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빙신이 끓인거라 맛없을꺼 같냐

[중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


그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


.


.

"헤어지자."


영화를 볼까. 아니다, 요즘엔 딱히 재미있는 영화도 없던데. 아니면 날씨 좋은데 가까운 공원에 산책을 가면 어떨까. 그것도 별로네. 워낙에 지루한 거 못참는 성격이니까. 그럼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하러가잘까. 그러기엔 날이 아직 밝구나. 뭘할까. 뭘하면 네가 심심하지 않을까. 대체 뭘...


"내 말 듣고 있어?"


길게 난 창가로 드리우는 햇살이 눈을 따갑게 만든다 싶을만큼 눈부셨다. 앞에 앉아있는 그녀가 오늘따라 유난히 예뻐보인다 싶더니만. 다정다감하게도 그녀의 바알간 홍차에 설탕을 넣어주려던 계상의 손이 복잡하게 돌아가던 머리 속과 함께 잠시 멈췄다. 흔들린다. 스픈을 들고 있는 기다란 손가락도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계상의 얼굴도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검은 눈동자도 여지없이 불안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버린다.


"헤어지자구."


단호한 한마디를. 누군가의 비위는 따지지 않고 가차없이, 7년간 만난 상대에 대한 예의는 저리가라는 듯 일말의 틈도 없이, 지금 이 시점에서 가련한 남자 하나가 어떤 여자에게 버림받고 있다는 생각을 인식할 그 짧은 겨를도 없이... 그녀는 참 별 거 없이 이별을 고했다.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란 노래 가사가 어떻게 됐더라. 맨날 흥얼거리며 줄기차게 따라부르던 노랜데 왜 지금은... 생각이 안나지.

왜냐고, 어떤 놈이길래 오랜동안 지켜온 사랑에 구멍을 내는거냐고, 그 놈이 나보다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잘났느냐고, 니가 그러고도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을 거 같냐고, 나보다 잘해주는 놈 만나기가 쉬울 거 같냐고... 그 흔한디 흔한 몇마디 말을 내뱉을 새는 분명 있었건만. 계상은 입을 꾸욱 다문 채 멍하니 식어가는 찻잔에만 눈을 박고 있을 뿐이다.


"계상아, 난 말야..."


오늘이 몇일이지. 우리가 만난지 몇일째 되는 날이지.

계상의 비어버린 머리 속으로 드는 짧은 생각마저 방해하려는지, 그녀는 계상에게 어떻게든 자신의 행동에 타당한 이유를 대려 안달이 났는가보다. 계상의 외모에서 내비치는 서늘한 눈매와 도톰한 입술이 자신의 이상형은 아니었다 한다. 계상의 자상하고 잘 챙겨주는 성격보다는 남자답게 자신을 리드해주는 남자를 원했다 한다. 정이 들어 떼어낼 수 없는 동갑내기보다는 자신보다는 서너살쯤 많은 생활 탄탄한 남자를 만나 안정되게 살고 싶다 한다. 거의 매일 만났던 그녀가, 계상의 사랑한다는 말에 나도 사랑한다고 대답해주던 그녀가 지금, 7년동안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말을 짓걸이고 있는거다.

뭐야, 시시하게. 너는 그대로인데 내일부터는 우리가 만난지 몇일째인지 셀 수 없는게 이별이라니. 이런 게, 이렇게 시시한 것 따위가.


"미안해."


이제껏 아무런 말도 않고 꼼짝없이 앉아있는 계상에게 그녀가 남아있는 양심을 털어놓았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드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 시선을 놓아두고 계상이 하얗게 질려가는 머리 속을 간신히 추스려낸다.

이제사 들어 하릴없는 사연 캐어묻지 말기. 구태여 잡아둘 수 없는 마음 가로막지 말기. 어차피 지켜질 수 없는 약속 미련두지 말기.

머리 속에 차곡히 들어차는 생각들이 일렬로 배열이 되고, 계상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똑바로 눈을 맞췄다.

사연은 사연대로 묻어버리기, 마음은 마음대로 놓아버리기, 약속은 약속대로 잊어버리기. 그렇게...


"처음 만난 그 자리로 되돌아가기."


계상의 뜬금없이 튀어나온 낮은 음성에 그녀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무슨 말인지를 한참동안 생각하는 눈치다. 그런 그녀에게 계상은 담담하게 내려앉은 얼굴로 다시금 마지막 인사를 내어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윤계상의 자세야."


7년간 끔찍히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도 했던 그녀를 놓아두고, 계상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찻집을 나와버린다. 덜컹- 닫히는 문소리가 제 찢겨진 심장만 못하다. 피식- 씁쓸한 비소를 터뜨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맥주를 한 잔 하기엔 아직도 여전히 날은 밝다. 계상은 터덜터덜 걸음을 내놓다 주머니에 잡히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무작정 생각나는 번호를 눌러본다. 마음 속으로 오로지 한 생각만이 꽉 들어차있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는다. 다시는 사랑따위 못한다.


"태우냐. 나 오늘........."

다시 내게 사랑은... 없다.

"...........차였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 ... 제 1장

"난 니가 별론데."


"네?"


"난 눈이 개구리처럼 너무 큰 여자 싫어해.
적당히 쌍꺼풀도 있었음 좋겠는데 넌 닝닝한 눈이 크기만 하잖아.
그리고 머리결도 까슬한 게 안 좋아 보인다.
도브 샴프 써봐라. 그거 좋다던데."


기가 막힌 표정으로 서있던 여자 하나가 제게 쏟아져내리는 말들에 멍청히 굳어섰다. 대체 이 놈이 뭐라 짓걸이는가. 여자는 상대방에게 건냈던 러브레터가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썩어버렸는지 기염을 토하며 욕을 무진장 쏟아내고 침을 퇴퇴 두어번 뱉은 후 바로 뒤돌아서 씩씩거리며 멀어져간다. 어쩌자고 저런 놈을 좋아했던가. 저런 놈인 줄 알았다면 내 두 번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을. 여자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거친 발길질로 멀어져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계상은 그제야 픽 웃음을 내보이며 길게 난 계단 위에 기대 앉는다. 재미있는 듯 실소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런 건 정말이지 하나도 재미없다. 이렇게 해서 보낸 여자가 얼마더라. 굳이 세어보지 않았지만 꽤 많은 수라는 것만 기억한다. 계상은 간만에 입은 청바지를 탈탈 털며 갈색빛을 띄어가는 나뭇잎에 시선을 놓아두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담배를 하나 빼어물고, 틱- 라이터로 불을 붙여 길게 담배를 빨아들이고 나서 후우-  담배를 처음 빨았을 때 입가에 착 달라붙어 고이는 씁쓸함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 계상은 담배를 입술 끝에 물고 라이터를 넣으려다 순간, 멈칫했다.


'계상아, 생일 축하해.'


젠장... 아직도 남아있는 게 있었나.

손떼가 묻어 광택이 바래진 은빛 라이터를 쥐어들고 계상은 느닷없이 침범한 추억 하나에 멍청히 타들어가는 담배를 놓아두고 있다. 포옹과 입맞춤과 사랑한다는 말로 치러진 대가는 이미 충분하다. 두번 다시 달콤한 말에 속지 않으리라. 대책 없던 자리에 난데없는 기억이 찾아들어 또다시 가슴을 아수라장이 되게 할 수는 없다. 계상은 짧게 심호흡을 내뱉고는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빼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남긴 전리품을 쓸쓸히 바라보다 저만치 보이는 휴지통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투웅- 쓰레기통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웅웅 심장을 파고든다. 빌어먹을. 좋아하더래도 너무 많이 좋아하지 말아야 하고 못 잊더라도 가슴에 못이 되게 못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다. 그런 게 나란 놈이라 그런다.


"저기요."


대책없이 가슴이 난도질 당하던 계상의 머리 속이 순간 정지됐다. 하던 생각들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제 발이 놓인 한 칸 아래즈음에 사내녀석 하나가 방실대고 있다. 뭐야, 이 놈은.


"혹시 불 있으세요?"


하얗게 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들어보이며 또다시 놈이 방실거린다. 이래서 캠퍼스 안은 싫다. 언제나 사람이 많아 북적거리고 자신이 원치 않는 순간에도 누군가 침범하게 마련이니까. 계상은 무표정하게 제 앞에 섰는 사람을 바라보며 제 주머니를 툭툭 두들겨 보였다. 비어있는 주머니를 확인시켜주며 계상은 그만 방해받고 싶다는 표정 또한 지어보였다. 귀찮아 죽겠단 말이다. 분명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을텐데.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져주던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이 놈은 꼼짝도 안하지. 여전히 제 시야 아래로 보이는 녀석의 발꼭지가 영 눈에 거슬려 계상은 운동장으로 돌려놓았던 눈을 들어 다시금 앞에 놓인 녀석을 바라봤다. 방실방실, 여전히 방실방실.


"잠깐 실례할께요."


뭐야... 계상의 입에 물린 담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녀석이 갑작스레 깊게 몸을 웅크리더니 제 담배 꼭지를 계상의 타들어가는 발간 담배 끝에 가져다댄다. 그리고는 입술을 제 담배로 가져와 한모금 길게 들이마시는거다. 담배 두개 길이만큼의 사이를 두고 낯설은 얼굴과 마주하다니. 사내녀석에게서는 어울리지 않는 야릇한 로션 냄새와 뒤엉키는 바람. 하얗게 내려오는 목덜미 아래로 보일듯 말듯 반짝이는 티셔츠에 가려진 은빛 목걸이. 이게 대체 뭐야... 시선을 어디로 둬야할지를 몰라 방황하던 계상의 눈동자가 닿은 곳은 낯선 녀석의 머리꼭지. 저를 빤히 바라보며 담뱃불을 이어내고 있던 녀석의 눈을 피해 급하게 찾은 곳은 녀석의 머리꼭지. 바람에 반항없이 헝클어지는 머리칼이 계상의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건 무슨 색이지. 노란색 더벅머리라 하기엔 햇빛에 반사되는 것도 같고. 이 놈이 쓰는 게 도브 샴픈가. 바보같은 상상과 정전기에 살짝 일어난 머리칼 하나를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차츰차츰 들 때 즈음, 휘익- 몸을 일으킨 녀석 탓에 계상의 멍한 사고가 멈춰버렸다.


"감사합니다."


잘 타들어가고 있는 제 담배를 흔들어보이며 녀석이 뒤돌아간다. 시덥잖기는. 계상은 저 건방진 행태에 한 방을 먹이지 못하고 무방비로 당한 것이 못내 우스워 피식- 웃음을 내놓았다. 시시하고 별 거 없는 경험이 분명했다. 그냥 어쩌다 우연히, 누구에게나 빈번히 일어날 수 있는 사내녀석들의 경험이 분명했다. 헌데 햇살에 여전히 반들거리는 녀석의 뒷머리칼들을 바라보던 차, 갑자기 녀석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500원짜리 야광빛 라이터를 꺼내더니 보란듯이 하늘로 던져내었다 타악- 낚아채는 게 아닌가. 간만에 느껴보는 황당함이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차 계상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어버버- 입을 떡하니 벌렸다. 뭐야, 저 놈은.


'KITCH' 라 딱풀로 붙여 허름하게 때가 묻은 종이간판이 삐뚤빼뚤. 평소 같으면 깔끔하다 못해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계상이 저 물건을 단박에 똑바로 놓았을테지만, 오늘은 동아리방에 혼자 있으니까. 태우는 기울어져있는 동아리방 이름을 바르게 달아놓고는 과자 부스러기가 난무하는 탁자 앞에 다시금 앉았다. 친구놈이 이 꼴을 보았다면 지금 당장 대청소를 해야 한다며 제 목을 쥐어틀었을거란 생각에 태우는 계상이 오기 전에 하던 일을 얼른 마무리짓고 탁자를 멀끔히 치우리라 다짐했다. 물론, 녀석은 태우가 청소해놓은 모양새에 분명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을 기어코 하고 말 것이다. 야, 다시해...라고.

근데 이 자식은 오늘 코빼기도 안 보이네.

중학교 때부터 동창이었던 친구놈은 가끔 이런식이다. 늘 단짝같이 붙어다니지만 남들이 보기엔 별로 친해보이지도, 그럴싸한 우정이 있어보이지도 않는 술렁술렁한 관계처럼 보이는 사이. 하도 오래 같이 지낸 탓인지 태우는 이제 계상의 행동을 전부 다 꾀고 있지만, 문득문득 녀석이 사라지곤 할 때면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곤 한다. 

또 혼자 삽질하고 있는 거 아냐.

1년 전 따스한 햇빛에 넋을 잃고 졸다가 받은 친구놈 전화를 아직도 기억한다. 차였다...는 단 한 마디 떨렁 남기고 끊겨버린 전화.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이제는 남이 되어 떠나가버린 얄미운 사람 같으니. 그런 그녀와 헤어지고 난 후 계상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정다감을 온 몸으로 실천하던 녀석이 쌀쌀맞은 살얼음장으로 변하더니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치 않고 무뚝뚝하고 차디찬 인간으로 돌변해 버린거다. 언젠가 친구놈이 그랬었다.

'인생은 모 아니면 도다'

그래서 180도로 대변신을 해버린건지. 싸가지로 온 몸을 무장하고 시건방으로 온 얼굴을 뒤덮었으며 냉소와 비아냥으로 친구놈 하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쌀쌀맞게 구는 녀석. 그것이 그녀를 잊는 방식이었는지, 자신이 버티는 방식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계상은 지금 세간에서 '이기적인 놈'으로 통하고 있다. 이게 다 그 썩어빠질 사랑 탓. 태우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샛바람에 짧은 반팔 아래 팔등을 살갑게 문지르며 얇은 셔츠를 덧입었다. 그리고는 제 앞에 놓인 까맣게 지문 하나 안 남겨져 있는 새 노트를 살짝 열어재꼈다.

'kitch', 남들과는 색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노라 당당히 선언하고 들어온 영화 동아리였건만 계상의 성질머리 탓에 그나마 있던 동아리 회원들도 오는 둥 마는 둥 발길을 끊고, 이제는 거의 폐쇄 직전에 놓인 불쌍한 이름. 대대로 의료계에서 날리는 의사 집안의 장손인 태우로써는 영화의 꿈을 펼치려 발버둥을 치다 의사가 되라 강요하는 부모님과 맞장 뜨고, 끝내 합의점을 찾은 것이 공대. 그리하여 태우가 처음 이 동아리를 발견했을 때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한강 똥물이라도 발견한 듯 얄팍한 희망이 마구 샘솟았었는데. 태우는 쓸쓸하게 비어버린 동아리방을 둘러보고는 푹 웃음을 내비쳤다. 그래도 이대로 꿈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태우는 반듯한 노트를 조심히 쓸어쥐고는 자신이 쓸 시나리오에 대한 경험과 소재를 수집하기 위한 메모를 열심히 끄적여보리라 굳은 맹세를 해본다.

끼이익-

뒷등을 타고 넘어오는 소리에 태우는 눈을 찡긋 감아버렸다. 오늘은 친구놈의 삽질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는지. 탁자 꼴이 이게 뭐냐고 강박 윤계상에게 서늘한 째림을 여지없이 받을 것 같아서. 태우는 회유책을 쓰자 마음 먹고는 휘익- 몸을 틀어재끼며 말을 이으려 했으나. 어? 친구놈이 아니네?


"동아리 회원 아직도 받아요?"


"이 쪽은 신입 회원 손호영. 반갑습니다."


신입회원 환영회라고 해봤자 떨렁 세 명이 전부. 그런 와중에 팝콘을 한 웅큼씩 손에 쥐어잡고 하나씩 하나씩 맛나게도 먹고있는 호영을 지긋이 노려보고 앉아있는 계상 탓에, 태우는 분위기를 띄워보고자 어울리지도 않는 넉살을 떨었다. 호영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악수를 하고는 그래도 영화에 대한 꿈을 함께 불사를 친구를 만났다는 것에 일단은 후한 점수를 주었나보다. 이 녀석은 얼마나 견뎌주려나. 태우는 계상의 눈치를 흘끔 보고는 머지않아 호영도 kitch를 향해서는 오줌도 안 눈다 선언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릴거라 마음 속으로 단언하고 있다.


"근데 술은 안 마셔요? 헤헤."


"동갑이니까 말 트자. 어때?"


"그래. 좋아좋아."


두 눈을 갸름히 휘어뜨리며 뻔뻔스레 술을 먹자고 재촉을 해댄다. 동갑이라 하기엔 어쩐이 조금은 어려보이는, 게다가 철부지 냄새를 팍팍 풍기며 조잘조잘 태우에게 말을 건내고 있는 꼴이란. 저 노란 더벅머리는 분명 아까 나를 농락한 그 놈이 맞으렸다! 계상은 의자에 길게 늘어져앉아 호영을 위아래로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다.


"계상아, 누가 맥주 가져올건지 고백점프 게임으로 정하자."


얼음더미 속에 놓여져있는 갖가지 맥주들을 가리키며 태우가 계상에게 매번 거는 내기를 하자 한다. 누가 공대생 아니랄까봐 하는 짓들이 꼭 저렇게 머리를 써야 직성이 풀리는지. 캠퍼스에서는 왠만해서는 피해간다는 윤계상이 유일하게 놀아주고, 놀 수 있는 친구인 태우니까. 계상은 노란 더벅머리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신경쓰지 말자 마음을 접고는 고백점프 게임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호영은 기어이 '그 게임은 머리 아파서 싫은데.'라 한마디를 하고. 게임이 시작되고 내내 호영의 훈수가 끊이지를 않아 결국 계상이 태우와의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한마디.


"야, 다시해."


"있잖아, 난 겉표면에 차가운 얼음 몽울이 져있는 버드로 갔다줘."


계상의 말은 팝콘 뿌스러기 쯤으로 치부했는지 호영은 벌써부터 제가 마실 맥주를 일러주며 얼른 가져오라고 성화다. 정말이지 저 입을 재봉틀로 박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밀려오는 계상이다. 계상은 태우를 위해 참는거다라 몇번이고 마음을 다그친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맥주가 놓인 바 앞으로 갔다. 하나하나 맥주병을 꼼꼼히 확인하며 이것저것 골라내고 있는 계상을 바라보는 호영에게 태우가 슬쩍 한마디를 던진다.


"저 놈이 좀 깔끔을 떨어. 뭐든지 꼭 유통기한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거든."


설마 상해서 곰팡이 둥둥 뜬 맥주라도 가져다 놓을까봐서. 그럼에도 계상은 유통기한이 어쩌구 하며 일일이 주인장에게 물어보고는 병맥주 세병을 갖고 자리로 돌아왔다.


"계상아, 계상아. 난 그냥 버드 말고 버드 아이스로 갖다줘.
그리구 이건 별로 차가워보이지도 않네.
차가운 걸로 갖다줘. 막 이글루에서 뽑아온 것처럼 무지 차가운 걸루."


호영의 눈치발 없는 행태와 쉼표없이 좔좔이 쏟아지는 단어에 태우의 입이 뜨억 벌어졌다. 계상이 이별이란 걸 맛본 이후, 그 어느 누구도 계상에게 이런 건방진 행각을, 게다가 저리 친한 척을 덧발라가며 한 적은 없었는데. 아직 계상의 성질머리를 못봐서 저렇게 간댕이가 부은 행각을 서슴없이 해대는 게 분명하리라. 태우는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계상의 손에 있는 맥주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는지, 계상의 머리 위에서는 이미 서슬퍼런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고 있었으니.


"야, 니가 갖다 마셔."


탕 소리가 나도록 병맥주를 탁자에 내려놓자 호영의 몸이 놀란듯 들썩였다 제자리를 찾았다. 호영이 동그래진 눈으로 차갑게 식어내린 계상의 표정을 잠시 살피더니 이내 헤실 웃으며 다시금 말을 잇는거다.


"계상아, 계상아. 지금 니 바야바같은 그 얼굴은 내 마음을 심난하게 해.
난 니가 우리집 토끼 깡총이만큼이나 마음에 드는데."


한술 더 떠서 겁대가리를 상실한 발언을 내뱉어버린 호영의 발언에 태우는 몸둘 바를 모르며 드디어 살인나는구나 싶어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계상이 병이라도 깨서 저 놈의 목청을 따버리겠다고 하면 기필코 막아주리라 마음을 먹으며 안절부절이다. 침착하기로 정평이 난 김태우마저 이리 당황하게 만들었으니 호영의 뻔뻔스러움인지 눈치 없음인지, 하여간에 저 엄청난 행동은 실로 대단하다 할만하다. 계상은 표정 하나 떨림없이 그대로 서서 호영을 내리깔아보다가, 이내 천천히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난 니가 싫다. 사람 입술치고 너무 두꺼워서 싫고,
가로로 길게 늘어져서 웃을 때 파묻히는 니 눈도 웃겨.
또 주절주절 수다스러워서 시끄러운 것도 딱 질색이고.
아, 니 노란색 호섭이 머리도 사람보다는 병아리한테나 어울리겠다."


지금까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호영을 떼어내려는지 계상은 쌓아둔 말들을 떨림 하나없이 줄줄 싸가지없게 뱉어냈다. 존심 상할거다. 기분 옴팡 상했을거다. 계상은 씨익 입꼬리를 추켜 세우며 멍한 호영의 얼굴에 비웃음을 거하게 선사할 준비를 마쳤다.

이대로 내 눈 앞에서 사라져버려라.
 

"너도 사람 입술치고 얇은 입술은 아닌데.
니 입술이나 내 입술이나 자로 재어보면 아마 몇 미리미터 밖에 차이 안 날거야.
또 니 눈이 내 눈보다 더 찢어진 건 거울 보면 알 수 있을거고.
웃을 때 눈이 파묻힌다고 해서 꼭 사라진 눈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리구 넌 너무 말이 없더라. 그건 내가 말이 많으니까 상관 없긴해.
근데 니 그 까만 머리는 꼭 번개탄 같아.
내가 염색 해줄까? 로레알이 좋다드라. 넌 소중하니까."


계상의 저런 표정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입이 반쯤 쩌억 벌어진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 말이 무지 많은데 풀어내지를 못해 답답함이 얼굴 가득 표정으로 자리잡고 있는. 태우는 호영과 계상을 사선으로 번갈아보며 이내 야릇한 기대감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말똥말똥 계상을 바라보고 있는 호영과 기분 드럽게 드러워진 계상이 한참동안 대치하고 있으니. 태우는 얼른 노트를 꺼내들면서도 연신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아, 아직 제목도 정하지 못했는데. 뭐, 그래도 상관없지. 태우는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자한자 적어내려갔다.

제 1장,

인생은 모 아니면 도다.

그렇다면,

그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02>

What's love....?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 ... 제 2장

새학기를 맞아 시간표를 짤 때면 여지없이 골머리가 썩어나갈 지경이다. 어떻게든 비어있는 시간을 최대로 줄이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서 오후에 재빨리 귀가할 수 있는 시간표를 짜느냐 하는 것이 관건. 그러나 태우는 듣고 싶은 과목을 죄다 수강한 죄로, 게다가 계상이 듣는 과목도 챙겨서 함께 들어줘야 한다는 이상한 협력심으로 결국 남들이 보기엔 오지게 재수없는 시간표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꼭두새벽부터 밥도 굶어가며 눈꼽도 떼다만 얼굴로 강의실에 앉아있다 나왔더니 공강이 3시간. 저번에 꿍쳐놓은 단편영화 몇편을 볼까 싶어 동방으로 향했는데, 아침부터 가방을 얼싸안고 잠겨있는 문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저 놈은 대체 뭐지.


"누구세요?"


흠칫 놀라서는 진득 눈을 뜬 놈이 문에 닿아 눌려버린 삐죽이 세운 머리칼을 탈탈 털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내뱉는 말이란.


"그러는 넌 누구냐."


엄청 싸가지도 없다. 잔뜩 웅크린 모양새가 꽤나 왜소해 보였는데,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녀석의 몸이 한참이나 올라간다. 생각보다 키가 크구나 싶어 태우는 안경을 다시금 올려끼고 앞에섰는 녀석을 주시했다. 삐죽이 세운 머리를 쫘악쫘악 올려 세우며 녀석이 멍청하니 굳어섰는 태우에게 똑똑 끊어지는 말투로 얘기를 건낸다.


"여기 빙딱같은 손호영이라구 있지?"


대체 학번이 몇학번이길래 처음 본 사람한테 반말부터 싸질르는지. 이런 싹퉁머리 없는 행태는 계상의 싸가지 없는 개무시의 질주와는 조금 차원이 틀린 부류다. 태우는 강렬하게 저를 바라보는건지, 야리는건지 암튼 뚫어지게 저를 쳐다보는 놈의 눈빛에 그만 얼결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우의 대답에 흡족한 듯 정체불명의 녀석이 씨익 야릇한 미소를 보인다.


"어? 데니야!!"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명쾌한 목소리에 태우가 뒤돌아 바라보면, 호영이 종종 걸음으로 와다다 쏜살같이 달려와서는 데니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호영의 친구라 하기엔 정말 독특하다 할만큼 끼리끼리, 그게그거, 유유상종의 진리에 위배되는 듯한 불협화음인 녀석들이다.


"빙신아, 넌 왜 날 쌩고생을 시키고 지랄이냐.
키친지 치킨인지 찾아댕기다가 대가리 빡 도는 줄 알았다."


"데니 너두 정말 여기 가입할거야? 응응?"


저렇게 서로 다른 언어전달방식을 갖고도 대화가 되는 게 신기하다. 태우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못한 채 두 녀석의 행태를 멍청히 지켜보고 있을 뿐. 헌데 갑자기 데니가 문고리에 채워져있는 자물쇠를 쏘아보다가 태우를 향해 매섭게 날카로운 눈빛의 방향을 트는거다. 그리고는 친절하게도,


"문 안 여냐, 씨방새?"


"그 새낀 어딨냐."


동방에 들어오자마자 불을 켜기 전부터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데니는 꼭 명탐정 코난마냥 그 작은 방을 수색하고 돌아다녔다.


"에쭈? 나 오는 줄 알고 미리 토꼈구만."


탁자 밑부터 한참동안 쓰지를 않아 잘 열리지도 않는 캐비넷까지. 온통 구석구석 사방을 청소기처럼 밀고 돌아다니더니 데니는 제가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알 수 없는 의기양양한 미소까지 보이고 있다. 데니가 온 것이 그리도 좋은지 마냥 실실거리며 서있던 호영이 그제야 탁자 앞에 의자를 빼어내고는 데니를 앉히고 저도 그 옆에 곰살맞게 앉아서는 뭐라뭐라 종알거린다. 아무래도 김태우라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소개하는 멘트가 저리도 긴 듯하다. 태우는 멀쭘히 서있다 그들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김태우야. 학번은 호영이랑 같고.
너도 호영이 친구니까 그냥 말 틀께."


"난 정신병자다, 영어로는 사이코.
이름을 굳이 알려야 한다면 안.데.니.
빙신 친구는 물론 맞고. 근데 너 몇년생이냐?"


"80년생인데."


자신을 정신병자라 당당히 소개하며 제 할말을 쏟아내던 녀석의 물음에 태우는 또다시 얼결에 띵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원래 학번으로 치자면 79년생이 맞겠지만, 태우와 호영은 소위 말하는 빠른 80년생들이었던거다. 태우의 대답에 데니는 피곤하다는 듯 거만한 포즈로 의자에 기대고는 태우를 아래로 내리 깔아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언고하니.


"난 79년생. 앞으로 날 형님으로 모셔라, 씨방새."


"뭐?"


"왜, 불만있냐. 하여간 요즘 것들을 버르장머리가 없어.
새꺄, 니가 격동의 70년대를 알기나 해?!"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라니 사람을 이런 식으로 황당하게 만들기도 하는가보다. 데니의 말에 호영이 나름대로 소근거렸으나 주위 사람 다 들리게끔 태우에게 은근슬쩍 '사실 데니는 12월생이야, 헤헤.'라 정보를 찔러넣어준다. 대학은 엄연히 학번순이라는 굳어진 관습이 있거늘 그것을 싸그리 무시해버리는 행태는 그렇다쳐도, 70년대라고 해봤자 끄트머리에 간신히 태어난 주제에 격동의 70년대 어쩌구 하는 모양새라니. 그 시절에 기저귀 차고 분유만 디립다 넣은 젖병만 빨고 있었을 거면서. 태우는 차분히 반박할까 싶었으나 전혀 먹혀들 것 같지 않은 데니의 표정을 다시금 확인하고는 그냥 푸욱 웃음을 보이고 말았다.


"난 기계공학과야."


"난 체육학과."


정말 못말린다. 어떻게 저 약골처럼 보이는 녀석이 체육학과라는 걸까. 태우는 정말 안 어울린다는 표정을 고스란히 얼굴에 담아 호영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호영은 여전히 입을 반달모양으로 만들어놓고는 조분조분 데니에 대한 신상명세를 떠들기 바쁘다. 고딩 때 집안에서 반항하려고 대학 안가겠다 가출을 해버리고, 그 당시 만난 사람이 다름 아닌 호영. 아버지가 거의 반강제적으로 대학에 쳐넣었는데 공부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운동이나 해보라는 심정으로 넣은 체육학과, 그러나 데니가 학교에 오는 이유 또한 호영. 태우의 생각대로 말만 번지르하고 깡만 세지 그야말로 비실거리는 청춘, 그러나 제가 지켜주고 보호하고 있다 생각하는 대상 역시 호영. 그리하여 데니는 학과에서 항상 '번외'로 통한다. 늘 호영을 따라다니느라 낙제를 면치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의 '잔디 깔고 학교 들어왔다'는 비아냥에 언제나 데니는 당당히 어깨를 곧추세우고 그리 말한단다. '정수기도 기증했어, 씨뎅들아!!'


"어이, 빙신. 근데 정말 그 쌔끼가 좋은거냐."


"그럼그럼. 난 계상이가 너무 좋아. 이따만큼 사랑해."


그러고보니 데니가 찾는다는 사람이 다름아닌 계상인가보다. 친구놈을 빼앗겼다는 질투심에 몸서리치다 결국 저도 이 동아리에 몸을 담고 호영을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리라 다짐한 모양이다. 계상의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거리는 호영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귀를 후비적거리며 오만가지 욕을 궁시렁대는 데니를 보며 태우는 심심치 않은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사랑이라고... 생각해?"


호영이 얼마만큼, 어떤 마음으로 계상을 바라보았는지 태우는 알지 못한다. 그저 사랑이라면 기겁을 하며 미친듯이 꽁무니를 뺄 계상을 떠올리며 호영의 아이같은 대답에 태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담담한 물음 하나를 내놓아본다. 그러면 쉴새없이 떠들던 호영의 얼굴이 태우에게로 향하고 그런 호영의 눈빛은 여전히 똘망똘망.


"원래 끝나는 게 사랑이야. 원래 변하는 게 사랑이야."


데니가 흥얼대듯 호영보다 먼저 선수를 친다. 데니에게는 호영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소리가 거슬린다기보다는 호영이 말하는 그 사랑의 대상이 계상이라는 것이 그저 심사가 뒤틀릴 뿐. 호영은 잠깐동안 조용히 앉아있더니 다시금 살짝 미소를 보이며 예의 그 말투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예전에 내가 깡총이를 키우기 전에 강아지 한마리를 키웠었거든.
아, 내가 지금 키우는 토끼 이름이 깡총이야.
근데 빙구가... 참, 내가 키우던 강아지 이름은 빙구였어.
데니가 지어준거야. 빙신이 키우는 개 빙구라구.
옛날에 우리 엄마랑 나랑 빙구랑 살았을 때.
난 빙구가 너무너무 좋았어. 우리 엄마 다음으로 좋았으니까.
얼만큼 좋았냐면 길을 가다가 넘어졌는데
눈 앞에 500원짜리를 발견했을 때 만큼 좋은거야.   
아니다, 1000원짜리. 아니다, 10000원짜리를 발견했을 때만큼보다 더 좋았어.
그러니까 계상이는 나한테 그런 존재인거야. 개같은 존재."


얘기를 경청해주던 태우는 호영의 마지막 결론을 짓는 멘트에 입에 헤- 벌어졌다. 그러니까 결국, 호영의 끔찍한 애지중지를 받고 있는 계상은 호영에게 있어 개같은 존재가 되는건가보다. 태우의 어설픈 웃음에 호영은 더 신이나서는 혀가 땀을 흘릴 정도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빙구는 내가 돌아오면 무조건적으로 반겨줘.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었어.
그냥 나만 보면 막 꼬리를 줄창 흔드는거야.
내가 잘 때면 옆에 와서 같이 눕고
내가 밖에 나가면 하루종일 나만 기다려.
내가 밥을 주지 않으면 아마 싫은 소리도 못하고 굶어죽었을거야.
그러니까 난... 그런 개같은 사랑을 할거야."


제가 주구장창 떠들어댄 말들이 만족스러웠는지 환희에 찬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호영의 설레이는 표정에 태우는 그제야 완전히 웃어보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결론을 다시 말하자면 개같은 존재에게 개같은 사랑을 바치겠다 하는거다. 그런 호영에게 데니는 이만큼 뿔이난 얼굴로 '모든 걸 주고 꿈을 꾸는 바보같은 삐에로'라고 타박을 하다가 '때론 알 수 없는 사랑학 개론'이라 했다가 구구절절이 호영을 구박하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빙신, 니 말이 맞다. 그 새끼는 개쉐이야."


그러더니 결국, 말도 안되는 희한한 결론을 받아들이고만 데니다. 그런 두 녀석의 투닥거림 같지 않은 친근감에 태우는 문득 계상과 친해졌던 과거가 떠올랐다. 제 오랜 친구놈에게는 지금도 그렇듯 두가지 거대한 인생관이 있다.

'내 것에 흠집나지 않게 악착같이 챙긴다' 와 '받은만큼 되돌려준다'

첫번째 문항이야 이기적인 놈들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고, 두번째 문항은 어찌보면 그럴싸한 예의바른 처사로 보일 수 있겠으나. 사실 저 문구 뒤에는 자기한테 해를 입힌 자에게 반드시 응징을 가하리라는 어마어마한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는거다. 그런 계상의 인생관을 몰랐을 고등학교 재학시절, 태우는 계상에게 책 한권 값을 아껴보자는 심산으로 어렵사리 책을 한권 얻어냈다. 절대로 안 빌려주려 발버둥을 치는 계상을 꼬득이고 달래어, 그것도 책에 흠집 안내겠다는 조건을 걸고 또 걸어 간신히. 그리고나서 태우는 흠집이 날세라 조심조심 구김하나 없이 책을 보았건만, 책을 돌려준 후 태우는 계상에게 거의 범죄자 취급을 받을만큼 온 구박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이유인 즉슨, 계상이 아끼는 책이라 더했겠지만 37페이지에 태우가 습관적으로 침을 발라 넘긴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으므로. 태우는 문득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일방적으로 호영이 당하고 있는 듯 보이는 두 사람의 말싸움을 티브이 속 를 보듯 바라보고 있다.


"근데 개쉐는 왜 안 오냐.
얼마나 잘난 쌍판인가 좀 볼라했더니."


"우리 계상이 지금 수업 중이야.
와아- 곧 끝날 때 다 됐어, 데니야."


"빙신아, 뭐가 좋아서 실실거리냐."


"우리 계상이가 얼마나 잘생겼는데.
너도 한번 봐봐. 그렇다고 반하면 안돼. 알았지?"


물론 주위의 억압이 거세다 하여 쫄거나 의기소침해 할 호영은 아니었던거다. 태우는 연습장에다 어설픈 낙서를 하며 어릴 적에 자신을 사로잡았던 상상 하나를 끄집어냈다.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던 부모님의 권유로 바이올린을 배웠더랬다. 그리고 조금 더 머리가 자랐을 때, 명랑만화 아기공룡 둘리를 보고 자신은 바이올린을 타고 깐따비아 별에서 지구로 친구들을 찾아 날아온 도우너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머리가 조금 더 굵어졌을 때에는 자연스레 그 생각을 접었던 걸로 기억한다. 헌데, 난데없는 곳에서 입이 거칠기 짝이 없는 깡마른 또치와 '호이호이~' 요술이라도 부릴 듯 엉뚱한 표정을 잘도 짓는 둘리를 만난 듯 하다. 이대로 만화영화 감독을 꿈꿔보는 건 어떨까. 태우는 정신없이 시끄러운 와중에 살짝 아무도 모를 웃음을 보이며 남은 한 사람, 계상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계상이 놈은,


끼이익-


"계상아, 계상아."


양반 되기는 글러먹은, 외계 친구들을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 난 우리의 고길동 윤계상 등장. 계상은 스윽 데니를 쳐다보고는 호영의 반가움을 철저히 무시한 채 저만치 떨어진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계상의 손에 들린 책의 제목을 확인한 순간 호영의 눈이 반짝 하더니 이내 쪼로로 달려가 계상의 옆에 바짝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런 호영의 모습에 불타오르는 눈매로 개쉐이를 외치며 계상을 노려보고 있는 안데니 또한 어김없다.


"너 요시모토 바나나 좋아해?"


"계상이 그 사람 광팬이야."


호영의 말을 못들은 척 책만 보고 있는 계상 대신 태우가 친절히 일러준다. 그러면 호영은 공통점을 찾았다며 뛸 듯이 좋아하고는 계상의 앞에서 다섯손가락을 쫘악 펼쳐 박수를 짝짝짝 쳐대는거다. 이래서야 어디 독서 삼매경이 가능하겠는가. 계상은 짜증스러운 듯 책을 내려놓고는 자리를 털어 일어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서관에나 갈 것을.


"난 안데니다. 니가 빙신이 말한 그 개쉐냐?"


이건 또 뭐야. 계상이 난데없이 나타나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는 낯선 얼굴에 인상을 잔뜩 써본다. 그런 데니와 계상의 대치 상태에는 별 동요없이 호영은 계상의 손떼가 묻어있는 책을 들고는 쓸어안았다 펴보았다 하며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는거다. 데니는 계상이 쫄기라도 바라는 냥 눈을 위로 치켜뜨고는 계상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계상에게 있어 일상이 이렇게 피곤하게 뒤엉키고, 게다가 주위가 무진장 시끄럽게 변화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거부하고 싶은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사내새끼가 빠나나 요리책 따위를 갖고 다니다니."


부르르 주먹을 떨며 분노의 게이지를 높이고 있는 데니의 말에 태우는 입을 막고 꺽꺽거리며 웃음을 참아냈다. 그런 데니를 계상은 심드렁히 내리 꼴아보며 말을 잇는다.


"빠나나가 아니라 요시모토 바나나다."


