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는 왜 면허를 사지 않는가

봉이 김선달, '대여료' 뜯으며 '공유 경제'로 포장하다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이것은 공유경제인가 대여경제인가

"Thank you for Sharing your husband with me."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그린 북(Green Book)>의 마지막 장면, 피아니스트 돈 셜리가 차량 기사 토니의 부인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당신 남편을 보내줘서(빌려줘서) 고맙소" 미국 남부 투어 2개월간 남편과 떼어놓고 운전기사로 써먹었으니 당연히 미안하고 고마울 터이다.

여기서 'Sharing'이라는 단어는 ‘보내주다’ 또는 ‘빌려주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물론 사람을 빌려준다는 말이 이상하므로 ‘보내주다’라는 번역이 훨씬 자연스럽겠다. 그런데 만일 일군의 집단이 저 대사를 이렇게 번역한다면 어떨까? "당신 남편을 나와 공유해줘서 고맙소."

Sharing Husband 뜻은 ‘남편 공유’? 

영화에 돈 셜리 박사가 동성애자임을 암시하는 장면이 잠깐 나오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 대사를 놓고 부인과 보스(Boss)가 '남편을 공유’한다고 번역하는 건 넌센스다. 그런데 한사코 이 단어를 ‘공유’라는 말로 번역하려는 집단이 있다. 

그런 집단이 어디 있겠냐고? 안타깝게도 이 나라 정부 지도자들과 재벌 총수들이 그런 집단에 속해 있다. ‘Sharing’이란 단어는 ‘빌려주다’라는 의미로 자주 쓰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단어를 ‘공유’라고 번역하는 집단, ‘공유 경제(Sharing Economy)’의 전도사들 말이다.

이들이 말하는 대표적인 공유 경제의 사례인 카쉐어링(Car Sharing)을 들여다보자. 미국의 우버(Uber), 동남아시아의 그랩(Grab), 한국의 타다(TADA)에 사용되는 차량은 과연 ‘공유’되는가? 이 차량들은 이미 개인 소유의 차량(우버, 그랩)이거나 특정 기업(타다)이 소유한 차량이다. 공유라는 개념과는 애시당초 관계가 없다. 

공유경제 전도사 그룹에는 재벌 총수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최근 현대차그룹 정의선 부회장이 "밀레니얼 세대는 이제 자동차 소유가 아니라 공유를 원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혀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럼 현대차그룹이 '차량 공유’를 위해 하는 일이 뭘까? 동남아시아의 우버라 할 수 있는 그랩에 투자한 것 정도이다. 이게 밀레니얼 세대가 말하는 ‘공유’란 말인가.

‘공유’라고 한다면 동네 놀이터나 공원처럼 내가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는 경우에 쓰는 개념이다. 하지만 카쉐어링의 경우 정확히 말하면 개인 또는 회사의 차량을 (운전기사까지 함께) 잠시 빌려서 쓰는 개념이다. 여기서도 ‘쉐어링(Sharing)’은 공유가 아니라 빌려쓰기로 번역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 지난 2월,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서 열린 미디어데이서 이재웅 쏘카 대표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봉이 김선달, 이제 이름을 제대로 부르자 

그러니 외국에서 도입해온 Sharing Economy라는 말은 ‘공유경제’가 아니라 ‘대여경제’라고 이름을 붙이는 게 훨씬 정당하다. 실제로 우버·그랩·타다 서비스를 요청한 뒤에 차를 잠시 얻어서 타고 ‘대여료’를 지불하지 않는가. 

실제로 한국의 ‘타다’ 서비스의 실체는 차량을 빌려주는(!) 렌트카 사업이다., 렌트카 사업인데 차량 기사까지 딸려오는 게 합법이냐고? 바로 여기에 타다 사업주의 번뜩이는 재치(?) 기존 제도의 허점을 활용한 대목이 있다. 11~15인승 차량을 대여할 경우에 한해 기사까지 함께 알선할 수 있도록 예외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예외규정은 본래 관광지에 여러 명이 함께 와서 큰 차량 1대를 렌트했는데, 하필이면 1종 면허를 소지한 이가 아무도 없을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둔 조항이다. 그런데 타다 사업주는 이 예외조항을 기가 막히게 활용해 11인승 카니발로 사실상의 택시 사업을 만들어낸 거다. 제도의 허점을 파고든 봉이 김선달과 같은 일이 ‘혁신’으로 포장되어 있는 거다.

