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아 들으면 무슨 뜻인줄 바로 알아야지 이런 둔한놈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3장 *112* 학원편(12)

*

야외 무도회는 갑갑한 천장을 대신해 아름다운 별빛들을 시작으로 가장 화려한 장식과 웅장한
음악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속속들이 도착한 각국의 왕족과 귀족들 그리고 간간이 그린 하우스
에서 온 평민 학생들로 가득 메워져 가고 있었다. 곳곳에서 골든대로 실버대로 그린대로 각 계
층에 맞춘 기숙사의 끼리 끼리로 모인 학생들이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고 각자 눈치를 보며 차
세대 권력자들을 예의 주시했다.

왕족과 귀족이라면 누구나 수행원들이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고 야외 무도회장은 파트너의 에
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선 아름다운 숙녀들로 인해 더욱 빛을 발했다.

특히 파트라 대륙에서 패션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발달한 마야 왕국의 갖가지 비싼 옷감
과 최고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의상들을 걸친 왕족과 귀족들의 모습은 무도회 분위기를 한껏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꽃이 있었으니 바로 가이루덴 왕국의 두 왕족이다.

보랏빛과 은빛이 어울려져 빛을 발하고 있는 외모와 더불어 은은하고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
은 세바스찬 왕자와 그의 외사촌인 일라이저 공녀였다.

세바스찬은 누군가에 의해 오래 전 잘려나가 어깨선만큼 닿은 보라의 은은한 빛을 발하는 머리
칼을 손으로 쓰러 내렸다.

"흥, 재수 없는 광대들의 모임이라…하긴 화려할수록 광대들은 미쳐 날뛰기 마련이니까……그
런데 일라이저 넌 이런 곳에 뭐 하러 온 거야…어차피 앞으로 가이루덴에 무릎 꿇을 광대들에
불과한 건데."

세바스찬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던 일라이저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엷은 미소
를 내보이며 낮게 대답했다.

"당연히 미래 신랑감을 구하려고 온 거지 뻔한 걸 왜 물어? 내 기품과 수준에 맞는 짝을 내 손으
로 직접 잡아가려 그러는 거지."

무도회장 입구에 쭈욱 뻗은 붉은 융단을 걸으며 일라이저는 손에 쥔 작은 부채를 팔랑거리며
귀찮다는 태도를 보였다.

"일라이저,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알아? 데본 제국의 왕족들이 이번 마나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는 소식을 듣고 온 걸 내가 모를 줄 알고…다시 한번 말하지만 헛된 꿈꾸지 마! 그들은 우리와
는 다른 세계의 자들이야."

그의 말에 일라이저는 자신들의 테이블에 앉으면서 계속 입술을 이죽거렸다. 듣기 싫은 아름다
운 사촌의 잔소리이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 자신의 수준에 맞는 이는 절
대 권력을 지닌 데본 제국의 왕족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 이미 박혀 버린 상태
였다.

데본 제국의 붉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마야 왕국과 가이루덴 왕국 그리고 크루바티 왕국 테이블
들이 차례대로 나열되어 손님들을 맞이했다.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소리에 남녀가 어울려 자연스레 춤을 추었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맛깔
스런 음식들이 차례차례 테이블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마야 왕국의 레오나르 왕자는 자신의 약혼녀 케이샨느와 함께 자리를 했고 이에 세바스찬과 일
라이저가 합석을 했다. 데본 제국과 카나 황국의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두 왕국은 대륙간
의 많은 외교를 통해 친분이 두터운 관계였다.

"오랜만이에요 레오나르 왕자님. 아, 이곳에서는 뒤에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고 했었죠? 그럼 다
시 할게요. 반가워요 레오나르님."

활발한 목소리로 일라이저가 가벼운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하자, 레오나르 역시 이에 응대했다.
그는 자신의 영토에 마나아카데미가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마야 왕국의 왕자였고
덕분에 아름다운 것에 상당히 집착하는 버릇이 있었다.

자신 역시 금발 머리칼에 잘 다듬어진 꽃미남에 속했으며 유별나게 외모와 의상에 신경을 많
이 쓰는 타입이었다. 그런 그의 약혼녀 역시 자신의 외모에 어울리는 금발의 인형이라 불리 울
만큼 예쁜 여자를 선택했었다. 적어도 일년여전 허름한 마법 상점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기 전
까지는 겉모습을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한 남자였었다.

"네, 반가워요 일라이저. 이곳에서 보니 분위기가 또 달라 보이는군요."

"호호, 그래요? 뭐, 타고난 핏줄이 화려하다 보니까 그렇죠."

일라이저는 허리까지 닿는 가느다란 보랏빛 생 머리칼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윙크했다. 그녀
는 이마가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고 보랏빛 눈동자가 유난히 커서 전체적으로 섬세하면서도 귀
여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일라이저의 말대로 그녀에게 흐르는 핏줄에 영향에서인지 묘한
신비감마저 지니고 있었다.

"처음 일라이저를 보고 놀랐어요. 예전에 당신이 이런 곳을 딱 질색이라고 말했었으니…내가
알기로 처음 입학 초대장을 보냈을 때도 거절 했었잖아요."

"호호, 그때야 이곳에 데본 제국의 왕족들이 올 거란 소식을 듣지 못해서 그런 거죠. 저 사실은
아주 막강한 힘을 지닌 남자를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 왔거든요."

"하하하, 일라이저 당신은 언제나 활발하고 자기 주장이 뚜렷해서 그 아름다움이 한층 돋보이
는 것 같아요. 그런 당신의 성격과 내 약혼녀의 외모를 합치면…생각나는 정말 보고 싶은 사람
이 있거든요."

레오나르는 자신의 약혼녀를 감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차갑게 돌아서며 말했다. 자
신을 그리움이라는 태풍 속으로 몰아간 여자와 닮아 선택한 약혼녀 그러나 그녀는 아니었다.

"재미있네요 레오나르.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하하, 글쎄요."

레오나르와 일라이저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사교에는 영 관심이 없는 세바스
찬은 불투명한 표정으로 빨리 이 지루한 시간이 지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과 만만치
않게 눈앞에서 입을 꾹 다물고 마치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는 인형처럼 순종적인 자세의 여인
이 눈에 들어섰다.

케이샨느 그녀는 레오나르의 약혼녀일 뿐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없는 여자였다. 가난한 농
로의 자녀에서 단지 누군가와 닮은 외모 때문에 레오나르의 약혼녀가 된 그녀.

"벙어리인가?"

조용히 있던 세바스찬이 입가에 와인 잔을 가져다 대며 묻자,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그에게
집중했다.

"하하, 아니에요. 워낙 숫기가 없는 사람이라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할뿐입니다."

"세바스찬! 숙녀에게 그런 실례의 말이 어디 있어. 정말 예의라고는…이래서 사교 모임에는 같
이 가고 싶지 않다니까…이해하세요 레오나르. 원래가 전쟁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서…."

"아, 괜찮아요."

일라이저의 사과에 레오나르가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그리고 나서는 힐긋 케이샨느를 바라봤
다. 하얗게 창백해진 그녀가 안되어 보였지만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왜 그녀는 저렇듯 바보
같을까? 누구처럼 용기 있지는 않더라도 평범하기만 해도 얼마나 좋을까? 레오나르의 이기적
인 마음이 케이샨느로 인해 불거져만 갔다.

"훗, 벙어리가 아니라면 언젠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군 그래."

또 한번의 세바스찬의 무례함에 일라이저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레오나르는 뭐라 답할 말을 찾
지 못했다. 그런데도 케이샨느는 굳게 담은 입을 열지 못하고 긴장된 표정을 고스란히 눈동자
에 담아 고개를  깊숙이 숙여 버렸다. 좀더 건들었다가는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분위기였다.

그때 뒤늦게 붉은 테이블의 주인공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각 테이블에 앉아 있던 왕족과 귀족
들이 일제히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춤을 추던 남녀들도 입구에 쫙 깔린 붉
은 융단에 시선을 모았다.

테리우스와 제로이드, 바이사코 그리고 카를로스가 그들의 수행원을 뒤에 엎고 등장한 것이
다. 수행원들은 다칸의 명령에 의해 소리 없이 무도회 곳곳으로 쫘악 퍼져 그들의 주군들을 보
필하기 시작했다.

네 명의 데본 제국 왕족들의 등장은 무도회를 순식간에 정적을 이루게 만들어 버렸다.

탕! 탕!

갑자기 조용해진 무도회장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테리우스가 바닥을 발로 크게 두 번 차 내리
며 소리 질렀다.

"뭐야!! 뭐!!! 불청객이라도 들어왔다는 건가? 아니, 이렇게 침묵으로 환대를 하다니…다들 죽
고 싶어?"

건들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악단들이 제일 먼저 새파랗게 질려 재빨리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
다. 그러자 다들 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갑작스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쳇, 갑자기 괜히 온 생각 들게 하는군. 가자! 우리 자리가 어디야?"

"제발 테리우스 성질 좀 죽여라. 너 때문에 우리들까지 피해 본단 말야."

바이사코가 두 손으로 머리를 곱게 넘기며 말하자, 제로이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소리 이번에는 좀 연애다운 연애 좀 해보고 가자고."

"쳇, 누가 하지 말랬어!"

"야, 너가 그렇게 으르렁거리는데 어디 무서워서 여자들이 좋다고 하겠어. 덕분에 우리까지 손
해 본단 말씀…뭐, 권력에 고개 숙이는 것이 여자들이긴 하지만 그건 좀 낭만적이지 않잖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테리우스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그들의 테이블로 가고 있는 사이 이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이들이 일일이 그 인사에 답하지
는 않았다.

그런데 이때 두 남자가 테리우스의 등장에 들고 있던 술잔을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
다.

챙그랑!

챙그랑!

그들은 바로 레오나르와 세바스찬이었으니.

'저…저 남자는 그때 그녀의 오빠?'

레오나르의 반가움에 가까운 놀람과 반대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들을 뒤돌아보는 테리우
스를 바라보는 세바스찬.

'저 자식이 데본 제국이 왕족이라고!!! 이런 제길!!!!'

그러나 이 두 사람과 눈을 마주친 테리우스는 별 반응 없이 돌아서 자리로 걸어갔다. 아직 그들
에 대한 생각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린의 기억을 지우면서 그녀와 함께 만났던 이들
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흐릿해진 까닭이리라.

"야, 저 두 녀석들 알고 있는 놈들이냐?"

제로이드와 바이사코에게 되려 테리우스가 물었다.

"아니, 초야에 묻혀 지낸 우리가 새파란 녀석들을 어떻게 알겠어? 널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아, 뭐하려고 가서 싸움이라도 하게? 아서라, 테리우스 제발 오늘은 그냥 즐겁게 지내다 가자
고."

"아…알았으니까 이거 놔…쳇, 내가 무슨 싸움꾼인 줄 아냐!"

바로 옆을 지나가기가 무섭게 술잔을 떨어뜨리면서 자신을 바라본 두 녀석들에 대해 알아보려
던 테리우스는 바이사코가 제지하고 나서자, 그는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 투덜거렸다.

*

"아, 괜히 오다가 별 구경하느라…헤헤, 나 때문에 너무 늦게 와버렸지 아르테니? 정말 미안
해…와아, 여긴 굉장히 멋있구나!"

아르테니와 함께 오던 중 잠시 딴 길로 새버렸던 아이린은 뒤늦게 온 무도회장의 입구에 서서
감탄을 연발했다. 이들의 조용한 등장은 아직까지 누구의 관심도 받지는 못했다.

"공주님, 괜찮으시겠어요? 수행원과 파트너를 하시면…아직 친구를 사귀지 못하셔서 안타깝네
요."

"아냐, 괜찮아…덕분에 아르테니랑 이렇게 데이트하잖아? 참, 그리고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말
고 앞으로는 아이린이라고 불러 줘. 알겠지? 아이린님도 아니고 아이린이야! 난 부하가 아니라
친구 아르테니가 좋단 말야."

아이린의 밝고 귀여운 표정과 진심 어린 부탁에 아르테니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환하게 웃
으며 대답했다.

"그러죠…아이린님 아니 아이린."

"헤헤, 고마워 아르테니! 자, 그럼 저랑 춤을 춰 주실래요?"

"아, 그건 남자가 청하는 거예요 공주님."

"어어, 또! 아이린이라니까! 그리고 춤을 권하는 건 남자든 여자든 할 수 있는 거야."

"아, 버릇이 되어 나서…그럼 함께 출 영광을 주셔 감사해요 아이린."

아이린은 녹색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그녀와 함께 동행한 파트너 아르테니와 왈츠곡에 맞춰 춤
을 추기 시작했다. 이에 사람들 사이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그녀의 모습이 드디어 테리우스의
눈에 들어왔다.

"저…저건!! 어떤 놈이야!!"

다른 남자와 춤을 추고 밝은 미소를 짓는 아이린의 태도가 심히 불쾌한 테리우스의 얼굴이 순
식간에 붉어져갔다.

^^*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3장 *113* 학원편(13)

그런 테리우스의 태도에 제로이드가 바이사코에게 눈짓을 하며 낮게 속삭였다.

"너도 느꼈지 바이사코. 저 녀석 예전에 테리우스가 아닌 것 같아."

입안에 가득 음식을 집어넣고 포만감과 함께 맛에 한껏 즐거움을 얻고 있던 바이사코 역시 친
구의 말에 동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늦게 대답했다.

"음음…하, 맛있군 쩝! 네 말을 듣고 보니 저 녀석답지 않게 부쩍 신경질적인 행동을 많이 하는
것 같긴 해. 뭐, 정확히 말하자면 과할 정도로 자주 흥분을 한다는 거지…마치…."

"…마치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대신 잇는 제로이드의 대답에 바이사코가 짧은 박수를 쳤다.

짝!

"맞아! 사랑! 오잉, 사랑? 테리우스가 사랑을? 에이, 차리라 귀신이 사랑을 한다면 믿겠…다가
아니라 저 녀석 어디로 가는 거야?"

"호오, 글쎄 이거 꽤 재미있는 일을 구경하게 되겠는데…."

제로이드는 친구가 도착할 지점에 서 있는 한 커플을 유심히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친구가 거짓말 같지만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즐거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천하의 테리우스가 사랑에 빠졌다…과연 저 골치 아픈 친구를 떠맡을 대단한 아가씨가
누굴지 궁금한 걸.'

간신히 화를 참아 내며 저벅저벅 무도회장 쪽으로 걸어가는 테리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바
이사코가 가리켰다.

"자리에 앉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도 뒤따라 가보는 게 어때? 괜히 내버려뒀다가 저 녀
석 사고라도 치면 앞으로 학교 생활하기 썰렁할 거야."

"아, 맞다! 여자들이 무서워서 우리랑 말도 안 하겠지…빨리 가보자구 제로이드!"

*

테리우스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던 두 남자는 그가 어떤 여자에게 다가서는 것을 바라봤다.
이에 눈썹을 약간 꿈틀거리며 어디선가 본 듯한 여자의 얼굴에 세바스찬은 생각에 잠겼다.

'저 여자 얼굴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왠지 낯이 익어…이상하군 아무리 오래 전에 만났다 해
도 한 번 사람은 기억하는데…저 녀석이 데본 제국의 왕족이란 사실에 내가 너무 긴장했나 보
군.'

세바스찬은 오아시스에서 남장을 했던 아이린의 모습을 정확히 꿰뚫어 기억하지 못한 채 고개
만 갸웃거렸다. 그러나 반대편에 앉아있던 레오나르는 달랐다.

급기야 그의 눈가에서 촉촉이 눈물까지 고일 정도로 감동에 푹 빠져 패닉 상태에 이르렀다.

아이린, 바로 그녀다!

꿈에도 그리던 그녀가 틀림없으리라.

그 동안 저토록 더 고결하고 성숙하게 아름다워진 그녀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니 믿을 수가 없
구나.

두 남자의 경직된 시선과 태도에 일라이저 역시 그들이 시선을 고정하는 곳을 바라봤다.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후, 두 번째로 무도회장의 정적이 휘감기 시작했으니 바로 테리우스의
행동 때문이었다.

퍽!!!!!!!!

세찬 그의 주먹은 아르테니가 피할 세도 없이 비겁하지만 뒤쪽에서 날아와 얼굴 측면을 강타해
버렸다.

이에 어느 누구도 감히 소리를 지르거나 저지하려는 자는 없었다. 감히 데본 제국의 권력에 방
해할 자가 누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자가 딱 한 사람 있었으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테리우스!!!"

짝!!!!!!!!!!!!!!

테리우스의 무례한 행동에 아이린은 자신의 파트너 아르테니의 퉁퉁 부어오르는 뺨을 살피더
니 화난 표정을 짓고 그대로 테리우스의 얼굴에 뺨을 후려쳤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맞은 테리우스의 표정은 실로 어이없어 하는 듯 보였다. 감히 자신을 어떻게 주먹만한 여자가
때릴 수 있냐는 물음을 눈동자에 묻은 채로 아이린을 바라보며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그야말
로 기가 차서 절로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조그마한 여자에게 맞았다니 있을 수 없
는 일이다.

사람들은 조금씩 웅성거리며 감히 데본 제국의 왕족에게 가차없이 손찌검을 한 용감한 어쩌면
미련한 행동을 한 여자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이런 조금만 늦었어도 못 볼 뻔했어 바이사코."

"쉬잇, 조용히 해 테리우스가 듣겠어. 헌데 저 여자는 누구야?"

"글쎄, 누군지 모르겠지만 푸웃!! 간만에 재미있는 걸 보여준 장본인인 건 확실하군."

제로이드는 일전에 산책로에서 지나쳐 갔던 여자임을 확인하면서 미소지었다.

테리우스가 더 기막혀 할 부분은 바로 그 다음 아이린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그를 아주 괴물 보
듯이 째려보고는 고개를 홱 돌려 아르테니에게로 다가가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걱정하는 것이
다.

"괜찮아? 어떡해! 갑자기 날벼락을 맞아도 이렇게 황당하진 않겠어…미안해 아르테니."

"아뇨, 괜찮아요 아이린 그것보다 이봐,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아르테니가 정색을 하며 테리우스에게 묻자, 이에 아이린이 오히려 아르테니를 말리며 끌어내
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안돼, 아르테니 그가 널 기억하면 내가 곤란해져…내가 처리할 테니까 무도회장 밖에서 기다
려 줘 응?"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다시금 여자의 손에 끌려가더니 이내 무도회장을 나가려는 아르테니의
행동에 테리우스가 쫓아갈 기세를 하자 이에 아이린이 막아섰다.

"어딜 가려구?"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호령하듯 자신만만하게 대하는 여자의 태도에 이제 재미없다는 듯 테
리우스가 한 손으로 아이린을 밀어 제끼며 대답했다.

"저리 비켜! 우선 저 녀석의 낯짝을 뭉그러뜨린 다음에 너랑 이야길 할거니까! 빨리 못 비켜!
난 여자라고 봐주지 않는다 알아!!"

"그럼 때려 봐!"

배짱이 있는 것인지 아님 간이 커서 배 밖으로 기어 나온 것인지 아무래도 뭘 믿고 이렇게 까부
는지 여자의 태도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참다 참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궁금해서 테리우스가
물었다.

"대체 너!!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 거야? 어디 든든한 빽이라도 있는 거냐?"

"응, 있어 엄청나게 큰 빽이 내 뒤에 있어서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아. 게다가 이렇게 앞뒤도 없
이 황당한 경우를 당했을 때는 더더욱 그 빽이 없어도 무서울 게 없지."

"너, 너, 너!!!"

"말을 해 말을 흥, 그런 벙찐 표정으로 얼간이처럼 굴 거면서 내 수행원의 얼굴을 그렇게 만들
다니 네 앞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해야겠어. 이래서야 왕족과 귀족들이 다니는 학교 체면이 말
이 되니? 폭력이 우선시 되다니 무슨 깡패 소굴도 아니고 화가 나고 기가 막힌 건 난데 왜 네가
화를 내고 그래!"

아이린의 설득력 있는 언변에 다들 마음속으로 감탄에 마지않았다. 물론 그녀의 말보다는 태도
에 감탄한 것이지만.

어느 새 사람들 사이에 끼여 든 레오나르는 아이린의 말을 경청하며 진정 자신의 그녀가 틀림
없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지금 살벌한 분위기도 이유가 되겠지만 혹시나 다시 경솔하게 다가가
서 또 다시 그녀가 사라질지 몰라 조심스럽게 다가가리라 마음먹었다.

테리우스의 등뒤에서 제로이드와 바이사코는 조그마한 여자에게 꼼짝도 못하고 있는 친구의
태도를 흥미롭다는 듯이 계속해서 팔짱을 낀 채로 구경했다. 그들은 절대 이 재미난 광경에 끼
어 들 생각을 하진 않았다. 다만 점점 더 금발의 맹랑한 성격의 자그마한 여자가 누군지 궁금해
질 뿐이었다.

아이린의 말에 테리우스는 자신이 그 스스로도 놀랄 만큼 흥분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다시금 냉
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쳇, 손해배상? 그래 그까짓 거 하던지 말던지 난 상관없어. 하지만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는데
가난해서 그린 하우스에 머물고 있다는 네가 대체 무슨 빽이 있다는 건지 어디 그 빽의 주인공
이 누군지 물어보고 싶군."

사실 그는 아이린이 주장하는 그 배경의 중심 인물을 알아내서 초토화를 시켜버려서 그녀가
더 이상 그 배경에 기대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에 물어본 것이었다. 그럼 아마 그에게 그녀가 기
댈 틈새가 생길 거란 계산까지 함께 말이다.

그러나 그의 새까만 속내를 아이린이 모를 리 없었다. 왜냐면 그의 머릿속 회로는 이미 잘 알
고 있는 그녀였으니까. 사랑하는 남자의 본성이 어떤 건지 그 마음과 생각의 패턴을 이미 아이
린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 주인공이 누군지 알려주면 내 수행원의 얼굴처럼 아니 그 보다 더 박살이라도 내려고?"

순간 테리우스가 뒤로 주춤하며 찔끔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이거 완전히 여우잖아. 쳇, 얄미워 죽겠군…제기랄 그런데 왜 저 눈
동자가 저 입술이 날 미치게 만드는 거야.'

테리우스가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리려는 의미에서 살짝 머리를 흔들다가 다시 아이린을 응
시했다.

"흐흐흠……여자가 그런 험한 말을 하다니 교양 수업은 받지 않았나 보군. 난 그냥 궁금해서 물
어 본 거야…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말던지."

"이 난리를 피워 놓고 사과를 해야지 사과를…남자가 쪼잔하게 잘못해놓고 이제 할 말 없으니
까 흥, 내 배경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말해주지. 그래야 네가 앞으로 내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니까."

테리우스의 칼칼해진 목에 마른침이 절로 꿀꺽 삼켜졌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말을 쫑긋
하고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의 목도 같은 상황이었다. 다들 조용히 그녀의 입만을 주시하는 가운
데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배경의 주인공은 바로 날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가르쳐 줄
수 없어. 헤헤, 어때 궁금하지? 궁금해서 죽겠지? 테리우스 윽, 그런 표정은 정말 못생겨 보여
얼굴 펴!"

"이게 정말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거냐!! 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왜 있는 줄
알아!"

"왜? 그 남자 찾아서 박살 내주려고?"

아이린은 약올리듯 테리우스에게 재잘거리면서 마음 속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남자
가 바로 너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망할 마족의 계약서만
없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사랑하는 연인도 못 알아보는 멍청한 남자를 패줘서라도 자신
을 기억하게 만들 거 라고.

"그래, 그 남자 누군지 모르지만 꽁꽁 잘 숨어 있으라고 해라. 내가 찾아서 반드시 아작을 내 주
고 말 테니까! 너, 잘 들어 앞으로 내 앞에서 그 남자든 아님 다른 놈이든 간에 함께 있는 모습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알겠어!!!"

테리우스의 질투 어린 말에 아이린은 내심 기뻤지만 그래도 불쾌하긴 했다.

'이 바보야! 그 남자가 바로 너 인걸…눈앞에 있는 널 보면서 널 그리워해야 하다니…여전히 성
질은 못돼 가지고는 남들 눈에 무섭겠지만 난 네가 이러면 귀엽게만 보인다구 하나도 안 무서
워.'

아이린의 눈동자에서 아주 잠깐 스쳐간 따스함을 느꼈는지 테리우스가 화가 나서 흥분한 기분
을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아이린이 아주 자연스럽게 테리우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생각지도 않은 그녀의 행동에 테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석고상처럼 굳어 버렸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모두 이 기막힌 반전의 사건에 어리둥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테리
우스가 거칠게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면 오히려 이해라도 했을 것을 되려 여자 쪽에서
그랬다니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정말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직도 굳어서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테리우스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아이린이 그에 귀에 아
주 작게 속삭였다.

"테리우스, 방금 전에 그 남자 찾아서 아작을 내겠다는 말…그 약속 꼭 지켜 줘 알겠지? 기대할
게. 참고로 그 남자 이곳 학생이야."

'제발 네가 널 찾길 너보다 더 내가 간절히 바래. 여튼 난 마족의 계약은 어기지 않았어….'

아이린은 나름대로 충실히 마족의 계약서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힌트를 줬다. 그
리고는 유유히 기다리는 아르테니를 향해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


(작은공지)---닉네임을 은빛마녀에서 겨울기사로 바꾸었습니다..^^*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3장 *114* 학원편(14)

*

한편 다칸과 함께 수행원 역할을 자청했던 카를로스는 테리우스로 인한 소란을 틈타 유유히 무
도회장을 몰래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간 곳은 바로 아이린이 머물고 있던 그린 하우스였으
니.

그리 멀지 않은 숲 속에 아처와 파라도가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이 그들이 머물고 있던 집에는
유난히 붉은 머리칼을 지닌 침입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손에 거무튀튀한 가죽 가방을 쥔 채로.

*

라무도라욤 마법사를 따라 양떼들이 마나아카데미 지역에 대거 몰려들었다. 그 옆에 꼬마 토비
는 두터운 배낭을 어깨에 맨 채로 검은 양과 흰 양들의 다툼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어 했다.

"호호호, 드디어 왔구먼…교수들이 머무는 지역이 어딘지 모르겠군. 토비야 우리가 머물 저택
이 어딘지 확인 좀 해 보거라."

라무도라욤 마법사는 양 갈래로 나뉜 길을 둘레둘레 보며 물었다.

"네, 주…아니 마법사님."

토비는 양들의 싸움을 말리느라 이마에 송글이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아내며 초청 서류를 품
에서 꺼내 확인했다.

"음 오른쪽은 학생들이 머물고 있는 지역이고 아, 여기 왼쪽으로 쭉 올라가면 보라색 지붕 저택
이 바로 나온다고 약도가 그려져 있는데요. 헤헤!!"

어린 꼬마의 육체지만 정신은 억겁의 세월을 지낸 사신은 자신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낯선지 웃음을 머금었다.

늙은 마법사와 작은 꼬마 그리고 앞다투어 따르는 흑백의 양들은 그들의 목적지 보라색 지붕
저택으로 들어섰다. 어둠이 깔렸던 거실은 난로 가의 장작불로 인해 점점 환해지기 시작했고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저, 주신님 아무도 없어 말씀드리는 건데 제가 알기로는 이제 이 여행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
은데 그때까지 카를로스를 잡아갈 수 있을지…."

장작불 앞 흔들의자에 세상에서 가장 느긋하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던 라무도라욤 마법사에
게 꼬마 토비가 나이답지 않은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늙은 마법사가 눈가에 희미한 웃음
을 스미면서 자신의 흰 수염을 매만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껄껄껄껄!!!!! 지난주에 잠깐 들렀던 가즈나이트들이 천계는 잘 지키고 있을 게야. 얼룩 모양
의 양 모습이라니 정말 재미있지 않았는가! 호호호!!! 이제 천사들과 악마들만 남아있기는 하지
만 이 녀석들이 양으로 있는 것도 마다 않고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사신 자네
의 실수로 카를로스가 살아 있는 것이고 그로 인해 아이린이 운명에도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되
었으니 그 일만 해결하고 나면 다시 천계로 갈 걸세."

"그러니 제 말이 여행기간 안에 그 카를로스를 잡아 갈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 녀석은 자신
이 이미 죽은 자의 영혼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니…더 악해져가고 있을 수 밖예요."

"허허허허!!!!! 걱정 말게나 그 녀석 스스로가 그걸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 될 테니."

"제가 걱정하는 부분이 그 부분입니다. 그냥 물리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니 물론 이 모든 것
이 제 잘못이기는 하지만…."

토비는 아니 사신은 지나갔던 스스로의 실수를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호호호!!!! 느긋하게 마음을 먹도록 하게. 우린 지금 이곳에서 늙은 마법사와 꼬마 아이 그리
고 양들로 있는 것이니 그 시간동안 오히려 즐기도록 하게나. 인간계에도 엄연히 만들어 놓은
규율이 있으니 내가 만든 곳이라 해도 기본은 지키면서 일을 해결해야하는 것일세. 허허허허허
허허!!!!!!!!!!!"

언제나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주신의 특권일까? 토비는 자신이 영혼을 거두 울 당
시 캐론 마왕 공작과 카를로스가 벌인 기막힌 흑마법을 떠올리며 자조적인 실소를 터트렸다.

사신이 자신을 속인 그 부자의 술책이 이렇게 순수한 영혼을 지닌 아이린에게 불행을 안겨 줄
요소가 될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 주신의 말 한마디가 그나마
사신 토비에게 위안을 가져다주었으니.

"껄껄껄!!!!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꼬마 얼굴에서 그런 근심 어린 표정은 어울리지 않는다
네. 아이린은 강한 아일세. 천하의 테리우스도 꼼짝을 못하지 않나 호호호호호!!!!!"

"후, 전 걱정이 태산인데 언제나 웃으실 수 있다니 부러울 뿐입니다."

한숨을 내쉬며 토비는 투벅투벅 자신의 머물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꼭 카를로스의
일을 자신이 해결하리라 다짐하면서.

*

아처와 파라도는 결국 무도회장에 가는 것을 뒤로 한 채로 숲 일각에서 밤하늘의 별들이 펼치
는 절경을 안주 삼아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꺼억! 취한다! 그러니 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네가 그렇게 간절히 원한다면 아니지! 아
니지! 네가 그렇게 목숨을 받칠 만큼 사랑한다면 고백을 해야한다 그 말이지!!! 끄∼억!"

코가 삐뚤어지게 마신다는 것이 어떤 건지 몸소 보여주는 파라도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친구
를 위로한답시고 마신 술로 오히려 자신도 추스리지 못할 정도로 취한 파라도.

반대로 아처는 같은 양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약간의 붉은 끼가 돌뿐 멀쩡해 보였다.

"임마, 넌 날 위로 해주려고 술을 가져온 거냐 아니면 약올리려고 마신 거냐? 하여간 못 말려.
자, 좀 일어나 봐…그만 돌아가자. 파라도!! 좀 정신 좀 차려봐!"

"엉? 아, 대장 우리 사랑스런 대장!!! 그래 사랑에 푹 빠져서 고백도 못하고 크헐헐헐!!! 엥, 왜
갑자기 땅이 내게 다가오는 거냥!!!"

푸욱∼턱!!!

바닥까지 모두 비운 술병을 바라보던 파라도는 급기야 땅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에 아처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친구를 낑낑대며 겨우 등에 들쳐업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체격도 두 배인데다가 술로 인해 의식까지 흐린 사람을 업었으니 걷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
니었다.

아처는 자신을 위해 위로와 격려를 하려고 노력한 파라도의 행동에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훗, 그래 내가 대장인데 날 믿고 따라오는 녀석에게 괜히 약한 모습을 보여서 잘못했다!! 임
마!!! 그런다고 이렇게 내게 앙갚음을 하냐? 엄청나게 무겁네…헉! 이제 숨까지 차네! 휘유, 짜
식! 그래도 고맙다 파라도! 어이쿠!!! 이런 나도 취하긴 취했나 보군…끙!!! 진짜 무겁네!!!"

아처는 그렇게 집을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마음만은 조금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마음속에 넣어두고만 있던 사실을 친구에게라도 털어놓았다는 것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

씩씩한 걸음으로 무도회장에서 나와 집을 향해 계속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고 있는 아이린의 모
습을 보며 뒤따르던 아르테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왠지 씩씩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그
녀의 앞모습과 달리 뒷모습이 슬퍼 보이는 것은 혼자만의 착각일까?

"하아!! 권력자들의 무도회도 별거 없던데 아르테니? 정말 시시했어. 그냥 웃고 춤추고 떠들
고…헤헤, 되려 아르테니가 만들어 준 이 드레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야. 난 정말 근사
한 파티인 줄 알았는데 게다가 나 때문에 얼굴까지 다치고…정말 미안해 아르테니."

앞서 가던 아이린이 활짝 미소를 머금으며 뒤돌아 아르테니에게 사과했다. 곱게 하나로 땋은
그녀의 금발 머리칼의 사이사이 잔 머리칼들이 미풍에 의해 하늘거렸다.

그녀의 입가는 미소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아르테니를 바라보는 아이린의 푸른 눈동자는 촉촉
하게 젖어 있었다. 아르테니는 이미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군요 공주님. 사랑하는 이의 기억에서 지워진 기분을 제가 어
떻게 위로를 해야 덜 아프실 수 있을까요.'

아르테니는 말없이 자신에게 씩씩해 보이려는 아이린을 조용히 안아 주었다. 그녀는 아르테니
가 아무 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을 테지만, 그는 엘프의 피를 지녔기에 귀가 발달했다. 무도회
장 밖에서 그녀와 테리우스가 나눈 이야기들을 모두 들었던 것이다. 그 대화 속에서 자신의 주
군이 이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분명 말못할 사연이 있을 테지만 아르테
니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이렇게 그녀가 울고 싶을 때 안아 주는 것만이 그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임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르테니…난……."

"쉬잇, 괜찮아요 공주님 아니 아이린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게요. 잠시 친구에게 기댄다고 생각
하세요. 난 당신의 눈물을 보지 않은 겁니다."

아르테니의 품속에서 그만 눈물을 흘리던 아이린이 그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흐느꼈다. 그
렇게 삼십여분이 흐르고 나서야 두 사람은 다시 집으로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아르테니
의 배려로 울고 나니 아아린의 마음도 조금은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아르테니, 정말 고마워.'

두 사람이 집 앞으로 도착하고 아처가 집 앞에 있는 큰 나무에 기대 있는 것이 발견 됐다.

"어, 대장 밖에서 뭐하고 있어? 무도회장에도 안 오고."

"일이 있었어 그런데 너무 일찍 온 거 아닌가?"

"하하, 우리도 일이 있어서 일찍 오게 됐지…파라도는?"

"아, 그게 술에 잔뜩 취해서 방에 들여놓긴 했는데 너무 무거워서 우선 문에서 가장 가까운 네
방에다가 눕혀 놨어."

"뭐! 이런!!! 그 녀석 술 마시면 토한단 말야!!! 아이린 먼저 들어갈게요."

아처의 말에 아르테니가 자신의 방을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파라도의 모습을 떠올리며 놀란 소
리를 하면서 재빨리 집으로 달려갔다.

아처는 방금 아르테니가 아이린의 이름을 그대로 불렀던 걸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녀를 응시했
다.

"아이린? 아르테니가 공주님께 그렇게 부르나요?"

"어, 응…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아처도 그렇게 불러 줘…파라도가 혼자서 술을 많이 마셨나
봐? 아처는 멀쩡해 보이는데?"

아이린은 아까 아처가 화내고 나갔던 걸 떠올려 조금은 어색하지만 평소처럼 말을 걸으며 그에
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자 아처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뻗어 내저었다.

"다가오지 말아요 공주님…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술을 많이 마신 상태니까."

아이린이 발걸음을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다가서며 말했다.

"그럼 내가 부축해줄게 들어가자. 찬 기운 계속 쐬고 있으면 감기 걸려."

"부탁이니 다가오지 말아요…전 몹시 취한 상태고 지금은 밤이에요…밤은 이성보다 감성이 더
활동하는 시간이니…휴! 당신을 보는 것이 이렇게 힘들 거란 생각은 못했군요."

아처의 말을 아이린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자신을 싫어한 것일까? 아이린은
멀뚱히 그를 응시하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겨울기사 올림....웅..^^*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3장 *115* 학원편(15)

아처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아이린은 그가 자신에게 뭔가 크게 화가 나서 그런 거라 생
각했다. 그녀는 무슨 일 때문에 아처가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 모르지만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
지며 그에게 다가섰다.

"아처? 내가 뭘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래서 화가 난 거야? 아처는 웬만해선 화내지 않는 사람이
잖아…아까도 갑자기 나가버리고…괜찮아? 얼굴에 열이 많아."

아이린이 말하는 도중에 자연스레 손을 뻗어 아처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술기운 탓인
지 그의 뺨이 너무 뜨거웠다. 멀리서 볼 때 너무나도 멀쩡해 보여 술에 취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는데 그의 말대로 많이 마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녀의 손은 뜨거웠던 것이다.

"이러지 말아요 공주님."

아처가 그녀의 손을 매섭게 떼어 내며 쉰 목소리를 냈다.

그제서야 정말 아처 말대로 그를 혼자 놓아두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린은 자신이 다가서는 것이 싫을 정도로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 거라 오해했다.

"…알았어 아처 먼저 들어갈게…무슨 일로 날 멀리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든 내가 뭘 잘못했
는지 일러주면 고치도록 할게…내게 너무 화내진 마. 난 친구가 화내는 게 제일 무섭단 말야!
알았지!"

아이린이 뒤로 주춤하며 고개를 양쪽으로 살짝 살짝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처가 자신의
뺨에서 떠난 그녀의 손을 덥썩 부여잡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아처?!"

자신을 밀어냈다가 다시 끌어안은 그의 행동에 아이린은 정말 왜 그런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다지 크게 화난 것 같지 않아 다행인 생각이 들었다.

아처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설레이는 것과 달리 아이린은 담담했다. 그녀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할 수 있는 이는 그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지도 모른다. 아이린에게 아처는 좋은 친구였던 것이
다.

"아처? 정말 왜 그래?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이린이 조금은 답답할 정도로 자신을 껴안은 아처를 조심스레 밀어내려 하자, 그가 그녀의
왼쪽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잠시만…이대로 잠시만 있어줘요. 후우,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요…잠시만 이렇게 기댈
게요."

술로 인한 것인지 그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많이 까칠해진 듯 했다.

그러나 아이린이 아이러니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은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저…아처 설마 파라도처럼 토하는 건 아니지?"

그녀의 재미있는 질문에 아처가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후훗, 아니에요…하지만…."

"엉? 하지만?"

"공주님이 움직이시면 토할지도 모르죠 후훗!"

"어, 정말? 아, 알았어 안 움직일게 토하지마 알았지?"

"…네."

그녀의 밝은 분위기가 잠시나마 아처를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렇게 아처의
고백은 그대로 그의 가슴에 잠시 묻어 둔 채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테리우스의 방 앞에서 다칸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로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때 그 앞
에 카를로스가 재투성이가 되어 터벅터벅 걸어왔다.

"지금 테리우스님을 만나 뵐 수 있나?"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 하셨습니다."

"아무도?"

"네."

카를로스의 껄렁한 태도 만만치 않게 눈을 위 아래로 굴리며 다칸이 영 내키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를로스는 언제나 낮이고 밤이고 테리우스를 철벽처럼 지키고 있는 다칸이 영 눈
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주군의 위험 요소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그 역시 카
를로스가 싫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전해! 지금 당장 만나뵈야 하니."

"안됩니다."

"그걸 왜 네가 답하는 건데? 응!! 들어가서 물어보고 나오라니까!!!"

목소리에 힘을 팍팍 주어 카를로스가 말하자, 다칸 역시 만만치 않은 태도로 눈에 힘을 팍팍 넣
어 대꾸했다.

"안됩니다. 다시 한번 이 말을 반복하게 하면 당신의 신분이 뭐가 되었든 내 검에 두 동강이를
낼 테니 알아서 물러나던지 말던지."

"뭐!!!! 이 자식이!!!!"

그러나 결국 다칸의 기세에 카를로스는 이를 갈며 물러나고 말았다.

야외 무도회장에서 엄청난 스캔들을 만들어 온 주군이 혼자 방으로 들어간 후 그에 가장 친한
두 친구들도 들어오지 못한 것을 카를로스가 어찌 들어 갈 수 있었겠는가.

'멍청한 놈! 저 녀석은 영 느낌이 안 좋단 말야…하긴 나도 주군이 혼자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
하긴 하군. 간간이 큰 소리도 지르시고 운동을 하시나? 휴, 그 난리를 피우시고 여자에게 윽!!
정말 체면이 말이 아냐…앞으로도 계속 그러시면 아! 정말 곤란해 곤란….'

다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돌아가는 카를로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테리우스의 방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조각처럼 깎여진 얼굴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탄탄한 근육 그리고 무엇보다 심연의 바다가 담
긴 듯한 매력적인 눈동자 이 얼마나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인가!

테리우스는 실크로 된 은빛 바지만을 걸쳐 입은 채 홀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으아아아악!!!!!! 제기랄!!! 제기랄!!!! 날 완전히 바보로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아니지 완전히 같
잖게 본다는 표현이 맞겠어. 날 무슨 손에 장난감처럼 주물럭주물럭 가지고 놀 듯이 윽! 정말
미쳐서 돌아가시겠군."

그렇지 않아도 하늘이 있는 방향으로 중력이 있는 것처럼 삐죽거리는 머리칼을 더 뻗치는 걸
돕듯 두 손으로 머리를 비틀며 방방 뛰었다.

테리우스는 자신의 외모 하나만으로도 아름다운 여자들이 그에게 목을 메던 걸 떠올렸다.

그 맹랑한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들도 자신에게는 순종했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달랐다.

자신의 권력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든든한 빽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하다니 대체 어떤 녀석이 그녀의 마음을 가졌는지 궁금하면서도 질투가 났다.

"이곳 학생이라고 했겠다. 쳇, 두고 봐! 어떤 기생 오라비 같은 놈인지 내가 꼭 찾아내서 초 박
살을 내 줄 테니까!!! 하지만…흠."

다시 흥분에서 냉정한 기분으로 바뀌면서 테리우스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미소가 절로 비
어져 나왔다.

"뭐, 그래도 내게 입 맞춘 걸 보면 날 싫어한다는 건 아니잖아? 쳇,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
가는 건 아니지! 좋아, 내 앞에서 그렇게 잘난 체를 하고 날 창피하게 만들었겠다. 반드시 날 사
랑하게 만들어 줄 테니 기다려라 꼬맹아! 그리고 나서 뻥 차버려서 내 앞에서 눈물 흘리며 날
붙잡게 만들도록 할 테니까. 쿡쿡쿡!!!! 이거 생각만 해도 너무 통쾌하잖아! 하하하하!!!!"

방에 들어간 내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던 테리우스가 이제는 문밖까지 들리도록 신이 난 듯
웃어대자, 다칸은 아무래도 자신의 주군이 충격을 많이 먹은 듯 하다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쉬
었다.

"휴, 정말 걱정된다 걱정…."

자신의 수호기사가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지와는 상관없이 테리우스는 수십 번 아니 수
백 번 자신과 입맞추었던 아이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린 아이린이라 아카리나스 왕국의 공주? 흠, 이런 왕국도 있었나? 그런데 참 낯이 익은 기
분이 든단 말야…내게 또박또박 대들 때는 잘 몰랐지만 입 맞춘 후 그 눈빛은…."

무도회에서 돌아온 후, 즉시 아이린에 대해 조사한 서류를 가져오도록 했던 테리우스는 그녀
에 대한 신상 서류를 읽어보다가 중얼거렸다.

뭔가 자신을 측은하면서도 안타깝게 바라보는 눈빛이 영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너무나 자신만
만하게 그를 대하는 것도 상식 밖이다. 분명 뭔가 있을 법도 한데 도통 감을 잡질 못하겠다.

"아, 미치겠네! 뭔가 잡힐 듯 말 듯…쳇, 갑자기 왠 꼬맹이 녀석이 내 속을 이렇게 뒤집어 놓다
니…이거야 원! 이건 진짜 나 답지 않아…."

*

한편 테리우스가 나간 후 다시금 분위기가 밝아진 무도회장이었다. 두려움의 존재가 사라졌기
때문인지 모두가 그들만의 파티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일라이저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넋이 나간 사람 마냥 허공을 응시하며 미소 짓기를
반복했다. 참다 못한 세바스찬이 투덜거리며 그녀에 어깨를 툭 쳤다.

"일라이저! 무슨 생각에 그렇게 푹 빠져서 헤어나올 줄 모르는 거야. 뭔지는 모르지만 마야 왕
족 앞에서는 그런 모습으로 있지 마."

세바스찬의 핀잔 어린 말에 정신을 차린 일라이저가 새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흥, 외교에 안 좋다 그 뜻이지? 하여튼 그 머릿속에는 세계 정복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을 거야."

"시끄러."

"잔소리는 듣기 싫은 가보네. 그럼 멀뚱히 앉아 폼만 잡지 말고 레오나르 왕자처럼 저렇게 춤
을 추던지."

일라이저가 약혼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레오나르를 가리키며 말하자, 세바스찬이 정색을 했
다.

"난 춤 따위는 취미 없어. 적당히 시간 때우고 가면 되는 거야."

"쯧쯧, 이래서 세바스찬과는 사교장에는 오기 싫다니까. 그래도 꼭 외교에 필요해서 참석하는
걸 보면 가끔 역겨울 때가 있어. 아,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잔소리 그만 할 테니까. 난 지금 세
바스찬과 신경전 벌일 만한 여유도 없어. 호호!! 드디어 내가 이곳에서 잡을 남자를 찾았으니
까!"

^^*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4장 *116* 학원편(16)

③말괄량이프린세스 4장 얼음왕자

드디어 마나아카데미 입학식이 시작되었고 아이린은 기대하고 고대했던 첫 수업을 위해 아침
부터 부산을 떨고 있었다. 지난 밤 술에 취해 자신에게 기대어 뜻 모를 말들을 중얼거리던 아처
도 그후로는 그녀에게 편안히 대해주었다. 물론 그런 아처의 모습에 파라도는 안타까움을 금
치 못했지만.

"아, 드디어 마법과 검을 배울 수 있게 되었어! 너무 기대대! 아주 열심히 배울 거야!! 그래서
꼭 강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 될 거야!!!"

세 명의 흑기사들과 아침을 먹다 말고 자리에 벌떡 일어나 두 주먹 불끈 쥐며 아이린이 다짐했
다. 참으로 귀엽다고 해야할지 철이 없다고 해야할지 그녀의 수행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다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요 며칠 공주님과 보내면서 느낀 점은 정말 순수함이 가끔 과할 때가 있다는 점이야. 히유, 앞
으로 모시면서 애 좀 타겠네.'

파라도의 적갈색 눈동자에 걱정스런 눈빛이 고이면서 그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옆에 아르테니 역시 오른손에 턱을 괴며 아이린을 응시하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며 그
녀의 말에 대답을 대신했다.

'공주님! 아이린! 이렇게 들떠 있다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면…흠 아무래도 그 뒷감당은 우리
가 해야겠죠.'

건너편 아처 역시 걱정된 마음은 두 친구와 하나였다.

'아무래도 실망이 크시겠군.'

아이린은 왜 이토록 세 사람이 자신의 굳건한 다짐에 대해 호응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딴청
을 피우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다만 그들의 반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나아카데미
에 대한 무궁한 기대와 함께 등교 길에 나섰다.

일단 마나아카데미 정문에 들어서면 수행원은 함께 동행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교칙 상 신분
에 따르는 호칭은 붙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폐하라든지 아니면 전하 혹은 주군 등
사용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다. 단지 선후배 사이나 예의 상에 존칭을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암암리에 권력자들에게 함부로 말을 놓는다거나 혹은 어울리려는 약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들 등교 길에 화려한 마차들을 대등하고 그들의 부를 맘껏 뽐내는 것과는 달리 아이린은 튼
튼한 두 다리로 2킬로미터를 걸어서 등교했다. 물론 첫날이라 세 남자들이 그녀를 따라왔지만
걷겠다고 고집을 피운 아이린 덕분에 그들도 함께 고생 아닌 고생을 해야만 했다.

말이 2킬로미터이지 워낙 기숙사 저택에서 학교까지의 길이 멀었기 때문에 지름길인 산길을 통
해 와서 쉽지 않은 보행을 해야만 했다. 보행이 아니라 등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걸맞을 것
이다.

"참, 아무리 봐도 별나신 분이야."

"음, 동감이다. 앞으로 우리 정말 스타일 구겨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거다."

정문 앞에 다 도착할 즈음 파라도가 턱하니 서서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아
르테니도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동의했다. 그들에게 이 정도 걸어온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덕
분에 땀이 나서 고급 예복이 흠뻑 젖은 걸 겪어야만 했다.

"여러 번 전쟁터에 원정도 간 녀석들이 이런 걸로 투덜거리기는 건강에도 좋구만."

은근히 아처가 아이린 편을 들었다. 그러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르테니가 대꾸했
다.

"아처, 그거야! 전쟁에서 원정은 필수인 거고 여긴 마나아카데미잖아. 누가 얼마나 많은 부와
권력을 지녔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견제하면서 은근슬쩍 기압 주는 곳!! 이런데서 걸어 등교한
다는 건 나 약자요!! 라고 보여주는 것과 같다는 걸 너도 모르진 않을텐데. 이런!! 대장이 사적
인 감정에 치우쳐서 합리적인 사고를 해내지 못하다니 속보인다!!"

아르테니의 틀리지 않는 지적에 아처가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이때 한참 앞서 가던 아
이린이 다시 그녀의 수행원들이 서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 말했다.

"하, 힘들어…너무 오랜만에 걸어서 그런 가봐. 다들 알겠지만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들어가야
해…다들 행운을 빌어 줘."

"그래요 공주님 이 파라도는 공주님이 잘 하고 오시리라 믿어요!!! 참, 옐로우 뱃지를 착용하셔
야죠."

파라도가 아이린의 왼쪽 붉은 색 옷깃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아, 맞다! 헤헤!! 내 정신 좀 봐! 자, 됐지?"

"네, 좋아요 아주 좋아요!! 공주님 만세!!!"

"파라도두 참 이름 부르래니까."

"싫어요 전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게 즐거운 걸요."

"하하, 못 말려 정말."

마나아카데미는 4개 학년이 있는데 학년별로 옐로우, 레드, 블루, 바이올렛 뱃지를 착용해 구분
을 짓고 있으며 수업은 따로 학년을 나누어 듣지 않고 섞여서 함께 듣는다.

각 학년이 끝나면 졸업 역시 옐로우, 레드, 블루, 바이올렛 졸업식이 따로 진행되며 대개 여자
일 경우는 레드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하고 남자는 바이올렛 졸업식까지 마치고 있다. 수업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신청해서 자유롭게 듣지만 졸업을 하려면 지정된 시험에 통과하여야 하
기 때문에 수업을 듣고 공부하는 것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미 바이올렛 졸업식까지 마쳤던 세 남자는 아이린을 찾기 위해 졸업생임을 감추고 옐로우에
서 레드까지 마치고 블루에 재학 중일 때 휴학을 했었다. 원래 마나아카데미에서는 모든 과정
을 마치고 졸업한 졸업생들이 다시금 필요에 의해 재입학을 할 경우 명예 학생으로 가장 높은
골든 뱃지나 혹은 학년에서 높은 바이올렛 뱃지를 수여하고 있었다.

뱃지는 이곳 학생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데 졸업식을 하면 다시 학
교에 반납을 해야만 한다.

각 졸업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년 안에 마칠 수도 있고 십 년 안에도 마칠 수 없을 수도 있었
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규칙들은 잘 정립되어 있으나 마나아카데미의 실체는 그리 탄탄하
지 않음을 이 세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잔뜩 기대에 부풀
어 있으니 그녀가 실망할 것이 벌써부터 걱정된 세 남자였다.

아이린은 붉은 재킷에 흰색 셔츠와 체크무늬 스커트를 다시 한번 재확인하며 가방을 짊어졌
다.

아침에 파라도가 너무나도 정성스럽게 닦아 놓은 아이린의 갈색 가죽 부츠가 반지르르하게 윤
이 났다.

멀리서 남색 재킷에 흰색 셔츠 그리고 검은 바지를 입은 남자들이 잔뜩 몰려들어가는 걸 보면
서 아이린은 새삼 쉼 호흡을 크게 한번 내뱉으며 말했다.

"하아, 이러다 늦겠다. 아처! 아르테니! 파라도! 나 잘 다녀올게! 이따 저녁에 봐!"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공주님!"

"하하, 네 이따 봐요."

파라도와 아르테니가 손을 번쩍 들어 뒤돌아 서는 아이린에게 흔들어 줬다. 아처는 묵묵히 다
른 학생들을 견주어 보면서 조용히 아이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잘 하실까? 아무래도 실망하시겠지?"

파라도가 낮게 중얼거리듯 묻자, 아르테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아마도…다들 개인 교습을 받고 오는 왕족과 귀족들이니 공주님은 간간이 있는 평민들과
같은 입장일거야."

"하잉, 꼭 물가에 아기 혼자 두고 온 기분이 드네. 수행원이 함께 들어 갈 수 없다는 교칙이 예
전에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규율이었는데 이렇게 심각한 관계가 형성될 줄이야…정말 괜찮을
까?"

두 사람이 이렇듯 아이린이 사라져 이제 보이지 않는 정문을 바라보면서 계속 근심 어린 말을
나누고 있을 때 아처가 자신의 안쪽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며 뭔가를 손에 쥐어서 친구들
에게 내밀었다.

"뭐야?"

파라도가 아무 이유 없이 내민 듯한 아처의 쥐어진 주먹을 보면서 물었다.

"글쎄, 뭘까?"

아처가 장난스레 빈정거리듯 되묻자, 아르테니도 그의 손에 무엇이 쥐어졌는지 궁금해졌다.

"이야, 대장 우리가 아까 놀렸다고 지금 복수하는 거야? 뭔데 그렇게 싱글거리며 사람 궁금하
게 만드는 거야?"

"맞아, 내 성질 급한 거 알면서 빨리 손 좀 펴봐!"

아처는 좀더 두 친구들이 궁금해지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냥 쉽게 장난기를 거두고 손을 펴 보
였다.

"자, 어젯밤 내가 위조한 골든 뱃지!!"

"우왓!!! 역시 대장이 최고라니까!! 우하하하하핫핫!!!!!!! 으읍…!!!!"

파라도의 너무 큰 웃음소리에 주변을 살피며 아르테니가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쉿! 아직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렇게 크게 웃으면 어떡해!"

"앗, 미안."

골든 뱃지!

이 뱃지를 마나아카데미에서 부여받은 학생은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되며 가장 결정적으로 골든
가면을 쓸 수 있어 신분의 비밀이 보장된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골든 뱃지는 각 왕국의 영웅이거나 절대 왕족에게만 부여하기에 마나아카데미에서는 큰 위용
을 발휘하는 뱃지였다. 게다가 가끔 이 골든 뱃지 학생들이 수업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자, 일단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옷부터 바꿔 입고 몰래 잠입해 보자."

아처의 능력에 새삼 감탄을 마지않으며 파라도와 아르테니가 그를 뒤따랐다. 물론 그들이 골
든 뱃지를 카나의 흑기사로 얻으려 했다면 아주 쉬웠을 테지만 지금 그들은 아카리나스 왕국
의 일원이었다.

*

테리우스는 오랜만에 입은 남색 교복이 영 맘에 들지 않은 듯 흰 셔츠 목덜미를 부분의 단추를
풀어 제끼며 투덜거렸다. 그는 지금 마나아카데미 건물에 최고층에 옥상에 의자 하나 놓고 앉
아서 난간에 붙어 서 있는 두 친구를 향해 으름장을 놓고 있는 중이다.

"야, 아직도 못 찾았냐? 좀 제대로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

원래부터가 신사적인 제로이드는 그의 친구가 시키는 대로 조용히 행하고 있지만 약간 성질이
센 바이사코는 조금 신경질을 부리며 대꾸했다.

"너 이런 거나 시키려고 초야에 묻힌 우리를 불러들인 거야! 우씨, 간만에 예쁜 여자들과 어울
려 보려고 따라 왔더니만."

"쳇, 언제는 여자 생각 안하고 초야에서 도나 열심히 닦고 싶다고 떠날 때는 언제고 잔말 말고
그 꼬맹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 봐. 분명히 오늘 등교할 거니까!!! 아, 억울하면 나보다 더 강하
게 태어나던지…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팍팍 도와 줘야지."

테리우스에 말도 안 되는 억측이 한 두 번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여자로 억측을 부리는 것은 처
음 겪는 바이사코였다.

"에구, 내가 참아야지 누가 널더러 1억 년도 넘게 산 녀석이라고 하겠냐! 도무지 해가 바뀌어도
전혀 철이 없는 녀석! 아, 알았어 찾으면 되잖아 찾으면!!!"

일순간 무서운 표정으로 바이사코의 기를 팍 죽여 버린 테리우스를 향해 마지막 핀잔을 내뱉으
려 그가 다시 난간에 붙어 열심히 천리안으로 아이린을 찾기 시작했다. 이에 제로이드가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흠, 아무래도 내가 발견 한 것 같은데?"

^^*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4장 *117* 학원편(17)

제로이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리우스가 쏜살같이 일어나 난간에 몸을 내밀며 물었다.

"어디? 어디 있다는 거야!"

그런 테리우스의 태도에 조금은 당황한 바이사코와 제리이드 이내 둘은 동시에 고개를 내저으
며 함께 팔을 뻗어 아이린을 가리켰다.

"아! 찾았어!!!! 호오? 여기서 보니까 완전히 땅콩 같은데? 하하, 저 녀석이 원래 땅콩 같아도 화
나면 아주 무서운 폭탄이거…어? 뭐야 니들! 왜 그런 이상한 표정으로 날 보는 거야!! 내…내가
뭘 어쨌는데!"

대뜸 테리우스가 화를 냈다. 이에 바이사코가 조금 전 환희에 찼다가 혼자 중얼거리던 친구의
모습을 흉내냈다.

"하하, 저 녀석이 원래 땅콩 같아도 화나면 뭐, 무서운 폭탄? 게다가 내…내가? 말까지 더듬고
테리우스 너 약이라도 먹은 거냐? 빨리 좋은 말 할 때 불어!"

순간 테리우스 등줄기가 쏴악 얼음이 굴러가듯 차가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차! 싶은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조그마한 여자 애에게 너무 과민 반응을 하다니 자존심에 금이
갔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직감이 맞는 것 같지 바이사코?"

"응, 내 생각도 너랑 같다."

매우 걱정스럽다는 듯 호랑이를 아기 고양이 다루는 듯한 표정을 지은 두 친구들 앞에서 테리
우스는 자신도 모르는 감정에 대해 일단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 지금 내게 장난하는 거냐!! 맹랑한 꼬맹이 하나 골려 줄 생각에 그런 것 뿐이야!!"

그러나 테리우스의 이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두 친구들은 그들이 떠올린 생각을 좀처럼 바꿀 기

세가 없어 보인다.

"쯧쯧쯧, 이 바이사코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넌 저 여자에게 푹 빠진 거야! 이런 걸 아마 테리
우스가 가장 싫어한다던 사랑이라는 이름을 지닌 거겠지? 하긴 여기 오기 전에 저 녀석 무슨 결
혼식을 하려다가 취소했다고 할 때부터 좀 알아봤지. 아무리 변덕을 잘 부리는 녀석이래도 결
혼이라는 건 딱 질색이었잖아. 그런데 뭐 곧 취소했다해도 그런 걸 하려고 했다는 것도 저 녀석
이 이제 슬슬 외로운 게 싫어 진 거야. 이제야 좀 남자다워 진 거지. 인정해라 테리우스 너도 여
자와 사랑을 하는 외로운 늑대임을 크크크!!!!"

"이것들이 정말 아니라니까!!!!"

다른 때 같으면 제아무리 심한 농담에도 친구들에게는 언성을 높이지 않던 테리우스가 버럭 소
리를 지르며 발악하듯 친구의 말을 부인했다. 이에 바이사코는 더더욱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처럼 감정을 겉으로 내 보이지 않는 테리우스였다. 그런데 저 자그마한 여자 애에 관해서 라
면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반응을 한다. 두 친구들에게는 실로 놀라우면서도 재미있는 일
이었다.

"테리우스, 나 역시 바이사코의 생각에 동감이지만 한낮 무식한 시골 여자라 해도 여자에게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상처를 주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난 번 결혼식이란 걸
해 놓고서도 파혼 당한 여자에게 넌 이미 한번 상처를 줬어. 물론 상대가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테리우스는 방금 전 흥분을 어느 새 차가운 가면 뒤로 감추고서 친구의 말을 끊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너무 건조한 목소리였다. 이에 제로이드가 슬쩍 입 꼬리를 휘며 말을 이었다.

"전쟁과 사랑을 동일시하지 말란 소리야. 전쟁에는 어떠한 폭력도 살인도 음모도 정의로 뒤바
뀔 수 있지만 사랑은 악이 들어갈수록 화만 부르게 되는 거야. 우리가 걱정하는 건 넌 지금까
지 너무 많은 전쟁 속에서 살아왔어. 가끔 우리가 질릴 정도로 그걸 친구들과 함께 지는 건 기
꺼이 응하겠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겠어? 데본을 포기할 수 있다면 그때
사랑을 하란 말이다. 아님 우리들처럼 데본을 떠나던지 지금은 일시적으로 네가 불러서 이렇
게 왔지만."

제로이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이 맞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자신이 왜 이런 소
리를 듣고 있냐가 테리우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단지 조금 끌리는 여자에게 아주 작은 관심을 내비친 것에 비해 친구들의 말과 행동은 너무 심
오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친구인 자신보다 낯선 여자를 더 생각하는 것처럼.

"…테리우스, 정말 저 여자 골탕 먹이고 싶은 생각 외에는 아무 감정 없는 거냐? 그럼 네 장난
에 동의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관심이 있어 건드리는 거라면 그만 두라고 하고 싶다."

일순간 테리우스의 주먹이 바람소리를 내며 제로이드의 턱 아래에서 위쪽방향으로 강타했다.

퍽!!!!!!

뒤로 널브러진 제로이드의 아랫입술이 찢겨져 선혈이 보였다. 지켜보던 바이사코는 그런 테리
우스를 말릴 생각이 없었는지 우두커니 서 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였다.

제로이드가 혀를 내밀어 피를 짧게 핥으며 손등으로 훔쳐냈다.

"다시 한번 주제넘게 내 앞에서 날 가르칠 생각이라면 그땐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알겠
어!!"

지금 테리우스의 눈동자는 한 제국의 군주의 모습이었다. 언젠가 그들을 지휘하던 눈동자와 목
소리.

"휴, 알겠어."

바이사코에게도 한번 눈길을 주던 테리우스가 이내 문을 통해 사라졌다. 휑한 분위기에 남겨
진 두 사람 여전히 눈가에 웃음을 남기고 있었으니.

"내 말이 맞지 제로이드?"

"으읔, 그래 맞는 것 같다. 어젯밤까지는 설마 했는데…좀 일으켜 줘."

제로이드는 주먹에 맞은 것이 꽤 타격이 컸는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
이사코가 친구의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그럼 이제 그 황금 안장 주인은 나다 알았지!"

"그래, 너 가져라! 아주 내기에서 친구 물건 가져간 것이 그렇게 신나냐? 웃다가 입술 찢어지겠
다 임마!"

제로이드는 맞은 턱보다는 바닥에 널브러져 몸 이곳 저곳의 통증이 더 크게 느껴졌다.

"테리우스 녀석 그렇다고 이렇게 세게 때리다니 이거 장난이 아니네. 읔! 아파! 바이사코 왜 찔
러대!"

"하핫! 재미있잖아! 크크크!!! 헌데 우리가 너무 심한 거 아닐까? 설마 우리끼리 내기한 거 테리
우스가 알아차리진 않겠지?"

테리우스가 나가버린 문을 바라보면서 바이사코가 말했다.

"으…읔, 너만 말조심하면 그런데 정말 그 여자 이름이 뭐더라? 아, 아이린이란 여자하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민감한지 난 그게 궁금해."

"히유, 어떻게든 그 여자랑 잘되던지 해야지. 안 그러면 우리도 불러냈겠다…그 녀석 또 전쟁
일으키려 할 지 몰라. 마신으로 천계에 가서도 전쟁에 미쳐 있었던 탓에도 봉인되었는지도 모
르잖아. 그건 그렇고 너 황금 안장 언제 넘길 거냐?"

"몰라! 임마!"

"어어,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오늘 학교 끝나고 바로 줘야 해! 헤헤, 덕분에 내 블루소드는 굳
었다!!"

바이사코는 자신이 내기에 내놓았던 블루소드 와 더불어 제로이드의 황금 안장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침을 흘렸다. 황금 안장을 말 위에 하고 블루소드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야말로 환상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이 어젯밤 테리우스의 침실에서 발견한 아이린에 관한 서류를 보고 짐짓 내기를 걸었
던 것을 테리우스는 알지 못했다. 얼마나 닳도록 서류를 읽고 또 읽었는지 빳빳한 종이가 흐물
흐물해진 걸보고 두 친구는 아이린을 두고 내기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테리우스의 감정
을 찔러서 그의 관심이 사랑의 시작점임을 확인했다. 그가 포커페이스를 잃고 감정이 순식간
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말이다.

*

테리우스가 계단을 내려가다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빠른 보폭으로 순식간에 일층에 당도했
다.

그리고 학생들이 등교하는 정원 쪽으로 다가갔다. 이때 3층 건물 창가에 보랏빛 눈동자가 그런
테리우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테리우스는 곧 누군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 올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며 백년은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에 몸을 기대어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이때 아이린이 양손으로 어깨 가방 끈을 쥐며 학교 건물만을 응시한 채로 경쾌하게 발걸음하
며 지나갔다.

"엣취! 흠흠흠!!!"

테리우스는 마치 어쩔 수 없이 나오려는 기침을 내뱉으며 아이린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아이린이 슬쩍 돌아보니 테리우스가 다른 곳을 응시한 채로 나무에 기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저기서 혼자 뭘 하고 있는 거야? 학교에 안 늦나? 하긴 부자 나라 왕이 학교에 늦는다고
뭐 큰일이라도 있겠어? 나 지금은 바빠서 너랑 못 놀아 줘 테리우스. 공과 사는 지금부터 구별
해야지! 지금은 학교가 먼저야.'

아이린이 못 본 척 그냥 지나가려 하자, 당황한 테리우스 다시 한번 헛기침을 했다.

"우엣취!!!! 흐흠!!!!! 아!아!아!"

그런데 이번에는 좀 어색했으니 일부러 낸 소리임을 아이린이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기다렸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리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대견스럽
게 느껴진 것이다.

'저 녀석 날 기다려 준거잖아? 내가 기억에서 지워졌는데도 마음은 날 기억하는 것 같아…풋,
억지일 수도 있지만 기분이 그래.'

그녀의 등뒤에서 동태를 살피던 테리우스는 몹시 애태우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가 그냥 가버
리면 이젠 자신이 불러 세울 수밖에 없는데 그건 좀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피하고 싶은 마음
이었다.

이때 아이린은 몸을 획 돌리더니 테리우스의 눈과 마주쳤다.

'됐다!!'

테리우스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얼굴은 굳은 채로 눈동자는 다소 거만하게 다른 곳을
응시했다. 그런 사이 아이린이 그에게도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그의 귀를 그의 심장을 긴장
시켰다.

"테리우스!!!"

테리우스 앞에 바짝 다가와 껑충 두 발을 뛰었다 착지하면서 아이린이 크고 짧게 말했다.

그러자 조금 귀찮은 듯한 어조로 테리우스가 그녀를 천천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뭐야 또 너냐? 왜 남의 이름을 허락도 없이 크게 부르고 난리야!"

테리우스의 대답이 영 맘에 들지 않은 듯 아이린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얼굴을 그에게 바짝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헛기침으로 사람 부르는 것 보단 이름으로 부르는 게 낫잖아. 안 그래?"

"쳇, 내가 언제…그냥 재채기가 나온 거야!! 그러는 넌 왜 애인이랑 같이 등교하지 않고 혼자 하
냐? 이 학교에 있다면서?"

"흥, 너한테 맞을 까봐 숨겨놨어…너? 방금 나 기다린 거지?"

"뭐?"

테리우스 자신의 속내가 들킬까 조금 긴장했다. 그런데 다음 아이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 기다렸다가 내 애인이랑 오면 그때 말처럼 실컷 패 주려고 기다린 것 아니었어?"

"흐흠, 맞아! 쳇, 여우같이 다 눈치채버렸군."

테리우스의 태도가 너무 귀엽게 느껴진 아이린 그와 계속 있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첫 수업에
지각할 수는 없었다.

"그럼 다음에 봐! 오늘 첫 수업인데 지각하면 안되거든. 다음에 놀아줄게!"

"다음에 언제?"

너무 빠른 테리우스의 대답에 놀란 건 아이린보다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베시시한 웃음을 머
금는 아이린을 보니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을 듯 싶었다. 그는 재빨리 말을 돌려
말했다.

"오늘밤에 내 생일이다."

"그래서?"

"쳇, 그래서라니 같은 학교 학생으로 그냥 초대하는 것 뿐이야. 그럼 먼저 간다…저녁에 마차
보낼 테니 준비하고 기다려! 이따 보자 꼬맹아!"

아이린이 초대에 응할지 말지 대답도 하기 전에 테리우스는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린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휴, 멋대로 인 건 그대로야…으앗! 진짜 지각이다!!! 어이구, 테리우스 너 때문에 나 지각하면
가만 안 둘 꺼야!!!"

아이린은 지칠 대로 지친 몸에 그나마 남은 힘을 발에 실어 최대한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0^*

(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4장 *118* 학원편(18)

*

건물 내부에 들어선 아이린은 텅 빈 복도를 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
지 않는다. 아주 조금 늦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높은 천장과 넓은 규모의 복도 때문인지 아
니면 으스스해 보이는 곳곳에 커다란 동상 탓인지 몸에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 기분 좋지
않은 느낌이다.

"어? 왜 아무도 없는 거지? 조금 전 등교 길에서만 해도 학생들이 북적거렸는데…첫 시간이…."

그녀는 주머니에서 꺼낸 수업 시간표를 훑어보며 강의실 주소를 확인했다. 아무리 늦어도 10
분 정도 일 텐데 복도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조금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모두
테리우스 탓이라며 아이린이 잠시 그를 생각하며 인상을 구겼다 폈다.

마나아카데미의 강의실로 들어선 통로에 모든 문들은 학생들이 왼쪽 가슴에 달고 있는 뱃지의
문양인 회오리 문양이 새겨 있다. 각 수업에 맞게 강의실이 나뉘어 있지만 단 하나 교양 수업
은 각 신분 계층이 나뉘어지는 사교성이 있는 수업이다. 아이린의 첫 수업은 바로 교양 수업이
었으니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겨우 찾아간 곳은 황금색 문이 있는 강의실이었다. 비록 가난으
로 인해 그린 하우스에 머물지만 그녀는 신분은 왕족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기숙사를 신분에 나누어 골드, 실버, 그린으로 나눈 것에 이어 교양 수업마저 문 색에서부터 벽
면 장식까지 차이가 나도록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아이린은 기대했던 마나아카데미에 대해 조금
씩 거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에, 뭐야? 교양 수업이 대체 뭐 길래…학교 안에서도 이렇게 신분을 나누는 거야. 능력별로 수
업하는 줄 알고 평등한 곳이구나 싶었는데 교양 수업이라…맘에 안 들어."

차마 앞문으로 들어설 용기는 없어 뒷문 앞에 서서 중얼거리던 아이린의 귀에 누군가의 발자
국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 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름 아닌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두꺼운 책 두 권을 양손에 묵직하게 들고 그녀에게 걸어오는
것이다.

'아! 라무도라욤 할아버지 아니 마법사님!'

한눈에 마법사 라무도라욤을 알아본 아이린은 그에게 인사를 건네려다 잠시 주춤했다. 혹 마족
의 계약서에 의해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스쳐간 것이다.

그런데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더니 낯익은 웃음소리를 내며 아이린의 머리
를 매만져 주는 것이 아닌가.

"호호호호, 오랜만에 보는구나. 내 도움 없이도 스스로 여기까지 잘 와주었구나 아이린."

아리스샘터인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던 계약서의 규칙이 어긋났다. 하얀 머리칼에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주름살 너머로 따뜻한 눈빛은 분명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맞았다.

"절 기억하세요? 정말 제가 누군지 아시는 거예요?"

"호호호호,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지금도 한참 늦은 것 같은데?"

강의실 문을 눈길로 가리키며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말하자, 아이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
다.

"어차피 늦은 걸요. 그것보다 마법사님이 절 기억하신다는 건 마…."

아이린은 마족의 계약서를 언급하려다 멈췄다. 그러자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가던 길을 다시 발
걸음하며 그녀에게 미소지었다.

"호호,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하려무나 아이린. 내 수업을 듣게 된다면 그때 보자꾸나 호
호호!!!"

"잠깐만요! 마법사님 물어 볼게 있어요 잠깐만요!!"

"호호호호호호!!!!!!!"

긴 옷자락을 바닥에 질질 끌며 걸어가던 라무도라욤 마법사는 생각보다 빠른 발걸음으로 모퉁
이를 돌며 이내 아이린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마치 잠시 동안 유령에라도 홀린 기
분이 들었다.

"…이상해."

아직도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사라졌던 모퉁이를 응시하며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린은 잠시 궁금증을 뒤로 한 채로 강의실 뒷문 손잡이를 조용히 돌려 안으로 밀었다. 복도
쪽으로는 창문하나 없던 강의실이었기에 안에서 어떤 교양 수업을 하는지 몰랐던 아이리은 경
쾌한 왈츠 음악소리를 제일 먼저 접하게 되었다.

"뭘 하는 거지?"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었고 학생들은 남녀가 파트너를 이루어 춤을 추고 있었으니 교복만 갖춰
입지 않았다면 화려한 무도회를 벌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멈출 것 같지 않던 음악소리가 정지되었고 이내 누군가 아이린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점점 다가오는 사람은 붉은 안경을 쓰고 깐깐한 인상을 담고 있는 깡마른 여자였다. 나이도 좀
들어 보였다.

늙은 여자는 아이린을 위 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들고 있던 기록부를 넘기더니 이내 신경질
적인 목소리를 흘러냈다.

"아이린 아카리나스!!! 본인 이름 맞나요!!"

늙은 여자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인 것에 쉰 소리까지 합성되어 있어 듣기 매우 거북했다. 특히
깜짝 놀랄 정도로 버럭 소리를 내질러 더욱 그러했다. 아이린은 절로 양손을 귀에 대고는 늙은
여자를 응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늙은 여자의 호통 덕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아이린
에게 쏟아지게 되었다.

"네, 그런데요…헤헤, 제가 좀 늦어죠? 헌데 누구세요?"

아이린은 아주 평범한 질문을 했을 뿐인데 늙은 여자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흥분을 하며 으르렁거리듯 자신에게 다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좀! 좀! 지금 좀이라고 했어요!!!! 첫 수업부터 그것도 신입생이 지각을 해놓고 아니 담당 교수
가 누군 지도 몰라보고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아, 혈압이 올라서…."

늙은 여자는 다름 아닌 왕족들의 교양 수업을 담당하는 미첼 교수였다. 그녀가 아이린을 호통
치다가 자신의 뒷목을 오른손으로 받치면서 어지러운 것처럼 행동했다. 미첼은 아이린이 존재
하지도 않은 가난한 왕족으로 비싼 기숙사비를 내지 못해 신분과 맞지 않은 그린 하우스에 머
물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던 왕족 학생들 틈에서 바이올렛 뱃지를 남학
생이 걸어 나왔다. 그리고 곧 뒤로 넘어질 듯 말 듯한 자세의 미첼 교수를 부축하며 이야기했
다.

"아름다운 교수님께서 갑자기 혈압이 올라가 기절이라도 하신다면 제 마음이 무척 아플 것 같
은데요?  미첼 교수님, 신입생도 오늘 첫날이라 늦은 것 같으니 착한 마음을 지니신 미첼 교수
님께서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해 주실 거란 걸 잘 알고 있지만 상급생인 제가 따로 이 신입생
을 엄하게 교육시키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선이 굵지만 부드럽고 강한 이미지의 남학생은 미첼 교수 몰래 아이린에게 살짝 윙크를 보냈
다.

그리고 다시 미첼 교수에게 부드러운 눈빛을 보이며 자신의 말에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있
음을 암시했다. 노처녀 교수는 이 잘 생기고 매너 있는 남학생에게 대답을 하기도 전에 주름진
입가에 미소를 걸치며 웃음부터 흘렸으니.

"뭐, 상급생이 신입생 교육을 하겠다는데 허락 안 할 수야 없지 호호호!!! 아이린양!"

아직 남학생의 손을 꼭 붙들고 있던 미첼 교수가 아이린을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차갑게
불렀다.

"네?"

아이린은 별로 기죽지 않은 태도로 자신 앞에서 맘컷 신경질 부리는 미첼 교수가 조금은 불쌍
하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난 조금 지각한 걸로 벌을 주는 그런 교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신입생이 첫 수업부터 그것도
가장 중요한 교양 수업 시간을 늦었다는 것에 대해 상급생이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하니 나도
어쩔 수 없군요. 심하게 혼이 나더라도 날 탓하지 말아요 알겠죠?"

미첼 교수 이야기 도중 남학생의 얼굴을 살짝 쳐다보다가 아이린에게 말했다. 그러자 남학생
은 자신의 손을 언제까지라도 쥐고 있으려는 듯한 미첼 교수로부터 가차없이 빼내버렸다.

그리고 아이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덥썩 쥐고 다소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낮은 어조로 말했
다.

"신입생! 상냥하신 미첼 교수님께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왕족들의 자존심을 걸고 상급생으
로써 기합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니 날 따라오도록."

"어?"

상급생의 손에 이끌려 강의실을 빠져 나온 아이린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그가 이끄
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일에 대해 잠시 이성을 놓
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자, 다시금 미첼 교수의 재촉과 함께 왈츠가 흘러 나왔고 곳곳에 학생들은
방금 전 그 신입생이 지난 번 무도회 때 문제의 그 여학생임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생각했던 분위기나 이미지와 너무 다른 마나아카데미의 첫 인상에 아이린은 잠시 공허함
과 실망감으로 머릿속 어지러웠다. 특히 처음 만난 교수의 이미지나 태도가 그녀를 실로 어이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지금은 갑자기 끼어 든 상급생의 손에 이끌려 빈 강의실에 들어서고 있다.

"흠, 어디까지 끌고 갈 작정인가요? 여긴 어디죠?"

남학생이 그녀를 이끌고 들어온 아담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공간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긴 내 친구들만 들어 올 수 있는 특별실이야. 원래 미첼 교수는 하루만 지나면 모든 잊어버
리는 성격이니 화날 때만 딱 피하면 혼날 일이 없거든. 아마 내일 지각하지 않으면 오늘 지각으
로 혼날 일은 없을 거야."

남학생은 좀 전 자신에게 무뚝뚝하게 대했던 태도와는 달리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여전
히 아이린의 손을 놔주지 않았고 팔목에 땀이 차는 것 같아 불편했다.

"헌데 이 손 좀 먼저 놔 줄래요?"

"아, 미안."

"특별실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왜 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지 알고 싶군요."

아이린의 불투명스러운 태도에 남학생은 양손을 어깨 높이로 올리며 미소지었다.

"이런!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다니…미첼 교수의 잔소리에서 구해줬는데 고맙다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누가 댁한테 도와달라고 했어요! 덕분에 함께 지낼 다른 학생들에게 더 찍혔다는 생각은 안 드
나 보죠?"

^0^*

추석연휴가 내일 시작되네요...웅, 송편 빚느라 좀 늦었어요...아침이 되기전까진
4장 마저 올리도록 할께요....다들 추석 잘보내고 오세요.....겨울기사 올림.
(추신-이쁜걸님...제가 조금만 늦어지면 님 너무 터프해지시는데 너무 무섭게는
터프해지시지 마세요....^^* 노력할께요....리플님들 독자님들 모두 추석 잘 보내세요.)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4장 *119* 학원편(19)


특별실이라는 곳은 거의 개인 거실이라 할 정도로 강의실의 분위기와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였
다. 아치형 창 다섯 개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햇살을 맞이했고 맞은 편 벽면에는 여신들이 바
닷가에서 춤을 추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이곳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어줄
고급스런 벽난로도 배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평면이지만 보석이 박힌 거대
한 원탁이었다. 그 원탁을 보고 아이린은 아리스샘터에서 보았던 테리우스의 모습이 갑자기 떠
올랐다.

'아리스샘터에서 장로들과 회의를 했던 그때…테리우스가 앉아 있었던 그 원탁과 비슷한 것 같
아. 그때 원탁보다는 좀 더 화려한 것 같긴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면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아이린.

대뜸 화를 내던 아이린이 허공을 응시하며 멍한 듯 있자, 남학생이 손가락을 이용해 딸깍 소리
를 내며 그녀를 일깨웠다.

"재미있는 애구나! 화내고 딴 생각에 잠기는 여자라 난 별론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남자의 태도가 이제 불쾌해지는 아이린이었다.

"나 역시 잘난 체하고 생색내는 남자 별로 인 건 마찬가지요."

"하하!! 테리우스 녀석이 왜 네게 빠졌는지 정말 불가사의하다. 아마 그 녀석과 닮은 성격 탓인
지도 모르겠군."

"테리우스!! 테리우스를 알아요?"

"그래, 난 테리우스 친구 제로이드라고 해."

제로이드의 머리칼에 창가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의해 붉은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햇살
을 닮은 그의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가 미소를 지으면 아마 어떤 여자
라도 넘어가지 않고선 못 베길 것이다. 네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잘 생긴 남자로 통한 녀석이
바로 제로이드였다. 정작 본인은 그런 외모에 대해 반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다.

"아이린 아카리나스! 헌데 아카리나스라는 왕국 이름은 처음 듣는 걸? 서류를 보니 패전국이 아
리스 왕국을 재건한 이름이라는데 그럼 아주 많이 가난하겠네?"

"나에 대해 별 걸다 알고 있군요."

"뭐, 별로 알고 싶지 않아도 너에 관해서 라면 테리우스 녀석이 워낙 방방 뛰고 있어서 곁에 있
으면 저절로 알게 되지. 그 녀석 여자에게 관심 주는 건 처음 보거든 꽤 흥미로운 일이지 친구
들인 우리로서는."

테리우스가 자신에 대해 이리저리 알아봤다는 것도 그녀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도 퍽 반가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좋게 생각되지 않던 제로이드가 테리우스의 절친한 친
구라는 사실 때문인지 이젠 좋게 생각되었다.

"그 녀석은 교양 수업을 안 받나요?"

창틀에 기대 서 있던 제로이드는 아이린의 물음이 꽤 신선한 충격을 먹은 듯 잠시 얼굴이 굳어
졌다.

아이린이 자연스럽게 아니 친근하게 테리우스를 호칭하는 단어가 그를 놀라게 한 것이다.

"그 녀석? 방금 테리우스를 그 녀석이라고 한 거야? 하하하하!!!!!"

"왜 웃어요?…내가 무슨 웃기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정말이지 그 녀석이나 그 녀석 친구들
이나 다들 하나씩 괴짜들만 모여 있는 것 같아."

폭소를 터트리는 제로이드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린은 어깨를 으쓱이다가 원탁에 의자를 빼 앉
으면서 조용히 혼자 중얼거렸다.

"미안, 너랑 이야기를 하다보면 테리우스란 녀석이 아주 평범하게 느껴져서…아, 테리우스는
원래 수업에는 들어오지 않아. 굉장히 따분해 하거든 어차피 여기 수업 들으려고 온 것 같지도
않고."

"완전히 날나리 학생이란 소리로 들리네요. 수업을 할 것도 아니면 여긴 왜 온 거죠?"

아이린은 설마 자신의 쪽지를 보고 단순히 이곳 학생으로 그가 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
다. 적어도 뭔가 목적이 있어 마나아카데미에 들어왔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그에게 따
라오라고 쪽지를 보냈던 것은 그에게 학교로 입학하라는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그녀가 있
는 지역에 오라는 것이었다.

아이린의 물음에 제로이드가 갑자기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뭔가를 생각했다.

'테리우스 녀석 혹시 아이린 때문에 여기에 들어온 건? 에이, 설마! 아무렴! 그럴 리가! 다음 세
대 후계자들을 관찰하러 온 거겠지…하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제로이드는 숱하게 봐온 미녀들과 아이린을 비교해 봤다. 그와 마찬가지로 테리우스 역시 데본
의 특성상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능력 있는 여자들을 많이 접해 봤었다. 그 미녀들에 비하면 아
이린은 평범한 점수밖에 줄 수 없을 것이다. 제로이드가 봐도 귀엽고 예쁜 얼굴에 평범해 보이
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함께 있으면 묘하게 유쾌한 기분이 든 것은 제로이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난 교양 수업이 끝날 때까지는 여기에 있어야 하겠네요. 이름이 제로이드라고 했었죠?"

"응."

"바이올렛 뱃지면 4학년이네요? 그럼 테리우스도 4학년이겠군요."

"그렇지."

"학교에 왔으면서 수업에도 안 들어갔다면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하하, 왜 어디 있는 줄 알면 찾아가려고?"

그냥 놀리는 어조로 제로이드가 말했다. 그런데 아이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린이 대답했다. 제로이드는 어리숙하면서도 뭔가 신비한 비밀을 담
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아이린에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학교 건물 옥상에 있을 거야! 그 녀석…."

"원래 답답한 걸 싫어하는 녀석이죠. 헌데 그 녀석 오늘 생일인가요?"

제로이드의 말을 바로 이으며 테리우스에게 그 녀석이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쓰는 아이린. 제
로이드가 알고 있기로는 분명 테리우스는 아이린이란 여자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
데 아이린은 테리우스를 마치 오래 사귄 친구 아니 연인처럼 대하고 있는 느낌이다.

제로이드는 아이린에 대해 좋은 느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경각심도 일었다. 어쩌면 테리우
스를 제거하기 위해 모종의 음모일지 모른 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예전에도 종종 그런 일이 있
었으니까.

데본 제국의 대마왕자리는 그런 것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믿을 수도 믿어서도 안 되는 자리.

"오늘 테리우스 생일이라고 누가 일러 줬나?"

제로이드가 조금은 경계하는 마음으로 아이린이 눈치채지 못하게 물었다.

"그 녀석이 오늘 날 생일 초대한다고 아침에 말했거든요. 아침에 지각한 것도 다 그 녀석 탓이
지만…생일이 오늘 인 건 몰랐는데."

테리우스에게 생일이라는 건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아주 오래 전 그는 자신의 생일을 어둠
속에 밀어 넣어 버렸으니 그는 자신의 탄생을 저주하는 자였다. 그러니 테리우스가 생일 파티
를 한다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그건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인 입으로 오늘
이 생일이라니 제로이드는 또 한번 놀라야만 했다.

"흠, 그건 좀 놀라운 사실이군. 생일이라…뭐, 그 녀석이 그랬다면 그런 거겠지."

"대답 한 번 이상하게 하시네요."

제로이드가 오랜 기억을 들춰 볼 때 적어도 테리우스의 생일은 봄이 아닌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니 테리우스의 생일이 오늘이라는 건 거짓말이 틀림없을 것이라 제로이드는 생
각했다.

"그만 가죠!"

아이린이 제로이드의 옷깃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어딜?"

"옥상이요."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4장 *120* 학원편(20)<상>

*

제로이드는 어느새 아이린의 뜻대로 테리우스가 있는 옥상을 앞장서 걷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조그마한 여자의 의지에 이끌리는 것인지 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이린이 부탁하는 것에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그마한 얼굴에 드넓
은 심연의 바다를 안고 있는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며 옥상에 가길 원한다고 했을 때 그는 잠
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테리우스가 저 여자에게 끌려 다니는 이유를 설명하진 못해도 이해할 수는 있겠는걸.'

두 사람이 옥상의 입구에 다다르자 아이린이 먼저 손을 내밀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제로이드
가 멈춰 서서 아이린에게 말했다.

"난 여기서 돌아가는 게 좋겠어. 괜히 당신을 데려왔다고 내게 화라도 내면 욱! 테리우스 주먹
에 맞으면 보통 아픈 게 아니거든."

탁 트여진 옥상을 쭉 둘러보며 테리우스를 찾던 아이린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같이 안 가겠다구요?"

그녀의 답변에 제로이드가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부드러
운 미소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의 미소 때문인지 아이린은 함께 동행하지 않겠다는 것에 조금
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할 수 없죠.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음…."

아이린이 촉촉한 눈동자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한다. 그녀가 자신의 이
름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 제로이드.

"제로이드!"

제로이드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아이린이 환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 제로이드!! 헤헤, 고마워요 친절하게 바래다줘서."

제로이드는 아이린이 한번쯤 자신을 붙잡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짧게 스치기도 했다. 만약 그
랬다면 아마도 거절하지 못 했으리라. 설령 테리우스에게 한 주먹 흠씬 맞더라도 말이다.

제로이드가 생각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참, 제로이드!"

역시 자신의 매력에 그녀가 함께 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거라 생각하고
기쁜 마음에 아이린을 바라봤다.

"음, 왜?"

"시간표를 보면 교양 수업 후에 다른 시간들도 있기는 있는데 신입생 그러니까 시간표에 교양
수업만 표시가 되어 있어서요. 신입생 두 번째 수업하는 곳이 어딘지 미리 좀 알아두었음 해
서…헤헤, 제로이드는 이곳 건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요."

제로이드의 기대에 찬 표정이 실망으로 잠시 물들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그의 이런 미묘한 표
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약 그가 테리우스였다면 알아차렸겠지만 말이다.

"신입생들은 오늘 교양 수업 후에 정식 수업은 없을 거야. 아마 새로운 신입생들끼리 사교 파티
를 할거라고 들었어. 수강 신청은 내일 교양 수업을 했던 곳에서 하게 되는 걸로 알고 있어. 자
세한 사항은 학교측에서 이미 각 기숙사에 문서를 발송했을 걸. 다른 학년들은 그대로 정상 수
업을 하게 되니까 그 종합 시간표가 신입생들에게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 대개는 평민층
신입생들이 혼란…?"

말하던 도중 제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린을 바라봤다. 왕족이라면 모를 리 없을 사항
을 그녀가 모르고 있다. 그는 아이린이 흑기사들과 이곳으로 급하게 온 경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왜 그녀가 마나아카데미이 규율에 대해 문외한인지를 알리 없었다.

'정말 여기저기 수수께끼 같은 여자로군. 왕족이면서 이렇게 기본적인 걸 내게 묻다니…다들
이곳에 오기 전에 시종관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텐데…원래가 왕족들은 수업 내용보
다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아무렴 몰락한 왕가를 재건한 허울뿐인 왕국의 공주라 할지라도 형식을 중요시하는 왕족의 교
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나 행동은 형식적인 습관에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것
같았다.

갑자기 말을 하던 도중 말끝을 흐리고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제로이드를 보면서 아이린이
물었다.

"왜 그러죠?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것처럼 바라보네요?"

"아, 아냐! 더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도 돼."

"아뇨, 뭐 더 이상 수업이 없다니 아쉽기는 하지만 아까 그 교양 수업에 미첼 교수님인가? 그 분
을 생각하니까 다음 수업이 또 뭐가 있나 싶어 물어본 거예요. 그럼 다음에 봐요 제로이드."

아이린이 한쪽 손은 반쯤 열어 놓은 문고리를 잡은 채 나머지 한 손을 들고 흔들면서 그에게 인
사를 했다.

그리고 아무런 아쉬움도 없는 듯 유유히 문을 닫고 제로이드의 시선에서 사라져버렸다. 잠시
잠깐의 즐거움과 공허함이 그의 마음에서 교차하고 있음을 스스로가 놀라하고 있는 제로이드.

옥상 출입구를 한 동안 부동자세로 응시한 채 서 있었다.

*

학교 건물은 바깥보다는 폐쇄적인 분위기를 지녔기에 답답함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
려 건물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기가 눌릴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탁 트인 옥상은 드넓은 공간의
규모보다는 시원한 자연 바람을 얼굴에 맞는다는 것이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아! 이 맛에 테리우스가 여기에서 있는 구나. 게다가 이 햇살은 정말 음! 좋다."

기지개를 한껏 켜고 하늘을 향해 미소를 짓는 아이린.

그녀는 하늘의 태양을 가느다랗게 눈을 뜬 채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음을 걸며 방향을 틀었다.

"책 속에서는 태양이 빨갛게 칠해져 있던데 아무리 봐도 내 눈엔 노랗게 보이네 뭘…으아아
앗!!!!!!"

아이린이 뭔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하필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부딪친 채 그의 몸
위로 널브러지고 만 것이다.

"뭐야!! 누가 감히!!!???"

얇고 넓은 책을 얼굴에 덮고 누워 있던 남자가 아이린의 발길에 치였다가 자신의 몸에 묵직하
게 쓰러지자 화를 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책을 치우며 잔뜩 화가 났던 남자의 얼굴은 이내 놀라움으로 번지기 시작했으니 그는 다름 아
닌 테리우스였다.

"아, 테리우스 안녕…!"

아이린은 잠시 동안이지만 해를 바라본 후였던 터라 앞이 캄캄해서 테리우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몸의 중심도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화난 목소리는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몸 위로 널브러진 상태
에서 손을 뻗어 얼굴을 더듬거리는 것을 보고 테리우스는 어이가 없는 듯 말했다.

"야, 갑자기 장님이라도 된 거냐? 왜 남의 얼굴을 더듬고 그래…흠흠!!"

"…태양을 바라봤더니 눈앞이 캄캄해져서 그래…나 좀 일으켜 줘."

"쳇, 아주 고르고르하는구만. 자, 조심해서 일어나."

테리우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면서 아이린을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눈을 깜빡 깜빡
거리는 아이린을 보면서 테리우스는 반가운 기분이 들었지만 표현하진 않았다. 그리고 장난 끼
가 발동했는지 그녀가 눈이 캄캄해진 사이를 이용해 혀를 낼름거리며 약을 올렸다. 그녀가 못
볼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일곱 살 박이 어린애나 하는 유치한 장난이란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말
이다.

"테리우스, 그만해! 다 보여…친구들이 그렇게 유치한 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4장 *120* 학원편(20)<하>

아이린의 말에 장난을 치던 테리우스는 놀란 마음은 둘째치고 무안한 마음이 들어 크게 헛기침
을 했다.

"허험험!! 아!! 정말 햇살이 좋긴 좋구만."

어깨 높이로 양팔을 벌렸다 오므렸다하면서 딴청을 피우는 테리우스의 모습에 아이린은 절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수업도 빼먹고 여기서 거의 시간을 보낸다며? 순전히 불량 학생이잖아?"