"빠나나나 바나나나 그게 그거지, 개쉐."


"그럼 넌 안떼니라 불려도 상관 없는거냐?"


팽팽하게 긴장으로 흐르던 어설픈 대화에 드디어 데니가 한방 먹었다. 남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계상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고 데니는 '천하무식 아임에프'라 말했을거다. 잠시동안의 침묵을 깨고 계상이 귀찮다는 듯 씩씩거리고 섰는 데니를 지나치려 하자, 데니는 굴하지 않는 자세로 계상을 막아세운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고 권투하는 자세로 계상을 한껏 노려보며.


"덤벼, 개쉐. 이기는 놈이 호영이를 갖는거다."


뱅글뱅글 계상을 감싸고 돌며 어디 한번 개겨봐라 하는 눈빛을 맹렬히 쏘아주고 있는 같잖은 데니의 행태에 계상은 끝내 피식 비웃음을 선사했다. 그런 계상의 웃음에 자존심이 잔뜩 상해버린 데니는 '에쭈? 웃었어?' 하더니 호영의 정신 산란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꼿꼿히 계상의 주위를 맴돌고 있으니. 끝내는 계상이 참다참다 데니를 슬쩍 밀치며 한마디 했다.


"그냥 너 가져라."


계상이 그냥 투욱 밀쳤을 뿐인데, 갑작스레 데니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철푸덕 소리와 함께 비참한 몰골로 바닥에 코를 박고 있는 가련함이란.


"데니야!! 괜찮아? 그러길래 가만 있으랬자나.
우리 계상이가 얼마나 힘이 센데.
어떡해, 너 무릎에 포도만큼 시퍼런 멍이 들 것 같은 조짐이 보여."


울상이 되어 자신을 일으켜 세우던 호영의 손짓에 데니는 어지간히 쪽팔려야 맞는건데, 무지 강한 상대를 만나 지가 패했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계상은 도무지 자신이 왜 이런 시덥잖은 것들과 놀아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저런 코메디같고 가볍기 그지없는 인간들과 자신은 분명 다른 부류의 인간인데. 지금 자신에겐 같이 놀아줄 의향도 시간도 여력도 없는데. 만사 피곤하다는 듯 두 사람을 지나쳐가는 계상의 모습에 역시나 호영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계상아, 계상아. 너 어디가?"


왜 꼭 두번씩 부르는지. 가는 귀가 먹은 사람도 아니건만. 제발 그냥 좀 내버려두란 말이다. 계상이 짜증스러운 듯 지긋이 호영을 노려봤다.


"계상아, 난 니가 좋아. 이따만큼 사랑한다니까."


호영의 입에서 내비치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계상의 인상이 낮게 굳어졌다. 어디서 감히 함부로 사랑이란 말을 나불거리는건가. 그것도 다름아닌 사랑에 크게 데다 못해 홀랑 타버린 윤계상 앞에서. 태우는 호영이 큰 실수를 한거라 생각하며 계상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 아무래도 계상이 꼭지가 돌아 미친듯이 날뛰면 뒷수습은 역시나 자신의 몫이므로.


"이거 선물이야. 너 라이터 없자나."


호영이 계상의 표정엔 아랑곳없이 수줍은 한떨기 민들레마냥 그의 손에 쥐어준 것은 야광 라이터. 그것도 500원짜리 촌스럽기 그지 없는 분홍빛 야광 라이터. 너무 어이가 없으면 화도 안난다더니 계상은 제 손에 들린 그 꾀재재한 물건을 한심하게 내려다봤다.


"넌 사랑을 몰라. 그러니까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계상이 그새 방법을 바꿨나보다. 재수없게 군다하여 절대로 떨어질 손호영이 아니란 것을 이미 깨우친 게 분명하다. 이제는 진드기 손호영을 타일러서 다른 놈 찾아가보라 설득이라도 하려는걸까. 태우는 눈을 반짝 빛내며 담배를 한무대기 피워 호영에게 라이터 선물을 받겠다 길길이 날뛰고 있는 데니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두 사람만의 대화가 드디어 시작될 듯한 분위기니까.


"왜 몰라? 난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데."


역시나 순순히 물러설 리 없는 호영이다.


"니가? 니가 날? 니가 윤계상을?
니가 나 윤계상을 사랑한다고?"


계상이 비웃듯 낮은 어조로 호영에게 거들먹거린다.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너한테 500원짜리 라이터를 주는 건 사랑이야.
내가 너랑 같이 바나나 책을 좋아하는 것도 사랑이야.
내가 니 머리를 염색해주고 싶어하는 것도 사랑이고,
내가 너랑 같은 과목 들으려고 새벽같이 수강신청하는 것도 사랑이야.
내가 너한테 하는 거니까 사랑이야.
어떤 것도 윤계상이란 이름만 걸리면 나한테는 그것도 사랑이라구.
어떤 사람이 너한테 사랑해 하는거랑 내가 너한테 사랑해 하는 건 달라."


힘맥아리 하나 없이 태우에게 잡혀있던 데니도, 그런 데니를 막아세우느라 정신이 혼미해져있던 태우도 호영의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사랑학 개론에 멍청히 굳어졌다. 지지 않으려는 듯 주먹까지 꼬옥 쥐고 서서 악바리처럼 말을 늘어놓은 호영의 모습을 계상이 가만히 떨림없는 눈동자로 바라본다.

하나도 재미없는 우스운 꼬라지.
윤계상, 너 지금 뭐하는거야.

계상이 피식 웃음을 내비치다 이내 단호하게 굳어선 표정으로 차갑게 식어내렸다.


"내가 가르쳐줘? 사랑이란 인간이 가장 빨리 망가지는 방법이다.
유무선 겸용에다가 양방향 통신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고
그러다 잘못하면 이도저도 안되게 디스크 손상이 되서
컴퓨터 본체까지 바꿔야하는 지경에 놓이는 게 사랑이야."


담담하지만 분명 떨리는 어조였다. 알 수 없었을테지만 분명 계상은 제 얘기를 하고 있는거였다. 하여간 공대생 아니랄까봐서. 태우는 안쓰럽게 계상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흐트러짐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호영의 눈동자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계상이 이내 마음을 추스리려 애를 써본다.

너같은 애송이를 데리고 내가 지금... 뭐라 짓걸인거지.

어줍잖은 녀석의 농간에 놀아난거다. 왜 이 녀석이 말을 걸면 화부터 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런 식의 대화는 달가울 리 없다. 계상의 암담한 표정에 태우는 제 손에 들려있는 노트를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오늘 제 1장에 대한 답을 달아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모 아니면 도다.

그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never.

라고. 어쩐지 시시하게 끝나버리는 것 같아서 태우는 제 손에 들린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계상은 짧게 숨을 내쉬고는 예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 호영을 그대로 스윽- 지나쳐갔다. 그런 계상을 그대로 놓아두던 호영이 다시금 입술을 올곧게 다져물고는 계상을 쫓아가 억지스레 잡아세웠다.


"계상아, 계상아."


"씨발, 너 바보야?
사랑이란 건 너처럼 그렇게 입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냐.
알아 듣겠어?!!!"


계상의 저런 모습 역시 참 오랜만에 보는 태우다. 계상이 흥분하고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태우는 호영의 저 거머리같은 행각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그런 계상의 거친 말투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데니가 다시금 입을 열어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이 싹수없는 개쉐! 너 지금 누구한테 욕을 씨부리냐? 어이?"


정신 산란하게 계상에게 주먹을 들어보이고 있는 데니의 모습에 호영도 똘똘한 표정으로 계상을 바라보다 이내 피익 웃음을 되찾았고, 계상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짜증스러운 듯 머리를 마구마구 긁어댔다. 도무지 지구의 기운과는 맞지 않는 녀석들. 계상은 깜빡 잊고 갈 뻔했던 제 책을 챙겨들고는 호영에게 다시금 단호하게 쌀쌀맞은 한마디를 던졌다.


"암튼 난 너랑 사랑 안하니까 까불지마."


"내가 사랑해!!!"


호영이 잉잉거리듯 목청껏 내지른 소리에 계상이 기가 막힌 듯 멈춰섰다. 뭐 낀 놈이 성낸다더니 이젠 억지로 우기기라도 할 태세다.


"내가 사랑한다니까. 사랑은 내가 할께.
나 밥도 맨날 2인분씩 먹거든. 그니까 사랑도 2인분 할 수 있어.
그 대신 넌 사랑 아닌 거 전부 다 해줘."


저게 지금 뭐라고 주절거리는건지. 도무지 저 녀석과는 같은 한글을 사용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계상은 한심하다는 듯 호영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책을 펼쳐들었다. 손호영의 말은 싸그리 씹어주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계상이 아껴 마지 않는 그 책에, 태우가 침 자국 한번 냈다가 된통 당했다던 그 책에, 호영이 색색이 볼펜으로 하트 속에 윤계상이란 이름을 열댓개 짱박아 그려넣어둔 게 아닌가. 도대체 호영의 손에 저 책이 쥐어져있던 그 몇분동안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니. 물론 계상의 인생관을 절대로 알 리 없는 호영이라 그랬겠지만, 호영의 행동력이 저리 신속할 줄이야. 계상의 책에 마구 낙서처럼 늘어져있는 하트 모양에 데니는 또다시 질투에 불타올라 빠나나 요리를 지가 해주겠다며 호영을 꼬득이고 있었고, 호영은 흐믓하게 부끄러운 미소를 내비치며 홍안이 되어 있었고. 오로지 계상만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독한 기운을 온 몸으로 뿜어내며 그 발랄한 분위기에 재앙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아무 것도 모르는 초롱초롱한 눈빛의 호영에게 이빨이 다 뽑혀져 나갈 듯 이를 갈고 있는 계상이 한마디 하기를.


"너... 부셔버릴거야."


빠르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태우는 제 1장에 대한 답을 잠시 보류하기로 한다. 개같은 존재를 향한 개같은 사랑을 조금 믿어보기로 마음 먹은거다. 태우는 자꾸만 입술 새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꾹 안으로 눌러 삭히며 노트를 급하게 열고는 평소 성격대로 명쾌한 요점 정리를 해냈다.

제 2장,

청춘의 덫.


<03>

'Oh! Back One' virus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 ... 제 3장

"호영이는?"


"디지게 돈 버는 중이다."


호영과 마주치는 것조차 몸서리를 치는 계상인지라, 태우는 친구놈과 농구 한게임을 뛰고 동방에 오는 것을 무지하게 꺼리다 못해 기피하기까지 하는 친구놈의 고집스런 자태에 어쩔 수 없이 홀로 동방으로 향했건만, 호영은 아르바이트를 가고 없는 모양이다. 입학했을 때부터 있었던, 밑이 다 꺼져가는 가죽을 가장한 커다란 비닐 쇼파에 몸을 깊게 웅크리고 있던 데니가 깜빡 졸았는지 부스스 눈을 뜨며 흐드러지게 기지개를 켠다.


"커피 마실래?"


"역시 내 카리스마에 무릎꿇고 충성하는구나, 씨방새야."


태우 손에 들려있는 종이컵을 받아들며 데니가 100원짜리 커피에 희한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는 홀짝홀짝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시는데 열중. 그러고보니 이 녀석은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있는 한 참 센티멘탈하고 샤프한 이미지를 풍기기도 하는 듯. 커피를 향해 강한 집중력을 과시하고 있는 데니의 얼굴을 태우는 빤히 살펴보았다. 역시나 어떠한 한계로 규정지을 수 없는, 새록새록 알수록 재미난 녀석. 태우는 데니의 볼에 눈꼭지를 달아놓고 설탕향이 가득 베어나는 커피를 한모금 입안에 넣어 가만히 음미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갑작스레 홰엑 치켜올려뜬 데니의 두 눈. 태우는 그 눈과 마주치자 괜스레 당황하며 눈알을 뱅그르르 돌리다 이내 베시시 바보같은 웃음을 보임으로써 그 상황을 무마시키려 하였으나.


"야, 씨방새."


"어?"


데니의 부름에 태우의 분주하던 행동이 사그라들고, 태우는 예의 그 차분함을 되찾고는 데니를 바라봤다.


"넌 세상에서 누가 제일 싫으냐?"


"글쎄.."


뭐 이런 어린애같은 질문을 다한담. 태우는 외계로부터 온 친구녀석이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예상컨데, 이는 계상을 씹으려는 전초전일거라 단언해본다.


"난 우리 아부지가 젤루 싫은데."


예상과 엇나간 대답이 나오자 태우는 띵한 표정을 짓다 이내 살풋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 데니의 모습에 시시한 대화가 끝나려는가 싶었더니.


"씨방새, 나 좀 웃겨봐라."


이내 태우가 자신 없어하는 걸 시키고만다. 어쩐지 우울해보이는 데니의 맥아리없는 권유인지 명령인지 모를 야릇한 뉘앙스를 풍기는 한마디에 태우는 가만히 데니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웃기는 것보단 웃는 거 잘하고, 말하는 것보단 듣는 거 잘하는데.
그러니까 니가 얘기해봐. 다음 수업까지 30분이나 남았는데."


"시시한 자식."


픽 웃으며 그제야 표정을 되찾는 데니는 태우의 말을 안들어줄 듯 하더니, 이내 권유한 사람이 무색하게도 쫘라락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얘기하지 말라 했으면 살인날 뻔 했겠네...라는 생각을 하며 태우는 데니가 주절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역시나 주제를 벗어날 리 없는 이야기의 주인공. 호영은 어렸을 적부터 엄마와 둘이 산다고, 그리고 지금은 토끼 한마리를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 한다. 그리고 홀로 외로울 엄마를 위해서도, 또 학비를 위해서도 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잡아 돈벌이를 한다고도 가르쳐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언고 하니.


"그 빙신은 내 앞에서 한번도 운 적 없다."


우는 것과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실실거림의 절대지존 손호영이라 그런가. 데니의 말에 태우는 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영의 눈물을 구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했는지 아니면 신기했는지 데니는 입을 씰룩거리며 제가 하던 이야기의 맥을 계속 이어나갔다. 언젠가 호영과 한번 깡패무리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죄다 물리치려 했건만 택도 없이 저를 픽픽 쓰러뜨리는 악의 무리들을 향해 호영이 정의의 주먹을 날려 저를 구해냈단다. 이빨이 두어개 나간 놈과 눈이 오지게 터져 잔뜩 부어오른 놈과 오방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이 혼미해진 놈들을 길거리에 널부러뜨리고,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게 주먹을 털던 호영이 데니를 일으켜 세우며 상대방 놈들을 보고는 울상이 되어 내지른 이야기란, "어떡해, 어떡해. 내 주먹이 망치보다 센가봐." 였단다. 그리고 어느날은 가난한 놈 포식시켜주겠다며 훼밀리 레스토랑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는데, 고객서비스카드란에 '어느 지점에서 음식을 드셨나요? (   )점'이라 쓰여진 란에 데니는 당당히 (압구정)점이라 썼건만 호영은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자세로 (100)점이라 썼단다. 저렇게 강한 놈이라 그런지, 이렇게 실없는 놈이라 그런지 여지껏 호영이 우는 걸 본 적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데니는 아직도 궁금한 모양이다.


"암튼 그 썩을 놈의 개쉐가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그리고는 도달한 결론이란 것이 뻔하디 뻔한 윤계상에 대한 끝없는 증오. 주먹을 부르르 떨며 데니가 입술을 꽈악 다져물고는 허공을 향해 날카로운 눈매를 들어올렸다. 호영의 마음을 홀라당 발라당 빼앗아가버린 게 화가 나는건지, 아니면 호영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계상의 행태가 괘씸한건지 모를. 태우는 우뢰매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데니를 보며 얼빵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태우의 눈길에 데니는 긴장을 풀며 어깨를 두어번 털더니, 짜라락 태우에게 얼굴을 들이밀고는 다시금 입을 연다.


"야, 씨방새. 난 다 알고 있다."


".....뭘?"


태우가 커피를 한모금 들이키며 데니의 눈을 조심히 들여다봤다. 그러면 데니는 낮은 포복자세로 태우에게 얼굴을 쑤욱 더 깊게 들이밀어 넣으며 은밀하고도 낮은 한마디를 건내는거다.


"너.. 나한테 반했지?"


푸헥- 도우너의 입에서 튀어나온 커피의 잔재는 왕자병 또치의 얼굴을 덮기에 실로 충분했다.


퉁- 소리를 내며 쓰레기통이 계상이 던진 활명수병을 삼켜버렸다. 태우와 농구시합을 끝내고 출출한 김에 분식당에 들러 라면을 하나 먹고 있는데, 난데없이 노란 호섭이 머리가 저만치에서 보이는 바람에. 계상은 갑작스레 속이 더부룩해짐을 느끼며 맛나게 먹던 라면을 고스란히 개수대에 버리고 말았다. 후다닥 뛰어들어와 '아줌마, 김밥 주세요, 김밥.' 하더니 꼬질한 천원짜리를 들이밀고는 은박지에 싸여있는 김밥을 쓸어안고 다시 와당탕 뛰어나가버린 녀석. 그 짧은 시간동안 녀석의 뒤통수를 잠깐 보았다는 이유로 이리 속이 뒤틀려 버렸는지. 계상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매일같이 먹어대는 활명수의 양이 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은근히 짜증이 몰려왔다. 조용히 개무시의 도로를 질주하자니 그런 것에 아랑곳하는 녀석도 아니고, 그렇다고 쿵짝을 맞춰가며 논쟁을 벌이기엔 언어전달 방식의 장벽이 너무 높고. 계상은 어찌해야할지를 몰라 바둥거리다 결국 호영의 머리카락 하나만 보일라치면 쏜살같이 일어나 줄행랑을 쳐버리는 도망자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매번 울렁대는 속을 달래기 위해 교내 약국에 들러 활명수 하나를 사먹는거다. 활명수 회사에서 소화불량에 허덕이는 자신을 보았다면 아마 베스트 소비자로 표창장을 주고도 남았을거다. 계상은 입가에 남아있는 활명수의 씁쓸함을 쭈욱 손으로 닦아내리고는 건조한 바람이 잔뜩 불어대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강의실로 향했다.


끼이익-


너무 일찍 왔나. 하긴, 도서관까지 가기는 귀찮고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그냥 강의실로 직행했으니 이를 수 밖에 없겠지. 계상은 텅 비어있는 강의실을 둘러보고는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대본다. 속도 답답한데 확 뚫리게 담배나 한 대 피울까. 그런 생각에 뒤질세라 얼른 담배를 하나 빼어물고 주머니를 뒤적뒤적. 그런데 손가락 새로 딸려나오는 것이 다름 아닌 분홍빛 야광 라이터. 이 촌스럽기 짝이 없는 오백원짜리 라이터를 보니 뒤집힌 속이 가라앉질 못하고 두통까지 몰려오는 게 어째 영 찜찜하기까지 하다. 이는 곧 있을 교양과목이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학점을 채우기 위해 상식도 넓힐 겸 '시의 이해'를 태우와 함께 수강했는데, 난데없는 오백원짜리 라이터보다 더 싫은 손호영과 그의 시원찮은 보디가드 안데니까지 함께 앉아 있었으니. 계상은 인상을 깊게 쓰고는 오백원짜리 라이터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냥 나가버릴까. 계상은 짧게 고민하다 출석때문에 F가 뜨는 것은 천하의 살얼음장 윤계상의 이미지에 말도 안되는 낙인이 찍히는것이므로 그냥 버텨보자 굳세게 마음 먹었다.

킁킁-

바람이 아침부터 내내 건조하게 차갑더니만 역시나 찬바람을 맞으며 농구를 한 탓에 코가 꽉 막혀버렸나보다. 계상은 코로 숨을 세차게 내뿜으며 답답하게 공기가 통하지 않는 콧잔등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질러댔다.

킁킁-

답답해 미치겠네. 계상은 한쪽 구멍 바로 위 콧등을 눌러 막은 후 입을 꾸욱 다물고 조금 전보다 더 세게 콧바람을 내쉬었으나, 어째 이 놈의 콧구멍이 꼼짝도 안한다. 좀 시원하게 뻥 뚫리는 방법이 없을까. 계상은 여러차례 이 방법, 저 방법을 강구하고 시도해보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에 짧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는 못참겠다. 강박 윤계상이 여기서 그대로 포기할 리가 있나. 계상은 주위를 두어번 두리번 거리고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바짝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이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없도록 코평수를 최대한 넓히고 검지 손가락 반마디를 쑤욱 콧 속으로 날렵하게 들이밀어 넣는다. 무언가 걸리는 게 분명 있을텐데. 작은 콧구멍 속을 나름대로 노련하게 휘젓고 다니는 검지 손가락이 이 구석 저 구석 쓸어내린다. 엇, 걸렸다. 손가락 끝으로 매만져지는 거친 먼지뭉텡이의 느낌이 촉감으로 전해져오자 계상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검지 손가락 끝을 올려세웠다. 그리고는 콧 속에 강하게 접착되어진 딱딱한 물질, 일명 코딱지를 손톱으로 스으윽 긁어내려 밑으로 쭈욱 꺼내려는 찰나.


끼익-


벌컥 열린 문으로 후다닥 뛰어들어오는 그림자 하나. 계상은 허걱 놀라서는 얼른 손가락을 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보니 저 놈은 재수 없기로는 둘째가라하면 서러울 손호영이 아닌가. 은박지에 반쯤 쌓여있는 김밥을 손에 들고 책을 한권 옆구리에 낀 호영이 알바 탓으로 굶은 점심을 김밥으로 떼우다 계상을 발견하자 금새 쪼로로 달려온다.


"계상아, 계상아."


이 놈이 과연 봤을까.

계상은 호영이 빠른 종종걸음으로 강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자신이 콧 속에서 손가락을 빼낸 시간과의 오차를 열심히 계산하는 중이다. 그리고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언제나처럼 싸가지 없는 눈빛을 덧발라 새초롬히 서있는 호영을 올려다봤다.

이 놈은 절대 못 봤을거다. 이 놈이 절대 봤을 리 없다.

계상은 자신의 순발력과 호영의 어리버리함을 계산수치에 포함시키며 절대적으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들키지 않았을거라 자신해본다. 그런 계상을 빤히 바라보며 여전히 김밥을 오물거리던 호영이 손에 들려있던 김밥을 다른 손으로 옮기더니, 참기름 묻은 손을 바지에 슥슥 문질러 닦고는 계상의 얼굴로 손을 가져오는거다. 그리고는 계상의 코 밑에 덜렁거리고 있는 답답함의 상징물을 쓰윽 닦아내준다.


"너 얼굴에 청포도가 썩은 것 같은 색깔을 띤 젤리가 묻어있네."


이런이런이런이런이런. 계상이 급하게 손가락을 원상복귀 시키느라 미처 손톱에 걸린 잔여물을 끝까지 데리고 오지 못한 모양이다. 계상은 이 쪽팔리고도 이미지 홀랑 말아먹은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머리 속이 새까맣게 변해버려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런 계상의 창피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영은 실실거리며 계상을 향해 먹다 만 김밥을 불쑥 내밀었다.


"먹을래? 운좋게 햄이 대따 큰 게 들어가서 무지 맛있는데."


"입 다물어."


이 무슨 드럽고 꼬질한 짓이란 말인가. 계상은 아예 뱅글뱅글 회전하고 있는 속을 달래려 가슴을 툭툭 손으로 때리며, 낮은 어조로 위협을 주고는 무서운 눈매로 호영을 바라봤다. 그럼에도 호영은 여전히 김밥을 오물거리며 두 눈을 갸름히 접어 웃고는.


"근데 니 코딱지 디게 귀엽다, 계상아."


"입 닫으랬다."


계상을 농락하려거나 놀리려는 것이 아닌, 호영은 정말 계상의 그것이 참으로 귀엽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시험관에 넣어 썩지 않게 박제해두고 싶을만큼. 그러나 계상은 그러한 호영의 마음을 헤아릴 리가 절대적으로 없었으므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져서는 호영을 어떻게 부셔버릴까 쉴새없이 머리를 놀려대고 있다. 그러다 무언가 번뜩 떠올랐는지, 조용하던 계상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서더니 호영을 내리 깔아보며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도로 건내는거다.


"너, 아직도 나 사랑하는거냐."


"그럼, 당연하지."


"난 헤픈 거 질색이다."


"내가 너한테 헤퍼? 정말?
와아- 나 너한테 무지 헤프구나?
그럼 나 니 오백원 할래.
오백원만 주면 바로 달려나오는 헤픈 사람 할래.
사실은 공짜로라도 맨날 나올 수 있긴 하지만
오백원은 내 자존심을 살려주는 거라고 생각해주면 돼."


또다시 말도 안되는 돌림노래를 듣고 있는 기분. 계상은 괜스레 말을 걸었다 싶어 퍽퍽 가슴을 치고는 호영을 피해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러면 호영은 헤실 웃음을 보이며 계상이 앉았던 자리에 몸을 맡기고는 남아있는 김밥을 은박지를 까서 하나하나 차례대로 꼭꼭 씹어 먹는거다. 어쩐지 호영에겐 매번 자존심 깍아내리기 전법이 먹혀들지를 않는 게 이상할 따름이다.  그렇게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썰렁한 강의실에서 김밥을 전부 다 먹은 호영이 저만치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는 속뒤집힌 계상을 뒤돌아보며, 김밥을 먹는동안 정리한 제 결론을 간추려 요약해준다.


"계상아, 계상아.
난 니 오백원, 넌 내 코딱지."


"입 안 닥치냐?!!!"


"자, 이번주 발표하기로 한 사람?"


'시의 이해'는 꽤 흥미로운 수업이었다. 학생들의 창작력에 불을 당기고 고리타분하지 않은 시간을 만들려는 젊은 강사의 숨은 의지가 다분히 빛을 발하였으므로. 오늘은 특히나 일본의 17음절의 짧디 짧은 시, '하이쿠'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강의시간이 한시간을 조금 넘어가고 있을 무렵, 지난 시간에 말했던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읊고 토론을 해보는 시간이 다가왔다. 저만치 눈 앞에서 손을 번쩍 들고 초등학생마냥 좋아하고 있는 호영이 눈에 박히자, 계상은 관심없는 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고, 태우는 흥미롭게 한 조를 이룬 호영과 데니를 지켜보고 있다.


"방금 전에 제가 조금 덧붙인 부분이 있어서 좀 어설플지도 몰라요. 헤헤."


호영은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강단 앞에 서서는 쭈욱 학생들을 둘러보다, 이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린, 찬바람 쌩쌩 휘날리는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옆에 서서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데니를 슬쩍 곁눈질로 쳐다보다, 위풍당당하게 제가 밤새 준비해온 시를 낭낭하게 읽어내렸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호영의 목소리에 태우가 살짝 웃으며 팔꿈치로 계상을 툭툭 쳐내렸다.


"김소월의 초혼이네."


그런 호영의 목소리와 태우의 관심에도 꼿꼿하게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계상이다. 그런 계상을 향한 마르지 않을 눈빛을 여전히 달아놓고, 호영이 잠시 한템포 쉬더니 더 큰 목소리로 마저 덧붙인 부분을 낭송을 하기 시작했다.


"산산히 부서진 이미지여!
얼굴 중에 찰싹 달라붙은 이름이여!
닦아도 남아있는 자국이여!
파다가 코피터질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려 하는구나.
사랑하는 코딱지여!
사랑하는 코딱지여!"


호영의 터무니 없는 시낭송에 주위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오로지 계상만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호영을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을 뿐. 한 사람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호영의 눈빛에 학생들은 이내 계상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수근대기 시작했다. 먼지 한 톨도 용서치 않는 깔끔대왕 윤계상을 아는 학생들은, 여자들에게 그간 계상이 해온 싸가지 없는 행태들을 들먹이며 가로로 눈을 길게 늘여뜨리고는 계상을 비웃기에 바빴음은 물론이고. 그런 계상의 치솟아오르는 분노를 알 리 없는 태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계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니가 코딱지야?"


"저 새끼, 가만 안둬."


낮게 으르렁거리는 계상의 목소리는 실로 복수의 칼을 가는 듯 엄청 날카로와져 있었다. 그런 계상의 모습에 태우는 알만 하다는 듯이 푸욱 웃음을 터뜨렸고, 호영과 계상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던 데니는 또다시 질투에 불타올라 호영을 냉큼 끌어내리고는 지가 그 자리를 차고 올라가 강단 위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는 탁탁- 칠판을 두번 크게 쳐서 웅성대는 주위를 간단히 집중시켜 버린다. 내려온 머리도 하나 없건만 쭈삣한 머리를 쓰윽 쓸어넘기며 데니가 허리를 쭈욱 펴고 꼿꼿하게 서서 제가 준비해온 시를 읽을 태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개그맨이 시도 졸라 잘 씁디다.' 였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를 정신없이 재빠르게 읽어내린 데니는, 다시금 주위를 스윽 돌아보고는 자기도 호영처럼 패러디 시를 읊겠다 한다. 그리고는 또다시 커다란 목청으로 이번에는 천천히 한자한자 격한 어조로 흥분을 고스란히 심어 시낭송을 시작했다.


"윤계상은 가라. 10월도 손호영만 남고 윤계상은 가라.
개쉐는 가라. 동학년 곰탱이의, 그 김태우만 데리고 개쉐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윤계상은 가라.
이 곳에선, 두 주먹과 박치기까지 내논 윤계상, 안데니가
가을의 캠퍼스 앞에 서서 질투심 빛내며 맞장뜰지니.
개쉐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빙신같은 손호영만 남고 그 모오든 윤계상은 가라!!!"


웅변을 하듯 주먹을 불끈 쥐어올려보인 데니의 행태에 학생들은 끝내 박수를 쳐주기에 이르렀고 호영과 데니, 게다가 계상까지도 그 날 수업의 하이라이트로 추대받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리고 열화와 같은 성원에 감사하다며 호영이 끝내 쐐기를 박는 축시를 하나 더 관중에게 건냈으니 호영의 에이플러스는 따놓은 당상. 응용력도 어찌나 좋은지 이번 시간에 배운 하이쿠, 17음절을 즉석에서 작문하여 읊조리기를.


"부채표 없는 활명수는, 손호영 없는 윤계상!!"

정신없이 현란하게 진행되던 수업이 끝나고 불이나케 밖으로 튀어나가는 학생들 틈에 끼어 바둥거리고 있는 호영을 데니가 쭈욱 잡아 끌어냈다. 그리고는 한산한 복도에 다다르면 바로 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검은 그림자 하나.


"계상아, 계상아."


호영의 반가운 기색에 더이상 뒤집힐 속도 없는 계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호영을 바라보다, 끝내 참지 못하고 활화산처럼 거하게 폭발하고 만다.

타악-

호영의 멱살을 잡아올려 벽에 밀쳐놓고 계상이 분한 나머지 씩씩거렸다.


"그만둬, 계상아."


눈깜빡할 새 일어나 상황에 태우가 미처 만류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히 호영과 계상의 틈에 끼어 진정하라는 듯 손짓을 보냈지만 계상의 눈은 이미 돌아가 있는 듯 보였다. 개망신을 줘도 유분수에, 이미지를 깍아먹어도 1,2점이지. 이제 학교에 낯짝이나 들고 다니겠냔 말이다. 계상은 호영의 옷을 추켜 올려 말아쥐고는 놓아주지 않을 듯 무섭게 노려봤다.


"이 그지같은 개쉐!! 누구한테 앞발을 갖다대냐? 어이, 어이?!"


데니가 계상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온갖 잡다한 욕을 내질러댄다. 정신없이 구는 데니와 계상의 손을 떼어내려 애를 쓰고 있는 태우는 상관 없이,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한번만 더 그러면 정말 죽여버리겠다는 듯 계상이 호영에게 강한 눈빛의 메세지를 보냈다. 그리고는 휙- 소리가 날만큼 거칠게 호영을 놓아주고는 금새 뒤돌아서 멀어져가는거다. 그런 계상의 뒤꼭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호영의 조용함에 계상의 뒤통수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사정없이 질러주던 데니도 금새 잠잠해졌다. 상처 입었을거라고, 그래서 저런 놈따위 재수 없어졌다고 그리 말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데니는 속으로 은근히 쾌재를 부르며 호영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런 데니의 기다림에 부응이라도 하듯 호영이 마침내 입술을 달싹이며 제 심정을 고한다.


"데니야, 어떡해..."


"왜? 저 새끼 싫어져서 그러지?
다신 보기 싫어져서 그런거지? 저 새끼, 아주 재수 원단이지?"


쉴새 없이 터져나오는 데니의 물음에 호영이 여전히 계상의 뒤꼭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잇는다.


"어떡해... 계상이가 처음으로 내 옷 만졌어. 계상이 손 무지 따뜻한 거 있지.
너무 좋아서 환장하겠어, 데니야."


그러면서 이 옷 빨지 말아야지... 생각하는 호영이다. 향후 일주일은 이 옷만 입어야지... 다짐하는 호영이다. 태우는 그런 호영의 환희에 찬 표정을 보며 몇일 전 계상이 한 말을 떠올렸다.

'세상엔 4종류의 사람이 있다.
남자, 여자, 아줌마. 그리고,
남자보다 강하고 여자보다 질기며 아줌마보다 훨씬 극성맞은... 손호영.'

그 때엔 이해할 수가 없어 뚱한 표정을 지었보였지만, 지금은 마음 속으로 계상의 이론에 깊은 긍정의 표시를 하고 있는 태우다. 그것이 분노라해도, 이렇게 살아 숨쉬는 감정에 익숙해지다 보면, 예전 계상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태우는 가만히 호영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호영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발그레한 호영을 연신 살피던 데니는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고는 '이씨, 씨발'을 외치며 저만치 손가락만하게 보이는 계상을 향해 와다다 달려간다. 그런 데니의 모습에 태우는 큰 싸움이라도 날까 싶어 환상에 사로잡혀 몽롱해진 눈빛의 호영을 데리고 얼른 데니를 뒤쫓았다.


"야, 개쉐. 거기 안 서냐?!"


계상이 못들은 척, 듣기 싫은 척 그대로 걸음을 내놓는다.


"에쭈? 씹었어? 말로 할 때 듣는 게 좋아, 재수 원단!!"


여전히 저를 무시하는 계상의 행태에 데니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계상을 바지런히 뒤쫓는다. 그런 데니의 모습에 태우 역시 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약골 안데니가 따라잡기엔 계상의 걸음이 생각보다 꽤 빠른 듯 하다. 계속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절대로 잡히지 않는 계상이 어지간히 얄미운 나머지, 데니가 걸음을 멈춰세우고 숨을 몰아쉬며 크게 소리를 질러버린다.


"거기 서라니까, 코딱지!!!"


그제야 계상의 발이 멈춰서고, 천천히 뒤돌아선 계상의 머리 위로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러면 데니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계상을 향해 달려가 그의 앞에 똑바로 마주서는거다. 그런 데니와 계상의 또다시 시작된 대치구조에 태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녀석들 곁으로 다가가 섰다. 홍길동에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있도록 호부호형을 허락한 것도 아니고, 성질 무지하게 드럽다고 소문이 파다한 고길동에게 윤계상을 코딱지라 부르고 손호영을 오백원이라 부를 수 있도록 '호코호오'를 허한다 한들 그 무슨 기쁨 충만한 일이리오. 여전히 분노가 삭혀지지를 않아 가슴이 울렁울렁 미식거리는 계상도, 제 친구놈을 홀랑 삼켜버린 얄미운 놈을 혼줄 내주고 싶은 데니도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서로를 주시하고 있다. 물론 한쪽 구석에서 여전히 계상의 얼굴을 요리조리 바라보며 행복에 사로잡혀 있는 호영도, 메모장을 꺼내 정신없이 관찰하며 글씨를 갈겨쓰고 있는 태우도 매한가지의 광경인건 두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어처구니 없고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싸움의 한가운데서 데니가 먼저 선빵을 날리기로 마음을 먹었는가보다. 사마귀처럼 양 손의 검지와 중지를 붙여 치켜세운 데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북두신권!!!"


난데없이 저리 외치더니, 계상의 목, 왼쪽 가슴, 배꼽, 오른쪽 가슴, 왼쪽 옆구리, 다시 목, 오른쪽 옆구리, 가슴 한 복판을 다다닥 빠른 손짓으로 꼭꼭 눌러 찔러댔다. 그리고는 여전히 내려온 머리는 하나 없건만 쭈삣한 머리를 쓰윽 쓸어넘기며 진지하고도 비장한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선다.


"넌 이제 10초 후면 죽는다."


계상의 벙찐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더해가는 가운데, 태우는 대대로 의사집안의 아들내미 면모를 한껏 살려 하얀 페이지에 오늘의 일과를 간결하게 담아냈다.

제 3장,


손호영, 정서적 공황 상태
안데니, 정신적 혼수 상태
김태우, 엔돌핀 다량 분비


윤계상,

오백원 바이러스에 감염.
손호영 발작 증후군 말기 증세.

우측 비례 그래프 참조
(x축 - 오백원을 만난 횟수, y축 - 코딱지가 먹은 활명수 갯수)


<04>

alone or together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 ... 제 4장


"이제 오냐?"


"어? 데니야. 여태 있었어?"


칠을 한 지 하도 오래된 탓에, 듬성듬성 녹이슨 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좁게 난 대문가에 앉아 담배를 태우다, 데니는 저만치 보이는 폴랑거리는 걸음의 그림자가 나타나자 담배를 더 깊게 빨아들였다가 후우- 짧게 내뱉었다.


"엄마는?"


"지금 막 꿈 속 양반이랑 데이트 갔다.
근데 그 동태눈 사장은 널 지금까지 부려 먹은거냐?"


"오늘 손님이 많았거든.
참, 우리 엄마 심심하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


"요즘엔 너보다 아줌마랑 노는 게 더 좋다."


또다시 계상에게 눈멀어 있는 호영의 콩깍지에게 섭섭함을 드러내고 만다. 하루종일 허리한번 못 펴고 서서 무거운 그릇들을 닦고 있었을 호영을 생각하니 영 심기가 불편해져서, 그만 두라고 조금 더 편한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말하려다가 멈칫. 그간 막노동 빼고는 안해본 일이 없다하는 호영이니까. 담배를 손가락으로 깔짝거리며 데니는 제 옆에 저와 같은 모양새로 쪼그려앉는 호영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돌맹이로 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는 호영을 또다시 잠깐 흘깃. 그리고는 관심없는 척 말을 흐릿하게 흘리기를.


"너 진짜 그 새끼가 환장하게 좋냐?"


데니의 물음이 떨어지자 마자 호영이 손장난을 하던 손가락을 뚝 멈추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힘차게도 끄덕끄덕.


