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참담은 아직도 나를 종종 죽인다

떠남과 헤어짐의 주저흔마저 살아 숨 쉬게 하는
사랑의 애니메이션

고통과 기억조차 이이체의 시선에서는 섬세한 사랑의 대상이 된다.
_허윤진 해설 「안개」

■ 시집 소개

 
소년의 감각과 현자의 시선

  이이체의 첫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가 문학과지성사 2011년 마지막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이이체는 2008년 『현대시』에 「나무 라디오」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하였고, 깊이 있고 감각 넘치는 시들을 줄곧 발표하며 주목을 끌어왔다. 이번 시집에서는 그가 숙고하여 묶은 83편의 시가 다채롭게 빛나고 있다. 이이체는 단순하게 스물넷이라는 젊은 나이나 이른 등단 연도, 여러 문예지와 기관에서 ‘좋은 시’로 여러 차례 선정되었다는 것 등만으로 재단ㆍ규정지을 수 없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생생하게 돋아나는 소년의 감성과 동시에 인간 실존의 덧없음을 통찰한 현자의 얼굴도 가지고 있다. 또한 오랜 상처를 응시하며 그 기억에 숨을 불어넣을 줄 알기에 더욱 살아 있는 시들을 『죽은 눈을 위한 송가』에 담을 수 있었다. 넓은 스펙트럼과 웅숭깊은 시 세계를 갖춘 이이체 시인의 이번 첫 시집이 우리의 귀에 무엇을 속삭일지 기대되는 연말이다.

 
온몸이 식물원인 것처럼, 결핍과 모순의 자기 실체를 노출하다

  이번 시집을 읽다 보면 출향(出鄕)과 이별을 모티프로 한 시편들이 다수 보인다. 이이체는 영혼이 안착했던 공간 혹은 사람을 떠나면서 느꼈던 분리의 고통을 고스란이 담고 있다.

외투처럼,
가지 않아도 가버린 것 같다
멀어진 것들의 목록
외투가 가져간 내 몸을 떠올렸다
침묵하는 단수들을 떠올렸으며
단위가 되고 싶었다
[……]
드디어 홀몸으로 단위가 될 수 있는 건가
중얼거리는 입술 밑으로
병신처럼 침을 주룩주룩 흘렸다
소금기가 가득했다
모래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가족을 만들어가겠지
외투의 혈관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
진심으로, 나는 무성한 식물원이 되었다
배를 타지도 않고, 그저 따라갈 수만 있기를
슬픔이 점점 귀여워져갔다
– 「실외투증후군」 부분

  외투가 없이 벗은 몸이 될 때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고 처음으로 수치를 느끼듯 자기 존재의 허물을 말없이 감싸주던 사랑을 잃은 자의 무력한 식물 상태를 우리는 안다. 이 글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허윤진은 외투로서의 사랑이 사라졌을 때, 빈 허물처럼 느껴지는 자신을 “병신”으로 비유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완벽하지 않은 자신, 결핍과 모순에 시달리는 자신의 실체가 눈앞에 생생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이이체는 이번 시집에 이별의 정서를 담았으나 사랑의 종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의 근원을 바라본다. 슬픔에 천착하지 않고 삶과 사랑의 허구를 들춘다. 이 모든 것이 망상이나 헛짓이라는 듯.

 
생생하게 피어나는 이별의 주저흔
– 상처 안에서 영원한 사랑을 꿈꾸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의 얼굴을 닮아가는 일과 같다. 이미 닮아져버린 뒤에 찾아온 이별의 시간 속에서 이이체는 회한을 풀어놓는 대신 낯선 자신을 새롭게 바라본다. 자기 자신의 얼굴, 분리된 타자, 그리고 외부 세계.