"쳇, 누가 불량 학생이라는 거냐? 어디서 순 이상한 거짓말만 들어 가지고…쯧쯧, 그렇게 귀가
얇아서 어디에다 쓰겠어. 예전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유명했는데 뭐, 요즘도 내 인기는 절정
을 달리고 있지만 하하!!"

"휴, 아무래도 병이 심각한 것 같아."

테리우스가 크게 웃음을 열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랑스럽다는 태도를 보이자, 아이린이 고개
를 흔들며 낮게 읊조렸다.

"야, 너 방금 뭐라 그랬냐?"

아이린의 작은 입술이 뭐라 중얼거리지만 너무 작아 들리지 않자, 테리우스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비밀스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설레거렸다.

"아, 아냐 별말 안 했어."

웃음 짓던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던 테리우스가 뭔가를 깨달은 듯한 눈빛을 하며 아이린을 바라
봤다.

이상하게 그녀만 생각해도 그녀를 만나도 자신의 감정 조절이 제대로 안되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방금 전에도 전혀 그 답지 않은 행동들 스스로도 의아해할 부분이었다.

"너!"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런 어조와 사뭇 다른 테리우스의 목소리였다. 이를 느낀 아이린이 조금
은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어…왜 갑자기 분위기 잡고 그래? 아얏!"

갑자기 아이린이 눈을 깜빡깜빡 거리 다가 손으로 눈 주변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아이린의 말
처럼 분위기 잡고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캐물으려던 테리우스가 되려 놀라 다가왔다.

"왜? 눈이 아파서 그래? 말을 해봐 자꾸 비벼대지 말고 그럼 더 안 좋아."

"아얏! 아파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돌이 들어간 기분처럼 껄끄럽고 아파!"

아이린이 계속 눈을 비벼대려고 하자, 테리우스가 그녀의 두 손을 잡아끌며 언성을 높여 말했
다.

"이런 멍청이!! 자꾸 비벼대면 더 아프다니까!"

"흐음, 그런 어쩌라구 아픈데! 그리고 아픈 사람한테 멍청이라니!!! 내가 왜 멍청이야!!!"

"쬐그만 게 성질하나는 아주…자, 날 쳐다봐 봐! 그대로 있다가 눈물이라도 나오면 눈에 들어
간 티가 저절로 나올 거야."

아이린의 충혈 된 듯 붉어진 눈을 살피던 테리우스가 설명했다. 그녀의 눈을 살피던 그의 눈동
자 그리고 둘 사이의 바라보는 거리가 자연스럽게 좁혀져 갔다.

아이린의 눈에서 눈물일 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눈에 돌이 들어간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아픈데?"

"쯧쯧, 그러게 평소에 고운 마음먹고 살았어야지. 자,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려봐 그래 그
대로 있어."

아이린의 목을 부여잡고 있던 테리우스의 왼손에 의해 그녀의 고개 방향이 살짝 오른쪽으로 비
틀어졌다. 그리고 테리우스는 자신의 입김을 불어 그녀의 눈에 들어간 티를 제거해주었다.

테리우스의 거칠고 차가운 성격과는 달리 그의 입김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함을 아이린
은 느낄 수 있었다. 눈 속에 들어온 껄끄러운 느낌이 스르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진 것이
다.

눈에 티가 완전히 사라졌는지 재확인하기 위해 눈을 깜빡거리던 아이리은 제대로 눈을 뜨고 앞
을 바라봤다. 너무 가깝게 자신의 얼굴 앞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테리우스의 시선.

그녀 역시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시선으로 테리우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
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고 테리우스가 먼저 어색한 듯 아이린에게서 물러났다.

그녀에게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갑작스레 설렘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의 울림은 멈추지 않는 테
리우스였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정말 내가 모르는 여자인 걸까?'

한 순간이지만 자신을 몰라보는 테리우스의 표정에서 아이린은 조금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너! 대체 누구야!!"

아이린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면서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린은 자신이 누군지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음이 답답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처럼 그
녀를 알고 있다는 느낌만 들뿐 기억이 없는 테리우스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됐다. 아리스샘터에서 있는 동안 스쳐 지나가면서 얼굴이 마주친 적이 있어 낯이 익은
거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아리스샘터에서 그때…내가 널 봤던 그때 말고 훨씬 전에 나와 네가
만난 적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말이지."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로 대답했다.

"아니, 그런 적 없었어."

그녀의 대답에 테리우스 역시 자신이 기억 못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음을 인
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왠지 모를 서로간의 섭섭함에 한 동안 아무런 대화 없이 침
묵이 흘렀다.

"아이린? 그게 네 이름이지?"

테리우스가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햇살 아래 탁 트여진 푸른 하늘을 천장 삼아 두 사
람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었다. 아이린의 탐스러운 긴 금발 머리칼이 바람에 어울려 춤을 추듯
너울거렸다.

"응, 나에 대해 조사했다며?"

"쳇, 너 졸졸 따라 다니는 그 녀석들이 그러든?"

"아니, 제로이드가 한 말 듣고 알았어."

"제로이드? 그 녀석을 네가 어떻게 알아?"

"여기 제로이드가 바래다 줬거든. 오늘 수업이 교양밖에 없는데 그 시간에 늦어서 혼나고 있다
가 제로이드가 구해줬어."

순간 테리우스는 잘생긴 제로이드의 미소와 그의 몸에 베여 있는 친절한 태도를 떠올렸다. 어
떤 여자라도 넘어갈 햇살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친구 녀석이 아이린을 구해줬다는 것이 썩 내
키지 않았다.

"쳇, 나 더러 불량 학생이라더니 너도 마찬가지 아냐? 그런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이 구해줬다
고 헤헤거리기나 하고."

"이게 다 누구 때문에 지각을 했는데 그런 말을 하니. 아침에 너만 안 만났어도 지각은 안 했
어. 게다가 기생오라비라니 넌 친구에게 그렇게 말 해? 그리고 내가 언제 헤헤거렸다고 그래!"

"내 친구에게 기생오라비라고 하든 멍청이라고 하든 그건 내 맘이야!! 아주 잘생긴 놈이랑 같
이 있다가 와서 기분 좋았겠네 뭐. 지금 말해두지만 너처럼 못생기고 멍청한 여자에게 내 친구
는 안돼!! 알겠냐?"

테리우스는 자신에게 덤비는 아이린의 태도가 꽤 재미있는 듯 그녀를 더 약올리려고 했다. 이
를 아는지 모르는지 단순한 아이린.

"뭐어? 너 자꾸 말 그렇게 할 꺼야!! 이런 식으로 할거면 생일 초대 거절하고 안 갈 거야. 그리
고 제 아무리 제로이드가 잘생겼다고 해도 내 애인만큼은 아니니까 염려할 필요 없으셔! 흥, 멍
청하고 못생겨?"  아이린이 뾰루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다시 애인 이야기를 꺼내자 테
리우스 불끈해졌으니.

"쳇, 얼마나 괴물 같은 애인이길래 누군지 조차 밝히지도 않으면서 툭하면 애인 이야길 꺼내!"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5장 *121* 학원편(21)

③말괄량이프린세스 5장 베일 속의 미소

테리우스를 따라 아이린은 옥상으로 들어왔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을 통해 건물을 내려오고 있
었다.

그것은 아주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통로였으니 번잡함이라면 딱 질색인 테리우스만의 길이였
다.

마치 아리스샘터를 들어가기 위한 미궁처럼 비밀 통로는 작고 아담했으며 잘 세공 되어진 돌들
로 이루어져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것처럼 막다른 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에 테리우스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문처럼 동그
란 모양으로 돌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오는 내내 두 사람의 말씨름은 쉬지 않고 계속 되고 있었지만 서로 악의가 있다기보다는 자존
심 대결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문이 열리자, 여전히 아이린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애인에 대해 테리우스가 빈정대면서 말했
다.

"그렇게 잘난 네 애인이랑 이렇게 떨어져 지내서 참 슬프기도 하겠다. 쳇, 재수 없는 녀석!"

"방금 그 말 내게 한 말이야?"

"뭐? 네 애인 녀석 두고 한 소리다!! 잔소리 그만 하고 내가 먼저 내려 갈 테니까 따라 내려와.
미리 말해 두지만, 여긴 좀 조심해야 할 곳이야."

비밀 통로의 아담한 불빛과는 달리 열려진 문 건너편은 어둠뿐인지라 아이린은 조금 걱정스럽
게 테리우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길래 아무 것도 안보여?"

테리우스의 입 꼬리가 살짝 휘어지면서 장난스런 눈빛을 감추며 대답한다.

"응, 이곳은 마법 도구 전시관인데 아주 귀중품들만 전시되어 있는 곳이라 담당 교수님과 함께
동행하지 않는 한은 학생들에게 제한 구역인 곳이야. 만에 하나라도 여기 있다가 들키면 바로
퇴학이니 조심해야 해."

"마법 도구 전시관? 그런데 왜 이렇게 캄캄해."

"어휴, 거참 대개 말많네. 그냥 내려오라고 할 때 내려와!"

테리우스의 퉁명스러운 말투 탓인지 아이린의 마음이 더 불안했다. 그를 모른다면 모를까 이렇
듯 대답을 안 해주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기 때문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먼저 통로에서 나간 테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자연스럽게 앞으로 걷듯이 나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통로의 문에서 손을 내밀어 보니
선선한 바람이 느껴진다. 그 바람의 느낌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 자신의 기우일까?

아이린이 머뭇거리는 사이 또 한번 테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나오라니까!"

그의 두 번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이린은 짐짓 그의 목소리가 바로 앞이 아니라 마치 밑에
서 부르는 소리 같다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의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서 작
은 횃불 하나를 들어 입구 쪽으로 가져와 비추었다.

"우아앗!! 지금 장난하는 거야!! 이렇게 높은데서 어떻게…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걸어 나오
라는 소리가 나와!!!"

위를 향해 바라보는 테리우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린은 다소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
다. 약 20미터 가량의 높이에서 내려다본 마법 도구 전시관은 아찔함 그 자체로 아이린에게 다
가선 것이다.

자유자재로 높이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임이 가능한 테리우스와는 조건 자체가 다른 아이린에
게 겁이 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테리우스는 그녀가 모른 상태
로 뛰어내리길 바랬던 것이다. 떨어지는 아이린을 무사하게 받아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곳에 마나아카데미 건물이 아니고 마법 도구 전시관으로 제한 구역이 아니라면 공중부
양을 해서 그녀를 데리고 내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마나를 사용하게 되면 마나 사용 금
지 규율에 어긋나게 되고 특히 제한 구역에서라면 규율 검사원 감시망에 걸릴 것이 자명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은 테리우스의 몸체만으로도 구태여 마나를
사용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공중부양은 사정이 달랐다.

작은 횃불에 보여진 아이린의 겁먹은 표정을 보니 그녀를 다시 혼자 옥상으로 돌아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더 질책을 해서 내려오도록 해야하나 테리우스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봐! 그냥 뛰어 내려! 그럼 내가 받아 줄 테니까."

"그러다 못 받으면 그러면?"

"넌 왜 해 보지도 않고 안 되는 것부터 생각 하냐? 재수 없게."

"그거야 네가 뛰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거겠지."

아이린은 벌써부터 후들거리는 다리의 감각을 느끼면서 스스로가 꽤 겁을 먹고 있음을 인식했
다. 보다 높은 창공에서도 아빠의 등에 앉아 하늘을 누볐을 때도 이렇게 무서워하진 않았던 그
녀였다.

그런데 그에 비하면 너무나 낮다고 할 수 있는 높이에서 뛰어내리기가 이렇게 겁이 날수가 있
다니.

'흐잉, 여길 어떻게 뛰어 내려….'

*

한편 이렇게 아이린과 테리우스가 함께 있는 사이 마나아카데미에 들어섰던 세 명의 흑기사들
은 철저한 준비로 무장하고 그들의 주군이 수업을 하는 곳에 몰래 들어섰는데.

미첼 교수의 앙칼진 목소리에 맞춰 춤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을 수 백 번 확인에 확인을 해봤지
만 그들의 주군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미첼 교수는 자신의 강의에 골든 마스크를 한 이
가 세 명이나 들어서자, 기뻐 어쩔 줄을 몰라 쉬는 시간 없이 연속해서 강의를 강행했다.

"아처, 여긴 쉬는 시간도 없나봐! 우리 여기서 계속 있어야 하는 거야?"

파라도의 물음에 아르테니가 턱을 매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흠, 어젯밤 애써서 위조한 보람이 없잖아. 지각할 까봐 서둘러 가셨는데 정작 강의실에는 없다
니 좀 이상하지 않아?"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파라도와 아르테니는 춤추는 학생들 사이로 계속 눈길을 떼지 않으면서 중얼거렸다. 침묵만 지
키고 있던 아처의 가면 아래에 그의 표정은 어둡게 굳어가고 있었다.

'공주님!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

골든 마스크의 등장으로 신입생들은 물론이고 기존의 상급생들도 그들을 인식하고 있었다. 최
근 골든 뱃지의 명예 학생들을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개가 골든 뱃지를
할 정도라면 현재 대륙에서 왕권 혹은 그 정도 수준의 부와 권력을 지닌 자들이니 말이다.

일라이저는 은회색 깃털이 달린 작은 손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그들을 주시했다.

"골든 마스크라? 마나아카데미에 후계자들 외에도 이렇게 현재 권력자들이 등장하기도 하는
군. 헌데 저 기분 나쁜 마스크는 왜 하고 있는 건지. 후후, 보나마나 늙은이들이나 되겠지…지
는 해들이 떠오르는 해들을 감상하기 위해 온 것이 틀림없어. 에씨, 아침에 분명히 봤는데 그
남자! 테리우스라는 남자는 왜 안 보이는 거야? 분명 이 강의에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흥!!"

일라이저는 혼자서 도도한 자태를 머금은 채로 주변을 살피면서 부채 아래로 도톰한 입술을 비
죽거렸다.

보이지 않는 세계 데본 제국과 카나 황국을 제외한다면 대륙 최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가이루
덴의 왕국의 일라이저 공주. 그녀는 자신의 배필을 찾기 위해 이곳 마나아카데미에 왔을 뿐 배
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학생들은 각 테이블에 앉았다가 그들 차례가 되면 정해준 파트너와 함께 미첼 교수의 지시에
따라 춤을 배우고 있었다. 한 번도 중앙에 나간 적이 없는 일라이저이지만 그녀의 신분 탓인지
미첼 교수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한참 따분해 하고 있는데 일라이저의 멤버들이 그
녀 혼자 앉아 있던 테이블로 걸어 들어왔다.

"일라이저는 정말 안 배울 꺼야?"

같은 또래의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말을 건네자, 순간 일라이저가 신경질적인 눈빛을 내보였
다. 그러자 당황한 얼굴빛을 하며 붉은 머리칼의 여자는 재빨리 말을 고쳐 물었다.

"일라이저님은 안 배우실 건가요?"

같은 나이에 같은 3학년이지만 일라이저는 자신보다 약소국에 속한 공주들이 함부로 그녀를 부
르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일라이저가 약소국이라고 생각할 뿐 그들은 가이루덴 다
음으로 대륙을 장악하는 왕국의 공주들이었다.

방금 일라이저에게 말을 붙였던 붉은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를 지녔고 키가 큰 이자벨라 공주
는 루카스 왕국의 공주이며 유일한 후계자이다. 그리고 그녀 옆으로 서 있는 파르칸 왕국의 이
란성 쌍둥이인 언니 세실리아 공주와 동생 레베카 공주가 함께 했다.

사교계에서 서로 친분을 쌓았던 이들은 이번에 갑자기 블루 뱃지를 달고 3학년으로 들어온 일
라이저 공주에 대해 새삼 그녀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했다. 마나아카데미의 일부분이 썩
은 물로 고여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엄격한 규율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 처음부터 블루
뱃지를 달고 들어오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에 둔 파트너가 없어서 별로 생각이 없을 뿐이야."

"아, 네 그러세요."

이자벨라는 속으로는 별로 맘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존
칭을 했다. 사실 일라이저가 오기 전까지는 그녀가 이곳 마나아카데미에서 퀸의 존재였는던 것
이다. 그런데 갑작스런 일라이저의 출현으로 자신의 자리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으니 이자벨라
눈에 일라이저가 곱게 보일리 만무했다.

"호호호호, 오늘 처음 등교하셨는데 벌써 마음에 둔 파트너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어머, 세상
에 그 행운의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한데요?"

눈치 빠른 세실리아가 지금껏 이자벨라에게 아부했던 것을 일라이저에 돌렸다. 세실리아는 밝
은 은색의 머리칼로 끝이 말아져 있고 같은 색의 눈동자를 지녔으며 왕족이라고 하기엔 극히
평범한 외모를 지닌 공주였다. 그녀에 비해 말수가 적은 쌍둥이 동생 레베카는 언니보다는 나
은 외모로 짙은 은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여자였다.

일라이저는 앞으로 자신의 좋은 수족 노릇을 해줄 최상급의 하녀 셋을 면밀히 관찰하듯 바라보
았다. 그녀에게 이보다 더 좋은 하녀들이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너희들 혹시 테리우스라고 알고 있어?"

일라이저의 말에 세 여자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좀 놀랍기도 하겠지…나도 그가 데본 제국의 왕족이란 사실을 듣고 놀랐으니까. 적어도
내 파트너는 그 정도 능력자여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래서 말인데 오늘 아침 내가 아주 재
미있는 걸 봤거든? 물론 지난번 너희도 무도회에 참석해서 잘 알 거야?"

"뭘 보셨는데요?"

이자벨라가 아직 충격이 가시자 않았는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난번에 그 여자 애 우리 테리우스와 함께 티격거렸던 그 여자 애랑 오늘 아침에 테리우스가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걸 멀리서 내가 지켜봤거든."

일라이저는 이미 자신의 것 인양 우리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집어넣으며 그녀의 소유욕을 과시
했다.

^0^*

제게 파이팅을 외쳐주셨던 여러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제게 정말 너무나도 큰 힘이 되어주셨어요..^^*
열심히 노력하며 조금씩 나아지도록 노력할께요..^^*
-겨울기사올림.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5장 *122* 학원편(22)

*

아이린은 벌써 세 번이나 아래로 뛰어 내리려다가 멈추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받으
려고 아래에서 기다리는 테리우스 결코 곱게 말이 나올 성격은 아니었으니.

"너 지금 누구 약올리는 거냐!!! 이번에도 안 뛰어내리면 그냥 내버려두고 혼자 가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여기서 어물거리다가 들켜서 퇴학을 당하든 말든 난 상관 안 할 테니까!"

겁이 나서 뛰어 내리지 못하는 걸 자신도 어쩔 도리가 없건만 격려는커녕 반 위협적인 목소리
의 테리우스가 이토록 얄미울 수가 없었다. 아이린은 몸을 엎드린 상태로 아래를 향해 빼꼼이
고개를 내밀어 봤다. 역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공포를 안겨주는 높이로 식은땀이 절로 났
다. 게다가 어두운 공간의 바람소리까지 휭 하니 겁이 두 배로 났다.

"무서운 걸 어떻게 해! 왜 비밀 통로를 이렇게 위험하게 만들어 놨어!"

"쳇, 그거야 내 맘이지! 어쨌든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에도 안 뛰어내리면 나 혼자 가버릴 거
야!"

"테리우스!"

아이린은 뭔가 크게 각오라도 한 듯 결연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그러자 테리우스가 고개를 젖
혀 아이린을 응시하며 삐딱한 표정을 하며 대답한다.

"왜 또!!"

"만약에…만약에 내가 아래에 있고 네가 여기에 있어서 내가 널 받을 테니까 날 믿고 뛰어 내리
라고 하면 너! 뛰어 내릴 수 있어?"

아이린의 질문에 테리우스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대답한다.

"내가 미쳤냐!!!!"

그의 대답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아이린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

"이봐!! 그런 시 덥지 않은 말로 괜시리 시간 끌지 말고 빨랑 뛰어 내려!! 여긴 웬만한 소리가 바
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아 시끄럽게 구는 건 상관없지만 시간별로 순찰 돈단 말야!!"

"알았어!! 뛰면 되잖아!!!"

테리우스에게 큰소리 한번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뒤쪽으로 달릴 거리
만큼 걸어갔다. 그리고 쉼 호흡을 크게 세 번하고 두 눈을 꼭 감은 상태로 앞에 마치 길이 있다
고 상상하며 질주했다.

'하나! 둘! 셋! 으아아앗!!!'

공중에 붕 뜨는 기분은 순간이었고 찬바람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는 듯한 기분이 일었다. 그 찰
나에 턱하니 깃털처럼 부드러운 느낌이 그녀의 몸을 감싸듯 붙잡았다.

테리우스는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린을 바라봤다. 자신의 기억 속에 그녀
를 처음 봤던 것은 아리스샘터 그의 아지트 동굴이었고 짧은 입맞춤이 그녀의 첫인상이다. 그
런데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 같은 연인의 기분이 드는 것은 왜 인지 그로서도 혼란
스러웠다.

그렇다고 지금 자신 앞에 이렇듯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를 믿을 수는 없다. 아주 오
래 전에 자신의 기억을 삭제하고 음모를 꾸몄던 흑마법 저주 사건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때도 마나아카데미에서 이렇게 기억이 혼미한 틈을 타 그에게 다가왔던 여인 그리고 음모 그
로 인한 벅스칼과의 우정에 금이 갔던 사건. 아직까지도 그 일은 테리우스에게 큰 상처가 된 일
이었기에 아이린을 마냥 믿을 수 없었다.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끌리는 기
분은 어쩔 수 없는 그였다.

"이봐, 무사히 내려왔어…이런, 기절했군."

아이린은 마치 잠을 자듯 기절한 상태였고 그런 그녀를 테리우스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안은 채로 바라봤다.

그녀에 볼이 점점 발그레해지는 것이 그의 눈에 보이고 그녀의 쌔근거리는 숨결이 그의 가슴
에 작게 전해져 깊숙이 파고들었다. 조명 탓인지 그녀의 모습이 좀더 성숙해 보이고 여성스러
워 보인다.

생각보다 그녀의 속눈썹이 길다는 걸 알게 되고 오뚝한 콧잔등이 동그랗게 보였고 그녀의 귀
볼이 두툼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작고 세세한 것마저도 깨닫는 그 순간 왜 이렇게 낯이
익는 것일까?

제발 아이린이 자신을 해치기 위한 음모와는 별개이길 그의 마음이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한
참을 그렇게 아이린의 얼굴을 바라보던 테리우스가 자연스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의 코끝에 닿는 그녀의 머리칼에서 상큼한 사과 향이 잔잔하게 풍겨 전해졌다.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후훗! 내가 제 정신이 아닌 거겠지? 네가 누군
지 정말 궁금해진다…아이린."

테리우스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기억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의
가슴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심장이 더 갑갑하고 터질 듯이 미칠 것 같
은 감정이 일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으음, 여기가 어디야?"

아이린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살며시 뜨면서 중얼거렸다. 아직 머리에 어지럼증이 가라앉지 않
은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던 테리우스가 방금 전 자신의 표정을 재빨리 감추며 말했
다.

"이거야 원, 뛰어내려서 기절까지 하냐? 아주 무거워 죽겠다!!"

쿵!!!!

테리우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린에게 투덜거림과 동시에 그녀를 가차없이 손에서 놓아 버
렸다. 그러자 큰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는 아이린.

"으아앗!!!! 아파!!!! 이게 무슨 짓이야 너!!!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아이린은 아픈 엉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꽤 재미있다
는 듯 테리우스가 바라보다가 다시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시간 없어! 빨리 따라와!"

매정하게 등을 보이며 앞으로 걸어가는 테리우스를 보면서 아이린은 화가 나지만 꾸욱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괜히 성질 부렸다가 정말 자신을 혼자 두고 가면 큰일이니까. 적어도 퇴학 당할
만한 상황에서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었다.

"가…같이 가!!"

테리우스의 뒤를 따라가며 아이린은 마법 도구들이 유리관에 덮여져 전시되어 있는 몇몇 물건
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유리관이 쓰여져 있는 것에는 이름표에 투명 망토라
고 적혀 있었고 화려한 보석으로 점철되어 있는 장갑에는 무적 장갑이라 새겨져 있었다. 그런
물건들을 보자 새삼 마법당에서 자신이 구입했던 마법 옷이 떠올랐고 그러자 아빠 제크가 생각
났다.

지금쯤 레드 드래곤 부모님은 잘 계시는지 안부가 궁금해지자, 아이린은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아이린이 훌쩍거리자, 앞서 걷던 테리우스가 뒤돌아보다 가던 길을 멈춰 섰다.

"흑!흑! 어? 왜 멈췄어? 다 온 거야?"

아이린은 혹시 자신이 울어서 테리우스가 화를 내지 않을까 싶어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로 물었다. 눈물 범벅이 된 눈을 깜빡거리며 아이린이 긴장하며 묻자, 테리우스가 아무런 말없
이 다시 뒤돌아 가던 길을 걸었다.

'왜 울고 있는 거지? 하여간 알 수 없는 여자라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이제 울기까지 하는 거
야!! 이그,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야지.'

테리우스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아이린은 재빨리 눈물을 닦고 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그렇
게 아이린의 첫 등교 날은 테리우스로 시작해서 테리우스로 끝나는 날로 기억되어 버렸다.

*

결국 아이린을 찾지 못하고 밤새 만든 골든 뱃지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세 흑기사들은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도 먹지 않고 아이린을 찾아 학교 건물을 샅샅이 뒤졌더니 그들은
배가 몹시 고팠다. 그래서 아처가 음식을 준비하고 파라도는 수프를 끓이기 위해 장작을 팼으
며 아르테니는 식탁을 차렸다.

"휴, 정말 공주님은 어디로 가신 거야? 돌아오실 때도 됐는데 오시지도 않고…휴, 정말 배고파
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고."

파라도는 자신이 끓인 수프에 큼지막한 고기를 찍어 먹으면서 어울리지 않은 한숨을 내쉬며 말
했다.

"파라도 너야 배가 고픈 걸로 억울하겠지만 대장 마음은 어떻겠냐? 어젯밤 그렇게 고생해서 만
든 골든 뱃지가 별 보람도 없었으니 안 그래? 대장?"

아르테니가 슬쩍 아처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보다는 아이린 공주님이 어디에 계시는지가 더 걱정이야. 여기가 비록 안전 지대라고는 하
지만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셨으니…."

아처는 꽤 시무룩한 표정을 하며 친구들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자 분위
기를 밝게 해보려고 아르테니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한다.

"하하, 별 일이야 있으시겠어? 조금만 더 기다려도 안 오시면 찾아 나서자고 괜히 별일 아니었
는데 소 란 피우는 것도 우습잖아.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아처의 기분이 어쨌든지 간에 배고픔을 채우는데 정신이 없던 파라도는 어느 새 그릇을 말끔
히 비워버렸다.

"꺼억!!! 아! 내가 끓였지만 정말 맛있는 수프야! 더 먹어야겠어. 수프 더 먹을 사람?"

"쯧쯧쯧, 파라도 네가 그래서 가끔 돼지랑 헷갈린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 거야! 지금 음식이 잘
도 넘어가겠다. 공주님이 어디 계시는지도 모르는데."

타타탁탁!!!!! 타닥!!! 타닥!!!

"크하하하!!!!! 아르테니 네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그러니까 배를 두둑이 채워나야
지. 만일에 공주님을 찾아 나설 것을 대비해서 말이야!!!"

탁탁탓탓!!! 타탓!!!

"어이구, 말이라도 안 하면…어? 이게 무슨 소리냐?"

파라도의 말소리와 섞여서 들리는 규칙적인 소리를 들은 아르테니가 주변을 의심쩍은 눈길로
살펴보며 물었다.

"엉? 무슨 소리? 난 아무 것도 못 들었는데? 괜히 들리지도 않은 소리…."

"쉿!!!"

아르테니가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르며 파라도의 말을 막아섰다.

탓탓탓!!!!!

뭔가 부딪치면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세 사람의 귀에 확연히 들리는 순간 그들의 시선이 동시
에 난로가로 집중되었다. 파라도가 수프가 담긴 냄비를 끓이고 있는 장작불에서 이상한 소리
가 난 것이다. 그 소리는 신경을 그슬릴 정도로 작지만 고약한 소리였다.

"파라도 너 대체 무슨 나무를 패 가지고 왔길래 저런 소리가…."

아르테니가 별일 아니라는 듯 파라도의 장작 탓을 하고 있을 때 몸을 굽히고 살핀 아처의 낯이
창백해져갔다.

"가만 이건!!"

콰쾅쾅콰쾅쾅!!!!!!!!!!!!!!!!!!!!!!!!!!!!!!!!!!

아처가 뭔가를 감지하고 중얼거리는 순간 갑자기 굉음소리와 함께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집이
폭발하고 말았다. 밖에서 본 집은 한 순간에 완전히 붕괴되었고 순식간에 그을린 연기가 하늘
로 높이 치솟아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린의 집은 한 순간에 검은 연기만 가득 찬 폐
허가 되어 버린 것이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5장 *123* 학원편(23)

*

혼자 갈 수 있다는 아이린의 말을 일절 무시한 채 테리우스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곳까지 동행
했으니.

누가 보면 마치 테리우스의 집에 아이린이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앞서 걷고 있는 그의 뒤를 그
녀가 부지런히 따라가고 있었다.

마법 도구 전시관에 이어 다른 통로까지 연이어 고생만 실컷 했던 아이린은 괜히 앞서가고 있
는 테리우스가 밉살스럽게 보였다. 그보다 그를 찾아 옥상까지 올라가서 결국 이렇게 사서 고
생을 하게 만든 자신이 원망스럽고 후회되었다.

'히유, 내가 괜히 저 녀석 만날 욕심에 배도 고프고 다리는 아픈데 이게 무슨 고생이람…지금
쯤 흑기사들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겠지? 그래, 조금만 더 참고 가면…아, 정말 다리 아
프다.'

아이린은 더 이상 걸을 힘도 없는 두 다리를 양손으로 매만지면서 조용히 주저앉았다. 점점 눈
앞에서 멀어져 가는 테리우스를 불러 세울 목소리도 나지 않았다.

"혼자 가던지 말던지…아, 배고파…."

앞서 가던 그가 뒤에서 그녀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무슨 일인가 하고 뒤돌아보니 그와 좀 떨어
진 거리에서 주저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얼굴에 심술을 가득 넣어 가지고
자신을 원망하는 눈초리를 지니고 말이다.

'쯧쯧, 저렇게 약해 빠져 가지고 어디에 쓰겠어!'

아이린을 향해 걸으면서 테리우스는 그녀의 허약함을 마음속으로 질책했다. 그러나 자신이 학
교 내에 만들어놓은 비밀 통로에 대해 그 스스로가 너무 무디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이린이 아닌 다른 여학생이 그를 따라 비밀 통로를 경험했다면 도중에
실신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체력을 잡아먹는 비밀 통로인 것을 정작 테리우스 자신이 너무 쉽
게 넘나들었기 때문에 아이린이 지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정도로 지치면 앞으로 학교 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턱 하지 자신 앞에 걸어와 약이라도 올리려고 한 것처럼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는 테리우스의
태도를 보니 아이린은 빠졌던 힘이 갑자기 솟아나는 것 같았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 지쳐서 힘든 게 아니라 단지…."

테리우스 앞에서는 언제나 힘이 솟으며 전투 의지가 자연스레 불타는 아이린은 잘 나가다가 갑
자기 말끝을 흐렸다.

"단지 뭐?"

자신의 물음을 되묻는 테리우스에게 아이린은 대답을 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렇게 테리우스는
응시하던 중에 아이린은 새삼 그의 머리칼이 예전에 비해 많이 길어졌다는 걸 발견했다.

"…단지 배가…고파 힘이 없는 거라구…."

한끼 걸렀다고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아이린의 눈빛에는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
어나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테리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는 그런 그녀에 대해 정말 재미있는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하핫!! 아주 골고루 하셔. 자! 업혀!! 대신에 너희 집에 가면 나도 저녁 한끼 먹을 수 있는 거
다! 알았지?"

생각지도 않았는데 테리우스가 대뜸 그의 등을 그녀 앞에 내보였다. 그러자 아이린은 빨리 집
에 가서 배를 채우고 싶은 생각에 재빨리 그의 등에 업혔다. 넓고 듬직한 그의 등이 편안하고
안락했다.

"좋아!! 아처가 만들어 준 음식이 정말 맛있거든."

"먹는 거 너무 밝히는 군."

"뭐?"

"아니, 생각보다 무겁다고."

"무겁거나 말거나 너 힘센 거 다 아니까 빨랑 집에 가기나 하셔."

"쳇, 내가 말을 말아야지."

테리우스가 낮게 중얼거리며 그녀를 업고 지름길을 통해 그린 하우스가 지역으로 향했다.

*

가이루덴 왕국의 전투 병사들이 땅거미가 지고 있을 때 성에서 천천히 빠져 나와 메틴 왕이 있
는 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고 얼굴에는 살기로 가득해 곧바로
전투를 벌이려는 기세였다. 곧 다가올 어둠에 대비해 각자의 손에는 굵은 횃불이 들려져 있었
고 반대쪽 허리춤에는 장검이 채워져 있었다.

그들이 궁 안으로 무사히 도착하자, 전투 병사들을 이끌고 있던 장군이 가이루덴 왕국을 상징
하는 국기를 힘껏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제군들!!!! 드디어 역사를 바꿀 시간이 당도했도다!!!! 우리 가이루덴의 위대함을 곧 대륙 곳곳
에서 알게 될 것이다!!!!!!"

장군의 외침에 병사들의 표정은 더욱 차갑고 잔인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들은 결코 명령 없이
는 외침하나에도 동요하지 않는 병사들이었다. 이에 장군은 꽤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
어 보였다.

그때 궁의 문이 열리고 붉은 융단이 쫘악 깔리면서 키 작은 왕이 황금 의자에 앉은 채로 등장했
다.

그러자 장군이 말에서 내렸고 동시에 약 삼천 명의 전투 병사들도 자동으로 그들의 왕 앞에 부
복했다.

"위대하신 메틴 왕이시여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명령만 하십시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전투 병사들의 모습에 메틴 역시 꽤 만족스러운 듯 했
다.

"역시 캄 장군답군. 뭐, 결과를 봐야 알 수 있겠지만 내 보기엔 이번 전투에서는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겠어. 테리우스가 없다고 해서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제 슬슬 세바스찬도 움직일 테
고 지금부터 조심스럽게 작전을 수행하도록 하라."

"네, 알겠습니다! 위대하신 메틴 왕 폐하!!!"

"지금 지하 터널을 이용해서 출발하도록 하라!! 그리고 시시때때로 보고하는 것도 잊지 말도
록."

"네!! 폐하!!!"

캄 장군의 절연한 표정을 보면서 절대 신임을 하는 태도로 메틴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
고 메틴 왕이 동쪽 방향의 수문장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궁의 일각에 벽으로 이루어졌던 곳에 커다란 터널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캄 장군은 기다
렸다는 듯이 전투 병사들을 이끌고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삼 천명의 병사들이 모두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메틴 왕은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데본 제국을 덮쳐봤자, 달걀로 바위 치기지. 하지만 아리스샘터라는 약점을 비집고
들어간다면 크하하하하!!!!! 테리우스 네 놈이 제 아무리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을 지녔다고 해
도 천하무적은 아니란 소리다!!!! 기필코 내 앞에서 네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 기
다려라!!! 널 위한 아주 멋지고 긴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크크크하하하하!!!!"

어둠의 장막이 깔린 하늘 위로 음흉한 메틴 왕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테리우스의 등에 업혀서 배고프다고 칭얼대던 아이린은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앞에서
너무 긴장을 하지 않는 것도 조금은 기분 나쁜 일이란 생각도 들었다.

"대체 날 뭘로 보고 툭하면 자는 거야…여튼 눈 마주치면 싸우고 안 마주칠 때는 자는 군."

그가 낮게 투덜거리며 거의 도착한 그린 하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아이린의 집이
있어야 할 곳에 그녀의 집이 없다. 다만 거무튀튀한 그림자가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
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집 전체가 폭발이라도 한 듯 까맣게 타서 절반 이상이 재로 변해 있고 뼈대
만 겨우 남아 있었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테리우스의 놀란 목소리에 아이린이 한쪽 눈을 비벼대며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
는 아직 눈앞에 있는 검은 형체의 것이 자신의 머물었던 안식처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뭐야? 왜 집으로 안가고 여긴 어디야 테리우스?"

아이린의 물음에 테리우스는 자신이 주소를 잘못 찾았나 싶어 그녀에게 되물었지만 역시 이곳
은 그녀의 집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너무나 멀쩡했던 아이린의 집.

"아이린! 여기가 너희 집인 것 같은데."

테리우스의 말에 아이린은 잠이 확 달아나 버렸고 그의 등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
다.

*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5장 *124* 학원편(24)


*

아이린은 무너진 집 앞으로 성큼 걸어나갔다. 뒤에서 테리우스가 아이린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녀의 귀에는 지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맙소사! 어떻게 된 거야!…."

순간 아이린의 머릿속에는 세 명의 남자들이 차례대로 떠올랐고 그들에게 혹 최악의 사태가 벌
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을 하고 까만 재를 손에 묻힌 채로 굳어버린 아이린에게 테리우스
가 다가와 속삭였다.

"괜찮은 거야?"

"……."

자신을 가족처럼 아껴주고 보살펴 준 아처와 파라도 그리고 아르테니가 혹 이곳 어딘가 까만
재와 함께 쌓여있을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자꾸만 아이린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다.

두려움으로 굳어 버린 무표정한 그녀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들었고 동시에 입가에 슬
픈 미소가 번졌다. 갑작스런 충격에 슬픔 목소리를 토하기보다는 어이없는 미소가 그려진 것이
다.

"그들은 내겐 가족과 같은 친구들이야…그들이 죽을 리 없어…내 친구들은 강해…강하다구 테
리우스!"

테리우스의 품에서 아이린은 힘없는 목소리로 반쯤 넋이 나간 몽롱한 눈동자로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안고 있는 테리우스의 가슴도 쓰라리고 아팠다.

아리스샘터에서 아이린이 떠났을 때 세 남자와 동행했다는 것은 서류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
다. 그들이 한때 카나 황국의 흑기사들이었으며 지금은 아이린의 선택에 의해 아카리나스의 수
행원이 되었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다. 왕족이나 귀족들이라면 누구나 옷의 장식처럼 달고 다
니는 수행원의 존재가 아이린에게는 이렇게 소중하다는 사실은 조금은 질투가 나기도 한다. 아
니,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로 잠시 혼란을 맛본 테리우스.

아이린의 등을 토닥거리던 그가 그녀를 자신의 품에서 밀어내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아직 시체를 찾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어린애처럼 눈물이나 흘리다니…쳇, 창피하지도 않
냐! 일단 시체부터 찾아봐야 할 거 아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이린을 내버려 둔 채로 테리우스는 이곳 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
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린이 두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맞아, 아직 그들이 죽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시체를 찾은 것도 아니잖아! 맞아!"

아이린은 눈가에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의 시체를 테리우스가 먼저 찾아 그들의 얼굴을 보
게 되면 예전에 만났던 기억이 되살아 날 수 도 있다는 점을 아이린은 지금 잠시 잊어버리고 있
었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그녀는 없었다. 오직 그들의 생사만이 그들이 살아있기만을 바라는 생
각과 마음만 가득할 뿐이다.

발에 밟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왠지 기분 나쁘게 들렸고 손에 묻은 까만 재처럼 아이린의 마
음도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벌써 한 시간 채 찾아 헤매고 있지만 세 남자의 자그마
한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점점 찬 기운이 들기 시작하자, 아이린의 몸이 걱정된 테리우스
가 그녀에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무래도 둘 중에 하나일 것 같다. 네 수행원들이 운 좋게 이 집이 폭파할 때 집에 없었거나 아
님 까만 재가되어 시체 흔적조차 남지 않았거나 여튼 이 밤에 우리 둘이서만 찾아보는 것도 무
리야. 내일 수사를 의뢰하도록 할 테니 전문가들에게 맡기도록 하고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어."

"싫어! 여기 있을 거야. 죽을 리 없어…."

아이린이 고개 숙이며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자, 테리우스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며 자신의 눈을 바라보도록 했다. 그리고 명령하듯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죽은 자들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만약 그들이 살아있다면 네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지 않겠어? 괜히 여기서 고집 부리고 추위에 떨다가 병이라도 나면 그럼 이런 재
수 없는 일을 벌인 자들을 누가 잡을 수 있겠어!! 아이린,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있지도 않은 나
라를 재건할 수나 있겠냐!!"

테리우스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의 말은 너무나도 옳았다. 그런데 그 옳은 사실이 아
이린은 미치도록 싫고 부정하고 싶다. 자신은 지금 너무나 두렵고 슬펐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
를 일으킬 여유도 없이 단지 그녀의 소중한 친구들을 잃었을 수도 있다는 상실감으로 가득한
것이다.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되려 큰소리로 호통을 치는 테리우스가 미웠고 그의 말에 따라
야하는 자신이 싫어진다. 힘없는 자신의 존재가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린의 가녀린 목소리가 끝이 갈라진 채로 테리우스의 귀에 들려왔다.

"네 말대로 할게."

"소리 질러 미안, 하지만 방금 한 말에 대해 후회하진 않는다. 그만 가자!"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녀를 안아 든 그의 손은 따뜻했다. 온몸에 힘이 풀려 움직일 힘조
차 나지 않은 아이린을 품에 안고 테리우스는 아무런 말없이 그의 집으로 향했다.

*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린 집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세 남자.

그들은 지금 나란히 집 주변에 울창하게 자리잡고 있던 느티나무의 높은 가지에 나란히 매달
린 채 까만 얼굴과 몸을 한 채로 의식을 잃고 있었다. 어떤 폭약을 사용했는지 집에 있던 그들
은 폭발과 함께 집밖으로 튕겨져 나간 것이다. 이들이 만약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테리우스의
추론 중 하나대로 까만 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카나 인이었다.

덕분에 온몸을 까맣게 그을린 것 외에는 별다른 타격은 입지 않게 되었다. 단지 잠시 잠깐 의식
을 잃었을 뿐이다. 대롱대롱 굵은 가지와 가지 사이에 낀 채로 매달려 있는 세 남자의 모습은
가히 광대들이 쇼를 보여주기 위해 연출했다고 해야 더 자연스러울 광경이었다.

"쿨럭!!! 케헤헥!!!! 읔!!! 뭔가 쿵!! 한 것 같은데 뭐냐? 우와왓!!! 이게 뭐야!!!"

가장 먼저 의식을 차린 파라도가 가위에 눌린 듯 숨막힌 기분을 안고 중얼거리다가 눈을 뜨고
경악을 했다. 몸은 공중에 매달려 있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은 어둡다고는 하지만 분명 산
산이 부서진 자신들의 방금 전 아늑했던 집이 틀림없었다.

"으윽, 머리야! 이런!!! 우리가 지금 공중에 매달려 있는 건가?"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아르테니가 두 번째로 깨어나 자신의 상황을 살피면서 말했다. 가장 안
쪽에 끼여 있는 아처는 아직 의식 불명 상태였다.

그러나 그도 곧 지상에서 깨어나게 되었으니 파라도가 몸부림치는 덕에 세 남자는 부러진 가지
에 그대로 엮인 채로 땅에 곤두박질치게 된 것이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5장 *125* 학원편(25)-1

*

골든 하우스에서 가장 넓고 큰 저택에 머문 하인들은 낮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이
유인즉 저택의 주인으로부터 학교에서 급하게 온 전갈 때문이다. 전갈의 내용은 주인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라는 메모였다. 덕분에 하인들은 부산스럽게 집 단장을 마치고 파티의 필요한 인
력과 장식 그리고 음식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러나 초청한 손님들까지 모두 참석해서 파티
를 즐기고 있는데도 정작 명령을 내린 주인에게서는 밤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으니.

제로이드와 바이사코는 그들의 친구를 대신해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더러 귀찮은 일을 담당해
야만 했다.

"테리우스가 거짓말로 오늘이 생일이라고 그 여자에게 말해 놓고 나서 이 난리를 피우고 있다
는 게 사실이냐? 헤, 그럼 역시 내가 말한 게 확실히 맞는 거네 그렇지 제로이드? 덕분에 황금
안장 이 형님이 잘 쓰고 계신다! 헤헤!!"

제로이드가 들고 있던 와인을 쭉 한번 들이키며 양쪽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리다 펴면서 대답한
다.

"글쎄, 내가 그녀를 만나서 직접 들은 말이니까 뭐 사실이겠지…테리우스가 이 정도로 그 여자
에게 빠졌다는 건 좀 우습긴 하지만 말야. 단지 분명한 건…."

제로이드가 말꼬리를 흐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아이린의 해맑은 웃
음을 떠올렸다. 친구의 표정을 주시하면서 바이사코가 되묻는다.

"분명한 건 뭐?"

"흐음, 그 여자가 그럴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지."

"호오, 그렇게 미인이냐?"

"뭐, 우리가 봐온 미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아주 신비한 매력을 지닌 여자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
다."

"헤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더욱 어떤 여자인지 궁금해지는데?"

"너도 보면 바로 알게 될 거다."

두 친구가 아이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 현관에 하인들이 몰려들어 분주하게 움직이
기 시작했다. 소식 없이 늦은 주인이 검은 재를 여기저기 묻힌 엉망인 몰골로 같은 모양새의 여
자와 등장했기 때문이다. 테리우스는 곱게 단장한 왕족과 귀족 손님들에 관해 선 아랑곳하지
않고 우선은 아이린을 따뜻하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정문으로 들어선 것이다. 정확히 말하
면 그는 자신이 오늘 생일 파티를 준비하라고 했던 전갈에 대해선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등에 업혀 온 아이린은 어느새 세상 모르게 잠이 들어 있었고 그녀의 볼에는 눈물자국과
검은 재가 얼룩져 있었다.

"뭘 그렇게 꾸물거리고 있어! 빨리 따뜻한 물과 음식을 준비해서 내 방으로 가져오도록 해!! 헌
데 다들 내 집에 모여서 뭘 하고 거야!!"

일그러진 표정으로 눈빛을 내리깔며 소리지르는 테리우스의 기선에 집사가 주눅을 들어 기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다.

"저…그것이 주인님께서 생일 파티를 준비하시라고 전갈을 보내셔서 그래서 저희가……."

집사의 말에 테리우스가 위아래로 눈동자를 잠시 굴리더니 생각이 난 듯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 이상의 표정 변화는 없는 채로 입을 열어 말한다.

"그랬었군. 지금은 바빠서 파티에 참석하기 힘드니까 손님들 접대는 친구들에게 하라고 일러둬
라. 그리고…."

테리우스가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그렇게 해놓은 것에 대해 칭찬을 받고 싶은 듯 집사가
중간에 말을 끊으며 대답한다.

"아, 그렇지 않아도 바이사코님과 제로이드님께서……예, 죄송합니다 주인님. 말씀 계속하십시
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눈빛으로 기선제압을 하는 테리우스에게
곧바로 꼬리 내리는 태도를 보이며 집사는 깊숙이 몸을 숙였다.

"쩝, 이 녀석 목욕 수발들 하녀들과 그 후에 따뜻한 음식들 준비하고 쓸 방도 하나 준비해놓도
록 해."

테리우스가 명령을 다 내린 후에 아이린은 등에 업은 채로 발걸음을 하려고 하자 곁에 서 있던
하인이 부축하려고 움직였다. 그러자 재빨리 그를 밀치며 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도움을 요청했나?"

"아…아닙니다."

"건방지게 함부로 나서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잔뜩 긴장에 떨고 있는 집사와 하인들을 등지고 걸어가면서 테리우스가 투덜거렸다.

"쳇, 대체 여기 집사와 하인들은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건지 쓸데없는 참견은 딱 질색인데 계속
저러면 휴, 피곤한데…이 녀석은 하여튼 기댔다 싶으면 세상 모르고 자는군."

*

영문도 모르게 테리우스의 한바탕 엄포에 놀란 하인들과 그 주변 가까이 있던 왕족과 귀족들
이 일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파티의 주인공 테리우스보다 그의 등에 업힌
의문의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아이린의 모양새가 온통 검은 재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
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던 바이사코와 제로이드에게 집사가 달려와 주인의 말을 전했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하여간 녀석 변덕은 알아 줘야한다니까. 캬악! 좋다."

바이사코가 핀잔 어린 소리를 한마디 한 후, 한 손에 들린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벌써 여
러 잔 홀짝거렸는지 얼굴이 붉은 화색이었다.

"후후, 덕분에 파티도 하고 아름다운 숙녀들도 만나고 좋지 뭘 그래…흠, 일이 점점 더 재미있
어지는데 테리우스가 여자를 등에 업고 왔다니 하하!!"

*

자신의 방에 도착한 테리우스는 우선 그의 침대에 아이린을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 그의 뒤
를 따라 목욕을 준비하는 하녀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아주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움직
임이었다.

목욕을 할 타원형의 통과 따뜻한 물 그리고 고운 비누 향이 테리우스의 방에 하나 둘씩 자리잡
아 갔다.

삼십여분정도가 지나자, 하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여자가 손에 타월을 얌전히
들고서 테리우스에게 다가가 이야기했다.

"주인님, 아가씨 목욕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물도 따뜻하게 데워진 상태로 보온 중입니다. 아
가씨를 지금 제가 깨울까요?"

다소곳한 늙은 하녀의 목소리에 테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주시하다가 다시금 아이린의
얼룩진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아니, 다들 삼십분 정도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내가 다시 부르면 들어오도록 해. 이 녀석이
지금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고 싶지가 않군 그래."

^0^* 웅, 너무 많이 늦었죠...죄송해요...정말루....란님...그리고 여러 독자님들..
기다려주셔서 고맙고 타일러 주셔 고맙고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고....ㅜ.ㅜ......
돌아왔다가 또 잠수해 버린 결과가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5장 *125* 학원편(25)-2

주인이 아이린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조용히 대답하자, 늙은 하녀가 눈짓과 손짓을 하며 함
께 온 하녀들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모두가 나간 후에도 테리우스는 말없이 아이린
의 얼굴을 바라본 채 정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새하얀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그녀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검게 그을린 것처럼 얼룩진 아이린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낸다. 테리우스의 손이 한번씩 스쳐 지나 갈 때마다 그녀의 여린 숨소리가 그의 손끝으로
전해져옴을 느낀다.

갑자기 그녀를 꼬옥 품에 안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만을 향하며 그녀의
마음 속에 온통 그만이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소유욕이 불거져 나왔다. 장난스러운 감정인 줄
만 알았던 것이 일순간 그에게 진지한 사랑의 감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머릿속
과 마음에 꽉 채워진 그녀의 존재가 부담스럽기는커녕 사라져버릴까 두렵기까지 했다. 그녀의
얼굴을 닦아내던 수건을 꽉 쥐더니 그가 숨이 막혔던 것처럼 답답한 마음의 한숨을 터트렸다.

"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공주로 신분이 불분명한데
다가 모든 게 수수께끼 같은 여자다. 어쩌면 두 번째 흑마법 저주와 같은 악몽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런 생각을 지니고 아이린에 대해 어느 정도 경계선을 긋고 있으면서도 그러면서
도 그녀에게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래도 결론은 그녀가 자신의 곁
에서 자신이 눈에 보이는 곳에 항상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아, 아이린 너 때문에 내가 정말 미치겠다……."

그는 아이린에 대한 그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희미한 기분 탓에 잠시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더욱 뒤틀리게 하는 것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계속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때 아이린이 몸을 뒤척이다가 살며시 눈을 떴다.

"하아앙! 여기가 어디야?"

자신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 천연덕스럽게 하품을 하며 물어보자, 그녀가
왠지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하품하는 모습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귀엽게
느껴졌다.

"쳇, 어디라니 내 방이지…널 업고 오느라 내가 얼마나 애 먹은 줄 알아?"

테리우스는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은 채 의연한 태도로 평소 그녀에게 빈정거리는 듯한 말
투로 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린.

어딘가가 어색해 보이는 듯한 그의 모습을 이리저리 관찰한다. 멋쩍은 듯 천장을 바라보고 딴
청을 피우면서 은근슬쩍 뒤로 손을 내빼고 있었으니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닦아내고 있던 수건
이 쥐어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 옆 벽면에 걸려진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아이린이 베시시 얼굴에 미
소를 걸치다가 심술난 표정으로 바꾸어 테리우스에게 투덜거렸다.

"이게 뭐야 테리우스 내 얼굴을 닦아주려면 양쪽 다 닦아내야지 이렇게 한쪽만 닦아내면 보기
흉하잖아…업고 왔다고 이런 식으로 약올리다니 너도 정말 못 말려."

"뭐?"

아이린을 제대로 바라본 테리우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혼자 감정에 잠시 허우적거리느라 그녀
의 얼굴 한쪽만을 닦아낸 것을 깨달았다. 반쪽은 검게 얼룩진 얼굴이고 다른 한쪽은 새하얀 그
녀의 얼굴빛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나의 얼굴이 둘로 나뉘어진 듯 음양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튀어 나왔다.

"푸하하하하!!!!!!! 너 정말 모습이 크큿…하하하하하!!!!!"

아이린도 자신의 모습이 웃겼는지 그의 웃음 뒤로 잠시 따라 웃었다.

"헤헤!! 하하하!!!! 어휴, 그만 웃고 물수건이나 이리 줘! 이런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창피하단 말야."

아이린이 침대에서 일어나 테리우스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음, 싫어. 필요하면 내게서 뺏어가 봐?"

말과 동시에 그녀에게서 재빠르게 멀리 떨어져 가는 테리우스. 그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아이
린이 입술을 비죽거리고 인상을 그었다.

'저 녀석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딱 그런 표정인데 뭐…에휴, 세 살 난 어린애도 아니고 가
끔 테리우스의 정신연령이 궁금해진다니까.'

아이린은 허리춤에 두 손을 올려놓으며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테리우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수건을 가지러 오면 안 주고 약올리겠다는 태도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정말 어린
애처럼 귀여웠다.

"테리우스,"

자신의 태도에 약오를 것 같던 그녀의 목소리가 의외로 담담했다.

"왜?"

"정말 유치해."

"뭐?"

"유치하다구."

"야! 너 지금 뭐라고 그러는 거냐! 유치하다니……."

일단 성질은 부렸지만 그녀의 말대로 지금 자신의 태도가 유치하다는 것을 그도 깨달았다. 잠
시 뭔가에 홀려서 그녀와 장난치고 싶다는 생각에 시 덥지 않은 제안을 했다니 쥐구멍이 있다
면 숨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흐흠흠, 뭔가 착각했나본데 이건 그냥 네가 아직도 무너진 집 때문에 심란해 할까봐…그래, 그
럴까봐 내가 긴장을 풀어주려고 농담한 거야 알겠어?"

"하, 그래?"

아이린에게 다가서며 테리우스가 다짐을 받아내는 것처럼 다시 대답했다.

"그렇다니까!!!"

"에효, 알았어. 귀청 떨어지겠네 왜 소리는 질러."

"쳇, 네가 안 믿으니까 강조한 거야. 자, 보기 흉하니까 빨리 마저 닦아내라."

테리우스가 수건을 쭈욱 내밀면서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려버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아이린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작게 대답한다.

"싫어."

"뭐?"

아이린의 답변에 테리우스가 얼굴을 되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저 여자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하는 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너 지금 나더러 장난한다고 지적해놓고 이번엔 네가 장난하냐?"

"아니, 처음 일 벌린 사람이 마무리도 해야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네가 닦아내다가 멈췄
던 거잖아. 그러니까 네가 마저 닦아줘야지 않겠어?"

"아…."

그녀의 말에 테리우스의 기분이 다시 좋아지려고 한다. 저절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질 때 아
이린이 두 눈을 감으며 그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쳇, 정말 콩깍지라도 씌운 건지 이런 이상한 얼굴을 해도 예뻐 보이다니 확실히 내가 제 정신
이 아니야.'

그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마저 깨끗하게 닦아내 준다. 그런 느낌이 아이린은 참 따뜻하
고 포근했다. 조금은 떨리는 듯한 테리우스의 손길이 아이린은 마냥 즐겁게 느껴졌고 이 순간
이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한편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늙은 하녀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제로이드님 바이사코님 이러시면 나중에 제가 곤란해집니다. 그만 문에서 물러서 주시는
것이…."

늙은 하녀의 이러한 태도는 데본 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례한 일에 속하겠지만 당사
자는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곳에 고용된 하인들은 모두 마야 인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도 모른다. 마야 인들은 예법을 매우 중시여기는 전통을 지녔기 때문에 왕족이
라 할지라도 그 예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되면 아랫사람이 충언을 하는 것은 극히 평범한 일
에 속했다.

지금 주인의 문 앞에서 짓궂은 표정을 보이며 방안의 소리를 엿듣고 있는 전혀 왕족처럼 행동
하지 않는 두 사람에게 늙은 하녀가 한 마디 하자, 이들이 그녀를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에이, 뭘 그런 걸로 곤란씩이나 마가린 자네도 함 같이 들어보라고 크크크 저 녀석이 얼마나
지금 재밌게 하고 있는지 내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고 싶지만 크읏, 겨우 참고 있는 거라네. 크
크크!!!"

"쉬잇, 조용히 해 바이사코 안에서 눈치채겠다."

"참, 마가린 자네가 마야 인이라고 했지?"

바이사코가 목덜미를 쓰윽 한번 멋쩍은 듯 매만지면서 묻자, 늙은 하녀 마가린이 고개를 나직
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흠, 역시 마야 인들은 분위기가 좀 다르군. 데본 제국이었다면 아마도…."

"쉿, 조용히 해. 떠들 거면 좀 떨어져 저쪽에서 말하던지 이러다 들키면 테리우스 성격에 가만
있을 거 같아 미리 조심해야지."

제로이드가 손을 휘저으며 바이사코를 나무랐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제로이드가 문
에서 떨어져 나와 마가린에게 다가와 물었다.

"헌데 목욕 준비하고 대기 중인 건 알겠는데 그 다음에 다른 명령은 없었나? 뭐 파티에 참석한
다는 그런 비슷한 말은 없었어?"

"네,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라는 말씀이외는 없었습니다."

"흠, 그래? 이봐, 바이사코 나랑 갈 때가 있어 따라와 봐."

제로이드가 바이사코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발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친구를 잡아채 가는
그의 눈동자가 뭔가를 꾸미는 듯한 눈빛으로 반짝거렸다. 입가에 미소를 짓는 것이 장난스러
운 일인 듯 싶었다. 그런 제로이드의 얼굴을 보고 바이사코는 친구의 행동에 궁금해지기 시작
했다.

"여기는 어떡하고? 아니, 무슨 생각이 들어서 이러냐 너?"

"여기 있어봤자 안에서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알아내는 건 한계가 있어 밖으로 끌어내서 둘의 표
정을 봐야지. 날 따라와 내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까."

"호, 그래?"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모퉁이를 돌아서는 뒷모습까지 느긋하게 바라보던 마가린이 고개를 천
천히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린다.

"정말 알 수가 없는 분들이야. 왕족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으니 말이지 아니면 너무 쾌활하신
분들이던지. 이 늙은이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군."

늙은 하녀는 마야 왕국에서 특별히 마나아카데미에 들어온 데본 제국의 왕족들을 위해 보낸 왕
실 하녀였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으로 데본 왕족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 하나가 힘든
일이었다.

예법에 있어 가장 잘 정립 된 마야 왕국의 왕실 하녀였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녀가 지
금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데본의 왕족들은 마야 왕족들처럼 충언이나 조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늙은 하녀의 등뒤로 듬직하게 서 있는 기둥 뒤에 그림자 하나가 스윽 지니 갔다. 긴 보라 빛 머
리칼이 마지막 꼬리인 듯 살포시 휘날린다. 바로 가이루덴 왕국의 공주 일라이저였다.

'흥, 내 직감이 맞는다면 테리우스의 등에 업혀 온 것은 분명 그 여자일거야. 아이린!'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6장 *126* 학원편(26)

③말괄량이프린세스 6장 가난한 공주

테리우스의 생일 파티는 제로이드와 바이사코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화려한 언변
으로 뭇 젊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로이드 그리고 유쾌한 모험담으로 귀공자들의 시선
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바이사코. 마치 이 생일파티의 주인공이 두 사람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
다.

"역시 우리들은 어딜 가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니까 하하하!!!"

바이사코가 걸쭉한 목소리로 시원스레 웃으며 어깨에 닿은 머리칼을 슬쩍 쓸어 넘겼다. 이에
팔짱을 낀 채로 여성들에게 매력적인 미소를 선사하던 제로이드가 작게 응대했다.

"남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보단 나처럼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어야지."

"이그, 그 말들으니 괜히 기분이 나빠지려고 그러네 쩝."

"하하, 농담이야."

"그것보다 아까 이야기한 건 잘 처리 된 거냐?"

바이사코는 조금 전 밀실에서 제로이드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꺼내 물었다. 그러자 그가 한쪽
눈을 싱긋 감으며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당연하지. 이 제로이드의 안목을 믿으라고!"

"흠, 아무리 생각해도 테리우스가 의상 때문에 파티에 나올 거라는 생각은…영 안 드는데……."

"어허, 날 끝까지 믿으라니까……하하하!!! 이렇게 좋은 음악이 흘러  나오는데 이렇듯 아름다
운 숙녀 분을 그냥 둘 수는 없죠. 저와 함께 춤을 추시겠습니까?"

바이사코의 물음에 대답을 다 하기도 전에 제로이드는 발걸음을 옮기며 제일 먼저 눈이 마주
친 여자에게 춤을 권유했다. 남자가 내민 손에 다소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붉은
머리칼의 여자.

그녀는 함께 있던 친구들에게 못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은근히 자신의 미모를 과시하는
듯한 기분에 빠진 채 제로이드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두 사람이 홀에 나가 다정한 연인처럼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여자의 일행들이 한마디씩 이
야기한다.

"한 동안 새로 온 가이루덴의 공주 때문에 거의 기가 죽어지내더니 오늘은 제로이드 덕분에 이
자벨라의 자존심이 좀 회복되는 거 같지 않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난 좀 걱정이 되기도 해."

"무슨 걱정이 된다는 거야?"

"그…그게…."

세실리아는 말을 머뭇거리며 고개를 내리는 동생 레베카의 행동에 답답한 듯 되물었다. 언제
나 동생 레베카는 그녀의 말이며 행동으로 하여금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곤 했었다.

"레베카, 좀 똑똑하게 말할 수 없겠니? 너랑 이야기하다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

파티 음악에 파묻혀 다른 이들에게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전달되진 않았지만 레베카에게는 똑
똑하게 들렸다. 왜냐하면 레베카의 작은 귀를 세실리아가 꼬옥 부여잡고 그녀의 귀에 바로 대
고 핀잔을 주었으니까 말이다.

"아…아, 언니 귀가 따가워…."

"흥, 아픈 건 빨리도 말하는구나. 또 혼나기 전에 말 제대로 못 하겠어."

"응, 그러니까 내 말은 제로이드님은 데본 제국의 왕족인데 저 모습을 일라이저님이 보시면 이
자벨라를 그냥 두지 않을 거 같다는…그런 뜻이었어."

동생 레베카의 말을 들은 세실리아가 공감을 한다는 듯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둔한 줄만 알았더니 가끔씩 머리가 돌아갈 때도 있구나. 내 생각에도 저 모습을 보면 일라이저
의 눈에 이자벨라가 좋게 보일 리 없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그 점이 되려 우리에게는 잘 된 일
일수 있어."

세실리아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 가는 연회장의 음악소리에 파묻혀 갔다. 파르칸 왕국
의 두 공주 세실리아와 레베카가 손 부채로 입을 가리며 밀담을 주고받는 사이 그들 뒤쪽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온 여인은 바로 가이루덴 왕국의 일라이저였다. 무슨
일인지 얼굴에 불만이 가득 차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이 참, 무슨 일인지 더 알아 볼 수 있었는데 그 늙은 하녀 때문에 헛걸음만 하게 됐잖아."

일라이저는 자신을 크게 꾸지람하던 늙은 하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또 다시 불쾌한 마음을 가져
야만했다. 테리우스와 아이린의 방을 기웃거리다가 늙은 하녀 마가린에게 호통을 들은 것이
다.

마가린은 상대가 가이루덴의 왕족이라는 신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법을 내세우며 일
라이저를 꾸짖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왕족의 신분으로 몰래 방을 염탐하다니요! 이게 대체 어느 나라 예법이란
말입니까! 그만 정중히 말씀 올릴 때 돌아가시지요.

나직하지만 강조하는 억양이 아직도 일라이저의 머릿속을 맴돌아 두통을 일게 만들었다. 어느
새 무도회 홀에 들어선 그녀는 자신의 수하로 거닐 던 세실리아와 레베카가 있는 쪽으로 유유
히 걸어온다.

"너희들 나 좀 따라오도록 해!"

등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세실리아와 레베카가 펄쩍 놀라 돌아본다.

"어머, 일라이저님!"

"…일라이저…님."

*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한참을 서로 장난을 치며 엎치락뒤치락 거리다 아이린이 그만 테리우스
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일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맴돌았고 왠지 모를 어색함에 휩싸이게 되
었다.

아이린이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빠져 나오려 들었지만 테리우스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테리우스."

좀 전과는 달리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한 아이린은 그런 자신의 느낌이 못내 부끄러운 듯 행
여 테리우스에게 들킬까봐 다시 한번 그의 가슴을 밀어 제치며 말했다.

"테리우스 갑갑해 장난 그만하고 놔줘."

"싫은데."

바둥거리며 자신에게 부탁하는 아이린의 모습에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테리우스가 대답했
다.

"뭐? 싫다니 무슨 뜻이야! 이거 놓지 않으면 화낼 거야."

테리우스의 손이 아이린의 팔을 꽉 붙든 상태로 그녀가 빠져나가려 할수록 점점 조여왔다. 그
리고 그녀와 그 사이의 간격도 점점 좁혀져 갔다. 아이린이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테리우스
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야! 너 정말 이럴 거야!"

"어쭈, 야? 이제 막 나가는구나. 흠, 네가 벌벌 하는 모습을 보니 더 놓아주기 싫은 걸? 하하
하!!!"

"제 정신이 아니야.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면서 지금 이런 장난을 하는 게 재미있니?"

아이린은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테리우스이기에 더 화가 났다. 집과 동료들을 모
두 잃어버린 슬픔을 위로해줘도 마음이 좋아질까 말까하는데 녀석은 되려 약을 더 올리고 있으
니 말이다.

"테리우스! 정말 이거 안 놓을 꺼야!! 아프단 말야!!"

아이린이 그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테리우스의 눈동자에 보랏빛이 살
짝 스쳐 지나간 것이 그녀에게 비춰졌다. 도통 무슨 꿍꿍이로 자신에게 이러는 지 알 수가 없었
다.

"좋아, 놔줄게."

"말만 그러지 말고 빨리 놔 줘."

여전히 그녀의 가녀린 팔을 붙들고 있는 테리우스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진지
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대신 조건이 있어."

테리우스의 말에 아이린이 불끈 화가 치밀어 오른 듯 소리 쳤다.

"야! 조건은 무슨 조건! 괜히 장난하지 말고 정말 놓으라니까! 네가 이렇게 하지 않아도 나 충분
히 힘들어."

"흠, 그거야 네 사정이지. 그리고 장난이라니 난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그가 그녀의 귀에 바짝 대고 낮게 읊조렸다. 아이린은 이제 말하기도 지친 상태가 되어 버렸
다.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렇지도 못했다. 그녀의 몸 중심은 이미 그에게 넘어가
있었으니까.

"휴우, 알았어 무슨 조건인데?"

아이린은 이제 그의 장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했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테리우스의 표정
이 점점 진지해져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키스 해주면 놓아줄게."

"……!!!"

생각지도 않은 테리우스의 제안에 아이린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장난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고 그녀가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
다.

*

무너진 집의 잔재를 뒤로 한 채 기숙사 주변을 맴돌던 세 명의 흑기사들은 그들의 주인이 어디
에 있는 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큰길로 나와보니 화려한 마차들이 줄지어 어느 저택을 향하고
있었고 그곳은 테리우스가 머물고 있던 저택이었다. 마차 뒤로 몰래 탑승한 그들은 승객들의
이야기를 쉽게 엿들을 수 있었다. 바로 그들의 주인이 그의 등에 업혀 밤늦게 파티 장에 도착했
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주인님이 왜 그 녀석의 저택에 머물고 계시는 거지? 어쩐지 기분이 나빠!"

파라도가 검게 그을린 얼굴이 가려운 듯 벅벅 긁어대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아르테
니가 피곤한 목소리를 내며 대답한다.

"글쎄, 우리들 집에 엉망이 되어 버린 걸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군. 마차 뒤에서 몰래 훔쳐 타고
가는 신세라니 참."

"으∼아! 차림새가 거지꼴인 건 별로 신경이 안 쓰이는데 무지하게 배가 고픈 건 못 참겠어. 대
체 어쩌다가 폭발하게 된 거야? 수프에 이상한 걸 넣은 적은 없었는데…."

"자세히 생각해 봐라 파라도. 분명한 건 수프가 있던 벽난로 쪽에서 폭발했다는 점이니까. 정확
한 건 아처가 날이 밝은 후에 수색해봐야 알겠지만 네 실수가 아니라면 누군가 우리 아니면 공
주님을 노린다는 점이야."

"젠장, 어떤 빌어먹을 녀석이!!"

파라도의 얼굴이 검게 일그러져 갔고 아르테니는 턱을 매만지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생각
에 잠겼다. 마차의 천장 위에 누워 있던 아처가 두 친구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감았던 눈
을 떴다.

"어떤 녀석인지 잡히면 가만 두지 않을 테다. 만약 공주님이 함께 계셨다면…."

아처는 만약의 경우를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행여 이번 폭발에 아이린이 함께 있었다
면 그래서 그녀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면 그랬다면 그는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푸웃, 그 망할 녀석에게 감사해야하나? 공주님이 무사하도록 해주어서?….'

아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밤하늘에 달빛을 넋 놓은 듯 바라봤다. 누군가 미치도록 그리웠
다. 그 달빛 속에 아름다운 아이린의 모습이 그려졌다.

^0^*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6장 *127* 학원편(27)

*

화려한 불빛들을 뒤로 한 채 음침한 구석을 찾아 감시하는 눈길을 하고 있는 남자. 그는 자신
의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공간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망할 계집 같으니 운이 좋구나! 어디 그 운이 어디까지 갈지 두고 보자."

카를로스는 낮게 중얼거리며 뒷짐을 진 채로 파티 장 구석에서 유유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
다. 그가 찾아간 곳은 습한 지하에 마련해 놓은 자신의 비밀 지하 방이었다. 그는 낡고 거친 돌
계단을 투벅투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려갔다.

곧 무너질 것 같은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어 제쳐 들어서자, 그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거미줄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기분 나쁜 거미줄들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손으로 헤
집으며 안으로 발걸음 했다.

카를로스 앞으로 전해진 밀봉된 붉은 종이의 전갈을 살펴본 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하하하!!!! 그래, 메틴 왕의 군대가 아리스샘터로 향하고 있다니 곧 전쟁이 벌어질 것 같군.
흠, 이쯤에서 나 역시 뭔가를 해야겠지. 그 망할 계집을 처치하지 못했다면 그 계집의 소중한
것을 없애버리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계약을 지키면서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치다니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 내 친히 보여 주지 암 보여주고 말고."

카를로스는 낡은 서랍에서 펜과 붉은 종이를 꺼내 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그리
고는 바닥에 놓인 흙먼지에 뒤덮인 수정 구슬을 꺼내 들고 마법 주문을 읊조렸다.

그러자 수정 구슬에 레드 드래곤 제크와 페키가 공중 비행하는 모습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아이린 널 없애야 테리우스가 미쳐가고 약해져 갈 것이다. 곧 가까운 날에 테리우스가 내
발 밑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야. 내 아버지도 못해낸 일을 내가 이루고 말테니 두고봐라. 데본
제국이 이제 곧 내 것이 될 테니 크크크크!!!!!!!!!! 움화하하하하하!!!!!!!!!!!!!!"

카를로스의 음침하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지하 방에서 비어져 나와 통로까지 울려 퍼졌지만
지상까지 새어나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테리우스 저택 정원의 나무에 갑작스레 까마귀들이 몰
려와 앉더니 카를로스를 대신하는 듯 까악 까악 거리며 음흉하게 울어댔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긴 수염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
었다.

"쯧쯧, 불쌍한 녀석 그 녀석을 처단할 상대를 내세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 듯 싶구
나."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그의 다리 주변에 가득 몰려 있는 양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

테리우스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여 들지 못하는 아이린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이 자신의 눈에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그 스스로
도 알지 못했다.

'푸웃,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인 건지 아님 쑥스러워서 고개를 숙인 건지 모르겠군. 지난번 내
게 입을 맞추던 그 당당한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군 그래. 헌데 이 녀석과 같이 있으면 있
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거지?'

낯익은 상황에 테리우스는 괜히 기분마저 즐거워졌다. 이런 테리우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아이린은 고개를 푸욱 숙인 채로 고민과 갈등에 잠겨 있었으니.

'뭐야, 갑자기 무슨 키스…장난하는 거 치고는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까 괜히 내가 겁나잖아.'

아이린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테리우스의 손이 그녀를 꽉 잡던 팔에서 등 쪽으로 자연스레
옮겨져 갔고 덕분에 그와 그녀의 거리가 더욱 밀착되어 졌다. 그의 보랏빛이 묻어나는 검은 눈
동자가 그녀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듯 응시했다. 이때 살짝 테리우스의 앞 머리칼이 부드럽게 떨
어져 내려와 그의 왼쪽 눈을 가렸다. 아이린은 넋이 나간 듯 그의 손에 허리 중심을 맡긴 채로
그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매번 테리우스와 만날 때마다 엿보였던 그녀의 당당함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
고 대신 그곳에 두 볼을 발그스름하게 만든 여인의 수줍음만이 남겨져 있었다.

테리우스가 그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포개었
다. 그에게만 풍겨지는 하늘 바람 같은 향기가 아이린의 입을 통해 몸 속으로 전달되었고 그녀
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을 그녀의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혀와 춤을 추었다.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별빛들이 창을 통해 두 사람의 실루엣을 그려냈
다.

아이린은 자신을 사랑하는 테리우스를 몹시 그리워했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 그녀에게 키스하
고 있는 남자는 기억하지 못할 뿐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테리우스…….'

사뭇 그의 장난스러웠던 표정도 황당한 제안도 어쩌면 그가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몸부
림을 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테리우스가 아이린은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갖고 싶다.

그녀의 생각도 그녀의 마음도 그녀의 사랑도 그녀의 시간도 모든 것을 다른 어떤 녀석도 아닌
자신이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리우스는 자신의 품에 안겨 그의 키스에 응답하고 있는 아이린에 대한 소유욕이 점점 강렬하
게 일어나고 있음을 스스로 자각했다.

'널 갖고 싶어…널 지켜주고 널 웃게 해주고 싶다. 나만 바라보게 하고 싶어. 모든 걸 버려도 좋
으니 네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좋겠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입술에 달콤한 향기가 그를 미
치게 했다. 오래 전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낯익은 그녀와의 입맞춤. 이젠 그 느낌이 어
떤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이 사랑이라 불리 우는 감정인지 아닌지
도 이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곁에 그가 아니 그만이 머물고 싶다는 것이다.

테리우스의 왼손이 그녀의 허리에서 올라와 그녀의 뺨을 감싸 안았다. 아이린의 흐트러진 앞
머리칼을 곱게 뒤로 넘기며 그녀의 입술에서 그의 입술을 거둔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
더니 입을 열었다.

"내 곁에 머물러 준다고…약속해라."

"……."

그의 낮고 강한 음성이었지만 간곡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아이린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소
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긍정적인 표현에 테리우스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아이린의 손을 조심스레 입맞춘 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이린은
다소 놀란 모습이었다.

'테리우스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이 녀석 지금 진심이야! 기억도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날? 신은 대체 사랑이란 걸 어떻게 만들어 놓은 걸까? 나 역시 테리우스에 대한 기억이 없어도
그래도 이 녀석을 다시 사랑하게 될까?'

아이린의 눈을 응시하며 테리우스가 입을 연다.

"널……."

그가 어렵게 뭔가를 고백하려 들 때쯤이었다. 누군가 길게 문을 두들겨 두 사람의 분위기를 정
지시켜버렸다.

똑! 똑!

한참 긴장하고 있었던 두 사람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불청객에게 관심을 돌린다. 테리우스가
꽤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냈다.

"누구냐!"

그러자 밖에서 느릿하고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주인님께 제로이드님께서 직접 보내신 소포가 있습니다. 지금 전해 드리라는 특별한 당부
가 계셨습니다. "

늙은 하녀 마가린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테리우스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주인으로서의 자세
를 취하고는 대답한다. 그 모습에 아이린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들어와라! 무슨 특별한 당부라는 게 뭐냐?"

"네, 여기 이 소포들을 열어보시면 아실 거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또 뭐?"

"저 두 분 언제까지 그런 모습으로 있으실 것인지 아직 목욕준비 대기중이라는 점도 잊지 마시
길 바랍니다."

마가린이 테리우스와 아이린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
니 자신들의 모습이 여전히 엉망인 것을 두 사람은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 모습보다는 나아졌
지만 여전히 지저분한 차림새였던 것이다.

"흐흠, 알았느니 나가서 음, 같이 할까?…가 아니라 흐흠, 각각 준비해 놓도록 해라."

테리우스는 명령 도중 아이린의 매서운 눈빛을 보고는 곧바로 말을 바꾸어 명령했다. 어느 때
는 자신의 고집대로 하다가도 정작 결정을 내릴 때쯤에는 결국 아이린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
이는 그였다.

하녀들이 모두 나간 후에 두 사람은 소포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며 각자 포장
을 뜯어냈다. 그리고 그 곳에 제로이드의 고급 취향으로 골라진 각자의 연회 복의 존재를 발견
하게 되었다.

테리우스의 의상은 어두운 보라색 벨벳의 정작으로 금색 패치가 장식되어 있었고 아이린의 의
상은 분홍색과 백색이 적절하게 조화된 드레스로 하늘거리는 프릴 장식과 리본이 잘 조화가 되
어 귀여운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제로이드가 왜 이런 옷을 보낸 거야?"

"쳇, 이 빌어먹을 녀석이……."

아이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죽마고우인 테리우스가 그 친구의 속
셈을 모를 리 없었다. 분명 자신과 아이린이 파티 장에 나오길 바라고 보내온 옷들이 틀림없었
고 여자들에게 아름다운 드레스의 유혹은 더더욱 매력적이란 점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니 제
로이드의 생각에 아이린 자신이 보낸 의상을 본다면 기필코 테리우스에게 부탁해서 파티 장에
나올 것이라 계산했던 것이다.

파티라면 질색하는 테리우스의 성격에 그녀를 데리고 파티 장에 나올 리 없었으니까.

그러나 제로이드는 한가지 실수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린에 대한 파악이었다. 그녀가 다
른 여성들과 똑같다고 생각한 점이 그의 실수였다.

드레스를 이리저리 살피던 아이린은 그 옷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입어 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건 그저 마음만 든 것 뿐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는 별로 관심 두지 않
는 그녀였다. 마법 옷으로 만들어 본다면 저렇게 똑같이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있
는 그녀에게 테리우스가 대뜸 한마디 던진다.

"왜 그 옷 입고 파티 장에 나가고 싶은 거냐?"

혹 그녀가 그러고 싶다면 그로서는 그렇게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에 테리우스가 물었다. 그런
데 그녀는 의외의 답변을 한다.

"이 푸른 색 리본 장식을 붉은 색으로 바꾸면 더 나을 것 같은데 좋은 작품인 것 같긴 해. 제로
이드가 옷을 제작하는 일을 하나봐?"

"뭐?"

"역시 붉은 색이 나을 거 같아. 나중에 조언 해줘야겠어. 참, 정말 목욕을 해야겠어. 목욕 후에
한숨 푹 자고 나야 피곤함이 풀릴 것 같아. 헤헤, 아까 자긴 했지만 그건 조금밖에 못 잔 거고.

내일은 아침 일찍 우리 집으로 가서 수행원들도 찾아봐야 하고 녀석들 틀림없이 살아 있을 거
야."

그리고는 소포 상자 안에 드레스를 집어넣고 유유히 목욕이 준비되어 있는 방으로 걸어 나간
것이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6장 *128* 학원편(28)

그런 그녀의 모습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테리우스가 바라봤다. 아이린이 방을 나서자 방
안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혼자서 웃다니…테리우스는 정서가 좀 불안정한 거 같아. 에휴, 알 수 없는 녀석이야…."

아이린은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리다가 마가린의 안내로 목욕실에 들어갔다.

한편 혼자 남은 테리우스는 자신의 방으로 하인들이 들어와서 서둘러 목욕 준비를 하는 동안
제로이드가 전해준 두 벌의 연회 복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제로이드 녀석의 꿍꿍이가 뭔지는 대강 짐작이 되긴 하는데…푸웃, 이 정도의 드레스에 객관
적인 평가만 한 채 돌아선 아이린은 대체 어떤 여자인 거야? 순진하다가도 놀랄 정도로 영리하
고 야생 말처럼 제멋대로 으르렁거리다가 어느 순간 순한 양처럼 변하고…흠, 그런 여자에게
마음을 통째로 빼앗기다니 재미있군.'

아이린은 자신의 옷이 더럽혀져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것에 대해 그리 놀라지 않았지만 그 옷
이 조금 전 제로이드의 소포로 왔던 드레스라는 점에 대해선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몸에 딱 맞은 드레스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아이린이 중얼거
렸다.

"이건 테리우스에게 전해 진 소포인데 내가 입어도 되는 건가요?"

아이린의 정중한 물음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마가린이 대답한다.

"그럼요. 소인의 소견으로는 아가씨를 위한 드레스인 듯 보입니다."

아직 아이린의 신분을 알지 못한 마가린은 그녀에게 불러야할 공주라는 호칭 대신 평민들에게
사용하는 호칭을 붙였다. 다른 왕족이었다면 이에 엄청난 호통을 쳤을 테지만 아이린은 자신
을 부르는 호칭에 그리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친절하게 답변해주는 마가린에 대
해 따뜻하다고 느꼈다.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는 처음 입어 봐요. 성함이…?"

왕족이나 귀족이 하녀에게 이름을 묻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다. 그러니 분명 이 숙녀 분은 평
민 계층이 틀림없다고 마가린은 생각했다. 종종 평민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마나 아카데미
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네, 마가린이라고 합니다."

"헤헤, 좋은 이름을 가지고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전 아이린 아카리나스라고 해요. 기분 좋은
목욕하게 해주시고 이렇게 아름다운 의상을 입게 해주시고 정말 감사해요. 마가린님."

아무리 평민 계층이라고 하나 분명 테리우스 주인의 손님이고 게다가 그녀는 곧 한 왕국의 중
요한 인재가 될 지위를 얻게 될 후보자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존칭을 넣자 마
가린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버릇없는 왕족과 귀족들을 야단치던 왕궁의 일등 하녀 마가린. 그녀는 지금 한번도
겪지 못한 일로 당황하게 된 것이다. 버릇없는 것과는 정반대로 너무나 예의바른 아이린의 태
도에 잠시 생각을 하던 마가린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처럼 아래에 있는 사람의 이름에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 것입니다. 주
인님의 손님이시니 저에게 역시 주인님만큼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말씀 낮춰주십시오."

"제가 큰 실례를 한 건가요? 혹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아이린은 마가린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 않고 마귀할멈처럼 고약하게 굴었다면 그녀
성격에 그렇게 친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치 엄마 품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는 마가린이 아이
린은 좋았던 것이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죄송해요. 전 나이 드신 분이시고 제게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고마운 마음에 드린 말씀이었어
요."

"네,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왕족이나 귀족 분들께도 예법을 중요시하는 저로서는 아가씨께
서 소인에게 존칭을 사용하시도록 두는 것 역시 일관성이 없다는 생각에 말씀 올린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마가린은 자신의 생각을 천천히 아이린에게 이야기했고 이에 그녀 역시 늙은 하녀의 말에 고개
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앞으로 주의하도록 할게요. 헤헤, 호칭은 주의하겠지만 죄송해요 아주머니에게 테리우스처럼
은 말하기 힘들 것 같아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순간 마가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가는 것처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무시무시한 주인
의 이름을 마치 개구쟁이 동생 다루듯이 부르는 아이린의 말에 놀란 것이다.

"자, 이제 그만 주인님이 계시는 방으로 가시지요 아가씨."

"네, 마가린."

아이린의 대답에 마가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서로 각자의 방에서 목욕한 후, 단장을 마친 두 사람은 다시금 처음 헤어졌던 방에서 재회했
다.

테리우스에게 보라색 정장은 깔끔하게 잘 어울렸다. 그는 어깨너머로 긴 머리칼을 뒤로 넘겨
하나로 묶었고 벨벳의 보라색 정작 안에 흰색 셔츠 위로 은 푸른색의 두터운 스카프가 고급스
러움을 더해 주었다. 마치 딴 사람처럼 보인 그의 모습은 그가 입을 열자, 역시 테리우스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 했으니.

"왜 이렇게 늦었어! 배고프다 우선 여기서 먹고 나가던지 말던지 하자."

'그럼 그렇지. 제멋대로 인 건 여전해.'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긴 테이블이 커다란 장정 두 사람에 의해 들려져 들어왔고 순식
간에 하인들과 하녀들의 발빠른 움직임으로 맛있는 진수 성찬이 차려졌다.

"이걸 다 먹을 생각이야?"

아이린의 눈동자가 크게 휘둥그레지자, 그 모습마저도 귀여운 듯 테리우스가 대답했다.

"그래, 너랑 나랑 둘이서 이걸 다 먹고 나면 파티 장에 가는 거야 알겠어?"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테리우스는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 파티가 거의 끝날 무렵에 그녀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
다. 그냥 봐도 아름다운 그녀를 화려한 드레스로 단장까지 하고 내 보내기에는 불안했던 것이
다.

"억지라니 그럼 파티 장에 나가서 놀고 싶단 말이야?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
데?"

"넌 정말이지 여전히 제 멋대로야."

"내가 뭘?"

테리우스가 인상을 그으며 자신에게 씩씩거리는 아이린에게 한 걸음씩 다가서며 되묻는다.

"내가 언제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고 했어? 아님 여기에서 이 음식을 먹겠다고 했어? 푹 쉬었다
고 생각한 지금 내가 가장 먼저 뭘 원하고 뭘 생각할 지 정말 모르겠어?"

순간 테리우스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는 단지 그녀만 생각했던 것 뿐 그녀의 마음이 어떨
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그건."

"아니야 나 역시 잘못한 거야. 마가린이 내게 이 옷을 건네 주었을 때 난 바보처럼 드레스의 아
름다움에 잠시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있었어. 네가 철없이 구는 모습을 보니까 되려 내 자신이 잠
시동안 어떤 모습이었는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알 것 같아."

아이린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더니 돌아서서 곧바로 방에서 나와버렸다. 그녀가 나가는 모습
을 보면서도 테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아이린이 복도에 나와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자, 마가린이 뒤따라 나왔다.

"잠시만. …허헉…아가씨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 마가린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아니 테리우스 앞에 있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나온 거예요."

"그러셨군요. 제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그것보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을까요? 바지차림이면 좋겠는데…."

"음, 그러시면 일단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제가 빨리 마련해 가지고 오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마가린."

아이린은 원기둥에 등을 기댄 채 종종걸음하며 사라져 가는 마가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행
여 테리우스가 자신을 따라올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만약 그녀를 따라와 따져 묻는다면 싸움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았기에 피하고 싶은 마음
이었다.

마가린이 어딘 가로 사라진지 십 여 분쯤 흘렀을까 어디선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
에 들려왔다. 그들의 화려한 드레스 차림새로 보아 테리우스의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추측
되었다.

"호호호!!! 그럼 이자벨라가 그 데본의 왕족이라는 제로이드와 춤을 추었다는 말이냐?"

일라이저는 자신의 웃음 뒤로 못내 불쾌한 심기를 감춘 채 세실리아와 레베카에게 포커페이스
를 유지했다.

"일라이저님 저…저…."

레베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세실리아가 그녀 동생의 팔을 툭툭 치며 눈치를 준다.
그러자 레베카가 일라이저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저 이자벨라의 행동에 화가 나신 건 아니시죠?"

"어머,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일로 화를 낼 것처럼 보여? 호호호!!!! 웃겼어 레베카. 제로
이드라는 남자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그 남자가 아마도 나와 이자벨라가 함께 있었던 걸 보
았다면 분명 내게 춤을 청하셨을 거야. 안 그래?"

일라이저가 세실리아와 레베카의 얼굴을 스윽 살피며 묻자, 그들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일라이저님."

"아, 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세실리아와는 다르게 레베카는 주춤거리듯 답변했다. 이때 일
라이저가 고개를 돌리면서 원기둥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분홍빛이 묻어나는 새 하얀색 드레
스를 차려 입은 아이린은 발견한 것이다.

'저건 아이린?'

일라이저는 자신의 눈썰미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방금 전과는 전혀 다
른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아이린 아카리나스 맞죠?"

"네?"

아이린은 생판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절 아시나요?"

"호호, 그럼 우리 학교 신입생이잖아. 난 일라이저라고 해…너보단 상급생이지."

"네."

"어머, 이 드레스는 정말 고급 옷감으로 만들어진 거네. 내가 명품을 알아보는 안목이 좀 있거
든. 요정들의 솜씨로 지어진 옷이 틀림없어. 내가 알기로는 아카리나스면 패전국의 왕국인 걸
로 아는데 그런 곳에 후계자가 이런 비싼 의상을 어디에서 구한 거지? 가난한 걸로 알고 있는
데 누군가에게 구걸이라도 한 거 아냐?"

"그건 왜 물어보죠?"

아이린이 고개를 빳빳이 든 상태로 일라이저의 두 눈을 응시하며 되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전
혀 일라이저의 기선제압에 꿈쩍하지 않은 당당함이 묻어나 있었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6장 *129* 학원편(29)


'아니, 이게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되묻는 거야 감히!'

아이린의 태도가 일라이저의 심기를 건드려 급기야 그녀를 화나게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거야! 신입생에 패전국 후계자 주제에!"

그러나 일라이저의 화보다 아이린의 화가 가히 폭발적으로 터져 나고 있음을 상대도 그 주변
의 세실리아와 레베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음 속으로 화가 난 것을 아이린은 겉
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태연하게 답변했기 때문이다.

"제게 시비를 걸려고 오신 건가요?"

아이린은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상대의 의연한 모습에 일라이저의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곁에 서 있던 세실리아와 레베카는 아이린이 아직 일라이저의 존재가 어떤 지를 몰라 설친다
고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오호라, 네가 아직 뭘 몰라서 이렇게 버릇없이 구는 거구나. 하긴 시골뜨기에 속하는 왕국 출
신 주제에 가이루덴 왕국의 공주의 모습을 알 리가 없지. 설마 가이루덴 왕국을 모른다 하진 않
겠지?"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는 아이린은 자신에게 버릇없다고 말하는 상대의 차림새를 천천히 바라
봤다.

보아하니 행색은 왕족이나 귀족인 것 같은데 그 거만함이 하늘을 뚫을 정도인 걸 보니 왕족일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가이루덴 왕국을 안다고 해도 별로 알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걸."

"뭐야? 너 지금 내게 하소를 하는 거냐!! 어디 감히!!"

"감히 뭘?"

"간이 부은 계집이로군."

일라이저의 거만함에 아이린의 정중함이 사라져버렸고 이에 일라이저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갔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찍어 둔 테리우스에게 알짱거리는 꼴이 눈에 가시였는데 전혀 기
죽지 않는 모습까지 대하니 그녀로서는 약이 바싹바싹 오를 수밖에.

세실리아와 레베카가 되려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지며 이젠 아이린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
음까지 들었다.

"언니 저러다 저 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으면 어떻게 해?"

레베카가 숨소리까지 숨겨가며 세실리아의 귀에 바싹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러자 세실리아가
대답대신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하지 말라고 신호했다.

그만큼 일라이저와 아이린의 분위기가 정적이 감돌면서 심상치 않게 퍼져 갔던 것이다. 자신
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응시하는 아이린의 당당함에 일라이저 자신이 오히려 기가 눌리
는 기분마저 들 때쯤이다.

짜∼악!!!!!!!!!!!!!!!!

일라이저의 굵은 반지가 끼여진 오른손이 아이린의 뺨을 정확하게 맞추었고 순간 아이린의 왼
쪽 뺨에 선명한 생채기가 쫘악 하고 그어지면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일라이저
가 비아냥거리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오른손 반지를 아이린에게 보라는 듯이 내보인
다.

"별것도 아닌 것이 재수 없게 내 앞에서 알짱거리더니 꼴 좋구나. 자기 주제도 모르고 감히 데
본 제국의 왕족의 일인지 테리우스를 넘보다니 한심한 것 같으니라고."

아이린은 자신의 왼쪽 뺨을 손으로 감싸며 일라이저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뜻밖에 그녀의 얼굴
에 미소가 그려지는 것이 아닌가.

"왕족이라면 참 대단할 줄 알았더니…생각보다 유치하네."

아이린이 핀잔 어린 어조로 일라이저에게 말했다.

"뭐 지금 내게 유치하다고 말했어 너! 네 꼴이 어떤 줄 알면서 그런 말이 나온다 말이냐!!"

일라이저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자 그 소리에 귀가 따갑다는 듯 아이린이 귀를 비벼 대며 응
대한다.

"시끄럽게 말하지 않아도 다 들려. 사람을 보자마자 출신 배경에 대해 따지질 않나 말도 안 되
는 억지를 부리질 않나. 깡패처럼 다짜고짜 손찌검을 하다니 당신 같은 왕족들은 자제력이라
는 걸 배우지 않나 봐?"

"뭐? 뭐 이런 게 다 있어. 패전국 후계자가 뭘 믿고 이렇게 까부는 거야!! 오호라, 테리우스의 배
경을 보고 알짱거려서 도움이라도 받으려 보구나!! 창녀처럼…."

"말하는 걸 보니 정말 왕족인지 의심스러워. 혼자서는 무서운가 보네 친구들을 대동해서 내게
함께 온 걸 보니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아마 테리우스에게 관심이 있나 봐? 그럼 그렇다고 말하
고 테리우스 본인에게 직접가면 되지 내게 와서 이게 무슨 유치한 짓이야."

아이린이 세실리아와 레베카를 눈짓하면서 말하자, 그들이 재빨리 두 손을 흔들며 친구가 아님
을 알렸다.

"하! 누가 친구라는 거냐! 애들은 내 하녀들이야."

일라이저가 기가 차다는 식으로 대답하자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다.

"하긴 그 성격 보아하니 굉장히 더러울 것 같은데 친구라는 게 있을 리 없지."

"이게 정말!!"