"빙신."


그따위 놈은 너를 이해할 수 없다는데도. 데니의 심드렁한 표정에도 게의치 않고 호영은 피곤한 탓에 잔뜩 부어버린 눈두덩에 눈동자가 파묻혀 사라질만치 웃음을 가득잡아 또다시 웃을 뿐.


"너 아줌마한테 개쉐 얘기 입 터지도록 해댔지?"


"어? 너 그거 어떻게 알아?"


호영의 눈이 동그래지며 데니를 신기하게 바라보니, 데니는 그런 호영의 모습이 못마땅한 듯 담배를 바닥에 마구 비벼 꺼버리며 제 옆구리에 차고 있던 연습장을 불쑥 내밀었다. 그런 데니의 손에서 연습장을 받아들고 보면, 하얀 종이 위에 '계상?'이라 쓰여져 있다.


"이거 우리 엄마 글씬데."


"누가 누구 글씬지 알아 맞추랬냐?
아줌마가 나 오자마자 붙들고 그 놈이 어떤 놈인지 물어본거라구, 빙신아."


데니의 입에서 분명 좋은 얘기가 나왔을 리 없었을텐데도, 호영은 매일밤 엄마에게 계상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이 생각났는지 입이 함박 벌어진다. 그리고는 데니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은 채, 제가 생각하는 계상의 멋진 모습을 떠올리며 엄마 역시 그런 계상을 의심하지 않을거라는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다. 갈수록 헤벨레한 표정으로 변해가는 호영의 얼굴에 데니는 참다참다 퉁명스런 말을 툭- 입 밖으로 내뱉고만다.


"나 배신해놓고 뭐가 좋아 실실대냐."


"배신 아냐, 배신 한 적 없어."


"나 버리고 그 새끼 좋다하면 그게 배신이지,
배신이라고 꼭 거하게 뒤통수를 갈겨야 배신이냐?"


"나 너 버린 적 없는데.
내가 너한테 언제 우리집에 그만 놀러오라고 그랬어,
아니면 학교에서 아는 척도 하지 말라 그랬어?
물론, 내가 계상이가 좋다고 너한테 말한 적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걸 부정한다거나 시치미를 뗀다거나 할 순 없지만
나 아직도 너랑 무지 친한데 그게 어떻게 배신이야?
배신은 그런 거 아냐.
내가 니 얼굴 볼 수 없게 되면 그게 배신이지.
그리구 넌 키가 나보다 커서 뒤통수 치기도 힘들단 말야."


뭐 하나 떡하니 타박을 하려다가도, 저리 일일이 대꾸하는 말버릇과 쉼없이 어줍잖은 논리를 펼치는 호영의 아리송한 이야기들에 언제나 패배하고마는 데니다. 계상의 비꼬기 전법이나 자존심 긁어내리기 한판 승부가 늘 나가리로 끝나는 것은 아마도 다 호영의 말투 덕분일거다. 어쩐지 꼬여버린 것 같은 대화의 맥락을 찾아헤매던 데니는 이러다가는 호영의 말도 안되는 논리에 자신이 당하고 말 것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한참동안 호영의 이야기를 답지않게 차분히 헤아리려 나름대로 애를 쓰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끝내 우기기 혹은 윽박지르기로 마무리를 지어버린다.


"으구~ 빙신아. 암튼 니가 날 차버린 관계로
난 절라 외롭고 궁상맞고 고독할 예정이야.
그러니까 왠만해선 날 혼자 내버려두는 게 좋을거다."


자신의 섭섭함과 질투라고 하기엔 무지 존심 상하지만 그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조잡한 감정들을 어떻게든 호영에게 알려줘야 하니까. 이렇게라도 호영에게 못을 박고 나면 제 속이 조금이라도 후련할 것 같아서. 데니는 괜스레 목청을 큼큼 가다듬으며 나 이따만큼 열받아 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면 호영은 딴청을 부리려는지 작은 대문에 떨어질 듯 아슬하게 매달려있는 딱딱한 페인트칠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뗄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의 침묵이 어울리지 않게도 흘러가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꼬르륵 하는 가련하고 불쌍한 소리가 들려왔으니. 데니가 고개를 홱 틀어 호영을 바라보자, 호영이 배를 가리며 베시시 웃는다.


"설마 여적 굶었냐?"


"손님이 무지 많았다니깐."


"으구, 빙신빙신. 따라 들어와. 초특급 라면 끓여줄께."


"으와~ 나 밥도 말아 먹을래."


금새 좋아라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이미 대문가로 들어서고 있는 데니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호영이 총총총 따라 들어간다. 혼자 있고 싶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는데 배신을 당한 이는 동태눈 사장을 향한 욕을 궁시렁거리며, 배고픈 배신자를 위해 직접 라면까지 끓여줄 모양이다. 그것도 초특급으로.


"데니야, 우리 라면 먹고 고백점프 게임 하자. 응?"


"확인 했냐?"


어둑하게 자리잡은 한가로운 산책로를 유리문 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다, 컵라면에 물을 받아들고 나무 젓가락을 입에 문 태우의 모습에 계상이 한마디 했다. 그러면 태우는 뜨거운 컵라면 두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손가락으로 용기 겉봉에 쓰여진 숫자를 가리킨다.


"아직 2년이나 더 남았어."


어릴 적 곰팡이 핀 음식을 먹어 병원에 실려가기라도 했는지, 하여간에 유난을 떠는 계상의 버릇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이렇게 한가롭고 여유로워 인적도 드믄 이 시간에 굳이 유통기한을 꼼꼼히 살피는 계상이 조금은 팍팍해보여 태우가 조금 센 반응을 보인거다. 간만에 계상이 사는 먼 동네에까지 찾아와 태우는 친구놈과 밖에 있는 공원에서 농구를 한 게임 뛰었고, 새벽바람이 쌀쌀해져 출출한 김에 그나마 하나 있는 24시간 불을 밝힌 '유일마트'에 들러 라면을 하나 뚝딱 헤치우자 합의를 보았다.


"내일 어디서 술 마실까?"


"갑자기 술은 왜."


아직 덜 익은 라면을 젓가락으로 뽀개어 휘저으며 계상이 탐탁지 않은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면 태우는 띵한 표정을 짓다 계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는거다. 그런 태우의 조용함에 계상이 젓가락을 내리며 태우를 바라봤다.


"왜?"


"너 정말 모르냐?"


"뭘?"


"내일 너 생일이잖아."


그런가. 날짜가 벌써 그렇게 됐나. 계상의 뚱한 표정에 태우는 기가 막힌 듯 멍청히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계상처럼 성급히 열지 않았던 컵라면 뚜껑을 열어재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라면을 휘휘 저으며 태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호영이랑 데니도 초대했어."


애써 계상의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굳이 눈이 피로하게 녀석을 바라보지 않아도 계상의 일그러지고 폭삭 구겨진 표정을 모를 리 없으므로. 태우는 재빠르게 라면을 입으로 말아넣으며 애써 태연한 척 여유를 부려본다. 이 나이에 누구는 초대하고 누구는 빼버리자는 싸움을 하는 게 우스울테지만 그러면 어떠랴. 어쩐지 그래야할 것 같은 느낌이 지배적이었던 탓에 태우는 당당히 사실을 밝히고는 여전히 라면을 먹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면 계상은 젓가락을 탁 놓아버리며 돌씹은 얼굴로 태우를 비스듬히 내려보는거다.


"누구 맘대로?"


"그런 거 못 느껴? 걔네랑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거.
그리고 이왕이면 다같이 축하하는 게 좋잖냐."


"축하? 여지껏 그 자식이 한 짓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난 호영이가 맘에 들어."


"미친 놈."


계상이 듣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리고는 라면 맛이 뚝 떨어졌는지 생수만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짜증스러운 듯 젓가락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팍- 꽂아버렸다. 어지간히 나이 먹은 사내놈들끼리 생일초대니 뭐니 불필요한 말일테지만 호영의 얼굴과 마주대하는 것조차 껄끄러운지 계상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고작 호영의 이름만 꺼냈을 뿐인데도 잔뜩 짜증을 부리는 계상의 모습에 태우는 피식 웃음을 보이고는 계상을 약올리려는 듯 쩝쩝 소리를 내며 라면을 후루룩 먹어댄다. 그녀 때문이 아닌 호영 때문인거니까. 태우는 만족스러운 듯 짧게 웃음 지었다.


"입 아프게 하지 마라, 김태우. 난 그 자식이 싫다."


"입 아프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호영이가 맘에 들어."


"그렇게 맘에 들면 너나 만나."


"니 상대로 말이다."


태우의 넉넉한 웃음에 계상은 더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입을 꽈악 다물어버린다. 그리고는 속이 꽤나 답답했는지 제가 사는 아파트 촌에 그나마 떨렁 하나 있는 마트 문을 박차고 나가며 기어이 모진 한마디를 남겨버렸다.


"미친 놈."


"태우야, 어디로 가는거야? 응?"


아르바이트를 하루 걸르느라 진땀을 뺀 호영은, 동태눈 사장에게 비굴하게 군 것도 금새 잊은 듯 어린애 솜사탕 받아들기 전의 모습과 같다. 서늘하게 뺨을 스치는 바람과 잔뜩 물을 먹어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이 태우에게 매달려있는 호영을 바라보고 있는 계상의 표정과 사뭇 흡사했다. 터틀넥에 턱을 반쯤 걸친 데니는 개쉐가 태어난 오늘이야 말로 실로 저주스런 날이라 연신 씨부렁거리며 계상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걷고 있었고.


"김태우, 나 먼저 집에 간다."


"어?"


계상이 걸음을 재촉해 태우와 호영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영과 생일파티니 뭐니 촌스러운 짓을 하느니 집에나 일찍 돌아가 드럼통으로 가득 끓여져있는 미역국에 몸을 담궈 익사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계상의 단호한 거절의 표시에 태우는 어제의 모든 이야기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 같아 잠시 생각하는 눈치고, 호영은 뾰로통한 표정과 띵한 표정을 동시에 보이며 계상에게 재촉하는 눈빛을 연신 보내고 있다. 물론 데니는 '생각 잘 했다, 개쉐'라며 계상의 행각에 처음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간다, 내일 보자."


뒤돌아서는 계상에게서 우박이라도 내릴 듯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무슨 말로 잡아야할지를 몰라서, 저렇게 매몰차게까지 굴 줄은 예상했더라도 애써 모른 척하고 싶던 생각들이어서. 태우는 멀어져가는 계상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젖었다. 이대로 내버려두는 게 나을까. 평소라면 진작에 달려가 침착한 설득을 펼쳐보였을텐데, 어쩐지 계상이 내내 우울해보여 태우는 잠깐 망설이는 중이다. 정말 호영 때문에 하루종일 저 모양인가. 태우의 아리송한 태도에 계상은 이제 거의 캠퍼스를 벗어나 있었고, 그런 태우의 곁에 머물러 있던 호영이 순간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더니 계상을 금새 따라잡았다.


"계상아, 계상아."


평소엔 걷는 것도 별로 내키지를 않아 하던 계상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며 못들은 척.


"계상아, 너 지금 가버리면 나 죽어버릴거야."


저게 지금 어느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애의 발언이란 말인가. 갖고 싶은 장난감 안사줬다고 땡깡부리는 것도 아니고. 계상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치며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 짧은 시간동안 현실적으로 판단해보건데 호영이라면 그간의 행태를 볼 때 정말 차도로 뛰어들고도 남을만한 놈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계상의 눈이 닿아오자 호영의 얼굴에 금새 화색이 돌려 했으나, 호영이 애써 표정을 다잡고는 한쪽으로 맨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든다. 뭐지...? 계상이 가로로 눈을 길게 뜨고는 호영의 손놀림을 지켜보면 호영이 짜잔- 창호지와 붐무기를 꺼내들고는 조분조분 말을 잇는다.


"니 생일파티 할래. 그니까 같이 가줘.
안그러면 나 여기서 정말 죽어버릴거야."


지 생일도 아니고 엄연히 계상의 생일인데 굳이 자기가 생일파티를 하네 마네 결정짓고 마는 호영이다. 같이 안가주면 널 죽여버리겠다는 스토커식의 발언이 아닌 차마 계상을 죽일 수 없어 자기가 콱 목숨줄 끊어내겠다고 말하는 호영이다. 게다가 협박을 하려면 쌈박한 권총, 그걸 구하기가 수월치 않았으면 부엌에 있는 식칼이라도 뽑아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떨렁 손에 들려진, 보기에도 안전한 창호지와 분무기는 대체 뭐지. 계상의 벙찐 표정에 호영이 창호지를 반으로 찢어내더니 이내 제 얼굴 위로 덮는다. 그리고는 분무기를 제 얼굴을 향해 가져다대며.


"여기다 물뿌리면 나 죽어.
창호지가 내 얼굴을 꽉 조일거거든.
그러니까 콧구멍이랑 입이랑 막혀서 나 죽는거야."


허- 살다살다 별 꼴을 다 보는구만. 애인이 지 마음 몰라준다고 한강대교에 옷 벗고 올라가 날뛰는 놈은 봤어도 창호지 얼굴에 쳐바르고 권총대신 분무기 들고 설쳐대는 놈이라니. 계상이 입을 쩍 벌리며 하얀 종이에 가려진 호영의 얼굴을 한심하게 들여다봤다. 그제야 캠퍼스 끝에 다다른 태우와 데니는 호영의 행동이 뭔지를 몰라 멀쭘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고. 하긴, 옛날 어느 시대 때에는 정말 저런 방법으로 사람을 처형하기도 했다하니 과학적으로 아예 근거가 없는 행동은 아닌 듯 싶어 계상은 답답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며 호영을 바라봤다. 이 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순수와 띨빵의 경계라고 해야 하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계상의 침묵에 호영이 창호지를 내리고는 이내 살풋 웃어보인다.


"너 진짜 못말린다."


"헤헤."


계상의 포기한 듯한 어조에 태우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데니는 사내놈이 귀가 얇아 저 모양이라며 계상을 노려보기 바쁘고. 호영이 신나라 가방에 분무기를 챙겨넣으며 계상의 뒤를 병아리마냥 쪼로로 뒤쫓는다. 분명 지구와는 별개처럼 보이는 이 녀석과 있으면 우울한 기운이 좀 가시기는 할까. 호영의 종종걸음을 곁눈질로 슬쩍 내려다보며 계상이 이내 잔뜩 흐린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쩌다 이런 생각까지 하는거지. 계상이 머리 속에 들어앉아있는 단 하나의 생각에 씁쓸히 웃으며 근처 호프집으로 향하고 있다. 그녀와 사귄지 몇일 째 되는 날인지를 더이상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이별이라 받아들여버린 계상일테지만. 생일인지도 잊어버려 친구놈이 찾아와 자신이 태어나 날을 가르쳐줄만치 하루하루에 가물해져 가는 계상일테지만 계상의 머리 속에 들어앉아있는 단 하나의 생각. 

그녀와 헤어진지, 아니 그녀가 떠나버린지 427일째.


"빨리 마셔, 씨방새."


"태우 소주 말고 맥주로 갖다줘라."


"그런 게 어딨냐, 개쉐.
누구 입만 양반이라 비싼 술 먹이냐?"


그런 게 아닌데. 계상은 설명하기 귀찮아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고 태우는 난처한 듯 데니를 살피다 이내 소주를 3잔 째 들이키는 중이다. 호프집에 들어오자마자 맨 구석에 자리를 잡은 호영은 계상의 생일이라며 급구 말리는 계상을 뿌리치고 생일 축하 노래에 혼자 일어나 박수까지 치며 앙증 애교 춤까지 선보였다. 그리고는 쳐다보는 주위 사람들에게 '곧 내 애인 될지도 몰라요, 무지 잘 생겼죠?'라며 계상을 젓가락으로 가리키지를 않나, 미처 케익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데니를 조르고 졸라 옆 테이블의 케익을 갈취해오질 않나. 그리고 지금은 부던히도 매일밤 연습해오던 고백점프 게임을 하는 중이다. 속이 부글부글, 인내심이 바닥나려 할 때마다 계상은 걸리지도 않았는데 연신 소주를 들이부었고. 그간의 노고가 먹혀드는지 데니와 호영의 합작 공세에 매번 걸리는 것은 태우. 원래는 소주를 마시면 맛이 가는 체질이라 마실 수 없다 버텨보았으나, 데니가 주위 이목 아랑곳없이 욕을 크게 내지르는 바람에 태우는 금새 소주를 털어넣는 수 밖에.


"니들 후회할거다."


얼굴이 점점 벌개져오는 태우를 바라보며 계상이 과일을 버석버석 씹다 낮은 경고를 내놓는다. 그러면 호영과 데니는 무슨 소린지를 몰라 멀뚱히 바라보다 지가 취해봤자 개꼬장이지 싶어 다시금 지들끼리 술을 마시는데 열을 올리는거다. 어영부영 술마시기 게임이 끝나버리고, 혼자 소주 두어병을 마신 계상이 취하기도 전에 떨렁 소주 세잔에 넋을 잃은 그의 오랜 친구 태우가 풀린 눈을 들어올리며 슬픔에 젖은 표정이 된다. 느끼한 냄새를 한껏 풍기던 안주 콘버터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 있던 호영과 데니는 태우의 그런 표정에 하던 일을 멈추고 굳어버렸다.


"사...아.....라......앙."


그러길래 소주 먹이지 말라니까. 계상은 드디어 시작됐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아버렸고, 호영과 데니는 태우의 더듬거리는 말이 무언지를 몰라 얼굴에 수많은 물음표를 달아냈다.


"사.......라....앙."


사랑? 사랑이 뭐 어쨌다는걸까. 호영과 데니는 서로를 바라보다 다시금 눈이 풀려 반쯤 쓰러져가는 태우에게로 눈을 돌렸다. 항상 차분하고 침착하게 남을 챙겨주는 태우의 모습에 워낙에 익숙해진터라 이렇게 흐리멍텅하게 구는 태우는 영 낯설기만 한가보다.


"사.....라앙.....사...랑.....사아...랑."


"씨방새, 너 앵무새과냐? 사랑이 뭐 어쨌다고?"


데니가 답답한 듯 숟가락을 치켜들며 태우를 재촉해댄다. 그러면 태우의 눈에 금새 슬픔이 차올라서는 눈물이 그렁그렁. 그 모습에 데니는 흠칫 놀라 엥?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호영 역시 태우의 얼굴에서 눈을 뗄 줄 모르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계상만이 다시는 이 호프집에 오지 못할거라 예견하며 조용히 겸허한 자세로 태우의 행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랑... 사랑..."


"사랑이 뭐? 뭐가 어케 됐다는거냐, 씨방새!"


"나도 사랑..."


"나도 사랑.. 그 다음을 얘기해야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꽹과리를 울리든 할 거 아니냐."


데니의 구박같은 대꾸에 태우가 아주 미미한 목소리로 흐릿하게 말을 남긴다. 이런 행태가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데니는 태우의 목을 끌어 올려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뭐? 뭐라구? 야, 새꺄. 들리게 말을 해라!!"


"나도 사랑......하고 싶어."


"으잉?"


"나도 사랑!! 하고 싶어!!"


조금 더 크게 또박또박 제 의견을 말하는 태우의 목소리에 데니도 호영도 난데없는 이야기인지라 멀뚱히 태우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20여년의 세월을 보내오면서 아직 한번도 여자친구를 만나본 적이 없는 태우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 나름대로 잘나가는 능력의 소유자라 자신하고 있었건만 그에게도 감춰진 아픔이 있었으니. 매번 공들인 여자가 있었다한들 그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언제나 끝자락에 그 여인들에게 들은 말은 딱 세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태우야, 넌 정말 좋은 동생이야.'와 '태우야, 넌 제일 친한 내 친구야.' 그리고 '태우오빠, 오빤 정말 친오빠 같아.'


"씨방새. 나한테 반한 이유가 있었구만."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또다시 자아도취의 결론에 빠져버린 데니다. 슬픔에 사로잡혀있는 태우를 안쓰러이 바라보는 호영과 데니를 향해 그대로 쓰러져 잠들 것 같은 태우가 갑작스레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그 북적한 호프집이 떠나가라 한맺힌 절규를 늘어놓았다.


"나도 사랑 할래!!!!!!!!"


실로 박하사탕의 설경구 남부럽잖은 자태였다.


"윽-"


"괜찮아?"


"집에나 가. 귀찮게 따라오지 말고."


태우를 받치고 기우뚱거리는 데니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버스에 몸을 실은 계상을 따라 호영도 냉큼 버스에 올라타더니 왠일로 두 칸 뒤에 가 앉아 말없이 계상을 지켜봐줬다. 버스가 흔들려 속이 더욱 불편해진 계상이 정류장에 내려 집까지 걸어오는데도 몇번을 멈춰앉아 울렁이는 속을 달래려 애를 쓰니. 끝내 뒤따라오던 호영이 계상 곁으로 다가와 개입을 하고만거다.


"잠깐만 기다려. 물 사올께."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아 놓으려 안달이 난다. 저 놈 앞에서 조잡하고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는데. 이제사 뒤늦게 술기운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런지 자꾸만 다리 힘이 풀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후우- 공중으로 흩어진 입김이 따닥따닥 시멘트 바닥에 가 달라붙는 듯.


"여기, 물.."


유일마트 문을 밀어열고 와다다 달려오는 호영의 모습이 두 세겹으로 겹쳐보인다. 생수통을 따서 친절히 들이밀고 있는 호영의 모습에 계상은 말없이 물을 받아들고 입을 두어번 행궈냈다.


"토할래? 저기서 비닐봉지 얻어올 수 있는데."


"됐어."


토하고 싶었는데 호영의 한마디에 토하기 싫어졌다. 계상은 마트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간신히 기어가듯 걸어가 그 앞에 얼른 쭈구리고 앉았다. 가슴이 새까맣게 타버릴 것만 같다. 평소라면 잘도 떠들어대며 계상의 신경을 긁어댔을 호영이 가만히 계상 옆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그의 옆얼굴에 눈을 달아놓는다. 이왕이면 싸가지 없게 '눈 돌려'라 말하고 싶지만 그것마저도 너무 버거운 계상이다. 상태가 이리 안 좋아서야 한시라도 빨리 이 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어둬야할 것 같다. 지금은 너무 힘이 드니까. 조금만 정신이 들 때까지, 딱 10분만. 아니 딱 5분만.


투둑- 투두둑-


"어? 비온다, 계상아."


그럴 줄 알았어, 젠장. 계상의 흐릿해진 사고 안으로 들어오는 빗소리에 계상이 자꾸만 멍청해지는 눈을 들어 무릎에 닿아오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그러면 호영은 금새 굵어지는 빗방울에 얼른 몸을 일으켜 계상을 부축하고는 저만치 마트 옆에 있는 천막 밑으로 몸을 숨겼다.


투둑- 투두둑-


소나기처럼 보이는 빗줄기가 어느새 사정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천막 탓에 차가운 기운이 발끝에 닿아 두 사람의 운동화를 적시고, 바닥에 닿아 튀어오르는 물방울들이 바지 끝자락을 짙은 빛으로 물들여간다. 빗소리가 처량한 것도 같아 계상은 가슴을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러본다. 아직 심장은 제대로 달려있네. 금새 차고 들어오는 추억이 생겨버릴까봐 계상이 남몰래 조바심을 내본다. 애써 머리를 추스려 왜 이 녀석은 조용할까라는 생각을 할 때 즈음.


"너 그거 알아?"


"뭘."


무뚝뚝했을테지만 그래도 계상이 대꾸를 해주었다는 것에 호영이 금새 입가에 웃음을 걸어놓는다. 정말 바보같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호영이 빗방울에 눈을 박아놓고 계속 말을 잇는다.


"넌 수컷과 아이의 중간이야."


또다시 희한한 말을 짓거리고 있는 호영의 말에 계상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살짝 인상을 썼다. 수컷까지는 그렇다쳐도 대체 누가 누구더러 아이라 하는건지. 정말 어린애같은 게 누군지 몰라 저런 말을 해대는건가. 계상의 표정에도 굴하지 않고 호영이 빗방울을 벗삼아 또다시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막 투정부리는 사람 같아.
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초코 시럽이 안 뿌려져 있다고
막 짜증 부리는 꼬마들처럼 너 지금 그러는 거 같다구."


"내가... 투정을... 부려?
그래서...내가...아이 같다고..?"


투정이라니.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지금 제 감정을 한낱 투정으로 치부하다니. 더듬거리는 말투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계상은 쓴 웃음을 지어버리고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화란 걸 시도한 자체가 잘못이고 대꾸란 걸 해준 자신의 입을 원망해야 맞는거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는 건 어디 안 가네. 계상이 술기운에 알싸해져가는 혀끝을 입 속에 가둬두고 가만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마트 밖으로 새어나오는 빛에 의지해 깜깜한 공원 벤치에다 눈을 던져두고 으스스한 새벽 기운에 몸을 깊게 웅크린 채, 계상이 더뎌지는 눈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면 자정이 훌쩍 넘어버린 시간이다.

그녀가 떠나버린지, 아니 날 버린지 428일째.

어린 날의 어느 봄날로 기억한다. 학원에서 그녀를 보는 순간, 마음이 물보라를 일으키듯 설레였었다. 3개월을 학원강사가 아닌 그녀만 쳐다보았고 한달을 고민해 그녀에게 다가갔으며 5개월동안 그녀와 친구로 지냈다. 그리고 그녀와 7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계상이 아릿하게 남아있는 소주의 쓴맛을 목구멍으로 주워삼키며 허공으로 눈을 들어올린다.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할까. 이렇게 네 얼굴을 본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잊지 않고 애처로운 모습으로 앉아있으니, 너 내게 고맙다고는 말해줄까. 내가 널 기억하는 만큼 너도 날 기억할까. 눈이 아파 보이지 않고 귀가 멀어 들리지 않는 만신창이가 된 내 모습을 넌 알고는 있을까.


"계상아, 계상아."


뜬 눈으로 곱씹는 아픔같은 건 하지 못하도록 호영이 계상의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순간 얼기설기 엉켜가던 추억이 정지를 했는지 뚝 끊겨내린 생각 틈으로 빗소리가 전처럼 크게 들려온다. 계상은 아무렇지 않은 척 훗- 쓴웃음을 내놓으며 빗방울을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다.


"너 어지간히 사람 귀찮게 하는 거 아냐?"


"응. 우리 엄마도 맨날 내가 귀찮을만큼 옆에 붙어있다 그래."


"그럼 성가실 정도로 말 많은 것도 아냐?"


"응. 데니가 그러는데 내 입술은 하도 많이 치대서 두꺼워진걸거래.
그래도 난 얘길 많이 해야하고 얘기 하는 게 무지 좋은 걸."


"그럼 너.. 재수 없는 것도 아냐?"


기어코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리고 만다. 계상은 정말 투정을 부리는 어린애처럼 호영을 걸고 넘어지며 괜스레 시비다. 물론, 그런 것에 결단코 상처입을 호영이 아니라는 확신도 있기는 했다.


"그건 내가 재수없는 게 아니라
니가 내 맘에 들어버린 게 재수 없는 일인거야.
그러니까 가엾게도 니가 나한테 찍힌거라구."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제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화라도 좀 내주면 좋으련만 어찌 저 녀석은 저리도 단단하여 뚫기가 어렵기만 한건지. 계상이 그제야 졌다는 듯 픽- 웃음을 내놓고는 어이가 없었는지 호영을 셀쭉히 바라봤다. 그러면 호영은 씨익 소리없는 웃음을 얼굴 가득 잡아넣으며 난데없는 이야기를 꺼내든다.


"태우냐. 나 오늘.....차였다."


뭐지. 호영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 빗소리가 너무 큰 탓에 저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깜빡 잘못 알아 듣고 있는 게 틀림없다. 계상은 멀뚱멀뚱 눈을 크게 껌뻑이며 호영을 굳어진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면 호영이 답지않게 차분한 미소를 보이며 그리 말하는거다.


"그 때 나 너 봤었어.
아마 난 그 때부터 니가 좋았을거야.
단박에 알아봤거든. 니가 많이 외롭다는 거."


말도 안되는 소리. 어디서 듣고와서 헛소리를 주절대는건지. 계상이 내려앉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원위치 시켜놓고 멍해진 머리를 그대로 놓아둔다. 적어도 이 어이없는 녀석과 있으면 그녀 생각따위가 좀 덜해질까 싶었는데, 이 녀석이 먼저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든거나 다름없는거다. 계상은 기가 막힌 탓에, 가장 깊숙히 넣어두었던 치부를 들킨 것 같은 야릇한 창피함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넌 처음부터 그렇게 적극적으로 내 앞에 나설 수 있었던건가.


"계상아."


"시끄러워."


제 이름을 습관처럼 두 번 부르기도 전에, 계상이 호영의 입을 가로막았다. 더이상은 아무 말도 떠들지 말고 아무런 것도 아는 채 하지 말고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내버려두라고. 계상이 낮지만 단호하게 호영을 막아세웠다. 시끄러운 거... 질색이랬잖아.


"그 사람 기억이... 지독한 치통처럼 아픈거야?"


말도 더럽게 안들어먹는 자식. 희한한 말들로 내 정신을 교란시켜 무어라도 얻어내려하는 수작에 불과한 짓들. 계상은 발칵 뒤집혀버린 속을 견디기가 힘든 듯 한 손으로 니트를 부여잡고 깊게 인상을 썼다. 그런 계상에게 아랑곳 없이 호영이 또다시 제 생각들을 빗방울에 실어보낸다.


"기억은 언젠가 희미해져."


"잡소리 치워."


"정말이야, 우리 엄마가 그랬어."


"닥치지 못해?!"


화가난 듯 잔뜩 성을 부린 계상이 쉴새없이 쏟아져내리는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 호영의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더 듣는다면 이대로 폭발해서 무슨 말을 쏟아낼 지 알 수가 없다. 그녀에 대한 울분마저 토해낼 자신이 너무 두려워서 계상은 마지막 한가닥의 이성에 매달려 비틀거리는 걸음을 내놓았다. 얼굴에 차갑게 와닿는 빗방울이 정신을 차리라고, 다 잊어버리라고 애원을 하는 것 같다. 휘청이는 계상을 말없이 바라보던 호영이 어느새 달려와 계상의 팔목을 낚아챘다. 그러면 계상은 치를 떨며 호영을 거칠게 뿌리쳐 버린다. 호영은 그런 계상을 바지런히 뒤쫓아 또다시 계상의 팔목을 잡아세운다. 계상의 매달려 있던 한줄기 이성이 그새 도망을 가버렸는지.


"난 아직도 사랑해.
무슨 소린지 알아 듣겠어?!
난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구, 이 새끼야!!!"


계상이 호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꽈악 움켜쥐고는 아무런 과장도 덧붙이지 못한 채 제 심정을 그대로 고했다. 전부 다... 술기운 탓이다. 너무도 많은 사연이기에, 말의 한계로는 표현이 모자라서 이유같은 건 말할 수도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한동안 조용하던 호영이 제 얼굴을 쓸어쥔 계상의 손을 살살 매만져주다 담담한 한마디를 내놓았다.


"내가 싫으면, 그런 표정 들키지 마."


심하게 흔들리는 계상의 눈빛이 순간 갈피를 잃었다. 단번에 계상의 호흡을 아주 쉽게 날려버리는 녀석. 계상의 손이 투욱- 떨어져내리더니 이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빗 속에 멍청히 서있다.

내 속에 든 그녀를 종이처럼 구겨버릴 수가 없어.


"계상아, 계상아."


잊어야 하는 너보다도 잊지 못하는 내가 힘들어서... 계상이 빗소리에 파묻히는 호영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오래된 친구놈에게 조차도 단한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나에겐 위로같은 건 전혀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 사랑은 내 초라한 품 속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는데. 난 지금 너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게 맞는지도.


"너... 아직도 날 사랑하는거냐."


"그럼, 당연하지."


똑같은 물음에 똑같은 대답. 참 쉽게도 나오는 대답에 계상이 조소를 터뜨리다 이내 사그라뜨린다. 넌... 이런 게 재밌니.


"김치가 없으면 라면 안 끓이는 게 난 것처럼
너 없이는 사랑 안 하는 게 나아."


호영의 말에도 아무런 동요 없이, 깊게 패인 얼굴에 어둠이 잔뜩 베어나는 계상이 빗물에 이미 젖어내린 머리카락을 쭈욱 올려넘겨본다. 젖을대로 젖어 무겁게 내려앉은 옷이 자꾸만 몸을 가라앉히고 있는지. 계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호영에게 눈을 맞췄다. 전부 다... 술기운 탓이다.


"나 너한테 건망증을 선물한거야.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증을 선물해줄께.
그러니까 첫눈오기 전까지 그 사람 잊게 해줄께."


생일선물 한번 거창하다, 손호영. 몸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다가 어느 순간 돌연 현실로 찾아와 고함을 지르게 하는 기억들인데 너... 무슨 수로 그런 자신을 하니.

7년간 함께해온 사람인데 고작 7주를 넘어가고 있는 호영이 허락없이 찾아와 자신의 마음을 헝클어뜨리는 느낌에 계상은 버티고 버텨온 모든 게 무너져버린 것만 같아 억울하다.


"넌... 농담을 진담처럼 해."


호영의 야릇한 말버릇을 이상하다 탓하며 계상이 쓸쓸한 웃음을 입가에 내놓는다. 순수와 띨빵의 경계에 있는 놈이 필요악과 필수 불가결의 사이가 되겠다 자청했으니 이제 어떡해야 하나. 계상이 조금씩 잦아드는 빗줄기에 흠뻑 젖은 얼굴을 들어 호영을 바라봤다. 그러면 호영은 하나 떨림없는 표정으로 잔잔한 웃음을 입에 달아놓고 있는거다. 비가 내리다가 그쳤다. 그냥 누구에게라도 안길려다가 계상은 끝내 그러지 못했다. 전부 다... 술기운 탓이다.

네 머리꼭지만 봐도 금새 속이 뒤틀려버리는 나인데, 아직도 잊지 못해 혼자 열병을 앓고 있는 나인데,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진부하고 촌스러운 나인데. 엉뚱한 말을 잘도 짓걸이고 수다스럽기 그지 없는 너인데, 사랑같은 건 평생가야 해보지도 못한 철부지같은 너인데, 아무나 사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 마냥 웃기만 하는 너인데. 지독히 외로워 무언가 같이 한다는 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리인데.


"농담같은 진담이야."


손호영, 널... 믿어도 될까.

제 4장,


.........................??

김태우 = 필름이 끊겨버린 기억 제로 상태


<05>

step by step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 ... 제 5장

"싫어."


"계상아, 계상아."


"글쎄 싫다니까."


손이 무지하게 많이 가는 섬세한 모형 자동차의 틀을 끼워맞추며 계상은 아예 고개를 세우지도 않는다. 대개 이런 것들을 조립할 때면, 본드가 덕지덕지 새어나오고 여기저기 잘라낸 필요없는 플라스틱 조각들이 나뒹굴며 종이비닐과 조립제품이 뒤엉켜 요란하고도 지저분한 광경을 연출하기 마련인데. 역시나 정리정돈의 살아있는 전설 윤계상은 콩알만한 플라스틱 하나 떨어뜨리지 않은 채 노련한 손놀림으로 자동차 모터를 다는 데 온갖 신경을 집중. 혹시나 계상의 물건에 손을 댔다가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태우는 쇼파에 앉아 계상의 옆에서 연신 무언가를 졸라대고 있는 호영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들이 보기엔 별반 다를 것 없는 계상의 싹수 노란 개무시처럼 보일테지만 태우는 분명 생일 이후로 계상이 호영의 물음에 퉁명스럽게나마 꼬박꼬박 대꾸를 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계상아, 계상아."


"난 안 해. 집중 안되니까 저리 좀 가라."


그녀를 잊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지. 하지만 그런 것이 인력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계상은 자꾸 자신에게 맡겨보라 큰 소리를 떵떵치는 호영의 억척스러운 태도에 똥고집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이제 슬슬 친구같은 태가 나긴 하는건지, 태우는 아웅다웅거리는 말이 셔틀콕처럼 왔다 갔다 하는 걸 바라보다 호영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조금은 달라져 보이는 계상의 태도에 무슨 일이 있었냐 물었더니 호영은 마냥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계상이가 나한테 화냈어. 그래서 너무 좋아.'라 말하고는 폴짝폴짝 온 복도를 뛰어다녔다. 그리고는 괜찮겠냐, 자신있냐 또다시 묻는 태우에게 여전히 밝지만 가볍지 않은 얼굴로 그리 대답했다. '문제 없어.' 라고.


"머리색도 내가 말한대로 파뿌리처럼 바꿨자나.
그래놓고 왜 싫데? 응응?"


"니가 분명히 죽겠다고 공갈협박 했어.
그리고 뭐? 파뿌리? 비유법 좀 다시 배워라."


호영의 '문제 없어'란 말에 그 효과가 나타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로 이틀 뒤에 계상이 초강력 울트라 대변신을 해서 등장했다. 정갈하고 깔끔한 이미지로 먹고 사는 놈이 숯검댕이처럼 검은 머리칼을 푸른 빛이 감도는 회색빛 머리로 홀랑 염색을 하고 강의실에 들어선 게 아닌가. 날라리 양아치 티가 어지간히 나는 계상을 못 알아보고 지나쳤던 태우는 강의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 왜 수업에 안 오냐 계상에게 전화까지 하고 말았다. 분명 머리색을 물들이자 제안한 것은 호영이었을테지만, 계상이 호영의 말을 순순히 들어준다는 것은 하마가 다이어트하다 객사한 것보다 적은 횟수일텐데. 물론 호영이 한차례 창호지 자살법을 다시 한번 시도함으로써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게다가 분무기를 까먹고 안가져 온 호영이 학생식당에서 빌린 주홍 바가지에 물을 퍼갖고 와서 창호지로 가린 얼굴 위에 뿌리겠다 협박을 해버렸으니 계상도 검은 머리를 넙죽 내주는 수 밖에. 그런 와중에도 파뿌리라는 단어가 영 거슬렸는지 호영의 지식수준을 탓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계상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옛 현인들의 말씀도 있잖아.
괜히 속담이라는 게 생기는 건 아닐거구.
오백원 이상 남을지도 모른다니까.
너 지금 오백원은 갖고 있는 거니까. 응응?"


"시끄러워."


