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녀의 못다 핀 꽃

24년간 복직투쟁 중인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씨

여름이면 사람의 몸에서 피어나는 꽃이 있다. ‘소금꽃’이다. 땀에 찌든 작업복 등짝에서 허옇게 피어나는, 염분기 배어있는 꽃마다에는 사연도 제각각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한 아버지의 수고가, 돈을 벌어 배움을 이루겠다는 소녀의 꿈이, 한평생 노동으로 삶을 일군 늙은 노동자의 인생의 궤적이 하나 가득 피어나 소금꽃나무를 만든다. 그 소금꽃을 다시 한번 피우기 위해 지난 24년간 싸워온 사람이 있다. 김진숙씨(51). 한진중공업(옛 대한조선공사)에서 노조운동을 하다 1986년 해직된 후 복직을 위해 싸우고 있다. 다른 노동현장에도 달려가 말과 글과 몸으로 힘을 보탠다. 그는 지난해 11월 말 한진중공업의 대규모 정리해고가 예고됐을 때 제일 먼저 천막 치고 농성을 벌이며 철회를 요구했다. 지난 1월에는 단식농성을 시작해 24일간 계속하다 병원에 실려갔다. 퇴원 후 주변 노동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농성을 이어갔다. 이를 계기로 회사는 정리해고 계획을 거둬들였다.

어느 소녀의 못다 핀 꽃

먼저 떠난 동료 노동자를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는 김진숙씨. 내년 겨울엔 그가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까. 부산 | 김세구 선임기자

김진숙씨의 단식농성에 관심 갖던 이들은 한진중공업 측이 정리해고 계획을 유보하자 다시 그를 잊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매일 오전 7시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문 앞에서 1인시위를 한다. 스물한살 ‘처녀용접공’ 시절로 돌아가 푸른 작업복을 입고 안전모를 쓰는 꿈을 꾼다. 고된 삶이었지만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은 그곳에서 ‘노동자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가고 싶어한다.

2007년 자신의 삶과 노동운동 20여년을 정리한 책 <소금꽃나무>를 펴내며 일반인에게도 알려진 그는 시대의 각성제처럼 다가온다. 인간의 참다운 권리 회복을 위해 갖은 고통에도 굴하지 않는, 24년간 변치 않는 김진숙씨의 신념은 무엇일까. 지난 14일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사무실에서 만났다. 예리한 눈빛을 상상했는데 그는 어린아이처럼 말간 눈을 갖고 있었다.

- 1인시위 문구가 복직 관련 내용이 아니네요.

“요즘은 ‘정규직 이렇게 힘든데 하청노동자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라고 쓴 것을 들고 있어요. 처음에는 ‘정규직인 우리도 힘든데…’로 했다가 아차 싶었죠. 나조차도 무의식 중에 ‘우리와 그들’로 나누고 있었던 겁니다. 비정규직은 노동운동에서조차 소외되고 있어요. 비정규직을 얘기하는 순간, 분란이 되니까 다같이 거대한 침묵으로 있는 것이지요.”

- 24일간 단식농성을 했는데 건강은 괜찮습니까.

“농성을 마치고 열흘간 다시 입원했어요. 지금도 밥은 못 먹고 죽을 먹어요. 무엇보다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 약속도 이중으로 잡아요. 젊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나이 든 것도 모르고…. 지율 스님이 건강히 사시는 걸 보면 (그분은) 인간의 반열에서 제외해야 할 분 같아요.”

- 정리해고 당사자도 아닌데 나선 이유가 뭡니까.

“출근투쟁을 하느라 회사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출근시간 새까맣게 밀려오던 사람들이 차츰 줄어드는 게 눈에 보였어요. 비정규직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들 갔고, 회사에서는 공식적으로 정리해고를 발표했어요. 무엇인가 해야 했는데 회사 안으로는 못 들어가게 하니까, 밖에서라도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는데요.

“정리해고 철회가 아니라 유보 상태입니다. 오는 7월 2차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회사의 발표가 있었어요. 긴장이 계속되고 있죠. 출근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불안한 것을 느껴요.”