일라이저의 두 번째 손이 세차게 날라 왔지만 이번에는 아이린이 상대의 손을 재빨리 잡아채
꽉 쥐었다.

"쯧쯧, 이봐 구제불능 왕족 공주! 내가 또 조용히 맞아 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머리가 나쁜 거
야 아님 생각자체를 못하는 거야? 똑똑히 들어 둬. 테리우스가 맘에 들어 그 녀석을 갖고 싶거
든 직접 만나서 테리우스와 해결해. 괜히 사람 피곤하게 와서 징징거리지 말고 다음에 다시 한
번 내 앞에 나타나서 징징거리면 그땐 말다툼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알겠어!"

아이린이 말끝을 강조하면서 붙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너…너 오늘은 내가 그냥 물러나지만 다음 번엔…."

일라이저가 분한 듯 씩씩거리며 아이린을 째려봤다. 그러자 아이린이 약간 인상을 찡그리며 우
습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다음 번엔?"

아이린이 되묻자 일라이저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천한 것 같으니!!"

"그냥 보내려고 했는데 그냥 보내면 아무래도 널 위해서도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무…무슨 뜻이야."

아이린이 한 걸음 한 걸음씩 일라이저에게 다가섰고 이에 기가 죽은 듯 일라이저가 뒷걸음을
쳤다.

퍼∼억!!

그러다 아이린의 짧은 주먹이 일라이저의 얼굴을 정통으로 맞추었으니 그녀의 주먹이 지나간
자리에 쌍 코피가 주르륵 흔적을 남겼다.

얼떨떨해진 느낌에 손등으로 코를 훔친 일라이저는 자신의 코피가 묻어나는 걸 보며 기겁을 하
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

"피! 피가 묻었어!! 감히 내게 주먹질을 감히!!!"

"대체 주거니 받거니 해놓고 뭘 감히 라는 말만 되풀이하는지 앵무새도 아니고…어? 아직도 서
있는 걸 보니 또 맞고 싶나 보네? 그리고 깜빡하고 지나칠 뻔했는데 말야. 테리우스는 이미 내
꺼야. 난 절대 내 것을 남에게 뺏기지 않아 알겠어? 무식하게 힘만 세서 몇 번을 싸워도 비리비
리한 넌 날 못 이겨! 그러니까 정 그 녀석이 갖고 싶으면 그 녀석에게 가! 괜히 나한테 와서 피
곤하게 만들지 말고 알았지?"

"뭐, 너 꺼? 흥, 두…두고 보자! 너! 아이린 학교에서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두고 보자
고!!!!! 윽!! 아…아! 두통이……."

일라이저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한 지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고 발악을 하다가 결국 기절
한 채 세실리아와 레베카에게 부축을 받아 아이린 앞에서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이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책 없는 왕족들이 한 둘이 아니었어. 그건 그렇고 테리우스 녀석 성질도 괴팍한데 뭐가 좋다
고 저렇게 발악을 하며 싸우는지…휴, 하긴 나도 그 녀석에게…어쨌든 다른 건 다 줘도 테리우
스는 못 주지. 그 녀석이 저 이상한 여자에게 혹 반해서 가버린 다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지만.
헌데 내가 힘이 세진 건가? 얼굴에 상처가 났는데 아프지도 않고 주먹을 휘두른 기분도 가뿐하
고 왠지 강해지고 있는 느낌이야."

아이린은 상처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기 위해 거울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계단 옆에서 벽 거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아까 손에 피가 조금 묻어났는데? 왜?"

상처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얼굴이 아무런 흔적 없이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
닌가. 그녀의 카나의 피가 서서히 깨어나 그녀에게 힘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계단에서 마가린이 아이린에게 줄 옷을 잘 개어진 채로 들고서 올라오고 있었다.

"어? 마가린!"

거울에 비춰진 마가린의 모습에 반가운 듯 아이린이 뒤돌며 늙은 하녀의 이름을 부른다.

"네, 오래 기다리셨지요. 여기 알맞은 옷을 구해 왔으니 절 따라오세요. 옷을 갈아입을 장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마가린"

아이린은 조금 전 기분 나빴던 일은 뒤로 한 채 빨리 옷을 갈아입고 이곳을 빠져나가 흑기사들
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늙은 하녀의 뒤를 따랐다.

아이린이 입은 바지와 셔츠는 모두 밝은 톤의 보라색을 띠고 있었고 그 위에 은회색 조끼를 입
었다.

"고마워요 마가린! 활동하기도 편하고 내게 딱 맞는 거 같아요."

"딱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 망토도 함께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망토요? 아, 밤이니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구요? 헌데 이건 초록색 벨벳의 고급 망토 같
은데…."

"네, 파티 의상에 걸쳐 입는 망토입니다."

마가린의 대답을 보아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듯 보였다. 아이린은 따로 마련된 황토색 가죽 가
방에 마법 옷을 작게 만들어 개어 놓고는 어깨에 둘러메고 다시 한번 초록의 고급 망토를 살폈
다.

"바지와 셔츠에 어울리지 않게 파티 의상에 쓰이는 망토를 가져오신 이유가 따로 있나요 마가
린?"

"네, 그렇습니다."

아이린은 질문을 하면서 자신이 입었던 드레스를 곱게 개어 옆에 있는 빈 상자에 가지런히 넣
었다.

"이 드레스는 제로이드에게 마가린이 다시 전해주세요. 아님 테리우스에게 전해주셔도 되고…
참 무슨 이유에서 이 망토를 가져오신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필요하실 것 같아서입니다. 사실은 옷을 찾으러 다녀 온 사이에 여기저기 수문장 병사들이 움
직이는 걸 발견하고 알아봤더니 모든 출입문을 통제해 놓으라고 주인님께서 명령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저택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정문뿐이고 정문으로 가려면 파티 장을 가
로질러야만 가능하답니다."

"맙소사! 테리우스 이 사고뭉치!!"

*

그때쯤 혼자서 연회 의상을 갖춰 입고 등장한 오늘 생일 파티의 주인공 테리우스의 곁으로 제
로이드와 바이사코가 다가와 술잔을 건네주며 웃었다. 그런데 웃는 친구들의 모습과는 달리 테
리우스의 얼굴에는 인상이 잔뜩 흐려진 상태에다 그의 말투는 화가 나 있는 어조였으니.

"쳇, 이 사고뭉치 아이린!! 여튼 어디로 튈지 모를 녀석이라니까!!!"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6장 *130* 학원편(30)

*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데다가 화려한 조명들로 점철되어 있는 곳을 몰래 가로 질러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다들 술에 취하기도 하고 들썩거리는 파티에 취하기도 했
기 때문에 그녀의 등장이 주목받을 만한 상황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이들
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점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다 시끄러우니 테리우스만 피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덩치 큰 하인들이 음식을 나르는 뒤를 따라 몸을 숨기며 이동하기 시작했
다.

중앙 홀에서 퍼져 나오는 왈츠에 제로이드와 바이사코는 각각 아리따운 숙녀들의 손을 잡고 춤
을 추었고 사람들의 시선은 그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단 한 남자의 시선만 제외하고는.

테리우스는 파티 장 곳곳을 예의 주시하며 누군가를 열심히 찾아내고 있었다. 아이린이 분명
이곳을 통해 그의 저택을 빠져나갈 거라 확신한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통로를
차단 해 놓은 데다가 수색 작업까지 명령했으니 그녀를 찾는 것은 시간 문제라 생각했다.

'아이린, 그런 식으로 가게 내버려두고 싶진 않아. 무너진 집으로 가봤자 추위에 떨텐데 왜 굳
이 가려는 건지…쳇, 괜히 수행원들에게까지 내가 이런 이상한 경계심을 지녀야하다니 재미없
어.'

파티의 주인공이 등장하자, 여기저기서 테리우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차마 그의 눈을 마주치
는 용기 있는 이는 없었다. 테리우스의 잘 생긴 외모와는 달리 그의 성격이 얼마나 무섭고 사나
운지에 대해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남자들에게는 거대한 권력자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저쪽에서부터 뚫어져라 바라보며 걸어오는 여성이 있었으니 일라이저였다.

아이린과 한바탕 난리를 치고 기절했던 그녀는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파티 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테리우스잖아?"

일라이저가 은 보라 빛 머리끝을 한 손으로 말아 돌리며 반가운 기색을 하며 말하자, 뒤쪽에
서 있던 세실리아와 레베카가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라이저는 부은 얼굴을 감추기 위해 부채를 활짝 펴 얼굴에 바짝 대고서 테리우스 쪽을 향해
발걸음 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세실리아가 레베카의 귓가에 대고 한마디했다.

"지금 저 얼굴을 하고 남자 앞에 가고 싶은 걸까? 제 정신이 아니지 나중에 우리가 안 말렸다고
괜히 야단 맞는 거 아닌지 몰라. 그렇다고 말리자니 분명 또 말린다고 핀잔 줄 게 뻔하고."

"…응 내 생각도 그래 언니."

두 사람이 서로 소곤거리다 갑자기 휙 몸을 돌려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일라이저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서 재빨리 총총걸음을 하며 일라이저의 뒤를 따랐다.

*

아처와 아르테니 그리고 파라도는 테리우스의 저택 앞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웅크리고
앉아 다소 불쌍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보기에 마치 동냥을 하는 거지
로 보이기에 딱 알맞은 모습들이었으리라.

"엣취!! 킁킁!!! 아무래도 몸에 안 좋은 기운이 맴돌고 있는 것 같아. 그 폭발물 분명 사악한 재
료가 들어가 있는 게 분명해. 에에엣취!!!! 킁킁!!…억울해."

파라도가 재채기를 하며 연신 코를 훌쩍거렸다. 게다가 점점 목소리도 걸쭉해지면서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는지 아르테니가 항상 구박하는 말투와는 달리 다감하
게 이야기한다.

"아처가 제조한 약을 먹고 조금 쉬면 나아질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라. 너만 억울하냐 아처나
나도 함께  집도 잃고 공주님도 못 보고 게다가 초대장도 없어 저 곳에 들어가지도 못하지 얼굴
과 몸은 까만 재에 뒤덮여 있고 참 셋 모두 완전히 거지꼴이 따로 없다."

"킁! 킁! 나만 재채기하고 아프니까 억울하다는 소리야. 우∼엣취!"

파라도가 말하다가 크게 재채기를 했다. 덕분에 아르테니의 얼굴에 녀석의 침이 튀어버렸다.
화가 난 아르테니가 앉은 자세에서 발을 뻗어 파라도의 얼굴을 차버렸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읔!! 임마 아프잖아!"

"당연히 아프지 괜히 발로 찬 건 줄 알아? 혼자 아파서 억울하다니 그럼 우리가 같이 안 아파서
안타깝다는 소리냐! 대체 언제 철이 들 거야?"

아르테니가 볼멘 목소리를 내며 파라도를 얄미운 눈길로 바라봤다.

"킁! 킁! 그렇다고 이 잘 생긴 얼굴을 발로 차냐!"

"풋, 잘 생긴 얼굴이라니 호박 썩은 얼굴도 그것보다는 낫겠다."

두 친구가 계속 해서 아웅다웅 싸우자 곁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처가 인상을 그으며
한 마디 한다.

"조용히 좀 해라. 지금 유치하게 싸울 때가 아니야. 공주님이 집에 다녀가셨다면 아마도 우리
에 대해 걱정하고 계실 거야. 게다가 테리우스의 저택에 계시다니 어떻게든 저 안에 들어갈 방
법을 생각해 봐야지. 그 녀석에게 우리 얼굴을 안 들켜야 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아처의 이야기에 멱살을 잡고 있던 파라도와 아르테니의 손에 힘이 풀리면서 휴전 상태가 되었
다.

"아, 맞다. 테리우스가 우리들 얼굴을 보면 안 된다고 그때 부탁하셨지. 엣취! 크킁! 공주님이
보고 싶다."

"나 역시…몇 년 안 뵌 기분이 드네 흠."

새까만 재로 얼룩 진 세 사람이 그리운 표정을 지으며 약속이라도 하는 것처럼 새하얀 달을 바
라보며 다시금 땅을 내려다보며 꺼져라 한숨을 터트렸다. 대체 테리우스의 저택에 어떻게 들어
가야 할지 막막한 그들이었다. 그만큼 테리우스의 저택의 경비가 삼엄했던 것이다.

*

"호호호!!! 안녕하세요. 전 가이루덴 왕국의 공주 일라이저라고 합니다. 이렇게 멋진 파티에 초
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일라이저는 예의를 갖추며 한 손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한 손은 치맛자락을 잡은 채 고
개와 무릎을 살짝 굽히며 테리우스에게 인사를 청했다.

황금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꿈치를 의자에 걸쳐 턱을 괴고 있던 테리우스가 이에 반응이
라도 하는 듯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앉으며 중얼거린다.

"쳇, 아니잖아. 넌 뭐야?"

그러더니 전혀 왕족 같지 않은 말투로 일라이저에게 묻는다. 멀리 금발의 여자가 지나가는 모
습을 보고 아이린이라 생각했던 기대가 무너지자 그는 지금 별로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건방진 말투로 자신에게 묻자, 일라이저 역시 기분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테리우스에 대한 호감
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애써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가이루덴 왕국의 일라이저 공주라고 합니다."

"가이루덴?"

테리우스는 갑자기 쌀쌀한 녀석의 얼굴이 함께 떠오르면서 기분 나쁜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했
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세바스찬과 같은 왕족이라니 별로 좋은 만남은 아닌 거란 느낌이 들었
다.

그런데 상대는 작고 하얀 손을 내밀며 들고 있는 부채 너머로 눈웃음을 보내오고 있으니 조금
은 어이가 없는 테리우스였다.

'조금 이상한 여자군. 세바스찬 녀석도 괴팍하더니 메틴의 왕족들은 다 그런가? 쳇, 귀찮게 언
제까지 내 옆에 서 있는 거야?'

한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테리우스가 앉아 있는 의자 옆에서 떠날 줄 모르고 서 있는 일라이저
를 바라보며 푸념했다.

일라이저 역시 자신에게 춤을 청하지 않는 테리우스에 대한 원망을 안으로 삭히며 점점 저려
오는 다리 때문에 안절부절하고 있었고 덕분에 세실리아와 레베카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함께
서 있어야하는 벌을 받아야만 했다.

'흥, 숙녀를 계속해서 세워 놓다니 매너는 영 좋은 녀석이 아니군. 특히 나처럼 아름다운 숙녀
를…하지만 뭐 데본 제국의 왕족인 것을 염두 해 볼 때 이 정도는 봐 줄 수 있지. 나중에 날 사
랑하게 되면 그때 두고두고 복수 해줘야지. 감히 날 옆에 벌 세우듯 서 있게 만들었으니까 호호
호!!!'

일라이저는 미래에 테리우스가 자신을 꽃을 들고 쫓아다니는 상상을 떠올리며 달콤한 미소를
지어 위안을 삼았다. 그래도 역시 그녀의 다리는 저리도록 아팠으니.

갑자기 테리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반가운 목소리를 외치며 말릴 세도 없이 달려가
버린다.

"찾았어!!"

그의 등에 손을 올리려던 일라이저는 저린 발 덕에 쿵하고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렇지 않
아도 아이린에게 맞은 얼굴 붓기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인데 다시 한번 저린 다리로 인해 얼굴
을 바닥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이를 안타까워하는 레베카와 내심 통쾌하게 여기는 세실리아
가 함께 달려와 일라이저를 일으켜 부축했다.

갖은 인상을 찌푸리며 테리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라이저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이에 기겁을 하며 닦아내면서 그녀는 분한 듯 부드득 이를 갈았다.

"감히 얼마나 대단한 나라의 왕족이라고 감히…이런 모욕을 내게 주다니…대체 뭘 보고 달려갔
는지 알아봐야겠어. 날 저 녀석이 있는 곳으로 부축해 줘!"

"네, 일라이저님."

세실리아와 레베카가 양쪽에서 그녀를 부축해 이미 테리우스 주변으로 사람들이 가득 에워싼
장소로 발걸음 했다.

*

아이린은 파티 장 중앙에 가장 높은 위치에서 턱하니 의자에 앉아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테
리우스의 모습을 본 후, 정문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어휴, 저 녀석 대체 날 못나가게 하려는 이유가 뭐야? 괜히 여기저기 경비를 삼엄하게 되니까
꼭 내가 도망자 같은 기분이 들잖아. 어쨌든 테리우스와 부딪치면 분명 싸울 게 뻔한데…안 부
딪치는 게 낫지."

아이린은 몸을 더 낮춰 바닥에 두 손을 짚으며 거의 기어가듯 기둥 뒤로 숨어 움직였다. 그런
데 한참 기어가는 그녀의 머리가 앞을 보지 않은 까닭이었는지 뭔가에 텅하고 부딪친다. 딱딱
하지도 않고 그리 크게 아프지 않은 걸로 봐서는 벽은 아닌 듯 싶다. 헌데 바닥을 향한 그녀의
시선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신발 아무래도 사람의 다리에 부딪친 듯 싶어 고개를 든 아이린
은 몸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하, 테리우스."

"어딜 가려고! 몰래 도망가봤자 내 손바닥 아닌 걸 알아야지! 쳇, 멍청하기는."

그가 서 있었다. 양팔을 겨드랑이에 낀 채로 매우 심술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
다. 파티의 주인공이 이동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등뒤로 사람들도 몰려들었고 덕분에 기어
가다 멈춘 아이린의 모습은 구경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화가 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일라이저였다.

"흥, 용서 못해…테리우스에게 관심을 저런 식으로 끌다니 조금만 더 있었으면 그가 분명 내게
춤을 권했을 텐데…아이린 널 그냥 두지 않을 테다. 마나아카데미에서 쫓아내고 말 거야. 반드
시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해."

한 손을 꽉 쥐며 일라이저의 화난 어조의 중얼거림에 세실리아와 레베카의 표정이 점점 굳어
져 갔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7장 *131* 학원편(31)

③말괄량이프린세스 7장 악마의 자장가

테리우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린의 눈빛을 보더니 이내 화가 났던 마음이 누그러져 버렸
다.

'쳇, 뭘 저렇게 빤히 바라보는 건지 날 그런 식으로 쳐다보면 봐줄 줄 알고….'

그가 약해진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연다.

"날도 어두워진데다 집도 없으면서 어딜 가겠다고 그렇게 서두르는 거냐?"

아이린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테리우스
에게 들킬 수도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로 인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알면서 왜 묻는 거야?"

아이린이 테리우스 주변에 웅성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꽤 불편하다고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의 그런 표정에서 그제야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깨닫는
테리우스.

"이봐!! 구경났어? 다들 좋은 말로 할 때 해산해!"

빈정거리는 그의 말투에 아이린이 그만 실소를 터뜨린다.

"풋!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말투가 그게 뭐야."

"내 말투가 뭐 어때서."

"무슨 군대도 아니고 해산하라니 참 말하는 거 보면 왕족이라는 걸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야, 내 말투가 어떻다고 그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님 알면서 모른 체 하는 거야. 손님들에게 말하는 게 꼭 아랫사람 대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몰래 빠져나가려는 아이린을 잡으면 혼내주려고 맘먹었던 테리우스가 되려 그녀에게 야단을
맞고 있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듯 테리우스가 정신을 바짝 차리
며 아이린을 쏘아본다.

"야! 너 지금 몰래 빠져나가려다 들켰으면서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

그 말에 오히려 아이린이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숨을 들이키다 내뱉는다. 주변에
몰려든 구경꾼들은 다들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는 분위기였고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들 역시 작고 고운 소리를 내며 함께 분위기를 맞추었다.

"테리우스!"

아이린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호명한다. 그 작고 여린 목소리가 심장을 덜컥 내려앉
을 만큼 겁을 주는 힘을 지녔다는 것을 깨달은 건 테리우스 본인뿐이었다. 아니 그에게만 해당
하는 사항이었다.

'뭐…뭘 단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이렇게 떨리는 기분이 드는 거야.'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하면 말없이 서 있는 동안 구경꾼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서며 일라이저
가 등장했다. 일라이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단순히
아이린이 테리우스 앞에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뭐얏! 이 분위기는 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끼여들던지 말던지 하지. 흐음, 혹시 싸
움?'

마치 무대의 주인공들처럼 두 사람을 동그랗게 에워싼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일라이저가 조심
스레 한 발자국 내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별로 그녀가 다가오는 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으니.

"야! 이름을 불렀으면 말을 해야할 거 아냐!"

테리우스가 목소리를 높여 되묻자, 아이린이 그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도둑처럼 몰래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물건을 훔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죄를 받아 감
옥에 갇혔다가 탈출하는 것도 아닌데 뭘 몰래 빠져나가려다 들켰다는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쳇, 고작 생각해 낸 변명거리가 그거냐? 내가 이곳에 있으라고 했으면 있어야지. 그렇게 당당
하면 왜 옷도 그렇게 바꿔 입고 몰래 기어서 나가려고 했던 건지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거
야."

테리우스는 자신이 한 말이 억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
었다. 억지라도 부리지 않으면 그녀를 보낼 수밖에 없을 형편이었으니 말이다.

"너랑 부딪치기 싫어서 그랬어. 이렇게 억지 소리할 것 같아서."

"뭐?"

"내가 왜 나가려고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잘 알면서 이렇게 막아서는 게 억지라는 거 너 역
시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막아서서 날 곤란하게 만들다니."

"……."

잠시 테리우스가 할말을 잃었고 그 틈에 일라이저가 갑자기 끼여들기 시작했다.

"아이린, 너 참 당돌한 아이로구나. 어쩜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감히 데본 제국의 왕족에게 이
리 함부로 굴다니 하긴 권력가들의 세상을 너처럼 촌뜨기가 알리 없지. 널 이곳에 데려와서 못
나가게 했다면 필시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런 명령을 감히 듣지 않고 나가려 들었다니 게다가
이런 비굴한 모습으로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애가 아니고서야. 테리우스 이런 애에게 더 이
상 신경 쓰지 않는 게 건강에 좋을 거 에요."

일라이저의 등장에 아이린도 어이가 없었지만 테리우스는 더욱 기막혀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지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나타나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억지 이야기를 하는 여자
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녀의 돌출행동에 세실리아와 레베카 역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라이저님이 너무 가이루덴 배경을 믿고 설치는 것 같은데 데본 제국을 상대로 괜찮을까요
언니?"

"쉿, 조용히 해."

"하지만 난…."

"쉿, 조용히 하라니까. 평소에 말하라고 할 때는 버벅 거리면서 조용히 있어야할 때는 왜 이렇
게 말이 많니 넌."

"네."

세실리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레베카를 다그치면서도 그녀 역시 일라이저의 경솔한 행동을 저
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곳은 그만큼 위험지역이라 할 수 있는 데본 제국의 영역이
니 말이다.

게다가 자신의 미모를 믿고 설치는 일라이저의 얼굴이 지금은 상당히 안 좋은 상태라는 걸 망
각하고 있는 듯 보여 걱정이 들었다. 아이린의 주먹에 맞고 바닥에 부딪쳐 연신 두 번의 타격으
로 퉁퉁 부은 일라이저의 얼굴을 응시하며 아이린이 주먹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얼굴이 덜 아픈가 봐?"

그러자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부채로 가리며 일라이저가 응대한다.

"아차! 이런…천하게 여자가 주먹이나 휘두른 것을 그렇게 내세우다니 테리우스가 너의 본색
을 안다면 아마 이곳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내 본색?"

"흥, 공주도 공주 나름이지 근본도 없는 가난한 왕국의 공주에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는 행동거
지하며 왕족이 기어다니다니 참 천하지 않고서야 어찌. 너 같은 앨 초대할 곳이 아니지…뭘 잘
못해서 이곳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뭐 아님 그 얼굴로 꼬리를 쳐서 테리우스를 유혹했거나."

아이린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일라이저가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말 많은 여자야."

"말이 많은 게 아니라 옳은 소리를 한다고 해야 맞겠지."

"피곤해 저리 비켜 난 그만 나가야겠어."

아이린이 귀찮다는 말투로 중얼거리며 손을 가볍게 휘젓는다.

"호호, 당연히 창피해서라도 나가야겠지."

"말만 많은 게 아니라 정말 웃기는 여자로군."

"제대로 존칭을 사용해라. 너처럼 가난한 공주에게 하대를 받을 위치가 아니야 난."

"휴, 억지부리는 테리우스 보다 더 억지부리는 여자라니 참."

아이린이 지친 듯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정말 봐줬더니 에잇!!!……."

일라이저는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린의 얼굴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두 여자의 실랑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테리우스가 일라이저의 올라간 손을 잽싸게 낚아
챘다.

"테…리우스?"

"이게 무슨 짓이냐?"

자신의 손목을 잡은 상대가 테리우스라는 사실에 놀란 눈을 하며 일라이저가 그의 얼굴을 바라
봤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가 봐왔던 무표정이 아니었다. 차갑고 매서운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 노려  보고 있었다.

"쳇, 제 아무리 중립 지역이라고 하나 보이지 않는 규칙이 존재하고 있음은 왕족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텐데 우습군. 날 더러 지금 테리우스라고 말했나?"

"네? 아…그건…."

"그건 뭐?"

테리우스의 왼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면서 표정은 점점 차갑게 돌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아이린은 숨을 죽이며 지켜봤다. 그대로 상황이 전개가 되었다해도 일라이저에게 맞을
그녀도 아니었지만 그가 막아주었다는 것에 좀 얼떨떨한 기분이 든 아이린이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그래서…."

"뭐? 하하하!!!! 흐음, 정말 황당한 답변이군. 좀 이상한 여자인줄로만 알았는데 정신적으로 꽤
문제가 있는 여자로군."

일라이저는 순간 자신의 모습이 몰려든 구경꾼들에게 어떻게 비춰질 지에 대해 깨닫게 되자,
얼굴이 붉게 물들어졌고 마음은 창피함으로 가득 찼다.

"아뇨, 지금 내 얼굴이 저 천한 여자에 주먹에 맞아 부어서 제대로 보지 못해서 당신이 내게 함
부로 구는 거죠. 난 가이루덴 왕국의 일라이저 공주예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내 아름다운 얼굴이 부어 올라서 지금 당신이 내게 함부로 구는 거라 그 말이죠.
난 당신을 내 파트너로 괜찮을 거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쳇, 역시 웃기는 여자야. 이봐, 아직 한번도 데본에 초대받아 본적이 없어서 뭘 모르는군. 데본
에 와서도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궁금하군 그래."

"뭐라구요?"

테리우스가 일라이저의 손목을 꽉 쥐며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다시 한번만 아이린을 괴롭히려들면 너! 내 손에 갈기갈기 찢겨 죽는다 알겠나?"

"……!!"

그의 협박에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아이린을 포함한 주변인들은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일라이저가 저렇게 안색이 창백한 채 몸이 빳빳하게 굳어졌는지 의아해했다.

그때 덩치 큰 정문의 수문장이 쾅하는 소리와 함께 저벅저벅 들어섰다. 수문장의 양다리에 각
각 남자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의 허리춤을 세 번째 남자가 부여잡고 있었다.

수문장이 입가에 추운 입김을 뿜으면서 테리우스에게 보고한다.

"주인님 차림새가 거지같은 놈들이 초대장도 없이 막무가내로 들어오겠다며 주인님을 뵙게 해
달라고 제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이렇게 데려 왔습니다."

수문장에 붙어서 절대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않은 남자들의 얼굴은 까만 재로 얼룩져 있었다.

^0^*

그래도 리플을 보면 즐거운 겨울기사입니다. 곧 음력 설이 다가오네요...^^*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7장 *132* 학원편(32)-1

고민을 거듭해 이런저런 계획을 짜서 테리우스의 저택에 몰래 들어가려던 세 흑기사들은 가장
어려우면서 쉬운 무대포 작전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인간 찐득이처럼 수문장의 몸
에 찰싹 달라붙어 불굴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대체 뭘 하는 녀석들이야. 수문장 신분도 모르는 녀석들을 내 앞에 들이다니 죽고 싶나?"

테리우스의 말에 긴장을 동반한 수문장의 얼굴에 한줄기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락부락한
인상이었지만 강자 앞에선 비굴한 면모도 지니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아닙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주인님께 보여드리고 처리할 생각에…아, 주인님 앞에
서 다른 움직임이 있으면 그대로 제가 처치하려 했습니다."

"말은 잘 꾸며되는 군. 변명은 딱 질색이다."

"네, 시정하겠습니다."

괴상한 모습으로 등장한 세 청년에게 테리우스도 구경꾼들도 썩 내키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내
저었지만 단 한사람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이린은 한 눈에 그들이 자신의
흑기사이며 수행원인들인 것을 알아차렸다.

'아! 아처, 아르테니, 파라도 다들 무사했어! 정말 고마워 정말…….'

아이린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들이 살아 있음을 반가워했다. 아이린의 눈에 눈물이 흐르자, 일
라이저의 손을 쥐고 있던 테리우스가 그녀를 뒤로 제쳐버리고 아이린에게 다가서서 묻는다.

"왜 우는 거냐. 혹시 저 녀석들이…."

아이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쳇, 명이 꽤 질긴 녀석들이로군. 이봐! 수문장! 그 녀석들을 쉴 수 있는 곳에 안내해서 치료하
도록 해라."

테리우스의 뜻하지 않는 배려에 아이린이 조금 의아해했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을 바
라보자 그가 멋쩍은 듯 짧게 말했다.

"저 녀석들이 이곳에 있어야 네가 안나갈 거 아냐. 이런 젠장."

"고마워."

"고맙긴 뭘 고마워 내 집에서 공짜로 먹고 잘 생각은 하지도 마라 쳇! 저리 비켜 구경났어!! 내
눈에 걸리며 죽도록 패 줄 거니까 빨리 꺼져!!!"

더 이상 아이린이 자신의 저택을 나가지 않을 거라 확신한 테리우스가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며 홀을 나가버렸다.

테리우스의 손에 제쳐져버린 일라이저는 잔뜩 겁을 먹은 상태로 자리에 쓰러져버렸고 세실리
아와 레베카가 그녀를 일으켜 부축했다.

'테리우스! 아이린! 너희가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지만 두고보자.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거야. 테리우스!! 가만 두지 않을 테다.'

일라이저는 두 손을 꽉 쥐며 바르르 입술을 떨며 테리우스에 대한 앙갚음을 다짐했다.

*

아이린이 테리우스의 저택에서 머물게 된 지 벌써 5개월이 흘러가고 있었고 그 동안 겨울과 봄
이 지나고 어느덧 푸름이 울창해진 여름이 다가왔다.

한가로운 휴일에 아이린은 과제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런 그녀를 훼방하는 것이 테리우
스의 몫이었다.

"야, 그렇게 하면 성적이 좋아지기라도 하냐? 지난번에도 밤새 공부하더니 성적은 별로였잖아.
그냥 쉬는 날에는 쉬라고 있는 거야."

테리우스의 비꼬는 말투를 처음에는 참아 줄만 했지만 계속해서 투덜거리자 아이린도 점점 인
내심에 한계를 느껴가기 시작했다. 물론 테리우스의 저택에 임시로 머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공짜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린은 아침저녁으로 테리우스의 방을 청소하고 그의 차
를 담당했으며 그녀의 수행원들은 이 집의 하인들과 같이 식사하고 일했으니 제 몫을 다 한 셈
이다.

게다가 테리우스 덕에 학교에서는 다들 아이린에게 말 걸기조차 힘들어하고 여자들은 일라이
저를 필두로 그녀를 간간이 괴롭히기 일쑤였다.

"그만 좀 유치하게 굴어!!!!! 남이야 성적이 어떻게 나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에 앉아 있는 테리우스를 씩씩거리며 바로 보는 아이린의 모습이
그는 마냥 좋았다.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 다는 점이 좀 껄
끄러운 사실이었지만. 그러다 멀리 아이린의 세 수행원들이 정원 청소하는 모습이 테리우스의
눈에 들어왔다.

"헌데 너희 수행원들은 매일 저렇게 까만 재를 얼굴에 바르고 다니는 거냐? 집이 무너진 충격으
로 이상해진 거 아니냐?"

테리우스는 고개를 돌려 애써 아이린의 화난 눈빛을 외면하면서 딴청을 피웠다. 그는 그녀의
수행원들이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니 든 넝마조각을 걸치든 아무 관심 없었다. 다만 그런 점들
을 꼬집어 말하는 건 그녀의 성질을 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내 수행원들이 어떻게 하고 다니든 여태껏 관심도 없었다가 지금에서야 말하는 이유가 뭐야.
나한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야…나 지금 공부해 둘 것이 많아서 너랑 실랑이 벌일 시
간 없어 테리우스."

어느 순간부터인지 아이린이 자신에게 뭐라고 말하든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데본 제국
의 대마왕이라는 자리에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는 그녀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린은 테리우스를
옆집 친구처럼 대했고 그 역시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토시도 달지 않았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7장 *132* 학원편(32)-2

"쳇, 누가 하고싶은 말이 있다고 그랬냐? 쉬는 날 공부하는 거나 얼굴에 까맣게 재를 바르고 다
니는 게 비정상적이란 소리지. 그리고 마법 공부를 그렇게 책만 들여다본다고 알아지나? 실습
을 해야지 실습을…누가 가르쳐 줬는지 지난 번 검술 시험 때 보니 엉망이던데 너희 이상한 수
행원들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나 보네? 검술은 원래 수행원들이 책임지고 가르쳐줘야 하는 거
아니냐."

테리우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아이린의 신경을 자꾸 건들었다. 그녀의 볼이 조금씩 붉어지
기 시작했고 마냥 여리고 부드러울 것만 같던 작은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꽈악 쥔 상태로 부들부
들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행원들과 테리우스의 저택에서 머물게 되면서부터 그들과 아이린이 이야기
를 나눈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원인은 바로 언제든 그녀의 주변에 서성이다 깜짝
등장하는 테리우스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아이린이 자신의 수행원들과 담소라도 나누려고
들면 등장해서 방해하곤 했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학교에서도 테리우스의 시선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친구 하나 없는 아이린
이었으니 지금 그의 말이 그녀의 신경을 건들고 남을 것이다.

"테리우스…."

아이린이 낮은 목소리에 하나하나 힘을 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음성에는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그리고 그 화를 참아내고 있는 지를 고스란히 표현했다.

뚝!

그녀의 오른손에 쥐어진 나무 펜대 허리가 끊기면서 작은 단말마를 내뱉었다. 생각 같아서 화
를 내고 이 집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 수행원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곳이 없었고 수중에 땡전한푼 없는 가난한 신세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돈을
벌 확률도 그나마 영이었다. 늦은 봄 한 번 이 집을 나가려고 시도했지만 눈앞에 얄미운 녀석
의 훼방 덕에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녀석은 그녀 앞에서 여전히 눈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화난 모습을 즐거워하는 듯 무서워하는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거참, 내 이름 한번 무섭게 부르는 군. 좀 부드럽게 부를 수 없어? 아무래도 넌 숙녀가 되는 법
부터 배워야겠다."

그의 왼쪽 입 꼬리가 위로 휘어져 살짝 올라간 걸 본 아이린은 약이 바짝바짝 올랐지만 참았
다.

"테리우스 참는데도 한계가 있어."

"뭘 참았다는 거냐? 그렇지 말고 책 덮고 나와 호수로 소풍가는 게 어때?"

그가 맞은 편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쿠키를 한 조각 입에 물며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녀가 자신의 억지에 맞춰 줄거라 생각했다. 분명 지금 읽고 있는 재미없는 책을 덮고 그와 시간
을 보내줄거라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생각이 빗나가고 있음을 몰랐으니.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계속해서 마주보고 있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답답한 벽을
만들어줬다.

아이린에게 마법과 검술을 익히는 것은 한시가 급하게 중요한 일이었고 그녀가 가야할 길은 먼
데 그에게 묶여져 꼼짝하지 못한 기분마저 들었던 것이다. 단지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 그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바보 같았다.

"그만 나가겠어."

그의 집을 나간다해도 뾰족한 대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린은 어려운 선택을 선포했다. 이
에 테리우스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응대한다.

"괜한 소릴 하는 걸 보니 자존심이 좀 상했나보군. 방금 한 말은 안들은 걸로 할 테니 그만 나가
자."

아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테이블을 양 손바닥으로 세차게 부딪치
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억지 그만 부려! 왜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너 아닌
사람과는 말도 하지 못하게 하고 공부할 때도 산책할 때도 심지어 식사할 때까지 내 곁에서…
휴, 정말 숨이 막혀 머릿속이 텅 빈 인형 같은 기분이 들어…그만 이곳에서 나갈 거야. 예전엔
이렇지 않았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끝을 흐리며 몸을 튼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그제
야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녀가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
이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만을 주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의 눈에서 그녀가 차츰 멀어지려고 발걸음하자, 그가 붙잡듯 입을 열었다.

"널 보호 해준 거야. 젠장, 그렇게 가버리지 마! 널 보호해 준거라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윙윙거릴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바라본 아이린의 눈동자에 공허함과 그에 대한 실망스러움이 묻어나 있다는 걸 확인한
테리우스는 괜히 짜증이 났다.

"이곳은 겉으로 보기에 멋져 보일 뿐이야. 속은 시커멓게 썩어서 그 냄새에 질식할 정도라고…
넌 너무 순수해서 그 독한 냄새에 질식하고 말 거야. 난 널 지켜주려고 그랬던 것 뿐이야. 제기
랄!!!"

"테리우스, 왜 너만 생각해? 날 보호해 준 것이 아니라 날 더 약하게 만든 거야. 그리고 네게 보
호받을 만큼 약하고 싶지도 않아. 누가 그래? 내가 순수하다고 네가 그러길 바란 거 아닐까? 그
만 둬, 난 지금 내 수행원들과 이곳을 떠날 거야. 날 막는다면 두 번 다시 너와 말하지 않을 거
야."

"뭐?"

아이린은 그 길로 자신의 배낭을 챙겨 수행원들을 데리고 테리우스의 저택을 떠나갔다.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붙잡으라고 테리우스에게 권했지만 그는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
의 뒷모습을 끝까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마가린은 그 동안 듬뿍 정이 든 아이린이 떠나자
눈물을 펑펑 쏟아냈고 다른 하인들도 섭섭한 얼굴을 하며 그녀를 배웅했다.

그러나 세 명의 수행원들은 까만 얼굴에 연신 웃음꽃을 활짝 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신 오
고 싶지 않은 테리우스의 저택에 안녕을 고했다.

'널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 널 숨막히게 했다니…쳇,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냐! 너란 여자는…잠
깐만, 예전에 이렇지 않았다니 분명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무슨 뜻이지?'

테리우스는 떠난 그녀의 방에 서서 그녀가 했던 말들을 되새김질 하다가 무엇인가를 놓친 듯
한 기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치 자신과 예전에 함께 지냈던 기분을 들게 한 그 말 한마디
가 마음에 걸렸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7장 *133* 학원편(33)

*

폐허가 되어버린 채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아이린의 집터에 여기 저기 잡초들이 푸른 싹을
터 자라나고 있었다. 아처와 아르테니 그리고 파라도는 그들의 안식처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들의 얼굴을 깨끗이 씻어내는 일이었다. 테리우스에게 얼굴을 알리지 않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썼던 까만 재가 그렇게 오랜 시간 그곳에서 머물며 일상생활에 하나로 자리잡을 줄
은 몰랐던 그들이었다.

"난 매일 아침 이렇게 잘생긴 얼굴에 검은 칠을 해야한 다는 것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내 보여야
하는 의무감을 지키지 않는 것 같아 그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움화홧!!!"

어느새 아르테니의 말투를 비아냥거리듯 따라하며 파라도가 젖은 머리칼을 뒤로 제쳐 늠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에 질세라 뒤에서 세수를 막 끝내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아르테니가 다 쓴
물을 실수로 엎지른 것처럼 파라도의 신발에 떨어뜨리며 말한다.

"이크! 이런 파라도 이를 어째? 그러게 주변 상황부터 파악하고 농담을 하는 거다 알겠냐?"

"이씨, 야! 아르테니 내가 없는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젠장!! 다 젖었잖아."

"널 두고 왔어야 하는데 괜히 데려왔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든다."

"누가 누굴 데려왔다는 거야. 대장! 이 녀석 말하는 것 좀 보라고!"

"임마, 대장이 지금 너 말을 들을 시간이라도 있을 것 같아? 아처, 설계는 잘 되어 가는 거냐?"

밑 둥이 훤하게 잘려 나간 큰 나무에 걸터앉아 설계도에 필기를 하고 있는 아처가 대답 대신 고
개를 좌우로 흔들며 조용히 하라며 손짓했다. 멀리서 주변을 살펴보고 오던 아이린이 세 수행
원들이 있는 곳에 뒤늦게 등장했다.

"정말 셋이서 하루만에 집을 지을 수 있는 거야?"

세 수행원들이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을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아이린이 되물었다.

"그럼요, 저희는 못하는 게 없다고요 공주님. 그러니 염려 마시고 내일 학교에 갈 준비나 하세
요. 오늘 하룻밤만 천막을 치고 자면 되고 내일은 우리들의 집이 짠하고 완성되어 있을 거니까
염려 마세요. 움화홧!!! 이 파라도를 믿으세요 공주님."

통쾌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자신감을 내보이는 파라도
의 모습에 아이린이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아르테니가 주먹을 쥐어
입에 가져다 대며 헛기침을 하고 나서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한다.

"흐흠, 저 녀석 혼자라면 믿기 힘든 일이겠지만 저와 아처가 하는 일이니 믿으세요 공주님. 하
하, 괜히 흑기사였던 것이 아니니까요. 궁전은 아니지만 작은 통나무집은 만들 수 있습니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녀석의 집에서 나오면 다들 머물 곳이 없어서 힘들까봐…정말 다행이
야. 고마워! 아처, 아르테니, 파라도 너희들이 없었다면 나 정말 힘들었을 꺼야…."

아이린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러자 파라도가 그의 주군에게 다가가 자신 역시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면서 다독였다.

"공주님도 참 저희는 언제가 공주님과 함께 할거라고요. 울지 마세요 공주님! 엉엉엉!!!!"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아르테니가 아처에게 작게 속삭였다.

"정말 하루만에 완성할 수 있는 거냐? 아무리 작은 통나무집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셋이서 무리
아냐?"

아처가 설계도의 두 번째 페이지를 넘기며 대답한다.

"평범하게 짓는다면 무리지…하지만 마법을 쓴다면 셋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지금 문
제는 통나무집이 아닌 것 같다."

"무슨 소리야?"

"두 번 다시 그 테리우스 녀석이 공주님을 보호하느니 안 하느니 하는 결정권을 주지 못하게 할
거야. 내일은 학교에서 방학을 하고 약 두 달간 집에서 보내실 거야. 우린 그 기간에 공주님께
마법과 검술의 개인 교습을 완벽하게 해드려야 해."

아처의 결연한 표정에서 아르테니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 자신과 파라도에
비해 테리우스의 저택에 머물었던 생활은 아처에게 가장 최악의 경험이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주군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여자로 바라보는 마음이기에 테리우스 안에 갇혀있는 듯한
아이린의 모습이 아처에게 하나하나 상처로 박혔을 것이다.

어둠의 장막이 깔리고 가까운 숲에서 벌레들이 그들만의 리듬을 내며 자장가를 불러댔다. 황금
빛의 별들이 하늘에 촘촘히 박히기 시작하고 구름 사이의 은은한 빛의 달이 모습을 드러내 아
이린의 얼굴을 비추었다. 잠든 수행원들이 있는 천막에서 나와 홀로 밤 산책을 하던 아이린이
그녀를 비추는 달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곳에서 벗어나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그 녀석
이 보고 싶은 걸까? 내가 정말 한심스러워.'

매시간 얼굴 마주했던 테리우스로 인해 답답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보
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잠이 오질 않다니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린은 도리
질을 하며 가까운 호숫가로 발길을 옮겼다.

집터를 치우고 설계하느라 힘들었는지 곤히 자고 있는 세 명의 수행원들을 뒤로 한 채로.

한 여름 밤의 온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호수에 발을 담그자, 호수 위로 불던 시원한 바람
이 그녀의 머리칼을 씻겨주듯 불어왔다.

"갑자기 모든 게 귀찮아졌어. 다 던져 버리고 내가 살던 동굴에서 살았으면 좋겠어. 아무도 없
는 곳에 아빠와 엄마와 내가 있던 그곳에서…공부하는 것도 그들과 어울리는 것도 그들을 이해
해야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 어쩌면 하고 싶었던 일들이 사실은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는지
도 몰라. 그 녀석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는 나조차도 싫고 귀찮아. 어떻
게 해야할지 네가 알려 줄래?"

아이린은 자신을 줄곧 바라보고 있는 달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물었다. 그러나 되돌아오
는 것은 질문을 던지기 전부터 비추던 은은한 빛과 정적뿐이다.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임
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잠시 스쳐 지나간 것이길 바랄 뿐이다.

아이린에 산책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들자, 그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아처가 눈을 살짝 떴
다가 다시 감고 잠이 들었다.

천막의 어둠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면서 아침을 알리듯 새들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
다.

"으앗!! 파라도!! 이 괴물아!!! 발 좀 치워!! 퉤퉷!! 읔, 어디다 발을 올린 거야."

아르테니가 자신의 입술을 정통으로 내리친 파라도의 발을 집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쳤다. 커튼 너머 아이린은 벌써 일어나 교복을 입은 채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처는 밖
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늦잠을 잔 아르테니와 파라도가 황급히 준비하고 천막에서
나왔다.

"좋은 아침이야! 아르테니, 파라도. 응, 아처가 아침을 준비했어. 야채 죽인데 생각보다 맛있
어."

아이린이 밝은 목소리로 야채 죽을 먹으며 말하자, 죽을 젓고 있던 아처가 친구들의 그릇에 죽
을 담으며 말했다.

"생각보다라뇨? 공주님 더 드시고 싶지 않으신가 보네요."

"어? 아, 난 그냥…맛있다는 말을…."

아이린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조금 미안하다는 듯 다음 말을 이으려 하자, 파라도와 아르테니
가 어느새 자리를 잡고 죽을 맛보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어이쿠야, 대장 정말 무지하게 생각보다 맛있는 걸."

"아, 나도 생각보다 맛있어!!!"

파라도의 아르테니에 힘입어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헤헤, 것 봐 생각보다 맛있다니까."

"공주님 안 늦으셨습니까?"

아처가 비틀어진 모자를 고쳐 쓰고 국자를 든 채로 팔짱을 끼며 아이린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
녀가 깜짝 놀라며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 수행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학교로 향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처가 고개를 돌려 늦잠을 자고 혼자 아침을 준비하게 만든 두
명의 친구들을 바라보며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생각보다 맛있다고 생각보다?? 그만 먹어!! 이건 다 버려야겠군."

"아…아냐!! 아휴, 이렇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맛있는 걸 왜 버려 대장."

"맞아,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아주 훨씬 맛있어. 파라도 돼지처럼 먹는 걸 보면 모르겠어? 하
하!! 많이 먹어야 오늘 집도 빨리 짓지 안 그래?"

*

마나아카데미의 한 연구실에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이른 아침부터 다칸을 맞이하고 있었다. 라
무도라욤 마법사의 얼굴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은 반면 다칸은 꽤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
마주 있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태도를 보였다.

"절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제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아셨는지 전 주군의 명령으로 아리스샘터
에 머물고 있었는데…."

한 시간을 넘게 양들로 그득한 연구실에서 머물게 한 라무도라욤 마법사의 이상한 태도에 답답
한 나머지 다칸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허허허!!!! 부탁이 있어 불렀네만 아직까지도 자네가 적합한지를 고민하고 있던 중일세. 함,
이 검을 가지고 아리스샘터로 가게나. 그곳에 변괴가 일어날 때 그 검을 검 집에서 열어보면 알
게 될 걸세. 허나 그 전에 절대 열어서는 안되네."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책상 위의 온통 검은빛을 내고 있던 검이 다칸의 손
에 옮겨졌다.

"아리스샘터에 변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이 검은?"

"호호호!!! 이것으로 내 일은 끝난 거 같구만, 명심하게 그 검 집을 제때에 열지 않으면 자네의
꿈도 사라질 걸세."

그리 친한 관계가 아니었던 라무도라욤 마법사와의 이상한 만남을 가진 채 다시금 아리스샘터
로 향하던 다칸은 그가 준 검은빛의 검 집에 검은 손잡이를 지닌 검을 바라보며 인상을 그었
다.

"내 꿈이 사라진 다라…."

*

마나아카데미의 여름 방학 식을 위한 파티가 한창 준비중이었다. 그들 속에 일라이저와 그녀
의 일행들은 인적이 드물고 어두운 곳에서 학생들이 아닌 낯선 자들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 여학생이야. 너희들이 일을 잘 진행 해준다면 보상은 톡톡히 치르게 해 줄 테니 실수
없도록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검은 두건과 망토를 둘러 쓴 일곱 명의 괴인들을 세실리아와 레베카는 다소 무서운 듯 부들부
들 떨면서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언니, 일라이저님이 정말 일을 벌리실 생각이신가 봐."

"보면 모르겠어. 저 사람들 눈빛을 봐. 난 무서워."

게다가 일라이저가 안고 있던 하얀 털에 위로 찢어진 듯한 눈을 지닌 검은 고양이가 날카롭게
야옹거리며 울어대자, 분위기는 더더욱 음침해져 갔다.

"아이린, 오늘이 네가 학교에 나오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후훗, 설마 널 따돌리고 혼냈던 걸
로 끝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여름 방학이 후에 널 보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만들어
줄 거야. 그 사이 테리우스를 내 남자로 만든 후 그 녀석까지 망하게 만들어 줄테니 두고 봐"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7장 *134* 학원편(34)-1

*

아이린은 여느 때와 같이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 채 혼자서 다녔다. 그렇다고 주눅이 든
다 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당당한 걸음으로 자신을 외면하
는 자들 얼굴을 응대하면서 걸어다녔다. 더구나 오늘은 한 한기를 마치는 파티 날로 다들 끼리
끼리 모여 들썩이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더욱 눈에 띄었다.

"한 학기를 마치면서 내가 배운 게 뭐였는지 참…기억에 남는 건 테리우스와 싸웠던 기억밖에
없어…."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 보단 테리우스 저택에서 하녀로 지냈던 기억이 더
많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교양을 담당했던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 미첼 교수를 다음 학기에는 부디 안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어디선가 미첼 교수의 목소리가 크게 들
려왔다.

[학생들은 지금 모두 예의 바른 발걸음으로 파인 광장으로 모이도록 하세요. 시끄럽게 소리내
거나 뛰어서는 안됩니다. 곧 황금 고슴도치 경기를 시작할 테니 배치된 좌석을 찾아 자리해 주
세요. 신입생들은 2학년 학생들을 뒤따르면 됩니다. 광장에 도착하면 각 학년의 담당 교수님이
학년 뱃지 색을 띈 깃발 옆에 서 계실 거예요. 그럼 다들 한 시간 안에 자리 이동을 마치세요.]

미첼 교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천장에 장치 된 나팔관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에 상급 학생
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신입생들만이 처음 맞이하는 방학 식으로 상급생들이 왜 소리 지르
며 날뛰는 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린 역시 처음 듣는 황금 고슴도치 경기에 대해 알지 못
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들 바삐 움직이며 각자 가입한 클럽의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는 사
이에도 아이린은 소외감을 느끼며 귀퉁이에서 학생들의 움직임을 살펴야만했다. 그들이 어디
로 향하는지를 파악한 후 뒤따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황금 고슴도치 경기라는 게 대체 뭘까? 테리우스 녀석 때문에 클럽에도 가입을 못해서 가까운
선배도 없으니 힘들구나……나도 친구가 있었으면…."

눈앞에 많은 학생들이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며 웃음소리와 함께 이야기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마음 한 구석이 싸늘해지는 듯 했다.

아이린 혼자만이 정지된 시간에 멈춰 있는 듯이 사념에 잠기고 있을 때 누군가 움직이는 무리
들에게 밀려 균형을 잃고 몸을 갸우뚱거리다 아이린과 부딪치면서 함께 넘어져버렸다.

"아얏! 아, 미안! 미안해! 괜찮아? 안 다쳤어? 아! 어쩌면 좋아 정말 미안해. 오늘까지 제출할 과
제물이… 이런 다 흩어져 버렸어. 난 항상 이 모양이야. 다들 황금 고슴도치 경기를 왜 저렇게
좋아하는 지 모르겠어. 이해가 안돼. 어, 정말 괜찮은 거야? 다친 곳이 있으면 치료실에 함께 가
서 치료를 받도록 해야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중에 무척 미안할 것 같아. 어머, 내 과제물을
누가 밟고 있어! 야! 저리 비켜봐!!"

"어? 응, 난 괜찮아……."

아이린은 자신을 밀어 함께 넘어진 여학생을 바라보며 얼떨결에 대답했다. 여학생은 잘 다듬어
지지 않은 채 헝클어진 담갈색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위로 올려 핀으로 고정했고 앞 머리칼은
그녀의 검은 테 안경을 조금 가릴 정도로 내려와 있었다. 안경 너머의 검은 눈동자는 자신의 바
닥에 떨어진 과제물을 열심히 찾아서 정리하는데 바쁜 듯 했고 차림새도 이곳의 여학생들과는
상당히 달라 보였다.

강의실 한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머리 숙여 공부에만 열중하는 학생의 이미지를 모두 가
지고 있어 보였다. 아이린이 자신의 옷을 털며 중얼거리는 동안 어느새 흩어진 과제물들을 열
심히 모아들고 온 여학생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안녕, 난 크루바티에서 온 로잔느라고 해. 어? 옐로우 뱃지네? 같은 신입생이구나. 아! 그러고
보니 낯이 익어 여학생들이 모이면 이야기하는 아이린 아카리나스 맞지?"

꽤 오랫동안 친한 벗처럼 로잔느는 아이린에게 악수를 하며 빙그레 웃었다.

"응, 그래. 헌데 여학생들이 모이면 내 이야길…."

"어? 뭐라고? 안 들려 안되겠다. 다른 곳으로 가자."

점점 출구 쪽으로 몰려드는 학생들 때문에 시끄러워지자, 로잔느가 한쪽 귀를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그리고 로잔느의 손에 붙잡힌 채 아이린은 한적한 연구실로 들어서게 된다.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산만한 로잔느는 연구실에서 혼자서 이것저것 정리하면
서 아이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로잔느의 행동에 특별한 악의도 없는데다가 순해 보이
는 첫 인상이 좋았던 아이린은 별 거부 반응 없이 조용히 기다렸다.

"아, 오늘이 방학 식이라 내일부터는 연구실을 사용하기 힘들거든 게다가 이 과제물은 교수님
이 내게 특별히 내 주신 거라 오늘까지 제출해야만 이번 학기 성적이 반영이 되는 거라…사실
아직 마무리를 다하지 못했거든. 참, 우리 서로 소개했었니?"

코끝으로 흘러내리는 큰 안경을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던 로잔느가 몸을 틀어 뒤에
서 있는 아이린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 로잔느라는 여학생은 머릿속에 자신이 공부하는 것
에 대한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응, 아이린 아카리나스라고 해. 넌 로잔느 크루바티라구? 헌데 로잔느 바쁜 것 같은데 난 그
만…."

아이린은 자신이 혹 방해가 되는 것 같아 연구실을 나가겠다는 손짓을 하자, 로잔느가 펄쩍 뛰
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안돼! 내가 아까 그 복잡한 곳을 지나갔던 이유가 바로 널 만나기 위해서였어. 라무도라욤
교수님이 널 황금 고슴도치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 연구실에 데리고 있으라고 당부하셨거든."

"라무도라욤 교수님? 라무도라욤 마법사 할아버지를 알고 있어?"

로잔느는 가지고 있던 두꺼운 책을 펼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분은 마법에 관해서 정말 많은 것을 알고 계셔. 물론 그래서 교수님이시겠지만 특히 내
가 가장 관심 있어하는 원자 축소에 관한 마법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지니고 계시지. 내가 말했
었니? 우리 크루바티의 장미 축제를 만든 게 나란 걸. 어쨌든 이곳 여학생들은 공부보다는 반려
자를 만나는 게 목적인 것 같아서 한심해 보여. 아이린 넌 아니겠지? 물론 나도 줄리앙이라는
남자 친구가 있긴 하지만 그 녀석도 나보다는 연구하는 게 더 좋다니 우린 참 잘 맞는다고 할
수 있지. 곧 있으면 줄리앙도 올 거야."

"왜 황금 고슴도치 경기를 내가 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거니?"

"아, 그건 나도 잘 몰라. 솔직히 그 경기는 개인적으로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권하고 싶지
않아."

아이린은 실험도구를 늘어놓으면 뭔가를 만들기 시작하는 로잔느의 맞은 편으로 다가가서 의
문나는 점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너도 신입생이라며 황금 고슴도치 경기에 대해서 알아?"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7장 *134* 학원편(34)-2

로잔느는 아이린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헝클어진 자신의 뭉친 머리카락이 실
험기구 막대에 걸려 엉켜지자, 인상을 쓰며 손으로 풀어내려 애를 썼다.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리던지 해야지 정말 쓸모가 없어. 뭘 물어봤었지? 아! 황금 고슴도치
경기에 대해서 물었지. 물론 내가 신입생이긴 하지만 이 학교에 들어오려고 이곳에 대해 많이
알아 봤으니까. 작년에 황금 고슴도치 경기를 마법 구슬을 통해 크루바티에서 관람했었거든.
물론 불법적인 거였지만…별로 권하고 싶지 않는 경기야. 아주 잔인하다고 표현해야 맞는 경기
지. 바이올렛 뱃지를 단 상급생들의 마법 기술을 볼 수 있는 원시적인 경기라고 할 수 있지. 마
법 기사 시험에 통과한 상급생들이 마나아카데미에서 자체 개발해서 사육한 황금 고슴도치들
을 제압하는 건데 누가 얼마나 빨리 많은 수의 황금 고슴도치들을 제압하느냐에 따라 황금 고
슴도치 왕으로 선정되는 거지."

로잔느는 한시도 쉬지 않고 줄줄이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우면서도 듣는 사람으
로 하여금 빨려 들어가는 마력을 지닌 듯 했다. 요란스럽지 않게 다정한 어조와 귀여운 목소리
로 아이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황금 고슴도치란 건 어떻게 생긴 건데? 왕이 되면 좋은 점이 있는 거야?"

"좋은 점? 뭐, 후계자들 세계가 다 그렇지 뭐. 으시대기 좋은 일이겠지.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난 그 경기를 왜 하는 건지 모르겠어. 황금 고슴도치 녀석들만 불쌍하지."

로잔느가 목덜미를 벅벅 긁어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모습을 본 아이린은 상대가 퍽 털털
하고 소박한 성격을 지녔다고 느꼈다.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왜 자신을 그 경기에 가지 못하게
했는지에 대해선 로잔느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아이린은 황금 고슴도치의 생김새를 눈으로 확
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열심히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로잔느의 등뒤로 조심스레 연구실
문을 열어 나온 후, 방해하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았다. 몰래 빠져 나왔다고 생각한 아이린은
안도의 한숨을 문 옆에서 내쉬었다.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방금 설명 해줬잖아. 라무도라욤 마법사님이 널 그 경기에 가
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다니까!"

갑작스레 버럭 문을 제치고 로잔느가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언성을 높이는 것이 아닌가. 이에
놀란 아이린이 제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휴, 깜짝 놀랬잖아."

아이린이 두 손을 가슴에 얹어 진정을 시키며 로잔느에게 말했다. 그러자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로잔느가 대답했다.

"이런, 또 미안 널 놀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내가 이 모양이야. 주위가 좀 산만하다고 해
야할까? 널 찾으려고 다닐 때는 널 못 찾고 연구실을 먼저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걷다가는 또
너와 부딪쳐서 찾고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넌 경기에 가면 안돼. 정말 신신 당부하셨거든. 그
래도 네가 고집을 피운다면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넌 데본의 귀족들 앞에서
도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면 정말이야?"

"나에 관한 소문이 꽤 많았나 보구나? 널 만나서 반가웠어 로잔느. 다음 학기에 강의실에서 만
나면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헌데 난 그 경기 꼭 보고 싶어. 이유도 모른 채 여기
에 숨어 있는 것처럼 있는 건 좀 그렇잖아."

아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말하자, 로잔느는 말리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
며 대답한다.

"좋을 대로 해. 난 해야할 실험도 많고 시간도 없고 널 붙잡을 설득력 떨어지는 말로 시간낭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참, 아이린 아주 잠깐 만났지만 너 괜찮은 친구 같아 맘에 들어."

로잔느가 펜대로 정수리 부분을 긁어대며 베시시 웃었다.

"고마워, 로잔느. 나 역시 네가 맘에 들어.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사실 난 이곳에
와서 친구를 사귀어 보지 못했거든. 소문으로 알겠지만 나 따돌림을 받는 중이거든."

"후훗, 바보처럼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널 무시하는 애들에게 왜 따돌림을 받는 거라 생각하
니? 보다시피 나 역시 애들과 어울리지 않아. 난 책과 어울리지."

"그럼 너도 따돌림을?"

아이린의 물음에 로잔느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대답한다.

"내가 왜 따돌림을 당해? 난 책과 어울리고 있는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데. 오히려 내가 모
든 애들을 따돌리고 있는 중이야. 뭉쳐서 다니는 게 지금 당장은 좋겠지. 그런 건 현재에 대한
순간의 만족감일 뿐이야. 중요한 건 미래의 그 애들이 다들 어디 있을까 하는 부분이지. 어쨌
든 광장으로 가는 길은 푯말로 표시되어 있어 찾기 쉬울 거야. 경기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끝나면 이곳으로 올래? 방학 식 파티는 함께 참가하도록 하자."

로잔느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이린의 마음에 와 닿았다. 정말 좋은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어
벅찬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응, 고마워 로잔느. 끝난 후 이곳으로 오도록 할게."

"내가 좀 부산스럽긴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시간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야. 기다릴 테니 꼭
와."

"알았어. 꼭 올게."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생각에 아이린은 조금은 든든한 마음으로 황금 고슴도치 경기장으로 발
걸음을 돌렸다.

*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7장 *135* 학원편(35)


로잔느의 말대로 황금 고슴도치 경기장을 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 전체가
온통 축제 분위기로 술렁이고 있었고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황금 고슴도치 경기장을 가는
푯말들이었다.

검은 가죽 위에 황금색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밤에도 그곳에서 다른 행사를 할 예정이었는지
야광 빛을 낼 수 있는 잉크가 사용되었다. 경기장 안에 발을 딛은 아이린은 일순간 주변에 정적
이 맴돌고 있음에 자신 역시 숨을 죽이고 발걸음을 멈추다가 갑자기 터져 나오는 함성에 또 한
번 놀래야만 했다.

"분명 뭔가 굉장한 것이 나왔나 봐. 빨리 가서 봐야겠어!"

돌로 지어진 경기장의 긴 통로를 뛰어간 아이린은 드디어 뻥 뚫린 광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
었다.

"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경기장의 규모에 감탄한 아이린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두 눈을 동그랗
게 뜨고 숨을 잠시 멈추었다. 그곳에는 마나아카데미의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마야 지역의 국민
들도 참석해 있었고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학생들이 모여 교수들의 지도하
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전 함성의 원인이었던 것은 바로 경기장 중심에 모여 있는 황금 고슴도치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책 속에서 나왔던 평범한 고슴도치의 크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으니 덩치는 황소만
했고 몸을 움츠리면 큰공처럼 보이다가도 멈춰 서서 가시들을 꼿꼿이 세울 때면 성난 괴물처
럼 그 날카롭게 빛나는 황금 가시에 찔리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황금 고슴도치 열 세 마리가 한곳에 모여 있다가 황금빛 가시들을 활짝 펴 얼마간 부르르 떨더
니 이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만의 언어로 작전 회의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린은 처음 본 생물에 마냥 신기한 듯 계단을 내려다보지 않은 채 황금 고슴도치들에게 시
선을 고정한 상태로 계단을 내려갔다. 곧이어 뿔피리 소리가 웅장하게 경기장 안을 가득 메우
더니 이내 굳게 닫혔던 돌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말을 탄 열 명의 마법 기사들이 등장했다. 그들
은 모두 은빛의 갑옷을 갖춰 입었고 투구에는 보라색 깃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갑옷 안의 적색의 제복에 바이올렛 뱃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법 기사들이 등장하자, 사람들의 함성소리와 박수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황금 고슴도치들이 모두 얼굴을 드러내 험악한 고함을 질러댔다. 그들의 얼굴
은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고 마치 고무로 만들어 놓은 듯한 질감을 지니고 있었다. 위협하는 표
정을 짓자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더 흥분한 듯 소리지르기 시작한다.

"크아악!!!! 크릉 크릉!!!! 크아악!!!!"

쇠 마찰음처럼 들리는 거칠어 듣기 거북한 소리였다. 아이린은 저절로 귀를 막을 수밖에 없었
다.

"와아!!!!!! 없애라! 없애라! 무찔러라! 무찔러라!"

"죽여버려!!! 가시를 뽑아 버려라!!!"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구동성으로 황금 고슴도치를 살인하라는 명령은 아무렇지 않
게 내뱉는다. 아이린은 자신의 귀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너무나 추해 보이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자신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생명을 죽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 단지 눈을
즐겁게 하려고 살육을? 아, 어지러워…….'

아이린은 갑자기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을 탄 마법 기사들은 전력 질주하
여 각자 하나씩 황금 고슴도치들을 맡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처리하느냐에 따라 남은 세 마리
를 먼저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수를 처리한 자가 황금 고슴도치
왕이 되는 것이다.

황금 고슴도치 왕이 된 자는 그 해 졸업식에서 영웅이 되기도 했지만 졸업 후 백 여 마리의 황
금 고슴도치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 전쟁시에도 큰 쓸모가 있지만 죽고 나서도 황금 고슴도치
들의 황금 가시는 마법으로도 보석으로도 큰 값어치가 있었다.

한 마법 기사가 첫 번째로 황금 고슴도치의 등에 창을 꽂고 날카로운 칼로 녀석의 입을 뚫어 피
를 토하게 만들어 죽음으로 이르게 만들었다.

"크우워웍!!! 크웍!!! 크릉!!! 크릉!!! 크우웍!!!!"

황금 고슴도치가 괴로움으로 비명을 지를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은 흥분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보였다.

아이린은 그런 황금 고슴도치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고 머리가 어지러워 학생들이 있는 곳까
지 걸어가지 못한 채 계단에서 주저앉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그때 검은 옷차림의 남자들이 다
가와 아이린을 업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경기가 시작될 때부터 짜증을 내던 테리우스가 첫 황금 고슴도치가 죽어 가자, 인상을 그으며
투덜거렸다.

"아직도 이걸 하고 있다니 유치하기 짝이 없어. 쳇, 시끄러워서 더 있고 싶지가 않잖아. 이 녀석
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어리버리한 녀석이 자리도 못 찾고 어디서 헤매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테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며 비어 있는 아이린의 자리를 바라보다 다시 자리에
앉아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부하들을 시켜서 찾아보라고 할까?"

제로이드가 턱을 매만지면서 경기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옆에서 연신 짜증만 내는 테리우스
에게 물었다. 그러나 바이사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리치며 경기에 집중하
느라 친구의 짜증에 신경을 쓸 세가 없었다.

"옳지!! 바로 그거야! 이런! 옆으로 피해야지. 아, 참 저걸 그냥 피해서 뒤로 올라타서 숨통을 조
여야지!!! 이 멍청아!!! 아!!! 저거 저게 아닌데."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 함성 덕에 시끄러운데 친구 마저 날뛰는 걸 보니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
지는 테리우스였다. 그러나 친구의 짜증에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보이지 않는 아이린이 원인임
을 알고 있는 제로이드는 알고 있었다.

"저 자식을 그냥!"

"테리우스, 참아. 원래 바이사코가 검투 시합을 광적으로 좋아하잖아. 괜히 엉뚱한 곳에 화풀이
하지 말고 내 말대로 아이린을 찾아오라고 부하들을 시켜."

"흠, 쳇! 누가 그 녀석 때문에 화가 났다는 거야."

테리우스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올린 채 몸이 눕혀질 듯한 자세를
하고선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며 제로이드가 입가에 미소를 걸치더니 잠시 후, 자신의 부하를 손짓으
로 불러 조용히 아이린을 찾아오도록 명령했다.

'예전에 그렇지 않았다는 소리가 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말인데도 왜 이렇
게 마음에 걸리지? 그 녀석이 한 말을 생각하면서 왜 그 껄끄러운 결혼식이 생각나는 건지….'

머릿속에 두통이 밀려오면서 머리가 쪼개어질 듯 한 고통이 느껴지던 테리우스에게 누군가 말
을 걸어왔다.

"이걸 갔다 드리래요."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로 눈을 감고 사념에 잠겨 있던 그가 눈을 뜨자, 그 앞에 작은 꼬마 남자
아이가 서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심부름꾼 꼬마인 것 같았다. 손에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
에 빳빳한 흰 봉투를 들고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부하들이 막아섰는데 널 꼭 만나야한다고 해서 내가 허락한 거야. 네게 무슨 편지를 전해야 한
다는데? 꼬마 애가 귀엽잖아. 아, 아무래도 검투는 내 적성이 아닌 것 같군. 그만 이동해야겠
어. 함께 갈래?"

제로이드가 로브를 챙겨 들며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꽤 시끄럽다는 듯 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
했다.

그런데 꼬마 아이에게서 건네 받은 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은 테리우스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
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창백해졌다가 이제는 점점 붉어져가면서 얼굴에 살기가 스쳐 지나가
는 것을 제로이드는 목격했다.

"이 편지 누가 준거냐!! 어서 말해!!!"

"읍,…아저씨!!! 흐흡!!!"

화가 난 테리우스가 다짜고짜 꼬마 아이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 조이며 묻자, 숨막힌 아이의 얼
굴이 새파랗게 변하면서 땅에서 멀어진 다리를 바둥거렸다. 깜짝 놀란 제로이드가 곧바로 테리
우스의 손목을 잡아채며 아이의 숨통을 트게 만들어줬다.

"테리우스! 꼬마 아이잖아!! 대체 왜 그래?"

바닥에 내쳐진 꼬마가 겁을 먹은 채 눈물을 터트리며 말했다.

"우아앙!!!! 전 몰라요!!! 그냥 아저씨에게 가져다주라고 어떤 누나가 시켰어요. 엉엉엉!!!!!…그
러면 사탕이랑…과자랑 준다고…엉엉엉!!!!!!"

꼬마의 말을 들은 테리우스가 주변을 살폈지만 의심쩍은 자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 한번 편지를 살폈다.

[아이린을 납치했다. 그녀를 살리고 싶거든 혼자서 검은 나무 탑 꼭대기로 와라. 황금 고슴도
치 경기가 끝나기 전에 오지 않으면 아이린은 죽는다. 아이린을 살리고 싶다면 와서 나와 거래
를 하라.]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이제는 테리우스의 귀를 시끄럽게 만들지 못했다. 그는 제 정신
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폭발하는 자신의 화가 그를 장악해 버린 것이다. 제로이드가 없었다면
아마 아무 것도 모른 채 심부름만 했던 그 아이의 목숨도 아무렇지 않게 해치워 버렸을지도 모
를 일이었다.

"어떤 간 큰 녀석이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군. 이거 꽤 재미있는 일이군. 테리우스 녀석이 일
을 크게 벌이지 말아야 할텐데 하지만 이번 일은 괜히 나도 화가 나는 걸. 아이린을 납치하다
니…."

이미 경기장에서 빠져나간 테리우스의 빈자리에서 구겨진 편지를 펼쳐 보며 제리이드가 중얼
거렸다. 그리고 다정한 태도로 겁에 질린 아이를 다독이며 부하들에게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라
고 명령했다.

"흥, 우리가 납치되었다고 하면 그 녀석 그냥 코웃음 치고 말걸? 하여간 아이린에게는 유별나
군 그래. 이겨라!!!! 이겨!!! 그렇지!!!! 얏호!!! 바로 그거야!!"

바이사코가 경기를 관람하다가 제로이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는 경기를 관람하면서도 테
리우스에게 벌어진 상황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제로이드
가 대답했다.

"물론 우리가 납치되었다면 알아서 살아와! 이렇게 답신이나 보냈겠지. 그러니까 이게 보통 재
미있는 일이야. 테리우스 녀석이 누군가를 구하러 직접 행차하신 다니."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그랬다면 이해가 된다만, 만약 누군지 알고서 이런 일을 벌였다면 그 납
치범 정말 불쌍하군. 이크!!!! 내가 한눈 판 사이에 황금 고슴도치에게 습격을 받다니 저런 멍청
한!!"

"난 그만 갈 테니 마저 구경하고 와라! 바이사코."

*

'만약 아이린의 털끝하나라도 다치게 했다면 세상에 태어난 것조차 후회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없애 줄 테다! 망할 자식들!!! 납치를 하려면 날 할 것이지 치사한 것들!!!'

레드문을 왼손에 쥔 채로 검은 나무 탑 계단을 쉽게 날아 올라가면서 테리우스는 이를 악물었
다.

납치범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려고 하는지도 궁금했지만 그것보다 아이린의 안위가 가장
걱정된 그였다. 아이린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에게 볼일이 있어 그녀를 이용했다는 점이 참을
수 없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0^*

다음 8장 되돌아온 사랑편 기대해주세요....총총총...^^*

참 음력새해까지 많이 여행하고 만나고 느끼고

세상은 넓고 사람도 많고 아주 작은 존재감도 느끼고

겨울산은 오르지 못했지만 나중엔 꼭....^^*

이제 눈에 익은 리플님들이 많아졌네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이곳에서 여러분 만나서

즐겁습니다.....^^*(추신-너무 게으른연재 ㅜ.ㅜ...죄송해요.)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8장 *136* 학원편(36)-1

③말괄량이프린세스 8장 되돌아온 사랑

아이린의 눈은 천으로 가려져 보이는 건 온통 암흑뿐이었고 두 손과 두 발은 밧줄로 꽁꽁 묶인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기절했다가 의식을 되찾은 아이린은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에 대
해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보세요! 누구 없어요! 거기 아무도 없나요!"

마치 어둠이 코끝에 걸려 숨쉬기조차 버거운 기분이 들었다. 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그녀 몸을
감싸는 듯 했고 왠지 모를 공포감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엄습해 오는 것 같았다. 주변에 인기
척을 느낄 수 없어 더욱 공포감이 그녀의 목을 조여 오는 듯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칼바람이
세찬 소리로 그녀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 폐쇄 된 공간 어디에 작은 틈새가 있는
듯 하다.

아이린의 분홍빛을 띠던 볼은 어느새 지저분한 먼지로 얼룩이 졌고 그녀의 어두운 금빛 머리칼
이 헝클어진 채 땀으로 젖어 있었다. 옷의 끝자락들이 조금씩 찢겨져 나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녀를 납치할 당시 무의식 중으로 반항했던 흔적으로 보인다.

"아무도 없어요!!! 여보세요!!!!"

이미 갈라질 때로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쳐봤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휑 한 바람 소리 뿐이다. 그
녀가 이렇게 공포에 둘러싸여 안에서 누군가를 애타가 부르고 있을 때 두터운 돌 벽 밖에서는
검은 두건을 쓴 괴한들이 모여 서 있었다. 그들에게 돌 벽을 통한 아이린의 목소리가 아주 작
게 들려왔지만 그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눈치다.

"난 이만 돌아가겠어. 오빠와 생각이 맞아 일을 벌이긴 했지만 저 애를 구하기 위해 찾아올 테
리우스와 마주치고 싶진 않거든. 솔직히 난 놀랬지 오빠 역시 이런 음모를 꾸미고 있었을 줄은
호호!!"

검은 망토의 두건에 깊숙이 얼굴을 파묻은 여자가 핀잔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상대 남자가 그
녀의 입을 막으며 나지막하게 응대한다.

"쉿, 조심해. 그 녀석이 도착해서 우리들의 정체를 알게 되는 건 별로 반갑지 않는 일이다. 아직
은 때가 아니거든. 흠, 다른 통로를 통해서 넌 그만 가보도록 해라."

"알겠어. 나 역시 테리우스와 결혼할 때 까진 요조 숙녀로 보여야겠지. 세계 최고의 능력을 지
닌 남자의 아내가 되려면 이 정도쯤은 참아야지. 하지만 저 여자 애는 꼭 없애버려야 해."

여자의 마지막 말속에는 응어리가 맺혀 있는 듯 앙칼진 억양이 섞여 있었다. 망토의 앞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쥔 여자가 다른 통로의 문을 열어 계단으로 내려갔다.

"쯧쯧, 저렇게 독해서야 아름다운 얼굴이 아깝군. 동생이어 다행이지 내 아내가 될 여자가 저럴
까 겁나는군. 지금쯤 칸 장군에게서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그 녀석에게서 내가 뺏어내지
못하면 이 전쟁의 승산도 사라지는군. 이거 꽤 내 어깨가 무거운데."

남자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자신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려 그의 신분을 감추었다. 그리고 몸을
틀어 테리우스의 등장에 대비해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검은 두건의 사나이들 사이로 걸어갔
다.

"다들 실수하지 말도록 해라. 너희가 최고의 암살자라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게 하도록…그만
여자가 있는 곳으로 장소를 옮겨라."

남자는 본능적으로 테리우스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굳게 닫힌 돌문을 열어 제쳤
다. 그리고 그 안에 꽁꽁 묶인 채로 꿈쩍도 하지 못 하고 있는 아이린에게 발걸음 한다.

"창 밖으로 매달아 놓도록 해 어차피 살려 둘 생각은 없으니까. 아니, 눈은 그대로 가려둬라."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아이린을 가둬 둔 곳의 돌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아이린은 정신을 차리
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누구죠? 날 왜 이렇게 묶어 놓은 건 가요? 내게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말해줘요. 여보세요?"

"생각보다 빨리 깨어났군. 곧 있으면 널 구하러 한 얼간이 녀석이 나타날 테니 그때까지만 숨쉬
고 있어라.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이니 마음에 준비를 해 놓도록 해."

낮고 차가운 음성 그러나 여린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 낯익은 목소리였다. 문제는 그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검은 복면의 남자들이 움직여 그녀를 자루에 집어넣는다. 아이린이 반항하려고 몸부림쳤지만
이상하게 몸이 뜻대로 잘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들 중 한 남자가 복면을 턱 아래로 제치고 길
게 난 칼자국이 그려진 얼굴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제 어미를 쏙 빼 닮았군. 결국 어미나 자식이나 내 손에 죽을 운명이었다면 그때 너도 네 어미
와 함께 죽는 게 좋았을 텐데 가여운 것. 크크크!!!"

거칠고 냄새나는 손이 아이린의 볼을 위 아래로 선을 그으며 매만지자, 그녀가 도리질을 하며
소리 쳤다.

"더러운 손 저리 치워라! 악마 같은 놈!! 그럼 네 녀석이!!!"

"크크크!!! 반항하는 것 역시 어미랑 똑같군."

일순간 분노로 가득 찬 아이린의 몸에서 강한 오로라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지만 이미 자루 속
에 넣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그들이 눈치채지는 못했다.

붉은 빛과 보라 빛이 어울려져 아이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녀의 몸이 차츰 깨끗
하고 안정되게 변해가고 있었다.

'저 녀석들은 하수인에 불과해. 배후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해. 아, 기분이 왜 이렇
지? 졸리고 나른해져 이상해…내 어머니를 내 어머니를…….'

검은 복면의 남자들은 아이린을 묶은 자루를 창 밖에 미리 장치 해둔 철봉에 매달았다. 그리고
자루의 묶인 부분의 밧줄을 창 안쪽으로 빼내서 벽에 박혀 있는 고리에 고정시켰다.

그 옆에 그들을 주도하는 마스크를 한 검은 망토의 남자가 두건을 깊게 쓴 채 서 있었다. 그들
이 기다리는 자의 발자국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그들에게 들리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점점 가까울수록 한 걸음 한 걸음의 발자국에
무게를 실어 다가오고 있다.

탕!!!!!!!!!!!!!!! 쾅!!!!!!!!!!!!!!!!!

돌문이 너무나도 손쉽게 열려 반원을 그리다가 벽에 부딪쳐 큰 파열음을 냈다. 그리고 곧이어
어이없게도 바닥으로 넘어지면서 또 한번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바닥에 얌전히 있던 먼지더미들이 일시에 춤을 춰 주변을 뿌옇게 만들어 버렸다. 마치
안개라도 낀 듯한 분위기가 조금 안정되어 지자, 그 중심에 한 남자의 실루엣이 왼손에 긴 검
을 든 채로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 있나."

남자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 날카롭고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화를 꾹 참고 있었다. 테리우스
는 눈앞에 괴한들을 당장이라도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우선 아이린의 안위부터 살펴봐야 한다
는 생각에 꾹 참았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8장 *136* 학원편(36)-2


"후훗, 드디어 나타나셨군. 올 줄 알았지."

마스크를 쓴 남자가 쓴웃음을 내뱉으며 테리우스를 마주했다. 남자의 마스크 너머로 살짝 보이
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열려진 창문을 통해 들어온 미풍으로 슬며시 휘날렸다.

남자는 창 밖으로 손을 들어 가리키며 테리우스를 향해 으름장을 놓는다.

"잘 봐라, 그 자리에서 어떤 위협적인 행동을 할 시에 저 여자를 담은 자루는 땅바닥으로 내동
댕이쳐질 테니…이런 그렇게 무서운 표정까지 지을 필요는 없고 나와 거래를 무사히 마친다면
여자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

"나와 거래를 하겠다면 우선 여자의 안전을 확인시켜 줘야하지 않나?"

단호하고 간단한 테리우스의 질문에는 전혀 떨리거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엿보이지 않아 마스
크를 쓰는 남자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마치 먹이를 잡기 바로 직전의 맹수의 눈빛처럼 고요하면서 살인적인 분위기였다. 테리우스가
한 발자국 다가서자, 그를 둘러싼 형태로 멀찌감치 떨어져 대기하고 있던 남자들도 함께 움직
인다.

테리우스는 비겁한 방법으로 자신을 불러들인 상대와 거래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재빠르게 레드문으로 천천히 허공을 휘두르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복면 남자들의 움
직임을 살폈다. 꽤 민첩하고 재빠른 녀석들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그 복면 너머의 신
분을 한눈에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도 잘 알고 있다 테리우스. 간단하게 우릴 해치우고 여잘 구하면
될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 허나 저 여자가 지금 내가 조제한 독약을 몸에 담고 있다면 그렇다
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않을까?"

마스크를 쓴 남자의 말에 테리우스의 움직임이 멈칫해지면서 미간이 일그러졌다. 힘있게 쥐어
들던 레드문을 아래로 내리면서 상대를 응시했다.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 저 여자의 목숨은 단지 물리적인 작용으로만 위협받고 있지 않다는 소리야. 저 여자
에게 투여한 독약은 내가 직접 조제한 것이니 해독제도 나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네 손에 내
가 죽는다면 저 여자의 목숨도 함께 앗아가는 거란 소리지."

마스크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잠시동안 테리우스의 머릿속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
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판단한 그가 레드문을 쳐들어 단숨에 엑스자형을 그리며 주변의 괴한
들에게 달려든다.

쉭!! 휘릭!!!

바람처럼 달려들어 괴한의 턱을 팔꿈치로 과격한 후 곧바로 레드문의 날에 녀석의 숨통을 끊는
다.

퍽!!!

상대가 힘없이 고꾸라져 죽음에 이르기가 무섭게 테리우스는 긴장하며 덤벼드는 다른 녀석들
에게도 레드문을 휘둘렀다.

챙!!!! 쉬익!!!!

그 속도가 눈으로 확인하기 힘들만큼 빨랐기 때문에 힘없이 몸이 고꾸라지면 피를 토하는 검
은 복면의 남자들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각자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순식간에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자, 마스크의 남자는 초조하고 긴장되었다.

"아니 이럴 수가…!!"

혼자 남은 마스크의 남자가 꽤 당황한 듯 잡고 있던 밧줄을 쥐어진 채 뒤로 주춤거렸다. 그런
사이 이미 그 앞까지 다가온 테리우스.

"네 녀석이 누군지 알아야겠어!"

"헉!"

테리우스가 살짝 검을 휘두르자, 검 끝에 의해 마스크가 깨끗하게 두 갈래로 갈라져 바닥에 떨
어진다. 그리고 마스크 너머에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바스찬의 얼굴이 드러났다.

"네 녀석은!!! 재수 없는 메틴의 아들이잖아!!! 원하는 게 뭐야!!!!"

테리우스의 한 손에 멱살을 잡힌 세바스찬이 자조적인 미소를 띄우며 욕지기를 내뱉는다.

"빌어먹을!! 훗, 하지만 네 여자와는 작별 인사를 해야할 거다. 그녀는 곧 죽는다."

"제기랄, 널 죽여 없애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저 여자를 살리지 못하면 네 녀석도 편하게
죽지는 못할 거야."

"하하, 내가 죽음 따위가 두려워 이런 일을 꾸몄다고 생각해? 어차피 네게서 얻어내지 못할 봐
야 나 역시 죽음을 택할 것이다. 저 여자와 함께 죽는다 해도 상관없어."

"이 자식이!!!! 원하는 게 뭐냐!!"

"후훗, 내가 원하는 건 블랙마나의 초석이다. 그걸 내게 건네주면 저 여자를 살려주겠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8장 *137* 학원편(37)

세바스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테리우스는 감지했다. 세바스찬은 지금 두려
움에 떨고 있지만 상대에게 그런 모습을 감추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테리우스에
게 당당히 자신이 요구하는 조건을 들이밀면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대응하던 세바스찬이었지
만 사실 얼굴 아래 몸들의 감각은 점점 마비가 되어지는 느낌이 퍼져가고 있는 상태였다. 더 강
한 자의 보이지 않는 기가 그를 가위  눌리는 기분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마저
그 기세에 눌릴 세바스찬은 아니었다.

"비겁하게 인질을 잡아두고 쳇, 내게 블랙마나 초석을 달라고 으름장을 놓다니 생각보다 간이
부은 녀석이구나. 그걸 가져다 어디에 쓰려고?"

"그건 네가 알 봐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블랙마나 초석이야."

"내가 그걸 네게 넘겨주고 나서 여자를 구한 후 다시 되찾아 올 때 널 가만히 살려 둘 거라 생각
하나?"

테리우스는 상대가 블랙마나 초석에 대한 정보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만약 지금 세바스찬에게 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블랙마나 초석을 건네주게 된다면 테
리우스의 몸은 약 한달 동안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연약한 상태로 되어 버리기 때문에 위험부
담이 컸다. 대개는 블랙마나 초석을 내준다 해놓고 복제품을 건네 줄 수 있을 테지만, 녀석이
메틴의 아들이란 점을 생각해 볼 때 복제품이 통하지 않을 거란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
다. 게다가 지금 빠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할수록 아이린의 생명은 급속도로 꺼
져가고 있으니 더욱 난감했다.

"하하하, 설마 내가 복제품과 진품을 구별 못할 얼간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네 녀석이 내게
블랙마나를 넘겨주면 적어도 한 달은 보통 인간들처럼 연약해 질 거란 것 역시 난 알고 있다."

"역시 메틴 아들답군. 짜증나게 교활한 점이…내가 저 자그마한 여자 하나 때문에 한 세계의 힘
이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을 네게 넘겨 줄거라 생각하나? 자칫 이걸 넘겨줬다가 수천 수억이 개
죽음을 당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테리우스가 레드문을 들어 올려 검 날을 세바스찬의 목에 가져다 대면서 속삭이듯 물었다. 그
러자 세바스찬이 목을 뒤로 살짝 제치면서 여전히 상대의 눈을 응시한 상태로 대답했다.

"후훗, 넌 이기적인 놈이니까. 저 여자를 위해 예전에도 나와 위험한 싸움을 감당했었던 걸 난
기억한다."

"예전이라니?"

테리우스는 이상한 이야기를 꺼낸 세바스찬을 향해 의아한 눈빛을 하며 되묻는다.

"오아시스에서의 일을 벌써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그때는 내가 몰라서 당했지만 지금은 아냐.
저 여자는 네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란 걸 이젠 알고 있다. 그때의 그 소년이 바로 저 여자라는
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제기랄, 어서 해독제를 내놔!!"

창 너머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자루의 움직임이 정지한 것을 본 테리우스가 다급한 듯
세바스찬에게 말했다. 그러나 칼날에 목이 맡겨져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보다 여유
를 보이기 시작한 세바스찬.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사이 저 여잔 죽어가고 있어. 어쩔 거냐? 블랙마나 초석인지 저 여자인
지 선택은 네가 해라."

세바스찬이 그렇게 요구하고 있는 사이 테리우스는 이미 자신의 손바닥에서 블랙마나 초석을
꺼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세바스찬이 꽤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자신의 목을 위
협하고 있던 검을 손으로 천천히 내렸다.

"그럴 줄 알았지. 공생하고 있는 동안의 블랙마나 초석은 강하지만 그 몸밖으로 나오면 유리처
럼 잘 부서지지."

세바스찬은 건네 받은 블랙마나 초석을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 부신 후 간단한 마법어를 사
용하여 불에 녹여 버렸다. 그런 행동에 테리우스가 조금은 놀란 듯 상대를 바라본다.

"흥, 그리 놀랄 것 없다. 어차피 내가 주인이 아닌 이상 내 몸으로 들어왔다가 독이 될 거란 것
역시 알고 있으니까. 그럼 난 이만…아차, 여자를 구해줘야겠지?"

테리우스가 다시금 레드문으로 세바스찬을 위협하며 말했다.

"어서 해독제를 내 놔!"

"후훗, 벼랑 끝에 세워진 탑까지 왜 오라고 했다고 생각하나? 그 벼랑 끝에 바로 물이 흐르기 때
문이야. 시체를 처리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이지. 해독제라 그보다는 물리적인 작용을 먼저 막아
보는 건 어떨까?"

세바스찬은 재빠르게 테리우스의 검을 제치면서 고리에 묶여져 있던 밧줄을 풀어버린 채 뒤쪽
통로로 도망가 버렸다. 밧줄이 후륵 풀어지면서 철봉으로 휘감겨 연결된 밧줄까지 금새 풀어지
더니 자칫 아이린을 담은 자루가 낭떠러지로 떨어질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런 제기랄!! 아이린!!! 아이린!!!"

간신히 밧줄의 끝을 잡아 쥔 테리우스가 자루를 향해 아이린을 세차게 불렀지만 아무런 움직임
도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점점 강하게 들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
되어갈 조짐을 엿보였다. 블랙마나 초석이 빠져나간 테리우스의 몸이 빠르게 작용하기 시작한
다.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무기력함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의 손목과 발목의 힘이 점점
빠져가고 있음을 손에서 놓아지는 밧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안돼! 젠장, 망할 녀석!! 아이린!!! 이봐!!! 정신 차리고 움직여봐!!! 이런!"

테리우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지고 온몸에 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어깨에 큰 바위
를 이고 있는 것처럼 몸이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그러나 아직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아이린을
우선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위험한 곡예를 펼쳤다.

원기둥을 눕혀 놓은 기다란 철봉을 조심스럽게 두 팔의 힘으로 이동한 후 철봉 끝의 자루를 작
은 단도로 찢어 내려갔다. 숨은 헉헉거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자칫 손이 미끄러졌다가는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게 될 상황이다.

부욱!

묶여진 곳의 바로 아래를 찢어낸 테리우스는 우선 아이린의 얼굴을 살폈다. 긴 어둠이 아주 옅
은 빛으로 바뀌는 느낌이 든 아이린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헉! 헉! 아이린!"

캄캄한 방에 갇혀 있다가 눈이 가려진 채로 다시 자루에 넣어졌던 아이린은 찢겨져 내린 가죽
의 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의해 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음성이 너무 작게 들
려왔고 자신의 목소리 역시 나오질 않은 상태였다.

"이봐, 헉! 헉! 괜찮은 거냐!! 대답을 해!! 아니, 힘들면…헉! 헉! 말하지 마라. 기다려 구해 줄 테
니까."

테리우스가 있는 힘을 다해 아이린을 한 손으로 자루에서 꺼내어 자신의 팔에 안아 냈지만 그
역시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기에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그녀를 자루에서 꺼냈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그녀의 작은 숨소리에 안도를 하다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덕분에 테리우스와 아이린을 서로를 껴안은 채로 벼랑 아래 흐르는 물을
향해서 낙하했다.

검은 나무 탑에서 이미 빠져 나와 말 위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바스찬이 만족한 미
소를 지으며 중얼거린다.

"결국 데본 제국의 주인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군. 이런 저 녀석이 죽은 걸 알면 일라이저 녀석
이 꽤나 슬퍼하겠군. 뭐 곧 잊고 다른 녀석을 찾아 결혼하겠다고 말할 녀석이긴 하지만. 이랴!!
가자!!"

*

의식을 잃은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추락으로 인해 비극의 최후를 맞이하려던 순간이었다. 아이
린을 보호하기 위해 투명 방어 막이 생성되면서 그녀를 안고 있던 테리우스까지 보호했다.

투명 방어 막이 구로 형성되면서 그들을 물에 가라앉게 하지 않게 해주었고 어느 시점에서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전쟁의 폐허가 남아 있는 케르베노아 영토가 있는 곳으로 그
주변은 사막으로 형성된 곳이다. 두 사람이 흘러가다 멈춘 곳은 케르베노아 영토에서 조금 떨
어진 작은 스타 섬이었다.

아이린이 눈을 떴을 때는 그녀를 보호 해주었던 투명 방어 막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세바스찬
이 투여한 독약이 되려 그녀의 능력이 제 역할을 하도록 일깨워준 결과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아이린의 몸은 그녀에게 들어온 독을 자체 해독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고 다음을 대비해 더
욱 강한 마나의 힘을 형성해 버렸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한 본인은 되려 몸이 더 가뿐해지고 강
해진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여긴 어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누군가 날 납치해서…맞아, 누가 날 불렀던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여긴 대체 어디…으아앗!! 오, 맙소사! 테리우스!!"

아이린이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날이 저물어 어두웠고 무작정 내딛은 발이 뭔가에 걸
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뭔가가 바로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기절해 있던 테리우스였
던 것이다.

왜 그가 지금 엉망인 몰골로 기절한 채 자신과 함께 쓰러져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우선은 그
를 깨워 따뜻한 곳으로 옮겨가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린은 그를 깨우려했다.

"테리우스, 테리우스 일어나 봐. 눈을 좀 떠 봐. 어? 숨은 쉬는데 테리우스."

처음에는 잠자리에 든 아이를 깨우듯이 그의 가슴을 흔들며 깨워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몸에 열이 높은 것이 느껴진 아이린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 녀석 아픈 아냐? 에이, 설마 테리우스가 아플 리가 하지만 몸에 열이 너무 많아. 이마
에서도 계속 땀이 나고 있고…어떻게 하지?'

아이린은 테리우스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안은 채로 캄캄한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불빛이 켜지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린은 그곳을 향해 커다란 목소
리로 외쳤다.