우리는 서로의 몽타주다
나는 세계를 지우는 일을 했고
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멍에 빠졌던 가난

의붓아들과 의붓딸의 만남
우리를 낳지 않은 우리의 부모들을 탈각했다
가진 적도 없던 것을 지키려고 애썼고
서로 악수하면서 서로의 손을 혼동해서 침묵했다
우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거울로 방을 가득 채웠으며
서로의 혈액형도 모른 채 피를 섞었다

[……]

우리는 유기되었다
세계와 거의 비슷해지는 중이다
없애러 간 곳에서 얻어서 돌아올 것임을 안다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몸이 부풀어 오른다
예쁜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손을 잡고 있게 될 것이다
– 「연인」 부분

  이이체의 시는 자기 자신에서부터 세계까지를 닫아내는 유폐의 정서가 강하게 드러난다. “나는 상처받은 역할에 충실했으므로 책들을 옷 삼아 은닉되었다”(「골방 연극」)거나 “세상이 날 갖지 않겠다고 결심한다/흐느껴 우는 귀머거리와 섹스하고 싶었다”(「나쁜 피」)와 같은 태도가 바로 그렇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고통의 기억으로 도달한 자폐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이 모든 아픔 자체에 숨을 불어넣어 고통스러울지언정 이를 더욱 살아나게 한다. “없애러 간 곳에서 얻어서 돌아”오고 “언제나 손을 잡고 있게 될” 너는 세계에서 유기되었을지언정 세계와 거의 비슷해지는 중인 것이다. 허윤진은 출향하고 이별한 그가 실향과 실연의 상처 안에서 영원히 사랑을 꿈꾸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들을 “사랑의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 표현한다. 이이체는 상처받고 깨져버린 우리 존재를 시로써 드러내며 또한 어루만지고 있다.

시들어버린 꽃잎들이 깨알같이 웃었다
호명하지 못하는 이름들을 부둥켜안고 온 그날
햇볕이 드는 창가가 희미해지기를 기도했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오류라는 걸 되새겼다
– 「이름이 생긴 이별」 부분

  맘 둔 곳을 떠나고 사랑이 머문 자리에 피어난 이별을 응시하며 이미 흔적만 남은 상처들을 어루만지는 시인은 이 모두에 애정 어린 숨을 불어넣는다. 생생하게 도드라지는 이별, 여기저기 고통 자국이 피어나는 이이체의 시는 올겨울 독자들을 사로잡고 읽는 이의 맘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갈지도 모른다.