"넌 진짜 무섭게 생겨서는 소심하게 겁도 많구나?
너 지금 눈이 보송보송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줄까봐 울고 있는 어린애같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도 있지. 태우는 끈질기게 계상을 공략하고 있는 호영의 빈틈없는 말솜씨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흐믓한 미소를 짓는다. 본드칠을 하는 계상의 손이 연신 헛나가는 걸 보니 오늘도 계상의 짧디 짧은 단어들은 호영의 우직함 앞에 무릎을 꿇게 되려는가보다. 오랜동안 친구놈을 보아왔고 그래서 그만큼 저 놈과 나눈 것이 많다고 알고있고 그래서 친구놈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확신했건만, 그런 건 오만이었나. 태우는 잔뜩 꼬여서 엉켜있는 실타래를 가슴 한구석에 꾹꾹 눌러담아놓은 지금까지의 계상이 조금은 누그러져 보이는 것 같아 어쩐지 자신의 보수적인 기질이 원망스럽다. 그래도 깐따비아에서 지구로 온 보람은 있게스리 둘리의 초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매일매일 더해지고 있으니까. 태우는 정신집중에 심한 태클을 받고 있는 계상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너 제발 좀 나가라."


"그럼 내가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약속해."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나가."


"사랑은 내가 2인분 한댔잖아.
그리고 넌 사랑 빼고 다 해주기로 했잖아."


"난 동의한 적 없어."


"그럼 지금 동의해. 응응?"


거머리도 울고 가고 송충이도 형님할 끈질긴 호영의 끝없는 협박 비스므레한 매달림에 계상의 손이 끝내 헛나가 본드칠을 한 모터가 전혀 예상치 못한 뒷바퀴에 떡하니 붙고 말았다. 본드 자국이 남는 모형 자동차를 윤계상이 만들었다는 것은 용납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구질구질한 현실인지라 계상은 질끈 눈을 감았다 번쩍 치켜뜨며 호영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러면 호영은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계상의 대답을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앉아있는거다.


"빨리 나가."


"수업 가게 빨랑 대답해줘."


"너 진짜 말 안 들을거냐."


"대답해주면 말 잘 들을께."


쿵- 계상이 짜증스러운 듯 탁자를 주먹으로 매섭게 내리치는 바람에 깜짝 놀란 호영의 몸이 화들짝 들렸다 내려앉는다. 쇼파에 몸을 기대어 책을 읽는 척 두 사람을 관찰하던 태우도 또다시 호영이 멱살을 잡힐까 싶어 막을 태세로 신속하게 준비를 마친 상태고. 계상이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이 동그래진 호영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이내 포기의 자세로 돌변하고 만다. 이것이 녀석의 수다를 저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므로.


"알았으니까 빨리 나가라." 


"응?"


"알았으니까 수업이나 가."


"정말? 니가 알았다는 건 동의한다는거지?
으와~ 계상아, 나 무지무지 좋아.
산타 할아버지가 울지도 않은 나한테 선물 준 거 만큼 좋아."


짝짝짝 다섯 손가락을 쫘악 펴고 박수를 딱 세번 치는 호영의 수선스러운 말주변에 계상은 시끄러워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했고, 이내 수업에 10분 이상 늦은 호영을 끌어일으켜 문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계상에게 조용한 안식의 평화가 도래한다. 그래도 대한의 남아답게 굳세게 자리를 지켜앉아 호영에게 끝끝내 항복을 외쳐버린 계상의 모습에 예전 남의 부탁을 절대 거절하지 못하던 따뜻함의 소유자 계상을 떠올리며 태우도 이제사 늦은 수업에 들어가볼까 몸을 일으켰다.


"너도 수업이었냐."


본드를 후후 불며 여전히 모형 자동차에 열을 올리고 있는 계상이 무심한 듯 태우에게 툭- 예의 그 말투로 짧은 인사를 건낸다. 아마도 자신만큼 수업시간을 꼬박꼬박 잘 챙기는 태우가 왠일인가 싶어 괜한 물음을 던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너 요즘 좋아보인다. 넌 잘 모르겠지만."


태우는 출석체크가 한번 안된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듯 동방 문을 열고 나가며, 띵한 표정으로 제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을 친구놈에게 손을 들어보인다. 분명 호영이 그랬다. '문제 없어.' 라고.


끼익-

발칵 열리는 문소리에 1시간여쯤 집중을 하며 모형 자동차를 반쯤 완성해가던 계상의 평화가 깨져버린다. 이제 막 아까 붙이려다 실패한 모터를 달려 했건만 야속하게도 들어오자마자 쇼파에 제 뼈다귀같은 몸을 묻어버리는 안데니가 눈에 들어와 박혔으니. 계상이 관심없는 듯 다시금 모형자동차에 고개를 박고 본드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계상에게 시비걸기, 태우에게 윤계상 씹어대기, 손호영 꼬득여 윤계상 엿먹이기가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린 데니가 이대로 조용히 계상을 놓아둘리 만무하다.


"너 왕따냐."


비실비실 비웃음을 날리며 역시나 오늘의 선빵도 데니의 몫이다. 그러면 계상은 의례 그러려니 하며 여전히 주무기인 개무시를 내놓을까 하다 이내 고개를 들고 데니를 향한 한마디를 던져낸다.


"왕따나 번외나."


데니의 치욕적인 별명을 들춰내며 계상이 고개를 비스듬히 올려 데니를 거만하게 내려다본다. 그러면 데니는 파르르 떨다 못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분루를 주워삼키며 주먹을 단단하게 말아쥐는거다. 오늘 있었던 테니스 수업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했건만. 데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계상이 개겨보라는 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응한다. 아무리 재수 없는 말을 던져내도 눈하나 깜짝 않는 호영과 달리,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금새 흥분시킬 수 있는 데니라서 계상은 그간의 서러움을 데니에게 쏟아내고 있는 듯 하다. 정말 사내놈들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지만, 아무튼 두 사람의 눈빛 사이엔 묘한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음은 분명했다.


"개쉐, 호영이를 이제 그만 나한테 넘기시지."


"재주 있으면 니가 데려가."


데니가 못참겠다는 듯 발딱 몸을 일으키더니 니가 아직 내 힘을 몰라서 그래..란 얼굴로 강하고 무서운 표정을 한껏 지어보인다. 그리고는 괜스레 캐비넷을 탕탕 손으로 때리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려 무진장 애를 써보지만, 계상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심드렁하게 바라볼 뿐.


"얼짱도 아니고 얼갱이 주제에 감히 빙신을 넘보다니.
너 화장 안하고 그렇게 이쁜 거 본 적 있냐. 어이??"


대체 누가 누구를 넘봤다는건지. 상황 파악이나 좀 제대로 해주면 좋으련만. 게다가 얼갱이라는 단어는 듣도보도 못한 단어. 문맥상 파악을 해보자니 아무래도 얼짱에 반대되는, 생긴 것도 별 거고 볼 거 하나 없다는 뜻인 듯 싶다. 왕따에 얼갱이까지 그래도 한 인기 한다는 윤계상의 존심에 먹칠을 하는 수식어들이지만 계상은 이젠 그런 것도 익숙해졌는지 데니를 어떻게 한 방 먹일까 머리 속으로 가장 강력한 방안을 구상 중이다. 그러면 조용한 계상이 괘씸한 듯 데니는 더 크게 궁시렁거리며 계상을 향한 독기어린 눈매를 풀 생각을 않는거다. 오늘은 북두신권에 이은 소림권법이라도 선보이려는지. 데니의 수선스런 팔동작과 더불어 딸려나오는 아다다다- 라는 말소리를 들으며, 계상이 데니의 팔이 닿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후빵을 날려버린다.


"화장 한 것들 중에도 그렇게 이쁜 거 못봤다."


도망다니느라 호영의 외모가 이쁘네 어쩌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계상이지만 이것이 초강력 핵주먹보다 더 센 효과를 낼 수 있으니까. 으엥? 하는 데니의 표정에 금새 허걱- 하는 표정이 자리잡는다. 호영이 아니고서야 저 놈의 악착같은 집착을 물리칠 방법은 없다. 처음으로 계상의 입에서 호영에 대한 평가가 내려지는 순간, 데니는 큰 에네르기라도 맞은 듯 처절함과 비통함에 사로잡혀 금새 계상에게서 몇발자국 물러났다. 호영에 대해 호감을 나타내는 말을 중얼거렸으니 그 배신감은 또 오죽하랴. 물론 호영에 대해 개무시의 발언을 했어도 데니는 검은 기운을 온사방에 내뿜었을테지만. 데니의 충격먹은 표정에 만족스러운 듯 계상이 보이지 않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계상은 승리의 브이자를 마음 속으로 마구 날리며 다시금 관심 없는 척 달려다 만 모터를 집어들었다.


"그 새끼.. 외로운 놈이야."


데니는 배반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표정을 짓다, 이내 계상에게 무거운 말투로 그리 말한다. 본드칠을 마친 계상이 이내 고개를 들어 데니를 바라보면 데니는 여전히 작지만 강단 있어뵈는 주먹을 들어보이며 말을 잇는거다.


"그 새끼 울리면, 내 손에 죽는다."


검지 손가락으로 계상의 얼굴을 똑바로 가리키며 데니가 하나도 무섭지 않은 협박을 내놓는다. 그래도 어쩐지 조금은 쓸쓸해보이는 데니의 말투에 계상도 마음 속으로 짓던 웃음을 거둬내고 데니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면 데니는 '그렇다고 내가 빙신을 포기했다 생각하면 오산이야, 개쉐.'라 검지 손가락을 가운데 손가락으로 사정없이 바꾸더니 이내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는거다. 동방 한가운데 앉아있던 계상이 갑작스레 찾아온 조용함에 멍청히 앉아있다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다시금 본드칠을 한 모터를 차체에 가져가려는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며 고개만 빼꼼히 들이민 번외 안데니가 외치길.


"야, 개쉐. 근데 니 머리 코딱지 색깔인 거 아냐?"


쾅- 닫히는 문소리와 더불어 1톤짜리 돌덩이를 머리에 맞은 듯한 계상의 손이 이번에는 모터를 자동차 앞바퀴에 떡하니 붙여놓고 말았다. 왕따에 얼갱이라 그럴 때 입다물고 있을 걸. 파뿌리라 그럴 때 그냥 가만 둘 걸. 후회막급 계상이다.

[주인님~ 전화받으세요~]


간드러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세번쯤 반복되서야 계상은 진득 눈을 떴다. 대체 지금이 몇시지? 깜깜하게 불빛 하나 없는 방 안이 한참 밤 중이라는 걸 인식시켜주는 듯 하여 계상은 하늘빛을 깜빡이며 단잠을 깨우고 있는 전화기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여보세요."


[계상아, 계상아. 지금 뭐해?]


"너 지금이 몇신 줄 아냐."


계상이 베게에 머리를 반쯤 파묻으며 피곤한 기색을 내비친다. 여전히 낭낭한 목소리의 호영이 일어나라 조르는 데에 내일 얘기하자고 달래며 끊어버렸다. 그러나 이에 굴할 손호영이 아니지 않은가. 또다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핸드폰 밧데리까지 빼어놓았으나, 이내 서리 내린 새벽녘에 집으로 전화를 해서는 끝내 계상을 기겁하게 만든 호영이다. 게다가 '날아라, 태권브이'까지 귀따갑게 열창을 하는 바람에 계상은 어쩔 수 없이 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새벽 다섯시를 넘어가는 시간에 만나자는 호영의 제안을 수락할 수 밖에 더는 할 것이 없었다. 계상이 스웨터에 점퍼를 걸치고 문밖을 나서니 이미 집 밖 가로등 밑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주홍색 후드티의 모자까지 뒤집어 쓰고 추위를 달래고 있는 호영이 보인다. 대체 이 시간에 무슨 일인지. 계상이 자꾸만 내려앉는 눈을 비비며 내려가니 호영이 잔뜩 부어오른 눈을 접어 베시시 웃으며 계상의 손을 이끌고 열심히 어디론가 가는거다.


"어디 가는거냐, 이 시간에."


"넌 아주 외로울 때, 그러니까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해?
태우도 깨우기 미안한 시간이고
엄마가 걱정할까봐 말하기도 뭐하면 어떻게 하냐구."


"............."


"난 그럴 때 깡총이랑 얘기하거든.
아, 깡총이는 우리집 토끼야. 내가 접때 말했었는데."


"그래서?"


슬슬 동이 터오는 이른 시간에, 그것도 쌀쌀한 바람까지 만만치가 않은 마당에 굳이 호영의 수다를 들어주고 있는 것이 영 못마땅해서 계상은 토끼따위엔 관심없다는 표시를 내보였다. 그럼에도 호영은 걸음을 늦추지 않은채 계상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거다.


"그래서 깡총이를 소개시켜줄까 했는데
넌 토끼는 털 날린다고 싫어할 것 같아서.
너 혼자이거나 무지 외롭거나 할 때
그 사람 생각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생겨날 거 아냐.
그러니까 뭐라도 얘기할 상대를 찾아서 외롭지 말아야지."


털 없는 미끈한 물개라도 소개시켜 주려는건가. 계상은 이제 남들이 할 수 없는 상상의 경지에 이르러 호영의 알 수 없는 행동을 파악하려 애를 써본다. 몇블럭쯤 걷고 또 걸어 발이 아프다 싶을때 쯤, 호영이 작은 문을 가리키며 가만히 웃는다. 계상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호영이 칠이 다 벗겨져가는 작은 문을 열고는 계상을 끌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거다. 마당이라 하기엔 비좁은 공간에 어정쩡히 서있는 계상을 끌어앉히며 호영이 똑같은 자세로 문을 마주보고 쪼그려 앉았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니까. 계상이 호영을 툭치며 말을 해달라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러면 호영은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쉿- 하더니 이내 대문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거다. 그런 호영의 모습에 계상이 흠- 짧게 숨을 내쉬고는 호영처럼 대문을 쳐다보고 있으면, 조금 뒤 부시럭 거리며 건너편에서 대문 밑으로 비닐봉지와 함께 요구르트가 배달되는 게 아닌가. 그 때를 놓칠세라 호영이 대문의 상대편에게 말을 건낸다.


"누구세요?"


그러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 상대는 친절히 물음에 답을 달아준다.


"요구르튼데요."


호영이 흡족한 듯 계상을 보며 활짝 웃는다. 이것이 일명 요구르트와 대화하는 방법이라나. 계상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지라 그대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저런 발상으로 이 나라에 버젓이 발을 붙이고 사는건지.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치고는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그렇게 벙찐 계상의 표정에 상관없이 호영은 배달된 요구르트 두개 중 하나를 따서 계상에게 건낸다. 그리고는 달콤한 요구르트의 뒷구멍을 이빨로 뜯어내리더니 쪽쪽 빨아먹으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요구르트가 싫으면 우유나 신문이랑도 얘기할 수 있으니까 걱정마."


"빨랑 해."


"싫어."


"왜 싫어? 다 해준다고 약속해놓고."


차마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뻐때기는 민망한지라 계상은 입을 꽈악 다문 채 짜증스러운 듯 머리를 박박 긁어댔다. 그런 계상의 모습을 비유하길 '저 새끼, 코딱지 파네.'라며 데니는 창창히 밝아있는 아침해에 하루 일과를 조금 일찍 시작하려는가보다. 태우를 제외한 세 명이 다 수업이 일찍 있는 터라 아침부터 전쟁을 치르기엔 하루가 어지간히 피곤할텐데. 그럼에도 호영은 동방에 들어와 계상을 보자마자 커다란 쌀튀밥 한봉지를 들이밀며 말도 안되는 제안을 덜컥 내놓았다.


"진짜 안할거야?"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냥 숫자만 셀 줄 알면 되는 데 뭐.
꼭 말이 될 필요가 있는거야?"


역시나 저 놈을 믿은 게 천치. 그녀를 잊게 해준다더니 개코나 잊을 수 있을려나. 아침에 요구르트랑 놀아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냔 말이다. 계상은 난데없이 쌀튀밥을 들이밀며 '그 사람 생각날 때마다 이게 몇갠지 세는거야. 틈만 나면 세야해. 그래야 그 사람 생각할 겨를이 없지.' 라 말하기도 민망한 대안을 내놓은 호영을 탓할 기운도 없어 그대로 의자에 앉아버렸다. 무시하다 안되서 도망다니고, 도망 다니다 안되서 싸워도 보고, 싸우다 안되서 포기하는 심정으로 조금만 받아주자 했는데 이 놈이 이제는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려는지. 누굴 구워삶아 먹으려고 이따위 유치하고 되도 않는 제안을 함부로 남용하는가. 계상은 괜한 짓이었다, 어리석은 기대였다 자신을 질책하며 호영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러면 호영은 볼이 톡하고 튀어나오더니 이내 가방을 뒤적거리며 작은 물병 하나를 꺼내놓는거다.


"뻥튀기 세다가 지루하면 이거 마셔."


기억을 잊게 하는 약이라고 우기기라도 할 놈이니까. 투명한 물병 새로 비추는 푸르스름한 초록빛이 베어나는 야릇한 색감에 계상이 물병을 들어 뚜껑을 열어본다. 그리고는 코를 훅- 하고 찌르는 자극적인 냄새에 이내 인상이 팍 일그러졌으니. 이게 대체 뭐야.


"물 두 컵에 소금 한 주먹, 와사비 다섯 무대기,
그리구 식초 되는대로 넣은거야.
그 사람 생각날 때 이거 마셔 버릇하면
그 사람 생각하는 게 싫어질테니까 두고봐."


이상하고 야릇한 논리를 줄줄이 늘어놓으며 이번엔 난데없이 냄새만 맡아도 거북한 이 연두빛 물을 들이키라하니. 상상만 해도 우습지 않은가. 쌀튀밥 세다가 연두빛 물 마시다 하는 어이없고 자폐아같은 모양새가. 계상은 얼른 뚜껑을 닫으며 그만 치우라는 듯 호영에게 쌀튀밥과 물병을 건내주고만다. 도무지 맞춰줄래야 맞춰줄 수가 없는 정신사상의 호영이라서, 계상은 마음을 접고 괜한 짓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아무리 좋게 봐줄래도 그럴 수가 없는 녀석임에는 의심의 여지도 없다. 그런 계상의 무뚝뚝한 표정에 호영이 아쉬운 듯 볼이 조금 더 통통하게 부풀더니, 조금 뒤 얼굴에 화색이 돌며 탁자 위에 놓인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체 뭘하는건가 싶어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데니와 계상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훤하게 놓여있는 탁자를 호영이 만족스럽게 바라본다. 그리고는 쌀튀밥을 뜯어 촤라락- 탁자 위로 전부 다 쏟아내는 게 아닌가. 입이 쩌억 벌어진 계상이 믿기지 않는 듯 호영과 작은 알갱이를 전부 토해낸 비닐봉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강박의 결벽증도 마다않을 윤계상에게 이는 청천벽력과 다름 없는 바. 어디 니가 치우지 않고 베기나 보자는 심보로 크나큰 승부수를 던진 호영이 씨익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금새 데니를 데리고 나가버린다. 계상이 넋이 나간 채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쌀튀밥에 허우적대는 파뿌리 아니 코딱지만 남아버린거다.


"호영아, 밖에 누가 찾아왔다."


하얀 앞치마에 하얀 모자, 하얀 유니폼까지 갖춰입은 호영이 무거운 접시들을 연신 닦아내리다 저를 부르는 카운터의 동태눈 사장의 목소리에 그제야 굳어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오전에 수업이 하나 밖에 없는 날이라 평소보다 일찍 일하고 조금 일찍 끝날 수 있는 날이라 아마도 데니가 저녁밥을 챙겨주러 찾아온 모양이다. 호영은 그리 생각하며 빨간 고무장갑을 벗어 물기를 탁탁  털며 밖으로 나섰다. 쌀쌀하게 코 끝을 에이는 바람에 호영이 콧물을 훌쩍이며 종종걸음으로 앞치마를 벗어내림과 동시에 저만치 보이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입을 귀에 걸어놓고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어? 저게 누구지?

호영이 당황한 듯 멍청히 바라보고 있자니, 저만치 있던 그림자가 휘익 하고 돌아서 성큼성큼 호영에게로 다가온다. 말똥말똥 그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호영의 눈동자로 비친 사람은 호영의 예상과 달리, 전혀 예상 불가능한 단 한 사람 계상이었다. 호영은 놀란 눈으로 혼이 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다가오는 계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계상은 그런 호영의 손에 물통과 쌀튀밥을 툭하고 쥐어준다. 아마도 데니에게 호영이 일하는 곳을 물어봤을 것은 당연지사. 그러면 왜 이곳까지 직접 방문한 것인지. 못하겠다고, 도저히 못해먹겠다고  불만을 토로하러 왔나, 아니면 이런 거 또한번 시키면 가만 안 두겠다 경고를 주러 왔나. 호영이 제 손에 들린 물건을 잠깐 바라보다 계상에게 눈을 맞췄다. 그러면 계상은 무뚝뚝함을 잔뜩 덧발라 그리 말하는거다.


"찌꺼기 빼고 4238개."


입이 반쯤 벌어진 호영의 넋나간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계상이 금새 몸을 돌려 멀어져간다. 단지 저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란 말인가. 호영은 제 손에 들려진 비닐봉지에 깨끗하게 들어가있는 4238개의 쌀튀밥과 1/5 쯤 비어있는 물병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아마 이걸 세느라 혈안이 되었을 계상은 수업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동방 구석에 앉아 쌀튀밥 개수를 세는데 하루일과를 전부 쏟아야만 했을거다. 단지 호영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을테지만, 어찌되었든 이걸 세는동안 그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호영은 벌써 한웅큼 멀어진 계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소리쳤다.


"계상아, 계상아."


저만치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슬쩍 뒤돌아서는 계상에게 호영이 헤실 웃으며 입을 연다.


"나 10분 있으면 끝나니까 쫌만 기다려주라. 응?"


계상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총총총 가게로 뛰어들어가버린 호영이었다.

"아줌마, 붕어빵 천원어치 주세요."


그러면서 '너랑 같이 먹을라구 맨날 참았어.' 라 소근거리며 호영이 주머니에서 뒤적뒤적 때묻은 천원짜리를 건내고는 천원에 세개하는 붕어빵을 받아든다. 보통 천원에 네개하는 곳도 많은데. 계상은 건너편에 보이는 붕어빵집도 있는데 왜 굳이 다른 곳보다 비싼 이 곳을 호영이 찜해놓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250원 때문에 뭐라뭐라 호영에게 말을 건낸다는 것마저 피곤한지라, 뻥튀기를 세느라 뻣뻣하게 굳은 목을 쭈욱 돌리고는 다시금 걸음을 재촉한다.


"이거 먹어."


"됐어, 너나 많이 먹어라."


"니가 지금 이거 안 먹으면 나는 기다리던 프로그램이
특집방송으로 짤린 것처럼 아주 많이 섭섭할거야."


오늘 하루 이 녀석 때문에 고생한 것이 얼마인가. 계상은 더이상의 다툼은 자신의 피곤함을 가중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내 붕어빵을 받아들고 말았다. 호영도 얼른 봉투에서 따끈한 붕어빵을 꺼내 호호 불며 맛나게도 한 입 베어먹는다. 이대로 그냥 집에 가는 것도 우습고 누가 누구의 집에 누구를 데려다주는 것도 안 어울리고 해서 계상은 호영을 기다리는 10분동안 태우에게 연락을 했다. 저녁이나 함께 먹던지 아니면 농구나 한게임 뛰던지 호영과 함께 갈거라 그냥 되는대로 둘러쳐놨다. 몇정거장 안되는 거리를 지하철로 금새 이동하며 호영이 하나남은 붕어빵을 보더니 이내 살금 웃는다. 그리고는 머리와 꼬리를 반으로 잘라내더니 불쑥 계상의 얼굴로 붕어빵을 들이미는거다. 또다시 안먹겠다 하면 귀가 시리도록 이 녀석의 잔소리를 들어야겠지. 계상은 짧게 생각하다 호영이 내미는 반쪽짜리 붕어빵을 받아들었다. 그러면 호영은 신이나서 입이 함박 벌어지며 남은 꼬리부분을 맛있게 먹는거다. 굳이 천원에 세개하는 붕어빵을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었던건가. 어쩐지 문득,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은 바보같은 느낌인지. 계상은 아무래도 피곤한 탓에 정신이 나갔다 생각하며 팥이 묻어난 머리부분을 한 입 베어문다. 비싼거라 맛도 좋네.


"그건 뭐냐."


"전화번호부."


전화번호부를 무슨 재미난 소설책이라도 되는 냥 꼬옥 끌어안고 나서는 호영을 보며 계상은 지하철 역 계단을 무심히 올랐다. 이것도 가끔 보면 재밌어...라고 말하는 호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굳이 이 세상에 읽을 책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한마디 던지고마는 계상이다. 그런 계상의 핀잔 섞인 이야기마저 좋은지 호영은 전화번호부를 더 세게 끌어안고는 계상의 걸음을 따라 쉴새없이 발을 놀린다.


"와아- 하늘이 무지 까맣다. 그치?"


호영이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리며 까맣게 내려앉은 밤하늘에 기분이 좋은 듯 중얼거린다. 그러면 계상도 호영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조금 늦어진 걸음도 상관 없는 듯 밤하늘을 바라본다. 별다를 것 없는 그저그런 까만 하늘.


"어둠은 시각의 호흡 정지 같애."


또다시 희한한 녀석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눈동자가 숨을 멈춘 것 같다는 호영의 해석에 계상은 밤하늘이 담고 있는 어둠이 조금 달라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비유법을 다시 배워야하는 건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뭘 그렇게 보냐?"


"별이 예쁘잖아."


여전히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려 목 아래로 찰랑거리는 노란 머리칼을 잠깐 바라보던 계상이 호영의 말에 이제는 하늘에 있는 반짝대는 별로 시선을 돌렸다.


"별은 아무에게도 차별하지 않아서 좋아."


어린애들이 읽는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를 저리 아무렇지 않게도 하는 녀석. 계상은 매번 시시하게 느껴지던 별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언젠가 태우가 말한 깐따비아 별을 찾아볼까 하는 유치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렇듯 밤하늘 별구경이란 걸 처음 해봤다. 그리고, 하늘에 박혀있는 별이 예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계상아, 계상아. 너 그것도 해줘야 하는데."


"그것도?"


"매일 나한테 그 사람 얘기 하나씩 해야해."


"뭐어?"


감춰둔 것이 많아 가끔은 홀로 감당하기가 버거우리만치 힘에 겨운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호영이 당황스럽기까지 해서. 계상은 띵한 표정으로 호영을 바라봤다. 호영은 밤하늘에서 천천히 눈을 내리더니 여전한 그 웃음을 입에 달고서는 계상에게 또렷이 눈을 맞춘다. 혼자 있을 때는 안되지만 같이 있을 때는 언제고 그녀 이야기를 해도 상관 없단다. 어느날 갑자기 마음을 거둬내는 것이 두려울테니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져야 하는거란다. 고여있는 늪처럼 썩어갈 게 아니라 한귀퉁이 물꼬를 틔우고 가슴 속에 묶어 둔 새 한마리 훨훨 날려 보내도 되는거란다. 호영의 흔들림없는 눈빛에 계상이 텅 빈 공원길에 가만히 멈춰섰다.

잊어볼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었던 나라는 걸 알잖아, 너.


"손호영."


"어?"


"넌 참.... 이상하다."


그렇게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꽁꽁 숨겨두었던 사람을 잘도 찾아내는, 남들은 차마 건드리지 못해 조심스러워하는 사람을 잘도 헤집어놓는, 이상한 방법으로 하루종일 아무 것도 생각 못하게 멀쩡한 사람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녀석. 호영과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태우의 말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는 않을런지. 그래, 분명 외로워야 함에도 외롭지 않았다. 하루종일 그녀 생각을 할 틈도 없었고, 그나마 그녀를 생각하면 코를 찌르던 향이 떠올랐고, 또 처음으로 소개받은 작은 친구와 대화하는 법도 터득했으니까. 하루종일 동방에 틀어박혀 쌀튀밥 개수를 세며 이러다 미쳐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도 했을테지만, 이렇게 유쾌하게 미쳐보는 것도 호영을 만난 보람이다. 이제 헤어짐으로부터, 혹은 이적지 흘렸던 눈물 자죽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져보고자 계상이 낮게 입을 열었다.


"이름은 이시내, 7년 사겼다."


왜 너에겐 그녀 얘기를 서투르게나마 하게 되는걸까. 그 해답을 찾지도 못한 채 계상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러면 호영은 벌써 두 가지나 그녀에 대해서 일러준 계상이 못내 고마워 살며시 웃음을 지어보이는거다. 그런 호영을 향해 계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을거라던 이야기를 천천히 내놓는다.


"그리고 오늘이.. 걔 생일이다."


호영의 눈이 금새 커졌다 제자리를 찾더니 또다시 반달로 휘어져 가느다란 웃음을 만든다. 외로운 놈이라더니 웃기 밖에 못하고. 계상이 그런 호영을 보며 피식 쓸쓸한 헛웃음을 지었다.


"계상아, 계상아."


"..............."


"니가 그랬지? 사랑은 입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


"근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거든.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게, 어쩌면 제일 설명하기 쉬운게 사랑인지도 몰라."


"................"


또다시 제 사랑을 구구절절 늘어놓으려는지. 호영의 반복되어지는 말에도 계상은 한마디 대꾸도 않고 그저 가만히 멈춰서 있을 뿐. 간간히 지나치는 바람이 차갑다는 생각을 애써 머리 속에 떠올리며 계상이 조용한 호영에게 눈을 맞추면, 호영이 한걸음 다가와 틈하나 없이 가까이 마주선다. 뭐지... 계상이 짧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호영이 제 입으로 사랑을 설명하려 계상의 입에 입술을 마주댄다.


"................"


분명 호영의 부드러운 입술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생각했던 계상이다. 제 목을 감싸며 조심스레 매달리는 호영의 손짓에 당황한 듯 한발자국 물러섰지만, 이내 틈을 내주지 않으려 다가서는 호영의 걸음에 계상의 눈 아래로 다시금 호영의 노란 머리칼이 들어찼다. 어떻게 해야 하나. 왜 난 망설이고 있는거지. 복잡하게 얽혀가는 머리 속이 순간 멈추고 빠르게 회전하는 듯 속이 또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망각을 끌어당기는 슬픈 마술처럼 그녀를 잊어버리기 위해 저지르는 것.

어찌 해야할지를 몰라 허공을 헤매던 손이 힘없이 내려가고 파르르 떨림으로 감은 호영의 두 눈을 바라보다 계상도 가만히 눈을 감아버린다. 작은 숨소리, 뜨거운 숨내음, 입가에 맴돌아 남아있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느끼는 찰나....에. 칼날을 잔뜩 세우는 세포들이 도타운 입술 맞대고 쿵쿵 뛰는 고동소리를 들었는지.


"................"


숨이 가뻐 입술을 떼는 순간, 계상의 머리 속이 텅 비어버렸다. 사랑을 베어 잊는 줄 알았는데 마음을 베어 이상한 녀석이 들어찼다. 달콤한 입술의 여운을 간직한 채로 가슴에 끌어안고 입맞춤을 나눈 것처럼. 그렇게... 사랑을 말해준 것처럼. 계상이 멍한 얼굴로 멍청히 굳어서있자, 호영이 살며시 웃으며 저도 부끄러운지 괜스레 발장난을 톡- 톡-


"개쉐!! 시방 안 떨어지냐!!"


어느새 당도했는지 멀리서 다가오던 데니가 태우를 놓아두고 가까이 붙어선 호영과 계상을 떼어놓으려 안달이 나서는 와다다 두 사람의 틈을 쩍 갈라놓는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어색한 기운을 읽었는지 온갖 욕을 퍼부우며 한산한 공원이 떠나가라 씩씩거리는거다. 그러길래 아이스크림을 사자던 태우의 제안이 영 껄쩍지근 하더니만. 데니는 5분만 더 빨리 왔어도 이 야리꾸리한 분위기를 타파할 수 있었을거라 생각하며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태우는 설마 하는 눈빛으로 계상을 바라봤지만, 계상은 여전히 멍청한 얼굴로 가만히 굳어서 있을 뿐. 태우가 흥분하는 데니를 가라앉히려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서며 유일마트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을 들어보인다. 이거 맛있을 거 같지 않아? 하는 표정까지 지으며.


"난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한 거 먹었어.
그러니까 데니랑 맛있게 먹어, 태우야."


두 볼이 발그레해지며 수줍은 미소를 날리던 호영이 갸우뚱하는 태우의 표정에 창피한 듯 몸을 베베꼬기 시작했고, 그런 호영의 모습에 기가 막혀 하던 데니는 끝내 계상에게 왕따, 얼갱이에 이은 또 하나의 별명을 붙여주기에 이르렀다.


"이 똥태 자식!! 너 빙신한테 무슨 짓을 한거냣! 어이어이?"


변태 제곱쯤으로 치부되는 똥태란 표현을 남발하며 계상의 멱을 따겠다 혈안이 된 데니가 온 잔디밭을 휘젓고 다니며 애꿎은 잡초의 생명력만 시험하고 있다. 그러면 태우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아이스크림을 까서는 이 어설픈 분위기를 종료시키려 애를 쓰는거다.


"난 아이스크림이나 먹어야겠네, 입가심도 할 겸.
오늘 동방에 누가 키위주스 상한 걸 갖다놨더라구."


"어? 태우야, 그럼 계상이가 아니라 니가 와사비 국물 마신거야?"


"와사비 국물?"


얼빵한 표정의 태우를 향해 배를 잡고 허리가 휘어지게 웃고 있는 호영의 웃음 소리가 까만 밤하늘에 묻혀버린다. 호영의 모습에 가만히 눈을 맞춘 계상이 조심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쩌다가 밤하늘 반짝이는 별을 보았을까. 아득한 꼭대기 지쳐 잠든 눈물 마른 별을 보았을까. 계상이 눈을 내리면 호영이 어느새 저를 보며 웃고 있다. 참숯처럼 검은 호영의 눈동자가 거기 있었다. 그렇게 계상에게 다가오던 별이 있었다. 그의 품에 스러지던 별이 있었다. 지상에도 별이 있다는 것을, 계상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손호영, 너보다... 내가 더 이상하다.

제 5장,

축구 관람의 법칙과 상응

= 골은 화장실 갔을 때에 꼭 터지는 법.

<06>

Who R U...?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 ... 제 6장

'가슴에 무수한 점들을 새기다, 급기야 그 점들을 파헤친 끝에 단 하나의 이름을 찾아내는 것'

호영이 계상을 찾아 'kitch'로 오기 바로 전날에 행한 작업이라 했다. 언젠가 그 말을 듣고 태우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앉아있었더니, 호영은 그것이 확신을 다지는 결정적 역할을 해주는 거라고 아리송한 설명을 덧붙였다. 점 하나하나를 가슴에 꼭꼭 눌러 찍으며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끝에 찾아낸 이름이 다름아닌 윤계상 세글자였던걸까.


"너 요즘 왜그러냐."


"뭐가."


제대로 비비지도 않은 오징어덮밥을 꾸역꾸역 급한 사람처럼 입안 가득 들이밀어 넣으며 계상이 퉁명스럽게 맞받아친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빨리 모면하려는 비굴한 자태. 태우는 실눈을 길게 뜨고 숟가락을 내리며 계상의 내려숙인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입안이 터질 듯, 씹지도 않고 밥알을 넘기는 듯 거지 나부랭이처럼 밥을 먹던 계상이 조금 뒤 태우의 눈빛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숟가락을 내리며 물을 벌컥벌컥.


"전화기도 꺼놓고, 동방엔 오지도 않고.
학생식당에서 밥 먹기는 곧죽어도 싫대고."


".........."


"대체 뭐야?"


"밥이나 드셔."


"호영이 때문이야?"


호영...이라는 이름에 물컵을 내리던 계상의 손이 짧게 떨린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입술을 쭈욱 빼며 아닌 냥 구는 친구놈의 습관같은 표정을, 그 안에 자리잡은 난처함을 놓칠 리가 있나. 태우는 이제 막 호영과 잘 지내려는 뉘앙스를 풍기던 계상이 갑자기 틀어진 이유가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굳이 학생식당을 벗어나 학교 밖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온 핑계 역시.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꺼, 임마."


그런 건 또 뭐고, 아닌 건 또 무언지. 태우는 벌써 물을 두컵째 완샷하고 있는 친구놈의 모습에 잠시 생각을 하는 눈치다. 무언가 파악해야할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은 느낌. 어지간히 심난했나. 예전에 호영을 피해 도망다니던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지만, 분명 녀석은 호영을 피해 눈에 띄지 않으려 발악 중인 것 같다. 그렇다면 매일같이 계상의 손에 들려있는 크기도 가지각색인 뻥튀기와 농도가 천차만별인 물병은 무얼 나타내는걸까. 호영에게 줄행랑을 치면서도 호영의 제안을 여전히 수락하고 있는 어정쩡하고도 뒤끝이 구리구리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서관 구석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두더지 저리가라 책만 파고 있는 계상의 복잡닝닝한 마음을 이해했는지, 아니면 공부에 방해될까 배려를 해주었는지. 호영은 계상이 화장실 간 틈을 타 쪼로로 달려와서는 매일같이 물병과 더불어 혹시라도 계상이 지루할까 새로운 종류의 뻥튀기를 사다놓고 사라져주었다. 그러한 납득 불가능한 그림을 머리 속으로 잔뜩 그려내며, 태우는 복잡하게 엉켜가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납작하게 만들어 머리 속에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다.


"윤계."


"왜."


"우리 간만에 내기 하나 할까."


"무슨..?"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계상의 표정에 태우는 이내 웃어버린다. 주머니에서 활명수를 하나 꺼내먹으며 속이 답답한 듯 손바닥으로 꾹꾹 심장께를 누르고 있는 친구놈의 상태를 본인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태우는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차올라 계상을 지긋이 쳐다봤다. 인생은 모 아니면 도라던 놈이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킨 게 분명하다. 지구인이 아닌 듯 보이는 호영이 어느 별에서 왔는지, 어떤 초능력을 쓰는지 정체파악이 불가능해지자 심지굳게 꼿꼿하던 제 이성과 죽은 줄 알았던 제 감정이 충돌을 일으키고 만거다. 그렇게 이성과 감정이 스파크를 튀겨대자, 익숙치가 않아 뻣뻣하게 굳어가던 심장이 못 견디고 저리 액상 소화제 따위로 속을 달래려 안달이 나버린거다. 태우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계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이내 마주하던 눈을 스윽 돌려 딴청. 뭔가 캥기는 게 있긴 있나보다.


