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북두칠성 몇 번째에 죽을까

<고대인들은 왜 하늘을 올려다보았는가>

‘서울 밤하늘이 되살아났다!’

얼마 전 서울 시정을 보도하는 기사에 나붙은 기사다.

매연과 먼지로 뒤덮인 서울 하늘.

희뿌연 빌딩의 경계 너머로 별을 잊고 산지 십 수 년이 넘은 오늘,

명절 귀경길에서나 간간이 볼 수 있었던 밤하늘의 별이 다시 돌아왔다.

현란한 도심의 조명 속에서도 고개를 들면 이따금 별이 빛나고 있다.

되살아 난 서울 하늘, 돌아온 밤하늘의 별들.

하지만 우린 이미 별과 동떨어져 살아온 지 오래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때와 방위를 읽던,

정화수 한 사발에 하늘의 별들을 담아 마음 속 간절한 염원을 빌던

옛 삶의 방식은 이미 잊힌 지 오래.

신문과 인터넷에는 매일 그날의 별자리 운세가 올라오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별자리에 얽힌 신화를 즐겨 읽는다.

TV에서는 별들의 탄생과 죽음, 충돌과 폭발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건 단순한 우주 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별은 문화 콘텐츠,

그것도 별로 돈 안 되는 시들한 장사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아련한 곳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늘의 별과 함께 살아온 흔적들이 남아 있다.

옛 사람들은 하늘에서 삶에 절실한 문제들을 구했다.

요즘 사람들 마냥 재미 삼아 멋 삼아 하늘을 본 게 아니었다.

지구로부터 몇 억 광년씩 떨어져 있는 별들이

우리에게 뭘 얼마나 제시해 주겠냐 싶지만,

인간이 하늘에서 얻은 것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씨앗이 되는 실로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런 인간과 별의 첫 인연은 머나먼 옛날,

인류가 문명의 첫 걸음을 내딛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직립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땅에 붙박여 네 발로 기던 인간이 두 손을 박차고 일어나 두 다리로 우뚝 섰다.

그 도도한 포스를 풍기기 위해 인간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허리 디스크라든지, 하지정맥류라든지 이런 게 다 직립에 따른 질병이란다.

땅으로부터 멀어진 만큼 소화를 주관하는 토기(土氣)가 부족해져

소화기능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그 중한 것들을 포기하면서 인간이 쟁취한 것이 있으니,

곧 대지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다.

우선, 인간은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도구와 물건을 만들었다.

신이나 할 법한 창조행위를 자기 손으로 직접 행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두 손으로 만들어 낸 도구들은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이건 다음에 기술할 변화에 비하면 사소한 성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인간이 직립을 통해 얻은 보다 근원적인 소득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이 획득한 것은 하늘과 통(通)하는 능력이다.

오롯이 솟아오른 머리는 한층 더 하늘과 가까워졌고 그만큼 하늘을 닮아갔다.

어느 순간 인간은 자신의 머리가 둥글고 빛나는 천체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와 달이 세상을 밝히듯 인간에게도 밝은 빛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가진 건 앎의 빛, 어둠과 무지를 몰아내는 인식의 힘이다.

그 밝음으로 인해 암흑 속에 가려져 있던 세계의 실상이 드러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눈에 들어 온 건 하늘 아래 어딘가에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다.

눈앞에 펼쳐진 건 천차만별의 세계상, 무시로 변화하는 복잡다단한 모습들이다.

최초로 앎의 눈을 뜬 인류의 앞에 펼쳐진 광경, 그건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세계의 불가해함,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떤 곳에 내던져 있다는 느낌.

인간은 자기가 내던져진 이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생각하던 우주.

이 그림은 우주가 곧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일까.

뱃살 대신에 박혀 있는 별들, 롱다리, 롱팔.

우주는 완벽한 비율을 가진 몸매를 자랑한다.

사람들은 이 비율 혹은 질서를 우주에서 발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그리하여 인간은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하늘의 거대한 빛들을 향해 질문을 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을 궁구한 끝에 답을 얻었다.

하늘에서 모종의 법칙들을 발견해 낸 것이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이 세상이

자신들이 손으로 만들어 낸 도구들보다 훨씬 정교한 짜임 속에 운행되고 있다.

더 놀라운 건 인간 역시 그 운행의 일부라는 것.

하늘아래 외따로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흐름과 함께하고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변화무궁한 세상에서 질서를 발견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소득이었다.

성서 신화를 보면 태초의 인간 아담이 뭇 피조물들의 이름을 짓는 대목이 나온다.

태초의 인간이 한 일이 왜 하필 이름 짓기였을까?

이름 짓기란 일종의 질서화이다.

대상을 호명하면서 규정짓고 분류하고 지위를 부여한다.

여기서 이름은 한 존재를 지시하는 부차적인 기능에 국한된다.

하지만 아담의 이름 짓기에는 남다른 것이 있었다.

그가 세상 만물들에 붙인 이름은 마구잡이식 넘버링이 아니라

사물의 구체적인 모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주먹 쥐고 일어서” 같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름처럼,

이름이란 낱낱의 사물들의 개별적 본질을 꿰뚫어야 했다.

가장 구체적이면서 본질에 부합하는 이름,

그것은 그 존재를 현실로 불러들이는 마법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마르셀 그라네는 이름을 뜻하는 글자 명(名)

생명과 운명을 뜻하는 글자 명(命)이 같은 발음, ming이라는 데 주목한다.

이름은 대상에 생명과 활력을 불어 넣는 신의 숨결이이며,

이름 짓기는 세상을 창조하는 신의 사역에 버금가는 행위다.

“이름을 말하는 것은 곧 존재를 취하는 것이자 사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짐승은 자신들을 명명할 줄 아는 자의 지배를 받는다.”

<마르셀 그라네,『중국사유』, 한길사, 57쪽>

하늘을 올려 보기 시작한 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광대한 하늘에 이름을 붙임으로 우주를 살아있는 질서로 재창조했다.

앞으로 이어질 하늘 이야기에는 이런 고대인들의 기쁨이 묻어나 있다.

<질서가 곧 나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늘에서 어떻게 질서를 발견해 냈을까?

밤하늘의 별자리는 시시각각 달라진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시사철 변함없이 제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별이 있으니,

바로 북극성이다.

이 별은 천변만화하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축이 있음을 알려줬다.

한편 하늘 위의 태양의 위치는 매순간 달라진다.

하지만 태양은 제멋대로 뜨고 지는 게 아니라

나름의 질서 속에 운행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동쪽의 지평선에서 떠오른 태양은 서쪽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다.

이 두 가지 규칙을 통해 인간은 광활한 대지에 방위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북극성은 우리에게 북쪽을 알려주며 태양은 나머지 동 · 남 · 서의 방위를 일러준다.

때문에 끝없는 사막 속에서도 빽빽한 삼림 속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길을 찾을 수 있다.

하늘은 우리에게 사방위(四方位)의 공간을 제시해 준 것이다.

한편 하늘은 인간에게 시간의 주기가 있음을 일러주기도 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시간이란 무차별한 날들의 연속인 듯 여겨지지만,

하늘을 보면 시간의 흐름에도 분명한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로부터 인간은 분명한 시간의 주기를 읽어냈다.

해가 뜨고 지면서 세상에 하루가 생기며 달이 차고 기울면서 한 달이 생긴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의 길이와 밤하늘 별자리의 변화는

태양과 별의 운행이 일 년의 주기를 따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늘을 보고 시간의 질서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시간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순환 · 반복 한다는 것이다.

달의 운동에 따라 흘러가고 되돌아오는 조류의 흐름이 생기는 것처럼,

시간의 변화도 흘러가는가하면 회귀하는 순환의 질서에 속해 있다는 것.

이것이 고대인들이 하늘에서 얻은 시간에 관한 지식이었다.

하늘을 통해 인간은 인식의 기본 골격인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확립한 셈이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이 우주의 질서정연한 흐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무수한 천체들이 이루는 조화와 협력의 하모니,

그 힘을 빌려 인간은 세상과 자신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 경이로운 짜임 안에 있다고 느낀다.

나를 포함한 삼라만상이 천체의 운행과 함께 한다는 생각.

별들이 질서와 조화를 잃지 않고 제 경로를 유지하듯 인간의 삶도 그러하길 바랐다.

하늘아래 덩그러니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것.

고대인들은 하늘을 보고 나를 봤으며, 자신을 그런 우주적 존재로 인식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해와 달, 별 그리고 인간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시간을 읽고 공간을 기획했다.

해가 어느 자리에 오느냐에 따라 땅을 갈아업기도 하고 추수를 하기도 했다.

반대로 어떤 꽃이 고개를 드는 순간 하늘엔 어김없이 어떤 별이 지나간다.

시공간은 하나다. 그리고 순환한다.>

<하늘의 무늬 읽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제기된 숙제가 있다.

바로 언젠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기원전 3천 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 바빌론의 길가메시 신화는

인간의 가멸성에 절망한 길가메시가 영원한 삶을 얻으려 저승에 다녀오는 이야기다.

중국의 시황제는 영생을 위해 세상의 명약을 다 구해 먹었고,

그의 제국인 진의 역사 또한 영원하길 꿈꿨다.

인간은 실로 오랜 시간 이 문제를 두고 괴로워한 셈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오래전, 문명 이전에 이미 제시됐었다.

하늘을 보고 삶의 의미를 찾았던 고대인들은 거듭되는 생사의 반복은

피할 수 없는 우주의 기본 요건임을 알았다.

하늘 위의 천체도 생사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천체의 탄생과 죽음이야말로

이 세상에 시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믿었다.

우리에게 예수의 생일로 널리 알려진 크리스마스는

실제 예수라는 인물의 생일이 아니라 바빌론 지역의 태양 부활 축제였다.

동양의 절기로 치면 동지. 이날은 태양의 남중고도가 가장 낮아지는 날이다.

이 날을 기점으로 그림자와 낮의 길이가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한다.

고대인들에게 이 날은 묵은 태양이 죽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날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환호 속에 새 태양을 반기며 죽음은 곧 또 다른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생사의 반복이 곧 우주의 시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늘을 보고 자신을 살폈던 고대인들,

그들은 천문현상에서 자연 현상과 인간사를 아우르는 우주의 공통적인 운명을 읽었다.

인간을 포함한 뭇 존재들은 이런 우주의 운명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잘났기로서니 이런 우주의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는 법.

삶과 죽음이란 생명이라면 모름지기 겪어야 할 우주의 섭리이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향한 질주는 인간에게 파멸을 선사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중하며 자기의 본 모습을 살피게 했다.

하늘은 인간에게 그가 처한 운명의 좌표를 일러준다.

그렇기에 인간은 부단히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며 주어진 명命을 살펴 살아가야 한다.

이는 고대사회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윤리론이다.

그 언저리에는 어김없이 천체의 운행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고대의 우주론이 있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우주론을 "천문(天文)"이라 일컬었다.

『설문해자』에 문(文)이란 한자를 풀이하기를

“문이란 물상의 근본이다(文者物象之本)라고 했다.

(象)이란 이미지나 조짐,

기미처럼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비가시적인 흐름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니 문이라는 것은 현상에 내재하는 물(物)과 상(象)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흐름들을 단칼에 포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문이라 하면 눈에 보이는 천체의 운행뿐 아니라

그것들이 수반하는 조짐이나 기미 등 미세한 기운의 변이마저 다잡는 개념이다.

이를 예쁜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의 무늬’ 읽기 정도가 될 것이다.

이는 현대의 천문학(astronomy)

천체의 객관적인 물리만을 추구하는 것과 사뭇 다른 점이다.

한 설명에 따르면 동양의 천문이란

현대의 천체학(astronomy), 점성학(astrology), 우주론(cosmology), 재이학(disaster)

에 해당하는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라 한다.

<김일권,『동양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7쪽>

고대의 천문이 이렇듯 광범한 영역을 넘나드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폭넓은 제반의 영역을 살피는 데 소요되었음을 보여 준다.

인간 역시 우주의 질서에 공명하는 소우주이기에

우주의 운명이 어느 주기에 와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주의 질서를 읽어 삶의 절실한 요구들을 충족시키려 했던,

우주의 운행과 부합하는 삶을 살려 했던 고대인들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별자리서당과 함께 동양천문에 나타난 고대인들의 사유를 따라가 보자.

<게오르그 루카치는 별들에게 길을 묻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서야 다시 별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아득한 역사>나카자와 신이치의 책 『신의 발명』에는

한 인류학자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의례에 참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돌마토프라는 이름의 이 학자는

원주민들과 함께 의례에 사용하는 환각제를 마시고 무아경에 빠진다.

그가 본 것은 강렬한 빛의 율동.

깨어나고 나서 그가 환각상태에서 마주한 기묘한 형상들을 그려내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은하를 본 겁니다. 우리와 함께 은하까지 날아갔던 거죠.”

<나카자와 신이치, 『신의 발명』, 동아시아, 43쪽>

은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렇다면 그가 본 빛의 정체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이건 나 어릴 적에

동네에서 본드 불던 아이들이 늘어놓던 체험담과 닮아있다.

사람이 황홀경에 빠지면 빛이 보인다.

우리 동네 엉아들은 눈에서 레이저가 나온다며 단체로 기차를 공격하러 다녔었다.

연구실의 멘토이신 정화 스님도 말씀하시길

명상에 잠긴 승려들도 자주 이런 빛의 군무를 마주한다고 한다.

삼매(三昧)에 든다고 하는 말이 곧 이와 같은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고매한 상태가 아니란다.

수행의 초보자들일수록 자기가 맞닥뜨린 환상적인 체험에

너무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단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해와 달과 별에서 나오는 빛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빛은 인간의 내면에도 있다.

이런 빛을 “내부섬광(phosphene)"이라고 한다.

18세기의 생리학자 푸르킨예(Purkinje)

하시시 복용으로 인해 나타나는 체험을 연구하다 만들어 낸 개념이다.

어떤 외부 대상의 지각없이 자체적으로 나타나는 내부의 빛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을 이어받은 후대의 생리학자들은 내부섬광은 시신경의 통로에서 일어나는

뉴런의 발화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을 내 놓는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내면’이라는 당최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럴듯하게 기술한 데 그칠 뿐,

내부섬광이 왜 발생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는 아무런 답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언뜻 보기엔 허무맹랑한 듯 들리는 아메리카 인디언식의 설명이

때로는 우리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아마 이 자리에 그들이 있다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당신이 지금 본 것은 잔상이나 환영이 아니라 은하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몸은 소우주로서 전체 우주와 감응하지요.

따라서 우주의 신비는 몸의 신비와 다르지 않습니다.

굳이 우주선을 타고 몇 억 광년을 걸리는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내면의 체험으로 곧장 우주를 경험할 수 있답니다.’

아주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 문명이 막 태동할 시절,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도 이와 같았다.

현대인들처럼 의식이 분화되지 않았던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분별없는 의식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나와 세계가 혼재된 세상을 살던 그들,

그렇기에 나를 잃어버린다는 위험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민감했다.

의식 자체가 이제 막 걸음마 수준이던 그들에겐

도처에 자아를 집어삼킬 듯한 위험이 산개해 있던 것이다.

그들은 빛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줄 앎의 빛 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밝게 빛나는 천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신 북두칠성 몇 번째에 죽을까

<머리가 둥글어 하늘을 본받고, 발은 모가 나 땅을 본받았으며,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고,

하늘에 오행(五行)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五臟)이 있으며,

하늘에 육극(六極)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육부(六腑)가 있고,

하늘에 팔풍(八風)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팔절(八節)이 있으며,

하늘에 구성(九星)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구규(九竅)가 있고..

- 허준 『동의보감』 「신형장부도」

곧 니 몸이 별이고 우주다. 어디서 무엇을 찾는가!> 

사회의 천문은 이렇듯 제의의 도구로 등장했다.

명상을 통해 은하수로 여행을 떠나던 샤먼의 주술 행위가 천문의 시초라는 얘기다.

밤하늘의 별과 내면의 별들의 이름을 되뇌며,

별자리의 모양을 본뜬 스텝을 밟으며 그들은 엑스터시에 이르렀다.

이 경험을 통해 그들은 내 안의 우주와 합일하는 신비를 체험했다.

그 한줄기 빛을 부여잡고 인간은 까마득한 내면의 혼돈 속에

하나씩 스스로의 질서를 조직해가기 시작했다.

이런 설명은 천문의 태동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해준다.

통상의 설명은 천문의 시작은 농경의 시작과 함께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이 눈뜨고 농경이 일어납니다.

농경은 정착을 가능하게 하고 정착은 다시 한번 급속한 이성의 발달을 가져옵니다. (…) 하늘의 운행을 관찰하여 그 자료를 토대로 곡물을 풍부하게 기르고

입맛에 맞는 가축을 기르는 데 힘썼습니다.
<전창선·어윤형 지음, 『음양오행으로 가는 길』, 와이겔리, 30쪽> 

유목민에게도, 수렵과 채취에 의존하는 아마존 정글의 원주민들에게도,

천문은 있었다.

정착과 농경을 통해 문명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인간은 천문과 함께한 것이다.

여기서 천문이 비단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문을 통해 역법(曆法)을 고안하고 농업 기술을 발전시킨 건 비교적 후대의 일이다.

고대의 추장은 곧 샤먼이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지금-여기라는 시공간의 좌표를 삼았고,

명상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좌표를 읽어냈다.

별을 관찰하여 볍씨 뿌리는 시기를 알려주고 전쟁의 때와 성패를 정하는 건

추장이 아니라 후대 문명국가의 왕들이 한 일이었다.

그 이전에 천문은 보다 제의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동양 천문을 이야기하는 자리이니 고대 중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역사 이전의 시대로 여겨지는 은(殷)나라.

그 사회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잠시 고대의 신화를 경유해야 한다.

<제(帝)는 어떻게 천(天)이 되었는가>

원시적인 고대의 공동체는 모계사회였다.

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곧 생명을 잉태하는 능력이 있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신화를 보자.

아치형의 자세로 하늘을 만들고 있는 것이 하늘의 여신 누트(Nut)이다.

그 아래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남신 게브(Geb)이다.

여신 누트는 태양을 낳았고, 세계를 그 뱃속에 품고 있다.

그들에게 우주란 이처럼 여성적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늘은 여성의 배와 같았다.

샤먼이 명상을 통해 도달하려 한 대상도 만물을 잉태하는 세계의 어머니였다.

중국의 고대 신화에도 이와 비슷한 모신(母神)의 창세 신화가 전한다.

그의 이름은 희화, 태양의 어머니이다.

그는 열 개의 태양을 낳았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한 명씩 깨끗이 씻겨서 교대로 하늘로 올려 보내는 역할을 한다.

바로 기원전 14세기 경 은나라에 전하던 신화다.

여신 희화가 낳은 열 개의 태양은

곧 주기적으로 교대되는 하늘의 태양을 뜻하는 것이자,

은나라를 차지했던 열 개의 부족을 일컫는 것이었다.

열 명의 부족장들은 자기 부족의 시조로 알려진 태양을 숭배했다.

이들에게는 태양 숭배 신앙과 결합한 조상숭배 전통이 있었다.

이 전통은 후일 유교에 흡수되어 현재까지 전하며,

유교문화권인 우리나라도 이 전통을 공유한다.

일 년에 일곱여덟 번의 제사는 기본으로 알고 지낸 우리네 며느리들의 애환,

그 애달픈 역사는 멀고 먼 고대 은나라 적부터 계속된 것이다.

은나라에서 숭배했던 신은 '제'(帝)로 각자의 부족을 관장하는 시조신이다.

이들의 신앙은 원시적인 자연신앙이었다.

이 지형도를 뒤바꾼 것은 주나라이다.

기원전 11세기,

중국의 서쪽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이 동쪽의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웠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결과 변방의 이민족이 대륙의 패권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이들은 자기 왕족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은나라의 신 '제'(帝)를 물리치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천'(天)이다.

(天)이란 글자는 주나라의 역사와 함께 새로 태어났다.

은나라의 갑골문에 나타난 천(天)자는 그저 ‘크다’는 뜻을 가질 뿐이었으나,

주나라에 와서는 여기에 절대와 초월이라는 의미가 덧붙는다.

즉, 천은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인격신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로써 세상을 품고 기르는 모계신의 계보는 막을 내리고,

다스리고 군림하는 부성적 종교가 시작된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오던 기존의 전통을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초월신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주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어깨 위에 절대의 존재인 천이라는 신을 세웠다.

이때부터 천명(天命)이라는 관념이 등장했다.

주나라 이래로 왕은 스스로를 하늘(天)의 명을 받은 천자로 인식했고,

그 후로 천명 관념은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와 함께 천문의 성격도 변했다.

애초의 천문이 원시 자연 신앙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면,

이제는 국가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일종의 일신교로 변화한 것이다.

자신들의 국가가 안정적으로 이어지기를,

또한 왕의 권력이 언제까지고 영원하기를 바랐던 왕과 관료들은

자신들의 바람을 우주에 투영했다.

뭇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북극성 중심의 천문체계가

이때부터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봉선(封禪)이라는 이름의 제천의식이 시작됐다.

(封)은 천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선(禪)은 대지의 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천자였다.

그는 새로이 정립된 부성적인 천신을 기림과 동시에

민중들의 신앙 속에 남아있는 자연신앙을 포섭하기 위해 대지의 신을 기렸다.

이로써 종교적 권위와 전제적 권력을 아우르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이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주나라에서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는 시기는

이렇듯 정치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격변의 시기였다.

이 격동의 시기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계층이 유가이다.

『몸과 우주』의 저자 유아사 야스오는

유가가 원래는 은나라에서 조상숭배의 종교적 행위를 담당하던 샤먼들이었다는

쇼킹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런 그들이 주나라에 와서는

막강해진 천자의 권위 아래 종속된 관료계급이 된 것이다.

한때 '영빨'깨나 날리던 사제 계급에서 일개 관료로의 참담한 전락.

주나라가 멸망하고 나서 그들은 한층 지리멸렬한 전락을 경험해야 했다.

이때 영적 권위를 박탈당한 유민의 역사를 다시 세우려 한 인물이

그 유명한 공자(孔子)이다.

그는 은의 전통이던 조상숭배를 당대의 살아있는 정치원리로 재정립하려 했다.

공자가 이루었던 업적의 의미는 신화시대가 멀어짐에 따라

그 지위가 떨어져 온 조상숭배에 대한 새로운 사상적 의미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것을 공공적 사회적 현장에서 통용되는 정치원리로까지

다시금 높여 놓았다는 점에 있다.
<유아사 야스오 지음, 『몸과 우주』, 지식산업사, 47쪽>

이렇듯 이들은 전통의 보존자이자 문명의 수호자라는 위치에서

그 명맥을 이어간 것이다.

아니, 천문 이야기 하다 왜 이야기가 갑자기 유가로 빠지냐고 의아해 하는 당신!

동양의 천문역사를 논함에 있어 유가를 빼놓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동양의 천문을 최초로 정립한 이가 바로 유가들이며,

그들이 이룩한 체계는 수천 년의 역사를 변하지 않고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가들은 어떻게 천문을 이론화 했으며, 또 어떤 도전에 직면했는가?

<왕의 남자는 누구? -유가 VS 방사>

천문(天文)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쓰인 문헌은

전국시대 말에 저술된 『여씨춘추』이다.

여불위.『여씨춘추』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자신의 빈객 3000여 명으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이 책에 담도록 했다.

여기에 한 글자라도 더 보탤 수 있는 자에겐 천금을 준다고 선언할 만큼

그는『여씨춘추』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은 진시황 때 만들어졌다.

그것이 체계화된 이론, 명실상부한 천문학의 체계로 정립된 것은

사마천 『사기』의 「천관서」에서다.

때는 한무제의 집권기로 BC 100년경의 일이다.

중국의 천문학은 『여씨춘추』와 『사기』의 사이,

즉 진의 천하 통일과 이어 들어선 한제국의 시기를 거치며 무르익었다.

이 백여 년의 시간 동안 중국의 천문학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이다.

물론 이 당시의 천문학은 우리와 전혀 다른 감각의 것이다.

하나의 별이 몇 억 광년 떨어져 있으며 무슨 성단에 속하느냐,

그 당시엔 이런 건 별로 관심거리가 못 됐다.

그들은 천체학적인 정보보다는 하늘이 어떻게 인간과 연결되는지를 궁금해 했다.

『여씨춘추』에서는 “하늘에는 구야(九野)가 있고, 땅에는 구주(九州)가 있다”고 해서,

아홉으로 나뉜 하늘과 땅이 풍기(風氣)의 교류로 서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사마천의「천관서」에서는 별자리 체계를 보다 완벽한 짜임새로 정립함과 동시에,

(風)(氣)라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우주의 음악적 리듬인 율(律)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당시의 천문학은 바람과 음악의 천문학인 셈이다.

이 주제는 살짝 미뤄두자.

오늘 살펴볼 것은, 이 시기 중국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하는 것이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선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국시대(기원전5~3세기)로부터 진한시대에 이르는 오백여 년은

중국의 과학기술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그 밑거름을 제공한 건 전국시대 제후국들 간의 피 말리는 경쟁이었다.

당시 군주들은

보다 부강하고 화려한 도시를 가지고자 하는 경쟁의식에 불타고 있었고,

이는 건축술을 위시한 여러 분야의 기술 발달을 추동했다.

여기서 천문학은 당대의 기술발달이 집약적으로 모아진 분야였다.

제후들은 경쟁적으로 나름의 우주탐사대를 꾸렸다.

냉전시대의 미국과 소련,

혹은 ‘개도국’ 딱지를 면해 보려는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이 하는 것처럼,

당대의 제후들은 서로를 견제하듯 하늘에 관한 지식을 쌓아 갔던 것이다.

우주가 정치적인 각축의 장이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다 진에 의해 최초의 통일 제국이 등장하면서

우후죽순 격으로 자라고 있던 여러 분야의 학문과 기술들이

왕성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짧았던 진의 역사 후에 들어선 한 제국은

기술 발달에 있어 보다 건실한 토양을 제공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등에 업고 등장한 신흥세력이 있으니 이들이 바로 방사(方士)다.

방사란 역법과 술수에 능통한 이들로,

요즘 말로 치면 점술가 또는 연금술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불치의 병을 고치고, 사물과 사건을 투시해서 보며,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등

보통사람들은 범접하지 못한 신이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렇듯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을 서둘러 포섭하려 했고,

방사들 역시 보다 특별한 능력을 발휘해 황제의 눈에 들려 애썼다.

방사들이 마구잡이로 남용하던 영적인 기운은 사실 말하자면,

은나라의 제사장이던 유가의 선조들이 보유한 능력이었다.

이들은 거북과 소의 뼈를 구워 점을 쳤고,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들에 의해 나라의 중대사이던 제의가 집행되었다.

하지만 과거 은나라의 샤먼으로서 가졌던 영적인 ‘원천 기술’을 잃어버린 채로,

허울뿐인 옛 전통만을 들먹이는 유가들은 갈수록 찬밥 신세로 밀려날 뿐이었다.  

<우리 유가가 달라졌어요>유가들의 서글픈 상황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중 「봉선서」에는 진시황의 이야기가 나온다.

진시황은 제국의 통일 과정에서 노나라의 유생 30명을 데려왔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까다롭고 시시콜콜 말이 많았다.

“전하~ 봉선의 기본은 옛 사례를 따르는 것이옵니다.

예로부터 산을 훼손하지 않게 수레바퀴에 쿠션을 충분이 깔아줬고,

자리를 잡을 때는 먼저 청소를 하는데, 깔개는 반드시 벼의 줄기를 써야 하며……”

뭐 이런 식이다.

때문에 진시황은 옛날 얘기하기 좋아하는 유가보다는

앗쌀하면서도 유스풀한 방사들을 반겼다.

급기야 봉선의례가 있을 때는 유가를 제외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진시황이 태산에 올랐다가 산중턱에서 폭풍우를 만나

큰 나무 아래에서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생들은 배척을 받아 봉선 의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진시황이 폭풍우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 비웃었다.
<사마천 『사기』,「봉선서」>

‘오메 꼬신 거!’ 하고 혀를 차는 유가들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불행히도 유가들의 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왕, 무제(武帝).

그는 진시황에게 뒤지지 않을 야망의 소유자였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열망에 사로잡혔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진시황과 닮은 점이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올드한 유가들은 잘나가는 방사들에게 밀려나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 불똥은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가계로 떨어졌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봉선의례에 따를 당하는 불운을 겪은 것이다.

대대로 천문과 역사를 담당해 온 전통 있는 가문에

지울 수 없는 치욕을 남긴 사건이었다.

그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며, 아들 사마천에게 이런 유언을 남긴다.

우리 조상은 주 왕조의 태사였다.

아주 오랜 상고시대에는 천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그러다가 중간에 와서 쇠퇴해졌는데 나에게 와서 유업이 중단될 수야 있겠느냐?

(중략) 지금의 천자는 한 왕조의 대업을 계승하여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하였으나

내 거기에 수행하지 못했으니, 이는 아! 나의 운명이로다! 운명이로다!

내가 죽은 뒤에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라!
<사마천 『사기』,「태자공자서」>

『사기』는 아버지의 한 서린 유언을 이어받아 완성한 사연 있는 저작인지라,

이 책의 곳곳엔 방사에 대한 적대감이 묻어나 있다.

그런가 하면 방사들에 치여

하향일로를 걷고 있던 유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전에 공자가 주나라의 천명사상을 수용해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면,

당대의 유가들은 라이벌 방사들의 주력무기인 역법(자연학)을 대폭 수용한다.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초기 유가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철저하게 현실 정치 지향적이던 그들은 예법의 수호에 골몰할 뿐이었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유가들이 그동안 배척해 오던 음양오행론이나 점성술 등

우주론적 요소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가들의 우주론이 방사들과는 정반대의 맥락임을 눈여겨봐야 한다.

정치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유가들은 우주의 순환적 질서에 주목했다.

그들은 현실 정치가 유기적으로 순환하는 우주의 질서를 이어받길 기대했다.

군주의 사사로운 야망에 의해 정치질서가 전횡되는 일이 없도록

완벽한 질서 속에 조직된 관료 조직을 꿈꾼 것이다.

권력에 편승하고자 했던 방사들과 반대로

우주론을 받아들임으로써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

중국의 천문학이 이론적으로 확립된 것은 이즈음의 일이다.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라는 자신들의 정치관을 그대로 하늘의 질서에 투영시켰다.

별자리들은 천자를 상징하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엄정한,

너무나도 엄정한 질서를 띤 채 정렬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의 관직에 대응되어 한자리씩 벼슬을 하고 있다.

이 체계는 초기의 세팅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로 후세에 계승되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온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천문학이

그만큼 뛰어난 수준에 도달했다는 얘기도 되지만

천문학이 국가의 비호 아래 오래 안락한 시절을 보냈다는 얘기도 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객관적인 천체를 연구하는 요즘식의 천문학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별은 그저 별일 뿐, 그것을 별자리로 묶는 것은 인간의 해석방식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하늘을 해석했고,

그 이해방식은 역사의 격절점마다 각축을 벌이며 변화했다.

천문학의 역사는 그런 점에서

시대마다 온갖 세계관들이 각축을 벌여 온 포연 없는 전쟁터라 할 수 있다.

<중국 천문학의 ‘거의 모든 것'>

사마천의 「천관서(天官書)는 중국 천문학의 ‘거의 모든 것’,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알파와 오메가’ 격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천관서(天官書)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늘의 별자리를 왕실의 관부(官府)에 대응시켜 이해하는 게 특징이다.

왕실에서 편찬된 후대 천문지들은 대개 이 글의 포맷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사마천은 여기서 중국 천문학의 유래에 대해 적고 있다.

 “사람이 생겨난 이래 군주가 태양과 달, 별자리를 살피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중략) 우러러 하늘에서 별자리의 모습을 살피고,

고개 숙여 땅에서 만물의 모습과 생태를 본받는다.”

<사마천, 「천관서」>

중국 천문학이 확고한 왕실 천문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사마천 당시의 일이지만,

멀리 주(周)나라 이전부터 사람들은 천문 현상을 기록했다.

그 시절 천문은 국가학의 일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원시적 우주 종교의 한 형태였다.

사마천의 말처럼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천문은 존재했었다는 것!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인간사와 우주의 질서를 연관 지어 이해하려 했다.

이때 왕(王)이란 존재는 그 한자의 모양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늘·땅·인간을 하나로 아우르는 존재다.

하지만 패권의 시대를 지나면서 당대의 유가들은

야망에 불타는 군주가 얼마나 혼란과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유가들은

자신들의 과제를 우주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주제 속에서 찾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은 ‘우주론적 유학’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사마천과 동시대인인 동중서(董仲舒)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질서가 부조화의 길에 들어설 때

하늘은 인간을 일깨우려 한다고 생각했다.

천자가 천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때 하늘은 재이(災異)를 내리며,

반대로 군주에게 덕(德)이 충만할 때 하늘은 복을 내린다.

