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것은 가짜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 미학과 예술론- "연암의 글은 한군데 못질 한 흔적이 없는데도 꽉 짜여져 빈틈이 없다. 그의 글은 난공불락의 성채다. 방심하고 돌진한 장수는 도처에서 복병과 만나고 미로와 만나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책 갈피에 써둔 메모다. 92년 7월 27일이란 날짜가 쓰여 있다. 또 97년 6월 20일의 메모에는 "서늘함은 사마천을 닮았고 넉살 좋음은 장자에게서 배운 솜씨다. 소동파의 능청스러움, 한유의 깐깐함도 있다. 불가에 빠진 사람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노장으로 압도하고, 다시금 유자의 근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고 적혀 있다. 1999년 8월 정 민 讀燕放筆序 ============================================= ▲ 위로 讀燕放筆·1 이미지는 살아 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장차 괴상하고 진기하고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것을 보려거든 먼저 선무문宣武門 안으로 가서 코끼리 우리를 살피면 될 것이다. 내가 황성皇城에서 코끼리 16마리를 보았으나, 모두 쇠로 만든 족쇄로 발을 묶어 두어 그 움직이는 것은 보지못하였었다. 이제 열하熱河 행궁行宮의 서편에서 코끼리 두 마리를 보매, 온몸을 꿈틀대며 움직이는데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 하였다. 내가 일찍이 새벽에 동해 가를 가다가 파도 위에 말같은 것이 수도 없이 많이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모두 봉긋하니 집과 같아 물고기인지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길래 해 뜨기를 기다려 자세히 보려 했더니, 막상 해가 바다 위로 떠오르려 하자 파도 위에 말처럼 섰던 것들은 하마 벌써 바다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열 걸음 밖에서 코끼리를 보고 있는데도 오히려 동해에서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김새가 몸뚱이는 소인데 꼬리는 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다 범의 발굽을 하고 있다. 털은 짧고 회색으로, 모습은 어질게 생겼고 소리는 구슬프다. 귀는 마치 구름을 드리운 듯 하고, 눈은 초승달 처럼 생겼다. 양쪽의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람이나 되고, 길이는 한 자 남짓이다. 코가 어금니보다 더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은 자벌레만 같고, 두르르 말고 굽히는 것은 굼벵이 같다. 그 끝은 누에 꽁무니처럼 생겼는데, 마치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가지고는 말아서 입에다 넣는다. 혹 코를 주둥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어, 다시금 코끼리의 코가 있는 곳을 찾기도 하니, 대개 그 코가 이렇게 길 줄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간혹 코끼리는 다리가 다섯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혹은 코끼리 눈이 쥐눈과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온 마음이 코와 어금니 사이로만 쏠려서 그 온 몸뚱이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좇다 보니 이렇듯 앞뒤가 안맞는 비유가 있게 된 것이다. 대개 코끼리의 눈은 몹시 가늘어 마치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떨 때 그 눈이 먼저 웃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어진 성품이 바로 이 눈에 담겨 있다. 강희康熙
때에 남해자南海子에 사나운 범 두 마리가 있었다. 오래 되어도 능히 길들이지 못하자, 황제가 노하여 범을 몰아다가 코끼리 우리로 들여보낼 것을 명하였다. 코끼리가 크게 놀라 한 번 그 코를 휘두르매 범 두 마리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코끼리가 범을 죽일 마음은 없었는데, 냄새 나는 것을 싫어하여 코를 휘두른다는 것이 잘못 맞았던 것이었다. 아아! 세간의 사물 가운데 겨우 털끝같이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일컫지 않음이 없으나,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일일이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를 가지고 '천天'이라 하고, 성정을 가지고는 '건乾'이라 하며, 주재함을 가지고는 '제帝'라 하고, 묘용妙用을 가지고서는 '신神'이라 하여, 그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이고 일컬어 말하는 것도 몹시 제멋대로이다.
이에 이기理氣로써 화로와 풀무로 삼고, 펼쳐 베품을 가지고 조물造物로 여기니, 이것은 하늘 보기를 교묘한 장인匠人으로 보아 망치질하고 끌질하며, 도끼질과 자귀질 하기를 잠시도 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이 초매草昧, 즉 혼돈을 만들었다. 天造草昧"고 하였는데, 초매라는 것은 그 빛이 검고 그 모습은 흙비가 쏟아지는 듯 하여, 비유하자면 장차 새벽이 오려고는 하나 아직 새벽은 되지 않은 때에 사람과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캄캄하여 흙비 내리는 듯한 가운데에서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이 과연 어떤 물건인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비유컨데 국수집에서 밀을 갈면 가늘고
굵고 곱고 거친 것이 뒤섞여 땅으로 흩어진다. 대저 멧돌의 공능은 도는데 있을 뿐이니, 애초부터 어찌 일찍이 곱고 거친 것에 뜻이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말하는 자들은 "뿔이 있는 놈에게는 윗니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마치 사물을 만듦에 모자란 것이라도 있는 듯이 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크게 웃으며 말하리라. 이것은 마음으로
헤아림이 미치는 바가 오직 소나 말, 닭이나 개에만 있지, 용이나 봉황, 거북이나 기린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이를 죽이고 마니 그 코는 천하에 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르며 서있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 대저 코끼리는 직접 눈으로 보는데도 그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데, 또 하물며 천하 사물은 코끼리보다 만배나 됨에랴!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 《주역》을 지으실 적에 '상象'을 취하여 이를 드러내었던 것은 만물의 변화를 다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몇 해전 일이다. 강의 시간에 연암의 글을 강독하고서 평설을 써오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한 학생이 과제 끝에 쓴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이라는 구절이 내 시선을 끌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인용한 대목이었다. 에코의 이 책에는 연암의 코끼리 이야기와 아주 비슷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듣거라, 아드소. 수수께끼 풀이는, 만물의 근본되는 제 1원인으로부터 추론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수한 자료를 꾸역꾸역 모아 들이고 여기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면 저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뿔이 있는 짐승의 예를 들어 보자. 왜 짐승에게 뿔이 있겠느냐? 뿔이 있는 짐승에게는 윗니가 없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면 유념해 두어라. 그런데 윗니도 없고 뿔도 없는 짐승도 있으니 낙타가 바로 이런 짐승이다. 윗니가 없는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라는 것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너는, 이빨이 없어서 제대로 씹을 수 없으니까 이런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나 있어서 소화를 도모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도 상상할 수 있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뿔은 어떨까? 너도, 짐승의 머리에 뿔이 자라는 이유를 상상할 수 있을 게다. 머리에 골질조직骨質組織을 솟아나게 함으로써, 부족한 이빨의 수를 보충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 낙타에게는 윗니가 없다. 윗니가 없으면 위가 네 개 있고, 뿔이 있어야 마땅한데, 위가 네 개인 것은 분명하지만 뿔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방어 수단이 없는 짐승의 머리에만, 몸 속의 골질이 뿔로 자라난다. 그러나 낙타의 가죽은 몹시 두껍다. 따라서 낙타에게는 뿔이라고 하는 방어 수단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원칙이 있을 수 있다고 해야겠느냐......자연 현상에서 하나의 법칙을 이끌어 내자면 우선 설명되지 않는 형상에 주의하면서,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갖가지 일반적인 법칙을 서로 연계시켜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뜻밖의 결과들이 특수한 상황에서 서로 관련되는 데서, 혹은 여러 법칙을 두루 싸잡는 하나의 실마리가 잡혀 나온다. 이 실마리를, 유사한 경우에 두루 적용시켜 보거나, 다음 발전 단계를 미루어 헤아려 보면, 마침내 자기 직관이 옳은 지 그른 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이윤기 옮김, 1992, 열린책들) 하권 483쪽) 연암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 번째 화두는 코끼리이다. 흥미롭게도 에코는 낙타라는 기호를 가지고 연암과 비슷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코끼리나 낙타라는 기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소나 말, 개나 돼지에만 익숙해진 눈에 코끼리나 낙타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의미들로 가득차 있다. 위 에코의 인용은 혼란스런 기호들 속에서 '하나의 법칙'에 접근해 가는 인식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앞선 연암의 문답과는 주객의 자리가 바뀌어 있다. 앞서 연암의 글에서 '하늘의 이치'를 들먹이며 예외적 존재를 인정치 않으려다 연암에게 공박당하는 '설자說者'의 태도는 윌리엄 수도사에게서 보다 세련된 논리를 갖추고서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나는 여기서 동서양 사고의 한 차이를 읽는다. ================================================== ▲ 위로 讀燕放筆·2 까마귀의 날갯빛 통달한 사람은 괴이한 바가 없지만 속인은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고 보니 괴이한 것도 많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통달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사물마다 눈으로 직접 보았겠는가? 아!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乳金 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 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아! 까마귀를 검은 빛에 가두었으면 충분한데도, 다시금 까마귀를 천하의 온갖 빛깔에다가 가두었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빛깔[色] 가운데 깃든 빛[光]인 줄을 알겠는가? 검은 것[黑]을 일러 어둡다[闇]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물은 검기[玄]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칠[漆]은 검은[黑]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빛깔 있는 것 치고 빛이 있지 않는 것이 없고, 형상[形] 있는 것에 태態가 없는 것은 없다. 미인을 보면 시를 알 수가 있다. 그녀가 고개를 숙임은 부끄러운 것이다. 턱을 괸 것은 한스러움을 나타낸다.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눈썹을 찌푸림은 근심스러운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림이 있을 때에는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바라는 바가 있을 때는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내 조카 종선宗善은 자가 계지繼之인데 시에 능하다. 한가지 법도에만 얽매이지 아니하여 온갖 체를 두루 갖추었으니, 우뚝히 동방의 대가가 된다. 성당盛唐의 시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한위漢魏의
시가 되고 또 송명宋明의 시가 된다. 겨우 송명인가 싶어 보면 다시금 성당으로 돌아가 있다. 달사達士와 속인의 차이를 어디에서 찾을까? 처음 보는 어떤 물건이나 경험해보지 않았던 어떤 일을 그 앞에 두어 보면 금세 구별할 수가 있다. 달사는 이미 익숙히 알았던 일이기라도 한듯이 침착하게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속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을 받아들일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처음 보기는 둘다 마찬가진데 한쪽은 속수무책으로 당황하여 화를 내고, 다른 한쪽은 태연자약 능수능란하게 처리해 버린다. 왜 그럴까?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검은 까마귀가 무슨 잘못이 있던가? 외다리로 고고히 서 있는 해오라비, 그 청순한 고결을 사람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정작 그는 지금 주린 제 뱃속을 채우려고 물 속의 고기를 한껏 노리고 있는 중이다. 까마귀의 반포지은反哺之恩은 어떨까? 늙은 제 어미를 위해 먹이를 토해내는 그 갸륵한 마음도 같이 욕을 해야할까? 까마귀는 검은 날갯빛을 하고도 제 삶을 불편함 없이 잘 살아간다. 그것을 보고 불편한 것은 정작 까마귀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을 보고 행복한 것은 사실 해오라비가 아니라 사람이다. 왜 까마귀를 더럽다 하는가? 해오라비가 고고할
것은 또 무엇인가? 왜 내가 알고 있는 사실, 내가 믿고 있는 가치만을 고집하는가? 왜 그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욕하는가? 모습이 추한대도 볼 만한 사람이 있고, 비록 추하지 않지만 볼 만한 구석이라곤 없는 사람이 있다. 글이 문리는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고, 비록 문리는 통하지만 지극히 혐오스러운 것도 있다. 이것은 천박한 사람에게는 쉽게 알려주지 못하는 이치이다. 사람들은 형만 보고 태는 보지 않는다. 겉모습에만 현혹된다. 그래서 언제나 허전하다. 늘 속고만 산다. 치통을 앓아 뺨에 한 손을 가볍게 대고서 살짝 찌푸린 양귀비의 표정은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슬픈 이야기에 젖어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쪽진 머리를 매만지는 번희樊姬, 그녀의 눈가를 촉촉히 적시는 눈물은 얼마나 고혹적이었을까? 그녀에게 왜 빚어 놓은 듯이 단정하게 앉아 있지 않느냐고 나무랄 것인가? 그녀더러 어째서 얌전히 머리를 길게 늘이지 않느냐고 야단할 것인가? 그래도 화가들은 굳이 '양비병치도楊妃病齒圖'를 즐겨 그리고, 연극 작가들은 번희의 쪽진 머리 매만지던 일을 소재로 희곡을 썼다(청나라 서위舒位는 《번희옹계樊姬擁 》라는 희곡을 남겼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여인의 요염한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점잖치 못하다고 무조건 나무랄 것인가? 장중한 아악雅樂의 정무正舞만을
옳다하여 빠른 박자로 손뼉치며 휘휘 돌아가는 북방 호무胡舞의 날렵하고 경쾌한 춤사위를 거부할 것인가? 근세의 잡극 중에 〈서상기西廂記〉를 공연하면 지루해서 졸음이 오는데, 〈모란정牧丹亭〉을 공연하면 정신이 번쩍 들어 귀 기울여 듣는다. 이것은 비록 여항의 천한 일이지만 백성들의 습속과 취향이라는 것이 때에 따라 옮기어 바뀐다는 것을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사대부가 옛 음악을 회복하려고 마음 먹고서 가락과 곡조가 바뀐 것은
모르고서 이에 갑자기 쇠북과 피리를 부수고 고쳐서 원래의 소리를 찾고자 한다면 사람과 악기가 모두 없어지기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어찌 화살을 따라가서 과녁을 그리고, 술 취함을 미워하면서 억지로 술 마시게 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정곡을 꿰뚫는 명궁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고 화살이 맞은 곳마다 쫓아가서 과녁을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화살이 과녁을 찾아가야지, 과녁이 화살을 찾아가는 법이 없다. 표적이 바뀌면 조준이 달라지듯, 시대가 바뀌면 취향도 바뀐다. 내가 쏘는 화살만은 반드시 과녁을 뚫어야 된다는 법이 없다. 여기서 억지가 생기고 무리가 따른다. 이미 달라진 옛 음악을 이제와 복원하려 한들 가능키나 하겠으며,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원래의 소리란 없다. 당시에는 그것도 변화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다. 있지도 않은 원래의 소리 때문에 지금 귀에 익은 소리를 버릴 수는 없다. 술 취해 비틀대는 꼴이 보기 싫거든 아예 술을 멀리할 일이다. 그런데 왜 싫은 술을 억지로 마시고 싫다는 술을 굳이 권하는가? =================================================== ▲ 위로 讀燕放筆·3 중간은 어디인가? 자무子務와 자혜子惠가 나가 놀다가 장님이 비단옷 입은 것을 보았다. 자혜가 휴우 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예전 황희黃喜 정승이 공무를 파하고 돌아오니, 그 딸이 맞으며 말하였다. 임백호林白湖가 막 말을 타려는데 하인이 나서며 말하기를, 이로 말미암아 논하건대, 천하에 보기 쉬운 것에 발만한 것이 없지만, 보는 바가 같지 않게 되면 가죽신인지 나막신인지도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런 까닭에 참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하고 그르다 하는 그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땀이 이로 변화하는 것 같은 것은 지극히 미묘하여 살피기가 어렵다. 옷과 살의 사이에는 절로 빈 곳이 있어 떨어지지도 않고 붙어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요 왼쪽도 아니니 누가 그 '가운데'를 얻을 수 있겠는가?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사랑하여 여룡驪龍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도 또한 그 구슬을 가지고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자패子 가 이를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내 시집의 이름을 삼을만 하다"하며 마침내 그 시집을 이름지어 《낭환집 丸集》이라하고는 내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자패에게 일러 말하였다. 진정지견眞正之見, 즉 참되고 바른 견식見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번에 살펴보려는 〈낭환집서 丸集序〉와 〈공작관문고자서孔雀 文稿自序〉는 바로 이 진정眞正한 견식의 소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연암의 글이 늘 그렇듯 이들 글 또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여러 겹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 글쓴이의 진의를 온전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장자가 산 가운데로 가다가 가지와 잎새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 베는
사람이 그 곁에 멈추고도 베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쓸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 없음을 가지고 그 타고난 수명을 마치게 되었구나"라 하였다. 장자가 산에서 나와 친구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친구가 기뻐 하인에게 거위를 잡아서 삶으라고 명하니, 하인이 묻기를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 줄 모르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자, 주인이 말하기를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라고 하였다. 숲 속의 큰 나무는 쓸모 없음으로 인해 제 타고난 수명을 누릴 수 있었고, 친구 집의 거위는
쓸모 없음으로 인해 제 목숨을 잃었다. 둘다 쓸모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이제 그 결과는 반대로 되었다. 혼란스러운 제자가 선생님은 어디에 처하시겠느냐고 하자, 장자는 천연스레 그 '가운데'에 처하겠노라고 대답한다. 글이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일 뿐이다.
