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몇 마디 주워 들은 거 가지고

표고차 700m, 총길이 10km의 긴키자연보도 트레킹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기 쉬운 외국은 아무래도 일본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비자 없이 방문 가능해 불쑥 찾기도 좋기 때문이지요. 가깝기로야 중국도 있지만 반대로 비자 비용을 더 올리는 바람에 마음이 선뜻 잘 동하지 않고, 얼마 전 러시아와도 상호 비자 면제를 시행했지만 거리상 좀 그렇고요. 반면에 일본은 최근 부쩍 심해진 망언과 망동에다 후쿠시마(福島) 지역 방사능 오염 파장에 대한 염려가 있긴 하지만 이 때문에 항공편이 수월하다는 반대급부도 있어 직장 선후배와 함께 세 명이 이번 설 연휴 끝 3일짜리 여행 계획을 세우고 그 가운데 날 하루를 할애, 명산 하나를 타고 왔습니다.

전날 김포 발 아침 비행기로 오사카로 가 시내 관광과 맛 체험을 하고 말로만 듣던 캡슐형 사우나에서 하룻밤 묵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교토(京都)로 가 그곳에 사는 일본인 지인 네 명과 만나 함께 점심 거리를 준비해서 승합차 한 대로 나라현으로 향했습니다. 교토의 일본인들과는 벌써 몇 년째 서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합동등산을 해오고 있지요. 동행인 선배가 오사카지점장을 하며 알게 된 한 분과 지한파 지일파 친구들을 소개해 저도 일원이 됐는데 어떤 해에는 20여 명 단체가 오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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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삼나무 숲을 오르는 대원들입니다. 나무들이 얼마나 빽빽하게 들어서 자라든지 숲 속은 어두컴컴해 쳐다 보기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삼나무가 어찌나 미끈하고 꼿꼿한지 ‘쭉쭉빵빵’입니다

우리가 목적한 산은 ‘긴키(近畿)지방의 마터호른’이라 부르는 나라(奈良)현 요시노(吉野)군 히가시요시노(東吉野)촌에 있는 해발 1,248.3m 다카미(高見)산입니다. 일본 100대 명산에는 들지 못하나 300대 명산에는 들고요, 긴키지방 및 간사이(關西)지방 100대 명산에는 듭니다. 이 산을 타기로 한 것은 지리적으로 교토에서 멀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오사카 쪽에 있는 곤고(金剛)산과 함께 이 지방을 대표하는 겨울 적설산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많이 내리면 ‘주효(樹氷)’라고 부르는 나무들, 즉 ‘스노 몬스터(Snow Monster)’ 현상을 비롯해 아름다운 눈꽃과 상고대들 등 겨울 산의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대서 그랬는데 막상 우리가 갔을 때는 눈이 적게 쌓여 그런 수사는 확인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일본은 1개 도(都 - 도쿄), 1개 도(道 -홋카이도), 2개 부(府- 오사카, 교토), 43개 현(縣)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오사카와 교토부, 교토부 나라현은 서로 경계가 붙어 있고요. 그간 일본을 수십 번 넘게 다녀왔지만, 나라현은 처음이라 아침 졸리는 눈을 부릅뜨고 창밖을 내다봅니다. 밤늦게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잦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어둔 하늘 아래 안개마저 자욱하게 껴 그 속에서 나타나는 나지막한 무채색 일본식 건물들과 주로 삼나무와 대나무들로 이루어진 마을 숲들은 신비롭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대나무들은 이제 막 잎갈이를 했는지 한 몸에 연두색을 비롯해 연한 초록색과 초록색, 진한 초록색을 다 띤 절묘한 대비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오전 9시 좀 넘어서 앞자리에 앉은 일행이 “저게 다카미산입니다”라고 일러줬지만 맨 뒷자리에 앉은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날씨도 안개 속이라 상상으로만 산세를 그려봅니다. 30분쯤 뒤 우리는 산의 남서쪽 스기타니(衫谷) 부근의 다카미야마 입구 버스정류소를 들머리 겸 날머리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차도 변에 약수터를 만들어 놓아 먼저 한 모금 마시고 산길로 들어서니 정면에 등산지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산의 등산로는 산 사방으로 4개가 나 있는데 우리가 오르는 코스는 긴키자연보도입니다. 정상까지의 표고 차는 약 700m, 총 길이 10km에 이른다는데, 원점회귀로 약 4시간 반이 걸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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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 숲을 오르다 터지는 전망대에서 담은 풍경입니다. 비 온 뒤 골짜기에서 비안개 피어 오르는 모습이 인상적이더군요.