이게 그 유명한 천인감응론으로, 그의 영향은 사마천의 글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최선은 덕을 닦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하늘에 제사를 올려 사악한 것과 재앙을 없애 달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방법이란 것은 없다.”

<사마천, 「천관서」>

사마천을 위시한 사관(史官)들은 왕실의 역사가이자 점성술사였다.

이들은 제왕에게 천명을 예고하고 해석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왕은 이들의 말에서 자신의 덕과 정치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이들은 자칫 이탈하기 십상인 인간의 질서를

우주의 조화로운 하모니에 대응시키려 노력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문명과 우주가 조화 속에 하나 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천지인 삼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천인감응론은 여기에 큰 공헌을 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천문학은 확고한 국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양의 천문학에는 ‘개인’이 없다.

이점이 서양의 천문학과의 주요한 차이점이다.

그렇다고 고대의 중국이 개인의 삶이 무시된 시대였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천지인이 하나라는 이들의 인식은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단일한 주체나 개인을 상정하지 않게 했다.

하나의 사회 질서 속에 포함된 한에서의 인간 혹은 주체를 말했던 것이다.

사회의 조화를 무시하고 개인의 안명을 구하는 무리들은

그 시대의 방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도덕적인 지탄을 받았다.

중국인들에게는 그만큼 질서와 조화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의 체계는 곧 우주 질서를 일종의 축약판으로 재창조하는 것이었고,

천자는 곧 우주 질서의 안배자로 여겨졌다.

그 속에서 우리는 ‘역사 속의 나’

혹은 ‘우주 속의 나’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처음 공부하는 이들에게 이 점은 중대한 비호감 요소로 다가올 수 있다.

청와대에 취직이라도 된다면 모르겠다만,

이 시대에 대체 왕실 천문학은 해서 뭣하겠는가!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이룩한 문명의 질서를

우주의 리듬에 일치시키려는 유가들의 뭉클한낙관주의를 읽어낼 수 있다.

또, 온통 점술 일변도인 오늘의 별자리점 말고,

몸과 국가와 우주가 어떻게 하나의 질서로 관통되어 있는지를 읽었던

고대인들의 혜안을 느껴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동양천문학은

몸과 우주에 관한 ‘중국 사유’의 원천 기술을 보유한 분야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하늘을 질서화 했는지를 잘 보면 몸이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

 
<우주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바야흐로 우주여행의 시대 개막을 목전에 두고 있다.

우주 결혼, 우주 황혼식, 우주 보험 등

우주는 목하(目下)상품이 되어 팔릴 준비를 하고 있다.

SF 영화에 나올 법한 일들이 빛의 속도로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아바타는 이런 우리의 현 주소를 여실히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자원 고갈에 허덕이던 인류가 우주로 떠나는 이야기.

지금 우리 모습이 딱 이렇지 않을까?

두 세기 전 신대륙에서의 골드러시가 다시 한번 시원하게 터져주시길 바라며,

세계의 갑부들과 기업은 우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머지않아 별이란 말은

우주 광석이 가득한 자원의 보고라는 뜻으로 통용될지 모를 일이다.

우주의 가치가 물질적 부로 환원되어 이해되는 이 시점에서,

누군가 당신들은 우주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갖고 있느냐 묻는다면

우린 뭐라 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삶 속에서 어떻게 우주를 체험하고 있는가?

고도의 천문학과 과학기술을 가지고도,

우린 애석하게도 우주에 대해 딱히 뭐라 확언할 수 있는 게 없다.

분석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자서전에는

노년의 융이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는 대목이 나온다.

거기서 만난 푸에블로 인디언들, 제대로 된 망원경 하나 없는 이들은

우주에 대해 놀랍고도 확고부동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푸에블로 추장 가라사대,

우리는 우주의 자손들이며, 태양은 우리 아빠다!

우리는 세계의 지붕 위에 사는 민족으로 아버지 태양의 아들들이오.

그리고 우리의 신앙으로 날마다 우리 아버지가 하늘을 운행하도록 도와주고 있소.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해서 하는 것이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더 이상 활용하지 않으면

그때는 10년 안에 태양이 뜨지 않게 될 것이오. 그러면 항상 밤이 되고 말 것이오.
<칼 구스타프 융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450쪽>

푸에블로 인디언의 역사는 오래지않아 막을 내렸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의 호언장담처럼 태양이 뜨지 않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런 그들에게 ‘너네 태양 아들 맞어?!’ 라고 비웃을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자기 확신과 위엄에 가득 차 자신의 우주론을 설명하는 추장의 모습에 탄복한 융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융이 주목하는 건 그 말에 담겨 있는 풍부한 우주적 의미이다.

그들에게 우주는 객관적인 관찰대상도 장사 거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서구인들의 협소한 시각과는 비교될 수 없을,

그야말로 우주적인 스케일로 세상을 봤다.

우주와 나는 둘로 나뉘지 않는 하나다.

우주의 리듬은 나의 모습을 결정하고, 나의 행위는 우주의 운행에 직접 기여한다.

이 말은 우리에게 ‘당신은 지금 얼마나 우주적으로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우주에 기여하고 있습니까’ 라는 윤리적인 질문을 남긴다.

고대인들에게 우주와의 합일은 삶의 의미이자 과제였고,

하늘은 관찰과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제의와 숭배의 대상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천인감응론’도 이와 동류의 세계관이다.

어떻게 나를, 사회를, 국가를 우주적 궤도에 올려놓을 것인가?

우리가 망각해 버렸다기엔 너무 가까이 그리고 도처에 이런 세계관이 산개해 있다.

흥미롭게도 푸에블로 인디언들처럼 태양 숭배 신앙을 가진 민족은 무수히 많다.

이집트, 바빌론, 인더스 등 무수한 문명권에서

태양을 섬기며 자신의 삶과 합치시키려 노력했다.

태양은 단연 인기 1순위의 천체였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아우르며 세계인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태양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태양, 질서의 수호자>

어제는 금성일식이 있는 날이었다.

금성일식은 금성이 태양을 지나가는 현상이다.

불안정한 궤도를 가진 금성은 자주 태양의 주위를 어지럽게 지나다닌다.

때로 태양의 방향을 거슬러 역행하기도 하고

이번처럼 태양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한다.

어제 일어난 금성일식에선

금성이 태양 안으로 쏙 하고 들어가는 흔치 않은 장면이 연출되었기에,

금세기 최고의 우주쇼라며 화제가 됐었다.

뉴스에는 태양을 관찰할 수 있도록 고안된 슈렉 가면을 쓴 아이들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지금 못 보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이건 옛 선조들이 봤다면 경을 쳤을 일이다.

점성학적으로 보면 태양은 왕을 상징하는 천체다.

그것이 금성에 의해 좀 먹혔으니 이건 보통 심각한 전조가 아니다.

천체는 결코 혼자 쇼하지 않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고대인들이 일식을 어떻게 전조로 받아들였는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리디아와 메디아 왕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막상막하로 진행되어 6년째에 접어들을 때였다.

싸움이 한창일 때 갑자기 낮이 밤이 되고 말았다.

일식이라고 하는 하늘의 돌변은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실제로 그 해까지 정확히 들어 이오니아인에게 예언했던 일이다.

리디아 메디아 두 군은 다 같이 낮이 밤으로 변한 것을 보고

싸움을 그만 두고 할 수 없이 화평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 『역사』, 50쪽>

당시 사람들은 일식을 신의 노여움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위를 바로잡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하여 6년간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화해 모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만큼 태양은 중요한 천체로 여겨졌다는 것.

태양의 변화는 여러 천문현상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태양의 인기 비결? 그건 무엇보다 ‘질서’에 있었다.

성실하고 규칙적인 바른 생활 사나이 태양. 태양은 우주 질서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의 반듯함은 일식과 혜성의 침범 등,

여러 방해요소들로부터 수시로 도전 받는다.

그럼에도 한결같은 진로와 예측할 수 있는 주기를 유지하는 태양은

사람들에게 질서의 수호자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태양의 주기에서 시간과 공간의 질서감을 획득했다.

또한 태양은 만물을 생육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농경을 토대로 흥기했던 4대문명의 발상지에는

공통적으로 태양숭배 신앙이 나타난다.

생명에너지를 무한 방사하는 태양은 범접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진 신으로 이해되었다.

이집트 태양신의 이름은 레(Re)이다.

이집트인들은 지하왕국의 어둠을 뚫고 나와 동에서 서로 항해하는 태양의 신,

레야말로 진정한 질서의 근원이라고 믿었다.

레는 항상 선물인 마트(Maat)와 함께 동행한다.

마트는 햇빛, 만물을 자라나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의 ‘비로자나불(毘盧遮羅佛)’도 이런 태양신의 일종이다.

산스크리트어로 ‘Vairocana’는 태양이라는 뜻.

역시나 불상의 머리 주위에 태양의 광휘를 상징하는 빛살이 묘사되어 있다.

사라진 문명 아즈텍의 신 ‘토나티우Tonatiuh’도 태양신이다.

아즈텍 신전의 태양의 돌 위에 묘사된 이 신의 모습은

한 눈에 봐도 어엿한 태양의 화신이다.

머리 주위에 묘사된 빛살은 태양의 광휘를 표현한 것이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듯이

태양은 강렬한 생명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최고의 신이었다.

뭇 존재들의 생명은 태양과 떼 놓을 수 없기에

태양신은 어디에서나 특권적인 지위를 가진 신으로 자리매김했다.

태양은 생명의 질서를 주관하는 완전 소중한 천체였던 것이다.

<중국의 태양신은 왜?!>

중국의 신화에도 물론 이런 태양신이 있다.

그런데 중국의 태양신은 여타 문명권에서처럼 끗발을 날리지 못한다.

일찍이 중국에도 태양숭배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농경 문명이 만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권적 권위를 가진 태양신의 전통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먼저 중국 신화 속의 태양 이야기를 만나보자.

중국의 신화에서 태양은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三足烏)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세상에 열 개의 태양이 있다고 믿었다.

태양의 집결지는 동쪽 바다 끝에 있는 부상수(扶桑樹)라는 나뭇가지다.

태양의 어머니 희화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아홉 개의 태양 중 하나를

탕곡이라는 호수에서 말끔히 씻겨 어제의 태양과 교대시켰다.

그런데 어느 날 열 개의 태양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대형사고가 벌어졌다.

덕분에 세상은 불바다가 됐고 명사수 예에게 태양을 쏘라는 막중한 임무가 내려진다.

예는 솜씨를 발휘해 아홉 개의 태양을 명중시키지만

천신 희화의 자식을 죽였다는 이유로

하늘의 노여움을 사 지상으로 영원히 추방당한다.

그러자 예는 곤륜산의 서왕모가 가지고 있다는 불사약을 구해 영생을 얻으려 한다.

서왕모 면전에 당도한 예와 그의 아내 항아.

서왕모는 이들에게 불사약을 내려주며 복용법을 일러주는데,

한 사람이 한 병을 다 먹으면 즉시 하늘로 올라가고,

두 사람이 반을 나누어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항아는 남편을 배신하고 몰래 불사약을 들이킨다.

하늘은 이런 항아를 용서하지 않고 흉한 두꺼비로 만들어버린다.

오늘날에도 해와 달에 이들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데

해에서는 부상수 가지에 매달려있던 태양-새 삼족오(三足烏)를,

달에서는 두꺼비로 변한 항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평소 우리가 해님 달님이라는 말을 자주 쓰듯이 중국에서는 해와 달을 함께 묶는다.

다른 문명권 사람들이 보면 놀라 자빠질 일이다.

감히 누가 태양을 달 나부랭이와 함께 묶는단 말인가?

태양을 소재로 하는 신화에

이다지도 권위가 없다는 것은 세계 신화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달은 밤과 어둠을 주재하는 신으로 여겨지기에,

그만큼 부차적인 지위로 간주된다.

심지어 서구 지역에서는 달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광기어린’ ‘미치광이’ 라는 뜻의 ‘lunatic’은 달을 뜻하는 라틴어 ‘lunar’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달은 해와 동급의 지위를 가지는 천체로 여겨지고 있다.

도대체 거리가 가깝길 하나, 크기가 비슷하길 하나,

천체 구조만 봐서는 당최 설명이 안 되는 이야기다.

먼저 태양신의 권위가 추락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이는 별자리 서당에 자주 등장하는 은나라의 몰락과 관련되는 이야기다.

우리는 날을 헤아릴 때 한 달을 열흘씩 끊어 상순·중순·하순으로 묶는다.

시간을 열흘을 주기로 한데 묶는 것은 은나라로부터 전해진 전통이다.

부상수에 걸려 있었다는 열 개의 태양은 은나라에 살던 열 개의 부족체를 뜻한다.

각 부족의 시조신이 태양이 되어 세상의 날을 주관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 조상신의 이름을 따 태양에 붙인 이름이

우리가 천간이라 부르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이다.

이들이 한차례 순환하는 주기를 ‘순(旬)이라 하여,

이를 시간의 중심으로 삼았던 것이다.

중국 문명은 분명 열 명의 태양신, ‘제(帝)’로부터 출발했다.

하지만 기원전 11세기,

은이 주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태양의 특권적 지위는 후퇴하게 된다.

우주의 중심은 ‘천(天)’이라는 새로운 신이 차지하게 되고

태양은 하루의 반절만을 주재하는 지위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음양, 현자의 눈>중국에서 해와 달을 하나로 묶는 이유는 시간의 안배와 관련이 깊다.

태양은 하루의 절반인 낮을 주관한다. 나머지 반절은 달이 주관한다.

크기 상으로는 무려 400배의 차이가 나는 이들이지만,

지구에서 보기엔 이들은 하루라는 시간의 반절씩을 주관하는 대등한 천체이다.

이들의 의미는 해와 달이라는 천체의 외연을 넘어 보다 추상적인 원리로 발전했다.

바로 중국의 독특한 세계관인 음양(陰陽)이라는 개념이다.

한자 음과 양은 언덕(阝) 응달과 양달을 나타낸 글자이다.

그늘과 양달이라는 상반되는 요소는 하나의 언덕의 두 모습으로 함께 공존하는데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의 성격이 반대의 것으로 뒤바뀐다.

일과 월의 조합으로 밝을 명(明: 日+月)이나 바꿀 역(易: 日+月)이란 한자가

만들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해와 달은 떼 놓을 수 없는 한 쌍이었다.

서로를 포함하며 변이하는 음양의 개념은 우주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데 소요되었다.

언덕의 양달은 응달이 있어야 가능하다.

언덕은 언덕이고 양달은 양달이라고 이들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없다.

한 사물은 자신의 반대항을 전제하고서야 가능하다.

모순되는 것들을 무 자르듯 잘라버리는 태도는 ‘밝은(明)인식이 아니다.

반대되는 요소들이 하나로 있기 때문에 세상은 부단히 ‘변화(易)’한다.

(日)은 밤(月)으로 밤(月)은 낮(日)으로.

이 생각은 중국 특유의 시간개념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간이란 직선으로 나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거듭되는 생성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립적이면서 보완적인 두 개의 기운이

공존과 교대 속에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양의 개념은 중국의 사유가 협소한 인식에 갇히지 않는데 일조했다.

일상적인 사고에 매몰된 인간은 사물의 일면을 보고 전체를 규정하려 하지만,

음양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반대편과 나중에 도래할 다른 국면을 함께 이해하게 한다.

이러한 생각은 시간과 공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것이 사물의 전체를 인식하는 현자들의 앎, 대지(大智)이다.

서구 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음양과 비슷한 생각들이 발견된다.

기원전 6세기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었다.

"‘신은 낮이자 밤이며, 겨울이자 여름이고, 전쟁과 평화이며, 포만감이자 배고픔이다."

그는 대립물이 공존하는 채로 부단히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을 포착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방대하고 화려한 신화 역시 같은 맥락의 것이다.

아폴론은 섬광이면서 때로는 어두움이고, 직선이면서 사선이기도 했다.

이것이 그리스의 신화가 기대고 있는 시적 언어, 뮈토스의 세계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얘가 쟤가 되고 쟤는 얘가 되는

이런 어정쩡한 이야기들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반대되는 것들이 온통 뒤섞여 있는 신화적 세계관과 절연하면서

그리스는 진실에 대한 엄밀한 기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관측 위주의 서양의 천문학이 태동한 것도 이즈음이다.

별에서 세상을 읽고 나를 읽던 고대의 전통을 말끔히 청산하고

우주의 구조를 그야말로 과학적인 태도로 규정하려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인간과 우주가 소통하던 감응의 세계관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천문학적 지식이 넘쳐났지만 삶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 한

그것은 모두 공염불과 같았다.

앞에 나온 푸에블로 인디언은 손바닥에 침 발라가며 맨눈으로 하늘을 봤지만,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 정도의 단순한 지식들에서

인생의 지팡이가 될 수 있는 귀중한 성찰들을 이끌어 냈다. 

전통적 삶을 벗어던진 우리 역시 이들과 같은 수순을 밟아왔다.

다음번의 일식이 언제 어디서 또 관측될 지, 우린 몇 백 년 앞을 정확히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당장의 일식이 어떤 의미인지, 우린 단 한 줄도 말할 수 없다.

반면 조악하기 그지없는 고대인들의 생각들은 우리를 너무도 황당하게 하지만,

그 안에는 나와 우주를 합치시키려던 고대 현자들의 지혜가,

삶을 우주적 차원으로 끌어 올리려던 고민이 담겨 있다.

중국인들은 태양을 보고 음양을 생각했다.

하나 안에는 반드시 정반대의 것이 내재해 있고,

그렇기에 우주는 멈추지 않고 굴러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음양의 이치이다.

이글거리는 생명의 원리 또한 이와 같다.

삶 안에 죽음이 있고,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다시 생명으로 이어진다.

태양도 음양의 원리에 따라 매일 탄생과 부활을 거듭한다.

그러니 삶에 집착하는 것, 허무의 늪에 파묻히는 것,

모두 인간의 협소한 이해가 지어낸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음양의 리듬, 그 아름다운 순환의 질서에 부합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일 수 있다.

푸에블로 인디언의 말, 너는 어떤 삶으로 우주에 기여하고 있는가?

자, 이제 자기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차례다.

<달빛 아래 두 개의 풍경>

‘달’하면 떠오르는 것은?

정월대보름이나 추석의 환한 보름달,

풍성한 먹거리와 정겨운 풍습들.

우리에게 달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다.

환하게 밝은 달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이런 우리에게 달을 곧 광기(狂氣)와 동의어로 놓는

서양인들의 정서는 낯설기 그지없다.

‘광기 어린’이라는 뜻의 영어 ‘lunatic’은 라틴어 ‘luna’에서 왔다.

‘luna’는 달이라는 뜻이다.

서구인들의 기억 속에 달은 어둡고 음산한 이미지로 기억되어 왔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괴수로 변하는 늑대인간 이야기,

보름달이 뜨는 날에 자살율과 살인율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여기에는 달이 내뿜는 서늘한 빛이 인간의 숨은 본능을 자극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나의 달을 두고 동과 서는 너무도 엇갈린 생각을 해왔다는 것.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른 밤,

서양인들이 원초적인 두려움에 휩싸여 하늘을 봤다면,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은 달빛을 가운데 두고 축제를 벌인 셈이다.

소싯적에 기도 좀 해 봤다고 자처하는 필자는

달과 관련된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벌써 십 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어느 날인가 할머니와 기도를 드리러 산에 올랐었다.

목적지는 친척 중 누군가의 꿈에 나타났다는 고목나무.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그믐날 밤이었다.

그믐날 밤에 꿈에 본 고목나무 찾기라…….

아마도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도 그보다는 쉽지 않았을까?

그믐날 밤의 산 속은 무엇도 없는 절대 어둠의 상태,

‘칠흑 같은 어둠’ 따위의 뻔 한 수사로는 형언할 수 없을 암흑의 극치다.

그런데 일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느 모퉁인가를 도는 데 갑자기 달빛이 나타난 것이다.

달 없이 빛나던 그 날의 달빛은,

꿈에서 본 고목나무를 찾아 치성을 드리고 돌아올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우리 집안사람들은 그 달빛을 산신의 보살핌이자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같은 상황을 서구인들이 겪는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선, 산을 오른다는 것 자 체에 대한 견해부터가 엇갈린다.

중세 유럽의 신학자들은 산을 ‘추악한 대지의 혹’이라 여겼다.

<유아사 야스오,『몸과 우주』, 331쪽, 지식산업사>

그곳은 악마와 마귀가 드글거리는 저주의 장소였다.

그렇기에 산은 오로지 정복의 대상으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서구인들은 산꼭대기를 찍는 등산의 방식으로 산을 대한다.

반대로 동양인에겐 산은 온갖 신령과 수도자들로 가득한

제의와 수행의 공간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에겐 정상을 오르는 것 보다 깊고 그윽한 곳에서 산과 감응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런 서구인들에게 골짜기와 달빛의 조합이라면,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최악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 상황을 마귀의 저주라 여기며 혼비백산하지 않았을까?

달은 동(東)과 서(西)의 너무나도 상반된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매체다.

이 차이는 천 길 사이로 벌어진 두 세계관을 명징하게 드러내 준다.

은은한 달빛을 두고 동과 서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단층을 향해

동양에서 해와 달은 부단히 교대되는 두 양상으로 이해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어떠한 위계도 설정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음양(陰陽)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낳는 데 일조했다.

양은 상승과 발산의 국면이며, 음은 하강과 수렴의 국면이다.

음과 양은 서로 의존하는 가운데 부단히 순환한다.

음양의 개념으로 말하면, 달은 음기(陰氣)를 주관하여

세상에 하강과 소멸의 기운이 가득하게 만드는 밤의 주인장이라고 할 수 있다.

(陰)은 발산하는 기운을 수렴시켜 구체적인 결과물을 벼려내는 기운이다.

그렇기에 밤은 생산의 시간으로 이해되었다.

낮이 발산한 양기를 벼려서 물질로 길러내는 시간.

달은 그런 생산의 과정을 총괄하는 천체이다.

태양이 용솟음치는 양기로 생명의 주재자 역할을 한다면,

달의 음기는 야무진 손끝으로 만물의 몸체를 빚어낸다.

좀 구태의연한 비유를 갖다 대자면, 태양은 돈 벌어다 주는 아빠 역할이고,

달은 세세한 살림살이를 주관하는 엄마 역할이라고 할까.

돈줄을 쥐고 있는 건 엄마 소관, 엄마한테 밉보였다간 밥 못 얻어먹는다.

물질세계를 주관하는 달은 만물의 밥줄을 쥐고 있는 우주적 엄마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달에 기대고 있는 것이 많다.

구체적이고 경험 가능한 물질세계의 거의 모든 것이

(陰)의 담금질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우리가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차원의 것이 바로 우리 ‘몸’이다.

인간은 달의 리듬에 영향을 받는다.

달의 성정은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그리고 그믐달로, 차고 기우는 것이다.

달이 만들어내는 순환의 율동은 지상의 만물에 차고 넘친다.

그것이 바다에 가서는 밀물과 썰물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사람에게 오면 들숨과 날숨의 호흡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없는 상태에서 파도의 물결이 이는 것은 1분에 약 18회이다.

이에 응하여 사람도 1분 동안 약 18번 숨을 쉰단다.

자, 여기에 숫자 2를 곱해보자.

그러면 사람의 평균 체온 36도가 된다.

36이란 수(數)는 달의 파동 18이 음양의 두 국면으로 확장된 것이다.

도가 수행자들은 36이란 수(數)를 몹시 중요하게 여겨

도인술의 동작들을 꼭 36번씩 반복했다.

여기에 다시 2를 곱하면 72가 나오는데,

이는 일 년 360일을 오행(五行)의 다섯 국면으로 나눈 수이자,

사람의 평균 맥박수와도 일치하는 수이다.

이 신비로운 수(數) 유희는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달의 율동이 우리 몸에 리듬을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의 월경주기도 달의 영향을 받는다.

여성의 월경주기와 달의 삭망월(朔望月)주기는 모두 29.5일이며,

임신과 출산도 달이 그득한 보름달일 때 가장 왕성하다.

인체는 달과 함께 춤춘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따라 몸의 기(氣)도 돌고 도는 것이다.

『황제내경』에는 인체와 달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체는 자연계와 유관하며 해와 달의 운행과도 상응한다.

그러므로 달이 차면 바닷물이 서쪽으로 차오르고,

인체의 기혈 역시 쌓이므로 기육이 충실하고

피부가 조밀해지며 모발이 건조해지고 주리가 닫히며 기름때가 끼는데,

이때는 비록 적풍사기가 침입하더라도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다.

달이 이지러지면 바닷물이 동쪽으로 차오르고,

인체의 기혈이 부족해져 위기가 가라앉으며

형체만 있을 뿐이고 기육이 감소하고 피부가 이완되며,

주리가 열리고 모발이 손상되며 기육의 결이 얇아지고 검은 때 같은 것이 떨어지는데,

이때에 적풍사기가 침입하면 사기가 깊숙이 들어가 갑작스럽게 발병한다.
『황제내경』,「영추」, <세로론>

만월 · 만조일 때는 몸의 혈기가 강건하고 기육이 튼실해지지만

달이 기울면 혈기의 운위가 쇠약해 진다.

이 말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달의 우아한 율동에 따라 우리 몸도 차고 기운다.

일찍이 옛 사람들은 인간의 몸이 달의 리듬에 상응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리듬을 거스르지 않고 살려 노력했다.

달과 바다,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우주의 리듬에 밝았던 것이다.

신화시대의 흔적들을 들춰보면

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모신(母神)숭배 전통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특히 달은 남신(男神)태양의 능동성을 받아들여

만물을 자라나게 하는 지모신(地母神)의 대표 격이었다.

사람들은 달을 원초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

잉태와 다산을 주재하는 여신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리고 달을 향해 풍요를 기원했다.

인류의 역사 상 달 숭배 전통은 태양숭배신앙의 흔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발견된다.

역사를 가지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일찍이 우주의 엄마,

달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해와 달의 궁합은?!>

달은 생명체의 몸을 주재할 뿐 아니라, 인간이 문명을 구축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달은 가장 가시적인 순환의 주기를 보여주는 천체다.

영화나 TV에서 좁은 감방에 갇힌 죄수가

창밖의 달빛을 가늠하며 날짜를 새기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달만큼 시간의 흐름을 한 눈에 보여주는 천체는 없다.

달이 차고 기울면서 만들어내는 보름이라는 주기는,

소리 없이 흘러 가는듯한 시간의 강물에

일정하게 굽이치는 리듬과 순환의 주기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은 이 순환의 질서 속에서 규칙성을 읽어냈다.

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을 발명하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인류에게 달은 첫 달력이 되어 주었다.

여기 한나라의 어느 무덤에서 출토된 재미있는 유물이 있다.

두 그루의 나무 그림.

너무 평범해서 누군가 무덤가에 휘갈겨 놓은 낙서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여기에는 옛 사람들이 달력을 만들었던 원리가 들어 있다.

왼쪽의 나무는 6개의 잎을, 오른쪽의 나무는 15개의 잎을 가지고 있다.

벌써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오른쪽의 나무는 달의 이지러짐을 보고 날을 헤아리는 기능을 한다.

차오르는 달을 보고 15일 동안 여기에 잎을 붙여나가고, 달이 기울면 다시 잎을 뗀다.

이렇게 한 주기를 돌고 나면 한 달이라는 시간이 찬다.

그러면 왼쪽의 나무에 잎을 하나 붙인다.

왼쪽의 나무는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잎을 붙이고 6개월이 차면 다시 잎을 뗀다.

잎이 모두 떨어지면 1년이 지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

이 그림이 잘 보여주고 있듯, 달력의 탄생에 있어 달은 가히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

비단 중국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사라진 제국 잉카 등

거의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달을 고려한 달력을 만들어냈다.

그 당시 달력의 용도는 오직 제의에 국한됐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달력이 보다 실용적인 용도로 쓰이길 바랐다.

특히 농경의 시작에 있어 달력의 필요는 너무도 절실한 것이었다.

달력의 발달과 문명의 고도화는 궤를 함께 해 갔다.

사회가 복잡하고 고도화 될수록

보다 체계적인 천체 질서를 반영한 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각 문명권마다 다양한 천체의 질서를 반영해 달력을 만들었지만,

주 쟁점이 되었던 사안은 해와 달의 주기를 맞추는 문제에 있었다.

해와 달의 운행을 동시에 고려한 이런 달력을 ‘태음태양력(太陰太陽歷)’이라고 한다.

태음태양력의 난점은 지구의 공전주기에 따라 만들어지는 1년(365.2422)

달의 공전에 따라 만들어지는 1달(29.5306 => 29.5306*12=354.3671)

서로 어긋난다는 것, 어찌 보면 해와 달은 궁합이 안 맞는 부부인 셈이다.

그럼에도 둘이 함께 살아가자니 부단히 지지고 볶을 수밖에.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달만을 고려한 태음력은 한 해의 시작과 끝을 엣지 있게 포착할 수 없다.

절기의 변화에 대해서도 사실상 알려주는 바가 없다.

하지만 태양의 운행을 고려하면 한 해의 기준점과 절기 변화를 단박에 움켜쥘 수 있다.

해와 달의 어긋나는 리듬을 조율하기 위한 비결,

이 문제는 달력에 윤달을 넣는 문제로 모아졌다.

윤달의 문제에 있어 중국인들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집요함을 보였다.

제대로 된 시간질서의 확립이라는 과제는

천자에게 주어진 가장 비중 있는 과제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해 전설의 요임금이 이렇게 한 말씀 남기실 정도.

“삼가 천체 운행의 원리를 파악해 해와 달과 뭇별의 운행을 계산하고 관측하도록 하라.

그리고 경건히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리도록 하라”

해와 달의 공전주기가 자연수로 똑 떨어지지 않고 소수단위로 늘어짐에도 불구하고

(둘의 차이는 10.8751 얼마나 머리에 쥐나는 계산이었을까!),

보다 정교하게 윤달을 넣는 법을 골몰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년 7윤법(19년 동안 7번의 윤달을 끼워 넣는 방법)이 도입되는데,

이는 태양이 선회하는 기점인 동지일과 달의 기점인 초하루가

같은 날에 들어오도록 맞춘 것이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중국인들은 동짓날 자시(子時)

해와 달이 동시에 반환점을 끊는 76년의 주기를 알아내기도 하고,

동짓날하고도 갑자일 자시에 해와 달이 나란히 골인 하는

4617년의 주기를 계산해내기도 한다.

(이 징한 계산에 참여한 이가 그 유명한 사마담-사마천 부자이다.)

여기에 1태양년의 주기에 질서를 부여한 24절기 체계가 확립되면서 중국의 달력은

달의 위상과 계절의 변화를 정교하게 포착하는 보다 균형감 있는 모습을 갖춰갔다.

<달(moon)없는 달(month)>

달력 하나에 이다지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중국인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천체의 운행을 모델로 해서 인간사회의 규칙을 찾으려 했던

천인감응의 세계관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간체계는 서양의 달력이 받아들여진 이후,

달력의 한 귀퉁이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달력의 작은 글씨에서나마 이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행운일지 모른다.

우리가 소위 ‘양력’이라 부르는 서양의 그레고리우스력의 실체를 알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앙상한 시간질서 속에서 살고 있는지에 몸서리치게 될 것이니 말이다.

달을 배제하고 순전히 태양의 운행만을 고려한 달력인 태양력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산물이었다.

나일 강이 범람하는 하지 무렵을 짐작하기 위해

그들은 일 년의 정확한 길이가 얼만큼인지를 따지려 했다.

하지만 이 달력은 농사를 위해 고안된 반쪽짜리 달력에 불과했다.

제의를 포기할 수 없던 이집트인들은 이 달력을 다른 태음태양력과 병행해 사용했다.

이 태양력이 세계적인 시간 체계로 급부상한건

로마시대 정복자들의 눈에 들면서부터다.

로마의 정복자들은 태양력의 간편함에 매료되었고

이를 자신들의 달력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서구의 시간질서에서 달의 운행은 배제되어 버리고,

(moon)없는 달(month)로 이루어진 기계적인 달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기고만장한 정복자들은 급기야 각각의 달에 매겨진 이집트 신들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서구인들은 시간의 질서가 만들어지는데 큰 역할을 한

(moon)의 존재를 깡그리 지워버리고

오로지 눈에 환하게 들어차는 태양의 길만을 따라 외발로 걷게 된 것이다.

시간의 체계에 있어 달의 주기를 배제했다는 것은 몹시도 위태로운 일이다.

달의 주기가 잊혀 졌다는 것은

동시에 우주의 순환의 질서도 함께 망각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달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없이 연이어 있을 것만 같은 아득한 시간들을 위해 세워진

일종의 이정표와 같은 것이다.

달력이 있기에 우리는 연속되는 날들 속에 매듭을 지을 수 있게 된다.