저 제목에 임해 붓을 잡기만 하면 문득 옛 말을 생각하고, 억지로 경전의 뜻을 찾아 생각을 꾸며 근엄하게 하며 글자마다 무게를 잡는 자는, 비유하자면 화공畵工을 불러 진영眞影을 그리는데 용모를 고쳐서 나가는 것과 같다. 눈동자는 멀뚱멀뚱 구르지 않고, 옷의 무늬는 닦은 듯 말끔하여 평상의 태도를 잃고 보면 비록 훌륭한 화공이라 해도 그 참 모습을 그려내기가 어렵다. 글을 하는 것도 또한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말은 반드시 거창할 것이 없으니, 도道는 호리毫釐에서 나뉘어 진다. 말할 만한 것이라면 기왓장 자갈돌이라 해서 어찌 버리겠는가. 그런 까닭에 도올 은 흉악한 짐승인데 초나라 역사책이 이름으로 취하였고, 사람을 몽둥이로 쳐서 묻어 죽이는 자가 극악한 도적임에도 사마천과 반고班固는 이에 대해 서술하였다. 글을 하는 자는 다만 그 참됨을 추구할 뿐이다. 이로 볼진대 얻고 잃음은 내게 달려 있지만 기리고 헐뜯음은 남에게 있다. 비유하자면 이명耳鳴이나 코골기와 같다.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하였다. "얘! 너 이 소리를 들어 보아라. 내 귀가 우는구나. 피리를 부는 듯, 생황을 부는 듯, 마치 별처럼 동그랗게 들려!" 옆의 아이가 귀를 맞대고 귀기울여 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이 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일찍이 시골 사람과 함께 자는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 게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하거나 한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며, 불을 부는 듯, 솥이 부글부글 끓는 듯, 빈 수레가 덜그덕거리는 듯하였다. 들이마실 때에는 톱을 켜는 것만 같고, 내쉴 때에는 돼지가 꽥꽥거리는 듯하였다. 남이 흔들어 깨우자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내가 언제 코를 골았는가?"하는 것이었다. 아아! 자기가 혼자 아는 것은 언제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 걱정이고,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남이 먼저 앎을 미워한다. 어찌 다만 코와 귀에만 이같은 병통이 있겠는가? 문장 또한 이보다 심함이 있을
뿐이다.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하니 하물며 그 병 아닌 것임에랴! 코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는 것에 성을 내니, 하물며 그 병임에랴! 그러므로 이 책을 보는 자가 기왓장 자갈돌이라 해서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畵工의 번지는 먹에서 흉악한 도적의 뻗친 수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명을 듣지 않고 내 코골기를 깨닫는다면 작가의 뜻에 거의 가까워 질 것이다.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 글이란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쓴다. 그런데 사람들은 붓만 잡으면 내 생각을 어찌해야 남에게 오해없이 충분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어찌하면 좀더 멋있게 폼나게 쓸 수 있을까 하는 궁리만 한다. 예컨대 초상화를 그리겠다면서 잔뜩 분장하여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그림을 그리게 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 ▲ 위로 讀燕放筆·4 눈뜬 장님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나와 바위에 부딪치며 사납게
흘러간다.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결, 구슬피 원망하는듯한 여울은 내달리고 부딪치고 뒤엎어지며 울부짖고 으르렁대고 소리지르니, 언제나 만리장성마저 꺾어 무너뜨릴 기세가 있다. 만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기병, 만대의 대포와 만개의 북으로도 그 무너질 듯 압도하는 소리를 비유하기엔 충분치 않다. 모래 위에는 큰 바위가 우뚝하니 저만치 떨어져 서 있고, 강가 제방엔 버드나무가 어두컴컴 흐릿하여 마치도 물 밑에 있던 물 귀신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사람을 놀래킬 것만 같고, 양옆에서는 교룡과 이무기가 확 붙들어 나꿔채려는 듯 하다. 어떤 이는 이곳이 옛 싸움터인지라 황하가 이렇듯이 운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는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내 집은 산 속에 있는데,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다. 매년 여름에 소낙비가 한 차례 지나가면 시내물이 사납게 불어 항상 수레와 말이 내달리고 대포와 북소리가 들려와 마침내 귀가 멍멍할 지경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 비슷한 것에 견주어 이를 듣곤 하였다. 깊은 소나무에서 나는 퉁소소리는 맑은 마음으로 들은 것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소리는 성난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개구리 떼가 앞다투어 우는 소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것이고, 일만 개의 축筑이 차례로 울리는 소리는 분노하는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천둥이 날리우고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는 놀란 마음으로 들은 까닭이요,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는 운치있는 마음으로 들은 때문이다. 거문고의 높은 음과 낮은 음이 어우러지는 소리는 슬픈 마음으로 들은 것이요, 문풍지가 바람에 우는
소리는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듣는 소리가 모두 다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은 단지 마음 속에 생각하는 바를 펼쳐놓고서 귀가 소리를 만들기 때문일 뿐이다. 이제 나는 한밤 중에 한 줄기 황하를 아홉번 건넜다. 황하는 장성 밖에서 나와 장성을 뚫고서 유하와 조하, 황화와 진천 등 여러 물줄기를 한데 모아, 밀운성 아래를 지나면서는 백하가 된다. 나는 어제 배를 타고서 백하를 건넜는데, 이곳의 하류이다.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서지 않았을 때 바야흐로 한 여름 불볕 속에 길을 가다가 갑자기 큰 강물이 앞에 나오는데, 붉은 파도가
산처럼 일어서며 그 끝간데가 보이지 않았다. 이는 대개 천리밖에 폭우가 내린 때문이었다. 물을 건널 때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길래, 혼자 생각에 사람들이 고개를 우러러 하늘에 묵묵히 기도를 드리는가 싶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물을 건너는 사람이 물이 세차게 거슬러 올라가며 소용돌이 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제 몸조차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하고, 눈은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것만 같아 문득 어찔해지며 빙글 돌아 물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니, 그 머리를 우러름은 하늘에 기도하자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경각에 달린 목숨을 묵묵히 빌 것이랴. 그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도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요동 평야는 평평하고 광활하기 때문에 물줄기가 성내 울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황하를 모르고서 하는 소리다. 요하遼河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밤중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낮에는 능히 물을 볼 수 있는 까닭에 눈이 온통 위험한데로만 쏠려서 바야흐로 부들부들 떨려 도리어 그 눈이 있음을 근심해야 할 판인데 어찌 물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한밤중에 강물을 건너매, 눈에 위태로움이 보이지 않자 위태로움이 온통 듣는데로만 쏠려서 귀가 바야흐로 덜덜 떨려 그 걱정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이 텅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이 밟혀 뒷 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두니, 한 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음에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나자 내 귀 속에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앉은 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았다. 예전 우임금이 황하를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등져 지극히 위태로왔다. 그러나 살고 죽는 판가름이 먼저 마음에 분명하고 보니 용이고 도마뱀이고 그 앞에서 크고 작은 것을 헤아릴 것이 없었다. 소리와 빛깔은 바깥 사물인데 바깥 사물이 항상 눈과 귀에 탈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보고 듣는 바름을 잃게 만듦이 이와 같다. 그러니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그 험하고 위태로움이 황하보다 심하여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통이 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 장차 내 산 중에 돌아가 다시 앞 시내의 물 소리를 듣고 이를 징험하여, 장차 몸 놀림에 교묘하여 스스로 총명하다고 믿는 자를 경계하리라. 〈일야구도하기〉는 《열하일기》 〈산장잡기〉 가운데 실려있다. 북경에 도착한 사신 일행에게 황제는 만리장성 밖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날짜를 정해 대어 오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큰 비에 물이 불어난 황하를 밤낮 없이 빠른 길을 찾아 재촉하다 보니, 그야말로 하루밤에 이리저리 강물을 아홉번씩이나 건너는 모험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그러니까 그때의 소감을 적은 글이다. 내가 오늘 밤에 이 물을 건넘은 천하에 지극히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믿고 말은 발굽을 믿고, 발굽은 땅을 믿어 말고삐를 잡지 않은 보람을 거둠이 이와 같도다. 수역首譯이 주주부周主簿에게 말한다. 위 대목은 《열하일기》〈막북행정록〉 속에서 앞서 〈일야구도하기〉를 적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장님이 눈먼 말을 타고서 한밤중에 깊은 연못가에 서있다. 위태로움의 지극함을 묘사한 말이다. 한밤중에 물결이 넘실대는 강물을 아홉번이나 건넌 일은 그 아슬아슬하기가 여기에 견줄만 하다. 생각할수록 진땀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암은 여전히 뚱딴지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이 사람. 내 보기에 장님은 위태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네. 정작 본인은 하나도 위태롭지 않건만 공연히 곁에서 지켜 보는 이가 위태롭게 보는 것일 뿐일세. 왜 그런가? 그는 눈앞에 뵈는 것이 없으니, 지금 제가 위태로운 연못가를 지나는지, 지금이 한 밤중인지, 또 제가 탄 말이 눈이 멀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니, 그는 말을 믿고 말은 또 제 발을 믿고, 발은 또 땅을 믿어 그저 평지를 걷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을터이니 위태롭기는 무엇이 위태롭단 말인가? 공연히 눈 가진 우리가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일 뿐이지. 안 그런가? 다시 책문밖에 이르러 책문 안을 바라다 보니 일반 집들도 모두 다섯 들보가 높이 솟았고, 띠로 이엉을 이어 위를 덮었는데, 등마루는 우뚝하고 대문은 가지런하였다. 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양쪽 가로 마치 먹줄을 친 듯 하였다. 담장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타는 수레와 짐 싣는 수레가 길 가운데로 이리저리 오가고, 벌려 놓은 그릇들은 모두
그림을 그린 자기들이다. 이미 그 제도를 보고 나니 시골구석의 촌티라고는 아예 없었다. 예전에 내 친구 홍덕보가 일찍이 규모는 큰데도 심법心法은 세밀하다고 말하더니, 책문은 천하의 동쪽 끝 모퉁이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매, 앞길의 유람이 갑자기 생각이 탁 막히면서 곧장 이 길로 되돌아가고만 싶어, 나도 몰래 배가 부글거리고 등이 타는 듯 하였다. 내가 크게 반성하여 말하였다. 여기에도 장님 이야기가 나온다. 《열하일기》〈도강록〉 중의 한 부분이다. 예전에 중국에 오기전 나는 중국이 뙈놈의 나라, 오랑캐의 천지인줄로만 알았다.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북벌北伐, 즉 '무찌르자 오랑캐'의 구호가 의당 그래야만 하는 진리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국경을 건너 중국 땅에 들어서고 보니, 중국에서는 가장 귀퉁이 시골의 하나임에 분명할 이곳의 문물이 내 이목을 압도해 온다. 우뚝한 들보 위에 이엉을 얹은 집들과 가지런한 대문들, 벽돌로 쌓은 담, 사통팔달로 죽죽 뻗은 도로 위로 이리 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각종 수레들, 하다 못해 집에서 쓰는 허드렛 그릇도 모두 그림을 그려 넣은 도자기 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무찌르자고 노래하던 오랑캐의 시골 모습인가? 시골이 이럴진대 그 서울은 또 어떠할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그만 부끄럽고 풀이 팍 꺾여서
그길로 내쳐 돌아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날 홍려시소경 조광련이 의자를 나란히 하고서 요술을 구경하였다. 내가 조경에게 말하였다. 역시 《열하일기》 중 〈환희기후지〉이다. 열하에서 거리의 요술을 보고나서 그 소감을 적은 대목이다. 스무가지에 달하는 요술장이의 요술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나서 연암은 시비도 가리지 못하고 진위도 분간할 수 없는 눈이란 없는 거나 진배없다고 말한다. 요술을 구경하는 사람이 속지 않으려고 자세히 보면 볼수록 더 잘 속게 된다. 앞서 〈일야구도하기〉에서, 보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더욱더 미혹되어 급기야 강물에 빠지고 마는 '신이목자信耳目者'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천하의 요술장이도 장님을 속일수는 없다. 이어 연암은 이미 예전 〈답창애〉에서도 써먹은바 있는 서화담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다만 내용은 이 글이 더 자세하다. ==================================================== ▲ 위로 讀燕放筆 5 물을 잊은 물고기 그대가 태사공의 《사기》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구료. 왜냐구요. 〈항우본기〉를 읽으면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 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고점리가 축筑을 연주하던 일이 떠오른다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일 뿐이니, 또한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 보면 아무도 없고, 게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 〈답경지答京之〉의 세번째 편지이다. 아마 경지가 보내온 먼저번 편지에 이런 사연이 있었던 듯 하다. "요즘 사마천의 《사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 〈항우본기〉을 읽노라면 제후들이 항우의 용맹에 얼이 빠져 감히 함께 나가 싸울 생각도 못하고 성벽 위에 붙어 서서 그 싸우는 모습을 넋놓고 구경하던 장면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이수易水 강가에서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러 떠나면서, '가을 바람 쓸쓸하고 이수는 찬데, 장사는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나니' 하고 노래를 부를 때 그 곁에서 축을 타던 고점리의 그 비장한 연주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참으로 사마천의 문장 솜씨는 경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완산完山 이낙서李洛瑞가 책을 쌓아둔 방에 편액을 걸고 소완정素玩亭이라 하였다. 내게 기문記文을 청하므로, 내가 이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낙서가 놀라 말하였다. 내가 또 말했다. 내가 또
말하였다.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동그란 유리를 통과한 햇빛이 점점 도타워지고 오므라들면서 꼭 칠흙 속에 숨은 고양이 눈깔처럼 요괴롭게 빛나다가, 마침내 종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뿜어올리고, 구멍을 내고,
구멍이 실고추처럼 가늘고 새빨갛게 종이를 먹어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동안 나는 숨이 막히고 배창자가 쪼글쪼글 오그라들면서 오줌이 마려웠다." 우연히 거친 성질을 기리다가 스스로를 사슴에다 견준 것은 사람이 가까이 가면 놀라는 까닭에서였지 감히 스스로 크다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주신 글월을 받자오매, 스스로를 말 꼬리에 붙은 파리에다 비유하셨으니 또 어찌 그다지도 작단 말입니까? 그대가 진실로 작게 되기를 구한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지요. 개미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일찍이 약산에 올라가 그 도읍을 굽어 보니, 사람들이 내달리고 달음질치는 것이 땅에 엎디어 꿈틀대는 개미집의 개미와 같아, 한 번 크게 숨을 내쉬면 흩어져 버릴 것만 같더이다. 그러나 다시금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한다면, 벼랑을 더위잡고 바위를 에돌아 덩쿨을 붙잡고 나무를 끼고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망녕되이 스스로 높고 큰체 하는 것이 또한 머리의 이가 머리카락을 타고 오르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이제 큰 소리로 스스로를 비유하여 사슴이라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마땅히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다시금 형체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고 보는 바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려 한다면, 그대나 나나 모두 망녕될
뿐이리이다. 사슴이 과연 파리보다야 크겠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습니까? 파리가 과연 사슴보다야 작겠지만 만약 개미로 본다면 코끼리의 사슴에 있어서와 한가지일겝니다. 이제 저 코끼리는 서면 집채만 하고, 가면 비바람 휘몰아치는 듯 하며, 귀는 드리운 구름같고, 눈은 초승달만합니다. 발가락 사이에 낀 진흙은 흙더미가 언덕과 같아 개미가 그 속에 집을 짓지요. 개미가 비가 오나 싶어 줄지어 나와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코끼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보는 바의 것이 멀기 때문일 뿐입니다. 코끼리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 보아도 개미를 못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보는 바의 것이 가까운 까닭일 뿐입니다. 만약 조금 큰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금 백리
먼데로부터 바라보게 한다면 아마득하고 가물가물해서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을겝니다. 어찌 이른바 사슴과 파리, 개미와 코끼리를 족히 분간해낼 수 있겠습니까? 〈답모答某〉는 연암이 누군가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글이다. 아마 이보다 앞선 편지에서 연암이 스스로를 겁많은 사슴에 견준 것을 두고 상대가 스스로 크다고 여긴 것으로 오해하여, 나는 사슴은커녕 말꼬리에 붙은 파리만하다고 낮추자 이에 대해 해명을 겸하여 쓴 글인 듯 싶다. 언어는 종종 이런 식의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 ▲ 위로 讀燕放筆·6 문심文心과 문정文情 아아! 포희씨 犧氏가 죽으매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지 오래로다. 그러나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 돌의 초록빛과 새깃의 비취빛 등 그 문심文心은 변치 않았다. 솥의 발과 호리병의 허리, 해의 둘레, 달의 활 모양은 자체字體가 아직도 온전하다. 그 바람과 구름, 우레와 번개 및 비와 눈, 서리와 이슬, 그리고 새와 물고기와 짐승과 벌레와, 웃고 울고 소리내고 울부짖는 것들의 성색정경聲色情境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그런 까닭에 《역易》을 읽지 않고는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글을 알지 못한다. 왜 그런가? 포희씨 犧氏가 《역》을 지음은 우러러 관찰하고 굽어 살펴보아 홀수와 짝수를 더하고 갑절로 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와 같이하여 그림이 되었다. 창힐씨蒼 氏가 글자를 만든 것 또한 정情을 곡진히 하고 형形을 다하여 전주轉注하고 가차假借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하여 글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글에 소리[聲]가 있는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의 대신大臣 노릇 할 때와 주공周公이 숙부叔父 역할을 할 때 내가 그 말소리는 듣지 못하였어도 그 소리를 상상해 본다면
정성스러울 따름이었으리라. 고아孤兒인 백기伯奇와 기량杞梁의 과부寡婦를 내가 그 모습은 못보았지만, 그 소리를 떠올려 보면 간절할 뿐이었으리라. 그런 까닭에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께 고하는 것과 고아와 과부의 사모함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더불어 소리를 논할 수가 없다. 글을 짓더라도 《시경》의 생각이 없으면 더불어 국풍國風의 빛깔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이별해보지 못하고, 그림에 먼 뜻이 없다면 더불어 문장의 정경情境을 논할 수가 없다.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모두 문심文心이 없는 것이다. 솥과 그릇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하는 자는 비록 한 글자도 모른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연암은 40세 전후로 지금의 파고다 공원 뒤편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머물러 살았다. 이 시기 전후 몇 년간의 글을 묶어 《종북소선鍾北小選》이라 이름짓는다. 이글은 이 묶음의 첫머리에 얹은 것이다. 연암 문학론의 최상승最上乘 문자로 그 문학 정신의 울결鬱結이 이 한편에 녹아 있다. 고대에는 우주가 하나의 형태와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주의 운동은 순환적 리듬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고, 그 리듬의 형상은 여러 세기 동안 도시와 법과 예술작품의 원형이 되었다. 정치적 질서와 시적 질서, 공적인 축제와 사적인 제의祭儀 -그리고 나아가 우주적 법칙에 대한 불화의 위반에 이르기까지-등은 우주적 리듬의 표현들이었다. 그 뒤 세계의 형상이 확장되었다. 공간은 무한하고 사방으로 뚫려 있다. 플라톤적인 해(年)는 끝없고 직선적인 연속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항성들은 더 이상 우주적 조화의 이미지가 되지 못했다. 세계의 중심과 신은 쫓겨나고, 관념과 본질들은 사라져갔다. 우리는 홀로 남게 되었다. 우주의 형상이
바뀌고,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개념도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여전히 세계였고, 인간은 인간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총체였다. 이제 공간은 팽창하여 분열되고, 시간은 불연속적인 것이 되었다. 세계, 전체는 조각 조각 파편화되었다. 인간은 분산되고, 그 역시 분산되어 떠도는 공간 속에서 미아가 되었다. 옥따비오 빠스는 공간은 팽창하여 분열하고, 시간은 불연속적인 것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세계는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인간은 분산되고, 떠도는 공간 속에서 길잃은 미아가 되고 말았다고 썼다. 독서를 정밀하고 부지런히 하기로는 포희씨만한 이가 없다. 그 정신과 의태意態는 천지만물을 포괄망라하고 만물에 흩어져 있으니, 이것은 다만 글자로 쓰이지 않고 글로 되지 않은 글일 뿐이다. 후세에 독서를 부지런히 한다고 하는 자들은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마른 먹과 썩어 문드러진 종이 사이에 눈을 부비며 그 좀오줌과 쥐똥을 엮어 토론하니, 이는 이른 바 술지게미와 묽은 술을 먹고 취해 죽겠다는 꼴이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질 않는가? 포희씨가 읽었던 책은 글자로 씌여지지도 않고, 글로 엮어지지도 않은 글이었다. 육합六合을 포괄하고 여태도 만물에 흩어져 있는 그런 문장이었다. 우주만물이라는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그것은 날아가는 새의 푸득이는 날갯짓에서 느끼는 약동하는 생명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독서는 옛 사람의 말라 비틀어진 종이 위에 머리를 묻고, 그 좀오줌과 쥐똥에 코를 박고서 이미 용도폐기된 죽은 지식의 껍데기만을 찾아 헤매이는 것이다. 펄펄 날며 우짖는 저 새의 생의로움을 시골 늙은이 지팡이 위에 새겨 놓은 새마냥 가두어 두고도 그들은 쉽게 만족하고 흐믓해 한다. 술에
취해 죽으려거든 깡술을 마실 일이지, 왜 술지게미만 배가 터지게 먹어대는가? 사물과 만나고 싶으면 가슴을 활짝 열어 그것들을 받아들일 일이지, 왜 낡은 책갈피만 뒤적이고 있는가? 연암협에 계실 때 혹은 종일 마루를 내려오지 않고 혹은 어떤 사물을 주목하여 눈길을 돌리지 않고 침묵하여 말이 없는 채 두어 시간을 넘기곤 했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지극히 미미한 물건, 예컨대 풀이나 짐승이나 벌레라도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조물주가 만든 자연의 현묘함을 볼 수가 있다"하셨다. 매양 냇가
바위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읊조리거나 느릿느릿 걷다가 문득 멍하니 무엇을 잊어버린 듯 하셨다. 때로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붓을 잡고 기록을 해서, 깨알같은 글씨로 쓴 조각조각 종잇장들이 상자에 가득 차고 넘쳤다. 마침내 시냇가 집에 간직해두고서, "훗날 다시 생각하고 점검해서 조리가 일관된 연후에 책을 이루리라"하셨다. 뒷날 관직을 버리고 연암협에 들어가 꺼내 살펴보니 그때는 눈이 너무 나빠져서 작은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서글피 탄식하시기를, "애석타! 고을살이 십 수년에 한 질 좋은 책을 잃어버렸구나!"하시고, 이윽고 "끝내 쓸짝없이 되고야 말았으니, 헛되이 사람의 뜻만 어지럽힐 것이다"하시고, 냇물에 세초洗草해버리게 하셨다. 아하! 우리들은 그때 곁에 있지 않아서, 마침내 수습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 ▲ 위로 讀燕放筆·7 눈 속의 잣나무, 사생寫生과 사의寫意 사함士涵 유한렴劉漢廉이 죽원옹竹園翁이라 자호하고 거처하는 집에 불이당不移堂이란 편액을 걸고는 내게 서문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 집에 올라보고 그 동산을 거닐어 보았지만 한 그루의 대나무도 보이지 않았었다. 내가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무하향無何鄕의 오유선생烏有先生의 집이 아니겠는가? 이름이란 것은 실질의 손님이거늘, 나더러 장차 손님을 위하란 말인가?"