- 이번 농성에 뛰어들면서 본인의 복직은 더 희박해진 것 아닙니까.

“회사에서 ‘절대 안된다’고 했답니다. 현실적인 가, 불가를 떠나서 내 인생은 늘 미완성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삶을 꿈꿔 본 적이 없습니다. 어긋난 뼈들이 맞춰지듯 계속 어긋난 내 삶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죠.”

지난해 11월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김씨의 명예회복과 부당해고 결정을 내렸다. 신청한 지 10년 만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이번 구조조정 반대에 앞장서면서 현실적으로 그의 복직 가능성은 더 멀어졌다. 그는 누렇게 변색한 24년 전의 해고통지서를 품고 있었다. 사번 23733.

- 왜 해고됐습니까.

“당시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데 앞장서게 됐어요. 다른 ‘아저씨들’은 딸린 식구도 있고 해서 저더러 대의원에 나서라고들 했죠. 80년대 초 작업장의 열악함은 상상조차 힘든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먹고 일하길 바랐어요.”

- 당시 대공분실에도 갔다면서요.

“노조활동을 하면서 세 번이나 붙잡혀갔죠. 그때 노동운동은 ‘빨갱이짓’이었으니까요. 그곳에서 겪은 일들은 말로 옮기기 힘듭니다. 뭔가 아주 작은 건수라도 있었으면 간첩으로 몰렸을 거예요. 워낙 빌미가 없으니까 ‘자생적 공산주의자’로 결론 내더군요. 대기발령과 부서이동이 거듭되다가 나중엔 노조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외딴 데로 발령났어요. 결국 인사명령 불복종으로 해고됐죠.”

어느 소녀의 못다 핀 꽃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김진숙씨.

- <소금꽃나무>가 나온 후 다음 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저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어요. 감정에 북받칠 때 한번씩 쓸 생각을 해요. 책도 계속 거절하다가 냈지만 독자와의 만남 같은 것도 하지 않았어요. 가끔 독자라며 e메일을 보내오거나 연락해오는 분들이 있기는 합니다.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삶이 이젠 없다고 생각했는데 부채감이 되살아나 부끄럽다’고요.”

책은 그동안 1만3500부가 팔렸다. 책을 낸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관계자는 “작가가 인세 수입을 비정규직 기금에 기부한 것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 생활은 어떻게 하시나요.

“해고자 활동비로 보조받는 게 있어요. 대부분 차비로 많이 쓰고 도시가스, 전기료 등 합쳐봐야 7만원 정도 나가고 별로 쓸 데가 없어요. 겨울에도 난방비 들 일 없고….”

- 겨울에 왜 난방비가 안 들죠.

“(머뭇대다 말했다) 2003년 이후에는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안 틀어요. 그해 10월 말 김주익 열사의 장례를 마치고 금곡동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죠. 꽤 추운 날이었는데 따뜻한 물로 씻으려고 보일러 단추를 누르려다가 멈칫했어요. 김주익은 그 여름 씻지도 못하고 크레인 위에서 싸우다 떠났는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나서 지난 7년간 보일러 단추를 한번도 못 눌렀어요. 겨울이면 오리털점퍼 입고 두꺼운 양말 신고 자요. 찬물로 씻고 나면 이가 타닥타닥 부딪치죠(그는 싱겁게 웃었다).”

김주익 열사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로 2003년 고공 크레인에서 129일간 농성하다가 목숨을 끊었다.

- 20대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까.

“강연회 때 한 여학생이 같은 질문을 했어요. 저도 모르게 그 학생이 무안해할 정도로 ‘절대로 20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저의 청춘은 대공분실, 해고, 수배, 감옥, 그런 기억들로 얼룩져 있으니까요. 다시 돌아간다면 좀 유치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 시간짜리 영화 보고 서너 시간 수다 떨고 크리스마스 때 남들처럼 들떠보기도 하고. 제가 모르는 감정이 ‘연애감정’ 같은 거예요.”

- 용접 실력은 남아있을까요.