카 쉐어링과 함께 소위 ‘공유경제’의 사례로 빈번하게 인용되는 에어비앤비(Airbnb) 사업 역시 누군가 이미 배타적인 소유권을 확보하고 있는 집 내지 공간을 ‘빌려주는’ 서비스이지 그 공간을 ‘공유’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부터 시작하자. 공유경제는 대여경제로, 카쉐어링은 차량대여업으로, 에어비앤비는 부동산대여업이라고 말이다. 차량과 부동산을 빌려주고 그 지대(Rent)를 받아 이윤을 챙겨가니 이거야말로 렌트 이코노미, 대여경제란 이름이 적절하지 않은가. 

공유경제 할 거라면 제대로 하자 

몇몇 지자체에서는 오래 전부터 카쉐어링을 독립적으로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적어도 이 차량들은 개인 또는 회사의 소유가 아니라, 지역민의 세금으로 지자체가 예산을 투입해 확보한 공유(!) 자산들이다. 이런 차량들을 저렴한 가격에 시민들에게 대여하는 것이야말로 지역 도서관이나 생활체육센터와 같은 공유경제 개념에 훨씬 적합하다.

요즘 핫 이슈가 되어 있는 택시 사업도 마찬가지다. 승차 또는 배차 거부나 불친절한 서비스는 대부분 이들 택시기사들이 사납금 채우기에도 급급하거나(법인택시) 생활임금보다 턱없이 낮은 벌이로 내몰리는(개인택시) 문제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그 해법이 ‘타다’와 같은 민간 자본이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사실상 면허 없는 택시사업을 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데 있을까? 

비록 이상주의라는 욕을 먹을지언정 완전월급제에 기반한 택시공영제라는 해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만일 택시 서비스가 버스·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과 조화를 이루며 시민의 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여기에 우버·그랩·타다가 활용하는 플랫폼 앱 서비스를 가미하면 훨씬 완벽한 대중교통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다. 

버스·지하철이 커버하기 어려운 시간대나 지역, 혹은 대량의 짐을 함께 이동해야 하는 경우 또는 이동권 약자들이 이동해야 하는 경우에 택시 서비스는 충분히 버스·지하철을 대체하는 대중교통으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버스·지하철보다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경우에는 약간의 할증요금을 붙여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말이다.

예를 들어 국토교통부 또는 서울시와 같은 지자체가 플랫폼 앱을 개발해 보급하고, 이 앱에 기반해 움직이는 공영 택시 서비스를 도입한다. 법인 택시에 지급해온 보조금을 출자 내지 지분으로 전환하여 지속적으로 법인 택시를 공영 택시 시스템으로 유도한다. 당연히 공영 택시 기사들의 경우 완전월급제를 시행하되 승차·배차 거부를 할 수 없도록 규칙을 적용한다.

개인택시의 경우 면허를 팔고 공영 택시 기사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지속적으로 개인택시 사업을 지속할 자유와 권리도 보장한다. 개인택시를 지속하는 이유는 택시 기사들 평균적인 벌이에 비해 더 많은 소득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만일 현실이 반대로 작동한다면 공영 택시 시스템으로 합류하는 이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공상이 아니다 

이런 모델은 엄밀히 말하면 공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모델이기도 하다. 해외의 몇몇 지자체들이 선도적으로 시행한 경험도 있고, 해외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국의 몇몇 지역에서도 '100원 택시'. '1000원 택시'와 같은 사실상의 공영 택시 서비스가 시도된 바 있다. 비슷한 취지에서 '무료버스'와 같은 진보적인 실험도 시행된 바 있다. 

물론 이 모델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서울과 같은 메트로폴리스(대규모 도시)에 적용해본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는 의미있는 경험이 꽤 존재한다. 물론 지자체 선거로 지방권력이 바뀔 때마다 이 사업의 지속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이라는 도전과제가 하나 더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제 이런 대안을 놓고 더 진지한 토론이 벌어질 필요가 있다. 택시업계에서 촉발된 논란도 있지만, 총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기도 해서 지금이 바로 전사회적 토론을 벌일 좋은 시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과거 지자체 또는 총선에서 ‘무상버스’와 같은 공약이 제시된 적도 있지 않은가. 

차량이나 부동산 대여업에 '공유경제'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아줘선 안 된다. 공유경제를 하려면 진짜 그 이름에 걸맞는 일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제 치열하게 공부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시작할 때이다.

'신성불가침'이 돼 버린 '차량공유'란 혁신적 헛소리

[기자의 눈] '타다'는 '차량공유'가 아니라 '노동대여'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 글에서는 타다와 택시의 상생 방안 같은 정책 이야기와 그 해결책을 다루는 게 아니다. 