"이별은 사랑의 끝이다, 혹은 다른 사랑의 시작이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태우의 목소리에 계상이 다시금 태우를 멍청히 쳐다본다.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래서 저리 도망다니고 있는걸테지만. 태우는 반들대는 안경 속의 작은 눈을 접어뜨리며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후자에 1년치 술값 걸께."


둘리 없는 지구인 고길동이 얼마나 처량맞은 모습인지 그 만화를 본 사람은 다 알고 있을게다. 내기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들어 승부욕을 불태우는 계상의 낯빛에 금새 자신없는 표정이 자리잡는다. 이건 죄다, 오징어 덮밥이 무지하게 맛없는 탓이다.


[여보세요?]


"호영..이냐."


어둑하게 내려앉은 어둠이 창을 까맣게 발라놓고 금새 깜빡대는 가로등 불빛에 치여 흐릿하게 동방을 비추고 있다. 데니는 쇼파에 깊게 몸을 웅크린채 오늘도 쏟아져내리는 그릇더미에 허덕대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호영의 목소리에 귀를 맡겼다. 한참이나 대답이 없는 데니를 아는지 모르는지 호영이 그릇에 딱 달라붙은 밥풀이 물에 불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탄을 하다 이내 데니의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한다. 거기 누구 없어요...부터 누가 우리 데니를 데려갔지...까지. 혼자 소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어리숙하고 어벙해보일 호영을 떠올리며 데니가 그제야 낮게 피식, 웃음 아닌 웃음을 내놓는다.


"어이, 빙신."


어? 데니야. 거기 있었어? 있으면서 왜 대답이 없어. 깜짝 놀랐잖아...기타 등등 말도 많은 호영이다.


"빙신아."


주절주절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말이 똑 멈추고 호영이 그제야 대답을 해준다. 응...?


"너.. 내가 아주 싫진 않았던거지...?"


오늘 아버지를 만났다고, 지긋지긋하게 지겨운 감정들이라 화를 낼 기운도 없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또다시 폭발하고 말았다고. 니가 와서 나를 좀 웃겨주면 좋겠는데. 분명 그런건데 니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이런 투정마저 미안하다고. 데니는 무릎 속에 고개를 파묻으며 고작 길지 않은 말을 아이처럼 웅얼거렸다. 알바에서 짤려도 자신이 우울하다 하면 밥풀이 불기 전에 달려올 녀석이니까. 호영이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라앉은 데니의 다음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너... 그냥 나보다 그 놈이...
그 개쉐가 조금.. 아주 쪼금.. 더 좋았던거 뿐이지...?"


대답을 해달라는지, 아니면 그저 한숨 섞인 푸념인지. 데니의 혼잣말 같은 이야기에 호영이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늘 그렇듯 같은 말을 되풀이해준다. 데니야, 난 니가 무지무지 좋은 걸.


"알았다. 참고하마, 빙신."


딸깍- 핸드폰을 살짝 닫아내리고 데니가 살며시 무거운 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이 녀석과 단 1분만 같이 이야기를 나누어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만다. 곁에 아무도 없어, 힘없이 늘어져버린 어깨가 혼자라는 느낌을 더 더럽게 만들지만.


끼익-


동방에 놓고 간 책, 내일 써야 하는 레포트. 태우는 느즈막히 끝난 오후 수업에 금새 해가 저버린 하늘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이제 겨울이구나...싶어 짧게나마 창문 밖 풍경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동방 문을 밀어열고 익숙한 곳에 있는 스위치를 찾으려 손바닥으로 더듬더듬.


"켜지마."


흠칫 놀란 태우가 난데없는 목소리에 냉큼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쭈욱 빼고 쇼파에 동그랗게 말아 뭉쳐져있는 몸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안데니?"


"불켜지 말고 그대로 나가."


깊게 숙인 고개 탓에 귓가에 웅웅- 잘 전달되지 않는 데니의 목소리에 태우는 잠시동안 데니를 바라보다 이내 틱- 동방 불을 켜버렸다. 더 깊게 움츠려드는 데니의 바지가 흙투성이라는 것을 알아채자, 태우는 놀란 눈으로 금새 데니 곁으로 가 앉았다.


"무슨 일이야? 어디 다친거야?"


"꺼져, 씨방새."


호영이 아닌 사람은 아직 두려운지도 모를 일이다. 데니의 꺼지라는 말에 맥아리가 하나도 없어서, 태우는 그 말에도 아랑곳 없이 데니의 곁을 지키고 앉아있다. 아무 말도 하기 싫은 듯 건드리지 말라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는 데니에게 제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질문따위는 더이상 던지지 않는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놓아두고 꼼짝없이 앉아있던 데니가 저보다 더 움직임없이 고요한 태우가 신경 쓰였는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살짝 눈을 비껴 바라보면 태우가 말없이 저를 바라보고만 있는거다. 뭐 구경할 게 있다고 저리 보는지. 데니의 반쯤 부어오른 왼쪽 뺨이 눈 안에 들어오자, 태우가 애써 표정을 가라앉히더니 이내 자리를 털어 일어났다. 그리고는 온화하고 언제나처럼 친절하게, 저는 아무 것도 못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절대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그냥... 그렇게.


"저녁 안 먹었지.....?"


부시럭 부시럭-

217개, 갈수록 알맹이가 커져가는 뻥튀기를 놓고 사라지는 녀석의 수고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 생각을 잊어야겠다는 의무감이 아직도 빡빡하게 들어차 있는지. 자신도 잘 분간이 되지 않는 이유에서 계상은 오늘도 호영이 가져다놓은 알록달록 색색이 뻥튀기를 세어버렸다. 알맹이가 커서 그런지 1시간만 투자하면 금새 다 셀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양. 계상은 도서관 휴게실에서 흘끔거리는 사람들을 나 몰라라하며 뛰어난 집중력을 선보여 금방 뻥튀기 개수를 알아내고, 그러다 또다시 복잡해지는 머리를 달래려 연거푸 두번을 더 세어 217개라는 것은 누차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리고 더는 할 것이 없어 마음 속으로 하나씩 세며 색소가 묻어나는 뻥튀기를 전부 다 먹어치워 버렸다.

부시럭 부시럭-

훌렁훌렁 손에서 날아갈듯 발버둥을 치는 비닐봉지가 도서관 밖에서 부는 바람에 부시럭거리며 춤을 춰댄다. 그런 비닐봉지가 오늘 하루 가장 저와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라 생각하니 어째 놓아주기가 싫어져버려서, 계상은 비닐봉지를 꼬옥 쥐고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치고 있다. 으스스하게 부는 바람을 헤치고 느긋하게 걸음을 내놓으며 캠퍼스를 거니는 계상을 보며 마주오던 여학생들이 난데없이 낄낄거린다. 그런 키득거림에 계상이 잠시 멈춰서서 제 손에 들린 비닐봉지가 혹시나 우스웠나 싶어 멀뚱히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지들끼리 수근거리고 있는 여학생의 모습에 계상은 짧게 인상을 쓰고 알게 뭐냐는 심정으로 굳센 걸음을 내놓는다. 그러다 설핏 스친 눈길이 닿아 계상의 발이 뚝- 멈춰선 곳. 학생들의 입과 귀가 되고 자유로운 이야기가 오고가는 학생 대자보란.  


-분실물 신고-

성명: 오백원에 붙어있던 코딱지
특징: 뻥튀기와 물병을 들고 다님
자주 등장하는 곳: 도서관 (공부를 하는지는 의심스러움)

찾아주시는 분께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살고 싶은
제 코딱지를 닮은, 파뿌리 한 단을 증정합니다.

-주인 백-


순간, 부시럭거리던 비닐봉지가 힘빠진 계상의 손에서 달아나 나폴나폴 저 멀리 날아가버린다. 그걸 인식하지도 못한 채 입이 쩌억 벌어진 계상이 쪽팔림에 질끈 눈을 감았다. 어째 몇일 조용하다 싶더라니. 버젓이 윤계상이란 이름을 써주지 않은 것만도 감사의 절을 올려야 하나. 이런 철부지같은 짓을 잘난 몸뚱이 하나로 굳세게 살아가는 윤계상에게 저지르다니, 계상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한다. 삐뚤빼뚤 크레파스로 친절하게 그려붙인 계상의 얼굴까지는 그렇다 치자. '사람을 찾습니다'도 아니고 분실물 신고는 뭐고, 잃어버린 똥강아지 찾듯 주인 백은 또 뭐냔 말이다. 계상은 눈을 번쩍 치켜뜨고는 거칠게 쫘악 소리를 내며 나무판자에 붙어있는 크기도 엄청 큰 전지를 와라락 찢어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런 계상을 향해 수근거리는 학생들을 매서운 눈빛으로 째려봐 제압한 후 다시금 흔적도 없이 호영의 대자보를 소리소문없이 소멸시킨 후, 계상은 만족스러운 듯 뭐씹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추켜세워본다. 그러다 문득 허허하게 부는 바람이 가슴에 들어찼는지, 계상이 뒤를 돌아보며 두리번거린다. 그 녀석은 없는건가. 나무 뒤에도, 건물 기둥 사이에도, 사람들 틈에도 그 병아리색 머리꼭지가 숨어있지를 않아서. 자신이 비겁하고 소심하게 겁을 잔뜩 먹고 도망다니고 있다는 걸, 호영이 눈치챘는지도 모르겠다고, 계상이 손에 들려있는 종이쪼가리들을 차마 휴지통에 버리지 못하고 가방에 구겨넣었다.

끼이잉-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도착한 전철에 올라 건조하게 팍팍한 얼굴을 매만지며 계상이 피곤한 듯 손잡이를 잡고 섰다. 퇴근 시간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오로지 노약자석만 비어있어서 계상은 박카스 선전을 떠올리며 튼튼한 두 다리로 버티고 서있는거다. 계상이 피곤한 듯 손잡이를 잡고 눈을 잠시 감으며 이대로 서서 잘 수도 있겠다...싶을만큼 노곤해지려는 찰나, 잠시 정차해있는 지하철 문으로 후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달려들어온 누군가가 있었으니. 계상이 뒷덜미에 불길한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뜨자, 갑작스레 제 등 뒤에서 그 누군가가 허리춤에 무언가 딱딱한 것을 가져다대고는 엄청 커다란 목소리로.


"손들어!! 넌 이제 내 포로다."


아니나 다를까 노란 병아리 손호영의 목소리. 저게 무슨 퍼포먼슨가 싶어 온통 계상과 호영에게로 집중된 뭇사람들의 시선이 거북하여 계상이 인상을 잔뜩 쓰며 뒤돌아보려 하니.


"꼼짝마!! 넌 이제 내 사랑의 포로라니깐."


그리고는 얼떨결에 관중이 된 사람들을 향해 한다는 소리가.
      

"내 포로에 눈독 들이면 다 쏘아버린다! 우두두두두두두!!!"


입으로 총알소리를 잘도 만들어 쏟아내더니 호영이 씨익 만족스런 웃음을 짓고는 재빠르게 닫혀내리는 지하철 문을 빠져나갔다. 유리문 안에 벙찌게 남겨진 계상에게 유리문 밖에 서서 지하철 청소함에서 훔쳐온 빗자루 총을 들고 호영은 잘가라 훠이훠이 손짓까지 해주고 있다. 치익- 닫힌 문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린 시끄러운 사내아이 하나에 넋이나간 사람들이 이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차마 문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덩그러니 지하철에 남아버린 계상만이 고스란히 그 상황을 감수해야만 했다. 철 모르던 시절, 친구놈들과 람보 게임을 몇번 했던 것이 훗날 이런 응징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계상은 차마 다른 칸으로 발을 옮기는 것조차 창피스러워서 조용히 꼼짝도 안하고 그 자리에 돌맹이처럼 굳어서있다. 일등급 개망신을 보란 듯 선보여준 호영의 발직함에 이제는 이골이 날 지경. 그렇게 터무니 없는 녀석을 만난 것은 분명, 신의 음모이자 하늘의 농간임에 틀림없다. 계상은 더디게만 가는 듯한 지하철을 향해 마음 속으로 잔뜩 욕을 퍼부어본다. 뒷골이 뻣뻣하게 당겨지는 느낌마저 들고 있으니. 아.. 혈압 올라. 


"들어와."


몇번이고 휘청거리며 주저앉을 듯하던 데니를 부축하고 달래고 얼르고. 그리 기운을 온통 소진하고 나서야 태우는 데니를 저의 자취집에 데려올 수 있었다. 자취방이라고 하기엔 그리 작지 않은 공간이고, 원룸이라고 하기엔 그렇게 뽀대나거나 윤기 흐르는 곳은 아닌 작고 아담한, 말 그대로 평화로운 냄새가 잔뜩 묻어나는 보금자리다.


"식구들은 춘천에 있어. 병원이 거기 있거든.
가만 있자, 반찬거리가 뭐가 있을라나.
아, 너 먼저 씻어야겠다."


멍청히 서있는 데니를 조심스레 데리고 태우가 슬며시 욕실 문을 열어준다. 태우가 들어간다면 몸을 반으로 구겨야할만한 비좁은 욕조 앞에 데니를 세우고 태우는 뜨거운 물을 틀다 괜스레 멋쩍었는지 살짝 웃어준다. 그리고는 밥해놓고 기다릴거라 안해도 될 말까지 일러주고 문을 살포시 닫으며 나가는거다. 한참동안 멍청히 서있던 데니가 조심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마주봤다. 뜨거운 김이 서린 흐려진 거울을 슥슥 옷자락으로 힘없이 닦아내리며 차마 울 수 없어 웃어보려고 어색한 저를 보며 애를 써본다. 그러다 이내 털썩- 욕조 턱에 주저앉아 또다시 멍하니 굳어앉아 있을 뿐.


똑똑-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를 않는 데니가 걱정이 되서 태우는 쌀을 앉히려다 물기를 털고 욕실 앞에 섰다.


똑똑-


"안데니. 너 괜찮냐."


대답이 없는 고요함에 태우가 살짝 문을 열어본다. 김이 가득하게 서려 눈 앞에 흐릿하게 앉아있는 데니를 가만히 바라보다, 태우가 이내 청바지를 걷어올리고는 양말을 벗어재꼈다. 팔을 걷어부치고 힘맥아리 하나 없는 데니의 팔을 살짝 들어 스웨터며 셔츠며 얼굴이 쓸리지 않게 잘 벗겨준다. 움켜잡고 흐느적거릴 기운조차 상실하였는지, 가슴에 낸 생채기를 쥐어뜯어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린건지. 넋나간 사람처럼 기운빠진 얼굴로 앉아 태우에게 온 몸을 내맡기고 있는 데니가 평소답지 않아 태우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어린애 목욕을 시키듯 데니를 발가벗겼다. 줄줄줄 물이 세고 있는 샤워기를 집어들어 물의 온도를 적당히 맞추고 데니의 몸에 살살 비누칠을 해준다.


촤아악-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린 것 까진 괜찮았다. 아버지가 세번째 재혼을 하던 날도 그런대로 참을만 했다. 어머니와 둘이 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으므로 그런 상황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을 버려놓고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쳤을 때, 아버지에게 맡겨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싫어서, 껍데기 뿐인 울타리 밖으로 도피를 해버린 것이 고등학교 때였을거다. 잊을만 하면 한두번씩 나타나 뜻대로 안되는 아들이 괘씸한지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데니를 꼭 이 꼴로 만들고 사라져버리는 가족이란 이름의 사람. 데니는 치를 떨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다 제게 비누칠을 하느라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태우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봤다.

넌 대체 뭐야...

허약한 몸뚱이도 모자라 우울증으로 한동안 병원신세를 졌던 데니는 길거리를 방황하다 신기한 녀석을 만났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놈. 그래서 그 녀석만큼은 세상에 다치지 않게 지켜주리라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데니는 차례차례 지나가는 일들을 생각하다 금새 눈시울이 붉어져버린다. 그런 지금 제 곁에 호영을 부를 기운조차 없었건만, 아직 엄마란 이름의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했건만. 분명 태우에게, 정신병자라 제 소개를 간단히 마쳤건만.

넌 대체 뭐냐구...

사람에게 무너지다 사람에게 다치고 사람에게 위안 받는 날도 있는걸까. 뚜욱- 저도 모르게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데니의 가녀린 등을 꼼꼼히 밀던 태우가 어느 순간 팔에 힘이 빠져버린다. 태우가 가만히 몸을 앉히고 추욱 늘어진 데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짙게 물들어가는 청바지 자락에 손의 물기를 닦아내더니 스윽- 데니의 부어오른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매만져주며.


"많이.. 아팠겠다."


깊은 사연 묻지 않기로 했는지. 안타까이 떨리던 태우의 눈빛을 보았는지 모르는지. 주루룩 쏟아내는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이내 꾹꾹 손등으로 눈가를 눌러찍는 데니의 모양에 태우는 모른 척, 더 울어도 된다는 듯 다시금 비누칠을 시작했다.


촤아악-


세상을 더 가지지 못해 비누거품 위에서 발을 구르던 데니의 안쓰러운 얼굴에 확 뜨거운 수증기가 덮치고. 중요한 것은 절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데니의 머리를 살살 감겨주며 태우가 아무 것도 신경쓰지 말라는 표정을 지어준다. 데니는 부쩍 비좁아진 제 마음의 통로에 앉아 삐걱삐걱 오래도록 비누칠을 하고 있는 태우의 손짓에 때가 된 투정을 하얗게 썻어내버리기로 한다. 어쩐지... 개운하다.


"밥을 못해서.. 시간도 없고. 이거라도 먹자, 배고픈데."


태우의 커다란 티셔츠를 입고 수건을 머리에 쓴 데니가 비적비적 나와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는 태우를 멀쭘히 바라봤다. 미안한 듯 베시시 웃는 태우의 얼굴에 데니는 나쁘지 않은 낯설음을 느끼면서 심호흡을 짧게 하고 껄렁껄렁 다가와 작은 상에 앉았다. 라면을 먹는동안 두 사람은 어색하지 않은 침묵을 즐기는 듯 보였다. 후룩후룩 몇젓가락 안되는 라면을 금새 헤치운 태우가 쩝쩝 입맛을 다시며 데니의 라면에 눈독을 들인다. 그 때까지 잔뜩 가라앉아 보이던 데니가 그제야 예의 그 표정으로 돌아가며 눈을 세로로 길게 늘어뜨리더니 독하고 매운 한마디를 던진다.


"차라리 임춘애의 라면을 뺏어먹어라, 씨방새."


하긴, 약골 비실왕 안데니. 가뜩이나 몰골도 가련하기 짝이 없는 오늘같은 날에 그나마 하나 제 손에 쥐어진 라면까지 빼앗기고 만다면 그 얼마나 분노스럽고 젠장맞겠는가. 태우는 피식 웃고는 전처럼 신랄한 말을 내뱉고 있는 데니의 말투에 그제야 안심이 된다. 역시 또치는 지구인 희동이를 둘리의 애완견이라 칭하며 꼿꼿한 도도함을 선보여야 어울리지.


"난 예전에 내가 도우너라고 생각했거든. 웃기지?"


한번 웃겨볼까 싶은 마음에 태우는 엄한 말까지 쏟아내고 만다. 역시 웃기는 것에는 별 재주가 없는지라 그나마 제가 하는 생각 중 가장 기발하고 가장 어이없는, 허튼 소리들을 내뱉고 나면 데니가 비웃기라도 해줄까 싶어서. 헌데 태우의 농담같은 발언에 데니는 라면을 졸렬하게 한줄기씩 쪽쪽 빨아 입안으로 말아 넣으며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는거다. 그리고는 웃기는 커녕 진지하고 경건한 말투로.


"넌 도우너보다 보라돌이를 더 닮았다.
근데 너, 배에 붙어있는 테레비는 어따 쟁겨뒀냐?"


푸헥- 라면 국물을 고질라처럼 내뿜는 태우를 보며 데니가 배를 잡고 낄낄거린다. 그런 데니의 웃음에 태우도 그리 억울하지만은 않은 얼굴로 말없이 웃어버린다. 어쩐지... 개운하다.


몇일을 잠잠하다 한 시간 새에 된통 두번을 호영에게 당하고 났더니, 정신이 쏘옥 빠져버렸는지. 계상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대각선으로 길게 맨 가방을 고쳐메고 지하철 역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십개나 되는 계단에 에스칼레이터가 달리거나 아니면 순간이동이라는 인간의 능력이 빨리 개발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익숙해뵈는 운동화 꼭지가 계상의 눈 안에 들어왔다. 계상이 불안함으로 멍청히 계단 중간에 서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호영이 커다란 후드 점퍼에 폭 파묻혀 저를 내려다보며 방실방실. 가만 안 두겠다고 벼르고 벼르던 마음도 아무 소용 없게스리 매양 방실방실. 계상이 피식 웃으니 호영이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짜란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어 흔드는거다.


"뭐냐."


"나 오늘 월급 받았어. 그니까 나랑 오늘 데이트 해줘."


"뭐?"


"데이트는 사랑 아니잖아. 사랑 빼고 다 해준댔으니까 빨랑 해줘."


데이트라는 게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거란다...라고 말해주려다 계상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마 호영은 데이트는 세글자고 사랑은 두 글잔데 그게 어떻게 같은 거냐고 따지고 들 게 뻔하니까. 어떤 이유와 논리를 들어서라도 저를 패하게 만들거라는 생각에 계상은 말없이 서서 호영을 멀찍히 바라봤다. 그러면 호영은 더이상 아무런 반박이 없는 계상의 침묵을 허락으로 금새 받아들이고는 신이난 얼굴로 쪼로로 내려와 계상의 팔을 끌고 어디론가 가는거다.


"계상아, 계상아.
오늘은 내가 돈 다 낼거니까 넌 한 푼도 쓰지마.
대신에 나는 돈을 많이 쓰면 안되는 사람이니까 
딱 5천원으로 데이트 하자. 응응?"


5천원으로 무슨 데이트를 하자는거지. 그녀와 수없이 많은 데이트를 해봤지만 적어도 만원은 가져야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지 않았던가. 설마 찻집이나 밥집 데려가서 제 것만 시켜주고 호영은 맛있게 먹는 저의 모습을 행복하게 지켜볼까 싶어서, 계상은 불안함을 차마 떨치지 못하고 제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호영을 슬쩍 비껴본다. 그래도 왠지 뭐할거냐고 묻는 일이 어울리지 않는 질문 같아, 계상은 그저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물음도 내놓지 않았다. 몇일동안 도망다니가 딱 걸려버려서, 그래도 제 깐에는 호영이 꽤 오래 참아준거다 싶어서 계상은 피식 웃고는 호영과 함께 지하철 역 바로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섰다.


"어? 버스 왔다."


저만치 다가서는 좌석버스에 계상이 호영을 멀뚱히 바라보니, 호영은 계상을 끌어다 버스에 타라고 손짓을 해대는거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1200원 곱하기 2, 2400원을 꺼내 넣고 계상과 함께 딱 붙어있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어디 가는거냐 묻고 싶은 마음을 눈치챘는지 호영이 시린 손을 꼭꼭 눌러 주무르며 계상에게 입을 열었다.


"접때 너 기다리면서 너무 심심한거야.
그래서 버스 노선표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이 버스가 순환버슨 거 있지.
그걸 알아버린 순간 나 가슴이 막 벅찼어.
가가멜이 뜨거운 국물에 스머프를 떨어뜨리기 직전처럼
그렇게 신나고 기대되고 그러더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무지 파악이 되지는 않지만, 어쨋든 순환버스라 하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일게다. 그렇다면 그냥 이 버스가 한바퀴를 돌 때까지 여기 짱박혀 앉아 호영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건가. 계상은 이미 제게로 몸을 반쯤 틀어 연신 떠들고 있는 호영의 모습에 등을 깊게 기대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정말 못말리는 녀석.

부웅-

그리 막힐 시간도, 그리 막히는 동네도 아닌지라 한산하게 뚫린 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호영은 여러가지 손짓과 신기한 표정까지 지어보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엄마와 단 둘이 살면서 바다 구경이 하고 싶어 강릉에 있는 이모네 집에 놀러갔던 이야기, 데니를 처음 길거리에서 만나 집에서 하루 재워준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제 과거지사부터 하다못해 오늘 있었던 동태눈 사장과 알바생 김모양이 맞장 뜬 이야기까지. 워낙에 별 반응이 없는 계상일테지만 간간히 웃는 표정이 보일라치면 더 신나서는 박수까지 짝짝 치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호영의 모습에 계상은 그저 편안한 자세로 머리를 기대고 앉아 호영의 목소리에 귀를 맡겨놓고 있었을 뿐.


"아저씨, 구간이 너무 짧은 거 같아요."


버스에서 내리며 호영이 덥수룩한 털보 운전사에게 그리 말하고는 아쉬운지 입을 오물거린다. 그리고는 계상을 따라 뽀로로 내려서는 멀어져가는 버스에게 손을 펄펄 저어주는거다.


"주책 좀 고만 부려."


하도 어린애처럼 보이는 호영의 행태에 계상은 그만 하라는 듯 호영의 팔을 막아세우고는 다음에 무얼할건지, 그게 뭔지 아무튼 빨리 하자는 눈빛을 보냈다. 아직 5천원에 도달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면 호영은 계상을 이끌고 횡단보도 앞에 섰다가 파란불이 켜지면 건너편에 있는 길거리 분식집으로 향한다.


"아줌마, 핫도그 두 개 주세요."


600원 곱하기 2, 1200원을 동전과 함께 내미니 계상에게 하나, 호영에게 하나 따끈한 핫도그가 주어진다. 호영이 앞에 놓여있는 케찹통을 들어 계상에게 쫘악 지그재그로 뿌려주고 제 것에도 좀 많다 싶을만큼 케찹을 남발하더니 으아아- 희한한 소리를 내며 바삭한 핫도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뜨거운 김이 호영의 입에서 모락모락 일어나고 호영이 먹어보라는 듯, 맛이 일품이라는 듯 계상에게 손짓을 보내면, 계상도 핫도그를 베어먹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별 말도 없이 핫도그를 간간히 입에 무는 소리만 들리는 밤길을 함께 걸으며 유일마트까지 당도하자, 호영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팍팍한 거 먹어서 목 마르지? 잠깐만 기다려."


금새 달려가 콜라 두 캔을 사오며 500원 곱하기 2, 1000원을 내미는 호영이다. 그러다 계산에 착오가 생겼는지 호영의 볼이 빵빵해지며 난처한 표정으로 계산을 하고 있는 아줌마와 한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다. 유리문 안으로 가득히 보이는 호영의 모습에 계상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빼고 그 모습을 살폈다. 아마도 호영은 10% 할인이 되는 유일마트의 제도를 계산에 포함시키지 못했는지 아줌마가 거슬러주는 100원이 어지간히 당황스러웠는가보다. 그 돈을 어찌할까, 제 5000원짜리 데이트가 4900원짜리 데이트가 될까봐 발을 동동구르던 호영이 나오지도 못하고 어정쩡히 서있다가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며 눈을 반짝 빛낸다. 그리고는 불우이웃돕기를 위한 작은 하트모양 모금함에 딸랑 100원을 넣고는 홀가분한 듯 총총 콜라를 안고 뛰어나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언고 하니.


"너랑 나랑 50원씩 불우이웃 도왔어. 착한 일 하니까 기분 좋다. 그치?"


어이없음도 이쯤되면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법이니까. 계상은 콜라를 따서 한모금 마시고는 짜릿하게 목구멍을 훑고가는 강한 기운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어쩐지 자꾸만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또다시 속이 뒤집힐 것 같아 조바심이 났었는데, 그래도 콜라를 마시고 나니 속이 좀 뚫리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시원한 밤바람에 얼굴을 맡기고 홀짝홀짝 콜라를 마시는 호영의 모습을 옆에 두고 돈 한푼 안드는 공짜 산책을 즐기고 있는거다.


"참, 까먹었다. 아까 사올껄."


호영이 제 머리를 톡톡 두들기더니 눈을 찡긋. 그리고는 금새 기다리라는 손짓을 계상에게 보내놓고 또다시 저만치 떨어져있는 마트로 달려간다. 체리맛 사탕 두 개 200원 곱하기 2, 400원을 내놓고 아주머니가 남겨주는 십원짜리들은 또다시 모금함으로. 호영이 사탕을 하나씩 양 손에 쥐어들고 기대감이 서린 표정으로 마구마구 달려오다,

파악-

소리와 함께 지나가던 남학생 두 명과 부딪혀 푸욱 고꾸라졌다.


"미안합니다."


주위를 살피기는 커녕 계상한테 눈꼭지를 달아놓고 질주를 한 탓일테지만, 호영은 제 옷이 더럽혀졌는지 말았는지 제 손에서 달아난 사탕을 찾느라 정신이 없는 듯 하다. 호영을 일으켜주지도 않고, 미안하다는 호영의 말에 대꾸도 없이 멀어져가는 고삐리 껄렁쟁이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영은 사탕 하나를 찾아낸 것에 쾌재를 부르며 그제야 일어나 옷을 대충 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남은 사탕 하나를 어두운 잔디 밭에서 찾는 데 혈안이 되는.


"야."


그 모양새가 한심스럽기까지 해서 계상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성큼성큼 호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깊게 숙여내린 호영의 얼굴을 추켜세우며 계상이 저의 부름에 뒤돌아본 껄렁쟁이들을 향해 강단있는 한마디를 내놓았다.


"빨리 사과해. 미안하단 말 못들었어?!!"


황당한 듯 계상을 바라보는 말라빠진 고딩들과 어이없게도 유치한 대치상태가 되었지만, 계상은 알 수 없이 열이 받은 얼굴로 서서 호영에게 사과하라 당당히 요구하고 있다. 덤빌테면 덤벼봐라. 뻘쭘히 서있는 녀석들이 꼼짝도 안 하자 계상이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어서와, 죽고 싶거든!! 매섭고도 차가운 낯빛으로 날카롭게 떨림하나 없이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는 계상의 모습에 어지간히 쫄았는지, 녀석들이 어설피 고개를 숙이며 들릴 듯 말 듯 미안하단 말을 내뱉고는 줄행랑을 친다. 한참이나 멀어져가는 놈들을 잡을 생각도 없이 계상은 인상을 팍 구기며 호영의 옷을 털어주기 시작했다.


"나 단 거 싫어하니까 잃어버린 거 찾지마."


호영이 망치보다 센 주먹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을테니, 어디서 나오는 보호본능인지를 모르겠지만 계상은 저도 모르게 호영의 옷을 털어주다 이내 어울리지 않다 생각했는지 하던 짓을 뚝 멈춰버린다. 신기하게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던 호영의 새초롬한 눈빛에 계상은 큼큼 목을 다지며 마시다 만 콜라만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공원 산책로를 따라 다시 걸음을 내놓았다. 그런 계상을 또다시 쪼로로 따라가며 호영이 제 손에 들려있는 사탕을 까서 오물오물 부숴먹는다. 바닥에 떨어뜨린 탓에 막대만 남기고 죄다 토막이 나버렸으니.


"안 먹을래?"


"됐어."


철없이 서두르고 칭얼대며 매달리는 호영의 손길을 애써 외면하며 계상이 애꿎은 콜라캔만 바작바작 씹어댄다. 슬쩍 비껴 바라보니, 볼이 뽈록하게 튀어나오도록 사탕을 오물거리며 호영이 체리빛이 감도는 입술을 달싹인다.


"계상아, 계상아.
그 사람 얘기 하나 해줘야지, 나한테."


지금 이 상황에 저리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당연한 계상의 의무이자 호영의 요구라 생각하는지. 계상은 자꾸만 답답하게 죄어오는 속을 퍽퍽 때리며 호영을 내려다봤다.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오늘 하루 그리 정신없게 만들어놓고 무슨 말을 하라는거니. 계상이 담담히 멈춰서서는 까마득한 밤하늘을 잠시 올려다본다. 아득하게 빨려들어갈 것 같은 어둠에 어느 별에서 왔는지 신원파악이 불가능한 녀석을 앞에두고 계상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호영을 마주봤다. 너도, 우주 어딘가에서 오긴 왔을테니.


"내가 그 사람을 잊어도 우주는 변하지 않는다."


계상의 말이 무언지 한참동안이나 되새기는 호영이다. 그리고는 커졌다 작아졌다 위를 쳐다보다 아래로 눈짓하다 빙글빙글 꾸준히, 그렇게 계상을 향해 꾸준히 웃어주는거다. 그래, 그런거였나보다. 호영의 웃음에서 터져나오는 온화함이 돌연, 우주같은 것을 믿게 만드는가보다.


"맞지...?"


"응."


"정말 맞는거지?"


"응."


재차 확인을 하며 제가 틀리지 않았다 용기를 주고 다짐을 달란다. 잊어도 괜찮겠냐고, 잊어도 되겠느냐고, 잊어도 살아갈 수 있는거냐고. 어쩌면 이미 시작되어버린 망각이 서글프기라도 한 듯 이제 그녀를 잊는 건 시간문제라고. 호영의 짧지만 확실한 대답에 계상이 담담히 웃는듯 마는듯 희미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간지럽고 슬픈.


"집에 가자, 늦었다."


천천히 뒤돌아서며 호영은 우주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지구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추락해 저리 지구인과는 다른 모습이 아닐까 추측을 하며 계상이 짧은 숨을 몰아쉰다. 문득 쓸쓸해져버린 탓에 혹여 사랑에 또 빠져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을 하면서 모든 기억으로부터 멀찍이 조바심을 내다 계상이 허허히 웃어버렸다. 간간히 무디어지고 가끔씩 무너지고, 그렇게 호영에게 익숙해져 가는지도. 알 수 없는 감정이 하루종일 마음을 침범해 심장이 자꾸만 움츠려들어서. 그래...서.


"계상아, 계상아."


마음이 가렵다, 환장하게. 오로지 재빨리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은... 심장. 계상은 몇일동안 꾹꾹 눌러담아던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 터져나온 듯 속이 발칵 뒤집힌 듯 하다. 그런 계상의 표정을 알 리 없는 호영은 뒤에서 몇발치 떨어져 걷다 이내 옆으로 다가와 여전히 사탕을 빨아먹으며 체리빛으로 더 새빨개진 입술을 연신 움직인다.


"이거 내가 다 먹는다. 응응?"


남은 사탕 반쪼가리를 홀랑 입 안으로 털어넣으며 호영이 흡족한 듯 웃는다. 어지럽다, 너는. 아지랑이가 어릿하게 피어오르는 듯 눈 둘 곳 없이 밋밋하게 반복되는 호영의 목소리가 자꾸만 무력감을 부른다. 떨리는 듯 요동치는 심장은 깊은 호흡으로도 멈출 수가 없는데, 호영의 웃음이 염치없이 화사하기까지 해서, 계상이 애써 호영을 외면하려 발악한다.


"이 사탕 원래 여러가지 맛이 있거든.
딸기맛, 초코맛, 바나나맛.. 또 뭐가 있더라.
암튼 그렇게 여러갠데 그 중에서 이게 제일 맛이 좋아."


좀처럼 여유를 주지 않고 가눌 수 없이 무섭게 휘젓는, 지치지도 못하게 다시 끌어당기는 호영이 야속하기까지 한 계상이다. 눈을 감았다 귀도 닫았다, 뛰는 가슴은 애써 돌로 눌러 두었다가. 빠져버릴 듯 끌어당기는 주체할 수 없는 벅찬 가슴을 어찌하지 못하고 주절주절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호영을 향해 계상이 휘익 몸을 틀었다. 그러면 갑작스레 저를 향해 마주하는 계상의 몸짓에 호영이 흠칫 놀라 굳어선다. 그리고는 답답해 죽겠는 계상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호영이 다시 살금 웃으며 입을 여는거다.


"너랑 먹으려고 일부러 체리맛 사탕들은 맨 아래에 넣어뒀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사가면 너랑 같이 못 먹을 거 아냐.
니가 단 걸 싫어한다고 미리 말해줬으면 200원으로 오락하러 갔을걸?
나는 너도 나처럼 사탕을 무지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저렇게 속을 다 드러내는데, 누가 자신을 사르지 않고 그냥 우두커니 서있겠는가. 계상이 가슴 속에 백기를 던지며 몽롱하게 비어가는 머리 속을 아예 털어낸다. 


"참, 그럼 너 솜사탕은 좋아해? 나 그것도 무지 좋아하는데.
그것도 입술이 달라붙을만큼 달긴 다니까 별로겠구나.
근데 말야,

..........흡!!"


계상이 쉴새 없이 입을 놀리는 호영의 입술을 그대로 덮쳐버린다. 눈이 동그래진 호영의 볼을 쥐어잡고 거칠게 입술을 부딪히던 계상이 눈을 감은 채 호영의 입술을 끌어당겼다.

손호영, 넌 나한테 뭐지...?

도리질하여도 거부하지 못할 때가 있으니, 이젠 어디론가 달려가는 제 마음을 나무라지 않기로 했는가. 호영을 기꺼이 호흡하며 계상이 가슴을 가만히 데우고 있다. 시간이 길 위에 누워버렸는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모든 것이 이대로 멈춰버렸는가보다.

너를 사랑하게 되면 우주는... 변해버리겠지.

계상은 차마, 제 가슴을 말하지 않는다.


"하아..."


짧고 굵게 한방을 날린 계상이 차마 호영에게 눈을 맞추지 못하고 뒤돌아간다. 그러면서 입 안 가득 베어나는 체리맛에 정신이 없는 와중이지만 존심에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


"시끄러워 죽겠다. 제발 입 좀 닫고 있어."


호영이 말똥히 멈춰서서 계상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가슴이 떨려 무얼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호영은 정말 자신이 너무 시끄러웠는가보다...반성하는 중이다. 오죽해서 계상이 제 입을 저런 식으로 막았을까... 안쓰러워 하는 중이다. 그리고는 이내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는지 계상의 뒤를 부지런히 쫓으며, 눈치코치 다 팔아먹고 분위기 홀랑 깨버리는 이야기를 해버리고 만다.


"거봐, 너도 사탕 먹고 싶었구나?"


그러면서 호영이 계상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대고는 쑤욱- 제 입에 남아있던 체리맛 사탕을 불어넣어준다. 계상의 띵한 표정과 더불어 입안으로 호영의 온기가 남아있는 체리맛이 쭈욱- 빨려들어온다. 아... 혈압 올라.

제 6장,


.....................................
.....................................
.....................................
.....................................
.....................................
.....................................
.....................................
..............................
.....................
............

... 안데니.


<07>

to be with you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 ... 제 7장

"어떻게 생각하냐."