초입부터 수령 50~100년은 됨직한 삼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근데 이 나무들 키가 여느 산에서 본 것보다 크고 미끈하며 곧기 또한 어찌나 꼿꼿한지 ‘쭉쭉빵빵’이란 말이 이곳만큼 잘 어울릴 곳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또 어떤 곳은 얼마나 빽빽하게 들어섰는지 숲 속이 깜깜할 정도입니다. 이런 숲 속에서 종종 사슴들이 관찰된다고 합니다.

등산로는 그런 숲을 관통하거나 가장자리로 돌아가는데, 가다가 시야가 터지는 곳에서는 완만한 산줄기와 안개가 피어오르는 깊은 계곡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순간 햇살이 비쳐서 산 경치가 더욱 운치를 더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상큼한 공기 맛이랄까요, 삼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 때문인지 몸 컨디션이 아주 좋습니다.

길은 처음에는 임도 마냥 널찍하더니 작은 재를 일컫는 고토우게(下峙) 지점에서 좌우로 갈라집니다. 좌우로 갈라지는 이 고갯길은 옛날 교토와 오사카의 황실에서 에도막부로 가는 이세카이도(伊勢街道)란 길로 교통량이 빈번했던 옛길이랍니다. 근데 등산로는 외로이 오솔길로 직진하되 우리나라 지리산 코재처럼 된비알을 이루며 솟구칩니다. 그런데 삼나무가 이 가파른 길까지도 촘촘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인공조림으로 심은 것 같은데 이런 경사지까지도 그럴 필요가 있었겠나 싶습니다. 날씨도 다시 흐려지며 빗방울까지 대동합니다. 전원 우장으로 복장을 바꾸고 배낭에 커버를 씌웁니다.

우리 세 명 중에 일본어 구사가 가능한 이는 선배 한 사람뿐입니다. 일본인들 중에 한국어를 하는 이는 아무도 없고요. 선배는 웬만한 일본사람보다 일본을 더 잘 안다 할 정도로 지일파인데다 일본 100명산을 절반 이상 그것도 두세 번씩 탄 산과 100대 명산 밖의 산들도 많이 탔을 정도로 일본통입니다. 일본인 지인들과의 교유기간도 오래 돼 추억거리며, 대화거리도 많아 저들 속에 들어 대화하는 걸 보면 꼭 일본사람들 같습니다. 일본인 일행 중에는 일본 100대 명산을 한두 개만 남겨놓은 이도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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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올라갈 땐 엎어져 있어서 모르고 지나쳤던 ‘곰 출현 주의’ 안내판입니다. 내려올 때 발견하고 가슴을 쓸었으나 곰들은 보통 한겨울엔 동면에 들어가 있지요. / 3 다카미산 등산로 입구에서의 기념촬영. 한국인 3명, 일본인 4명 총 7명으로 구성된 이번 산행 주인공들입니다. / 4 이 산에 유독 많이 자라는 꽃나무. 꽃 이름은 모르겠으나 독성이 강해 동물들이 먹지 않아 많이 자란다고 합니다. / 5 삼나무 순인지, 꽃인지, 열매인지 고민하다 새 순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 6 줄기로 자라는 이 풀 이름은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귀엽게 생겼더라고요.

반면 저는 주워들은 일본어 몇 마디와 콩글리시에 표정과 몸동작으로 겨우 의사를 표할뿐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평소 한국에서 다른 사람들과 산행할 때에 그리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어서 대화를 하지 않고서도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원래 여럿이 산행을 하다 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혼자 타기도 마련이니까요. 이번 7명이 산행을 하는 데도 선두 두 명, 중간 세 명, 후미 두 명으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그 두세 명끼리도 때론 혼자 가게 됩니다.

후지산, 곤고산이 보인다는 정상 조망

삼나무 숲이 잦아들고 일반 나목들이 나타날 즈음 등산로 상황도 바뀌기 시작합니다. 예상했던 적설 구간입니다. 처음에는 희끗희끗 몇 무더기이던 것이 오를수록 길고 두툼해지며 어느 지점부터는 발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구니미이와(國見岩)’란 팻말이 세워져 있는 고만한 바위 부근에서 앞서 오르던 다른 젊은 등산 팀 친구들이 멈춰 서서 아이젠을 착용합니다. 중학생 아니 초등학생 같아 보이는 여학생도 있습니다. 일본 산을 탈 때 부러운 것이 이렇게 젊은 학생들을 자주 만난다는 점입니다. 한겨울 아무리 일본에 높은 산이 많다고 해도 해발 1,000m가 넘는 산을 이렇게 즐겁게 잘도 오르다니….