하루, 한 달, 한 해의 시작과 끝.

하나의 국면을 온전히 마무리 할 수 있기에 비로소 새로운 시작 또한 가능한 것이다.

달력은 시간의 순환의 질서를 제시함으로써

세상에 생명의 리듬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달 없는 달력이란 엔진을 들어낸 자동차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달의 주기가 사라짐과 함께 사람들은 열리고 닫히는 시간의 마디를 상실하게 되었다.

달이 차오르고 기울고, 파도가 밀려왔다 쓸려가고, 호흡이 들고 나는 것처럼,

시간은 돌아오고 떠나가는 순환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시계 바늘이 지나가는 균질한 거리의 칸들,

혹은 일직선으로 뻗어가는 화살 같은 게 결코 아닌 것이다.

이쯤에서 서구인들이 달을 보고 느꼈던 공포감이 이해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어쩌면 그들은 굽이치는 시간의 물결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아닐까?

삶이 죽음으로 죽음이 또한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또한 시간 그 자체가 매번 사라지고 탄생하는 순환의 연속이라는 것을,

감당치 못했던 것 아닐까?

피로로 가득한 질주로부터 잠시 숨을 돌리고, 이 밤 달빛과 함께 춤 한 자락 어떠실지.

<오성이야기>

고천문학의 용어들 중 우리 귀에 가장 익은 단어는

아마 “일월오성(日月五星)이 아닐까 한다.

일월은 해와 달, 오성은 태양을 가운데 놓고 공전하는 다섯 행성을 일컫는 말이다.

태양계의 행성들 중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다섯을 엮어서 오성이라 했다.

수성, 화성, 목성, 금성, 토성.

그리고 여기에 일월의 두 요소를 합쳐 칠요(七曜)혹은 칠정(七政)이라 불렀다.

칠요와 칠정은 곧 일월오성의 다른 말이다.

칠요는 음력 한 달을 4등분해서 얻은 7일의 시간주기이고,

칠정은 일곱 개의 천체의 운행을 정치원리에 대응시킨 것이다.

각각 일월오성에서 얻어낸 시간 질서와 정치 원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일월과 오성의 운행이 지상의 시간질서를 만들어내고,

나아가 나라의 정치원리까지 결정한다는 것.

하늘의 무수한 천체들 중 이들 일곱이

그만큼 인간의 삶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임을 알 수 있다.

하늘의 운행을 살펴 인간의 삶에 적용시키려 했던 고대인들에게

이들 일곱 천체는 하늘의 관전 포인트가 되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성(五星)이다.

태양을 중심으로 나란히 돌고 있는 다섯 행성(行星).

이름 그대로 이들은 “떠돌아다니는 별”이다.

하지만 이들은 마구잡이로 떠돌아다녀 궤도를 예측 할 수 없는 혜성(彗星)과는 다르다.

태양을 중심으로 엄밀한 궤도를 지키며 돌고 있지만,

태양계의 세 번째 별인 지구에서 보기에 어지러이 떠도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태양처럼 안정적이진 않지만 이들의 궤도는 예측가능하다.

일찍이 고대인들은 복잡하게 얽힌 오성의 길을 읽어낸 바 있다.

고천문학이 이룩한 경이로운 성과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탄성을 금하지 못하지만,

정작 그들이 어려움을 무릅쓰고서 여기에 도전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하지 않는다.

옛 중국인들은 오성에서 무엇을 보려 했을까?

오성의 운행과 우리의 삶 사이에 어떤 접점을 찾고 있었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고대 사회에서 천문학은 나라의 비중 있는 국책사업이었다.

천체의 운행은 시간질서의 확립에 중요한 기준점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왕들이 핵무기를 원하듯 그 당시의 군주들은 시간(시간질서)을 갖기를 원했다.

고대 군주들에게 시간 질서의 확립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시간을 다스리는 것은 곧 세계를 다스리는 것과 같았다.

무질서한 세계를 문명화 시키려는 야심찬 군주라면

먼저 무상한 시간의 흐름을 다스릴 수 있어야 했다.

그저 흐름으로 있을 뿐인 시간을 쪼개고 나누어 만든 시간(시간체계)이란 발명품은

인간이 자기의 필요에 따라 어떤 것을 다스리는데 필수적인 디딤돌이 되었다.

이때 우선하는 과제는 하늘을 공간화 시킨 천구(天球)라는 구면에

천체의 움직임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가장 그리기 쉬운 건 역시 태양의 움직임이다.

이에 비해 오성의 궤도는 굉장히 복잡하다.

중국인들은 태양이 지나가는 길을 천자의 길로 여겼다. 이를 천도(天道)라 부른다.

태양 주위를 도는 다섯 행성의 궤적은 태양을 보좌하는 관리들의 영역이라 여겨졌다.

왕은 유려하게 뻗은 자신의 길을 순행하며 스스로가 천자임을 세상에 천명했고,

자신의 다섯 신하들에게는 그들 각자에 맞는 직무를 나누어 부여한다.

오성이 운행하며 이룬 궤적은

말하자면 태양으로부터 하사받은 업무들의 그래프와 같은 것이었다.

이때 오성은 오행(五行)에 배속되어 각 기운이 주재하는 방위를 상징한다.

다섯 행성이 모두 모이면 동서남북과 중이 합쳐진 정방형의 공간이 완성되는 것이다.

오성은 왕이 다스리는 땅에 해당한다.

고대 문명권 중 중근동의 지역에서는 태양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이걸 그려낸 것이 ‘황도대zodiac’이다.

황도대는 곧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궤도이다.

이 황도구역을 달의 열두 주기를 뜻하는 12구역으로 나눈 것을 황도 12궁이라고 한다.

천구상의 공간 이 구획 되면 그걸 시간 질서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간체계는 태양과 달의 운동이 함께 반영된 ‘태음태양력’으로 발전해갔다.

이들의 시간체계는 해와 달의 운행을 고려해 만든

일 년 열 두 달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 시간추산을 위해 주목한 것은 뜻밖에도 목성의 공전주기였다.

그리기도 어려운 목성의 공전주기를 떡 하니 고른 대인배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상당히 복잡하고도 독특한 시간 질서를 의도한 것이다.

목성이 태양 주위를 한 번 도는 동안 지구는 약 12번(11.86) 공전 한다.

그러니까 목성의 한 해가 지구의 12년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지구의 한 해를 년(年) 이라 부른다.

목성의 한 해는 세(歲)라고 한다.

 ‘세월이 흐른다’고 할 때의 세월(歲月)

목성의 주기를 열두 번 끊어 나온 한 해의 명칭이다.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16쪽>

제사의 축문 앞머리에 붙는 ‘유세차(唯歲次)’라는 말도

그 해에 목성이 어떤 위치에 자리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시간체계는 세성이 위치한 위치에 따라

각각의 해를 다른 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중국은 여기에 태음태양력의 역법 체계 마저 고수하려 했으니 해와 달

그리고 목성 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꿰차는 시간 체계를 가지려 했던 셈이다.

일 년 열두달 뿐 아니라 십이 년 한 해 한 해 특이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 똑같은 시간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고대의 시간관은 너무도 낯설다.

우리들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심한 삶의 습관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하루가 한 달이 그리고 일 년이 각각 얼마나 다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옛 사람들은 천체의 순환과 함께

매번 회귀하는 듯한 시간 속에 도드라지는 차이의 지점들을 포착해내려 했다.

매 순간이 얼마나 새롭고 다른 것인지!

우리가 망각해가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이 여기 있다.

<오성의 점성적 의미>

오성은 시간 질서의 협조자로 나서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제까지 수차례 이야기했던 천인감응.

거리상으로 까마득한 격차로 떨어져 있는 천체와 인간이

감응하고 공조하는 질서를 이룬다.

오성의 궤적을 관찰하는 것은 주로 점성학자들의 몫이었다.

수많은 천체들 중 지구와 나란히 궤도를 이루고 있는 만큼 이들의 파급력은 강력했다.

점성학을 오로지 국운을 내다보는데 복무시켰던 중국의 특성 상,

오행의 점성적 의미는 주로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 거시적인 틀로 해석되고 있다.

대략적으로 오성의 점성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목성은 동방의 목기에 배속된 행성이다.

앞서 봤듯이 세성(歲星)이라고 한다.

목의 기운이 추진력을 의미하기에 목성의 세를 보고 어떤 지역의 정벌 여부를 점쳤다.

화성은 남방의 화기운에 속한 행성이다.

뜨고 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아 사람을 미혹시킨다고 해서 형혹성(熒惑星)이라 부른다.

화는 예를 뜻하므로, 화성이 어지러우면 나라의 예법이 문란해 진다.

그리고 화는 폭발력을 의미하기도 하니,화성의 세는 전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옛날에 전투를 할 때는 화성의 운행을 눈여겨 봐야 했다.

화성의 운행을 따를 경우 승리하고 거스르는 경우 지게 된다.

화성과 금성이 충돌할 경우 화극금(火克金)하므로 금이 상징하는 군대가 파괴된다.

토성은 중앙의 토기에 배속되니 점성학적으로는 제후와 임금의 상으로 여겨진다.

토성이 특정 궤도에 머물 경우 그에 해당하는 지역에 길한 일이 있다.

오래 머물수록 그 복은 크다.

한편 토성이 급하게 움직이면 왕이 편안하지 않고,

거꾸로 운행하면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금성은 태백성(太白星)이라고 하는데 서방의 금에 배속된 행성이다.

금성은 군사를 주관하기에 금성의 운행이 순조롭지 못하면

군대가 패하거나 임금이 왕위를 찬탈당한다.

수성은 북방의 수에 배속된 행성.

수가 잉태의 기운을 상징하듯이

이 별은 뭇 별들을 잉태하는 어머니와 같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진성(辰星)이라고 불린다.

수성의 운행이 순조롭고 그 빛이 고르면 풍년이 들고 날씨가 조화로우나

그렇지 않으면 흉년과 기근이 찾아온다.

물론 오성을 살피는 방법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것의 빛이 어떤지, 어느 궤도로 어느 속도로 운행하는지,

그리고 주변의 천체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 복잡한 변수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기억해 둬야 할 것은,

오성은 저마다의 궤도 위에서 돌고 돌고 돈다는 것.

오성의 운행은 그치지 않고 이어지며,

천체들의 관계는 매번 새로운 장 속으로 접어든다.

세상의 오행, 그리고 우리의 삶은 모두 천체의 조화와 같다.

천체의 운행에 쉼이 없듯 교차하고 얽히며 매번 새로운 관계망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삶 역시나 매번 새롭게 벌어지는 사건의 무대 위를 살아가고 있는 것.

하늘의 오성은 매순간 새롭게 거듭나는 이 시공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한다.

<장작패기에서 도(道)를 읽다>

군복무 시절, ‘장작병’이라는 것이 있었다.

장작병이란 말 그대로 장작을 패는 병사다.

아침밥 먹고 저녁밥 먹을 때 까지 종일 장작만 팬다.

군인들은 이 보직에 열광했다.

시간 잘 가고, 잔소리 하는 사람 없고, 하고 나면 근육도 생긴다.

언젠가 애인과 펜션에 놀러가 빛나는 어깨 근육을 뽐내며 장작을 팰 날을 꿈꾸며,

군인들은 다투어 장작병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장작은 아무에게나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식하게 힘으로 달려드는 애송이들의 도끼는 빗맞거나 씹히거나 둘 중에 하나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쩍쩍 장작을 가르는 고수의 도끼질,

이건 나무의 결을 읽어 내는 혜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안 알려준다는 그 비방을 여기 전격 공개한다.

『장자』에 보면 소 잡기의 달인 포정(庖丁)이야기가 나온다.

한 편의 춤곡을 보듯,

우아한 리듬을 타며 소를 잡았다는 그의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어도 늘 갓 숫돌에 간 듯하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道)로써 소를 잡는 것이다.

소를 소로 보지 말고 그와 혼연일체가 되면,

살과 뼈가 이루는 미세한 결과 틈이 눈에 들어온다.

그 길을 따라 칼을 놀리면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뼈와 살이 툭툭 절로 갈라진다.

무릇 장작패기의 도도 이와 같으니,

먼저 장작과 혼연일체가 되어 장작-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면 나무의 (道) 보인다.

나무의 몸통을 굴려보라.

분명 한 면이 어두침침할 것이다.

모르겠으면 나이테를 음미해보라.

어딘가 원들이 조밀하게 밀집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곳이 북쪽이다.

나무는 북(北)을 등지고 남(南)을 향해 자란다.

그래서 남쪽을 향한 나이테는 넓고, 무르며, 밝은 빛깔이 난다.

반면에 북쪽의 나이테는 조밀하고, 단단하며, 빛깔은 어두침침하다.

바로 이곳, 나무의 북쪽에 도끼를 대라.

이곳은 나무의 숨통이 모인 길이다.

북에서 남으로 뻗어나간 나무의 보이지 않는 길이 바로 여기로 통한다.

도끼로 이곳을 내리치면 나무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두 동강 난다.

나무의 기준점이 나이테 동심원의 중앙이 아니라 북쪽의 어딘가라는 점.

보이지 않는 길이 북쪽으로 통하고 있다!

군대 가서 장작병이 되라고, 여친한테 점수 따라고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거 아니다.

장작패기라는 작고 사소한 일에서 우주의 이치를 읽어 보자는 것이다.

불쏘시개로 쓰일 나무개비도 하나의 소우주다.

땅의 바위도, 바위 밑에 꼬물거리는 벌레도, 그리고 그걸 보는 우리 인간들도,

모두 하나의 소우주라는 점에서 같다.

우주의 섭리는 이들 모두에게 공히 내재되어 있다.

길은 북쪽으로 통한다는 것,

이것은 비단 통나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북에서 남에 이르는 보이지 않는 축,

그것은 곧 우주 만물을 이루고 있는 뼈대요, 길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라.

하늘의 중심은 천구(天球)의 한 가운데가 아니다.

춥고 어두운 북쪽 하늘 어딘가, 거기 북극성이 있다.

디카 동호회 회원들이 별 일주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고정시키는 별,

실크로드를 횡단하던 그 옛날 상인들이 길잡이로 삼던 별,

고대 이집트인들이 영혼이 돌아가는 별이라 믿었던 별,

그곳을 향해 피라미드에 작은 창문을 내던 별.

그것이 바로 부동의 별, 중심의 별, 북극성이다.

이 별은 우리에게 북쪽의 의미를 각인시켰다.

그곳은 중심이자 기준이 되는 방위이다.

홀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뭇 존재들의 조화와 운행을 주관한다.

북극성은 곧 우주의 축이 되는 별이다. 

<북극성과 중국 천문학>

중국 천문학은 북극성 중심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고대 문명권에서 대체로 태양을 중심으로 한 천문학이 싹 튼 것과 비교 되는 지점이다.

여기선 태양이 지나다니는 길, 곧 황도(黃道)가 하늘의 중심이다.

지구가 공전하며 만들어 내는 태양의 궤적은

인간에게 씨 뿌리고 거두는 농사의 시기,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일러주었다.

중국인들 역시 태양의 운행을 눈여겨봤지만

그 길이 하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찍이 바퀴와 수레를 만들어 냈던 중국인들에게 회전하는 천체의 운행에

어딘가 축이 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런 것이었으리라.

그렇기에 중심이 가운데가 아니라 북에 있다는 사실이

이들에겐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태양의 길 말고 변하지 않는 정점,

바퀴의 굴대 같은 곳을 찾았고 그곳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 별이 곧 북극성이다.

멀리 주나라 시절부터 중국인들은 북극성을 하늘의 중심이라 생각했다.

북극성(北極星)(極)세계의 정점을 잇는 우주의 축이라는 말이다.

중국인들은 북극성을 바퀴의 축, 혹은 저울대(權) 같은 이미지로 떠올렸다.

북쪽 하늘에 얼어붙은 듯 붙박인 고정점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고 역동할 수 있게 하는 축이라는 것이다.

『진서』에서는 이 별을 하늘이 회전하는 지도리(天之樞)라고 생각했다.

지도리는 텅 빈 중심이다.

비어있기 때문에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한 가운데 붙박여 있지만, 결코 녹스는 법이 없다.

중심은 운동과 변화를 낳는다.

여기서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중심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中)이란 결코 물리적인 한 가운데가 아니다.

온갖 변화,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대립적인 국면들을 포괄 하는 자리,

그것이 중이다.

그렇기에 중은 특수한 어느 한 지점이어선 안 된다.

불변의 고정점이어서도 안 된다.

‘입장 아닌 입장’을 견지하며 계속 굴러가야 한다.

<프랑수아 줄리앙,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 182쪽> 

마치 스피노자가 ‘중심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 아니라 ‘

선분의 회전 운동’으로 원의 정의를 바로잡듯,

중국인들은 세계를 변화하고 운행하는 그 자체로 사유하려 했다.

중이란 변화를 아우르는 정점,

그렇기에 어느 하나가 아니면서, 모든 것일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中)의 원리는 천지만물을 이루는 우주의 이치이다.

북극성을 통해 이 원리를 체득한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정치 윤리로 밀고 나갔다.

혼란으로 가득한 인간사, 천체의 조화로운 운행을 본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찍이 공자는『논어(論語)의 한 대목에서 북극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위정(爲政)편의 첫 구절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덕으로 다스림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


북진(北辰)이란 북극성을 일컫는 말이다.

지리멸렬한 춘추전국시대를 겪으면서,

그리고 진한대의 통일 국가를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통일과 조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인간 사회의 중심인 천자는

북극성의 덕을 이어받아 질서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군주가 패권으로 세상을 제압하는 것은 공자가 생각한 우주적 정치의 모습이 아니다.

뭇 제후들이 스스로 복종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천자에게는 세상을 감화시킬 ‘덕(德)’이 요구되었다.

덕이란 대립하는 입장들의 합의점을 이끌어 내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입장 그대로인 채

조화롭게 운행되게 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천자는 머물러 있는 듯 하지만 상황에 맞게 부단히 그 중심을 조절해야 한다.

매 순간 때에 맞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中) 윤리학이 나온다.

어떤 측면에 안주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모든 가능성을 온전히 열어 놓은 상태,

매 순간 저울추를 움직여 가며 때에 맞는 판단으로 균형 있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

이것이 옛 선인들이 추구했던 지혜로운 현자의 삶이다.

이때 그 모델이 된 것은 저 하늘의 북극성이었다.

<내 안에 북극성 있다>

다른 한편 북극성은 소우주인 인간의 몸을 이해하는 데도 기여했다.

『황제내경』 영추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나니, 사람은 머리가 둥글고

발이 모난 것으로써 거기에 상응합니다.(天圓地方 人頭圓足方以應之)라 하여

인간과 우주의 상응을 설명하고 있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받은 것이고,

발이 평평하게 각진 것은 땅을 본받은 것이다.

일 년에 365일이 있듯이, 인간에게 365개의 뼈마디가 있고,

일 년에 사계절이 있듯이 인간에게는 팔다리 사지가 있다.

그리고 하늘의 북극성에 상응하는 전체를 아우르는 중심점이 인간에게도 존재한다.

현대 의학에서 뇌(腦)라 부르는 머리 한 가운데,

동양에서는 이를 니환궁(泥丸宮)이라 부른다.

하지만 니환궁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뇌와 같지 않다.

니환(泥丸)이라는 말은 불교 용어인 니르바나(nirvana, 열반)에서 왔다.

이는 번뇌를 소멸시킨 깨달음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오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머리야만이,

북극성처럼 우리의 전체를 조화의 도로 아우를 수 있다.

하지만 번뇌 속에 살아가는 보통의 우리 삶 가운데 그것은 희뿌연 구름에 가려져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중심 없는 패닉의 상태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자신의 일상과 몸을 돌아보라.

우리는 얼마나 중심 없이 살고 있는가. 하루하루가 얼마나 충돌과 혼란의 연속들인가.

공자는 『논어』「양화(陽貨)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관에 따라 서로 다르고 멀어진다.

(性相近也 習相遠也)

습관이 우리를 멀게 만든다.

조화와 균형의 저울추, 내 안의 북극성으로부터.

일상의 편리를 위해, 우리는 익숙한 대로, 길들여진 대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직시하지 않는다.

습관은 우리가 일상적 편리를 위해 자기의 중심점을 맞바꾼 결과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내 안의 북극성은 가려져 잊혀진 것일 뿐,

사라져 없어진 것은 아니다.

전환의 여지는 상존한다.

즉, 자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적 자기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

숨은 내 안의 빛과 대면할 수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수행의 목표다.

내 안의 북극성, 내 존재의 중심을 찾아가는 길.

그렇다면 그 길은 어떻게 찾아갈 수 있는가?

자기 안의 우주와 합일하려 했던 도가수행자들은

북극성을 신격화 한 ‘태일(太一)’과의 합일을 위해 노력했다.

우리 몸의 오장육부에 마음과의 통로가 있고 각각을 지키는 신이 있지만,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신들 중의 우두머리인 태일신이다.

태일과 만난다는 것은 마음의 중심점을 다잡는다는 것과,

몸의 각 장부들과 기운이 조화롭게 운행되게 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이를 ‘내단 수련’이라는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승화시켰던 도가들은

명상을 통해 혼잡스런 의식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호흡과 의식집중을 통해

몸 안의 기를 원활히 소통시키는 두 가지 길을 모두 중요시했다.

이들에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었다.

몸 안의 기가 순리대로 소통될 때 마음의 번뇌도 가라앉는다.

반대로 의식이 고요히 가라앉을 때 몸의 기운 역시 정미로울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다잡고 내 안의 신을 찾아 떠나기.

이것은 자아의 일상적 습관을 깨고 나오기 위한,

그리고 내 안의 북극성과 만나기 위한, 도가 나름의 전략이었다.

갈등과 번뇌로 시름에 겹다면, 고개들어 북쪽 하늘을 보라.

힘찬 도끼질 한 방에 산란한 마음을 다잡아 줄 부동의 별이 저 하늘 어딘가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빛나고 있다.

<북두칠성, 영원의 시계바늘> 

이 글이 포스팅 될 때 쯤 아마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돌 제방을 쌓고 있을 것이다.

크레인도 지게차도 없이.

해발 1000m에 육박하는 소백산 중턱을 향해

등짐으로 바위덩이를 져 나르고 있을 것이다.

현대판 시지푸스라도 되려는 건가?

찌는 삼복더위에, 대체 소백산에 돌덩이는 뭣 하러!

이 모든 일은 ‘윤달’로부터 비롯되었다.

올해는 그 유명한 윤삼월이 든 해이다.

윤달은 해와 달의 운행주기가 달라서 생긴 달력의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

끼워 넣은 달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원래 없던 달이 왔다며

윤달 내내 놀고먹으며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때를 별렀다가 ‘푸닥거리’를 한다.

수의를 맞추고, 이장을 하고, 가토를 한다.

열세 번째 달, 원래 없는 달이기에 이때는 귀신도 쉰다는 게 그 이유다.

귀신들에게는 17년에 단 3번 오는 소중한 연차인 셈.

그렇기에 후손들이 무덤을 파헤치는 금기를 범해도 너그러이 봐준다.

한 무속 한다는 우리 집안에서 이 찬스를 그냥 넘길 리 없다.

지력(地力)이 쇄했다고 그동안 말이 많았던 증조부의 산소를 윤달에 이장(移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산소의 제방을 쌓으러 가는 것이다.

제목이 북두칠성 이야기인데 난 또 왜 푸닥거리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건가?

난생 처음 보는 이장 과정 중에 내 눈길을 끌었던 ‘칠성판’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칠성판은 시신을 누이는 널빤지이다.

2미터 정도 길이의 널빤지에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을 따라 구멍을 뚫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다.

칠성판을 무덤에 함께 매장하는 이유는

망자의 영혼이 무사히 저승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기 위함이란다.

우리에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하늘로 돌아간다는 아름다운(?)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북두칠성일까?

북두칠성은 망자들의 영혼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북두칠성은 우리네 민속 신앙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별자리다.

정화수 한 사발을 떠놓고 기도를 올리던 그 옛날 어머님들은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또한, 사찰에 들어서 일주문 지나 대웅전 지나 후미진 곳 깊숙이 올라가면

칠성신을 모셔놓은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이란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신을 모시는 곳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뿌리 내리며 도교 성향의 토착신앙을 수용한 결과물이다.

이렇듯 북두칠성은 오랜 시간 동안 민중들의 삶과 함께 해 온 별이다.

왜 북두칠성은 민중들에게 그와 같은 호응을 받았을까?

그리고 우리에게 북두칠성은 어떤 의미였을까?

함께 북두칠성의 일곱별을 향해 여행을 떠나보자!

<삼신할미와 고인돌>

북두칠성은 생사를 주관하는 별자리이다.

우리의 삶은 북두칠성에서 시작되어 북두칠성으로 끝난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우리네 어머님들의 정화수는

칠성신(七星神)에게 기도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누구나 한번쯤 전래동화의 한 대목에서 이런 대목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신께 비나이다!

이 늙은 부부를 불쌍히 여기시어 부디 옥동자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옛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북두칠성과 남두육성(南斗六星)의 연계 플레이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두육성은 여름철 별자리로 서양 별자리로는 “궁수자리”의 일부 별들이다.

여섯 개의 별이 마치 미니 북두칠성처럼 국자 모양으로 연이어 있다.

남쪽의 국자 별이라는 의미로 그 이름을 남두육성이라 하는데,

이게 그 유명한 ‘삼신할머니’의 별이다.

자식을 바라는 인간의 정성이 북두칠성에 응하면

새로 태어날 영혼은 북두칠성의 협력업체 격인 남두육성으로 간다.

거기서 삼신할머니께 엉덩이를 찰싹 얻어맞고

어머니의 태(胎)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기 엉덩이의 몽고반점은 이때 생긴 멍자욱인데

이게 전생의 기억을 잊게 하는 역할을 한단다.

그래서 맞을 때 시퍼런 자국이 남도록 아주 제대로 맞아 주어야 한다.

남두육성과의 협력 하에 인간의 탄생을 주관하기도 하지만,

북두칠성의 주 업무를 굳이 따지자면 ‘죽음’이다.

북두칠성에 거하는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을 주관한다.

이런 전설이 있다.

중국 위나라에 관로라고 하는 점성술의 대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밭에서 땀 흘려 일하고 있는 안초라는 청년을 만나는데,

얼굴을 보니 곧 죽을 운명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안초를 불러 말했다.

"모월 모일 밭가 뽕나무 아래에 가면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을 테니,

그 옆에 앉아 술을 따르고 시중을 들어라."

안초는 뽕나무 아래 바둑을 두는 두 노인을 찾아 고이 술시중을 들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노인은 수명을 기록한 명부를 뒤져

‘十九’를 ‘九十’으로 뒤집어 주었고, 소년은 90살까지 오래 오래 살았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두 노인이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의 신령이다.

남쪽에 앉은 이가 남두육성, 북쪽에 앉은 이가 북두칠성의 신인데,

남두의 신은 삶을 관장하여 탄생일을 기록하고,

북두의 신은 죽음을 관장하여 사망일을 기록한다.

둘이 나란히 생사의 끈을 쥐고 있지만 북두의 신이 좀 더 끗발이 셌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문제가 보다 민감한 것이었던 것.

동양인들의 정서 상 태어난 이상 수명을 충분히 누리며 사는 게

지복이라는 인식이 작용하기도 했으리라.

이것이 북두칠성이 그 오랜 시간 구복(求福)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다.

북두칠성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을 인간의 죽음과 함께 했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을 살펴보면

북두칠성 별자리를 새겨 놓은 문양이 남아 있다.

고분의 무덤 천정에도 북두칠성의 그림이 있다.

이 풍습이 오늘날의 칠성판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인간은 북두칠성을 통해 세상에 나와 살다가

죽으면 다시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

삶과 죽음은 끝없는 순환의 고리로 잇대어 있다는 것.

억겁의 세월 동안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공유해 온 것이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Uroboros) 상징하듯,

우주는 삶과 죽음의 끝없는 순환 고리를 이루며 돌고 돈다.

그것이 우주의 시간이다.

여기서 북두칠성은 끝없이 이어지는 생사의 고리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다.

<북두칠성, 천자의 수레가 되다>

언제부터 우리는 북두칠성과 함께 했을까?

그 시원을 찾아 거슬러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중국 최초의 문자 기록에 이미 북두칠성에 대한 언급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시절부터 우린 북두칠성과 함께 살아 온 것이다.

물론 시절이 바뀌고,

그와 함께 신봉하던 사상이 바뀌면서 북두칠성의 의미는 조금씩 변해왔다.

사람들은 그 시대의 감각으로 북두칠성을 보았고,

그때마다 북두칠성은 각기 다른 색깔로 채색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하늘의 핵심 별자리로

인간의 세계를 주관한다는 생각만은 변함이 없었다.

진한시대에 북두칠성은 천자의 통치행위를 상징하는 별이었다.

중원 통일의 꿈을 이룬 뒤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던 시대배경에 따른 것이었다.

북두칠성은 주극성(週極星)이다.

주극성이란 사철 내내 온 밤을 밝히며 지지 않는 별을 일컫는다.

이름 그대로 북극성(極)주변을 도는(週)별들이다.

북극성과 북쪽 지평선을 반지름 삼아 천구에 가상의 원을 그리면

이 안에 들어오는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일주하는 주극성이 된다.

이 범위 안의 별들은 절대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므로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동양에서는 이를 자미원(紫微垣)이라 칭했다.

북두칠성은 그 안에 속하는 별자리다.

끊임없이 사방위를 도는 이 별을 사람들은 우주 질서의 주재자라 여겼고,

정치의 모델로 삼았다.

중국에서는 이 별을 천자를 싣고 달리는 수레 모양이라 생각했다.

북두칠성이 사방위를 주유하며 사시와 오행의 질서를 세우듯이,

천자는 중원 영토의 사방을 순행하며 정치 질서를 건립했다.

북두칠성이 우주의 기틀이 되는 별자리이기 위해선

우주의 규범 원리를 아우르는 상징적 의미를 포함해야 했다.

사람들은 북두칠성을 우주론의 기본 뼈대가 되는

“음양오행”을 명시하는 별자리로 인식했다.

음양(陰陽)이란 무엇인가?

천체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음양은 곧 해와 달이다.

해와 달로 인해 낮과 밤의 교대가 생기고 여기서 하루라는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또는 음양은 하늘과 땅(天地)이라는 상하의 공간적 격차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벼운 양의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을 이루고

무거운 음의 기운은 아래에 엉겨서 땅이 된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경우건

음양은 하나의 태극(太極)이 역동하면서 생긴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둘로 나뉘는 성질의 것이 아닌 고로,

‘1=2’라는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오행(五行)역시 마찬가지.

오행은 하나의 태극(太極)을 조금 더 클로즈 업 해, 다섯 스텝으로 나눈 것이다.

오행은 사계절의 교대와 생장수장(生長收藏)의 네 국면에서 출발했다.

이것이 사상(四象)의 시간적 의미다.

오행은 이 시간적 의미에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위(四方位)라는 공간적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이때 오(五)라는 수는 그 순환운동의 회전축을 더한 것이다.

사상의 네 국면은 정지·분할된 각각의 컷들이 아니라 상호 순환하는 질서의 산물이다.

시간으로 보면 사계절과 각 계절 사이의 마디, 공간으로 보면 사방위와 그 중앙,

천체로는 수금화목토의 오성(五星). 이것이 곧 오행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行)이란 움직인다는 의미다.

그것도 삐걱삐걱 절룩이며 걸어가는 모양이다.

한 발을 들고 깽깽이로(亍)비틀거리며 걷는 모양(彳) 곧 행(行) 것이다.

어긋남과 충돌, 그 많은 사건의 와중에도 우주는 쉼 없이 돌고 돈다.

그렇기에 이 역시 하나의 태극(太極) 다르지 않다.

수식으로 나타내면 ‘1=2=5’라는 희한한 모양새가 연출된다.

자, 그렇다면 이 수만 가지 우주질서를 모두 아울러 질서화 한 것이

북두칠성이 의미하는 수(數)7이다.

럭키세븐의 그 7도 여기서 나온 건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동양에서 7이란 수는 곧 음양(2)과 오행(5) 결합체이며,

우주 질서의 상징이었다.

이는 음양이 나타내는 상하(上下), 오행이 나타내는 사방(四方)과 중앙(中央),

즉 3차원의 시공간을 표상한 것이다.

혹은 일월(日月) 오성(五星) 조화를 이루는 천체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수식으로 하면 ‘1=2=5=7’이다.

<이 알 수 없는 글자들과 괘들의 향연.

맞다. 요게 음양오행의 정수를 한 눈에 보여주는 그림이다.>

사마천은 『천관서』에서

“북두칠성은 이른바 선기옥형(璇璣玉衡)으로 칠정(七政)을 다스림을 일컫는다.”

고 기록하고 있다.

선기옥형이란 아름다운 옥구슬로 된 저울대라는 뜻이다.