사함이 머쓱해져서 한동안 있더니만, "애오라지 스스로 뜻을 부쳐본 것일 뿐이라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였다. "상심하지 말게. 내 장차 자네를 위해 이를 채워 줌세. 지난번에 학사 이양천李亮天이 한가롭게 지내며 매화시를 지었는데, 심사정沈師正의 묵매墨梅를 얻어 시축詩軸에 얹었더랬네. 인하여 웃으며 내게 말하지 않겠나. '심하도다! 심씨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능히 사물과 꼭같게만 할 뿐이로다.' 내가 의아해서 말했지. '그림을 그리면서 꼭 같게 그린다면 좋은 화가일터인데, 학사께서는 어찌 웃으십니까?' 그러자 학사는 이렇게 말했었네. 그런 일이 있은 뒤 내가 어떤 일에 대해 말하다 죄를 얻어, 흑산도 가운데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었네. 일찍이 하루 낮 하루 밤에 7백리를 내달리는데, 길에서 전하는 말이 금부도사가 장차 이르러 후명後命 즉 사약을 내리는 명령이 있을 거라는 게야. 하인들은 온통 놀라 떨며 울어댔지. 그때 날씨는 추운데 눈은 내리고, 앙상한 나무와 허물어진 벼랑은 들죽날쭉 무너져 길을 막아 아무리 바라보아도 가이 없었다네. 그런데 바위 앞의 늙은
나무가 거꾸러져서도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마치 마른 대나무와 같지 뭔가. 내가 바야흐로 말을 세우고 도롱이를 걸치고 멀리 가리키며 기이함을 일컫고는, 「이 어찌 이인상이 전서로 쓴 나무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었네. 위리안치 되고 나서는 장독 毒을 머금은 안개가 어두침침하고, 독사와 지네가 베개와 자리에 얽혀 있어 해입음을 헤아릴 길이 없었지. 어느날 밤에는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 마치 벽력이 이는 듯 하므로 아랫것들은 모두 넋이 나가 구토하며 어지러워들 하였네. 내가 노래를 지어 말하기를, 「남쪽바다 산호야 꺾인들 어떠하리. 오늘밤 다만 근심 옥루玉樓의 추움일세.」라 하였다네. 이인상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근자에 산호곡을 얻어보매, 완미하면서도 상심하지 않아 원망하고 후회하는 뜻이 없으니, 능히 환난에 잘 대처해가고 있더군. 접때 그대가 일찍이 잣나무를 그려달라 하더니만, 그대 또한 그림을 잘 그린다고 말할만 하네 그려. 그대가 떠난 뒤, 잣나무 그림 수십 폭이 서울에 남았는데, 모두 이조吏曺의 벼슬아치들이 끝이 모지라진 붓으로 베껴 그린 것이라네. 그런데도 그 굳센 줄기와 곧은 기운은 늠연하여 범할 수가 없고, 가지와 잎은 무성하여 어찌나 성대하던지?」라고 하였더군. 내가 나도 몰래 실소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네. 「이인상은 몰골도沒骨圖, 즉 형체없는 그림이라 말할만 하구나.」 이로 말미암아 보건데, 좋은 그림이란 그 물건과 꼭 닮게 하는데 있지 않을 뿐이라네.' 나 또한 웃고
말았었지. 얼마 후 학사 이양천 공은 세상을 뜨고 말았네. 내가 그 시문을 편집하다가 적소謫所에 있을 때 형에게 보낸 편지를 얻었는데, 쓰여 있기를 '근자에 아무개의 편지를 받아보니, 날 위해 당로자當路者에게 석방을 구해보려 한다는데, 어찌 저를 이리도 박하게 대우하는지요. 비록 바다 가운데서 썩어 죽을망정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었네. 내가 그 글을 들고서 슬피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학사는 참으로 눈 속의 잣나무로구나. 선비는 궁하게 된 뒤에 평소 품은 뜻이 드러나는 법이다. 환란과 재앙을 만나서도 그 절조를 고치지 아니하고, 높고도
외로이 우뚝 서서 그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어찌 날씨가 추워진 때라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었네." 이제 우리 사함은 성품이 대나무를 사랑한다. 아아! 사함은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이란 말인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 내 장차 그대의 집에 올라보고 그대의 동산을 거닐면서 눈속에서 대나무를 구경해도 좋겠는가? 유한렴劉漢廉은 자신의 호를 죽원옹竹園翁이라 짓고, 집에는 불이당不移堂이란 편액을 내 걸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집에는 대나무 동산은커녕 한
그루의 대나무도 구경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의 호를 죽원옹이라 했을까? 불이당不移堂이라니, 무엇을 옮기지 않는 집이란 말인가? 대나무 한 그루 없는 집에 사는 '죽원옹'과, 어떤 역경에도 옮기지 않을 뜻을 기르는 '불이당'을 위해 연암은 붓을 들었다. 남쪽 바다 산호야 꺾인들 어떠하리 南海珊瑚折奈何 남쪽 바다 산호는 이 험한 파도를 견디지 못해 꺾이고 만다 해도, 단지 나의 걱정은 산호에 있지 않고 玉樓에 계신 우리 임금께서 춥지나 않으실까 하는데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남쪽 바다 산호의 원관념은 물론 자신이다. 자신이야 이 절해고도에서 아름다운 뜻을
펴보지도 못한채 거꾸러져 죽더라도 상관 없지만, 임금과 나라의 안위만은 근심치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작은 종놈 닭을 묶어 저자로 팔러 가니 小奴縛鷄向市賣 옹색한 살림에 닭이라도 저자에 내다 팔까
싶어 꽁꽁 묶었다. 그러자 묶인 닭들이 안죽겠다고 푸드득 난리를 친다. 저것들이 팔려 가면 나는 몇 끼 밥을 먹겠지만 저놈들은 또 삶아져 남의 밥상 위에 오를 것이 아닌가? 저것도 목숨이라고 살아 보겠다고 아우성치는 꼴이 꼭 내 처지를 보는 것 같아서 그만 풀어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시를 이공린은 어떻게 그려냈을까? 꽁꽁 묶인 닭들의 푸드득 대는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모습을 그렸을까? 그렇지 않다. 이공린은 그림 속에 결코 닭을 그리지 않았다. 그가 그린 것은 8구, 추운 강물을 바라보며 산 누각에 기대선 두보의 스산한 표정 뿐이었다. '한강寒江'이라 했으니, 혹독한 겨울이 코 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이 가난을 이고서 또 한 겨울을 어찌 견딘단 말인가? 만감이 교차하는 그의 표정 속에 이미 〈박계행〉의 사연이 다 담겨져 있다. 맑은 가을 강가 여관에서 새벽에 일어나 대나무를 보니, 안개 빛과 해 그림자와 이슬 기운이 모두 성근 가지와 빽빽한 잎새 사이에서 떠돌고 있다. 가슴 속에서 뭉게뭉게 그림을 그리고픈 생각이 솟아났다. 기실 가슴 속의 대나무는 눈 앞의 대나무는 아니었다. 인하여 먹을 갈고 종이를 펼쳐 붓을 놀려 순식간에 변상變相을 지어내니, 손 안의 대나무는 또한 가슴 속의 대나무가 아니었다. 요컨대 뜻이 붓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이 정해진 법칙이라면, 정취가 법도의 밖에 있다는 것은 조화의 기미인 것이니, 유독 그림만 그렇겠는가? 맑은 가을날 새벽 강가에 앉아 대숲을 본다. 자욱한 안개빛과 떠오르는 해 그림자, 그리고 촉촉한 이슬 기운이 대나무 가지와 잎새 사이에 떠돌고 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화가는 강렬한 화의畵意를 느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려고 붓을 든 화가의 마음 속에 담긴 대나무는 눈 앞에 서 있는 대나무와는 같지가 않다. 붓을 재빨리 휘둘러 순식간에 그려 놓고 보니, 종이 위의 대나무는 또 가슴 속에 있던 대나무가 아니었다. 눈앞의 대나무와 그려진 대나무, 그리고 애초에 내 가슴 속에 있던 대나무는 서로 다르다. 대상을 사생 하기에 앞서 화의畵意가 충만해야 하는 것은 그림에 있어 정칙定則이 된다. 그러나 막상 가슴 속 형상이 눈앞의 실상과 만나 그림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그러한 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변화의 기미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우는 샘물 풀에 스며 반딧불로 화하고 鳴泉浸草流螢化 돌돌돌 울며 흐르던 샘물은 길섶의 풀을 적신다. 젖은 풀은 다시 반짝반짝 반딧불이로 변화하였다. 지루한 장마 끝에 고목엔 버섯이 돋아나, 바짝 말라있던 둥치에 아연 향기가 감돈다. 썩은 풀이 변하여 반디가 되고, 고목枯木이 버섯을 쪄서 향기를 머금는 것이 바로 시이다. 우주론적 순환이 이 속에 담겨 있다. =================================================== ▲ 위로 讀燕放筆·8 심사心似와 형사形似, 비슷한 것은 가짜다 옛것을 본떠 글을 지음을 마치 거울이 형상을 비추듯 하면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좌우가 서로 반대로 되니 어찌 비슷함을 얻으리요. 그렇다면 물이 형체를 그려내듯 한다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본말이 거꾸로 보이니 어찌 비슷하다 하리오.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 할진대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한낮에는 난장이 땅달보가 되고, 저물녘에는 꺽다리 거인이 되니 어찌 비슷하다 하겠는가. 그림이 형체를 묘사하듯 한다면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길 가는 자가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자는 소리가 없으니 어찌 비슷함을 얻겠는가. 그렇다면 끝내 비슷함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일까? 말하기를 대저 어찌하여 비슷함을 구하는가? 비슷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짜는 아닌 것이다. 천하에서 이른바 서로 같은 것을 두고 반드시 '꼭 닮았다'고 하고 구분하기 어려운 것을 또한 '진짜 같다'고 말한다. 대저 진짜 같다고 하고 꼭 닮았다고 말할 때에 그 말 속에는 가짜라는 것과 다르다는 뜻이 담겨 있다. 때문에 천하에는 이해하기 어려워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완전히 다른데도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통역과 번역으로도 뜻을 통할 수가 있고, 전서篆書와 주문 文, 예서隸書와 해서楷書로도
모두 문장을 이룰 수가 있다. 왜 그럴까? 다른 것은 겉모습이고, 같은 것은 마음이기 때문일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데, 마음이 비슷한 것[心似]은 뜻이고, 겉모습이 비슷한 것[形似]은 피모皮毛일 뿐이다. 이씨의 아들 낙서洛瑞가 나이 열 여섯인데, 나를 좇아 배운 지 여러 해이다. 심령이 맑게 열려 지혜가 구슬 같다. 한 번은 자신의 《녹천고綠天稿》를 가지고 와 내게 물었다.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는 진짜와 가짜, 같고 다름에 관한 이야기이다. 연암은 글의 처음을 '방고倣古', 즉 옛날을 모방하는 문제로 시작한다. 글을 짓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말과 뜻으로 하지 않고 옛것을 모방하여 짓는다. 옛것을 모방함은 옛 사람과 거의 분간이 가지 않을만큼 꼭 같게
하면 되는가? 그 결과 읽는 이가 이것이 옛글인지 지금 글인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우리의 글쓰기는 성공한 것일까? 대저 작자들이 위魏나라 이전에는 삼사三史를 많이들
본받았고, 진晉나라 이래로는 오경五經 배우기를 즐겼다. 대저 사서史書의 글은 얕고 모방하기가 쉽지만, 경전經典의 글은 뜻이 깊고 모의하기가 어렵다. 이미 어렵고 쉬운 차이가 있고 보니 얻고 잃음 또한 달라지게 마련인 것이다. 대개 겉모습은 달라도 마음이 같은 것은 모의의 윗길 가는 것이고, 겉모습은 같지만 마음이 다른 것은 모의의 아랫길이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 모동심이貌同心異만을 좋아하고 심동모이心同貌異는 숭상치 아니하니 어찌된 것일까? 대개 안목이 밝지 않고 기호하는 것이 치우침이 많아 '사사似史'를 기뻐하며 '진사眞史'는 미워하기 때문이다. 모동심이貌同心異는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속 내용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옛 책에서 베껴와 말투를 흉내내 겉모습의 비슷함은 얻었지만 그 정신의 실질은 갖추지 못한 경우이다. 심동모이心同貌異는 그 전달코자 하는 알맹이는 같지만 겉보기에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모동심이가 하급의 모방이라면, 심동모이는 상급의 모방이다. 뒷 사람이 앞사람을 배우는 방법은 심동心同이어야지 모동貌同이어서는 안된다. 연암식으로 말하면 심사心似라야지 형사形似로는 안된다. 같기를 추구하면서도 똑같아서는 안 되며, 다름을 추구하되 실질은 다르지 않은, 이른바 '상동구이尙同求異'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진정한 닮음이란 껍데기에 있지 않다. 껍데기는 전혀 다른데도 알맹이는 같은 그런 닮음이라야 한다. 오직 문장 또한 그러하다. 그 반드시 힘껏 빠르게 내달려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은 뒤에야 그 화려함을 없애 질박해지고, 그 맛을 죽여 담백하게 된다. 만약 처음부터 육경을 배운다면 그 자리에서 힘이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혈기가 방장한 사람이 스스로를 기르기를 늙은이가 앉고 눕는 것 같이하여 사람을 시켜 밥을 떠먹이게 하고 고기를 빻아 오게 하며 미음만을 마신다면 일년이나 반년이 못가 지체가 약해져서 마침내는 고칠 수 없는 병이 든 사람이 되어 죽게 될 뿐이다. 이와 같은데도 스스로 나의 생활과
섭양이 아무 늙은이와 같으니 장수하는 것도 또한 마땅히 그 노인과 같을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을 옳다 하겠는가? 나는 오래 살고 싶다. 그러니 80 노인의 섭양 방법을 그대로 따르면 80세까지는 살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가 하는 것처럼 사람을 시켜 밥을 떠먹이게 하고, 고기는 빻아와 먹고, 밥을 버려 미음만 먹었다. 그 결과 내가 얻은 것은 80 노인과 같이 오래도록 장수할 수 있는 건강이 아니라, 80 노인의 늙음 뿐이었다. 마을의 꼬맹이가 천자문을 배우는데, 그 읽기 싫어함을 꾸짖자,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天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라고 합디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이를 기죽일만 합니다. 전문이래야 34자에 불과한 엽서로, 〈답창애答蒼厓〉 즉 창애蒼厓에게 답한 세 번째 편지이다.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꼬마 녀석 하나가 자꾸만 딴청을 한다. 화가 난 훈장이 이놈! 하고 야단을 치자 그 대답이 맹랑하다. "선생님! 저 하늘을 보면 저렇게 파랗기만 한데, 하늘 천天 따 지地 검을 현玄 누르 황黃, 왜 맨날 하늘을 검다고만 한답니까? 그래서 읽기 싫어요." 부쳐 보내신 글 묶음을 양치하고 손 씻고 무릎 꿇고서 장중히 읽고는 말하기를, "문장은 모두 기이하다. 그러나 이름과 물건을 많이 빌어와 인용하고 근거로 댄 것이 꼭 맞지가 않으니 이것이 흠결이 된다"고 하였지요. 청컨대 노형老兄을 위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문장에는 방법이 있으니, 마치 소송하는 자가 증거를 들이대고, 장사치가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비록 말의 이치가 밝고 곧아도 만약 다른 증거가 없다면 무엇으로 재판에서 이기겠습니까? 그래서 글 짓는 자는 경전經傳을 널리 인용하여 자기 뜻을 밝히는 겝니다. 성인聖人께서 지으시고 현인賢人이 풀이 하셨으니 이보다 더 미덥겠습니까만, 그래도 오히려 "〈강고康誥〉에 말하기를 '밝은 덕을 밝히라'고 했다"고 하고, "〈제전帝典〉에 이르기를, '높은
덕을 환히 밝히라'고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벼슬 이름과 땅 이름만은 서로 빌려 써서는 안됩니다. 섶을 지고서 소금 사려! 하고 외친다면 비록 하루 종일 길을 가더라도 땔감 한단도 팔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로 황제가 사는 도읍을 모두 장안長安이라 일컫고, 역대 삼공三公을 죄다 승상丞相이라고 부른다면 명실名實이 뒤죽박죽이 되어 도리어 비루하게 될 뿐이지요. 이는 곧 좌중을 놀래키는 진공陳公이요, 찡그림을 흉내내는 서시西施일 뿐입니다. 그래서 글짓는 사람은 더러워도 이름을 감추지 아니하고, 비루해도 자취를 숨기지 않습니다. 맹자가 "성씨는 함께 하는 바이지만, 이름은 혼자만의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또한 다만 말하기를,
"글자는 함께 하는 바이지만, 글은 혼자만의 것"이라고 말해봅니다. 〈답창애지일答蒼厓之一〉이다. 아마도 유한준이 자신의 문집 엮은 것을 연암에게 보내 평해 줄 것을 요청했던 모양이다. 칭찬을 기대하고 있던 유한준에게 연암은 대뜸 좋기는 좋은데 이름을 자꾸 빌려오고, 여기저기서 인용을 끌어온 것이 맞지 않아 그게 흠이라고 지적하였다. 형사形似 추구의 지나침을 나무란 것이다. 어제 아드님이 와서는 글 짓는 것에 대해 물어 보길래, "예禮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라"고 일러 주었지요. 그랬더니 자못 기뻐하지 않고 돌아가더군요. 모르겠습니다만 아침 저녁 문안을 여쭐 적에 이 말을 하던가요? 〈답창애지사答蒼厓之四〉이다. 아마도 유한준의 아들이 아버지 편지 심부름으로 연암을 찾아왔다가 문장의 방법을
물었던 모양이다. "선생님! 글은 어떻게 써야 합니까?" 아버지와의 불편함을 눈치 챈 아들의 물음이었으니, 아마도 연암의 귀에 그 말은 순순하게 들리질 않고, "당신이 그렇게 잘났으면 도대체 어떻게 써야 잘 쓴 글이랍니까?" 쯤으로 들렸을 법도 하다. 연암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간단하지.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게나. 그러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야." 이른바 문장을 함에 지금 것을 피하고 말은 반드시 진한秦漢의 옛스러움을 답습하며, 우리의 시속時俗을 버리고 이름은 반드시 중국의 고아한 것만을 모방하니 그 촌스러움이 크다 하겠다. 진실로 그 이치를 얻기만 한다면, 비록 우리나라의 일을 기록하고, 우리나라의 사물을 적으며, 우리나라의 말을 쓰더라도 절로 뒷날 반드시 전해질 훌륭한 글이 되기에 해될 것이 없다. 그럴진대 이른바 지금 것이라 해서 반드시 옛것만 못하지 않고, 이른바 시속時俗의
것이라 해서 반드시 고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것을 가지고 촉蜀 땅에 전하게 하면, 촉 땅 사람이 한 번 보고는 문득 우리나라의 글임을 알게 될 터이고, 민 땅에 전하게 하면 민 땅 사람이 한 번만 보고도 바로 우리나라의 글임을 알게 될 터이니, 이러한 뒤라야 이를 '진문장眞文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 위로 讀燕放筆·9 그때의 지금인 옛날 자패가 말하였다. 내가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 에 푸른 기와를 얹은 사당에는 얼굴이 윤나고 붉고 수염이 달린 의젓한 관운장關雲長의 소상塑像이 있다. 사녀士女가 학질을 앓게 되면 그 좌상座床 아래에 들여놓는데, 정신이 나가고 넋이 빼앗겨 한기를 몰아내는 빌미가 되곤 한다. 그렇지만 꼬맹이들은 무서워 하지 않고 위엄스러운 소상을 모독하는데, 눈동자를 후벼파도 꿈벅거리지 않고, 콧구멍을 쑤셔대도 재채기 하지 않으니, 한 덩어리의 진흙으로 빚은 소상일 뿐이다. 대저 시절을 근심하고 풍속을 병통으로 여기는 자에 굴원屈原 같은 이가 없었지만, 초나라의 습속이 귀신을 숭상하였으므로 그의 〈구가九歌〉에서는 귀신을 노래하였다. 한漢나라가 진秦나라의 옛 것을 살펴, 그 땅과 집에서 임금 노릇하고, 그 성읍을 도읍으로 삼으며, 그 백성을 백성으로 삼았으면서도 삼장三章의 간략함만은 그 법을 답습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비록 궁벽하지만 또한 천승千乘 제후의 나라이고, 신라와 고려가 비록 보잘 것 없었지만 민간에는 아름다운 풍속이 많았다. 그럴진대 그 방언을 글로 적고 그 민요를 노래한다면 절로 문장을 이루어 참된 마음이 발현될 것이다. 남의 것을 그대로 답습함을 일삼지 않고 서로 빌려와 꾸지 않고, 지금 현재에 편안해 하며 삼라만상에 나아감은 오직 무관의 시가 그러함이 된다. 아아! 《시경》 3백편은 새나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 아닌 것이 없고, 뒷골목 남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진대 패 땅과 회檜 땅의 사이는 지역마다 풍속이 같지 않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의 위로는 백성의 풍속이 제각금이다. 그런 까닭에 시를 채집하는 자가 여러 나라의 노래로 그 성정을 살펴보고 그 노래의 습속을 징험하였던 것이다. 다시 어찌 무관의 시가 옛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겠는가? 《영처고》는 이덕무가 젊은 시절 지은 시문을 모은 것이다. '영처 處'는 영아 兒와 처녀處女를 가리키는 말이니,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스러운 생각을 담은 글이지만, 처녀처럼 순진한 수줍음을 지녀 남에게 보여주기는 부끄럽다는 뜻으로 붙인 제목이다. 즐거워 함의 지극한 것은 영아만한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그 장난치는 것은 애연 然한 천진天眞이다. 부끄러함의 지극한 것은 처녀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감춤은 순수한 진정眞情이다. 사람으로 문장을 좋아하여 즐거워 장난치고 부끄러워 감추기를 지극히 하는 것이 또한 나만한 이가 없다. 그런 까닭에 그 원고를 '영처 處'라 하였다. 일체의 인위가 배제된 어린아이의 오락과도 같은 '천진天眞'함, 부끄러워 감추는 처녀의 순수한 '진정眞情',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문학에서
추구하려한 핵심이라는 것이다. 결국 문학이 추구해야 할 것은 무슨 거창한 소명의식이나 교훈주의가 아니라 '천진天眞'과 '진정眞情'의 토로일 뿐임을 천명한 것이다. 용동산농龍洞山農이 《서상西廂》을 쓰며 끝에다 말하기를, "아는 이가 내가 여태도 동심童心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대저 동심이라는 것은 진심眞心이다. 만약 동심을 안된다고 한다면 이는 진심을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대저 동심이라는 것은 거짓을 끊고 순수히 참된 최초에 지녔던 한 생각의 본마음인 것이다. 만약 동심을 잃게 된다면 진심을 잃는 것이고, 진심을 잃는다면 참된 사람을 잃는 것이다. 사람이 참되지 않으면 온전히 처음 상태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동자童子라는 것은 사람의 처음이요, 동심童心이라는 것은 마음의 시작이니, 대저 마음의 처음을 어찌 잃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어찌하여 동심을 갑작스레 잃게 되는 것일까? 대개 그 처음에는 듣고 보는 것이 귀와 눈을 통해 들어와 그 마음에 주인이 됨으로써
