귀족 을 쉽게 함락 시키는 방법

1920년 중국 뤄양시 주택개발지역 철거물에서 글이 새겨진 돌 하나가 발견됐다.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묘지명이었다. 의자왕과 부여융은 백제 멸망 후 당나라군에 의해 당나라로 압송됐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얼마동안 생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사망해 유명한 북망산에 묻혔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그 지역은 돌궐 등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외국 군왕들이 묻힌 지역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외국인 묘역이다. 따라서 의자왕의 묘 역시 부여융의 묘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도 몇 번에 걸친 탐사와 의자왕의 묘를 찾았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의 묘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는 개발 과정에서 파괴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대신 2008년에 부여융의 증손녀 부여태비의 묘지명이 발견됐다. 그녀는 당나라 고조 이연의 증손자인 곽왕 이옹과 결혼했다고 한다. 이 사실로 미뤄보면 당나라로 잡혀간 의자왕 일가는 험악한 포로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왕족 대우를 받으며 산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 멸망의 원인과 의자왕의 책임

그렇다고 해서 마음까지 편했을까. 당나라에서 보낸 생의 남은 기간에 의자왕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하는 물음을 수없이 묻고 되뇌었을 것이다. 물론 백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당나라 침공이었다. 그러나 과거 외환위기나 요즘의 금융위기처럼 외부적 요인이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위기 대처라는 측면에서 보면 누구나 반성할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가 내놓은 답은 다음과 같다. 의자왕은 세자 시절에 형제들과 화목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서 ‘해동증자’로 불렸다. 또 결단력이 있고 과감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신라에 대규모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의자왕이 교만해져서 방탕과 사치에 빠지고 충신과 충언을 멀리한다. 의자왕 15년 의자왕은 궁을 화려하게 리모델링하고 음란하며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이듬해 좌평 성충이 극렬하게 이를 말리자 화가 난 의자왕은 성충을 투옥하고 당나라 침공을 경계하라는 성충의 상소를 무시했다.

그러나 이 기록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해동증자라고까지 불리던 인물이 그렇게 쉽게 타락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의자왕의 사생활이 좀 문란해졌다고 하지만 그것이 백제가 망할 정도의 폭정은 아니었다.

무엇이 진실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은 의자왕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보도일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다만 삼국사기는 유가 관점에서 쓴 역사책이어서 사건의 배경이나 사회적·환경적 요소는 제거하고 지도자의 성품에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알맹이가 빠지고 타이틀만 남은 기사가 된 것이다.

서기 641년 의자왕이 즉위할 당시 백제와 신라는 운명적 결전이라고 할 만큼 사생결단의 공방전을 벌였다. 한반도 통일에 가장 근접한 나라는 고구려지만 수나라 및 당나라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남하정책에 제동이 걸렸다.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저항하고 있었다. 성왕 때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면서 신라가 기습적으로 한성을 점거했다.

이 사건으로 한반도 내 힘의 균형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백제는 자신들의 옛 수도인 한성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최대 규모의 전투를 준비하던 성왕은 어이없게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살해됐다.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도 신라를 계속 밀어 붙였지만 결정적인 고비를 넘지 못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빠르게 성장했다. 시간은 안타깝게 흘러갔지만 백제는 쉽게 역전의 계기를 잡지 못했다. 한강 쟁탈전에서 신라는 전술적 우위에 있었다. 한강의 지류인 남한강은 신라 영역인 충주·단양 지역으로 뻗어 있다. 신라는 수로를 이용해 빠르고 쉽게 병력과 물자를 이송할 수 있었지만 백제는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이것은 전술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백제 지배계급의 분열

더욱 치명적인 약점은 백제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성탈환전에 대해 백제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것이다. 백제의 왕족과 건국세력들은 만주의 부여와 고구려에서 이주해 온 집단이었다. 그들은 한강 유역의 세력과 연합해 백제를 세웠다. 그런데 한성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함락당하면서 이들은 다시 웅진(공주)으로 이주했다. 수도를 옮겼으니 집권세력에도 변화가 일어나 웅진 주변 세력들이 권력 중추로 들어왔다.

백제가 한성 탈환전을 시도하려 하자 이들의 분열이 가시화됐다. 귀족세력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대체로 충청도 주변과 그 남부 귀족들이 한성탈환전에 미온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이 전쟁은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장사였다. 한성 탈환에 성공하면 수도는 다시 한성으로 옮겨갈 것이고, 왕족과 과거의 집권 귀족세력들은 자신의 영토와 권력까지 회복할 것이다. 자신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수도권의 특권마저 상실할 것이 분명했다. 왕들은 지역 이권만 보지 말고 국가라는 전체를 보라고, 이 상태를 방치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설득했겠지만 별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백제 정치사의 이 고질병에 대해 의자왕은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었다는 인물평 그대로 획기적인 방법을 썼다. 의자왕 16년 왕은 귀족세력을 숙청하고 대신급인 좌평을 모두 아들과 왕족들로 대체한다. 왕의 아들만 41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모두 좌평으로 임명했다. 의자왕이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었다는 인물평은 이런 모습을 두고 한 말이다. 의자왕이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로 형제들과 우애가 깊었다는 기사도 이 사건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세자 시절부터 왕실의 정치적 단합을 추구했으며, 자식도 많이 생산해야 했다. 그래서 궁도 크게 짓고 잔치를 벌였다.