이 저울의 용도는 하늘의 기틀을 세우는 것이다.

해와 달과 오성(五星)의 질서, 하늘의 음양과 오행을 주관한다.

나아가 음양오행에 의해 행해지는 만사의 일들을 다스리기도 한다.

그래서 “칠정(七政)을 다스리는 별이란 직함을 얻었다.

이렇듯 북두칠성은 우주 질서의 근간이었다.

자연 현상과 정치질서를 아우르는 세계 질서의 총체가 그 안에 있다.

진한시대의 사람들은 이 수레의 바가지에 탑승한 천자를 상상했다.

그는 곧 세상의 어지러운 질서를 바로잡는 존재였다.

<북두칠성은 일곱이 아니다>


한편 한무제가 유학을 국가의 중심 사상으로 천명하면서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 도가들은 북두칠성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키워갔다.

한대의 우주론은 중앙 집중형 관료시스템이

어떻게 하면 순조롭게 운행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모든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인간의 현세적인 욕망이나 종교적 요구들이 제기될 통로들을 철저히 봉쇄했다.

이에 도가 사상은 한대의 지고한 정치 문화와는 다른 출구를 모색했다.

유가들의 천문학이 일종의 국가 경영 지침서였다면,

도가들은 개인의 몸과 운명을 주관하는 점성적인 의미로

나름의 우주론을 구축해 나간 셈이다.

후한이 망하고 육조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들의 활동은 탄력을 받았다.

불교가 유입되어 도교와 서로 습합되면서

국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우주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 졌다.

그 합작품이 바로 칠성신앙이다.

이와 더불어 중국 천문학은 개인의 수행과 구복이라는 쪽으로 무게 중심이 기울었다.

북두칠성의 일곱 별 각각은 천지 우주의 구성 원리이다.

모든 존재들은 다 그 별들과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태어난다.

이때 일곱별의 기운을 고루 받은 존재는

그렇지 않은 존재보다 생의 지복을 훨씬 잘 누린다.

나는 그 중 어느 별의 기운을 타고 났는가?

지금 이 시대는 어떤 별의 영향 하에 굴러가는가?

이런 식으로 북두칠성의 해석은 점성학적인 방향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북두칠성이다. 그런데 저기 여섯 번째에 빛나는 저 별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북두칠성의 자루 부분을 표(杓)라 하고 머리 부분을 괴(魁)라 한다.

그중 괴의 첫 머리에 있는 별이 1성이 되고 자루 끝에 있는 별이 7성이 된다.

1성부터 순서대로 천추성-천선성-천기성-천권성-옥형성-개양성-요광성으로 불린다.

각각의 별들은 그 이름에 맞는 점성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12지지에 배속되어 그 년에 태어난 사람들의 운을 주관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중 제 6성인 개양성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한다.

이 별은 ‘북두칠성은 일곱이 아니다’라는

당혹스런 주장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의 수 7이 얼마나 중요한 상징인지 이제껏 그토록 힘주어 주장했는데,

일곱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되냔 말이다.

고대 로마에서 군인을 뽑을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장교 지망생의 시험 과목중 하나가 별 보기였다.

그들은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향해서 물었다.

‘저게 몇 개로 보이니?’

놀랍게도 일곱이라 말하면 탈락이고, 여덟이라고 말해야 합격이었다.

대체 이 무슨 일인가?

그들의 말이 맞다.

육안으로 관찰되는 북두칠성의 별은 일곱이 아니라 여덟이란다.

제 6성인 개양성, 서양에서 미자르(Mizar)라 불렀던 이 별은

단일한 별이 아니라 이중성이다.

눈 좋은 사람에겐 그와 나란히 늘어선 보성(輔星),

서양식 이름으로는 알코르(Alcor)가 보인다.

북두칠성을 북두팔성이라 개명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도가들은 아예 한 발 더 나아가

북두칠성이 아예 아홉 개라고 주장하기 이르렀다.

보성 옆에 필성(弼星)이라는 또 하나의 별이 있다!

이 황당한 주장을 점검하기 위해 북두칠성으로 정밀한 천체 망원경을 향해보면

진짜로 개양성과 나란히 빛나고 있는 두 개의 별이 관측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밀 분광기를 동원해서야 관측되는 사실,

아무리 도를 닦은 도가 수행자라 해도

맨눈으로 이 별을 분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무슨 근거로 북두칠성이 아홉이라는 북두구진 체계를 만들어 냈을까?

비결은 염력도 투시력도 아닌 고도의 상수학이다.

바로 도가들에게는 7보다 9라는 수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7은 음양오행의 담지자이자 완전한 공간을 표상하는 수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아직 그 자체로 완전한 수는 아니다.

동양에서 완전수의 지위를 가지는 것은 9라는 수이다.

9라는 수는 이보다 더 큰 수가 없다는 완전수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 불교사상의 영향이 가세하면서

생사의 경계를 넘는 억겁의 시간을 또한 고려해야 한다는 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불교의 윤회 사상의 영향으로 확장된 시간적 스케일은

3차원의 벡터 7에 선후(先後)라는 시간적 의미를 포함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숫자 9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시공간의 벡터다.

결국 우주의 중심축으로서 일곱이 아닌 아홉 개의 별이 요구되었던 것이고,

이에 두 별을 추가해 북두구진(北斗九辰)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도가들은 북두칠성을 일곱 현자와 두 명의 은자가 주관하는

칠현이은(七賢二隱)의 별이라 상상했다.

보이지 않는 두 별의 가세가 있어야 만이

완벽한 우주질서를 표상하는 별이 된다는 것이다.

보이는 현상의 세계가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작용하는 그 무언가의 존재를 인식할 때

비로소 우주 질서를 올바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내재된 생명 원리를 이해하고 거기 부합하는 삶을 살려 했던 도가다운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여기서도 북두칠성은 우주 질서의 주재자였다.

사시사철 지지 않고 밤하늘을 밝히는 주극성으로서의 지위는

이 별에게 “영원”의 타이틀을 부여했다.

억겁의 세월을 거듭 하며 북두칠성은 저 하늘 위를 밝혀왔을 것이다.

사람들은 거기서 무상한 생사의 모래바람에 쓸려가지 않을 진리

혹은 질서를 발견하려 했다.

북두칠성의 답은 ‘거듭되는 순환’이었다.

계절마다 자리를 달리하며 우리에게 사시의 질서를 알려주던 별자리,

이 사계절의 흐름과 더불어 동서남북의 방위를 알려주던 별자리,

매 시각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밤하늘의 시계바늘 역할을 하던 별자리,

북두칠성은 시계바늘이자, 달력이자, 나침반이었다.

거듭되는 순환의 주기 속에 우주의 시공간을 담아내고 있었다.

영원의 별로 자리매김한 우주의 시계바늘, 북두칠성. 나에게 이 별은 어떤 의미일까?

북두칠성은 지금도 하늘 어딘가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을 것이다.

<동양 별자리는 왜 복잡하고 지루한가>

2주라는 시간은 대체 어떻게 흐르는 건지, 어느덧 마감이다!

원고는 아무리 해도 제자리걸음이고,

나의 전담 편집자인 류도사는 원고를 팽개치고 휴가를 떠나버렸다.

이 총체적인 난국의 상황에,

왜 나의 손은 키보드 자판이 아니라 마우스로 향하는 것인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웹툰이나 스포츠 뉴스 따위를 클릭하고 있다.

방금 전에는 네이버의 별자리 점을 클릭하고 있는 날 발견하고 소스라쳤다.

이게 될 말인가!

동양 별자리 연재를 맡은 작자가 원고는 안 쓰고, 서양 별점 타령이라니.

그런데 그 잠깐의 순간에 탄복할만한 일이 벌어졌다.

황소자리, 8월 15일 운세, 거기 이렇게 나와 있었던 것.

“요즘의 당신은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일을 가지고

오랫동안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입니다. ... 한시름 놓고 휴식을 취하도록 하세요.”


시원한 장대비처럼 타들어가는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한 마디이다.

용하도다, 별자리 점이여! 명쾌하고 실용적이도다,

서양 별자리여! 신앙심이 절로 샘솟는구나!

하지만 내가 앞으로 써야 할 동양 별자리 이야기를 생각하면

참 속 쓰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네 동양별자리에는 왜 이 한 방이 없을까?

낡고 고리타분할 뿐만 아니라 이미 그 명맥이 끊긴지 오래인 동양 별자리.

본격적으로 동양 별자리 28수 이야기를 꺼내야 할 시점에,

동양 별자리는 왜 이다지도 복잡하고 지루한가라는,

딴에는 절박하고도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서두를 열고자 한다

확실히 동양 별자리는 남다른 면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을 종횡무진 누비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인도의 천문학이

골고루 버무려져 생겨난 서양의 별자리 체계와 달리

중국의 천문학은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

독자적으로 확립된 문명체계라니 참으로 감탄할 만한 일인 듯하다.

그런데 양손에 동서의 별자리 체계를 올려놓고 비교해 보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몇 가지 사실이 눈에 띤다.

동양의 별자리에서는 밝게 빛나는 예쁜 별들 말고

굳이 흐리고 어두운 별들을 별자리로 묶고 있다.

또 별자리 간의 구역 구분도 들쭉날쭉 이다.

별자리의 탄생 신화도 희박하다.

모양새가 기하학적으로도 근사하지도 않다.

언뜻 보기에 엿장수 맘대로 그어 놓은 낙서 같기도 하고,

누가 악의적으로 망쳐놓은 지도 같기도 하다.

대체 누가, 왜 이런 별자리 체계를 만들어 낸 것인가?


여기에 답하기 위해, 잠자고 있는 중국 천문학을 깨워,

별자리의 탄생에 얽힌 묵은 비화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양 별자리가 결코 열등하다거나

덜 유용하다거나 하지 않다는 얘기를 해야겠지.^^ 갈 길이 멀다!

동양별자리는 각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조금 긴 인트로를 필요로 한다.

동양 별자리의 특수성을 인식해야 한다.

각론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서양 별자리랑 완전히 다른 지반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제까지 우리가 늘 해왔던 얘기,

동양의 고대 천문학은 일종의 우주 종교로 출발했다는 점을 기억하고 시작하자.

<동양 별자리의 탄생 -중국 천문학과 적도좌표계>

기우(杞憂)라는 말을 알 것이다.

기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 걱정했다는 ‘기인지우(杞人之憂)’의 줄임말이다.

쓸데없는 걱정, 안 해도 될 근심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우리는 이 얘기를 들으며 옛 사람들은 이다지도 어리석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앞날을 걱정하며 쓸데없는 걱정으로 발을 동동거리는 건

첨단의 문명을 갖춘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른 버전의 기우에 시달리며 살 뿐이다.

오존층이 뚫려서 지구가 타 들어가면 어쩌나

(풍수지리에 의하면 작년부터 인류는 소빙하기에 접어들었단다)

말로만 듣던 ‘서울 불바다설’이 현실이 되면 어쩌나(그럴까 과연?)

고리 원전이 저러다 터져버리는 건 아닌가(음.. 이건 가능한 시나리오다)하는 등.

고대인과 현대인을 막론하고 인간에겐 뿌리 깊은 불안이 내재해 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세상이 진짜 갈 데 까지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고대인들은 태양이 미쳐버린 나머지

계절의 순환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게 최고의 걱정거리였다고 한다.

이 더위가 계속된다고 생각해 보라.

아니면 봄이 오지 않고 살을 에는 추위가 계속 된다고 생각해보라.

전쟁이 세상을 폐허로 만들어도, 수해가 산천을 할퀴고 지나가도

세상은 놀라운 재생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우주의 ‘순환’이 이대로 멈춰버린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리다.

그야말로 세상이 끝장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문명은 공통적으로 우주의 순환을 기리는 우주종교를 보유하고 있다.

이때 천문학은 하늘과 소통하기 위한 창구가 되어 주었다.

중국을 제외한 여타의 문명에서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늘을 봤다.

생명의 원천이자 가장 명징한 순환의 질서를 보여주는 하늘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우주의 순환과 계절의 주재자로 그들은 태양에 포커스를 맞췄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아니었다. 왜일까?

일찍이 고도의 농경문명을 이룩한 그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양치기들도 우러러 본 태양을 왜 이리도 홀대한 것인지……. 

이 문제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구성하는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고대 천문학자들은 그 계절의 지표가 될 만한 별을 찾아 별자리로 엮어냈다.

정확한 관측을 위해 일출전이나 일몰 직후 태양 근처에 있는 별들을 관찰하려 했다.

유명한 별, ‘시리우스(Sirius)’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집트에서는 이 별이 태양과 함께 동쪽 하늘에 떠오르면

대지의 어머니 나일 강의 범람기가 임박했다는 전조로 읽었다.

대부분의 고대 문명에서 이런 식으로 별자리를 구성했다.

이는 참으로 속편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태양의 길을 읽은 후

그 근처에 있는 환하고 잘빠진 별들로 별자리를 엮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지의 천문학의 뼈대가 되는 “황도 좌표계”의 기원이다.

중국의 경우를 보자.

이들이라고 생명의 원천인 태양을 도외시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한 술 더 떠 태양에 대해 아주 제대로 알아내려 했다.

태양과 별들 그리고 관측자인 나의 위치를 엄밀하게 규정해내려 했다.

그러기 위해 이들은 태양 반대편에 있는 별을 관측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를 알기 위해 우주를 엄밀하게 구조화 해 내려 했다.

확실히 중국인들은 고생을 자처한 감이 있다.

<시리우스는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이다. 큰 개 자리에 배속되어 있다>

중국인들에게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하늘의 극과 주극성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들은 북쪽 하늘의 극과 그 반대편을 극을 연결해

하늘을 구조화 한 천구(天球)라는 가상의 구에 중심축을 만들어 냈다.

이게 자오선(子午線)이다.

(여기서 우주와 인간을 관련짓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관념이 나왔다.

중국인들은 하늘의 북극은 지상에서의 황제와 같고,

나머지 주변에는 제후국과 같은 별들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천구에 지구의 적도에 상응하는 가로선을 그으면 그게 하늘의 적도가 된다.

그러면 북극과 적도 사이의 공간을 분절해

천구에 우산살 같은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다.

이걸 업계 용어로 시간권(時間圈)이라 하는데

중국인들은 시간권이 적도를 나누는 점에 의해 정의되는 “적도좌표계”를 만들었다.

28수는 오렌지 조각처럼 나뉜 천구의 영역을 기준으로 뽑힌 별들이다.

여기서 밝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우주의 구조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중국의 복잡하고 모호한 별자리 체계가 대체 뭣 때문이었는지

대략 그 실체가 드러난다.

틀이 이리도 확고하니 별자리의 모냥새가 떨어지고 자잘할 수밖에.

게다가 28수 별자리를 제후국으로 여겼기에

제후국스럽게 파편화된 모양새로 그려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하늘을 분할함으로써 우주의 구조를 파악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즉자적인 관측에 머물지 않고 구조화와 하늘의 분할에 골몰했다.

지구상의 관찰자에게 하늘의 일부만 보인다 해도 그들은 나머지 별자리,

즉 28수의 전체 구조를 알았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어디에 태양이 위치해 있는지 마저 알았다.

보이지 않는 별들 사이의 태양의 위치,

지금 우리로선 이런 해괴한 걸 대체 왜 알아내려 하는지 의아할 뿐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이건 참으로 근본적인 문제였다.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

제후국인 28수의 그 어디를 지나고 있는가 라는 정치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중국 천문학 우습게 볼 일 아니다.

우리의 통념과 달리 중국의 천문학은 고도의 기하학과 질서체계를 보유하고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28수의 탄생>

적도좌표계를 택한 것은 어떤 점에서는 공교로운 선택이었다.

지구가 구형이라는 것도, 지축이 기울어 있다는 것도 일찌감치 간파한 그들이었지만, 지축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뒤뚱거리며 돌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업계용어로 이를 세차운동(歲差運動)이라 한다.

마치 팽이의 회전축이 빙그르 도는 것 같이 자전운동을 하고 있는 지구의 자오선이

26,000년을 주기로 원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 과학시간에 존 사람들,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놀랄 것이다.

아마 진한 무렵의 중국인들이 이 얘기를 듣는다면 당장에 내 멱살을 잡을게 분명하다.

그들에게 북극이란 천자의 상징이자

우주의 영원성을 담지하는 확고부동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주의 영원불멸에 관한 일종의 신앙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달리 공교롭게도 북극성은 계속 변해왔다.

공자가 말한 북극성이 우리가 보는 저 북극성이 아니고,

역사상 북극성이 두 개가 되었던 적도 있다.


세차운동 덕분에 28수도 일그러졌다.

28수란 주대로부터 진한대에 이르는 시기의 사람들이

당대의 북극성인 제성(帝聖, Kochab)을 중심으로

체계화 한 별자리 체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축이 빙그르 돌면서

이와 함께 하늘의 28수도 당시 사람들이 맞춰놓은 정교한 틀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그들이 얼마나 공을 들여 28수라는 정교한 별자리 체계를 만들어 놓았는지를 알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세차운동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먼저 동양 별자리는 왜 28개일까?

수의 상형자를 살펴보면 거적으로 만든 작은 오두막의 모습이다.

이에 머무른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하늘에 있는 이 별들은 고속도로의 각 지점들마다 드문드문 있는 휴게소들처럼,

태양이나 달, 그리고 행성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쉼터로 인식되었다.

밤에 가장 밝게 빛나는 천체는 달이다.

곧 달은 밤의 주인이다.

그렇기에 달에 대해서는 특별대우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쉼터의 개수를 달의 운행 주기인 28에 맞춘 것이다.

이 28개의 별자리는 다시 네 개의 궁에 일곱 개씩 배당된다.

이들을 담는 궁은 사계절에 대응되고,

여기에 중앙의 주극성의 영역을 의미하는 3원(垣)이 추가된다.

그리하여 하늘은 크게 다섯 영역으로 나뉘는 데, 이는 오행(五行) 나타내는 것이다.

별들이 일곱 개씩 배당된 이유는 우주의 시계바늘 북두칠성의 수를 본뜬 것이다.

북두칠성의 7은 음양의 2와 오행의 5가 합쳐진 것이니,

이들 28수는 그야말로 우주의 구조에 의해 분할 된 셈이다.

우주의 구조화를 통해 광대무변한 하늘의 영역을 임의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통한다.

그들은 땅을 나누고 인간의 세계를 나누듯이 하늘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 분류체계를 통해 하늘 땅 인간이 하나로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궁극으로 밀고 간 것이 진한대의 시대적 조류였다.

동서남북의 사방위와 그 모서리를 합하면 여덟 개의 방위가 나온다.

이 팔 방위를 기준으로 땅과 하늘을 헤아렸다.

당대인들은 하늘과 땅의 팔방위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고 생각했고 이는 곧

8개의 기본 절기(동지, 하지, 추분, 춘분,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의 기운을 의미한다.

이 바람이 생명의 근간이 되는 기(氣)가 된다고 생각했다.

계절과 방위에 응하여 만들어지는 기가 곧 우주의 시간 질서가 된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문명은 여기 착안해 구축되었다.

시간 질서인 역(曆)은 우주의 팔풍을 기본 골자로 해서 짜여진 것이다.

바람의 운율이 시간의 근본이 되기에

여타의 다른 문명 제도도 우주 질서의 근간을 본받게 된다.

사마천의 『사기』는 이러한 천인감응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는 팔풍에 착안해 우주의 리듬인 율(律)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제도의 핵심인 예악의 근본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입각해 천지의 기운 변화에 상응하는

정치 교화가 시행되어야 한다고 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우주의 리듬을 이어받은 문명과 제도를 구축하려 했던

고대 중국인들의 고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의 무상함은,

그리고 우주의 광대무변한 변화의 원리는 이들의 자취를 지워가며 흘러갔다.

애써 이룩한 문명은 쇄락했고, 정교한 우주질서는 어긋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우주의 깊은 울림에 자기 삶을 일치시키려던

고대인들의 겸허한 노력의 흔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우주의 바람이 만들어 낸 깊은 울림이 뭇 생명과 역사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다는 생각.

앞으로 별자리 서당에서는

28수 안에 녹아있는 고대 중국인들의 혜안을 추적해보려 한다.

<가을 별자리 이야기>

페가수스 빙의

태풍 볼라벤이 지나갔다.

태풍이 불어 닥친 28일 서울은 유령의 도시 같았다.

행인들이 종적을 감춘 시가지,

사람들은 창문마다 부적처럼 X자를 쳐놓고 그분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다.

강풍에 갸냘픈 여우비를 흩날리던 그 이름도 요상한 태풍 볼라벤은

몇 개의 전봇대와 가로수, 간판과 함께 ‘천안함 아군 기뢰에 의해 침몰’이라는

놀랄 만한 이슈 하나를 사뿐히 즈려 밟고 지나가셨다.

‘최악의 것이 온다’며 온갖 매체가 헐리웃 영화 카피처럼 입을 모았고,

상황도 헐리웃 영화 식으로 허망하게 종료되었다.

공포감 조성, 매체 장악... 어딘지 좀 식상하면서,

한편으로 구린내가 풍기는 시나리오다.

사람들은 X자로 봉쇄한 방안에서 실시간 이슈를 클릭했고,

기대만큼의 스펙터클이 연출되지 않자

제주도 조랑말이 태풍에 날아다닌다며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제주도 조랑말 페가수스 빙의!”

조랑말이 태풍에 날린다는 뻥도 참 놀랍기 그지없지만,

거기다 페가수스를 갖다 붙인 신화적 감각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페가수스를 아는가!

날개달린 말 페가수스, 우리말로는 천마(天馬)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참 인연이 깊은 심볼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을 씹고 아련한 회상에 빠져들듯,

“제주도 조랑말 페가수스 빙의!”라는 기사를 앞에 두고

나는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단양 사람이다.

석회석의 고장 단양.

파란색 천마를 로고로 삼은 모 시멘트 회사는 단양의 몇 안 돼는 밥줄이다.

나 어릴 적엔 단양 읍내의 거리엔

새마을 마크와 나란히 푸른 천마 로고가 그려진 담장이 늘어서 있었다.

봄이 되면 시멘트를 만들고 남은 석회를 농가에 무상 배급해 주는데,

이 날 마을은 거의 축제분위기다.

그 구원의 푸대 자루엔 날개 돋친 푸른 말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천마는 곧 단양의 상징이다.

나 역시 천마가 그려진 성냥으로 담배를 배우고,

천마가 그려진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천마 그림이 그려진 시멘트 푸대를 져 날라 밥을 벌어먹던, 천마의 후예다.

생전에 말이라곤 몇 번 본적도 없는 내가 비상하는 천마 그림 앞에서

아련한 고향의 향수를 느끼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던 것이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추억의 페가수스는 태풍 볼라벤과 함께 내게로 엄습해왔다.

하지만 정작 나는 페가수스에 대해 아는 바 없다.

허기를 채우듯 페가수스에 관한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내가 얘기해야 할 가을 별자리와

엄청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말았던 것.(저의 무지를 고백합니다!^^)

페가수스는 어떤 별일까,

그리고 어떤 신화를 담고 있을까?

그리고 정작 내가 얘기해야 할 가을철 동양 별자리와는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자, 함께 내 영혼의 고향 페가수스로,

영롱한 가을철 별자리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네모는 천마다 -페가수스 이야기

고개 들어 하늘을 보자.

요즘은 서울에서도 희미하게나마 별이 보이더라.

선선한 바람에 귀뚜라미 우는 운치 있는 가을밤은 별을 보기 딱 좋은 시기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가을 밤하늘은 별빛이 티미하기로 유명한 때다.

별빛이 강렬하지 않기에 그 별이 다 그 별 같아 보이는 시기가 가을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여기 가을 밤하늘에서 길을 찾는 법을 전격 공개한다.

가을 밤하늘에서는 먼저, 네모를 찾아라.

입추가 되면 해질녘에 반대편 동쪽 하늘에서

태양과 맞교대 하는 네모 별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게 가을철 대표 별자리다.

가을 밤하늘에는 언제나 이 네모 모양의 별자리가 있다.

그래서 이 별을 가을 하늘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를 가을 하늘의 대사각형이라 한다.

이 네모 모양은 페가수스의 3개별과 안드로메다의 별 하나가 만나 이루어진 것이다.

과학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별자리는 하늘의 위치를 찾는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γ별 알게니브와 안드로메다자리 α별을 연장하면

북극성과 춘분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선은 적경 0도 선,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하면 ‘자오선’과 일치한다.

이 선과 하늘의 적도가 만나는 점이 바로 1년의 시작이 되는 춘분점인 것이다.

가을 하늘의 중심인 이 네모를 보고 서구인들은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까?

서구인들은 이 네모가 은하수를 향해 박차고 날아오른 천마

페가수스의 날개와 등짝, 안장이라고 생각했다.

가을 밤 은하수를 향해 질주하는 말이라, 어딘지 쓸쓸해 보이지 않는가?

역시, 예삿말이 아니다 싶었다.

그리스 신화는 사연 있는 말 페가수스의 내막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이 말은 출생부터가 비범하다.

그의 어머니는 메두사요, 아버지는 포세이돈이다.

음양오행에서도 수(水)가 많으면 색을 밝힌다고 보는데,

그리스 신화의 해신(海神) 포세이돈도 음탕하기로 이름난 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섹시한 말의 모습으로 왕년에 절세의 미녀였다는 메두사를 꼬시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을 친 장소가 순수의 상징인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었다.

아테나 여신의 저주를 받아 메두사는 괴녀가 되었고,

급기야 페르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메두사가 죽으며 낳은 자식이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다.

한때 아름다운 처녀였던 어머니를 닮아 눈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백마였다.

<페가수스의 별자리들. 하늘에서 저 별들을 어떻게 찾는담?>

이런 페가수스가 절박하게 날아오르는 몸짓으로

별자리에 붙박이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페가수스는 오만한 왕자 벨레로폰의 소유가 되었다.

페가수스를 얻은 벨레로폰은 신의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고

이에 노한 제우스가 말파리의 독한 침으로 페가수스를 놀라게 해

벨레로폰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스인들은 페가수스의 네모 모양을 보고

오만한 인간을 떨어뜨리는 천상의 말의 몸부림을 연상한 것이다.

하지만 벨레로폰의 수중에 넘어가기 이전까지

페가수스는 고상한 학예의 신인 뮤즈들에게 사랑받던 말이었다.

가을 하늘의 저 네모는 우아한 뮤즈들이 타고 다니던 페가수스의 안장이었다.

참고로 뮤즈는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오직 시만을 담당하는 신이 아니라,

학술과 예술 전반을 담당하는 아홉 여신들이다.

(1-역사는 클레이오, 2-서정시는 에우테르페, 3-희극은 탈레이아,

4-비극은 멜포메네, 5-합창가무는 테릅시코레, 6-독창은 에라토,

7-찬가는 폴리힘니아, 8-천문은 우라니아, 9-서사시는 칼리오페라고 함)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일까.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는 천상과 대지를 오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등에 뮤즈가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인간은 역사, 시, 천문 등의 학예를 통해 대지와 천상을 누비며 세계와 교통하려 한다.

학문과 예술이란 오래전부터 인간이 우주와 감응하며 소통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간혹 야망에 찬 인간이 이를 오용하여 스스로의 파멸을 자처하고 만다는 것.

이것이 페가수스 신화가 전하고 있는 교훈인 것이다.

네모는 왕실과 도서관이다 -실수와 벽수 이야기

동양에서는 ‘가을의 대 사각형’을 어떻게 보았을까?

일단 누가 봐도 네모 모양인데 동양인들은 네모로 안 봤다.

동양인들은 작대기 두 개 라고 보았다.

동양 별자리 무시말자.

옛 선조들이 눈이 뼈서 그런 게 아니다.

별자리의 구성 원리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동양별자리는 적도를 중심으로 균질하게 영역을 분할해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리 밝지 않은 별들로 별자리가 구성되는 한편,

별자리의 분포가 고르고 조밀한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때 분할의 기준이 된 시간권이 네모의 한 가운데를 관통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네모는 하나의 별자리로 묶일 수 있다.

마치 나란히 늘어선 성냥개비처럼 두 개의 작대기가 연이은 형상으로

각각 실수(室宿)와 벽수(壁宿)가 된 것이다.

동양 별자리가 별로 재미는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실수와 벽수에 얽힌 신화도 찾아보기 힘들다.

페가수스 이야기처럼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는 동양에 별로 없다.

그 이유, 동양인들은 28수 별자리를 천자와 제후들의 궁궐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을 다섯 영역으로 나누어 북극과 주극성들의 영역은 천자가 거하는 하늘의 중간,

즉 삼원이라 여겼고,

나머지는 동서남북 네 방위에 따라 각각 제후국들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여겼다.

그 안의 별과 별자리들은 천자와 제후가 기거하는 궁궐과 마차들이라고 여겼다.

각각의 별자리마다 특정한 기능을 관장하는 궁실의 이미지를 덧붙였다.

대신에 그 점성적 의미, 즉 해석의 여지는 보다 넓고 깊다.

<실수의 ‘실(室)’은 집을 뜻한다.

거처나 건물인 태묘(太廟)와 궁실(宮室) 또는 군량을 쌓아두는 곳간을 의미한다.

토목공사에 관한 일을 주관한다.

벽수는 동벽(東壁)이라고도 하여 건물의 벽을 의미하며 문필가의 별자리라고도 한다.

문운(文運)과 도서관 그리고 ‘실수(室宿)’와 같이 토목공사를 주관한다>

먼저 실수(室宿)에 대해 알아보자.

실수는 처서 무렵(8월 23일경)에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별이다.

실(室)은 집이나 방을 의미하는 글자다.

이 별은 글자 뜻 그대로 천자가 기거하는 궁실에 해당한다.

왕실의 태묘라고 보기도 했다.

태묘는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여기서 각종 제의와 의례가 행해진다.

그러기에 이 별은 국운을 점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실수의 대표별인 실성이 밝으면

천자가 쾌적한 곳에 거하고 선대 임금의 넋도 편히 쉴 수 있다.

반대로 실성이 흔들리면 종묘사직이 흔들리게 된다.

실성에 뭔가 변동이 있으면 궁실이 움직이므로

새 궁궐을 짓는 토목공사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실성이 심하게 가려지면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보기도 했다.

나라가 영 어수선 한 요즘,

우리 실성이 과연 안녕하신지 한 번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다.

다음 맞은편의 벽수(壁宿)에 대해 알아보자.

이 별은 백로 무렵(9월 8일 경)에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별이다.

벽(壁)은 역시나 말 그대로 건물의 벽을 뜻하는 글자인데,

여기서는 도서관을 의미하는 별자리라는 의미다.

이 별자리는 하늘의 도서관이었다.

이 별이 밝게 빛나면 천하의 책이 모이고 학문의 도가 이루어지고

현명한 군자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된다.

특히 벽수의 핵심 별자리인 벽성을 이루는 두 별의 밝기가 환하고 균일해야 한다.

흐리거나 둘 사이의 균형이 깨지면 흉조로 여겼다.

벽성이 빛과 조화를 잃으면 임금이 문보다 무를 숭상하게 된다.

그래서 천하의 선비를 천하게 여기고 천하에 서적이 은폐되고

선비들은 은거하는가하면, 무인들이 활개를 치는 시대가 온다고 한다.

군부독재 시대는 끝났지만

천하의 어진 청년들이 손가락을 빨고 있는 청년 실업의 시대,

우리의 벽성은 과연 안녕하신지 하늘을 올려다 볼 일이다.

가을 하늘의 네모가 과연 온전히 보이는가?

흥미로운 것은 동서 공히 가을 하늘의 네모를 보고 학문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게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이라던데,

과연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음양오행으로 가을은 음기가 자라나는 계절,

외적으로 뻗어나가기를 그치고 무르익고, 강밀해지기를 요구하는 시기다.

가을의 음기를 받아 만물은 성숙의 길로 한 걸음 다가간다.

식물은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인간은 성숙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바로 공부다.

공부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해본다.

앞선 선인들의 말씀을 배우며 자기를 고양시키려 한다.

자연의 호흡에 밀착했던 고대인들은 자연히 이 사실을 알았다.

가을은 공부의 계절!

페가수스 신화가 말해주듯,

공부로 나를 연마하는 것이야말로 천지자연과 소통하는 길인 것이다.

가을의 문턱이 열렸다.

북드라망과 함께 이 가을 알찬 공부의 열매를 맺어보자.

추분 무렵의 별자리, 안드로메다 혹은 규수

포스팅에 적당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글은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갔니?”라는 말로 시작해본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우주적 스케일을 가진 신조어가 나왔구나 하고 무릎을 쳤었다.

스케일 탓인지 이 말은 웹상의 신조어들 중에 퍽 생명력이 긴 편이다.

지하철 무슨남과 청담동 무슨녀,

지금은 은퇴한 정치인 모씨 등 숱한 사람들을 수식하는 데 이 표현이 쓰였다.