머리가 지끈하게 고민이 된건지, 아니면 주먹구구식으로 마음을 정리했는지. 휴가 차 부모님이 떨렁 아들만 남겨놓고 여행을 가버린 바람에 홀로 집에서 뒹굴거리다 도저히 안되겠는지 평소보다 일찍 동방으로 향한 계상이다. 처음으로 호영에 대해, 아니 자신의 복잡다단한 마음에 대해 과장과 거짓을 배제하고 솔직히 털어놓는 계상의 물음에 태우는 대답이 아닌 짧은 웃음으로 대신했다.


"웃지마, 새꺄."


나름대로 심각하다고, 진지한 물음인데 무시하듯 왜 웃는거냐고. 날카로운 눈매로 짧은 경고를 남기는 계상에게 태우는 애써 웃음을 삭히고는 여전히 기분좋은 얼굴로 친구놈을 대한다. 우선은 친구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끔 제 마음의 바닥을 드러내주는 게 고마와서이고, 둘째는 아무리 꽁꽁 얼어붙은 살얼음장도 살랑이는 바람 한줄기에 스르르 녹아내리기도 하는가보다 싶어서다. 그리고 마지막은  꽤나 난처한게 애를 먹고 있는 듯, 답답함으로 무장한 친구녀석의 표정이 재미있기도 하여.


"그냥.. 화가 나더라."


단지 호영이 어린 녀석들과 부딪혀 넘어진 것 뿐인데, 그것도 어찌보면 호영의 덜렁대는 성격 탓이고 크게 다치거나 어이없게 사고를 당한 일도 아닌데. 그렇게 그냥 빈번히 일어날 수 있는 뻔하디 뻔한 일이었는데, 왜 호영이 발라당 넘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그 말라빠진 고딩들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모르겠다고. 계상이 그런 제가 한심하다 생각했는지 머리를 박박 긁으며 테이블에 쿵쿵- 머리를 두어번 박는다. 정신차려, 정신차리라구.


"나 미친 게 분명해.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냐."


"그럼 넌, 내가 이러는 게 정상으로 보이냐."


"너 원래 그런 놈이야."


"뭐?"


호영에게 계상이 친절함을 보인다하면, 그것은 코끼리가 하이힐 신고 트위스트를 추는 일만큼이나 드문 일일진데. 원래 그렇다는 건 말도 안되는 터무니 없는 소리. 계상의 한쪽 눈썹이 찌익 올라가며 어디서 거짓부렁이냐, 개수작은 일찌감치 포기해라...라는 강렬한 눈빛이 발사된다. 그러면 태우는 푸욱 웃음을 보이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최대한 조분조분한 말투로 담담히 말을 잇는거다.


"니 생활신조 제 1항이잖아."


"뭐가?"


"내 것에 흠집나지 않게 악착같이 챙긴다."  


눈알이 한번쯤 도로록 굴러가더니, 계상이 물음표를 남발하며 띵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면 지금 태우는 '내 것'이라는 문구에 호영이 포함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건가. 그래서 내 것에 흠집이 날까봐 안달이 난 나머지 호영이 넘어지는 모양새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거라 해석을 해주는건가. 계상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머리 속에 가득찬 '은행엔 절대 없는 오백원'에 대한 상념들이 절로 떨어져 나가길 바라는 냥.


"제 2항만 실천하면 되겠다.
받은만큼 되돌려준다. 어때?"


친구라고 하나 있는 놈이 마음이 진정되게 타일러주지는 못할 망정, 낙엽까지 쓸어다 얹어놓고 마음껏 불타올라라 부채질해주고 있는 꼴이라니. 계상은 안정이 될까 싶어 태우에게 큰 마음 먹고 상담을 받아보고자 했는데 외려 더 엉켜가는 마음 탓에 인상을 깊게 썼다. 도우너가 제 바이올린을 맡길만큼 절실히 믿는 친구가 혀를 반쯤 내민 띨띨한 표정의 소유자 둘리라는 것을 깜빡 잊은 잘못. 계상이 다시금 현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려 테이블에 쿵쿵- 머리를 두어번 더 울린다. 이건 꿈이다, 이건 모조리 다 꿈인거다.


끼익- 쾅.


"개쉐 개쉐!!"


난데없이 소란스러움을 한꺼번에 몰고 바람처럼 나타나 문을 발칵 열어재낀 데니가, 갑작스레 계상에게 와라락 달려들더니 맹렬한 눈빛으로 계상을 노려보는데 한껏 열을 올린다. 오늘은 또 얼마나 소심하고 치졸한 이유로 저리 뚜껑이 열리다 못해 저 하늘 멀리 날아가버린걸까. 데니의  불끈 쥔 주먹에 계상이 피곤하다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대어 버렸고, 태우는 반가운 기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반응없이 무덤덤한 계상의 표정에 데니는 씩씩거리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치더니 숨이 막히는지 셔츠 윗단추를 두어개 풀어재끼고 다시금 계상을 노려보는데 온 신경을 집중.


"빙신 어따 감췄냐, 개쉐."


키가 작기나 해야 가방에 넣고 다니든 목에 메고 다니든 할 거 아닌가. 그 어수선하고 수다스런 녀석이 숨긴다고 조용히 감춰지기나 하련가. 계상은 언제나 그렇듯 시시껄렁한 시비를 걸고 있는 데니의 끈질긴 노고에 이젠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빙신을 어따 빼돌렸냐구, 새꺄."


"나도 오늘 하루종일 못 봤는데 무슨 소리냐."


의심의 먹구름이 채 가시지 않는지 데니는 계상의 말에 지긋이 계상을 노려보며 눈치코치를 살핀다. 눈을 갸름히 뜨고 눈알을 옆으로 잔뜩 밀어넣어 계상을 주시하고는 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번 한번만 믿어주마....하는 아량을 베푸는 표정을 지으며 데니가 그제야 계상에게 한발짝 물러섰다. 그러고보니 수업도 빡빡하다하는 날인데 하루종일 호영이 보이지를 않는 게 이상하긴 하다. 레포트가 많은 날인가. 아무리 그래도 계상에게 얼굴 도장을 찍으러 줄기차게 동방을 드나들었을 놈인데.


"그럼 이 새끼, 대체 어디 쳐박혀서 땅파고 있데?
전화기도 꺼놓고, 수업도 빠지고. 씨뎅, 확 돌아버리겠네."


전화기도 꺼놓았다는 데니의 말에 계상의 귀가 솔깃하다. 무슨 일이 있는건가. 이 알 수 없는 불안함은 또 뭐지. 이런 감정 역시 내 것에 대한 악착같은 소유욕인걸까. 계상은 또다시 울렁이기 시작하는 속을 손바닥으로 꾸욱 누르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데니에게로 눈을 돌렸다. 도무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오래된 친구인 너도 모르는데 내가 어찌 알겠냐는 표정으로. 허나 그 애절하고 궁상맞은 눈빛에도 데니는 여전히 계상에게 독한 눈매를 풀지 않고 괜스레 원망 가득한 눈빛만 되돌려주고 있다.


"개쉐, 너."


검지 손가락으로 또렷이 계상의 양 눈 사이를 정확하게 찝는 데니다. 계상의 눈알이 데니의 손가락으로 사시처럼 도로록 굴러들어오려는 찰나, 데니가 알차고 굳건한 제 의견을 계상에게 피력한다.


"오늘밤 10시까지 빙신을 찾아 내 앞에 데리고 온다. 알간?!!"


호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계상이건만, 도대체 무슨 수로 그 천방지축 손호영을 찾아 데리고 오란 말인가. 수소문할 곳도 모르고 전화 한번 걸어본 적이 없고 어디로 튈지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그야말로 탁구공이 형님으로 모실만한 녀석인데. 게다가 저 뻔뻔하고 당돌하기 짝이 없는 명령조의 말투는 어떻게 응징해야 할까... 싶었지만 계상은 그저 호영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머리 꼭대기로 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그 모든 생각을 고요히 접는다. 담담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계상의 얼굴에 데니는 드디어 이 놈이 자신의 무력 앞에 기가 눌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홰엑 돌아선다. 당당한 걸음걸음으로 나아가려는 데니의 뒷모습에 계상이 피식 웃어버리고, 데니는 여전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태우를 향해 남모를 브이자를 그려보이고. 그러면 태우는 그런 데니를 흐믓하게 지켜보다 이내 성큼 다가와 데니의 목에 풀려져있던 단추 두 개를 꼼꼼히 채워주는거다.


"단추 풀지마."


"뭐라는거냐, 씨방새."


태우의 손짓에 입술을 쭈욱 빼고 제 단추가 채워지는 광경을 구경하던 데니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태우를 바라보면, 태우는 제 목에 있던 목도리를 풀어내어 데니의 목에 훌훌 감아주며 차분히 말을 잇는거다.


"밖에 춥다."


전부터 친절한 놈인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태우네 집에서 하루 묵은 후로 녀석이 답지 않게 저를 챙기는 것 같아 데니가 뜨뜻하게 목을 감기우는 목도리를 멀쭘히 내려다봤다. 단순히 춥다고 이렇게 자잘한 배려를 해주는건가. 게다가 답답시련 범생이도 아니고 단추를 끝까지 채우라는 단정함을 다름아닌 안데니에게 기대하다니. 데니가 또다시 의심의 뭉게구름을 쥐어짜며 태우를 은근히 살핀다. 그러면 태우는 목도리가 풀리지 않게 둘둘 잘 말아주며 흡족한 듯 웃는거다.


"뭐하는 짓이냐니까, 씨방새?!"


불안함이 먹구름처럼 온 머리속을 뒤덮어가는 것을 느끼며, 데니가 끝내 궁금증을 탈탈 털어내버린다. 술집에서 사랑을 하고 싶다 뼈저린 탄성을 늘어놓던 김태우의 낯설디 낯선 모습이 매끄러운 웃음을 보이고 있는 눈 앞에 펼쳐진 태우의 모습에 오버랩되고 있는 것은 왜일까. 그런 데니의 시큼털터름한 눈빛에 태우가 순하게 웃으며 차분한 어조로 또박또박 제 의견을 말하기를.


"니 속살 아무한테나 보이지 마."


뜨아아- 입을 벌린 데니가 차마 해야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애대대거리고 있을 뿐. 그리고 짧고도 고요한 침묵을 깨고 또다시 펼쳐진 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서 도피를 하려, 별안간 흐르는 소리.

쿵쿵-

데니만큼이나 충격먹은 태우의 오래된 친구놈 고길동이 테이블에 사정없이 머리를 박고 있다.


"네, 알겠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제게 전화를 해서 오늘 하루 일을 쉬겠다 사정했다며 호영의 행방은 모르겠노라 무관심하게 말하는 동태눈 사장의 목소리에, 계상은 떨떠름하게 전화를 끊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저녁도 굶어가며 온 학교를 이 잡듯 뒤졌을거고 호영의 집 근처에서 쪽팔림을 감수하며 삼십분쯤을 기다렸을거다. 대체 어디 간거야. 알바까지 땡땡이치겠다 미리 알려놓은 걸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한건데. 계상은 셔츠 속으로 술술 들어오는 밤바람에 짜증스러운 듯 벽을 짚고 푸쉬업을 두어번 하고는 몸을 탈탈 털어댔다. 왜이렇게 몸이 닳아 안절부절인지, 설마 안데니의 경고따위가 무서울 리는 절대 없고. 계상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머리 속을 어찌할 바 모르고 호영을 기다리고 서있는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해보여서, 그대로 굳세게 뒤돌아섰다. 미쳤다, 미쳤어. 계상이 그 어떠한 생각도 더이상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꾹꾹 눌러담으며 성큼성큼 제 집을 향해 발걸음을 내놓는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있자니 또 오만가지 생각이 들 것 같고, 계상은 한정거장, 두정거장 팻말과 유일마트를 지나서 집 근처에 거의 다 다다랐다. 어지간히 술이 땡기는 탓에 맥주를 두어캔 사갈까 싶은 마음으로 발걸음을 멈춰세우고 불켜진 마트 간판을 고개 돌려 바라보니.


"손...호영?"


허- 참 기가 막혀서. 호영이 마트 옆 천막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계상의 부름에 고개를 반짝 들고는 눈이 동그래진다.


"계상아, 계상아. 왜이렇게 늦었어?"


쏜살같이 계상의 곁으로 달려와 오래도 기다렸는지 볼이 발개진 호영이 계상의 품을 부비부비 파고든다. 하루종일 어딜 갔었느냐고, 대체 연락이라도 되야 걱정을 좀 덜하지 않느냐고. 그 평범한 구박을 할 틈을 호영이 주지를 않아 계상은 그냥 피식 웃는 수 밖에. 당장 눈 앞에 있으므로 찾아다녔다는 말따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근데 여기까진 왠일이냐."


"혼자 있기 싫어서."


혼자 있기 싫다면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건 무슨 아이러니인가. 계상은 바짝 매달려 징징거리고 있는, 어린애처럼 보이는 호영의 표정에 짧게 한숨을 쉬고는 호영을 데리고 뒤돌아가기 시작한다. 공원 저너머로 보이는 시계탑의 작은 바늘이 열심히 10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당연히 데니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 아닌 호영을 버젓이 찾아낸 제 능력에 대한 과시가 지금 데니가 있는 곳으로 호영을 데리고 가는 명백한 이유이다. 계상은 팍 일그러질 데니의 얼굴을 상상하며 종종걸음으로 제 옆을 바짝 따라오고 있는 호영을 바라본다. 계상은 오늘 하루 호영이 챙겨주지 않은 탓에 뻥튀기 개수를 세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기분좋다 생각한다. 호영은 그런 계상의 흐믓한 표정이 아닌 주머니에 팍 찔러넣어진 계상의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열심히 그의 걸음을 따라가고 있다.


"근데 어디가는거야, 계상아?"


"계상아, 계상아. 나랑 춤춰. 응응?"


"싫다. 난 춤 못 춰."


"못 추는 게 어딨어? 그냥 흔들면 돼."


"글쎄 난 안 춰."


"빨랑빨랑~ 응응?
니가 그렇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넌 나중에 배뽈똑이 아저씨 될거야.
배둘레햄 아저씨 되면 내가 막 놀릴텐데 그래도 상관 없어?"


어디갔다 이제오냐 빙신아!!! 소리를 열댓번 들으며 데니의 그 가느다란 손가락에 목이 갇혀 좌우로 스무번쯤 흔들리고, 그래도 마냥 실실대는 호영의 표정에 데니가 그제야 독한 눈매를 풀고는 그 앞에 있는 나이트 클럽으로 들어가버렸다. 얼결에 따라들어온 태우와 계상은 워낙에 시끄럽고 복잡한 곳을 싫어하는지라 그냥 조용히 맥주나 마시자 싶었는데 호영은 커다랗게 고막 터져라 울리는 음악과 휘향찬란하게 돌아가는 조명에 좋아라 짝짝 박수를 치더니 계상을 끌고 나가지 못해 안달이 났다. 호영의 끈질김에 결국 무릎 꿇고 말 것이면서 꼭 저렇게 몇번이라도 버텨 보려는 계상의 모난 똥고집에 태우는 나가라 계상의 엉덩이를 일으켜세웠고 계상은 마지못해 호영의 손에 딸려 나가며 태우를 향해 주먹을 들어보인다. 현란하게 돌아가는 조명에 정신이 다 아찔해질 지경. 계상이 어정쩡히 서서 제게 부딪혀오는 사람들을 짜증스럽게 바라봤다. 그러면 호영은 저를 보라 계상을 톡톡 두들긴 후 음악에 취해 춤을 추기 시작하는거다. 나이트 기본 동작인 그 흔한 박수치며 슬쩍슬쩍 몸 흔들기 조차도 거행하지 못하고 무대를 받치고 섰는 기둥마냥 꼼짝없이 굳어선 계상을 아랑곳 않고 호영의 머리카락이 계상의 눈 앞에 나폴거리고 있다.

이건 또 무슨 마법을 부리는거야.

대쪽같이 멈춰선 계상을 앞에 두고 호영이 뱅그르 돌며 노련한 손짓을 한다. 박자에 딱딱 맞아떨어지는 어깨짓과 쉴새없이 폴랑거리는 노란빛 머리칼이 조명보다 더 정신을 놓게 만든다. 엉덩이를 살짝 흔들며 웃음을 귀에 걸어놓고 계상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는 호영이 정신없이 춤을 춘다. 말로는 다할 길이 없어 춤을 추어 전하는지. 호영이 백마디 참았다가 춤을 추어 푼다. 작아졌다가 커지고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음악에 소리는 춤을 싣고 춤은 소리를 타고. 호영의 손끝에 우주가 있는지. 계상을 보며 춤을 추며 정신을 잃을 듯한 몸짓의 출렁임에 그녀의 기억이 파편으로 부서지려는가. 호영의 몸짓에 계상이 길게 눈을 깜빡이면 우주가 빙그르르 돈다.


"호영이 춤실력 끝내주는데?"


의외라는 듯 입을 떠억 벌린 태우의 발언에 맥주를 홀짝이며 과일안주에서 멜론을 찾아헤매던 데니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무대의 호영을 바라봤다. 어지간히 외로웠던 모양이지. 데니가 피식 쓸쓸한 웃음을 내보이며 춤에 빠져 있는 호영을 안쓰러이 내다본다. 물론 그 옆을 막대기마냥 서있는 계상이 이뻐보일리 없는 것은 당연지사.


"나도 춤 하면 안 빠진다, 씨방새.
혹시 '압구정동 열정의 춤사위' 안데니라고 들어봤냐?"


하하- 소박하고도 우렁찬 웃음을 내놓는 태우의 명쾌한 표정에 데니도 피식 웃고는 홀짝홀짝 달기만한 맥주를 들이킨다. 그러면 태우도 데니와 함께 짠을 하고는 맥주를 시원하게 쭈욱 마시는거다. 태우가 이쑤시개를 놀려 파인애플 속에 숨어있던 멜론을 찾아 데니에게 들어밀어주니 데니가 셀쭉히 태우를 바라보다 괜스레 큼큼 목을 다진다. 데니는 태우가 또다시 이상한 헛소리를 주절거리면 파인애플 한 통을 입에 고대로 쑤셔넣어 다시는 허튼 소리 못하게 해야지 다짐하는 중이다.


"손님, 남자분들만 오셨습니까?"


의례 그렇듯 실제 인물과는 하나도 닮지 않은 웨이터 박찬호가 다가와 건전하다 꼬득이며 즉석만남을 시키려 은근슬쩍 데니에게 수를 부린다. 그러면 데니가 두리번거리며 혹시 늘씬하고 쭉쭉빵빵 미인들이라도 있는가 싶어 눈을 빛내보지만, 이내 태우가 웨이터에게 똑부러지게 말하기를.


"우린 부킹 안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차분하게 말을 잇는 태우의 무표정함에 웨이터 박찬호가 민망한 듯 살짝 고개를 까딱이고는 돌아가버렸고 데니는 여자를 물색하던 제 모습에 찬물을 끼얹은 태우가 황당한 나머지 멀뚱멀뚱 태우를 바라봤다. 이런 데 오면 부킹을 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이고 세상사는 이치이건만. 데니는 혹시 태우가 처음으로 나이트에 온 것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선비같은 자태를 뽑내고 있는 태우를 지긋이 노려봤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태우가 갑작스레 맥주를 완샷하더니 타악- 컵을 내려놓고 데니를 똑바로 쳐다본다. 흠칫 놀라 멜론을 바작바작 혀로 간지럽히던 데니에게 태우가 말하기를.


"너, 아무 여자나 만나지 마."


케엑- 멜론이 사레 들어 눈알이 발개질 정도로 기침을 하는 데니가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태우의 모습에 뒤로 넘어갈 사태에 이르르고. 아까부터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왜이리 간섭은 시시콜콜하며 말도 안되는 말들을 퍼부어 사람 기염을 토하게 만드는지. 데니가 어느 정도 목을 가라앉힌 후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머리를 추스려본다.


"야, 씨방새. 너 왜 자꾸 그러냐? 어이?"


당황한 듯, 제발 농담 좀 고만하라는 듯 데니가 애걸복걸한 말투로 태우를 조용히 타일러본다. 허나 태우의 떨림없게 다물은 입이 왜저리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걸까. 데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태우의 대답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내가 니 알몸 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책임진다는 거 아냐."


저게 지금 뭐라는건지. 조선시대 우물가에서 태어나기라도 했나. 저 고리타분하고 구시대적인 발상은 누구한테서 물려받은 것이란 말인가. 손만 잡아도 결혼을 약속한 줄 알고, 키스만 해도 무조건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낙인찍는 인간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등밀어주고 책임진다는 놈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데니는 차마 반박할 말도 떠올리지 못한 채 뜨억- 입을 벌려놓고 있을 뿐. 저 보수파에 대항하여 개화파 안데니, 위정척사운동이라도 벌려야 하나. 여전히 맥주를 들이키며 시원한 웃음을 보이는 태우와 기가막힌 표정으로 얼굴이 시뻘개지고 있는 데니와의 침묵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 데니는 태우의 단호하고도 진지한 이야기에 긍정 혹은 부정의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을 돌려주기에 이르렀다.


"너 소주 마셨지, 씨방새?!!"


"술 많이 먹었는데 괜찮겠냐."


"괜찮아, 괜찮아.
니가 나 집에두 데려다 주구 나 무지무지 기분 좋아.
앞으로 술 자주자주 먹어야겠다. 헤헤."


또다시 이상야릇한 결론에 다다르고 마는 호영이다. 술에 취한 듯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말도 없고 푼수를 떠는 것 같지도 않아서 계상은 은근히 그런 호영이 신경쓰이고 있다. 집에 데려다 주라고 등떠미는 태우에게 차마 싫다라고 반박하지 못한 것도 아마 다 그런 이유 때문일거다.


"난 항상 그렇게 주문을 외워.
괜찮아, 괜찮아.
그러면 정말 괜찮아지는 것 같거든."


그렇게 신이나게 춤을 춰서 힘이 다 빠져버린건가. 차분히 추욱추욱 내려앉은 노란 머리가 호영의 걸음을 따라 살짜기 흔들리는 것에 눈을 맞추고 계상이 뚜벅뚜벅 호영의 집을 향해 걸어간다. 좁은 골목 두어개를 지나도 아무 말이 없고, 작은 벤치를 지나도 고요함만 더하고. 어째 어색한 형세가 계속되면서 두 사람이 마침내 호영의 집 앞에 다다랐다.


"아, 요구르트."


호영이 대문 밑에 들이밀어져있는 요구르트 비닐봉지를 꺼내며 쭈욱 허리를 편다. 아침에 미처 저 작은 친구들을 챙기지 못했는가보다. 손에 그 자그마한 비닐봉지를 들고 헤어짐의 말을 하기가 너무 싫은지 잘가란 말도, 데려다줘서 고맙단 말도 없이 발장난만 톡톡- 계상도 그만 가야지란 말도 없이 하루종일 우울해뵈는 호영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엄마 기다리시겠다. 그만 들어가라."


"................엄마 지금 없어."


"왜..?"


"집엔 깡총이만 있어."


"엄마 어디 가셨냐."


고개를 푸욱 숙인 채 고개를 끄덕거리는 호영의 어두운 얼굴에 계상이 호영의 팔을 끌고 끼익 열리는 좁은 철문을 밀어열었다. 작은 마당과 현관 사이의 얇은 시멘트 턱에 호영을 앉히고 계상이 잠시 어둑하게 불이 꺼져있는 호영의 작은 집을 바라보다 이내 호영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쩐지 너... 슬퍼보이잖아.


"어디 가셨는데?"


"병원. 병원에 있어.
어제 밤에 교통사고가 나서 새벽에 수술까지 했어.
다리뼈가 많이 부서졌데.
걸을 수는 있을거라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가봐.
그래서 내가 일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엄만 나 혼자 돈버는 게 많이 미안하댔어.
차 조심하라고도 맨날 일렀는데....
우리 엄마... 듣지를 못해. 아마 경적소리를 못 들었을거야.
아프다고 말도 못하는데... 그래도 많이 아팠겠지? 그치?"


숨을 몰아쉬며 많이 속이 상했는지 무릎 사이에 턱을 괴고 앉아 호영이 몸을 깊게 움츠린다. 그래,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말을 많이 해야하고 말을 하는 것이 좋다던 호영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많이 외로운 놈이라던 호영의 오래된 친구놈의 이야기를 잊어버릴 리 없다. 농아인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담히 드러내며 하루종일 애를 태웠을 호영을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시려와서, 계상은 가만히 호영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럼 병원으로 가야지 왜 집으로 왔어?"


"강릉에 사는 이모가 올라왔어.
오늘은 이모가 있겠다고, 한숨도 못잤을테니까 좀 쉬라 그래서.
깡총이도 집에 혼자 있고. 오늘 하루만 이모한테 부탁했어."


아무렇게나 재빠르게 슬픔, 떨구고 달아나는 녀석. 혼자서 아팠는지, 그리하여 혼자서 그 곳에 앉아 계상을 기다렸는지. 계상이 안쓰러이 호영을 바라보다 가만히 하늘 위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늘 밤도 여전히 하늘엔 별이 있고, 지상에도 별은 있다.


"그래도 우리 엄마, 다른 데 안 다쳐서 다행이야."


"다행이란 말, 지금 어울리는거냐."


"응, 아주 잘 어울려."


한참이나 자라야 하는 철부지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단단하게 단련이 되어있어 그렇게 웃고 그렇게 괜찮을 수 있는거였니. 계상의 눈빛이 동정어리다 생각했는지 호영이 이내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계상에게 또다시 입을 연다.


"난 우리 엄마랑 얘기하는 게 참 좋아.
우리 엄마랑 있으면 말이 아닌 다른 걸로 이야기할 수 있거든.
너 그런 거 알아? 말 말구 다른 걸로 얘기하는 거."


대답이 없는 계상을 말끔히 바라보던 호영이 살금 웃음을 보이며 제 손을 계상의 눈앞에 살짝 내민다. 그리고는 오무렸다 폈다 주먹을 졌다 손가락을 하나씩 감추었다 하며 이야기를 잇는다.


"이상하지? 같은 손인데 말야.
우리 엄마가 손바닥은 마음의 표현이래."


자유자재로 변하는 손을 쫘악 펴고 호영이 계상의 손을 끌어다 마주대고는 슬며시 미소를 보인다. 오늘은 빈 모습, 차가운 손을 계상에게 남김없이 내민 호영이다. 내 말 들리지? 하는 듯한 호영의 표정이 계상의 심장을 까끌하게 훑는 것 같다. 말은 가슴보다 앞서가길 좋아한다지만 사람의 말이란 언제나 어눌하고 쓸쓸한 노릇. 그리하여 저 아이의 미소는 가장 맑은 무형언어인지도. 더 듣고 싶어서 온 몸에 구멍을 뚫고 더 보고 싶어서 동공 옆에 또 구멍을 뚫기라도 하듯 계상의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말하지 않고도 얘기하는 방법을 알고는 있지만
난... 네 목소리가 좋은 걸.
내가 스무번은 얘기해야 니가 한마디 해주니까.
그리고 네 귀는 참 편해, 계상아."


매일같이 수다스럽게 조잘조잘 말도 많은 녀석이라고, 그렇게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계상의 귀가 편안하다고 말하는 호영이 다시금 고개를 내려 흙바닥으로 향한다. 계상은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아무런 위로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조용한 침묵에 호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저를 향해 닿아있는 계상의 눈빛을 바라보다 이내 눈물이 그렁이게 차오른다. 계상이 굳어진 얼굴로 호영의 눈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려 하면 호영은 이내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갑작스레 두리번거리며 저만치 나무 아래 놓여있는 줄넘기를 가져오는거다. 그리고는 애써 환하게 웃으며 줄넘기를 넘기 시작한다. 휘익 휘익-


"뭐해?"


"줄넘기."


"갑자기 왜?"


"땀이랑 눈물이랑 성분이 똑같은거래.
그러니까 땀으로 다 빼내면 안 울 수 있어."


휘익휘익- 휘몰아치듯 바람을 가르는 줄넘기 소리에 계상이 멍청히 앉아있다. 그간 슬픔이 하도 많아 몇천번의 줄넘기를 하기라도 했는지 참 잘도 넘는 호영이다. 버릇처럼 입가에 웃음을 하나 걸어놓고 눈물 대신 땀으로 몸 속의 수분을 쥐어짜내고 있는 호영의 모습에 계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호영 앞에 섰다. 휘익휘익 돌아가는 줄이 더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세우지만.


"손호영."


"응?"


"언제까지 그런 얼굴 하고 있을거냐."


안 어울려, 안 어울린다구. 차라리 울어. 계상의 담담하고도 낮은 한마디에 휘익거리며 넘어가던 줄의 소리가 잦아든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겁게 내려앉은 호영의 입가에 더이상 남아있는 웃음은 없다. 계상이 한걸음 더 다가가 호영의 앞에 섰다. 숨소리가 마주하고 한 바람결에 같이 머리칼이 날린다. 익숙하지 않은 듯 천천히 조금씩 고개를 들어올려 계상을 바라보는 호영의 눈빛에 금새 물이 오른다. 계상이 울어도 된다는 듯 천천히 호영의 노란 머리칼을 쓰다듬어준다. 그런 그의 태도가 너무 친절하지도 너무 쌀쌀맞지도 않아 외려 호영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 하였다. 호영은 왠지,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마음이 저민다.


"흑..."


털썩 주저앉아 호영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쓸쓸해 견디기 힘들 때에는 누군가에게 특별해지고 싶은거라 했다. 너무나 슬퍼서 못 견딜 때에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은거라 했다. 그리고 호영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이유를 혼자 있기 싫어서...라 했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몸과 마음을 순식간에 닫아버리는 날카로운 신경으로 무장한 계상 앞에 호영은 그렇게 서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닿기만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것처럼, 그 후에 세상이 끝나기만을 기다려 온 것처럼. 호영은 지상에서 아주 낮게 낮게 누군가의 손짓이 닿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나.. 흑.. 거의...흑.. 십년 만에.. 흐윽.. 울어보는 거 같아...흑."


콧물까지 껄떡껄떡 주워삼키며, 소매로 눈가를 연신 닦아내리며 호영이 어린애처럼 운다. 쪼그려앉은 모양새가 하도 가련하여 계상이 따라 앉아 바라보니, 호영이 멈출 생각도 않고 그간의 설움을 전부 털어내고 있다.


"흐윽.. 나 정말... 괜찮았거든..흑.
흐윽...우리 엄마가 있었으니까.
근데... 흑... 이상하게 자꾸...눈물이 나.."


"지금은 내가 있잖아."


한참을 울던 호영이 계상의 낮은 한마디에 여전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꾹꾹 눌러찍으며 발개진 코와 퉁퉁 부운 눈을 들어 계상을 바라본다. 한 뭉치의 그리움이 꽤 커다란 양이었는지 호영의 시야는 여전히 흐리다.


"그걸로는... 안되겠냐."


담담히 말을 이으며 계상이 바라보면, 멍청하게 놀란 표정으로 굳어진 호영의 눈가엔 여전히 눈물방울이 걸쳐져 있다. 별 표정 없는 계상이 호영에게서 눈을 떼어 옆에 있던 비닐봉지로 손을 가져간다. 그리고는 부시럭거리며 비닐봉지를 헤치고 그 안에서 요구르트를 꺼내서는 뒷꼭지를 이빨로 작게 따서 호영에게 불쑥 들이민다. 거꾸로 세워져있는 요구르트와 계상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호영이 수습이 안될만큼 퉁퉁 부어버린 눈에 걸쳐진 눈물을 스윽스윽 옷자락에 닦아내더니 계상의 손에 있던 요구르트를 받아들었다. 오늘 배달된 것이니 유통기한을 확인하지 않아도 될거다. 남은 하나의 요구르트의 은박지 뚜껑을 그대로 까서 한번에 훌렁 목으로 넘겨버린 계상을 바라보며 호영이 너무 부어 잘 접히지도 않는 눈으로 살짝 웃고는 요구르트를 쪽쪽 빨아 먹는다. 너무... 달콤하다.


"일어나라, 우리집에 가자."


"응?"


"혼자 있기 싫다며."


무뚝뚝하게 툭툭 말을 던지는 계상이 엉덩이에 묻어있는 흙먼지를 탈탈 털며 답지않은 제안을 했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신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계상이다. 호영은 잠시 꿈인지 생신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제 볼을 찌익 꼬집고는 아프다는 느낌에 아이처럼 웃으며 계상을 바라본다.


"우리 깡총이 데려가도 돼? 집에서 못나오게 할께."


깡총이도 혼자 있기 싫을거라며, 순하고 착하고 말도 잘 듣는 녀석이라며 토끼 자랑을 한웅큼 늘어놓은 호영이 이내 방으로 뛰어들어가 하늘빛 플라스틱 우리 안에 토끼를 넣어온다. 분주하게 정신없이 손을 놀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가슴이 가득찬 모양이다. 하얗게 매끄러운 털에 갈색빛 작은 반점들이 몇개 보이고 당근을 먹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토끼를 잠깐 바라보니, 호영이 인사를 시켜주겠다며 토끼를 불쑥 꺼내어 계상 앞에 들이민다.


"만져볼래? 디게 부드러워."


"됐다."


앞발로 당근을 쥐어잡고 앞니를 잔뜩 세워 갈갈이처럼 갉아먹고 있는 토끼의 오물거리는 입을 잠시 구경하다 계상은 호영의 손에 있는 플라스틱 우리를 낚아채어 대신 들어준다. 저 무뚝뚝한 표정에서도 따뜻함을 한가득 느끼고 있는 호영인지라, 호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들킬까봐 애꿎은 손톱만 아작아작 깨물고 있다. 여전히 발간 코로 새근거리는 듯한 호영의 숨소리에 계상의 가슴이 작게 뛴다.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호영의 눈빛을 모른 척 하며 계상이 호영을 데리고 작은 철문을 빠져나왔다.


"나 니 방에 가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소원 한번 참 시시하네. 그래도 누군가의 소원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것이 신기하여. 계상은 열심히 자신을 쫓아 외로움을 떨치고 있는 호영에게로 살짝 눈을 돌렸다. 새벽이 짙게 물들어가 더이상 깜깜해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이미 자정이 넘어버려 고요한 길거리가 그리 나쁘지 않다. 바람이 쌀쌀하게 살을 에이는 느낌만 제외한다면. 호영이 내일 병원에 가면 엄마에게 무슨 얘기를 해야하나부터 꼼꼼히 따져가며 계상에게 연신 무어라무어라 떠들다가, 또 잠시간의 침묵 동안에는 계상을 향해 어디에도 없는 미소를 보여준다. 천번의 키스보다 평생을 애태우는 단헌번의 눈맞춤. 계상이 말없이 호영에게 눈을 맞추며 집으로 향하고 있다.

그래, 대낮같은 미소 하나 붙잡고 이렇게 바람에 부대껴도 괜찮아.   


"계...상아."


집 앞에 거의 다 당도해 나즉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순간, 계상의 가슴이 철렁 주저앉았다.

설마.. 설마...

호영이 고개를 빼어 잘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확인하려 해보지만, 어둠이 꽁꽁 숨겨두고 누군가를 보여주지 않는다. 조금 뒤 멍청히 굳어선 계상에게로 천천히 누군가 다가온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가지런히 묶고 계상 앞에 몇발치 떨어져 마주선 사람. 터져버릴 듯 요동치며 심하게 떨려대는 계상의 눈동자에 호영이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꼬옥 쥐고 있던 계상의 옷자락을 말없이 놓았다.


"계상아..."


눈물까지 보이며 그녀가 계상에게로 다가와 그대로 안겨버렸다. 뻣뻣하게 굳어서있는 계상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방황한다. 다시는 오지 않을 듯 싶더니 또 오는구나. 다시는 안 올 듯 벼르고 가더니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다시는 오지 않을 듯 매정하기 그지 없더니 어찌해서 다시금 나를 찾는거니. 너 없는 내가 이제서야 익숙해져가는데, 이제와서 돌아오면 나는 어떡해야해. 계상의 멍한 머리 속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든다. 투욱- 떨어져내린 계상의 힘빠진 손을 바라보던 호영이 계상에게 안겨있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뒤돌아서 멀어져가는거다. 가슴에 비워진 사람이, 그렇게 가장 절실하던 사람이 잊어버리려하니 다시 계상 앞에 나타났다. 이런 걸 남들은 아마... 행운이라 하겠지. 얼마동안 새까맣게 비워진 머리로 넋을 잃고 서있던 계상의 눈동자가 다시금 제자리를 잡는다.

손호영...

계상이 제 품에 있는 그녀를 조심스레 떼어낸다. 난 아직도 네게서 벗어나지 못한걸까. 떨리는 듯 저를 올려보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 계상이 이내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저만치 언덕 위를 오르고 있는 호영을 쫓아 계상이 미친 사람처럼 달리다 이내 호영의 팔목을 낚아챈다. 어딜 가는거야, 너.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계상이 불안한 표정으로 호영을 바라보면, 호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여전히 웃고 있다.


"어쩐지.. 소원이 너무 빨리 이뤄진다 했어.
그 사람.. 맞지? 돌아와서 다행이야."


허- 계상이 허탈한 조소를 보이며 호영에게로 눈빛을 고정시켰다. 어딜 가겠다는거야, 너.


"다행이란 말.. 지금 어울리는거냐."


최대한 떨리지 않으려 애를 쓰는 계상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져 있다. 꾸욱- 호영의 팔목을 죄고 계상이 갑작스레 엉켜버린 상황에 왜 호영이 물러서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 마음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인가. 나는 왜 그녀를 뿌리치지 못했는가. 이 즉흥적인 감정들을 어찌해야할지를 몰라 계상의 낯빛이 어둑하게 내려앉고 있다. 그런 계상을 말없이 쓸어보던 호영이 또다시 웃으며 담담히 그리 말한다.


"응, 아주 잘 어울려."


호영이 제 옷을 잡고 있는 계상의 손을 말없이 떼어내면 계상의 손이 투욱- 떨어져나간다. 잠시 흔들리듯 이내 고정되어버린 눈동자로 하얗게 시린 웃음을 남겨놓고 호영이 천천히 뒤돌아 멀어져간다. 조금씩 작아져가는 호영은 절대로 멈춰서지도 머뭇대지도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나를 두고 돌아설 때 마음이 돌아서질 못해 그 자리에 못 박혀 서서, 아직 쓸쓸히 남아있는 네 손의 온기가 식어지면, 아니 네가 아주 작아져 안보이면 내 마음이 비어질까. 너를 보낼 준비가 안되어있는데 어딜 가겠다는거야, 너.