"여기요!!!!! 도와주세요!!!!! 사람이 죽어가요!!!!!! 여기요!!!!!"

*

테리우스가 편지를 건네 받고 갔던 검은 나무 탑에서 제로이드와 바이사코 그리고 아이린의
세 수행원들이 근심에 찬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방학 식이 끝난 후에도 아이린이 돌아오지 않자, 학교로 찾아온 아처와 아르테니, 파라도가 제
로이드와 바이사코를 통해 그들의 주군이 납치된 사건을 알 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찾아온 지금 두 사람에 대한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학교측에서는 학생이 납치된 지도 모른 채 행사에만 열광했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흥분한 아처가 발을 구르며 목청을 높였다. 그런 그의 반응에 바이사코가 습관처럼 코를 매만
지며 중얼거렸다.

"어린 학생도 아니고 다 큰 성인들을 학교에서 어디까지 간섭하겠어. 그건 억지에 불과하지.
두 사람이 함께 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 테리우스 녀석이라면 무서울 게 뭐가 있
겠어."

바이사코의 상관없다는 식의 말투가 아처의 신경을 건들어 버렸다.

"그 잘난 친구 녀석이 납치 된 일이 아니잖아!!! 우리 공주님이 납치되었단 말이야!!!"

"일개 수행원 중에 건방지군."

"이봐! 난 당신 수행원이 아냐! 알겠어!!"

아처는 화가 난 상태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바이사코를 향해 주먹질을 해 버렸다. 턱 소리와
함께 바이사코의 턱이 왼쪽으로 돌아갔고 이에 아르테니와 파라도가 재빨리 아처의 두 번째 주
먹을 막아섰다.

바이사코 역시 아처의 무례함을 되 갚아 주려고 했지만 아르테니와 파라도가 중간에 막아서서
뒤로 물러섰다. 아처와 바이사코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한쪽에서 제로이드가 창문 쪽
근처의 바닥을 손으로 매 만져 보고 코에 가져다 냄새를 맡아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비록 뭔가에 의해 흔적이 사라졌다지만 이건 분명 블랙마
나 초석의 잔재야."

*

^0^*

저 성실연재로 돌아온거랍니다....집으로.^^*

(그 동안 생각보다 여기저기 일이 많았네요..^^*)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8장 *138* 학원편(38)-1

*

늙은 어부의 도움으로 두 사람은 쉴 곳을 얻게 되었다.

"할아버지 정말 감사해요."

아이린이 두 손을 감싸 잡으며 낯선 자신들을 거리낌없이 도와준 할아버지의 마음에 감사를 표
한다. 이에 멋쩍은 듯 할아버지가 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내면서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깊게 패
인 주름살 너머의 긴 세월을 봐온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그녀가 잡은 손의 감촉은 거
칠지만 따스했다. 마른 몸집에 허름한 옷가지를 걸치고 있는 할아버지는 아이린에게 잡힌 손
과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대답한다.

"허허, 그리 큰 것도…아닌데 뭘."

할아버지의 부끄러운 듯한 느린 음성만 들어도 얼마나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늙은 어부 존은 젊은이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들에게 안내해 준 방에서 더 지체
하지 않고 나가줬다.

"그럼 편히 쉬게나."

"네, 할아버지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존은 오랫동안 사람들을 봐오지 않은 터라 낯선 두 사람과의 만남이 조금은 기쁘고 한편으로
는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존이 나간 후, 아이린은 침대로 다가와 누워있는 테리우스의 이
마에 물수건을 갈아주며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혼자 중얼거렸다.

"휴! 테리우스, 어쩌다가 너와 난 항상 이런 상황만 만들어내는지 모르겠어. 뭐가 어떻게 된 일
인지 아직도 어리둥절하지만 빨리 깨어나 줘. 깨어나서 내게 소리를 치든 빈정거리든 괜찮으니
까 빨리 일어나기만 해줘. 대마왕이라면서 이 정도는 거뜬히 일어나 줘야지 응? 제발."

아이린은 그의 이마에 얹어 있는 물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물수건을 이
마에 얹어 놓은 후, 그의 얼굴을 그녀의 손으로 매만졌다. 자신의 애 타는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그가 괜히 얄미워 보이기도 했다.

테리우스가 누워 있는 침대는 일인용으로 좁았지만 푹신했고 추위에 떤 이들을 위해 존이 일부
러 두꺼운 이불을 가져다주었다. 작은 방이었지만 침대 맞은 편에는 장작이 타고 있는 조그맣
고 거무튀튀한 난로가 온기를 불어주었고 침대 옆에는 갈색의 호롱불이 방안을 아늑하게 비춰
주었다.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가 자장가처럼 아이린의 귓가에 맴돌기 시작 할 때 즈음 테리우스를 간호
하던 그녀의 손과 눈의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멈추었다. 카나의 에너지로 그녀의 몸
이 보호되고 더 강한 힘을 얻긴 했지만 아직 이에 익숙한 몸체가 아닌 상태였기에 아이린도 피
곤함을 느꼈다.

온몸에 열기로 몸 구석구석이 타오르는 듯이 뜨거웠던 테리우스도 점점 몸이 회복하는 기운을
보였지만 그의 정신 상태도 아직은 암흑 속을 헤매고 있었다.

너울거리는 불의 기운의 휩싸여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들어내는 터널에 그의 몸이 빨려 들어가
기 시작하더니 끝도 없는 암흑이 엄습해오면서 몸에 열기는 차츰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둡군…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이것은….'

허공에 몸이 움직이면서 그를 어디론가 인도하는 듯 쾌속 질주하기 시작하더니 불기둥이 그를
삼켜 먹을 듯이 동물의 형상을 하고 덤벼들었다. 사자의 얼굴을 한 불의 형상은 날카로운 울음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니 테리우스를 통째로 덮쳐 버린다.

'쳇, 내 머릿속이잖아. 아무래도 블랙마나 초석이 나가면서 몸이 불안전해졌나 보군. 가위에 눌
리는 건 제일 기분 나쁜 일이야. 참! 아이린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기둥 터널로 들어선 테리우스는 안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지 않았
다. 이윽고 터널에 끝이 나왔으니 그곳은 아리스샘터의 한 동굴이었다.

유령처럼 모든 사물을 뚫고 지나가는 자신의 몸이 멈춘 곳은 동굴의 안쪽에 두 남녀가 속삭이
고 있는 모습이 나타날 때였다.

'저건 또 뭐야? 아니, 나잖아 그리고…아이린.'

테리우스는 그곳에서 자신이 아이린에게 블랙마나 초석을 손에서 꺼내 보여주는 것을 목격했
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기억의 일부가 그를 찾은 것이다. 그 순간 머릿속에 엄청난 두통이 일
기 시작했고 몸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그의 혈관들이 피부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
처럼 파도를 치기 시작하더니 그의 목으로 무엇인가가 넘어왔다.

우웩 소리와 함께 구토를 한 테리우스는 입안에 맴도는 역겨운 맛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입
에서 나온 것은 번지르르한 검은 액체가 묻어 있는 덩어리로 썩은 냄새로 진동을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테리우스는 잘 알고 있었다. 마족의 계약서가 부리는 주술의 결과물 그러나 대마왕
인 자신까지 휘두를 수 있는 이 마족의 계약서를 누가 만들었는지 짐작가지 않았다.

테리우스의 몸에서 블랙마나 초석이 나가면서 그 파장으로 그에게 꼭꼭 묶여 있었던 마족의 계
약서 주술이 풀리게 되는 부작용을 겪게 된 것이다. 물론 본인에게는 부작용이 아니라 권리를
되찾은 셈이 되었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면 그의 기억은 예전처럼 완벽하게 재생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문제
는 그의 기억이 아니라 그의 몸 상태였다. 블랙마나 초석이 빠져나간 테리우스는 약 한 달 여간
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약한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그 기간에 누군가 그를 해치우기라도 한다
면 이를 정면으로 막아낼 재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쉽게 블랙마나 초석을 내주
었다니 그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때 테리우스의 머릿속으로 아지랑이 형태의 연
기가 스며들더니 침대에 누워있던 그가 눈을 번쩍 뜨며 탄성을 질렀다.

"아! 아이린."

아담하고 낮은 천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주인공을 바라본다.
그녀는 자신을 간호하다가 잠이 든 듯 보였다. 테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이 든 아이린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8장 *138* 학원편(38)-2

어떻게 자신이 그녀를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어쩌다가 그녀와의 결혼식이 그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자신이 기억조차 못한 상황까지 이르렀
단 말인가!

테리우스는 기억을 잃은 후, 마나아카데미에서 재회했던 아이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기억을 상실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마족의 계약을 했다
는 뜻이 된다.

왜? 무엇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했을까? 그와의 결혼식을 앞두고서!!

테리우스가 아이린을 안은 팔에 힘을 주자,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스르르 눈을 떴다.

"테리우스! 언제 깨어난 거야? 이제 좀 괜찮은 거니?"

아이린은 자신이 그의 품에 안긴 상태에 대해 자각하기도 전 그의 얼굴에 눈에 들어오자, 걱정
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쳇, 괜찮지 않으면…."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몸을 뒤로 뺀 아이린을 다시 자신의 품안으로 잡아당기며 그가 퉁
명스럽게 대답한다. 그가 자신을 품에 안자, 조금 어색한 기분을 느낀 아이린이 두 손으로 그
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하면서 말했다.

"테리우스 왜 그래? 테리우스…."

"쉿, 지금은 그냥 조용히 이대로 있어 줘."

"너 좀 이상…."

"제발 부탁이다. 아이린."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들리자, 아이린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

그리 믿음이 가진 않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기억의 조각이 맞춰졌다는
사실보다는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도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어 줬다는 사실이 테리우스는 감사
했다.

'내가 널 잊어버렸다니…내가 널…날 많이 원망했겠구나.'

어느 새 테리우스의 손길에 의해 좁은 침대 위로 그와 아이린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누웠다. 그
의 마음처럼 그녀의 심장도 뛰고 있었고 아늑했던 방안에도 정체 모를 긴장감이 팽팽하게 스며
들었다.

옆으로 누워 서로의 눈을 응시하던 테리우스와 아이린.

아이린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테리우스의 눈을 마주하며 그의 얼굴을 자신의 눈을 통해 마음
에 새기기 시작했다. 예리하지만 입가에 미소를 띠면 어느새 장난스런 소년의 눈동자가 되어
버리는 그의 눈과 곧고 잘 깎여진 그의 코 그리고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그의 입술.

'날 사랑한다고 했었는데…그 입술을 움직이며 소리를 내서 날 사랑한다고 그랬었는데……테
리우스 날 잊은 너와 마주하고 있는 게 점점 힘들어져.'

아이린의 손이 테리우스의 입술을 어루만지면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
를 품으로 끌어당기더니 이내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다가온 그의 입맞춤에 아이린은 자신
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자신을 잊은 그가 또 다시 자신에게 다가서고 있는 것이 그녀
에게 슬픔을 안기는 듯 하다.

그녀의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이 테리우스의 볼에 닿자, 그가 키스를 멈추고 그녀에 얼굴을
바라보면서 속삭인다.

"사랑해 아이린."

"……."

"잠시라도 널 잊었던 날 용서해 줘."

테리우스의 사랑고백에 이어 그의 기억이 되돌아왔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아이린은 꾹 참아내
고 있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날…기억해? 내가 누구였는지 너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기억하는 거야?"

"그래."

"…흑! 흑! 테리우스…흑! 난! 난 있지…너무 힘들었어…너무…."

우는 아이린을 꼭 껴안으며 테리우스가 다독였다. 그리고 그녀에 등을 어루만지며 달랬다. 그
렇게 아이린은 테리우스의 품에서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그런 아이린의 얼굴을 쓰다듬으
며 테리우스가 한마디했다.

"녀석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참, 그래도 그렇지 마력이 잠시 사라져서 몸이 약해졌다지만 평범
한 남자인 것을 늑대 앞에서 이렇게 세상 모르는 순한 양처럼 잠이 들다니…훗, 못 말리는 애인
이라니까. 날 뭘 믿고 이렇게 자냔 말이야. 확 덮쳐 버릴 가보다."

"…음…음냥…."

아이린이 잠을 자던 중에 살짝 몸을 움직이자, 테리우스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리고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열어 새벽을 맞이하는 바닷바람
을 맞으며 중얼거렸다.

"휴, 이 사고뭉치 대체 어떤 녀석과 마족의 계약을 한 거야. 어떤 놈인지 알아내서 가만 두지 않
을 테다…흠, 우선은 그 망할 세바스찬과 메틴 녀석들부터 해결해야겠군. 블랙마나 초석에 대
해 그렇게 잘 알고 있다는 건 뭔가 오래 전부터 계획했다는 뜻인데…지금 이 몸으로 나서기엔
역부족이야."

그는 조만 간에 제로이드와 바이사코를 이곳으로 조용히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들에게 자
신이 죽은 것으로 해두는 것이 되려 그들의 음모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러나 아침이 되면 오늘 하루 동안은 아이린과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낼 생각이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8장 *139* 학원편(39)-1


*

고즈넉한 아침을 맞이하는 아리스샘터의 외곽에 짙은 안개가 가득 했다. 희뿌연 안개의 색이
점점 짙어져 그을음의 색을 띠고 있는 곳에는 피에 굶주린 병사들이 투구 안의 날카로운 눈빛
을 번뜩이고 있었다.

"장군님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려야만 합니까? 그냥 쳐들어가서 정복해 버려도 저희의 승리가
뻔하거늘."

칸 장군의 충복 하르만이 불만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개월을 거쳐 미궁을 통
해 아리스샘터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곧바로 전투를 벌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세바스찬 왕자님의 전갈이 오지 않았으니…킁, 왕자님의 전갈이 오기 전에 전쟁을 해서
승리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 우리가 되려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
다리는 수밖에. 병사들의 양식은 아직 충분하고 아리스샘터의 장로들 중 우리와 내통하는 자들
이 있으니 들킬 염려는 없을 테니…기다려라."

"하지만 마냥 이렇게 언제까지 기다려야하는지…."

칸 장군이 그의 부하 하르만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내리치며 당부한다.

"기다려라. 때를 맞춰 전투를 벌이는 것 역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과 함께 포근한 기분으로 스륵 눈을 뜬 아이린은 제일 먼저 낯익은 남자
의 등을 보게 된다. 베이지 색의 상의와 담갈색의 헐렁한 바지를 입은 남자가 난로 앞에서 뭔가
를 하는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뭘 하고 있어?"

아이린이 그의 어깨를 등뒤에서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콕콕 찌르며 묻는다. 그러자 테리우스
가 조금은 쑥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게…저 흐흠…."

곧이어 테리우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헛기침만 하다가 자신이 마련한 탁자 옆으로 비켜서 혼
자 의자에 앉아 버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가 그녀를 위해 아마도 아침을 준비한 듯 하다.

잘 볶아진 야채와 우유 그리고 과일 잼을 바른 빵까지 딴에는 서툰 솜씨로 조심히 마련한 듯 했
다. 차려진 아침 식사를 본 아이린이 넌지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테리우스를 바라본다.

"날 위해 준비한 거야? 테리우스 네가 식사를 차리기도 하는 거야? 하하하!!!! 세상에 어머, 이
자그마한 빵에 잼까지 발라 놓고 우와, 정말 근사한데?"

아이린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아침 식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자, 테리우스가 고개를 푹 숙
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발 그만 놀리고 조용히 먹어 주면 안되겠냐."

"음음,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아침식사는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것 같아. 왜? 날 위해 차려줘
서 고맙다고 칭찬하는 건데 싫어? 하, 알았어 조용히 먹을게."

아이린은 먼저 그가 잼을 발라놓은 빵을 입에 넣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 맛이 입안 전체에
퍼져갔다. 맛있게 먹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턱을 괸 채로 테리우스가 감상하듯 지켜본다.

'쳇, 한번 먹어보란 소리도 안하고 혼자 잘도 먹는군.'

그가 그녀를 위해 차려준 아침식사이지만 한번 권하지도 않고 혼자서 맛있게 먹고 있는 아이린
이 조금 얄밉게 느껴졌다.

"냠냠, 테리우스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냠…냠 헌데 어젠 어떻게 된 일이야. 날 가둔 그 사
람들 정체가…뭐였는지 넌 왜…음, 냠…그곳에 왔는지…게다가…음!!"

아이린이 쉬지 않고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빵을 먹다 목으로 꿀꺽하고 삼키는
순간 그녀의 입술에 그가 키스했다. 순간 아이린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다 서서히 눈
을 감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이 그의 목을 휘감았고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
싸 안았다.

"오늘은 복잡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오늘 하루만은 우리 둘만 생각하며 데이트하자."

"……하지만."

"그렇게 하자 아이린."

"…응."

테리우스가 그녀를 꼭 껴안으며 오랜 시간동안 꿈쩍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그
의 소중한 연인이다. 그녀가 오늘 하루만큼은 그로 인해 웃으며 행복하길 바란다. 이제 힘을 잃
어버린 그에게 내일은 조금 버거운 일로 가득 차기 시작할 테니까. 내일이면 그 지긋지긋한 피
의 전쟁에 맞설 준비를 해야하니까.

두 사람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산책을 나왔다. 그리고 아름다운 섬의 경치를 구경하
게 된다.

바다의 푸른 기운을 받고 자란 숲이라 그런지 녹색과 푸른색이 어울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높
은 나무 위에는 눈처럼 하얀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며 자신들의 둥지에 착지하기도 하고
먹이를 나르기도 했다. 한참을 걷던 테리우스가 뭔가를 생각했는지 뛰어가기 시작했다. 뒤에
걷던 아이린도 덩달아 뛰었다.

"테리우스, 무슨 일인데 말도 없이 뛰어 간 거야? 어, 조각배잖아."

"타라."

"너 노 저을 줄 알아? 이거 생각보다 힘들다고 하던데 참, 이거 주인이 있는 배일수도 있잖아.
맞다! 우릴 구해준 할아버지 배일 거야. 허락도 없이 타면 안 되는 거야."

"쳇, 잔소리는 타라면 조용히 타는 거야. 자, 그렇게 얌전히 앉아 있어 알았지."

재잘거리는 아이린을 번쩍 들어 조각배에 억지로 앉힌 테리우스가 노를 손에 잡으며 말했다.
바다의 바람은 그들을 반기는 듯 잔잔했고 해 역시 옅은 구름들의 도움으로 따스하게 두 사람
을 비추었다.

'데본 제국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널 노출시켰으니 네게 너무 미안하다. 너 하
나 지켜주지 못하고 블랙마나 초석마저 빼앗겨 버렸으니….'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볼 때면 그들의 유치함과 숱한 거짓 맹세에 항상 코웃음을 치던 테리우
스였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8장 *139* 학원편(39)-2

*

<<천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지상으로의 여행을 갓 마치고 돌아온 천사와 악마 그리고 주신이
파라다이스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린을 가까이 서 더 볼 수 있었는데 거참, 저 녀석들만 아니었으면."

악마들 중 한 녀석이 하얀 로브를 걸치고 그들을 응시하는 천사들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이에 천사들이 맥주로 건배를 하며 응대했다.

"하핫, 어차피 양의 모습으로 아이린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잖아. 그래도 공
동으로 함께 여행도 하고 텍경기 보다 더 유쾌한 경험이었어."

"주신께서도 마법사 차림이 어울리셨던 거 같고 참 흑검을 어느 녀석에게 줬나?"

곱슬머리 릴케 천사가 맥주 한 모금에 볼이 붉게 상기된 채 묻는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아 있
는 거무스레한 피부의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탐슨이 입을 열었다.

"성질 더러운 녀석에게 준 걸 내가 보긴 했지. 어찌되었든 데본과 카나는 제 3세계로 몰아내야
인간 대륙의 힘이 균형해질 거라 생각한다. 젠장, 술맛 한번 더럽게 쓰군."

탐슨이 들고 있던 맥주 잔을 바닥에 던지면서 거친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악마
들이 하나같이 인상을 그으며 항의하듯 말한다.

"이봐, 넌 천사면서 왜 우리들 자리에 끼여 앉아 분위기 흐리는 거얏!!"

"신참들은 이 녀석이 악마라고 해도 다 속겠군. 어서 자리를 옮겨라 탐슨."

탐슨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거친 행동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얼굴을 보면 처음 보는
이들은 그의 소속이 악마일거라 지레 짐작한다. 그러나 그는 하염없이 눈꽃처럼 맑은 영혼을
지닌 릴케처럼 천사 소속이었다. 그런 그가 악마에게든 천사에게든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것
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파라다이스 카페 밖에서도 흑이다 백이다 나누면서 지겹게 여기서도 그런 걸로 다투지 말게
들 자자, 곧 주신께서도 내려오셔서 하실 말씀이 계시다고 했으니 다들 사이좋게 파티를 즐기
세. 여기 맥주 더 가져오게나!! 자, 어서 기분들 풀고 노세나."

파라다이스 카페의 주인이 막 신경전을 시작하려는 천사와 악마들을 다독이고 탐슨을 달랬다.
그는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영상장치를 작동 시켜 이들을 진정시켰고 테리우스와 아이린에
관한 지상의 이야기들로 관심을 돌렸다.

*

한적한 바다 위에서 조각배가 점점 육지에서 멀어지려 하자, 아이린이 못내 불안한 표정을 지
었다. 그녀의 길고 고운 머리카락이 미풍에 의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몇 가닥씩 흐트러졌다.
그 머리카락이 그녀의 눈을 가리자 손으로 집어 귀 뒤로 차분하게 넘겼다.

"테리우스 어디까지 가는 거야? 벌써 육지에서 너무 멀리 왔어. 몸도 별로 안 좋잖아."

"내 몸이 안 좋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젯밤 심하게 아팠는데 조금 나아졌다고 이렇게 무리하면 안 된다는 소리야."

"아, 그러니까 날 걱정해준다는 그 소리였군.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크크크!!!"

"흥,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웃겼어."

"하하하, 너 얼굴 빨개졌다 아이린 하하하!!!"

"저게 정말 야!!"

아이린은 아직 그에게 일어난 일을 그리고 그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테
리우스의 마력이 현재 바닥인 것도 알리 없었다. 테리우스는 아이린과 즐거운 데이트를 보낸
후, 늦은 밤이 되면 그녀에게 어제 일어난 일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겠다고 생각했
다.

"으앗, 아이린 그렇게 일어나면 배 뒤집어져. 그렇지 조심히 다시 앉아…그래."

약이 오른 아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휘청거리는 배의 움직임에 놀라 그 자리에 석고
상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테리우스가 위 아래로 손짓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자리
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안정된 자세가 되자, 다시금 노를 저어 육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바
다로 나왔다.

이제 출렁거리는 바다 위의 해와 멀리 보이는 새들 그리고 푸른 하늘만이 배경을 장식했다.

"자, 됐어. 이제 내가 가운데로 앉은 자세로 조심스레 움직일 테니까 너도 가운데로 천천히 움
직여서 오도록 해."

"으, 싫어 잘못 움직였다가 배 뒤집어지면…아까 놀랬단 말야."

"쳇, 뒤집어지면 다시 뒤집어서 올라타면 되지 옷밖에 더 젖겠어. 아무리 내가 아팠다고 해도
그렇게 허약하진 않으니 걱정 마."

"알았어. 괜히…화를 내고 그래."

아이린은 테리우스가 시키는 대로 그가 조금씩 배에 중앙자리로 옮길 때마다 그녀도 자리를 옮
겨왔다. 두 사람이 가운데에서 만나자, 그가 자신과 같은 방향의 뱃머리를 보게 했다.

"자, 이제 그대로 누워 봐."

"누워?"

"응, 그대로 누워 나도 누울 테니까."

"정말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말해주면 안돼?"

테리우스는 대답대신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며 자신과 나란히 눕도록 만들었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8장 *140* 학원편(40)


그리고 아이린의 얼굴에 자신의 손을 올려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녀가 잠시 하늘을 볼 수 없도
록 말이다. 눈을 감은 아이린의 감각이 청각에 쏠렸다. 일렁이는 바다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
고 푸른 향을 싫은 미풍이 그녀의 코끝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테리우스, 나 정말 궁금해. 계속 눈을 가릴 거야?"

"아니, 이제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 봐."

테리우스가 아이린의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려 자신의 배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가느다랗
게 떠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에 가려졌던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내 눈을 부시게 하자, 아이린
이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말한다.

"앗, 눈부셔! 흐음, 와아! 누워서 보니까 하늘이 또 달라 보이는 구나! 구름이 없었다면 태양을
보기 힘들었을 거 같아. 흰 구름도 태양도 하늘도 정말이지 너무 멋지고 평화로워 보여."

"흐흠, 어떤 책에서 읽은 건데 말이지…그게…."

테리우스가 잠시 멈칫거리다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이야기를 꺼냈지만 자신 스스로가 느껴지
는 목소리의 떨림에 또 다시 말을 멈췄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린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
고 내쉬면서 시원한 바다와 확 트인 하늘의 경치에 취해 흠뻑 빠져 있었다.

"화아! 너무 좋다. 잔잔하게 출렁이는 배를 침대 삼아서 하늘을 천장 삼아서 햇살은 따뜻하게
비추고 너무 뜨겁지 않게 구름이 감싸주고 테리우스 나 하아암! 졸려…."

"아니, 졸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지금 네게 할 말이 있는데…이봐, 아이린 진짜 자는 거
냐. 야, 내 참 이렇게 분위기 파악 못하는 꼬마에게…휴, 멋진 말 좀 하려고 기껏 생각해서 여기
까지 나왔더니 이 녀석 정말 잠들어 버렸잖아."

"……."

숨을 쌔근거리며 어느새 테리우스의 어깨 쪽으로 돌아서며 잠을 청하는 아이린을 보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짓는다.

"쳇,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거라고 하늘의 태양을 보며 멋진 청혼을 하려고 했더니만 잠
을 자다니 너도 참 하긴 반지를 준비? 반지! 아, 왜 여태 그걸 기억 못하고 있었지. 블루다이아
몬드 초석…우선 육지로 빨리 가야겠군…이런…아이린."

그런데 그녀가 그의 어깨에 파고 들어와 어느새 그의 팔을 베개 삼게 되자, 테리우스는 아이린
을 깨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노를 저어 육지로 향하지도 못한 채 꼼짝 못한 신세가 되어 버렸
다.

"널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거냐. 쳇, 잘도 자는 군. 조그마한 얼굴에 눈 코 입 다 있군 그래…으
윽, 안돼. 이 녀석은 왜 자는 모습으로 날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야. 내가 너 때문
에 미치겠다."

"……."

테리우스의 중얼거림에도 불구하고 아이린은 아주 달콤한 잠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그녀가 눈을 비비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테리우스가 어느 새 잠이 든 채로 그녀를 꼬옥 안고
있었다.

"어, 테리우스 자고 있는 거야? 흠냥, 많이 피곤했나 보네. 하아암, 테리우스…테리우스."

아이린이 작게 속삭이듯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눈은 도무지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녀
가 가까이 서 본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며 그의 이마에서 코끝 그리고 입술까지 엄지손가
락으로 길게 선을 그으며 움직였다. 손가락 끝이 떨릴 때마다 그녀의 심장은 두 배로 빠르게 뛰
었다. 행복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마주 보고 있어도 다른 곳을 향해 걸어
가는 기분이 들었고 같은 곳을 볼 때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어쩌면 테리우스와 나 지금이 마지막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데본과 카나
는 정 반대의 입장이니 거기에 존속되어 있는 너와 내가 과연….'

아이린이 그의 턱에서 멈춘 손을 멈추려 하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테리우스가 그녀의 손을 붙
잡으며 눈을 뜬다.

"어, 깼어?"

그녀의 물음에 아무 말하지 않은 채 테리우스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한다. 그리고 자
연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으며 가볍게 입맞추었다.

"나의 영원한 신부가 되어 줘…아이린."

"……."

테리우스의 달콤한 속삭임에 아이린은 전신이 마비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 역시 알고 있
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이 상황에 둘만의 미래를 언약하기엔 너무나 큰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린은 자신만을 위한 행복에 응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에겐 아리스 왕
국 재건이라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었고 카나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 게다가 무슨 일인
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테리우스가 속한 데본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는 걸 느꼈다. 그의
몸이 왜 이렇게 약하게 느껴지는지 아이린의 알 수 없는 감각이 알려주고 있다. 딱히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힘든 상황에서 그의 청혼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오아시스가
모래알뿐인 신기루라고 아이린의 이성이 일러준다.

아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고개를 돌려 바다를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돌아보고 대답한다.

"넌 데본의 테리우스이고 난 카나의 혈육인 아이린이야. 예전에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
랐었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아. 지금의 넌 아마 잘 알고 있을 거야 테리우스. 내가 널 어떻
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게 소중한 존재라는 거…넌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날 잊
은 채 내가 카나와 아리스를 잃은 채 너와 함께 있을 수는 없어. 그건…미안 나도 잘 모르겠어."

"쳇, 웃기는 군. 데본과 카나라…너 역시 그런 틀에 박힌 질서에 맞추려고 할 줄은 몰랐다. 왜
꼭 너만이 아리스를 재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그 왕국의 왕족이라 그런 거냐? 결
국 너 역시 귀족과 평민의 신분은 나뉘어져야한다고 생각하는 거군. 뭐, 나야 그런 게 어찌되
든 워낙에 성질 더러운 녀석이라 상관 안 하지만."

아이린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절대 흘리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이 말을 듣지 않는다. 테리우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틀렸어. 난 내가 왕족이라 아리스를 재건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냐. 아리스를 위해 디딤돌
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거야. 그걸 네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어. 그렇다고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냐 테리우스."

"난 널 원해. 다른 건 필요 없다. 아이린 너만 내게 와 준다면 다른 건 상관없어."

아이린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테리우스를 바라보며 말한다.

"널 사랑하지만 지금은 너의 신부가 되어 줄 수는 없어. 너 역시 데본을 포기하지 않을 거잖아.
지금 당장 포기한다고 말해도…아니, 넌 분명 포기하지 않을 거야. 우리 지금은 친구로 있자 테
리우스…."

아이린이 흐느끼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고개 숙여 눈물을 감추려했다. 그녀의 가녀린 어
깨 위에 손을 얹으려다 멈추며 테리우스가 답답한 듯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제기랄!!! 날 더러 너와 친구로 지내란 소릴 받아들이란 소리야!! 어이가 없군 그래."

돌아오는 길에 테리우스와 아이린은 내내 서로의 얼굴도 바라보지 않은 채 침묵했다. 그들이
머물고 있던 곳에 도착할 때까지 테리우스도 아이린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금 좁은 방안에 둘이 들어서자, 서로의 답답한 마음이 주변을 가라앉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 침묵을 테리우스가 먼저 탁자에 앉아 있는 아이린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
으며 깨트렸다.

"네가 원한다면 네가 그렇게 힘들어한다면 네가 편안해질 때까지…친구가 되어 곁에 있어 줄
게."

테리우스의 말에 아이린이 그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감싸 안으며 조용히 흐느꼈다.

^0^*

제  목: ③말괄량이프린세스 9장 *141* 학원편(41)

③말괄량이프린세스 9장 블랙마나의 희소성

붉은 머리칼의 미녀가 빠른 발걸음으로 성전의 계단을 올라간다. 그녀의 눈빛에 분노가 스며들
어 절정을 이루고 있었고 꼭 쥔 주먹에는 찢겨진 서찰이 구겨져 있다.

메이샤링은 방금 전 아리스샘터 장로들의 모임에서 가이루덴 왕국의 움직임을 확인 시켜주는
정보를 눈으로 확인 한 후, 성전 집무실에 있는 코보 족장에게 달려가는 길이다.

탁!

집무실의 문이 부서져도 개의치 않겠다는 듯 가볍게 닫아도 닫힐 문을 있는 힘껏 박차고 메이
샤링이 들어섰다.

"코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었어? 이걸 보란 말이야."

조용히 집무를 보고 있던 코보가 갑작스런 메이샤링의 출현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묻는
다.

"무슨 일인데 그래."

"무슨 일! 하아, 이렇게 한가하게 무슨 일이냐고 말하다니 아리스샘터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진
짜 아무 것도 모른단 소리야."

메이샤링은 무언가 불안 한 듯 손톱을 입에 물어 자근거린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가 화에 못 이
겨 찢어버린 서찰을 코보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잘 봐, 가이루덴과 데본 제국의 무역에 관련된 서류야. 이중장부에 끼여 있던 서류를 비밀리
에 입수한 거 헌데 그 품목이 뭔지 똑똑히 보라구."

찢겨진 조각을 맞추어 코보는 메이샤링이 가리킨 품목의 이름을 살폈다.

"블랙4? 블랙4이라…이런 품목이 있었나? 무슨 암호명으로 붙여 놓은 거 같긴 한데…."

코보가 알아차리지 못하자, 메이샤링이 답답한 듯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블랙마나를 가리킨 거야. 그것도 데본 제국에서 가이루덴으로 엄청나게 많은 블랙
마나가 수출되었어. 이쯤해서 생각나는 거 없어? 데본 제국에 테리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전까지 있을 수도 없던 일이 겉으로 표출되는 걸 봐. 더 이상한 건…."

"더 이상한 건?"

"장로들이야. 그 전부터 양 갈래로 나뉘어져 화합이 잘 되지 않았었지만 방금 전 회의실에서 데
본 제국으로 향하는 아리스샘터의 출구를 개방하자는 것에 다들 찬성을 한 거야. 지난 많은 세
월동안 단 한번도 일치를 보지 못했던 장로들이 이번에는 어느 누구의 반대도 없이 만장일치
로 개방에 찬성을 한 거야. 나를 제외하고서 말이지…게다가 족장도 없이 그렇게 큰 안건을 결
정하다니 뭔가 서두르는 낌새였어. 나도 오늘 우연히 회의실에 들어갔다가 참여했던 거야."

코보 족장이 장로들의 그런 무례한 처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메이샤링에게 되묻는다.

"사실이야?"

그의 표정이 짐짓 진지해지면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만약 데본으로 향한 출구를 열어두게 되
면 아리스샘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이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출구가 열리면
밤하늘에 쳐놓은 마법이 사라지고 달이 드리워진다. 보름달이 되면 코보는 기억하지 못하는 늑
대 괴물로 변해 포악한 일행을 일삼게 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이 안건을 주도했단 말인가……."

믿어지지 않는 다는 듯 코보 족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밖에서 콰쾅거리는 폭발하는 굉음
이 들려왔고 곧이어 집무실 안쪽까지 화염이 치솟았다.

"이런!! 아침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더니…빨리 몸을 피해야지 뭘 하고 있어!!"

"아, 메이샤링 이쪽으로 가면 비상구가 있어. 그쪽으로 가도록 해 난 중요한 서류들을 챙겨 갈
테니…."

"미쳤어!! 지금 서류조각 챙길 때야. 당장 빠져나가서 상황을 파악한 후 장로들을 소집해야지.
어서 함께 가!"

"하지만…."

"누가 샌님 아니랄까봐. 지금 함께 가지 않으면 평생 네 얼굴 안볼 줄 알아."

"아…알았어."

코보는 극성스런 메이샤링은 손에 이끌려 발길을 옮겼다. 그녀의 불같은 성격을 지금 건드려
좋을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캄캄한 어둠이 성전의 폭발로 인한 화염으로 인해 아리스샘터를 환하게 비추었다. 누군가 성전
의 입구를 폭파시킨 것이다. 코보와 메이샤링은 재빠르게 집무실에서 벗어나 성전을 빠져나가
는 비상 통로로 향했고 그들의 수행원들은 성전 안에서 허둥거리는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폭발로 인해 성전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성전 안 몇몇 사람들은 연기에 질식해 빠져나가
지 못한 고 질식사하기도 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행원들의 안내로 비상통로를 통
해 빠져 나와 큰 인명피해는 입지 않았다.

간신히 빠져 나온 메이샤링은 검게 그을린 자신의 얼굴을 못마땅하다는 듯 수건으로 닦아 내
며 투덜거렸다.

"쿨럭! 쿨럭! 휴∼우, 목이 텁텁해 죽겠어."

기침을 하면서 수건으로 입을 막아내 가래를 뱉어 내면서 메이샤링이 코보를 바라본다. 그 너
머에 다른 사람들도 다들 입을 손이나 천으로 막아내면서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였다. 더
러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에 대해 놀라워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검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면서 불길을 멈추지 않는 성전을 우러러보며 눈을 떼지 않았다.

성전의 폭발음을 듣고 뒤늦게 성전 주변으로 장로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었고 이에 메이샤링이
코보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분명히 이노렌 장로가 꾸민 짓이 틀림없어. 아니 그가 꾸미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깊이 관련되
어 있을 거야. 그를 심문하라고 명령해."

메이샤링이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을 거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오는 장로들과 코보를 번갈
아 보며 확신했다.

"쿨럭! 크윽! 하아, 수 백년동안 평화로웠던 이곳에…이노렌 장로는 푸른색의 로브를 걸치고 있
는데 왜? 의심을 하려면 붉은 색 로브를 걸친 장로들 중에서 의심해야하지 않겠어. 쿨럭! 지난
번 오로라결계 사건에서도 테리우스가 그들을 지적하고 벌을 줬었지 않았나?"

*

깊은 밤에 아리스샘터에 당도한 다칸은 그의 충직한 부하 흑표들을 거닐고 성전을 향해 걷다
가 깜짝 놀랐다. 조용히 평화로운 정적만 흐르던 아리스샘터의 성전에 갑작스런 폭발 때문이
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춘 채 거칠고 큰 바위 뒤로 몸을 숨긴다. 이어 뒤를 수행하던 흑
표들 역시 다칸의 손짓 명령에 의해 나무 곳곳으로 휙휙 거리며 숨어 들어가 몸을 은닉시켰
다.

적색의 망토를 휘감은 누군가가 그 길목을 조심스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덩치나 걸음
걸이로 보아 남자인 듯 했다. 낯설지 않은 기운을 머금고 있는 자가 불타는 성전을 바라보는 눈
빛이 예사롭지 않았고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를 머금고 있음을 다칸의 눈이 확인했다.

그리고 망토의 두건을 벗어낸 자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다칸은 몸을 숙이며 낮은 탄성
을 내뱉는다.

"…카를로스!"

다칸은 조심스레 카를로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왠지 석연치 않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
다.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오른 손으로 움켜쥐며 라무도라욤 마법사가 떠올려 졌다.

'이 검에 의해 죽어야할 자가 바로 네 녀석이라면 기꺼이 마법사님의 뜻을 받들어 없애주마! 헌
데 저 녀석 뭘 저렇게 살피고 있는 건가?'

카를로스는 자신이 설치한 폭약에 의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성전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한 미소
를 지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쯤 외곽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칸 장군의 군사들의 행
동개시였다.

"뭘 망설이고 있는 건지. 쯧쯧, 두뇌에 해당하는 곳을 이렇듯 완벽하게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놓
았으면 곧바로 행동을 취해야지…이래서 인간들과는 거래를 하고 싶지 않다니까. 흐흐흐, 하
긴 메틴 왕의 군사가 이렇게 허술하다면 나중에 내가 다시 장악하기 좋은 상대이긴 하지."

곧 다가올 죽음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카를로스는 품안에서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붙이
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마법의 주문을 중얼거리는 순간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린다.

"아니, 네 녀석은!!"

카를로스가 손에 쥐고 있던 캐론 마왕 공작의 마스크를 땅에 떨어뜨리면서 신경질적인 목소리
로 소리쳤다.

"허, 이런 이런 이게 누구신가? 카를로스님이 아리스샘터에 계시다니…흠, 이걸 테리우스 주군
께서 아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군."

다칸의 비아냥거림에 카를로스는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며 재빠르게 검을 빼어 들어 다칸의 목
을 겨냥했다. 다칸이 방어할 새가 없을 정도로 카를로스의 몸놀림을 빠르고 정확했다. 다칸 역
시 그의 그런 태도에 감탄할 정도로.

"입맛 살아 있는 녀석이로구나. 너 따위 뱀파이어 녀석에게 당할 카를로스님이 아니시다. 크크
큿!!! 어리석은 놈. 어차피 네 주군도 지금쯤은 거의 죽어 있는 목숨이나 같을 것을 아직 상황
판단을 못하는 걸 보니 피라미답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 주군에게 무슨 일을 벌인 거냐!!"

"글쎄, 그건 네 녀석이 살아서 알 수 없을 거 같은데 크크큿!!!"

카를로스가 다칸의 목을 겨눈 검 끝을 그의 심장으로 서서히 움직이며 낮게 읊조렸다. 그러자
다칸이 상대의 검 날을 왼손으로 막아 쥐고 자신의 검을 끌어올리며 방어한다.

챙!!

다칸의 검이 카를로스의 검을 막아서면서 둘의 사이가 벌어졌다.

"아니, 그 검은!! 카나의 정기를 받은 검을 왜 네 녀석이 지니고 있지?"

카나 황국에서 사용하는 흑검의 비법을 가이루덴에서도 비슷한 원리로 제조하여 사용하고 있
기 때문에 순간 카를로스는 다칸을 보낸 이가 가이루덴의 메틴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
나갔다.

다칸이 흑검을 고쳐 쥐고 카를로스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흥, 그걸 물으면 내가 알려 줄거라 생각하나? 어차피 안하무인격인 주군은 어디에 계셔도 살
아 남으실 분이다. 내가 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나? 바로 널 죽이기 위해서야. 아리스샘터가
어떻게 되든 그건 아리스샘터를 지키려고 싸우는 자들의 몫이지. 휘이익∼!!!"

다칸이 카를로스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휘파람을 불러 흑표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불타는 성전
이 내려다보이는 가파른 언덕에서 카를로스와 다칸의 목숨을 건 사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챙!! 챙!! 챙!!!

다칸의 검의 연거푸 쏟아지는 공격에 카를로스의 검이 그만 두 동강이 나버렸다. 둘의 대전을
조용히 주시하던 흑표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냐!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내 제국이 날 기다린다!! 이대로!! 이대로는!!!"

다칸의 검에 몸을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카를로스는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토해냈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핏기가 서려 있었고 억울한 분노를 토해내는 목에는 시퍼런 핏줄들이
꿈틀거리며 살갗에서 빠져 나오려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죽어랏!!!!"

"안돼!!!!!!!!!!!!!!!!!!!!!!!!!!!!!!!!!!!!!!!!!!!!!!!!!! 커억!……."

다칸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카를로스의 목이 마지막까지 권력을 장악하려는 욕망에 손을
놓지 못한 채 발악하다가 일순간 힘없이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이 녀석의 시신을 불태워 없애버려라."

다칸은 흑표들에게 명령을 내린 후, 불타는 성전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

아리스샘터의 성전이 불타오르고 그 소식이 마나아카데미의 제로이드와 바이사코에게 전해지
면서 그들은 아처와 아르테니 그리고 파라도를 집으로 초대했다.

"이건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테리우스를 빨리 찾아야 하기 때문에 당신들
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로이드가 세 수행원들을 직접 안내하면서 상황의 긴박함을 이야기했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던 그의 얼굴이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만큼 상황은 심각했다.

제로이드가 안내한 곳에는 원형의 큰 탁자가 있었고 그곳에 바이사코가 여러 개의 서찰들을 살
피며 한숨을 내쉬고 앉아 있었다.

"제로이드, 이곳에 앉아서 이런 종이 조각들만 보고서는 아리스샘터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으
이…휴! 저 녀석들은 왜 데려온 거야?"

바이사코의 말에 파라도가 발끈한 마음에 소리질렀다.

"아니, 저 자식이!!"

"죄송합니다. 친구를 대신해 사과 드릴 테니 고정하세요."

제로이드가 고개 숙여 사과하자, 파라도가 멋쩍은 듯 뒤로 한발 물러섰다.

바이사코가 이마에 손을 얹어 손가락을 움직여 주무르며 또 한번 크게 한숨을 내쉰다. 아처와
아르테니 그리고 파라도가 각각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아처가 먼저 제로이드에게 입을 열었
다.

"우리들의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씀인지 이야기 해주시죠. 말씀하셨던 아리스샘터에 관한
일을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저희는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
다."

제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대한다.

"알고 있습니다. 실은 그 일 때문에 여러분들을 초대한 겁니다. 저희는 아리스샘터에 생긴 일
로 저희는 그곳으로 갈 예정입니다. 대신 시킬 일의 성질이 아니니…현재 테리우스가 없는 이
상 저희가 나서야할 상황입니다. 대신 여러분들께서는 테리우스와 아이린을 하루 속히 찾아서
아리스샘터의 일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 문제라면 저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겠죠."

아르테니가 아리따운 금발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여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
답에는 어딘지 모르게 못마땅한 의미가 담겨진 듯 했다. 마치 그들에게 명령을 받는 느낌이라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두 분이 살아 계신다면 당신들의 부탁을 들어 줄 수 있겠지요. 만약 살아 계신다면.'

아처가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지긋이 매만지면서 한숨을 토해냈다. 두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할 지를 지난밤부터 방법을 강구하려고 했지만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탁이 아니라 해도 세 수행원들은 지금 아이린을 찾기 혈안이 되어 있었다.

*

가뿐한 마음으로 손에 쥔 목검을 아이린을 힘차게 앞을 향해 휘둘렀다.

휙!!

탁!!!

그러나 상대의 목검에 의해 보기 좋게 부러졌다.

"야! 테리우스 처음부터 검을 부러뜨리는 법이 어디 있어!!! 무슨 선생님이 이래!!"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42화

  겨울기사  Date : 2003/03/10  View : 541  Vote : 0

*


"내가 뭘? 제대로 가르쳐 달라고 신신당부 할 때는 언제였더라?"

테리우스가 딴청을 피우며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대답한다. 그러자 아이린
이 그의 옷깃을 잡아끌며 이야기했다.

"누가 제대로 가르쳐 달라고 했지 가지고 놀라고 그랬어!!! 벌써 이게 몇 개째인 줄 알아!!!"

"참나, 여자들 변덕은 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그만 들어갈란다."

테리우스를 향해 부러진 목검을 쥐며 불만스런 얼굴을 하고 있던 아이린의 옆에는 부러진 목검
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것을 힐끗 한번 쳐다보며 테리우스가 한마디했다.

"참 재주도 좋아. 저걸 다 만들고 부수고 만들고 부수고 넌 지치지도 않냐? 아, 난 몰라. 들어가
서 존에게 밥이나 달라고 해서 먹어야지 배고파."

테리우스의 성의 없는 태도에 아이린이 화가 난 듯 톡 쏘는 목소리로 말한다.

"테리우스!! 그럼 검술 수업은!!! 야!!!…저 녀석이…."

아이린의 대찬 물음에 테리우스가 귀찮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목검을 만들어 놓던지 해. 내가 언제까지 목검을 만들어 가르쳐야 하냐. 배울 사람이 만들어야
지."

그리고는 휙 하니 존의 집으로 가버렸다. 아이린의 미간이 일순 일그러지면서 입에서는 불만스
런 한숨이 새어나온다.

"흐잉, 뭐야. 기껏 검술 가르쳐 주겠다고 먼저 제안해놓고 약이나 올리고…헌데 목검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테리우스가 만들 때 잘 봐둘걸."

*

집으로 들어와 존에게 명령하듯 식사를 만들게 하고 식탁에 앉아 그 음식을 먹고 있던 테리우
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거리며 중얼거린다.

"그런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 나더러 뭘 가르쳐 달라는 거야! 쳇!"

혼자 흥분한 채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테리우스와 반찬을 식탁에 놓으려던 존의 눈이 마주쳤
다. 그러자 조금은 쑥스러운 듯 테리우스가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운다.

"흐흠, 뭘 봐? 할아범."

"아니, 난 그저 내게…."

"뭐?!"

"내게 말하는 줄 알았지 뭔가…허허허!!! 잘 들게나 젊은이."

"쳇, 웃기는 영감이군."

마음씨 좋은 존은 다소 버릇없는 테리우스를 마치 손자를 다루는 듯한 눈길을 주며 웃음을 지
었다. 존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관여치 않은 채 테리우스는 머릿속에 맴도는 누군가의 얼굴
에 또 다시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음식을 입에 넣는다.

'그렇게 너랑 얼굴 마주 대하면 내가 바보냐. 아무 생각도 안 나게! 뭐? 친구? 웃기고 있네!!
쳇, 뭐야 뭐가 그렇게 복잡해. 쳇, 그렇다고 무턱대고 키스하면 내가 약속한 걸 어길 테고 그럼
그 녀석 날 두 번 다시 안 보려 할 테고…곁에 있자니 키스하고 싶고 눈에 안보이게 하자니 보
고 싶고 이런 제기랄!!! 대체 여자들은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야!!'

테리우스는 입안에 음식물을 가득 집어넣은 후 질근질근 씹으며 심술궂은 표정으로 식사했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실타래가 엉키고 엉켜서 도저히 풀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어떤 여자에
의해서.

*

"이 심술쟁이 같으니!! 흥, 그렇다고 혼자 가버리고…헌데 내 검술 실력이 이렇게 형편없었나?
아님 테리우스가 너무 잘 한 건가? 휴, 정말 힘들어…."

테리우스가 가버린 이후, 혼자서 목검을 휘두르며 연습을 하던 아이린은 체력이 다하자, 땅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아예 바닥에 누워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스르륵 잠이 들고 만
다. 그녀의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원하게 불어
오는 미풍이 그녀의 몸을 가뿐하고 상쾌한 기분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춰지는 햇살 역시 그 따뜻함으로 땀
이 식어 몸이 차가워지는 아이린의 체온을 다시금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이봐, 선생이 없어도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어야지!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다니!! 나 참, 너처
럼 제 멋대로 인 학생을 어떻게 가르치란 소리냐?"

"어? 테리우스!"

천진한 눈동자로 두 눈을 깜빡거리며 테리우스를 누운 채 바라보는 아이린의 눈빛에 되려 그
가 어이가 없었다.

'쳇, 어이가 없어서 남 속은 다 뒤집어 놓고 본인은 이렇게 태평하게 누워 잠이 오다니 내가 미
친다.'

테리우스는 손에 들고 온 봉지를 그녀에게 내 던지듯 주면서 입을 열었다.

"배가 고프면 집으로 들어오던지 했어야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응, 연습하다가 그만 누워서 잠이 들었지 뭐야…어, 이건 빵이랑 과일이네? 날 위해 가져온 거
야? 그럼 화 풀린 거니?"

아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봉지를 살피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녀가 봉지 속을
열어보며 미소짓는 걸 보면서 테리우스도 마음이 놓였다. 다만 먹는 것에 자신이 눌리는 기분
이 들어 좀 우스운 느낌도 들었다.

"참나,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배가 고파서 밥 먹고 온 거지. 쳇, 간식으로 가져왔더니만
착각은 자유라니까. 벌써 먹고 있는 것 좀 봐라."

"음, 냠냠! 나도 배가 고팠나봐. 헤헤, 웅 냠냠 맛있다."

"야, 천천히 먹어 누가 뺏어 먹는다고 하냐? 하여튼 못 말리는 녀석이라니까."

"어? 응, 냠냠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배가 더 냠냠, 고파져서 헤헤, 냠냠…윽!! 케켁!!…."

빵을 먹다가 목에 걸렸는지 아이린이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더니 이내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갔
다. 이에 그녀보다 더 놀란 테리우스가 그녀의 등을 두드린다. 그리고 즙이 많이 나오는 과일
을 깨서 아이린의 입에 넣어 줬다. 수분을 섭취한 그녀는 이내 목에 걸린 빵 조각을 넘겨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넘어갔다. 죽는 줄 알았어."

"이런 멍청아!! 그러게 천천히 먹어야지. 그걸 바보처럼 한꺼번에 넘기냐! 에휴, 정말!!"

목에 걸린 빵 조각 때문에 꽤 힘들어 썼는지 아이린은 눈에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그렇다고 테
리우스에게 이렇게 혼날 정도로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이런 과민 반응
이 되려 재밌게 느껴졌다. 그녀에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테리우스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짓게
되었다.

방긋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라보는 아이린의 얼굴을 마주한 테리우스가 기겁을 한 표정
으로 왼쪽 눈썹을 스윽 끌어올리며 말한다.

"뭐야, 그 표정은…."

"헤헤, 나 걱정해주는 게 너무 재밌어서."

"내가 언제 널 걱정해줬다는 거야! 쳇, 이젠 아주 별걸 다 제 멋대로 생각하시는 군."

"걱정은 네가 했지. 헤헤, 그렇게 걱정되면 검술 수업 다시 해줘 응? 에이, 응? 응?"

아이린이 목검을 스윽 내밀며 테리우스에게 말하자, 그가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대답한다.

"뭐…뭐야, 그 표정 그 태도는 야, 징그러워! 내 참 이제 날 가지고 노는 군."

"이번에는 잘 가르쳐 줄 거지?"

"싫어!"

"에이, 해 줄 거면서."

"싫다니까!!"

그러나 한 시간 후, 테리우스는 열심히 아이린의 검술 수업을 해주고 있었다.

*

밤새 아리스샘터 성전 주변 숲 속에서 날을 샌 다칸이 흑표들을 뒤로 한 채 그의 동료 앨런을
찾아갔다. 우선은 자신이 믿을 만한 자를 만나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었기
에 성전의 장로들을 만나는 것은 뒤로 미뤘다. 자신을 찾아온 다칸을 앨런은 반갑게 맞이했고
피곤함이 역력해 보였기에 그에게 잠시라도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길 권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의 뜻과는 관계없이 카를로스와의 대전과 먼길을 달려왔던 피로와 긴
장이 풀리자, 그의 몸 자체가 휴식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앨런의 침대에서
잠시 쉬는 것을 택하게 된다.

한참 동안 깊게 잠이 들었던 다칸은 누군가 자고 있는 자신을 흔들며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
리는 듯 해 눈을 뜬다. 그리고 낯익은 여자의 흐릿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클리오네?'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한없이 눈물만 흘리더니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말없이
흐느끼다가 그녀의 가늘고 하얀 팔을 내밀어 보였다. 그녀의 왼팔에는 전에 없던 흉터가 있었
는데 화상 자국인 듯 했다. 붉게 데여 뭉그러진 그 화상자국은 언뜻 보면 새의 모양처럼 보였
다.

'왜 이런 곳에 흉터가 생긴 거냐. 클리오네 왜 말하지 않는 거지?'

클리오네는 계속해서 그녀의 왼팔의 흉터를 내보이더니 다칸을 바라보며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다시 어디론 가를 향해 걸어간다. 안개가 자욱해진 배경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
으나 다칸의 몸이 움직이질 않았고 그의 목소리 역시 나오질 않는다.

이때 앨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칸은 정신이 들었고 자신이 꿈을 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클리오네의 모습을 말이다.

"자네 괜찮은가? 원, 무슨 악몽이라고 꾼 것처럼 얼굴 색이 말이 아니네. 하긴 지금 이곳 전체
가 악몽 그 자체이지."

"……음, 내가 오랫동안 잤나?"

"응, 꽤 오래 자도록 내버려뒀네. 지금 성전 폭파 사건으로 장로들이 회의를 하고 사람들도 이
래저래 불안해하는 분위기라 일이 많았거든. 네가 나간 후 혼자서 수문장 일을 한다는 게 좀 힘
들더군. 이제 곧 다시 날이 저물면 할 일이 많아질 테니."

앨런이 차를 준비하면서 다칸에게 이야기했다.

"앨런, 혹시 클리오네를 지금 만나 볼 수 없을까?"

꿈속에서 만난 클리오네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칸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를 왜 만나고 싶어하는데?"

앨런의 표정이 좀 전과는 다르게 다소 진중하고 어두워졌다.

"다칸, 그녀는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가 없네."

"무슨 말이야?"

"……유감스러운 일이네."

*

아처는 케르베노아 영토의 지도를 펼치며 아르테니와 파라도에게 설명했다.

"이곳 바다에서 연결되어 있는 마법 통로가 있었던 곳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순간 이동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지금쯤 공주님의 몸에도 마나가 성장해 가고 있다는 걸 감안해 볼
때 가장 유력하게 주군께서 머물고 계실 수 있는 지역은 이곳 스타 섬이야."

"스타 섬?"

"그래, 다만 이 섬에서 가까운 곳이 케르베노아 영토라는 점이 좀 맘에 걸려."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43화

  겨울기사  Date : 2003/03/10  View : 516  Vote : 0

*

아르테니는 곱게 땋은 자신의 금발 머리칼을 뒤로 넘기더니 이내 파라도의 머리를 손에 쥐면
서 아처의 말에 경청했다.

"아처! 스타 섬은 어떤 곳인데 그래?"

파라도가 자신의 머리칼을 만져 주겠다는 아르테니의 태도가 썩 맘에 걸렸지만 그리 크게 신
경 쓰지 않으며 아처에게 묻는다.

"스타 섬은 거의 무인도에 가까울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이야. 다만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케르베노아 영토가 문제지."

파라도의 머리칼을 이리 쥐었다가 저리 쥐었다가 하면서 아르테니가 코끝을 찡그리며 중얼거
린다.

"파라도 제발 좀 씻어라. 이 엉킨 머리칼가지고 어떤 모양을 내도 볼품없겠어."

"냅 둬. 이러다 죽을란다. 그러게 누가 내 머리 만져 달라고 했냐! 허참, 남자가 할 짓이 없어서
볼 상 사납게 머리나 만지는 건 어떻고."

"뭐!"

퍽! 소리와 함께 아르테니가 파라도의 뒤통수를 후려치자, 못내 억울한 듯 그가 아르테니를 째
려보며 볼멘 소리로 말한다.

"이씨, 왜 때려! 눈 튀어나올 뻔했잖아."

"튀어나오기는 뭘 때린 내 손이 아플 지경인데 무슨 머리가 이렇게 단단한지 돌이 아니라 쇳덩
이야."

두 사람의 말도 안 되는 신경전 속에서도 아처는 묵묵히 케르베노아 영토의 지도를 이리저리
살피며 시름에 잠겼다. 죽음의 땅이라 불리 울 만큼 온통 모래와 시체로 가득한 검은 기운이 가
득한 지역 어딘가에 주군이 계실 걸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

데본 제국의 지하에 자리 잡고 있던 몬스터던전을 없애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아리스샘터로 향
할 줄 알았던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뜻밖에도 갑자기 나타나 마왕 공작들에게 내린 지시 사항
이었다.

내부에 있던 캐론 마왕 공작을 따르던 무리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지만 겉으로 내보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바이사코의 지휘 아래에 몬스터던전을 철거하는 작업을 신속하게 처리되었고 그 주변의
지하 감옥까지 매몰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제로이드는 이내 아리스샘터를 향해 홀로 출발했다.

헌데 이 몬스터던전 주변에 있던 지하감옥의 일부에서 작은 지진이 발생하여 지상에까지 그 영
향이 미쳐 그만 바이사코가 임시로 머물던 천막의 땅바닥이 꺼져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죄송합니다. 병사들과 함께 마법사들을 투입했지만 아직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
다."

"흠, 그래? 알겠다. 그만 나가봐라. 음, 지휘자의 안전에 대해 이렇게 허술하다니 뭔가 수상하
군."

곤히 쉬고 있던 바이사코는 졸지에 푹 꺼진 구덩이에 빠진 꼴이 되어 꽤 화가 나 있었다. 그러
나 마왕 공작들은 끝내 지진의 원인을 찾아 내지 못했다. 다음날 바이사코가 직접 지진의 원인
을 살피던 중 백색의 가루들을 발견해 손으로 문질러 보더니 그의 눈매에 빛이 났다.

"이 흔적은…크훗, 녀석 제 주인을 찾아갔겠군. 생각보다 테리우스가 빨리 모습을 나타나겠어."

몬스터던전이 철거되면서 황금 새장에 갇혀 있던 누군가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급기야 걸려
있던 흑마법이 풀리면서 녀석은 신이 난 듯 자유를 되찾았다. 데본 마법사들의 손에 잡히기 전
에 재빠르게 탈출을 감행한 녀석은 자신의 몸에서 백색 가루를 생성해 마법진을 만들어 공간
이동에 성공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자신과 연결고리를 지닌 주군(현재는 별로 주군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 녀석
의 바램이지만)을 찾아 나섰다.

"얏호!!! 자유다!!! 아, 자유의 바람아 불어라!! 날아라!!! 아, 이 맛이야!!!! 이 날아 다니는 기분
을 어디에 비유할까!!!!! 자, 세상에 기다려라!!! 이 벅스칼님이 나가신다!!!! 우헤헤헤!!!!!!"

*

메이샤링의 극성스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코보 족장은 아직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아리스샘터
의 최대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다. 곧 이곳을 점령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밖의 보이지 않는 적들
에 대한 파악을 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장로들을 모아 놓고
아리스샘터에 생긴 이변에 대해 회의했다.

"현재 성전에 일어난 폭발은 외부에서 공격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한 음모 쪽으로 생각
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러 장로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최근 아리스샘터와 데본 제국과
연결된 통로를 개방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소수의 장로 분들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
나 그 분들은 현재 지난 번 죄로 인해 붉은 로프를 하시고 계시는 약 스무 분의 장로 분들 중에
서 제시한 의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코보 족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에 발끈한 붉은 로브의 장로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응대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의견은 아예 묵살해도 된다는 말이오. 비록 의견이 달라 현재의 위치가 이
리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역시 이곳의 장로들임을 분명한 사실이오."

"맞소, 의견이 달라 이리 된 것이지. 우리에게 죄가 있어 이리 된 거라 생각하지 않소. 처음부
터 마치 성전의 폭발이 우리들이 벌인 짓인 것처럼 말하는 것조차 기분 나쁘군."

몇몇의 붉은 로프의 장로들이 불만 섞인 이야기를 꺼내자, 여기저기서 동조하며 회의실은 순식
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탁! 탁!

그때 이노렌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푸른 로브를 중앙에 던져 버리며 장로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런 로브의 색으로 우리가 흩어지는 정신을 보여서는 안 된다 생각하오. 다들 나를 따라 로브
를 벗어 던져 버리시오."

버젓이 그들을 이끄는 코보 족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그들의 리더인 양 선두로
나서는 이노렌 장로의 모습에 메이샤링이 끼여들어 한마디한다.

"이노렌 장로! 당신이 무슨 권리로 우리들에게 로브를 벗어라 마라 하는 거죠? 이 로브는 아리
스샘터를 대표하는 장로들의 상징이에요. 더군다나 이곳의 리더는 당신이 아니라 코보 족장이
란 사실을 망각했나보죠? 아님 벌써 망령이 든 건가요?"

메이샤링의 발끈한 모습에도 이노렌 장로는 예전처럼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
려 여유 섞인 웃음을 흘리며 그의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크허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되나 보군 메이샤링. 쯧쯧, 그래서야 장로라고 할 수 있나? 크허
허!!"

이노렌 장로의 미묘한 말에 코보 족장이 나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오. 이노렌 장로."

"오늘이 그대의 권리가 박탈된다는 소리지. 크허허허!!!!"

"뭐라!!!"

이때 긴 신호음과 함께 갑작스런 함성이 아리스샘터를 뒤덮기 시작했다.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격렬한 외침과 함께 수천 수만 명의 발자국 소리가 진동을 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피비린내 나
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리스샘터인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장로들의 모습
에 코보 족장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망연자실했다. 아리스샘터의 지도부들이 이미 적들의 손
에 넘어간 꼴이니 앉아서 당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몇몇의 장로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침묵하거
나 곧 다가올 새로운 권력에 대한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

칸 장군이 아리스샘터를 장악하고 있을 때 세바스찬은 캐론 마왕 공작의 성을 통해 데본 제국
에 진입했다. 그리고 손에 쥔 문서를 보며 승리의 웃음을 짓는다.

"이제 블랙 마나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권력의 크기를 의미하는 거다. 테리우스 네 녀석이
더 이상 블랙 마나의 존재를 무한에서 유한으로 만들어 놓았으니…뭐, 아직도 그걸 깨뜨린 점
이 좀 아쉽지만 어차피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는 것이 낫지. 이제 슬슬 마왕 공작들을
포섭해 볼까?"

막 데본 제국의 성에 들어서려는 그의 앞에 보라색 망토를 걸친 여자가 가로섰다. 그의 사촌 일
라이저이다.

"세바스찬, 만약 오빠가 이곳의 왕이 되면 그럼 테리우스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녀는 아직도 테리우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의 안위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그의 부와 권력에 이끌려 접근했지만 자꾸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던 그에게 어느새 빠져가고
있는 그녀였다.

"이게 뭔 줄 알아?"

"……."

세바스찬이 둘둘 말린 서류를 보이며 묻는다. 그러자 일라이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답변
을 기다렸다.

"푸웃, 바로 데본 제국에서 테리우스가 과연 왕의 자격을 갖추었는지에 대한 물음표를 가져다
줄 자료다. 데본 제국은 부와 권력이 가장 높은 자가 왕의 자격을 가지고 있거든. 뭐 아주 간단
하게 표현하자만 말이지. 녀석은 이제 블랙마나 초석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 힘도 사라져가
고 있다 이 말이지."

"그럼…."

"그래, 그 녀석은 이제 데본 제국에서 왕의 자질이 있는지 그 권력부들에게 재판을 받게 될 거
야. 이곳에 원칙은 아주 강경하거든. 그 후에 칸 장군이 이끈 군대로 인해 사라져 버리는 아리
스샘터에 대한 소식까지 더 해진다면 테리우스 그 녀석은 끝장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곧 알게 된다. 그만 넌 네 자리로 돌아가 있어 일라이저."

데본 제국의 성에 들어서는 세바스찬의 뒷모습을 보며 일라이저는 잠시 동안 멍해진 기분이 들
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어 힘을 잃어버릴 테리우스의 모습을 생각하자, 일라이저는 갑자기 반가
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힘이 없어진다면 그럼 그를 더 강한 힘으로 내 곁에 둘 수 있다는 소리가 되는 건
가? 쫓겨난 왕을 애인으로 삼는다? 뭐, 결혼이 아니라 애인이라면…그래, 내게 그렇게 차갑게
굴었던 걸 눈물나게 후회하도록 해 줄 거야. 호홋,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돌아가
계획을 세워야지.'

일라이저는 급히 자신이 타고 온 은회색 마차에 올라 가이루덴으로 향했다.

*

낯선 섬이 일 주일 사이 어느 새 내 집처럼 편안하게 될 정도로 익숙해져 버렸다. 아이린은 묵
묵히 저녁을 먹고 있는 테리우스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테리우스."

그녀의 음성만 들어도 어떤 종류의 말을 꺼낼 지 대충 짐작이 가는 테리우스가 대답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그렇게 가느다랗게 목소리를 내냐?"

"내가 언제…피잇, 친구들이 보고 싶지 않아?"

"쳇, 내 친구들을 말하는 거냐 아님 네 친구들을 말하는 거냐."

"알면서 그래. 지금쯤 아처랑 아르테니 그리고 파라도가 날 찾고 있을 텐데…우리 너무 오랫동
안 여기에 머물고 있단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아이린의 말에 한동안 테리우스가 침묵하더니 갑자기 미간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한다.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44화<상>

  겨울기사  Date : 2003/03/10  View : 496  Vote : 0

그의 표정에 아이린이 기가 눌린 상태로 이래저래 분위기를 살폈다. 낮에 검술 수업을 받으면
서 여러 번 혼났던 탓인지 혹시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테리우스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가 고기를 썰고 있던 나
이프를 창문 쪽으로 번쩍 날리더니 그대로 유리창이 깨지면서 누군가의 모습이 스윽 지나갔
다.

쩌∼억! 쨍그랑!!!

아이린이 화들짝 놀라 사정없이 깨져버린 창문과 그곳을 매섭게 째려보고 있는 테리우스를 번
갈아 보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왜 그래 테리우스! 무…무슨 일이야?"

먹다만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안에 넣은 후, 질겅질겅 씹으면서 그가 볼멘 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은 불청객이 왔단 소리지. 생각보다 늦게 왔어. 읔, 잔소리를 들을 생각에 갑자기 머릿
속에 빙글빙글 돌 것 같다. 잔소리꾼은 너 하나도 벅찬데 말이지."

"잔소리꾼?"

아이린이 테리우스의 옷깃을 잡아 세우며 그의 시선을 자신에게 고정시켜 놓고 되물었다. 그러
나 테리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을 회피한다.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는
피곤했다.

"테리우스, 그렇다고 창문 유리를 저렇게 깨트려 놓으면 어떡해. 바람이 불어 방도 차가워지고
게다가 존 할아버지께 미안하게 이게 무슨 짓이니. 정말 이유도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웬 심술
이야."

아이린이 투덜거리며 깨어진 창문으로 다가가 몸을 굽혀 유리 조각들을 하나 하나 줍기 시작했
다. 그제야 테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막아서며 말문을 열었다.

"어차피 그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야. 괜히 어줍잖게 줍다가 손 다쳐 그만 둬."

"그 녀석이라니?"

"응, 아주 골칫덩이에 별로 반갑지 않은 녀석이지만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어야 할 녀석이지.
왔으면 들어와 얼굴을 내밀어야 정상이지만 그 녀석 내 앞에서 주인님 소리하기 싫어서 주변
만 뱅뱅 돌고 있거든. 이제 그 녀석 때문에 이 유리창이 깨져서 우리가 추위에 떨지 모르니까
미안해서라도 나타나서 치우겠지."

테리우스가 설명하는 동안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창문에 다시 한번 스윽 지나가는 누
군가의 모습을 목격했다.

"어! 누가 방금 저기로 휙 지나갔어 테리우스."

"흠, 아무래도 나타나기 썩 내키지 않나 보군. 내버려둬라. 지붕에서 날을 새든 말든 여하튼 아
이린 너 감기라도 걸리면 그 녀석 내 손에 반은 죽을 줄 알아야 할거야."

테리우스의 기압 섞인 목소리를 창 밖에서 몰래 엿듣고 있던 벅스칼은 목에 사래라도 걸린 것
처럼 케켁 거리는 것을 입으로 막으면서 다시금 침을 꿀꺽 삼켰다.

'으이구, 저 원수 같은 테리우스 쩝, 뭐 이 빼어난 외모를 주인님께 하루바삐 보여드리고 싶긴
하지만 너 꼴 보기 싫어서 들어가기는 더더욱 싫고…음, 헌데 왜 테리우스의 기가 이렇게 약하
게 느껴지는 거지? 내가 없는 사이에 뭔 일이 생긴 거야?'

반지에서 풀려난 벅스칼은 이제 다시금 테리우스를 주인님이라고 불려야 한다는 상황을 파악
하면서 옛주인이 되어버린 아이린을 그리워하며 씁쓸해했다. 그렇다고 테리우스가 버젓이 자
신에게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에 나 왔어요 하고 들어가기도 자존심이 상한 터라 오늘밤
은 그냥 지붕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아이린은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식탁보를 깨진 창문에 붙였지만 그렇다고
바람을 완전히 막아내진 못했다. 식탁 앞 벽난로에 평소보다 장작을 더 태워도 추운 기운이 가
시진 않았다. 게다가 친구 사이로 지내자는 아이린의 선언 덕에 테리우스는 꼼짝없이 침대에
아이린을 모셔 놓은 채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자야만 했다.

"테리우스, 춥지 않아? 괜찮아? 그러게 왜 하필 유리창을 깬 거야. 존 할아버지께서 오늘 안 들
어오셨으니 창문을 고칠 수도 없고 아마 지난번처럼 사냥을 가신 거 같은데 언제 오실 지 알 수
도 없잖아. 정말 안 추운 거야?"

마력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는 지금 테리우스의 몸 상태가 최저였기 때문에 추위가 더 뼈저리
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춥다고 말하면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싫은 그의 자존심이었으니.

"시끄러워, 잠이나 잘 것이지 그 놈의 잔소리는…으이구, 이 녀석 들어오기만 해봐라."

이를 갈며 벅스칼을 떠올린 테리우스는 아주 조금은 저녁때의 행동을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
다.

한편 지붕에서 바닷가의 세찬 바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평온하게 잠이 들고 있던 벅스칼은
원래 드래곤의 성질을 지닌 몸체인지라 몸에 열이 많았기에 웬만한 추위에는 끄덕도 없는 녀석
이었다.

크릉!!! 쿠울!!! 크르릉!!!!

쿠울!!!! 휘유∼푸르르 쿠울!!!

너무나도 천하 태평하게 자고 있던 벅스칼은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을 천장 삼아 곤히 잠에 빠
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가 벅스칼의 얼굴에 스윽하고 드리우더
니 이내 녀석의 얼굴에 무자비한 속도로 펀치가 날라들기 시작한 것이다.

벅스칼의 잠자던 소리는 잠시 후, 비명소리로 돌변하게 되었다.

"으아아아앗앗!!! 누구얏!!!"

"네 주인다!!! 임마!!! 남은 추워서 덜덜거리고 있는데 시끄럽게 코까지 골며 자고 있어!!!"

무방비 상태로 테리우스의 주먹에 얼굴을 맡겼던 벅스칼이 죽었다 싶은 마음에 그래도 조금
덜 맞아 보겠다는 심정으로 자신에게 또 다시 날아오는 테리우스의 주먹을 방어했다.

턱!!

그런데 너무나도 싶게 벅스칼에 손아귀에 테리우스의 주먹이 막아졌다. 이에 주먹을 날렸던 테
리우스보다 벅스칼이 되려 놀라 동공을 확대하다 두 눈을 깜빡거리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테리
우스를 바라봤다.

"주인님…!"

"……."

테리우스와 거의 한 몸처럼 느끼고 있는 벅스칼에게는 그의 주먹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통
해 그의 몸 상태가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인간과 비교한다면 그는 여전히 강
한 남자다. 그러나 마나를 지니고 있는 마력자들과 비교한다면 그는 한낮 평범한 인간에 불과
한 힘만 지니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빌어먹을 제기랄!!!"

"테리우스님!"

벅스칼이 무슨 일인지 그의 몸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자, 바로 그를 주인님이라 칭하
며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 점이 되려 맘에 들지 않은 듯 테리우스가 그의 머리를 툭하고 내치
면서 대답한다.

"시끄러, 언제부터 네가 내게 존칭을 했는지 까마득해서 기억도 안 난다. 쳇, 사실은 그 블랙마
나 초석을…."

테리우스는 지붕에서 벅스칼과 나란히 앉아 그에게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 해주었다. 벅
스칼 역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카를로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면서 데
본 제국이 위험에 처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하지만 주인님은 원래 마신까지 있었는데 블랙마나 초석을 내줬다고 이렇게…."

"쳇, 일시적인 거야. 하지만 방법을 제대로 찾아내서 풀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마신이란 자리
는 피를 필요로 하는 자리…지금은 내게 지켜야할 소중한 것이 있어서 함부로 꺼낼 수 없는 힘
이야."

"결국엔 끝까지 폼잡고 싶단 소리네 뭘."

"이 녀석이 까불고 있어! 벅스칼 당장 내려가서 창문 고쳐 놓지 못해!"

"에효, 그런 심부름은 이제 안 해요. 쩝, 물론 아이린 주인님이 보고 싶어 내일 아침에는 내려
갈 생각이었지만."

벅스칼의 달라진 모습을 바라보면서 테리우스가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볼만하군. 한때 친구로 지냈던 때가 갑자기 생각나네 뭐,
별로 좋은 기억은 없다만."

"흠흠, 이만하면 멋지고 잘생긴 남자지. 솔직히 너보다는 내가 더 멋져."

벅스칼이 슬쩍 말을 놓으며 말한다. 그의 눈처럼 부신 신비함을 머금고 있는 머리칼은 더벅머
리 아래로 길게 땋아져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온통 흰색 경장 차림이 그를 마치 신선처럼 느
끼게 했다.

게다가 머리칼과 의상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는 그의 구릿빛 피부와 검은 눈동자는 명랑함과 쾌활함의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44화<하>

  겨울기사  Date : 2003/03/11  View : 473  Vote : 0

*

"그만 내려가자. 춥다."

"아니, 이렇게 멋진 천장을 두고 어딜 내려간다고 그래요. 사나이들끼리 멋지게 이곳에서 누워
밤을 새워 이야길 해보죠. 이런 것이 바로 사나이의 우정을 뒷받침하는 추억거리가 되지 않겠
어요?"

"사나이? 놀고 있네. 너나 해라 난 내려간다."

테리우스가 내려가려고 몸을 일으키자, 벅스칼이 그의 손을 턱하고 붙잡으며 거의 애걸하듯 말
한다.

"에이, 왜 이러시나 그 멋졌던 옛 주인님의 기상은 어디로 가시고 이쯤 추위는 견딜 수 있지 않
는지…아, 그 이상한 음모에 의해 몸이 허약해 지셔서 이젠 안되시죠. 음, 어쩔 수 없군요. 전
멋지게 이곳에서 하룻밤 지내고 내려 갈 테니 그럼 먼저 가세요."

벅스칼의 말이 테리우스의 자존심을 건들었는지 그가 다시 몸을 낮추더니 눕는다. 그리고 팔베
개를 하며 투덜거렸다.

"쳇, 추위는 무슨…오늘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네 잔소리를 들어주지 뭐."

"하핫, 역시 주인님은 멋지세요."

가끔 아부 성 발언에도 약한 테리우스였고 언제나 아부에 능숙한 벅스칼이었다. 다만 녀석의
잔머리 굴리는 속내 덕에 끝이 안 좋았지만 말이다.

'헤헷, 생각보다 일찍 잠이 들었네. 어쩌다가 마력을 다 상실한 거야 참.'

*

다음 날 아침, 아이린은 아직 몽롱한 상태로 눈을 비벼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암, 잘 잤다. 어젯밤에 꽤 시끄러웠던 소리가 났던 거 같은데…바닥이 추웠을 텐데 테리우
스는…으앗!"

아이린이 무언가에 발이 걸려서 넘어졌다. 이불 안에 꿈틀거리는 것이 테리우스일 거라 짐작하
고 손을 뻗은 그녀는 그만 놀라고 만다.

"테리우스…앗! 누구세요?"

머리칼이 흐트러져 얼굴 전체가 부수수한 벅스칼이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다가 아이린의 시선
과 마주치자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재빨리 이불로 자신을 얼굴을 뒤집어쓰며 소리한다.

"에궁, 이걸 어째 이런 모습으로 주인님을 만나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하핫, 안녕하세요 주
인님."

모습은 한번도 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아이린은 한쪽 눈
을 비벼대며 뒤로 성큼 물러서 자신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희멀건 이불더미를 가리켰지만
막상 말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러자 벅스칼이 빼꼼이 이불 속에서 얼굴을 조심스레 다시 꺼내 보이며 활짝 핀 미소와 함께
손바닥을 위로 올려 보이며 인사한다.

"하핫, 주인님! 벅스칼을 잊으신 건 아니시죠?"

"벅스칼? 벅스칼이라구? 정말 벅스칼이야?"

아이린의 계속되는 반복 질문에 벅스칼이 연거푸 고개를 까닥까닥 거리며 웃음을 짓는다.

"네, 저예요. 주인님의 영원한 종 벅스칼."

아이린은 벅스칼의 낯선 모습에 조금 놀랐지만 그의 목소리가 반가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반가
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주변 구석구석을 살피며 누군가를 찾아본다. 그녀가 무엇을 찾
고 있는지 뻔히 짐작한 벅스칼이 조금은 미안함을 섞어 내며 말했다.

"에궁, 아무리 찾아도 테리우스는 이곳에 없어요 주인님."

"어? 응, 그래 테리우스가 없어…벅스칼은 그럼 어제 혼자 그냥 들어왔다는…아니, 그보다 여
길 어떻게 찾았어…아니지, 그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아이린의 연속되는 질문에 벅스칼이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이야기한다.

"헤헤, 주인님도 참 그렇게 많은 질문을 한꺼번에 하시면 어떡해요. 우선 어젯밤에 테리우스가
창문을 깨트려서 혼이 난 장본인이 저예요. 아시겠지만 전 원래 본능에 강한 기운을 지녀서 주
인님과 연결된 고리가 있어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거든요. 아, 테리우스는 지금 지붕에서 자
고 있을 거예요. 제가 내려오라고 했지만 한사코 지붕에서 자겠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둔 거
죠. 헌데 아침은 언제 먹나요?"

벅스칼이 설명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말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아이린은 그냥 고개를 끄덕
이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아, 아침? 지금 준비할 거야. 존의 식료창고에서 음식을 가져와서 요리하면 되거든. 그럼 테리
우스 좀 불러 줘. 이야기는 식사하면서 천천히 하자 벅스칼."

"네∼에, 주인님!"

벅스칼이 충성을 맹세하는 것처럼 경례를 하자, 아이린이 빙긋 웃으며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가지고 방을 나선다. 사실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 역시 편안한 평상복 차림이었기에 벅스칼과
이야기하는데 아무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린이 나간 직후, 벅스칼은 침대 밑으로 구겨 들
어간 자신의 옷들을 꺼내기 바빴다. 벅스칼은 잠을 잘 때면 옷을 다 벗어버리는 잠버릇이 있었
던 것이다.

그가 옷가지를 챙겨 입고 있을 때 그나마 창문에 바람을 막아주고 있던 식탁보가 갈라지면서
누군가 침입했다.

"헉, 누구얏!"

아래 바지를 걸쳐 입다가 놀란 벅스칼이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치기하면 소리쳤다. 그러자
온몸이 새파랗게 추위에 떨어 차가운 테리우스가 부르르 떠는 목소리로 응대한다.

"뭐! 누구? 이 녀석이 너 오늘 정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뭐가 어째? 밤하늘을 천장 삼아 사나
이의 우정이 어쩌고저쩌고 내가 네 녀석 말주변에 또 넘어간 걸 생각하면…엣취! 제기랄 감기
까지!!! 벅스칼 너 잡히면 가만 안 둘 거야!"

테리우스가 벼르며 달려들자, 벅스칼이 재빨리 몸을 일으켜 식탁 너머로 도망가면서 소리지른
다.

"아,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요. 그냥 자다가 추워서 내려 왔죠. 뭘, 주인님도 추우면 내려와서
잤으면 됐죠. 그런 융통성 없는 걸 왜 제 탓으로 돌립니까? 으앗, 그걸로 뭘 하시려구요."

화가 난 테리우스가 레드문을 꺼내 들자, 질겁하는 벅스칼이 문을 열로 도망가버린다. 이에 질
세라 그 뒤를 테리우스가 바짝 뒤쫓았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궁금해 식료 창고에서 나온 아이
린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벅스칼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 아이린 주인님! 테리우스 좀 말려 주세요. 저 녀석이 절 죽이려고 해요. 우아앙!!! 좀 막아
주세요."

"아니, 벅스칼 왜 그래? 테리우스 지금 그걸 왜 빼 들고 있는 거야? 모습은 또 왜 그래?"

몰골이 말이 아닌 테리우스가 가히 살인적인 눈빛으로 벅스칼을 향해 레드문을 빼어 들고 있
자, 아이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45화

  겨울기사  Date : 2003/03/11  View : 473  Vote : 0


*

벅스칼과 테리우스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눈빛을 주고받는 덕분에 아이린은 꽤 불편한 식사를
해야만 했다.

"두 사람 다 언제까지 그렇게 으르렁거릴 거야. 중간에 있는 내가 더 힘들잖아. 정말 세 살 먹
은 애들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야."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벅스칼이 고개를 낮추며 입안에 빵을 집어넣고선 투덜거린다. 그러다 테리우스가 험상궂게 바
라보자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벅스칼 나중에 보자."

"에효, 나중에 보자는 거 하나도 안 무섭다."

"저게 진짜."

테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들자, 아이린이 재빠르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막는다.

"두 사람 다 지금부터 얼굴에 인상을 쓰거나 비아냥거리면 다신 안 볼 테니까 알아서들 해! 알
겠어!"

"……!"

"네에? 에잉, 알았어요 주인님. 히힛, 잘 해보자구 테리우스…님 쩝! 음, 이 수프 맛있는데요."

벅스칼은 금세 분위기를 바꾸어 재잘거리면서 식사를 했고 그 모습이 얄밉지만, 아이린의 선언
에 하는 수 없이 테리우스는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왜 아이린의 눈치를 살
피는지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뜻 자신의 고집대로 밀고 나갈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벅
스칼이 찍소리도 못하게 패주고 싶었지만 말이다.

그들의 식사가 거의 끝날 때 즈음 누군가 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처음에는 벅스칼의 재잘
거림에 의해 잘 들리지 않았지만 곧이어 문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리자, 아이린이 문을 향해 고
개를 돌려 말했다.

"어? 존 할아버지께서 벌써 돌아오신 건가?"

그녀가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벅스칼이 테리우스에게 물었다.

"존? 그게 누군데?…요."

아이린이 곁에 없자, 다시금 테리우스의 심기를 살피면서 벅스칼이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짓는
다. 녀석 어디에서든 빌어먹고 살 생명력이 질긴 녀석임에 틀림없다고 테리우스는 생각했다.

"이 집 주인이야."

"호오, 그렇군요."

"……."

"헌데 이 고기는 좀 질기네요. 양념은 아이린 주인님께서 직접 만드신 건 가요?"

"시끄러."

"흐잉, 성질은…쩝."

테리우스는 컵에 물을 따르고 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리고 바
다를 향해 바라보는데 낯익은 목소리들로 뒤가 시끌벅적거리기 시작한다.

"세상에! 아처, 아르테니, 파라도 대체 어떻게 찾아 온 거야? 파라도 얼굴은 왜 그렇게 까맣게
됐어?"

"으아아앙!! 공주님, 세상에 이런 허름한 곳에서…아, 원래 화려한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 파라도는 공주님을 다시 못 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
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크흑흑!!! 이렇게 다시 뵈어서 감격스러워 눈물을 안 흘릴 수가
없네요. 크흑흑!!!"

아이린이 숨쉬기 곤란할 정도로 파라도가 그녀를 꼬옥 껴안았고 연이어 아르테니 역시 아이린
의 손을 붙잡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공주님이 살아 계셨을 거라 믿었어요. 이번에 아처가 마법진을 만드는데 정말 힘이 들었답니
다. 혹시 못 찾을까 제 맘도 조마조마 했거든요. 하, 다행이에요."

호들갑을 떠는 파라도와 아르테니에 비해 아처는 묵묵히 아이린을 향해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
다. 그리고 아처는 고개를 돌려 테리우스를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째려본다.

'저 녀석 때문에 공주님이 이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니…용서할 수 없는 놈!'

자신을 꽤 매섭게 바라보는 아처에 대해 테리우스 역시 좀 껄끄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생각했
다.

'뭐야, 저 녀석 건방진 눈빛은! 쳇, 좀 조용히 있다 싶었더니 떼거지로 몰려왔군. 잔소리꾼 벅스
칼에 이어 떨거지 수행원들까지…슬슬 이곳에서 벗어날 때가 된 건가?'

*

데본 제국에 고위 마왕 공작들이 모여 진지하게 회의를 열고 있었다. 그들의 안건은 붕괴된 아
리스샘터의 지도부에 대한 처리와 대마왕 테리우스의 자격 상실에 관한 증거를 검토하는 문제
였다.

데본 제국의 지도층들 사이에는 아리스샘터에 갔던 제로이드와 데본 제국의 재판부에 갔던 바
이사코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블랙마나와 더불어 화이트마나를 생성하는 카나 황국
의 외교부에서도 참석했다. 회의는 제로이드가 진행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리를 지
키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비어있는 대마왕의 좌석에 자리잡고 있는 왕관을 향해 경위
를 표한 후 자리에 앉았다.

"이미 가이루덴의 침략으로 인해 붕괴된 아리스샘터에 관해서는 코보 족장을 사퇴시키고 그 자
리에 이노렌 장로가 맡는 것으로 일괄 처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과 구체적으로 해야할 주
제는 두 번째 안건인 테리우스 마왕에 관한 일입니다. 여기 가이루덴의 세바스찬 왕자가 가져
온 서류에 의하면 그는 데본 제국의 힘을 상징하고 있는 블랙마나 초석을 소멸시켰다고 합니
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데본 제국에서 대마왕이 지녀야할 첫째는 바로 강력한 힘의 원천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블랙마나의 생성이 더 되지 못한 점을 볼
때 과연 대마왕의 자리를 계속 테리우스 마왕에게 부여해야 하는 것 인지입니다."

제로이드는 자신의 입을 통해 그의 친구를 파멸 시켜야한다는 말을 전달해야한다는 점이 썩 내
키지 않았다. 그는 고위 간부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는 내내 굳은 표정이었고 바이사코 역시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긋고 있었다. 다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캐론 마왕 공작을 따
르던 무리들과 그들을 마치 대표하고 있듯 그들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세바스찬 왕자만이 만족
스런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제로이드의 상황 설명이 끝나자, 데본 제국의 재판부의 판관이 자리에 일어나 발표했다.

"삼일 후, 대마왕에 대한 자격 여부에 관해 재판을 열릴 예정입니다. 현재 테리우스 마왕을 찾
기 위해 수색대를 편성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테리우스 마왕께서 사망했을 경우에는 블랙마나
를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왕족에게 대마왕의 자리를 역임하게 됩니다.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
는 가이루덴의 세바스찬 왕자이십니다. 가이루덴에서는 데본 제국과 친교를 수립을 요청한 상
태입니다. 마왕 공작님들의 선택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

긴 회의가 끝난 후, 데본 제국의 지도층들을 위한 만찬이 시작되었다. 한쪽에서 제로이드와 바
이사코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끔씩 멀리서 마왕 공작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세바스찬을 바
라봤다.

"뭔가 이상해. 제 아무리 막강한 군대를 지니고 아리스샘터를 쳐들어 왔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
렇게 일순간에 장악할 수 있지? 게다가 저 기생오라비 같은 생김새 좀 봐. 영 맘에 안 들어."

제로이드가 고개를 내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에 바이사코가 고개를 끄덕이
며 술을 홀짝홀짝 넘겼다.

"지금으로서는 테리우스가 온다고 해도 뾰족한 방법이 없어. 참나, 이렇게 어이없게 데본이 저
런 뺀질 거리는 어린 녀석에게 넘어가다니 크게 전쟁이라도 한바탕 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겠어! 젠장, 테리우스는 어쩌다가 순순히 블랙마나 초석을 내놓아 없애버린 거야. 도무지 이
해할 수가 없어!"

두 사람의 마음은 점점 착잡해지기만 했다.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46화

  겨울기사  Date : 2003/03/12  View : 481  Vote : 0

*

세 흑기사들의 방문으로 인해 데본에서 보낸 수색대가 테리우스를 찾기 전에 그는 데본으로 들
어서게 되었다. 아이린은 자신으로 인해 테리우스가 블랙마나 초석을 소멸시켰다는 이야기를
제로이드에게 전해 듣고 놀랬다. 데본 제국에서 재판을 벌이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아이
린은 테리우스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쉽게 부와 권력을 내
버렸다는 점이 안타깝고 미안했다.

테리우스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아이린은 자신의 맞은 편에 일라이저와 그녀의 일행 그리고
몇몇 마나아카데미의 학생들을 발견했다. 전 세계의 권력이 이동될 수 있는 상황에서인지 각
국의 지도부에서 참석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벅스칼, 데본 제국에서 재판을 하는데 외부에서도 참석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알기로는 이곳
은…."

"카나 황국도 그렇지만 데본 제국도 왕의 자리에 관한 일은 각 국의 권력자들이 참석할 수 있어
요. 물론 감시가 철저하지만…테리우스가 이런 일을 벌였다는 건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렇다고 주인님 너무 시무룩해 있지는 마세요. 그거 아세요? 테리우스가 계속 주인
님을 바라보고 있어요."

벅스칼의 귓속말에 아이린이 고개를 푹 숙이며 알고 있다는 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부 앞에 놓여 있는 황금 의자에 앉아 있는 테리우스는 마치 고급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것저것 증거 자료를 확인 받고 대답하면서 일종의 조사를 받고 있는 분위기였다.

판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리우스를 향해 질문을 던지자,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선다. 거의 모
든 자료가 말해 주듯 그에게 이제 더 이상 블랙마나를 생성할 힘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었
다.

"그럼 더 이상 데본 제국에 대마왕 직위를 지켜나갈 능력이 없는 테리우스 마왕을 대마왕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판결을 내려도 되겠습니까? 현재 테리우스 마왕에게는 보유하고 있는 블랙마
나가 없으므로 이 재판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에는 데본 제국에서 추방하게 됩니다. 이 사실
을 알고도 순순히 따르겠습니까?"

진지한 판관의 물음에 테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렇소."

그에 한마디 대답에 재판을 함께 하던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자리를 물러나겠다는 테리우스의 태도가 그들은 납득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잠깐만, 이의를 제기합니다."

갑자기 일라이저가 자리에서 손을 올리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는 당당히 재판부 앞으로 당
당히 걸어가 쥐고 있던 길고 흰 봉투를 건넨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재판부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이루덴의 일라이저 공주님이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여기에 적힌 대로라면 공식적으로 테리우스 마왕에게 청혼을 하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블랙
마나를 넘기겠다는 뜻이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일라이저의 보랏빛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빛나 보였고 그녀의 가느다란 미소는 테리우스를 향
하고 있었다. 이에 제일 먼저 놀란 아이린이 두 손을 가슴에 얹으며 현기증을 느꼈다.

데본의 재판부에서도 그녀가 준 서류를 훑어보며 회의를 했고 관중들 역시 예상치 못한 반전
에 수군거렸다. 세바스찬은 갑작스런 사촌 여동생의 행동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터벅터벅 걸
어나와 그녀의 손목을 비틀어 끌어 당겼다.

"무슨 개수작이야!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세바스찬의 화난 음성이 낮게 그녀의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그런 행동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일라이저가 태연하게 답변한다.

"걱정 마, 오빠가 차지하고 싶은 자리를 뺏을 생각은 없으니까. 어차피 테리우스라는 위험 요소
를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것이 나중에 후한이 없을 거 아냐?"

"후훗, 그래? 좋아. 어차피 이빨 빠진 호랑이 녀석이다. 일라이저 널 한 번 믿어보지."

일라이저와 세바스찬이 나란히 서서 테리우스를 응시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세바스찬은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테리우스의 태도가 조금은 맘에 걸렸다.

'어떻게 저렇게 태평할 수가 있지? 기분 나빠.'

세바스찬이 심기가 불편 한 듯 되려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인산을 썼다. 일라이저의 제안에 대
해 회의를 마친 재판부에서 테리우스에게 물었다.

"테리우스 마왕은 가이루덴 공주의 청혼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습니까?"

검붉은 모자를 뒤집어 쓴 판관의 물음에 테리우스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그럴 생각은 없으니 개의치 말고 판결하라."

테리우스는 대답한 후, 아이린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시선을 피한 채 고개
를 떨구고 있었다. 곁에서 벅스칼이 계속 자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는 듯 싶었다.

'후, 아이린.'

테리우스는 그녀의 마음이 행여 다칠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반면 아이린 역시 마치 죄인처럼
재판부 앞에 앉아 대답을 하고 있는 테리우스가 걱정되었다.