성충이 문제의 상소를 올리고 투옥된 것도 바로 이 해의 일이다. 그가 올린 상소의 본래 목적은 왕족의 과도한 권력 장악과 숙청에 대한 반대였을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좀 더 솔직하게 의자왕과 왕비가 귀족을 많이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두 사실을 조합하면 해동증자설과 폭군설이 서로 모순적인 것도 아니고, 의자왕이 만년에 변절한 것도 아니었다. 왕실 입장에서 보면 그는 여전히 해동증자였다. 왕실의 정치적 단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족층 입장에서 보면 의자왕은 전제권력을 추구하며, 충신을 몰아내고 충언을 멀리하는 전형적인 폭군이었다.

그렇다면 백제 멸망에 대해 의자왕은 유죄일까 무죄일까.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처럼 그는 형편없는 폭군이 아니다. 그렇다고 백제 멸망에 대한 그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다. 의자왕의 실수는 문제에만 집착하다 보니 그 문제를 제거하는 것이 해법의 전부라고 판단한 데 있다. 국가 지도자 입장에서 보면 귀족들의 근시안과 이기주의는 정말 화나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힘을 모으는 것이었다. 의자왕은 과감하게 결단해 그들을 제거했다. 보기 싫은 사람들은 사라지고 왕실의 권력이 증가한 것 같지만 국가는 분열되고 힘도 흩어졌다. 그의 결정이 백제 사회의 깊은 문제를 한꺼번에 해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문제에만 집착하는 근시안이 파국 원인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런 오판이 당나라 침공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게 했다는 것이다. 성충은 죽기 전에 당나라 침공을 경고하는 상소를 의자왕에게 올렸지만 의자왕은 듣지 않았다. 당나라 침공을 예상하고 총력전을 준비하려면 그의 숙원사업인 귀족세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거나 완화해야 했다. 그래서 의자왕은 전쟁에 대한 경고에 대해 숙청을 면해 보려는 귀족세력의 음모 내지는 위기설 조장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의자왕뿐 아니라 역사상의 수많은 군주와 리더의 삶을 집어 삼킨 함정이다. 특히 불리하고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 특정 사건으로 오래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자주 빠진다. 자신의 삶을 괴롭히고 운명을 왜곡하는 원인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에 ‘그들(또는 그것)만 없었다면…’이라는 생각을 갖기 일쑤다. 그러나 ‘그들’만 없앤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역사를 바꾼 현명한 리더는 때로 ‘그들’을 적극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귀족 을 쉽게 함락 시키는 방법

<김유신 묘(경북 경주시)>   

“장군! 5만 군사를 한꺼번에 보낸다면 5천의 백제 군사야 쉽게 물리칠 수 있을 터인데 어찌 이리 시간만 보내고 계신지요?” “죽음을 각오한 백제군을 가볍게 보면 우리 군의 피해가 클 것이오. 우리 군대의 피해를 줄이면서 이길 방법은 없겠소?”

황산벌에서 적은 수의 백제의 결사대에 맞선 김유신은 어떤 고민을 했을까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까요?

의자왕의 독재와 백제의 혼란

백제 의자왕은 즉위 초기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 북쪽의 30개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점령하면서 백제 중흥을 이루는 듯 하였어요. 그러나 의자왕은 귀족들을 정치에서 제외시키고 자신의 아들 41명을 최고 관직에 임명하는 등 가까운 사람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하고자 했지요.

의자왕이 권력을 독점하려하자 귀족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였어요. 나라의 지도층은 분열되고 의자왕이 점차 사치에 빠지자 백제의 국력이 크게 약해졌어요.

성충이나 흥수 같은 충신들이 의자왕의 잘못된 정치를 말리자 이들을 옥에 가두었어요. 이를 본 백성들의 마음도 점차 멀어져 갔지요.

혼자서 백제를 공격할 만한 힘이 없었던 신라는 오래 전 당에 지원군을 요청하였어요. 김춘추가 지원군을 요청한지 16년 만에 당이 군대를 보내면서 나당 연합군이 만들어졌어요. 백제가 흔들리는 틈을 노린 것이었어요.

당의 13만 대군을 태운 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백제를 향했어요. 목적지는 백제의 수도 사비를 끼고 흐르는 백강(지금의 금강) 하구의 기벌포였어요. 이에 발맞춰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 군사들도 탄현을 향해 출정하였어요.

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백제 의자왕에게 전해졌어요. 의자왕은 감옥에 갇혀있던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어떻게 방어해야할지를 물었어요.

“기벌포와 탄현은 우리나라 요충지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기고도 1만 명을 막을 수 있는 곳입니다. 군사를 보내 두 곳을 철통같이 지키소서.”