그녀와 이별한지 452일째. 멍하니 서있는 계상이 서러운듯 주먹을 꾸욱 쥐고 작아져만가는 호영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호영은 이대로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 밤새 줄넘기를 해야할 것 같다. 홀로 되는 연습을 무수히 해보았으니. 호영이 마음 속으로 주문을 외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제 7장,


여자 = 과거 완료
남자 = 현재 진행형

여자의 사랑은 점층형
남자의 사랑은 반복형


그러나,

반복재생... 실패


<08>

Why be normal...?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 ... 제 8장

"이름은 이시내래. 이름 이쁘지?
7년이나 사겼데. 정말 오래인 거 같아.
나는 한번도 계상이랑 보내지 못한 크리스마스를
그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고도 넘을만큼 같이 보낸거니까."


아들의 입모양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제 엄마에게 작은 담요를 덮어주며, 호영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계상의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한쪽 다리의 두 배가 될만큼 칭칭 감은 붕대로 무장한 다리가 걸리적거리지 않게 최대한 담요를 얇게 펴서 엄마의 품에 안겨주고, 호영은 휠체어를 정리하며 또다시 중얼중얼. 도망치듯 계상을 벗어난 그 날 이후 차마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지만, 그제는 계상의 머리꼭지를 보았고 어제는 계상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매번 그의 곁에는 그가 아직도 사랑한다던 그녀가 있었을거다. 안타까운 듯 아들의 손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호영은 고개를 들어 살며시 웃었다. 괜찮다 안심시키는.


"근데 엄마.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내가 계상이를 볼 수 없게 된 것 같은데
계상이도 나를 보기가 힘들게 된 것 같은데,
내가 계상이를 배신한건지 계상이가 나를 배신한건지
그걸 아직도 잘 모르겠어."


되도록 또박또박 입모양을 만들며 웅얼거리지 않으려 애를 쓰는 호영의 메마른 볼을 엄마는 연신 안쓰러이 쓰다듬어준다. 따뜻한 엄마의 손을 살살 매만지며 호영도 환하게 웃어보였다. 제 손바닥과 마주했던 계상의 손도, 이렇게 따뜻했던 걸로 기억한다.

끼익-


"어? 데니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지라 반가움에 와라락 제게로 달려드는 호영을 셀쭉히 실눈으로 바라보던 데니가, 이내 호영의 엄마를 보고는 눈매를 풀며 씨익 웃음을 짓는다. 해저문 병원바람이 쌀쌀한지 혹시라도 환자에게 누가 될까 찬기운을 탈탈 털어내고는, 그제야 문쪽에서 침대가로 다가오는 데니다. 6인용 병실이라 그리 조용하지 않은 분위기 탓에 데니가 그리도 1인용으로 옮기자, 돈은 내가 빌려주마 강단있게 설득해봤지만 호영은 한사코 거절하며 제가 벌어놓은 돈을 털어 제 엄마가 있을 곳을 마련했다.


"어머니, 만두 사왔어요. 만두 좋아하잖아.
근처에 만두집이 없어서 저 아래 시장까지 갔다니까.
그러니까 많이 먹어요. 배터지게 혼자서 다 먹어야 돼."


살며시 웃으며 데니의 찬 손을 꼬옥 쥐어주는 사람을 향해 데니가 또다시 씨익 주름을 가득잡아 웃어보이고는, 뒤에 멀뚱히 서있는 호영을 홱 고개를 틀어 바라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까딱여 따라나와란 표시를 내보였다. 잠시 산책이나 하고 오겠다는 고상하고 낭만적인 핑계를 호영모에게 또박또박 일러준 후, 데니는 쌩한 바람을 남기며 문 밖을 나섰다. 그런 데니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호영이 엄마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노라 손짓을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데니를 빠르게 뒤쫓는다.

"데니야."


"씨발."


"데니..야."


병원 건물을 벗어나 사람이 드문 곳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빠른 걸음을 내놓던 데니가, 한산한 곳에 다다르자 다자고짜 욕부터 내질러버린다. 데니의 표정을 살필 수 없어 싸한 기운을 잔뜩 덧발라놓은 데니를 열심히도 뒤쫓아오던 호영이 뚝 멈춰선 데니 탓에 어정쩡히 굳어섰다. 휘익 몸을 틀어 호영을 독하게 바라보며 데니가 성이 난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 기집애 때문이야?!
너 학교 안 나오는 것도 개쉐 안 만나는 것도
휴학하려고 하는 것도 엄마 때문이 아니라
다 그 기집애 때문이냐고!!"


꼿꼿하게 서서 온 몸을 파르르 떨며 얼굴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가는 데니다. 어째서 그런 이유인거지. 2주동안 시험만 보고는 쏜살같이 학교를 빠져나가던 호영이었다. 아르바이트도 그만 두고 곧 다른 곳을 알아볼거라며 어색하게 웃던 호영이었다. 집안 사정이 넉넉치를 않으니, 병원비에 여태 벌어놓은 학비가 전부 날아가버렸으니 휴학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던 호영이었다. 그리하여 그 이유란 것이 엄마란 이름의 사람이 아닐거라는 의심은 해본 적도 없었건만. 데니는 알 수 없이 분한 마음에 주먹을 꾸욱 쥐고 서서 부르르 떨며 허공을 죽일 듯 노려본다.


"너 왜이렇게 병신같냐!!
너 이럴려구 그 새끼한테 갔어?!"


아무런 말없이 발장난만 치고 있는 호영의 어깨를 움켜쥐고, 데니가 목청 가득 화를 내질러버렸다. 이럴려던 건 아니었는데, 왜 네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걸까. 그런 저를 안쓰러이 바라보고 있는 호영의 눈빛에 데니는 머리 꼭대기까지 뜨거운 김이 치밀어 올라 금새 뒤돌아섰다.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간다해도 절대 안된다 묶어두고 가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다. 고작 이따위 꼴을 내게 보이려고, 고작 그따위 놈을 사랑한답시고. 날카로운 눈매로 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만큼 흥분을 한 데니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성큼성큼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데니야."


호영이 불안한 마음에 데니를 불러보지만 데니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더 빠르게 걸음을 내놓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호영이 망설이다 마음을 다잡고는 이내 데니를 향해 달려간다.


"데니야!"


얼마나 분한지 눈에 이유없이 눈물까지 들어차놓고, 여린 녀석 하나가 저를 잡는 호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쳐버린다.


"데니야, 이러지마."


"이거 놔! 그 새끼.. 죽여버릴거야!!"


앙칼지게 제 본심을 드러내며 데니가 계속 붙어오는 호영의 손을 떨쳐냈다.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도,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냥 계상이 미치도록 미워서, 밉다는 말이 너무 초라해보일만큼 미워서 데니는 이미 눈이 돌아가버린 상태다. 어깨에 매달리고 팔을 잡아끌고 허리를 움켜쥐는 호영의 손을 계속 떼어내는 데니의 손짓이 그가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말해주듯 거칠어져있다. 내가 가만 둘 거 같아? 내가 이대로 보고만 있을 줄 알아?!!


"데니야!!"


끝끝내 앞서나가려는 데니를 급기야 앞으로 막아세우며 호영이 그대로 데니에게 안겨버린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만큼 온 신경세포가 날카롭게 곤두서있던 데니가 그제야 뚝- 멍청히 멈춰섰다. 푸욱- 데니의 품에 제 몸을 내맡긴 호영의 얼굴이 보이지를 않고 그저 그의 몸이 작게 떨려오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너를 간절하게 하는거지.


"그러지마, 데니야.
계상이한테.. 그러지마."


온 몸으로 저를 막아세우고 제 품에 매달려있는 호영이 단 한번도 한 적 없는, 아니 한번도 그럴 필요가 없었던 애원이란 걸 하고 있다. 이대로 가슴이 새까맣게 재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속이 상해서 미칠 것만 같다. 화풀이를 해야할 그 무엇도 손에 쥐어지지가 않아서 데니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화 한번 제대로 못내보고 이대로 숨어버린 호영은, 아마도 계상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계상이 저를 나빴다 할까 겁이 나는 모양이다. 데니는 훗- 씁쓸한 웃음을 보이며 입술을 꾸욱 깨물어버렸다. 그런 데니를 말없이 바라보던 호영이 틈하나 없이 데니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침묵. 고요한 바람이 사악사악 꺼져가는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걸 바라보며 데니도 호영도 담담히 마음을 달래려 애를 써본다. 씩씩거리며 들썩이던 데니의 어깨가 어느 정도 잦아들면 호영이 그제야 데니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 사람, 그냥 기집애가 아니라 이시내야."


손가락으로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알 수 없는 원을 그리며 호영이 덤덤히 그리 일러준다. 그냥 여자로 불리우기엔 그녀는 호영이 너무나도 원하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데니는 깝깝하게 꽉 막혀오는 가슴이 죄어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어버렸다. 푸념도 늘어놓지 못하는 꼬락서니라니.


"시낸지 또랑인지 개울인지 알게 뭐냐."


뚱한 표정으로 이러나 저러나 절대로 마음에 들리 없는 그녀에 대해 데니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기분 나빠 죽겠다는 식의 발언을 하고만다. 아마도 호영 대신 화라도 실컷 내주자 마음 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화라도 내면 계상이 저를 나쁜 기억으로 떠올릴까봐, 바보처럼.


"데니야..."


"왜."


"계상이도... 내가 아주 싫진 않았던거겠지?
그냥 나보다 그 사람이 조금.. 아주 조금 더 좋았던거겠지?"


"빙신."


누가 심장에 뜨거운 파스를 붙여놓기라도 했나, 절대로 가라앉지 못하고 퉁퉁 부어버린 느낌이 드는 탓에 데니가 끝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입 안 가득 맴도는 말을 쏟아내지 못해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가슴에 묵묵히 들어찼는가보다. 데니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쓸쓸한 표정의 호영을 차마 보지 못하고 빈 하늘만 바라본다. 넌, 천치 바보 등신이다.


"나 그냥.. 너만 볼 걸 그랬나봐.
계상이 보지 말고 너랑만 있을 걸 그랬나봐.
근데 내가 그러면... 계상이가 너무 외로울 거 같아서.
내가 그러면... 그냥 다 외로울 거 같아서.. 그래서..."


"닥쳐, 빙신아."


정말로 너는 천치 바보 등신이다. 데니가 답답한 속을 퍽퍽 주먹으로 때리며 속상한 듯 호영을 바라봤다. 그러면 호영은 담담한 웃음을 내놓으며 가만히 데니에게 눈을 맞추는거다. 속고도 또 속고 당하고도 또 당하는 바보요, 천치요, 등신이요, 게다가 병신이다. 데니가 저보다 몇갑절은 더 가슴이 쓰렸을 호영을 헤아리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어본다. 가슴에 허허하게 들어차는 밤바람이 뜨겁게 부어오른 심장을 훑고 지나간다. 호영에게 말 걸어주는 사람들은 호영의 속에 묻어버린 이야기엔 관심이 없고 웃고 있는 그의 얼굴만 좋다고 한다. 하지만, 데니는 처음부터 달랐다. 여전히 자신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 호영에게로 눈을 돌려 데니가 그제야 담담한 얼굴로 돌아간다. 그렇게 안쓰러이 호영을 바라보다 데니가 피식 웃어주니, 호영이 안심이 되었는지 손바닥으로 가슴을 살살 쓸어내리며 그를 따라 살풋 웃는거다.


"데니야, 그래도 난... 계상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빙신."


깡총인지 껑충인지 그야말로 알게 뭐냐. 데니는 자정을 향해 가는 시계를 보며 싸늘한 밤바람이 야속한 듯 주머니에 깊게 두 손을 찔러넣고는 궁시렁거린다. 깡총이가 계상이에게 있다며 좀 찾아다 달라 부탁하는 호영의 말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죽어도 보기 싫은 놈을 만나러 죽어도 오기 싫은 곳에 발을 들인거다. 이미 그 놈이 토끼고기로 국을 끓여먹었거나, 헐값에 토끼털을 팔아버렸을거라고 호영을 꼬득이고 설득해보았지만 그 쇠고집에 씨도 안먹힐 소리. 깡총이가 보고 싶다며 징얼대는 호영이 하도 시끄러워서 데니는 병실 한 구석에 구겨져 있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닮은 토깽이를 하나 사갈까. 가만히 멈춰서서 눈알을 왔다갔다하며 잔머리를 쓰던 데니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만다. 그러다 걸리면 무지 쪽팔릴테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조잡하고 잡스러운 대처방안이다. 데니가 추위를 이기려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하다 저만치 어둑하게 다가오는 그림자에 가만히 멈춰섰다. 그 놈인가.


"왜 아무 말 안해?"


"그냥."


담담히 말을 잇는 계상의 목소리에 옆에 있던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다. 기말 시험이라며 2주동안 내리 도서관에만 쳐박혀 있던 계상을 참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째 계상은 별 말도 없고 그 흔한 반가움의 표시도 없는 것 같아서 그녀는 은근히 섭섭한 모양이다. 늦은 저녁을 먹자해도 싫다하고 집에 데려다 달라해도 별 반응이 없는 계상의 기분을 살피려 그녀가 자꾸만 고개를 옆으로 내려 계상에게 눈을 맞추려 애를 쓴다.


"너 많이 변했어, 계상아. 그거 알아?"


"그래..."


참 순순히도 대답을 해버린다. 그녀를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시시한 반응을 보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아무 생각 없는 듯 늘 그냥 그런 계상의 모습에 그녀는 예전의 계상을 떠올리며 변했다...는 말을 한다. 처음 계상의 파격적인 머리색깔에도 적응이 안되는지 그녀는 예전의 검은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는 말을 했었다. 물을 사러 들린 마트에서 투명한 곽 속 막대사탕들 아래를 들쳐내어 주머니가 넘칠만큼의 체리맛 사탕을 사는 계상에게 예전엔 단 거 싫어했잖아...라고도 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잘도 웃어주고 따뜻하게 손도 잡아주던 계상에게 많이 무뚝뚝해졌구나...라고도 했다. 그런 예전의 모습이 그리도 그리웠다면 그런 예전에 저를 버리지 말았어야 하는 건 아니었는지. 계상이 쓸쓸히 비어있는 밤하늘에서 눈을 떼어 텅빈 공원길로 시선을 놓아둔다.


"늦었다. 그만 집에 가라."


"안 데려다 줄거야?"


그렇게 그리워 만져보고 싶어하던 얼굴이 눈 앞에서 웃고 있는데. 계상은 살며시 미소를 보이고 있는 그녀를 담담히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7년이란 시간이, 그리고 1년이란 그리움이 그녀에게 안겨준 당당함인가. 계상이 짧게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퍼억-

거칠게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제 얼굴을 사정없이 가격하는 손길에 계상의 정신이 아찔해진다. 입을 막고 놀란 얼굴로 서있는 그녀와는 무관하게, 데니는 씩씩거리며 넘어져있는 계상의 멱살을 잡아챘다. 날마다 계상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데니였음에도, 이렇게 계상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처음이다. 크게 들썩거리며 오르내리는 데니의 가슴께가 눈 앞에 보이고 계상이 작게 찢어진 입술 상처를 손등으로 스윽 닦으며 데니에게 똑바로 눈을 맞췄다. 그러면 데니는 그것이 더 분하고 괘씸해서 계상의 목을 더 세게 죄어버린다.

너란 놈은, 세상에서 나를 화나게 한 두번째 인물이다.

데니가 계상을 죽일 듯 노려보며 한치도 눈을 떼지 않는다.  계상은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 어떤 토를 달지도 않고 묵묵히 넘어져 있을 뿐이다. 가소로운 약골이라더니, 맞은 곳이 꽤... 아프다. 떨림없이 저를 보고 있는 계상의 얼굴에 데니가 한참을 노려보다 입술을 굳게 다져물고는 투욱- 쓸모없다는 듯 계상을 놓아준다. 아무래도 오늘은 토끼를 호영에게 데려다 줄 수 없을 것 같다. 데니가 주머니에 다시금 손을 찔러넣고는 여전히 일어서지 않고 있는 계상을 바라봤다. 계상이 숨을 몰아쉬며 맨바닥에 앉아 데니를 올려다보면, 데니가 매섭고 독한 한마디를 내놓고는 금새 멀어져간다.


"개쉐, 난 니가... 진짜 개새낀 줄은 몰랐다."


시험이 끝나고 이제 방학이 오긴 왔는지. 아직은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지만 한산한 캠퍼스가 어색하기도 하여. 계상은 점심 나절을 동방에 앉아 모형자동차를 조립하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자리를 털어 일어났다. 앙상하게 메마른 가지들을 구경하며 느릿하게 걸음을 내놓다 문득 멈춰선 곳. 계상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취업정보로 가득한 대자보가 눈 앞에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다. 몸을 돌려 대자보란을 마주하고, 무얼 보는지 아니 아무 것도 보지 않는지 멍한 눈으로 그 앞에 서있던 계상이 그런 제가 한심스러워 피식- 낮은 웃음을 만든다. 옆구리 사이에 걸쳐놓은 책을 빼어들고 스산히 부는 바람을 등지며 다시 몸을 돌리니, 저만치 보고 싶었던 얼굴 하나...있다. 미소를 지어야할지 아니면 그냥 모른 척 지나가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하던 호영이 그만 타이밍을 놓쳐버린 듯, 계상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서있다. 오늘은 머리꼭지도 뒷모습도 아닌 완전한 계상의 얼굴과 마주하고, 지금 그의 곁엔 함께 보이던 그녀도... 없다. 그가 보던 것, 간절히 바라보고 만지던 것 모두 자신이 아닌 그녀라 하지 않았던가. 조금씩 제게 가까워져 오는 계상을 향한 호영의 눈빛이 작게 떨리고 안절부절하는 마음을 따라 손가락도 미미한 경련을 일으킨다. 별 일 없었느냐고 물어오면 그래...라고 대답해야지. 잘 있었어하고 물어오면 그래...하고 대답해야지.


"얘기 좀 하자."


"병원에 가는 길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는 아무래도 실패다. 친구란 이름으로 마주할 자신같은 건 추호도 없다. 호영은 분명 괜찮을거라던 심장이 왜이렇게 난동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어서 얼른 고개를 숙여버렸다. 왜이러지, 이러기 싫은데. 계상이 팍팍하게 마른 얼굴로 호영을 따라 눈을 내리니, 호영의 손에 들린 종이 하나가 바람결에 작은 소리를 만들어낸다. 휴학 신청서? 계상이 다시금 눈을 들어 호영을 굳어진 표정으로 바라봤다.


"손호영."


"나 이제 니 풍선껌 안해, 계상아.
니 맘대로 부풀렸다 터뜨렸다 하는 거 안 할래.
단물 다 빠져서 나 이제 그런 거 못해."

   
만나서 반가워 보내는 마음, 자신에게만 이런 작별이 아니라서 아픈 마음 숨기며 돌아설 수 있을거다. 돌아와서 아픈 마음 짓눌려 참고 참으며 지우려해도, 눈감고 있어도 차마 못 지운다해도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서다. 그도 그녀도 마음 편하니 옆에서 지켜보는 마음도 좋을 거 같아서다. 희미한 웃음을 보였는지, 말없이 뒤돌아서 가는 호영을 바라보다 계상이 참지 못하고 여전한 노란 머리칼을 따라나섰다. 타악- 소리와 함께 호영의 몸이 단번에 계상 앞에 마주하고, 호영보다 더 깊게 떨리는 눈동자로 계상이 호영을 막아세워놓고 낮은 음성으로 오래전의 이야기를 되묻는다.


"너... 아직도 나... 사랑하는거냐."
 

그럼, 당연하지. 그럼, 당연...하지. 그럼...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던 너였잖아. 나한테 니가 그렇게 말해줬었잖아. 호영의 미소가 마음에 숨었다가 계상의 눈에 뛰어들어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조롱한다. 사랑한다는 말 끝까지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이렇게 붙잡고만 있는가. 계상의 요동치는 눈빛을 차마 외면하는지, 호영이 담담히 계상을 쓸어보며 조용히 입을 달싹였다.


"어떡하지?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는데."


호영을 잡아챈 손의 힘이 점점 빠져나가며 계상의 얼굴이 깊게 내려앉았다. 왠지 다른 때처럼 태평하게 헤죽거릴 수 없었다. 호영의 눈과 마주치면, 가슴이 답답해졌으므로. 호영이 바닥에 떨어져내린 종이를 집어들며 멍하니 굳어서있는 계상을 향해 말없이 미소짓는다. 천연덕스럽게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도 이대로 띄워보낼 것인가. 눈꼬리에 번지는 눈웃음의 진동, 조용한 웃음이 흐느낌이라는 걸 다 알고 있는데. 그냥 이렇게 살지, 우리. 왜 이별을 하려 하니. 바람처럼 흐르며 가볍게 나부끼지 왜 진한 이별을 고집하니, 너. 넋을 잃고 서있는 계상을 그렇게 바라보다 호영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언제나 그는 호영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실은 정말 알기 쉬운거였는지도 모를. 호영의 눈에 슬픈 안개가 내린다.

계상아...
나중에 니가 지구에 있고, 내가 다시 지구에 오면
그 땐 니가 나를 조금 더 빨리 알아챘으면 좋겠어.

계상이 멀어져가는 호영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머리 속이 하얗게 비워져내린다. 내 마음이 비춰지는 네 눈이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주지 않았잖아, 너는. 이쯤에서 호영을 놓고 돌아서야 하는데, 겹겹이 쌓인 기다림 뚫고 제 맘을 훑어내린 호영의 미소가 남아서 계상은 차마 돌아서지 못했다. 너의 가슴에 자국을 남기고 나의 가슴에 후회를 남기고 혼자서 쓸쓸히, 이렇게 외로이. 이미 변해버린 우주를 등지고 가는 호영의 어깨가 작게 떨린다. 괜찮다고, 볼 수 없어도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괜찮다고. 늘 그리 살아왔으니 이젠 혼자서도 참 좋다고. 먼 곳에 있어 모른다해도 홀로 미친 사람처럼 웃고 울려 한다고. 호영이 뒤돌아서 바라보면 계상의 눈빛이 너무 정겨울까 그대로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도 조금 수월해지는 길은 없는 듯 하다. 눈물의 자국, 빛바랜 그리움 하나... 이제 그런 사랑은 싫다. 너무... 지쳐서.


딸랑-


"어서오세요."


싸늘한 바람을 코트 깃에 잔뜩 묻혀온 태우가 탁한 실내 공기에 살짝 인상을 썼다. 붉은 빛이 가득한 넓지 않은 바에 서서 담배 연기를 헤치며 두리번거리니, 저만치 늘어져있는 친구놈이 주인장을 향해 뭐라뭐라 떠들고 있다.


"이거 말고 다른걸로 줘요.
막 이글루에서 뽑아온 것처럼 엄청 차가운 걸로."


어지간히 취했는지 혼자 낄낄거리며 주인장이 새로 꺼내다주는 맥주에 목을 축이던 계상이 태우가 다가오자 그제야 상체를 일으켜 앉는다. 왔냐는 인사도 없이 앉으란 배려도 없이 연신 맥주만 들이붓고 있는 계상을 한숨 섞이게 바라보던 태우가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저도 맥주를 하나 따서 금새 목으로 넘겼다. 오늘따라 맥주 맛, 더럽게 쓰다.


"기분 좋아서 술 한잔 했다. 너무.. 기분 좋아서.
시내가 나한테 다시 와서, 그래서 너무.. 기분이 좋아."


그러면서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더니, 지갑 가득 들어있는 만원짜리 지폐를 쫘악 펼쳐보이는 계상이다. 1년치 술값은 자신이 다 낼테니 걱정 말라 하는지, 내기에는 졌어도 그녀가 돌아와 좋다는 듯 모순에 휩싸여 이기죽거리는 계상의 모습에 태우는 낮게 표정을 굳히며 계상의 지갑을 정리해서 도로 넣어준다. 차라리 겁쟁이라 욕이라도 퍼붓지. 계상은 여전히 저를 챙겨주고 있는 태우의 손길에 마땅찮은 듯 인상을 깊게 썼다. 기분... 나쁘다.


"이거."


"이게.. 뭔데..?"


흐리멍텅해진 눈으로 태우가 내미는 짙은 색 노트를 바라보다 계상이 태우에게로 눈을 돌렸다. 계상의 옆에 서있던 시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태우는 알 수 없이 숨이 막혔다. 그저 반갑다고 하기엔 그간 친구놈의 고단함이 너무 가벼워질 것 같아서. 다시 돌아왔다는 낭만적인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그녀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녀를 떨쳐내지 못해 사랑조차 깨닫지 못하는 못난 친구놈이다. 태우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더이상 이런 꼴은 보기 싫다는 단호한 어투로 축쳐진 계상을 향해 대답을 돌려준다.


"처음엔 영화 때문에 시작한거였고
나중엔 너랑 호영이 때문에 쓰던거다.
이젠 쓸 게 없어졌으니까 니가 가져가."


계상의 앞으로 노트를 밀어넣는 태우의 손을 바라보며, 계상이 쓸데없다는 듯 피식 비웃음을 보인다. 비아냥거리며 한 대 맞기라도 했으면 좋겠는지 거들먹거리는 계상의 표정에 태우는 속이 상하는지 맥주만 들이킬 뿐이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좋다하는 그의 입만 제외하고, 계상은 그녀가 떠났을 때와 별반 다름없는 모습이다. 아직도 모르는걸까, 아니면 그냥 놓아두는걸까.

딸랑-

문에서 이는 오래되고 투박한 종소리에 태우가 잠깐 눈을 돌려 바라보면, 시내가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와 계상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시내에게 연락까지 한 계상이 하도 못마땅하여 태우가 작은 눈을 납작히 접어 계상을 바라보면, 계상은 그런 태우의 표정에 푸흡- 한심한 웃음을 보이며 술에 절어 추욱추욱 탁자에 늘어지는거다. 잔뜩 취해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계상을 보며 시내가 난처한 듯 태우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고, 태우는 그런 시내에게 차마 웃어주고 싶지가 않아 그대로 맥주를 들이부었다. 


"계상이.. 술 많이 마셨나봐."


"어."


"태우야."


"왜."


"넌.. 내가 싫지?"


"어."


눈도 맞추지 않고 짧게 대답을 하는 태우의 모난 태도에 시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훗- 짧게 웃어버린다. 딱 부러지게 친구놈 앞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못 박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지만, 태우는 그저 한숨으로 대신할 뿐 더는 할 것이 없다. 양 팔을 겹쳐 머리를 묻고 있던 계상이 살짝 머리를 들어올려 어지간히 풀린 눈매로 스윽 양 옆을 둘러보고는, 이내 시내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걱정스럽게 저를 보고 있는 시내의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 계상이 흐릿하게 그리 묻는다.


"야, 이시내. 너.. 아직도 나 사랑하는거냐."


술에 취해 묻는 이야기에 그 어떤 대답을 한들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을텐데도. 계상의 웅얼거리는 물음에 시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계상을 가만히 바라만 본다. 그래, 대답은 뻔하다. 다른 남자를 만나보니 너만한 사람 없더라고 떠날 때처럼 너무 현실적이어서 비참하기까지한 이야기를 돌려준다거나, 멀리 있어도 사랑은 너 하나 뿐이라 다시 돌아왔노라고 유행가 가사 한자락을 들려준다거나 대답은 훤히 보이는 예상답안이다. 혹여 사랑한다 속삭여준다면 그 말을 믿을 수나 있을까. 아니, 그녀만 보이던 그 때처럼 그리 가슴 떨리게 벅차기는 할까. 언젠가 호영이 한 말을 기억한다. 자신의 사랑해와 누군가의 사랑해와는 분명 다른거라던. 계상이 푸훗- 비소를 터뜨리며 술집이 떠나가라 크게 웃더니 이내 무표정하고 차갑게 식어내린다.


"야, 김태우."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의 계상이 태우를 바라보며 낮은 음성으로 그리 말한다.


"걘....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니다.
분명히... 아무 것도... 아니었어."


입으로는 그 사람 다 버렸다고 말하면서도 눈으로 오로지 한 사람만 가득 움켜쥐고. 계상이 씁쓸히 웃으며 휘청이듯 몸을 일으켰다. 난... 전화도 잘 못하는 무디고 무딘 가슴인걸. 숱하게 되내이던 말들 차마 꺼내지 못한 채 계상이 술잔만 엎지르고 밖으로 나선다. 태우에게 여보란듯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계상을 따라, 그녀도 당황한 듯 태우에게 살짝 인사를 건내고는 얼른 몸을 일으켜 계상을 따라 나섰다. 웃음을 내비치며 저를 보던 친구놈의 눈동자는 슬펐다. 내일은 더 가까이 저 놈 마음을 들여다보리라. 그래, 알고 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그저... 사랑일 뿐이라는 것. 태우가 계상이 어느새 꺼내놓고 간 지갑을 보며 맥주를 한모금 입에 물고 그저 담담히 웃는다.


"계상아, 괜찮아?"


계상이 대답 대신 크게 심호흡을 하며 터덜터덜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부딪히듯 걸어간다. 정신을 벗고 다 놓아버린 뒤통수에서부터 반란이 일었는지.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이 멀미를 일으켜 이대로 주저앉고만 싶다. 쌔하게 살을 에이는 찬 바람이 계상의 입김을 공중으로 흐트러뜨린다. 눈과 귀, 머리가 먼저 바람을 맞고 가슴도 덩달아 두근반 서근반 하다가 바람을 맞아 죽을 둥 살 둥. 아무 것도 아닌, 분명 아무 것도 아니었던 그 미소가 조금씩 먼지되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듯 하다. 명분도 없이 갈증만 더하고 혼미해지는 허전함을 견디기가 버거워 계상이 가만히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늘은 어쩐지 별이 하나도 눈에 들지 않는다. 그의 옆에서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녀가 연말 분위기를 한껏 낸 거리 장식물들을 바라보며 들뜬 듯 그리 말한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네."


한 모서리가 부서져 버린 가슴, 조각난 틈으로 무엇이 들어왔는가. 티없이 환한 웃음으로 그리움을 지니고 있는 누군가가 심장에 뛰고 있다. 그가 누구인지, 계상은 이제사... 알 것 같다. 그냥 살다가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가슴 저려올 때, 그럴 때 가던 길을 멈추고 헤매다가 저린 가슴 삭이고 돌아서려 하면 꼭 만나지던 호영이라서, 그에게 길들여진 가슴이 갑자기 길을 잃었다. 무심한 바람에 부서지는 그 미소가 이렇게 아픈데. 곳곳에 찔린 상처 아픔이 서서히 살아날 때 너의 미소가 있어야 하는데. 더 깊어지는 깊이로 뼈에까지 와닿는 것 같은 묘한 통증이 흔적으로 남을만큼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익어버렸어. 내 귀가 가슴에 적어버렸어. 그러니... 이제 널 감추기는 틀린걸까.


"계상아, 크리스마스 때 뭐 받고 싶은 거 있어?"


생각나는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만나야할 이유가 있는 것인데 가만히 생각하면 만나야할 이유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면 먼저 웃어야 하는지, 먼저 모르는 척 가야 하는지. 이렇게 다시는 올 까닭이 없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건지. 옆에 있을거라는 말을 허술히 들었나. 혼자 두기 싫다는 말을 벌써 잊었나. 호영은 그저 처연히 웃었을거다. 그 웃음은 살기가 힘들다고 말했을거다. 등이 휘었다고, 오늘도 고단한 하루였다고 그리 말했을거다. 사랑할 시간이 지나버렸다고... 그리 말했을거다. 그런 호영을 보며 계상은 등이 아프고 팔이 저려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손호영...
넌 그 자리에서 좋은거니.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도 좋은거니.
지금 이 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넌... 그 자리에서도 괜찮은거니.

가슴골을 적시며 물씬 배어드는 추억에 계상이 밤하늘을 헤아리다 가만히 멈춰섰다. 빠르게 지나치는 사람들 틈에 끼어 멍하니 멈춰선 계상을 따라 그녀도 의아한 얼굴로 그의 옆에 선다. 쓸쓸함이 가득 차오르는 멍한 눈을 아무데나 던져놓고 계상이 크리스마스 불빛이 반짝대는 길거리에 서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호영의 사랑은 우주 안에서 그만이 간직하고 있는 절대적인 빛이 아니었던가. 왜 자꾸 가슴 시린 별이 되려 하는가. 그래, 너 때문에 등줄기가 벌겋게 도드라지도록 화가 난다. 기분... 나쁘다.


"..........기억 상실증."

제 8장,

남자 = 현재 완료
남자 = 현재 진행형

남자의 사랑은 반복형
남자의 사랑은 망각형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한

망각... 실패


<09>

come back to me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 ... 제 9장(終)

"호영아, 여기!!"


노란빛 머리칼이 어지럽게 날리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태우는 붐비는 사람들을 헤치고 몇발자국 앞서 나갔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태우의 안경꼭지를 보고, 저를 향해 손을 들어 반기는 태우의 얼굴에 호영이 반가움에 종종걸음으로 얼른 다가갔다. 그러고보니 이게 대체 얼마만의 바깥 나들이더라. 급하게 서둘러 온 탓에 입 새로 차가운 입김이 공중으로 뿌옇게 흩어지고, 호영이 달려오느라 헤쳐진 목도리를 다시금 훌렁 목으로 넘기며 태우 앞에 섰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아냐,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 별로 안 늦었단 증거야.
나 원래 기다리는 거 못하거든."


태우가 코트 주머니에서 영화표 두장을 꺼내어 짜란 펼쳐보이며 기분좋게 웃는다. 방학을 하고 2주동안 내리 집구석에만 쳐박혀 있는 친구놈을 친히 찾아가 몇번 만나고, 또 줄창 꽁무니를 빼는 데니에게 '또치 책임론'에 대한 심도깊은 강연을 펼치고. 그리고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그간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던 호영을 만나러 나온거다. 꼭 호영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으니.


"근데 데니는 안 와?"


"글쎄, 약속 있는 거 같던데.
이 참에 우리 둘이 데이트 하는거지."


"병원에 엄마 혼자 있어서
영화 보고 밥 먹고 빨리 들어가야 되는데.
아, 밥은 내가 살께.
비싼 건 못 사도 맛있는 건 사줄 수 있어."


두 눈을 갸름히 휘어뜨리고 웃는 호영의 미소에 태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계상에 대해 안부 정도는 물을 법도 한데, 호영은 어쩐지 별 다른 말이 없다. 어쩌면 그녀와 잘 지내고 있다 할까봐 덜컥 겁부터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북한 공산당의 후예처럼 집에서 땅굴만 파고 있는 계상에게 찾아간 날은 어김없이 언쟁을 벌였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놈의 삽질이 하도 한심해서 참다 참다 몇마디 쏘아붙이고 나면, 계상은 언제나 무반응으로 일관했으므로. 허나 그것이 몇날몇일 계속되면서 태우는 왠지모를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귀찮은 존재를 떨궈내고 그녀와 알콩달콩 잘 사는 것처럼은 절대 보이지 않았으니까. 1년치 술값 내기에서 절대로 이길 자신이 없는지 '야, 다시해.'라는 강한 승부욕의 습관같은 말을 들을 수도 없었으니까.


"난 나중에 영화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어.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로 말야."


"사랑이 아닌 사랑 이야기 같은 거?"


너무 모순적인 이야기를 내놓았는가 싶었더니, 호영은 되려 더한 답을 돌려준다. 평범하면서 특별한 건 무어고, 사랑이 아니면서 사랑인 건 또 무얼까. 그런대로 주고 받은 말들이 어째 문맥에 하나 맞는 것 같지가 않아서 호영도 태우도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호영이 표를 받아들고 좌석배치도를 살피더니 중앙에 걸렸다며 눈도 덜 아프고 자막 읽기도 쉬울거라 폴짝폴짝 좋아한다. 그런 호영의 모습에 태우는 발가락으로 리모콘을 누르며 심심하다 못해 궁상맞은, 둘리 없는 외톨박이 고길동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계상이 안 궁금해?"


"어...?"


아무렇지 않게 친구놈의 이름을 거론하는 태우의 말투에 호영의 몸이 흠칫 떨린다. 조잘조잘 말도 많은 녀석이 그새 까마귀 고기를 서너 포대 주워삼켰는지 입을 꾸욱 다물고 입술이 토옥 튀어나와 손가락만 꼬물락 꼬물락. 눈알이 도로록 굴러가는 걸 보니, 아마도 난처한 이야기인지라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는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계상이.. 잘 지내지?"


시시껄렁하다 못해 하나도 재미없는 물음. 잘 지낸다는 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도 그렇다고 그 놈 스스로도 그리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태우는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이지도 않고 그냥 불쑥 그리 말해버린다.


"아니."


눈이 동그래져 혹시 계상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조바심을 내고 있는 호영의 눈빛에 태우가 살짝 웃는다. 궁금해 죽겠는데 묻지를 못해 답답해하는 표정이 역력하고 호영은 태우에게서 얼른 무슨 말이라도 나오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태우는 저도 몰랐던 사실들이 갑작스레 하나하나 머리 속에 정리되어지는 걸 느끼며 어쩐지 상쾌한 기분마저 든다. 깔끔한 강박 윤계상에게 있어 너저분한 감정의 찌꺼기는 참을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너무 간절해하던 그녀가 돌아와 혼란에 혼란이 거듭되니 티끌 하나 견디지 못하는 그 모난 성격이 브레이크를 걸어버린거다. 그리하여 제 자신이 말한대로 이도저도 안되게 디스크 손상이 되었나보다. 그래서 본체까지 바꿔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나보다. 집에 홀로 틀어박혀 무얼하는가 했더니.


"계상이 요즘 백업 중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 한참을 생각하던 호영의 띵한 표정에 태우가 말없이 웃어버렸다. 속이 깨끗해지도록 정리가 되고 나면, 그 깨끗하게 티 하나 없는 곳에 누군가를 들여놓고 나면 친구놈은 제자리로 돌아올게다. 그토록 원하던 자리를 찾아올게다. 태우가 말끄러미 웃으며 호영을 바라보고 있으면, 호영이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그제야 천천히 태우에게로 눈을 맞춘다. 오늘, 지새고 나면 혹시 올 것 같음에 나, 기다려도 될까. 허탄한 약속 다시 오리라는 그 말이 아니어도 기다릴 것이다. 사랑을 고백키에 너무 늦었다는 말 가뭇없이 지우기 위해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라 하지 않아도 이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호영이 그제야 태우에게 환한 웃음을 보였다.


"태우야, 난 원래... 기다리는 거 잘 해."