"호, 저 녀석 정말 우리 공주님을 좋아하나 본데? 헌데 데본 제국의 귀족인 건 알았지만 대마왕
이었다니 게다가 공주님의 연인…으, 카나 황국에서 이 사실을 알면 뒤집어 질 거야. 공주님께
서 왜 우리에게 저 녀석에게 신분을 숨기라고 했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하네. 아처만 불쌍하지
쯧쯧."

"쉿, 파라도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해. 공주님 들으시겠어."

아이린과 벅스칼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던 아르테니가 곁에 투덜거리는 파라도를 팔꿈치로 쿡
찍어내며 나무랐다. 그리고 왼쪽에 빈 좌석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아처는 참석하지 않은 채 밖
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던 것이다.

테리우스의 대답을 들은 재판부에서 참여한 모든 판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에서는 테리우스 마왕에게 이 시간 이후 대마왕직을 박탈할 것이며 데본 제국에서 일주
일 안에 추방할 것을 판결합니다."

탕! 탕! 탕!

세 번의 울림과 함께 테리우스에 대한 결정이 마무리되었다. 동시에 일라이저는 자신의 뜻대
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를 악물었고, 세바스찬은 판결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

친구들의 배려로 테리우스는 아이린과 단 둘이 이야기 할 수 있는 밀실에 자리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재판이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
태였다.

둘이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테리우스의 시선을 피하는 아이린이었다.

"야, 언제까지 내 눈을 피할 생각이야? 쳇, 너 답지 않아."

"……."

"너 정말 나랑 말 안 할 거냐?"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아이린이 조금은 쉰 듯한 목소리로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테리
우스에게 천천히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눈을 겨우 응시한다. 자신의 어
깨에 올린 아이린의 손을 테리우스가 조심스레 잡아끌더니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다.

"뭘 어떻게 해 너만 내 옆에 있으면 되는 거지."

"…이 바보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이린이 그의 어깨를 작은 손으로 솜방망이처럼 두들기며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
이 사랑했던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도록 만들어버린 원인이 스스로
임이 못내 미안했던 것이다.

"괜찮아, 내게 다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 다고 해도 선택은 마찬가지였어. 그렇게 미안하면
내 소원하나 들어주던지."

"…흑흑, 무슨 소원…."

"그게 무슨 소원이든 간에 들어준다고 약속부터 해."

테리우스의 말에 아이린이 그의 눈을 마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알았어. 무슨 소원인데?"

그러자 그가 아이린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살며시 닦아내더니 이내 그녀의 입술에 입맞
추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이린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눈을 감고 그의 키스
에 응했다.

"흠, 이제 좀 기분이 좋아졌는데? 솔직히 아까 그 재판부 녀석들 한바탕 부숴 주고 싶었거든."

"…못 말려…이러는 게…."

아이린이 뜨겁게 달궈진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면서 얄밉다는 듯 테리우스를 바라보며 핀잔을
주자, 그가 그녀의 콧잔등을 살짝 손가락으로 퉁기며 말했다.

"너야말로 앞으로 내게 친구 사이니 어쩌니 그런 소리나 하지마. 내가 왜 네 친구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난 너랑 친구 안 한다. 난 네 연인이야. 그 점 잊지 말라고 확인 해 준거야."

테리우스도 조금은 어색한지 말도 안 되는 언변을 늘어놓으면서 딴청을 피웠다. 정말 태평한
녀석이었다. 일주일 후면 자신의 나라에서 추방될 처지에 놓인 왕치고는 너무나도 안정된 모습
이었다.

"테리우스,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정말 이대로 데본 제국을 포기하고 말 거야?"

"그럼 넌 만약에 내가 데본 제국을 다시 찾게 되면 그럼 나와 이곳에서 살 거냐?"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 내 처지가 어떤지 알고 있잖아. 난 아리스를 되살려야해."

"쳇, 것 봐. 어차피 여길 떠날 생각이잖아."

아이린은 도통 테리우스의 속을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녀가 이곳에 머물 수 없
으니 자신도 머물 이유가 없다는 태도였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듣기로는 그가 마신의 자리
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그래서 저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 지금 장난으로 하는 말 아냐. 이대로 추방당하면 세바스찬이 널 그냥 둘 것 같아. 아니 다
른 나라에서도 널 죽이려 킬러들을 보낼지도 몰라."

아이린이 테리우스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그에게 현재의 상황을 다시 한번 직시하라고 일렀
다.

"이곳에는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있어. 내 자리에 갑자기 다른 녀석이 앉는 다고 해서 데본 제
국의 전체 뼈대가 한 순간에 흔들리진 않아. 그것보다 네게 꼭 할 말이 있는데."

"…무슨 말."

테리우스가 그녀를 조심스레 탁자 위로 들어올리고 자신을 마주보게 한 다음 씨익 미소를 지으
며 입을 열어 아이린이 알아듣기 힘든 마법 언어를 구사하더니 그녀의 왼손을 올려 잡는다.

그러자 그 동안 투명 마법으로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약지 손가락에 블루다이아몬드 반지가 모
습을 드러냈고 테리우스의 손에도 똑같은 반지가 모습을 나타냈다.

다시 등뒤로 오른손을 감추다가 내밀자, 그의 손에 하얀 장미 꽃다발이 들려져 그녀에게 향했
다.

"나와 결혼 해줘 아이린."

"테리우스…."

"나와 결혼 해줘 아이린…사랑해."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47화

  겨울기사  Date : 2003/03/12  View : 511  Vote : 0

*

이미 그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던 터라 아이린은 두 번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현재 그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오래 전 잊어버렸던 그가 준 반지의 모습을 보니 말문
이 막히고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여기까지 서로가 참 힘들게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테리우스 역시 여러 번 거절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하며 진지하고 간절
한 마음으로 아이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날 위해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린 남자…과연 나 역시 너처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아이린이 말없이 테리우스의 볼을 조심스레 매만지자, 그가 입을 열어 말한다.

"테리우스, 난 네게 아무런 힘이 되어 줄 수 없어…알고 있잖아. 난 카나 황국을 등지고 아무 것
도 없는 아리스 왕국을 선택했고 앞으로도 그 선택에 변함이 없어."

"알아, 네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지금 청혼하지만 앞으로 노력할게. 네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
는다. 단지 네 곁에 함께 있도록 해줘."

아이린은 자신에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주는 테리우스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마수에
걸린 듯 빨려 들 것 같은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는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진실해 보인다.
처음 바람둥이 같다며 삐딱하게 봤었던 조각상처럼 잘생긴 테리우스의 얼굴이 지금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

"…너와 결혼할게."

잠시 머뭇거리며 자신을 응시하던 그녀의 입에서 드디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승낙이 떨어
졌다. 테리우스는 지금처럼 아이린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말이 없을 때는 도도해 보이는 바다를 품고 있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지금은 따스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다. 오뚝한 콧잔등과 도톰한 입술이 사랑스런 눈빛과 함께 어울러져 미소를 만들
어 내고 있었고 그런 표정이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얏호!!!!! 나와 결혼을 해주겠다고!!! 아!!! 이렇게 행복한 기분이 들다니!!!!! 얏호!!!!!!!!! 유
휴!!!! 하하하하하하!!!!!!!!"

"아, 테리우스가 그렇다고…이러면 어떡해 밖에서 들려."

"아, 괜찮아 괜찮아 그런 건 상관 없어. 얏호!!!!! 아이린이 나와 결혼한다!!!!!!!!!!!!!! 하하하
하!!!!!!!!"

테리우스가 아이린을 번쩍 안아 들고 밀실 여기 저기를 뛰어 다녔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
던지 밀실 밖에까지 전달 될 정도였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세 수행원과 두 친구들은 들려오는 테리우스의 웃음소리와 섞인 함성에 어
리둥절했다.

"드디어 테리우스가 미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비명 지르며 웃을 일이 뭐 있겠어. 대
마왕이라고 해서 특별할 줄 알았더니 흠, 역시 추방 명령에 충격이 컸나봐."

파라도가 며칠 새 면도하지 못한 자신의 거칠어진 턱을 위 아래로 훑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한다.

"그러게 사태가 심각한 것 같은데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우리 공주님과 함께 있어도 되
는 건지 모르겠군."

아르테니가 이번에는 파라도의 의견에 동감하듯 팔짱을 고쳐 끼며 이야기한다. 그러자 곁에서
함께 있던 바이사코와 제로이드가 인상을 그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한 소리 했다.

"수행원이면 수행원다워야지. 감히 누구에게 실성을 논하고 있어!"

"뻔히 우리에게 들리는데 그렇게 말하다니 좀 심하시군."

테리우스의 상황이 이제 절벽까지 가고 있는 상황이라 두 사람의 신경도 날카로웠다. 말없이
서 있던 아처가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자, 파라도와 아르테니가 놀라며 펄쩍 뛰었다.

"아니, 대장 그게 무슨 짓이야. 우리가 무슨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있어 파라도. 죄송합니다. 저희가 공주님의 안위를 책임지다 보니 실언을 했습니다."

아처가 예의 바른 태도로 사과를 표하자, 바이사코는 영 신통치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지
만 제로이드는 상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뭐, 우리도 그리 잘한 건 아니니 사과를 받아들이지. 그 보다 두 사람에 들어간지 한참 되었는
데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것이 어떨지."

제로이드는 말이 통할 것 같은 아처에게 밀실에 신호를 보내는 것에 대해서 제안했다. 첫 인상
과는 달리 예의가 바른 상대란 생각이 들었다. 아처 역시 처음 밀실에 들어 갈 때 주군의 안색
이 너무 시무룩해 보였던 터라, 조금 걱정이 된 상태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밀실에 노크를 하고 안에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파라
도, 아르테니 먼저 이 분들에게 무례함을 사과 드려라."

아처의 말에 파라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휭 하니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렸다. 그러
나 함께 그럴 줄 알았던 아르테니가 제로이드가 내민 손을 덥석 잡으며 말한다.

"생각보다 멋진 분에게 실례를 했군요. 이해하세요. 저희가 워낙 공주님에 관해서는 민감한 터
라 하하."

"멋진 분이라 그 쪽도 한 외모 하는데요 뭘."

"하아, 사람 볼 줄 아시는군요. 사실은 원래 이런 외모를 갖기란…."

"원래 타고난 외모를 가꾸는 것도 정말 중요하죠…."

어느새 제로이드와 아르테니는 그들의 화려한 외모에 대한 공통점을 공유하면서 그들만의 대
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기가 차다는 듯 호탕한 성격의 파라도와 바이사코가
동시에 입을 열어 말한다.

"저런 팔불출!…."

"저런 팔불출!…."

자신과 똑같은 말을 내뱉은 상대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더니 파라도가 먼저 다음 말을 잇는다.

"자고로 남자란 외모보다는 성격과 의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크하핫!!!! 이제 보니 썩 괜찮은 구석이 있는 친구였구만."

"그러게 그쪽도 한 성격 하겠는데…."

"이런 날에는 술이나 한잔 들이키면서 얼굴을 마주하고 고민을…."

제로이드와 아르테니가 이야기에 열변을 토하고 있는 중에 바이사코와 파라도 역시 그들 사이
의 공통점을 공유하면서 이야기에 빠져 들고 있었다.

아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엉뚱한 주군을 닮은 하인들의 모습인 것처럼 느껴졌다. 한쪽
에서 쭈그리고 앉아 잠에 취하고 있던 벅스칼이 시끄러운 소리에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그
리고 주변을 살피더니 아처에게 다가가 물었다.

"와우, 어쩌다 저렇게 친해진 거죠? 제가 잠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하, 참…."

자신들에게 닥친 최악의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리고 있는 그들에게 아처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벅스칼 역시 이런 상황에 잠을 자고 있었으니 설명한 듯 무슨 소용이겠냐
싶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단순하다고 결론짓기보다는 역시 강한 자들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이 처음 궁금했던 원인을 제공한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밀실 문을 열고 그
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대뜸 두 사람이 발표를 하는 것은.

"우리 결혼한다."

테리우스의 그 한마디에 아처를 비롯한 다섯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해 굳어진 얼굴을 풀지
못했다.

그의 발언을 재차 확인하려는 듯 아이린에게 곧바로 시선을 옮겨 그녀가 부정할 것을 바랬지
만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이 틀림없음을 확인시켜주었다.

*

"공주님,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아시고 그런 결정을 하신 겁니까."

아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누가 들어도 그가 화가 많이 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테리우스
일행과 헤어진 이후, 아이린은 그녀의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해명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데
본 제국에서 제공한 고급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저택에서 머물고 있었다.

"저 그게…."

"지금 결혼이라니요. 그것도 아무런 전망도 없는 추방당한 왕과 말입니다. 이게 될법한 소리입
니까!"

"하지만…."

"아직 공주님께서 선택하신 마나아카데미에서 졸업도 아니 아직 중간에도 가지 못하고 지금 와
서 갑자기 결혼이라니요. 이런 식으로 어떻게 아리스 왕국을 재건할 수 있다고 하시겠습니까!
한 나라의 주군이 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아무리 철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요.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한 채 감정에 치우치시면서 휘둘릴 거면 차라리 지금 아리스 왕국 재건
을 포기하고 그만 카나 황국으로 돌아가십시오. 아리스 왕국 재건을 포기하실 마음으로 청혼
을 받아 들이신 겁니까!"

아르테니와 파라도 역시 할 말이 많았지만 아처가 너무 화를 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그
들은 명함도 못 내밀었다. 다만 불투명한 표정을 짓고 아이린을 바라 볼 뿐이다.

"아처,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신 겁니까! 데본 제국에서 추방되
었다 해도 그는 데본 인입니다. 카나 황국에서 이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대체 공주님
은 왜 그렇게 주요한 문제를 혼자서 맘대로 결정 내리시고 선택하신 겁니까! 저로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어요."

아처의 목에 핏대가 섞이면서 그가 그나마 화를 삭히며 발언하고 있음을 아르테니와 파라도는
눈치챘다. 그러니 그들까지 나서서 주군을 닦달하지는 못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이린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연거푸 야단치듯 말을 쏟아 붓던 아처가 한쪽 벽을 주먹으로 세
게 쳐 찌그러뜨리면서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아이린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그 결혼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십시오."

아처의 입장은 단호하고 분명함을 그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아르테니가 조용히 아이린에
게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주님 아무래도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아처에 이어 아르테니까지 자신에게 결혼을 거절하라는 뜻을 보이자, 그녀가 파라도에게 눈길
을 돌린다. 그러자 파라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것을 권했다.

아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마치 어린아이처럼 야단을 맞는 듯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이린의 눈
에 일순간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처에게 다가서며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한다.

"난 결혼 할 거야 아처."

그녀의 생각은 분명했고 흔들림이 없음을 그녀의 다부진 눈동자가 알려주고 있었다.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공주님."

"국가끼리의 신의가 중요하듯 인생을 건 약속 역시 중요한 거라 생각해. 그리고 아처의 말대로
난 아리스 왕국을 재건할 아리스의 공주야. 카나 황국에서 어떻게 나오는 지에는 관심 없어. 다
만 그곳은 내 어머니의 나라로 중요한 것 뿐이야."

"정말 결혼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아처와 아르테니, 파라도가 내 결정에 대해 실망하고 날 떠난다고 해도 그 결혼을 물릴
생각은 없어."

그러자 크게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아처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고 힘없이 무릎을 꿇는다.

"저희가 어떻게 공주님을 떠나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처의 말끝이 흐려지면서 그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아이린의 귓가에 윙윙거렸다. 그는 눈물
을 삼키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가버리는 것에 대한 서러움을 그리
고 그런 그녀를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아픔을 토해 내기 위해서 말이다.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48화

  겨울기사  Date : 2003/03/12  View : 478  Vote : 0

*

이틀 후, 테리우스와 아이린은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에 참석자는 제리이드
와 바이사코 그리고 아처와 아르테니, 파라도, 벅스칼 뿐이었다.

주례는 성직자 생활을 한 적이 있었던 제로이드가 맡았다. 제로이드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신
호를 보내자,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의 맹세를 다짐한다. 그리고 서로의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나의 아내 아이린의 곁에서 언제나 좋은 남편으로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의 남편 테리우스의 곁에서 언제나 좋은 아내로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

테리우스의 경건한 목소리를 귀로 들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본 아이린이 빙긋 웃는다. 그러자
뒤쪽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파라도가 통곡하듯 눈물을 짜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주님을
테리우스에게 보낸다는 기분이 들어 억울한 것이다. 그런 파라도를 토닥거리며 아르테니가 살
짝 친구의 팔을 꼬집는다.

"임마, 아처 생각도 해야지. 여기서 울면 어떡해. 이 철부지야."

아르테니가 소곤거리듯 말해도 파라도에게 별로 통하지 않았는지 그는 크게 다시 한번 울어대
며 답했다.

"크흐흐흑!!! 그럼 슬픈 걸 어쩌란 말이야!! 아, 공주님 부디 잘 사세요. 엉엉엉!!!"

"하여튼 옆에 있는 게 창피하다니까."

바이사코는 어젯밤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의자에 덜썩 주저앉아 간신히
박수를 쳤다. 그 옆에 꽁꽁 얼어버린 눈사람처럼 아처는 꿈쩍하지 않은 채 자신의 눈앞에서 다
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아이린을 지켜봐야만 했다.

'부디 행복하세요 주군.'

그는 행여 테리우스의 잘못으로 인해 아이린이 상처 받는 일이 생긴다면 가만 두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그때 제로이드가 신랑과 신부를 향해 마지막 발언을 한다.

"이로써 신랑과 신부의 언약을 신 앞에 약속드리며 이 두 사람의 신성한 결혼을 지금 반대하지
않은 자는 영원히 침묵하십시오. 없습니까?"

제로이드가 조금은 장난 끼 섞인 표정으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하객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다. 그러나 아처는 들고 싶은 손을 주먹을 꾸욱 쥔 채로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그녀를 바라보
면 손을 들고 반대 한 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없는 것으로 알고 이로써…."

그때였다. 이 작은 교회에 문을 누군가 턱하고 열며 빛을 등지고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그리
고 테리우스와 아이린 앞에 나타나서는 이들 결혼에 제지를 가한다.

"잠깐만!!! 이 결혼은 무효요."

갑작스런 출연자에 대해 아처를 비롯한 아르테니와 파라도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덩달아 전
혀 예상치 못했던 제로이드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아이린과 테리우스는 그리 놀란 표정은 짓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의외라는 생각
만 할뿐이다. 그 이유를 벅스칼도 알고 있었다.

"에궁, 저 버터 왕자는 또 어떻게 알고 여길 온 거야 쩝. 어째 순조롭게 잘 진행된다 싶었어."

벅스칼이 낮게 중얼거리자, 못내 궁금한 듯 파라도가 그에 귀에 대고 묻는다.

"저 자가 누군데 그래?"

"누구긴요. 마야 왕국의 레오나르 왕자죠. 아이린 공주님을 무지 따라다녔던 때가 있었거든요.
아마 데본의 재판 때문에 참석했었나 봐요."

"마야 왕국? 호오, 우리 공주님이 발이 넓으시군."

레오나르는 숨차게 뛰어 왔는지 얼굴이 붉었고 아직도 가쁜 호흡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
다.

"헥헥, 이…결혼을 반대합니다."

별로 생각지 않았던 반대에 대해 제로이드가 고개를 까닥거리며 레오나르에게 되물었다.

"어째서?"

"그건 저 두 사람은 남매니까요. 그리고 아이린과 결혼할 운명의 상대는 바로 접니다."

말도 안 되는 레오나르의 억지에 다들 코웃음을 치다 크게 나오려는 웃음을 여기저기서 참아내
려고 애썼다. 다만 바이사코만은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모른 채 드르렁 코를 골며 아예 옆
으로 누워 잠에 빠져 버린다.

신성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방해자가 나타나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결혼의 마지막
을 망치려고 들자, 내내 얼굴이 일그러져 가고 있던 테리우스가 입을 비죽거리며 골머리를 앓
았다.

'저 자식이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어휴, 저걸 그냥 확 던져 날려 주고 싶은데 아이린 앞
에서 인상 그을 수도 없고…아, 오늘만은 제발 내 얼굴에 미소를 일그러지게 만들지 말아야 하
는데….'

레오나르가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지 알고 왔는지 보다는 지금 현재 그가
이곳에 나타나 결혼식을 중지하고 있다는 점이 더 신경 쓰였다.

"우리는 남매 사이가 아니에요…레오나르."

이마에 땀이 성글성글 맺힌 레오나르가 아이린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손에 입을 맞
춘다.

"그런 거짓말을…당신은 분명 아직도 절 잊지 못 하시는 거라 생각합니다. 어쩌다 오빠와 결혼
을…그런 천륜에 어긋나는 처지에 처했는지 모르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그대를 어둠 속에서
구해드리리다. 그 동안은 당신의 오빠가 무서워 나서지 못했지만 결혼식이라니 더 이상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나타났어요. 아이린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뿌직!

뿌지직!! 뿌직!!!!!

테리우스의 이마에 신경 줄이 도드라지면서 그의 인내에 한계점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참다 못
한 그가 레오나르의 이마를 향해 힘차게 발길질을 해버린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이린이 말릴 세도 없었다.

퍽!!!!!!!!

으읔!!!!!!!!!!!!!!

쿵!!!!!!!!!!!!!!!!!!

첫 번째는 테리우스의 발이 레오나르의 이마를 강타한 소리요. 두 번째는 레오나르의 짧은 비
명 소리요. 세 번째는 그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이마를 박고 쓰러진 소리였다.

그리고 다시금 테리우스는 얼굴에 미소를 고스란히 지은 채로 제로이드에게 명령하듯 말한다.

"빨리 진행해라 제로이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제로이드가 이마에 손을 얹다가 짧게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
인다.

"아, 그래…흐흠, 반대가 없다면 이로서 두 사람이 부부임을 신 앞에 맹세합니다. 신랑 신부 키
스하세요."

테리우스가 아이린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코끝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더니 그녀가 뭐라고 말하
려고 하자 먼저 작게 속삭인다.

"쉬잇, 저 녀석은 지금 잊어버려. 자, 내 아름다운 신부 그대의 입술에 키스하도록 허락하시오."

"……응."

테리우스는 어젯밤 제로이드가 일러 준 멋진 말을 잊지 않고 아이린에게 들려주면서 그녀의 입
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로서 두 사람은 정식으로 부부가 된 것이다.

결혼식이 끝나도 신랑과 신부는 미리 준비되어진 마차를 타고 그들만의 밤을 보내기 위해 미
리 예정 해 놓은 별장으로 향했다. 작은 교회에 남은 사람들은 그들끼리 신랑 신부에 행복을 위
한 파티를 벌이기로 한다.

누군가의 쪽지를 보고 부리나케 교회로 달려왔던 레오나르는 머리에 통증이 일어나 꿈쩍할 수
가 없었다. 주변에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듯 했지만
아직은 정신이 오락가락 한 상태다. 그의 이마에는 보기 좋게 테리우스의 신발 자국이 턱하니
새겨져 있었다.

'에휴, 조심해야지. 장난 좀 치려고 했다가 저 버터 왕자가 저렇게 나올 줄을 생각도 못했잖아.
에궁, 나중에 테리우스가 내가 꾸민 일이란 걸 알면 날 가만 안 둘 거야.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
이얌. 그래두 뭐, 덕분에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결혼식이었지 뭘.'

벅스칼이 음흉한 미소를 살짝 지으며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는 레오나르를 바라보
면서 건배를 했다. 아르테니와 제로이드도 많이 친해 진 듯 웃음 섞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건배
를 했고 파라도는 심심한 듯 바이사코를 건들어 깨우며 함께 술을 더 마시자고 조르고 있었
다.

아처는 홀로 눈물을 삼키며 술잔을 연거푸 계속 안주도 없이 마셔대며 쓰린 속을 달랬다.

*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단 둘이 보냈던 밤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조금은 낯설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따라 아이린의 눈동자가 더 아름답게 빛나 보이고 그녀의 입술이 더 촉촉해 보이는 것이
테리우스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웬일인지 항상 선머슴처럼 대들고 왈가닥처럼 굴던 아이린이
말없이 다소곳한 태도로 조용히 있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조그마한 호수 앞에 있는 통나무 별장 방안은 따뜻한 난로와 푹신한 침대로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창 밖으로 새까만 밤의 장막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
었다.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나란히 침대에 기대앉아 맞은 편 창에 별들을 바라본다.

"흐흠흠!!"

그가 헛기침을 하며 아이린의 어깨에 팔을 슬쩍 올리자, 그녀가 살짝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달이 참 맑군."

"응?…그래…푸웃!"

밤하늘에 달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창문으로는 달이 보이지 않았다. 테리우
스의 엉뚱한 말에 아이린이 그냥 답변하다 웃음을 터트린다.

"왜…왜 그래."

"테리우스 너 떨고 있는 것 같아서…그냥 웃겼어."

"아, 그래. 쳇, 그런 넌 뭐 안 이상한 줄 아냐?"

"내가 이상해?"

아이린의 물음에 놀란 토끼 눈을 하며 눈을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을 테리우스가 응시하면서 그
녀의 입에 살짝 입맞추며 대답한다.

"그래, 너무 아름다워…오늘 정말 너 엄청나게 예쁘다. 뭐, 좀 닭살 돋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말 밖에는 딱히 할 말이 생각 안나."

"무슨 말…."

"사랑해."

그가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연이어 그녀의 목에 키스 세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었고 밤하늘에 달도 부끄러운 듯 아이린처럼 두 볼이 발그스레해졌다.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49화

  겨울기사  Date : 2003/03/12  View : 512  Vote : 0


*

데본 제국에서 추방당한 테리우스와 함께 아이린의 일행도 그곳에서 떠나기로 결정했다. 데본
에서 제공해준 숙소에서 아이린과 세 수행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고 그 곁에 테리우스와 벅스
칼 그리고 제로이드와 바이사코도 함께 했다.

"우선은 이곳에서 나가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인지 목적을 정해 놓고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
다."

아처가 대륙 지도를 펼쳐 보이면서 설명한다. 그는 어느 정도 실연의 상처를 극복해 가려는 듯
못내 아이린의 시선을 피하며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보다 테리우스 너도 함께 가는 거냐? 그럼 우리는?"

한쪽에서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테리우스와 이야기를 나눈다. 바이사코의 질문에 테리우스
가 고개를 끄덕이며 벅스칼을 한 동안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벅스칼은 나와 함께 아이린 일행에 동행할 거야. 너희 둘은 이곳에 남아서 세바스찬 왕자 녀석
과 메틴 왕의 움직임을 살피고 내게 간간이 중요한 소식을 알리도록 해. 지금 나서서 녀석들을
혼내주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냐. 게다가 녀석들의 속셈이 뭔지도 알아내야 하고."

바이사코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아이린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카나 황국의 자손이라며 괜찮겠어?"

그의 질문에 테리우스의 얼굴빛이 아주 잠깐 어두워졌지만 곧 평정을 되찾는다.

"괜찮아 상관없어."

"너야 상관없겠지 좋은 여자야 상처받지 않게 잘해."

제로이드가 테리우스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며 당부했다. 그러자 세 수행원들과 진지하게 회의
를 하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을 테리우스가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테리우스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린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쑥스러
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곁에서 그 모습을 보던 아르테니가 아이린을 툭하고 팔꿈치로 치면서 작게 속삭였다.

"공주님, 회의에 집중하세요."

"아, 그래. 뭐라고 그랬지 아처?"

아처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이야길 반복했다.

"아리스 인들이 가장 많이 피해 있는 지역으로 가셔서 분해 된 아리스 왕국의 힘을 모아야 한다
고요. 그러니까 가장 척박한 땅으로 노예 상에서 도망자들이 도망갔던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저희가 공주님을 발견했던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아요."

"그곳이 어딘데?"

"바로 여기 케르베노아 영토의 사막지대입니다."

아처가 모형으로 만들어진 엄지손가락 크기의 붉은 깃발을 가져다가 지도에 찍어 붙이며 말했
다. 아이린이 그곳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그 부근에 스타 섬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럼 이곳으로 가려면…마법진을 이용해서 가는 거야?"

"아닙니다. 저희에게 지금 마법진을 사용할 재료와 힘이 거의 바닥난 상태로 위험합니다. 육로
로 가셔야 합니다. 바로 이 지역 젬모스 마을을 통과하시면 됩니다."

"아, 그래.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도록 해."

"네, 공주님."

아처가 지도를 접으면서 회의에 썼던 자료들을 조용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가 조금
썰렁했던 탓에 곁에서 함께 한 파라도와 아르테니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아처,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어. 아처가 이러는 게 난 맘 편치 않아."

"제게는 지금도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너무 빨리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아 주십시오. 공주님."

아처가 아이린의 손을 뿌리치고 방에서 나가버리자, 그 뒤를 파라도가 따라 나섰다.

"아르테니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아처가 아직도 내가 카나 인으로서 명예를 저버렸
다고 생각하고 저렇게 화를 내는 거야?"

"후훗, 글쎄요."

아르테니가 말없이 아이린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그러자 쭈욱 지켜보던 테리우스가 자신의
아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아르테니를 노려보면서 발끈했다.

"저 녀석 뭐야."

갑자기 예전 무도회때 기억이 되살아난 테리우스였다. 그때도 저 녀석을 감싸기 위해 아이린
이 나섰던 적이 있었다. 그가 아이린쪽으로 발걸음 하려는 순간 제로이드가 막아선다.

"이봐, 아내의 수행원들에게 유치하게 질투나 하면 참 퍽도 널 멋진 남편으로 아이린이 생각하
겠다. 제발 결혼했으면 인내심이라는 것도 길러."

"야, 넌 저거 안보이냐."

"참나, 결혼 안 해서 난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가서 뭐라고 할거야?"

"그거야…."

"내일이면 데본 제국에서 나가야 할 텐데 마력은 어느 정도 회복 된 거냐."

제로이드가 조금 걱정된 듯 묻자, 테리우스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그때 창에 걸터앉
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바이사코가 다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저게 뭐지?"

바이사코가 손으로 가리키며 친구들에게 물었다. 그가 가리킨 것은 중앙로를 통과하고 있는 커
다란 철창 안에 동물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레드 드래곤으로 두 마리가 나란히 어디론가 이
동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군대의 깃발은 다름 아닌 카나 황국의 깃발이다. 각 국에서 왔던 권력가
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던 과정이었다.

"저건 레드 드래곤이잖아. 데본 제국에 레드 드래곤이 있었나? 우리가 관리하기는 하지만 레드
드래곤 영역에서만 서식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러게…카나 황국에서 데려가나 본데 우리들도 모르게 왔다가 갔다는 게 좀 뒤가 구린데."

제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망토를 챙겨 입으며 바이사코에게도 망토를 건넨다.

"아무래도 성으로 직접 가서 알아 봐야겠어. 같이 가자 바이사코!"

"알았어. 테리우스 내일 새벽에 다시 들리도록 하마."

그러자 그들의 움직임에도 별 동요 없이 찬찬히 레드 드래곤을 응시하던 테리우스가 뭔가를 발
견한 듯 눈을 번쩍였다. 그리고 제로이드에게 다가가 매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레드 드래곤들의 이름이 뭔지 알아오도록 해. 그리고 혹 카나 황국에서 뭘 내 놓았는지도."

"그게 무슨…."

"더 묻지 말고 어서 나가봐."

"그래."

테리우스가 아직도 아르테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이린을 바라보면서 제로이드에게 당부
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나자, 벅스칼이 조심스레 테리우스에게 다가와 이야기했다.

"주인님 생각이 맞는 거 같은데요."

"흠, 아마도…헌데 박쥐처럼 언제 거기 있었어."

퍽!

테리우스가 벅스칼의 얼굴을 무턱대고 가격하자, 그의 코에 피가 주룩 났다. 좀 억울하다는 표
정을 지으며 벅스칼이 대꾸했다.

"아니 왜 툭하면 때려요. 코피 나잖아요."

"너야말로 툭하면 기분대로 상황대로 반말하다가 주인님 하다가…원래 장난 좋아하는 거 알고
있지만 걸리면 알지?"

"흐잉, 내가 뭘요."

"레오나르 녀석이 우리 결혼식을 어떻게 알고 왔지?"

"아…그거야 뭐."

아르테니와 이야기를 마친 아이린이 테리우스에게 다가오자, 벅스칼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 등뒤로 숨고는 헤죽 거렸다.

"둘이 또 싸우고 있었던 거야?"

아이린이 창가 쪽으로 다가오려고 들자, 테리우스가 재빨리 그녀의 발걸음을 돌리도록 방향을
바꾸며 탁자에 앉았다.

"하핫, 싸움은 무슨 헌데 어디로 갈지 결정한 거냐."

"응, 케르베노아의 사막지대가 최종 목적지이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 젬모스 지역을 지나야 한
데."

"젬모스 지역?"

"응."

젬모스 지역은 죄수들과 도둑들 그리고 해적들이 많이 있는 지역이라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게다가 여자가 많이 있지 않은 지역이라 아이린에게 위험한 곳이었다.

"거긴 좀 위헌한 곳인데 게다가 그곳까지 가는 동안은 거의 산을 타야 하기 때문에 인적도 드물
고 갈 수 있겠어?"

"응."

아이린이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바로 끄덕이며 웃었다.

"호오, 그렇게 자신이 있다니 놀랍군. 아직 검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뭘 믿고 그렇게 자신
있다고 그러냐."

"응, 너."

아이린이 테리우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바로 대답하자, 그의 귓가가 금세 붉어졌다. 그러
자 벅스칼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면서 곧바로 토할 듯한 자세를 아이린 등뒤에서 연출해
보였다.

"하핫, 그래. 흐흠, 뭐…."

계속되는 벅스칼의 장난하는 몸짓에 테리우스는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화도 낼 수 없었다.
턱을 괴고 자신을 싱글벙글 바라보는 아이린의 눈빛을 계속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테리우스가 조금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전자에 물을 컵
에 따라 벌컥 벌컥 들이킨다.

"하아, 물맛이 좋은데. 점심은 내가 만들어 줄까?"

그만 즐거운 기분에 만들 줄도 모르는 음식을 하겠다고 나서는 테리우스였다.

"어? 정말? 와! 응, 좋아. 그럼 아처랑 아르테니랑 파라도도 무척 좋아할 거야. 물론 벅스칼두."

아이린의 반응에 금방 되돌아 테리우스의 후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이런 이게 아닌데."

그때 창 밖에서 긴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자, 아이린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을 모두 빠
져나간 권력자들을 배웅하는 마지막 신호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레드 드래곤의 모습은 아
이린이 머물고 있는 창에서 잘 보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무슨 행사라도 하는 건가?"

아이린이 창 쪽으로 발걸음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테리우스가 재빨리 그녀를 막아섰다.

"어? 테리우스 왜 그래?"

"응, 널 갑자기 안아주고 싶어서."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0화

  겨울기사  Date : 2003/03/13  View : 913  Vote : 0

*

희뿌연 새벽 안개 사이를 헤치고 건장한 청년 둘이 말을 몰고 급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그
들은 약속된 시간을 넘겼기에 마음이 더 급했다. 말의 고삐를 바짝 더 조여 쥐고서는 테리우스
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향했다.

아처는 벌써부터 일어나 떠날 준비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그러나 아르테니와 파라도는 힘든
표정을 지으며 배를 움켜쥐고선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 뒤로 벅스칼도 구릿빛 피부에 걸맞지
않게 안색이 창백해 보였다.

"그러게 그런 걸 왜 함부로 먹었어."

"…으, 말도 마…후회하고 있으니까."

"나 역시…."

친구들의 모습을 한번 둘러보며 맘에 들지 않는 다는 듯 혀끝을 차며 핀잔했다. 방안에 아이린
역시 몸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물론 테리우스까지도.

아처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이 이렇듯 병든 닭처럼 시름시름한 것은 사실 통일된 이유가 있어
서였다.

바로 어젯밤 테리우스가 만든 이름도 없는 이상한 요리 때문이다. 아처만 제외하고 다들 처음
에는 맛있다고 먹다가 한 시간 후쯤부터 배를 움켜쥐더니 끊임없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신세
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덕분에 지금은 말할 기운도 없을 정도로 몸에 힘이 쭉 빠진 상태였
다.

나중에 아처가 만들어 준 약 덕분에 지금은 괜찮아 졌지만 어젯밤 너무 시달렸던 탓에 별 기운
은 없는 그들이다. 그러니 새벽에 출발하기로 한 여행길이 그리 달가울리 없었다.

방안 침대에서 테리우스와 함께 누워 있던 아이린이 잠에서 깨어나 그를 두들겨 깨운다.

"테리우스, 테리우스 다들 일어난 것 같아. 빨리 일어나 봐. 우리들만 안 일어난 거 같다구."

"아, 더 자고 싶어…욱, 어제 먹은 음식 때문에 아직도 정신이 없단 말이야. 조금만 더 자고 일
어나자 응"

테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린을 팔로 다시 눕혀 안으며 꿈쩍하질 않는다. 그러자 아이린
이 힘겹게 그의 팔에서 빠져 나왔다.

"피잇, 네가 만든 요리 때문에 다들 고생한 거잖아. 어서 일어나."

아이린은 마치 아기처럼 더 자고 싶다는 듯 눈을 비벼 대는 테리우스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내젓는다. 누가 그의 모습을 보고 전직 대마왕이라고 하겠는가. 지금 상황도 그리 좋지 않음에
도 불구하고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별반 다름없는 생활 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
다.

아이린이 마법 옷을 입고 간편한 복장을 떠올리자, 깔끔한 흰 칼라와 황갈색의 가죽 재킷과 바
리차림을 했다. 그리고 의자에 벗어있는 테리우스의 옷을 그에게 건네며 말한다.

"빨리 일어나서 옷 입고 여행갈 준비해 테리우스."

"아, 딱 일분만 더 잘게."

아이린이 테리우스 옆에 앉아 그의 귀를 살짝 잡아 당겼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옷 입지 않으면 혼자 두고 우리끼리만 떠날 거야. 그냥 하는 말 아냐. 일
분내로 옷 입고 나와 알았지. 그럼 나 먼저 나간다…자기."

아이린이 바로 나간 후, 테리우스가 눈을 번쩍 뜨며 그녀의 마지막 말을 되새긴다.

"어엇, 자기? 방금 나더라 자기라고 부른 거야? 호오, 자기라 그거 참 괜찮은 걸."

테리우스가 휘파람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와 셔츠를 재빠르게 입었다. 그 역시 자신
이 만든 이상한 요리 덕에 밤새 얼굴이 꽤 수척해져 있었다.

"휴, 그게 마법 재료에 쓰이는 가루인 줄 모르고 음식에 뿌렸으니…하여간 마법사들은 왜들 병
에 이름도 안 붙여 놓는 거야…헷갈리게."

테리우스가 방에서 나와보니 다들 떠날 준비를 마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
나 그곳에는 벌써 도착해서 그들과 함께 있어야할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없었다.

테리우스가 창문 커튼을 치고 밖을 살폈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고 안개가 자욱해서
밖을 식별하기 힘들었다.

"이봐, 혹시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오지 않았나?"

테리우스가 질문하자, 세 수행원들과 더불어 벅스칼까지 일제히 그를 원망하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들은 지금 테리우스와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어
젯밤은 크나큰 전쟁을 치른 힘든 시간이었던 것이다.

'뭐야, 그 반응은 쳇, 남자 녀석들이 삐진 것처럼.'

그들의 반응에 테리우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알겠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몸을 돌려 자신의 배낭
을 챙겨 들었다.

일행이 밖으로 모두 나와 배낭을 각자의 말에 실었다. 아처와 아르테니 그리고 파라도는 각자
의 말에 짐을 실으며 은근히 누가 벅스칼을 태워야할 지를 걱정했다.

말이 네 마리였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린과 테리우스가 함께 탈것이고 그렇게 되면 벅스칼은
세 수행원들 중 한 명이 태워야 할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저 녀석은 누가 태우는 거냐 아르테니 너냐?"

"미친 소리 하지 마셔. 저 수다쟁이를 태웠다가 내 심신이 고달파질텐데."

"이봐, 난 덩치가 있어서 저 녀석을 태우기 힘들어."

"대신 말 덩치도 황소만 하잖아."

"아, 그거야 나랑 맞는 거지. 난 안된다니까."

파라도가 한사코 손을 내저으며 곤란함을 표시하자, 역시 뒤질 수 없다는 듯 아르테니도 고개
를 내저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아처를 바라봤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무게란 무게
는 혼자 다 잡고 있는 아처의 분위기에 눌려 그만 한숨만 내쉬어야했다. 아마 아처의 등뒤에는
벅스칼이 싫다고 할 분위기였으니까. 그만큼 아처는 어두운 표정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두 수행원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벅스칼은 조금전부터 먼 곳을 응
시하며 뭔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다들 새벽이라 긴 팔을 입고 있는데도 불구하
고 녀석은 몸에서 열이 나는지 짧은 반 팔 차림이었다.

"허, 이상하네…분명히 따라 나설텐데. 아직까지 안 오네. 쩝, 그 녀석이라면 분명히 좋은 말을
가지고 있을 텐데…부려먹기도 좋고."

"뭘 부려먹기 좋다는 말이냐?"

"으앗, 주인님 언제 제 곁에 오셨어요."

"놀라기는 또 무슨 꿍꿍이야. 설마 나 대신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오는지 봐주는 건 아닐 테
고."

벅스칼처럼 테리우스도 이마에 손을 얹어 먼 곳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때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빛나는 금발 머리칼을 반짝이면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
이 서서히 안개 속에서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테리우스가 곧바로 인상을 그으며
벅스칼을 노려본다.

"너! 이 녀석 누가 저 버터 같은 녀석을 부르라고 그랬어."

"에효, 참 그래야 말을 얻어 타죠. 설마 제가 저 수행원들 말을 같이 타겠어요. 아님 주인님들
뒤에 꼽사리 껴서 타겠어요. 쩝, 저 녀석과 함께 가면 좋은 점도 많고 도움도 받고 좋죠 뭘 그래
요."

"이 녀석이 정말!!"

"헤헤, 고정하세요 주인님."

결국 레오나르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와 아이린에게 인사를 했고 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리
스 왕국을 재건하러 가는 길목에 좋은 힘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세 수행원들도 크게 반대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딘가 모르게 조금 얼빵 해 보이는 레오나르에 대해 별로 경계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
한 그들이었다.

"이마는 좀 괜찮아요 레오나르?"

아직도 이마에 선명하게 테리우스가 만들어 놓은 발자국 모양이 새겨진 것을 보고 아이린이 미
안한 듯 걱정된 목소리로 레오나르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앞 머리칼을 아래로 내려 가리면
서 대답한다.

"하핫, 괜찮습니다. 이 정도쯤이야 뭘…그 보다 여행에 절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초대요?"

레오나르를 초대한 적이 없던 아이린이 이상하다는 듯 되묻자, 재빨리 벅스칼이 끼어 들어 레
오나르를 수행원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위기를 모면한다. 사실 그녀의 초대로 놀러 가는 여
행을 가는 줄 알고 그는 이곳에 달려 왔던 것이다.

잠시 후,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들은 이미 테리우
스와 아이린이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우린 벌써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다행이 아직 출발하지 않았구나."

"쳇, 다 너희들 기다리느라 지체한 거지."

테리우스는 자신의 벌인 사고로 인해 여행 출발이 늦어졌다는 사실을 두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
은 채 괜히 그들이 약속에 늦었다고 핀잔을 주었다. 그의 그런 이중적인 모습에 수행원들은 혀
를 내둘렀다.

"이봐, 다들 삼십 분 후에 출발 할 테니 그때까지 잠시 쉬고 있도록 해라."

테리우스는 마치 자신이 그들을 이끄는 대장인 것처럼 명령을 내린 후, 제로이드와 바이사코에
게 다가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파라도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다.

"뭐야! 우리가 무슨 부하라도 되는 것처럼 명령을 하다니 내참 기가 막혀서."

"쉬잇, 참아 공주님의 남편이니 우리에게 주군과 같은 분이지 뭘 그래."

"난 저 녀석 맘에 안 들어."

"파라도, 옆에 저 녀석 친구가 있으니 말조심하라니까."

아르테니가 곁에 서 있는 벅스칼과 레오나르를 가리키면서 파라도에게 주위를 준다. 그러자 벅
스칼이 손을 내저으며 응대했다.

"헤헤, 뭐 지금까지 분위기 봐서 알겠지만 전 주인님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요. 제 앞에
서 테리우스 주인님 욕을 한다고 해도 전 괜찮아요. 물론 이쪽도 마찬가지구요."

넉살 좋은 벅스칼의 모습에 되려 그 녀석이 더 못 미덥다는 듯 아르테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그렇게 테리우스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아이린은 식료품 저장고에서 홀로 음식들을 챙
기고 있었다. 집 안 거실로 들어선 제로이드가 먼저 테리우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그 레드 드래곤들의 이름은 각각 제크와 페키라고 하더군. 생각보다 유명한 레드 드래곤
들이었어. 인간의 아이를 키웠던 소문의 그 레드 드래곤이래. 카나 황국에서 그 레드 드래곤을
데려가는 조건으로 상당한 량의 화이트 마나를 제공했는데 그 화이트 마나들을 블랙마나로 바
꿀 계획인 것 같아."

"헌데 그 교환하기로 한 그 화이트 마나의 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하는 거야. 문제는 왜
데본 제국의 소속에 있는 레드 드래곤들을 카나 황국에서 그 비싼 값을 제공해 가면서 데려가
는 거지. 그 점을 알아내지 못했어."

바이사코의 말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겠다는 듯 테리우스를 고개를 끄덕이며 턱
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 두 친구에게 물었다.

"그 교환 계획을 세운 자가 누구야?"

"아, 그게 가이루덴 왕국의 세바스찬 왕자야. 게다가 그 녀석이 데본 제국에 마왕 공작 직위를
신청했어."

테리우스는 자신의 블랙마나 초석을 빼앗은 세바스찬의 얼굴을 떠올리며 묘한 미소를 지어 보
였다.

<3부 마침>


^0^*

4부 모험편이 이제 시작됩니다.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1화<상>

  겨울기사  Date : 2003/05/01  View : 453  Vote : 0

산새가 험한 길을 지나 테리우스와 아이린 일행은 한밤중이 되어야 젬모스 지역에 도달하게 되
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여행길로 다들 피곤에 휩싸였고 쉬지 않고 달려왔던 터라 몹시 지쳐 있
었다.

아이린은 어느 새 테리우스의 등에 기댄 채로 잠이 들어 있었고 뒤따라오고 있던 벅스칼도 레
오나르의 등에 기대어 침을 흘린 채로 자고 있었다. 선두에 나섰던 아처와 아르테니 그리고 파
라도는 그들이 쉴 곳에 다다르자, 말을 정지시키고 묵을 곳을 정하기 위해 차례로 땅에 발을 디
딘다.

"너무 늦게 도착했어. 게다가 젬모스의 중심으로 향하려면 공주님을 생각해서 간다해도 열흘
은 걸릴 거야. 우선 오늘밤은 이곳에 천막을 치고 휴식을 취한 후에 가는 게 어때?"

온 몸이 으슥할 정도로 거무튀튀하고 장대한 나무들을 둘러보며 썩 맘이 내키지 않은 듯 아처
가 말했다. 그러자 아르테니가 어깨에서 팔뚝까지 손으로 감싸며 손가락을 까딱까딱 거리고 주
변을 둘러보며 한마디한다.

"생각보다 으스스한 곳이긴 하군. 아처 말대로 오늘은 더 가기 무리인 것 같아. 파라도! 천막을
펼쳐라."

파라도를 향해 명령하듯 이야기한 후, 아르테니는 공주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 모습
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분한 듯 땅에 발을 구르며 파라도가 투덜거린다.

"아니! 왜 나더러 천막을 치라는 거야! 지는 뭐하고? 덩치만 크고 힘만 세면 힘든 일은 다 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다고 맨 날 힘들고 무거운 건 나더러 하라는 거야!! 그리고 지가 대장도 아
니면서 왜 시켜 왜!! 안 그래 대장?"

황마 콤보턴의 등에 짊어져 있던 둘둘 말린 천막을 풀어내면서 연신 투덜거리던 파라도가 아처
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아처가 펼쳐든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다 스쳐 지나가듯 대답한다.

"네가 해 파라도."

"엉? 응, 그래 대장."

파라도는 원망스런 눈빛으로 축 쳐진 어깨를 하며 아처를 바라봤지만 한번 어딘가에 몰입하면
그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꿈쩍하지 않는 성격 탓에 더 이상 대꾸하기도 힘들었다.

뒤늦게 도착한 테리우스가 조심스레 그의 등에 기대어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아이린을 조심스
레 품에 안고서 내린다.

"하여간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잔다니까…자는 것도 예쁘군."

테리우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아이린은 여전히 잠에 푹 빠져 있다.

"……."

그리고 그녀를 들고 아처 앞에 나타나 물었다. 저벅저벅 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왠지 귀에 거슬
리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상대가 테리우스임을 확인한 아처의 시선은 곧바로 상대가 안고 있
는 아이린에게 옮겨졌다. 그녀의 곤한 모습에 괜히 기분이 상한 그였다. 자신의 품이 아닌 다
른 남자의 품에 너무나도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 그에게 유일한 주군의 모습이 원망스
럽다는 느낌까지 잠시 스쳐지나간다. 그의 심장이 아직도 아이린을 향해 뛰고 있음을 스스로
도 부인할 수 없었다.

아처가 지도에서 눈을 돌리며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로 테리우스에게 적막한 침묵을 깨고 입
을 연다.

"파라도가 두 분이 계실 곳을 안내할 겁니다. 오른쪽 길로 돌아서 가보시면 파라도가 있을 겁니
다."

아처의 무뚝뚝한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테리우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듯
대꾸한다.

"녀석에게 수행원이 있어 좋긴 좋군. 다만, 그 수행원의 눈빛이 내 맘에 영 거슬린다는 점만 빼
고 말이지."

아처의 마음이 뜨끔했지만 상대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는 그렇게 아이린을
안고 유유히 걸어가는 테리우스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에는 어
느새 평평했던 지도가 꾸깃꾸깃 오그라져 있었다.

"테리우스…."

한편 레오나르의 등에 기대어 최대한의 편안한 자세로 있었던 벅스칼이 갑작스런 충격에 눈에
별이 보이면서 꿈같던 잠에서 깨어난다.

"이크! 우아암, 뭐야 맛나게 자고 있는데 머리에 혹이 생기겠잖아."

그 모습을 고까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레오나르. 그의 등이 축축해진 것을 확인하며 널브러져
어리벙벙한 벅스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다 왔어. 그녀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오빠와 결혼이 가능한 건지…."

레오나르는 아직도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남매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듯
했다.

이에 조금은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든 벅스칼이 한마디 던진다.

"왕자라고 다 영리한 건 아니라니까. 저렇게 멍청해서 무슨 왕자라고 하는지 겉은 허영으로 똘
똘 뭉쳐서

쯧쯧, 걱정이다 걱정…정신병자와 함께 동고동락해야하다니…우아암, 졸려 더 자야겠는데 어
디 좋은 나무 없나?"

흐늘거리는 하얀 옷깃을 미세한 바람에 날리며 일어서는 벅스칼은 마치 신선인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용히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레오나를는 눈을 비
벼대며 자신이 유령에 홀린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어? 어디로 사라졌지? 묘한 녀석이군. 그건 그렇고 내 옷이 너무 튀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
녀에게 괜찮게 보여야 할텐데. 아침이 되면 그녀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할 수 있겠지. 아! 저기
난 어디에서 묵으면 되는 거요?"

울상을 짓고 있는 아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레오나르가 다가와 말을 건넸지만 곧 이어지
는 그의 묵직한 침묵에 질려 그는 아르테니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레오나르는 세 명의 수행원들과 머물었고 벅스칼은 홀로 나무 어딘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
고 조금 떨어진 곳에 따로 마련해 둔 천막에는 부부가 된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문제는 테리우스는 눈을 말똥말똥 뜬 상태로 천막의 갈라진 틈 사이로 보이는 별들을 감상하
고 있는 다면 아이린은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는 점이다.

함께 밤을 지새웠던 적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고 부부가 되
어 함께 누워있으니 테리우스는 여전히 곁에 있는 아이린으로 인해 긴장되었다.

"으음, 맛있겠다……."

대뜸 아이린이 눈을 감은 채로 왼손을 들어 올려 곁에 있는 테리우스의 가슴에 턱하니 올려놓
더니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린다. 그녀는 지금 꿈속에서 테리우스가 요리사가 되어 하얀 슈크
림 케익을 크게 만들어 놓은 걸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는 중이었다.

"뭐야 이 녀석?"

테리우스의 오른쪽 눈썹이 곧바로 위로 치켜 올려지면서 그가 반쯤 몸을 일으켜 아이린을 바라
봤다.

여전히 뭐가 그리 행복한지 그녀는 연신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잠꼬대를 한다.

"…응, 자기가 만들어 줘서…너무 너무 맛있어. 쉿, 비밀…우와, 너무 맛있어."

아이린의 두 번째 잠꼬대에 테리우스의 인상이 조금씩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 꿈속에서 만나고 있길래…감히 신랑이 옆에 버젓이 있는데 자기라니….'

그러나 그의 화도 잠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더니 조금씩 수그러진다.

"잠깐, 내가 결혼을 했으니 이 녀석이 꿈속에서 자기라고 부르는 자가 나일 수도 있는 거잖아?
흠, 꿈속에서 나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니 것도 썩 괜찮은 걸? 그게 만약 나일 경우에는 말이지."

계속되는 아이린의 행복한 미소와 잠꼬대가 잦아질수록 그 상대가 자신인지 아닌지가 궁근한
테리우스.

그녀를 깨워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렇다고 피곤에 지쳐 자고 있는 그녈 깨우
는 것도 조금은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여졌다.

"쳇, 이 녀석을 깨워 말아?"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1화<하>

  겨울기사  Date : 2003/05/02  View : 380  Vote : 0

*

다음날 아침, 아이린을 자신에 팔에 껴안은 채로 자고 있는 테리우스를 건들어 깨우는 벅스칼.

"아니, 해가 중천인데 아직까지 자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쯧, 이래서야 아이린님께 좋은 남편
이 되겠어요. 빨리 일어나요. 아침 준비라도 해야죠."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계속해서 테리우스의 얼굴에 나뭇가지를 가져다 툭툭 찌르는 벅스칼 덕
에 테리우스는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자식이 정말!"

"쉬잇, 아이린님 깨시겠어요. 좀 조용히 좀 일어나요."

그러자, 혹여 자신의 목소리에 아이린이 깨어났는지 조심스레 살핀 테리우스가 베개를 가져다

그녀의 머리에서 자신의 팔을 빼고 베개를 대신 넣는다.

늦은 밤까지 아이린의 잠꼬대의 주인공에 대한 궁금증으로 잠을 설쳤던 지라 테리우스의 얼굴
은 꽤나 피곤함이 역력해 보였다. 부시시한 머리칼을 긁적이며 조금은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벅스칼을 따라나선 테리우스.

"이봐, 벅스칼 또 무슨 꿍꿍이로 아침부터 잠을 깨우는 거냐. 내가 언제부터 아침 식사를 했다
고 그래."

"헤유, 주인님도 참 아이린님 깨어나시기 전에 깨워준 걸 고맙다고 그냥 말씀하시면 되실 것
을…지난 번 그 해변에서도 아침을 손수 만드셨고 나중에도 식사를 만드셨던 거 잘 알고 있구
만. 그거 다 아이린님께 잘 보이려고 그런 거 아니셨나요?"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은 벅스칼의 하얀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면서 녀석에 능
구렁이 같은 미소가 테리우스의 눈에 들어온다. 언제 봐도 무슨 말을 해도 얄미운 느낌을 주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는 퍽 재미없는 인연이란 생각에 절로 한숨이
푹푹 새어 나온다.

벅스칼이 어디론가 테리우스를 이끌고 가더니 개울가 근처에서 멈춰 서서 수풀 쪽으로 혼자 뛰
어갔다가 뭔가를 들고 돌아왔다.

"쳇, 혼자 신이 났구만 저 녀석…그래도 요즘은 옛 이야길 안 꺼낸 걸 보면 상처가 많이 아물었
나보군."

낮은 개울가를 가로질러 폴짝폴짝 뛰어 오는 벅스칼이 자신이 들고 있던 부대 자루를 들어올리
며 소리친다.

"새벽에 제가 잡은 고기들과 나무에서 딴 과일들이에요. 이걸 가지고 요리를 할 생각이니까…
옆에서 좀 거들어봐요."

"뭐, 나더러 너 요리하는 걸 거들어 달라니 그런 게 어디 있냐. 요리를 내가 하고 네가 거들어야
지."

"내참, 주인님 지난번에 만든 요리로 다들 배탈이 나서 고생했던 걸 잊으신 건 가요? 아마 또 요
리를 하셔도 마찬가지 일 걸요. 이번에는 제가 할 테니 거들도록 해요. 게다가 이건 모두 내가
준비한 거라구요."

상황을 보아하니 이랬다. 벅스칼이 직접 아이린에게 맛있는 아침을 만들어 주고 싶어 새벽부
터 일어났다. 그리고 고기와 과일들을 준비했다. 그런데 누군가 도와줘야 할 요리였다. 그래서
벅스칼에게 만만한 상대를 물색하던 중 걸린 게 바로 테리우스.

왜냐하면 세 수행원들은 분위기가 다들 어색하고 어려웠고 레오나르는 너무 할 줄 아는 게 없
고 그나마 남은 것이 가장 오래도록 알고 지낸 테리우스였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을 마친 테리
우스가 벅스칼의 표정을 살피더니 녀석은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이며 두 손을 비벼대고 있었다.

"헤헤, 주인님도 참 맛난 요리도 먹고 아이린님도 아침부터 좋은 식사도 하고 일석이조인데 뭘
그러세요. 시간도 없는데 그만 절 도와주시죠."

"흠, 좋아 이번엔 도와주지."

생각보다 테리우스가 쉽게 수락하는 것을 보고 벅스칼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린을 떠올렸다.

'주인님이 정말 아이린님에게는 꼼짝도 못하는 군.'

개울가 옆에 자리를 깔아 놓고 요리를 하기 위한 불을 지피고 하나 둘이 두 사람은 아침 식사
를 준비해 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맛있는 음식 냄새에 다들 알아서 일어나 이쪽으로 올 거예요."

벅스칼이 어디에서 준비했는지 하얀 요리 모자를 머리에 쓰고는 제법 요리사 모습을 하며 국자
를 높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생선의 머리를 잘라 내고 있던 테리우스가 한마디한다.

"만약 음식 맛이 영 아니면 각오해야 할거야."

"헤헤, 걱정마시라니까요."

테리우스가 수풀들과 개울들을 바라보며 문뜩 어떤 기억을 되새기며 중얼거린다.

"푸웃, 하하."

"주인님 결혼하시고 나서 그렇게 헤헤거리면 다들 팔불출이라고 욕합니다. 제발 주변 눈도 생
각하세요."

그러자 테리우스가 표정을 다잡으며 대답한다.

"아니, 갑자기 아이린과 함께 했던 일들을 하나 둘 떠올려보니 그 녀석 표정까지 생각나서 웃음
이 나도 모르게 나온 거야."

"오, 거야 저도 언제나 함께 있어 알긴 하지만 그래도 전 소리로만 들은 데다 보는 것에는 한계
가 있었죠."

흘러내리는 모자를 뒤로 다시 바로 잡으며 벅스칼이 녹색 줄이 새겨진 과일을 깎아 내렸다.

"헌데 주인님 아이린님에 대한 좋은 느낌이 언제부터 생긴 거죠? 처음부터 계속 싸웠던 것 같은
데."

"그건 아마도 처음부터라고 말하는 게 옳겠지만, 그 녀석이 내 머리칼을 다듬어 줄 때 내 심장
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크큿, 그때 그 엉망인 모습에 쩔쩔매고 아이린님이 하라는 대로 했던 그때 말씀이군요."

"시끄러워 요리나 해."

두 사람의 요란한 대화 속에 곧이어 요리들이 하나 둘이 진행되었고 맛있는 음식 냄새가 천천
히 주변을 물들이고 있을 때쯤이었다.

두 사람을 몰래 미행했던 아처가 나무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발길을 돌려 천막이 있
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자신이 묵었던 곳으로 들어와 자리에 눕는다.

"어떤 느낌일까?…."

아처가 자신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면서 낮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쉰다. 이미 누군가의
연인도 아닌 아내가 되어버린 여인에 대한 마음을 아직도 접어내지 못한 채 묘한 질투가 느껴
지다니 감추기가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차라리 한번 부딪쳐 고백하고 싶은 맘도 들었지만 그
랬다가는 지금처럼 곁에서 지켜보는 것조차도 힘들어질 것이 뻔했기에 그렇지도 못한 그였다.

맛있는 꿈으로 너무나 편하게 잠을 잤던 아이린이 상쾌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편다.

"아, 잘 잤다. 어? 나 혼자 잔 건가?"

아이린이 낯선 천막 안을 둘러보더니 테리우스의 짐과 자신의 배낭을 확인하고 미소 짓는다.

"테리우스가 함께 있었구나. 나 혼자 두고 어디로 간 거지?"

옆자리를 보니 함께 잔 것 같은데 테리우스가 보이질 않자, 아이린이 천막 밖으로 나왔다. 그러
자, 파라도와 아르테니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들 깨어나 아침 체조를 하면서 아이린에게 인사
를 한다.

"하하핫, 공주님 잘 주무셨어요. 정말 상쾌한 아침이네요. 이 지역이 공기는 정말 좋은 것 같아
요."

파라도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아이린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응, 파라도두 잘 잔 것 같아 보이네. 밤새 힘들었지? 아르테니도 레오나르도 고생했어요."

"방금 전에 벅스칼이 왔다 갔어요.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침 식사를 만들었다고 개울 쪽으
로 오라는데요."

아르테니가 무슨 말인가 하려는 레오나르의 입을 막아서며 아이린에게 말했다.

"아침을? 설마 테리우스가 식사를 준비한 건?"

조금 걱정이 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린이 묻자, 파라도가 대답한다.

"크하핫, 벅스칼 녀석이 요리를 했다니 걱정 마세요."

"아, 그래. 테리우스가 요리를 못해서가 아니라 가끔 아주 가끔 이상하게 만들어서…그런데 아
처는?"

아이린이 아처의 행방을 묻자, 아르테니가 그가 묵고 있는 천막을 가리키며 답한다.

"대장은 아직도 자고 있는 것 같은데 공주님께서 가셔서 좀 깨워 오실래요?"

"그래? 알았어. 그럼 다들 먼저 가 난 아처와 함께 뒤따라갈게."

아이린이 아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파라도가 아르테니에게 다가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묻는다.

"왜 그래 아르테니 대장은 아직 마음 정리가 다 안되었잖아. 웬만하면 공주님과 안 부딪치게 해
줘야지."

아르테니가 여전히 레오나르의 입을 막은 채로 파라도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 차라리 계속 부딪쳐서 잊는 편이 더 빠를 거야."

"그건 너무 잔인해. 완전히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잖아. 친구가 되어서 그럼 안되지."

"글쎄, 친구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다. 그만 가자."

한참을 걸어가다 파라도가 아르테니의 헤드락에 걸려 있는 레오나르를 보면서 한마디한다.

"그 녀석 입은 왜 그렇게 막고 있는 거냐?"

"어? 그래 그럼 한 번 들어봐."

아르테니가 레오나르의 입을 열어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한 소리 한다.

"아니, 무엄하게 감히 왕자인 내게 이런 대접을 하다니 이런 지저분한 여행에 옷이 다 망가지
고 흠 르노아르가 없어서 모든 게 엉망이야. 벅스칼의 말을…으움……."

듣다못해 아르테니가 다시 그의 입을 막자, 파라도가 단숨에 레오나르를 한방 먹여 기절을 시
킨 후, 자신의 어깨에 들춰 매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당분간은 입을 막고 데리고 다녀야겠군. 벅스칼이란 녀석이 왜 이 마야 왕자를 데려 왔는지 모
르겠지만…쩝, 여튼 무지하게 배가 고프군."

*

아이린은 조심스레 천막에 들어서면서 아처를 부른다.

"아처, 아직도 자고 있는 중이야? 아처."

눈만 감은 채로 누워 있던 그가 낯익은 목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니 여긴 어떻게……."

"응, 다들 아침 먹으러 갔는데 아처가 아직 안 일어났다고 해서 함께 가려고."

"네."

좁은 천막 안에서 잠시 적막감이 흐르자, 아이린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뚜렷하게 난다.
그녀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평소보다 조금 큰 소리를 냈다.

"어, 그럼 우리도 빨리 가자 아처."

아이린이 되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 들자, 아처가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며 붙잡았다.
이에 놀란 아이린이 아처를 되돌아보며 말한다.

"아처?"

예전에 집 앞에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슬픔 목소리를 냈던 아처의 모습이 떠오르자, 아이린은
그 순간 테리우스를 떠올리게 된다. 왜 갑자기 테리우스가 떠오르는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아처, 왜 그래? 말을 안하고 있으니까 내가 겁이 나잖아."

그러자 아처가 힘겨움이 묻어나는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탁이 있어요…."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2화<상>

  겨울기사  Date : 2003/05/08  View : 293  Vote : 0

순간 아이린의 눈에 아처의 슬픈 눈동자 주변의 촉촉한 물기가 보였다. 힘없이 쳐진 그의 어깨
가 그냥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가 무슨 일로 그리 슬픈 눈빛을 하며 말하고 있는지 궁금했
다.


"어디가 아픈 거야?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아처. 무슨 부탁인지 말해 들어 줄께."


아이린이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어내자, 그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여전히 힘겨
운 목소리로 말한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주군께서 제 머리칼을 다듬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 머리칼을?"

아이린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하다 직접 아처의 머리칼을 가리켜 손짓을 하며 되묻는다.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시지 않아도 돼요. 힘들다면 방금 부탁은 안 들은 걸로 해 주셔도…."

"아, 아냐 아처.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 다만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부탁이라 잠
시 어리둥절했던 것 뿐이야."

"……엉뚱한 부탁이라…그렇군요."

아이린이 금새 가위를 찾으려고 주변을 살피자,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처가 낮게 중얼거리다
힘겨운 목소리만큼이나 힘없는 미소를 내비친다.

바다 물결을 담고 있는 듯한 아처의 푸른 머리칼을 아이린이 조심스레 가위질을 하며 다듬어
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의 바로 앞에서 머리칼을 신중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조심스레 대하
는 모습이 괜히 기분 좋았다. 테리우스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은 아처였다.

그녀의 따뜻한 손길과 함께 들려오는 고운 목소리가 그의 근심을 눈 녹듯이 녹여버린 듯 하다.
아처는 지금 눈을 감고 작게 들려오는 가위질 소리와 아이린의 수다 그리고 그녀의 손길로 너
무나 행복했다.

'당신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은 듯 아까울까요? 이런 내 마음을 당신이 알게 된다면 그래도 지
금처럼 날 대해 줄지….'

아처는 갑자기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당당히 고백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 충동과 이
성적인 자제가 매분매초마다 엇갈리고 있었다.

그 시간 벅스칼의 아침 식사는 인기 절정에 오르고 있었다. 파라도와 아르테니는 혀를 두르며
그 맛에 감탄을 했고 레오나르 역시 처음 예의를 갖추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맛에 취해 정신
없이 먹었다.

다들 맛있게 아침을 하고 있는데 단 한 사람 테리우스 만이 땅바닥에 왼발을 작게 구르며 왼쪽
눈썹을 치켜들면서 아이린이 올 방향을 향해 인상을 긋고 있었다.

'이 녀석 다른 놈들은 다 왔는데 왜 그 녀석은 안 온 거야? 게다가 그 밥맛없는 놈이랑 같이…대
체 둘이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밥도 안 먹고….'

테리우스의 심각한 모습에 벅스칼이 국자를 손에 쥔 채로 다가오더니 겁도 없이 옛 주인의 뒤
통수를 살짝 내려치며 말을 건넨다.

"식사 안하고 멀뚱히 서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까?"

"읔, 무슨 짓이야!!"

시퍼런 눈매로 곧 죽일 것처럼 응시하는 테리우스의 기세에 눌린 듯 벅스칼이 한 걸음 뒤로 주
춤하면서 혀를 낼름거렸다.

"헤헤헤, 뭘 장난한 거 가지고 화를 내세요 주인님도 참. 식사 안 하시냐구요?"

"상관 마. 이봐! 그래 거기."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 치던 테리우스가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파라도에게 물었
다.

"…무슨 일로?"

한참 맛있게 먹다가 큰소리에 고개 들던 파라도가 어리둥절한 듯 묻는다.

"그 녀석은 왜 안 오는 거야!"

"그 녀석이라면?"

"아이린, 내 신부 말이야."

그제야 주군을 가리킨다는 것과 동시에 그 주군의 남편이 한 성질 하는 테리우스라는 사실도
재확인하며 파라도가 대꾸한다.

"대장과 함께 오신다고 하셨으니 곧 오실 겁니다."

"대장?"

"아처말입니다."

"나도 알아. 그 아처란 녀석과 왜 그 녀석이 같이 오냔 소리야."

"그거야 아처가 천막에서 나오질 않아서 공주님께서 깨워 같이 오신다고 해서…뭐, 곧 오실 테
니 걱정 안 하는 것이…."

파라도는 아르테니와 눈을 마주치고 테리우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그럼 그 놈하고 그 녀석하고 단 둘이 두고 왔단 소리야. 제기랄!!!"

테리우스는 혼자서 엉뚱한 상상을 잠시 하더니 이내 화를 버럭 내며 아이린이 있는 곳으로 내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벅스칼이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 거렸다.

"쯧쯧, 우리 주인님도 팔불출이 다 되셨군. 아니 그 동안 결혼 안 하셨을 때는 어떻게 사신 거
야. 흠흠, 저런 걸 질투라고 하지 않나?"

벅스칼의 말에 다들 동감한 듯 고개를 동시에 끄덕끄덕 거리 더니 다시 식사하는 것에 열중했
다. 결혼한 여성에게 그 녀석이라고 호칭하는 것도 함께 여행 온 일행에게 그 놈이라고 하는 것
도 모두 테리우스였으니 그 혼자 괴짜가 되어버리는 분위기였다.

아처가 머물고 있던 천막은 아직도 걷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내달리던 테리우스도 천막 앞에
와서는 발걸음을 조용히 한다. 괜히 안에서 두 사람이 뭘 하고 있는 지 내심 불안하기도 궁금하
기도 한 그였다.

'쳇, 왜 갑자기 이런 묘한 기분이 드는 거지? 아이린 그 녀석 원래 수행원 녀석들과 마나아카데
미에서 함께 살았는데 뭘…아니지, 지금은….'

그의 생각이 다 정리가 되기 전에 테리우스의 손이 천막 안에 닿아 틈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아
이린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이린과 겹쳐져 보이지 않은 맞은 편의 남자는
아처가 틀림없을 것이다. 나란히 마주한 채 두 사람이 이 시간까지 뭘 하고 있는지 테리우스는
조금씩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아처의 머리 손질을 마친 아이린은 그의 머리길이가 맞는지 양쪽 머리칼을 두 손의 손가락 사
이로 재어보면서 방긋 웃었다.

"잘 다듬어 진 것 같은데…음, 거울로 내가 보여줄까? 거울이…."

아이린이 몸을 움직이려 들자, 아처가 막아서며 대답한다.

"아니오, 공주님의 눈동자 속에 제 모습이 보이는데요."

"어? 뭐?"

놀란 토끼 마냥 두 눈을 깜빡거리는 그녀의 짙은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처가 살짝 미소 지
었다. 그제야 아처의 따스함이 느껴진 아이린이 절로 기분이 좋아진 듯 활짝 웃었다.

"아, 다행이다. 아까는 아처가 너무 침울해 있어 보여서 걱정했는데 이제 좀 나아보여."

"그런 가요? 공주님 덕분이에요."

아처가 그녀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찰나였다. 누군가의 심상치 않는 숨소리를 두 사람에
게 들려왔다. 뭔가에 잔뜩 화가 나서 흥분해 있는 소리였다. 바로 테리우스가 천막 안으로 들어
온 것이다.

"…쳇!"

한참을 씩씩거리던 테리우스가 아이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 첫마디였다.

"어, 테리우스?"

"…쳇! 쳇! 쳇!!!!"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2화<하>

  겨울기사  Date : 2003/05/09  View : 438  Vote : 0

아이린의 의아한 표정을 쳐다보며 테리우스는 하고 싶은 말은 못한 채로 툴툴거리기만 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불끈 쥐고서 천막 밖으로 끌어낸다. 아이린은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억지로 끌려가듯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테리우스의 갑작스런 행동에 조금 당황한
듯 아이린이 그가 붙잡은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테리우스!!"

"무슨 짓!…."

잔뜩 부어 있는 목소리로 그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 심술궂게 바라보자, 그 기세에 아이린이 침
을 꿀꺽 삼키며 그가 잡아끈 손목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답했다. 아주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이다. 행여 억지 소리를 해가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할 테리우스 일지라도 일단 화가 나면
조금 무서우니 말이다. 그가 무섭다는 것 보다 그로 인해 주변에 파생되는 일이 무서운 거였
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이것 봐! 갑자기 손목을 세게 붙잡고 끌려 와서 이렇게 빨갛게 부었
잖아. 분명 몇 시간 후에는 멍이 들 거란 말야. 내 손목을 멍들게 할 정도로 네게 뭘 잘못했는
지 난 아직 모르잖아."

아이린이 손목을 휘휘 위 아래로 까딱까딱 거리며 테리우스의 눈앞에 내보이자, 그의 눈이 곧
바로 그녀의 손목을 응시한다. 퍽 놀란 눈치였다.

"멍이?"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혹 많이 다쳤는지 살피는 모습을 보고 아이린은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감을 잡았다.

'내 손목을 걱정해주는 거 보면 이 녀석 지금 내게 억지 부리려고 내게 온 거잖아. 흥, 어디 골
탕 먹어봐…이런 건 초반에 잡아야 나중에 이상한 억지 부리는 습관이 없어지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아이린은 초반에 신혼부부가 하는 기득권 쟁취 작전에 돌입한다.

"아얏! 아파 살살 다뤄. 정말 이게 뭐야 아침부터 신랑 덕에 부상당하고 그런 신부가 세상에 어
디 있어."

"후후, 많이 아파? 미안 미안…널 다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진짜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이린에게 테리우스가 믿어 달라는 듯 애원한다. 그 모습이 얼마
나 귀여웠는지 일행들이 있었다면 보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치 자신에게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테리우스가 아이린은 퍽 맘에 들었다. 그러나 다른 여자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한다며 그
녀는 참지 못할 것이다.

"말해."

"뭘?"

아이린이 조금은 토라진 목소리를 하며 테리우스에게 묻는다. 그러자 그가 딴청을 피우며 시선
을 돌리면서 답했다.

"아처의 천막 밖까지 조용히 왔다가 갑자기 씩씩거리며 들어와서 다짜고짜 내 손목을 쥐어 잡
고 밖으로 끌고 나온 이유 말하라구."

조목조목 따지는 아이린의 잔소리가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그 답변을 한다는 것은 테리우스에
게 조금 곤욕이었다. 단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아무 생각 없이 다짜고짜
데리고 나왔다고 한다면 분명 질투한 거라고 놀리고도 남을 아이린이기에 더더욱 대답하기 싫
은 그였다.

"그건……,"

"푸웃, 질투하는 구나?"

"쳇, 아냐."

"그럼? 마나아카데미 기숙사에서도 수행원들과 함께 지냈었는데 갑자기 아처랑 단둘이 있다고
들어와서 아무 이유 없이 날 끌고 나온 이유가 뭔데?"

왜 언제나 항상 아이린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는 코너에 몰린 기분이 드는 것일까? 테리우스
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그러나 코너에 몰린 쥐는 되려 고양이를 물게 마련이다. 자신의 마음이 들키자, 그가 대뜸 버
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봐, 넌 이제 결혼한 여자라는 걸 잊고 있나 본데 왕국의 공주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중
에 하나! 바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한 공간이 있지 않는 다는 거야. 하녀를 동반하지도 않
은 채로 아무리 수행원이라지만 저 좁은 천막에서 단 둘이 있는 다는 것 자체가 불명예스러운
거라고."

"무슨 뜻이야? 내가 공주답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야 지금?"

"그래, 공주라면 한 나라의 주군이라면 주군답게 왕국의 예절도 지켜야지. 참나, 넌 수행원들에
게 그런 것도 배우지 않은 거냐."

테리우스는 점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는 말들로 아이린을 상처 입히고 있었다. 결코 그녀를
상처 줄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심술궂은 소리들이 줄
줄 나오고 있었다.

이쯤해서 아이린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럼 넌! 넌……."

아이린은 테리우스가 데본 제국에서 추방당한 것에 대한 사실이 즉각적으로 떠오르자, 입을 열
었지만 차마 말을 잇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추방당했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에 희생 앞에 그녀가 이래저래 따질 만한 이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
은 것 같았다.

"내가 뭘!"

테리우스가 인상을 잔뜩 그으며 그녀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반문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린의 눈가에 촉촉한 것이 맺히더니 좀더 두면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펑펑 울 기미가 보인
것이다.

"……."

"아이린! 읔, 그래 내가 말이 좀 잘못 나왔어. 하하, 혹시 울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그렇지?"

아이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바보처럼 울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마…."

힘없는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대로 가만 두면 울 것이 틀림없다고 테리우스는 생각했다.
차라리 대들고 바둥바둥 싸우는 아이린의 모습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축 쳐져 있었다. 그가 그녀를 상처 입힌 것이다.

"미…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런 소리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괜찮아. 앞으로는 왕국 예절에 관한 걸 배워두도록 할게 테리우스."

"그만 식사하러 가자 아이린."

테리우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손을 잡지 않는다.

"아니, 별로 배고프지 않아. 좀 쉬고 싶어…혼자 가도록 해."

"고집 부리지 말고 함께 가. 혼자서 이곳에 있으면 위험해. 그 놈도 식사는 해야 할 거 아냐. 그
럼 너 혼자 여기서 있겠다 소리잖아."

"혼자 있어도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그럼 같이 있어 줄께."

테리우스가 끝끝내 혼자 갈 수 없다고 말하며 그녀를 안으려고 하자, 그 손길을 세차게 뿌리치
며 달려가다 아이린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버렸다.

"으아앗!!!!!!!!"

철퍼덕 넘어진 아이린이 바닥에 얼굴도 함께 박은 덕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흙과 함께
코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조금 전 심각했던 그녀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버
렸고 아이린 역시 조금은 창피한 생각이 들어 재빨리 코피를 소매로 훔쳐낸다. 그 덕에 코 옆으
로 번진 핏자국이 더 상황을 악화시켰다. 결국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을 참아내던 테리
우스가 함박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크큭…푸하하하하!!!!!!!!!!!!! 정말이지 넌 잠시도 혼자 둘 수가 없는 사고뭉치야!!! 크큭큭큭!!!
하하하!!!"

"…시잇, 웃지마. 그렇게 배꼽잡고 웃고 싶어 너!!"

"야, 크큿…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해. 하하, 휴…네 말대로 정말 배꼽이 빠지겠다. 하여튼 말을
내 말을 안 들으니 이런 사고를 당하지. 마치 일곱 살 난 꼬마 아이처럼 이게 뭐냐. 가만 있어
봐. 닦아 줄 테니."

테리우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냈다.

"아아, 아파…좀 조심히 닦아…아프단 말야."

"엄살 부리지마. 지난번에 네 얼굴 반쪽만 닦아내고 한참을 실랑이했던 걸 생각하면 너도 참…
이그, 너더러 왕국 예절이니 뭐니 했던 거 정식으로 사과할게. 그런 거 안 배워도 괜찮아…넌
그냥 이런 모습 그대로가 좋아 알겠지? 아까 심술 부려서 미안하다."

"……응."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어 보이자, 테리우스가 살짝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퉁기
며 말한다.

"아무 앞에서 그렇게 웃지마…내 앞에서만 웃어 알았지?"

"……음."

"음이라니 그게 대답이냐?"

"…아니, 생각 중이라는 소리야."

"쳇, 그냥 해본 농담이야. 괜히 성격에도 안 맞는 말을 했더니 닭살만 돋네. 그만 일어나 가자."

그때 아이린의 뱃속 시계가 꼬르륵 거렸다. 두 사람 모두 확실하게 들었고 그 소리의 주인이 누
구인지는 너무나 뻔했다.

"뭐야, 배 안 고프다며 그 소리는 뭐냐?"

"다시 배가 고파졌나봐."

"하여튼…알았어 그럼 식사하러 가자. 나도 만들면서 조금씩 집어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긴
하니까."

아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아픈 소리를 하며 도로 주저앉았다.

"아얏, 아파서 못 걷겠어. 아무래도 발목이 삐었나봐 테리우스."

"이런…어휴, 조심했어야지. 얼굴에 흙만 묻어 다행이다 싶더니만 기어코 일을 저질렀군 그래.
가만 있어봐."

테리우스는 아이린의 발목을 살피며 혹 뼈에 손상이 있는지 살폈다. 그가 그녀의 발목에 손을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오로라의 기운이 그의 손바닥에서 그녀의 발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
다. 잠시 후, 아이린을 안아 들며 테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는 오른쪽 발목은 사용하지 않도록 해. 인대가 늘어난 정도로 그나마 다행이다. 치료
는 했지만 하루는 지나야 다시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응, 고마워. 내려줘도 되는데 조심해서 오른쪽 발 사용하지 않고 걸으면 돼."

"됐네. 누굴 더 고생시키려고 오늘은 그냥 네 발 노릇 내가 해 줄 테니 그렇게 알아."

"피잇, 뭐든 자기 맘대로야 테리우스는."

"뭐? 내 맘대로 라니 대체 누가 누굴 맘대로 하는 지 모르겠네…덕분에 오늘 하루 네 하인 노릇
하게 된 나더러 내 맘대로 라니…억울해."

테리우스의 농담 섞인 이야기에 아이린이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천막 안에서 지켜보던 아처
가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른 남자의 품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이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휴, 아이린 공주…난 왜 아직도 그대가 카나 황국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리 미련과 후
회가 있는지 만약 그랬다면…그랬다면 그대의 곁에 내가 있을 수도 있었는데……."

아처는 천막에서 나가지 않고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넣고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3화

발목 부상으로 인해 하루 종일 테리우스의 등에서 생활했던 아이린은 자신의 오른쪽 발목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발목을 다치지 않았다면 이렇게 테리우스의 등이 따뜻하고 넓은 걸 몰랐을 거야.'

두 사람의 이런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다들 짝이 없는 외기러기 신
세를 한탄 한 듯 농을 주고받았다.

"쩝, 아무리 신혼은 닭살이라고 하지만 하루 종일 저렇게 등에서 내려놓지 않다니…테리우스
가 아닌 것 같아…쯧쯧."

혀를 내두르는 벅스칼의 말에 동감한 듯 아르테니와 파라도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에휴, 내 참 혼자인 사람은 서러워 살겠나…크큿, 그래도 우리 아이린 공주님이 행복해 하신
표정을 지으니 이 파라도의 마음도 뿌듯하구만."

"왜? 딸 시집 보낸 아버지 같은 기분이라도 드는 거냐?"

"음, 꼭 그런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한데 하하."

"에라, 이놈아!"

아르테니가 파라도의 머리를 가볍게 내려치며 자신도 웃었다. 그들의 주군이 행복한 모습을 보
니 그들 역시 행복했다.

"휴, 오늘밤은 여기서 보내야 하는 건가요? 이곳 나무들은 꽤 크고 웅장한데…기분 나쁘게 누군
가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영 찝찝하군요."

낮부터 산행을 시작했던 이들은 깊게 우거진 숲 속에서 밤을 지새기 위해 발길을 멈추었다. 천
막을 맡고 있던 파라도가 야영을 위해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 뒤를 벅스칼이 깡충깡충
뒤따랐다.

아르테니는 어두컴컴한 주변을 둘러보며 겁먹은 얼굴을 한 레오나르와 함께 했다.

"앞으로 9일 정도는 매일 이렇게 지내야 할 텐데 괜찮겠소?"

아르테니가 다소 걱정이 되는 듯 묻자, 레오나르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답변한다.

"아, 네. 전 괜찮습니다. 헌데 이곳은 정말 너무 캄캄하고 으스스한 곳이군요."

"아마 점점 그런 분위기를 맛보게 될 겁니다. 젬모스 지역에는 시한 폭탄 같은 존재들로 가득하
니까요."

"시한 폭탄이라면?"

"범죄자들이나 추방당한 이종족들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죠."

"앗, 범…범죄자들이라구요?"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들에게는 그들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아르테니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테리우스를 힐긋 바라본다. 그러자 레오나르는 영문을 모
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안색이 창백해졌다. 테리우스가 바로 데본 제국에서 재판
을 받고 추방당했던 대마왕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르테니와 레오나르가 담소를 나누며 그들이 머무를 곳에 장작불을 켜고 있을 때 테리우스는
잠든 아이린을 등에서 내려놓고 그녀를 살폈다. 그 옆에는 아처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서서
두 사람을 가까이 서 주시하고 있었다.

"으음…어, 미안 테리우스 깜빡 잠이 들었었나봐. 방금 전까지 깨어 있었는데…힘들었지?"

하루 종일 자신을 업고 온 테리우스에게 조금 미안한 듯 아이린이 말했다.

"뭐 좀."

"……."

테리우스가 조금 으쓱해진 기분으로 두 다리를 두들겨 보이며 말했다. 그 모습이 조금 얄미운
아이린이 잠시 할말을 잃었다.

"네가 좀 무겁기는 했지. 하핫, 뭐 내가 워낙 튼튼해서 거뜬히 업었던 거지. 다른 녀석 같았으
면 특히 저 비실비실 녀석 같았으면 못 업을 거다."

아처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이며 보란 듯이 말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테리
우스의 비꼬는 목소리가 그대로 아처에게 전해졌다.

'유치한 녀석.'

아처는 비아냥거리는 테리우스의 말에 별 동요 없이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 모습이 되려 테
리우스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날 업어 준 건 고맙지만 아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야 테리
우스."

아이린이 아처의 편을 드는 것처럼 들린 테리우스가 쉽게 열을 받아 그대로 얼굴이 일그러졌
다.

"넌 남편 보다 수행원 편을 드는 거냐."

"말도 안돼! 지금 여기서 남편이라는 소리가 왜 나와. 편을 드는 게 아니잖아."

"쳇, 됐어! 오늘 아침에도 천막에서…."

"천막에서 뭐어?"

"흐흠, 됐어. 어쨌든 저 녀석과 가까이 있지마."

"왜? 무슨 이유로?"

"내가 기분 나쁘니까 그거면 이유가 충분한 거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테리우스의 태도에 아이린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바라보고 있는 아처에게도 괜히 미안했다.

"싫어."

"뭐?!"

"싫다구! 납득되지 않는 이유로 강요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싫어. 아처를 싫어하는 이유도 모르
겠고 내게 아처와 가까이 하지 마란 말도 납득이 안돼."

테리우스는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처와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자신의 질투
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 정말!!"

"내가 뭘!!"

테리우스와 아이린의 언성이 점점 높아져 갔다. 그 모습에 아처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두 사
람의 싸우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다정하게 보였던 것이다.

멀리까지 들리는 테리우스와 아이린의 다툼소리에 나머지 일행들이 알겠다는 듯이 다들 고개
를 끄덕거렸다.

어둠 속에서 작은 불로 야영을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날카로운 야수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어떤 자들인가?"

높은 나무에 몸을 숨기고 있는 이들의 대장인 듯한 자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그러자 그의 곁을
수행하는 몸집이 큰 사내가 컬컬한 목소리로 답했다.

"데본에서 온 자들입니다. 조심해야합니다. 두목."

"데본이라…."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4화

  겨울기사  Date : 2003/10/30  View : 1  Vote : 0


말괄량이프린세스 154화

*

어둠 속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그들의 영역에 들어선 불청객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남자의 눈

이 날카롭다. 마흔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에게서는 조용하지만 강한 카리스마가 풍겼다.

짙은 금발 머리칼을 뒤로 질끈 동여매고 있었고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에 그의 짙푸

른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다. 조각상처럼 잘 깎여 진 그의 코가 얼굴의 굵은 선을 만들어 강

한 인상을 주었다. 젬모스의 도망자들을 이끌고 있는 앨리어튼이 며칠 새 면도하지 않은 까

칠한 턱을 매만지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한다.

"부크……."

그러나 앨리어튼 보다 덩치가 세 배 가량은 커 보이는 부크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분명 그의 곁에서 낮게 포복을 한 채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봐, 부크……."

다시 한번 부른 후 이어 대답을 하지 않자, 앨리어튼이 고개를 돌려 그의 부하를 살폈다. 너

무 오랫동안 숨죽이고 염탐만 했던 탓인지 부크는 어느 새 눈을 뜨고 잠이 들어 있었던 것

이다.

"이런 녀석 벌써 꿈나라에 들어갔구만…못 말리는 친구일세."

"……푸우∼우……."

앨리어튼은 두 손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러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부하들이 하나 둘씩 대장의 휘파람 소리에 응답했다.

"휘익!!! 휘익!!!"

"휘익휘익!!!! 휘익휘익!!!!!"

깊은 잠에 들어 있던 아이린에게까지 그 휘파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면 나머지 일행들에

게도 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세 흑기사를 비롯해서 테리우스와 벅스칼 그리고 레오나르까지

이 요란한 휘파람 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또 뭐야?"

아이린과 다투는 바람에 천막 밖에서 잠을 자고 있던 테리우스가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그때 파라도와 아르테미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거 사람이 내는 소리인 것 같은데 너도 알고 있었냐?"

"취침 전부터 인기척이 있어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공주님은 괜찮으신가요?"

정중한 아르테미와 달리 파라도는 자연스럽게 테리우스에게 반말을 하며 물었다.

"쳇, 뚱보녀석 아주 막나가는군."

"뭐시, 뚱보!"

파라도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발악했다. 그러나 테리우스는 상대의

태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르테미에게 눈길을 줬다.

"내 아내는 괜찮아. 그것 보다 주변에 이상한 녀석들이 다가오고 있는 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자칭 수호기사인 듯 내세우면서."

"뭐야!!!!! 공주님의 부군이라 예의를 갖추었는데 마치 네 하인 다루다니!!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가!!! 예전에 데본의 우두머리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쫓겨난 주제를 아셔야지!!!!"

파라도가 고함을 치는 동안 그의 머리칼은 쭈뼛쭈뼛 삐져 나왔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열을

받고 있었다. 테리우스의 건방진 어조에 아르테미와 뒤늦게 온 아처 역시 썩 기분이 좋지만

은 않았다.

"쳇, 그래서? 그 덩치로 날 깔아뭉개기라도 하겠단 소리냐? 웃기지도 않는군."

"이 자식이 정말!!!"

퍽!

퍼퍽!!

퍼퍼퍽퍽퍽!!!!!!

파라도의 선방에 뒤이어 테리우스 역시 이에 응하면서 두 사람의 몸싸움은 점점 격해지더니

이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다 땅바닥에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테리우스의 힘이 막강하다 했지만 카나 황국에서 인정했던 흑기사 신분의 파라도 역시 이를

방어하며 공격할 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이런 싸움을 감히 말리려고 하지

않은 채 일행들은 다들 먼 산 보듯 팔짱을 낀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되려 이 갑작스런 싸움에 놀랐던 것은 자신들의 존재를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경계하

는 내색도 하지 않는 이방인들에 대해 앨리어튼을 포함한 젬모스의 일원들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채고서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야 대장?"

"글쎄다…희한한 녀석들이거나 베짱이 좋은 녀석들이겠지. 어서 부크나 깨워라. 저들은 포박

해서 데려가 조사를 해봐야겠다. 휘∼익!!!"

앨리어튼이 짧은 휘파람 소리를 내자, 어둠 속에서 그들을 정탐했던 이들 외의 검은 무리들

이 여기저기서 바삐 움직이더니 이내 거친 황금가시로 꼬여 만들어진 그물 망을 끊어 내렸

다.

싸움을 끝내지 않고 있던 파라도와 테리우스도 이를 지켜보던 일행들도 모두 앨리어튼의 지

시로 인해 내려진 그물 망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잡힌 포로의 입장 치고 그들은 전혀 당황한 기색을 하거나 그물 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없었다. 이때 천막까지 그물 망이 걸쳐져 있었던 그곳에서 한 여자 나오는 것이 앨

리어튼의 눈에 띄었다.

"어? 이건 뭐야? 테리우스! 파라도! 두 사람 뭐하고 있는 거야.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아이린은 천막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갑하게 자신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 거대한

그물 망의 존재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안에서 다투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 질문했다.

곧이어 파라도의 변명과 고자질이 뒤섞인 하소연이 아이린에게 시작되었고 전후 사정을 들

은 아이린이 화가 난 눈초리로 테리우스를 바라보자, 녀석은 이내 그 눈길을 외면한 채 딴

청을 피웠다.

"쳇, 뭐든 내 탓이란 소리군. 그렇게 무섭게 쳐다 볼 필요까지나…."

말끝을 흐린 그가 한 손으로 가볍게 자신의 머리에 얹힌 그물 망을 제거해 버렸다. 두 사람

의 상황을 지켜보던 나머지 일행들도 너무나 쉽게 그들을 둘러싼 그물 망들을 자신들의 검

을 이용해 제거해버렸다.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도 아니고 이런 이 상한 게 떨어져 덮쳐 있는 상황에서 같은 일

행끼리 싸움을 하고 있다니 정말 한심해. 테리우스도 파라도도 둘 다 똑같아. 아니 그걸 지

켜보고 구경하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웃지마 벅스칼 너도 마찬가지야."

작고 여려 보이는 여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건장한 남자들이 꼼짝도 못한 채 꾸중을 듣고

있는 모습이 앨리어튼에게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아니 그보다 대체 저들은 어떤 자들이기에

마법의 힘을 불어넣은 황금가시 그물 망을 손쉽게 제거해 버릴 수 있는지 의아했다.

"대…대장."

"조용히 대기하고 있어라. 나도 지금 놀라서 잠시 생각을 해야겠으니까."

앨리어튼의 목소리에 작은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5화

  winterknight  Date : 2003/11/04  View : 945  Vote : 0


말괄량이프린세스 155화

젬모스에 들어선 낯선 이방인들은 앨리어튼의 명령에 의해 은신처로 끌려왔다. 그러나 결코 덫
에 걸린 포로라고 하기 힘든 일행들이었다.

"결국 이상한 곳에 끌려와 버렸어. 이게 다 저 성질 더러운 테리우스 탓이야."

파라도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테리우스의 신경을 살살 건들기 시작한다. 또 시작이다라는 표
정으로 아르테미와 아처가 팔짱을 낀 채로 바라봤다.

"어쭈, 햇병아리 주제에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한 번 정신차리게 패줘야 주제를 알겠냐."

"테리우스, 그만해."

"쳇, 감싸기는…."