아마도 안드로메다는

우리 시대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거의 유일한 별일지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안드로메다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처음 이 말을 만든 사람은 왜 하필 안드로메다를 떠올린 것인지.

뭇 사람들이 상실해 버린 개념이 향해 가는 별,

안드로메다는 어떤 별일지.

자!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은 개념의 별 안드로메다이다.

<실제 안드로메다 은하의 모습이란다.

보기만 해도 참 예쁘다.

졸지에 무개념 유배지로 전락해버린 안드로메다가 이렇게 이쁠 줄이야...

은하철도 999에서 메텔이 여길 가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게야~~>

안드로메다는 딱 요즘 철의 별자리이다.

완연한 가을에 접어든 요즘, 절기상으로는 백로와 추분 사이,

해질 무렵 동쪽 하늘위로 지난시간에 살펴본 바 있는 가을철의 대사각형에 뒤이어

솟아오르는 별이 바로 안드로메다이다.

마치 팔다리를 벌리고 춤추는 듯한 사람의 형상을 한 별자리이다.

한 눈에 봐도 사람의 형상이 그려지는지라

안드로메다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먼저 페가수스 사각형, 동양 별자리로는 실수와 벽수를 찾는다.

그중 북동쪽의 모서리,

즉 벽수의 북쪽 별이 안드로메다의 머리인 알파(α)별 알페라츠이다.

그로부터 북동쪽을 향하여 V자가 가로로 놓인 것 같은 모양으로 늘어선 별들이

안드로메다의 팔다리가 된다.

알파(α) 밑으로 델타(δ), 베타(β), 입실론(ε), 감마(γ)별이 늘어선다.

이들 별이 안드로메다 공주의 머리와 몸, 양 발에 해당하고,

델타(δ)별의 좌우로 뻗은 어두운 별들의 라인이 두 팔이 된다.

아래 베타(β)별은 안드로메다의 허리가 되며 여기서 양편으로 두 다리가 갈린다.

흥미로운 것은 안드로메다의 오른편 다리 언저리에 은하가 보인다는 것이다.

베타(β)별에서 북쪽으로 안드로메다의 오른 무릎쯤 되는 뮤(μ)별과 뉴(ν)별로

더듬어 가다보면 뉴(ν)별 근처에 ‘안드로메다 대은하 M31’이 있다.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은하이자

지구가 속한 은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바로 ‘안드로메다 대은하 M31’이다.

가장 가깝고 유명한 은하를 끼고 있다는 점,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가졌다는 점,

이런 이유로 안드로메다는 SF소설의 주 무대가 되기도 했다.

별을 보고 ‘자원’을 떠올리는 우리 시대의 우주관에 가장 부합하는 별이

이 별 안드로메다인 것이다.

안드로메다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별이 되었다.

‘개념이 안드로메다로 갔다’는 말은 아마도 여기서 나온 게 아닐까 한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놓고 천체를 곧 하나의 상징으로 여겼던 옛날 같았으면

‘개념이 자미원으로 갔니’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드로메다의 신화를 알아보자.

안드로메다는 희생양으로 바쳐진 처녀다.

우리나라 민담으로 치면 바리데기 같은 존재다.

그녀는 에티오피아의 공주였다.

포세이돈이 보낸 고래 괴물 케투스가 에티오피아 해안을 유린하자

희생양으로 해안 바위위에 바쳐졌다.

안드로메다는 바리데기보다는 운이 좋았나보다.

염라대왕에게 시집가서 굳은 시집살이를 도맡아 해야 했던 우리네 바리데기와 달리

안드로메다는 지나가던 훈남 페르세우스에 의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여차저차하여 안드로메다는 페르세우스의 부인이 되고,

죽어서 페르세우스 옆에 별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하늘의 별 안드로메다를 가만 보니,

제물로 바쳐져 바위에 포박된 가녀린 처녀의 모습이 연상된다.

재미있게도 안드로메다의 아래에는

바다괴물 케투스를 상징하는 고래자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늠름한 페르세우스가 버티고 서 있다.

이 별자리들에선 안드로메다를 둘러싸고

해안가에서 벌어졌던 급박한 결투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이들이 펼쳐진 가을철의 밤하늘은 흥미진진한 신화가 상영되는 하나의 극장이었다.

문운의 별, 규수

동양별자리로 앵글을 틀어보자.

가을철 대사각형을 따라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별 무리들.

서양인들이 안드로메다라 부른 별들 일부를, 동양에서는 ‘규수(奎宿)’라고 불렀다.

물론 배치도 의미도 전혀 다르다.

규수는 안드로메다의 팔다리 주변 별들을 8자 모양으로 그려냈다.

먼저 이 별의 모양을 노래로 읊은 [보천가]의 한 대목을 들어보자.

허리는 가늘고 머리는 뾰족한 것이 마치 해진 신발 같구나.
열여섯 붉은 별이 둘러서 신발을 만들었네.
<이순지 <천문류초> 중에서>

규수는 무려 열여섯 개나 되는 별들의 모임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안드로메다의 델타(δ)별, 베타(β)별, 뮤(μ)별, 뉴(ν)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노래에서 읊고 있는 것처럼, 뾰족한 신발 모양의 별자리다.

언뜻 보면 삐죽삐죽 날이 솟아 있는 표창이 연상되기도 한다.

혹자는 이를 보고 돼지를 연상하기도 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기 바란다.

규수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동양의 천문학은 점성적인 의미가 강하다.

때문에 별자리의 모습이 뭣처럼 생겼는가라는 점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고대인들에게는 동류가 상응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거나 직접 관련이 없는 사물들도

그 형상이 비슷하면 곧바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여긴 것이다.

만일 이 별을 입술모양이라고 본다면,

이 별은 곧장 입술과 관련된 어떤 일들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면 이 별의 상태를 보고

언어풍속(입술=말) 아니면 성풍속(입술=뽀뽀)따위를 점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규수를 어떤 모양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점성적인 의미는 달라진다.

통상 그 해석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안드로메다가 희생양으로 바쳐진 순결한 처녀의 이미지였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굉장한 동서의 격차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인데,

규수는 첫째 문운(文運) 주관하는 별로 본다.

구불구불 연이은 모양새가 마치 하나의 글자 같다고 하여,

이 별을 문(文)의 상징으로 여긴 것이다.

(奎)란 왕이 직접 쓴 글인 어필(御筆)과 어제(御製)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이 별은 나라의 문운을 점치는 데 쓰인다.

정조의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 이란 이름도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정조는 즉위하던 해인 1776년 규장각을 설치했다.

처음엔 선왕들의 책을 보관하는 왕실 도서관의 성격이었으나

차츰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변했고,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토대가 되어 주었다.

이런 식으로 동양의 별자리는 왕궁의 건축이나 관료조직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별자리를 그 자체로 우주의 궁궐이자 신하로 여겼던

옛 사람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점성학적으로 규수는 문운을 점치는 별이었다.

이 별이 밝으면 나라의 문화가 창성해지고 학문이 번창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문치주의로 유명한 중국의 송나라 때,

규수 주변으로 오성이 모두 모인 적이 있다.

송대가 낳은 성리학의 탁월한 성과와 300년간 이어졌던 송 왕조의 치세는

바로 규수의 기운에 힘입은 것인지 모른다.

지난시간에 살펴본 벽수도 도서관을 상징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벽수와 연이어 있는 규수가 학문과 결부되는 별자리라는 점.

벽수와 규수가 떠오르는 가을철, 확실히 가을은 공부의 계절인가 보다.

독자 여러분, 이 가을을 놓치지 말고 공부합시다!

조금 튀는 감이 없지 않지만, 동시에 이 별은 무기를 주관하는 별이기도 하다.

우리로서는 학문과 무기가 대체 뭔 관계인지 의아할 따름이지만,

점성학적으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일이다.

규수의 생김새가 뾰족한 표창과 같다고 보면,

이 별은 또한 무기를 주관하는 별이라고 해석 된다.

규수는 병란을 점치는 별이었다.

이 별이 움직이거나 혜성에 의해 침범당하면 곧 하늘의 무기창고가 털리는 형국이니,

나라에 병란이 일어나리라 예상했다.

한편 이 별이 돼지의 모양이라고 본 점성가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정말 살 오른 돼지 모양 같다.

그래서 규수에 하늘의 돼지(天豕)라는 별칭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럼 이 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돼지 모양이니까 축산업이랑 관련되겠지 라고 예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대 점성학을 너무 얕본 것이다.

추상과 직관의 힘을 발휘 하시어 한 번 더 생각해 보시라!

12지지 중 돼지는 수(水)기운에 해당한다.

따라서 규성은 나라의 수로나 도랑을 의미했다.

이 별이 어지러우면 홍수가 일어난다던지 수로가 망가진다던지 하는 변고가 생긴다.

특히나 금성이나 화성이 침범하면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이 생긴다.

4대강으로 나라의 하천이 온통 쑥대밭이 된 오늘,

우리의 규수는 과연 안녕하신가!

모두 하늘을 올려 보자.

가을 별자리가 시작되다, 서방백호 7수

규수가 떠오르는 추분 무렵,

이제부터는 바야흐로 가을 별자리의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감이당 수업을 들으며 별자리 이름을 독송하셨던 독자분들,

혹은 필자처럼 신당에 기도 꾀나 하러 다니셨던 분들은 알 것이다.

동양에서는 별자리를 동서남북 사방위의 신에 배속한다.

동방청룡, 북방현무, 서방백호, 남방 주작.

여기에 중앙을 상징하는 3원(垣)이 덧붙으니

하늘의 구역이 크게 다섯으로 나뉘는 셈이다.

그런데 가을철 별자리인 서방백호 칠수는 왜 입추가 아닌 추분부터 떠오르는 걸까?

동양 천문학은 관측 중심이 아니라 구조 중심이다.

10회 차에 연재분에 설명한 바 있지만,

동양의 28수는 하늘을 수리적으로 분할하려는 관심에 의해 탄생했다.

입추엔 이 별이 뜨고 추분엔 저 별이 뜨고 하는 식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속편하게 별자리 지도를 그린 게 아니라,

추상적인 원리를 따라 하늘을 구조화 하려 했다.

분할의 기본 원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오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측되는 시기와는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행이 의미하는 바 그 시기의 천체가 담고 있는 ‘기운’ 과 영향이라는 점에서,

보다 탁월한 해석을 제공한다.

가을은 오행으로 금(金)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금은 거두고 죽이는 숙살(肅殺)의 기운을 감고 있다.

가을이 되면 산천의 초목들은 성장을 멈추고 열매를 맺는데 고심한다.

수렴하는 금의 국면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방위로는 금은 해가 떨어지는 서쪽이다.

서쪽 하늘에 해가 걸릴 무렵 우리는 퇴근을 한다.

금기운을 받아 하루의 결실을 거두는 것이다.

하늘의 별을 나누는 원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늘을 하나의 커다란 구(球)라고 생각했을 때,

여기서 서쪽 방향에 있는 별자리들은 곧 가을의 금기에 배속된다.

그렇기에 이들은 금이 상징하는 숙살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백호라는 동물이 담당한다.

사마천에 따르면

“규수는 호랑이의 꼬리이고 루수 위수 묘수 필수는 호랑이의 몸체이며

자수는 호랑이의 머리와 수염이고 삼수는 호랑이의 앞발에 해당”한다.

<사마천 [천관서]>

이제부터 연재될 서방 백호의 별자리들은

금이 상징하는 수확, 전쟁, 군사 등의 의미가 강하다.

이렇게 보면 서양의 별자리와도 일면 통하는 점이 있다.

서양 별자리가 기대고 있는 신화도

인간이 농사짓고 사냥하며 계절을 살피고 자연과 감응하던 세계관 속에서 나왔다.

서양의 별자리에도

그 별이 뜨는 계절의 성격과 의례에 관한 이미지들이 짙게 녹아들어 있다.

안드로메다는 희생양이다.

희생제의는 주로 추수 무렵인 추분(秋分) 기하여 많이 열린다.

희생제의는 희생물을 바쳐 대지의 신을 달래며

한 해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열렸던 것이다.

동양의 규수의 다른 이름인 천시(天豕),

돼지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건가 찜찜해 한 독자분들이 분명 계시리라.

신화에서 돼지는 대표적인 곡물신으로 나온다.

돼지는 밭의 곡식을 먹어치우는 동물이기에

고대인들의 눈에는 그가 곧 곡물의 주인이라고 비춰졌다.

그래서 돼지를 곡물신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그리스에서도 돼지는 곡물신의 화신이었다.

이런 신화적 이미지가 중국의 별자리 체계에도 반영된 것이리라.

희생양으로 바쳐진 안드로메다를 집어삼키려던 괴물 케투스의 별자리,

고래자리는 동양 별자리로 천창(天倉)과 천균(天囷)이다.

각각 루수와 위수에 속한 별자리들이다.

이들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하늘의 창고, 곳간이라는 뜻이다.

가을은 수확철이고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때,

때문에 이때 하늘에 뜨는 별자리들에 곡식의 수확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금기운이 지배하는 가을철의 밤하늘. 저 하늘의 별들, 그리고 대지의 초목들,

그걸 바라보는 지금-여기의 나.

모두 가을이라는 시공이 가진 금(金)기운에 동참하고 있다.

수확과 결실의 시기. 버리고, 죽이고, 수렴시켜야 하는 때.

저 하늘의 별과 이 땅의 만물,

그리고 나의 몸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옛 사람들은

가을 하늘의 별들을 보고 다르지만 같은 꿈을 펼쳐갔던 것 아닐까?


양자리와 루수와 위수

남산에서 별을 보았다!

유난히 하늘이 맑던 엊그제 밤.

귀뚜라미 우는 가을 숲길을 혼자 터덕터덕 걷다가 고개를 젖혔는데,

머리 위에 선명한 네모 모양의 별자리가 반짝이고 있지 뭔가!

지지난 회 차에 연재했던 가을철의 대사각형, 실수(室宿)와 벽수(壁宿)였다.

야심한 남산 소나무 숲을 퇴근길 삼아 다닌 지 1년 만에

드디어 알아먹을 수 있는 별자리가 나타난 것이다.

남산 중턱에서 운명처럼 마주친 네 개의 별은

뜨거운 화인(火印)처럼 나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듯 했다.

실물이 나으시네요, 라는 말을 이럴 때 써도 좋을지.^^

사진과 그림 속에서 죽은 도형들로 익힌 가을철 별자리들이 살아있는 심장처럼

저 하늘위에 벌떡벌떡 빛나고 있었다.

그간의 포스팅에서 내가 수태 우려먹었던 천인상감(天人相感)이 어떤 것인지

새삼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저 하늘의 별은 이 곳에서 몇 억 광년 떨어진 천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곧 나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나의 두뇌, 나의 심장, 나의 배꼽,

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수한 사건들과 함께 공명하고 있는 운명의 시계추.

하늘과 인간이 응한다는 것은 서로가 나뉘지 않는 하나라는 말이다.

분리된 객체로서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차원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의 리듬으로 동시에 함께 호흡 한다는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개념의 별 안드로메다, 그리고 규수(奎宿)를 더듬더듬 그려나갔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 할 루수(婁宿), 위수(胃宿)에 이르렀다.

<양자리에 위치한다는 벽수! 그러나 봐도 여전히 모르겠는 건...>

서방 백호의 일곱 별자리 중 호랑이 등짝에 해당하는 별자리이다.

(호랑이 새끼라고도 한다.)서양별자리로는 양자리와 겹친다.

양자리로 치면 루수는 양의 머리에 해당하고, 위수는 양의 옆구리 쯤 된다.

서양의 황도 12궁과 동양의 28수에 모두 포함되는 별이니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별일테다.

자~ 이것이 바로 오늘 나의 글감이로구나!

뒷목이 뻐근해져 올 정도로 하늘을 보며

양자리 혹은 호랑이 등짝의 저 별들을 한참을 궁리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

그림빨에 비해 실물이 좀 딸린다!

나의 알량한 상상력으로는 당최 양으로도 호랑이로도 안 보인다.

모양이 근사한 것도, 밝기가 밝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궁금해진다.

밝고 모양 잘 빠진 다른 별들이 주변에 많은데

왜 이 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일까?

궁금증을 잠시 접어 두고, 먼저 별자리 찾는 법을 알려드리리다.

가을철 별자리는 정갈하게 차려진 고향집 밥상 같다.

복잡하지도 강렬하지도 않은 별자리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늘어서 있다.

한 눈에 알아보기 쉬운 별이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난해하지도 않은 게 가을철 별자리의 특징이다.

추석 때 고향 내려가셔서 형제 누이 손잡고 꼭 한 번 찾아보기 바란다.

오늘의 별자리에 도달하기 위해선, 먼저 가을철의 대 사각형을 찾아야 한다.

해질 무렵 동쪽 하늘에 있다가 자정이 되면 남쪽 하늘로 옮겨 온다.

그 중 페가수스 사각형의 동쪽 변인 벽수(壁宿)의 두 별, 즉 벽성(壁星)에 주목하라.

이 두 별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쭉 이동하면,

이들과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는 노란별이 나온다.

이 별이 양자리의 대빵 하말(hamal)이다.

하말을 찾았으면

여기서 서쪽으로 연이어 있는 부지깽이 모양의 나머지 두 별을 찾을 수 있다.

하말부터 순서대로 알파(α), 베타(β), 감마(γ)번호가 매겨져 있고,

베타별은 세라탄(Sheratan)이라고도 부른다.

이 세 별이 서방 백호의 두 번째 별자리 루수(婁宿)이다.

위수(胃宿)는 하말의 북동쪽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별자리다.

밝기는 5등성. 좀 어둡다.

눈물이 시큰 베어나오 게 실눈을 떠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어둡다고 무시하지마라.

이래봬도 양자리의 옆구리, 그리고 서방백호의 세 번째 별자리인 위수(胃宿)란다!

루수(婁宿)는 목줄이다

먼저 루수(婁宿)를 살펴보자. 婁는 ‘끌 루’ 자이다.

트랜순에서『맹자(孟子)를 배우고 있는 동지들께는 익숙한 글자일거다.

『맹자(孟子)의 네 번째 편명이 바로「이루(離婁)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루(離婁)의 밝은 눈과 공수자(公輸子)의 교묘한 기술로도

규구規矩(걸음쇠와 곱자)를 쓰지 않으면 모난 것과 둥근 것을 만들지 못한다.

(離婁之明 公輸子之巧 不以規矩 不能成方員 -『孟子』離婁 上

여기서 몹시 눈이 밝다는 사자성어인 “이루지명(離婁之明)”이 나왔다.

이루란 천안(天眼)을 가졌다고 알려진 전설속의 인물이다.

시력이 어찌나 좋은지 백보나 떨어진 곳의 털끝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이름에 쓰인 루(婁)자는 서방백호의 별자리인 루수(婁宿)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별처럼(婁)밝은 눈으로 멀리 떨어진(離)것을 본다는 데서

아마 이루(離婁)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婁)자는 어떤 것을 잡아끈다는 뜻이다.

여기서 소를 잡아맨다는 뜻도 나왔다.

별자리의 모양을 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목줄이다.

별자리의 생김새가 짐승을 잡아매는 목줄의 모양이니,

이 별은 하늘의 짐승 우리에 해당한다.

옛 사람들은 이 별이 제사에 바쳐질 희생물들을 가둬두는 목장이라고 보았다.

무엇을 가둔다는 의미에서 이 별을 하늘의 감옥으로 보기도 하였다.

목장이건 감옥이건, 어쨌거나 뭘 ‘저장’하는 게 이 별의 역할인 것이다.

루수는 그밖에도 재미있는 5개의 별자리들을 포함하는데,

이들 역시 곡식과 가축의 저장과 관련된 의미다.

루수의 아래에 있는 별자리 중 하나가

지난 회에 고래자리로 이미 소개 된 바 있는 천창(天槍)인데,

이름 그대로 하늘의 창고라는 뜻이다.

그 곁에는 천유(天庾)라는 별자리가 있다.

(庾)는 곳집, 마찬가지로 하늘의 곳간을 뜻하는 별자리다.

루수를 좌우에서 보필하고 있는 좌경(左梗), 우경(右梗)이라는 별자리도 있는데,

그 중 좌경은 산지기요, 우경은 가축을 주관하는 목동이다.

루수의 위에는 무운을 주관하는 천장군이라는 별이 있다.

이 별자리들의 점성적 의미는 이상에 소개된 별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별이 움직이거나 일직선으로 정렬된다거나 오성의 침범을 받는 등의 현상이 일어나면

나라의 곳간이 침범 받는 형국이니 병란이나 내란이 일어나고, 흉년이 찾아들게 된다.

루수는 추분 무렵 밤하늘의 주인공이다.

해질녘에 동쪽하늘에 얼굴을 내밀어 자정이 되면 남쪽하늘에 당당히 버티고 선다.

이 별에 사람들은 가을걷이가 막 시작되는 이즈음 농촌의 풍경을 그려 넣었다.

루수를 통해 우리는 고대인들에게 수확의 시작을 알리는 추분이라는 절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거꾸로 알아 낼 수 있다.

루수의 의미가 희생제의에 쓰이는 동물들을 가둬두던 창고라는 데로 돌아가 보자.

고대인들은 음식을 곧 ‘식량’으로 여기는 우리 현대인들처럼 미개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분명 나의 것이 아닌 생명을 취하는 것이었다.

나의 외부로부터 다른 것을 받아들임으로 계속되는 순환에 참여한다는 것,

이게 그들의 생명관이었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생명관은

주입된 에너지를 그저 소비할 뿐인 주유소 마인드에 가깝지 않은가?

고대인들은 사냥이나 수확의 때가 되면

반드시 먼저 그 원래의 주인에게 예를 표하는 제의를 수행했다.

내가 취해 간만큼 인간도 대지에 제공해야 할 것이 있었다.

희생제의는 어디까지나 대지의 정령과 신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의미를 전하는 자리였지,

우리의 흔한 오해처럼 탐욕스럽고 광기어린 살육의 축제가 아니었다.

루수가 담당하는 역할도 바로 이것, 대지에 대한 감사와 위무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서양의 양자리를 보자.

우연의 일치인가. 양자리 역시 희생제의에서 유래된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신화는 이렇다.

프릭소스(Phrixus)와 헬레(Helle)라는 남매가 있었다.

이들은 왕의 자식이었지만 계모의 아래에서 엄청난 아동학대를 받았다.

우연히 이를 본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남매를 위해 황금 가죽을 가진 숫양을 보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막내 헬레는

그만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해협에 떨어지고 만다.

사람들은 가엾은 헬레를 기리고자 이 해협을 헬레스폰트라 불렀다.

남매를 실어 나른 양은 불미스러운 사고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별자리가 되는 포상을 얻었다.

이게 양자리에 얽힌 이야기의 전말이다.

무지하게 운 좋은 양이지 싶다.

어린 애를 물에 빠뜨려 죽게 했으면 업무상 과실치사다.

금고형을 당해도 모자랄 판에 황도 12궁의 당당한 별자리로 올라가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이 중요한 별자리에 누가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짜 맞춘 것일까?

이 이야기 유래는 희생양의 신화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헐리웃 영화 식의 비장한 구출씬으로 윤색되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애초에는 희생제물로 바쳐진 양과 왕의 자식에 관한 이야기였으리라.

고대인들은 인신공희에 바쳐질 제물을 택할 때 아무나 만만한 상대를 고르지 않았다.

인간 희생양은 신을 표상할 수 있는 특별하고 이례적인 존재들 중에서 택해졌다.

그런점에서 왕의 자제들은 제물이 되기에 적격이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구출된 것이 아니라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올림푸스 산맥 근처의 프릭소스 지방에서

신에게 헌납된 희생 제물 중 하나가 바다 건너

멀리 흑해 연안의 콜키스(Colchis)지방까지 떠내려 간 그리스 판 엑소더스 신화.

양자리이건 동양의 루수이건 이 별이 희생제의와 관련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첫 수확물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 쥘 줄 알았던 고대인들.

내가 획득한 삶의 몫만큼 또한 죽음을 치러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지혜.

낡은 기존의 내가 먼저 죽어야 새로운 삶의 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았던 고대인들.

낯설게만 느껴지는 고대의 희생제의에는

잉여 없는 순환의 장 속에 살았던 고대인의 지혜로운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

위수는 밥줄이다

다음은 위수(胃宿)를 살펴볼 차례.

북방 현무의 다섯 번째 별자리인 위수(危宿)와 구분하기 위해

‘밥통’ 위수라고 흔히 부른다.

(胃)는 우리 몸의 소화기관 위장을 말한다.

우리 몸의 깊은 곳에 장부가 감춰져 있듯이

이 별도 루수의 동쪽 어드메에 어둡게 웅크리고 있다.

모양은 세 개의 주황색별이 삼각형 편대로 모인 모습.

보천가에서는 이 별을 이렇게 읊고 있다.

세 개의 주홍색별이 솥의 다리 형상을 하고 은하수의 밑에 있네.

<이순지,『천문류초』>

솥이 곡식을 담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이 별은 곡식 창고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 점에서 위수(胃宿)라는 이름은 참으로 적절한 듯하다.

곡식을 담고 저장하는 하늘의 곡식 창고가 바로 저 별의 임무인 것이다.

농사가 나라의 제일가는 중대사이던 옛 사회에서

위수가 점성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을지 쉽게 짐작이 가능하다.

그토록 어둡고 분간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28수의 하나로 이 별이 각인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한다.

이 별이 밝으면 풍년이 들고 사계절의 날씨가 순조롭다.

먹거리가 풍족하니 사람들이 여유롭고 천하의 예가 바르게 선다.

반대로 별이 어두우면 흉년이 드니,

굶주려 뵈는 것이 없어진 사람들이 예를 잃게 된다.

흥미롭게도 나라에 아주 극심한 기근이 찾아올 때면

밥통 위수의 세 별이 위장이 쪼그라들듯이 가운데로 몰려든다고 한다.

이 놀라운 점성학의 세계!

별이 쪼그라드니 사람들의 밥줄도 이에 응해 쪼그라드는 것이다!

제아무리 정보와 과학기술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현대 사회라지만

인간사는 한 그릇 밥통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여전히 인간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밥이다.

천지 강산이 몇 번을 뒤바뀌어도

사람들은 입에 밥 한 덩이 떠 넣으려 고군분투하며 산다.

고로 밥이 곧 천리(天理)인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린 밥에 대한 균형감을 상실하고 말았다.

온통 무엇을 먹을까라는 질문만이 넘쳐나는 요즘,

우리에게 밥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먹을 것인지 돌이켜 보는 건

참으로 의미 있는 질문이 될 것이다.

가을의 수확 철을 맞이하야, 한 아메리카 부족의 수확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북아메리카의 크리크족 인디언들은 “부스크busk”라는 의식을 거행한다.

첫 수확물을 거두는 시기의 의례다.

새로운 곡식을 거둘 시기가 임박하면 이들은 굶는다. 일명 닥굶. 닥치고 굶는다.

음식물은 먹어서도 만져서도 안 된다. 이게 끝이 아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안의 묵은 세간을 모조리 마당에 내 몬다.

바로 묵은 지난해의 잔해를 말끔히 태우기 위해서다.

추수로 농사일도 바쁠 텐데, 배곯으며 청소에 매진한다. 버리고, 태우고, 비우자,

이게 수확 철을 맞이하는 인디언들의 자세다. 이 또한 끝이 아니다.

인디언들은 여기 만족하지 않고 민간요법을 통해 토법(吐法)과 하법(下法)을 쓴다.

단추뱀 식물의 뿌리의 쓰디 쓴 즙을 마셔

뱃속의 남은 국물 한 방울 까지 모조리 토해낸다.

강력한 하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장의 주름 깊은 곳에 끼어 있을지 모를 마지막 묵은 변 한 덩이를 위해서!

이렇게 지난해로부터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비운 뒤에야

이들은 새로 수확한 음식물을 입에 댈 수 있었다.

얼마 후 8월 한가위를 맞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얘기다.

다 먹지도 못한 음식들을 온통 지지고 굽기에 바쁜 우리들.

음식장만 하느라 병나고 이혼하고 하는 얘기는 남의 집 얘기만이 아니다.

이런 우리에 비해 저들의 풍습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그들에게 먹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과의 교류였다.

특히나 새로운 수확물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정령, 새로운 기운과의 만남이다.

그렇기에 묵은해의 속된 기운은 철저히 제거되어야 했다.

새로 들어올 신선한 기운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충분히 자신을 비우고 청결히 했다.

충분히 비워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새로운 한 끼 밥을 위해 남김없이 버리고 비웠던 크리크족들,

참으로 성스러운 식사이지 않은가?

곧 8월 한가위다.

사람들은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보며 복을 빌 것이다.

더 풍요롭고 더 편하게 생을 누리려는 인간의 욕망의 끝은 어디인가?

이번 추석에는 달 말고 위수(胃宿)를 보자.

어찌나 먹는 걸 밝히는 지, 위가 배 밖으로 나올 듯 한 요즘 시대.

하지만 저 하늘의 밥통은 한 없이 어둡고 깊은 곳에 있다.

위수를 보면서 추수철 닥굶-닥토-닥싸의 신공을 발휘하던

크리크 족의 지혜를 다시금 떠올려 보시길.

한로(寒露), 완연한 가을

찬 이슬이 내리는 절기 한로(寒露). 결실과 수확의 시기다.

가을은 냉혹한 금(金)기운을 머금은 때다.

결과를 얻기 위해선 비우고 쳐내야 한다.

살벌한 죽음의 타작이 한바탕 지나가지 않고선 수확의 기쁨이란 없는 것이다.

『서경』에 이르기를,“금왈종혁(金曰從革)”이라 했다.

종혁이란 변혁의 의미다.

무딘 돌덩이가 펄펄 끓는 용광로를 거쳐야 예리한 한 자루 검으로 거듭날 수 있듯이,

금(金)의 마법적인 변이 과정 뒤에는 ‘악마적인’ 제련의 코스가 웅크리고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에밀레종의 전설을 모두 알 것이다.

신명한 소리를 내는 종을 위해 용광로에 아이를 녹여 넣었다는 이야기.

야금작업을 위해 인신제물을 바치는 이런 유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세계 신화에 속한다.

지역과 인종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금(金)을 만들어내는 야금작업에서

극도의 악마적 성격을 읽어냈다.

용광로는 인간제물의 희생 없이 아무것도 뱉어내지 않았다.

희생이 있기에 수확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을 금기운의 의미다.

귀뚜라미 우는 가을 밤하늘.

남산에는 연인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아름다운 커플들이 하늘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저 하늘의 별들이 가을의 숙살지기(肅殺之氣)넘쳐난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가을 하늘을 보고 섣불리 철지난 유행가를 흥얼거리지 말라.

당신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저 하늘의 별은,

가을의 낭만이 아니라 임종의 통곡소리와 전쟁의 포성으로 가득할 테니 말이다.

오늘은 한로 무렵 떠오르는 별들을 만나 볼 차례.

음기작렬하는 가을의 민낯을 여기 공개한다.

죽음의 별, 대릉(大陵)

첫 주인공은 지난 회에 연재한 위수(胃宿)에 속한 별자리다.

그 이름 대릉(大陵), 대릉이란 말 그대로 큰 무덤이란 뜻.

이 별은 무덤과 죽음을 주관하는 별이다.

아무리 블로그 개편이라지만 가을이라 어쩔 수 없다.

시작부터 음산하게 깔고 들어가는 게, 어째 오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 별자리는 8개의 붉은 별이 띠 모양으로 이어진 것인데, 빛이 좀 어둡다.

하지만 문제없다.

음기작렬 하는 가을철의 별인지라 그 빛이 어두워야 제격인 것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별이

이발소 간판 돌아가듯 화려하게 번쩍거린다면 그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점성학적으로 이 별은 어두워야 좋다.

그래야 죽음으로 인한 나라의 변고가 적은 것이다.

이 별이 환해지면 사상자가 많이 생긴다고 한다.

어둔 별은 어두워야 한다는 것,

당연한 듯하지만 가만히 곱씹어 보면 눈물나게 감동적인 말이다.

별이 어두우면 눈여겨보지 않는 게 관측 중심의 현대 천문학이다.

하지만 천지인이 상응한다는 전제하에 하늘에서 인간사를 읽었던 중국인들은

어둡고 흐린 별들도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다.

이는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음-양의 세계관의 한 단면이기도 할 것이다.

언덕의 가려진 이면일지라도

세계를 구성하는 한 국면이라는 점에서 음과 양은 동등하다.

그리고 각자는 자기만의 고유한 의미를 가진다.

이렇듯 우리네 28수에는

포괄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보던 지혜로운 옛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다음, 대릉이 그리고 있는 우아한 곡선에 폭 싸인 하나의 별,

그 이름은 적시(積尸)이다.

시체가 쌓인다는 무시무시한 뜻.

별자리의 모양도 커다란 무덤에 시체가 들어앉은 형국이다.