동심을 잃고 만다. 자라서는 도리道理가 듣고 보는 것을 좇아 들어와 그 마음에 주인이 됨으로써 동심을 잃게 된다. 나중에 도리와 듣고 보는 것이 날마다 더욱 많아지게 되면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이 날마다 더 폭넓어져서, 이에 아름다운 이름이 좋아할만한 것임을 알게 되어 힘써 이름을 드날리고자하여 동심을 잃게 되고, 아름답지 않은 이름이 추함을 알아 힘써 이를 덮어 가리려 하는데서 동심을 잃게 된다. 대저 도리道理와 문견聞見이란 모두 독서를 많이 하여 의리義理를 아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옛날의 성인이 어찌 일찍이
독서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설령 독서하지 않았더라도 동심은 진실로 절로 남아 있었을 것이요, 독서를 많이 했다손 치더라도 또한 이 동심을 지켜 잃지 않도록 했을 따름이니, 배우는 자가 도리어 독서를 많이 하고 의리를 아는 것이 동심에 장애가 되는 것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저 배우는 자가 독서를 많이하여 의리를 알게 되면 동심에는 걸림돌이 되나니, 성인이 또 어찌 저서著書와 입언立言을 많이하여 배우는 사람에게 장애가 됨을 하겠는가? 동심이 막히고 보면 이에 있어 펼쳐 말을 해도, 언어가 마음 속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게 되고, 드러나 정사政事가 되더라도 근저가 없게 되며, 저술하여 문사文辭가 되어도 능히 통달하지 못하게 된다. 안으로 머금어 아름다움이 드러나지도 아니하고, 도탑고도 알차 광휘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한 구절의 유덕有德한 말을 구하려 해도 마침내 얻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동심이 막히고 보면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문견聞見과 도리道理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으로 삼게
되기 때문이다. 대저 이미 문견聞見과 도리道理로 마음을 삼고 보면, 말하는 바의 것도 모두 문견과 도리의 말일 뿐 동심에서 절로 나온 말은 아니다. 그 말이 비록 공교하다 한들 내게 있어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찌 가짜 사람이 거짓 말을 말하고 거짓 일을 일삼으며 거짓 글을 짓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그 사람이 이미 가짜고 보면 거짓되지 않는 바가 없다. 이로 말미암아 거짓 말을 가지고 가짜 사람과
말하면 가짜 사람이 기뻐하고, 거짓 일로 가짜 사람과 말하면 가짜 사람이 기뻐하며, 거짓 글로 가짜 사람과 이야기하면 가짜 사람이 기뻐한다. 어디를 가도 가짜 아닌 바가 없고 보면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 온통 전부가 가짜고 보니 난장이가 어찌 진짜와 가짜를 변별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비롯 천하의 지극한 글이 있다 하더라도 가짜 사람에게 불태워져서 후세에 다 보지 못하게 된 것이 또 어찌 적다 하겠는가? 왜 그럴까? 천하의 지극한 글은 동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동심을 항상 지닐 수만 있다면 도리가 행해지지 않고
문견이 서지 않았다 해도 글되지 않을 때가 없고 글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한결 같이 체격과 문자를 새롭게 만들어도 문장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시를 어찌 반드시 옛 선집만 따를 것이며, 문을 어찌 반드시 선진先秦만 기필하겠는가? 내려와 육조六朝가 되고, 변하여 근체近體가 되며, 또 변하여 전기傳奇가 되는 것이다. 변화하게 되면 원본院本도 되고 잡극雜劇도 되고 《서상곡西廂曲》도 되고 《수호전水滸傳》도 되고, 지금의 과거 시험도 되는 것이니, 선현들이 성인의 도를 말한 것은 모두 고금의 지극한 글이라, 시세時勢의 선후만으로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이를 인하여 동심을 지닌 사람이 절로 문장을 이루는 것에 느낌이 있었던 것이니, 다시금 무슨 육경六經을 말하며, 무슨 《논어論語》니 《맹자孟子》니를 말한단 말인가? 대저 육경과 《논어》《맹자》는 사관史官이 지나치게 높여 기린 말이 아니면 신하된 자가 지극히 찬미한 말일 뿐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우활한 문도門徒들과 멍청한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억해내되 처음은 있으되 끝이 없거나, 뒷부분만 얻고 앞은 빠뜨려 그 본 바에 따라 책에다 써놓은 것일 뿐이다. 후학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문득 성인의 입에서 나왔다하여 아예 경전이 된다고 지목하여 결정했던 것이니, 그 누가 그 가운데 태반이 성인의 말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설령 성인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요컨대는 또한 그때 그때마다 일이 있어 나온 말로, 병통을 인하여 약을 주고 때에
따라 처방을 내려 이러한 어리석은 제자들과 우활한 문도門徒들을 구하려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약으로 거짓 병을 치료하고 처방으로 정해진 아집을 논난한 것이 어찌 갑자기 만세의 지론至論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육경과 《논어》《맹자》는 바로 도학道學의 구실이 되고, 가짜 사람들이 모여드는 연못인 셈이니, 결단코 동심의 말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아아! 내가 또 어찌 동심을 일찍이 잃어본 적이 없는 진정한 큰 성인聖人과 만나 그와 더불어 한 번쯤 글에 대해 말해볼 것인가? 아! 세상에는 이미 동심童心을 잃어버린 가짜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가짜 글과 가짜 생각을 가지고 경전經傳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말씀이라 하며 그리로만 따라오라 한다. 하여 거짓이 난무하고 위선이 판치며 옛 사람의 죽은 망령만이 허공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동심은 어디에 있는가? 세계로 향한 촉수觸手가 싱싱하게 살아 있던, 모든 것이 바람이었고 풀잎이었던 동심의 세계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 위로 讀燕放筆·10 시인의 입냄새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군의 시고詩稿는 몹시 적어서, 고체와 금체시 모두 50수
뿐이다. 고체시는 오로지 한유韓愈를 배웠는데 기이하고 험벽하기는 그보다 더 해서, 정경情境은 핍근하고 필력이 막힘이 없다. 율시와 절구 등의 시는 항상 성률에 구속되어 마음 속에 말하려는 것을 그대로 쏟아낼 수 없음을 못마땅히 여기셨다. 그래서 왕왕 한 두 구절만 이룬 채 그만 둔 것이 많다."(김윤조 역, 《역주 과정록》(태학사, 1997), p.279)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飢食而渴飮 강물은 흘러가고 산은 우뚝 솟았네 水流而山峙 이것은 이정섭李廷 의 〈오시吾詩〉 연작 가운데 두 수이다. 배고파 밥 먹고 목 마르면 물 마시듯 쓴 것이 내 시다. 즐거워 웃고 근심 겨워 찌푸린 것이 내 시다. 눈앞에 펼쳐지는 온갖 형상들이 모두 내 시다. 죽은 옛 경전 안에 내 시는 없다. 앵무새 흉내 속에 내 시는 없다. 나는 오직 내 가슴의 진실만을 노래할 뿐이다. 음식도 밤 지나면 상해 버리고 食經夜便嫌敗 이것은 이언진李彦 의 작품이다. 하루밤만 지나면 맛있는 음식도 부패해 먹을 수가 없다. 자드르 하던 새옷도 일년만 입고 나면 후줄근한 헌 옷이 된다. 한당漢唐의 문장인들 왜 썩지 않으랴. 그런대도 옛것만을 옳다고 하고 제길로만 따라오라 하니, 아! 시인의 입냄새가 참으로 고약하구나. 그렇지만 정작 이 시를 쓴 이언진은 그 시대에 절망하고 인간들에게 절망해서, 세상에 남겨 두어야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며 제가 쓴 시 원고를 죄 불질러
버리고 스물 일곱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 ▲ 위로 讀燕放筆·11 잃어버린 예법은 시골에 있다 아! 예禮를 잃게 되면 초야草野에서 찾는다더니 그 말이 옳다. 이제 천하가 머리를 깎고 옷섶을 좌로 여미게 되어, 한궁漢宮의 위의威儀를 알지 못하게 된 것이 이미 백여년이 되었다. 홀로 연희演戱하는 마당에서만 그 검은 모자와 둥근 소매, 옥 띠와 상아 笏을 본떠 장난치며 웃곤 한다. 아! 중원中原의 유로遺老들은 다 스러졌으니, 얼굴을 가리고서 차마 이를 보지 못하는 자가 있기나 하겠는가? 또한 이를 즐겨 구경하면서 그 옛 제도를 떠올려 보는 자가 있기는 할것인가? 해마다 가는 사신이 중국에 들어가 남쪽 吳 땅의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吳 땅 사람이
말하였다. 이홍재李弘載 군이 젋어서부터 내게서 배웠다. 장성해서는 한어漢語 통역에 힘을 쏟았으니 그 집안이 대대로 역관譯官이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문학을 권면하지 않았다. 이군이 그 학업에 힘을 쏟더니 관대冠帶를 하고는 사역원司譯院에 벼슬나갔다. 나 또한 이군이 앞서 책을 읽음이 자못 총명하여 문장의 도리를 능히 알았으나 이제는 거의 잊었으리라 생각하여, 그저 그렇게 없어지고 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었다. 하루는 이군이 스스로 지은 것이라고 하면서 제목하여 '자소집自笑集'이라 하고는 내게 보여주었다. 논論·변辨·서序·기記·서書·설說 같은 백여편은 모두 내용이 풍부하고 논리가 정연하여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이에 낯빛을 고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오래전부터 이를 염려하였기에, 특별히 이
문집에 써서 서문으로하여 말한다. 초등학교 4학년 난 딸아이는 날마다 일기를 쓰는데, 담임 선생님이 날씨를 그저 '맑음' '흐림'으로만 적지 말고 설명적인 기술로 적어오라고 한 모양이다. 몇달이 넘게 일기를 써오고 있지만, 그 날씨의 묘사가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붉다'는 한 글자만을 가지고 毋將一紅字 산마루 위에 핀 들꽃을 보고 지은 시이다. 눈 앞의 꽃을 보고 그저 '붉은 꽃'이라고만 말하지 말라. 시인이 사물을 보는 시선은 이래서는 안된다. 꽃술의 모양은 어떤지, 붉다면 어떤 붉은 색인지, 그것이 주는 느낌은 어떤지를 말해야 한다. 그래야 그 꽃은 내가 만난 단 하나의 의미가 된다. 가슴으로 만나지 못하는 꽃은 꽃이 아니다. '이름 모를 꽃'은 꽃이 아니다. 떨림이 없는 만남은 만남이 아니다. 고인 물은 일렁이지 않는다. 자리 옆에 더위가 물러가더니 座隅覺暑退 남극관南克寬(1689-1714)의 〈잡제雜題〉연작 중 한 수이다. 무더위 속에 대자리를 깔고 앉아 있노라니, 후덥지근하던 더위가 한풀 숙어짐을 느낀다. 처마 틈으로 비치던 해 그늘이 조금씩 위치를 바꾼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알겠구나. 가만히 앉아 있는 그, 하루 종일 입을 열어 말한 기억이 없다. 4구에서는 '도정陶情'이라고 했다. 그는 하루 내내 그저 죽치고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물레를 돌려 도자기를 빚어내듯, 마음 속에 뭉게뭉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빚어' 한편의 시를 자아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말 없던 앉아 있던 여름 오후를 함께 누려 보고 싶다. 그 맑은 시선의 내부에서 일어나던 투명한 광합성 작용을 느껴 보고 싶다. ================================================== ▲ 위로 讀燕放筆·12 새롭고도 예롭게
옛 사람에 책 읽기를 잘 한 사람이 있는데 공명선公明宣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옛 사람에 글을 잘 지은 이가 있으니 회음후 한신韓信이 그 사람이다. 왜 그럴까? 공명선이 증자에게서 세 해를 배웠는데 책을 읽지 않자 증자가 이를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선생님께서 가정에서 생활하시는 것을 뵈었고, 선생님께서 손님 접대하시는 것을 보았으며, 선생님께서 조정에 처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배웠지만 아직 능히 하지 못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배우지도 않으면서 선생님의 문하에 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 되었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해와 달이 비록 오래 되었어도 그 광휘는 날마다 새롭다. 책에 실려 있는 것이 비록 방대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제각금 다르다. 때문에 날고 잠기고 달리고 뛰는 온갖 생물 중에는 간혹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산천 초목에는 반드시 비밀스런 靈이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서 지초芝草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한다. 예禮에는 송사訟事가 있고 악樂에는 의논이 있으며,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그림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어진 이가 이를 보면 인仁이라 하고, 지혜로운 자가 이를 보면 지智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백세 뒤의 성인을 기다리더라도 의혹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선 성인의 뜻이고, 순임금과 우임금이 다시 살아나 일어나신다 해도 내 말은 고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은 뒷 어진이의 말이다. 우직禹稷과 안회顔回가 그 법도가 한가지이나, 소견이 좁아 융통성 없는 것과 제멋대로 공손치 않음은 군자가 말미암지 않는다.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은 나이가 스물 셋인데 문장에 능하여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며 나를 좇아 배운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그 글을 지음은 선진양한先秦兩漢의 글을 사모하였으나 그 자취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부한 말을 제거하기에 힘쓰다 보니 간혹 근거 없는데서 잃고, 논의를 세움이 지나치게 높은 것은 간혹 법도에 어긋남에 가까웠다. 이는 명나라의 여러 작가들이 법고와 창신에 있어 서로서로를 헐뜯으면서도 함께 바름을 얻지 못하고 나란히 말세의 자질구레함으로 떨어져서, 도를 지키는데 보탬이 없이 한갖 풍속을 병들게 하고 교화를 손상시키는 데로 돌아간 것이니, 나는 이것을 염려한다. 새것을 만들어 교묘하기 보다는 차라리 옛것을 본받아 보잘 것 없는 것이 더
나으리라. 일전 석사논문을 지도했던 제자에게서 E-mail을 받았다. 고문론을 주제로 쓴 제 논문을 누군가에게 주었다가, 연암을 고문가라고 한 논문
중의 언급 때문에 논란이 일었는데, 연암이 왜 고문가이냐? 그는 패관소품체를 썼다 해서 문체반정의 와중에서 정조에 의해 순정고문으로 된 반성문을 지어 제출하라는 견책을 입었다. 그렇다면 그는 반고문가임이 분명한데 무슨 근거로 고문가라고 했는가? 이것은 한양대학교에서만 통용되는 주장이 아닌가? 뭐 이런 말이 오갔던 모양이다. 요컨대 그런 상대의 계속된 힐난에 속수무책으로 신통한 대답을 못하고 물러선 녀석이 멀리 대만까지 글을 보내 내게 구조요청을 해온 것이었다. =================================================== ▲ 위로 讀燕放筆·13 속 빈 강정 소천암小川菴이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과 속기俗技를 두루 기록하였는데, 심지어 종이연에도 계보가 있고, 아이들 수수께끼에도 풀이를 달아 놓았다. 후미진 뒷골목의 흐드러진 인정과 익숙한 모습들, 문에 기대서거나 칼을 두드리거나, 어깨짓으로 아양떨고 손바닥을 치며 맹세하는 시정市井 사람들의 모습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다 제각금 조목조목 엮어 놓았다. 입과 혀로는 분변하기 어려운 것도 반드시 드러내었고, 생각이 미치지 못하던 바도 책을 열면 문득 실려 있다. 무릇 닭 울고 개 짖으며 벌레가
날고 좀이 꿈틀대는 것도 모두 그 모습과 소리를 얻었다. 이에 있어 십간十干으로 배열하고는 이름지어 《순패旬稗》라 하였다. 하루는 소매에서 꺼내 내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내가 다 읽고 나서 돌려주며 말하였다. 이 책을 보는 자는 소천암小川菴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노래가 어느 지방의 것인지를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로 알 수 있을 걸세. 이에 있어 잇대어 읽어 가락을 이루게 되면 성정性情을 논할 수도 있을 것이고, 화보畵譜를 붙여 그림을 그린다면 수염과 눈썹까지도 징험해낼 수 있을 것이네. 재래도인目宰 道人이 일찍이 논하기를, '석양 무렵 한 조각 돛단배가 잠깐 갈대숲 사이에 숨어 있으니, 뱃사공과 어부가 비록 모두 텁석부리에 쑥대머리라 해도 물가를 따라가며 바라보노라면, 심지어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인가 의심하게 된다'고 한 적이 있네. 아아! 도인道人이 나보다 먼저 얻었도다. 그대는 도인을 스승으로 모셔야겠네. 찾아가서 징험해 보게나!" 《순패旬稗》는
어떤 책인가? 소천암小川菴이란 이가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과 속기俗技를 적어 놓은 책이다. 종이연의 종류와 아이들 수수께끼, 민간의 노래와 사투리에서부터, 닭 울고 개 짖는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실려있지 않은 것이 없다. 장사치들이 제 손바닥을 치면서 한푼도 남지 않는다고 엄살을 떠는 이야기며, 몸파는 여자가 어깨짓을 하면서 남정네를 유혹하는 모습도 이 책을 펴면 만날 수가 있다. 뜬금없이 이 책을 가져온 소천암은 연암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한다. 꽁깍지만한 배에 고기 그물을 싣고, 석양 무렵 맑은 강에 두 폭 돛을 달고서 갈대 우거진 속으로 떨쳐 들어가니, 배 가운데 탄 사람이 비록
모두 텁석부리에 쑥대머리일지라도 물가를 따라가며 바라보면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 선생인가 싶어진다. 고기 그물을 싣고 쌍포 돛을 단 배야 일상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지만, 강물이 맑고 때가 석양인데다 하필 들어가는 곳이 갈대숲이고 보니, 그 안에 타고 있을 텁석부리에 쑥대머리 어부도 저 당나라 때 고사인 강호산인江湖散人 육구몽陸龜蒙일 것처럼만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해묵은 장도 그릇을 바꾸고 보니 입맛에 새롭더라는 이야기의 부연이다. 그렇지만 연암이 끝에서 이덕무의 말을 끌어와 그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한 것은, 텁석부리 쑥대머리를 고사 육노망 선생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솜씨는 아직도 부족하니 좀더 노력하라는 주문으로 나는 읽었다. '다음과 같이 삼가 아뢴다'는 이른바 '우근진右謹陳'이란 말은 진실로 속되고 더럽다. 유독
모르겠거니와 세상에 글짓는 자를 어찌 손꼽아 헤일 수 있으리오만, 판에 찍은 듯이 모두 이 말을 먹지도 못할 음식을 주욱 늘어 놓듯이 쓰니, 공용 격식의 글 머리나 말 머리에 으레 쓰는 투식의 말 되기에야 어찌 해가 되겠는가? 〈요전堯典〉의 '옛날을 상고하건데'란 뜻의 '왈약계고曰若稽古'나, 불경佛經의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란 뜻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바로 지금의 '우근진'일 뿐이다. 홀로 봄 숲에 우는 새는 소리마다 각각 다르고, 해시海市에서 보물을 살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새롭다. 하주荷珠, 즉 연잎에 구르는 이슬은 절로 둥글고 초박楚璞은 깎지 않아도 보배롭다. 그럴진대 척독가尺牘家가 《논어論語》를 조술祖述하고 풍아風雅를 거슬러가며, 그 사령辭令은 정자산鄭子産과 숙향叔向에게서
배우고, 장고掌故는 유향劉向의 《신서新序》와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를 본받는다면, 그 핵실核實하고 꼭 알맞은 것이 홀로 책策에 뛰어났던 가의賈誼나 주의奏議에 능했던 육지陸贄일 뿐이 아닐 것이다. 저가 고문사古文辭로 한번 이름이 나게 되면 단지 서序와 기記가 으뜸이 되는 줄만 알아, 허황된 것을 얼기설기 엮거나 엉뚱한 것을 끌어 당겨 와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가小家의 묘품 品이 됨을 배척하면서, 볕드는 창 깨끗한 안석에서 졸다가 베개로 고이기나 한다. 대저 공경한다고 하여 예를 갖춰 서서 엄숙하고 위엄있는 자태로 근엄하게 서 있는 것은 어버이를 모시는
도리가 아니다. 만약 다시금 옷소매를 넓게 펴서 마치 큰 손님을 보듯 하며 간단히 춥고 더운 것만을 묻고 다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공경스럽기는 공경스러워도 예를 안다고는 못할 것이다. 즐거운 낯빛과 기쁜 목소리로 어버이를 봉양함에 곳을 가리지 않는다 함이 어찌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빙그레 웃으면서, 앞서 한 말은 농담일 뿐일세."라고 한 것을 보면 공자께서도 농담을 잘 하신 것이며, "아내가 닭 울었다 하자, 남편은 날이 밝지 않았다 하네"는 시인의 척독尺牘일 뿐이다. 우연히 책 상자를 살펴보다가, 때가 마침 추운 겨울인지라 바야흐로 창문을 발랐는데, 예전에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글로 끼적거리다 남은