아이린이 파라도를 감싸 돌자, 테리우스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저…지금 저희가 붙들려 있는 걸 다들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며 겁에 질려 있던 레오나르가 한마디하자, 곁에 있던 벅스칼이 별일 아
니라는 듯 그의 어깨를 토닥거린다.

"헤헤, 걱정마슈. 여기서 겁을 내는 건 당신 한 사람 뿐이니까."

"그럼 여기서 탈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염려하지 마라니까요."

장난스런 벅스칼의 목소리가 왠지 미덥지 않다는 듯 레오나르는 그를 흘끔 바라보다 이내 고개
를 숙여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대 마야의 후계자가 이런 곳에서 죽는구나 라는 심정으로 말이
다.

앨리어튼은 그의 부하 부크와 제레미 그리고 한스를 데리고 붙잡힌 이방인들을 가둔 움막으로
발걸음 했다. 그러나 왠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상대의 정체를 도통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
다.

웬만한 자들이라면 그들의 신분에 관한 정보를 알아 낼 수 있을 터인데 지금 그들에게 붙잡힌
이들의 신분은 베일에 쌓인 채 종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푸른 눈을 가진 여자의 모습에 누군가를 연상케 했던 탓에 적의를 가질 수 없었다.

'누군가 많이 닮았다…붙잡혀도 저리 당당할 수 있다니….'

무거운 도끼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부크가 움막의 문을 열어 제쳐 길을 열었다. 그러자 제레
미와 한스가 차례대로 들어섰다. 잠시 밖에서 주춤하던 앨리어튼이 들어 올 때쯤 그의 부하를
비롯해 그의 목에는 이미 낯선 이방인들의 칼들이 겨누고 있었다.

"정체가 뭐냐?"

엘리어튼이 물으려고 했던 질문을 아처가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방인들은 어느새 자신들을
묶고 있던 마법의 줄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제레미는 덩치 큰 남자의 칼에, 한스는 곱상하
게 생긴 긴 금발 머리카락 남자의 칼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연민을 느끼게 하는 여자의 옆에는 한 성질 해 보이는 남자가 으르렁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에 다소 떨어져 보이는 눈빛의 남자와 장난기 가득한 남
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건 내가 물어볼 질문인 줄 알았는데."

보통 녀석들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잡혀왔던 것이 의심스러웠던 앨
리어튼이었다.

'내가 혹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이 자들이 만약 우리들의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강대국들
이 보내온 첩자들이라면 이거야말로 낭패로구나!'

앨리어튼은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채 그의 목을 칼로 겨누
고 있는 남자에게 대답했다.

"칼에 의해 고통을 느껴야 내 질문에 답을 할 생각이냐! 다시 한번 묻겠다. 너희들 정체가 무엇
이 길래 우리들을 붙잡은 것이냐!"

"하하, 이미 알고 묻는 것 아니냐? 밖에 우리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순순히 너희들을 이곳에
서 내보낼 것 같으냐. 한 번 들어온 은신처에서 살아 나갈 순 없을 것이다."

앨리어튼의 대답에 아처가 잠시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들을 끌고 왔던 마차의 창문을 모두 가
렸던 것이 떠올랐다. 한 지역의 귀족들의 무리라고 보기엔 어려웠고 산적에 가까운 무리들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뭘 그렇게 어렵게 물어보고 그래 대장, 이 녀석들 한 번씩 패준 후에 불게 하면 될 것을 곱게
말로만 하니까 기고 만장 한 거라고."

파라도가 속이 불편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자, 딴청 피우고 있던 테리우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대상은 다르지만 패주고 싶은 심정은 나랑 같군 그래."

테리우스의 말에 파라도가 그를 흘깃 한 번 노려보다가 아이린의 눈빛과 마주치자, 이내 고개
를 돌려버렸다.

"두 사람 다 모두 그만해. 그리고 다들 칼을 그만 거둬."

아이린의 말에 세 흑기사들이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동시에 바라봤다. 여전히 칼을 겨누
고 있는 채로 말이다.

"어서 그 칼들을 그만 거두라니까."

"공주님!!!!"

아처와 아르테니 그리고 파라도가 동시에 그럴 수 없다는 어조로 아이린에 대답한다. 그러나
아이린의 표정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듯 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빨리 거둬.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거야?"

아처가 아이린의 눈빛을 마주하더니 마지못해 칼을 거두며 대답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지켜보던 아르테니도 한스의 목에서 천천히 칼을 거두었다.

"아니, 그렇지만…."

"파라도, 거둬라."

고집을 부리려던 파라도에게 아처가 한마디하자, 그 역시 칼을 거두었다.

앨리어튼은 세 명의 강한 남자들을 말 한마디에 제압해버리는 야무진 눈동자의 여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새삼 놀랬다. 한없이 여리고 약할 것 같은 여자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보다 여자의 말에 맥을 못 추고 명령을 듣는 남자들에게 더 놀
라웠다. 여섯 명의 남자들이 한 여자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가 이들을 이끌고 있는 책임자인가?"

앨리어튼의 말은 정중했지만 존대를 하지 않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상대를 내리는 태도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는 이곳을 지나가는 여행객일 뿐인데 왜 저희를 붙잡아 오셨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 이유를 알기 전에 서로 칼을 겨눠 피를 볼 생각이 없을 뿐이죠."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그녀의 말에 가시가 있음을 앨리어튼은 느낄 수 있었다.


^0^*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6화

  winterknight  Date : 2004/07/23  View : 315  Vote : 0

앞부분에 조금 삭제된 부분과 연재분을 덧붙여서 올립니다.
이제 시작이네요....약 3일에서 5일간 연재를 완결할 예정입니다. 그럼 즐독하세요...총총총
-은빛마녀 앤 겨울기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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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군. 가냘픈 여자가 이들의 대장이라도 되나봐? 크헐헐헐!!!!!"

목 언저리에 손을 얹고 불쾌하다는 듯 아르테니를 째려보며 한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는 사실 작은 체구의 여자가 정말 이들의 대장이라고 생각해서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들에게 당당한 남자들의 심기를 조금이라고 꺾어 자존심을 회복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장 앞이라 네 녀석 웃음을 참고 있는 줄 알아라. 어디 한번 더 웃어 보시지?"

아르테니가 한스의 목에서 거두었던 칼날을 그의 심장 쪽으로 향하면서 되물었다. 그러자

한스의 안면은 이내 새파랗게 질린 채로 자신이 말을 잘못 꺼냈다는 것에 뜨끔했다.

이에 테리우스는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아이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왠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앨리어튼의 시선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흠, 우린 보다시피 젬모스 지역으로 몰려온 도망자들의 신분이라고 할 수 있소. 다들 사랑

하는 가족과 정든 고향을 등지고 현상수배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지. 그러나 그건 강대국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불쌍한 이들이지. 다들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이오. 다만 젬모스 지

역에서 다시 제 2의 터전을 잡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것이오."

뜻밖에 앨리어튼은 그들의 상황을 아이린에게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이에 한스와 부크는 불

만이란 듯 표정에 심술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장! 이 녀석들이 만약 첩자라도 되면 어쩌려고 그런 걸 말합니까!"

심히 불쾌한 듯 투덜거리는 부크를 살핀 아이린이 다시 앨리어튼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서로 방법이 틀리게 만났을 뿐 적은 아닌 거 같네요. 저희는 첩자도 아니고

지금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고 있는 중이니까요."

"새로운 땅이라?"

앨리어튼이 흥미롭다는 듯이 아이린을 바라보며 묻는다. 야무지고 현명해 보이는 아이린의

태도에 그는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테리우스의 심기는 점점 불편해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저 능글맞은 놈이 누굴 보고 히죽히죽 미소를 짓고 있는 거야. 쉰은 넘어 보이는 노

친네가 노망이 들었나!'

괜히 애꿎은 땅에 발길질을 하며 화를 삭히고 있는 테리우스. 많은 이들이 있는 가운데서

질투하고 있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는 참고 있었으리라. 이 모습을 마냥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는 벅스칼의 얼굴에는 소리 없는 웃음꽃이 한창이었다.

아이린은 하얗고 고운 손을 앨리어튼에게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전 아이린 아카리나스라고 합니다. 지금 일행들과 함께 케르베노아 영토를 찾아가는 중이

에요. 제 친구가 되어 주시겠어요?"

"하하, 젊은 아가씨가 배짱 한 번 두둑하군. 맘에 들어!! 좋지!! 오늘은 새 친구를 맞이한 기

분으로 파티를 벌여야겠군."

테리우스는 물론이거니와 아처, 파라도, 아르테니, 레오나르 그리고 벅스칼까지 어안이 벙벙

한 순간이었다. 상대편인 한스와 부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대장들에 악수로 인해 마지못해 인상을 구겨가며 서로에게 어색한

인사를 해야했고 젬모스 지역에서는 오랜만에 밤새 파티가 벌어졌다.

술과 음식이 식탁위로 푸짐하게 올려졌고 악기사의 리듬에 맞춰 다들 장작불을 중심으로 춤

과 노래를 한껏 즐겼다.

앨리어튼은 사람들 사이로 웃음 지으며 어울리고 있는 아이린을 계속 바라봤다. 그리고 그

런 그의 모습을 뚫어져라 시기 어린 질투의 시선으로 테리우스가 바라보고 있었다.

*

젬모스 인들이 마련해 준 잠자리는 깨끗하고 단정한 곳이었다. 특히 아이린이 머무는 곳은

나무 위에 지어진 집으로 지금은 어두워 볼 수 없지만 밝은 날에 창 밖 풍경이 장관인 곳이

었다. 세 흑기사들은 그녀가 머무는 집을 기준으로 왼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레오나르와 벅

스칼 그리고 테리우스는 오른쪽 집에 자리했다. 앨리어튼이 정해 준 곳은 이곳에서 좋은 집에

해당하는 것들로 친구에 대한 예우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에 껄끄러워했던 세 흑기사들도 이곳 사람들과 밤새 어울리고 난 후에는 금새 이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벅스칼과 레오나르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사람 신혼 부부를 갈라놓은

것에 불만이 가득한 테리우스만 제외하고 말이다.

"테리우스, 파티도 끝났는데 피곤하지 않아? 그만 자야하지 않겠어."

말을 꺼낸 레오나르보다 벅스칼이 더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문 앞에 서 있는 테리우스를 바라본다.

혹 폭발해서 이 집을 날려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농담도 상대의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하는 것을 특히나 지금 테리우스의 기분이 엉망인 것을 안 벅스칼은 더 불안했다.

"쉿, 조용히 있어요. 레오나르."

"왜? 내가 뭘 잘못했나?"

두 사람이 소곤거리듯 말을 주고받는 동안 '쾅' 하는 문소리와 함께 테리우스는 나가버렸다.

"휴우, 간이 그냥 콩알만해졌네.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레오나르."

"내가? 왜? 테리우스가 왜 저런 거지?"

"그거야…흠, 관두죠. 말해 뭐하겠어요."

"화는 내가 내야하는데 참 모를 녀석이군."

레오나르가 피곤한 듯 이불과 베개를 정리해 잠잘 준비를 하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아직

도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남매가 아닌 연인으로 지금은 부부라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가 힘든 상태였다. 다만 그녀의 곁에 좀더 있고 싶은 마음에 이 여행에 동참한 것뿐이다.

*

앨리어튼은 괜히 입이 마르고 목이 탔다. 그는 아이린이 머물고 있는 숙소 앞에서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주먹을 쥐고 문에 노크를 하려다가도 다시 손을 거두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리려고 망설이는데 아이린이 문을 열고 그와 눈을 마주한

다. 조금 놀란 듯한 눈빛을 하며 그녀가 입을 연다.

"어, 무슨 일이세요? 앨리어튼씨."

"아…그게 저 잠시 지나가던 길에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어보려고…."

"아뇨. 아주 좋은데요.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아이린은 잠시 앨리어튼을 방으로 초대해야할 지 망설여졌다. 밤이 너무 깊은데다 테리우스

가 맘에 걸린 탓도 있었다. 그녀가 조금은 곤란한 표정을 짓자, 앨리어튼이 눈치를 채고 말

했다.

"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잠시 나와 줄 수 있겠소?"

"네, 그러세요."

밤하늘에 총총 빛나는 별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앨리어튼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린은 어디 출신인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물어봐도 되겠소?"

"저요? 음, 그건 좀 복잡한데…전 수양부모님 아래서 자랐거든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 친

부모님들께서는 집안 반대로 결혼에 어려움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아, 그랬군. 그럼 친 부모님들은 찾았나?"

"글쎄요. 찾았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어요. 제 뿌리가 어디인 줄 이젠 알고

있거든요. 지금 케르베노아 영토로 가는 이유도 그걸 바로 잡아가려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앨리어튼씨와 이야기하는 게 참 편한 기분이 들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앨리어튼은 자신을 응시하는 아이린의 머리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것은 남녀관계의 분

위기가 아닌 어른이 아이에게 칭찬하는 종류의 몸짓이었다.

"그래, 이곳에서 편히 쉬다 가도록 하렴. 뭐든 도와 줄 일이 있다면 말하고…날씨가 쌀쌀한

데 그만 들어가 쉬도록 하렴."

앨리어튼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아이린을 일으켜줬다.

"네, 앨리어튼씨. 참, 혹 이곳 분들 중에 아리스 왕국에 관련된 일들을 알 수 있을까요?"

"아리스 왕국? 그 망해버린 왕국의 일은 뭐하러?"

"제 아버지의 왕국이거든요."

"뭐!…."

순간 앨리어튼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그의 두 손이 어느 새 아이린의 팔을 꽉 쥔 채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누구의 왕국이라고?"

"앗, 아파요 앨리어튼씨…이 손부터 좀…."

아이린은 꽤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며 앨리어튼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때 무서운

얼굴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던 남자가 앨리어튼의 등뒤에서 돌연 나타나 그를 아이린

에게서 떼어 놈과 동시에 물씬 패기 시작한다.

퍽!!!!!

퍼벅!!!!!

퍼버벅!!!!!!!!

앨리어튼을 거의 반 시체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은 바로 테리우스였다. 아이린은 픽 쓰러져

기운을 못 차린 채 신음하는 앨리어튼를 바라보다 테리우스를 말렸다.

"테리우스!!! 이게 무슨 짓이야!!!! 죽일 셈이야!!!!"

"쳇, 구해줬더니 왜 내게 화를 내는 거야."

테리우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는 방금 전 질투에 불타던 자신을 다스리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날 구해주다니."

"이 능글맞은 녀석이 방금 널 덮치려고 했잖아."

"그게 아냐. 그냥 이야기 도중에…암튼 빨리 이리 와서 앨리어튼씨를 안으로 모셔. 상처가

너무 많아."

"쳇, 싫어. 이곳 사람들을 부르던지 해. 내가 미쳤냐! 내가 팬 녀석을 뭐 하러 도와 줘."

"너, 정말 말 안들을 꺼야?"

"죽어도 싫다 어쩔래."

아이린이 꽤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테리우스의 얼굴에 바짝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저 분 방으로 모시지 않으면 다신 너랑 키스도 하지 않을 테고 한 방도 같이 쓰는 일은 더

더구나 없을 꺼야. 좋아, 아래 아처랑 파라도랑 아르테니에게 부탁하면 돼."


4장 아버지와 딸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테리우스의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고 그의 시선은 어둠 그 자체였다.

덕분에 옆에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함께 날밤을 세어버린 벅스칼과 레오나르.

"……빌어먹을."

테리우스가 낮게 읊조리며 인상을 긋는다. 어젯밤 아이린은 결국 자신의 흑기사들을

불러들여 앨리어튼을 돌본 것이다. 그것도 그녀의 방에서 테리우스 자신을 밖으로 내보낸 채로.

"……그 망할 놈이 어디가 맘에 들어서 날 무시하고 내 앞에서…쳇, 빌어먹을…."

고개를 가로 저으며 어깨를 쭉 늘어뜨린 그를 이리저리 살피는 벅스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흠흠, 주인님 무슨 일로 그러세요?"

"……."

"아니, 무슨 일로 그렇게 저기압인지 말씀이나 좀 해보세요. 예??"

벅스칼은 좁은 방안에서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를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차라리 문밖으로 나가면 좀

나을 듯 싶겠지만 도통 문밖으로 나가려고만 하면 테리우스가 무서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기에 살벌해서

나갈 수도 없었다.

"정녕 이렇게 숨통을 조이실 거면 죽더라도 나가서 죽겠어요. 아시겠죠!"

"저도…."

벅스칼이 마지막 용기를 내듯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레오나르도 그
뒤를 조심스레 따른다.

그러자, 이글거리는 눈빛과 함께 살벌한 분위기를 만드는 저음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막아선다.

"죽고 싶으면 나가…."

그리고 곧바로 테리우스가 탁자에 주먹을 내리치자, 두 갈래로 쫙 갈라지는 모양새가 두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앙, 정말 죽겠네…아니, 어젯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애꿎은 제가…흡 알았어요. 조용히 있으면
되잖아요."

쫑알거리는 벅스칼의 모습이 마치 아이린이 자신에게 투덜거리는 모양새와 비슷해 보이자 다시금 테리우스
의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똑! 똑!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는 벅스칼에게 가뭄이 단비와도 같은 반가움과 고마움의 존재였다.

그러나 무겁디무거운 테리우스의 기분을 의식한 덕에 차마 그 노크에 입을 열 수는 없었다.

똑! 똑!

똑! 똑! 똑!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재차 확인하는 듯한 노크 소리.

테리우스가 인상을 그으며 벅스칼에게 눈짓을 한다. 열고 싶으면 열어 라는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하아, 누구세요."

벅스칼이 대답과 동시에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어, 안에 있었으면서 왜 조용히 있었던 거야?"

그녀다.

그녀가 뻔뻔스럽게도 내 앞에 나타나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와 있다. 어젯밤 늙고 못
생기고 멍청해 보이는 녀석 하나 때문에 내게 등진 채로 내 기분을 낭떠러지 끝에 떨어뜨린 장본인.

화가 난다. 미칠 것처럼 화가 난다.

내가 화가 나는 것은 미칠 듯이 질주하는 내 질투심에 어이가 없어 화가 난다.

내 감정을 송두리째 저 여자에게 맡겨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존심이 상해서 화가 난다. 그런데 뻔뻔스
럽게 다가오며 미소짓고 있다니 그 미소에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내게 화가 난다. 제기랄! 결혼을 해도 그녀
가 내 것이 아닌 기분은 언제나 불안하다.

테리우스는 마치 머릿속에 어제 자신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그를 향해 다가오는 아이린을 보면서 인상을 그
었다.

"잘 잤어. 테리우스?"

뻔뻔스럽게 아침인사를 하는 그녀.

테리우스는 자신 앞에서 생글거리는 아이린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쳇, 네 눈에는 내 얼굴이 잘 잔 사람처럼 보이냐?"

테리우스의 볼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린이 그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응."

"뭐?"

어이없는 그녀의 대답에 되묻는 테리우스.

그러나 역시 미소지으며 느긋하게 대답하는 아이린.

"잘 잔 것처럼 보이냐고 물어서 대답했잖아. 왜?"

"참나, 됐다. 그만 나가라 피곤해."

"아침 안 먹을 거야? 아침 먹고 할 일이 있을 텐데."

아이린은 테리우스의 심술궂은 모습이 퍽 재미있었지만, 애써 웃음을 참아내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알아차린 듯 테리우스가 왼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한숨을 내쉰다.

"흐음, 대체 무슨 꿍꿍이냐? 내가 지금쯤 기분이 나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뻔히 한숨도 못 잔 얼굴이
란 걸 알면서 무슨 속셈이야? 그리고 할 일이라니?"

아이린이 살며시 테리우스에게 다가와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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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은빛마녀...겨울기사...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연재가 시작되었어요.......................공지를 올린 후에도 계속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버려서............테리우스와 아이린을 잊어버린 리플님들이 많겠죠...ㅜ.ㅜ

그래도 이야기는 마무리를 지어야겠지요...^^* 완결을 앞두고 너무 오랜동안 잠수를 해서 죄송해요.

그럼 완결편 이야기가 다시 시작됩니다......................^^*..총총총

-은빛마녀...겨울기사 올림.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7화

  winterknight  Date : 2004/07/24  View : 281  Vote : 0


"아침 먹기 전에 어르신께 사과를 해야지? 남편."

테리우스가 자신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지만 아이린은 이에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몸
을 돌려 벅스칼과 레오나르에게 말을 건넸다.

"벅스칼, 그리고 레오나르님 빨리 준비하고 나오세요. 다들 아침 식사를 하려고 준비중인데 함께 해야죠.
참, 테리우스 내 말 잊지마 알겠지?"

아이린의 이야기에 테리우스는 무표정한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에 테리우스의 눈치만 살피던 벅스칼과 레오나르는 아이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예!!!"

"예!!!"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대답하는 벅스칼과 레오나르.

그러나 너무 빨리 나가버린 아이린의 행보에 다시금 벅스칼과 레오나르는 한참동안 방안에서 음침하고 어둠
으로 가득 찬 분위기에 젖어 있어야만 했다.

'어휴, 아이린 주인님도 참 같이 데려가시지 그렇게 혼자 빨리 나가시면 테리우스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우
잉 못 살아.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 정말.'

벅스칼이 레오나르에게 손짓을 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던 찰나였다.

테리우스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간다. 이에 괜스
레 벅스칼과 레오나르만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기분만 들었다.

"아!!!! 이게 대체 뭐냐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지고 있잖아!!!! 주인님들 두 분다 정말 나빠요!!!!"

씩씩거리는 벅스칼이 조금은 안됐다는 듯이 레오나르가 그에 등을 다독거렸다. 그러자 벅스칼은 괜히 더 초
라한 기분만 들어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누가 당신더러 위로해 달랬어요!! 하지마요!!"

"그래도 좀 안타까워서 하하!!"

레오나르가 멋쩍은 듯 웃으면서 여전히 벅스칼의 등을 다독였다. 그의 흥분이 가라앉았으면 하는 바램이었
지만 그와 반대로 벅스칼의 혈압만 올라갈 뿐이었다.

"아니 그만 두라니까!!!!! 어휴 참나!!!!"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나간 줄 알았던 테리우스와 눈이 마주친 벅스칼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흡!!! 아니 나가셨잖아요."

"…그래서? 불만이냐?"

"아뇨,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테리우스는 대답과 동시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의 레드문을 집어들고 나가면서 벅스칼을 한번 째려
본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세요. 주인님."

"내 맘이지. 멍청한 녀석…."

테리우스는 툭하니 한마디 내뱉고는 그대로 나가버렸고 그의 말에 벅스칼은 웬만해서는 붉어질 수 없는 구
릿빛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레오나르가 멈추었던 손짓을 그의 등에 대고 또 다시 다독이고 있었다.

"힘들어도 참아요 벅스칼."

레오나르의 왠지 기분 나쁜 위로에 벅스칼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를 째려보더니 갑자기 입 꼬리가 휘어
지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내 기분이 어떤지 너도 한 번 온 몸으로 느껴보는 건 어떠냐?"

벅스칼과 레오나르 그리고 테리우스가 머물렀던 방안에서 그후 한참을 한 남자의 비명소리가 맴돌았지만,
문 밖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아이린은 막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앨리어튼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에는 이미 충성스런 부하 부크와 제레미
그리고 한스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무리 서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부크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상태였다.

"몸은 좀 괜찮나요? 어젯밤 정말 죄송했어요. 테리우스가 갑자기 그렇게 행동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 아닐세…젊은 혈기에 그럴 수도 있지. 괜찮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젊은 혈기라는 앨리어튼의 말에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했다. 테리우스의 모습이야 젊겠지만
그가 존재했던 시간을 본다면 앨리어튼 보다 훨씬 더 나이든 위치라는 것을.

'아무래도 테리우스가 사과를 하지 않고서는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그 녀석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거야. 흠,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 걸까?'

옆에 서 있던 제레미가 조금 불쾌하다는 듯이 아이린에게 한마디한다.

"두목이 말리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이곳에서 내쫓겨났어! 알기나 하고 행동한 건가! 당신이 대장이라고 알
고 있는데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이렇게…."

"그만 하게."

제레미가 점점 흥분하듯 말을 하기 시작하자, 앨리어튼이 그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테리우스를 대신해서 사과 드리겠습니다."

아이린의 말에 앨리어튼이 세 부하들을 살피더니 대답한다.

"이건 아이린이 사과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 그래. 개인적으로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만, 이미 사람들에게 소
문이 퍼진 듯 하고 내 부하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 친구가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이 일이 조용히 넘어갈
듯 싶은데 어떻소?"

그냥 넘어가려 했던 앨리어튼이 결국 다수 의견으로 인해 그대로 넘어갔다가는 아이린을 포함한 그녀의 일
행이 이곳에서 쫓겨날 것 같다는 판단을 하고 의견을 말했다.

두목의 배려 섞인 제안에 아주 조금은 못마땅한 세 부하들도 어느 정도는 수긍을 하는 표정으로 고개들을 끄
덕이며 아이린을 바라봤다.

"네."

아이린은 짧게 대답하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 테리우스에게 이미 사과를 하라고 말했지만 그의 성격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 녀석이라면 사과를 하지 않을텐데….'

테리우스의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이해를 구하기 위해 들어왔지만 더 이야기를 언급한다는 것
은 상대에게 변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참, 숙녀 분의 방을 내가 너무 오래 머물고 있었군. 몸도 어느 정도 괜찮은 듯 하니 부하들과 그만 내 숙소
로 옮겨야겠소. 어젯밤 간호는 정말 감사히 생각하오."

"아닙니다. 마땅히 그랬어야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 그 말은 아이린에게 들을 말이 아니라니까. 자, 자네들 그만 날 부축해서 여기를 나가세."


^^*

그래두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셔서 너무 고마워요......그럼 계속해서 만나요....총총총

-은빛마녀올림...^^*

완결은 177화에서 엔딩이 됩니다................^^*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8화

  winterknight  Date : 2004/07/29  View : 442  Vote : 0

앨리어튼은 아이린에게 가볍게 예의를 표한 후, 그의 부하들과 함께 그녀의 방에서 나갔다. 아이린은 혼자
남은 방에서 조금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테리우스가 앨리어튼에게 사과를 하는 기적
이 일어날지 그녀로서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탁! 탁! 탁탁탁탁!!!!!!

문에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는 소리에 아이린은 화들짝 놀란다. 곧이어 문을 열면서
소리를 낸 장본인을 대면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짐작했던 대로 테리우스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레드문을 쥐고 문턱에 서 있었다.

"지금 그걸로 문을 두드린 거야?"

"글쎄."

아이린이 코끝에 힘을 주며 다시 되묻는다.

"레드문으로 두드린 거 맞으면서 왜 시치미를 떼?"

"흠."

점점 짧아지는 성의 없는 테리우스의 대답이 슬슬 아이린의 기분에 활을 쥐게 했다. 자칫하면 그 활시위로
화살을 장착해 쏘아버릴 기세로 테리우스에게 말을 건넨다.

"내가 보기에 사과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싸움이라도 하겠다고 오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를 어쩌
나? 어르신은 그만 돌아가셨는데……테리우스! 정말 그럴 거야!!"

"응."

대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남자다. 무서울 정도로 침착할 때도 있고 위엄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처럼 이렇게 철없는 어린애처럼 심술에 쌓인 듯한 모습은 정말이지
대책이 없으니 말이다.

"휴우,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제발 어르신께 사과하면 안되겠어?"

"쳇, 약 먹었냐?"

"테리우스!"

"싫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싫은 건 싫은 거다. 내가 왜 그 능구렁이 같은 놈한테 사과를 해! 그것보다 너!"

테리우스가 이야기하면서 서서히 아이린에게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리켰다.

꿀꺽!

아이린의 침이 넘어가는 소리는 아마도 그녀가 순간적으로 긴장을 했던 탓이리라.

"……왜? 핫, 테리우스 인상은 왜 쓰고 그래…괜히 무섭잖아."

"흠, 역시 멀었어 멀어."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낮게 중얼거린다.

"뭐가 멀었다는 거야."

"남편을 이렇게 거지 취급하는 걸 보면 결혼이란 흠…."

"엉?"

테리우스는 갑자기 레드문을 명치와 무릎사이로 껴안은 듯한 자세로 앉으면서 마루 바닥에 손가락으로 긁적
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린은 잠시동안 그가 정말 약을 먹어서 정신이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만큼 지금 아이린 앞에서 있는 테리우스의 행동은 뭔가 불규칙하고 정신없는 모습
들이었다.

문 밖에서 두 사람의 행동을 주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던 벅스칼이 테리우스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뭐야, 테리우스님이 드디어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신 게 분명해. 궁시렁 거리는 모습이라니 휴우, 괜한 불
똥 튀기 전에 몸 사리는 것이 좋겠군."

"읍, 그것보다 약을 좀 발라야할 것 같은데요."

실컷 두들겨 맞아 얼굴 이곳 저곳이 멍이 든 레오나르가 벅스칼의 옆에서 힘없이 서 있는 채로 말했다. 그가
서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자세는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으니 이에 벅스칼이 한심하다는 듯
대답했다.

"어이구, 내가 이 녀석을 왜 데려왔을까? 무늬만 왕자 아냐? 자, 업혀라."

"하, 고마워요."

"으이구, 내가 못살아."

밖에서 인기척이 났지만 아이린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서 대책 없는 남자에게 신경을 쓰는
것만으로 벅찼으니까.

"테리우스!"

"……."

주저앉아 바닥이 꺼져 라고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야말로 아이린의 음성을 아니
존재 자체를 싹 무시하고 있는 태도였으니.

아이린이 다시 한번 테리우스를 향해 힘주어 불렀다.

"테리우스!"

"……."

이번에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눈을 잠시 응시하더니 문 쪽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어딜 가는 거야. 잠깐, 안돼 이대로 어딜 가면 날 더러 어쩌라고?"

아이린이 테리우스의 앞을 막아서며 약이 바짝 오른 듯한 표정을 하며 볼을 씰룩거렸다.

"비켜."

"싫어."

"쳇, 그런다고 내가 못 가냐? 밀면 나가떨어질 거면서 어서 비켜."

"뭐, 밀어버린다고? 싫어, 그래도 못 비켜. 화가 났으면 이야기를 해야지 이런 식으로 나가면 날더러 어쩌라
고 그래."

차라리 그가 발을 동동거리고 소리를 발악 지르며 그녀에게 화를 낸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동
요도 없이 화도 내지 않은 채로 침착해 보인 그가 레드문을 손에 쥐고 이 방을 나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
은 불길함을 그녀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절대로 그냥은 나갈 수 없다는 듯한 절연함이 묻어 있는 아이린의 얼굴 그러나 조금만 건들면 금새 눈물을
펑펑 쏟아버릴 것 같은 연약함도 엿보였으니.

테리우스는 잠시 동작을 멈춘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독하게 열정적인 질투의 화염에 뒤덮인 그는 오
히려 차가운 얼음 성처럼 차분했다. 그러나 이 방을 나가면 곧바로 앨리어튼이라는 작자를 잡아 목을 벨 지
도 모를 살기가 그의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왜 화가 나 있는지 그 이유를 그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단순히 질투라고 하기에는 너무 묘하
고 이상한 기분이 그를 화나게 하고 있었다.

"테리우스, 어젯밤 일로 화가 난 거야? 그냥 이곳의 수장이신 분이 나와 이야기를 하려고 들리셨던 것 뿐이
야.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이야?"

"날 더러 그 능구렁이 작자에게 사과를 하라며?"

테리우스가 드디어 그녀와의 대화에 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는 안심과 동시에 기뻤다.

"그래, 어제 너로 인해서 다쳤으니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래도 일단 사람을 다치게 했으니까 사
과를 하라는 말이었어. 그런데 왜 때린 거야?"

천진한 얼굴을 하며 정말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바라보는 아
이린의 모습에 테리우스는 기가 막힌 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 너 때문이잖아!!! 쳇, 그걸 꼭 내가 말해야 넌 알겠냐!! 그 능구렁이 같은 놈이 네 팔을 붙잡고 있었으니
까 당연한 거 아냐!! 그런 녀석 조금 혼내줬다고 오히려 내게 화를 내는 넌!"

"내가 언제 화를 냈어? 사과하라고 한 거지."

대세는 다시금 아이린에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테리우스는 점점 더 그녀의 대화에 휘말려가면서 이게 아
닌데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나오는 말들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국 아이린이 그의 화가 난 이야기를 모두 들어 준 후에 결론을 냈으니.

"어쨌든 이제 그 분께 사과할 거지?"

"야, 너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어디로 들은 거야!!"

"사과할 거지 테리우스"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바라본다.

꽁꽁 얼린 얼음산도 녹아버릴 것 같은 그녀의 따뜻한 미소에 그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바보
가 되어버린다. 아! 이게 아닌데.

"그럼 지금 가자 테리우스."

"아니, 잠깐 같이 가자고?"

"응, 같이 가서 사과도 드리고 앞으로 이곳 사람들과 어떻게 지낼지 어떤 도움을 받게 될 지에 대해서도 상의
를 해야지. 케르베노아 영토로 가려면 이곳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잖아."

그녀가 싱긋 웃더니 문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테리우스가 뒷목덜미를 매만지며 중
얼거렸다.

"쳇, 결국 아이린 뜻대로 된 거잖아. 대체 내가 왜 저 녀석에게 반한 거지? 읔, 잠시동안이지만 형님 아우 하
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테리우스, 빨리 안 오고 뭐해?"

"가잖아."

아이린의 발걸음을 곧바로 따라잡으며 테리우스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잔뜩 구겨
진 인상으로 말이다.

*

세 명의 흑기사들과 벅스칼, 레오나르는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의외로 벅스칼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
는 반면 얼굴이 말이 아닐 정도로 상처투성이가 된 레오나르는 쉴새 없이 떠들었으니.

"하하, 그러니까 아이린님께서 테리우스님을 혼내시는데 그 무거운 분위기가 정말 숨이 막힐 듯 했답니다.
역시 그녀는 아름답고 강하신 분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뭐,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도 그랬었지만 말
입니다……."

계속 떠들어대고 있는 레오나르의 이야기에 어느 누구도 대꾸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레오나르 역시 자신 혼
자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린을 떠올리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별로 상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들 대꾸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각자 머릿속에 아이린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0^*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다들 더위도 조심하시고 감기모기 조심하시고 냉방병도 조심하세요....총총총
제가 잠시동안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답니다...다신 혼자 안갈래요..ㅜ.ㅜ...^^*
나름대로 많이 반성하고 많이 고민했던 시간이었습니다...산속숙소의 산내음도 좋았구요...
그럼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되세요...총총총........................................겨울기사올림.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59화 (4장)

  winterknight  Date : 2004/08/30  View : 202  Vote : 0


*
앨리어튼의 숙소에서 패닌은 식사를 준비하면서도 궁시렁거리듯 투덜거렸다. 그 이유인즉 이방인에게 맞은
앨리어튼의 모습에서 화가 났기 때문이다.

멜리사. 그녀는 옛 주인을 대신해서 그녀의 딸과 함께 앨리어튼의 곁에서 그의 시중을 들고 있지만 어느 새
젬모스의 터줏대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뚱뚱하다고 싶을 정도의 풍채를 지녔지만 나이 든 그녀의 얼굴은 통통하고 약간의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녀
가 탁자 위에 수프를 담은 항아리를 옮기면서 다시금 앨리어튼을 못마땅한 얼굴로 너무나 노골적으로 시선
을 보내자, 곁에 있던 그녀의 딸 제이닝이 만류했다.


"어머니, 이제 그만 하세요. 앨리어튼님이 식사도 못하시겠어요."

평범한 외모에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올린 제이닝은 어딘지 모르게 강인한 여전사의 면모를 갖춘 이미

지를 풍겼다. 그녀는 집안 일을 하는 여자의 모습보다는 남자들과 어울려 사냥을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 했

다. 앨리어튼 보다 7년 어린 그녀였다.

"쯧쯧, 젬모스의 수장의 얼굴이 저 꼴이 뭐냔 말이지. 마치 이 늙은 유모를 약올리려고 일부러 저렇게 맞고
온 것 같단 말이다. 제이닝, 너도 눈이 있으면 저 얼굴을 보고 화가 안 나겠니? 휴, 내가 너무 오래 산 게야.
어떤 놈이 우리들의 수장 얼굴을 저렇게 만들었냐 말이지."

계속되는 멜리사의 잔소리가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흔쾌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앨리어튼이 한 손을
그의 이마에 올려 가리며 눈치를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침묵을 유지한 채로 늙은 유모가 주는 수프를 입안에
넣어 맛을 봤다.

"푸웃, 어머니 그만 쳐다보세요. 그러다가 앨리어튼님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겠어요."

"어이구, 내가 그 놈이 어떤 놈인지 내 앞에 나타나면 그 면상을 가만 두지 않을 테니 말리지 마세요."

속이 상한 마음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멜리사는 다음 음식을 하기 위해 식탁에서 벗어났다. 멜리사의 시
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앨리어튼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제이닝에게 말을 건넸다.

"내 얼굴이 그렇게 망가졌니 제이닝?"

그의 물음에 잠시 시선을 마주하더니 제이닝이 미소지으며 이내 대답한다.

"네, 아주 조금 그래도 너무 신경 쓰실 정도로 얼굴이 망가진 건 아니에요."

"하아, 망가졌다는 표현까지 쓰다니 정말 심하나보네. 유머의 잔소리를 한동안 들어야겠군 그래."

"아마도 그래야 될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일원들이 공개적으로 그 이방인의 사과가 없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던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제이닝이 궁금했던 것을 이내 참지 못하고 앨리어튼에게 물었다.

"글쎄."

"이미 결정을 내리신 건 아닌가요? 그들이 만약 위험한 첩자라면 문제는 심각할 테고."

"하하, 제이닝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될 일행들이니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경계하지 않아도 될 일행이라뇨?"

"글쎄, 수프가 참 맛있군."

앨리어튼은 더 이상 이방인들에 관해 제이닝에게 언급하지 않겠다는 듯 조용히 식사를 진행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조금은 슬픈 눈빛을 잠시 보내다가 제이닝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아마 앨리어튼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그분뿐이겠지….'

*

멜리사는 당분간 앨리어튼의 얼굴을 안보는 것이 자신의 심장에 좋을 거란 생각이 들어 다음 음식을 하인에
게 시켜 보냈다. 잠시 산책을 하고 싶은 생각에 울타리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던 그녀는 잠시 후 마주 오고
있던 두 사람에 의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여자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기염을 토할 정도로 정신착란이 넘어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번개라도
맞은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은 경직되어 보였고 이에 놀란 것은 오히려 상대방들이었다.

"아주머니,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건가요?"

몸의 중심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갸우뚱거리는 멜리사를 일으켜 붙잡으며 아이린이 물었다.

"아,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멜리사의 창백한 안색이 마음에 걸린 아이린이 재차 물었다. 그러자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테리우스가 심드
렁한 말투로 입을 연다.

"쳇, 괜찮다는데 뭘 그렇게 걱정 하냐? 그만 가자."

'저 녀석이! 아, 걱정이야.'

차갑기 그지없는 테리우스의 태도에 아이린은 걱정이 들었다. 이 태도가 곧이어 앨리어튼에게 사과할 순간
에도 이어질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린은 잠시 테리우스에게 못마땅한 눈빛을 보낸 후 다시금 멜리사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아주머니 가까운 숙소에라도 모셔다 드릴까요?"

"아니오. 이제 정말 괜찮아요. 고마워요 아가씨."

"그러시면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아, 잠깐만 헌데 처음 보는 얼굴들인 것 같은데?"

잠시 현기증을 맞이했던 멜리사가 낯선 이방인들에 존재를 뒤늦게 깨닫고 물었다.

누군가를 연상하게 하는 금발의 푸른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숙녀와 다소 거만스럽지만 시원스럽게 잘 생
기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청년은 젬모스 지역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이린의 손목을 꽉 쥔 채로 멜리사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저희는 이곳을 지나가던 나그네 일행들입니다. 지금 앨리어튼님을 만나 뵈려고 가는 길이고요."

"앨리어튼님을?"

"네, 저희 일행의 일원이 잘못을 해서 사과를 하려고 가는 길이에요."

"설마 아가씨가 앨리어튼님을?"

"아, 그런 건 아니고 그게 저……."

아이린이 말을 못하고 잠시 망설이자, 멜리사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테리우스에게 옮겨졌고 뭔가를 알았다
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다시 한번 테리우스를 꼼꼼히 살피더니 그녀의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
작했다.

"오라, 네 녀석이구나!! 감히 앨리어튼님의 얼굴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녀석이!!!! 무릎을 꿇고 빌어도 시원찮
을 판에 이제서야 나타나서 사과를 한다고!!!! 너 이 놈!!!! 못된 놈 같으니라고!!!!"

멜리사의 폭탄 같은 호통에 테리우스는 그야말로 어이가 뺨을 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그녀가 테리우스를 향해 온갖 험한 욕설을 퍼붓고 있다가 뭔가를 깨달았는지 말을 멈춘다. 아이린은
멜리사의 말이 격해질 수록 자신의 손목이 아팠지만 눈물을 머금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죄를 잠시
나누고 있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꽤나 시끄러운 할망구로군."

"뭐라!!! 이 싹퉁머리 없는 놈 말하는 거 하고는!!!"

"흠, 누구 입이 더 거칠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걸 보니 치매로군."

테리우스도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이곳 젬모스의 있는 자들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찾
아 볼 수가 없었다.

"그만!!!"

조용히 있던 아이린이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려 팔을 옆으로 획하고 펼치며 두 사람을 말렸다. 이에 멜리사가
뒤로 주춤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사나운 고양이처럼 테리우스를 째려보고 있었다.

"아주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이 사람도 욱하는 마음에 그런 거예요. 제가 대신 사과 드릴 테니 노여움을 푸세
요."

아이린의 정중한 사과에 멜리사가 다소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 했다. 이에 못마땅한 듯 테리우스가 핀잔 어
린 말을 한마디 내뱉는다.

"쳇, 웃기지도 않는군."

"테리우스, 제발…."

아이린이 그에게 부탁하듯 명령했다. 그러자 그가 멈추었고 그 모습에 멜리사는 다소 의아했다.

'호오, 저 싸가지 없는 녀석이 의외로 여자에게는 약하나보구먼.'

아이린 다시 한번 멜리사에게 사과를 한 후에 테리우스와 함께 그녀를 뒤로 한 채 앨리어튼의 숙소로 향했
다.

*

앨리어튼은 식사를 마친 후, 제이닝과 함께 손님을 맞이했다. 아이린과 테리우스의 방문은 멜리사로 하여금
이미 부락 전체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앨리어튼의 숙소 앞에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조용히 이방인들의 태도를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앨리어튼님, 약속대로 테리우스가 사과를 하기 위해 이렇게 방문했습니다. 테리우스?"

아이린이 우두커니 서 있는 테리우스를 부른다. 그의 표정은 차갑고 어두웠다.

정말 미칠 노릇이다.

미쳤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지금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고작 작은 부락의 도둑들 무리의 두목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라는 것은 자존심 상한 일이다. 테리우스
는 아이린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쉽게 그것을 행하기가 어려웠다.

세 명의 흑기사들도 이 흥미 있는 장면을 사람들 사이에 묻혀서 관람 중이었다.

"이봐, 정말 테리우스가 고개 숙여 사과를 할까? 아니지, 어쩌면 무릎을 꿇어야할지도 몰라 그렇지?"

파라도가 다소 흥분한 듯 그의 눈을 크게 뜨고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몸을 움직여가며 중얼거렸다.

"흠, 무릎을 꿇는 건 불가능하고 본다 난…거기까지는 요구하지 않겠지 설마, 그렇지 아처?"

"모르지."

그들 사이를 비집고 헤어나가 앨리어튼의 숙소로 들어선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제레미였다.

사과를 받으려고 자리에 앉아 있는 앨리어튼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과를 하라고 말하는 아이린 그리고 아
직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는 테리우스.

그들의 적막을 깨뜨려 준 것은 제레미의 등장이었고 이어 그의 말 한마디는 큰 파장을 일으켰으니 바로 "우
리 부락을 무시하지 않고 정말 사과를 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무릎을 꿇는 성의는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목, 우리들 일원은 이방인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만 용서한다고 합의했습니다." 이에 가장 놀란 것은
아이린의 마음이었다.

아이린이 앨리어튼을 바라보며 고갯짓을 했지만 앨리어튼은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레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네만 이미 부락의 사람들도 모두 보고 있으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네."

테리우스는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고 여기 모인 사람들을 모두 밟아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스쳐가
기 시작했다. 그의 무표정한 모습에 눈동자가 조금씩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자, 아이린이 그에게 다가가 속삭
였다.

"테리우스, 안돼. 절대 여기서 화를 내거나 소란을 피우면 안돼 그럼 네가 지는 거야 알았지?"

"뭐? 이봐, 나 좀 잠깐 보자고."

테리우스가 아이린으 손목을 잡아채더니 앨리어튼을 향해 한마디하고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방을 향했
다.

"잠시 실례."

두 사람이 갑작스레 사라지자, 긴장했던 거실의 분위기는 조금 완화된 듯 싶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언제 다
시 나타날지 모르는 두 사람이 어서 모습을 드러내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연극을 보는 듯이 그들
에게는 재미를 주고 있는 하나의 즐거움이자 긴장감들이었으리라.

"테리우스 왜 그래?"

"뭐, 너 지금 나더러 저 영감탱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그 말이냐? 차라리 날더러 이곳을 초토화 시켜버리라
고 하면 그게 더 쉽겠다. 내가 미쳤어? 내가 왜? 제기랄!!!! 난 저 영감탱이에게 무릎 따위는 꿇지 않을 거
다!! 절대로!!"

"괜찮다고 한다면 그까짓 무릎 내가 꿇겠어. 그런데 난 안 된다고 하잖아."

아이린도 그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아니면 이 지
역으로 통과하는 것을 포기해야할 테고 그럼 케르베노아 영토로 다다르기 전에 아리스왕국을 재건하는 것
에 어려움이 많이 따를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테리우스를 희생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벌써 그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제국을 버렸다. 그런데 다시 그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것은 또 다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 방법 밖에는 이곳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이린
은 목에 걸리는 뜨거운 감정을 삼켜내며 그에게 힘겹게 입을 열었다.

"테리우스, 날 위해서 무릎을 꿇어 줘."

아이린의 말 한마디.

그녀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꺾이게 될 지 알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말
았고 더 이상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말 한마디를 꺼낸 후에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졌다. 눈가에
눈물이 글썽여 넘치려하지만 그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휴, 너란 아이 정말 너 밖에 모르는구나.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나보구나. 너에게는 그 아리스 왕국을 재건
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상관없는 거겠지. 젠장!!!"

테리우스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쉽게 삼키질 못하고 벽에 주먹을 박으며 잠시 후, 말없이 거실로 발걸음을 옮
겼다.

아이린은 차마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니,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방금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이 아팠고 그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갑자기 테리우
스의 뒷모습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고 그와의 거리가 굉장히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아이린 너 지금 뭘 한 거니? 아냐, 이건 아닌 것 같아. 테리우스!'

무언가 다시 결심을 한 듯 아이린이 떨리는 발걸음을 옮겨가며 이제는 그가 보이지 않는 길로 따라나섰다.
그러나 그녀의 늦은 발걸음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테리우스가 앨리어튼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사
과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부락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했고 우쭐해했으며 그녀의 일행들은 다소 의외의 결과에 다들 어안
이 벙벙한 상태였다.

"부락을 대표해서 그대를 용서하겠네. 당신들의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도움을 줄 것을 약속하겠
네."

앨리어튼이 테리우스의 왼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마치자, 테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뒤늦게 온 아이린을 향해 시선을 응시하더니 그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를 헤쳐가며 그곳을 떠났다.

"테리우스!!!!!"

아이린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론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에 앨리어튼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란히 서서 말을 건넨다.

"젊은 혈기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거네. 아이린 자네가 가서 위로를 하는 것이 좋
을 듯 싶군."

"네."

아이린의 목소리가 너무 힘없이 흘러나왔다. 그때 멜리사가 들어와서 그녀를 보고 다시 한번 앨리어튼을 바
라보더니 뭔가 확신하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히 라고 하기에는 이 아가씨의 모습이 너무나도…."

앨리어튼이 뭔가를 눈치챈 듯이 재빨리 멜리사의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멜리사 잠깐…."

"아니에요. 분명 클레오님의 우리 클레오님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어요. 앨리어튼님 모르시겠어요. 이것은 신
의 계시에요. 분명 클레오님의 딸이 분명해요."

갑작스런 멜리사의 실언에 아이린은 혼란스러웠다. 테리우스에 대한 마음이 진정되기도 전에 지금 그녀 앞
에서 늙은 아주머니가 뭐라고 하시는지 귀가 윙윙거린다.

그녀가 어지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자, 창문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처와 아르테니 그리고 파라도
가 재빨리 들어섰다.

앨리어튼이 아이린을 부축하려고 들자, 아처가 막아서며 자신이 안아 들었다.

"저희 공주님은 저희가 지킬 테니 너무 깊은 간섭을 하지 말아 주시지요. 그럼 이만."

흑기사 일행들은 다소 불편한 심기를 앨리어튼에게 말없이 내보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

한달동안 병원에 있었습니다.
갑작스레 부모님의 건강으로 인해서입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워 아무런 경황이 없었습니다.
새삼 가족의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은 한달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회복하셔서 건강을 되찾아가게 되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도 언제나 건강한 매일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겨울기사 올림....^^*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60화

  winterknight  Date : 2004/09/01  View : 172  Vote : 0


5장 엘프족과 드워프족 그리고 아리스인

메틴 왕은 만족했다. 그의 아들 세바스찬의 업적에 대해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칸 장군은 세바스찬 왕자 옆에 서서 아리스샘터를 장악했음을 메틴 왕에게 보고하고 있었고 성안은 승리의
기쁨으로 환해있었다.

"하하하, 이제 됐다. 그 고약한 테리우스를 데본 제국에서 쫓아냈고 아리스샘터를 장악함으로 인해 이제 데
본 제국의 실권은 우리 가이루덴 왕국의 차지가 되었구나!!! 움화화홧!!!!!"

"축하드립니다. 전하!"

칸 장군은 부복을 하며 자신의 왕에게 축하를 표했다. 모두들 기뻐하고 있는 와중에도 세바스찬과 그의 사
촌 일라이저는 그리 만족해하는 표정이 아니었으니.

"정말 촌스러워서 못 봐주겠어."

일라이저가 작은 부채 너머로 세바스찬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아이린 곁에 테리우스가 동반하고 있음이 마
음에 걸렸고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조용히 해."

세바스찬이 그녀의 목소리를 낮추라고 주의를 줬지만 그녀의 표정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그녀가
더 큰 목소리로 사람들의 흥을 망치기 전에 그는 그녀의 손목을 이끌고 밖으로 빠져 나와야만 했다.

"무슨 짓이야, 세바스찬."

"목소리가 큰 것은 상관없지만 너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는 것은 나중에 후회하게 될텐데 그래도 괜
찮다면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가던지."

차분한 세바스찬의 목소리에 일라이저도 흥분했던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는지 그녀의 사촌의 요구에 순응했
다.

"흥, 오라버니 역시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인 것은 나와 같은데 뭘 그래?"

"글쎄, 너와는 다르지."

"뭐가 다르다는 거죠?"

일라이저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는 약이 바싹 올라 있었다. 그녀에게 이제는 권력을 쥐고 있
는 제국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테리우스!

그 남자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런 데본 제국 따위는 빈 껍데기에 불과했으니.

그녀는 지금 뒤늦어 버린 지독하디 지독한 사랑의 늪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난 적어도 적에게 얻어내야 할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취하고 있지만 넌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신의 감정조
차도 자제할 줄 모르고 있으니 이미 진 거나 다름없지 안 그런가?"

"그게 무슨 소리죠?"

세바스찬은 뭔가를 회상하듯 뭔 곳을 응시하다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테리우스, 그 녀석에게 난 아직 진 빚을 다 갚지 못했다. 그 녀석에게 데본 제국을 빼앗은 것은 진정한 승리
가 아니란 소리지. 그 녀석에게 정말 뺏어야 하는 것은 단 하나다."

"그 여자……아이린을 말하는 거군요."

"그래, 그녀를 내 곁에 둬야만 이 전쟁의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거지."

"흠, 그거 참 좋은 생각이에요. 내게 등돌린 최고의 권력자를 강제로라도 내 곁에 둘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아파하는 것만큼 그 남자의 마음도 아파하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세바스찬, 내
가 뭘 하면 되죠?"

"이제야 좀 말이 통할 것 같군. 내 아름다운 사촌 일라이저."

둘의 은밀한 대화는 나중에 한 연인에게 큰 파란을 일으켜 올 씨앗의 싹이 되었다.

*

테리우스의 사건 이후, 아이린 일행은 젬모스의 지역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케르베노아 영토에 관련된 정
보를 얻어 올 수 있었다.

벌써 한 달이 지나갔지만, 그 날 이후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테리우스의 종적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오늘
은 아이린에게 케르베노아 지역의 지도에 관해 도움 설명을 줄 특별한 손님 두 분이 초대되었다.

그들은 바로 하이엘프족의 클락과 드워프족의 미니조우였다.

하이엘프족들의 대부분이 그랬듯이 클락 역시 빼어난 외모의 청년이었고 그의 녹색 눈동자는 그의 금발과
잘어울러져 보석처럼 깊고 빛나 화려한 첫인상을 선사했다.

굉장한 고집과 신념이 뭉쳐있을 것 같아 보이는 드워프족의 미니조우 역시 아이린에게는 새로웠다. 그녀의
체구는 작았지만 자긍심은 무한해 보였다. 붉은 머리칼이 양 갈래로 짧게 땋아져 있었고 클락과는 꽤 가까
운 듯한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클락이라고 합니다."

"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앨리어튼님께서 굉장히 경험과 학문을 지니셨다고 말씀하셨어요."

"하핫, 과찬이세요. 이쪽은 제 파트너 미니조우입니다. 연금술에 능하고 요리도 잘 한답니다."

클락의 칭찬에 미니조우의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아이린은 놓치지 않았다. 저 소녀 이 소년을 좋아하고 있
구나하는 느낌을.

작은 집무실에서 아이린은 이 두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앞으로의 문제들을 조금씩 해결해 갈 수 있는 희망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 귀퉁이에는 여전히 테리우스에 대한 아픔이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었
다.

그때 차를 준비한 아처가 집무실을 작게 두들겨 노크하더니 잠시 후, 들어섰다. 오늘따라 푸른 색 정장차림
을 하고 있는 아처의 모습이 조금은 의젓해 보였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옐로스타의 잎으로 만든 차입니다."

아이린이 손님들에게 아처를 가리키며 소개한다.

"이쪽은 제 수행원입니다."

"아처 아토스라고 합니다."

수줍음을 타는 지 미니조우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없이 아처의 인사를 받았고 클락은 예의바르게 그에
게 악수를 청한다.

"안녕하세요. 클락이라고 합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부터 도움이 되고 있는 듯 합니다. 여러 지역으로 여행을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처가 지도를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이린은 든든했고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
었다. 아직은 그녀가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과정들이 어렵고 모르는 점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그녀를 편안하게 했다.

한참을 케르베노아 영토에 관련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클락의 눈이 뭔가를 발견한 듯 반짝
인다. 클락은 회의를 하던 중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더니 아이린의 책상 왼쪽 편에 있던 가방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방에서 비어져 나와 있는 망토의 끝자락을 매만지더니 확신하듯 빼어들고는 꽤나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이린을 바라본다.

"이 마법 옷은 어디에서 구입하신 건가요?"

"그보다 남의 물건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댄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예의가 아닐지."

아처가 조금전과는 다르게 아이린의 물건에 아무런 사전 양해 없이 손을 댄 것에 꽤 불쾌한 심정을 내보였
다. 그러자 클락이 재빨리 고개 숙여 사과를 했고 아이린은 괜찮다는 듯 웃음으로 넘어가며 대답한다.

"그건 제 아버지께서 친구 분의 가게에서 제게 선물로 사준 옷이랍니다. 혹시 아세요?"

"네, 그럼요. 이 옷 제가 만든 거랍니다."

"네에?"

"하하, 이런 기가 막힌 인연이란 정말 반갑습니다."

아이린은 잠시동안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클락을 뒤따라가던 미니조우가 마법 옷 아래의 슈바이저 검 지금
은 책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혜의 서를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린을 바라본다.

"전 아이린님이 케르베노아 영토로 여행을 하는 나그네라고 앨리어튼님께 소개를 받았는데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계신거죠?"

뜻 모를 미니조우의 물음에 아이린은 되려 물었다.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닙니다. 클락,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다시 들리도록 했음 좋겠는데요."

신중한 미니조우의 제안에 클락이 의례 알았다는 듯 아이린에게 양해를 구했고 그렇게 도움을 준 손님들을
방문한지 두 시간 후 아이린의 숙소에서 나갔다.

*

밤이 되자, 아이린은 집무실 책상에 쌓인 수많은 정보가 담긴 서류들을 뒤로 한 채 창문에 다가서서 달을 응
시했다. 앨리어튼의 친절 어린 호의로 그녀는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채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또
한 흩어진 아리스 왕국의 아리스 인들에 관한 이야기와 그 역사들도 좀더 깊고 넓게 접할 수 있었다. 앨리어
튼 역시 아리스 인이란 사실이 그녀에게 참 많은 위로가 되었고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녀
의 아버지에 관련된 정보를 접하지는 못했다.

이제 보름 후면 이곳을 떠나 대부분이 사막으로 둘러 쌓인 케로베노아 영토로 출발해야만 한다. 주인이 없
는 땅이기에 그곳을 먼저 들어 선 자들이 그곳을 갖게 될 테지만 척박한 곳을 탐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할 일이 산더미일수록 그녀는 의욕이 높아져 같고 다시금 그녀의 부모에게 당당해 질 수 있는 한걸음에 더
다가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힘든 느낌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것일까?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가 자신을 떠난 이후, 밤이 되면 찾아오는 적막감과 함께 그에 대한 마음도 함께 찾아왔다.

아픔 하나,

상실감 하나,

배신감 하나,

미안함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움 하나,

그를 찾고 싶지만 지금은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그를 찾는 것이 어리석을 거
란 헛된 믿음 때문에.


^^*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61화

  winterknight  Date : 2004/09/02  View : 161  Vote : 0


테리우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이린이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손을 내민다. 그리고 밤의 기운을 손끝으로 느끼면서 자신이 얼마나 그에게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를 자문해본다. 자신을 위해 제국을 포기했고 자신을 위해 자존심을 버린 채
로 무릎을 꿇는 그 남자.

"괜찮은가요?"

조용한 음성이 그녀의 등뒤에서 염려스러움이 담아져 들려왔다. 아처였다.

"아, 아처 아직 안 잤어?"

"네, 아직 지도에 관한 분석을 끝마치지 못해서요. 그런데 공주님은 왜 아직도 주무시지 않으셨어요."

"그냥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

아이린이 말끝을 흐리며 다시금 달을 응시한다.

그녀의 뒷모습이 가녀린 그 어깨가 요즘 너무나도 쓸쓸하고 힘들게 보였다. 아처는 그녀에게 도움이 될지언
정 그녀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란 것을 너무 오래 전에 깨달았기 때문에 만약 그가
카나 황국의 귀족을 선택했다면 그랬다면 그녀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미 답이 보이지만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답.

"요즘 공주님의 웃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군요."

"그랬어?"

아처가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네자, 그제서야 아이린이 그의 시선을 마주한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달을 응
시하며 테리우스를 향해 아파하고 있었다.

"많이 힘드신 가요?"

"좀 그러네."

"그 분을 찾아오라고 명령하시면 지금이라도 찾아오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이린의 말끝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전해졌다. 아처는 그녀의 말에 더 이상 답변도 물음도 할 수가 없
었다.

그녀의 마음이 울고 있음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가 잘못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테리우스라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인지도 아니 잘못이길 지금 이 순간 간
절히 바랜다.

"아처…그는 왜 말없이 떠났을까? 이런 생각을 내가 하고 있다면 나 참 이기적인 사람인 거겠지? 날 위해 모
든 걸 버린 사람을 다시 한 번 날 위해 그의 자존심을 무릎 꿇게 했는데…그런데 여기서 내 곁에 머물러 주기
까지 바란다면 그건 내 욕심이 너무 넘치는 거겠지?  훗, 아마 그런 걸 꺼야. 그는 내 욕심에 너무 화가 나서
내 욕심이 지겨워서 날 떠난 걸 거 야."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뒤늦은 후회를 하는 듯 그녀 모습 전체가 울고 있었다.

아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마음도 아팠다.

그 슬픔이 나를 향해 울었으면 하는 내 욕심도 그녀에게 다가서면 다시금 눈물이 될까봐 겁이 난다.

아처는 조용히 다가가 아이린을 안았다. 지친 그녀는 그를 밀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
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아닌 어떤 이의 어깨에도 기댈 만큼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테리우스, 만약 당신이 아이린에게 이렇게 힘든 존재라면 그렇다면 이제 그 자리를 내가 빼앗아 버리겠다
고 지금 이 순간 아이린의 눈물 앞에 다짐한다. 그녀를 위한 다짐이 아닌 나를 위한 다짐을…….'

아이린을 중심으로 하루를 일년처럼 다들 열심히 아리스 왕국의 재건에 관한 사항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녀가 의미를 부여한 새로운 이름 아카리나스라는 이름으로 연구와 작업을 생각보다 더 빠르고 단단하게 진
행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아이린의 모습은 언제나 밝은 웃음을 짓고 명랑한 목소리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밤이 되어 홀로 집무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동안에는 단 한사람에 대한 마음만으로 눈
물을 흘려야만 했다. 고통스러울 만큼 아픈 하루를 보내고 나면 다시금 또 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그녀의 곁
에 그가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허전하고 아픈 시간이라는 것이 스스로에게 못내 화가 나고 안타까웠다.

'테리우스, 어디 있는 거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니? 내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할 기
회는 용서를 구할 기회는 줘야하잖아. 이렇게 사라져버리면 그럼 난 앞으로 너만 그리워하고 아파한 채로 이
렇게 존재해야하는 거야?'

그녀는 지금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존재할 뿐이었고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아카리나스 왕국이
필요해졌을 뿐이다.

이제는 삶의 이유가 삶의 존재로 변해 버린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삶의 이유는 어느 새 왕
국의 재건이 아니라 테리우스였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은 잘못일까? 아님 실수일까?

아이린의 하루는 다시 이어졌고 이제 케르베노아 영토로 떠나기 하루 전이 되어버렸다.

그때까지 테리우스에게는 소식하나 없었고 어느 새 아이린을 의식한 듯 사람들에게서 테리우스에 관한 이야
기는 암암리에 언급하지 말아야할 불문율이 되어버렸다.

*

앨리어튼은 심각한 고민으로 사색에 잠겨 있었다. 작고 여린 겉모습과는 다르게 강한 신념과 아름답게 자라
준 그의 딸에게 너무 고마웠다. 자신을 찾아오게 해준 운명의 신께 엎드려 입맞추고 싶었다. 그의 유일한 사
랑이었던 클레오와의 다리가 되어준 그들만의 단 하나의 영혼의 보석이 살아 있어 주었다.

"아이린…나의 딸아…."

창 밖으로 보여지는 그의 딸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와 앉아 차를 입에 한 모금 들이킨
다. 내일이면 아이린이 이곳을 떠날 것이다. 자신의 왕국을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서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
다는 집념하나로 자신을 떠나게 된다.

똑!

똑똑!

짧은 노크소리와 함께 미니조우가 클락과 함께 앨리어튼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앨리어튼님."

미니조우는 아이린에 관한 물음을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어려 보이지만, 강하고 많은 세월을 보낸 지혜
로운 드워프족의 여장군이다.

"글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미니조우는 자신이 카나 황국의 요청으로 직접 방문해서 수년동안 연구하여 만들어 전설이 되어 버린 슈바
이저 검을 아이린에게서 발견한 순간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카나 황국의 앨리어튼님은 여전히 반갑지 않은 불청객에 불과합니다. 슈바이저 검이 지금은 지혜의 서로 변
해 아이린님을 돕고 있을 지 모르지만 다시 검으로 진화하는 순간 카나 황국에서도 아이린님의 위치를 파악
할 것이고 그곳이 결코 후계자를 포기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후계자 선택 의식의 결과에 대해 절대
만족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겁니다. 그곳에 장로들의 이중적인 성격은 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테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여전히 클레오의 죽음을 메틴 왕이 화이트 마나를 위해 저지른 암살이라
고 생각 할 테지. 그 암살자들 역시 메틴 왕과 연결된 자들로 증거는 완벽했을 테니까."

클락은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경청하면서 가끔씩 창 밖의 아이린과 그녀의 흑기사들의 모습들을 관찰했
다. 그녀가 알아야할 진실인가 아니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인가.

아이린.

그녀가 태어난 순간부터 아니 태어나지 않는 그 순간부터 그녀의 삶이 모두 절대 왕국의 하나 카나 황국의
반데라스 황제의 손에 의해 모두 결정되어진 운명에 불과했음을 말이다.

데본 제국의 대마왕인 테리우스를 만났던 사실도 레드 드래곤의 손에 키워졌던 것도 그리고 그녀 자신이 선
택 의식을 행하면서 선택할 결과마저도.

하지만 한 가지 아직 의문이 있다면 저 흑기사들도 꼭두각시에 불과한 요소일까? 아니면 그들도 진실의 단면
을 알고 있는 자들일까 하는 점이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환상을 간직한 채 희망을 품고 싶어하고 그것을 최대한 이용할 줄 아는 카
나이니까. 어쩌면 지금의 만남도 이미 각본처럼 짜여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래서 고민이라네. 미니조
우 자네의 의견은 어떤가?"

"제 의견보다는 아이린의 아버지로써 앨리어튼님이 내리실 선택이 더 중요하겠죠. 어느 선까지의 진실을 말
할 것인지. 그녀에게 반데라스 황제가 그의 딸을 죽였고 그 손녀를 뺏으려 했다는 것을 말할 자신 있으신가
요? 아니 그보다 그 잔인함을 딸에게 건네줄 자신이 있으신가요?"

앨리어튼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어 입에 물었다.

"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네. 날 드러내는 것이 혹 아이린에게 위험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데본 제국은 겉
으로 드러난 어둠이 전부이지만 카나는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어둠들을 지니고 있음을 아이린에게 알리
게 되면 그 아이는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릴 걸세. 저렇게 사랑에 힘들어하며 그리워하는 순수한 내 딸에게 그
런 이중 잣대의 어둠을 짊어지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아직 더 단단하고 강하도록 거리를 두고 지켜
봐야하는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네."

길게 뿜은 그의 담배 연기가 사방으로 흐트러지듯 그의 마음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용히 듣고 있던 클락이 두 사람의 말에 결론을 지어준다.

"네 살짜리에게도 진실은 그대로 보여주고 알려주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 나이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만
큼의 방어력도 그 아이의 몫이 될 테니 말이죠.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한 사
람의 눈만 가릴 뿐입니다. 앨리어튼님이 따님을 정말 사랑하신다면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십시오. 진실 앞에
어떤 결정을 내리고 선택을 내리든 그것은 이미 앨리어튼님의 몫이 아닙니다. 아이린님은 지금까지 너무 많
은 거짓말의 테두리에서 방황하셨습니다. 그 진실을 찾기 위해 저렇게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을 무시하지 마
세요. 하하, 그냥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려주십시오. 앨리어튼님."

"흠,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결론 앞에서 다시금 망설이는 앨리어튼은 자신의 딸에게 다가서는 것이 염려되었다.

앨리어튼 그 스스로가 아이린보다 더 두려운 사실들을 다시 접하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
니조우의 한마디가 그의 고민을 조금 덜어주었으니.

"직접 말하시는 것이 힘드시면 편지를 쓰세요. 제가 전해 드리죠. 어차피 클락과 저도 아이린님과의 여행에
동참하기로 약속되어 있으니 그 후에 재회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흠, 그거 참 고마운 제안일세."

"뭐, 좀 비겁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니 아이린님도 이해할 겁니다."

"그래, 고맙군."

앨리어튼은 씁쓸한 미소를 내지으며 펜과 종이를 준비했다. 그리고 미니조우와 클락이 떠난 후에 책상에 앉
아 클레오를 떠올리며 잠시 눈물을 짓다가 글을 써내려 갔다.

*

짐을 운반도중이던 파라도가 은근 슬쩍 아처의 표정을 바라보더니 아르테니의 배를 살짝 팔꿈치로 찔러댔
다.

"이봐, 요즘 들어 아처의 표정이 밝아 진 것 같지 않아?"

"그렇지 뭐,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게 무슨 소리냐? 엉, 넌 뭔가 알고 있는 거냐? 말해봐라."

"그거야 눈에 가시 같던 존재가 사라졌으니 기분이 좋은 거야 당연한 거지."

"눈에 가시?"

파라도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멍청하기는…테리우스 말이다."

"뭔 우스?"

아르테니가 작게 테리우스의 이름을 언급했기에 답답한 듯 파라도가 이해하지 못하고 재차 묻는다. 그러자
아르테니가 그의 귀를 바짝 잡아당기고 속삭인다.

"테리우스."

"아, 그 녀석…아하!! 알겠군."

"어휴, 역시나 넌 그쪽으로는 느리군."

"공주님도 훨씬 밝아진 거 같은데?"

"글쎄, 난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 아무래도 힘드실테지."

"뭐가?"

"어휴, 더 이상 대화가 안되겠다. 짐이 날라라 임마!"

"뭐?"

"아, 답답해 파라도 이 녀석 너 지금 일부러 그런거지?"

"잉, 아닌데."

두 사람은 그렇게 아웅다웅하면서 짐을 나르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일하던 아처와 아이린이 작은 꼬
마의 쪽지를 확인하고는 어디론가 발걸음 했다.

젬모스 일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원형 회의장에서 아이린을 찾아온 네 명의 손님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
었다.

"메이샤링? 아니 코보 족장님 그리고…."

반가운 손님들이었다. 메이샤링과 코보 그리고 다칸과 앨런이 나란히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처는 말없이 서서 그녀가 친구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따분한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이린? 호호호, 우리가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지."

메이샤링이 자신의 차림새를 둘러보면서 아이린의 시선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된 거 에요?"

"그게 아리스샘터가 사라져버려서 지금 도망자 신세가 되었거든. 이게 그 나쁜 이노렌 장로의 농간에 넘어
간 결과지. 어떤 멍청한 지도자의 실수라고 표현해도 맞겠지?"

메이샤링이 코보 족장을 슬쩍 흘겨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코보 족장의 모습은 여유롭고 느긋해 보였
다.

다칸의 무표정한 모습도 여전했고 앨런의 다정다감한 모습도 여전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누군가를 연상
케 했기 때문에 아이린에게는 반가운 존재들이었고 아처에게는 꺼리고 싶은 존재들이었으리라.

"그런데 테리우스 이 녀석은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야? 친구들이 왔으면 맨발로 달려와서 환영해야하
는 거 아니야? 쫄딱 망했다고 아는 체도 안 하기로 한 건가? 호호호, 여전히 이 재미없는 세 남자들은 시종일
관 침묵으로 일관한다니까. 그러니 그 긴 여정에서 내가 얼마나 따분하고 답답했겠어. 안 그래 아이린? 정말
테리우스는 왜 안 나온 거야?"

메이샤링의 시원스러운 말담에 아이린은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그러나 그에 관한 안부에 대해서는 차마 입
을 열기가 망설여졌다.

"테리우스님은 사정이 있어 먼저 떠나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전 아이린님을 수행하고 있는 수행원 아처 아
토스라고 합니다."

망설이는 아이린을 대신해서 아처가 메이샤링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아, 그렇군요. 반가워요 전 메이샤링이라고 데본의 소속인 아리스샘터의 장로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이제
는 없어져버린 아리스샘터의 족장 코보, 그리고 그 옆에는 수문장이었던 다칸과 앨런이죠. 다들 아이린과는
잘 알고 있는 사이이니 경계하지는 마세요. 호호호!!!!!"

메이샤링의 소개로 세 남자들은 아처에게 시선을 고정했고 그들은 서로간에 말없이 간단한 목례만으로 자신
들의 인사를 마쳤다.

앨리어튼의 배려로 아이린의 친구들은 그곳에서 머물 수 있게 숙소가 마련되었고 그 날 밤은 아이린의 숙소
에서 메이샤링이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린은 늦은 밤 메이샤링과 차를 마시면서 그녀의 말재주에 넘어가 테리우스와 있었던 일들을 고
스란히 알려주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로 인해서 그녀가 너무나 아프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여태껏 마음 밖으로 비어져 나올 만큼
테리우스로 인해 아팠던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그녀 스스로 점점 나약해져 감이 느껴졌다.

"그랬었구나. 테리우스 그 녀석이 우리 아이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단 말이지. 하아, 그만 잊어 버려 그런 녀
석은 세상에 깔리고 깔린 것이 남자라고. 호호, 이런 분위기에서 절대로 차를 마실 수 없지. 짜잔!!! 자, 우리
이걸 마시자고."

"어, 그건 멜리사 아주머니의 술인데?"

"호호호, 그 마귀할망구 같으니 이 술 좀 뺏어 오는데 고생 좀 했다니까. 식료품 담당을 만나러 갔다가 저녁
에 만났는데 이 술을 보고 그냥 올 수가 있어야지. 주라고 해도 안주니 몰래 가져올 수밖에 어차피 내일이면
떠날 건데 뭐 어쩔 거야?"

"여기를 떠나요?"

"그럼, 아이린을 만났는데 같이 동행해야지 내가 여기 남을 것 같아? 호호호, 자! 마셔!"

*****************************************>>>

오늘은 풀하우스 마지막회군요......................^^*
요즘 재미있는 만화책을 보고 있습니다.....이틀전부터 보고 있는데 "내일의 왕님"
일상속으로의 잔잔함이 묻어나서 재미있더군요.........................................^^*
그럼 즐거운 하루되세요...........................................................................^^*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62화

  winterknight  Date : 2004/09/04  View : 262  Vote : 0


*

다칸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계속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메이샤링에게 주려던 반지였다. 그
런데 그냥 어쩌다가 그 반지를 자신이 주었다고 믿는 클리오네는 죽음 앞에서조차 그가 주었다고 믿는 반지
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클리오네의 미련한 사랑을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은 무시했는데 그녀가 죽은 후에 자책감이 느껴진다. 스스
로의 미묘한 감정 변화에 다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퀘퀘한 담배 연기가 방안을 가득 메울 때까지도 다칸은 개의치 않은 채 사념에 잠겼다.

실로 바보 같은 여자다.

아니, 미련한 여자구나.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데…….

그녀의 죽음이 괜히 그녀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만들게 하고 있다.

다칸은 그녀에게 접근했던 이노렌 장로의 얼굴을 떠올리자,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조금 떨어져 바라보던 앨런이 말을 건네며 다가선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날텐데 눈을 좀 붙여야되지 않겠어."

"됐어."

"벌써 며칠째 쉬지 않고 있어 다칸. 이러다가 몸이 피곤으로 망가질 꺼야. 그러니 내 말대로 좀 쉬어."

"됐다니까 상관하지마."

그러자 온순한 성격의 앨런이 다칸의 멱살을 부여잡으며 조금 거친 느낌으로 말했다.

"너에게 클리오네는 별 볼일 여자였는지 모르지만 어떤 남자에게는 보석 같은 존재였어!! 알기나 해!! 단지
네 녀석이 친구란 이유로 봐준 거다. 그녀의 복수는 네 녀석 손으로 직접 해야만 의미가 있어. 그러니 어서
쉬어! 널 위해 쉬라는 소리가 아냐. 억울하게 죽은 그녀를 위해 그런 그녀를 바라봤던 한 남자를 위해 쉬라
는 소리야. 멍청하고 바보 같은 녀석!!"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제기랄, 더 이상 너와 마주 대하는 것도 지금은 역겨울 뿐이야."

앨런이 그만 다칸에게서 손을 거두더니 그 길로 나가버렸다. 천장이 무너질 것 같은 쾅하는 문소리와 함께.

그의 친구 앨런이 그에게 휴식을 취할 것을 요구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요구의 목소리로 인해 다칸은 다시
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미련한 여자와 어리석은 친구 녀석으로 인해 그는 다시금 담배에 의존하며 자신
의 행로를 되돌아봐야 했고 자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그 자신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기적인 성격으로
살아왔고 그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린 그였다. 그런 그에게 인간적인 면을 찾아서 다시금 되짚어보는 것
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으리라.

"이노렌 장로, 당신의 목숨은 내게 맡겨야겠군. 그 미련한 여자와 내 멍청한 친구 녀석의 영혼을 달래기 위
해."

씁쓸한 웃음을 내뱉으며 다칸은 다시금 담배 한 모금을 입안으로 깊게 빨아들였다.

*

테리우스는 어느 곳에다 그에게 치밀어 오르는 화를 풀어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곧장 그녀가 있던 젬모스
지역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달리고 걷다보니 어느새 케르베노아 영토에
와 버렸다.

척박한 땅으로 한 눈에 보아도 생명이 살기 힘든 곳이었다. 물이 필요함을 땅 전체가 울음을 토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갈라져 있었고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

대체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러나 이곳은 참 대단하고 위대한 곳이리라.

테리우스 본인을 무릎 꿇게 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는 그 척박한 땅에 대자로 뻗어 눕고는 청
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하늘아 맘껏 비웃어라!! 이 망할 주신!!! 당신이 원하는 게 이런 거였어!!!! 내가 다시 그 천계에 가는
날 그곳을 이곳처럼 만들어 줄 테니까 긴장하고 있으라고!!!!! 이게 다 당신 탓이야!!!!"

테리우스는 화 풀만한 만만한 상대가 아니, 자신에게 견줄만한 상대가 주신뿐이라고 결론  지었는지 애꿎은
주신의 탓으로 돌렸다.

*

<<천계>>

테리우스의 음성이 화면을 통해 천사들과 악마들에게 전해졌고 이어 주신 역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
다. 여전히 그들의 먹거리를 피자와 맥주였다.

"호호호호호, 테리우스의 성격은 여전하군요. 호호호호!!!!"

주신의 웃음소리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그들은 이제 텍경기보다는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엇갈리기 시작한 정점에 대한 관심이 더 극에 달려 있었다.

"흠, 저희도 간만에 등장하니 감회가 새롭네요. 지난번에 양의 모습을 했던 이색적인 놀이도 다시 한번 했으
면 싶고."

"커억, 하려면 너희 천사들이나 해라. 우리는 다신 그런 모습으로 변장 못해. 그때 얼마나 몸이 쑤시고 아팠
는데 게다가 하필 양이라니 풀만 먹기가 얼마나 어려웠는데."

"멍청한 악마들 같으니 이 참에 채식을 좀 해보는 것이 어떠냐?"

"어쭈, 덤빈다 이거냐."

"여기가 중립 지역인 걸 그 멍청한 머리가 또 잊었나보구나?"

"이것들이 정말!!!!"

다시금 아무런 일도 아닌 사소한 말 몇 마디에 흥분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주신이 조용히 중재했다.

"사신, 여기 피자 한 판씩 더 돌리세요. 여기서는 싸우지 마세요. 제게 혼납니다. 호호호호!!!!!"

그러자 다들 아주 조용해졌다. 역시 주신의 힘은 셌다.

*

낮은 더웠고 밤은 추웠다. 계속해서 여기저기 둘러보러 다녔지만 도무지 생명이 살기에는 부적합 영토였다.
하기는 그래서 각 국들이 신경 쓰지 않은 버려진 영토였겠지만.

테리우스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스스로 힘들게 만들면서 잠깐이라도 아이린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다시금 몸이 편안해지고 휴식을 취하면 그녀만이 떠오른다.

그녀만 떠오르면 왜 이렇게 화가 나고 감정이 제멋대로 분산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겨져 있는 마력을 이용해 농기구를 만들었고 뭔가를 실험하기 위해 밭과 논을 일구었다. 그
러나 땅은 그가 생각한 만큼의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노동을 했지만 그 결과는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미쳤군. 이런 곳을 위해 날 무릎 꿇게 하다니…쳇, 그 일을 아직까지 계속 내가 중얼거리고 있는 걸 보면 나
역시 미쳤군. 그런 일은 지금쯤 잊어버려야 정상 아닌가? 하기는 아이린을 만나고 나서 내 기준으로 정상이
었던 적이 거의 없었지."

*********************************************>>>

이제 가을입니다..................^^*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63화
 겨울기사   | 2004·10·17 13:07 | HIT : 213 | VOTE : 0 |

태양 빛을 그대로 받은 채로 누워 있던 테리우스는 어느새 피곤함에 스르륵 잠이 들었고 달빛을 맞이해서야
감긴 눈을 떴다. 테리우스의 손가락에 자리잡고 있던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을 내기 시작했고 곧이어 땅
의 흙들이 이상한 몸부림을 하기 시작한다.

마치 테리우스를 집어 삼키려?듯이 그의 손을 중심으로 흙들이 미친듯이 요동치며 덮쳐오기 시작했으니.

"젠장, 이건 또 뭐야?"

테리우스의 오른팔까지 덮쳐오는 흙더미들을 툭툭 털어내자, 땅으로 흐트러지더니 이내 파란 불빛들을 발하
는 것이다. 그것은 블루 다이아몬드의 초기 원석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 쓸모 없는 땅인 줄 알았던 이 영토가 세계를 뒤흔들 에너지원을 복사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발
견한 테리우스는 그 사실 앞에서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 이건 또 멋진 반응인걸? 흠, 아무래도 메틴 녀석이 꽤나 아파하겠군. 하하하!!!! 아이린!!!! 널 위한 선물
이다!!! 하하하핫핫!!!!"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어대는 테리우스의 함성에 인근 야생 동물들이 움찔거렸다. 그의 기에 눌려서 말이다.

*

앨리어튼은 서신을 클락에게 넘겼고 아이린 일행은 드디어 젬모스의 지역을 떠날 시간을 맞이했다.

"그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러모로 폐도 끼쳤고요."

아이린이 가벼운 인사와 함께 앨리어튼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등을 돌려야했던 테리
우스가 아직은 그녀의 마음에 가시가 되어 있는 상태로.

"아닐세, 괜히 함께 있던 일행과 사이가 안 좋게 되어 유감일세.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해해주게나."

앨리어튼의 차분한 어조로 대답한다. 그의 대답에 아이린의 일행 속에 누군가 핀잔 어린 소리로 중얼거렸다.

"흥, 일행이 아니라 남편이죠. 너무 한 줄 아나 몰라."

벅스칼이었다. 별로 좋아하고 싶지 않지만 좋아하는 테리우스가 지금 이곳 일행들과 함께 하지 못한 이유를
제공한 제공자가 그는 썩 맘에 내키지 않았다.

"누구야!!!"

이번에는 앨리어튼 쪽 누군가가 벅스칼의 핀잔에 반응한다. 그러자 재빨리 메이샤링이 나섰다.

"호호호, 떠나는 마당에 왜들 이러시나? 좋은 벗으로 기억하기도 바쁜 시간에 그만 하시고 기분 좋게 인사나
나누죠? 잠시 머물렀지만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그럼 우리는 갈 길이 바빠서 이만…아이린 그만 가자."

"어?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어디서든 몸조심하게나 또 보세."

앨리어튼은 마지막까지도 그의 딸에게 조금의 감정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느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램마저도 묵과했다.

그렇게 아이린 일행은 길을 떠났다. 아처가 선두에 있었고 뒤이어 파라도와 아르테니가 뒤따랐으며 중간 진
열에 아이린과 메이샤링, 미니조우와 클락이 함께 했다.

코보 족장과 앨런 그리고 다칸과 나머지 일행은 마지막 대열에 합류했다.

아이린 일행이 젬모스 지역을 떠나가는 모습들을 근거리에 숨어 지켜보던 보랏빛 머리칼의 남자가 상대에게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때, 보아하니 그 건방진 녀석은 저기에 없는 게 확실한데…부하 녀석의 정보가 맞는다면 둘 사이가 많이
갈라져 보이는 것 같은데 그 녀석을 유혹할 자신은 있는 거냐?"

"흥, 세바스찬 오빠나 잘 하시지 그래. 저 계집애 당해봐서 알지만 만만치 않은 여자니까. 난 걱정하지마…이
번에는 결코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 할 테니까."

뭘 믿고 일라이저의 코끝이 하늘을 뚫을 지경인지 잠시 의아했던 세바스찬이 다시금 아이린 일행이 있는 쪽
을 바라보더니 부하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이 일사천리로 움직인다.

"됐다. 어차피 난 여자 쪽이고 넌 남자 쪽이고 여기서 갈라지도록 하지."

세바스찬이 말에 오르며 일라이저에게 말하자, 그녀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말에 오르며 고개를 끄덕인
다.

"걱정 말라니까. 그럼 내가 먼저 출발할게. 오빠가 먼저 가고 나면 괜히 내 기분이 거지같아서 말이지. 애들
아! 가자."

일라이저는 긴 분홍색 망토를 휘청거리도록 휘두르며 그녀의 부하들을 거닐고 세바스찬의 앞에서 유유히 사
라져갔다. 그녀의 뒷모습에 세바스찬은 조금은 걱정이 된 듯 혀를 차며 말을 내뱉는다.

"휴, 괜히 저 녀석을 끌어들였다가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어. 아니지, 어차피 시간을 끌어야하니
까…그만 가자. 이랴!!"

세바스찬은 못내 안심이 안 되는 듯 자꾸만 일라이저가 사라진 방향에 눈길을 돌리다가 다시금 아이린 일행
의 뒤를 쫓아갔다.

*

아처가 천천히 말의 속도를 늦추더니 아이린과 속력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산악지대로 좀 험한 편이기는 하지만 젬모스에서 건네준 지도 덕분에 그래도 무난한 길을 찾아서 다행입니
다. 그런데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십니다. 괜찮으세요?"

말의 속도가 조금 떨어지는 듯 하자,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무표정이 그의 말소리에 흐트러지며 초
점을 맞춘다.

"어? 아니, 괜찮아. 언제 왔었어? 앞쪽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아닙니다. 잠시 일행들을 살피러 제가 속도를 줄인 것입니다. 걱정 마세요."

아처는 그녀의 반응에 실망하더니 다시 파라도와 아르테니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5장 마침.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64화
 겨울기사   | 2004·10·23 23:54 | HIT : 204 | VOTE : 0 |


6장 메이샤링과 코보

밤이 되자, 메이샤링과 아이린은 남자들이 가져다 놓은 장작불에 불을 지피고 나란히 자리했다. 어두운 밤의
분위기가 이들 일행들에게 평화로움을 던져 주었다.

"정말이야? 테리우스를 무릎 꿇게 했다는 이야기가?"

메이샤링이 궁금했던 질문들을 아이린에게 묻는다.

"휴, 네."

한숨을 내쉬며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를 손등에 가져다 놓는다.

어깨에 힘이 쭉 빠지면서 그때의 일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가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다시 돌아간다면 그 말을 거둘 수 있었는지 생각이 복잡해져만 갔다. 단지 메
이샤링이 물어서 떠올린 것 때문이 아니리라.

테리우스가 떠난 후, 지금까지 내내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던 생각들이었으니 아니, 마음들이었으니
미안하면서도 억울하기도 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고리에 고리를 물었다.

"그럼 아이린은 지금 괜찮은 거야? 힘들지 않아?"

아이린의 눈치를 살피며 메이샤링이 조심스레 그녀의 마음을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를 떠나게 만든 것은 난데 그가 떠났다는 것에 대해서는 억울 할만큼 화가 나요. 그렇게 화가
나는 제 모습이 너무 못나게 느껴져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

"호호, 사랑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지."

메이샤링이 멀리서 있는 코보에게 잠시 눈길을 주더니 이내 아이린의 어깨를 다독였다.

"사랑이라고요?"

자신의 감정들에 대해 결론을 내려준 메이샤링을 바라보며 아이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게 엮어진 느낌들이 테리우스에 대한 사랑이라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싶은 건지
도 모른다.

"그를 만나면 한편으로는 안아주고 싶고 한편으로는 큰소리치며 싸우고 싶어요. 제가했던 행동이 잘못된 것
이라면 잘못이라면 싸우는 편이 낫지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는 건 그런 건 정말…."

아이린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그 동안 그녀에게 보여주었던 그의 모습들이 모두 거짓말처럼 흐
트러져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했던 몸짓도 미소도 약속도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져 그녀 자신을 초라한
기분으로 몰아넣었다.

"그래, 내가 볼 때는 아이린이 잘못했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존심을 꿇게 만든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야. 하
지만 테리우스는 그 보다 더 큰 잘못을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니까 아이린은 울어도 돼.  그 녀석보다 더
아프니까 소리내서 울어도 돼."

"흑…흑흑!!!"

처음 흐느끼던 아이린의 울음소리가 점점 엉엉거리며 소리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눈물바다를 메이샤링
이 따뜻하게 보듬어주며 다독여주었다.

"그래, 어떤 남자들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상대에게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 남겨진 사람이 얼마나 아파할 지 모른 채 말이지. 그리고 세계 평화를 외치거나 큰 일을 하
기 위해 작은 걸 버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꺼야. 마치 만인들을 위해서 공헌을 하는 것이 한 사람을 위한 것
보다 더 크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뭐든 버리는 것은 쉬운 법이거든. 버려지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 시작을 함께 했다면 끝도 함께 해야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인 것을 모르
는 철없는 녀석들도 있으니까."

메이샤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이린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

"……고마워요 메이샤링."

"너무 아파해서 깊게 슬퍼하지는 마…아이린, 그럼 너 스스로를 무덤 속에 갇혀 놓아지게 되니까. 점점 친구
들과 멀어지게 되고 세상의 빛과 멀어지게 되면 그럼 그건 자신 스스로에게 지는 거야. 지금 아파하는 것은
괜찮지만 똑같은 일로 반복하며 아파하거나 너무 길게 아파하지는 말아. 휴, 나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지만
그건 방법이 아닌 것 같거든. 난…지금 아이린이 가장 아파하는 이유를 잘 알거든."

"제가 가장 아파하는 이유요?"

"응, 지금 억울하거나 초라한 기분보다 더 아픈 것은 보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을까봐 그게 더
두려운 거 아닌가?"

메이샤링의 마지막 말이 아이린의 귓가를 계속해서 맴돌았다. 눈물에 지쳐 마음이 아파서 잠이 들었던 그 순
간까지도 말이다.

보고 싶은 사람을 영영 볼 수 없을까봐 그게 더 두려운 거 아닌가?

보고 싶은 사람을 영영 볼 수 없을까봐 그게 더 두려운 거 아닌가?

보고 싶은 사람을 영영 볼 수 없을까봐 그게 더 두려운 거 아닌가?

아침이 되었다. 어젯밤에 너무 울었던 탓인지 아이린의 눈가가 퉁퉁 부어 괜스레 따뜻한 햇살마저 따갑게 느
껴졌다. 밤새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동료들은 못들은 척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크큿, 주인님 얼굴이 아주 달덩이가 다 되셨어요?"

벅스칼이 엉거주춤 달려오며 아이린을 팔짱을 덥석 끼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린다. 그는 지금 그의 주인의 기
분을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풀어주고 싶었다.

"어, 이런 모습은 보여주기 싫은데 벅스칼."

"헤헤, 제가 오늘 아침은 붓기를 가라앉혀 주는 호박을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으니까 금방 예전처럼 예뻐지실
수 있을 거예요. 저 철거머리 녀석만 사라져 준다면 말이죠."

벅스칼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요리 재료들 앞에서 기웃거리며 뭐든 도우려고 하고 있는 레오나르를 가리키
며 말했다. 그러자 살풋 아이린이 미소를 짓는다.

"히힛, 벅스칼이 데려 온 거잖아?"

"읔, 처음에는 돈도 많고 말도 좋은 거라 괜찮았는데 말이 너무 많아서 점점 귀찮아져가고 있거든요."

벅스칼이 레오나르에 대해 말이 많은 것이 불만이라고 말하자, 아이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벅스칼
의 말솜씨 역시 그에 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벅스칼의 수다 덕분에 아이린은 한층 마음이 즐거워지
는 기분이 들었다.

"공주님은 괜찮으신건가요?"

아이린이 벅스칼의 요리를 도우며 웃는 모습을 바라보던 아처가 메이샤링에게 넌지시 묻는다. 그러자 그녀
가 잠시동안 아처의 눈빛을 지그시 살펴보더니 뭐가 알겠다는 듯 입가에 입꼬리를 씨익 휘며 응대한다.

"글쎄, 어차피 마음이 아프다고 해도 얼굴은 언제든 웃을 수 있는 거고 웃으며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기는 하
겠죠. 기분이 나아지는 것과 마음이 나아지는 건 다른 거니까. 하지만 누군가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설레는
건 아마 또 다른 감정이겠죠? 안 그런가요?"

"흐흠, 괜한 질문을 했군요. 장로 분께서 점성술까지 하실 줄은 몰랐군요."

"호호, 글쎄요. 워낙에 많이 차여봐서 사랑에 관해서 라면 점성술 능력이 없어도 이론들은 넘치겠죠."

"제가 보기에는 본인 역시 헤매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처가 처음부터 지켜본 분위기를 파악하며 코보 족장에게 잠시 눈길을 주더니 다시금 메이샤링을 바라보며
말했다.

"과연 누구만 하겠어요? 나야 뭐, 내 화살을 내 손에 쥐고 있으니까 언제든 볼 수 있어 아프지는 않죠? 하지
만 가까이 서 내 화살이 아닌 것을 손에 쥘 수도 없으니 당신, 꽤 아프겠어? 안 그런가요?"

"괜한 말을 꺼냈군요. 그만 식사하러 가시죠."

아처는 괜히 거리감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고 재빨리 후회했다. 어차피 테리우스의 사람들이다. 크게 보
면 카나 인들과 데본 인들이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이 모든 원인
의 제공자는 지금 웃음 짓고 있지만 말이다.

*

-카나 황국 반데라스 황제의 제 3 집무실

반데라스 황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집무실 중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세 번째 집무실에서 귀빈들을 접대하
고 있었다. 그가 접대하고 있는 귀빈들이란 다름 아닌 아이린을 길러준 레드 드래곤 부부들이었으니.

"흠, 그 동안 생활하는 것에는 불편은 없었나?"

반데라스 황제의 물음에 제크와 페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빠르게 대답했다.

"네."

"네."

그리고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솔직히 데본 제국에 속하고 있는 레드 드래곤의 신분으로 카나 황국에 머물
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고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런 곳에서 벌써 여러 날을 이유 없이 지내고 있으니 그들로써는 답답할 뿐이었다. 다만 데본 제국으로 죄수
처럼 끌려갔다가 급작스럽게 카나 황국으로 옮겨와 귀빈 대접을 받고 있는 그 경위에 대해서는 궁금했으나
감히 그 이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괜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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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65화
 겨울기사   | 2004·10·27 19:51 | HIT : 303 | VOTE : 0 |


반데라스 황제와 대면하게 될 때는 가뜩이나 불편한데 인간형으로 변화하고 있어야 하는 점이 제키에게는 가
장 큰 곤욕이었다. 그나마 반데라스 황제와 대면하지 않는 시간에는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이 웅장한 규모
였기에 레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어도 알맞았기에 조금은 견딜 수 있었다.