우버는 혁신일까? 

미국에서 우버를 이용해 볼 기회가 있었다. 몇해 전 뉴욕에 방문했을 때 지인이 스마트폰 앱으로 우버 기사를 호출하면서 '어쩜, 너무 편리하지 않니?'라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건 솔직히 감흥이 없다. '이게 왜?'

택시를 스마트폰으로 호출하는 서비스야, 한국에선 이미 일상이었다. 물가를 감안해도 우버 요금은 한국의 택시 서비스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이게 '혁신'으로 불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미국, 특히 뉴욕의 택시는 악명높다. 비싼 요금에 불친절하고 교통난은 최악에 '콜'을 부를 경우 요금이 천정부지로 솟는다. 우버는 이런 불편을 해결해 줬다. 

한국 여행객에게 동남아시아는 과거 '바가지 택시'의 대명사로 악명높았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갈 때 요금 폭탄을 각오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일부 택시 기사는 여행자가 지리를 모른다는 약점을 이용해 가까운 목적지를 빙 둘러 간다. 심지어 택시 요금이란 건 '흥정'이 기본이다. '택시 흥정하는 법' 같은 노하우는 인터넷에 널려 있다. 택시와 '유사 택시'의 경계도 희미했다. 그 틈에서 '그랩'이나 '클룩'이 나왔다. 이게 대단한 돌풍을 일으킨 이유는 '정찰제', 그리고 '부르면 온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줘서다. 친절함과 편리함이 없던 곳에 친절함과 편리함을 팔면, 대박이 날 수밖에.  

우버가 '앱'을 충격적으로 잘 만들어서, 혹은 자동차를 날아다니게 하거나 순간이동을 가능케 해서 성공한 건 아니다. 척박한 시장에서 약간의 서비스를 가미한 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런 경우는 시장이 척박할수록(기저효과) 성공의 규모도 효능감도 커진다. 우버와 그랩은 미국과 동남아시아였기 때문에 성공한 사업 모델이 됐다.  

택시 시스템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이나 일본에서 우버와 그랩이 자생적으로 탄생하지 못했던 이유는 별 게 아니다. 그다지 필요성을 못 느꼈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구글이 한국 시장에서 고전하는 이유는 네이버라는, 특이한 방식으로 강력한 생태계를 구축한 다른 검색 툴이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구글이 '네이버를 위한 한국의 법(규제) 때문에 우리의 혁신 서비스가 한국에서 죽어간다'고 울지 않는다. 그냥 한국 사람들에겐 구글이 필요하단 절박감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적었을 뿐이었다.  

차량 하나 소유하지 않고 앱 하나 두고 기사를 관리하며 중간에 이익을 떼 가는 것이 하는 게 전부인 사업으로 돈을 벌고, 그렇게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첨단 산업에 기웃거리고 기술 혁신에 투자하는 것은 전형적인 미국의 기업 성장 스토리다. 이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이 갑자기 '혁신'으로 둔갑해 한국에 수입되더니, 최근에는 우버나 타다가 무슨 '4차산업혁명'의 상징처럼 돼 버렸다.  

차량공유서비스 타다는, 사실 차량대여서비스에 더 가까워보인다. 유사한 사업이 과거에 있었다. '깨비 책방'이나 '비디오 대여점' 같은 것들인데, 비디오 대여점은 나중에 배달 서비스도 했다. 이게 사라진 이유는 '불친절'이 아니라 인터넷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봐도 우버의 '업적(?)'은 인터넷 개발이나 자동차 발명같은 급은 아닌 듯 하다. 

우버나 타다를 차량 공유 서비스라고 말하는 것도 어패가 있지만, 그렇다고 '차량 대여 서비스'라고 말하는 것도 본질을 가린다. '사람 대여 서비스', '노동 대여 서비스'로 부르면 어떨까. 자율주행차가 활주하는 세상이 아닌 이상 차량 대여 서비스는 모두 사람의 섬세한 노동으로 이뤄진다. 운전 서비스를 차량 서비스로 부르는 사이에 우린 사람을 지워버린다.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러 '쿠폰'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들에게 현금을 마구 뿌려대는 '배달앱'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 혁신으로 기업이 유지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노동으로 기업이 유지되고 또 돈을 번다.  

그런데 우버의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한다. 미국 법원은 우버 기사가 노동자가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이른바 '특수고용직'인데,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와 비슷한 구조의 고용 형태다.  