“하루 저녁에 배 한척은 만들 것 같은데 용접을 한 게 5년이고, 안해본 지 20년이 됐으니 잘 모르겠어요. 함께 해고됐다가 20년 만인 2006년 복직된 이정식, 박영제씨가 몇 달 지나니까 할 만하다고 하던데요.”

- 복직된 분들을 보면 어떤 심정이 듭니까.

“노조 사무실에 갔다가 작업복 입고, 안전모 쓰고 일할 채비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정식·박영제씨)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자신감에 차있고 표정부터 전과 다르더군요. 순간 느낌이 이상했어요.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하루종일 심란했지요. 누가 물어오면 ‘해고자는 당연히 복직해야지’ 답했는데 내가 진짜 돌아가고 싶은 거구나 느꼈어요.”

- 81년 당시 ‘젊은 여성 용접공 1호’였다면서요.

“용접공 돈(월급)이 셌어요. 신발공장 월급이 한달 5만원이 안됐는데 조선소는 13만원이었으니까요. 대학 진학의 꿈을 키울 때였어요. 스물한살에 인생막장이라는 조선소에 용접공으로 들어갔으니 희한하게 봤죠. 더러 죽은 남편을 대신해 일하는 아줌마 용접공은 있었어요. 한창 조선업이 부흥기여서 인력이 모자랄 때죠. 사방 1m도 안되는 좁고 환기 안되는 공간(탱크)에 구겨져 들어가 용접을 했어요. 철판에 깔리고 바다에 떨어지고, 거미줄처럼 엉킨 전깃줄에 감전되고, 사고로 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안전장치에 돈을 안 쓴 탓이죠. 장비 설치보다 사람 목숨값을 더 싸게 여길 때였습니다.”

- 함께 일하던 분들이 현장에 남아있나요.

“아침에 시위하고 있으면 ‘니 밥은 먹고 대니나’, 오십이 넘었는데도 ‘니 이제 사십 넘었제’하며 인사하는 분들이 있어요. 정년퇴직 하는 날 양복입고 오셔서 손 꼭 잡고 ‘니 복직 못보고 간데이’하면서 만원짜리 한 장 쥐여주는 아저씨도 계시고요.”

- 그분들과 가까워진 계기가 있나요.

“용접현장에서 일한 지 3개월째에 철판이 무너지면서 두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6개월간 입원했어요. 평소 음담패설 잘하고 상사 앞에서는 찍 소리 못하는 아저씨들을 무척 싫어했는데 한두 명씩 문병을 와요. 와서 술주정도 하고. 아저씨들이 다녀간 다음날부터는 그집 아줌마(아내)들이 양은 냄비에 죽을 쒀왔습니다. 병원에 식당이 없어 중국집에서 시켜먹는 것을 보셨거든요. 퇴원 후에 고맙다고 인사를 다니는데 하나같이 ‘하꼬방’에서 자식 대여섯과 부대끼며 살고 있었어요. 그분들의 삶을 처음으로 들여다본 거죠. 인간이 참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고생스럽던 곳에 왜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합니까.

“그 현장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그리워서인지 모르겠어요. 착하고 우직하게 일하면서 인간답게 살기를 소망한, 몸으로 소금꽃을 피우던 사람들이요.”

- 후회한 적은 없나요.

“한번씩 막막할 때는 있지만…. 그때의 일을 후회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 노동자란 어떤 사람인가요.

“단순히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끊임없이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세상과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죠.”

- 노동운동이 위기라고 합니다.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이 현장과 멀어지고 관료화되면서 긴장과 분노가 사라졌어요.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힘은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제는 삶 자체가 운동일 수밖에 없어요. 그 속에서 함께 연대해야죠.”

- 청소년이나 대학생들 앞에서 특강할 때는 무슨 얘기를 합니까.

“볼펜이나 옷, 신발, 자동차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만들었는지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자들의 삶을 생각해 보라고 해요. 학교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삶에 대해서, 자기가 사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의 자존감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요. 그게 연대라고.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도 모두 삶 속에서 만들어져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