것을 얻으니, 모두 50여칙이었다. 어떤 것은 글자가 파리 대가리만 하고, 어떤 것은 종이가 나비 날개처럼 얇다. 어떤 것은 장독 덮개로 쓰기에는 조금 남고, 어떤 것은 대바구니에 바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에 뽑아서 한 권을 베껴 쓰고 방경각放瓊閣의 동루東樓에 보관해 두었다. 임진년(1772) 10월 초순, 연암거사는 쓴다. '우근진右謹陳'이란 당시 편지글에서 습관처럼 쓰던 말이다. 편지 쓰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어김없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이 말을 쓴다. 격식을 따지는 공문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상 쓰는 편지글에서야 굳이 이 말만은 꼭 써야하는 까닭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을 보면 글이 시작되는 곳마다
''왈약계고曰若稽古'를 되뇌고 있고, 그 많은 불경에는 어김없이 '여시아문如是我聞'이 서두에 적혀 있다. 그 '여시아문' 중에는 부처님이 직접하지 않은 자기 말도 얼마나 많겠는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습관처럼 쓰는 투식의 말은 예나 지금이나 있는 것이었구나. 어린아이들 노래에 이르기를,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는 것은 바늘 가지고 눈동자 찌름만 같지
못하네"라 하였소. 또 속담에도 있지요. "삼공三公과 사귈 것 없이 네 몸을 삼갈 일이다"라는 말 말입니다. 그대는 잊지 마십시오. 차라리 약한 듯 굳셀지언정 용감한체 하면서 뒤로 물러터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이오. 하물며 외세의 믿을만한 것이 못됨이겠습니까? 〈여중일與中一〉, 즉 중일中一이란 이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이다.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 무슨 일을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 보낸 글이지 싶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도끼를 휘두른대도 목표물을 맞히지 못하면 헛힘만 빠질 뿐이다. 차라리 작은 바늘로 상대의 급소를 찌르는 편이 훨씬 낫다. 굳이 높은 벼슬아치에게 연줄을 대려고 애쓸 것 없다. 내가 내 몸가짐을 바로 해 애초에 그런 일이 없도록 했어야 했다. 겉으로 위세등등하면서 뒤로 무른 것 보다는 외유내강이 훨씬 더 낫다. 외세는 결코 믿을 것이 못된다. 경전의 말을 끌어오는 대신 아이들의 동요와 민간의 속담을 인용해 충고를 던진 것이다. 속빈 강정이기 보다 매일 먹는 밥과 해묵은 장맛으로 쓴 글이다. 정옹鄭翁은 술이 거나해질수록 붓이 더욱 굳세어졌었지요. 그 큰 점은 마치 공만 하였고, 먹물은 날리어 왼쪽 뺨으로 떨어지곤 했더랍니다. '남南'자를 쓰다가 오른쪽 내려 긋는 획이 종이 밖으로 나가 방석을 지나자, 붓을 던지더니만 씩 웃고는 유유히 용호龍湖를 향해 떠나갑디다.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군요. 〈답창애答蒼厓〉, 즉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에게 보낸 아홉번째 편지글이다. 전문이래야 42자에 불과한데, 鄭翁이 술이 거나한채로 글씨 쓰는 광경이 마치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글은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맛이 있어야 한다. 귀에 대고 하는 말은 듣지를 말고, 절대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며 할 얘기라면 하지를 말 일이오. 남이 알까 염려하면서 어찌 말을 하고 어찌 듣는단 말이오. 이미 말을 해 놓고 다시금 경계한다면 이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인데, 사람을 의심하면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소. 〈답중옥答仲玉〉의 첫 번째 편지이다. 원래 세상 일이란 것이 그렇다. 귓속말은 대부분 떳떳치 못한 말이다. '이건 절대 비밀인데' 하며 하는 이야기는 으레 그 말까지 함께 옮겨지게 마련이다. 역시 전문이래야 44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간결한 필치 속에 이미 자신이 하고픈 말은
다 담고 있다. 글이란 이렇게 맵짜야 한다. =================================================== ▲ 위로 讀燕放筆·14 글쓰기와 병법 글을 잘 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 글자는 비유컨데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장典掌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隊伍 행진과 같다.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 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대저 장평의 군사가 그 용감하고 비겁함이 지난 날과 다름이 없고, 활.창.방패.짧은 창의 예리하고 둔중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건만, 염파廉頗가 거느리면 제압하여 이기기에 족하였고, 조괄趙括이 대신하자 스스로를 파묻기에 충분하였다.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 하는 자는 버릴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진실로 그 장수를 얻는다면 호미.곰방메.가시랑이.창자루로도 모두 굳세고 사나운 군대가 될 수 있고, 천을 찢어 장대에 매달아도 정채가 문득 새롭다. 진실로 그 이치를 얻는다면 집안 사람의 일상 이야기도 오히려 학관學官에 나란히 할 수 있고, 어린아이들의 노래나 마을의 상말도 또한 《이아爾雅》에 넣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篇과 장章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비유컨데 용감하지도 않은 장수가 마음에 정한 계책도 없이 갑작스레 제목에 임하고 보니, 아마득하기 굳센 성과 같은지라, 눈 앞의 붓과 먹은 산 위의 풀과 나무에 먼저 기가 꺾여 버리고, 가슴 속에 외웠던 것들은 벌써 사막 가운데 원숭이와 학이 되고 마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글을 잘하는 자는 그
근심이 항상 혼자서 갈 길을 잃고 헤매거나,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 대저 갈 길이 분명치 않으면 한 글자도 내려 쓰기가 어려울뿐 아니라 항상 더디고 껄끄러운 것이 병통이 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헤아림을 비록 꼼꼼히 하더라도 오히려 그 성글고 새는 것을 근심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음릉陰陵에서 길을 잃자 명마인 추 도 나아가지 않고, 굳센 수레로 겹겹히 에워싸도 여섯 마리 노새가 끄는 수레는 이미 달아나 버린 것과 같다. 진실로 능히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게 되면 마치 눈 오는 밤에 채蔡 성을 칩입하는 것과 같고, 토막 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면 세 번 북을 울리고서 관關을 빼앗는 것과 같게
된다. 글을 하는 도가 이와 같다면 지극하다 할 것이다. 나의 벗 이중존李仲存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 를 모아 엮어 열 권으로 만들고, 이를 이름하여 소단적치騷壇赤幟라 하였다. 아아! 이것은 모두 승리를 얻은 군대요 백 번 싸워 이긴 나머지이다. 비록 그 체재와 격조가 같지 않고, 좋고 나쁨이 뒤 섞여 있지만 제각금 이길 승산이 있어, 쳐서 이기지 못할 굳센 성이 없고, 그 날카로운 칼끝과 예리한 날은 삼엄하기가 마치 무고武庫와 같아, 때를 따라 적을 제압하여 움직임이 군대의 기미에 맞으니, 이를 이어 글 하는 자가 이 방법을 따른다면, 정원定遠의 비식飛食과 연연산燕然山에 공을 적어 새기는 것이 그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방관房琯의 수레 싸움은 앞 사람을 본받았어도 패하고 말았고, 우후虞 가 부뚜막을 늘인 것은 옛 법을 반대로 하였지만 이겼으니,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은 처남 이재성李在誠(1751-1809)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體를 모아 열 권으로 묶은 《소단적치》란 책에 써준 글이다. '소단적치'란 '문단의 붉은 깃발'이란 뜻이고 붉은 깃발은 대장군의 상징이다. 지금까지 과거에서 높은
등수로 합격한 모범 답안만을 엮어, 과거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실린 글을 익혀 과거 시험을 준비한다면 어떤 문제가 출제되더라도 답안 작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이다. ================================================== ▲ 위로 讀燕放筆·15 생각의 집, 나를 어디서 찾을까? 송욱宋旭이 취해 자다가 아침에야 술이 깼다. 드러누워 듣자니 솔개가 울고 까치가 우짖으며 수레 끄는 소리와 말 발굽
소리가 떠들썩하였다. 울타리 아래서는 방아 찧는 소리, 부엌에서는 설거지 하는 소리. 늙은이가 소리치고 아이가 웃는 소리, 계집종이 잔소리하자 사내종이 헛기침 하는 소리, 무릇 문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모를 것이 없는데, 유독 제 소리만은 없는 것이었다. 이에 그만 멍해져서 말하였다. "집안 사람들은 모두 있는데, 나만 어째 혼자 없는걸까?" 눈을 둘러 살펴보니, 저고리는 옷걸이에, 바지는 횃대에 있고, 갓은 벽에 걸려 있고, 허리띠는 횃대 끝에 매달려 있었다. 책상 위엔 책이 얹혀 있고, 거문고는 가로 놓이고, 비파는 세워져 있었다. 거미줄은 들보에 얽혀 있고, 파리는 창문에 붙어 있었다. 무릇 방안의 물건도 모두 그대로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유독 자기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급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서 그 자던 곳을 살펴보니, 베개를 남쪽으로 놓고 자리를 폈는데 이불은 그 속이 들여다 보였다. 이에 송욱이가 발광이 나서 벌거벗은 몸으로 나갔구나 하며 몹시 슬퍼하고 불쌍히 여겨, 나무라고 또 비웃다가 마침내 그 의관을 끌어안고, 가서 옷을 입혀주려고 길에서 두루 찾아다녔지만 송욱은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동곽東郭의 소경에게 가서 점을 쳤다. 소경은 점을 치며 말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갓끈이 끊어져 구슬이 흩어졌구나. 저 올빼미를 불러다가 헤아려보게
하자꾸나." 둥근 동전이 잘 구르다가 문지방에 부딪쳐 멈추자, 동전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축하하며 말하였다. "주인은 놀러 나갔고, 객은 깃들어 쉴 곳이 없구나. 아홉을 잃고 하나만 남았으니, 이레 뒤에는 돌아오겠구나. 이 점괘가 크게 길하니 마땅히 과거에 높이 붙겠구려." 송욱이 크게 기뻐하여, 매번 과거를 베풀어 선비를 시험할 때마다 반드시 유건儒巾을 쓰고 나아가서는, 문득 제 시험 답안에다 스스로 비점批點을 치고 높은 등수를 큰 글씨로 써 놓곤 하였다. 그래서 한양 속담에 반드시 이루지 못할 일을 두고 송욱宋旭이가 과거에 응시하기라고 말하곤 한다. 군자가 이말을 듣고 말하였다. "미치긴 미쳤지만 선비로구나! 이는 과거에 나가긴 해도 과거에 뜻을
두지는 않은 것이다." 계우季雨는 성품이 소탕하여 술마시기를 좋아하고 호방하게 노래하면서 주성酒聖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세상에서 겉은 번드르하면서 속이 유약한 사람을 보면 마치 더러워 토할 듯이 하였다. 내가 장난삼아 말하였다. "술 취해 성인聖人이라 자칭하는 것은 미친 것을 감추려는 것일세. 자네가 취하지 않고서도 생각이 없게 되면 거의 큰 미치광이의 경지에 가깝게 되지 않겠나?" 계우季雨가 정색을 하고 한동안 있더니, "그대의 말이 옳다" 하고는 드디어 그 집을 염재念齋라 이름 짓고 내게 기記를 부탁하였다. 마침내 송욱의 일을 써서 그를 권면한다. 대저 송욱은 미친 사람이다. 또한 이로써 나 스스로를 권면해 본다. 어느날 아침 술에서 깨고보니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나를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어디 있는가?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두고 벌거벗은 채 어디로 사라졌는가? 여기서 우리는 자못 심각한 자아분열의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창밖의 세계, 방안의 세계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그 속에 있어야 할 나만이 실종된 것이다. 어느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된 일일까?' 그는 생각했다. 결코 꿈은 아니었다. 약간 좁긴 해도 제대로 된 사람 사는 방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방은 낯익은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그레고르는 창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흐린 날씨가 -창턱 함석 위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온통 우울하게 만들었다. '좀더 잠을 청해 이런 어리석은 일을 잊도록 하자.'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그럴 수가 없었다. 흡사 위 카프카의 〈변신〉 첫 대목을 연상시키는 이 글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 버린 한 인간이 절망적 현실 앞에서 급기야 미쳐버린 이야기이다. 그래서 실종된 자아를 찾아나서는 이야기이다. 낮잠에서 깨어 보니 눈을 비비고 아무리 소리질러도 갑자기 두려움과 설움에 젖어 아마도 가위 눌린 꿈 한자락을
노래한 것임직 하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가 문득 부딪치는 벽, 두려움과 설움들. 단란한 웃음소리는 언제나 어딘지도 모를 먼곳에서만 들려오고, 뿌연 전등불 아래서 누구 한사람 돌아다 보지 않는 희미한 시계視界, 정작 나는 어디 있는가 하는 존재 증명을 위해 내쏟는 한없는 눈물과 울음들은 또 그것대로 전후戰後의 안스러운 내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송욱처럼 심각한 자기 실종으로까지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무릇 요행을 말할 때는 '만에 하나'라고들 하지요. 어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수만명도 더 되는데, 이름이 불리운 사람은 겨우 스무명 뿐이니 참으로 만분의 일이라 할만합니다. 문에 들어설 때에는 서로 짓밟느라 죽고 다치는 자를 헤일
수도 없고, 형과 아우가 서로를 불러대며 찾아 헤매다가 서로 손을 잡게 되면 마치 다시 살아온 사람을 만난 듯이 하니, 그 죽어 나간 것이 '열에 아홉'이라고 할만합니다. 이제 그대는 능히 열에 아홉의 죽음을 면하고 만에 하나의 이름을 얻었구려. 나는 무리 가운데에서 만분의 일에 영예롭게 뽑힌 것을 축하하지 않고, 다시는 열에 아홉이 죽는 위태로운 판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만 가만히 경사롭게 여깁니다. 즉시 몸소 축하해야 마땅하겠으나, 나 또한 열에 아홉의 나머지인지라, 바야흐로 드러누워 끙끙 앓으면서 용태가 조금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다오. 과거에 급제했다고 이웃에서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던 모양이다. 모두冒頭에서 과거급제는 요행수일 뿐이라고 말을 걸쳐 놓고, 이른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선발한다는 과거시험, 열이 들어가면 아홉이 죽어나오는 그 시험에 급제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축하하고 싶은 맘이 없고, 이제 다시는 그 난장판에 끼지 않아도 되게 된 것만을 축하한다고 했다. 본문 중에 열에 아홉이 죽어 나간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퍼뜩 앞서 〈염재기念齋記〉에서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던, 점장이가 아홉을 잃고 하나만 남았으니 좋은 징조라고 하던 점괘 풀이를 환기하게 된다. 정작은 연암 자신도 그 시험장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여태도 앓아 드러누워 있노라고 했다. 당시 선군의 문장은 명성이 이미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울리었다. 매번 과거 시험이 있을 때마다 시험을 주관하는 자가 반드시 끌어 당기려 하였으나, 선군은 그 의도를 간파하고 혹은 응시하지 않거나 혹은 응시는 하되 시권試券을 제출하지 않으셨다. 하루는 과장科場에 있으면서 고송古松과 노석老石을 그리니, 세상에서는 서투르고 물정을 모른다고들 비웃었다. 그러나 이는 대개 달갑게 여기지 않는 뜻을 보이신 것이었다.… 그는 왜 모든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벌떼같이 달려드는 과거 시험장에서 백지를 제출하거나, 한가롭게 고송古松 따위를 그리며 앉아 있었던 걸까? 과거 시험이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송욱처럼 미치지 않고는 견딜 길 없던 세상,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실현하겠다고 익힌 공부가 국가 사회를 위해 쓰일 수 없고, 고작 권문權門에 빌붙어 일신의 영달을 구하는데만 쓸모 있게 된 세상, 달아 삼켜 놓고 쓰다고 뱉는 그런 세상에 대한 절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때의 그 세상은 눈앞의 지금과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 ▲ 위로 讀燕放筆·16 스님! 무엇을 봅니까? 을유년 가을,
나는 팔담八潭에서부터 거슬러 가서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 치준대사緇俊大師를 방문하였다. 대사는 손가락을 깎지 껴서 인상印相을 만들고는 눈은 코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동자童子가 화로를 뒤적이며 향에 불을 붙이는데, 연기가 동글동글 한 것이 마치 헝크러진 머리털을 비끌어 매어 놓은 것도 같고, 자욱한 것은 지초芝草가 무성히 돋아나는 듯도 하여, 그대로 곧게 오르다가는 바람도 없는데 절로 물결쳐서 너울너울 춤추듯 흔들려 마치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자가 홀연히 묘오妙悟를 발하여 웃으며 말하였다. 동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이때 턱을 받치고 곁에 앉아 이를 듣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마득하였다. 담배가 방생한 연기는 지금 우리들 삶을 연기와 같다고 말하지만 담배연기, 박상천의 〈방생放生·5〉란 작품이다. 시인은 삶이란 흔적도 없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린 담배 연기와 같은 거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유롭지만 그러기에 허무한 거라고 말한다. 내 입에서 품어져 나간 담배 연기,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담배 연기, 분명히 있었지만 찾을 길 없는 담배 연기. 그는 왜 담배 연기를 보며 허무와 자유를 같이 떠올렸을까?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니 허무하고, 얽매임 없이 제멋대로 날아가고 있기에 자유롭다고 했다. 그런데 허무는 자유로운가? 자유는 과연 허무한 것인가? 담배 연기는 허무한가? 우리네 인생은 자유로운가? 인생이 허무한줄은 알아도, 그속에 자유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기에 삶의 번민은 늘어만 가는 것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의 전문이다. 향은 타고 나면 재가 남지만, 만해는 그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고 썼다. 타고 남은 재에서 단지 허무虛無와 공적空寂만을 본다면 그것은 깨달음이랄 수도 없다. 그처럼 그칠 줄 모르며 타는 나의 가슴이 있어, 재가 되고 허공이 된 뒤에도 허무적멸虛無寂滅로 스러지지 않고 알 수 없는 향기가 되고 작은 시내의 노래가 되며, 오동잎의 파문이 되어 전 우주를 껴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별의 말이 간절해도, 이른바 천리 길에 그댈 보내매 마침내는 한번 이별일 뿐이라는 것이니 어찌 하겠소. 다만 한 가닥 가녀린 정서情緖가 이리저리 감겨 면면이 끊어지지 않으니, 마치 허공 속의 허깨비 꽃과도 같구려. 와도 어디서 조차 오는지 모르겠고, 떠나가도 다시금 애틋할 뿐이라오. 접때 백화암百華菴에 앉았노라니, 암주菴主인 처화處華가 먼데 마을에서 바람결에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를 듣고는 그 비구인 영탁靈托에게 게偈를 내려 말하였다. 어제 그대가 정자 위에서 난간을 돌며 서성거릴 때 저는 또 다리 어귀에서 말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사이의 거리가 하마 1리 남짓 되더군요. 그때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던 곳은 또 어디쯤이었을까요? 〈답경지答京之〉, 즉 경지에게
보낸 답장의 엽서다. 벗과 헤어진 뒤 그 연연하고 애틋한 정서를 절묘하게 포착한 소품이다. 잘 가시게, 잘 있게. 이별의 말을 나누자 어느 새 가슴 한 구석이 메어져 온다. 무어라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가녀린 명주 실이 온 몸을 이리저리 감싼 듯 떨칠길 없는 면면한 정서가 내 마음 위로 흐른다. 그것은 분명히 있으되 볼 수가 없으니 허공 속의 환화幻花가 아니겠는가? 이런 정서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저물녘 용수산龍首山에 올라 그댈 기다렸지만 오시질 않더군요. 강물만 동편에서 흘러와서는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더이다. 밤이 이슥하여 달이 떠오길래 정자 아래로