쌓인 눈이 한참 녹고 있는 중이라 푸석푸석해서 우리는 그대로 오르기로 합니다. 여전히 안개 자욱한 산길. 가팔랐다 완만하기를 반복하며 고도를 높이니 고요하기만 하던 산이 서서히 바람소리를 들려 주기 시작합니다. 정작 바람은 와 닿지 않고 소리만 요란한 게 은근히 겁을 줍니다. 오르는 길 오른쪽으로 ‘부에후키이와(笛吹岩)’란 팻말과 함께 전망이 뻥 뚫린 절벽 바위가 하나 나타나는데 오리무중 시계 속에서 경치는 상상할 수 없고 그 설명문만으로 사연만을 감 잡는 수밖에요.

정오 가까운 시각인데 컴컴한 눈 쌓인 산길을 오르는 기분 참 묘합니다. 앞서가던 후배 동행이 내려오는 한 탐방객에게 큰 소리로 영어로 “파이브 미닛?”이라고 물으니 한 박자 늦게 “하이! 파이브 미니또”라고 답해 줍니다. 정상이 얼마 남았나 싶어 기지를 발휘해서 물은 후배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보아 딱 5분 거린 아니고 정상이 가까워지긴 한 모양이라고 감을 잡습니다. 그래선지 길이 다시 엄청 가팔라집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윙윙 거리던 바람의 실체와 마주칩니다. 왼쪽에서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대는데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돕니다. 해서 몸을 30도쯤 오른쪽으로 돌려 발걸음을 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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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부 능선에 지어놓은 대피소입니다. 강풍을 피하기 적격이지만 최대 50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 많은 탐방객들이 머물기엔 비좁더라고요.

내벽의 일부가 돌담과 시멘트로 만들어진 목조 대피소인데 천장에서 물방울 뚝뚝 떨어10m 남짓한 시계로 앞서가는 후배가 저 위에서 등을 보이며 정상 봉우리에 올라선다 싶었는데 따라 올라가보니 정상이 아니고 능선 길입니다. 하지만 바로 정면 10여 m 앞에 목조 대피소 건물이 하나 나타납니다. 정각 정오. 일행 중 세 번째로 제가 대피소에 들어섭니다. 강풍을 피해 대피소로 들어와 몸을 녹이며 점심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50여 명은 되는 것 같고 대피소 정원 또한 이 정도로 내부는 만원 상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집니다. 누수인지, 온수를 부어 컵라면을 들어 생긴 결로인지, 아님 사람들의 땀으로 맺힌 현상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선 채로 빈자리가 나길 기다렸다가 쪼그려 앉은 채 교토에서 사온 점심 도시락을 꺼내 먹습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대피소 안 풍경은 똑같습니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사람들 때문에 점심을 들기 무섭게 자리를 내주고 나옵니다. 대피소 터가 정상인 줄 알았는데 나와보니 대피소 뒤 20m 지점이 정상입니다. 그곳에는 작은 신사(다카수미진자, 高角神社)가 하나 세워져 있고요.

평평하게 만든 대피소 지붕도 계단을 만들어 전망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여기서 멀리 북동쪽으로는 후지(富士)산이 아스라이, 남쪽으로는 스기삼림이 울창한 주릉, 남서쪽으로 곤고산이 한눈에 드는 장쾌한 조망을 즐길 수 있는데 이 지방 사람들은 물론 전국의 탐방객들이 이 경치에 반해 재차 삼차 찾아오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빈설(貧雪)에 오리무중까지 아니어도 한참 아주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경치를 못 봐서 다음에 다시 안 오게 될 것 같다’며 신소리로 서운함을 달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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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우리보다 늦게 올라온 초등학교 학생들입니다. 대피소 내부가 비좁아 꼭대기에 올라가 자리 나길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 대피소 안 모습입니다. 서서 웃고 있는 사람들이 이번 저와 동행들이지요.

아까 구니미이와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복잡한 대피소에 들어오지 못하고 전망대에서 쉬고 있습니다. 카메라를 갖다 대니 포즈까지 취해 주는 게 여간 귀엽지 않습니다. 근데 저는 아까 강풍이 불 때 카메라 셔터 모드가 엉뚱한 곳으로 돌아간 것을 몰랐습니다. 열심히 찍었는데 나중에 내려가다 보니 정상부에서 찍은 건 셔터 속도가 느려 기념사진까지 죄다 흔들리고 상태도 안 좋은 거 있지요. 수십 년을 들고 다닌 카메란데도 종종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되니 참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 맞고 또 맞는 거 같습니다.