반데라스 황제는 언제나 오후 늦은 시간이 되면 하루에 한번 이들 부부에게 들려 안부를 묻고는 퇴장하곤 했
다. 처음에는 그들을 염려하는 모습처럼 다가왔지만 몇 차례가 지나자,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한 의무적인 인사
치레라는 느낌을 주었다.

"여보,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지내야하죠? 정말이지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페키가 볼멘소리를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겠어. 강자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약자 입장에서 그것보다 지금까지 우리들을 가둬두면서 손님 대접을 하
는 걸 보면 뭔가 꿍꿍이속이 있을 것 같은데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은 턱도 없는 일이고 차라리 여기 있는 동
안 왜 우리를 억류시키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방향으로 목적을 바꿔보는 건 어떨까?"

"흐응, 듣고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어디서부터 알아 본 다죠?"

아내의 질문에 찔끔한 표정으로 아직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제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핫, 나도 잘 모르지. 그건 당신이 생각해봐."

"뭐라고요? 칫, 정말 못 말리는 양반이야. 그건 그렇고 우리 아이린은 어디서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너무 보
고 싶어요."

"휴, 그러게 말이지. 무사히 살아서 다시 볼 날이 있을지…큭큭, 엉엉!!! 아이린! 내 딸아!!!"

제키의 울음소리가 집무실을 뒤흔들어 놓기 시작하자, 밖에서 이들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동시에 고개
를 숙이며 한숨을 내쉰다. 매일 있는 일인 듯 그들은 집무실 안의 울음소리에 길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

제로이드는 가이루덴에서 수입한 물품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바이사코와 함께 레드 드래곤의 행방에 대해서
알아보던 중 가이루덴의 관계 자료를 입수하게 되었다.

다시금 둘은 제로이드가 소유하고 있는 데본 제국의 브라이언 저택에서 잠시 머물게 된다.

아름다운 것에 관심이 많았던 제로이드는 레드 드래곤에 관한 서류에서 가이루덴의 물품들이 많이 사용되었
고 관계국에서 무료로 대여했다는 점을 보고 같은 물품들을 밀수입했던 것이다.

"그것 참 이상하군. 왜 데본 제국 계열에 있는 레드 드래곤을 카나 황국으로 넘기는데 있어 가이루덴 왕국이
도울 수가 있는 거지? 바이사코 뭐 짐작 가는 점 없나?"

"글쎄, 데본 제국을 가이루덴에서 왕권을 빼앗았다는 것은 동맹국이었던 카나 황국과 대적하게 되었다는 소
리인데 뭐 그렇다면 잠시동안 적과의 동침처럼 데본을 삼키기 위해 카나에게 잘 보인 것은 아닐까?"

바이사코는 화려한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는 단검을 집어들면서 눈을 게슴츠레 뜨며 대답했다. 그는 또 다른
나라의 이국적이고 화려한 물품들에 많은 관심을 내보였지만 그것을 구태여 소유하고 싶은 느낌은 들지 않았
다.

"흠, 자네 말대로 그렇다고 해도 이 마법 원판은 전투력에 필요한 군대 물품에 속해. 뇌물이라고 하기에는 좀
앞뒤가 맞지 않아. 언젠가 다시 적이 될 상대에게 가이루덴 최고의 발명품 그것도 군대 물품을 아무런 대가
도 없이 대여한다는 건 좀…그 정도로 레드 드래곤의 가치가 있다고도 볼 수 없잖아."

"에잇, 차라리 전쟁에 나가 피 터지게 싸우는 편이 낫지. 테리우스 녀석은 왜 이런 걸 우리한테 부탁한 거야!!
자네 혼자 많이 고민하고 결론 내리게나. 난 그만 가서 자야겠어. 이제 그만 테리우스 녀석에게 가봐야지."

바이사코가 머리를 긁적이며 핀잔 섞인 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물품 창고에서 나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서류 목록을 보던 제로이드가 한마디 내뱉는다.

"하여간 단순 무식한 놈…말해 뭐하나. 흐음, 아무래도 이 레드 드래곤들에 대해 더 알아 봐야하겠는데 어디
쓸만한 부하 녀석이 누가 있더라? 갑자기 생각하려니 딱히 떠오르는 녀석이 없군."

*

케르베노아 영토까지 이제 일주일 후면 도착할 예정에 놓인 아이린 일행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계속 해서 전진했다.

아처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아이린 주변을 살폈으며 미니조우와 클락은 무슨 일인지 다른 이들 몰래 조용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이린도 알아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언제까지 침묵으로 일관할 겁니까?"

미니조우는 지금 당장이라도 클락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아이린에게 자신이라도 언급하겠다는 듯 이야기
했다.

"케르베노아에 다 도착하면 그때 제가 이야기할 테니 그때까지는 기다려주는 것이 나을 겁니다."

"하루라도 빨리 아는 것이 아이린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알게 되면 분명 다시 돌아가려고 할지도 모르니 지금은 내 말에 따라 줘."

"흥, 항상 자기 생각이 우선이네요."

미니조우는 맘에 들지 않는 다는 듯 클락을 크게 한번 흘겨보고는 이내 아이린과 메이샤링이 있는 쪽으로 말
고삐를 틀어 이동했다.

그들의 조용한 싸움을 눈치 빠른 앨런과 다칸이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비밀인지 궁금한 걸?"

앨런이 꽤나 궁금했는지 클락의 심각한 표정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숲은 햇살을 막아 어두웠지만 그들 일
행이 지나가는 길은 생각보다 평탄했다.

"직접 가서 물어보지 그래? 조용히 혼자 생각해서 없는 이야기 만들어 혼자 의심하느라 골머리 썩지 말고?"

다칸의 말에 뼈가 있음을 감지한 앨런이 친구의 얼굴을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지금 그 말의 의미는 뭔가?"

"글쎄, 그건 자네가 알아서 생각해야지.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하지 못한 걸 괜히 그 여자가 짝사랑하는
존재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도 어찌 보면 비겁함에 일종이 아닐까해서 말이지."

"너 정말…."

앨런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져갔다. 웬만해서는 얼굴에 미소를 떠나보내지 않을 만큼 안정적이고 편안한 성격
의 소유자인 그가 말이다. 클리오네가 홀로 사랑했던 자신의 친구, 그러나 그 친구에게는 단지 흥미의 존재였
던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들의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흥, 왜 정곡을 찌르니까 천하의 신사 앨런도 화가 나나보군. 호오, 날 때릴 기세로군. 어디 용기가 있으면 한
대 쳐보던지…그럴 배짱도 없었으니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에게 사랑한다 고백도 못해보고 버젓이 눈앞에서
친구에게 빼앗기기나 하지. 그것도 그냥 잠시 놀던 것으로…읔!!!"

다칸의 적나라한 말 공격은 앨런의 주먹에 의해 멈춰졌다. 앨런이 뻗은 주먹으로 인해 다칸은 피할 생각도 없
었는지 그대로 맞았고 둘은 그대로 말에서 낙마하게 되었다.

선두에 있던 흑기사들과 아이린 일행들이 이 작은 소란에 걸음을 멈추었고 뒤에 함께 있던 코보 족장도 꽤 놀
란 듯 둘은 지켜봤지만 그들을 말리지는 않았다.

다칸의 입가에 선혈이 흘러 내렸고 그가 손등으로 쓰윽 문질러 닦아내며 매서운 눈빛으로 앨런을 마주했다.

"쳇, 비겁한 놈!!! 날 때릴 자격이 네 녀석에게 있다고 생각해?"

다칸이 되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이 말한다.

"허헉, 뭐야!!"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넌 그녀에게 고백했어야했어."

"내가 어떻게? 그녀는 널 사랑했는데 너 역시 그녀와…."

"그녀와 뭐? 잤다고? 내가 잔 여자가 그녀 하나뿐이었어? 내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여자들 중 하나였다. 친구
였다면 잘 알고 있으면서…빌어먹을 그녀의 죽음을 마치 모두 내 탓인 것처럼 그 짐까지도 모두 나의 것인
듯 그렇게 괴로워할 거라면 그냥 내 손에 죽어라 친구. 너 사실은 그녀의 복수까지도 내 것이라고 멋대로 판
단하고 그래서 더 아파하는 거 아닌가?"

앨런은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클리오네의 죽음에 복수마저도 다칸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가 죽음 앞에서까지도 그리워하던 남자는 자신이 아닌 다칸이었으니까.

앨런이 다잡았던 주먹을 내리고 어깨에 힘이 저절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힘없이 주저앉
고 말았다.

"난……."

다칸이 다가와 앨런의 목덜미를 쥐어 잡더니 그를 일으켜 세워 얼굴을 바짝 맞대며 말했다.

"여행 내내 날 원망하는 듯한 네 눈길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 클리오네의 복수는 내 몫이 아니다. 그녀를 한
때 알고 있었던 친구로서 그녀의 복수를 도울 수는 있지만 그녀의 죽음 앞에서도 난 말한다. 난 그녀를 사랑
한 적도 사랑하지도 사랑할 생각도 마음도 없다. 그러니 그녀의 복수는 너의 것이다 앨런."

다칸은 자신이 해야할 말을 모두 토해내자, 앨런의 목덜미를 풀어주었다. 그 둘을 둘러싼 사람들의 눈을 한번
씩 스윽 마주하더니 이내 숲 속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버렸다.

"방금…클리오네라고 하셨습니까?"

클락이 창백해진 얼굴을 하며 앨런에게 다가가 묻는다. 다칸에 의해 엉망이 되어버린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서 단호한 어조로 이름을 재차 확인한다.

"말씀해주십시오. 하이엘프의 클리오네 맞습니까? 데본 제국에 있었던…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던 클리오네 맞
습니까?"

"……."

앨런이 말을 못 잇자, 메이샤링이 나섰다.

"그녀를 알고 있나요? 데본 제국에서 도망자가 되어 아리스샘터에서 있었어요. 하이엘프의 클리오네 맞아요.
앨런, 어쩌다가 다칸과 갑자기 이런 소란을 일으켰어요. 당신답지 않군요."

아이린이 앨런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에 상처들을 손수건으로 닦아내 주었다. 클락은 이마를 오른손으로 감싸
며 잠시동안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침묵으로 주변 역시 조용해졌다.

"코보, 앨런을 좀 부축해줘요. 난 다칸을 찾아올 테니까."

"혼자 괜찮겠소? 이곳 숲은 길이 아닌 곳의 지리는 험하오."

코보가 메이샤링 혼자 보내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 듯 물었지만, 그녀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그대로 다칸
이 사라진 방향 쪽으로 이동했다.

앨런은 친구의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했던 충고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여
전히 클리오네가 떠난 지금도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자신의 심장은 반응을 하고 있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들
로 자신의 살아있는 모든 시간들이 의미 없이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해야겠어요. 아처, 파라도, 아르테니 천막을 칠 장소들을 알아 봐줘요. 그리고 벅스
칼과 레오나르는 먹을 걸 준비해줘요. 미니조우와 클락, 코보 족장님은 다음 이동 장소에 대한 계획을 살펴
봐줘요. 앨런은 상처들을 좀 소독해야겠어요."

아이린은 응급 상자를 배낭에서 꺼내며 주변 일행들에게 각자 할 일들을 정해주었다.

누구하나 반대 없이 그녀의 명령대로 다들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장작불이 타들어 가는 불빛들이 숲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고, 그 옆에 앨런은 아이린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괜찮아요? 앨런."

"네, 죄송합니다. 저로 인해 괜한 소란을 피우게 해서."

"아니오. 저도 잠시 클리오네를 잊고 있었는걸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제게도 한
때는 잠시나마 친구였었는데…."

"정말 할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기억해주는 걸 보면 클리오네도 아마 행복해할 거예요. 단 한사람
이 마음에 담고 기억해준다는 거 소중하게 여겨준다는 거…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요. 너무 자책하지는 마
세요."

아이린은 자신이 과연 앨런에게 조언해줄 만한 자격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신 스스로에게
해야할 말들이 앨런에게 흘러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앨런은 아이린이 준 약을 먹고 잠이 들었고 다른 일행들도 피곤한 일정으로 인해 다들 쉬게 되었다. 다만 다
들 각자의 천막에서 쉬고 있었기에 누가 깨어 있는지는 서로 알 수 없었다.

"주인님 주무세요?"

아이린이 자신의 천막에서 쉬고 있는데 벅스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니 들어와."

아이린이 대답하자, 잘생긴 소년의 모습을 한 벅스칼이 하얀 머리칼을 긁적이며 들어온다.

언제 봐도 개구쟁이 이미지였던 벅스칼의 모습이 그녀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었다.

"왜 쉬지 않고…많이 피곤할 텐데."

"하핫, 레오나르라는 녀석은 지금쯤 꿈나라에 별나라 달나라 탐험중이지만 그 녀석 옆에서 좀체 잠이 와야 말
이죠."

"그래, 차 한잔 줄까? 아까 메이샤링이 만들어 준 건데 따뜻하게 데워놨어."

아이린이 녹색 빛이 나는 차를 벅스칼에게 내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많이 지쳐 보였
다.

"주인님, 테리우스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냥 그래."

"치잇, 보고 싶으시면서…아, 예전에 테리우스랑 주인님이랑 숨바꼭질하며 싸웠던 여행이 생각나네요. 주인
님과 만나기 전에 테리우스는 참 차갑고 이기적이고 무서웠는데 주인님 만난 후로는 좀 따뜻하기도 하고 실
수도 하고…아, 웃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죠. 예전에 메이샤링과 어울렸을 때랑 또 틀렸다니까요."

"메이샤링과?"

아이린은 궁금했다. 자신과 만나기 이전에 테리우스가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생활들의 모습들이 말이다. 그
는 어떤 모습들로 살아갔을지 자신이 없었던 공간에서의 그의 모습들이 저절로 궁금해졌다. 동시에 그의 친
구들에게까지도 묘한 질투가 느껴지기도 했다.

"원래는 제가 충실한 부하였죠. 제가 감히 지금처럼 테리우스에게 야!야! 뭐 이런 식으로 호칭하는 것은 감히
생각하기 힘들었거든요. 블랙드래곤 종족으로 대표로 마나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될 때 테리우스와 처음 만났
어요. 그때 그가 제 주인이 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죠."

"응."

"그때 제가 좋아했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고백하면서 사귀게 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
다면서 절 차버린 거예요. 아마 그때쯤 한참 친구로 지내던 메이샤링이 테리우스에게 고백할 그때쯤이었을
거예요. 치잇, 그 여학생이 좋아한다던 남자가 하필 테리우스여서 그때부터 제가 무척이나 미워했죠. 그 배신
감이란…지금 생각해도 굉장했던 거 같아요."

"테리우스가 그렇게 인기가 많았어? 그래서?"

벅스칼이 실연으로 했든 메이샤링이 고백을 했든 이상하게도 아이린의 관심은 테리우스의 반응뿐이었다.

"헌데 더 짜증이 났던 건 테리우스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는 거였죠. 그 녀석 주변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거든요. 고슴도치처럼 상대를 화나게 하는 뭔가가 있는 녀석이에요."

"벅스칼은 그래서 테리우스와 싸운 거야?"

"하핫, 싸워봤자 제가 죽을텐데 어떻게 싸우겠어요. 괜한 심술을 부리다가 테리우스가 어느 날 제가 마음에
든다면서 그냥 제게 친구의 권한을 줬던 거죠. 그래서 반말도 했다가 존칭도 했다가 그때부터 그냥 묘한 관계
가 시작된 거죠."

"그럼 벅스칼은 테리우스가 싫어?"

"몰라요. 그냥 친구였다가 하인이었다가 원수가 되었다가 동료가 되었다가 이 애매 모호한 관계에 익숙해져
서 싫은지 좋은지 그런 건 그때마다 달라지는 것 같아요."

벅스칼의 이야기 속에 그가 얼마나 테리우스를 그리워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벅스칼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상하게 테리우스를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들리는 걸?"

"네에? 미쳤어요. 제가 그녀석이 어디가 보고 싶겠어요. 주인님도 참…뭐, 그때 그 여학생이 보고 싶다면 또
모를까."

"그 여학생이 보고 싶다면 왜 만나지 않는 거야?"

"운명도 참 짓궂죠. 그 여학생은 그 해에 병에 걸려 죽었어요. 그런데 그게 꼭 모두 테리우스 탓처럼 느껴졌었
거든요. 그때 그 여학생을 다시 살리고 싶어서 금지되었던 흑마법을 남용했다가 전 데본에서 추방당할 뻔했
었어요. 그때 테리우스가 절 도와줘서…."

아이린은 벅스칼이 옛 생각을 떠올리는 눈빛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오래도록 그의 곁에서 좋은 벗이 되어준
벅스칼에게 새삼 고마움이 느껴진다. 차갑지만 따뜻한 테리우스의 모습들도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느껴지
는 것 같았다. 벅스칼은 한참동안이나 마나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옛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갔다. 아마도 그는
테리우스에 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 아이린을 찾아왔던 것 같았다.

벅스칼이 돌아간 후, 아이린은 다시금 잠자리에 들려고 몸을 눕혔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공주님 주무시나요?"

아처의 목소리였다.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아이린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대
답했다.

"아니, 무슨 일이야."

"저, 괜찮다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천막에 그의 그림자가 장작불의 불빛들로 인해 휘청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소리의 그림자가 그가
어느 정도의 술에 취했음을 알려주었다.

"너무 늦었어 아처…내일 밝은 날 이야기하도록 해."

좀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처가 또다시 언젠가 때처럼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이린에게 느껴졌
다.

"공주님…아이린, 공주님…제발 지금 저와 이야기를 해 주세요…아이린…."

아처가 천막의 입구 바로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낮게 중얼거렸다. 아이
린은 그가 걱정되어 나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거리감이 생기는 기분이 들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왜 테리우스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테리우스가 마음에 방패가 되어주는 느낌이었다.

"아처, 그만 가도록 해."

"공주님이 저와 이야기 해주시기 전까지 여기에서 꿈쩍도 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때와 다르게 아처는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아이린의 의견을 무시해버렸다.

함께 술을 마시던 파라도는 고주망태가 되어 그 자리에서 대자로 뻗어 잠이 들었고 너무 많이 마셔 머리가 깨
어질 듯이 아픈 아르테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을 나왔다.

"어, 아처 녀석 어디로 가는 건가? 나처럼 머리가 아파서 바람을 쐬러 가나? 아니, 저쪽은 공주님 천막이 있
는 곳이잖아."

아르테니는 일단 자신의 머리에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얼굴을 물에 담갔다. 잠시후, 그는 술에서 조금씩
깨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조금 차린 후, 아처가 걸어갔던 방향으로 조용히 뒤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친구가 술 주정을 부리듯 보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기에 친구로서 마음이 아팠
다.

"그만 일어나 아처."

밖에서 아르테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이린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아르테니라면 술에 취한 아처를 잘 보
살펴 줄 것이기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처를 마주해서는 안될 것 같았기 때문
이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르테니, 지금 내가 나갈 상황이 안돼. 아처를 숙소까지 좀 부탁할게."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르테니가 아처를 한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걱정 마시고 쉬세요. 공주님, 제가 책임지고 아처를 데려가겠습니다."

"고마워…아르테니."

그러자 아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막의 입구를 휙 하고 활짝 열어 제쳤다. 이에 아이린은 앉은자
리에서 숨이 멎을 만큼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공주님, 왜 절 피하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제가 지금 공주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어
려운 건가요?"

아처는 엉망으로 취해 있었다. 예전에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지금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 지조차 가
눌 수 없을 만큼 이성이 마비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처, 많이 취했어. 그만 가도록 해. 난 지금 아처와 할 이야기가 없어."

"왜요? 이거 놔, 아르테니!!! 지금 날 말리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아처가 아르테니에게 하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아르테니가 잠시 뒤로 주춤했
다. 친구는 술에 취해 이성은 마비되었지만 그의 의지와 움직임은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오늘 다칸과 앨런
의 싸움이 이상하게 아처의 심기를 건드려 놓은 듯 보였다.

"그래, 아처 내게 할 말이 뭐지 말해봐."

아이린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그녀에게서는 보통 흑기사들을 대했던 친근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알 수 없
는 방패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처가 다가와 아이린의 양팔을 두 손으로 꽉 쥐며 그의 눈을 마주치게 했고 그의 눈빛에 그녀도 피하지 않
고 맞섰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침착하게 묻는다.

"내게 할말이 뭔지 모르겠지만 이 손은 좀 치워 줘."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무슨 소리야?"

아처의 손에 힘이 그녀의 팔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아처, 아파 이거 먼저 놔줘."

"대답 먼저 하세요. 왜 저는 당신의 짝으로 안 되는 겁니까? 테리우스는 항상 당신을 힘들게 하는데 왜 그는
되고 저는 안 되는 겁니까?"

보다 못한 아르테니가 다가와 아처를 말리려고 한다.

"상관하지 마라 아르테니 이건 친구로서가 아니라 대장으로서 명령이다. 난 공주님을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처…네, 대장."

아르테니가 뒤로 물러난 것은 아처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아이린이 그의 말대로 하라며 고갯짓을 했기 때문
이었다.

"아처, 난 이미 결혼했어."

"이혼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제게 오시면 됩니다. 그럼 카나 황국과 등을 돌릴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집니다.
제가 그보다 더 많은 명예와 권력과 부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카나 황국에서의 제 지위는 얼마든지 더 높아
질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기만 한다면…제가 지금 흑기사로 존재하고 수행원으로 머
무르는 것은 오로지 당신 때문입니다."

아처는 절규하며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그녀에게 향하고 있는지 절실하게 포효하듯 아이린의 마음에 매달렸
다.

"아처, 다시 한번 말해야겠어. 난 이미 결혼했어."

"공주님!!"

"내가 사랑하는 건 테리우스였어. 아처가 내게 고백을 하듯 안 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어."

"제가 먼저 당신을 만났다면 그랬다면…."

"아니, 테리우스를 나중에 만났다고 해도 난 그와 결혼했어."

"왜죠?"

아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의 단호함에 테리우스를 향한 마음이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냥 이유는 없어. 난 테리우스와 있을 때 행복하고 그로 인해서만 마음이 숨막히게 아파."

"아프다구요? 그게 사랑이란 말씀입니까? 만약 그가 사라진다면 그럼 그때는 제게도 기회를 주는 건가요?"

"아니, 그가 없다면 나도 살 수 없어. 만약 아처의 말대로 그와 이혼이란 것을 미래의 어느 날 하게 된다고 해
서 지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건 아닐 것 같아. 그로 인해 내가 사랑을 배워가고 있는 것 같거든.
난 그를 사랑해 바로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미래는 알 수 없다지만 난 그가 없으면 살 수 없어…내 기억이 사
라진다고 해도 내 마음이 그를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다시 생을 살아간다면 그를 만나서 사랑하고 살아가고
싶어."

"왜 꼭 그가 당신의 짝이라고 확신하는 겁니까?"

"아처가 날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건 집착이야.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처의 감정을 알아서가 아니라
내 감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난 테리우스를 사랑해. 그리고 테리우스도 날 사랑한다고 고백했어. 그래서
내 사랑이 내게 소중하고 영원한 거야."

아이린은 아처에게 단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표현해야함이 부담스러웠다. 아니 힘들었다.

결국 상처를 줘야하는 것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었으리라.

"제 사랑이 당신에게 집착이란 말이군요."

"아처, 미안해…날 아껴주는 마음…그 사랑…내게 소중하지만…내게 영원하도록 소중한 건 테리우스야. 만
약 테리우스가 어느 날…날 향한 사랑이 사라졌다고 한다면 나 역시 아처처럼 이렇게 망가지는 모습 보이며
힘들어 할 것 같아. 사랑을 놓아주는 마음이 참 아플 것 같아. 내게서 누군가 테리우스를 빼앗아 간다면 아니
테리우스가 떠나버린다면 그럼 난 살수가 없을 것 같아…그러니까 아처 스스로를 너무 힘들게 하지마."

아처의 손이 점점 느슨해지면서 아이린의 팔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제가 당신을 너무 힘들게 했군요."

"미안해…아처, 그 말 외에는 할 수가 없어. 내 곁에 있기 힘들다면 날 떠나도 괜찮아."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아처는 아이린에게서 등을 돌리고 천막을 나갔다. 아이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를 아
껴주던 사람이 떠난 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으리라.

아이린 일행 주변을 조용히 움직이며 주시하고 있던 눈빛들을 그날 밤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세바스찬은 아이린의 천막 뒤의 나무 위에서 빙그레 미소지으며 낮게 읊조렸다.

"이런, 다칸이란 만만치 않은 녀석이 툭하고 나가버리고 이젠 흑기사의 아처까지 떠난다니 이거야 원…일이
이렇게 순순히 풀려서야. 저 조그마한 아가씨가 꽤나 힘들어하는 군 그래. 테리우스 그 녀석에게 멋진 선물
을 할 수 있겠어. 참 웃기는 커플들이야. 흐흐흐!!!"

*

메이샤링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칸이 우스운 고백을 듣고 나니 벙찐 기분에 웃음만 나올 뿐이었
다.

"호호호, 뭐라는 거죠? 그러니까 댁이 날 좋아한다 그 말인가요?"

"반응 한번 묘하게 하는 군 그래."

"앨런과 싸우고 나서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가 모르겠군요."

"이봐, 난 진신이야."

"호호호, 수문장이 장로에게 반말을 하다니 참 내가 너무 아량이 넓은 건가?"

메이샤링은 기막힌 다칸의 고백을 들은 후부터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를 찾아 쫓아왔지만 되려 그
가 그녀를 찾아오게 되었다.

잠시 바람만 쐬고 돌아가려고 했던 다칸은 뜻밖에도 메이샤링과 단둘이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페허가 된 곳의 장로를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

"당신도 그곳의 수문장이었다는 걸 잊었나 보군."

"어차피 데본 제국으로 귀환할 거잖아."

"그거야 테리우스에게 달려있지. 그런데 언제부터 날 좋아한 거죠?"

"몰라."

다칸은 괜한 고백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 점점 자신을 놀리듯이 접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고백이…당신을 좋아해 아니 사랑하는 거 같아…그 한 문장으로 끝이에요."

"그럼 뭘 더 바라나."

"뭔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얼마만큼 그런 감정을 지니게 되었는지 말해야하는 거 아닌가?"

"흠, 괜히 귀찮은 일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호호, 당신이 내게 고백했다는 걸 코보가 들으면 그의 표정도 가관이겠어."

메이샤링의 말에 잠시 다칸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되돌아온다. 사실 별로 친하게 지낸 관계는 아니지만 다칸
과 코보 사이에는 보이지 않은 신의가 형성되었던 사이였다. 그런 코보 족장이 아직도 메이샤링을 마음에 두
고 있다는 것을 다칸도 알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

다칸이 딴청을 피우듯 천천히 걸어가며 뒤따라 걷는 메이샤링에게 슬쩍 말을 건넨다. 그러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죠?"

"코보 족장과는 왜 이혼했는지…흐음, 그런 건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

"휴, 뭐 그거야 너무 우유부단하게 행동해서 답답해서 이혼했죠. 살다보면 그냥 물이 흐르는 대로 마음이 흐
르는 대로 살아가는 것도 방법이니까."

메이샤링이 밤하늘의 별빛들이 예쁘다며 감탄해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손에 사탕을 쥐고 있는 기분이 그녀
에게서 전해졌다. 자신의 고백을 무던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시원스럽게 바람을 일으키듯 통과시켜버리는 것
이 그리 썩 나쁘지는 않았다.

"당신은 참 이상한 여자 같군."

"호호, 뭐가 이상하죠?"

"언제든 누구에게나 웃으며 친근하게 대하는 걸 보면 가벼워 보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거 같고."

"어머, 나에 관해 많이 관찰했나보네. 이거 기분 좋은데…호호!! 그리고 또?"

메이샤링이 오르막길에서 다칸에게 손을 건네자, 그가 그녀를 이끌어 올려 주면서 대답한다.

"심각한 일을 가볍게 만들면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은 듯 하고 사랑 고백 앞에 거절을 해도 상대를 기분 좋
게…아니,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니."

"아,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보였군요. 그렇다면 그것도 제 모습이겠죠. 살다보면 뭐든 때가 있는 법이고 어떤
상황들이 생기기 마련이죠. 호호호,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든 여유를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까. 괜히 골치 아프게 심각한 건 난 싫어하거든…."

"그런데 왜 코보 족장에게는 그렇게 매번 화를 내지?"

다칸의 질문에 메이샤링의 입가에 웃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이 그의 귓가에 서서히 다가오
더니 아주 나지막한 소리를 전달해준다.

"후후, 그를 사랑하거든."

메이샤링의 그 말 한마디에 다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고백이 완벽하게 거절당했음을 받아들여야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아주 멋진 여자를 자신이 사랑했다는 사실 아니 사랑하는 감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일행이 머물고 있던 천막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메이샤링을 다칸이 부르며 말했다.

"이봐, 한 번 거절했다고 끝난 건 아냐."

"호호호, 이거 기분 좋은데 그럼 긴장하고 있어야지. 늙어서 호강하는 군 그래…코보가 질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텐데…호호호!!!!"

"못 말리는 여자로군."

=================================================================(^^*)==>6장 마침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66화
 겨울기사   | 2004·11·15 00:34 | HIT : 227 | VOTE : 0 |

7장 세바스찬과 일라이저의 욕심

아침이 되자, 아이린은 그녀의 일행들과 동그랗게 모여 앉은 곳에서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처가 떠
난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그는 클락의 숙소 앞에 자신이 맡았던 임무들과 관련된 서류들을 놓아
두고 떠난 것이다. 덕분에 일정에는 크게 차질이 생기지 않을 듯 싶었다. 다만 아이린에게 소중한 사람이 또
다시 떠났다는 것에 그녀가 많이 힘들 거라는 추측으로 일행들은 걱정스러웠다.

"다들 알겠지만 오늘 아침 일찍 아처가 떠났어요. 그가 맡았던 임무들을 클락이 대신 해주세요. 생각보다 빨
리 도착할지 모르겠어요. 일주일 후면 케르베노아에 도착할 테고 그곳에서 아카리나스 왕국을 세우는데 필
요한 서류 작업과 동시에 성과 궁을 어떻게 건설할지도 알아봐야 할 거예요. 지금으로서는 자금도 부족하고
제가 왕족으로 인정 받아야할 과정들도 있을 테고……."

아이린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눈
물을 흘리게 되면 그 동안 쌓아왔던 것들이 모두 무너져 내려 다시 일어 설 수 없을 것만 같아 꾹 참고 또 참
아낸다.

그런 아이린의 모습에 못내 안타까운 듯 파라도가 아르테니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대장이 정말 떠난 걸까? 너에게도 아무런 기색 없었냐?"

"글쎄, 대장도 나름대로 힘들어서 떠난 걸 거야. 하지만 곧 돌아올 거라 믿는다. 그러니 그때까지 공주님을
우리들이 잘 보살펴야지. 왜 우리한테도 말없이 떠나서 섭섭하냐?"

"아니, 그냥 좀…섭섭하네."

단순한 파라도는 아처에게 무척 섭섭하다는 듯한 기색을 얼굴에 그대로 나타낸다.

아르테니가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달랬다. 덩치 큰 녀석이 의외로 정이 많아 마음에 빈자리를 느끼면 가
장 먼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짓는다.

외모와 많이 어울리지 않는 친구 녀석의 모습에 아르테니가 쓴웃음을 짓는다.

이번에는 아르테니 스스로도 아처에게 섭섭함이 느껴졌다. 어젯밤 아이린에게 보였던 아처는 자신이 알고
있던 대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면서까지 힘들게 고백하고 거절의 쓴잔을 맛본
친구의 모습이 그 역시 못내 안쓰럽다.

주변 분위기가 다들 아이린의 상심으로 인해 가라앉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번에는 그녀도 힘들었는지 기
운 없는 모습을 애써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메이샤링이 곁에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보고 웃음을 건네 보기도 한다. 다행이 메이샤링의 기운
넘치는 에너지들 덕분에 아이린을 비롯한 그의 일행들의 분위기도 조금씩 나아져갔다. 그렇게 하루해를 다
시금 열기 시작한다.

"아무리 봐도 포기하기에는 너무 멋지단 말씀이야."

*

앨리어튼은 지금쯤 자신의 서신을 그의 딸이 읽었는지 궁금했다. 젬모스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 그 와중에도 그의 생각은 딴 곳을 향하고 있었다.

"두목."

"두목님."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본다. 묵묵부답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앨리어튼에게 다들 시선이
집중되었다.

"허험, 이런 미안하네. 그래 왜 불렀나?"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흠, 그러니까 제 말은 그 일행들이 분명 데본에서 온 자들인 것이 확
실한데 그렇게 보내도 우리들에게 별 피해가 없겠냐하는 그 말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젬모스의 사람들은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이린 일행들이 떠나고 난 후, 줄곧 그들은 순순히 받아주고
떠나 보낸 것이 앨리어튼의 명령아래 행하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혹여 데본에서 군사들이라도 들이닥
치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었다.

"내가 명령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또한 거기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데본의 군사들이라도 들이닥치면 책임이 무슨 소용있습니까? 이미 다 죽은 후에…."

한 녀석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앨리어튼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나 그의 말이 전혀 가망성이 없는 소리는 아
니었고 다들 걱정하는 부분이었기에 앨리어튼의 대답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들 모두가 데본에서 온 자들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카나에 속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을 이끄는 자는 나는 신뢰한다. 결코 이곳에 피 바람이 불 일은 없다. 걱정하지 말도 다들 떠날 준비를 해라."

"네?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란 말씀이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갑자기 그런 말을…."

앨리어튼의 발언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을 모두 떠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원정대를 구성해서 아카리나스 왕국에 세워지는 영토에 보낼 것이
다. 우리들에게 그곳에 새로운 터전이 될 것이고 더 이상 도망자의 신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클락
과 미니조우를 통해 예전부터 진행해 오던 일이다. 그러니 준비하라."

젬모스의 사람들은 앨리어튼의 발언에 한편으로는 기뻐했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안함의 긴장감을 지녀
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 두목은 한번도 그들을 힘들게 하는 선택을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 그들은 다시 그들의 두목의 선택을 따르게 될 것이다.

*

아이린 일행이 계곡에 물이 흐르는 것을 발견하고 목이 축이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들이 이들 일행을 순식간에 포박하고 만다. 그들이 그렇게 어이없이 적들에게 당한 까
닭은 그들 모두가 마법의 힘을 빌어 함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계곡에 흐르는 물.

그들의 목을 축이도록 도왔던 시원한 물이 원인이었다.

"하하, 물을 마시고 기운은 못 차리는 군. 이렇게 허술해서야 내가 너무 싱거워지는 군."

세바스찬이 모습을 나타내며 무릎을 꿇은 채 포박되어 있는 아이린 일행들에게로 다가왔다. 파라도는 너무
많이 마신 탓에 기절해 있었고 나머지 일행들은 자꾸 몸이 흐느적거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금발의 숙녀 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마법을 걸 어둔 동굴에 가둬라."

세바스찬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들이 신속하게 움직인다.

"넌…어떻게…."

아이린이 세바스찬을 알아보고 눈을 마주치다가 픽하고 쓰러진다. 그런 그녀를 안아 들고 세바스찬이 숲 속
어딘 가로 사라져 버렸다.

자신들의 주군이 남의 손에 의해 납치된 것도 까맣게 모른 채로 단체 약속이라도 한 듯 기절했다가 잠시 후
일어선 그들이 맞이한 곳은 음침한 동굴이었다. 그것도 마법에 걸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곳에서 말이다.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하다니……할 말이 없다."

아르테니가 두 손으로 머리를 포개듯 움켜쥐며 고개를 꺾어 동굴 천장을 향해 절규한다. 실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확인도 없이 음식물을 섭취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그들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나중에 아처
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가. 파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주도면밀하지 못한 행동에 대해 이처럼 후회하기는 처음이었다.

"망할 녀석들 대체 어디에서 온 녀석들이었는지 왜 공주님을 납치해갔는지…이러고도 우리가 수행원이라
니…주군의 흑기사 자격도 없어."

당황하며 자책하고 있는 두 흑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다칸이 코웃음을 친다.

"웃기는군. 하다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지. 이런 일로 당황하는 모습이 더 우스워."

"뭐얏!!!! 이 녀석이 죽을 라고!!!!"

파라도가 욱하는 성격에 다칸의 멱살을 쥐며 그의 얼굴을 맞댄다. 그리고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그를 위
협하듯 쏘아봤다. 그러나 다칸의 표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벅스칼과 코보 그리고 미니조우는 셋이 머리를 맞대고 동굴을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런 마법은 가이루덴에서 쓰던 것들인데…데본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전 조금 어렵겠는데요."

벅스칼이 턱을 왼손으로 매만지며 멋쩍은 듯 클락과 미니조우의 눈치를 살핀다.

"글쎄, 하이엘프와 드워프족들은 카나와 데본의 영향력과 거의 거리가 멀어서 이렇게 카나의 영향을 많이 받
은 마법의 주문을 해결할 수 있을지는 장담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클락의 설명에 동의한다는 듯 미니조우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다칸과 파라도가 서로를 노려보며 크게 싸울 듯 보이자, 아르테니와 메이샤링이 다가와 그들을 말린
다.

"파라도, 저 녀석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냐. 공주님을 구하려면 힘을 합쳐도
부족하다고…여기서 우리끼리 싸운 들 무슨 소용이야. 어서 이 손 놔줘."

아르테니가 파라도의 손을 붙잡아 떼려고 힘을 주며 말하자, 그의 손이 조금 느슨해진다.

"다칸, 당신도 그만해요."

메이샤링이 다칸에 어깨를 툭 치며 말하자 그의 손도 느슨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여전히 잡아먹을 듯한
파라도의 눈빛과 건방져 보이는 다칸의 눈빛을 그대로 둔 채로 동시에 서로의 멱살을 놓아버린다.

*

세바스찬은 자신의 부하들이 준비 해 놓은 천막 안의 간이형 침대 위에 아이린을 눕혀 놓는다. 그리고 주머
니에서 작은 보랏빛을 내는 약병을 꺼내어 그녀의 코끝에 향을 맡도록 했다.

그러자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그녀의 눈꺼풀이 열리고 푸른 눈동자가 빛을 내며 세바스찬을 바라본다. 그리
고 이내 상대가 누구인지를 인식하자,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입을 연다.

"세바스찬, 이게 무슨 짓이죠? 날 납치 한 건 가요?"

그녀의 표정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세바스찬이 코끝을 찡그린다. 물론 자신을 반기지 않을 거란 건 예
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깝게 그녀를 대하는 느낌이 조금은 색달랐다.

언제나 한 발치 멀리서 관찰하는 정도였는데 자신이 대적할 만한 상대의 연인을 아니 아내를 가깝게 대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녀의 구겨진 인상을 제외한 다면 말이다.

"이런 그렇게 잡아먹을 듯 바라 볼 것은 없잖소?"

"내가 당신을 그렇게 바라본 것 같나요?"

"흠, 아닌가?"

"틀렸어…내 동료들은 어디 있지?"

아이린을 말을 내리면서 위엄스런 자태를 취하고는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묻는다. 작은 천막에 그
녀와 세바스찬만 존재하고 있다. 당연히 그녀의 일행들이 걱정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걱정 마라. 곧 그들을 만나게 해 줄 테니…솔직히 너에게는 관심이 없다. 내가 원하는 건 테리우스니까."

"알고 있다."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답변하자, 잠시동안 그녀의 눈을 세바스찬이 응시하다가 입을 연다.

"뭐, 알고 있다니까 앞으로 내 말에 협조해야한다는 것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 테리우스 때문에 우리를 붙잡아 뒀다 이거로군. 만약 내 동료들에게 해를 입힌다면 내 손에 목숨이 끊
어질 걸 각오해야 할거야."

아이린의 협박에 세바스찬은 기가 찼다. 잡혀 온 주제에 게다가 테리우스도 없는 마당에 어디서 저런 배짱
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하핫, 기가 차는 군. 네 몸 하나 버티지도 못하고 잡혀왔으면서 그런 협박을 할 배짱은 어디서 오는 거냐. 이
래저래 여자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까."

"잘 됐네. 나 역시 당신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니까. 날 어떻게 이용해서 테리우스에게 접근할 생각인지는 모
르겠지만 이미 떠난 사람이야. 그만 내버려둬."

"글쎄, 데본 제국에서 떠난 것이 마치 내 탓인 듯 들리는 군. 그건 그가 자초한 일이고 그 원인은 아이린 바
로 당신 아니던가?"

"…그건…."

말이 막힌다. 비아냥거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약올리는 보라색 머리칼의 남자의 고운 면상을 한
대 갈겨 주고 싶어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니까. 게다가 떠나 보낸 테리우스에게 이렇게 잡힌 모습을 보여야할 걸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제 곧 목적지에 다 달아 성실하게 노력하면서 하나씩 쌓아 올리면 그럼 아카리나스 왕
국을 건설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곳곳에 함정과 마주 대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매번 산너머 산 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아이린이었다. 테리우스까지 희생시키면서까지 시작하고 끝을 내려던 일을 지
금 이 순간 그 꼭 붙잡은 손을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내가 대체 왜 이렇게 흔들릴까? 테리우스 지금 어디 있는 거니?'

아이린은 자신을 혼자 남겨둔 채 천막을 나가버리는 세바스찬의 등을 보면서 생각했다.

*

한편 일라이저는 케르베노아 영토에 도착하자마자, 인상부터 구겼다. 더러운 냄새와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
를 연신 짜증나게 만들었다.

"이런 곳에 무슨 왕국을 세우겠다는 건지 이런 땅에서…그 여자도 그 남자도 다 제정신이 아니지. 아니, 멀쩡
한 부귀영화를 내버리고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야. 얘들아, 흩어져서 테리우스를 찾아라. 난 이곳에서 쉬고
있어야겠다. 어두워져서 꼼짝도 하기 싫어. 이 피부를 좀 보라고…휴, 난 잠시 휴식이 필요하겠어. 하녀들은
내가 쉴만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전사들은 테리우스를 찾도록 해라."

일라이저가 귀찮다는 어조로 자신의 아랫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처음 그녀와 동반했던 전사들과 나중
에 불러들인 하녀들은 일언반구 저항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따른다.

사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쉴 곳을 포장하듯 만들기란 그리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게다가 이런 곳에서 사
람을 찾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이 제 아무리 실력을 겸비한 재원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관은 까다롭고 도도한 여인이었다. 반대 의사를 표현하다가 반죽음을 맞이하고 쫓겨난 예가 많았기에 다
들 저항하지 않는다. 워낙에 어릴 적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성취했던 여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건 그렇게 세바스찬 오라버니는 일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지금쯤이면 아이린을 붙잡았겠지? 나도
슬슬 테리우스에게 접근을 해야 하는데 말이지. 대체 어디서부터 찾는다는 말이냐. 육로가 생겨서 망정이
지, 스타 섬을 통해서 갔다면 아마 배를 탔을 테고…아, 난 정말 항해란 질색이다."

"저 공주님 먹을 것을 다시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라이저의 하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상급 인이 조심스레 그녀에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 말을 꺼낸다.
점점 시장기가 가시고 있던 일라이저가 그 말을 듣자 신경질을 낸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어머, 아니지. 이런 말투는 내게 안 어울리지. 흐흠, 그게 무슨 소리냐?"

"저, 그게 케르베노아 영토 지대로 들어서자, 준비해 두었던 식 재료들이 모두 상해 버렸습니다."

"뭐? 원인이 뭐야?"

"그게…저희도 그 원인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지대로 넘어와서 그랬다는 것 말고는…

읔!!!"

하녀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짧은 비명을 지른 것은 일라이저가 던진 그녀의 뾰족한 신발 때문이었다.

"그만!!! 됐으니 어서 구해와라. 저런 멍청한 것들을 하녀들이라고 데려 왔으니."

"그럼 몇 명이서 갈까요."

일라이저의 시중을 들도록 파견된 하녀들은 열 명이었다.

"이 지역이 넓은 것 같으니 모두 한꺼번에 움직여서 갔다와라. 전사들의 음식도 준비해야 할 것 아니냐. 이곳
이 궁전이었다면 너희들은 다 감옥 행이야."

"네, 알겠습니다. 일라이저님."

고약한 주인의 명령에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어느 사이 일라이저는 혼자 남았다.

그녀는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자신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못 마땅한 듯 연신 투덜거리며 돌과 흙으
로 뒤범벅이 된 땅을 밟아 걸어갔다. 그녀의 신발 높이가 너무 높고 뾰족한 탓에 자꾸 걸려 넘어졌고 덕분에
그녀가 차려 입은 고운 붉은 빛 드레스도 엉망이 되어 고운 빛을 잃어갔다. 그녀가 하녀와 전사들에게 명령
을 하며 호령했던 곳에서 벌써 2백 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편없어. 이런 곳에 무슨 희망이 있다는 걸까? 휴우, 아무래도 하녀들과 전사들을 기다려
서 시키는 편이 낫겠다. 나 혼자 돌아다니는 건 무리야."

일라이저가 막 몸을 되돌리려는 찰나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휘익∼

낯선 휘파람 소리에 놀라 곧바로 그 소리가 나오는 위쪽으로 고개를 제쳐 들고 살피며 소리친다.

"누구냐!!!!"

"오호, 이게 누군가? 그 최고로 아름답다던 가이루덴의 공주께서 이런 척박한 곳까지 무슨 일이신가?"

"어떤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일라이저는 상대의 목소리만 듣고서는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자가 높은 나무에서 가볍게 뛰어내리
더니 고개를 들고 자신의 몸을 툭툭 털어 내면서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이런 날 몰라보다니 이거 섭섭해야하는 건가? 쳇, 너야말로 여기는 무슨 일이냐?"

테리우스였다.

그녀를 그토록 애태우게 만들었던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한 남자.

이런 척박한 땅에 그녀 스스로가 발을 디딜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 오만한 녀석.

예전 모습에 비해 턱수염이 길러져 있었고 조금 야위어 보였지만 껄렁한 태도와 더불어 건방진 눈빛은 그가
틀림없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일라이저는 일 순간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으며 침착 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뒤로 물러서거나 순응적인 태
도를 보이면 상대는 예전처럼 자신을 하찮게 여길 것 같았다. 자신의 도도함으로 그에게 더 당당해야만 그
를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테리우스, 당신이군요."

그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쓰윽 뒤로 넘기며 짙은 흑요석의 눈동자로 흥미롭다는 듯 일라이저를 바라본다. 그
리고 아무런 말없이 등을 돌리고 그녀가 왔던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한다. 급한 마음에 일라이저
가 입을 열어 말을 건넨다.

"저기 이봐요 테리우스."

"날 부른 건가?"

"그래요.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별로."

예상은 했었지만 남자의 무관심한 대답에 여자의 자존심에 작은 금이 새겨진다. 그러나 이에 물러나지 않고
다시 남자에게 말을 건넨다. 테리우스는 그녀에게 그럴 만큼 가치 있었다.

존중하거나 사랑의 존재가 아니라 욕심을 부리고 싶을 만큼 거대한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해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이런 위험한 곳에 숙녀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건 신
사가 할 행동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래서?"

"사실 전 길을 잃었어요. 옛정을 생각해서 절 수행해주는 건 어떤가요? 가이루덴으로 향하는 배에 탑승하는
것까지만 도와줘요. 테리우스."

일라이저의 제안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먼저 그녀가 이곳까지 혼자 왔을 리도 없었거니와 다시 돌아가려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테리우스의 대답은 명쾌했다.

"좋아. 날 따라와라."

"어머, 고마워요 테리우스."

앞장서서 걸어가는 테리우스의 입가가 씨익 포물선을 그리며 미묘한 미소를 지어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일
라이저는 두 손바닥을 찰싹 맞장구 치며 그의 뒤를 총총 걸음으로 따라간다.

*

아이린은 세바스찬이 나간 후, 주변을 살피며 도망갈 궁리를 했다. 일단 천막 밖에 여러 명의 보초들이 수시
로 움직이는 것을 본다.

"아무래도 세바스찬이 부하들을 많이 대동했나봐 이를 어쩌지? 그래, 흑기사들도 있고 벅스칼도 있고 다칸
과 코보 족장도 있고 그렇게 만만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 믿어."

아이린은 자신의 일행들이 크게 다치진 않았을 거라 희망했다.

그때 천막의 입구 틈새로 하얀 빛줄기가 들어서더니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아이린의 귀를 윙윙거리게 만들면
서 그녀가 일순간 바닥으로 쓰러져 버린다.

으아악!!!!!!!!!!!!!!!!!!!!

악!!!!!!!!!!!!!!!!!!!!!!!!!!!!

쉬익!!!!!!!!!!!!!!!!!!!!!!!!!!!!

쇳소리 마찰음이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린은 배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
는 것을 참지 못하면서 의식을 되찾았다.

"허어억!!!"

조용히 누워 있던 그녀가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숙이며 헛구역질을 해댄다.

몸 속에 무엇인가가 자리를 잡고 속을 비틀어대고 있는 느낌이 들었고 머릿속은 하얗게 질린 듯이 어안이 벙
벙해져 있었다.

현실을 인지하며 그녀의 눈이 초점을 맞추자, 반가운 얼굴들이 그녀를 반기고 뭐라고 계속 말을 하는데 도
통 들리지가 않았다.

"아이린, 이제 정신이 든 거야? 괜찮아? 어휴, 이 얼굴 하얗게 질린 것 좀 봐. 땀으로 목욕이라도 한 것 같잖
아."

메이샤링이 창백해진 아이린의 얼굴에 식은땀을 닦아 내면서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러나 아이린은
아직 제 정신이 아닌 듯 자신을 유령이라도 보는 표정을 지었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안 깨어나셔서 많이 걱정했습니다."

"저도요. 공주님."

아르테니와 파라도가 아이린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목소리가 드디어 아이린의 귀에 들렸다.

"아, 어떻게 된 거야?"

아이린이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다시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다. 그때 누군가 카나 황
국이라는 단어 하나만 그녀의 귓가를 스며들었고 아이린은 다시 혼절하고 말았다.

*

반데라스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더불어 곁에 있던 마가레타 황후 역시 얼굴에서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핏줄을 찾은 행복감에 사로 잡혀 있는 중이었다.

"하하하하하!!!!!!!!!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드디어 우리들의 손녀를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니…안 그렇소
황후."

"네, 그럼요. 정말 기쁩니다. 이 모든 것이 아토스 공작의 공입니다."

마가레타 황후가 반데라스 황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 앞에서 부복을 하고 있는 아토스 공작을 손으
로 가리킨다.

"맞소. 아토스 공작의 이번 공을 크게 높여 거기에 합당한 보상을 할 생각이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반데라스 황제 폐하."

"그래,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이린의 일행을 비롯해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세바스찬의 무리까지 모두 카나 황국으로 소환하게 된 작전
에 일등 공신이 된 아토스 공작이 고개를 들어 반데라스 황제에게 입을 열었다.

"네, 폐하.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 저의 고유 권한을 다시 돌려 받고 싶습니다."

"호오, 고유 권한이라면?"

"네, 폐하. 흑기사의 대장으로써 아이린 공주님의 약혼자 자리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하하하, 그거라면 내가 오히려 다시 부탁할 생각이었다. 데본의 마왕과의 결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사
실…아토스 공작이 아이린 공주의 약혼자가 되어 평생 배필이 되어 준다면 카나의 절반은 그대의 것인 된
다. 그 부탁을 수용하겠노라."

다소 야위어진 아처 아토스 공작이 반데라스 황제의 윤허에 감사의 절을 올렸다.

*

귀빈실에 화려함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의식을 잃은 아이린을 보살피던 메이샤링이 한마디한다.

"정말 대단한 곳이야. 카나 황국이라는 곳…이렇게 넓고 이렇게 화려하다니…내부 장식이 온통 번쩍이는 황
금에 오색가지 보석들이라니 뭐, 데본도 만만치 않지만…거기는 좀 검붉은 색 위주라면 여기는 완전히 꽃밭
분위기잖아. 세상에 아이린의 이곳의 후계자라니 왜 이걸 다 포기한 거야? 나라면 절대 못 했을 텐데. 쯧쯧,
테리우스가 뭐라고."

겨우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린을 바라보며 메이샤링이 혀끝을 찬다.

"그래도 적의 소굴에 들어왔다는 기분이 들어서 왠지 으스스한데요. 이곳 사람들은 뭔가 알고 있겠죠?"

벅스칼이 몸서리를 치는 듯한 몸 동작을 해 보이면서 두 명의 흑기사들의 눈치를 살핀다. 왜 저들은 이곳에
왔으면서 자신들과 같이 갇혀 있는 것이지 의아해했다.

"미안하게도 우리들도 영문을 모르겠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니까.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도 알 수 없고 이
런 거대한 카나의 마법 진을 형성하는 것은…설마 그럴 리는 없을 거야."

아르테니가 말을 잇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파라도가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아르테니를 가리키며 그 역
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냐, 그럴 리가…하지만…."

두 사람의 생각이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사람이 그럴 리 없을 거라고 둘 다 받아
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흥, 내 생각에는 너희 둘이 예상하는 대로인 것 같은데 뭘 그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클락이 다칸에 빈정거리는 말에 질문을 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저 흑기사들의 대장 아처란 녀석을 말하는 거다. 우리를 이곳에 끌고 온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을 상실했던
그 못난 녀석 말야."

다칸의 말은 적나라했고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는 파라도가 재차 그의 멱살을 다시금 부
여잡으며 으르렁거린다.

"야, 임마!!!! 우리 대장을 모욕하지 말아!!!!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너 이 놈 오늘은 기
필코 끝장을 내주고 말테다."

"하이고, 이거야 원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군."

파라도와 다칸이 다시 으르렁 거리며 싸움을 하려 들자, 이번에도 아르테니와 메이샤링이 다가와 그들을 말
린다. 이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코보 족장이 날카로운 한마디를 그들에게 던진다.

"다들 그만 둬!!!! 아이린이 아파서 쉬고 있는 공간에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이야. 지금 서로 싸울 때인가? 상황
을 봐가면서 행동들을 할 알만한 사람들이 이 무슨 추태야!!!!!"

아이린의 이마에 올려놓은 수건을 다시 물에 적셔 짜고 있던 레오나르가 싸우는 이들을 흘긋 바라보다가 다
시금 아이린에게 신경을 썼다.

어느 날에는 한없이 강해 보이던 그녀가 되고 어느 날에는 이토록 가냘픈 그녀가 되기도 한다. 덧없는 여행
에 함께 몰려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던 레오나르였다.

다소 화려했던 성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만 지금은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재미나게 자신 앞에
서 함께 마주하고 있는 벅스칼이란 친구도 마음에 들었던 마야의 왕자였다.

"아프지 말아요. 아이린."

레오나르의 한마디에 벅스칼이 킥킥 대며 배를 움켜 잡고 웃어댄다.

"아니, 왜 웃는 겁니까? 벅스칼."

"큭큭큭, 당신은 언제나 말하는 목소리가 꼭 버터 발라 놓은 것 같다니까. 히힛."

"하핫, 그런가요? 벅스칼 당신을 다음에 꼭 나의 성에 초대하고 싶군요."

"아니, 왜?"

"꼭 만나서 배움을 얻을 분을 소개해 주고 싶어서요."

"히힛, 그게 누군데?"

"르노아르라는 분입니다."

"뭐? 날 더러 그 버터 교육을 받으란 소리야?"

"아니, 그를 아십니까?"

레오나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벅스칼을 바라보고 묻자, 그가 딴청을 피운다.

'치잇, 그거야 아이린님의 반지에 봉인되었을 때 만났으니까 알지 이 바보야.'

그러나 자신이 반지에 봉인되었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귀빈실은 꽤 넓었고 아이린 일행들이 각자가 쉴 수 있는 공간과 침대 그리고 음식들이 충분히 있었다. 게다
가 시간이 되면 커다란 문을 열고 치료사가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린의 상태를 점검하고 나갔다. 얼
굴을 하얀 천으로 가리고 들어온 치료사는 일행들의 질문에는 묵묵부답이었고 벅스칼이 한번 치료사의 옷깃
을 붙잡았다가 불에 덴 듯한 주술에 걸려 크게 다칠 뻔했었다.

그 후, 치료사의 방문은 아이린의 안위에만 신경 쓰도록 어느새 일행들의 관심 밖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
게 일 주일의 시간이 흘렀고 혼절했던 아이린도 정신을 차리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
된 채 귀빈실에서만 머물고 있던 이들 일행은 처음에는 지친 몸을 쉬고 싶어 탈출하는 것은 보류한 상태였
다. 그러나 이제 아이린이 건강을 찾게 되었고 그 사이 그들도 휴식을 취했기에 슬슬 귀빈실을 벗어나고 싶
은 생각이 들었다.
벅스칼과 레오나르는 아이린의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고 아르테니와 벅스칼은 창 밖의 풍경을 보면서 카나
황국의 움직임을 살폈다. 메이샤링과 코보는 무슨 일인지 다투고 있었고 물론 메이샤링의 일방적인 공격에
코보가 당하는 상황이었다. 다칸과 앨런은 무뚝뚝한 상태로 서로에게 눈길한번주지 않았지만 그 주변은 아
주 무겁디무거워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클락과 미니조우는 원탁에 자리를 잡고 지도를 살피면서 각자 필요한 메모를 적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기가 카나 황국이라니 왜 우리들이 여기에 오게 된 거야?"

아이린의 질문에 다들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그 점이 궁금하니까. 그러나 초반에 다칸과 파
라도가 다투었던 일을 떠올리니 더더욱 그녀에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혹시 아처의 소행이라면 분명 아이린은 상처를 받을 것이고 이제 겨우 기운을 차린 그녀에게 그런 상처를 그
들이 전해주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저희도 잘 상황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이 저희를 잘 보살피려는 듯 보이
고 공주님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수시로 치료사가 들어와서 치료하고 같다는 것입니다. 이미 흑기사의 자
리를 내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저희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르테니가 지금의 상황을 아이린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러자 파라도도 한마디 거든다.

"공주님의 건강이 괜찮으시다면 지금부터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해 볼 생각입니다."

파라도의 말에 다들 공감하듯 수용하겠다는 눈빛을 보이며 아이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럼 우리가 이곳에 얼마나 있었던 거야?"

"일 주일이야."

메이샤링이 대답해주었다.

"일주일? 그럼 그 동안 카나 황국이라는 사실 말고 우리를 끌고 온 목적이나 뭐 그런 건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이야?"

"응."

너무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몸은 카나 왕족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기에 일
반 사람의 몸 구조와는 달랐다. 카나 왕족은 빛을 흡수하듯 몸 안이 에너지로 움직이고 있어 천 일을 넘게 수
면을 취할 수도 있었고 생명을 잉태하고 보존하는 기간도 일반 사람들과 달랐다. 그것은 데본 왕족도 마찬가
지였다. 파트라 대륙에서 유일하게 에너지로 움직이는 카나 황국과 데본 제국의 왕족들을 하나의 일행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바로 아이린이었다.

아이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 쪽으로 다가가 밖을 바라본다. 이곳의 계절은 겨울인지 눈이 내리
고 있었다. 하얀 눈이 곳곳에 덮여져 있어 건물의 모습을 한층 푸근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눈사람을 만들어 보고 싶어."

아이린의 엉뚱한 소리에 다들 의아해 한다.

"눈사람이라…그거 재미있겠군요."

레오나르만이 아이린의 말에 답변해주며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조금은 편안해 보여서 그는 안심을 했다.

"아,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아. 그만 나가는 방법을 강구해 보자. 클락 이곳의 구조를 파악할 만한 정
보는 수집했겠죠? 클락이라면 그 동안 그랬을 거 같은데?"

"네? 아, 제 나름대로 준비는 해 두었습니다."

아이린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창가에서 원탁이 있는 곳으로 다가서며 그의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 그러자 다
가오는 아이린의 행동에 클락이 조금 당황해하며 원탁에 올려놓은 서신을 재빨리 다른 서류 아래로 밀쳐 넣
었다. 그 모습을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미니조우가 힐긋 바라보며 못마땅해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알아
차려 버린 아이린이 모른 척 원탁을 빙그르르 돌다가 서신을 휙 하고 낚아채듯 집어냈다.

"헤헤, 이게 뭔데 내게 감추는 눈치야? 어, 이거 내 이름이 쓰여있는데…아이린에게…앨리어튼…어, 앨리어
튼님이 내게 쓴 편지잖아. 클락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러자 클락에 앞서 미니조우가 대신 대답을 해 준다.

"그건 앨리어튼님이 아이린님에게 전해 달라고 클락에게 부탁하신 거예요. 계속 전해 주려고 했는데 적당한
때가 되지 못해서 좀 늦은 겁니다."

"아, 그랬구나. 그럼 이거 내가 읽어봐도 되는 거야? 클락."

이제 겨우 회복하게 된 아이린에게 그 서신의 내용이 약이 되는 것보다는 독이 된다는 것을 클락과 미니조우
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상황 이젠 아이린을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네, 아이린님께 보낸 서신이니까요. 죄송합니다. 늦게 전해 드리게 되어서…."

"아니 그 동안 상황이 그랬는데 뭘. 그럼 여기서 읽어봐도 되지?"

"아니, 혼자 보셨으면 합니다. 다른 방으로 가셔서 될 수 있으면 혼자서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래? 응, 알았어. 그럼 난 이걸 읽어 볼 테니 다들 모여서 이곳을 나갈 방법을 모색해 보도록 해."

아이린은 입맛을 다시며 배가 좀 고파 맛난 음식들을 먼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클락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한 동안 아팠던 것이 몸이었는지 마음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몸이 가뿐해져
서 인지 마음도 편안해진 기분이 든다.

아이린이 모퉁이를 돌아 밀실이 되어 있는 방으로 돌아서다가 갑자기 심장이 쿵하는 설렘을 느끼고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자신의 배를 그녀도 모르게 매만지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든든한 느낌 따뜻하고 강한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다. 뭐지? 이 느낌은…마치 테리우스를 만나는 그런 느낌과 비슷해 기분이 들어.'

잠시 그 느낌에 눈을 감고 취하다가 정신을 든 아이린이 방으로 편지를 쥔 채 들어섰다.

============================================================================>7장 마침 ^^*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67화
 겨울기사   | 2004·11·27 19:40 | HIT : 187 | VOTE : 0 |

8장 진 실

일라이저는 처음에 자신이 원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테리우스를 따라 나섰
다. 그런데 점점 험한 곳으로 가면서 자신의 모습이 엉망이 되어가자, 내심 그가 자신
을 일부러 골탕 먹이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순순히 날 바래다주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디까지 가는 지 따라 가봐? 아님
여기서 그냥 멈춰? 아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라이저는 등만 보이는 테리우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계속되는 의심으로 결정을 내
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한 나라의 공주라고 하기
에 부끄러울 만큼 지저분한 상태였다. 흙 길을 지나서 자갈을 걷게 되었고 그로 인해
부러진 왼쪽 신발의 뒤축이 부러졌다. 게다가 곱게 차려 입었던 붉은 드레스는 점점
형태를 알 수 없을 만큼 여기 저기 얼룩이 지고 찢기고 올이 풀려 있다. 이 모든 것이
테리우스가 흙으로 자갈로 심지어 늪까지 있는 곳으로 걸어갔기 때문이었으니.

깜깜한 밤길이기에 바로 앞, 테리우스의 모습만 보고 걸어갔던 그녀는 덕분에 험난
한 길을 감각으로 더디며 모욕 아닌 모욕을 몸소 느껴야만 했다.

냇물이 흐르는 곳에 도착하자, 목도 축이고 몸도 씻어내고 옷도 닦아 낼 겸 그녀가 말
한다.

"테리우스! 더 이상은 못 가겠어요. 좀 쉬었다 가죠."

지칠 대로 지친 일라이저가  목놓아 울 듯이 애절하게 테리우스에게 부탁하자, 그가
비로소 그녀를 뒤돌아 봤다. 그리고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그렇게 하지."

테리우스가 대답을 한 후, 조용히 냇물 주변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일라이저가 얼
굴을 씻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라이저 그녀가 케르베노아 영토에 들어 왔을 때부터 테리우스는 낯선 이방인의 진
입을 감지하게 되었다. 조용히 관찰한 결과 낯익은 얼굴이다.

데본 제국에서 자신에게 청혼했던 여자. 언젠가 마나 아카데미에서 마주쳤고 아이린
을 밀쳤던 그 여자였다. 메틴 왕의 아들 세바스찬에 사촌누이라고 했던 오만하고 제
멋대로 인 바로 그 여자가 자신을 왜 찾아 왔는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묻는다고 해서 호락호락하게 대답할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니
곁에서 그녀가 먼저 문을 두드리기를 기다린 후에 그녀 스스로 입을 열도록 유도하
는 것만이 최선책일 듯 싶었다. 괜히 걱정이 되는 것은 이것이 일라이저의 단독 행위
인지 아니면 세바스찬도 관련된 일인지도 알고 싶었다. 만약 세바스찬이 관여한 일이
라면 분명 아이린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도 그 조그마한 녀석에게 당했
던 그였으니까. 아니, 아이린에게 해를 입혔던 녀석이니 일라이저의 정보가 테리우스
는 필요했다.

'아이린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쳇, 너무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꽤나 보고 싶군.'

테리우스가 밤하늘의 별들을 감상하면서 아이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밤하늘을 구경하다가 호수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모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괜스레 아이린이 미칠 듯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록 테리우스 자신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났다 한들 그녀를 볼 수 없는 아픔보다는
적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되는 그였다.

일라이저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매만진 후 조금은 깨끗해진 기분이 들자, 테리우스를
바라봤다. 그가 바위에 앉아 있다가 이내 뭔가를 준비한 듯 하더니 장작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듯 손짓을 했다. 그의 다정함이 왠지 기분 좋게 느껴져서인지
자신의 심술이 어딘 가로 도망가버린 기분이었다.

"추울 텐데 몸을 좀 녹이도록 해."

"어머, 고마워요. 이곳은 너무 추운 곳이군요. 숲은 너무 울창하고 사막의 모래는 너
무 지저분하고 일관성이 없어 보여요."

"그런가?"

장작불 너머의 그의 얼굴이 조명을 받았는지 더 깊고 신비로와 보였다. 적어도 일라
이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저 남자를 가지고 싶다.

꼭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럼 내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어떻게 해서든 이 남자를 꼭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이린이라는 그 여자가 없어진다면 이 남자가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일라이저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테리우스에 대한 깊은 애정이 그녀의 손을 타고 흘
러나왔다. 자연스레 일라이저의 손이 테리우스의 볼에 닿으려는 순간, 남자의 손이
먼저 그녀의 손을 방어하듯 막아낸다. 그리고 정지되는 시간처럼 몇 분이 흐른다.

'뭐야, 이 여자 대책 없군. 쳇, 괜히 기분만 나빠지잖아.'

테리우스는 아이린과는 전혀 다르게 일라이저와 가까이 눈을 마주하니 괜스레 기분
이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반면 일라이저는 자신에게 상대가 넘어왔다고 생각했는
지 다른 손을 다시금 남자의 볼에 가져가려 한다. 참다 못한 테리우스가 한마디한다.

"이봐, 정신 차려. 쳇, 자신이 얼마나 못난 줄 알고는 있는 거냐? 그만 떨어져라."

"어? 앗!!! 이게 무슨 짓이야!!!! 무엄하게!!!!!"

테리우스가 일라이저를 툭 하고 밀쳐냈다. 그런데 힘이 좀 과했는지 그녀가 뒤로 벌
러덩 넘어졌고 덕분에 일라이저의 입에서 그녀의 심술궂은 성격의 어투가 되돌아 왔
다.

"놀라기는 새삼스럽게…이쯤해서 말해봐라. 이곳에 왜 왔는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내 인내심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좀 전과 다르게 안색이 차갑게 변해 보이는 테리우스의 눈빛은 아주 오래 전 그녀를
바라봤던 그 매서운 눈빛으로 돌변해 있었다.

"흥,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이제야 좀 테리우스를 만나는 것 같군 그래."

"시끄럽군. 그건 내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잖아."

"어머, 내가 이 고생을 하고 깜빡 속았던 것에 비하면 그 정도쯤이야. 내게 막대하지
않는 것이 그 여자에게도 좋을 텐데."

"무슨 소리냐. 그 여자라니?"

"무슨 소리는 무슨 소리…아이린이라는 그 여자 지금쯤이면 세바스찬 오라버니에게
잡혀 있을 테니까 당신은 내 말에 고분고분 따라줘야 한다 그 말이지. 아앗, 이거 놓
지 못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휙 돌리던 일라이저가 그만 테리우스의 손에 손목이 꺾
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까지 봐왔던 테리우스의 모습 중에서 가장 무서운
표정을 대면하게 된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거 같은 야수의 표정이 테리우스
에게서 보여졌다. 일라이저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겁이 났다.

"말해라. 아이린을 어떻게 했나? 안 그럼 지금 당장 그 목이 그대로 부러져도 아쉬울
것 없을 테니까."

그는 극도로 침착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흥분한 상태였고 그녀의 손목에 이어 다른
한 손이 목을 움켜잡을 때에는 살기가 일라이저의 뼛속까지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아직은 무사할 거니…읔, 날 좀 풀어 줘…요."

"쳇, 비겁한 거나 비열한 거나 남매가 똑같군. 아이린이 무사하다니 이쯤 해두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화를 되찾은 듯한 테리우스의 모습에 일라이저는 그 동안 자신
이 가지고 있던 환상에서 재빨리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잠시동안 일정 거리에 떨어져서 시간을 갖게 되었다. 테리우스는 마음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싶었고 일라이저는 빨리 안정을 되찾고 싶었다.

지금 자신이 흥분한 채 눈앞에 여자를 없앤다고 하더라도 아이린이 무사해지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저 여자가 알고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일라이저 역시 테리우스에 대
한 환상이 깨져 버린 지금 다시 그녀의 왕국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곡해졌다. 이
남자를 갖고 싶다는 것이 갑자기 이 남자가 두렵다는 생각으로 옮겨지다니 믿을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래,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처음 다짐처럼 없애버릴 테다. 두고 보자 테리우스.'

일라이저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에 대한 집착을 분노로 뒤바꾸는 것에 그리 오랜 시간
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테리우스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먼저였다.

그때 비현실적으로 어둠의 공간이 갈라지면서 빛의 줄기가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
냈고 이에 둘 모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 이건 뭐죠?"

"이건 또 무슨 짓이냐?"

서로에게 질문을 동시에 던지다가 다시금 이들의 시선이 빛줄기에서 멈춰 섰다. 이윽
고 두 사람은 낯선 곳에 이동할 때까지 의식을 잃고 말았다. 너무나 쉽게 카나 황국으
로 이동하게 된 테리우스와 일라이저 그들은 각각 다른 건물의 위치에서 감금된 채
아직 의식조차 회복하지 못했다. 워낙 강력한 마법의 주술에 의해 이동하게 되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주술을 이용한 자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카
나 황국에서 내놓으라는 마법사들을 제쳐두고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아처 아
토스 공작의 작품인 것이다.

*

카나 황국의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세바스찬의 모습에서 예전 가이루덴의 화려
했던 왕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초췌해진 얼굴은 깡마른 사람의 얼굴처
럼 핏기가 없어 보였고 두 눈은 휑하니 초점이 흐려 보였다. 양팔은 벽에 고리로 연결
된 쇠사슬의 수갑에 채워져 매달려 있었다. 겨우 바닥에 맨발로 땅을 딛고 버티고 있
던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린 공주를 어떻게 할 작정이었나? 세바스찬 왕자."

푸른 가면을 쓴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 길이의 봉을 세바스찬의 얼굴에 기분
나쁘게 찔러 대며 묻는다. 그러나 세바스찬은 남자의 목소리를 귀에 담는 것조차 힘
들어 보인다.

"이봐, 물을 부어라."

"네, 공작님."

푸른 가면을 쓴 공작이 감옥을 지키고 있는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가 들고 있던
물통에 차디찬 물을 가득 채워 세바스찬의 얼굴에 때리듯 붓는다. 이에 놀라 세바스
찬이 사색이 되어 숨을 헐떡이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공작이 다시 묻는다.

"다시 묻는다. 아이린 공주님을 납치한 이유를 대라. 단독 범행이었는지 아니면 배후
에 인물이 있었는지 말하라."

"헉, 후어어헉…힘…이 들어…그만 풀어줘라…으어헉…여기가 어디냐."

세바스찬은 숨이 차듯 헉헉거리며 입을 열었다.

"후후후, 과연 가이루덴의 왕자답군. 감히 카나 황국의 후계자를 두 번씩이나 위해하
려고 하다니 황제의 명령 없이도 널 제거할 수 있다만 메틴 왕의 후계자이기에 목숨
은 살려둔다. 그러나 배후에 메틴 왕이 있었다는 증명서에 도장을 찍어야만 풀어 줄
것이다. 선택은 네가 알아서 하라. 이 자를 잘 감시하도록 하라. 곧 카나의 성기사들
이 와서 이 자를 인수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공작이 세바스찬을 매섭게 한 번 바라보다가 이내 감옥을 빠져나간다. 그 모습을 흐
릿하게 바라보던 세바스찬은 온몸이 뜨거운 것처럼 타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마
치 두 손목을 통해서 몸의 모든 힘이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
다.

'제기랄,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빛을 보고 의식을 잃었던 것 같은
데…온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양쪽의 수갑에 주술이 걸린 것이 틀림없
다. 이곳은 대체 어디지?'

세바스찬은 생각에 골몰하다가 그대로 또 다시 의식을 잃어갔다. 그의 마나가 점점
쇠약해  질수록 그의 의식도 흐트러져 가고 있었다.

*

아이린은 앨리어튼이 쓴 편지를 보고 눈물을 뚝뚝 흘러내렸다. 어머니의 죽음이 단순
히 권력 싸움의 희생에 불과했다는 것이 화가 났다. 딸을 죽음으로 내 몰아갈 만큼 왕
의 자리가 중요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 분이 내 아버지였다는 말이지…그러니까 이 편지의 글은 내 할아버지가 내 어머
니를 죽음으로 몰아냈다는 말이지…그 암살에 배후가 다름 아닌…권력이란 참 무서
운 거구나…."

무엇보다도 겉으로 드러난 사실로 많은 이들이 판단하는 것은 카나 황국의 적들이 만
들어 낸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너무나 냉혹하고 잔인했다. 이제 카나 황
국으로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지금 곧 대면해야할 반데라스 황제를 어떻게 바라봐
야 할지 그 시간이 두렵다.

앨리어튼이 알아낸 사실은 대강 이러했다. 약소국인 아리스 왕국에 클레오가 결혼을
하겠다며 카나 황국을 떠났고 그 일로 화가 난 반데라스 황제는 마가레타 황후 몰래
일을 꾸민다.

그러나 직접 그 일을 행하지는 않고 자신의 이복 동생인 메틴 왕의 손을 빌었지만 실
제 메틴 왕 스스로도 자신을 조정하는 것이 반데라스 황제임을 알지 못했다. 어리석
은 메틴 왕은 꼭두각시 역할을 잘 수행해 주었고 클레오는 암살자들에 의해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반데라스 황제의 예상대로 클레오가 신호를 보낼 것이고 그러면 자동적으로
그의 두 번째 후계자가 카나 황국에 귀환되는 것이 음모의 완성이었다. 그러나 그 중
간에 레드 드래곤이 나타날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 그로 인해 더 이상 나서지 못했던
것이다.

손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절로 빠져 그녀를 털썩 주저앉게 만들어 버렸다. 마음은 그
릇된 사건으로 인해 화가 났지만 그 원인이 자신의 혈육이라는 점이 씁쓸해진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마음은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러
자 그녀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녀석이 있었다.

매번 비꼬는 듯한 말투를 하며 가끔씩 감동을 주는 녀석. 그 녀석이 간절히 보고 싶어
졌다.

곁에만 있어도 힘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절벽 끝에 서 있는 듯한 이 기분 앞에
서 그 녀석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얼마나 그 녀석을 사랑하는지 알게 해
주고 있었다.

'그래, 테리우스라면 적어도 그 녀석이라면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고 차분하게 판단하
고 행동했을 거야. 그 녀석이라면 이런 일로 주저앉거나 울지 않았을 거야.'

아이린은 힘이 빠진 두 다리를 두 손으로 밀쳐 내면서 일어섰다. 그리고 방에 있는 거
울 앞으로 다가섰다. 주변을 둘러 본 후, 잘 마련되어 있는 옷가지들과 장신구들을 살
펴 본 후, 자신에게 알맞은 것들을 선택했다. 초록빛이 나는 드레스를 차려 입고 은
빛 구두를 신는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 머리칼을 곱게 빗은 후, 하나로 잘 땋아서 올린 머리로 단정하게
마무리를 했다. 그 외에 은색의 작은 별 귀걸이와 초승달 모양의 목걸이를 목에 걸었
다.

옅은 분홍색으로 입술 빛을 만들고 은회색으로 눈 화장을 마무리했다. 단아하지만 세
련되고 차갑지만 온화한 분위기로 자신을 만들어 갔다. 누구에게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그녀의 단장하는 솜씨는 매끄럽고 자연스러웠다. 그 방에는 그 외 그녀의 일
행들이 지니고 있던 짐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아이린의 배낭과 그 안의 물건
들까지도 말이다.

그녀가 손가락을 퉁겨 내자, 주인의 마나 영향을 받은 배낭이 이내 사라지고 아이린
앞에 슈바이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슈바이저는 어느 새 책에서 검으로 모습이 변환되
어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은빛의 칼날이 파르르해 빛이 찬란했고 손잡이의 녹색은 단조롭지
만 그 색 자체만으로도 고귀해 보였다. 곡선의 디자인이 꽈배기를 틀 듯 서로 뒤엉켰
지만 질서 있어 보인다.

"슈바이저, 너의 지혜가 필요하다. 이 편지를 너에게 보관하고 싶구나."

아이린이 슈바이저를 얼굴에 길게 된 후, 작게 읊조리더니 이내 검의 끝을 편지에 가
져다 댄다. 그러자 슈바이저의 은빛 칼날이 작은 진동을 내더니 편지를 고스란히 흡
수했다.

"검게 변하지 않은 걸 보면 편지의 내용이 거짓은 아니구나."

아이린은 슈바이저 검의 손잡이를 반대 방향으로 꺾어내며 칼날의 모습을 사라지게
했다. 그리고 허리춤에 마련된 녹색 가방에 검을 넣어 둔 후, 창문으로 가까이 걸어간
다.

햇살이 곱게 비춰 그녀 얼굴을 따뜻하게 반겨준다. 그녀는 화이트 마나의 영향을 받
아 자신도 모르게 생각과 마음이 성장되고 있었다. 그 동안 아파 누워 있었던 것도 마
나의 영향이 컸던 탓이리라. 한 순간에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해 왔지만 그때 떠올린
단 하나의 얼굴이, 이름이, 모습이 그녀를 일어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세상이 그
녀에게 등을 돌려도 단 하나 자신 곁에서 웃으며 서 있어 줄 것은 무조건적인 단 하나
의 믿음이 그녀를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녀석이라면 자신이 잘못했다고 해
도 그녀 곁에 다시 돌아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 테리우스는 내 곁으로 다시 돌아와 줄 거야. 그러니까 난 지금 혼자가 아닌 거
야."

아이린은 단장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서 다시 한번 확인 한 후, 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를 지나 그녀의 일행들이 있는 곳에 문을 두드린 후, 들어선다.

다들 긴장하고 침묵으로 가라앉는 분위기 속에 갑갑한 듯 보였다. 서로의 눈치를 살
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들 하나 같은 마음으로 고민에 의해 분위기가 가라앉는지
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분위기가 약속이라도 한 듯 어두웠던 것은 분명했다.

"무슨 일이야. 다들 어두워 보여."

아이린이 걱정을 한 듯 묻자, 다들 그녀를 바라본다. 몇 시간 전 편지를 읽으려고 들
어갔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게 변해 돌아왔다. 클락의 설명으로 아이린의 아버
지가 앨리어튼이라는 것과 그녀의 어머니 클레오 여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주요 배후
가 반데라스 황제라는 설명을 들은 일행들은 놀람과 함께 착잡한 마음들이었다. 편지
를 다 읽은 아이린이 그 충격으로 아파하고 슬퍼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그들
앞에 아이린은 너무나 태연해 보였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오랫동안 혼자 계시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했습니다."

아르테니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묻는다. 아이린이 편지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그
들도 알고 있지만 그녀 앞에서 모르는 척하기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 봤어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카나 황국에서 초대장을 보내 왔습니다."

클락이 하얀 바탕에 붉은 하트가 새겨진 초대장을 아이린에게 건네주며 말한다. 곁에
서 미니조우의 얼굴이 꽤 불만스러워 보였다. 미니조우는 카나 황국의 무례함에 잔
뜩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메이샤링이 말없이 다가와 아이린의 어깨를 토닥거려주었고 그 모습을 다칸이 지켜
봤다. 그는 아이린의 차분함에 잠깐이지만 경외감이 들었다.

"초대장이라…오늘밤에 파티를 연다네요. 그럼 다들 파티에 참여할 준비를 하도록 해
요. 아, 그리고 지금은 정말이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으로 배를 먼저 채워야겠어."

"히힛, 주군님 먹성은 여전하셔요."

"그래, 벅스칼 이쪽으로 와서 함께 먹자. 혼자 먹기 심심해."

그러자, 레오나르가 벅스칼보다 한발 앞서 그녀가 앉은 식탁에 자리하며 미소를 짓는
다.

"저도 시장하던 차였는데 함께 드시죠."

"그래요. 레오나르."

아이린의 밝은 표정과 곧이어 그녀의 웃음 섞인 이야기에 다들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
고 그로 인해 표정 역시 밝아졌다. 무거워졌던 일행들의 분위기가 아이린으로 인해
밝아졌던 것이다.

"겉으로는 저렇게 웃고 계시지만 마음은 많이 아프실 텐데."

파라도가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럽다는 듯 조금 떨어진 곳에서 중얼거렸다.

"알아, 그래도 기운을 차리신 듯 보여서 다행이다."

아르테니가 몰라보게 변화된 아이린의 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아주 조금은 걱정된 마
음을 품은 채로 말이다. 게다가 반데라스 황제의 음모에 두 흑기사는 적지 않은 충격
을 받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짐작하지만 그들의 주군이자, 공주님에게 돌아갈 충격의 화
살이 그리 반갑지만 않았던 것이 그들의 진심이리라.

"아, 배도 채웠고 난 파티에 참여할 준비도 다 된 것 같으니까 이곳 카나 황국의 건물
구경을 좀 하고 싶은데…."

"혼자서는 위험하세요. 게다가 다른 건물로 통하는 정문을 굳게 잠겨 있어서…."

벅스칼이 말리려 들고 있을 때 아이린이 빠른 발걸음으로 정문의 손잡이를 꺾어본다.

찰칵!

문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가 일행들의 귀에 뚜렷하게 들렸다. 그 동안 굳게 닫혀 있었
던 문이 언제부터 열려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고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었다. 아이
린의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굳이 이곳을 떠날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어머, 열려 있는데 뭘…아니 나 혼자 돌아다니고 싶어. 그럼 다들 파티 준비하고 여
기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도록 해. 어차피 길잡이를 보내 준다고 하니까."

아이린이 자신의 의사를 일행들에게 밝힌 후, 그들 눈앞에서 유유히 나가면서 문을
닫는다.

다들 그녀의 뒤를 쫓아가지는 않았다. 이곳은 그녀에게 가장 안전한 카나 황국이고
지금은 그녀 혼자 있고 싶은 심정인 것을 그들 일행 모두 다 알고 있으니까.

*

테리우스는 머릿속에 납덩이라도 얹혀 놓은 것처럼 무겁고 차가운 기운의 살기가 그
를 엄습했다. 견디다 못해 눈을 뜨자, 방금 전 그 기운도 동시에 사라진다.

"읔, 빌어먹을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야…여기가 어디지?"

넓은 침대에서 대자로 뻗은 상태로 며칠간 의식을 잃었던 테리우스가 투덜거리며 자
리에서 일어난다. 몸 구석구석이 콕콕 쑤셔대듯이 아프고 결리다. 기분도 별로 좋지
않을 만큼 기분 나쁜 곳이다. 밝은 톤의 분위기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고운 햇
살조차 신경질 나게 만들고 있다. 본능적으로 이곳이 어디인지 그는 몇 분도 안 돼 알
게 되었다.

"쳇, 카나 영감탱이…간이 부었구나. 감히 나를 강제로 소환하다니 웃기시는군."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지면서 투덜거리던 그가 방안이 답답했는지 문을 열려고 손잡
이를 틀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는 감금된 상태였던 것이다.

이에 기가 찬 듯 테리우스가 씨익 하고 웃음을 짓더니 뒤로 주춤하다 빠르게 앞으로
돌진하면서 문을 박찼다.

그러자 쿵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직격탄을 맞은 듯 뒤로 힘없이 밀쳐 내려가 바닥
에 닿으면서 다시 한번 크게 쿵 소리를 반복한다.

"흐음, 제법 힘이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야. 아주 좋은데…지금쯤 케르베노아 영토에
귀여운 녀석들도 터를 잡았을 테고…어디가 나가는 길인가?"

테리우스의 몸은 생각보다 빠른 회복을 보이고 있었다. 블랙 마나의 초석이 있던 자
리에 그가 개발한 블루다이아몬드 마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 몸
안에 있던 에너지들이 다시 소통하게 되었고 마신 시절의 힘까지 끌어 모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게다가 케르베노아 영토 특유의 에너지 원칙 때문에 블루다이아몬드의 생산력을 가
중시켜주는 결과는 그의 계획에 빛을 발하게 해준다. 그것은 아이린이 원하던 목표
에 큰 힘이 되어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미로처럼 엮여 있는 통로들을 마구잡이로 순서도 없이 무조
건 들어가 본다. 그러다 다시 나오기를 반복했다. 어디가 어디인지 같은 무늬인 듯 하
면서 서로 다른 무늬로 엮어져 있는 벽장식이 길의 방향을 더 헷갈리게 만들어져 있
었다.

"제기랄, 뭘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거야. 소심한 성격에 카나 영감답군."

테리우스는 길을 찾다가 계속 같은 곳을 반복하는 느낌이 들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뭔가를 연결 해 놓은
듯 꽈배기 형태로 그려져 있지만 그 벽화들이 오히려 길을 헤매게 만들었다.

어디로 들어섰는지 햇살은 멈추고 곳곳에 촛불들로 가득한 곳이다. 거울과 어울러져
꽤 아담하고 분위기 있어 보였다.

"호오, 이런 분위기 쩝 배고프게 만드는 군. 어디 먹을 거 없나? 하핫, 그렇지."

원탁에 놓여진 바구니에 과일과 빵이 있었고 벽난로 부근에서 와인을 발견할 수 있었
다. 아마도 테리우스가 들어선 곳은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인 듯 싶었다. 그때 촛불
이 춤을 추듯 심하게 휘청거린다. 동시에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도 들려온다. 붉은 과
일을 입에 한 입 베다 말고 그가 재빨리 커튼 뒤로 몸을 감춘다.

따닥! 따닥!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다.

딱! 딱! 딱! 딱!

누군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따닥!! 틱!!

다시 걸어가다 한 발의 방향을 바꿔 본다.

또깍!! 또깍!!

발에 힘을 실어 걷는다.

퉁!! 퉁!!

제자리에서 두 발을 힘껏 구른다. 뭔가 뜻대로 안 된 것에 화가 난 것처럼.

꽤 요란하면서 분주한 발걸음 소리 가볍지만 날카로운 걸 보니 체중이 작거나 여자
인 것이 분명하다. 상대의 숨소리가 점점 다가올수록 테리우스는 숨을 멈추어 최소한
의 소리를 줄인다.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숨을 죽였다. 혹 따라오는 다른
이들이 있는지 까지 지켜봐야 하기에  상대가 바로 그의 앞까지 와서 등을 보이고 있
어도 잠시 동안 기다려 본다.

그의 예상대로 여자였다.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그러나 어두웠고 카나에서 아는 이
는 없다.

여자 외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판단이 서자마자, 곧바로 여자의 목을 그
의 팔로 감아 똬리를 틀어내듯 조였다. 그러나 여자가 최소한의 숨은 쉴 수 있도록 여
유를 준다.

그래야 그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쉿, 이봐! 죽고 싶지 않다면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날 왜 이곳으로 불
러 왔는지 그것부터 알고 싶다만 우선 너의 신분을 밝혀라. 가만 잠시 숨통을 좀 느슨
하게 해 줄 테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허튼 짓을 하면 그대로 가는 줄 알아라."

테리우스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그가 여자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
도록 느슨하게 팔에 힘을 조정한다.

"하…테…리…우스…."

"뭐? 테리우스? 그게 네 이름이냐? 내 이름이지. 누가 내 이름을 말하래. 흠, 날 붙잡
아 왔으니 내 이름을 알겠지. 그래, 내 이름을 아는 걸 보니 날 데려오는 작전에 너도
뭔가를 알고 있나 보군. 자, 내가 질문한 건 네 신분이야. 어서 말해라."

"이 바보…."

어처구니없는 여자의 목소리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낯익은 목소리다. 그가 뭔
가를 직감하고 곧바로 여자에게서 팔을 풀어 내리고 그녀를 정면으로 돌려 눈을 응시
한다.

그리고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를 무섭게 쏘아보는 여자에게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아이린…하아, 안녕? 이런…."

"케켁, 읔…하…아파."

테리우스의 어설픈 인사에 아이린은 이내 찡그리며 그녀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싼다.
그의 힘에 의해 압박을 당한 그녀의 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고 목안은 겨우 숨을 찾았
지만 아렸다.

테리우스의 볼이 금세 붉어진다. 동시에 그의 가슴속의 심장들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
처럼 쿵쾅거려 머릿속이 어질 해진다. 그는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 쉰다. 그래서 숨이 막힌다. 그런데도 꼼짝할 수 없이 몸은 점점 꽁꽁 얼어
붙는다.

그런 그의 모습을 아이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본다.

'뭐야, 날 알아보지 못하고 날 죽일 뻔한 남자를 계속 사랑해야돼 아님 그만 멈춰야
돼? 이 녀석 왜 이렇게 꿈쩍도 안하고 있는 거지? 잘못해서 그런 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숨도 안 쉬고 있는 것처럼 침묵하다니 나랑 신경전이라
도 하는 건가?'

테리우스는 여전히 사색이 파랗게 질린 듯한 안색으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아이린
의 눈을 응시한다. 제 삼자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아마도 남자가 여자에게 으르렁거
리며 화를 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테리우스, 계속 말없이 그렇게 있을 거야? 숨이라도 쉬고 있는지 모르겠어."

"허걱, 케…겍 하아…하…아…흡…하아!!!!!!!"

오랫동안 참아왔던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한 테리우스가 몸을 구부려 바닥을 향하면
서 무릎을 꿇고 손을 바닥에 닿으며 엎드렸다. 몸의 경직이 풀리면서 호흡 순환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으나 그의 심장은 더 긴장하고 있었다.

"이런, 테리우스 대체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괜찮아?"

아이린은 테리우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깨달았는지 그의 등을 두들기며 얼굴을
살펴본다. 그러자 숨을 고르며 안정을 찾아가려고 노력하던 그가 그녀의 손을 꼬옥
쥐며 앉은 상태로 눈을 마주한다.

딸꾹!!

딸꾹!!!!!

그런데 그의 목에서 그가 원하던 말의 소리 대신 긴장하고 있는 사실을 표현하듯 딸
꾹질이 먼저 터져 나온다. 애절한 눈빛으로 아이린을 만난 감동에 대해 말하고 싶지
만 빌어먹을 딸꾹질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테리우스, 방금 전 날 죽일 뻔한 일은 용서해 줄 테니까. 제발 정신 좀 차려."

"딸꾹!!!…."

여전히 테리우스는 아이린의 말을 들으면서 딸꾹질만 연달아 내보내고 만다.

"그래, 알았어.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지난 번 일도 내가 잘못
했어."

"딸꾹!!!…"

"우리는 왜 매번 일이 이렇게 꼬일까? 아, 난 지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돼서 머릿속
이 복잡해 죽겠어. 할아버지가 엄마를 죽게 한 거래.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마음이 너무 아프다. 힘들었는데 다 포기하고 싶었는데
널 떠올리니까 힘이 났어. 그래서 지금 널 이렇게 만난 이 순간이 기적 같으면서도 놀
라움보다 감사함이 먼저 떠올라…나 많이 힘들었거든…."

"딸…꾹!!"

아이린이 중얼거리다가 딸꾹질로 대답하는 분위기 없고 철없는 이 남자의 어깨에 기
대다 소곤소곤 잠이 든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엉망인 마음의 상태도 이 녀석
에게만은 내보여도 괜찮은 그녀였다. 아이린이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자, 멈
추지 않을 것 같던 테리우스의 딸꾹질도 장난치듯 멈춘다. 그리고 그 역시 그녀를 만
났던 긴장감과 상황에서 벗어나 잠시동안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기대며 잠이 들었
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극적으로 만나 너무나 편안하게 서로의 마음에 기댄다.

한 시간쯤 지나자, 테리우스가 먼저 눈을 떴고 곧이어 아이린도 눈을 뜨면서 서로에
게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벽에 기댄 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짧은 시
간 깊은 단잠을 맛보게 된 것으로 행복감을 느꼈다. 둘이서 동시에 배를 매만지더니
약속한 것처럼 하품을 하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아, 배고프다."

"아, 배고프다."

서로의 존재를 다시 확인한 듯 둘이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짧게 서로에게 웃음을 내
보인다.

"식탁에 먹을 것이 있던데 먼저 배부터 채우고 나서 그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
때?"

"응."

테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린에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 그의 딸꾹질이 멈추었
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고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그걸로 충분했다.
"넌 여길 어떻게 온 거냐. 흑기사들이 호위가 엉망이었나 보군. 참, 그 녀석들 원래 카
나 인들이었지."

"그런 건 아냐. 음, 이거 정말 맛있다."

여전히 식성하나는 끝내주는 그녀다.

"그럼 세바스찬이냐?"

"어? 어떻게 알았어.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것도 아닌 것 같아."

"결과적으로는 그것도 아니다? 그럼 네 생각의 결론은 뭔데?"

"그게 반데라스 황제…그러니까 내 할아버지께서 데려 온 것 같아."

"흠, 넌 그렇다 치고 난 왜 데려온 거야."

"아마도 내 남편이어서 그런 건 아닐까? 음, 이 와인 정말 맛이 기가 막혀 너도 마셔
봐."

"쳇, 마음이 아프다 머리가 복잡하다 그러더니 먹을 거 앞에서는 뭐든 명랑한 건 여전
하구나."