무덤을 뜻하는 대릉이 좀 포괄적인 의미였다면,

이 별은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죽음을 상징한다.

사람의 생사의 문제와 직결된 별,

이 별자리가 밝으면 천하에 죽는 사람이 많아진다.

큰 전쟁이 벌어진다거나 역병이 돈다거나 하는 중대한 변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이 별 역시 밝으면 안 된다.

만일 이게 크게 번쩍인다면 천하에 사상자가 많이 생길 경고의 표시로 보면 된다.

<페르세우스>

여기서 잠깐!

앵글을 틀어 서양 별자리와 견주어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적시는 서양별자리로 페르세우스의 팔과 어깨에 해당한다.

그새 페르세우스를 잊은 섭섭한 독자가 여기 계시리라 생각지 않는다.

날개달린 말 페가수스의 주인,

메두사를 무찌르고 아름다운 미녀 안드로메다를 구해낸 멋진 왕자님 페르세우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싹둑 잘라낸 용맹스런 모습 그대로

하늘의 별자리로 붙박였다.

그림을 보시라!

그의 왼손은 꿈틀거리는 메두사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

메두사의 눈에 해당하는 저 별이 ‘악마의 별’로 불리는 “알골(Algol)”이다.

이 별은 괴물 메두사의 눈알인지라 기이한 조화를 부린다.

약 69시간 간격으로 밝기가 변하는 것이다.

어제 2등급이었나 하면 내일 쯤 3등급이 된다.

과학시간에 졸지 않은 분들은 변광성(變光星)이라는 업계 용어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이 별은 2개의 동반성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이 주위를 돌면서 일종의 식(蝕)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별 알골은 무덤 별자리 대릉의 다섯 번째 별이다.

무덤 별자리에 악마별이라!

중국과 그리스의 별바라기들은

대륙의 양 끝단에 서서 어쩜 이리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어쨌거나 숙살의 금기(金氣)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페르세우스 별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은 가슴의 알파(α)별 미르팍(Mirfak)이다.

이 별은 은하수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동양 별자리로 하면 저 별은 대릉 위의 천선(天船)이다.

은하수를 가로지르는 천상의 배.

아홉 개의 붉은 별이 저 하늘 배의 바닥을 이루고 있다.

이 배의 용도는 무엇일가?

은하수를 여행하고픈 관광객들을 위한 유람선?!

이 배가 무덤 별자리 곁에 위치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라.

이 별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황천행 여객선이다.

도무지 낭만이라고는 허락하지 않는 동양 별자리의 세계.

발랄샤방한 블로그를 표방하는 북드라망의 기치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금기운의 결정체, 묘수


자, 이제 시선을 옮겨 서방백호의 몸통에 속하는 묘수(昴宿)의 영역으로 건너가 보자.

(昴)는 ‘묘성묘’자로 오직 묘성을 뜻하는 글자다.

자신의 고유 글자(?) 있을 정도로 묘성은 유명한 별이다.

그 이름 묘(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먼저, 묘(昴)라는 이름은 이 별의 모양새에서 왔음직 하다.

글자의 성부인 묘(卯)에는 무성하다는 뜻이 있다.

(日)무성하게 빛난다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으리라.

그 모양을 보면 일곱 개의 주황색별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이다.

별이 모여 있는 모습이 좀스러워 보이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좀생이별’이라고 부른다.

<참 별도 많다. 그런데 어떻게 저 많은 별들에 일일이 이름을 다 붙여놨을까.

오히려 그게 더 신기할 따름이다. 거기다 '좀생이별'이라는 별명까지.^^>

혹은 “좀생이보기”라는 민간의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좀생이보기란 음력 2월 6일에(이 날을 좀생이 날이라고 한다.)

좀생이별을 보고 한 해의 농사일과 신수를 점치는 풍속이다.

묘월(卯月)에 그 빛(日)을 보고 점치던 별이라는 데서 묘(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해석 방법은 이렇다.

달을 모심기 할 때 논으로 이고 나르던 밥으로 보고,

좀생이는 밥 달라고 아우성대는 아이들이라고 본다.

달과 별의 거리가 가까우면 풍작이고,

달과 별이 나란히 가면 평작이고, 별과 달이 멀찌감치 떨어지면 흉작이라고 했다.

특히 좀생이별이 달에 뒤지면 아이들이 밥 달라고 따라다니며 보채는 형국이므로

흉년이 든다고 보았다.

농한기의 막바지를 보내며 새해 농사준비에 한창이던 농부들은

좀생이별을 보고 그 해 농사일에 들 짚신의 양을 가늠했다고 한다.

평양 약수리 고분벽화에도 이 별의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이 풍습은 유래 깊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을 민중들의 삶과 함께 호흡해 온 별이 좀생이별,

묘수인 것이다.

하늘의 하고많은 별 중에 사이즈가 큰 것도 모양이 근사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좀생이 같은 이 별이 그토록 주목받았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이 별은 육안으로 관찰되는 성단이다.

어떠한 계기로 같은 곳에서 동시에 탄생한 별들의 무리인 것이다.

그것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퍼렇게 펄떡거리는 젊은 별들의 모임이다.

이렇게 보면 좀생이별을 보고 밥 달라고 보채는 아이들 같다고 생각했던

우리네 농부들의 생각은 현대천문학의 설명과도 통하는 것이다.

비단 우리 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문화권에서

이 별을 어린 형제자매의 무리라고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이 별을 플레이아데스성단이라고 불렀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틀라스(Atlas)신의 일곱 딸을 의미하는

칠 자매별이라 불렀다.

흐릿한 별빛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그 별의 젊은 기운을 간파했을지,

고대인들의 놀라운 혜안에 무릎을 치게 되는 대목이다.

망원경으로 이 별을 보면

500여개의 젊은 별들이 우글거리는 그야말로 진풍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이 별이 인간들로부터 얼마만큼 시공을 초월한 러브콜을 받아왔는지 살펴보자.

다음 로고를 보시라.

이 유치찬란한 로고를 한 눈에 알아보시는 분들이 분명 계시리라.

일본의 자동차 브랜드 스바루의 로고다.

일본에서는 좀생이별을 스바루(Subaru)라고 불렀다.

묘성은 보통의 시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여섯 개로 보이기에 육련성(六連星)이라는 별칭을 가진바,

여기엔 여섯 개의 별만이 표기되었다.

일본의 민중들과 함께 호흡해 온 별 스바루를 자기 회사의 로고로 삼았다.

과연 민중지향적인 차를 생산하는 회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튼 일본인들에게도 묘수는 무척 친근한 별인 셈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에 작은 창을 내었는데,

그중 남쪽 입구는 이른 봄에 묘수가 보이게 맞춰져 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들은 이 별을 마카리키(Matariki)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이 별은 새해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마타리키가 처음 보이는 6월 무렵, 마오리족의 성대한 신년축제가 벌어진다고 한다.

한편 북미 인디언들은 묘수가 자기 조상들의 고향이라고 여겼다.

인디언들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신비주의자들은

지금도 이 파릇한 성단과의 교신을 시도하고 있단다.


<마카리키는 작은 눈 또는 신의 눈이라는 뜻이다.

여러 개의 별들이 모여서 일군의 무리를 이루는 정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 별의 무리들이 떼를 이뤄 6월 무렵 동북 지평선에서 반짝이며 떠오른다>

그리고 고대의 중국!

중국인들은 묘수의 근처에

태양의 길 황도와 달의 길 백도의 중간점이 있다는 데 주목했다.

그렇기에 이 별은 일월과 음양의 중도(中道)라고 여겨졌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있기에

이 별은 하늘의 눈과 귀가 되어 세상의 형벌을 주관한다고 보았다.

이 별이 밝으면 천하의 법질서가 바로 서지만 흐리거나 작아지면 형벌이 남용되어

아첨꾼이 들끓고 충성된 신하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보았다.

숙살의 금기를 지닌 서방백호에 속하는바

중국인들은 이 별을 강렬한 금기의 결정체로 본 것이다.

묘수에 속한 다른 별자리들도 마찬가지로 죽음과 군사를 상징한다.

그 중 의역에 뜻을 둔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 둬야 할 별자리가 있다.

바로 권설(卷舌)과 천참(天讒)이다.

기묘한 형태로 커브를 꺾은 권설의 모양새가 왠지 눈에 익다 하시는 분,

물론 없으리라고 본다.

이 별은 앞에 나온 페르세우스의 다리에 해당한다.

얼른 마우스 휠을 굴려보시라.

메두사를 해치우고 의기양양하게 선 그의 튼실한 다리,

동양 에서는 그 여섯별을 따서 ‘혀를 만다’는 뜻의 권설이라 불렀다.

놀라서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을 권설(卷舌)이라고 한다.

옛 군대에서 기습작전을 펴던 군인들이 말을 못하게 하려고 입에 나무를 물렸는데

그 나무 조각의 이름도 권설이라 한다.

별자리의 모양을 보니 영락없이 혀가 안으로 말리는 모양이 연상된다.

점성학적으로도 말(言)을 뜻하는 별이다.

신하의 간언이랄지 천하의 뜬소문이랄지 하는 세상 말들을 담당하는 게 이 별,

권설이다.

그렇다면 권설의 혓바닥 안에 말려 있는 천참(天讒)이란 별은 무엇인가?

천참이란 하늘에 참소한다는 의미.

좀 순화시켜 말하자면, 이 별은 하늘과 교통하던 샤먼의 별이다.

하늘의 조짐을 읽고 그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자.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와 운명을 읽고 액을 떨쳐내는 일을 담당하는 무당은,

권설의 주관을 받는 동종업계 종사자인 셈.

그렇다면 하늘과 소통하는 이들의 신비로운 능력은 어떻게 획득되는 것일까?

이들 모두가 서방백호의 금기(金氣)에 배속된다는 것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금이란 변혁의 기운,

고로 무와 의는 모두 금의 힘을 빌어

어떤 것을 새로이 변이시키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다.

『천문류초』에 이 별은 검은별(黑星)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어두워야 길하다는 의미이다.

음기 작렬하는 어둠 속에 묻혀 있을 때 제 역할을 한다는 것.

하지만 저 극도의 음(陰)은 속에 끓는 불덩이를 머금고 있다.

화의 제련을 받은 광물이 비로소 예리한 쇠붙이로 거듭나는 것처럼.

시뻘겋게 달궈진 숯을 집어삼키는 시베리아 샤먼들처럼.

불을 집어 삼키고 그 열기를 감내해 내는 존재들만이

서방(西方)의 금(金)의 영토에 진입할 수 있다.

금기운이 지배하는 이곳은 변이의 땅이다.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낸 도공의 물레,

돌덩이에서 쇠붙이를 끄집어 낸 대장장이의 풀무,

한 알 낱알에서 수십 배의 소출을 이끌어 내는 농부의 쟁기,

죽어가는 생명을 병상에서 일으키는 의사의 침,

버린 인생을 새 삶의 길로 이끌어 내는 무당의 방울.

이들 모두는 불의 시련을 감내함으로써

존재의 변신에 가 닿은 위대한 금의 아들들이다.

혹독한 불길 속에 묵은 나의 껍질을 불태움으로써 거듭나는

삶을 획득한 변신의 귀재들.

이들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죽음 없이는 수확도 없다는, 너무도 자명한 자연의 법칙을.

흐린 별들의 집합체인 고요한 가을 하늘.

저 하늘과 우리가 무언가 교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풍요와 악마의 두 얼굴을 한 금(金), 이 한 단어로 충분하지 않을까.

상강의 대표별자리 필수

이슬 시리즈의 종결자 상강(霜降)이 지났다.

서리가 내리고 초목이 시드는 때, 단풍의 빛깔은 하루가 다르게 농익어가고,

가을 막바지의 따순 볕 속에 낙엽이 하나 둘 부서져 내린다.

이 시기를 형용하는 참으로 빤한 멘트가 있으니, 바로 ‘낭만’이다.

낙엽과 함께 찾아온 우수, 바바리 끌고 다니는 남자의 계절……

여기 동의하시는 분들이 혹 계실라나 모르겠다.

대체 이 계절의 어디에서 낭만이란 두 글자를 읽어낸 것인지,

나로선 당최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이곳 필동 골짜기는 벌써부터 뼛속시린 한기가 가득하다.

그 옛날 필동에 살았다는 간서치(看書痴) 이덕무가 아침에는 동쪽 창가에 책상을 놓고,

점심때는 남쪽, 저녁때는 서쪽 창가로 햇살을 따라 책상을 옮겨 가며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 있지 않은가?

필동에 실제로 살아보니 알겠다.

오죽이나 추웠으면 자리를 옮겨 다니며 글을 읽었으랴!

이 한 철 살아남기 위해

우리 중년 남성들은 얼마나 볼품없는 털옷해 입어야 하는가!

만물이 헐벗는 시기,

낭만은 고사하고 자신의 적나라한 비루함과 직면해야 하는 때가 가을이 아닐까?

얼마 전 가을 남자의 본 면모를 확인하게 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여느 날처럼 나는 뵈도 않는 별자리를 꼽으며 남산 산책길을 따라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감나무 위에 웬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부스럭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반쯤 벗어진 머리, 악착같이 뭔가를 움켜쥐고 있는 손!

가까이서보니 그는 늙수그레한 중년 남성이었다.

감나무 위에서 그는 감서리를 하는 중이었다.

때는 자정도 훨씬 넘은 야심한 시각.

무엇이 그로 하여금 저 노구를 이끌고 아득한 감나무 위에 오르게 한 것일까.

일순 깨달았다. 저것이야말로 가을 남자다!

죄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가늣한 눈매에서,

석기시대 인류가 문명의 첫 걸음마를 떼던 아주 먼 옛적부터,

우리 깊은 곳에 녹아든 가을 본능을 읽고 말았다.

먹잇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돌도끼를 던져대야 했던,

과실을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무 위에 기어오르던

인간의 수렵채취 본능 말이다.

바바리를 끌며 담배나 태우는 건 별로 가을스럽지 않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

닥쳐올 추위 속에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긁어모아야 한다.

가을은 금(金)의 계절이다.

금은 팽팽하게 경계를 치고 가두는 기운이다.

경계 안에 들어오는 것은 포획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그렇기에 가을의 금기(金氣)를 숙살(肅殺)의 기운이라 한다.

가을에 만물이 결실을 맺고 수확을 거두는 건 천지가 금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이치다.

금의 기운을 받아 초목은 열매를 맺는다.

딱히 뭔가를 생산할 게 없는 우리 즘생(?!)들은 수렵채취를 한다.

이때 활용되는 감각은 후각이다.

먹잇감을 찾기 위해선 부지런히 코를 킁킁거려야 한다.

우리의 감각기관중 코(鼻) 금에 배속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치가 아닐까 한다.

72절후의 설명에 따르면 상강의 첫 5일 동안을 ‘표내제수(杓乃祭獸)’라 한다.

뜻은 ‘승냥이가 산짐승을 잡는 때’이다.

소싯적에 시골 생활 좀 했던 이 몸도 이맘때가 되면 토끼잡이에 몸이 달았던 기억이.

여튼 만물의 수렵채취 본능이 절정에 달하는 게 곧 상강의 풍경인 것이다.

상강, 바야흐로 사냥의 계절이 찾아왔도다!

사냥꾼의 그물, 필수(畢宿)

상강의 밤하늘을 지배하는 것은 필수(畢宿)다.

서방 백호의 용맹한 등짝,

사냥감을 겨누며 날렵하게 자세를 낮출 때 솟아오르는 부위에 해당한다.

이 별의 생김새는 흡사 새총과 같다.

여덟 개의 주황색별이 Y자 모양으로 예각을 그리고 있다.

이 별자리에 붙은 이름 필(畢)은 사냥에 쓰이는 자루 달린 그물의 상형이다.

저 하늘의 별 역시나 사냥의 별자리라는 점, 흥미롭지 않은가?

별자리의 생김새를 가만 뜯어보니

새나 토끼를 잡기 위해 힘껏 그물을 던지는 모양이 연상된다.

여기서 필(畢)의미하는 그물은 금(金)기운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물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윤곽을 그린다.

그 경계 안에 들어오는 사물을 단단히 가두고 긁어모은다.

그 안에 걸려드는 사물은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된다.

점성학에서 필수는 수렵과 형벌을 주관하는 별로 본다.

『천문류초』에서는

“필(畢)은 변방 병사의 수렵하고 훈련하는 것을 주관한다.”고 말한다.

옛 사람들은 이 별을 천하를 그물질하는 천자의 그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별의 세력이 강하면 변방의 오랑캐들이 복종해왔고,

그렇지 않으면 병란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또 필성이 자리를 옮기면 그물에 소란한 일이 일어나는 형국이므로

감옥에서 죄인들이 탈옥을 하거나 난리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한편, 이 별은 비를 주관하는 별로도 유명하다.

필수의 닉네임은 우사(雨師)이다.

하늘의 비를 주관하는 관리라는 뜻이다.

형벌과 사냥의 별이라더니 갑자기 비가 웬 말이냐고 의아해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다.

이 해석은 아마도 천문이 국가(군국점성학) 포섭되기 이전,

오랜 세월 민중들이 하늘을 보고 천지의 운위를 읽던 민간의 풍습에서

전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맘때쯤이면 꼭 스산한 가을비가 내리는데,

아마도 필성은 가을비를 예측하던 지표였으리라.

그 유명한 삼국지에 오늘의 주인공 필수(畢宿) 이야기가 나온다.

화자는 그 유명한 제갈공명.

위나라 군사의 침입에 직면하여 노심초사하는 왕평에게,

공명은 배짱도 좋게 ‘쫄지마~’ 이 한마디 멘트를 날려주신다.

전쟁 걱정 할 것 없이 1천명의 군사만 대비시키면 된다고 호언장담한다.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공명은 말한다.

달의 궤도에 필성이 들어오면 큰비가 오는데,

지금 필성이 달에 걸렸으므로 머지않아 큰 홍수가 휩쓸고 갈 것이라고.

그의 말 대로 얼마 뒤 큰 비가 내렸고,

홍수 덕에 그의 나라는 전쟁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제갈공명,

그는 지략가이자 전술가이기 이전에 하늘의 움직임에 정통했던 천문학자였던 셈이다.

샤냥의 별 혹은 비의 별. 필수는 두 얼굴의 별자리다.

우연의 일치인지,

흥미롭게도 다른 문화권에서도 이 별을 비의 별자리로 기억하고 있다.

조금 시야를 넓혀서 대륙의 저편 그리스로 건너가 보자.

하늘의 눈물, 히아데스성단

필수의 Y자 그물은 서양 별자리의 황소자리와 겹친다.

그리스의 목동들은 이 별이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파(Europa)를 유혹하기 위해

황소로 변한 제우스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Y자의 예리한 선분에서 그들은 황소의 눈과 광대뼈와 목을 연상했다.

필수를 관찰해보면

좌측 끄트머리에 영롱한 붉은 광채를 발하는 엄청 밝은 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이를 필대성(畢大星)이라 불렀고,

그리스인들은 알데바란(Aldebaran)이라고 불렀다.

알데바란은 ‘황소의 눈알’이다.

성난 황소가 붉은 눈을 부라리듯 이 별은 굉장한 광채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고대의 별바라기들은 이 별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알데바란을 빛의 전령이라 보았고,

유대인들은 신의 눈이라 생각했다.

세차운동으로 별들이 선회한 궤적을 기원전 3천년 경으로 되돌려보면,

황소자리는 지금과는 정반대로 춘분점이 위치하는 별자리였다.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이 별을 봄을 알리는 표지로 삼았다.

봄을 알리는 전령사, 이 별에서 사람들은 만물의 소생을 알리는 신 목소리를 들었다.

황소의 눈알,

알데바란을 제외한 V자의 별들은 ‘히아데스(Hyades)’라는 이름의 산개성단이다.

히아데스라는 이름은 ‘비가 내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이 별은 말 그대로 우기의 시작을 알리는 별자리였다.

히아데스가 뜰 무렵 내리는 비를, 그래서 ‘히아데스의 눈물’이라고 했단다.

물론 이는 기원전 3천 년 전, 이 별이 봄의 지배자이던 시기의 일이다.

시공의 격차를 넘어, 그리고 천체의 무상한 변화를 넘어,

이 별이 민중들에게 비의 별로 인식되었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천자의 수레, 오거성

<맨 위의 꼭짓점은 무시하고 아래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천창, 천옥, 사공, 천고, 경. 서양의 마차부 별자리와 겹친다>

필수에 속한 별 중 빼 놓지 말아야 할 별자리가 있다.

필성의 위에 자리한 오거성(五車星)이라는 별자리다.

이 별은 하늘의 다섯 수레다.

이에 천자의 수레라는 별칭이 붙었지만 천자가 타고 다니는 전용 자가용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이 다섯 별은 트럭이다.

용도는 수확철 보도 자료를 위한 천자의 인증샷.

수확철 들판에서 짐칸에 잔뜩 곡식을 부려놓은 채,

어색한 농부 복장을 한 왕이 인증샷을 날리는 장면을 상상하면 되겠다.

재미있는 것은 다섯 별은 각기 다른 용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

서북쪽의 별은 천고(天庫) 하여 콩을 주관하며,

동북쪽의 별은 천옥(天獄)이라 하여 쌀을 주관한다.

동남쪽의 별은 천창(天倉)이라 하여 삼베(麻)를 주관하고,

중앙의 별은 사공(司空)이라 하여 기장과 조를 주관한다.

그리고 마지막, 서남쪽의 별 경(卿) 보리를 주관한다.

이 다섯 수레는 자신들의 짐칸에 실린 다섯 곡식을 주관하기에,

그 별의 밝기를 보고 해당 작물의 작황을 점쳤다.

그리스인들도 이 별자리를 마차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들은 여기에 ‘마차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에서 이 마차의 용도는 트럭이 아니라 휠체어에 가까웠다.

그리스인들은 이 별을

아테네의 왕 에리크토니오스의 불편한 다리를 대신해 준 4두마차라고 봤단다.

양을 치며 하늘을 봤던 그리스인들과

농사를 천하 사업의 근간으로 보았던 중국인들이,

얼마나 비슷하면서도 다른 별자리를 구성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상, 필수에 얽힌 별자리들의 어지러운(?) 퍼레이드를 살펴보았다.^^

때는 가을의 마지막 달인 술월(戌月).

겨울이 가까워 오면서 밋밋했던 초가을 밤하늘이 점차 화려한 빛깔로 변해간다.

하늘도 땅도 가을의 마지막 끄트머리를 쥔 채로, 분주히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올 가을엔 달님이 필수를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가셨는지,

엊그제는 정말 싸늘한 가을비가 천지를 휩쓸고 지나갔다.

무섭게 곤두박질치는 기온은 혹독한 너무나도 혹독한 필동의 추위를 걱정하게 만든다.

올해 김장은 어떡해야 할지, 열악한 연구실 주방의 겨울 설거지는 어떻게 해결할지…

쓸데없는 걱정으로 궁상을 떠는 내게, 저 하늘의 필수는 묻는다.

올 한 해 그대는 무슨 사냥감을 잡았는가?

그대의 수레엔 어떤 곡식이 채워졌는가?

자, 모두 수확과 결실을 향한 막바지 금기(金氣)발휘에 전념할 때다.

<겨울 별자리 이야기>

음기여 고개를 들라, 오리온과 자수 삼수 이야기

시리도록 아름다운 겨울 별자리 이야기를 미뤄두고 짧은 휴가를 다녀왔다.

두어 달, 하루에 8시간씩 자며 핑핑 놀았다.

어찌나 놀았는지 자판을 치는 손가락이 길을 못 찾을 정도.

겨울엔 모름지기 놀아야 한다!

음양오행을 공부하며 이것 하나 확실히 배웠다.

생장수장 중 장(藏), 만물이 감추어지는 시기가 곧 겨울 아니던가.

사람도 천지의 운행에 맞추어 씨앗처럼 웅크리고 쉬어야 한다.

말 나온 김에 지난 학기 갑자서당에서

어린이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던 글귀를 여기 소개해 보련다.

『황제내경』 「소문(素問)」에 실린 사기조신대론(四氣調神大論)이란 글이다.

겨울 석 달은 만물이 움츠러들고 갈무리되어 휴식하는 시기로

물이 얼고 땅이 갈라진다.

사람도 이를 따라서 양기(陽氣)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늦게 일어나야 하는데, 해가 뜨는 것에 맞추어 일어나야 한다.

품고 있던 뜻이나 의욕을 펼치기엔 좋지 않아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드러내지 않으며

때를 기다리는 여유를 찾아야 한다.

추위를 피하고 따뜻한 곳에 머물며 땀을 흘리거나 피부를 함부로 드러내

기운이 빠져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 겨울에 맞는 양생법이다.

지난 해에 못다 이룬 일을 두고 미련을 품지도 말고,

뭔가를 새로 해보겠다는 의지를 품지도 않은 채,

유유자적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게, 겨울스러운 삶의 자세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기, 수고로 몸을 혹사시키지 않기,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기 등.

겨울엔 일상의 템포를 늦추는 절제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완전히 끝내고 충분히 쉬어야 따스한 봄날, 힘차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자, 모두 빈둥빈둥 귤이나 까먹으며 죽은 듯이 겨울날을 보내보자.

어쩐지 저 깊은 곳에서 샘 솟듯 양기가 터져 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겨울엔 일을 벌이지 않는 게 양생의 도이건만,

‘양기 손상’을 무릅쓰고 겨울 별자리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생각 같아선 노는 김에 겨울 석 달을 꼬박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춘을 목전에 두고 겨울 별자리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뭣하니,

입춘이 된 다음에 봄철 별자리부터 새로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심산이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새 뽀얗게 먼지가 덮인 별자리 책들을 다시 폈다.

하지만 어디를 펴건 겨울엔 놀아야 한다는 말 일색이었다.^^

겨울 별자리는 다름 아닌 ‘휴식과 죽음’ 을 주관하는 신들이었던 것이다.

원고를 쓰겠다고 작심하고 앉은 내게,

겨울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일제히 ‘겨울엔 놀아야 해, 겨울엔 놀아야 해’ 하며

속삭이는 듯한 느낌?! 이래저래 후회막심이다.

이 가여운 필자는 짧디 짧은 겨울 휴가를 마치고,

다시 헤어 나올 길 없는 연재의 늪으로 빠져들어 간다.

하지만, 부디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들께서는

필자의 과오를 발판으로 삼아 휴식과 재충전으로 가득한 ‘양생 겨울’을 만끽하시기를!

오리온의 머리, 자수(觜宿)

오늘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오리온(Orion) 상 되시겠다.

우리에겐 과자 회사 상표로 익숙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그리스 신화의 유명 인사 중 하나다.

오리온, 그는 내노라 하는 사냥꾼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찬란한 식스팩을 장착한 다부진 몸매의 거인이다.

집안도 빵빵하다.

그의 아버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여친 또한 대단한 퀸카다.

아르테미스(Artemis)라고 들어는 봤나?

그녀는 사냥의 여신이자 야생동물의 수호신, 그리고 달의 여신이다.

사냥의 신끼리 만났으니, 궁합은 볼 것도 없겠다 싶다.

하지만 이 선남선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있는 집 자제들이란 원채 걸리는 게 많은 법,

아르테미스의 쌍둥이 오빠인 아폴론이 이들의 만남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불붙은 사랑을 어찌 한 두 마디 말로 갈라놓을 수 있으리오.

아무리 말로 해도 들어먹지를 않자 아폴론은 급기야 오리온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자는 오리온의 사랑하는 연인 아르테미스.

아폴론은 오리온의 눈을 보이지 않게 만든 뒤, 아르테미스를 꾀어 화살을 쏘게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의 살해자임을 알게 된 아르테미스는 비탄에 빠졌고,

제우스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오리온을 밝은 별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추운 겨울 하늘에 유독 이 별 오리온자리가 환히 빛나는 것은

못다 이룬 이들 남녀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 때문이라고 한다.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의 연인답게, 오리온은 아주 건장한(!) 장수의 모습이다!>

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오리온의 머리 부위다.

세 개의 별이 나란히 오리온의 머리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동양 별자리로는 자수(觜宿)이다.

동서양의 별자리 모두 이 별자리를 머리에 해당한다고 봤다는 점이 흥미롭다.

동양의 별자리에서 자수는

서방 백호 별자리 중 호랑이의 머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이 세 별의 어떤 특징이 이들을 머리로 보게 만든 것일까?

비통한 죽음으로 최후를 장식한 청년 오리온의 한 맺힌 머리라...

한이 맺힌 사람의 마음은 음기로 가득하다.

그런점에서 동양의 자수 별자리와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서방백호 별자리의 머리.

저 하늘의 호랑이는 지금 음기 작렬하는 울음을 울고 있다.

세상을 향해 ‘음기여 고개를 들라’고 울부짖는 음(陰)의 전령사!

자(觜)의 풀이를 보자.

(觜)는 무척 재미있는 글자다.

부엉이의 머리 위에 뿔처럼 난 털을 뜻하는 글자다.

부엉이란 짐승은 요즘 유행하는 모히칸 스타일을 하고 있나보다.

정수리에 삐쭉 털이 솟아 있는데, 이걸 자(觜)라 부른다는 거다.

여기서 ‘뾰쪽한 끝’이라는 뜻이 파생되어 나왔다.


자수는 입동인 11월 8일 경, 지는 해와 맞교대 하며 동쪽 하늘을 밝힌다.

입동은 만물이 수렴의 시기를 지나 시들어 죽는 스산한 시기다.

앙상하게 얼어붙은 산천의 초목을 보면 우리의 입에선 절로 탄식이 흘러 나온다.

‘아, 성장과 번영의 시기가 끝나고 고단한 겨울이 찾아오겠구나.’ 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 당시의 심정을 담아

저 하늘의 별에 자(觜)라는 이름을 붙였으리라.

만물의 양기를 죽게 만든 (陰)뾰족한 끝. 그 이름,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천문류초』에서는 이 별을 ‘하늘의 관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자는 하늘의 관문을 주관한다.

별이 밝고 크면 천하가 평안하고 오곡이 잘 익는다.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면 임금과 신하가 지위를 잃게 되고, 천하에 가뭄이 든다.

사람의 몸에서 머리가 기가 통하는 관문이듯,

하늘에는 호랑이의 머리가 천기가 드나드는 출입구가 되는 것이다.

또한 금에 배속된 장부인 폐가 내외의 경계를 가르고 납기를 주관하는 역할을 하듯,

하늘에서도 금의 계절인 가을의 별자리가 그 관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 별자리가 밝고 크면 하늘의 관문이 원활이 소통되니

나라가 평안하고 풍년이 든다고 본 것이다.

반대로 자성이 움직이거나 오성에 침범당하면

정치가 불안해지고 흉년이 든다고 보았다.

오리온의 몸통, 삼수(參宿)

아무리 별자리 문외한인 류도사라도

이 별자리가 팔다리를 벌리고 선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뚜렷하고 명징한 외연을 자랑하는 겨울 별자리 중에서도 대표 주자에 해당하는 게,

바로 이 오리온이기 때문이다.

삼수는 오리온의 몸통과 팔다리 사지에 해당하는 별자리다.

우연의 일치인지, 동양 별자리에서도 용맹스런 장수의 모습으로 봤다.

사냥꾼이거나 장수이거나.

어쨌거나 이들 모두 오행으로 수렴의 금(金) 기운에 배속되는 것들이라는 점,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오리온 자리. 오리온의 머리에 위치한 푸른 별 세 개가 자수이고,

오리온의 팔다리 몸통을 그리는 10개의 별이 삼수이다.>

『천문류초』에 실린 노래 보천가 중 삼수를 읊은 대목을 청해 들어 보자.

총 열 개의 별로 이루어진 삼은 자수와 서로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네.

삼은 두 어깨와 두 다리가 있고,

두 다리 안에 있는 세 개의 별이 심장이 되며

(伐)의 세 별은 배 안에 깊이 들어가 있다네

먼저 이름, 삼(參)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자.

삼이란 관여하거나 참여한다는 의미다.

이 별이 뜨는 것은 입동에서 소설에 걸친 11월이니

음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동양인의 안목으로 삼수를 그려낸다면

아마도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선 사납고 용맹스런 장수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까.

이 별의 몸통을 기준으로 윗부분은 황도와 백도의 중간 지점이라고 한다.

그래서 점성학적으로 몹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를 부월(鈇鉞)이라고 한다.

부와 월 모두 도끼를 뜻하는 글자다.

그러니 이곳은 밤하늘에 새겨진 섬짓한 도끼자국과 같은 것이리라.

이 부분의 별들은 만물을 베어 죽이는 음기의 화신과 같다.

또한 몸통의 가운데 나란히 선 세 별과 팔 다리의 네 별은 각기 장군을 표상한다.

특히 왼쪽 어깨에는 좌장군, 오른쪽 어깨는 우장군, 왼쪽 다리는 후장군,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는 편장군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들 일곱 장수는 천하의 군사를 주관하는 별이다.