돌아왔지요. 늙은 나무가 희뿌연데 사람이 서 있길래, 나는 또 그대가 나보다 먼저 그 사이에 와 있는가 생각했었다오. 〈답창애答蒼厓〉 다섯 번 째 편지이다. 오기로 한 벗은 기다려도 오지 않고, 강물만 멀리서 흘러와서는 또 어둠 속으로 흘러가 버린다. 밤 깊어 달이 둥실 떠오길래 만나기로 한 정자 아래로 돌아오는데 희뿌연 나무 아래를 보니 사람이 하나 우두커니 서 있다. 반가운 마음에 그대가 나를 놀래 주려고 그 사이에 먼저 와 있는가 했더라는 사연이다. 길게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 ▲ 위로 讀燕放筆·17 지황탕地黃湯 위의 거품 주공 公 스님이 입적한 지 엿새되던 날 적조암寂照菴 동대東臺에서 다비를 하였다. 그곳은 온숙천溫宿泉 노송나무 아래에서 열 걸음 거리도 되지 않았다. 밤마다 항상 빛이 있었는데, 벌레의 등에서 나는 초록빛이나 물고기 비늘의 흰빛, 썩은 버드나무의 검은빛과도 같았다. 대비구大比丘
현랑玄郞이 대중들을 이끌고서 마당을 돌다가 재계하고 두려워떨며 마음으로 공덕 쌓기를 맹서하였다. 나흘 밤이 지나서야 스님의 사리 3매를 얻어, 장차 부도浮圖를 세우려고 글과 폐백을 갖추어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내가 평소에 불가佛家의 말을 잘 알지 못하지만 애써 부탁하는지라, 이에 시험삼아 물어 보았다. 이에 시로 잇대어 말하였다. 乃爲係詩曰 지황탕地黃湯의 비유를 地黃湯喩 〈주공탑명〉은 윤광심尹光心(1751-1817)이 엮은 《병세집幷世集》과 이규경李圭景(1788-1856)의 《시가점등詩家點燈》에 연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수록되었을만큼 당대 문인들에게서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던 작품이다. 행간이 미묘할 뿐 아니라, 전체 글이 중층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물고기의 부레나 밤버섯은 모두 밤중에 빛을 낸다. 썩은 버드나무는 한밤중에는 마치 인불[燐火] 같다. 고양이가 캄캄한 밤에 등을 털면 불빛이 번쩍번쩍 한다. 이 네 가지 것들은 음陰의 종류이지만 음陰이 지극하게 되면 밝음과 통하게 된다. 이 인용에 따르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벌레의 등에서 나는 초록빛이나 물고기 비늘의 흰빛, 썩은 버드나무의 검은빛"이란 다름 아닌 '지음至陰'한 기운이
뿜어내는 '밝음'을 나타낸다. 무리와 함께 마당을 돌다가 스승의 시신을 안치한 대좌臺座 위로 밤마다 떠돌던 음산한 빛을 보고 그것을 스승의 남은 넋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령스런 기운으로 알았던 현랑玄郞 등은, 돌아가신 스승의 정신이 아직도 여기 머물러 자신들을 질책하는가 싶어, 놀라 두려워 떨며 공덕功德 쌓기를 다짐했던 것이다. 다시 그렇게 나흘이 지난 뒤에야 거기에 답하기라도 하듯 주공 스님은 3과顆의 사리를 남겨 응험하였다. 감격한 제자들은 이 일을 자세히 적어 연암을 찾아와 사리탑에 명문銘文 써줄 것을 간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마음만 낸다면 나는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 ▲ 위로 讀燕放筆·18 돌에 새긴 이름 정 민 연옥連玉 유련柳璉은 도장을 잘 새긴다. 돌을 쥐고 무릎에 얹고, 어깨를 기우숙하게 하여 턱을 숙이고서, 눈을 꿈뻑이고 입으로 불며 그
먹글씨를 파먹어 들어가는데 실낱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입술을 삐죽 모아 칼을 내밀고 눈썹에 힘을 주더니만 이윽고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보며 길게 숨을 내쉰다.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가 지나다가 그를 위로하며 말하였다. 무관이 웃으며 말하였다. 하루는 그 전에 모은 고금의 인장을 가지고 엮어 한 권으로 만들어 가지고 와서는, 내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공자께서 "나도 오히려 사관史官이 빠뜨린 글을
보았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신 것은 대개 이를 상심하신 것이다. 이에 있어 나란히 이를 써서 책을 빌려주지 않는 자의 깊은 경계로 삼는다. 〈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는 유련柳璉(1741-1788)이 자신이 수집한 고금의 인장印章을 찍어 한 권의 인보집으로 만든 《유씨도서보柳氏圖書譜》의 서문으로 써준 글이다. 그는 전각篆刻에 취미가 있어 옥돌 위에 쓴 글씨가 끊어지는 법 없이 잘도 파나간다. 그래서 아예 자字조차 제 이름을 파자破字하여 연옥連玉이라 하였다. 왼손에는 돌을 꽉 움켜쥐고, 칼을 든 오른쪽 어깨를 약간 높게 쳐들고는, 턱을 바짝 아래로 숙여 눈을 꿈뻑이고 입으로 돌가루를 연신 불어가며, 도장 위에 써놓은 글씨를 파들어가기 시작한다. 칼이 움직이고 돌가루가 튈 때마다 실낱같은 글자의 모양이
점점 또렷해진다.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마무리에서는 내미는 칼끝따라 저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 나오고, 눈썹을 찡그려 돌을 한동안 살펴보더니만, 이윽고 어깨에 힘을 빼더니 뻣뻣해진 고개를 쳐들며 긴장을 푸는 것이다. 그대가 고서古書를 많이 쌓아두고도 절대로 남에게는 빌려주지 않으니, 어찌 그다지도 딱하십니까? 그대가 장차 이것을 대대로
전하려 하는 것입니까? 대저 천하의 물건은 대대로 전할 수 없게 된지가 오래입니다. 요순이 전하지 않은 바이고 삼대三代가 능히 지키지 않았던 것인데도, 옥새를 새겨 만세에 전하려 했으니 진시황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오히려 몇 질의 책을 대대로 지켜내겠다고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책은 정해진 주인이 없고, 善을 즐거워 하고 배움을 좋아하는 자가 이를 소유할 뿐입니다. 만약 후세가 어질어 善을 즐거워 하고 배우기를 좋아 한다면, 벽 사이에 간직해 두었거나 무덤 속에 비장해둔 귀한 책이나 여러 차례 번역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의 책도 장차 남양南陽의 세가世家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후세가
어질지 않아 교만 방일하고 나태하게 되면 천하도 또한 지킬 수가 없거늘 하물며 책이겠습니까? 말을 남이 타도록 빌려주지 않는 것은 공자께서도 오히려 장차 상심하셨거니와, 책을 지닌 사람이 남이 읽도록 빌려주지 않는다면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그대가 만약 자손이 어질든 어리석든 모두 대대로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더더욱 큰 잘못입니다. 군자가 창업하여 실마리를 드리움은 계승할만 것이 되는 까닭에 법으로 이를 분명하게 하고, 덕德으로 이를 이끌며, 모습으로 이를 보여주지 않음이 없는데도, 후세가 오히려 혹 이를 실추하여 계승함이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관석關石과 화균和勻을 하夏나라의 자손들이 진실로 대대로 지킬 수 있었다면 구정九鼎을 어찌 옮겼겠으며,
밝은 덕과 좋은 향기를 은나라의 자손들이 진실로 대대로 지킬 수 있었더라면 박사 社를 어찌 고쳤겠습니까? 천자를 공경함을 주나라의 자손들이 진실로 대대로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면 명당明堂을 어찌 헐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보건데, 법을 밝게하여 후세에 드리우고, 덕으로 이끌고 모습으로 보여주더라도 오히려 지키기가 어렵거늘, 이제 천하의 고서古書를 사사로이하여 남이 선하게 되도록 빌려주지 아니하면서 교만하고 인색하게 책을 끼고서 후세에 건네주려 하니,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우고, 벗을 가지고 어짐을 보태나니, 그대가 만약 어짊을 구한다면
천 상자에 가득한 책을 벗들에게 주어 함께 닳아 없어지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 이제 높은 누각에다 묶어 두고서 구차하게 후세의 계획을 세우려한단 말입니까? 이 편지로 보아 유련은 천 상자에 달하는 책을 소장했던 엄청난 장서가였고, 그 중에는 구해보기 힘든 책도 많았으되 남에게는 절대로 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 책 마다 도장을 찍어 소유주를 밝히고, 그것으로 대대로 물려 전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 그가 《유씨도서보柳氏圖書譜》라는 인보집을 가져와 연암에게 서문을 부탁했던 것이다. 아마 당초 그의 마음은 연암의 서문에서 귀한 인장을 이리도 많이 모아 마침내 한권의 책으로 묶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장한 일이라는 식의 덕담을 기대했을 법하다. 돌 다듬는 사람이 새기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마침내 함께 무덤에 가서 다투었으나 무덤은 적막하니 소리가 없고, 세 번을 불렀지만 세 번 다 응답하지 않았다. 이때 돌 사람이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며 말하였다. 양자운揚子雲은 옛것을 좋아하는 선비로 기이한 글자를 많이 알았다. 그때 마침 《태현경太玄經》을 초하고 있다가 정색을 하고 얼굴빛을 고치더니만 개연히 크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글은 돌 다듬는 석수쟁이와 비석에 글자를 새기는 조각쟁이와의 말다툼으로 시작된다. 석수쟁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공적을 세웠다 해도, 비석을 세우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 그 사람의 훌륭함 보다도 오히려 나의 공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천하에 가장 단단한 물건인 돌을 쪼개어 비석으로 세우는 나야말로 가장 위대하다. 그러자 조각쟁이가 즉각 반발한다. 웃기지 마라! 돌만 세운다고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훌륭한 문장이 있다해도 내가 글씨를 새기지 않고는 쓸데가 없는 것을. 돌이 오래가지만, 글자를 새겨야만 의미를 갖게 된다. 내가 더 위대하다. ================================================ ▲ 위로 讀燕放筆·19 요동벌의 한 울음 초팔일 갑신 맑음. 정사正使와 가마를 같이 타고 삼류하三流河를 건너, 냉정冷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십여리를 가서 한 줄기 산 자락을 돌아 나오자, 태복泰卜이가 갑자기 몸을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말 머리를 지나더니 땅에 엎디어 큰 소리로 말한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서 말하였다. 기쁨이 지극하면 울 수가 있고, 분노가 사무쳐도 울 수가 있네. 즐거움이 넘쳐도 울 수가 있고, 사랑함이 지극해도 울 수가 있지. 미워함이 극에 달해도 울 수가 있고, 욕심이 가득해도 울 수가 있다네. 가슴 속에 답답한 것을 풀어버림은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거니와,
울음은 천지에 있어서 우레와 천둥에 견줄만 하다 하겠소. 지극한 정이 펴는 바인지라 펴면 능히 이치에 맞게 되니, 웃음과 더불어 무엇이 다르리오? 사람의 정이란 것이 일찍이 이러한 지극한 경지는 겪어보지 못하고서, 교묘히 칠정을 늘어놓고는 슬픔에다 울음을 안배하였다네. 그래서 죽어 초상을 치를 때나 비로소 억지로 목청을 쥐어짜 '아이고' 등의 말을 부르짖곤 하지. 그러나 진정으로 칠정이 느끼는 바 지극하고 참된 소리는 참고 눌러 하늘과 땅 사이에 쌓이고 막혀서 감히 펼치지 못하게 되네. 저 가생賈生이란 자는 그 울 곳을 얻지 못해 참고 참다 견디지 못해 갑자기 선실宣室을 향하여 큰 소리로 길게 외치니, 어찌 사람들이 놀라 괴이히 여기지 않을 수
있었겠소." 정진사가 말했다. 아이가 태 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힌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 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 나와 손과 발을 주욱 펼 수 있고 마음이 시원스레 환하게 되니 어찌 참된 소리로 정을 다해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런 까닭에 마땅히
어린아이를 본받아야만 소리에 거짓으로 짓는 것이 없게 될 것일세.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는 것이 한 바탕 울만한 곳이 될만 하고,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산金沙山이 한 바탕 울만한 곳이 될만 하오. 이제 요동벌에 임하매,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일천 이백 리 길에 사방에는 모두 한 점의 산도 없어 하늘 가와 땅 끝은 마치 아교풀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것만 같아 해묵은 비와 지금 구름이 다만 창창할 뿐이니 한 바탕 울만한 곳이 될만 하오." 한낮은 너무나 더웠다. 말을 재촉하여 고려총高麗叢과 아미장阿彌庄을 지나 길을 나누었다.
주부主簿 조달동趙達東 및 변래원卞來源, 정진사鄭進士, 하인 이학령李鶴齡과 더불어 구요동舊遼陽에 들어가니, 그 번화하고 장려함은 봉황성鳳凰城에 열 배나 된다. 별도로 〈요동기遼東記〉가 있다. 이번에 읽으려는 〈호곡장好哭場論〉은 《열하일기》의 한 부분으로, 압록강을 건너 드넓은 요동벌과 상면하는 감격을 적은 글이다. 본래 제목이 없으나 선학先學의 명명命名을 따랐다. 1939년 경성제국대학 대륙문화연구회가 북경과 열하 일대를 답사하고 펴낸 보고서, 《북경北京·열하熱河の사적관견史的管見》에서 결론 대신 이 글을 적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문장이다. 요동벌 그 언제나 끝이 나려나 遼野何時盡 제목은 〈요야효행遼野曉行〉이다. 열흘을 가도록 요동벌은 단지 지평선만을 보여줄 뿐이다. 가도 가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산 하나 보이지 않는 벌판, 크게 지르는 소리는 메아리만 남기고 지평선 끝으로 사라진다. 말 머리 위론 새벽 별이 떨어지고, 밭두둑 너머로 아침 해가 누리를 비추며 떠오른다. 物象의 모습이 그 햇빛에 하나 둘씩 제 모습을 드러낸다. 아! 대지 위의 내 모습은 너무도 미소微小하구나. 매탕梅宕 이덕무李德懋가 필시 미친 병이 난 듯 한데 그대는 이를 아는가? 그가 황해도 장연長淵에 있을 적에 일찍이 금사산金沙山에 올랐더라네. 한 바다가 하늘을 치매, 스스로 너무나 미소微小한 것을 깨닫고는 아마득히 근심에 젖어 탄식하며 말했더라지. 연암이 처남 이재성李在誠에게 보낸 편지글 〈여중존與仲存〉이다. 이덕무가 장연 바닷가의 모래산인 금사산에 올랐는데, 그 역시 연암이 요동벌을 앞에 두고 그랬던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 광막한
시계視界에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그래서 너무도 하잘 것 없는 존재의 나약함을 깨달음은 물론, 아울러 앞 바다에 떠 있는 섬조차도 탄알만하게만 여겨져 공연히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을 걱정하느라 노심초사 했더라는 이야기이다. 연암이 〈호곡장론〉의 말미에서 금사산을 거론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봉沙峰의 꼭대기에 우뚝 서서 서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 뒷편은 아마득하여 그 끝이 보이지 않는데, 용과 악어가 파도를 뿜어 하늘과 맞닿은 곳을 알지 못하겠다. 한 뜨락 가운데다 울타리로 경계를 지어, 울타리 가에서 서로 바라보는 것을 이웃이라 부른다. 이제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이편 언덕에 서 있고, 중국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사람은 저편 언덕에 서 있으니, 서로 바라보아 말을 할 수도
있으되, 하나의 바다가 넘실거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니, 이웃 사람의 얼굴을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귀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며 발로 이르지 못하는 곳이라 해도, 오직 마음이 내달리는 바는 아무리 멀어도 다다르지 못할 곳이 없다. 이편에서는 이미 저편이 있는 줄을 알고, 저편 또한 이편이 있는 줄을 알진대, 바다는 오히려 하나의 울타리일 뿐이니, 보고 또 듣는다고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령 무언가를 붙잡고서 흔들흔들 구만리 상공에 올라가 이편 언덕과 저편 언덕을 한눈에 다 본다면 한 집안 사람일 뿐일 터이니, 또한 어찌 일찍이 울타리로 막혀있는 이웃이라 말하겠는가? 높이 올라 멀리를 바라보니, 더더욱 내가 잗단 존재임을 깨달아 아마득히 근심이 일어, 스스로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저 섬에 사는 사람들을 슬퍼하였다. 가령 탄환만한 작은 섬에 기근이 해마다 들고, 바람과 파도가 하늘과 맞닿아 진대賑貸하는 곡식조차 통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해구海寇가 몰래 쳐들어 와 바람을 타고 돛을 올려도 달아나 숨을 땅이 없어 전부 도륙을 당하게 되면 어찌 한다지? 용과 고래, 악어와 이무기가 뭍을 에워 알을 낳고서 사나운 이빨과 독한 꼬리로 사탕수수처럼 사람을 짓씹어 먹는다면 어찌 하지? 해신海神이 크게 성을 내어 파도가 솟구쳐서 마을 집을 덮쳐 버려 남김없이 쓸어가 버리면 어떻게 하나? 바닷물이 멀리로 옮겨가 하루 아침에 물길이 끊어져 외로운 뿌리가 우뚝 솟아 아마득히 바닥을
드러낸다면 어찌 하나? 파도가 섬의 밑둥을 갉아 먹어 오래도록 물에 잠겨 흙과 돌이 견디지 못하고 물결을 따라 무너져 버리면 어떻게 할까? 객이 말하였다. 금사산은 황해도 장연 땅 장산곶의 백사장을 말하니, 바람이 실어온 금모래가 산을 이룬 곳이다. 바람에 따라 산의 모습은 백변百變의 장관을 연출한다. 툭 터진 시야로 서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진정眞情을 펾은 마치 고철古鐵이 못에서 활발히 뛰고, 봄날 죽순이 성난 듯 땅을 내밀고 나오는 것과 같다. 거짓 정을 꾸미는 것은 먹을 반반하고 매끄러운 돌에 바르고, 기름이 맑은 물에 뜬 것과 같다. 칠정 가운데서도 슬픔은 더더욱 곧장 발로되어 속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슬픔이 심하여 곡하기에 이르면 그 지극한 정성을 막을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진정에서 나오는 울음은 뼛속으로 스며들고, 거짓 울음은 터럭 위로 떠다니게 되니, 온갖 일의 참과 거짓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살아가는 일은 답답하고 속터지는 일이다. 봄날 죽순이 땅을 밀고 솟아나듯,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겉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울음과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진정에서 나와 뼛속까지 스며드는 그런 울음은 어디에 있는가? 갓난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터뜨리는 첫 소리 같은 울음을 어떻게 울 수 있을까? 나의 시, 나의 노래는 그러한 울음이었던가? 슬프지도 않으면서 짐짓 슬픈체 우는 거짓 소리는 아니었던가? 기름이 물에 뜬 것처럼, 반반한 돌 위에 쓴 먹 글씨처럼 스미지는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그런 울음은 아니었던가? 아! 그곳은 어디에 있는가? 요동의 벌판에 있는가, 금강산 비로봉의 꼭대기에 있는가? 아니면 장연의 바닷가에 있는가? 나도 그런 곳에 서서 큰 소리로 한번 울어 보고 싶구나. 천추의 커다란 울음터라니 千秋大哭場 ================================================== ▲ 위로 讀燕放筆·20 제 2의 나를 찾아서 옛날에 벗을 말하는 자는 벗을 두고 혹 '제이오第二吾'라 하기도 하고, '주선인周旋人'이라고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 글자를 만든 자가 '우羽'자에서 빌려와 '붕朋'자를 만들고, '수手'자와 '우又'자로 '우友'자를 만들었으니,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이 양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자는 "천고千古의 옛날을 벗삼는다"고 한다. 답답하구나, 이 말이여! 천고의 사람은 이미 화하여 흩날리는 티끌이나 서늘한 바람이 되었는데, 그 장차 누가 나를 위해 제이오第二吾가 되며, 누가 나를 위해 주선한단 말인가? 양자운揚子雲이 당시 세상에서 지기知己를 얻지 못하자, 개연히 천세千歲 뒤의 자운子雲을 기다리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의 조보여趙寶汝가 이를 비웃어 말하기를, 아아! 내가 《회성원집繪聲園集》을 읽고는, 나도 모르게 심골心骨이 끓어 올라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였다. 봉규씨의 시詩는 훌륭하다. 그 대편大篇은 소호韶頀의 음악을 펴는듯 하고, 단장短章은 옥구슬이 쟁그랑 울리는 것만 같다. 그 음전하고 온아함은 마치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를 보는 것 같고, 드넓고도 소슬함은 마치 동정호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나는 또 알지 못하겠구나. 이를 지은 자가 양자운인지, 아니면 이를 읽는 자가 양자운인지를. 아아! 말은 비록 달라도 글의 법도는 같으니, 다만 그 기뻐 웃고 슬퍼 우는 것은 번역하지 않고도 통한다.
왜 그런가? 정情이란 겉꾸미지 못하고, 소리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장차 봉규씨와 더불어 한편으로 후세의 양자운을 기다림을 비웃고, 한편으로는 천고를 벗삼는다는 말을 조문하련다. 벗은 '제 2의 나'이다. 나를 위해 온갖 일을 다 나서서 '주선해 주는 사람'이다. '붕朋'이란 글자는 '우羽'자의 모양을 본떴고, '우友'자는 '수手'자에 '우又'자를 포개 놓은 모양이다. 진정한 벗이란 새의 양 날개나, 사람의 두 손과 같이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안될만큼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 한쪽 날개와 다른 편 손과
같은 벗을 두고, 사람들은 턱도 없이 '상우천고尙友千古'를 말하곤 한다. 상우천고라니, 그것은 아득한 천고의 고인을 벗으로 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어떻게 내 오른 팔이 되고, 내 왼편 날개가 되며, '제 2의 나'가 되고, 나를 위해 '주선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벗이란 지금 내 곁에 있을 때 의미가 있을 뿐이다. 곁에 마음 나눌 벗이 없고 보니, 답답한 나머지 나온 말이라고는 하지만, 안타깝구나 상우천고의 그 말이여! 한참 무더운 중에 그간 두루 편안하신가? 성흠聖欽은 근래 어찌 지내고 있는가? 늘 마음에 걸려 더욱 잊을 수가 없네.