맛있게 먹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조금 얄미웠는지 테리우스가 아이린이 한참을 맛
있게 먹고 있던 음식의 접시를 낚아채 버린다. 그러자 그녀가 곧바로 이맛살을 찌푸
리며 투덜댄다.

"야, 너무해 그걸 뺏으면 어떡해. 나 무진장 배고팠단 말야! 뭐, 그 전에 좀 먹기는 했
지만."


너무나 안타깝고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원망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
에 테리우스는 웃음이 나왔다.

"풋, 그래 많이 먹어라. 내 마누라 내가 챙겨줘야지. 어이구, 못 말린다 정말."

그녀의 코를 살짝 비틀어 쥔다.

"아얏, 아프잖아."

테리우스가 식사를 다 한 후에도 한참을 이것저것 먹어대던 아이린이 원하는 만큼 먹
은 후의 포만감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본다.

"아, 행복하다."

"쳇, 넌 배부르면 행복하냐? 이 상황에서 참 느긋하게 좋겠다. 그 망할 카나 영감탱이
가 네 할아버지라 해도 내 손에 잡히면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테니 말리지나 마라."

"그렇게 하진 마."

아이린이 배를 살짝 토닥이다가 그의 말에 대답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
러보니 참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이봐, 이건 외교에 문제가 있는 거야. 데본의 왕족을 이렇게 대접하는 건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란 말야."

"피잇, 어차피 쫓겨났잖아."

"야, 그거야 너 때문이지."

"흥, 그런 말을 하다니 그건 테리우스가 선택한 거야. 안 그래?"

아이린이 빙긋 웃으며 그의 앞에 성큼 다가와 대답한다. 언제부터 그녀가 이렇게 여
우처럼 달콤하면서 새침해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달라 보였다.

"너 좀 이상하다. 태도가 너무 방관적이거나 이기적인 것 같아. 마치…."

"마치 널 닮은 것 같다고?"

"뭐, 그래. 그런 건 별로 달갑지 않아."

"부부는 원래 닮아가면서 서로 다른 친구이자 연인 아닌가? 난 있지 네가 내 옆에 다
시 있어서 너무 행복해. 그래서 지금 내게 놓인 문제들을 잘 풀어갈 수도 있을 것 같
고 다시 문제가 생겨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좀 차분하게 해결해
가보자."

아이린의 모습이 계속 변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의젓해져 보이기도
했고 믿음을 안고 있는 그런 느낌 테리우스는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불안감이 일시에
사라진 기분이 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일단 너와 날 이곳에 데려온 할아버지가 무슨 뜻을 가지고 계신지를 오늘 밤 만찬에
서 알아볼 생각이야. 그리고 나서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난 다시 케르베노아 영토로 가
서 아카리나스 왕국의 건설을 시작해서 나라를 잃은 사람들에 희망을 안겨주는 다리
역할을 할거야. 그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다 함께 해야만 하는 거야. 혹
지금 가다가 길이 끊겨지면 다시 붙이려고 함께 하면 되는 거고…무엇이든 옳다고 믿
는 것에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 과정이
진실하면 그걸로 충분해. 만일 결과가 실망이면 다시 진실을 향한 과정을 시작하면
되는 거고 난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할거니까."

"호오, 그 동안 마음이 많이 단단해 졌구나. 그 많은 결심을 언제 다 그렇게 하셨나."

"음, 방금."

"뭐?"

아이린이 테리우스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두 손을 휘감으며 품에 안긴
다.

그리고 그 품안에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 쉬면서 낮게 이야기한다.

"널 만난 지금 모든 것이 선명해졌어."

"야아, 이거 꽤나 영광인걸."

"테리우스, 다신 날 떠나지는 마."

그녀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

"다시는 네 마음에서 날 밀어내지 마. 내 곁에서 떠나지 마…난 그게 가장 힘들고 아
파."

"알았다. 내가 할 말을 네가 하다니…."

테리우스가 짧게 대답하고 그녀의 어깨를 안은 손으로 토닥인다. 다시는 아이린을 자
신의 마음에서 내보내지도 곁을 떠나지도 않을 거라고 마음으로 약속하면서.

그 역시 많이 힘들었기에 지금 그녀의 짧은 고백은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한 기적이었
다.

"카나에서 우리를 순순히 내보내지는 않을 거다."

"알아, 날 내보내 준다고 해도 널 그냥 두지는 않을 거라는 거…."

아이린은 그 점이 가장 걱정되었다. 그렇게 완벽한 가면을 쓰고 나라의 이익을 위해
서 딸마저 희생할 수 있으며 아내에게조차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반데라스 황제라면
지금 테리우스가 최고의 골칫거리로 제거의 대상이 될 것이 자명했다.

"널 설득해서 카나의 후계자로 내세운다면 분명 날 제거하려고 들 테고 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크게 번질 거야. 데본에서 쫓겨났다고 해도 실제 세력들은 여전히 내 손에
있거든. 지금 꼭두각시처럼 가이루덴의 메틴이 그 자리에 세바스찬을 넣어두려고 움
직이고 있지만 본래 카나의 혈통이 흐르는 그들을 데본 왕족들이 가만 두지 않을 거
다. 정식으로 그 자리에 오르게 되면 분명 곧바로 암살 당할 거야."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나도 그 생각을 했어. 게다가 지금 내 몸도 점점 힘이 생성되
어지는 게 느껴져. 너와 내가 부부라는 것이 데본과 카나…두 왕국 모두에게 받아들
이기 힘들 것이고 제거하고 싶은 대상일 거야."

아이린의 진지한 태도에 테리우스는 기분이 좋았다. 점점 그녀가 성장해가고 있는 느
낌이 그를 즐겁게 한다. 그는 이미 문제 해결의 끝이 보였지만 그녀가 풀어 가는 방식
이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그가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데본에 힘으로 카나를
제압해 버리는 것이었지만.

"테리우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말야. 생명 하나 하나가 삶과 죽음을 모두 스
스로 받아들이고 노력하고 만들어 가는 그런 거야. 그렇게 살아가는 길목에서 힘있
는 자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방해를 받거나 제압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쳇, 아주 교과서를 만들어서 학생들을 가르쳐라. 그런 건 애초부터 불가능해."

"나도 알아. 그런데 그렇게 하는데 다리 역할이라도 되고 싶어."

"그런 걸 뭐 하러 해? 어차피 내버려두면 만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텐데 뭐 시간
이 좀 걸려서 탈이지만."

"그 안에 다치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걸 돕고 싶어…도움이 필요할 때까지만."

"아이린, 철학을 해라…좀더 현실적인 계획을 이야기 해봐."

아이린이 테리우스의 얼굴을 짝 소리가 나도록 두 손으로 감싸면서 그녀의 눈을 마주
하게 한다.

"이봐, 남편! 난 당신이 있으니까 행복하단 말야.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그리고 나도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거야…지
금도 받고 있는 것처럼…알겠어? 그리고 반데라스 황제가 우리를 내보내 주는 것은
내게 방법이 있어. 그건 내게 맡기고…테리우스 넌 데본의 세력들을 끌어 모아서 아
카리나스 왕국의 방패 역할을 하는 것에 도움을 줘. 분명 파트라 대륙에서 반대를 할
테니 왕들의 제압에는 맞대응 할 만한 힘이 필요하니까."

"읔, 알았어. 알았으니 내 얼굴 좀 풀어주지?"

"히힛, 고마워."

"그런데 방법이 뭔데?"

"음, 그건 지금은 비밀…배도 부르고 그만 만찬 장소로 가는 길 좀 찾아보자."

아이린이 곱게 차려 입은 드레스를 휙휙 원을 그리듯 살펴보더니 이내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한다.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을 그가 뒤따른다. 서로의 재회에 대해 서로 겁
을 먹었던 순간의 감정들에게 부끄러울 만큼 두 사람의 만남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
안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힘을 합쳐도 역시나 미로 같은 곳의 카나 건물의 복도에서 밖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 것은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그들이 택한 길은 가장 빠르고 적합하다고 내세운 아이린의 기막힌 방법이었으니.

"뭐야, 설마 반데라스 황제에게 써먹을 방법도 이런 황당한 것은 아니길 바란다."

"쉿, 말하지 말고 내려가는 것에 신경 좀 써 테리우스."

아이린은 커튼으로 연결한 줄을 통해 창 밖으로 건물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
다.

"아참, 그리고 테리우스 만찬 장소에 도착하면 드레스 룸부터 찾아야겠어."

"왜?"

"흐음, 내 남편 모습이 정말 거지같아서 그래. 창피해…히힛."

"야!!!"

건물을 빠져 나와 또 다른 문을 향하면서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길을 찾은 듯 밝아져
갔다.

------------------------------------------------------------------------------------------------------8장마침
날씨가 너무 춥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겨울.....................따뜻한 군고구마가 먹고 싶습니다.
곧 눈도 내리겠죠....................그렇게 한해가 가는 길에 크리스마스도 다가옵니다.
참 오래도록 더딘 말프도 두장만 남았습니다...........^^*
그럼 여려분 즐독하세요........리플님들 따뜻한 관심 한마디 제게 힘이 되어줍니다.
언제나 고마워하는 마음 아실지......................히힛.....................겨울기사올림.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68화
 겨울기사   | 2004·11·28 18:58 | HIT : 168 | VOTE : 0 |

9장 메틴 왕의 최후 발악

반데라스 황제가 마련한 만찬에 초대된 손님들의 표정들은 그야말로 석고상이라 할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표정들은 다들 서로의 아니 반데라스 황제의 눈치
만을 살피고 있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파트라 대륙의 왕족들은 물론이거니와 특별석
에 초대된 이들도 거북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았
을 경우 어마어마한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참가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초대된 자들은 각각 지정된 원탁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세 개
의 원탁이 있었다. 하나는 반데라스 황제의 이복 동생이자 테리우스의 마수에 걸려 1
미터 남짓의 신장을 지닌 메틴 왕과 그의 일행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화려
하고 콧대 높던 세바스찬 왕자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핼쑥해
져 핏기 없는 얼굴 그리고 마른 몸으로 그는 힘없이 겨우 자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옆자리에 일라이저는 심통 맞은 표정을 지으며 손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주변 눈
치를 보고 있었다.

또 하나는 아이린의 일행들이었다. 파트라 대륙의 왕족들은 아이린 일행들 사이에서
데본 인들이 섞여 있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워낙 유명한 인사들이었
기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었다. 테리우스와 막연한 사이로 알려져 있
는 메이샤링을 비롯해 코보 족장과 뱀파이어 수문장이자 테리우스의 수호 기사인 다
칸, 그리고 앨런.

메틴 왕의 일행 보다 아이린 일행에 대해 사람들이 더 많이 수군거렸다. 그들이 왜 이
곳에 있을 수 있는지 결코 보기 힘든 현상이고 불길한 증조라며 서로들 의견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가장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원탁의 주인들이었
다. 그들이 자리하고 있는 원탁은 다른 곳보다 다섯 배 가량은 크고 넓은 공간을 차지
했다.

그나마 작게 축소한 형태로 자리하고 있는 레드 드래곤 부부, 제크와 페키는 사람들
과 함께 섞여 있는 것이 꽤나 불편했다. 제크가 자꾸만 인간형으로 변환했다가 레드
드래곤 형태로 다시 재 변환하는 과정을 수시로 반복하는 바람에 이렇게 넓은 공간
의 원탁에 앉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반데라스 황제가 아무런 언급이 없어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데본 제국 소속의 레드 드래곤은 전쟁
이 일어날 때 최전방에 위치한 최강의 무기라 할 수 있으니 결코 파티에 함께 하는 것
이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으리라.

"다들 초대에 응해 주어 고맙소. 성대한 파티의 주인공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관계로
먼저 음악에 맞춰 흥을 내고 준비된 식사를 먼저 시작하여도 좋소. 다들 즐기시오! 오
늘은 내게 있어 매우 즐거운 날이니까."

반데라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높이 들고 축배를 권하며 말을 마치자, 웅
장한 음악과 함께 준비된 요리들이 차례대로 원탁에 올려졌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떨
떠름한 상태로 경계를 하다가 노래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음식에 취하면서 차츰 파티
를 즐기게 된다.

"폐하, 아이린 공주가 늦는 것이 걱정됩니다."

마가레타 황후가 그녀의 손녀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듯, 걱정스러운 어조로 반
데라스 황제에게 묻는다. 그러자 그가 안심을 시켜주기 위해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
며 대답한다.

"걱정 마시오 황후. 아이린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연락을 받았으니 그 아이가
어디에 있든 카나 안에 있으니 아무런 잘못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네, 저는 한시라도 빨리 클레오의 딸을 보고 싶은 마음에…그 아이를 보면 클레오에
게 조금이라도 미안함을 덜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토스 공작의 공이 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폐하께서 공작과 아이린을 맺어 주신다
던 이야기가 있던데…."

"하하하, 그렇소 둘은 천생 연분이 될 것이오. 장차 카나를 이끌어갈 후계자의 부군으
로 아토스 공작은 손색이 없소."

"하오나 폐하, 아이린은 이미 데본의 마왕과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당치 않소. 감히 데본과의 결혼을 어찌 받아드린단 말이오. 난 절대 인정할 수 없소.
특히 테리우스 대마왕은 더더군다나 안되오."

"네, 폐하."

반데라스 황제가 잠시 진노를 하며 거북한 심사를 드러내 보였다. 그 모습에 마가레
타 황후는 짐짓 걱정을 아니할 수 없었다. 그녀의 딸 클레오도 반대하던 약소국 아리
스 왕자와 결혼을 함으로 해서 반데라스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아버지와 척을
두었는데 이번에 손녀 아이린마저 그렇게 될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
다.

*

파티가 화려하게 벌어지는 중앙 홀의 맞은 편 복도에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귀퉁이를 지나면 목적지의 정문이 등장한다.

"제기랄, 더럽게 길도 어렵게 만들어서 완전히 벌받는 기분이잖아. 카나 황국은 무슨
건물들을 미로처럼 만들어 놓은 거야. 이 건물도 복도에 죄다 이상한 그림들이 어지
럽게 널려 있어서 헷갈려."

"어? 잠깐만 테리우스 이쪽으로 좀 와봐."

아이린이 뭔가를 발견한 듯 잡고 있던 테리우스의 손을 잡아당긴다. 그러자 그가 여
린 반동에도 불구하고 꼼짝없이 그녀가 이끄는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뭔데 그래?"

"파티 장소 안에서 찾아보려고 했는데 여기에서 해도 될 것 같아. 여기도 아까 건물에
서 우리가 만났던 그 곳하고 실내 장식이 비슷하잖아. 틀림없이 손님용 방일 거야."

"그래서?"

테리우스가 한 자리에서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고정 자세를 취하며 눈썹만 까닥거린
다. 곧이어 왼쪽 발을 건들건들 위아래로 작게 울리듯 움직였다. 눈앞에서 부산스레
이동하며 이것저것 자신이 있는 곳 바로 앞 탁자로 모아 들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꽤나 재미있는 듯 지켜본다.

"하아, 다 됐다. 우선 저기 안쪽에 샤워 실이 있는 것 같아. 그곳에서 좀 씻고 와."

"뭐?"

아이린이 가지고 온 물건들은 모두 테리우스의 모습을 깔끔하게 만들도록 도와주기
위한 집기들이었다.

"설마 그 모습으로 만찬에 참여하자는 건 아니지? 뭐, 그냥 가고 싶다면 가겠지만 그
래도 그 수염은 밀고 갔으면 싶은데?"

"하아, 이런 아이린 내가 좀 칙칙해 보여서 마음에 걸렸나보네? 아까는 거지같다고
하더니만."

"뭘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저곳에 들어서서 다른 사람들이 널 구경하는 눈빛으로 보
는 건 싫단 말이야."

"날 생각해서 그런 거다 그 말이지?"

"나도 예전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 왔을 때 그곳 사람들과 좀 다른 차림으로 마
을에 들어서서 구경거리가 된 적이 있었어. 기분 별로 거든. 결코 네 모습으로 내가
창피해서는 아냐. 그런 거라면 난 지금 그대로 네가 간다고 해도 좋아."

약간의 장난기가 치솟는 테리우스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아이린에게 내보이며 고
개를 갸우뚱거린다.

"정말 이대로 내가 가도 넌 상관없다 그거지. 흠, 과연? 손톱만큼도?"

테리우스의 짓궂은 놀림 슬슬 아이린의 비위를 건드린다.

"몰라!!! 알아서해 그냥 가던지 말던지…."

"쳇, 금새 토라진 거냐? 난 내게 아부하는 녀석들은 아주 많이 봐왔다. 별로 달갑지
않은 태도지만 불필요하다고 할 수도 없는 관계들…적어도 넌 그냥 네가 느낀 대로
생각한대로 그대로 내게 전달해줬음 싶은데 어때?"

테리우스의 질문에 아이린이 잠시 동안 골똘히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오랜
만에 테리우스의 입에서 진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 일은 결코 흔치 않은 일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감사
할 일이다.

"자, 그럼 내 아내가 이 모습은 별로 라고 조언을 해줬으니 꽤 괜찮은 차림으로 바꿔
볼까?"

테리우스가 아이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더니 이내 자신의 두 손을 짧게 부
딪친다. 짝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그를 휙 하고 감싸고 사라지더니 이내 근사한 복장
과 깔끔한 모습의 테리우스가 거짓말처럼 아이린의 눈앞에 서 있었다.

"와, 테리우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붉은 색과 검정 색으로 조화가 이루어진 그의 의상은 그의 검은 눈빛과 머리칼에 잘
어울렸다. 게다가 말끔하게 면도가 되어진 얼굴은 매우 깔끔하고 다정해 보인다. 길
었던 머리칼도 짧게 잘려져 끝이 조금씩 곱슬머리로 어울러져 귀공자처럼 느껴졌다.

"뭐 이 정도에 놀라다니 내가 누군 줄 잊고 있는 거 아니냐?"

"하지만 블랙 마나를 빼앗기고 힘이 사라졌잖아…."

"쳇, 다 나았다."

"그게 낫기도 하는 거야?"

"질문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 날 바라보는 네 눈동자가 도저히 현실 파악을 못하는
것 같다. 야, 그렇다고 왜 울어!"

"응, 너무 기뻐서…나 때문에 영영 힘들어 할 줄 알았는데…그랬는데……우웁!!"

아이린이 눈물을 마저 쏟아내기 전에 테리우스가 그녀에게 입맞추었다. 두 사람은 반
대편에 홀에서 자신들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 관한 생각은 아예 접어 둔 채
로 잠시 동안 서로의 달콤한 키스에 취해 있었다.

*

반데라스 황제의 협박 아닌 협박으로 만찬에 참여했지만 메틴 왕은 불편한 심기를 계
속 인내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제 카나 황국과 대적할 수 있는 데본 제국
의 블랙 마나를 거의 장악했고 그만큼 가이루덴의 힘도 파트라 대륙에서 단연코 최고
의 세력을 가진 왕국이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데라스 황제는 자신의 하나뿐
인 후계자의 상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전시용인 듯 파티에 참여해 그의 눈앞에
내놓았다. 게다가 어떤 마법의 주술로 인한 것인지 세바스찬은 앉아 있으나 살아 있
지 않은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여봐라, 칸 장군에게 카나 황국의 외곽 성 주변에 군사들을 모두 대동하고 한 시간후
에는 내 명령과 상관없이 카나 황국을 덮치라고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메틴 왕은 자신의 수하에게 짧고 낮은 목소리로 명령한다. 그리고 술잔으로 입을 축
이며 가식적인 눈웃음으로 반데라스 황제에게 눈인사를 올린다.

"그만 이곳을 나가고 싶어요. 작은아버지는 세바스찬이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아무렇
지도 않으신 가요? 더 있다가 이곳에서 저도 이렇게 만들어 버릴까봐 겁이 난다 고
요."

일라이저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은 듯 맞은 편 메틴 왕에게 투덜거렸다.

"나 역시 이 자리가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일라이저 네 마음만큼이나 이곳
을 떠나고 싶다 그 말이지. 헌데 반데라스 황제가 무슨 꿍꿍이로 이 자리를 만들었는
지 지켜볼 필요는 있다 생각하니 참아라. 세바스찬은 가이루덴으로 데려가서 다시 회
복시키면 되면 너무 염려하지 말고. 쯧쯧쯧, 병약한 녀석 같으니…꼴 보기가 싫구나."

초점을 잃은 채로 앉아 있는 세바스찬의 모습을 보면서 메틴 왕은 크게 실망이라도
한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메틴 왕의 행동에 잠시동안 세바스찬이 불쌍
하다는 생각을 일라이저가 한다. 사촌인 그녀마저도 어느 정도 동정심을 갖았는데 아
버지라는 자가 하는 말과 행동이 조금은 세바스찬이 측은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한참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파티에 푹 빠져 있을 때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
리고 일제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가장 먼저 그들을 반기는 것은 이 만찬
을 주도한 반데라스 황제였다. 그의 지시에 의해 팡파르가 울려 퍼지면서 가운데 붉
은 양탄자가 길게 깔려진 곳으로 두 사람이 걸어 들어가 반데라스 황제와 마주한다.

"널 환영한다 아이린. 자, 여러분 카나 황국의 후계자가 돌아왔습니다. 오늘 이 중요
한 사실을 여러분께 알려드리기 위한 자리입니다. 자, 이리 오너라 아이린."

반데라스 황제의 독단적인 발언에 잠시 동안 아이린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스
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옆에 온화한 미소로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손녀딸을 보게
된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마가레타 황후. 그녀의 모습에 아이린은 차분한 태
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반데라스 황제가 권하는 그의 옆에 놓인 황금색 의자로 걸어간다. 물론 그녀
의 곁에는 테리우스가 에스코트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반데라스 황제가 테리우스가 아이린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그래, 정말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주었구나. 자, 다들 맘껏 마시고 즐기도록 하라. 카
나의 후계자로 인해 짐의 마음이 기쁘구나!!!!! 오늘 참가한 왕족들에게도 후한 선물
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시 파티를 시작하라."

반데라스 황제가 축배를 권하며 그의 발언을 마치자, 여기저기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 흐르는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파티 장을 가득 메운다.

*

지독하게 추운 날씨가 칸 장군의 목 언저리를 쭈뼛쭈뼛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는 어두
워진 밤이기에 더욱 화려한 불빛을 내뿜고 있는 카나 황국의 성들을 바라보고 있다.

한 시간 후면 진격하라는 메틴 왕의 명령에 복종하겠지만 과연 성공할지는 미지수였
다.

"이번 일은 너무 무모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 조금 걱정이 되는 늙은이의 마음이
오."

이노렌 장로가 길게 늘어진 자신의 흰 수염을 매만지며 칸 장국에게 말한다.

아리스샘터를 장악하는 것은 이미 테리우스가 없었던지라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 동
안 궂은 전쟁들을 치르면서도 승승장구했던 그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것이 불길
하다. 마치 지금까지의 전쟁의 종점을 향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왕의 명령이니 따라야지 별수 있나."

"흠, 이번 전쟁만 끝나면 그럼 이젠 내가 원하는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오."

"그렇지. 자네가 준 데본에 관한 자료는 모두 꽤 쓸모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난 카나 황국에 관해서는 문외한인데 왜 이번 일에도 나를 끌어들인 거요."

"그건 이번 파티에 테리우스 대마왕이 참여했다는 소식이 있어 그런 거요. 다른 아리
스샘터의 장로 일행도 있다고 하더군."

"그런…이제야 알려주다니…."

"왜 걱정되시오?"

이노렌 장로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진다. 그가 해온 배반들이 점점 커져서 이제는 겉
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지금 이젠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왕이었던
테리우스를 대면하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때 갑자기 뒤편에서 큰 폭음이 들리면서 군사들이 함성이 들려온다.

진격하라!!! 모조리 쓸어버려라!!!!

우아아아아!!!!!!!! 으아앗!!!!!!!!!!!!!!!

카나 황국의 성기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카나의 군사들이 칸 장군의 군대를 향해 돌격
한다. 이에 놀란 칸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이노렌 장로의 안색도 창백하게 변한
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휘몰아치면서 카나 황국의 군사들에게 칸 장군이 이끄는 가이
루덴의 군대는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그렇게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가이루덴
의 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맙소사, 이렇게 일격에 무너지다니 내 군대가…내 군대가…."

칸 장군이 투구를 벗어 던지며 머리채를 쥐어흔들고서 목놓아 절규한다. 아직 칼을
제대로 겨누어 보지도 못한 채 당해버렸다. 그렇게 조심하고 정교하게 계획했던 일이
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져버렸다. 대체 어떤 자가 이끌었기에 단 시간에 전멸한
단 말인가.

우두머리 칸 장군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급자들은 목에 칼을 짊어진 채로 카나 황
국으로 이동한다. 카나의 군대를 이끈 아토스 공작이 백마를 타고 금빛 휘장을 휘두
른다. 그는 자신의 약혼녀를 맞이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것에 희망을 걸었다.

'기다리십시오. 아이린 공주님…당신 곁으로 지금 제가 갈 것입니다.'

*

만찬 내내 아이린은 각국의 왕족들에게 반데라스 황제에 의해 끌려 다니며 소개되고
있었다. 반면 몸이 좋지 않은 마가레타 황후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의자 하나를 사
이에 두고 테리우스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어렵다면 어렵고 어색
한 관계였다.

그러나 나이가 더 많은 마가레타 황후가 먼저 테리우스에게 말을 건넨다.

"오느라 수고가 많았겠네요."

그녀는 테리우스가 반데라스 황제의 계획에 의해 강제로 끌려 온 것을 모르고 있었
다.

'뭐야, 이 할망구는 알면서 약올리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모르고 물어보는 건가? 쳇, 귀
찮군.'

상대가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말을 걸자, 테리우스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만찬 내내 자신을 뒤로 제쳐두고 무시하는 반데라스 황제의 태도 역시 썩 반가운 일
은 아니었으니.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봉인되어 있는 동안 카나 황국의 황제가 세대를
걸쳐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테리우스 대마왕은 역사에 남아 있는 데본 제국
의 대표임이 자명했다. 게다가 지금 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는 태도의 일
색은 그의 힘이 모두 소진했다고 예상한 카나 황국이 그를 직접적으로 무시하는 작태
였다 볼 수 있겠다.

반데라스 황제의 번지르르한 사교적인 발언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모습에 더 이
상 참기 힘든 아이린이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돌아서서 곧바로 테리우스가 있는 곳
으로 다가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놀란 반데라스 황제가 얼굴이 많이 굳어진 상태로 그 뒤를 따라
갔다.

"테리우스, 나 그만 나가고 싶어. 이곳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져."

아이린의 얼굴은 매우 지쳐 보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테리우스가 반가운 얼굴
을 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막 나서려는데 반데라스 황제가 막아선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이린, 카나의 후계자로서 예를 갖춰야할 자리다. 그렇게 가벼
운 자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을 터인 것을 이런 실례를 범하다니 참으로 실망이다."

"아뇨,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요. 그만 나가겠습니다."

아이린의 목소리를 강하고 또랑또랑했으며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고 야무져 보였다.
곁에 있던 테리우스가 괜히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다. 실로 재미있고 통쾌한
일이었으리라.

"이런, 소리를 낮추거라. 귀빈들의 귀에 들리겠구나."

반데라스 황제의 모습에 아이린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적어도 이 만찬의 의미
가 그녀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서야 깨달았으니.

"아뇨, 누가 들었든 상관없습니다. 전 이 자리는 황제폐하께서 제게 용서를 구하기 위
해 마련 한 곳이기를 바라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 전혀 다른 것 같아 이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 일행들과 카나 황국을 완전히 떠날 생각이니 준비해주시
면 감사하겠습니다."

"뭐라고!!!!!! 감히, 뭐라고 하는 것이냐!!!!!!!"

반데라스 황제의 진노함에 음악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당황해 한다. 이제 반데라스 황
제에게는 만찬의 손님들의 시선 따위는 상관없어졌다. 자신의 과오를 전혀 모르고 있
을 거라고 생각한 그의 앞에서 아이린 손녀가 말하는 소리는 단순히 버릇없어 보일
뿐이다.

"떠나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안 된다!!! 곧 있으면 넌 이곳에서 약혼을 발표해야하느니라!!!!"

반데라스 황제의 황당한 발언에 잠자코 아이린 곁에 서 있던 테리우스가 인상을 긋는
다.


---------------------------------------------------------------------------------------------------------^^*
오늘도 찾아와준 당신,
당신이 있어 참 행복합니다..................................어디서 들어본 광고문이에요..
호호호..............겨울이 되니 호빵이 먹고 싶네요...고구마에 호빵에...................
식욕의 계절입니다..........^^*

-겨울기사올림.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69화
 겨울기사   | 2004·11·29 03:45 | HIT : 404 | VOTE : 0 |

코웃음을 치며 다소 껄렁한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다가와 반데라스 황제의 왼쪽 어깨
를 툭툭 건드리며 매서운 눈빛을 보내는 테리우스.

그 모습에 아이린이 메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푸른 눈동자를 크게 뜬 채로 자신의 손
을 잡고 있는 테리우스의 태도를 바라본다. 그가 혹 화를 내며 이곳을 난장판으로 만
들어 버릴지도 모를 기세처럼 보였다. 그렇게 되면 지난 번 젬모스 지역에서처럼 똑
같은 일이 반복되는 기분이 들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 한번 테리우스의 자
존심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인 자신의 손에 돌아오는 것은 악몽이다. 그러나 그가 지
금 화를 낸다면 그녀는 그렇게 해야한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테리우스…제발 참아 줘. 화를 내더라도 내가 내야하는 상황이야…지금 네가 화를 내
게 되면 그럼 모든 것이 원점이 돼버려…저들에게 그런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돼.'

권력가들에게 있어 작은 실수도 큰 전쟁의 불씨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아이린
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의 행동이 얼마나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상황인 것이
다.

카나 황국의 대표와 데본 제국의 대표의 침묵의 긴장감. 그녀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알려드려야겠군요. 아이린과 전 이미 결혼
을 했습니다. 약혼은 결혼 전에 하는 것인데 뭐, 굳이 다시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는
걸 바라시면 그렇게 해도 전 상관없습니다. 장! 인! 어! 른!"

반데라스 황제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던 테리우스의 손은 어느새 어깨 위의 먼지라도
털어 주는 것처럼 토닥이듯 보였고 매서웠던 그의 눈빛은 여전했지만 굳게 다물었던
입가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 테리우스…."

테리우스의 의태연한 모습에 아이린이 감동한다. 너무나 자랑스러운 그녀의 남편이
다.

"왜 그러시나 부인? 무슨 그런 감동의 얼굴씩이나."

"자네 지금 짐에게 뭐라고 했나?"

반데라스 황제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눈을 깜빡거리고 입술을 깨문다. 천하
의 테리우스가 자신에게 장인 어른이라 부르며 웃고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테리우스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데본의 대마왕으로 왕족의 체통
이나 예절에는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화가 나면 고스란히 화를 내고 그로 인해 전쟁
이 생기면 전쟁을 치르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아이린의 약혼을 문제로 자존
심을 박박 긁어내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미소를 짓
다니 이 무슨 희귀한 일이란 말인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라는 걸 보면 황제께서도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시나 봅니다."

"뭐라?"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제게 같은 질문을 반복하시다니…아, 장인 어른의 건강이 안
좋으시면 사위 된 도리로 힘든 카나의 국정을 잠시 제가 도맡아 도울 수도 있습니다
만."

"아니, 이 놈이…."

"하하, 사위를 이 놈이라 하시다니 노망이 아니고서야 황국의 예법을 지키셔서 모범
을 보이셔 야죠. 아무래도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이곳을 떠나고 싶어하니 실례를 무릅쓰고 가봐야 할 것 같아 사위의 마음이 애통합니
다. 장인 어른."

"읔, 이봐라 짐이 자리에 좀 앉아야겠다."

반데라스 황제가 뒷머리를 오른손으로 짚어내며 수호기사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
는다.

"흠, 정말 걱정이 됩니다. 제 마음이 다 아프군요."

테리우스의 빈정거리는 말투가 시작되었다. 역시 그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아내를 위해 화내는 방법을 조금 바꾸었을 뿐이었으니. 이에 아이린이 고개를 내젓는
다.

'아, 테리우스…정말 못 말리는 내 남편…그래도 지금 많이 참아주고 날 배려해 주는
거야.'

공식적으로 전쟁을 치를 만한 빌미를 결정적으로 제공은 하지 않으면서 반데라스 황
제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에 테리우스는 만족했다.

'흥, 이 너구리같은 카나 영감…네 놈이 감히 네 성질을 건드려서 데본과의 전쟁이라
도 선포하려는 모양인데 어림없다. 그럼 자동으로 아이린과 나는 이혼을 해야하는 결
과를 가져다주는데 그 어처구니없는 수에 넘어갈 수야 없지.'

테리우스와 반데라스 황제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메틴 왕은 자꾸만 출입 문
쪽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의 행동에 이상한 낌새를 챈 일라이저가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기다리시나요?"

"그게…아니다. 신경 쓸 것 없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제게 숨기시는 거죠?"

"그런 것이 아니다. 넌 세바스찬을 잘 돌보고 있도록 해라."

메틴 왕은 일라이저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좀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
해버렸다. 그는 칸 장군이 군대를 몰고 들어올 때가 되었는데도 밖이 조용해 다소 심
란한 마음이었다. 한편 가장 자리에 위치한 레드 드래곤 부부들은 처음 사람들의 눈
요기가 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계속 해서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눈을 뜨고 둘러보니 한 쌍의 남녀를 둘러싸고 사람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했던 그들의 딸 아이린
과 가정 교사 테리우스였다.

"세상에!!!! 아이린!!!!!!!!!!!!!!!!!!!!!!!!!!!"

"오, 나의 딸아!!! 아이린아!!!!!!!!!!!!!!!!!!!!!!"

페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연이어 제크의 흥분된 목소리가 파티 홀을 뒤덮어 순식
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에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아이린이고 테리우스였
다.

"오, 맙소사."

아이린은 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놀라움에 이어 반가움이 그녀의 눈을 통해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에 테리우스는 코웃음 한번 치며 눈가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묻어 났다.

"하여튼 광대들이 따로 없는 녀석들이라니까. 카나에서 이 녀석들을 어디에 쓸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만찬에 공개적으로 내세웠다는 건… 쳇, 구석에 있었으니 안보였
지."

어느 사이 아이린을 둘러싸고 엉엉 울어대는 철없어 보이는 다소 재미있는 광경에 테
리우스가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멀리서 원탁에 앉아 모든 모습들
을 지켜보며 차분히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아이린의 일행들이
었다.

"다행이야. 테리우스 녀석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었네. 치잇, 좀 어디 망가져서 나오
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메이샤링이 여전히 완벽해 보이는 테리우스의 모습을 보며 투덜거리자, 벅스칼이 맞
장구를 친다.

"쩝, 동감입니다. 어, 그런데 저기 뒤에 저 두 사람…초대도 받지 않고 어떻게…."

"어머, 정말."

벅스칼이 먼저 발견하고 뒤이어 메이샤링이 알아차린 듯 손가락으로 지적한다. 그러
자 코보 족장을 비롯한 레오나르, 다칸, 앨런 그리고 아르테니와 파라도가 일제히 시
선을 고정한다.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기분이 들어 그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테리우스의 눈썹
이 움찔하자, 그의 뒤쪽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린의 일행들이 흠칫 약간의 시선을 떨
군다.

"흠, 뭐야 날 반기는 거냐 아님 관찰하는 거냐…쳇, 저 녀석들 아주 한 곳에 뭉쳐 있
군 그래. 아니, 날 보는 것 같지는 않는데 어딜 보는 건가?"

테리우스는 아이린의 일행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을 둘
러본다. 그때 그의 등뒤로 두 사람이 나란히 다가와 그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린다.

"우리들일거다."

"음, 네 일행들이 바라보는 건…히힛, 반갑지 친구!"

제로이드와 바이사코였다.

"이런, 카나 영감이 너희를 초대했을 리는 없을 텐데…뭐야, 불법 침입이냐? 흠, 그건
곤란한데 내 장인의 허락 없이 헉!!"

바이사코가 장난스레 테리우스의 허리를 그의 오른 주먹으로 가격한다.

"이 녀석 무슨 장인? 심부름 시켜놓을 때는 언제고."

"그러게 말야. 알아낸 정보고 궁금하지도 않은 가봐. 헌데 아이린은 어머니 나라에 와
서 행복해 하는 거냐? 아님 키워준 레드 드래곤들을 만나서 좋아하는 거냐?"

제로이드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아이린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녀는 지금 레드 드래
곤 부부와의 만남에 감동 중이었고 그 모습을 사람들은 어리둥절 바라보고 있다.

게다가 침울한 표정으로 뜻대로 되질 않아 온갖 인상을 긋고 있는 반데라스 황제와
이를 염려하는 마가레타 황후의 모습은 그 주변을 어둠으로 몰아가게 만들고 있었
다.

"레드 드래곤이 아이린을 키워 준 걸 알아냈다면 그것보다 더 대단한 걸 내놓아야 내
가 너희를 인정해 줄텐데."

"뭘로?"

"친구로…히힛, 어서 말이나 해봐라. 곧 있으면 나도 저 관중들의 시선에 포함될 테니
까. 너희들 여기 있는 걸 알면 아마 카나 영감이 불법 침입으로 가두려고 할거다. 알
아서들 피하라고."

"어이구, 이걸 친구라고…제로이드 네가 말해라. 난 배가 고파서 음식이라도 좀 먹고
있어야겠어. 아휴, 아주 푸짐하게도 차려놨구나. 음악이나 좀 다시 연주하던지 하
지…썰렁하군."

테리우스가 친구들이 어떤 정보를 가져왔는지 지레 짐작은 하고 있지만 확인하려 했
다.

제로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카나 황국에서는 레드 드래곤을 첫 번째 이유로 아이린을
길러준 양부모들이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을 이용해 데본과 전쟁을 할
생각이었다.

제로이드는 이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그 안에 가이루덴이 얽혀 있는 것도 설명
한다.

"아무래도 가이루덴이 이 전쟁 중에 또 다른 마음을 먹고 카나와 동맹을 맺었다고 뒤
통수를 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뭐, 동상이몽이라고 카나가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
니까. 헌데 이곳에 메틴 왕도 온 거냐?"

"응, 저쪽에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저기 저 녀석…아마 내가 건 마법
에 아직도 심통이 난 것 같다."

"하하하, 그만 풀어주지 그래. 메틴 왕도 계속 저 신장으로 살고 싶지는 않을텐데."

"쳇, 욕심을 비우면 자동으로 커지도록 되어 있어 안 그러니 매년 저렇게 작아지지."

"그래? 그 사실은 말했냐?"

"음, 몰라…말했던가. 아, 지금 그런 거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내 아내에게 가보련다."

"참 테리우스가 지상 세계에 이렇게나 관여를 많이 할 줄이야. 결혼의 힘이 크기는
커."

제로이드가 살짝 놀리듯이 말하자, 테리우스가 힐끔 그를 바라본 후 발길을 돌리려
한다.

"아, 잠깐만."

"또 뭐냐. 놀릴 거면 지금까지 반데라스 황제가 내 인내심을 시험한 것과 반대로…넌
그냥 확 하고 던져버린다."

"하하, 그건 아니고 우리가 방금 들어오면서 봤는데……잠깐 귀 좀."

"간지럽게 무슨 귀 그냥 말해."

"듣기 싫으면 말고."

"됐어. 안 들어. 나간다."

테리우스는 친구의 말을 더 이상 들어 볼 필요 없다는 듯 휙 하니 그의 아내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제로이드는 퍽 재미있어 한다. 그러
나 성 밖에 본 광경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친구가 듣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다소 안타
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곧 부딪칠 마찰에 대해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미소짓는 제로이드.

이에 한참을 먹을 것에만 집착하던 바이사코가 다가와 묻는다.

"으음, 정말 맛있다. 테리우스가 아처에 대해서 뭐래?"

"나도 몰라. 그만 좀 먹어라 그러다 돼지 되겠다. 신경 좀 써."

제로이드의 핀잔에도 별로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먹은 음식물을 목으로 잘 넘기기 위
해 오렌지 쥬스를 들이키며 시원스레 트림을 하는 바이사코였다.

"커∼억! 남이야 돼지가 되던지 말던지…어, 파라도와 아르테니는 저기에 있잖아. 그
럼 아처 그 녀석만 갈라진 거냐?"

"뭐, 속사정이야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만 아무래도 내분이 있었듯 싶다. 그렇지 않고
서야 일행들과 뚝 떨어져서 카나 황국의 갑옷을 입고 전장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기사
로 행렬을 한다는 건 앞뒤가 안 맞잖아. 카나로 환궁한 게 분명해."

"그럼 우리와 적이 된 거네. 그러니까 테리우스가 뭐래?"

"말 안 했어."

제로이드가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대답하고는 만찬이 벌어지는 곳에 출입구를
찾아 유유히 걸어가자 바이사코가 뒤따른다. 그리고 뭔가를 굉장히 열변을 토하듯 말
하지만 제로이드의 무쇠 주먹 한방에 그냥 그대로 조용해졌다.

"야, 아파."

"그러게 왜 그리 시끄러워. 남들 이목 끌면 우리는 여기서 피곤해져."

"어디로 가는데."

"테리우스와 약속한 곳이 있어 우선 우리는 그곳으로 간다."

"흠, 다시 데본의 시골로 돌아가고 싶다. 권력 세계는 정말이지 지겨워."

"히힛, 나도."

잠시 후, 인적이 드문 복도에서 둘은 마법 진을 형성하더니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버
렸다. 그리고 몇 분도 안돼 그곳으로 아처가 벗은 투구를 오른쪽 가슴팍에 감싼 채 만
찬 홀을 향하고 있었다.

*

반데라스 황제는 레드 드래곤 부부에게 묘한 이질감과 동시에 질투를 느끼게 된다.
아이린이 자신을 만났을 때의 태도와는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반가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은 날 보면서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가레타 황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딸 클레오가 낳은 아이가 아니던
가. 마치 클레오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처럼 아이린은 그녀의 딸과 쌍둥이처럼 똑같
은 모습이었다.

"레드 드래곤들이 너무 흥분한 듯 하니 일단 귀빈실로 모셔다 드려라."

반데라스 황제가 참다못해 명령을 하자, 제크와 페키가 곧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응대
한다.

"앗, 저희는 괜찮습니다."

"네, 아주 차분하고 행복합니다."

아이린 역시 그들과 좀더 있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했다.

"황제 폐하, 저는 절 길러주신 분들을 만나 너무 기쁩니다. 이분들과 좀더 같이 있고
싶습니다."

그녀의 말에 반데라스 황제는 언짢은 심기를 토로한다.

"아이린 공주는 짐에게 이곳을 떠나겠다고 말하였다. 아직 그 이야기의 마무리를 짓
지 않은 듯 싶으니 우선 이들을 귀빈실로 보내도록 하는 것에 반대하지 말아라."

어떻게 보면 반데라스 황제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이린이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본 뒤 레드 드래곤 부부들을 향해 이야기한다.

"부모님들을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갑고 기쁜데 지금은 때가 좀 좋지를 않은 것 같아
요. 그러니 잠시만 귀빈실로 가서 기다려 주세요. 제가 이곳을 떠날 때 함께 모시고
가도록 할게요."

말괄량이였던 그때의 아이린과 다르게 차분하고 숙녀가 다 된 모습에 레드 드래곤 부
부는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 과정을 지켜보지 못한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 우리는 그곳에서 널 기다리고 있으마. 여보 그만 가자고."

제크가 먼저 그의 긴 꼬리를 흔들어 페키에게 접촉하면서 딸의 말에 수긍을 한다. 그
러나 페키는 못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계속해서 아이린
의 모습을 보기 위해 뒤돌아보고는 했다. 그렇게 레드 드래곤 부부는 카나의 우두머
리 하녀의 안내를 받고 귀빈실로 자리를 옮긴다. 작은 음악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지
면서 상황은 조금 느슨해져 보이는 듯 했다. 썰렁한 듯 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파
티의 진행자가 조심스레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반데라스 황제가 다소 무례함을 범한 것을 그대로 방관하고 있는 카나의 후계
자 아이린에게 한마디하기 위해 벼르고 있는 순간이다. 레드 드래곤 부부가 홀에서
완전히 나간 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린이 몸을 돌려 반데라스 황제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곧바로 반데라스 황제 앞에 부복을 하며 입을 열었으니 그녀의 목소리는 낮
고 차가웠다.

"전 알고 있습니다. 폐하!"

"무슨 소리냐."

"폐하, 전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배경을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
을 알게 된 지 아직 만 하루도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명백한 진실이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폐하와 마주하는 것 마저 힘들고 아픕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해 폐하에
게 직접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이곳을 떠나도록 허락
하십시오. 더 이상은 폐하 스스로의 욕심으로 화를 부르는 어리석음은 행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 어머니의 아버지이시기에 최소한의 예를 갖추고 있는 제 모습에서 더
이상을 바라지는 말아 주십시오."

"……아이린. 그것은 오…해다."

반데라스 황제의 목소리가 다소 떨리고 있었고 이에 더 놀란 것은 마가레타 황후였
다. 지금 자신들의 앞에서 그들의 손녀가 무엇이라고 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마가레타 황후가 다소 격앙된 분위기의 목소리로 그녀의 남편을 바라본다. 너무나 파
랗게 질려 있는 남편의 얼굴 그것은 악몽 그 자체였으리라. 마가레타 황후 역시 이 세
계를 잘 알기에 아이린이 돌려 말한 이야기의 본질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이다.

"폐하, 지금 아이린의 말이 무슨 뜻입니까? 폐하…아니, 여보 지금…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말씀을 해 보세요. 설마 당신이…아니죠. 아니라고 제 눈을 보고 말씀해 보세
요. 폐하!!!!…아……."

급기야 마가레타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서다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마가레타 황후님을 황실로 모시도록 하세요."

아이린이 차분하게 명령하자, 밑에 하녀들과 하인들이 서둘러 그 명령을 수행한다.
아이린도 할머니의 건강이 걱정이 되어 테리우스를 대동해 함께 동행한다. 마가레타
황후를 황실에 잘 모신 후 하녀들에게 치료사를 불러 올 것을 당부하며 그녀의 남편
과 방을 나온다.

"괜찮겠냐? 좀더 함께 있어 들이지 그래."

어쩐 일로 테리우스가 다정하게 염려해준다. 이에 조금은 놀라운 기분이 든 아이린.

"아니야. 어머니의 어머니이셔 그래서 아프신 것 싫지만 지금은 날 대하시기 힘들 거
야. 내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하셨어. 그것보다 반데라스 황제 폐하와 담판을 짓
고 이곳을 먼저 나가서 할 일이 우선 이야. 이곳에 너무 오래 잡혀 있었어."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

"테리우스, 곁에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뭘, 흐으음 어서 가자 담판을 지으려면 마음먹을 때 지어야지. 내가 뒤에서 버텨주

마."

멋쩍은 듯 딴청을 피우며 테리우스가 그녀의 손을 이끌고 앞장을 서서 걸어갔다.

반데라스 황제는 의자에서 고개를 숙이며 왼손으로 이마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때 아
처가 들어선다. 파티의 음악 소리가 다시금 끊겨지고 팡파르가 울렸다. 중앙으로 당
당하게 들어선 아처는 반데라스 황제가 있는 곳까지 빠른 발걸음으로 다다라 곧바로
부복을 한 후, 보고를 한다.

"가이루덴 군사를 모두 제거하고 포로들을 제압했습니다. 폐하!"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지금 이 상황에서 아처의 등장은 반데라스 황제에게 골치
가 되어 버렸다.

"짐이 오늘은 힘들구나. 자세한 보고는 다음에 하도록 하고 오늘의 만찬도 이것으로
끝을 내고 내일 다시 하도록 하라."

"그건 안됩니다."

아처는 들어오면서 자신이 만든 마법 주술로 인해 데려온 한 때 함께 했던 일행들의
존재를 보았다. 그들이 있는 지금 뒤로 물러나는 것은 그 스스로에게 힘든 일이었다.

"네, 명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폐하, 약속을 지키십시오."

아처는 자신과 오늘 아이린 공주가 약혼을 발표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 아처의 등장을 목격하게 된 일행들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히 황제가 있
는 곳으로 걸어갔다. 특히 아르테니와 파라도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처, 이 어리석은 친구야. 거짓으로 사랑을 어찌 얻겠나. 뻔한 길을…아, 불쌍한 대
장.'

아르테니의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그것은 파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죠?"

아이린이 테리우스와 함께 돌아와서 반데라스 황제 앞에 부복하고 있는 아처를 향해
묻는다. 그때 갑자기 메틴 왕이 우당탕하는 소리를 내며 장검을 빼어들고 무식하게
반데라스 황제를 향해 덤벼들었다.

"으아아악!!!! 죽어라!!!!! 이 미친 반데라스!!!! 내 손에 죽어라!!!!! 감히 내 군사들
을!!!!!!!"

"쳇, 미쳤구나 메틴."

테리우스의 레드 문이 단칼에 메틴 왕의 장검을 단검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마터면
반데라스 황제와 나란히 서 있던 아이린에게 검이 엇나갈 뻔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반데라스 황제는 별로 당황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테리우스가 막아서지 않았
어도 그는 황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만 황제가 잠자코 있는 것은 아이린과의 이
야기로 인해 충격이 가시지 않아 침묵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메틴, 운 좋은 줄 알아라. 아이린이 다쳤다면 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걸 경험했을 테
니까."

"큭큭큭, 움화화화!!!!! 컥컥컥컥!!!!!!!"

메틴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나중에는 통곡을 하며 눈물이며 콧물이며 쥐어 짜
낸다.

"여전히 요란스럽군."

"이건 아냐!! 커억!!! 커억!! 커억!! 내 군사들이 카나를 삼키고 나면 데본을 삼키고 그
렇게 돼야지 이건 아냐!!!!! 내 아들도 저리 되었는데 이건 아냐!!!!!"

"이봐, 그만 좀 울어. 넌 어째 여전하냐…반데라스 황제의 이복 동생이면 뭐하나 나이
는 더 많이 먹어서는 카나의 촌수는 좀 이상하다니까."

"내 키를 어떻게 할거냐!!! 이 못된 테리우스 이게 모두 네 탓이야!!!! 커억!! 커억!!!
흑!!흑!!"
원망어린 눈으로 테리우스를 바라보며 메틴 왕은 그 동안의 설움을 다 토하듯 발악했
다. 대마왕이 봉인되기 전에 자신에게 걸었던 주술로 인해 그는 삶이 싫어졌다. 그의
멋진 외모를 송두리째 빼앗아가 버린 테리우스가 죽도록 싫고 미워 복수를 다짐했는
데 그가 봉인되어 세상에 없어지자, 그는 다시 큰 키로 돌아가는 희망이 사라지고 말
았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돌아오다니 데본 제국만 제압하면 테리우스도 제압하고 그
러면 자신의 키도 돌아올 것 같았다.

"이봐, 욕심을 버려 그럼 예전처럼 돌아갈 거다. 그러니 그만 좀 징징거려. 대체 나이
를 어디로 먹은 거냐. 네 녀석 유치한 것은 예상은 했었지만 쳇, 그만 울어."

"뭐? 욕심을 버려? 그거면 되냐? 흑!! 흑!!"

"아, 몰라 그냥 해봐. 그만 조용히 좀 해라. 이봐, 거기 일라이저 숨지 말고 나와서 메
틴 좀 데려가지."

테리우스가 사람들 사이에서 구경하듯 숨어 있는 일라이저를 지적하며 말한다. 그리
고 사람들을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쳇, 다들 만찬이 아니라 무슨 구경하는 것처럼 돼버렸잖아. 오늘 파티는 그만이다.
다들 나가도록 해라."

반데라스 황제의 명령도 있었거니와 데본 제국의 테리우스가 말하자,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파티 홀을 조용히 떠나기 시작했다.

일라이저가 바닥에서 흐느끼듯 울고 있는 메틴 왕을 겨우 일으켜 세워 가이루덴의 하
인들에게 부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메틴 왕의 울음소리는 그가 파티 장을 떠날 때
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제 만찬 장소에는 아이린 일행과 반데라스 황제 그리고 아처
만이 남아이었다.

-----------------------------------------------------------------------------------------------9장 마침

이제 마지막회만 남았습니다................^^* 겨울기사 올림.


제  목: 말괄량이프린세스 170화 (마지막회)
 은빛마녀   | 2004·12·15 17:53 | HIT : 749 | VOTE : 0 |

10장 테리우스와 아이린의 보물

메틴 왕이 떠나는 뒷모습을 테리우스는 마지막까지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신장을 왜 작게 만들었는지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나질 않는다. 아마도 그날 기
분이 안 좋았을 때 메틴이 자신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은 아닐까 잠시 짐작을 해 본
다. 여전히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일을 계기로 해서 하나의 대륙에 피
바람이 덮칠 뻔했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에게 사소한 화가 누군가에게는 커
다란 불행을 안겨다 줄 수 있었음을 말이다.

반데라스 황제는 자신을 당당하게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의 주인공을 마주하기
가 조금은 버거워졌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그대로 덮어두겠다는 손녀를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강제적인 방법 외에는 설득하여 자의로 카나에 남게 하는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아처의 요구 역시 지금으로서는 실행하기 힘든 상황
이니 사면초가였다.

그러나 반데라스 황제의 근심에도 불구하고 아처의 요구는 단호하고 명백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여전히 부복한 자세로 황제의 명을 기
다린다.

"저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가이루덴 군사를 제압하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약속
하신 대로 전 아이린 공주님과 약혼식을 올리라는 명을 내리시기 전까지는 이 자리에
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르테니는 점점 추해져 가는 길목에 들어서는 친구의 모습을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다가가 아처의 행동을 멈추게 하려 들었다. 그러자 아르테니의 움직임
을 알아챈 아처가 그 즉시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고 두 눈을 번쩍이며 낮은 목소리
를 낸다.

"날 말릴 생각이라면 친구여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내 손에 죽을 수 있으니…친구들
을 모두 잃은 다고 해도 난 공주님만 내 곁에 둔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것이
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내 마지막 부탁이다."

아처의 눈동자에는 예전 순수하고 맑은 기운으로 가득 찼던 대장의 모습들이 이제 존
재하지 않았다. 함께 웃고 울고 의지했던 동료로 친구로 형제로 지내왔던 그 사람은
지금 없었다.

파라도가 자신의 가슴을 탁하고 두 번 내리치면서 입에 거품을 물며 거친 목소리로
아처에게 소리를 질러 댄다.

"이봐!!!! 대장!!!! 정신 좀 차려!!!!! 이건 대장답지 않아!!!! 이건 우리 흑기사들의 명예
를 더럽히는 일이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우리들의 명예를 잊은 거야!!!! 말해
봐!!! 대답해봐!!!!!"

"난…이제 그런 것에 상관없다. 파라도 너 역시 다가오면 내 검에서 피를 볼 것이다."

흑기사들의 분열을 바라보면서 반데라스 황제는 점점 더 난감해져 가는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카나 황국의 최고 권력과 명예와 부를 상징하고 있는 후계자들만이 가
질 수 있는 흑기사의 신분을 갖은 자들이다. 그들의 작은 분열에 관한 사건은 카나황
국의 이미지에 크게 먹칠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도 황제가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감정 싸움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쳇, 아주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군. 이봐, 반데라스 황제가 너에게 아이린을 주기
로 약속이라도 한 거냐."

테리우스가 더 이상 인내심에 바닥이 났는지 기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
나 의외로 이 상황의 주인공인 아이린은 태연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한 채 반데라스
황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처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고 그의 목소리에도 귀
를 닫고 있는 듯 표정의 변화가 보이질 않는다.

"아처 아토스 공작은 들어라. 지금 짐은 그대와의 약속을 이행하기에 시간이 필요하
다. 그러니 지금은 그만 돌아가도록 하라."

"안됩니다."

"뭐라, 지금 짐의 말을 거역하고 반역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필요하다면…."

아처의 대답은 주변인들을 비롯해 반데라스 황제까지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마치
이 자리에서 약혼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거두기라도 할 작정인 것처
럼 보였다.

사랑에 목마른 것처럼 더 이상은 떨어질 나락이 없는 것처럼 아처의 모습은 비장해
보인다.

반데라스 황제가 더 이상은 아처의 무엄한 태도를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카나
황국 기사대를 불러낸다. 푸르스름한 빛의 검은 망토를 둘러싼 자들 서른 명이 어디
에서 나타났는지 공중에서 번쩍임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이 두르고 있는 망
토 자락이 마치 살아 숨쉬는 것처럼 길게 출렁이며 바닥으로 가볍게 착지한다.

"아토스 공작의 반역이다. 곧바로 하옥하라."

기사대는 짧은 목례로 답을 한 후, 아처를 향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아르테
니와 파라도가 그들의 대장을 감싸며 검을 빼어든다.

"흥, 우리들 손에 아처를 혼내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이들 손에 우리들의 대장을 내
줄 수는 없다."

"나 역시."

파라도의 발언에 아르테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합류한다.

"아이참, 이게 무슨 희한한 일들인지 모르겠어. 대화로 해결할 일을 아무래도 내가 나
서야겠어."

"메이샤링, 그대로 있으시오. 이것은 카나의 일이니 데본에서 움직이는 것은 현명하
지 못하오."

메이샤랑이 참다못해 중재에 나서려고 하자, 코보 족장이 서둘러 그녀를 막아냈다.

뒤쪽에 서성이던 다칸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앨런을 불러내 그를 데리고 아무
도 모르게 만찬 장소를 빠져나가 버렸다.

"어딜 끌고 가는 거야?"

"조용히 따라와 보면 알아."

다칸의 명령 아닌 명령에 앨런은 친구의 뒤를 따르게 된다. 그 사이 아처는 자신을 공
격하는 기사대에 맞서 싸우는 아르테니와 파라도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을 배
반한 자신을 위해 직위와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친구들이었다.

기사대는 마치 감옥으로 아처를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처
럼 무섭게 공격해왔고 아르테니와 파라도는 미친 듯이 그들의 공격을 방어해야만 했
다. 아처가 어떠한 방어나 공격도 하지 않은 채 부복하는 자세에서 꿈쩍하질 않아서
이다.

쉬리리릭!!!!!!!!!!!!!!

챙!!!!!!!!!! 창!!!!!!!!!!!!! 팅!!!!!!!!!!!!!!!

기사대의 망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그들의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만찬 장소
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 공간은 가장 무서운 살의로 가득해
졌다.

"쳇, 이러다가 아이린마저 다치겠군. 시끄러운 카나 녀석들…이쯤해서 그만둬줘야겠
다."

테리우스가 싸움 광경을 지켜보다가 홀로 중얼거린다. 그리고 레드문을 꺼내 힘차게
바닥을 향해 내리꽂는다.

콰콰쾅!!!!!!!!!!!!

굉장한 파열음이 바닥에 진동을 일으키면서 원형의 공간으로 파장을 일으킨다. 일시
에 모든 공격과 방어의 동작이 멈춰지면서 세 명의 흑기사들과 카나의 기사대의 움직
임이 멈춰 졌다. 그들의 표정과 숨소리마저 정지된 모습은 마치 다른 세상과 나뉘어
져 있는 듯 보였다.

"이것은 데본의 전투 마법에 하나…어떻게 된 것이냐!!!!"

테리우스의 마법에 놀란 반데라스 황제가 두 눈을 부릅뜨며 묻는다. 대마왕의 힘이
소진되었다는 정보가 틀렸음을 지금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힘이 돌아 온 것이다. 보면 모르나? 조금 있으면 다들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을 테니 치료사들이나 대기하도록 하시죠. 장인 어른!!!"

"테리우스…."

드디어 테리우스 곁에 있던 아이린이 입을 열고 말을 한다.

"응, 왜 그래? 괜찮은 거냐. 많이 놀라서 조용히 있었던 거 알고 있다."

"그런 건 아냐. 그것보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놀라 떨리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주 작지
만 강하게 들리는 그녀의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야무지게 느껴진다.

반데라스 황제는 처음 자신을 장인이라고 불렀던 테리우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되새
겨봤다.

'흐음, 저 녀석이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아님 나를 앨리어튼 대신으로 생각하겠다는
뜻인가? 대마왕의 꿍꿍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군 그래. 그 못난 앨리어튼과
결혼하겠다고 클레오가 여왕 자리를 박차가 나가지만 않았어도…몹쓸 녀석 카나를
위해 아비가 딸을 희생시키게 하다니…손녀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점점 힘이 드는 구
나.'

반데라스 황제는 자신을 장인이라고 자꾸 칭하는 테리우스의 모습을 살폈다. 아이린
을 걱정하듯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 자꾸 앨리어튼에게 불러야
할 호칭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뭔가 다른 꼬투리를 잡기 위한 함정처럼 들렸던
반데라스 황제.

"황제 폐하, 무슨 뜻으로 아처에게 저와의 약혼을 약속하셨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처음 제가 원하는 바를 다 알렸으니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
아가도록 해주십시오."

"그것만은 안 된다. 아이린 넌 이곳에 남아 카나의 뒤를 이어야할 유일한 후계자이
다."

반데라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아이린에게 부탁하듯 호소한다. 그러
자 그녀의 이맛살이 조금씩 찌푸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빛마저 날카롭게 만들었
다.

"할아버지!!! 제가 왜 그냥 돌아서려는지 그 뜻을 잘 아시면서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
십니까!!! 어머니가 선택한 삶을 사셨듯이 저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발 욕심을
버리세요."

"……."

아이린의 입에서 처음으로 할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반데라스 황제가 잠시 움찔했
다.

"저희를 그만 보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은 어머니의 죽음 앞
에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아이린, 그럼 카나는 마지막 후계자를 잃게 된다. 널 보낼 수 있는 명분이 없노라. 끝
까지 그리 고집을 피운다면 강제로 대관식을 거행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입장이노
라."

아이린이 한 발자국 다가서서 테리우스의 손을 부여잡고 그를 한번 슬며시 바라본
다. 자신의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 이제 그와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는
그녀였다.

"전 이미 카나의 후계자로 자격이 없습니다. 혈육이 아닌 두 번째 선택을 황제께서는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아처라면 카나의 훌륭한 후계자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무슨 소리냐, 자격이 없다니."

"제 몸에는 이미 데본의 생명이 잉태되어 있습니다."

"뭐라!!!!"

아이린의 폭탄 발언에 반데라스 황제보다 테리우스가 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
의 얼굴은 그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눈동자는 촉촉해 보였다. 테리우스의
심장은 긴장하기 시작하고 그의 얼굴은 기쁨과 놀람으로 표정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메이샤링과 코보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종족의 특성상 카나와 데본 사이에 생
명이 잉태되기는 그리 쉬운 일도 이렇게 빨리 일어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아이린의 아기 소식은 매우 놀라운 것이 틀림없었으리라.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아이린의 거짓말인가 아니면 진실인가 아직은 알 수 없었
다.

그 사이 치료사들이 들어와 카나의 흑기사들을 비롯해 기사대들을 모두 데리고 나갔
다.

썰렁해진 만찬 장소에 반데라스 황제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힘없는 어조로 겨우 입
을 열었다.

"과인의 잘못이 크다는 것은 인정하나 지금은 너에게 용서를 빌기보다는 나의 죽은
딸에 무덤으로 가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먼저인 듯 싶구나. 아이린, 너의 말이 사실인
지를 확인해 볼 의무는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겠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넌 자유
니라. 네가 원하는 삶을 위해 이곳을 자유롭게 떠나는 것을 윤허하노라."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하나의 왕국을 지켜내기 위한 권력자의 선택은 그렇게 힘겹게 꺾어지고 말았다. 그
런 반데라스 황제의 모습이 못내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러나 아직은 아이린 역시 그녀
의 할아버지를 용서하기는 힘들었다. 적어도 지금은 이대로 이곳을 떠나는 것이 그들
을 위한 그리고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믿고 싶었다.

카나 황국에서 아이린 일행은 그렇게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기로 일정을 잡았다.

그들이 머무는 귀빈실에는 메이샤링, 코보, 미니조우, 클락 그리고 테리우스와 아이
린 만이 다시 모여 있었다.

아처를 따라 신의를 지키려던 아르테니와 파라도는 아직 혼절한 상태로 그들과 함께
떠나는 것은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머지 네 사람의 행방은
아침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흥, 결국 아이린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우리가 여기에 끌려왔었던 거야. 헌데 레오나
르와 벅스칼이 안보이네. 만찬에서 하도 정신이 없어서…."

메이샤링이 길게 늘어뜨린 곱슬머리를 옆으로 땋아 내리면서 투덜거렸다. 그러고 보
니 다칸과 앨런의 행방도 묘연했다.

"다칸과 앨런은 무슨 일이 있는지 나가는 걸 봤지만 글쎄 나 역시 벅스칼과 레오나르
의 모습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소. 허나 둘이 함께 있다면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아
도 될 듯 싶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이건 뭔가? 꼬마 젤리인지 붉은 색이 탐스러워 보이네. 미니조우 이것 좀 먹어 볼래
요?"

코보 족장의 설명에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메이샤링이 딴청을 피우며 미니조우에게 식
탁에 담긴 젤리를 권한다. 그러자 미니조우가 인상을 굳은 채로 딱딱하게 응답한다.

"됐습니다. 클락, 내일 떠날 거라면 지도를 좀 살펴보죠."

"에이, 사람 무안하게 그리 무뚝뚝하다니 미니조우도 좀 꾸미고 화장을 좀 하고 나면
훨씬 멋져 보일텐데."

메이샤링이 드워프족 미니조우에게 다가와 그녀의 눈 높이를 맞추며 생글거리며 속
삭였다.

"멋져 보여요? 예뻐 보이는 게 아니고?"

"호호호, 그게 아니라 멋져 보이면서 예뻐 보인다 그 말이지 뭘 어때요 내가 꾸며줄
까?"

다소 기분이 상한 듯 미니조우가 투덜대듯 말하자 메이샤링이 재빨리 말을 바꾸어 말
한다.

미니조우가 계속 메이샤랑이 피해가고 그럴수록 재미난 듯 메이샤링이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며 졸라대는 모습을 보고 클락이 코보에게 한마디한다.

"메이샤링님은 참 명랑하고 기분 좋은 여자 분이에요. 그렇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니조우도 조금은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한다면 좋을 텐데…."

클락이 가방에서 지도를 빼 살피면서 안경을 고쳐 쓰다가 중얼거렸다.

"클락, 카나에서 다시 케르베노아 영토까지 물리적으로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
죠."

"네, 저도 그 점이 조금 걱정됩니다. 다시 그 머나먼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흠, 제 생각에는 우리가 카나로 잡혀 왔던 것 보다 케르베노아 영토로 이동하는 것
이 더 빠르지 않을까 싶은데요."

코보 족장의 말에 클락이 다소 놀라운 듯 그를 바라보며 지도에서 눈을 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좋은 묘안이 있다는 것만큼 반가운 소식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혹 그것이 카나의 도움이라면 결코 반갑지는 않을 듯 싶다.

"혹 카나의 도움을 받는 거라면 우리는 거절해야합니다. 아까 아이린 공주님의 발언
은 결국 카나의 도움은 결코 받지 않을 거라는 것과 같으니까요. 제가 알기로 아리스
샘터가 몰락한 후 그 안에 있던 분들의 힘도 모두 소진된 걸로 알고 있는데…아직 회
복할 시점도 아니고."

"흠, 그렇죠. 메이샤링도 저도 그리고 다칸과 앨런도 지금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제가 뜻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아까 눈으로 보셨을 텐데…."

"무슨 말씀인지…."

클락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코보 족장이 테리우스와 아이린이 들어간 방 쪽으로 시선
을 돌린다.

"아!…."

그제야 클락은 환희의 미소를 짓는다. 그렇다. 레드문을 움직였던 테리우스의 마법
은 그의 힘이 모두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클락은 잠시 그 점을 잊고 지
나칠 뻔했다.

"그렇다면 전 시간이 된다면 잠시 어디에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뭐, 카나에서 저희에게 있는 시간동안 손님 대접을 하겠다했으니 어디든 다녀오시
죠."

"네, 그럼."

클락은 무슨 일인지 자신의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메고 외투를 집은 후 자신의 일행들
이 머물고 있던 장소에서 나갔다. 코보는 길고 푹신한 의자에 누워 그의 여자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서히 잠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있어 어디에서든 그는 행복함
을 잘 알고 있었다.

*

테리우스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봐야 할 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린은 반데
라스 황제와 결판을 내고 난 후, 귀빈실로 돌아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둘만이
있는 공간에서 침묵만 어색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아이린을 바라보며 테리우스는 망설인다. 그녀가 정말 자신의 아기를 가졌는지
아니면 카나의 황제에게 명분을 제시해주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는지를 말이다.

"흠, 흠! 흠! 흠!…저 사실인 거냐? 이봐, 자는 거야?"

안절부절 하는 테리우스의 목소리가 조용히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아이린의 귓가에 노
크를 한다. 이 남자를 더 궁금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거짓말을 알려줄 것인
지 고민한다. 사실 아이린은 카나 황국을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
나 그녀의 몸 안에 정말로 생명이 잉태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도 모르고 있었으니.
천계의 주신을 비롯한 천사와 악마 그리고 가즈나이트들은 안타까워했다. 물론 그 사
실 역시 주인공들은 모르지만.

"뭐가?"

그녀가 자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되묻는다. 마치 자신을 놀리는 기분을 만들었
다.

테리우스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대답하고 있는 그의 아내에게 조심스레 다가
간다.

"저…그게…그 흠, 아기…."

테리우스의 긴장된 목소리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이다. 만약 그에게 아기가 있다고 대
답한다면 그는 과연 기뻐할 것인가 아니면 당황해 하며 싫어할 것인가 아이린은 궁금
해졌다.

"푸웃, 하하하하!!!!!"

그러나 아이린은 전전긍긍하는 테리우스의 목소리에 더 이상 연극을 할 수가 없었
다.

"야, 왜 웃어!"

"테리우스 네가 너무 긴장하니까 웃음이 나와서 그래."

"쳇, 뭐야 그럼 거짓말이었던 거야? 그래?"

"응, 내가 언제 아기를 가져봤어야 알지. 그냥 카나 황국에 후계자 자리를 거절할 가
장 좋은 명분을 생각해낸 것 뿐이야."

"이런…."

테리우스의 실망하는 표정이 괜스레 아이린의 기분을 절로 좋아지게 만들었다. 그의
어깨가 축져지고 표정은 어둡기보다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교차하고 있다. 그녀가
잘못 본 것일까? 그의 눈가에 이슬이라도 맺힌 것처럼 반짝여 보이는 것은 눈물 같
아 보인다.

"테리우스, 설마 우는 거야?"

아이린의 말에 그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대답한다.

"무슨 헛소리냐. 넌 무슨 그런 거짓말을 나랑 상의도 없이 하냐…놀랐잖아."

"에이, 무슨 남자가 그런 걸로 우냐?"

"야,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

"에이, 울었는데?"

"너 자꾸 그렇게 놀릴 거냐."

"응."

아이린의 해맑은 표정과 밝은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그로 인한 것임을 테리우스는 행
복했다.

"테리우스, 내가 거짓말이라고 해서 그래서 많이 섭섭해?"

작은 일에 삐진 것처럼 볼에 심술을 넣은 듯한 남자의 모습에 아이린은 장난을 하고
싶어진다. 방금 전 심각한 일로 자신의 심장을 도려낼 것처럼 암담했던 사실들에 맞
섰던 것이 이렇게 한 사람으로 인해 행복감과 평화로움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놀라웠다.

"그런 건 왜? 쳇, 묻지 마라."

"헤이, 섭섭했구나. 난 네가 아기를 좋아할 줄 몰랐어. 아,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아기
가 생기면 그럼 참 좋겠다. 휴, 우선은 아카리나스 왕국을 재건하는데 뒷받침할 만한
재력이 필요한데 그 문제부터 다시 생각해봐야겠어."

"흠, 또 그 아카리나스 이야기로 돌아가는군."

"테리우스, 나 갑자기 산책하고 싶어."

"산책?"

"응, 갑자기 별이 보고 싶은데 같이 가 줄래?"

아이린은 카나의 밤하늘을 별들이 구경하고 싶어졌다.

"뭐, 원한다면 이곳 밤 날씨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피곤하지 않겠어?"

"내일 아침이면 떠나는데 다시 돌아올지도 기약할 수도 없고 어머니의 나라에 밤하늘
을 보고 갔으면 해."

"그래, 그럼 나가자."

오늘 테리우스의 아내는 여러 가지 일을 겪었고 여러 가지 모습들을 그에게 보여주었
다.

많이 힘든 일들을 잘 견디어 내준 아내가 믿음직스럽고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

벅스칼은 갑작스레 레오나르가 배탈났다며 온갖 인상을 찌푸리고 식은땀을 흘리는
바람에 만찬 장소를 떠나야만 했다. 무슨 음식을 잘못 먹었는지 결국 건물 밖으로 나
와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내고 말았던 레오나르. 다시 만찬 장소를 찾기 위해 계단을
올라 복도를 가로질렀지만 미로 속 같은 구조로 인해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내 참 살다가 이런 골치 덩이는 또 처음이야! 내가 널 왜 이 여행에 동참하도록 했는
지 내 발등을 찍고 싶다!!"

"미안…욱!! 욱!!!"

벅스칼의 등에 업혀 있는 레오나르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지 계속 헛구역질을 해댄
다.

"이것 봐!! 내 등에 토했다가는 그 시간이 바로 죽음인줄 알아!!! 어휴, 냄새…아직도
못 걷겠어?"

"읔, 그게 손발이 후들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서…아직 길을 못 찾은 건가요?"

"보면 몰라!!!! 아, 내가 참 이게 무슨 꼴이람."

"욱, 욱! 욱! 죄송해요. 참 저 역시 마야의 왕자로서 이런 모습은…욱!!"

"아, 신이시여 저를 차라리 다시 반지에 봉인 시켜주십시오."

벅스칼은 레오나르를 업은 것은 힘들지 않았으나 그가 언제 자신의 등에 토할지도 모
른다는 긴장감에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찬 장소를 겨우 찾았지만 이번에는 다시 손님들이 머무는 귀빈실
로 가야한다는 경비병의 설명에 벅스칼의 얼굴은 그야말로 창백하다 못해 샛노랗게
변하고 말아야만 했다.

*

다칸이 앨런을 끌고 간 곳은 건물의 가장 맨 아래에 위치한 지하 감옥이었다. 그곳에
는 아처로 인해 한 순간 죄수가 되어 끌려온 패잔병들로 들끓고 있었다.

"여기는 왜?"

"이노렌 장로가 이 무리에 있으니까 그렇지."

"이노렌 장로가?"

"그래, 따라와라."

앨런의 얼굴에 놀람과 동시에 분노의 표정이 삽시간에 퍼져갔다. 심장이 빠르게 뛰
고 피의 흐름이 역류하는 것처럼 온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다칸의 안내로
이노렌 장로가 쇠사슬에 묶여있는 곳까지 어떤 정신으로 걸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드디어 앨런과 대면하게 된 이노렌 장로의 몰골은 사람의 형상이라고 말하기 어려웠
다. 어떤 지시에 의해 고문을 당했는지 아니면 우두머리이기에 의례 절차를 밟았던
탓인지 이노렌의 눈빛은 이미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눈빛 어딘가에 아직
은 독기가 남아있어 보였다.

"이노렌 장로, 우리를 알아보겠나?"

다칸이 먼저 다가가 이노렌 장로의 턱을 한 손에 쥐어대며 눈을 마주하고 묻는다. 그
러자 붉은 피로 염색된 듯한 그의 눈동자가 잠시 빛나 보인다. 다칸을 알아보는 듯 했
다.

"……다…칸…흡, 네 놈이 어떻게 이곳에…"

쇳소리처럼 메마르고 갈라지는 이노렌 장로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소름이 끼쳤다.

"흥, 영감 아직도 목숨이 살아있다니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 당신이 내 친구를 불명
예스럽게 이용하다가 죽였더군."

다칸의 설명을 이노렌 장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다급한 마음에 앨런
이 한발 다가가 친구의 말에 덧붙인다.

"클리오네 이야기다. 이 더럽고 추잡한 인간아!!!!!"

참다 못한 앨런이 오열을 하며 이노렌 장로의 목을 그의 두 손으로 잡아 조였다. 곁
에 있던 다칸은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노렌 장로를 지키고 서 있던 카나의 병사들
이 다가오지 못하게 방어해주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 맘껏 복수할 기회를 주고 싶었
다. 그것이 죽음이든 용서이든 선택은 앨런에게 맡기고 싶었다. 클리오네를 사랑한
남자로 친구로 그만한 권리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말이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낯익은 목소리에 다칸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 클락이 서 있었다. 이어 클락은 재
빨리 앨런에게 다가가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나선다.

"멈추세요."

"이봐,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만 일행들에게 돌아가 있도록 해."

다칸이 앨런에게 다가서는 클락을 막아서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자 클락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눈빛으로 다시금 앨런에게 다가서려 한다.

"두 번 말하지 않겠어. 내 친구의 복수를 방해하지 마라. 같은 일행이라고 해도 가만
두지 않을 테니…."

"앨런, 제 말을 들어주세요. 클리오네를 죽인 자가 저 자라면 그렇다면 그 복수의 몫
은 당신이 아니라 제 것입니다."

클락의 말에 분노로 차 있던 앨런이 이노렌 장로를 조이고 있던 손을 잠시 느슨하게
노이며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클락이 그의 얼굴을 대면하며 말을 잇는다.

"클리오네는 바로 제 누이입니다. 제 친 혈육이라는 말입니다."

"네?"

"뭐?"

다칸와 앨런의 뭔가 한 대 얻어맞은 듯 놀란 눈을 하며 클락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
니 하이엘프의 종족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클리오네의 동생이라고 연결 지
어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놀랄 일인 것은 당연했으리라.

"부탁 드립니다. 이노렌 장로의 손에서 제 누이가 죽었다면 하이엘프 종족의 법칙대
로 그를 처벌할 권한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 누이도 편안하게 하늘에서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누이의 영혼이 편안해 질 수 있도록 지금의 분노를 거두시
고 제게 맡겨 주십시오."

클락의 정중한 부탁은 오히려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태도를 갖추어 다칸
과 앨런을 무안하게 만들 정도였다.

"클리오네는 제게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친 혈육만 할까 싶습니다. 죄송합니
다. 제가 잠시 제 분에 못 이겨 복수만 생각했다니…당신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정말이냐? 후회하지 않겠어?"

앨런이 손을 거두며 클락에게 다가서서 대답하자, 다칸이 아쉽다는 듯 이노렌 장로
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곧이어 클락의 부탁대로 다칸과 앨런은 먼저 일행들이 있는 숙소로 이동하기로 한
다. 그리고 클락은 내일 아침 일행들과 합류하기 전까지 감옥에서 이노렌 장로의 일
을 마무리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클락 혼자 두고 오기가 조금은 불안했지만 주변에 카
나 병사들이 그들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 안심하고
두 뱀파이어 수문장들은 그렇게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크으윽, 나를 어쩔 셈이냐?"

"네, 한 순간의 죽음으로 제 누이의 복수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클락은 그 한마디만 한 후 가방에서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더니 주술을 읊으며 이노
렌 장로에게 뿌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 앨런의 행동보다 알 수 없는 클락의 행동에 이
노렌 장로를 깊은 공포감으로 밤새 떨어야만 했다.

*

카나의 밤하늘은 어두웠고 곳곳에 박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은 파티라도 벌인
듯 여기저기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구나 할 정도로 눈은 즐거웠
고 마음은 시원하게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꼭 잡은 테리우스의 손은 든든하고 따
뜻했다. 아이린은 앞으로도 분명 힘들고 험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세워진 왕
국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할 왕국은 다른 왕국들에게 달갑지도 않을 테고 위엄스러워
보이지도 않을 테니 매 순간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잡고 있는 이 손 하나 그 마음
하나로 어떤 것도 잘 이겨낼 자신이 생겼다.

"아무래도 난 주신께 선물을 받은 거 같아."

아이린이 별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옆모습이 테리우스의 눈에 들어온
다.

"뭔데?"

"너…."

"야, 유치하다."

"흥, 남은 진지하게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다니 다신 이런 말 하나봐라."

아이린의 토라진 목소리가 귀여웠다. 그녀의 대답은 분명 화가 난 듯 해 보였지만 그
눈빛은 미소로 가득해 보였다. 계속 걷던 발걸음을 테리우스가 멈춰 선다. 그리고 그
녀를 나무 의자에 앉혔다.

"어, 벌써 다리가 아파서 산책 그만 두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테리우스가 그녀의 무릎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의 얼굴
을 바라본다. 어디서 그런 표정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천진한 어린아이의 눈동자가
지금 아이린을 응시하고 있다. 괜스레 자신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들
었다.

"테리우스, 왜 무릎을 꿇고 그래 그만 일어나."

"아니, 아이린 난 이런 거 잘 못하는 것 같아. 그런데 그냥 너만 있으면 뭐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만 내 곁에 있어주면 뭐든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앞으로 너에게 미
안하단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을게 대신 나로 인해 네가 행복하도록 노력할게."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 일어나…난 이미 행복해 내게 미안하거나 고마워할 필요 없
어 테리우스."

아이린이 테리우스를 일으켜 세우자, 그가 그녀를 품에 다정하게 안았다. 그의 숨소
리가 그녀의 목선을 타고 들어서서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어 준다. 곧이어 두 사람
은 입술을 포개어 입을 맞춘다.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한 걸음
씩 다가서며 용기를 내는 것임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

카나 황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 후, 새벽이 되어 아이린 일행들을 떠날 준비로 각
자 바삐 움직였다.

"그래도 아이린 주인님의 할아버지라고 필요한 물건들은 원 없이 대주는 군."

"그러게요."

"이봐, 그만 좀 따라다니지."

"하하, 우리는 파트너인 걸요."

"뭐, 마야에서는 널 안 찾나보지?"

"아, 우편으로 연락했으니 당분간은 세상 공부를 하는 것으로…."

"이런, 맙소사!!!!"

벅스칼이 뒷짐을 지며 마차에 여기저기의 물품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리자, 그 뒤를 레
오나르가 따라다니며 응대한다.

코보와 메이샤링도 한쪽에서 티격태격 해가며 짐을 옮기고 있었고 이에 미니조우도
돕고 있었다. 한쪽에서 다칸과 앨런은 신기한 듯 클락이 가져온 새장 속의 검은 쥐를
계속 해서 구경하고 있다.

"아니, 이게 정말 이노렌 장로란 말인가?"

다칸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검의 끝으로 쥐를 건드려 본다.

"네, 그렇습니다. 다칸님."

"아, 정말 대단하네요."

앨런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잔뜩 겁을 먹고 있는 쥐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앞으로 제가 죽기 전까지 쥐의 모습으로 제 곁에 있을 것입니다. 한 순간의 고통이
아니라 스스로 죄를 뉘우치며 고통을 받는 삶을 받게 될 테니 누이에게 좋은 복수가
될 것입니다."

"흠, 그렇군."

"아, 네."

일행들은 각자 여유를 가지며 카나 황국의 입구 쪽에서 테리우스와 아이린을 기다리
고 있었다. 테리우스는 머뭇거리며 아처가 쉬고 있는 곳의 문 앞에서 말없이 서 있는
아이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반데라스 황제와 마가레타 황후와 짧은 인사를 나누
었고 그녀가 이곳을 떠나려면 아처와의 이별 인사 역시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
나 이 순간에도 그는 질투심이 느껴진다.

"이봐, 그렇게 보는 것이 힘들 거 같으면 그냥 편지 한 장 쓰고 가지?"

"아니, 들어가서 얼굴보고 갈래."

"그럼 내가 대신 문 두드려줄까?"

"어? 아니, 그게 좀 떨리네."

"떨려? 그 녀석 차버린 건 아이린 너잖아."

아니, 지금 떨리 다는 말을 버젓이 남편 앞에서 하다니 아무래도 괜스레 그녀를 좋아
하는 남자에게 인사를 시키는 것인가 싶었다.

똑! 똑!

그녀가 드디어 용기를 낸 듯 문을 두드린다. 이별하는 것이 힘들어서 망설였던 것일
까? 아니면 힘들어하는 아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어서였을까? 테리우스는
궁금해졌다.

아이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파라도와 아르테니가 침대에 누워있는 아처을 걱정스
러운 눈빛을 하며 지켜서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파라도와 아르테니의 얼굴에
반가움으로 가득해진다.

"공주님!!! 저희 안 보시고 떠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흑! 흑! 흑!"

파라도가 다짜고짜 달려와 아이린을 품에 안으며 훌쩍거린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테리우스의 표정이 곧바로 인상을 그으며 파라도를 불똥이라도 튄 듯이 째려본다.
그 눈빛에 깜짝 놀란 파라도가 자신도 모르게 아아린을 그의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
러나 여전히 그녀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훌쩍거린다.

"그래, 파라도…설마 날 지켜준 수행원들을 안 보고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

"흑! 흑! 뭐 공주님께서 마음이 고우셔서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흑! 흑! 다른 장애로
인해…못 보는 줄 알았습니다."

파라도가 말하는 다른 장애로 틀림없이 테리우스를 가리키고 하는 말이었음을 본인
도 알고 상대도 알아들었다. 그 사이 아르테니가 다가와 아아린의 손등에 입을 맞추
며 말한다.

"다행입니다. 이렇게 얼굴을 뵙고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지금은 저희가 대장
때문에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든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가겠습니다."

"응, 고마워 아르테니."

아이린이 파라도의 품에서 벗어나 아르테니의 품에 안기자, 테리우스는 두 주먹을 불
끈 쥐며 최대한 인내심을 붙잡아 두어야했다. 무슨 일인지 이 흑기사들과 있으면 자
신만 소외당한 기분이 들어서 별로 좋지 않았다.

"테리우스, 아르테니, 파라도…미안하지만 아처와 단둘이 잠시만 있고 싶은데 괜찮을
까?"

아이린의 부탁에 세 사람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물론 테리우스는 마지막 발걸음을
뗄 때까지도 두 사람만 남겨두는 것이 언짢은 듯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그래, 지금 떠나면 아처 녀석을 다시 볼일도 없을 테니까…지금은 내가 참자. 게다가
아파서 자고 있는 녀석을 상대로 질투하는 것 내 꼴이 우스워지잖아.'

테리우스가 마지막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 한 후, 아이린이 침대에 누워 있는 아처에
게 다가갔다.

아이린은 아처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언제나 그
녀의 곁에서 같은 편이 되어주고 옳은 길로 가도록 도와준 고마운 스승이고 좋은 친
구인 존재이다. 자신보다 더 자신을 아껴주고 위로해주고 힘이 되어준 사람이다. 항
상 어깨를 빌려주고 필요한 조언을 해주기를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너무 차갑고 이기적으로 변해서 다가왔을 때 그녀의 마음은 아
프고 쓰렸다. 안쓰럽고 미안했다.

"아처, 이제 나 그만 내가 가야할 길을 향해서 떠나야 할 것 같아. 어쩌면 지금이 마지
막 만남일지도 몰라. 그래도 너와는 인사를 하고 가고 싶었어. 나로 인해 아파서 누
워 있는 모습에 내 마음이 참 아프다. 그래도 혼자서라도 아처 앞에서 인사를 하고 가
야할 것 같았어. 당신도 참 내게 소중하니까. 언제든 먼 훗날 다시 만날 때 그때는 좋
은 사람의 아처만 기억할게. 아처에게도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 빨리 회복하기를 바
래…잘 살아야 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아처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린이 그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
을 한다. 그의 의식이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린이
막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자, 아처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이에 아이린이 살짝
놀라 그를 바라본다.

"아처?"

그러자 아처는 눈을 감은 채로 낮은 목소리를 차분하게 내뱉는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눈을 뜨고 공주님과 마주하면 또 다시 욕심
이 생겨 보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이대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시 공주님을 마주하
게 되는 먼 훗날에는 다시 예전의 좋은 친구로 만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좋은 마음으로 떠나세요. 제 이야기는…다 했습니다. 그만 가세요."

그리고 아처는 그녀를 붙잡은 손을 힘없이 놓는다. 가냘프게 놓아버린 그 손길에 아
이린은 마음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비어진 공간에 다시금
좋은 친구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아이린이 입구로 발걸음을 향하자, 아처는 반대로
돌아누워 두 눈을 더 질끔 감아야만 했다. 절대 지금 돌아서서 일어나 그녀의 뒷모습
조차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럼 다시는 그녀를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니 이를 악물고 보내
야만 한다. 그것이 그녀가 행복한 길이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최고의 선물인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제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이별이라는 운명이 참 저주스럽습니다.'

아이린이 문을 열고 나왔을 때 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테리우스가 그녀를 와
락 끌어안는다.

"읔, 숨막혀 테리우스."

"쳇, 빼앗기는 줄 알았다."

"무슨 소리야."

"됐어. 돌아왔으니까 됐다 그만 떠나자."

테리우스는 끌어안은 아이린을 살짝 밀어 제쳐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후, 웃음을 짓
는다.

"흠! 흠! 아직 저희 있는 걸 잊은 건 아니시죠?"

"험! 험! 공주님 배웅을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파라도 짐도 옮겨 두리고 해야하
는데."

"야, 그런 건 병사들과 하인들이 알아서 해. 하여간 넌 힘쓰는 것 밖에 몰라."

"헤헤, 그런가?"

아이린은 파라도와 아르테니의 활기찬 모습에 기운이 났다. 그들이 있어 아처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흑기사들과의 이별 인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기다리는 일행들과 합류했다. 케르베노아 영토로 가는 길은 그리 먼 여정이
되지는 않았다.

우선 카나 황국에서 마법 진을 사용할 화이트 마나를 제공 해 주었고 그 외의 물품들
을 많이 지원해 준 덕에 정착하는 것도 쉬울 듯 싶었다. 게다가 테리우스의 마력이 예
전처럼 돌아왔기 때문에 그들 앞에 두려울 것은 없었다.

케르베노아 영토에서 아이린 일행을 맞이한 것은 제로이드와 바이사코였다. 그들이
보여준 영토의 모습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으니 그것은 바로 블루다이아몬드 마
나의 번식이었다. 게다가 젬모스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은 앨리어튼을 중심으로 마을
을 형성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무 것도 없을 거란 땅의 모습에 이미 따뜻한 온기와
좋은 방패막이 자리를 잡아간 채로 아이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테리우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기는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나이든 능구렁이 두목을 불러들여 이곳에 마을
을 만들도록 제로이드와 바이사코가 도와주도록 만들었지. 너에게 보여준 내가 만들
어 낸 블루다이아몬드 마나가 이곳에 힘이 되어 줄 거고…."

"나이든 능구렁이?"

"그 있잖아 앨리어튼인지 멍청인지 하는 늙은 아저씨."

"아, 그 분…테리우스 그 분이 내 친 아버지야."

"뭐? 카나의 영감탱이는?"

"그 분은 내 할아버지고 그러니까 테리우스 네가 장인 어른이라 불러야 할 분은 바로
예전 아리스 왕국의 왕이셨던 앨리어튼 그 분이셔."

"하아, 참 복잡하네…난 그 아저씨 별로 맘에 안 드는데."

"흐음, 나도 아직 아버지라고 불러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만나야할지 모르겠어."

테리우스가 짐을 풀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이린의 어깨에 손을 올리
며 말한다.

"친구 녀석들이 도와 줄 테지만 그래도 마을을 짓고 다시 왕국을 만들고 거기에다 연
합국으로 등록하는 것까지 그리 만만치 않은 일이 될 거다. 카나 황국에서 더 이상 지
원해 주지는 못할 거야. 물론 데본 제국에서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할 수 있겠냐?"

"응, 해 볼 거야."

"하하, 대책 없이 대답은 잘 하는 구나. 저기 멀리 보이는 큰 짐 덩어리들 보이냐?"

테리우스가 들판 너머에 보이는 두 개의 산등성이 모습을 가리키며 아이린에게 묻는
다.

"어? 잘 안 보이는데 해가 저물어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잘 모르겠어."

"쳇, 좀 시끄럽기는 하지만 제로이드랑 바이사코 시켜서 모셔다 놨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곳곳에 사람들에게 비명을 지르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레드 드래
곤 부부였다. 잠시 후,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아이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 아래로 앨리어튼이 자신의 부하들과 무거운 짐을 나르다가 아이린을 향해 손을 흔
든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되는 기분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때 두 사람 앞에 세 명의 은색 갑옷을 걸쳐 입은 가즈 나이트들이 빛을 가르며 등장
한다.

"축하드립니다. 테리우스와 아이린!! 두 분의 아기에게 날개를 선물하라 주신께서 보
내셨습니다."

갑작스런 가즈 나이트들의 등장에 테리우스와 아이린은 당황했다.

"이봐, 이렇게 불쑥 나타나면 어쩌자는 거야. 뭐? 아기라니?"

"네, 그건 그냥 제가 거짓말 한 건데……."

아이린은 작은 숄에 둘러 쌓인 채 빛을 발하는 황금빛의 날개를 신기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해가 모두 지면 저희는 다시 천계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자, 받으세요."

가즈 나이트 세 명이 많이 늦었다는 듯 다소 다급해진 목소리로 부탁하자 얼떨결에
아이린이 주신의 선물을 받았다. 그녀가 선물을 건네 받자 곧바로 그들은 만족의 웃
음을 지으며 빛으로 이내 사라져버린다. 두 사람 모두 유령에라도 홀리는 순식간의
일이었다.

"테리우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넌 천계에 있어봐서 알잖아. 주신이 그렇게 한가
하셔?"

"하하하, 아무래도 아이린 네 거짓말이 진실이 되어 버린 것 같은데…하하, 주신도
썩 멋있는 구석이 있단 말이야."

"그럼 정말 내가?"

"아, 기분 좋은데 오늘밤은 대대적으로 파티를 아니 축제를 벌여야겠다. 아카리나스
왕국의 후계자가 생겼으니 말이다."

"기분이 이상해."

그날 밤 사람들은 모두 모여 아이린의 아기 소식을 축하하는 파티를 벌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자유를 위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곳곳에 모아 놓은 장작불을 중심
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뛰어 놀 듯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댄다. 수많은 왕국에서 쫓
기고 도망자로 낙인 찍혔던 그들에게 이제 새로운 왕국이 생겨날 것이다. 그로 인해
서로 다시 논쟁도 하고 다른 왕국에게 외면을 당할 수도 있으나 그들은 서로가 친구
이고 함께 할 것이기에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으로 하나의 왕국이
시작되고 그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선택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그 과정만은 진실할  것은 그들은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한 여자가 한 남자를 한 마음이 한 마음을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
하는 것처럼 그들의 왕국도 그렇게 사랑으로 엮어지는 사람들의 세상이기를 바래고
바란다.

테리우스는 불빛으로 점철되어지는 축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품에 잠든 아이
린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영원히 그대를 사랑하겠노라고 그렇게 그들의 사
랑은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