또한 몸통에서부터 아래로 나란히 내려붙은 세 별은 벌(伐)이라 하여,

북방의 오랑캐를 뜻하는 별로 이해했다.

그렇기에 벌은 어두워야 좋다고 생각했다.

흥미롭게도 이 별들은 고구려의 고분에 종종 등장한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북방 오랑캐에 속하던 고구려인들에게는

벌성이 환히 밝아지는 것이 오히려 호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자수와 삼수.

서방백호의 마지막 별자리에 속하지만 이들은 대표적인 겨울 별자리에 속한다.

가을 막바지에 하늘을 밝히며 겨울이 찾아옴을 널리 알리던 별자리인 것이다.

‘만국의 음기여 고개를 들라!’

자수와 삼수가 음의 도래를 선포하고 지나갔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겨울 별자리들의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가을철의 칙칙하고 어둔 별들 대신

현란하고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겨울 하늘의 주인공들이 선을 보일 예정이다.

자 함께 하늘을 보자.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우물과 시체가 있는 풍경 -정수와 귀수

겨울 하늘에서 삼각형을 찾아주세요

어느덧 겨울 막바지다.

대한(大寒) 지나고 나니 쌓인 눈들이 거짓말같이 사르르 녹아버리고

나뭇가지마다 하나 둘 봄눈이 맺히기 시작한다.

수줍게 맺힌 봄눈 아래에는 눈 녹은 물이 아슬하게 걸쳐 있다.

넋 놓고 앞산 자락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겨울 석 달이 이렇게 가버리고 말았음을. 입춘이 내일 모렌데,

겨울 별자리 연재를 한답시고 뒷북을 치고 있는 난 대체 뭔가.^^

자, 정신 차리고 부지런히 진도(?!) 빼야겠다.

겨울 하늘을 본 적이 있는가?

어린 시절 내게 겨울 하늘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차갑게 타오르는 겨울 하늘의 별들이었다.

1등성들로 빼곡한 겨울 하늘의 별들은 섬득함 그 자체였다.

밤길을 홀로 걷노라면,

사나운 기세로 빛나는 겨울 별들에게 영혼이라도 빨아 먹힐 듯 한 기분!

그런데 서울에 오니 이런 겨울 하늘이 참으로 만만하다.

매연과 도심의 불빛에 중화된 서울의 겨울 하늘은

그야말로 적당한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앙갚음이라도 하듯, 요새 나는 겨울 하늘을 오래오래 주시한다.

(별자리 연재 쉬는 동안, 결코 논 게 아니라는 거!)

각설하고,

온갖 화려한 별들이 웅성거림으로 가득한 겨울 하늘에서 길을 찾는 법을 알아보련다.

가을 하늘의 길잡이는 페가수스 ‘사각형’이었다.

겨울 하늘에서는 오리온 옆에 ‘삼각형’을 표지로 삼는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질 무렵

동쪽 하늘을 보면 겨울철의 삼각형이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지난 시간에 연재한 오리온자리와 바로 맞닿아 있다.

늠름한 오리온의 왼쪽 어깨,

동양 별자리로 치면 삼수(參宿) “좌장군”이 삼각형의 한 축이다.

그리고 작은 개자리의 프로시온이 또 한 축이다.

프로시온은 동양의 별자리로 치면

오늘 이야기할 정수(井宿)에 속한 남하(南河)라는 별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축은 주극성에 속하는 시리우스, 동양의 천랑성(天狼星)이다.

이 세 별이 통칭 “겨울철의 대삼각형”이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이 세 별을 찾았다면

겨울 하늘에 길잡이가 될 좌표가 세워진 셈.

여기서부터 남방주작 별자리들의 현란한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여기서 잠깐!

왜 겨울 별자리를 “남주작”이라 부르는지 의아해하는,

수준 높은 독자 분들이 계실 듯하다.

남주작은 여름의 화(火)기운이므로,

이름대로라면 여름 별자리의 이름으로 쓰이는 게 맞다.

하지만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올려본다는 것.

마치 거울에 맺힌 상이 좌우가 뒤바뀌듯,

이 과정에서 밤하늘의 별들도 전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름 하늘엔 북 현무, 겨울 하늘엔 남주작의 별들이 주인공이다.

그렇다고 여름에 북방의 수기운, 겨울에 남방의 화기운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북현무의 별자리들은 발산의 화 기운을,

남주작의 별자리들은 응축의 수 기운을 상징한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겨울별자리들은 주작처럼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별들 일색이다.

하지만 이들은 대개 죽음과 소멸을 주관하는 신들이다.

시체를 상징하는 별, 상여를 상징하는 별, 귀신을 상징하는 별 등등.

어쩌면 내가 겨울 별자리들에서 유독 공포감을 느껴온 것도,

저 하늘의 음침한 수기운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시원의 별, 정수

남방 주작 별자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우물 별자리 정수(井宿).

남방주작의 도상으로 보자면 이 별자리는 주작의 머리에 해당한다.

머리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동양의 의학에서는 머리 안에 하나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생각해,

이를 뇌해(腦海) 불렀다.

별자리의 경우도 마찬가지.

주작의 머리에는 생명의 물이 솟아오르는 우물 별자리, 정수가 자리하고 있다.

겨울을 상징하는 별의 첫 머리가 우물(水) 뜻하는 것이니 그 의미도 적절한 듯.

별자리의 생김새 또한 우물과 같다.

정수는 여덟 개의 별이 우물 정(井)모양으로 연이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별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사마천의『사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劉邦, BC247~BC195)이 중원의 패권을 장악할 무렵

오성(五星)이 태백성(금성)을 필두로 하여

모두 정수 근처에 모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자,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오성이 우물 주위로 모였으니, 뭐 생수사업으로 돈이라도 번다는 걸까?

먼저 정수의 점성학적인 의미를 알아보자.

물은 생명의 근원이요, 뭇 생명체의 시원이다.

그리고 우물은 그것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따라서 우물 별자리 정수는 생명의 근원이 솟아나오는 출구,

시원으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 마주하게 되는 궁극의 근원을 상징한다.

국가에 봉사했던 점성학자들은 그것을 “황족”이라고 해석했다.

왕이란 곧 국가의 중심, 근원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성이 모였다는 것은 왕의 주변에 세력이 집결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럼 당대의 많은 패자 중 어떤 왕을 일컫는 것일까.

정성에 상응하는 영토를 지배하는 왕, 곧 한나라의 유방을 일컫는다.

그리고 태백성(금성) 필두로 오성이 집결했다는 것은,

(金)군사를 상징하므로 무력으로 천하를 얻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과연 유방은 항우라는 쟁쟁한 장수를 누르고 중원 땅을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비천한 서민 출신의 날건달 유방이 통일 제국 한의 우두머리로 등극 하리라는 것,

당대의 술사들은 겨울 하늘의 정수에서 그 조짐을 미리 읽어냈다.

정수는 그 밖에 물, 생명을 주관하는 별로도 본다.

정수는 휘하에 18개의 별자리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은 대개 물, 구체적으로는 치수를 점치던 별자리들이다.

수명을 관장하는“노인성”이라는 별도 있다.

양생이 필생의 목표이던 도교 수행자들이 열성으로 섬기던 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멀리 고려시대 무렵부터 노인성을 기리는 제를 올렸다.

노인성을 보면 오래 산다는 속설도 있었다.

그만큼 민중들에게 강한 의미로 각인되던 별인 것.

그러나 이 별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인성의 별칭이 남극성(南極星)이다.

남쪽하늘에서 간신히 볼 수 있는 별이라는 뜻이다.

겨울에 제주도나, 남해 바다에 위치한 산봉우리에 오르면 운 좋게 만날 수 있단다.

귀신의 별, 귀수

남방주작의 두 번째 별은 주작의 눈, 귀수(鬼宿)다.

귀신 귀(鬼), 말 그대로 귀신 별자리다.

주작은 귀신을 보는 새라는 말인가?

이 별은 동지 무렵 겨울 밤하늘의 주인공이다.

동지는 일 년 중 음(陰)기운이 정점에 오르는 때이다.

음이 왕성해 지므로 이 날 귀신이 활개를 친다.

그걸 막자고 동지 날 우리 팥죽을 쑤어 먹지 않던가.

아무튼 이 무렵 하늘의 지배하는 별에 사람들은 귀신의 별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생긴 모양도 이름값을 한다.

3.5등급 이하의 어두운 네별이 마름모 모양을 이루는데,

그 안에 마치 눈동자처럼 희뿌연 별이 하나 담겨 있다.

어둡고 음산한 것이, 이름 그대로 귀신을 보는 눈의 형상이다.

그 중 사각의 틀이 귀신의 별 귀수이다.

옛 사람들은 이 별을 시신을 나르는 상여에 비유했다.

이 별이 사망과 질병을 주관한다고 보았다.

한편 이 별로 국운을 점칠 경우,

간사한 음모를 감찰하는 하늘의 눈(天目)이라고 이해했다.

이 경우 동북쪽의 별은 말을 모으는 일을,

동남쪽의 별은 병사를 모으는 일을,

서남쪽의 별은 베와 비단을 모으는 일을,

서북쪽의 별은 금과 옥을 모으는 일을 맡는다.

이 네 별에 변화가 있으면 그에 응하는 일에 부정한 사건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귀수 안에 있는 눈동자 별은 적시(積尸) 한다.

시체가 쌓인다는 의미로, 사망과 상례, 제사를 주관하는 별이다.

이 별들은 음(陰) 절정에 이른 시기의 별인만큼 어두운 것이 좋다고 보았다.

이 별들이 밝거나 움직이면 질병이 창궐하고 죽음이 만연할 징조이다.

흥미롭게도 서양의 별자리에서도 이 별을 시체의 별로 본다.

귀수는 황도 12궁의 별자리 중“게자리”의 몸통과 겹친다.

게자리는 헤라클레스와 싸우다 죽은 게의 시체가 별자리로 된 것이다.

제우스의 부인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을 피워 낳은 헤라클레스를 미워하여,

헤라클레스가 히드라와 혈전을 벌이는 순간 게를 보내 히드라를 돕게 한다.

하지만 게의 집게발 정도로 영웅 헤라클레스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헤라가 보낸 게는 헤라클레스에게 난자되어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

이를 가엾게 여긴 헤라 여신은 게의 시체를 하늘로 올려 보내 별자리로 만드는 데,

그것이 게자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게자리 안에 있는 적시(積尸) 프레세페 성단이라 불린다.

자세히 보면 하나의 별이 아니라 여러 별이 무리를 이룬 성단이라는 것이다.

이 별이 성단이라는 것을 알아낸 인물은 그 유명한 갈릴레오.

손수 제작한 망원경으로 세밀히 이 별을 관측한 결과

희뿌연 이 별의 실체를 밝혀 낸 것이다.

그런데 동양의 천문학자들도 일찍이 이 별이 성단임을 간파했던 듯하다.

이순지는『천문유초』를 지으며

이 별에 “적시기(積尸氣)”라는 부연 설명을 달아 놓으며,

단일한 별이 아니라 기운으로 이루어 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별이 성단이라는 것과 통하는 주장이다.

자, 이로써 겨울 별자리의 초입을 지나오게 되었다.

겨울 별자리의 현란한 외양과 달리

그 안에는 우물과 시체가 있는 음산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겨울 하늘에 대고 ‘저별은 나의 별~’ 운운하는 철 지난 유행가를 흥얼거리지 말라!

멋모르고 가리킨 저 하늘의 별이

시체와 귀신과 제사를 주관하는 죽음의 별일 확률, 99.9%다.

겨울 별자리는 경박한 감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겨울이란 소멸과 죽음의 시간이라는 것,

죽음은 그 자체로 삶을 이루는 또 하나의 마디라는 것,

그것을 온전히 긍정할 때 새로운 도약과 생성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는 것.

겨울 밤하늘은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히드라와 남주작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별을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치는 난, 얼마나 행복한가!

원룸 방 한 칸도 얻어 살기 힘든 세상에 자기만의 천문대를 거느리고 사는 난,

얼마나 대단한가!

밤이면 밤마다 저 하늘의 이름 모를 ‘별 밭’을 헤아리는 꿈을 꾸는 난,

얼마나 ‘별 복’ 터진 사람인가!

자, 오늘은 한강과 관악산이 내다보이는, 그리고 아주 가끔 별도 보이는,

솔향기 진동하는 나의 천문대로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한다.

계사년이 의미하는 ‘검은 뱀’에 딱 어울리는 별자리가 요즘 막 떠오르고 있으니!

서양 별자리로 ‘바다뱀자리’,

우리에게 헤라클레스가 물리친 머리 아홉 달린 괴물 뱀으로 익숙한,

‘히드라(Hydra)’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보름달을 약 200여개 겹쳐 놓은 길이의 저 별자리는

천구의 장장 100°에 걸쳐 낮고 길게 깔려 있다.(서양 별자리 중 가장 긴 별자리란다!)

별자리가 원채 낮게 깔리는 관계로

열악한 나의 솔숲 천문대에서는 그중 극히 일부만 보인다.

그래서 비얌이라기보다는, 뭐시기... 굼벵이 정도로나 보인다. 그래도 좋다!

우리 천문대는 굼벵이도 뱀으로 보이고 남을 수준급 신심(信心) 장착하고 있으니!

히드라의 이야기야 뭐 다들 알 것이다.

머리가 하나 잘리면 새 머리가 둘 생긴다는 불사의 괴물 이야기 말이다.

연구실에서 에세이 시즌이 될 때면, 쪽지시험을 볼 때면,

무한증식 하는 그의 머리가 참 부러워진다.

아, 저 머리 반만 내게 있었으면~~! 알고들 계신지 모르겠는데,

동양에도 이와 비슷한 뱀 이야기가 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솔연(率然)’이라는 이름의 뱀이다.

이 뱀은 머리를 치면 꼬리가 달려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비고,

몸통 가운데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힘을 합쳐 저항한다.

머리로 안 되니 몸으로 막는 그 모습,

마치 원고 마감을 앞둔 나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각설하고, 흥미로운 건 이 ‘바다뱀자리’가

그대로 남방 주작 별자리의 나머지 별들과 겹친다는 것이다.

류수(柳宿), 성수(星宿), 장수(張宿). 각각 주작의 부리와 목,

모이주머니에 해당하는 별들이다.

나머지 익수(翼宿)와 진수(軫宿)

바다뱀자리 바로 옆에 면해 있는 ‘컵자리’와 ‘까마귀자리’에 해당하니,

겨울 별자리가 모두 한 큐에 꿰어지는 셈.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인들은 이들 별자리 모두에 “향연”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류수, 성수, 장수는 정확히 남방 주작의 소화기관에 해당한다.

(바다뱀자리로도 마찬가지로 뱀의 머리에서 몸통에 이르는 소화기에 속한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들의 점성학적인 의미는, 모두 ‘제례와 음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컵자리와 까마귀자리 역시 ‘만찬’과 ‘음식’을 상징하는 별자리들이다.

‘컵자리’는 주신(酒神)디오니소스의 술잔이다.

그리고 ‘까마귀자리’는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 먹느라

아폴론의 심부름을 잊은 대~단한 이력의 주인공이다.

왜 이들 모두는 향연 혹은 음식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동서의 점성술사들은 겨울 막바지의 이들 별에서 대체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이 땅과 가장 가까운 낮고 기다란 별자리. 겨울은 대지에 깊은 잠을 부여하였다.

하얀 눈에 덮인 대지는 응축과 부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듬해 봄의 경쾌한 봄눈을 위하여, 고요하면서도 맹렬한 잠 속에 빠져 들어 있다.

‘소진과 소생’의 시기!

이 대목에서 나는 마르셀 그라네의 『중국사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셀 그라네는 겨울의 미덕에 대해 말한다.

대지가 인간의 노동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계절이야말로

인간이 세속적이지 않은 관심사에 몰두하는 데 가장 용이한 시간으로 주어진다.

<중국사유, 121쪽>

겨울은 만물이 얼어붙는 소멸의 시간, 휴식과 충전이다.

소우주인 인간도 마찬가지. 겨울철 인간은 농한기를 맞는다.

놀고먹는 호시절이다.

그 가운데 비세속적인 화두를 향해 자신의 염원을 모은다.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목표가 아니라

본질적인 내적 자기성찰을 기하는 시간이 겨울이다.

겨울철에 벌어지는 농한기의 축제는,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달리

이듬해의 풍년 기원 따위의 현세적인 목표를 지향 하지 않는다.

생(生)과 사(死), 소멸과 재생 등.

존재의 근원을 향한 물음으로 피어오르는 것이, 곧 이 시기의 축제다.

(농한기의 축제에서는) 가능한 한 모든 힘을 동원하여 남김없이 소비시켰으며,

스스로도 완전히 소진되게 했다.

산 자와 죽은 자, 생물과 무생물, 온갖 소장품과 생산물들, 인간과 신들,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모두 한데 뒤섞여 격렬하고도 활기찬 난장을 이루었다.

<중국사유, 122쪽>

유위의 삶이 자아낸 모든 분별과 경계들을 지워나가는 강렬한 디오니소스의 시간!

나와 너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생과 사의 경계 등

삶의 자리에 놓인 모든 장벽들 마다 ‘꽃’이 피어오르게 하는 강렬한 시간!

이 축제는 나를 비우는 무아(無我) 난장이다.

허나 그 도저한 자기 비움이 있기에 소멸과 파괴가 역설적이게도 재생으로,

회춘(回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야말로 소진과 소생의 축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시기에 벌어진 성스러우면서도 광적인 난장을

고대인들은 저 하늘의 별들에 기록해 놓았는지 모른다.

무한증식하는 머리를 가진 바다뱀의 모양으로, 디오니소스의 술잔 모양으로,

까마귀의 모양으로, 혹은 화려하게 날개를 편 상상의 새 주작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것이 오늘 이야기할 남방주작의 별들이다. 눈여겨 봐주기 바란다.

오늘은 별 다섯 개, 통으로 나간다~!

향연의 별자리들 

①주작의 부리 - 류수

먼저 주작의 부리, 류수(柳宿)차례다.

바다뱀자리로 치면 뱀의 머리에 해당한다.

여덟 개의 별이 버드나무 가지가 땅을 향해 드리운 것과 같이 연이은 모양이라 해서

버들 류(柳)자를 썼다.

하지만 가만 보면 버들가지보다는 숟가락, 국자 따위의 주방기구들이 떠오른다.

그래선지 류성은 하늘의 주방장에 배속된다.

주로 음식 창고나 연회장 따위를 주관한다.

이 별이 크고 밝으면 풍년이 들고 먹거리가 풍부해진다고 한다.

지난 한 해 나는 연구실 주방에서 주방장 노릇을 했는데,

아마도 이 류수의 영향을 받은 탓 아닌가 한다.^^

우리가 눈 여겨 봐야할 별은 류수 옆에 붙은 “주기(酒旗)라는 별이다.

뜻을 풀자면 “주막 깃발” 정도 될까나.

이름만으로도 흐뭇해지지 않는가? 그렇다.

우리가 좋아하는 술집 별자리다.

모양도 3개의 별이 소담스럽게 연이은 게 마치 청아한 소주잔이 연상된다.

이 별은 잔치와 음식을 주관한다.

축제의 별, 뒷풀이의 별이다.

이 별이 밝거나, 혹은 오성이 이 별 주위로 모두 모여들거나 하면

천하에 큰 잔치가 생긴다.

②주작의 목 - 성수

다음 차례는 주작의 목, 성수(星宿)되시겠다.

일곱 개의 별이 길게 연이은 것이, 어째 영락없는 주방도구다.

길쭉한 국자라고 하면 적당하려나?

생김새가 흡사 술 푸는 국자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이 별 역시 향연의 별자리로 본다.

먹을 복을 주관하는 주작의 목, 별자리다.

혹은 이 별을 왕비와 신하를 주관하는 별로 보기도 한다.

이 별을 통해 왕비와 신하의 안위를 점쳤다.

그런데 별자리의 변화를 판단하는 성수만의 판단 기준이 있다.

바로 ‘반짝임’이다.

이 별은 유독 반짝반짝 빛나는 특징이 있다.

이 반짝임이 평소보다 격하면 점성학적으로 굉장히 좋지 않은 조짐으로 여겼다.

서양 점성술가들도 이 별의 반짝임에 주목했다.

이 별자리 중에 가장 서쪽에 있는 별은 ‘바다뱀자리’ α별로 알파드(alphard) 부른다.

흔히 이 별은 ‘고독’의 상징으로 통한다. 왜 고독인가?

이 별은 특유의 붉은 빛으로 저 홀로 밝게 빛나기 때문이다.

스산한 겨울 밤에 그 빛은 한눈에 고독한 정조를 자아낸다.

사람들은 이 별을 보고 심장을 떠올렸다.

바다뱀의 형상으로 볼 때 이 별은 뱀의 심장 부위에 해당한다.

심장이 박동하듯 붉은 빛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이 별은 소한 무렵 하늘의 주인이다.

남쪽하늘 낮은 곳에서 심장처럼 펄떡거리는 별자리가 있다면

꼭 눈여겨 봐두기 바란다.

당신은 지금 고독의 별 알파드, 남방주작의 목 성수를 보고 있는 것이다.

③주작의 모이주머니 - 장수

장수(張宿)남방 주작의 모이주머니 별이다.

생김새도 영락없는 모이주머니다.

모이주머니는 음식을 주관하는 곳이므로

이 별은 하늘의 부엌을 주관하는 별로 여겨졌다.

모양을 보면 6개의 별이 사탕포장지 모양으로 연이어 있다.

그중 가운데의 마름모 모양을 이루는 것이 주작의 모이주머니에 해당한다.

이 네 별이 가운데로 모여들면,

모이주머니가 졸아붙는 형국이므로 그 해에 흉년이 든다거나 기근이 발생하게 된다.

반대로 이 별이 밝고 크면 나라의 경제가 번성하고 풍족해진다.

<오른쪽에서 순서대로 류수, 성수, 장수의 위치이다.>

④주작의 날개 - 익수

익수(翼宿)남방 주작의 날개 별자리다.

자그마치 22개의 별이 주작의 화려한 날개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이제까지 별자리들이 술과 음식을 의미했다면,

익수는 연회에 흥을 더할 음악의 별이다.

주작이 커다란 날개로 하늘을 차오르는 모습을 연상해 보라.

날갯짓에 맞춰 세상에 울려 퍼지는 웅장한 바람의 노래가 연상되지 않는가.

예로부터 익성은 예악을 주관하는 별로 여겨졌다.

이 별이 밝고 크면 예악이 흥하게 된다.

익수는 서양별자리로는 ‘컵자리’에 해당한다.

이 별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난무하지만

주신 디오니소스의 술잔이었다는 설이 가장 마음에 든다.

디오니소스의 축제가 벌어질 때마다 한 잔 가득 넘치게 포도주를 따르던 술잔.

이 별은 노래와 술이 어우러진 한바탕 축제와 함께 해온 별인 셈이다.

⑤주작의 꼬리 - 진수

마지막으로 주작의 꼬리인 진수(軫宿)를 보자. 겨울 별자리엔 없는 게 없다.

술과 음악과 노래, 심지어 수레도 있다. (軫)은 수레라는 뜻이다.

이래저래 노는 데 필요한 건 거의 다 갖춘 셈이다.

별의 모습을 보니 네 개의 주황색 별이 한데 모인 것이 영락없는 수레의 모습이다.

그 모양도 굉장히 밝고 아름답다. 그래서일까?

옛 사람들은 이 별자리가 천자가 타고 다니는 수레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이 별자리 곁에는 수레의 바퀴처럼 양쪽의 축이 삐져 나와 있는데,

이는 천자를 보필하는 제후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각각 좌할(左轄)과 우할(右轄)이라 한다.

이들 바퀴 부분이 진수보다 밝으면 나라에 모반이 일어나고,

진수에서 멀어지면 제후가 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한다.

<오른쪽이 익수, 왼쪽이 진수이다.>

겨울 별자리 연재를 마치며- 별을 들어라

소멸과 죽음이 지배하는 시간, 겨울은 응축의 시간이다.

분별된 형상들을 모두 비워내는 시간. ‘나’를 버리고 하나가 되는 시간.

소리 없이 빛나는 저 별들을 바라보다 문득 저 별들이 듣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듣고 있구나!

듣는 ‘나’ 없이도 들리는 게 소리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도, 잠을 잘 때도, 우리는 듣는다.

무언가를 고집하는 ‘나’가 있으면 오히려 들을 수 없다.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니, 라는 말을 하지 않던가.

누군가 말을 안 들어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필시 강한 아집을 가진 사람이리라.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어떤 것에 온전히 귀를 열 수 있다.

듣는 가운데 우리는 ‘나’가 아니라 ‘하나’가 된다.

듣는다는 것은 겨울에 참 어울리는 감각이다.

나는 나를 둘러싼 무수한 존재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러한 관계들 자체가 나다.

이때 듣는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동서남북 사방의 모든 관계들을 하나로 끌어 모은다는 의미다.

우리는 모든 방향의 소리를 듣는다.

뒤편의 소리를, 담벽 너머의 소리를, 방향의 여하에 구애됨 없이 우리는 듣는다.

고로 듣는다는 것은 응축이고, 소진과 소생의 겨울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

의역학에서도 (耳)를 겨울의 수(水)에 배속하고 있지 않던가.

문득 떠오르는 일화 하나가 있다.

어떤 사람이 마더 테레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당신은 기도를 할 때, 신과 어떤 대화를 합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직 신의 소리를 들을 뿐입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신은 그럼 뭐라고 말하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도 그저 들을 뿐입니다.’

나도 듣고 신도 듣는다. 이것이 겨울의 풍경이고,

(水) 기운을 쓰는 우리 마음의 풍경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듣는다는 것, 그것은 기도이고, 시(詩)이고, 그리고 별이다.

별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나만의 천문대에서 별을 보며 지낸지 어느덧 일 년 반이 지났다.

있는 대로 눈을 찡그려 가며 뵈도 않는 별자리를 그리려 애쓰던 시간들.

가끔 내 눈 앞에 파편의 별들이 별자리로 떡하니 나타나던 날, 그 희열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저 별과 대화할 것인가?

잃어버린 옛 천문학의 자취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고 ‘점성학’이라는 해괴한 분야를 파 들어갔다.

헌데 일 년 반에 걸친 대대적인 삽질(?)끝에 배운 것이 있다면 이것 하나다.

별은 듣는 것이라는 거. 별을 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왜냐면 별도 듣기 때문이다.

별은 세상을 주재하고 주관하는 게 아니라 오직 듣는다.

온전히 듣기 때문에 세상과 (應)하고 감(感)하는 것이다.

보려고 하면 볼 수 없다.

자 이제 하늘을 보지 말고 듣자!

<봄 별자리 이야기>

청룡이여 고개를 들라 -각수와 항수 이야기

하늘의 바가지 기울다

사흘짜리 설 연휴를 맞아 쾌재를 부르며 고향에 다녀왔다.

별 홀릭의 삶을 살고 있는 내게 드디어 별 다운 별을 볼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촌놈들의 자부심이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

초저녁부터 우글거리며 밝아오는 별무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댁들 이렇게 별 밝은 동네 본 적 있수?!^^

사실 어릴 때 쳐다도 안 보던 하늘이었다.

푸르고 붉은 빛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별빛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밤늦게 혼자 화장실에 갈 때나, 친구들이랑 밤고기를 잡으러 갈 때,

행여나 별과 눈이 맞을까 눈 깔고 다니던 나였다.

별자리 공부를 하고 나서

별 하나하나 눈여겨보기 시작하니 고향마을 전체가 새롭게 보인다.

토끼가 유독 잘 잡히던 뒷산엔 북두칠성 자루가 걸리고,

소백산 산신각이 있는 앞산 위에는 시리우스가 서늘하게 빛나고 있다.

그동안 모른 채 지내왔던 고향 마을의 밤 얼굴을 처음 대면한 셈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는 김춘수의 시구가 오버랩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만 사소한 사고가 터져 버리고 말았다.

별 좀 보겠답시고 있는 대로 똥폼을 잡다가, 벌러덩 뒤로 나자빠지고 만 것이다.

허허벌판에서 저 혼자 말이다.

제가 서 있는 곳이 빙판 위인 줄도 모르고,

좋다고 하늘 구경을 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한때 김병만을 방불케 했던 나의 야성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얼음 깨고 계곡에 들어가

맨발에 맨손으로 개구리를 낚아 올리던 것도 모두 다 옛일이다.

어찌나 호되게 넘어졌는지 아직도 그때 삐끗한 손가락이 얼얼할 정도. 하지만 괜찮다.

억만금을 주고도 못 살, 가슴시린 별밭의 퍼레이드를 아주 실컷 만끽했기 때문이다.

얼음판 위에 패대기쳐진 내 얼굴 위로 쏟아질 듯 이글거리는 무수한 별들!

놀라운 건 이제 그들이 누군지 알겠는 거다.

저것은 황제 헌원 별자리, 저것은 지난번에 연재했던 삼수…

그 살 떨리는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힘겹게 자판을 두들겨 본다.

자, 오늘부터는 봄철 별자리 이야기다.

입춘이 지난지도 어언 열흘. 바야흐로 봄이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봄의 껀덕지를 찾을만한 건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눈앞에 펼쳐진 설산, 매섭게 볼을 때리는 바람, 대지는 아직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다.

새로 오신 봄님은 세상천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눈치들 채셨을 테지만, 답은 ‘하늘’이다.

『내경』에 이르기를 사람의 몸은 우주와 응한다 했다.

사람에게 팔 다리 사지가 있듯이 세상엔 봄·여름·가을·겨울의 네 계절이 있고,

사람의 팔 다리가 각각 세 마디로 이루어지듯이 한 계절은 세 달로 나뉜다.

계절의 기운은 3이라는 수가 의미하는 바, 천지인(天地人) 순서로 갈마든다.

첫 달에 계절의 기운은 하늘에 이르고, 둘째 달에 땅에 도달한 뒤에,

마지막 달에 사람에 이르는 것이다.

봄의 초입인 인(寅)월, 봄기운은 우리 머리 위, 하늘에 머물러 있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자. 시커멓다고 다 같은 밤하늘이 아니다.

저 하늘 어딘가에는 생동하는 봄의 목기(木氣) 잔뜩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봄은 저 하늘에 어떤 변화를 몰고 왔는가?

가장 알아차리기 쉬운 것은 북두칠성이다.

북두칠성의 바가지 있지 않은가?

전문용어로 이를 (魁, 으뜸)혹은 선기(璇機)라 한다.

이 바가지에 무엇이 담길까?

답은 바로 양기(陽氣).

어둠이 깔린 뒤 북쪽하늘 지평선 위에 북두칠성이 떠오른 모습을 관찰해 보자.

양기가 모두 졸아들고 음기가 극점을 넘기는 동지(冬至) 되면,

북두칠성은 바가지를 하늘 위로 받친 채 떠오른다.

마치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얼마 안 되는 양기 나마 보충하려는 듯이!

동지가 든 음력 11월의 괘상을 지뢰복으로 나타낸다.

지뢰복의 복(復) 돌아온다는 뜻이다.

북두칠성 바가지에 조금씩 양이 차오르며,

새로운 약동과 도약의 계절을 준비하는 것이다.

반대로 하지(夏至)가 되면 북두칠성의 바가지는 하늘위에 거꾸로 뒤집힌 형상이 된다.

안에 차버린 양기가 옴팡 쏟아져 버렸으므로

이제는 거꾸로 음기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를 괘상으로 천풍구라 한다.

(姤)란 우연히 만난다는 뜻,

음기가 차오르면서 나뉘어 있던 음과 양이 우연히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즈음 밤하늘의 북두칠성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인월의 북두칠성은 북쪽 하늘에 수직으로 서 있다.

그러면 어찌 되겠는가?

바가지에 담긴 양기가 조금씩 넘쳐 흐르지 않겠는가.

상상들 해 보시라!

동지로부터 서서히 차오르던 양기가

바가지가 기울면서 왈카닥 쏟아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하늘로부터 양기가 터져 나오는 달,

겨우내 음에게 농락 당하던 양이 드디어 기지개를 켜고 몸을 뒤틀기 시작한다.

음의 컴컴한 감옥에서 양이 발을 구르며 도약하는 달,

이로써 봄의 시작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 울려 퍼진 셈이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그 모습, 상당히 무시무시하다.

고백컨대 나는 우뚝 선 북두칠성의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고 나자빠지고 말았다.^^ )

고개를 들라, 청룡 

봄을 알리는 두 번째 표지, 동방의 별들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천구(天球)라는 거대한 우산 위에 동쪽 영역을 담당하는 별들.

동쪽은 무언가 떠오르는 영역이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는 곳, 그곳이 동쪽이다.

고대의 별바라기들은 거기서 천체들이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탄생, 창조, 소생이 일어나는 곳, 그것이 곧 동쪽이 의미하는 바다.