기벌포는 바닷물이 빠지면 넓은 갯벌이 생겨나 군사들이 상륙하기가 어렵고 수비하기에 좋은 곳이었어요. 탄현도 높고 좁은 골짜기로 이어져 있었는데, 이곳으로 신라군을 유인하여 공격한다면 적은 수의 군사로 손쉽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곳이었지요. 하지만 몇몇 신하들은 반대하였어요.

“많지 않은 군사를 둘로 나누는 것은 스스로 패전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흥수는 죄인입니다. 임금과 나라를 원망하는 자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귀족 을 쉽게 함락 시키는 방법

<기벌포, 탄현, 황산벌의 위치>   

계백에게 의지하는 의자왕

고심하던 의자왕과 귀족들은 결국 흥수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백제 조정에서 시간을 낭비하며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당군은 해안을 수비하던 백제군을 물리치고 기벌포에 상륙하였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사비성으로 진격하고 있었어요.

두 나라 군대의 빠른 움직임에 다급해진 의자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어요. 의자왕은 어쩔 수 없이 계백을 불러 5천 결사대로 김유신의 신라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적은 군사로 5만의 신라군을 막아야 하는 계백은 비장한 각오를 하였지요.

“나라의 미래를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외적에게 잡혀 노비가 될까 염려가 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혼이라도 편한 것이 나을 것이다.”

계백은 처와 자식을 모두 죽이고 5천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로 출전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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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군과 목책(백제군사박물관)>   

계백은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해 먼저 수비하기에 좋은 세 곳을 골라 목책을 세웠어요. 계백은 결사대에게 큰 소리로 비장하게 외쳤어요.

“지난 날 구천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오늘 마땅히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와! 와!”

계백을 넘어선 김유신

황산벌에 도착한 신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어요. 죽음을 각오한 백제군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고,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했어요. 예상보다 강한 백제군의 저항에 신라군의 피해가 늘어났어요.

신라군의 피해가 커지자 김유신은 크게 당황했어요. 계속된 패전으로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고, 게다가 당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짜도 지키기 힘들어졌어요.

고심하던 김유신은 화랑을 전장에 보내 싸우게 했어요.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의 아들 반굴이 힘껏 싸우다 죽었어요. 반굴이 죽자 이번에는 김유신의 조카 김품일이 16세의 아들 관창을 시켜 선봉에 서게 하였어요.

“계백은 어디 있느냐?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나와 결판을 내자.”

호기롭게 창을 휘두르며 백제군 진영을 휘젓던 관창은 백제군에게 사로잡혀 계백 앞으로 끌려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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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과 관창(백제군사박물관)>   

계백이 투구를 벗게 하니 관창이 어리고 또한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였어요.

“신라에게 우리 백제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어린 소년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

계백은 속으로 탄식하며 관창을 돌려보냈어요. 신라군으로 돌아간 관창은 아버지 품일에게 간단히 인사만 한 후 말을 타고 또다시 백제군으로 쳐들어갔어요. 그리고 다시 사로잡혔지요.

“내 너를 살려 보내줬거늘 어찌 다시 온 것이냐? 나의 머리를 베고 싶다면 더 커서 장수가 된 후에 다시 찾아오너라.” “또 나를 살려 돌려보낸다면 날카로운 창과 말을 준비해 다시 올 것이다. 그대에게 패했으니 더는 욕보이지 말고 죽여라.”

계백은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에 실어 신라군 진영으로 보냈어요. 관창의 목을 본 신라군은 어린 화랑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분노하였어요.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유신이 때맞춰 신라 군사들에게 외쳤지요.

“신라의 군사들이여! 어린 화랑들이 죽음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있거늘 그대들은 어찌 백제군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린단 말인가. 이들의 죽음 앞에 그대들은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준다면 내 오늘 밤 백제를 쳐서 없앨 것이다!”

귀족 을 쉽게 함락 시키는 방법

<신라군과 백제군의 전투>   
백제군사박물관

관창의 장렬한 죽음을 본 신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어요. 5만의 군사가 물밀 듯이 백제군을 공격하였어요. 황산벌은 성난 신라군과 나라의 최후를 막으려는 백제군의 함성과 비명으로 가득 찼어요. 그러나 적은 수의 백제군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하루 동안 벌어졌던 황산벌 전투는 결국 백제군의 패전으로 끝났어요. 계백도 부하들과 함께 황산벌에서 전사하고 말았지요.

마지막 희망이었던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패하자 나당 연합군을 막을 백제의 군대는 더 이상 없었어요. 이윽고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게 포위되었고, 얼마 저항도 못하고 함락되었지요.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도망갔던 의자왕도 곧 항복하고 말았어요. 700여 년 동안 유지되어온 백제의 역사는 결국 황산벌 전투 이후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어요.

김유신의 지략으로 신라군은 계백을 넘어 오랜 백제와의 승부를 낼 수 있었어요. 만약 신라군이 계백의 백제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면 전쟁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을까요?

귀족 을 쉽게 함락 시키는 방법

<황산벌의 모습>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