중존仲存과는 이따금 서로 만나 술잔을 나누겠지만, 백선伯善은 청파교靑坡橋를 떠나고 성위聖緯도 운니동雲泥洞에 없다 하니, 이같은 긴 여름날에 무엇하며 지낼는지 모르겠구려. 듣자니 재선在先은 벼슬을 하마 그만 두었다던데, 돌아온 뒤로 몇 번이나 서로 만나보았는가 궁금하이. 저가 조강지처를 잃은데 더하여 무관懋官 같은 좋은 친구마저 잃었으니, 아득한 이 세상에서 외롭고 쓸쓸해 할 그 모습과 언어는 보지 않고도 가늠할 만 하네 그려. 또한 하늘과 땅 사이의 궁한 백성이라 말할만 할 것이오. 아아! 슬프다. 나는 일찍이 벗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아픔보다 심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를 잃은 자는 오히려 두 번, 세 번 장가들어 아내의 성씨를 몇가지로 하더라도 안될 바가 없다. 이는 마치 옷이 터지고 찢어지면 깁거나 꿰메고, 그릇과 세간이 깨지거나 부서지면 새것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혹 뒤에 얻은 아내가 앞서의 아내보다 나은 경우도 있고, 혹 나는 비록 늙었어도 저는 어려, 그 편안한 즐거움은 새 사람과 옛 사람 사이의 차이가 없다. 벗을 잃는 아픔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다행히 내게 눈이 있다해도 누구와 더불어 내가 보는 것을 함께 하며, 귀가 있다해도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맛보는 것을 함께 하며, 코가 있어도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 하며, 다행히
내게 마음이 있다 해도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깨달음을 함께 하겠는가? 종자기가 죽으매, 백아가 석 자의 마른 거문고를 끌어 안고 장차 누구를 향해 연주하며 장차 누구더러 들으라 했겠는가? 그 기세가 부득불 찼던 칼을 뽑아들고 단칼에 다섯 줄을 끊어 버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 소리가 투두둑 하더니, 급기야 자르고, 끊고, 집어던지고, 부수고, 깨뜨리고, 짓밟고, 죄다 아궁이에 쓸어넣어 단번에 그것을 불살라버린 후에야 겨우 성에 찼으리라. 그리고는 스스로 제 자신에게 물었을테지. 〈여인與人〉, 즉 벗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편지에 나오는 성흠聖欽은 이희명李喜明(1749-?)의 자이고, 중존仲存은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1751-1809)이다. 백선伯善은 누구의 자인지 분명치 않다. 성위聖緯는 이희명李喜明의 형인
이희경李喜經(1745-?)이고, 재선在先은 박제가朴齊家(1750-1805), 무관懋官은 이덕무李德懋(1741-1793)를 말한다. 젊은 시절 함께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던 벗들이자 제자들이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을 이룬다면, 50일만에 다섯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뽕나무를 10년 길러 제법 무성해지면, 그제서야 누에를 먹이겠다. 누에가 실을 뱉으면 오색으로 곱게 물을 들여야지. 열흘에 한 가지씩 50일만에 물을 들여 봄볕에 쬐어 말려야지. 오색실이 뽀송뽀송하게 마르거든 아내에게 부탁하여 내 친구의 얼굴을 그 실로 수놓게 하겠다. 그것도 한 반년은 걸리겠지. 그런 뒤에 귀한 비단으로 배접하고 표구해서 고옥古玉으로는 괘를 달아야지. 그것을 들고서, 저 백아가 종자기를 앞에 앉혀두고 연주하던 드높은 산과 양양히 흐르는 강물로 나아가 이것을 걸어놓고 마주보며 말없이 앉아 있겠다. 날이 다 저물도록 그렇게 있다가 오겠다. 단 한 사람의 지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를 위해 나는 기꺼이 이렇게 하겠다. 단 한 사람의 지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 ▲ 위로 讀燕放筆·21 갈림길의 뒷 표정 영숙永叔은 장수 집안의 자손이다. 그 선대에 충성으로 나라를 위해 죽은 이가 있으니, 지금까지 사대부들이
이를 슬퍼한다. 영숙은 전서와 예서에 능하고 장고掌故에 밝다. 젊어서 말 타기와 활 쏘기에 뛰어나 무과에 뽑히었다. 비록 벼슬은 시명時命에 매인 바 되었으나,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으려는 뜻만은 선조의 공덕을 잇기에 족함이 있었으니 사대부에게도 부끄럽지가 않다. 아아! 그런 영숙이 어찌하여 식솔을 이끌고서 예맥 貊의 고장으로 들어가는가? 영숙이 일찌기 나를 위해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거처를 잡아준 일이 있었다. 산이 깊고 길이 막혀 종일을 가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다. 서로 더불어 갈대 숲 가운데에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배기를 구획지으면서 말하였다. 이제 영숙은 기린협에서 살겠다고 한다. 송아지를 지고 들어가 키워서 밭을 갈게 하겠다고 한다. 소금도 된장도 없는지라 산아가위와 돌배로 장을 담그리라고 한다. 그 험하고 가로막혀 궁벽한 품이 연암협 보다도 훨씬
심하니, 어찌 견주어 같이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갈림길 사이를 서성이면서 여태도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하물며 감히 영숙이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뜻을 장히 여길지언정 그 궁함을 슬퍼하지 않으련다. 현실에 좌절하고 가난을 못이겨 식솔들을 이끌고 강원도 두메 산골로 들어가는 벗 백영숙白永叔을 전송하며 써준 글이다. 친구를 전송하면서도 글을 써주느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예전에는 그랬다. 그의 이름은 백동수白東修(1743-1816)이니 영숙永叔은 그의 자이다. 호는 인재靭齋 또는 야뇌당野 堂이라 하였고 점재漸齋라고도 했다. 야뇌野 는 누구의 호인가? 내 친구 백영숙의 자호自號이다. 내가 영숙을 보건데는 기위奇偉한 선비인데, 무슨 까닭으로 스스로 그 낮고 더러운 곳에 처한단 말인가? 나는 이를 알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세속을 벗어나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선비를 보면 반드시 이를 조소하고 비웃어 말하기를, 온세상이 모두 그러한지라, 이른바 야뇌野 한 사람은 홀로 기쁘게 그 길을 가다가도 세상 사람이 나와 함께하지 않음을 탄식하여, 혹 후회하여 그 순박함을 버리거나, 혹 부끄러워하여 그 질박함을 버려, 점차 각박한데로 나아가게 되니, 이 어찌 참으로 야뇌한 것이라 하겠는가? 야뇌한 사람은 또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백영숙은 고박古樸하면서도 실질實質이 있는
사람이다. 차마 도타움을 가지고 세상의 화려함을 사모하거나, 질박함을 가지고 세상의 속임수 쓰는 것을 뒤쫓지 아니하고, 굳세게 스스로를 세워 마치 방외方外에서 노니는 사람과 같음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무리로 모여 헐뜯고 비방하여도 야野함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뇌 함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니, 이 사람이야 말로 진실로 야뇌한 사람이라고 말할 만 하다. 이룬 것 없는 야인의 삶과 굶주림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뇌인 人의 생활을 자조하면서도, 질박하고 도타운 삶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이 야뇌당이란 이름 속에 담겨 있음을 본다. 요컨대 백영숙은 그런 사람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지극한 우정은 궁할 때의 사귐이라 하고, 벗의 도리에 대한 지극한 말로는 가난을 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아! 청운靑雲의 선비가 혹 굽히어 초가집에 수레타고 찾아오기도 하고, 포의布衣의 선비가 혹 권세가의 붉은 대문에 소매자락을 끌기도 하니, 어이하여 서로 간절히 구하는데도 서로 마음맞기가 이다지 어렵단 말인가? 대저 사람은 인색하지 않음이 없어 아끼는 것에 재물보다 심한 것이 없고, 또한 추구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매 혐오하는 바가 재물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도, 그 아껴 혐오하지 않음만을 논하니 하물며 다른 것에 있어서이겠는가!《시경》에 이르기를, "마침내 구차하고 가난한데도 내 어려움을 알아주는 이 없네."라고 하였다. 대저 내가 어렵게 여기는 바에 대해 남들은 반드시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까닭에 천하의 은혜와 원망이 이로부터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재물이 많은 사람은 남이 요구할까 근심하여 먼저 그 없는 것을 일컬어 남의 바램을 끊어 버리는 까닭에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바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른바 술잔을 머금고서 은근히 대접하여 손을 맞잡고 무릎을 맞대던 자도 모두 그 서글피 머뭇거림을 이기지 못한채 구슬프게 낙심하여 돌아가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다. 나는 이에 있어 가난을 논의함이 쉬 얻을 수 없으며, 앞서의 말이 대개 격동됨이 있어 그렇게 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대저 곤궁할 때의 사귐을 지극한 벗이라 함이 어찌 자질구레 하고 비루하다 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또한 어찌 반드시 요행으로 얻을 수 있기에 말하는 것이겠는가? 처한
바가 같고 보니 자취를 돌아볼 것이 없고, 근심하는 바가 한가지인지라 그 어렵고 힘든 사정을 아는 것일 뿐이다. 손을 잡고 괴로움을 위로할 때엔 반드시 그 굶주리고 배부르며 춥고 따뜻한지를 먼저 묻고, 그 집안 사람의 생산을 묻는다.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절로 말하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슬퍼함에 감격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지난날에 지극히 말하기 어렵던 것이 지금은 입을 따라 곧장 거침없이 쏟아져 능히 막을 수 없게 된단 말인가? 때로는 문으로 들어가 길게 읍을 하고는 하루 종일 말없이 있으면서 베개를 찾아 한숨 자고서 떠나가도 오히려 다른 사람과 십년 이야기 한 것보다 더 낫지 않겠는가? 이는 다른 것이 아니다. 사귐에 있어 마음이 맞지 않으면 말을 하더라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고, 그 사귐에 간격이 없다면 비록 묵묵히 둘이 서로 말을 잊더라도 괜찮은 것이다. 옛말에 "머리가 흰데도 낯설고, 길에서 잠깐 만나 사귀었는데도 오랜 친구와 같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내 친구 백영숙은 재기才氣를 자부하며 이 세상에서 노닌지 30년인데도 마침내 곤궁하여 세상과 만나지 못하였다. 이제 장차 그 양친을 모시고 끼니를 해결하러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려 한다. 아아! 그 사귐은 곤궁함을 가지고서였고, 그 대화는 가난을 가지고서였으니, 나는 이를 몹시 슬퍼한다. 그러나 대저 내가 영숙에게 있어 어찌 다만 곤궁한 때의 친구일 뿐이겠는가? 그 집에 반드시 이틀의 땔거리가
있지 않았는데도, 서로 만나면 오히려 능히 차고 있던 칼을 끌러 술집에 전당잡히고서 술을 마셨고, 술이 거나해지면 큰 소리로 노래하며 업신여겨 꾸짖고 장난치며 웃어버리니, 천지의 비환悲歡과 세태世態의 염량炎凉, 마음 맞음의 달고 씀이 일찍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음이 없었다. 아아! 영숙이 어찌 곤궁할 때의 벗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찌 그렇게 자주 나와 종유해 마지 않았더란 말인가? 영숙은 진작부터 당시에 이름이 알려져, 사귐을 맺은 벗이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다. 위로는 정승과 판서, 목사와 관찰사에서, 그 다음으로 현달한 사람과 이름난
선비들이 또한 이따금 서로 밀어 허락하였다. 그 친척과 마을 사람, 그리고 혼인으로 교의交誼를 맺은 이가 또 한둘이 아니었다. 대저 말 달리고 활 쏘며 칼로 치고 주먹을 뽐내는 부류와 서화書畵와 인장印章, 바둑 장기, 거문고와 의술醫術, 지리地理, 방기方技의 무리로부터 저잣거리의 교두꾼과 농부, 어부, 백정, 장사치 등의 천한 사내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길에서 만나 정을 나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또 집으로 연신 찾아오는 사람도 접대하였다. 영숙은 또 능히 그 사람에 따라 얼굴빛을 달리하여 각기 그 환심을 얻었다. 또 산천의 노래하는 풍속과 이름난 물건, 옛 자취 및 관리의 다스림과 백성들의 고충, 군정軍政과 수리水利를 잘 말하였는데, 모두 그의 뛰어난 바였다. 이것으로 여러 수많은 사귀는 사람과 노닌다면 또한 어찌 뜻을 얻어 마음껏 질탕하게 따를 한 사람이 없겠는가? 그러나 홀로 때때로 내 집 문을 두드리는데, 물어보면 달리 갈데가 없다는 것이다. 영숙은 나보다 일곱 살 위인데,
나와 더불어 한 마을에 살던 것을 돌이켜 보면, 나는 그때 아직 동자였는데 이제는 이미 수염이 나 있다. 십년을 손꼽아 보는 사이에 모습의 성쇠가 이와 같건만, 우리 두 사람에게는 오히려 하루와 같으니, 그 사귐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아아! 영숙은
평생 의기意氣를 중하게 여겼다. 일찍이 손수 천금을 흩어 남을 도운 것이 여러번이었으나, 마침내 곤궁하여 세상과 만나는 바가 없어, 사방에서 그 입에 풀칠함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비록 활을 잘 쏘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그 뜻이 또 녹록하게 남을 따라 오르내리며 공명을 취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이제 또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서 기린협 가운데로 들어가는데, 내 듣기에 기린협은 옛날 예맥의 땅으로 험준하기가 동해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그 땅 수백리가 모두 큰 고개와 깊은 골짝으로 나뭇가지를 더위잡고서야 건너고, 그 백성은 화전을 일구고 너와를 얹어 집짓고 사니, 사대부는 살지 않는다고 한다. 소식은 일년에 겨우 한차례나 서울에 이를 것이다. 낮에 나가면 오직 손가락 끝이 무지러진 나뭇꾼과 쑥대머리를 한 숯쟁이들이 서로 더불어 화로에 빙 둘러 앉아 있을 뿐이리라. 밤이면 솔바람소리가 쏴아 하며 일어나 집 둘레를 흔들며 지나가고, 궁한 산새와 슬픈 짐승들은 울부짖으며 그 소리에 응답할
것이다. 옷을 떨쳐 일어나 방황하며 사방을 둘러보면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면서 구슬피 서울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아! 영숙은 또 어찌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한 해가 저물어 싸라기 눈이 흩뿌리면, 산이 깊어 여우와 토끼는 살져 있으리니, 활을 당기고 말을 달려 한 발에 이를 잡고 안장에 걸터앉아 웃으며, 또한 아웅다웅 하던 뜻을 통쾌히하여 적막한 바닷가임을 잊기에 충분할 것이 아닌가? 또 어찌 반드시 거취의
갈림길에 연연해 하며 이별의 즈음에 근심할 것이랴? 또 어찌 반드시 서울 안에서 먹다 남긴 밥을 찾아 다니다 다른 사람의 싸늘한 눈초리나 만나고, 남과 말못할 처지에 있으면서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형상을 짓는단 말인가? 영숙이여! 떠날지어다. 나는 지난 날 곤궁 속에서 벗의 도리를 얻었었소. 비록 그러나 영숙에게 있어 내가 어찌 다만 가난한 때의 사귐일 뿐이겠는가? 무언가 아쉬운 일이 있어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친구가 있고,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어려운 형편을 다 털어 놓게 되는 친구가 있다. 사귐의 깊고 얕음은 이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술잔을 따르며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대는 것만이 참된 우정이 아닌 것이다. 청나라 김성탄金聖嘆(1608-1661)의 〈쾌설快說〉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가난한 선비가 돈을 꾸러 와서는 좀체 입을 열지 못하고서 묻는 말에 예예 대꾸하며 딴 소리만 한다. 내가 가만히 그 난처한 뜻을 헤아리고는 사람 없는 곳으로 데려가 얼마나 필요한지 묻고 급히 내실로 들어가 필요하다는대로 주었다. 그런 뒤에 그 일이 반드시 지금 당장 속히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인가? 혹 조금 더 머물면서 함께 술이나 마실 수는 없는가? 하고 물었다.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그러자 황균재黃鈞宰란 이가 이를 패러디하여 〈술애정述哀情〉이란 글을 지었는데, 이렇게 고쳐 놓았다. 빈한한 선비가 이틀이나 땔거리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달려가 친구에게 부탁이나 해보려고 머뭇머뭇 문에 들어가 말을 꺼내려다가는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인이 벌써 그 뜻을 알아차리고 먼저 자기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이 두가지 사이의 엇갈림에서 우리는 참된 우정의 소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마음 나누는 우정이 없는 인생은 삭막한 사막이다. 길 떠나는 벗을 전송해 지어준 고인의 두 편 글이 우리네 삶을 부끄럽게 한다. ================================================= ▲ 위로 讀燕放筆·22 한 여름 밤 이야기 22일, 국옹 翁과 함께 걸어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에게 갔다. 풍무風舞 김억金檍은 밤에야 도착하였다. 담헌이 슬瑟을 타자, 풍무는 금琴으로 화답하고, 국옹 翁은 갓을 벗고 노래한다. 밤 깊어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자 더운 기운이 잠시 가시고, 현絃의 소리는 더욱 맑아진다. 좌우에 있는 사람은 모두 고요히 묵묵하다. 마치 내단內丹 수련 하는 이가 내관장신內觀臟神 하는 것 같고, 입정에 든 스님이 돈오전생頓悟前生 하는 듯 하다. 대저 스스로 돌아보아 곧으매 삼군이 막아선다 해도 반드시 나아갈 기세다. 국옹 翁이 노래할 때를 보면 해의방박解衣磅 , 옷을 죄 벗어 부치고 곁에 사람이 없는듯 방약무인하다. 매탕梅宕 이덕무李德懋가 한번은 처마 사이에서 늙은 거미가 거미줄 치는 것을 보다가 기뻐하며 내게 말하였다. 지난 해 여름, 내가 담헌에게 갔더니 담헌은 마침 악사 연익성延益成과 더불어 거문고를 논하고 있었다. 그때 하늘은 비를 잔뜩 머금어, 동녘 하늘 가엔
구름장이 먹빛이었다. 우레가 한번 치기만 하면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잠시 후 긴 우레가 하늘로 지나갔다. 담헌이 연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읽을 두 편 글은 연암과 그 벗들이 격의 없이 만나 예술을 논하고 인생을 논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들이다. 암울한 시대를 건너기가 답답해 가슴 터지기야 그들이 우리보다 덜하지 않았겠지만, 이런 풍류와 여유가 있었기에 그들은 발광發狂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윗글의 제목은 〈하야연기夏夜 記〉이다. 7월 13일 밤, 성언聖彦 박제도朴齊道가 성위聖緯 이희경李喜經과, 아우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 약허若虛 원유진元有鎭, 여생과 정생, 그리고 동자 견룡이와 더불어 무관 이덕무에게 들러 그를 데리고 왔다. 그때 마침 참판 원덕元德 서유린徐有麟이 먼저 와서 자리에 있었다. 성언은 책상다리를 한채 팔꿈치를 기대고 앉아, 자주 밤이 깊었는가를 보면서 입으로는 가겠노라고 말하면서도 부러 오래 앉아 있었다. 좌우를 돌아봐도 선뜻 먼저 일어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원덕도 또한 애초에 갈 뜻이 없는지라, 성언은 마침내
여러 사람을 이끌고 함께 가버리고 말았다. 한참 뒤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은 이미 가셨을테고 여러 사람들이 거리 위를 산보하면서 나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한다고 하였다. 조금 술이 취하자 인하여 운종가雲從街로 나와 달빛을 밟으며 종각鍾閣 아래를 거닐었다. 이때 밤은 이미 삼경하고도 사점을 지났으되 달빛은 더욱 환하였다. 사람 그림자의 길이가 모두 열 길이나 되고 보니, 자기가 돌아보아도 흠칫하여 무서워 할만 하였다. 거리 위에선 뭇개들이 어지러이 짖어대고 있었다. 오견獒犬이 동쪽으로부터 왔는데 흰빛에다 비쩍 말라있었다. 여럿이 둘러싸 쓰다듬자,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서 한참을 서 있었다. 일찍이 들으니 오견獒犬은 몽고에서 나는데, 큰 놈은 말만한데다 사나워서 길들이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온 것은 다만 작은 놈이어서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로 나온 것은 더욱 작은 놈인데, 우리나라 개와 비교해보면 훨씬 크다. 낯선 것을 보고도 짖지 않는데, 한 번 성이 났다 하면 으르렁거리면서 위세를 피우곤 한다. 시속時俗에선 '호백胡白'이라고 부른다. 특히 작은 놈은 '발바리'라고 부르니, 운남雲南에서 나는 종자다. 모두 고기를 좋아하는데, 비록 아무리 배고파도 불결한 음식은 먹지 않는다. 능히 사람 뜻을 잘 알아, 목에다 붉은 띠로 편지를 매달아 주면 비록 멀어도 반드시 전한다. 혹 주인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주인 집 물건을 물고서 돌아와 신표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상 사신을 따라서 우리나라에 오지만, 대부분은 굶어 죽는 수가 많다. 늘상 혼자 다니며 활개치지 못한다. 무관懋官이 술에 취해 '호백豪伯'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잠시 후 있는 곳을 잃게 되자, 무관은 구슬프게 동쪽을 향해 서서 마치 친구라도 되는듯이 '호백아!'하고 이름을 부른 것이 세 차례였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고 떠들자, 거리의 뭇개들이 어지러이 내달리며 더욱 짖어댔다. 마침내 현현玄玄의 집에 들러 문을 두드려 더욱 마셔 크게 취하고는 운종교를 밟고서 다리 난간에 기대어 이야기 하였다. 지난 날 대보름 밤에 연옥 유련은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백석白石 이홍유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었다. 혜풍 유득공은 장난으로 거위 모가지를 끌고 몇 바퀴 돌면서 마치 하인에게 분부라도 내리는 시늉을 지어서 웃고 즐거워들 하였다. 이제 하마 여섯 해가 지났다. 혜풍은 남쪽으로 금강錦江에 놀러갔고, 연옥은 서쪽으로 관서關西 땅에 나가 있으니, 모두들 별고나 없는지? 다시 수표교에 이르러 늘어 앉았자니, 다리 위 달은 바야흐로 서편에 기울어 덩달아 한창 붉고, 별빛은 더욱 흔들려 둥글고 큰 것이 얼굴 위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슬은 무거워 옷과 갓이 죄 젖었다. 흰 구름이 동편에서 일어나 가로로 끄을며 둥실둥실 북쪽으로 떠가자, 성 동편은 짙푸른 빛이 더욱 짙게 보였다.