 
■ 시집 속으로

잊지 않은 것을 기억한다

연꽃 아래서 피어나는 주검

무너진 밤은 밝고, 설익은 해는 색을 지운다
어제 태어난 잠이 오늘
눈 뜬다

어떤 우주에서만 흐르지 않는 숨이 있었다

저무는 눈가에는
누군가가 등불 없이 스산하게 잦아든다

풀꽃들이 암수를 알 수 없는 음양을 가졌다

향을 피우지 않고 춤추는 여승들과
폐허
폐허
폐허의 허물

도시는 허물을 벗고 기어 다니고 있는 것

어느 길에서든 간단하게 헤매면서, 누구도 시린
눈을 죽일 수 없었다

나무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숲
칼의 뼈

흉터 위에 소복하게 내려앉는 색을 보듬고

이형(異形)의 인생이
마르지 않는 강가에 이르러 눈을 씻는다

피와 눈물

피의 눈물
– 「죽은 눈을 위한 송가」 전문

 
이곳은 매우 슬프고 아늑하다. 비행운이 없이도 날 수 있는 하늘의 귀퉁이다. 휑뎅그렁한 부엌이라고 해도 좋다. 이건 포크고 이건 의자고. 그런데 왜 이렇게 텅 빈 거지. 이어폰을 끼우지 않은, 네가 억지로 밥 먹는 소리. 나는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청회색 정서가 싫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넘치는 이야기들, 그 축축한 식도락. 부엌에서 종이비행기를 접시에 담고 너에게 포크로 자르기를 요구했었지. 미안해요. 나는 발자국도 없이 가벼운 사람. 무단투기된 언어들이 하필이면 부엌으로 몰려만 가는가. 지구의 한 조각을 손에 쥐고 사는 것이 이토록 서럽더라니. 우걱우걱 구겨 넣는 밥 한 숟가락은 비행기 안의 멀미만큼 어지럽고. 하늘에서 구름조각들을 잡아다가 먹어본 일이 있다. 시궁창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다리를 감싸고 있다. 노래로 감출 만한 슬픔들을 거울에 비춰보고 싶다. 모든 비행기들은 지구의 한 조각만을 떠돌 따름이고. 무모하게 눈부신 내 사랑, 미안해요, 같이 만져요. 너를 만져도 아무 느낌이 없는 것을 느낀다. 고개를 수그린다.
– 「추락한 부엌」 전문

 
■ 시집 소개글

  『죽은 눈을 위한 송가』가 그에게 중요한 어휘들을 모은 하나의 새로운 사전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가 사용하는 어휘들의 의미는 분명히 사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즐겨 쓰는 단어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형용사들의 경우에는 상태의 빈약함과 관련된 단어들이 많다. 이 여위고 겸손하고 가볍고 조그맣고 작고 가냘픈 것들의 세계. 그가 위대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강인하게 이곳으로 돌아오는 순간은 바로 그가 자신의 사소성을 인정할 때이다.

■ 뒤표지 글

삶은 마약이다. 계속 살면 피폐해진다. 사랑은 이별한다고 잊거나 잊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덮어두고 떠나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 중독되어 독신의 처방을 얻었다. 누군가 우는 것을 보면 울게 된다. 세상에는 더 이상 반전(反轉)이 없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동안 모든 걸 그리워하게 되었다. 서로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반려의 몸이여. 뒤돌아서면 등지고 온 무덤들이 많았다. 진짜 생각이란 없다. 생각을 떠나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잔류하는 이형(異形)의 삶이어도 삶이기에 죽지는 않는다. 이 색을 간직하겠다. 서로를 닮은 황홀경들이 착종하는, 인간의 미로. 그 주저흔의 골목길에서 우리는 재회하여 서로의 피를 확인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헤어질 수 있을까. 어떤 참담은 아직도 종종 나를 죽인다. 아무도 나를 갖지 못해서 나는 나를 부둥켜안았다. 이번 삶을 유폐시켜서 모두 유감이다. 기필코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아니다. 멀리 떠나서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시인의 말

제1부 일식
가족의 탄생/환생여행/추락한 부엌/화장일기/아모레스 페로스/실외투증후군(失外套症候群)/수수께끼 외전/이산(離散)/신/

제2부 사랑의 윤회
너희들의 사랑/Alacrima/금서들/취한 말들을 위한 여름/나무 라디오/골방 연극/자각몽/나쁜 피/그림일기/연인/유희/소설/복음서를 잃어버린 사제들의 연대기/앙팡 테리블/태엽/연혁/단어/배신놀이/회문(回文)/날짜변경선/채식주의자들/혐오/낭만주의/시에스타/나무 라디오 2/반목

제3부 검은 피
고아(孤兒)/콤플렉스와 징크스/후유증들/죽은 눈을 위한 송가/詩/Eclipse/밀회/사어(死語)/거짓말의 목소리/빙하기/나비궁전/사라지는 포옹/신생(新生)/파종/인간론/복화술/낯선 애무/한량들

제4부 유서
유언연습/친절한 세상/요양/悸/이름이 생긴 이별/크레바스/외사랑/천형/알몸들/Beastie boy/자폐/장면의 이면/수면제/종말론들/명랑/그림자 족보/무간(無間)/인간의 신화/미물/그로테스크 키스

이이체 지음

어떤 참담은 아직도 나를 종종 죽인다

시인 이이체는 1988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고,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2008년 『현대시』에 「나무 라디오」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죽은 눈을 위한 송가』『인간이 버린 사랑』이, 산문집으로 『당신을 헤매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