택시나 '유사 택시'와 같은 운송업은 규모가 대충 정해져 있다. 차량과 운전자를 함께 대여해 사용하는 '모빌리티'가 아무리 늘더라도 한 달에 택시를 열 번 타는 사람이 갑자기 스무번 탈 가능성은 적고, 안 타던 사람들이 더 많이 타더라도 한계는 있다. 서울에 택시가 7만 대다. 많다고 한다. 타다와 같은 서비스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서울에 '유사 택시' 10만 대, 20만 대를 만드는 게 아닐 것이다. 서울 택시 7만 대가 보유한 승객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우버나 리프트 역시 무리하게 차량 수를 늘려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유사 택시'가 늘면 1대 당 승객 수는 줄어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기사들의 소득도 줄어들고, 고통스러운 노동 환경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 승자는 단 하나, 대여료, 수수료 받아 먹는 플랫폼 오너다.   

자동차 한대도 소유하지 않는 '모빌리티 기업'은 기업주의 입장에선 '혁신'이지만 노동자 입장에선 '재앙'이다. '재앙'을 맞이하게 된 노동자에게 '혁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21세기 '문맹' 취급을 하면 그들이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이런 '억지'가 한국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혁신의 신화화다. 배달 앱 서비스나 타다 서비스의 본질과 관련한 문제를 제기하면, 신성불가침의 혁신에 저항하는 걸로 간주되며 곧바로 '러다이트' 취급을 받는다. 어떤 신문은 '타다 vs. 택시' 논란을 두고 '마차 눈치 보며 자동차 길 막으면 마차 좋은 세상이 오나'라고 사설에 썼다. 자동차가 등장했는데 마부들이 데모한다는 비유는 단골이다. (그런데, 타다 이재웅 씨가 자동차를 발명했나?)  

영국의 '붉은 깃발법' 비유도 재미있다. 자동차를 발명한 나라인 영국이 마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자동차가 마차를 앞지르지 못하도록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실 잘못된 비유인데, 런던에 마부를 모아 수수료를 떼먹는 마차회사가 등장했다는 게 더 잘 맞는 비유다. 다른점이 있다면 마차회사 마부들은 승객에게 '특별히 원하시는 유행가가 있으면 불러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는 점 정도다.  

자율주행차라는 헛된 꿈, 드론 피자 배달 같은 괴기스러운 단어 배열이 무슨 '혁신'으로 포장되는 것도 솔직하지 못하다. 자율주행차의 개발이나 드론의 개발은 '혁신'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서울 시내를 마음껏 다닐 수 있으려면 서울 시내의 도로와 골목길을 재배열하고, 하늘길의 새로운 구획과 규범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 이건 '기술 혁신'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을 만져야 한다. 사회 시스템을 만지려면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하늘에 드론 수만대가 떠다니는 게 가능할까? 저 위 몇대에나 폭탄이 실려 있을까 하는 걱정부터 든다. 이런 세상이 온다면 어떤 SF영화에서처럼 분명 기업이 국가를 인수하는 시대가 도래해야 가능할 것이다. 아니면 독재 체제로 가자고 투표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멸시하는 게 '선'이 될 수 있고, 노동을 마음껏 재배열 할 수 있으니까.  

지금 논의되는 혁신은 60년대 '미래 시대 예측' 삽화에나 나오는 '로봇 청소기'나 '우주 여행' 수준도 못 된다. 추상적 합의로 세운 국가 시스템을 뒤틀고 사회적 행위를 재배열하는 걸 전제로 하는 일들을 '자동차 발명' 같은 수준으로 논의한다. 그러면서 대중을 '혁신'에 반대하는 '멍청이'로 취급한다. 기술적 상상력은 드높되, 인문학적 상상력은 빈약하다.   

이재웅 씨 같은 경우는 자본가로서 자신의 롤에 충실한 사람이다. 인류 최초로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인류 최초로 렌트카 사업을 구상한 사람, 혹은 인류 최초로 비디오 테이프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인류 최초로 비디오 대여점을 연 사람에 비견될만 하다. 딱 거기까지다. 이재웅 씨를 옹호하는 분들은 돈벌이 모델의 혁신을 21세기 인류의 길처럼 포장만 안 했으면 한다. '아메리칸 드림'의 흔한 창업 성공 스토리가 한국에서 21세기 인류 혁신의 모델로 간주되고 있는 건 코미디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이재웅 씨에게 좋은 말을 했다. 이 당연한 말 마저 누군가 '고리타분하다'고 느낀다면, 할 말이 없다.  

"혁신의 빛 반대편에 생긴 그늘을 함께 살피는 것이 혁신에 대한 지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혁신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 전체의 후생을 높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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