정상 뒤에는 우리나라 서낭당처럼 한 무더기 돌을 쌓아놓았는데 여기도 젊은 여성 탐방객 두 명이 바람이 불어가는 쪽에 쪼그려 몸을 숨긴 채 점심을 들고 있습니다. 바람만 피하면 그래도 견딜 만하게 기온이 그리 떨어지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생생한 자연환경에 부러움과 경외감 가져

하산은 이 정상을 에둘러 내려가다가 올라오던 길로 다시 붙는다는데 앞서 가던 선배가 ‘길이 위험할 수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는 안전을 위해 아예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고 합니다. 날씨가 좋지 않은데다 눈길이어서 미리미리 안전조치를 취하는 거라면서요.

안전이 이유라는데 거부할 수 없지요. 전원 백 코스로 다시 내려옵니다. 조심조심 올라오는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게, 아이젠 없이도 미끄러지지 않게. 힘들게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파이브 미닛”을 외쳐 주면서요. 근데 어느 산이나 그렇습니다. 올라갈 땐 헉헉거려도 올라야 한다는 집념으로 그리 힘든지 모르고 올랐다가 내려올 때 보면 ‘우와~ 이런 험한 길을 어떻게 올랐냐!’ 싶게 가파르고 긴 구간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내려오다 올라오며 힘들어선지 혹시 정상인가 하고 순간 착각을 했던 작은 봉우리이자 북서쪽 히라노(平野)나들목 버스정류장 쪽으로 내려가는 갈림길 가에 뒤집힌 채로 처박힌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듭니다. 애살 많고 호기심 많은 선배가 다가가 바로 세워보니 ‘출몰 곰 주의’란 표십니다. 순간 위험도 모르고 올랐다는 생각은 금방 ‘곰은 겨울잠을 자니까’로 상쇄되었지만 아직도 여러 산에 야생 곰이 서식하고 있는 일본의 산들과 생생한 자연환경에 부러움과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려올 때는 여유가 생겨선지 일행들과 대화를 많이 하게 됩니다. 네 분의 일본인 일행 중 세 분은 2009년 7월 중앙알프스 부근 야스가다케(八ケ岳)를 등산할 때도 함께했고 한 분은 초면인 줄 알았는데, 이 분도 함께했다고 합니다. 그때 산 정상부에서 광풍을 만나 제 도시락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버리는 바람에 점심을 굶었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근데 이번 산행은 어떤 특별한 일이 없어 앞으로 세월이 많이 지나면 무엇으로 이 산 산행을 쉽게 떠올릴까 싶어집니다.

일본어 몇 마디 주워 들은 거 가지고

다카미산 정상에서 찍은 기념사진. 일본인 대원이 가지고 온 삼발대로 찍어서 여긴 필자(맨 왼쪽)도 함께 나왔지요.

하산 때는 그 사이 내린 비와 기온의 상승으로 길이 더 질퍽거립니다. 예상 외로 많은 탐방객들의 발길도 한 몫 했을 겁니다. 내려오면서 다시 한 번 놀라는 것이 가족 단위 등산객들입니다. 유치원에 다님직한 아이에게 정식 등산 복장을 입히고 함께 오르는 가족 팀과 맨 앞과 뒤 남자 한 명씩을 대동하고 오르는 스물네 명의 젊은 여성 탐방조에 박수를 보내게 되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도 저런 모습 자주 대하게 되길 바라면서요.

오후 2시경 우리는 들머리로 택했던 다카미산 입구 버스정류소로 내려와 화강암을 깎아 만든 약수터 물로 다시 목을 축이고 흙투성이 등산화를 씻으며 산행을 종료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차를 몰아 인근의 온천장으로 향했습니다. 노천욕장까지 갖춘 다카스미(高角)온천은 그리 크진 않지만 등산을 한 뒤 땀 씻기엔 최고의 명소 같았습니다. 그래선지 들어가고 나올 때 우리를 앞서거나 뒤섰던 등산객들을 다 다시 만난 거 있죠.

교토로 돌아와 명주로 유명한 후시미(伏見)의 한 청주 주조장 직영 술집에서 생청주에 전문 닭요리를 안주로 뒤풀이를 가졌습니다. 전통 일본식 건물 다다미방에서 닭 한 마리를 인수분해한 것처럼 부위별 코스로 나오는 안주를 곁들여 접시 같은 밑 잔을 받친 글라스에 넘치게 청주를 따르곤 건배로 권주하는 우정 넘치는 자리. 정치와는 상관없이 민간끼리의 한일 관계는 원래 이러지 않았나 싶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