개구리 소리는 마치도 멍청한 원님에게 어지러운 백성들이 몰려들어 송사하는 것만 같고, 매미 울음은 흡사 공부가 엄한 서당에서 강송講誦하는 날짜가 닥친듯 하며, 닭 울음 소리는 마치 한 선비가 똑바로 서서 간쟁함을 제 임무로 삼는 것만 같았다. 두 번 째 이야기,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는 지금의 종로 3가 파고다 공원 뒷편에 있던 연암의 집으로 박제가朴齊家의 적형嫡兄인 박제도朴齊道와 이희경李喜經, 이희명李喜明 형제 등이 이덕무李德懋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 함께 찾아온 때의 일을 적은 것이다. 그때 연암에게는 먼저 온 손님 서유린徐有麟이 있었다. 대화 중에 끼어든 것이 멋쩍었던 성언은 책상다리를 한 채 팔꿈치를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무료한 기색을 나타낸다. 그리고는 공연히 밖을
내다보면서 시간을 묻고, 입으로는 건성 이만 가야겠군을 연발하면서도 일어서지는 않은채 앉아 있었다. 이쯤 되면 먼저 온 손님더러 이제는 우리에게 연암을 양보하라는 시위인게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자리를 막상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먼저 온 손님 또한 작심을 한 듯 이편의 눈치를 모른체 하고 있으니, 삐뚜름하게 앉아 있던 성언이 결국 제 급한 성질을 못 이기고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고 말았다. 그렇게 연암의 집을 나선 그들은 조금은 김이 빠져서 거리를 배회했던 모양이다. 다시 연암 집 대문을 두드린 동자 녀석은 제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으리! 아까 계신 손님은 하마 돌아가셨겠지요? 지금 저희 주인 나으리께선 다른 분들과 함께 거리를 산보하시면서, 나으리께서 빨리 나오셔서 함께 술잔이나 나누시길 기다리고 계십니다요." 뻔히 방안에 손님이 그대로 있음을 알면서 하는 수작이다. ================================================= ▲ 위로 讀燕放筆·23 뒷골목의 등불 5월 그믐에 서편 이웃으로부터 걸어 연암 어른 댁을
찾았다. 때마침 희미한 구름은 하늘에 걸렸고, 숲속에 걸린 달은 푸르스름하였다. 종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은은하더니 나중엔 둥둥 점차 커지는 것이 마치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어른이 댁에 계실까 생각하면서 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먼저 그 집 들창을 살펴 보았다.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그 문으로 들어섰다. 어른께서는 벌써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 계셨다. 마침 맨발에 맨 상투로 창턱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문간방의 아랫것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내가 온 것을 보시더니 옷을 고쳐 입고 앉으시고는, 고금古今의 치란治亂과 당대 문장명론文章名論의 파별동이派別同異를 자세히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듣고 몹시 기이하게 여겼다. 그때 밤은 하마 삼경으로 내려왔다. 우러러 창 밖을 보았다. 하늘 빛이 갑자기 열릴 듯 모여들어 은하수가 환해지는가 싶더니만 더욱 멀리로 날리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가 놀라 말하였다. "저건 어찌된 건가요?" 어른께서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네 그 옆을 좀 살펴 보게." 대개 등촉불이 막 꺼지려하여 불꽃이 더 크게 흔들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좀전에 보았던 것이 이것과 서로 비치어서 그런 것임을 알았다. 잠시 후 등불이 꺼졌다. 두 사람은 캄캄한 방 가운데 앉아 웃고 얘기하며
自若하였다. 내가 말했다. "예전에 말이죠. 어르신께서 저와 한 마을에 사실 때 한 번은 눈오는 밤에 어르신을 찾아 뵈었었지요. 어르신께서는 절 위해 손수 술을 뎁혀 주셨구요. 저도 손으로 떡을 집어 흙난로에다 구웠는데, 불기운이 올라와 손이 너무 뜨거워 자꾸만 떡을 재 속으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서로 보면서 몹시 즐거워 했었지요. 이제 몇 해 사이에 어르신께선 머리가 벌써 하얗게 세시고, 저 또한 수염과 머리털이 희끗해졌군요." 이 말 때문에 서로 한참동안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날 밤으로부터 13일이 지난 뒤에 이 글을 쓴다. 윗글은 제자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연암 댁을 방문했던 일을 적은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란 소품 산문이다. 여기에는 연암이 사흘 굶던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가난이 선비의 다반사라지만, 그 높은 뜻에 안쓰런 궁핍이 읽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6월 어느날,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가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연암 어른을 찾아가니 어른은 사흘이나 굶고 계셨다. 탕건도 벗고 맨발로 방 창턱에 발을 걸치고 누워 행랑채의 아랫것과 서로 문답하고 계셨다." 소위 연암燕巖이라는 것은 바로 내가 금천협金川峽에
살므로 사람들이 인하여 이를 호로 삼은 것이다. 내 집 식구들은 이때 광릉廣陵에 있었다. 나는 평소에 살이 쪄서 더위를 괴로워 하는데다 또 푸나무가 울창해서 여름밤이면 모기와 파리가 걱정되고, 논에서는 개구리가 밤낮 쉴새없이 울어대는 까닭에, 매번 여름만 되면 항상 서울 집으로 피서를 오곤했다. 서울 집은 비록 몹시 습하고 좁지만 모기나 개구리, 푸나무의 괴로움은 없었다. 홀로 계집종 하나가 집을 지키다가 갑자기 눈병이 나서 미쳐 소리지르며 주인을 버리고 떠나가버려 밥 지어줄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행랑채에 밥을 부쳐 먹다보니
자연히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저도 또한 일 시키는 것을 꺼리지 않는지라 노비와 같았다. 고요히 앉아 한 생각도 뜻속에 두지 않았다. 때로 시골 편지를 받으면, 단지 평안하단 글자나 살펴보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더욱 성글고 게으른 것이 몸에 배어 경조사慶弔事도 폐하여 끊었다. 혹 여러 날을 세수도 하지 않고, 열흘이나 두건을 하지 않기도 하였다. 손님이 이르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하고, 혹 땔감이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다가 더불어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이야기 하며 정성스레 수백 마디의 말을 나누곤 하였다. 남들이 그 우활하여 마땅함이 없고 지리하여 싫어할만 함을 책망해도 또한 그만둠을 알지 못하였다. 또 제 집에 있으면서 객처럼 지내고 아내가 있으면서 중처럼 사는 것을 나무람이 있어도, 더욱 편안하여 바야흐로 한 가지 일도 없음을 가지고 자득自得하며 지내었다.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절룩거리는 것이 우스웠다. 밥알을 던져주어 더욱 길이 들자 날마다 찾아와서 서로 친하게 되었다. 마침내 이 놈과 더불어 장난하며 말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완전히 하나도 없고, 오로지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네."라 하였다. 우리나라 시속時俗에 돈을 '문'이라 말하므로 맹상군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자다가 깨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간 또 잠을 잤다. 아무도 깨우는 이가 없고 보니,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쿨쿨 잠자기도 하고, 때로 간혹 글을 지어 뜻을 보이기도 했다. 새로 철현금鐵絃琴을 배워, 지루할 때는 몇 곡조 뜯기도 하였다. 혹
술을 보내주는 벗이라도 있으면 문득 기쁘게 따라 마셨다. 취한 뒤에는 스스로를 찬미하여 말하였다. 이때 내가 과연 사흘 아침을 굶고 있었다. 행랑채의 아랫것이 남을 위해 지붕을 얹어주고 품삯을 받아다가 밤에야 비로소 밥을 지었다. 어린 것이 밥투정을 해 울며 먹으려 들지 않자, 행랑채의 천예賤隸가 화가 나서 밥주발을 엎어 개에게 던져주며 나쁜 말로 나가 뒈지라고 욕을 해댔다. 이때 나는 막 식사를 마치고 곤하여 누웠다가, 장괴애張乖崖가 촉蜀 땅을 다스릴 때 어린아이를 목벤 일을 들어 비유하며 일깨워 주고, 또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욕만 하면 자라서 더욱 은공을 저버리게 되네"라고 타일러 주었다. 그러다가 우러러 보니 은하수는 집에 드리워 있고, 별똥별이 서편으로 날아가며 흰 금을 허공에 남기고 있었다. 말이 채 마치지 않아 낙서洛瑞가 와서는 "어르신은 혼자 누워 누구와 말씀하십니까?"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른바 행랑채 사람과 더불어 문답하더란 것은 이를 말함이다. 낙서는 또 눈오던 날 떡 구워 먹을 때 일을 적었다. 그 당시는 내 옛 집이 낙서의 집과는 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아이적부터 이따금씩 보았는데, 나는 손님이 날마다 많았고 당시 세상에 대해 의욕도 있었다. 그러나 금년에 마흔도 못되었는데 이미 터럭이 허옇게 세었으므로 자못 그 감개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쇠락하여 담담히 세상에 뜻이 없으니, 그때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에 그를 위해 기문記文을 써서 수답酬答한다. 이 글의 제목은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이다. 읽기에 따라 씁쓸하기도 했을 제자의 글을 받아본 뒤 막상 연암은 머쓱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똑 같은 형식으로 답장을 했다. 오늘의 눈에는 무의미한 장난 글로 비치겠으나, 그 글 한 줄 한 줄에 살가운 정이 담겨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 멋이 깃든줄을 알겠다. 풍석楓石 서유구徐有矩 봉조하奉朝賀가 연암의 문장을 몹시 좋아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그 젊을 적에 자주 더불어 왕래하였는데 글을 지으면 반드시 연암에게 보여 그 허가함을 얻은 뒤에야 썼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연암이 그 여름에 굶기를 다반사로 한 것은 위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홍길주洪吉周의 《수여난필睡餘瀾筆》에 실려 있다. "공을 두고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데 왜 그렇습니까?" 서유구徐有矩가 이렇게 따져 묻자, 연암은 씩 웃으며 천연스럽게 여름 장마철에 며칠을 굶고 있을 적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 가만히 따져 읽어보면, 여기에도 기승전결의 구성이 있고 기복이 있다.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 충문공忠文公은 연암의 문장을 몹시 싫어 하였다. 일찍이 내각에 있을 때, 풍석楓石과 더불어 의론이 맞지 않자, 풍고가 불끈하여 말하기를, 이 역시 홍길주洪吉周의 전언傳言이다. 한 사람 연암을 두고 이쪽에서는 《맹자孟子》의 구두조차 떼지 못할 인간이라고 매도하고, 다른 편에서는 《맹자》를 넉넉히 짓고도 남을 분이라고 높였다. 이런 극단적 평가의 엇갈림 속에서 시대의 우울과 연암의 절망은 깊어만 갔던 것이다. =================================================== ▲ 위로 讀燕放筆·24 혼자하는 쌍륙 놀이 옛날에 고기古器를 팔려 했으나 3년이 지나도록 팔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 바탕은 딱딱한 것이 돌이었는데, 술잔으로나마 쓰려 해도 밖은 낮고 안이 말려있는데다, 기름 때가
그 빛을 가리고 있었다. 나라 안을 두루 다녀 보아도 거들떠 보는 자가 있지 않자, 다시금 부귀한 집을 돌았지만 값은 갈수록 더 떨어져 수백전에 이르게 되었다. 하루는 그것을 가지고 서여오徐汝五에게 보여준 사람이 있었다. 여오가, "이것은 붓씻개이다. 돌은 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에서 나온 것으로 옥 다음으로 쳐주니 민옥珉玉과 같은 것이다" 하고는 값의 고하를 묻지 않고 그 자리에서 8천을 주었다. 그 때를 벗겨내자 앞서 딱딱하던 것은 바로 돌의 무늬결이었고, 쑥색을 띤 초록빛이었다. 형상이 낮고 또 말려있던 것은 마치 가을 연잎이 시들어 그 잎새가 말려진 것과 같았다. 마침내 나라 안의 명기名器가 되었다. 여오는, "천하의 물건이 그릇으로 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건대 그 마땅함을 얻어야 쓰이는 것일 뿐이다. 대저 붓털이 먹을 머금어 아교가 굳어지면 끝이 쉬 무지러지므로 늘 그 먹을 씻어 내어 부드럽게 해주는데, 이것은 붓을 씻기 위해 만든 그릇이다"라고 한다. 대저 書畵와 골동은 수장하는 자와 감상하는 자 두 종류가 있다. 감상하는 안목은 없으면서 한갓 수장만 하는 자는 돈만 많아 단지 그 듣는대로 믿는 자이고, 감상하는 안목은 뛰어나지만 능히 수장하지 못하는 자는 가난해도 그 눈을 저버리지는 않는 자이다. 우리나라에 비록 간혹 수장가가 있긴 하지만, 책이란 것은 중국 복건성 건양建陽에서 찍어낸 방각본이요, 서화는 강소성 금창金 에서 만든 가짜일 뿐이다. 밤껍질 빛깔의 청동 화로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갈아버리려고 하고, 장경藏經의 종이가
더럽다고 씻어내려 한다. 엉터리 나쁜 물건을 만나서는 그 값을 높게 주고, 보배론 물건은 버려두어 수장할줄 모르니 그 또한 슬퍼할만할 따름이다. 신라의 선비는 당나라로 가서 국학에 입학하였고, 고려 사람은 원나라에 유학하여 제과制科에 급제하였으니, 안목을 열고 흉금을 틔울 수가 있었다. 그 감상의 배움에 있어서도 대개 또한 당시 세상에서 환하게 빛났었다. 조선 이래로 3,4백년 동안 풍속이 날로 비루해져서 비록 해마다 연경과 교통한다고는 해도 썪어버린
한약재나 거칠고 성근 비단 따위 뿐이다. 하우夏虞·은주殷周 적의 고기古器나 종요鍾繇·왕희지王羲之·고개지顧愷之·오도자吳道子의 진적이 어찌 일찍이 단 한 번이라도 압록강을 건너 왔겠는가? 근세의 감상가로는 상고당尙古堂의 김씨를 일컫곤 한다. 그러나 재사才思가 없고 보면 아름다움을 다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대개 김씨가 개창한 공은 있지만 여오는 꿰뚫어보는 오묘한 식견이 있어 무슨 물건이든지 눈을 거치기만 하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낸다. 여기에 재사까지 아울렀으니 감상을 잘하는 자라 하겠다. 여오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운데다 문장에 능하고 소해小楷를 잘 쓴다. 아울러 미불米 의 발묵법潑墨法에 뛰어나고 한편으로
음악에도 정통하였다. 봄 가을 한가한 날에는 마당에 물을 뿌려 쓸고는 향을 살라놓고 차를 끓여 감상하였으나, 늘 집이 가난하여 수장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또 세속에서 이를 가지고 시끄럽게 떠들어 댈까 염려하여 답답해 하며 내게 말하였다. 진귀한 골동품도 그 위에 세월의 때가 켜켜이 앉고 보니 쓸데 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술잔으로 쓰자니 너무 평평하여 도무지 쓸모가 없어 보여 겉보기로는 여늬 막돌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제 임자를
만나 묵은 때를 벗겨내자, 저 유명한 복주 수산석, 그 중에서도 가장 상품으로 치는 오화석갱에서 파낸 돌로 만든 붓씻개였다. 마른 연잎 모양으로 끝을 살짝 안으로 오무려 그 가운데로 물을 흘리게 만든, 엷은 쑥색을 띤 진귀한 물건이었다. 먹은 아교로 뭉친 것이니 글씨를 쓰고 나서 그때마다 씻어두지 않으면 굳어져 붓을 버리고 만다. 이 붓씻개로 붓을 씻어 간수해 두면 붓끝이 금새 모지라질 염려가 없으니 文房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물건이었다. 하루는 비가 오는데 마루를 배회하시다가 갑자기 쌍륙을 끌어당겨 왼손 오른손으로 주사위를 던져 갑·을 양편으로 삼아 대국을 하셨다. 그때 손님이 곁에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 놀이를 하셨다. 이윽고 웃으며 일어나셔서 붓을 당겨 남의 편지에 답장을 쓰시기를, "사흘 주야로 비가 내려 사랑스러운 한창 핀
살구꽃이 녹아서 붉은 진흙으로 되었습니다. 긴긴 날 애를 태우며 앉아서 혼자 쌍륙을 가지고 논답니다. 오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지요. '다섯이야!' '여섯이야!' 부르짖다 보니 오히려 상대편과 나라는 사이가 생겨나서, 승부에 마음이 쓰여 적수가 뒤집어지더군요. 나는 저를 모르겠답니다. 꼭같은 내 양손에 대해서도 사사롭게 여기는 바가 있는 것일까요? 저 나의 양 손이 이미 이쪽 저쪽으로 편이 갈리고 보면 상대편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는 저 양손에 대해서는 역시 조물주와 같은 존재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한쪽은 부추기고 한쪽은 억누르기를 이같이 하다니요. 이제 비에 살구꽃이야 비록 쇠락해 떨어졌겠으나 복사꽃은 선명하게 곱겠지요. 나는 여기서 또 모르겠습니다. 저 조물주가 복사꽃을 부추기고 살구꽃을 억누르는 것 역시 사사로운 바가 있어서일까요?"하셨다. 손님은 웃으면서, "나는 본디부터, 선생께서 쌍륙에 뜻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일단의
글을 구상해내시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하였다.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를 회억하며 쓴 글의 한 대목이다. 편지글에 답장을 쓰다가도 막힌 생각을 뚫기 위해 연암은 혼자 쌍륙을 놀았다. 그의 글은 한 편 한 편이 모두 이러한 고심참담 끝에 나왔다. 읽다보면 늘 행간을 가늠키 어려워 허우적 거리기 일쑤지만, 그래서 오늘날 그것은 켜켜이 때가 앉은 붓씻개 같은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의 글은 진짜다. 지금까지도 시퍼렇게 날이 선 진짜다. ================================================ ▲ 위로 讀燕放筆·25 강물빛은 거울 같았네 유인孺人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 여섯에 덕수德水 이택모李宅模 백규伯揆에게 시집 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 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鵝谷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려 한다.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 길이 막막하여, 어린 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띄워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斗浦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막 여덟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구르며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 여덟 해 전의 일이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워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 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하였다.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은데, 세월은 길어 그 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 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였으니, 덧 없기 마치 꿈 속과도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인가. 떠나는 이 정녕코 뒷 기약을 남기지만 去者丁寧留後期 죽은 누님을 그리며 지은 묘지명이다. 번역만으로는 원문의 곡진한 느낌을 십분 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애잔하고 가슴 뭉클한 한편의 명문이다. 연암과 죽은 누님과는 여덟살의 터울이 있었다. 어려서 그는 누님에게 업혀 자랐을 터이다. 열 여섯에 시집간 누이가 마흔 셋의 젊은 나이에 고생만 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아내를 잃자 살 도리가 막막해졌다고 했으니, 그나마 그간의 생계도 누님이 삯바느질 등으로 꾸려왔음이 분명하다. 자형 백규는 선산 아래 땅뙈기라도 붙이고 살아볼 요량으로 상여가 나가는 길에 아예 이삿짐을 꾸려 길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그 세간이라는 것이 겨우 솥 하나, 그릇 몇 개, 옷 상자와 짐 궤짝 두어 개가 전부라니, 그 궁상이야 꼭 말해 무엇하겠는가. 죽은 누이에 대한 너무나 애절하고 정이 넘치는 글이다. 사실, 하마터면 울어버릴 뻔 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큰 누나가 시집을 갔다. 그 동안 내 연필을 깎아주던 누나가 시집 간다 하니 걱정이 되어 어느날, "누나! 누나가 시집 가면 내 연필은?" 며칠 뒤 매형 될 분이 연필깎기를 사다주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것은 가진 아이가 극히 드물었다. 결국 누나와 연필깎기를 맞바꾸게 된 셈이다. 그런 뒤 나는 예쁘게 깎여 나오는 연필깎기가 좋다는 생각보다는 연필 깎는 누나의 손이 보고 싶어 누나집을 찾아 나섰다가 길을 잃어 버린 적이 있다. 이제 누나도 40살이 넘었다. 건강하시길 빈다. 예전부터 묘지명이나 비문은 유묘지문諛墓之文, 즉 귀신에게 아첨하는 글이라 하여 포褒는 있어도 폄貶은 없는, 다시 말해 좋은 말만 잔뜩 늘어 놓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고 글의 짜임새 또한 규격화 되어 있어, 심지어 한유韓愈가 지은 여러 묘지명을 놓고는 사람 이름만 바꿔 넣으면 아무라도 괜찮다는 '동인중제지문衆人同祭之文'의 비난까지 있어 왔다.
그런데 연암의 위 묘지명은 그 구상이나 내용이 파격적이다. 오늘날도 누님의 묘지명에다 동생이 자형의 궁상과 거울에 침뱉으며 장난치던 내용을 써서 새긴다고 한다면 모두 펄펄 뛸 것이다. 실제 연암의 글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금서로 낙인 찍혀 드러내 놓고 읽혀지지 못했다. 하물며 연암의 손자로, 초기 개화파의 선구였던 박규수 조차도 그가 평양감사로 있을 때 《연암집》을 간행하자는 동생의 말에 공연히 문제 일으킬 것 없다고 묵살했을 정도였다. 마음의 정리에 따르는 것이야 말로 지극한 예라 할 것이요, 의경을 묘사함이 참 문장이 된다. 글에 어찌 정해진 법식이 있으랴! 이 작품은 옛 사람의 글로 읽으면 마땅히 다른 말이 없을 것이나, 지금 사람의 글로 읽는다면 의심이 없을 수 없으리라. 원컨대 보자기에 싸서 비밀로 간직할진저. 장의葬儀 절차를 성대히 함이 지극한 예가 아니다. 망자를 떠나 보내는 곡진한 마음이 담길 때 그것이 지극한 예가 된다. 있지도 않았던 일을 만들어 적고, 상투적 치레로 가득한 글이 참 문장이 아니다. 가슴 아픈 사랑의 마음이 실릴 때라야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참 문장이 된다. 그렇다. 묘지명에 무슨 정해진 법식이 있으랴!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정해진 법식만을 가지고, 무슨 묘지명을 이따위로 쓰느냐고 욕을 해댈 터이니 혼자만 읽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이 또 한 번 읽는 이를 슬프게 한다. 형님의 모습이 누구와 닮았던고 我兄顔髮曾誰似 돌아가신 아버님을 꼭 닮아, 마치 아버님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던 형님, 그 형님조차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시다. 그리운 형님의 모습을 이제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쓸쓸한 마음에 시냇가로 가서 그 물에 내 얼굴을 비춰 볼 밖에. 연암은 이렇듯 덤덤한 듯 감정의 미묘한 구석을 꼭 꼬집어 내는 마술사이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상투를 짜고, 이마에 건巾을 앉히고는 거울을 가져다가 비춰보아 그 기울거나 잘못된 것을 단정히 하는
것은 사람마다 꼭 같이 그렇게 하는 바이다. 내가 성인이 되어 건을 쓸 때, 눈썹 위로 손가락 두 개를 얹어, 이것으로 가늠하매 거울에 비춰 볼 필요가 없었다. 이로부터 혹 열흘이나 한달을 거울을 보지 않았으므로, 젊었을 때 내 얼굴은 이제 이미 잊고 말았다. 벗삼을만한 사람이 있어 한 마을에 여러 해를 같이 살다가 얼굴도 알지 못한 채 떠나가도 한스럽게 생각되는데, 나와 나는 그 가까움이 어찌 다만 한 마을에 사는 것일 뿐이겠는가. 그런데도 이제 내가 내 젊을 적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천년 전에 사람이 있어, 그 도덕이 스승으로 삼을만 하고 그 문장이 본받을만 하면 나는 그와 한 때에 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한다. 백년 전에 사람이
있어 뜻과 기운과 의론이 볼만하여도 나는 그와 한 때에 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한다. 수십년 전에 사람이 있어, 기운은 족히 육합六合을 가로지를만 하고, 재주는 천고를 능가할만 하며, 글은 온갖 부류를 거꾸러뜨릴만 하였다. 그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내가 이미 인사를 통하였으나 미처 만나보지는 못하였고, 미처 더불어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내가 한스럽게 생각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미 수십년 전의 나를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수십년 전의 다른 사람을 알겠는가? 이제 내가 거울을 꺼내 지금의 나를 살펴보다가 책을 들춰 그 사람의 글을 읽으니, 그 사람의 글은 바로 지금의 나였다. 이튿날 또 거울을 가져다 보다가 책을 펼쳐 읽어보니, 그 글은 다름 아닌 이튿날의 나였다. 이듬해 또 거울을 가져다 보다가, 책을 펴서 읽어보니 그 글은 바로 이듬해의 나였다. 내 얼굴은 늙어가면서 자꾸 변해가고 변하여도 그 까닭을 잊었건만, 그 글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더 기이하니, 내 얼굴을 따라 닮았을 뿐이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다. 어찌하여 그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건만 그것을 유감으로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그의 입김이 끼쳐 나오기 때문이다. 내 얼굴은 하루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데, 그의 글은 언제 읽어도 늘 새로운 감동이 살아 있다. 마치 하루도 같지 않은 내 모습처럼 그의 글은 언제나 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다. 淸眞閑實 信書言行判 育士道 올림 ================================================= ▲ 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