기다리는 거 잘 못하는 나 역시 기다리고 있으니 너무 늦은 거 아니라고, 태우는 저보다 한참은 더 친구놈을 기다려줄 수 있는 호영을 향해 말없이 웃다 툭- 꺼져내린 불빛에 그제야 자리를 잡고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드디어 호영과 꼭 보고 싶었던 영화가 시작할 모양이다. 바이올린을 타고 저 말리 은하계를 날아오르던 도우너의 기분은 이러했을까. 태우 앞으로 팝콘을 불쑥 내미는 호영이 스텝 이름이 줄줄이 딸려나오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난 듯 들뜬 목소리로 묻는다.


"근데 태우야, 이 영화 무슨 내용이야?"


"나도 잘 몰라. 외계인이 지구를 정복하는 줄거리 밖에."


"간만이다."


"그래."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붉게 물든 하늘을 등지고 들어왔으니, 지금쯤 어두워졌을라나. 데니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리 속 가득 빽빽하게 들게해놓고, 저 짧은 인사가 무색하게도 벌써 담 배만 세 대째 피우고 있다. 마주앉아 있는 것도, 앞에 앉아 있는 놈도, 이 곳에 나온 이유란 것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 탓. 주문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계상의 의견은 아랑곳 없이 누가 더 싸가지 없나 내기라도 하듯 병맥주 두 병을 지 마음대로 시켜놓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뻐끔뻐끔 담배만 태우고 있으니. 별 말 없이, 별 표정도 없이 그런 데니를 지켜보던 계상이 그제야 하늘색 우리 안에 있는 토끼를 데니에게 건냈다. 흘깃 깡총이를 살피니, 흉하나 없이 토실토실 살이 더 오른 것 같아서. 데니는 계상의 손에서도 멀쩡히 윤기가 좔좔 흐르고 있는 토끼놈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배신감까지 들고 있다. 거칠게 담배를 팍팍 비벼끄며 딸려나온 병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데니가 점점 꼬여가는 심사를 달래려 허공에 눈을 놓아두고 침묵. 토끼 핑계를 대고 계상에게 쌍판을 들이밀어라 큰소리 떵떵 쳤지만, 막상 앞에 놓고 보니 왜이렇게 속만 갑갑해지는지.


"야, 개쉐."


가만히 맥주를 한모금 마시던 계상이 데니의 익숙한 부름에 눈동자를 들어올린다. 주인 없이 지내던 토끼놈은 모양새가 다 훤해졌구만, 호영 없이 지내던 저 놈은 표정 한번 죽을 맛이라. 데니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방황시킨다. 무언가 할 말이 가득한데 그 시작이 수월치가 않아 자꾸만 가슴에 가스가 차는 듯 부글거려서 데니는 안절부절 맥주만 마셔대고 또다시 부름에 이은 말은 꺼내지도 못한다. 그런 데니와 달리 별 움직임 없이 고요히 앉아있던 계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데니에게로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안데니."


"왜, 새꺄."


꿀릴 것 없다는 듯, 내가 뭐가 무서워서 너따위 놈에게 지고 들어가겠냐는 듯 데니가 기세등등하게 어깨를 쫘악 펴고 계상을 마주대한다. 무슨 말을 하건 반박의 여지는 분명히 있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네 놈이 죽을 죄를 지은 것이니 용서해줄 리 만무하다고. 데니는 마음 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을 구겨넣으며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함부로 짓걸이면 또 맞는 수가 있다는 걸 명심해라. 데니의 솟아오른 주먹에도 아무런 동요 없이 계상이 담담히 제 말을 이어간다.


"그 자식 혹시 울면... 요구르트 하나 먹여라. 그럼 잠잠해질테니까.
근데 웬만하면 너는... 울리지 마라. 그 자식 우는 거... 기분 아주 더럽다."


단단히 말아쥔 주먹이, 순간 풀어져버린다. 데니가 벙한 표정으로 김이 팍 세어버린 제 가슴을 어찌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온갖 욕과 용맹스런 사투를 전부 다 준비해왔건만, 상대편의 백기를 든 모양새가 참으로 시시하기도 하여 데니는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내놓고 말았다. 둘 곳 없어 서성이던 마음이 이제야 잠잠히 제 자리를 찾으려는지. 그래도 제게 호영을 부탁하는 것 같은 저 말투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유같은 건 언제나 궁금하지도 않지만.


"개쉐, 나 뭐하나 물어봐도 되냐."


계상이 천천히 눈을 맞추면 데니는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계상을 아니꼽게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준비해온 그 수많은 말들 중, 절대로 하지 않게 될거라 믿었던 가장 밑바닥의 이야기를 하나 꺼내들었다.


"그 기집애랑 빙신 손호영, 누가 더 니 옆에 오래 있을 거 같냐."


데니의 단호한 물음에 진지함이 한가득 베어났다. 그 빙신은 내 앞에서 울 리 없다. 내가 그 빙신을 울릴 리도 없다. 단지 궁금한 것은, 네가 그 놈을 다시 울리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다. 판단 오류로 후회할 짓일랑 아예 접어라 하듯, 데니의 떨림없는 표정에 계상이 덤덤히 그리 대답한다.


"내가 누구 옆에 오래 있고 싶은지만 생각하는 중이다."


싸가지 없을 것이면, 개무시를 할 것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 하지 독한 놈도 아닌 주제에. 데니가 짧게 헛웃음을 치며 맥주병을 살짜기 간지럽혔다. 깊은 배려를 밀어냈고 말없는 기다림을 모른 체하며 생각이 무뎌가고 발길도 느려진건지 모를 일이다. 떨칠 수 없는 이별의 예감으로 이미 돌아서서 홀로 많이 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안녕, 안녕 눈물없이 헤어지자 한 건 아니었다 한다. 분명, 저따위 놈에게 주먹을 날린 것이 미안하지 않았었는데. 데니가 씁쓸히 웃으며 적군인지 아군인지 도무지 파악이 안되는 계상을 향해 이내 입을 연다.


"다음엔... 그렇게 해.
엉뚱한 소리 한다고 구박하지 말고 잘 귀담아 들어주고
사랑한다고 하면 자주는 아니더래도 가끔은 맞장구도 쳐주고.
묻는 말에 대꾸도 해주고 손도 많이 잡아주고
춥다고 하면 안아주고 싫은 게 있어도 웃어주라.
다음엔... 그 자식한테 그렇게 해줘."


다음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줄 알았다. 다음이라는 것은 없을 줄로 알고 있었다. 헌데 어쩌자고 이런 당부를 늘어놓고 있는 한심한 꼬락서니가 되었는가. 분명 이건 아니었는데. 데니는 그런 제가 하도 우스워 피식- 웃고는 담담히 계상을 바라봤다. 필요하다면 요구르트는 드럼통으로 가져다줄 수도 있으니, 그걸 호영에게 먹이는 것은 계상의 몫으로 돌리려는지.


"안데니, 나도 너한테 뭐하나 물어봐도 되냐."


"내가 너 때린 합의금 얘기만 아니면."


예의 그 표정으로 건들건들 말을 늘어놓으며, 데니가 앞에 놓인 팝콘을 안주 삼아 계상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맥주를 한모금 들이키고 까끌하게 혀에 남아있는 팝콘 부스러기를 이빨로 괴롭히면서 데니가 다시는 절대로 너같은 놈한테 당부따위는 안하리라는 표정이다. 또다시 호영에게 잘못하면 더하게 패줄 수도 있다는 표정이다. 결코 세지 않지만 줏대있는 주먹의 소유자, 데니를 향해 계상도 따라 피식- 웃으며 담담히 제가 궁금한 것을 털어놓는다.


"왜 호영이한테, 니가 아니라 나냐."


안 보겠다 하면, 헤어진거라 끝인거라 하면 쌍수들고 마중나와 나팔이라도 불어댈 줄 알았다. 호영에게 싸가지 없는 놈 뒤돌아보지도 말라고 대신 침이라도 뱉어줄 줄 알았다. 헌데 왜, 대체 왜. 데니의 당부가 낯설었는지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는지. 호영을 아끼는 마음이라 하면 뒤지지 않는 것을 알고 있어 계상은 데니에게 굳이 안해도 될 질문을 해버렸다. 혹시나 어려워할 질문일까봐 망설이다 내놓은 물음이건만, 데니는 여전히 계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기분좋게 씨익- 웃고는 그에 대한 답을 간단히 달아준다.


"새꺄, 난.. 번외잖냐."

아씻, 더럽게 춥네. 귓가에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몸을 더 으스스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데니는 털모자를 더 깊게 내려쓰며 재빠른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비쩍 마른 사내놈이 전혀 관심없어 할 것 같은 튀는 색깔의 토끼 우리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게 우스웠는지, 흘끔거리는 사람들 탓에 데니는 속으로 저를 이 꼴로 만든 호영의 목을 손가락에 넣고 줄기차게 흔드는 상상을 하며 어둑해진 골목길로 들어섰다. 한산한 골목어귀에 토끼 우리를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들어보니 부재중 전화는 한 통도 안 와있고. 오늘은 이 놈이 어째 전화도 없네. 아직도 빙신이랑 같이 놀고 있나. 가뜩이나 날씨도 안 도와주고 기분도 꿀꿀해지려는데 저를 책임지겠노라 큰소리 치던 놈은 코빼기도 안 보이다니. 데니가 입김을 훌훌 뿜어내며 급한 성질에 버튼을 꾹꾹 눌러버린다. 신호음이 서너번쯤 울리고 상대방의 여보세요...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씨방새, 너 어디냐?!"


까랑까랑 맞받아치고 나니 조금은 속이 후련해진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착한 성품은 아닌 듯 싶지만 꼴리는대로 해야 정신건강에도 좋다 하니까. 어디냐고 묻는 데니의 물음에 태우는 호영과 함께 병원에 와서 호영의 어머님을 뵈었다 하고, 영화도 무지 재미있게 보았다 하고 호영이 사준 칼국수도 일품이었다 한다. 오늘 하루, 똥통에 빠진 듯 기분 드럽게 우울한 데니로써는 참으로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는 터. 에쭈? 나 없이도 신났다 이거지? 태우는 약속 있다더니 용무가 끝났느냐고, 혼자 있으면 이리로 오지 않겠냐는 배려까지 잊지 않는다.


"나 오늘 바쁘다, 씨방새."


괜스레 한번 뻐때면 존심이 살아나기라도 하는지. 거만한 포즈로 발발 떨고 있는 토끼놈을 품에 안은 데니가 괜히 한번 튕겨보았으나.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순순히 포기하는 태우의 목소리에 사내새끼가 왜이리 뚝심이 없는지 그새 짜증이 옴팡 밀려오는 데니다. 


"나 오늘 무지 바쁘다고!!"


책임진다 했으면 이럴 때 옆에 있어줘야지. 오늘이 호영을 향한 마음을 접고 개쉐에게 훨훨 날려 보낸 경이로운 날이라고. 게다가 지금은 당근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 토끼놈을 들고 우스운 꼴로 추운데 꽁꽁 얼어 서있다고. 그런데 어찌하여 저 놈은 기생이 당도하길 기다리는 선비마냥 저리 꿈쩍도 안하는건지. 그런 걸 절대 알 리 없는 태우에게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억지로 똘똘 뭉쳐, 데니는 그럼 볼 일 보라 타이르는 태우가 야속한지 또다시 덜컥 신경질부터 내지른다.


"나 오늘 절라 바쁘다니깐, 씨방새!!!"


그래서 뭘 어쩌라는건지. 땡깡 땡깡 이런 땡깡이 또 있을까. 앙탈의 끝을 보이려는지 연신 바쁘다고 떠들어대는 제게 무슨 말을 해야 정답인지를 모르겠는 태우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끝내 데니는 눈치 코치 다 팔아먹었다며 아둔하고 무디다고 태우를 타박하기에 이르렀다. 데리러 오겠다거나 보고 싶어 죽겠다거나 딴 놈들이 늘어붙지 않게 늦게 다니지 말라고 조선시대 선비 행태는 왜 오늘따라 안하는건지 섭섭하기만 하여. 데니가 잔뜩 툴툴거리다 가만히 들려오는 태우의 웃음소리에 이내 풀이 팍 죽어서는 조곤조곤 제 심정을 고하는 수 밖에.
    

"있잖아, 씨방새."


듣고 있다고, 어디 안 가고 네 목소리만 기다리고 있다고 차분히 일러주는 태우다.


"내가 무지 바쁜데도 불구하고... 오늘 너랑 놀아주까?"


"이 녀석이 깡총이구나?"


토끼 우리를 품에 안고 쪼그려 앉아 처량맞게 저를 기다리고 있던 데니를 데리고 태우는 보이는대로 이름 모를 찻집에 들어왔다. 몸이 바싹 얼은 데니에게 왜 안에서 기다리지 밖에서 떨고 있느냐 약간의 핀잔을 주고 얼른 따끈한 차를 시켜주는 태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데니는 아무 말이 없다. 호영의 토끼를 구경하며 살살 장난을 걸던 태우가 조용한 데니가 이상했는지 그제야 눈을 들어 데니를 마주봤다. 아직도 화딱지가 나서 뿔이 솟아있나. 데니의 표정을 살피는 태우의 끈질긴 눈빛에 데니가 그만 보라는 듯 태우의 눈 앞에 손을 휘휘 젓는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한다는 말이.


"나 팥빙수 먹고 싶다."


"너 감기 걸려. 다른 거 먹어."


"싫어, 빙수 땡겨."


한겨울에 보숭보숭 얼음 갈아주는 곳이 얼마나 있을라고. 그런데도 안된다 몇번 다그치면 될 것을 태우는 마누라 입 덧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머리를 굴리며 이것저것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여기 어디쯤에 빙수를 파는 곳이 있었더라. 저 비실비실한 몸에 차가운 걸 먹여도 무사하기는 할까.


"여긴 겨울이라 안하는 거 같더라.
내가 나가서 빙수 파는 데 있나 찾아보고 올께, 기다려."


급하게 몸을 일으키는 태우를 따라 데니가 퍼뜩 놀라 태우의 팔을 잡아세웠다. 영문을 몰라 멀뚱히 저를 내려다보며 어정쩡히 서있는 태우를 보며 데니가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못말리는군. 태우의 팔을 끌어 다시 자리에 앉히고 데니가 우스워 죽겠다는 듯 깔깔거리다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되돌아간다. 따뜻하다는 감정에 익숙치가 않더라도.


"김태우."


"어?"


"난 정신병자다. 영어로는 사이코."


지독히도 모난 성격에 싸가지는 밥 말아 먹은지 오래고 가끔씩 심각한 발작 증세로 날뛰다 마음대로 안되면 화부터 내지르는 신경질적이고 못되먹었으며 재수도 오지게 없는 사람이라고. 그 기나긴 제가 생각하는 안데니에 관한 수식어들을 짧게 마무리 지으며 데니가 또다시 태우 앞에 제 소개를 간단히 마쳤다.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놓는 데니의 진지한 표정에 태우가 벙하게 데니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 한 켠이 간질간질. 태우의 묘한 표정에 데니가 똑부러지는 말투로 더이상 기다리게 하지 않고 그리 묻는다.


"나같은 사람, 너 감당할 수 있겠냐."


이만큼 저를 챙겨주고 감싸주고 보듬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얼마 전의 물음에 대한 답을 달아주듯 담담하게 묻는 데니의 목소리에 태우가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이제 데니는 소주를 마셨냐고 묻지 않아도 될거다. 이제 태우는 소주를 마시고 절규하지 않아도 될거다. 씨이익- 입가에 커다란 웃음을 매달아놓고 태우가 언젠가의 누군가처럼 단호한 대답을 돌려준다.


"문제 없어."


촤르륵- 쏟아낸 쌀튀밥이 탁자 위로 가득하게 펼쳐져 있고, 종업원 이하 앉아있던 손님들이 대체 무슨 짓인가 싶어 쌀튀밥을 하나하나 골라내고 있는 남자 하나를 희한하게 쳐다본다. 크리스마스라 북적하게 자리를 매운 찻집과 더불어 창밖으로 비치는 거리풍경은 보기에도 빡빡하다 싶을만큼 사람으로 가득했다. 반짝이는 불빛 장식과 한 켠에 놓인 트리에 하나도 들뜨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쌀튀밥을 세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계상 뿐인 듯. 온 신경을 집중해서 손톱만한 알갱이들을 오십개 단위로 끊어 세고 있던 계상이 한참동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앉아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쭈욱 펴본다. 뻐근하게 결려오는 어깨와 목을 돌려보고 짧게 숨을 몰아쉬며 계상은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쌀튀밥을 그제야 싹싹 긁어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쌀튀밥 3972개, 아니... 3972번 그 녀석 생각.


"계상아."


왜 하필이면 헤어짐을 말하던 그 찻집에 그 자리인지.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민망한 듯 짧게 머뭇대다 구석에 앉아있는 계상을 발견하고는 금새 몸을 낮춰 앉았다. 다른 곳으로 가자 말하려 했지만, 이미 계상이 종업원에게 홍차 두 잔을 시켜놓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져둔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여념이 없어 그녀는 그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울려 퍼지는 캐롤이 귓가를 맴돌아 되내어지고 있는지도.


"왜 이렇게 연락이 안돼?"


"그래서 내가 연락 했잖아."


따근하게 김이 일어나는 발간 홍자 두 잔이 탁자에 놓여지고, 계상은 아무런 이유도 달지 않은 채 그리 대답했다. 방학을 하고 나서 제대로 얼굴 한번 볼 수 없었던 계상이 그래도 크리스마스라 저를 불러냈다는 생각에 그녀는 일단 안심이 되는 것 같다. 설탕을 한 스푼 넣어 살살 젓는 그녀의 손짓에 발간 홍차가 뱅그르르 원을 그려낸다. 예전엔 설탕 반 스푼이지 않았었나. 그녀의 입맛이 변했는지 저의 기억력이 좋지 못한 탓인지. 어찌 되었건 그녀에게 설탕을 넣어주던 제 몫도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 계상이 짧게 웃어버린다.


"우리 어디 갈래? 너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시내야."


"응?"


분명 전화로 할 말이 있다고 말했었는데. 그녀가 답지 않게 다른 이야기들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어서 계상이 조용히 그녀를 불러본다. 가만히 눈을 들어 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계상이 담담한 미소를 하나 내보였다. 캐롤 하나가 끝나버리고, 잠깐동안 찾아온 침묵이 갑자기 어색해졌는지, 아니면 참 오랜만에 보는 계상의 미소라 마음이 살짝 놀라버린건지. 그녀가 계상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계상이 말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어 차분히 그리 말한다.


"나... 너 많이 좋아했었다."


나른하게 흘러나오는 캐롤의 제목을 헤아리기도 전에 계상의 이야기가 먼저 그녀의 머리 속에 들어왔다. 어느 하루 빼놓지 않고 나누던 웃음과 차 한잔이었다고. 그래서... 잘가란 말 가슴에 뭉쳐 차마 못하고 목만 메었었다고. 물밀 듯 밀려오는 감정의 실태래가 뒤엉키듯 그녀가 아무런 말도 없이 떨리는 눈으로 계상을 바라보고만 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냐고, 도무지 파악 할 수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는 계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려 애를 쓰는 듯 하다.


"진심...이었어."


어지럽게 핀 들국, 반지했으면 좋겠다 싶을만큼 그녀가 좋았다. 그녀가 낯선 어깨를 안고 푸른 미소를 던질 때에도 시린 마음 그녀에게 보일까 황망히 보고만 있었다. 수년간 쌓아온 사랑이 무너지는 순간은 그도 그럴 것이니, 그렇게 마음을 저당잡혀 참 오랜동안 기다려왔다. 허나 시계 바늘 거꾸로 돌리면서 가다보면 아스라히 알게 될 것이다. 안된다는 것을. 해도 해도 아무리 해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 아니었니."


멍하니 굳어선 그녀가 잔뜩 긴장을 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묻는다. 계상이 담담히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불안해하는 표정을 그렇게 보고만 있다. 하고 싶은 말 많을 줄로 안다. 허나 듣지 않기로 한다. 그녀에게는 더이상 편안한 귀가 되어줄 자신이 없다. 가슴 속에 그냥 묻어두고 살자. 답답한 사연, 말해서 무얼해. 생각을 빼앗아 매여 놓을지라도 내 마음 둘 사람은 그냥 놓아두라고, 계상이 차분한 표정으로 여전히 그녀를 조용히 쳐다만보다 입을 달싹였다.


"너, 내 머리가 무슨 색인 줄 아냐."


난데없는 질문에 그녀의 눈빛이 잠시 머무른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무슨 의도일까 헤아리려 복잡해지는 머리를 추스리려는 그녀의 표정에 계상이 짧게 미소짓다 이내 그에 대한 답을 달아준다.


"곰팡이 색깔이다. 그러니까... 유통기한이 지났단 뜻이야."


멍한 표정의 그녀에게 계상이 구김없는 미소를 보이고는 자리를 털어 일어났다. 안녕, 이렇게 몸을 낮추어 인사하는거다. 그래, 이렇게 안녕하는거다. 좋은 날씨의 어느 가을날, 적당하게 서늘한 바람 속에서라도 다시는 만나지지 말기를. 한때는 뜨거웠던 그리움의 얼굴을 나도 모르게 조금씩 놓쳐버릴 뿐. 그래도 한정없이 미워지면 전부 다 잊어도 상관 없다고. 가슴 저린 아픔을 삭히지 않아도 되는, 이제는 일기장 가득 추억이 되어버린 이름 석자. 계상이 탁자를 벗어나 그녀를 놓아두고 멀어져간다.


"계상아."


가만히 멈춰선 계상이 천천히 뒤돌아보니 그녀가 고개를 돌려 계상에게로 눈을 놓아두고.


"다른 사람.. 있는거니...?"


무겁게 내려앉은 그녀를 계상이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제 손에 들려있던 뻥튀기를 그녀에게로 던져주었다. 휘익- 소리와 함께 제게로 달려드는 뻥튀기를 받아들고 그녀가 다시금 계상을 쳐다보니, 계상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듯 그녀에게 손짓을 하며 짧게 웃는거다.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는 말투로 대답하길.


"내일 아침, 니네집 요구르트한테 물어봐라."


그대로 발길을 돌려, 그녀의 황당해하는 표정을 살필 새도 없이 계상이 차값을 계산하고는 문을 밀어 열었다. 덜컹-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계상이 북적이는 사람들 틈으로 발길을 내놓는다. 아직 어두워질 시간은 아니지만 낮부터 내내 어둑해진 하늘이 그리 쓸쓸하지 않은 것은 홀가분한 기분 탓인가. 다정하게 팔장을 끼고 제 옆을 부대끼는 사람들 속에서 느슨하게 걸음을 옮기며 계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빼어 물었다. 틱- 500원짜리 분홍 야광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후우- 내뱉어보니, 담배연기보다 입김이 우세하다. 호영의 입김이 싫다며 혼자서도 온전히 설 수 있다고 발자국 소리를 쿵쿵내며 걸었던 때가 언제였더라. 그 때엔 하늘도 저 멀리 달아나며 울고 있었는데. 이만큼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것들과 잊어버린 것들이 네가 떠나간 자리에 놓이려는지. 계상이 담배를 입에 물고 어둑하게 내려앉은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뭐지...?

시야에 흐릿하게 닿아오는 무언가를 느끼며 그것이 무엇인가 생각할 때 즈음, 와아- 첫눈이야...라고 누군가 외쳤던가. 계상이 어지럽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속에 꼼짝없이 멈춰서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눈이 오네. 그 녀석 모습 갖추어 떠올리기도 전에, 그 녀석에 대한 그리움 쌓이기도 전에 어느새 공간을 가득히 메울 듯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비는 떠난 사람을 원망하게 하고 눈은 잊어버린 사람까지 떠오르게 하는거란다. 아직도 많은 생각을 다듬어야 하는데 첫눈치고는 너무 펑펑내려 계상이 자꾸만 돌아보며 다시금 걸음을 옮겨본다.

손호영, 보여? 첫눈이 내려.

생각없이 무작정 생각나는 사람. 그 녀석의 약속을 들어주려는지 보란 듯이 흰 눈이 하득하득 흩어지며 내린다. 지금쯤 그 녀석은 무얼할까. 지구가 시들까봐 하늘에서 뿌려주는 거라며 개구장이처럼 눈싸움을 할런지, 아니면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 단체로 비듬을 터는 날이라고 신기한 상상을 이야기할런지, 그도 아니면 육교 위에 올라 한 시라도 더 빨리 눈을 맞으려 안달이 났을런지. 계상이 그런 녀석과 함께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매달려 있다가, 눈 앞에 정신없이 흩날리는 눈송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잊어버렸다가. 온 몸이 젖어도 외로웁지 않게 계상이 그리 지치도록 걸어간다. 담배 한 대가 다 타들어가고 꽁초를 버리며 손을 털어내고는 계상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시린 손으로 전화기를 움켜쥐고 생각나는대로 번호를 눌렀다. 하늘의 별이 흰 눈 되어 쏟아지는 오늘에사 호영의 선물을 고스란히 받은 것 같아서.


"태우냐. 나 오늘........"


다시는 사랑하지 않는다 했다. 다시는 사랑따위 못한다고 했다. 다시는 사랑따위 없다고도 했다.

그렇게 인생은 모 아니면 도라지만.

그렇다면, 그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차버렸다."

maybe...

.


.


.


.

"덤벼, 기집애!! 이기는 사람이 씨방새를 갖는거다."


머리채라도 잡고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는 듯 강의실 한 켠에서 방방 뛰고 있는 데니의 앙칼진 목소리에 태우는 기겁할 듯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그 앞에 서있는 태우의 후배는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질려가는 중이다. 저 괴상한 성질머리 덕에 새학기를 맞이하자마자 캠퍼스에 김태우의 연인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났으니 수근덕거리는 다른 학생들을 신경쓸 필요는 없다 치자. 허나 태우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아니 적어도 학교에 얼굴은 들고 다니게 최소한의 배려는 해줘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그 또한 알게 뭐냐. 태우를 곧잘 따르는 새내기 후배에 대한 질투심에 불타올라 강한 집착을 한껏 선보이며 데니가 옆에 있던 휴지통을 들어 마구마구 휘둘러대며 와다다다- 소리와 함께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야, 안데니. 이러지 말라니까. 소연인 그냥 내 후배야."


태우에게 허리를 잡혀 옴짝달싹도 못하고, 힘으로 제압하기는 이미 글러먹을 것을 알면서도 죽어라 손톱을 바짝 세우고 몸부림을 치는 데니의 행태에 주위 사람들은 낄낄거리기 시작했고 태우의 후배는 차마 웃지도 못한 채 벙찐 표정으로 데니를 신기하게 바라볼 뿐.


"소연아, 다음에 보자."


"네, 태우선배. 제가 전화할게요."


"그래."


꾸벅 인사를 하며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 얼른 자리를 뜨는 후배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태우의 모양새에 데니는 눈이 뒤집혀 더욱 강도 높은 발버둥을 쳐댄다. 이는 죄다 북두신권의 맛을 보지 못한 한낱 졸개의 파렴치한 짓거리다 생각하며, 데니는 가슴 속에서 용솟음치는 분노를 삭힐 길이 없어 씩씩거렸다.


"어따 전화를 해, 하소연!! 에쭈? 도망가는거냐?! 어이?!!"


정말 어디에다 하소연도 못하게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질투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소연의 뒤통수를 향해 끊임없이 괄괄거리는 데니의 입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탁- 틀어막고는 태우가 관중을 향해 베시시 웃어보였다. 태우의 손에 입이 막혀 질질 끌려나가면서도 발을 동동 구르는 데니가 쪽 한번 못쓰고 주르륵 딸려나가고. 건물 밖을 빠져나와서야 태우가 데니를 놓아주고는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 데니는 발을 쿵쿵 구르며 분하다는 듯 태우를 죽일 듯 노려보는거다.


"너 수업있잖아. 빨리 들어가, 벌써 늦었다."


"야, 씨방새."


"왜."


"바람 피지마!!!"


바람 피울 틈이라도 좀 줘놓고 저런 말을 하지. 태우가 푸욱- 웃으니 데니는 매운 눈매를 풀지 않고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야멸차게 태우를 야릴 뿐. 아마도 소연과 태우가 엊그저께 학생식당 저편에서 밥을 먹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 데니에겐 뇌리를 때릴만치 크나큰 충격이었나보다.


"바람 안 필테니까 그럼 너도 반바지 입지마."


"우엑-"


데니가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으며 우엑거린다. 이제 곧 여름도 다가오는 이 따스한 봄날에 태우가 또하나의 보수적인 정책을 내놓고 만거다. 훤히 다리 드러내놓고 다니면 싫다고 반바지를 입지 말라했던가. 워낙에 마른 체형이라 그닥 반바지를 즐겨입지는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매번 꼭꼭 잠근 단추에 목이 졸려 산지 벌써 몇개월이더냐. 둔하디 둔한 도우너의 바이올린이 탐나 덜컥 받아들인 것이 후에 이런 꼴로 되돌아올 줄이야. 속았다, 속았어. 징하게 속았다구. 데니가 흥- 싸늘한 바람을 만들며 태우의 배를 꾸욱 손가락으로 찔러대더니 이내 뒤돌아 멀어져간다. 그런 데니의 뒷모습이 안 보일때까지 태우가 흐믓하게 지켜보다 이내 동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은 또치녀석이 그간 저와 땀흘리며 연습한 테니스에서 낙제를 면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끼익-

아직 친구놈은 안 왔나. 점심 시간을 넘어 이제 막 오후 1시를 향해가는 시계를 보고는 30분쯤 여유가 있다는 생각에 태우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있으면 호영이 복학 신청을 하러 학교에 들른다 했다.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하여 수업이 있는 데니 대신 점심도 굶어가며 기다리기로 했으니. 얼마전 어머니가 퇴원을 하고 위험 수당이 많다하는 창문 닦기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마련했다며 좋아하던 호영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태우가 시간을 떼울 거리를 찾으며 두리번거리다 고개를 내려 바라보니, 눈에 띄는 건 멀끔히 치워진 탁자 위의 노트 하나.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하다 했더니 이게 얼마만에 보는거지. 태우가 어느새 손떼가 많이 묻어 바래져있는 노트를 들어보고는 왠지 모를 기대감에 살짝 미소지었다. 그간 저와 함께 시간표를 맞추어 새학기를 보내고, 또한 매일같이 데니와 유치한 실랑이로 어설픈 대결을 벌이고 있는 별 다를 바 없는 계상에게 그 누구도 호영에 대한 생각을 묻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도 호영에 대한 생각을 의심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태우는 노트를 살짝 열어보려다 잠깐 망설이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읽어도 될까. 그간 뭐라도 써놓기는 했을까. 그 꼼꼼한 놈이 칠칠맞게 흘렸을 리는 없고, 굳이 왜 이걸 여기다 놓고 간걸까. 다시 내게 돌려준다는 의미일까. 그건....무얼 뜻하는걸까. 태우는 복잡하게 엉켜가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노트를 펼쳐 들었다. 어쩐지... 설레어온다.


동방 창가에 서서 30분이 훌쩍 넘도록 이 생각 저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태우가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한가한 캠퍼스로 나와 섰다. 흠뻑 숨을 한번 들이쉬고 훗- 짧게 웃음을 짓고는 밝게 일렁이는 하늘빛에 기분좋은 걸음을 내놓는다. 건물을 한참동안 벗어나 계단을 밟고 내려 운동장 앞에 서니, 운동장을 가로질러 저만치 건너편에 보이는 여전히 노란빛인 머리카락. 봄햇살이 닿아 유난히 반들거리는 머리빛이 눈부시기까지 해서 태우는 친구놈의 노트를 옆에 끼고 말갛게 웃었다. 벌써 복학 신청서를 받아왔는지 스탠드에 홀로 앉아 괜히 가방을 뒤적거려 수첩도 꺼내보고 또 무어라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는 호영이다. 한줄기 바람결에 눈처럼 흘러내리는 벚꽃잎들에 호영이 고개를 들어 꽃잎을 손으로 받아볼 냥 뻗어보더니 이내 헤실 웃고는 다시금 신청서를 쓰는데 열중.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 몸을 흔들거리며 꼭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런 호영을 말없이 지켜보던 태우가 더이상 호영이 기다리지 않게 걸음을 내어놓으려다 순간 멈칫. 저만치 호영을 향해 다가가는 낯익은 그림자 하나에 태우가 그대로 멈춰섰다. 고개를 내리고 글자를 적고 있는 호영에게로 참 오래도록 기다려온 계상이 그렇게 다가가고 있었으므로. 그들 앞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벚꽃잎들처럼 친구놈이 노트에 빼곡히 적어놓은 글자들이 태우의 머리 속을 마구 치고 들어온다.

손호영, 그 녀석을 만난지 286일째.


개수를 알아낸 뻥튀기 175봉지, 352795개.

술 대신 마신 와사비 물 14통, 4900 미리리터.

산책 대신 1092번 버스 63회 순환.

입가심으로 부셔 먹은 체리맛 사탕 187개.

저녁 대신 먹은 3개에 천원하는 붕어빵 31봉지, 93개.

매일 지갑에 들고 다니는 5천원짜리 지폐 12장.

요시모토 바나나에 새겨진 윤계상 반복 읽기 73번.

전화번호부에 새겨진 호영이란 이름 328명, 그 중 손호영 15명.

밤마다 넘은 줄넘기 횟수 총합 23944번.


그리고,

이별에 대처하는 윤계상의 자세.


"혹시 불 있냐?"


처음 만난 그 자리로 되돌아가기.

짧게 떨어지는 물음에 호영의 고개가 반짝 들리고 제 앞에 담배를 물고 서있는 계상의 모습에 호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반갑다는 말도, 오랜만이란 말도 필요 없다. 매일 호영이 닦아놓은 반질반질 윤을 내는 창문에 제 손도장을 꾸욱 눌러찍고 돌아왔으니까. 아무런 말도 못하고 멍하니 굳어있는 호영에게로 계상이 허리를 굽혀 입에 문 담배를 들이밀었다. 계상의 눈동자가 호영을 향하여 초점을 잡고, 담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 닿아 까맣게 반들거린다.


"계상아, 계상..아."


누가 나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주었는가. 계상이 흔들림 없이 눈동자를 호영에게로 놓아두고 가만히 손을 뻗어 무언가 말을 하려는 호영의 손을 꼬옥 쥐어준다. 여전히... 따뜻하다. 그 마음 어디에도 있지 않은 차가운 말은 더이상 싫다고. 바싹 마른 입술에 달착지근하게 샘솟아 혀 끝에서 멈춰선 보고 싶었다는 한마디. 무엇도 점점 보이지 않고 무엇도 점점 들리지 않고, 그러더니 내 안에 내가 도무지 보이지 않고 어쩌다 툭- 눈이 마주쳐버린, 나의 장점보다 나의 단점에 더 익숙한 사람. 그러하니 다, 내 탓 투성이다. 예기치 않은 일들로 더딘 걸음일지라도, 잊지 못해 지새던 밤도 가고 싶어 안달이 나던 시간도 모두 젖혀두고 나, 네게로 왔다. 이제부터 사랑은 내가 할테니 사랑 아닌 것은 네가 다 해달라고 하려는지. 가만히 손을 쓸어잡고 계상은 아무런 말도 없다. 이미 말을 하지 않고도 말을 하는 방법을 녀석에게서 배웠으므로. 언제나 마음에 걸렸던 말들, 유감없이 풀어놓으며 계상이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부드러운 미소를 내어놓았다. 어깨 한번 으쓱하며 웃고 말게.

내게도 그런 말 하나는 있다. 더이상 슬프게 더듬지 말고 공연히 변두리로 헤매지 말고. 안개 속에 묻혀서라도 나즈막히 속삭이려다 입 안에서 삼키고만. 닳지도 해지지도 않는 허공에 하고 싶은 말 하나는 있다.

널 사랑해서야, 이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도.

웃고 있는 나나 웃지 않는 너나 가진 것이란 사랑 하나 이별 하나. 그래도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틀림없이 이제는 나 너를 사랑할 수 있다. 그래, 사랑할 수 있을거다. 아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별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예감이 가득할 뿐이다. 이제 그만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처음 만난 그 날처럼 그 미소를 준다면.

그의 호사스럽지 않은 고백이 마음에 꽉 들어차서 아련한 현기증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호영이 가만히 손으로 전해져오는 느낌에 계상을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환하게 웃어준다. 둘 사이로 흘러내리는 꽃잎이 첫눈보다 더 예뻐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그 많은 사람들 중 오로지 그 계상에게만 몸이 기울어지듯 호영이 천천히 몸을 숙여 계상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내었다. 그리고는 비어있는 계상의 입술에 제 입술을 그대로 묻어버린다.

사랑이라 불리워도 좋고 그렇지 않다해도 상관없다. 그 감정만 퇴색되어지지 않는다면 그 무어라도 상관 없는게다. 더러는 장난같은 말장난이라 할테고 더러는 길들여진 미운정이라 할테고 또 더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유쾌함이라 할테니.

짧게 입술을 떼어내는 호영이 금새 당황한 듯 눈이 동그래진 계상을 향해 낮은 웃음을 만들어놓고 하얗게 웃었다. 세상 사람들 훤히 다 보는 곳에서 이렇게 민망한 수작을 부렸으니 강박 윤계상 어지간히 당황했을 터라. 오랜동안 기다리게 한 벌이라도 주려한건지. 호영의 활짝 웃는 모습에 계상이 벙찐 표정을 추스리며 제 앞에 놓인 녀석을 멀쭘히 바라보다 이내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버린다.

그래, 그렇다면 우리 두사람만의 언어를 만들자.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두 눈이 사라져버릴만치 웃고 있는 호영과 계상을 보며 태우는 흐믓하게 뒤돌아섰다. 사랑이란 흔하디 흔한 말이 아닌, 사랑이란 진부하고 촌스러운 표현이 아닌, 둘만의 언어가 무엇인지, 오랜 세월이 지난다 한들 태우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허나 그 역시 상관없지 않을까. 제 손에 들려있는 노트를 만지작거리며 태우가 이내 걸음을 내놓아 멀어져가기 시작한다. 사랑에 다친 친구놈을 어느 별이 받아줄 것인가. 언젠가 그리 물으면, 내 방식의 우주가 있어. 내 눈에 들어오는 크기로, 기억하는 넓이로. 친구놈은 그리 대답할거다. 행복한 미소를 하나 입에 걸어놓은 태우의 뒤로 호영을 향한 계상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온다.


과연 지구인들은 알고 있을까.

저 떠돌이별이 친구놈의 오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이것이, 사랑이 아닌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야, 다시해."

제 9장,


코딱지가 오백원을 만난지 287일째,

외계인, 지구를 정복하다.

Toplist

최신 우편물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