라틴어로 동쪽은 오리엔트(orient)인데, 이는 동사 ‘떠오르다’에서 파생된 단어다.

인디언 속담에는 또 이런 얘기가 있다.

‘난관에 봉착했을 때 동쪽을 보고 생각을 하면 답이 나온다’는 말.

이것이 뭔 봉창 두들기는 소리당가,

동쪽에 대체 뭐가 있길래! 무엇이겠는가?

뭐든 떠오르고 새로 시작하게 하는 힘이 동쪽에 있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이를 치유의 힘으로 활용했다.

잊었던 물건이 어디 있는지 떠오르고,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출구가 솟아나고!

우리도 뭔가 간절한 염원이 있다면 동쪽을 바라고 기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천문에서는 동방의 별에 청룡의 형상을 부여했다.

청룡은 동방의 목(木) 기운을 주관하는 수호신이다.

봄철에 씨앗이 터지고(甲), 몸을 비틀며 싹이 터 오르듯이(乙),

청룡이란 짐승은 몸을 비틀며 하늘로 솟아올라

소생의 계절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이다.

오늘부터 연재할 7개 별자리 (角), 항(亢),(氐), 방(房), 심(心), 미(尾), 기(箕)바로 이 청룡의 몸을 이루는 별들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밤하늘의 청룡을 만나러 갈 차례다.

<동청룡의 별자리>

동방청룡의 첫 번째 별자리, 각수를 찾아보자.

자정 무렵, 이 별은 동쪽 하늘에서 떠오른다.

춘분은 지나야 완연한 봄의 시즌이 시작되므로

아직 동방 청룡 별자리들의 전성기는 아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청룡의 때가 도래함을 알리는 봉화불이 솟아오른다.

그것이 청룡의 뿔 각수(角宿)다.

각수를 찾는 법을 알아보자.

각수를 찾으려면 먼저 북두칠성을 찾아야 한다.

북두칠성의 자루 부분이 그리는 유려한 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무지막지한 밝기로 빛나는 별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목동자리의 아크투루스다.

북두칠성이 속한 큰곰자리를 수호하는 ‘곰의 수호자’라는 뜻.

동양별자리로는 항수(亢宿)에 속한 대각성(大角星)이라 불린다.

여기서 곡선을 따라 더 나아가 보면 또다시 만나게 되는 1등성이 있는데,

이 별이 그 유명한 ‘스피카’, 동양별자리로 치면 각성(角星)이다.

이때 북두칠성에서 아크투루스를 거쳐 스피카에 이르는 크고 아름다운 곡선을

봄철 별자리를 찾는 기준선인봄철의 대곡선(the great spring curve)’이라 한다.

각수(角宿)란 동방 청룡의 뿔이다. 두 별이 마치 뿔처럼 솟아있는 모양이다.

두 별 중 남쪽별을 좌각성이라 하는데, 이 별이 방금 설명한 스피카다.

반대로 북쪽 별은 우각성이라 한다. 이 별은 동방의 목(木)기운의 결정체이다.

목은 곡직(曲直)이라 했다.

뒤틀고 굽어지며(曲) 앞으로 추진해 나가는(直)기운이라는 얘기다.

새싹이 두꺼운 지표를 뚫고 솟아오르는 것,

태아가 좁고 긴 산도(産道) 비집고 태어나는 것,

모두 이 목의 추진의 기운을 쓴 예이다.

짐승들이 머리에 달고 있는 뿔(角) 이러한 목기운의 결정체이다.

상대를 밀치고 힘을 겨루기 위한 무기, 이는 강력한 목기운을 쓰는 것이다.

각수 역시 괜히 뿔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별자리는 군사적 공격의 상징이다.

이들은 군사, 장수 등을 의미하는 별로

이 별을 보고 왕실의 위엄과 정치의 조화를 점친다.

흥미롭게도 좌각성과 우각성 사이는 해가 지나는 황도와 겹친다.

목기운의 결정체인 별 사이로 양기 덩어리 태양이 지난 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런가하면 우각성 위로는 달이 지나다닌다.

또 이들 주변으로 오성이 모두 지나다닌다.

그렇기에 각수는 동서를 막론하고 점성학적으로 굉장히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일단 동양에서는 전쟁과 군사를 점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넘어가자.

다음 별자리는 청룡의 목에 해당하는 항수(亢宿)다.

각수 바로 옆에 붙어 있으니 찾기 쉽다.

생김새는 네 개의 별이 '괄호〔 〕'모양으로 이어진 모습,

(亢) 목이란 뜻이니 이를 보고 청룡의 목이라 연상했던 것이다.

나라의 관료제로 보자면

목청 좋은 소리로 크게 외치며 정사를 보는 것은 관리들의 몫이다.

그래서 이 별은 하늘의 관료를 상징한다.

천하의 예법과 송사와 재판 등 국가 행정의 영역들을 점치는 별자리로 해석되었다.

이 별 역시 해와 달 그리고 오성이 운행하는 길목에 있기에

점성학적으로 중요한 별로 각인되어왔다.

처녀자리, 목은 인(仁)함이다

그나마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 별자리로 치면

각수와 항수는 처녀자리에 속하는 별들이다.

각수가 처녀의 팔이라면 항수는 처녀의 다리다.

신화와 별자리가 생겨난 맥락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각수 항수와 처녀자리 사이에 어떤 공통분모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별은 일월오성이 지나는 목 좋은 곳이기에,

동서의 점성술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던 동쪽 하늘의 블루칩이었다.

그렇담 서양에서 이 별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까?

별자리의 주인공은 페르세포네라는 처자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로 태어났다.

대지의 여신의 혈통을 이었으니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그 어떤 꽃을 갖다 대어도 페르세포네의 미모 앞에서는 무색했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꽃밭을 산책하던 페르세포네에게 무시무시한 재앙이 들이닥친다.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며 땅이 갈라진 것이다.

이윽고 갈라진 땅에서 지하세계의 지배자 하데스가 튀어 나왔다.

이 모든 것은 페르세포네를 연모해오던 하데스의 납치극이었다.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아내가 되었다.

졸지에 딸을 잃은 데메테르는 비탄에 휩싸였고,

이윽고 대지엔 가뭄과 흉년이 찾아들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제우스가

하데스를 설득하여 페르세포네 친정 보내기 프로젝트를 감행한다.

그 결과 세상엔 다시 생기가 찾아들게 되었다.

하지만 하데스와 약정한 석 달 동안 만은 꼭 시댁에서 보내야 했다.

페르세포네가 시댁에 가 있는 인고의 석 달 동안을

인간들은 겨울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여자들에게 시댁이란 하데스의 영역, 곧 지옥이라는 것,

이것은 만국 공통의 진리인가 보다.^^

저승에서 시집살이 하고 돌아온 우리네 바리데기 이야기와도 어딘지 흡사하지 않은가.

이집트에서는 이 별을 이시스라는 여신으로 여겼다.

이시스는 대지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의 딸인데,

오빠 오시리스의 아내가 된 사연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 역시 팔자 사납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여자였다.

남편이자 오빠인 오시리스가 그만 동생 세트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죽고 만 것이다.

그러자 이시스는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사방에 흩어진 남편의 유해를 찾아낸 뒤

소생시켰으나 되살아 난 남편은 저승으로 돌아가 저승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 한다.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유해를 찾아 떠나는 이시스,

이집트에서는 하지무렵 비가 내리는데 이 비를 이시스의 눈물이라 불렀다 한다.

이윽고 나일강이 범람하면 이집트 땅에도 농번기가 찾아온다.

이 신화 역시 어딘가 비스무리 하지 않은가.

페르세포네이건, 이시스이건, 무미건조한 동양의 각성이건,

어쨌든 밤하늘에 이 처녀자리가 밝아 오를 무렵이면

사람들은 척박한 시절이 지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호시절이 온다고 여긴 것이다.

순결한 처녀의 얼굴처럼 청초한 백색으로 빛나는 별 스피카,

북두칠성과 대곡선으로 연결되는 이 별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소생과 부활의 축제를 벌여나갔다.

마치 시집살이 하고 돌아온 딸내미를 반기는 친정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말이다.

<목동자리의 빨간 동그라미는 위에서 살펴본 '곰의 수호자' 아크투르스이고,

처녀자리의 노란 동그라미는 생동하는 봄의 증표 '스피카'>

고로 이 별은 그냥 얼굴 반반한 처녀의 상징이 아니다.

감내하고, 또 소생하는 인고의 인간형의 원형이다.

세계 어느 신화권에서나 이 별은

온갖 고초를 견뎌낸 인고의 여신으로 묘사되었음을 상기해보라.

저승 지옥을 넘나들며 혹독한 시련을 감내해낸 존재들.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시련을 온전히 받아들인 덕에 이들은 해방과 소생의 기쁨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랬기에 더욱 겨울의 어려움을 딛고

소생하는 봄철의 여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리라.

문득 이 별에 인할 인(仁)자를 붙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에서는 목(木)의 덕(德)으로 인(仁)을 꼽고 있다.

인이란 무엇인가.

(二)의 사람(人)이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자의(字意),

사람들은 그저 사람과 사람간의 어울림 정도로 간단히 이해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이상의 얘기들로 미루어 볼 때,

인을 단순히 성격 너그럽다는 류의 얘기로 치부하면 안 된다는 감이 확~ 오지 않는가.

공자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

인이라 했고,

그레이엄은 이를 ‘타인에 대한 사심없는 관심’으로 해석했다.

<『도의 논쟁자들』, 47쪽>

당최 이 무신 소린가?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해보자.

인이란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상대주의에는 나와 타자의 격차를 통해

나를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인자(仁者)에게는 지켜야 할 나[我]가 없다.

그렇기에 온전히, 있는 그대로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의역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인이란 수생목(水生木), 즉 수기(水氣)를 써서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고,

목기를 써서 치고 나갈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시련과 난관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감당하면서

(물은 아래로 흐르고 어떠한 환경이건 그에 자신을 맞춘다)

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면서,

원수를 자식으로 삼을 수 있는 무한한 애정을 보내는 것

(목은 환경을 초극하는 생성의 기운이다), 그것이 인이다.

닥쳐오는 모든 존재들을 감당하고, 타자에 대한 온전한 열림을 살아가는 것.

즉 인이란 도저히 그럴 수 없으리라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고,

그런 뒤에 부활과 소생의 새싹을 들어 올리는 것이다.

바야흐로 봄이다.

희망찬 기운이 감도는 이 봄,

서울 하늘에서도 어렵지 않게 백색의 청초한 별 스피카를 찾을 수 있다.

저 뿌연 하늘에서 처녀자리, 각성, 항성을 찾아보자.

어떤가, 소생하는 봄의 힘찬 박동소리가 느껴지지 않는가.

우주의 축(軸) 맞춰라 -조율의 별 저성 이야기

음양이 조화되는 묘월의 별, 저성

하도 볕이 좋기에 간만에 산책길에 나섰다.

동면하던 짐승들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

여기 쓰인 ‘놀랄 경(驚)’자를 보시라!

그냥 잠에서 깨는 게 아니라,

우레 소리에 깜짝 놀라 후다닥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약동하는 목(木)의 분출력!

죽은 듯 잠자던 만물이 뿅~하고 솟아오르는 때!

이것이 경칩 무렵의 풍경이다.

산책길에서 나는 과연 경칩다운 풍경과 마주했다.

대지는 아직 헐벗은 모습이지만 어디선가 물씬 봄의 기운이 전해져온다.

훈훈한 봄바람을 만끽하려는 인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건 모두 서론 격에 불과했다.

산책길이 끝날 무렵 진정한 경칩의 주인공을 만났기 때문이다.

굴 밖으로 나온 굼벵이, 개구리 따윈 없다.

대신에 소생의 목기(木氣)를 한껏 머금은 ‘놀란 칩충(蟄蟲)’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얼마 전까지 이름 모를 병으로 두문불출하던 장금샘이었다.

어제까지 누워있다 경칩 날 비로소 기운을 차렸다는 장금샘.

용솟음치는 경칩의 기운을 받고 드디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

병고에 시달리느라 움츠러든 등과 어깨가

따스한 봄볕에 비로소 활짝 펼쳐지는 듯 했다.

(소생하는 봄기운을 잔뜩 받으셨으니 앞으로는 건강 잃지 않으시길 바래요~!^^)

아무튼 이로써 묘월(卯月)이 힘차게 그 첫발을 내디딘 셈.

봄의 목기가 대지에 도달하는 때, 봄의 기운이 성(盛)해지는 때가 묘월이다.

(卯) “어떤 물건을 반으로 갈라놓은 모양을 상형”한 글자다.

아마도 묘월의 중기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春分)이 온다는 데서 딴 이름이지 싶다.

동지 지나고부터 서서히 자라난 양기가

드디어 음기와 견주어 조화를 이루게 되는 시기.

한마디로 잃었던 음양의 저울추가 다시 균형을 되찾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춘분보다 보름 앞선 경칩 역시 마찬가지다.

옛 사람들은 잠자던 짐승이 우레 소리에 놀라 뛰쳐나온다고 표현했지만,

우주의 무게추가 화평해진 것을 감지한 짐승들이

미리 박차고 나온 거라 봐도 무방할 듯싶다.

움츠러든 주름이 펼쳐지는 시기,

지난 시간의 후퇴를 힘찬 약동으로 밀어 올리는 시기가 곧 묘월인 것이다.

낮과 밤, 음과 양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시기,

밀쳐냄과 당김이 평형을 이루는 시기,

열림과 닫힘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시기,

접힘과 펼쳐짐이 교대되는 시기!

닫힘이 있었기에 열림이 있고, 물러남이 있었기에 나아감이 가능하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조화란 말인가!

오늘 알아볼 주인공은 바로 이 묘월의 심벌(symbol) 별자리이다.

그 이름 바로, 저수(氐宿), 동방 청룡의 가슴에 해당하는 별자리다.

이 별자리는 음양의 기운이 화평해지는, 잠자던 생명도 놀라서 깨어나는,

묘월 무렵의 풍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자, 오늘의 주인공 저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천자의 사생활 - 저수이야기

『천문류초』에 실린 <보천가>를 보면,

“저(氐)는 네 개의 주홍색 별이 말(斗)을 기울여 쌀의 양을 헤아리는 형상”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절묘한 표현이다!

네모지게 연이은 별자리의 모양은 영락없는 됫박의 모습이다.

저 네모 별자리를 기울여 금방이라도 곡식을 퍼 올릴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됫박 모양이라는 점이 아니라,

저울추를 기울여 됫박의 무게를 잰다는 대목이다.

아마도 저성을 보고 <보천가>를 지은 옛 사람은

묘월에 음양의 기운이 평형을 되찾는 모습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 이름에 ‘근본 저(氐)자가 쓰인 것도,

음양이 균형을 이루며 우주의 기운이 근본을 다잡는다는 것을 나타내려던 것 아닐까?

<동청룡 : 각항저방심미기(노란색 표시) 중

붉은 색 점이 됫박 모양으로 연결된 것이 바로 저(氐)성(星)이다.>

그렇다면 저수(氐宿)는 무엇을 점치던 별자리였을까.

지난 회에 연재한 각수와 항수와 마찬가지로

저수 또한 점성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입지에 자리한 별이다.

저성(氐星)의 아래로 2척(尺)이 되는 지점에 오성과 해와 달이 지난다.

고대의 점성가들은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조짐을 읽어냈을까?

우선 동방 청룡의 별자리 중 대각성(大角星)을 천자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저수에 연이어 있는 방수(房宿)는 임금의 집무실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저수는 임금이 집무실로 가기 전에 머무는 장소인 셈,

그렇기에 이 별을 ‘천자의 침소’라고 보았다.

마침 그 아래로 일월오성이 지나니 그 모습을 보고 ‘천자의 사생활’(?!)을 점친 것이다.

이 별자리는 비(妃) 후궁, 그리고 대신들의 세력을 의미했다.

이 별이 밝고 바르면 궁실에서 왕을 잘 보필하지만

여기에 오성이 지나거나 일월식이 있으면 왕실에 내란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순지, 천문류초, 82쪽>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저울추에 됫박을 매단 모습을 연상시키는 저수를 두고

왜 천자의 침소를 연상했던 것일까?

우주엔 음양이 조화되는 황홀한 드라마가 펼쳐지는데,

이를 두고 왜 하필 야시시한 천자의 사생활 따위를 점쳤던 것일까.

그리고 설마하니,

고대의 늙다리 왕들이 궁녀의 보필을 받아야 얼마나 받겠느냔 말이다.^^;

약간 므훗한 이야기라 입에 담긴 뭣하다만, 묘월은 대대로 짝짓기의 계절이었다.

왜냐면 음양이 균형을 이루는 때이니까.

고대 의서를 보면 하나같이 인간들이

시도 때도 없이 성생활을 하며 정기를 소모한다고 토로하고 있지 않던가!

우주와의 소통 고리가 끊어져 버린 인간은 성생활에 사철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원래 짝짓기란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춘, 추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남산 산책길에서

장끼와 까투리가 뒤엉켜 있는 장면을 마주친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짝짓기를 하고 있었던 거란 말인가!^^;;; 국유지에서,

그것도 훤히 트인 대로변에서... 에잇, 설마?!

이 의아함은 전적으로

(性)을 내밀한 것으로 여기며 죄악시 하는 근대인의 감각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는 성을 불경한 것이라 여기며 입에 담기 꺼려한다.

음지의 성을 양성화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 모두는 고대의 감각으로 보건대,

몹시도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성은 건전한 사회상을 이룩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렇기에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주적 존재로서의 자기실현의 과정이었다.

고대의 성왕들은 성을 금기시하고 관리하려들지 않고,

오히려 우주적 중매쟁이의 역할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월령]에 기록된 묘월의 풍습을 보자.

이 달에는 제비가 남쪽에서 날아온다.

제비가 오는 날에 소, 양, 돼지의 세 가지 희생을 갖추어

고매신(高禖神)에게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제사를 지낸다.

이때 천자가 친히 행차하는데,

후(后)와 비(妃)는 아홉 빈(嬪)을 거느리고 천자의 앞에 가서 기다린다.

그러면 천자는 곧바로 왕림하여 제례를 거행하는데

천자는 고매신상의 앞에 나아가 몸소 궁대로서 허리를 감고

고매신 앞에서 활과 화살을 받는다.

<여씨춘추12기, 56쪽>

이는 옛날에 고신씨(高辛氏)의 비(妃)인 간적(簡狄)

제비의 알을 삼키고 설(契)을 낳았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제사다.

여기서 고매신(高禖神)이란 아들을 낳게 해주는 결혼의 신, 우주의 중매쟁이다.

(고매신의 매禖자는 중매 매媒자와 통한다.)

천자는 곧 고매신의 화신으로서 음양의 교화,

그리고 대지의 생육과 번성을 상징하는 의례를 시행한 것이다.

고매신에게 받은 활과 화살은 주지하듯, (陽)의 상징이다.

이로써 천자는 대지라는 음(陰)의 영역에 양기를 방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 셈이다.

또한 양기의 생동을 돕기 위해 천자는 왕실의 악공들에게 음악과 춤을 장려했다.

노래와 춤을 통해

언 땅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생동하는 봄의 기운에 응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문(門) 수리하게 했다.

이는 음양이 드나드는 문이 제 역할을 다 하게 돕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인간집단은 우주의 음양이 서로 사귀고 조화하여

쉼 없는 창조와 생성(生生不食)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 의례는 어긋난 우주 질서를 다잡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무지갯빛’을 띤 우주적 축제였다.

자, 이제 다시 하늘을 보자.

저 하늘의 저수는 음양이 교통하는 하늘의 문(門)이다.

고대 점성가들은 저 별을 통해 음양의 조화되는 모습을 점친 것이다.

천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우주의 사생활,

만물의 생육과 번성을 점치던 별자리인 셈이다.

우주를 조율하라

묘월의 풍습 중 재미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도량형을 맞추는 일이다.

온갖 저울추와 됫박들 등의 도량형을 점검하고 고르게 한다.

왜냐? 우주의 음양이 평형을 이루는 때이므로

기울어진 저울추에 영점을 잡기 좋은 때라고 본 것이다.

저수의 상(像)이 저울추에 됫박을 매단 모습이라는 점도 이와 상통한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서양 별자리로도 이 별이 저울의 형상이라는 점이다.

저수의 일부분은 서양의 천칭자리와 겹친다.

그리스인들은 이 별자리를 전갈자리의 집게발이라 보았다.

그래서 이 별자리의 알파별(별자리의 별 중 가장 밝은 별)

‘주벤엘게누비’라는 이름을,

베타별(별자리에서 알파별 다음으로 밝은 별)에 ‘주벤에샤마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두 전갈의 집게발이라는 뜻이다.

(그중 주벤에샤마리는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녹색 별로 유명하다.)

<빨간줄이 베타별인 주엔에샤마리, 노란줄이 알파별인 주벤엘게누비>

그런데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는 이 별자리의 신화를 재창조했다.

당시 이 별자리가 추분점에 위치한다는 데 착안한 것이리라.

(물론 지금은 세차운동으로 당시와는 격차가 생겨버렸지만.^^)

안정된 통치기반을 갈망했던 그는 하늘의 별들 중에서도

누군가 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이 별을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에아가 손에 쥔 천칭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신과 인간이 교통하던 황금시대가 저물고 인간이 갈수록 타락의 일로를 걷게 되자,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에아는 깊어가는 분쟁과 갈등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저울추를 기울이며 옳고 그름을 따졌다.

하지만 신과 인간의 관계가 어깃장이 나버린 철의 시대가 되자,

그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인간들의 세계를 버려두고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고 말았다.

로마인들은 지난 시간에 소개한 처녀자리를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에아라고 여겼고,

여신의 손에 들린 천칭이 이 별자리, 천칭자리라 생각했다.

동양인들도, 서양인들도 모두 이 별을 우주의 저울추, 천칭이라고 여겼다.

동서의 별자리에 이렇듯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점, 경이롭지 않은가?

우주의 실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자리를 성찰하려고 했던

고대인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동서의 점성가들은 공히 저 하늘의 저수 혹은 천칭자리에서

우주의 조화와 균형을 읽어냈다.

치우친 기운을 다잡으려 우주가 거대한 용트림을 하는 시기!

바로 저성이 뜨는 묘월의 풍경이다.

묘월을 맞이하야,

우리도 기울어진 일상의 무게 중심을 다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봄철엔 왜 사냥을 금지하는가 - 전갈자리와 오리온 이야기

1. 삼세의 무게를 간직한 하늘

불교에서는 십세(十世)의 시간이 모여 한 찰나를 이룬다고 말한다.

내가 살아 숨 쉬는 지금 여기의 시공은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무수한 인연조건들의 결집체라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시공이 겹쳐져 지금-여기를 만든다.

오메~ 심오한 거!

알듯 모를 듯 고매해 보이는 불교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하는 길이,

나는 하늘을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곧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저 하늘을 밝히는 무수한 별들,

그야말로 무수한 중생들이 뒤얽힌 중중무진의 그물망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계절, 하나의 시간, 이런 생각들은 인간이 지어낸 분별상에 불과하다.

쉼 없이 유동하는 저 하늘을 인간들의 편의상 특정 시공간으로 고정시켜 놓았을 뿐,

별이란 그 자체로 무수한 중생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관계망들의 조합인 것이다.

정화스님이 말씀하시길,

“차별 없는 인연 자체의 변화에서 온갖 차별이 나오므로

차별된 낱낱은 인연 전체의 무게를 담고 있는 차별이 되고

인연을 모두 담고 있는 차별이기에 인연의 각성에서 보면

차별된 모습 그대로가 차별을 떠난 실상이 된다고 했다.

<육조단경, 20쪽>

우리 인간이란 종족은 뭐든 쪼개고 분절하려 든다.

그래야만 뭔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 하늘의 별도 그리하여 자잘한 조각들로 파편화 되고 말았다.

저 별은 춘분의 별, 저 별은 하지의 별,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별자리들의 조각 하나하나에서,

그것들마다에 전체 우주의 무게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읽어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별자리에서 인연의 총체성을 읽어낼 수 있을까?

낱낱의 별자리 뿐 아니라 별자리들의 관계와 판세를 함께 읽어야 한다.

이걸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 배우는 몇 개의 별자리만 기억해도,

어렵지 않게 삼세(三世)시간이 어우러져

하나의 하늘을 이루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자정에 남쪽 하늘에 뜨는 별을 그 계절의 기준 별자리로 삼는다.

그렇기에 해질녘에는 과거의 하늘이 남쪽하늘을 지배하며,

동틀 무렵에는 미래의 하늘이 남쪽하늘을 지배하게 된다.

이건 하늘을 시간이라는 분별 기준으로 쪼개 본 예다.

<각 계절마다 밤하늘을 장식하는 대표 별자리들>

공간이라는 틀로 쪼개볼 수 도 있다.

북쪽 하늘은 영원의 별들인 주극성들이 자리를 채우고,

동쪽하늘은 미래의 별, 남쪽하늘은 현재의 별,

서쪽 하늘은 과거의 별들이 채우고 있다.

겨울의 별은 여름의 별을 밀어내고, 봄의 별은 가을의 별을 밀어내며 떠오른다.

쉼 없이 운행하는 천체들이 이루는 운행과 순환의 향연!

하나의 세력이 저물면서 동시에 새로운 장이 펼쳐지는 것,

이 거듭되는 갱신(更新)의 연속이 곧 우주의 호흡(呼吸)이요, 운율(韻律)이다.

얼마 전 약수역 부근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면서 나의 중요한 일과인 별 보기에 변화가 생겼다.

국립극장 지나서 반얀트리 호텔을 끼고 있는 성곽길이

나의 새로운 천문대가 된 것이다.

전에는 관악산이 내려 보이는 전망대에서 남쪽 하늘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는데,

이제는 동서의 별들을 훨씬 폭넓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쪽 하늘을 등지고 이마 위에 동쪽의 별을 이고 가는 나의 퇴근길!

요즘엔 밤마다 동쪽 하늘로 나를 마중 나오는

스피카의 마성(魔性)가득한 빛에 푹 빠져 있다.

이따금 고개를 돌려 서쪽하늘로 빠져 나가는

겨울 별자리들의 차고 서늘한 빛깔을 음미하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밤하늘에는 동쪽 하늘로 새로운 별들이 밀려오며,

겨울 하늘에서 제일 알아보기 쉬웠던 오리온은 후퇴하고 있다.

서쪽 하늘에 걸린 오리온이라,

그야말로 시간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저물어가는 것들이 향하는 곳,

서방(西方)이란 곧 지나온 시간이 머무는 장소이며,

현재의 내가 있도록 준비한 모든 시절들의 총체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서쪽 하늘을 보면 신께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서쪽 하늘을 향한 그들의 묵상과 경배는 곧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인연에 대한 감사의 기도였다.

흘러가는 것으로 하여금 흘러가도록 두고,

새로 다가올 인연에게로 온전히 나를 열어 두는 것,

이것이 인디언들이 서쪽 하늘에서 배운 삶의 지혜였다.

하여, 지금 무슨 별이 뜨고 있는지 못지않게, 무슨 별이 지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사라지고 있는 것들의 궤적이 지금의 나의 인연조건을 불러들이고 있으므로.

소멸의 서방(西方) 온전히 내다보는 혜안을 가질 때,

현재의 자리를 온전히 성찰하는 혜안을 가지게 될 것이다.

2. 오리온이 저물고 전갈자리가 온다

오늘 썰을 풀 주인공은 전갈자리다.

질투와 복수의 화신이라는 전갈자리.^^

동양의 별자리로는 방수(房宿),심수(心宿), 미수(尾宿)가 이와 겹치는데,

여러모로 묘하게 겹치는 대목이 많다.

그래서 오늘은 이례적으로 전갈자리 이야기를 먼저 풀어보려 한다.

사실 앞의 긴 서론은 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 깔아 둔 포석이었음을 고백한다.^^

오늘의 주인공 전갈자리는 대척점에 자리한 오리온자리와 늘 함께 이야기 된다는 것.

전갈자리가 떠오르며 오리온이 진다.

이 무렵의 밤하늘엔 전갈과 오리온의 쫒고 쫒기는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지는 셈.

자, 그렇다면 오리온이 저물고 전갈자리가 오는,

저 하늘의 풍경은 어떤 신화를 동반하고 있는 것일까.

전갈자리는 원래 지난 시간에 다룬 천칭자리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전갈자리의 유려한 S자 곡선이 전갈의 몸체고

천칭자리의 네모꼴이 전갈의 집게발인 셈이다.

그러다 로마 황제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발표하면서 천칭자리를 따로 떼 놓았고,

이 가엾은 전갈은 졸지에 집게발이 잘린 신세가 되고 말았단다.^^

어쨌거나 이 좋은 봄날, 왜 하필 징그런 전갈이란 말인가?

하지만 무시마라,

겉모습은 징그러울지 몰라도 이 전갈, 나름 사연 있는 전갈이다.

봄 하늘에 난데없이 전갈을 풀어 놓은 장본인은 태양의 신 아폴론.

전갈의 임무는 눈꼴 시린 한 닭살 커플을 방해하는 것이다.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을 감행하고 있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사냥꾼 오리온.

아르테미스의 오빠인 아폴론은 오리온과 결혼하려는 아르테미스를 막기 위해

간계를 써, 아르테미스로 하여금 오리온을 쏘아 죽이게 한다.

비통한 연인의 막장 러브스토리에 마음이 동한 제우스는

오리온을 별자리로 만들어 아르테미스의 슬픔을 달래주려 하지만,

아폴론은 이에 질세라 전갈을 보내 별이 된 오리온을 뒤쫓게 하였다.

별이 되어서도 쫒고 쫒기는 비통한 운명의 주인공이란!

재미있는 것은 카이사르가 전갈자리에서 집게발 부분을 떼어내

천칭자리를 만들어 버린 이후로 전갈자리의 신화가 그럴듯하게 윤색되었다는 점이다.

이 전갈은 사랑하는 연인을 갈라놓은 죄로 집게발이 잘려 버렸다는 식으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문다고 했던가.

이 징한 전갈은 집게발 없이도 여전히 오리온을 뒤쫓고 있는 중이다.

집념과 오기로 불타는 화끈한 복수의 화신이여.

아, 이 얼마나 원한과 애통이 들끓는 업장이란 말인가!

전갈자리는 오리온의 대척점에 자리한 별자리다.

전갈자리가 뜨면 오리온이 저문다.

스피카의 뒤를 따라 전갈자리가 고개를 들고, 오리온이 저 하늘로 사라져 간다.

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별에게도

소멸의 때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하지만,

이 별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나면 더욱 뭉클한 감동이 전해져 온다.

이루지 못한 사랑과 별이 되어서도 쫒기는 신세가 된 비운의 주인공이라!

3. 봄철에 사냥을 금하는 이유

그런데 진정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여기 더 있다.

뭉클한 러브스토리 이면에 자연의 이치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오리온은 사냥꾼의 별이다.

가을 막바지와 초겨울에 왕성해지는 금(金)의 숙살의 기운을 간직한 별이다.

겨우내 세상을 밝히던 오리온의 싸늘한 빛을 보라.

수렵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리하여 신마저 넋을 잃게 한,

오만한 영웅의 모습이 거기 그대로 담겨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자연의 섭리란 너무도 공평하여, 그에게도 어김없이 휴식과 소멸을 선고한다.

왜냐하면 생성과 소생의 계절을 목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만한 사냥꾼 오리온이 죽어야

생육과 번성이 가능하다는 너무도 단순명료한 가르침이 이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전갈자리가 떠오르는 늦봄의 풍습을 월령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달은 바야흐로 생기가 왕성하고 양기가 흩어져 퍼지는 달이므로 살아있는 것은

모두 밖으로 나오고, 싹트는 것은 모두 창달하여 안으로 그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천자는 천하에 덕을 펴고 은혜를 베풀어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가난한 자와 외로운 자와 먹을 것 떨어진 자를 가엾이 여겨 곡식과 돈을 나누어준다. ... (이 달에는 새와 짐승의 살육을 금하니)

각종 그물과 주살, 또는 새와 짐승들에게 먹여 독살시킬 독약 따위를 가지고

구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금하라고 명령한다.

개인적으로 갑자서당 어린이들과 함께 암송을 했기에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머금어지는 구절이다.

양기가 퍼져나가기에 안에 있던 싹들이 모두 밖으로 펼쳐지는 때라니,

정말 명문이지 않은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 정말이지 딱 이 시기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만물의 생기가 잘 발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봄철의 섭리다.

천자(天子) 자임했던 고대의 군주들은 만물의 피어나려는 섭리를 잘 도와주고,

숙살의 금(金)기운을 배제하는 것을 정치의 커다란 근본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고아와 빈민들을 돕고 사냥과 어로를 금하게 하는 것이 봄철,

왕의 주된 업무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 다시 그리스 신화의 대목을 상기해 보자.

이 좋은 봄날 징그런 전갈을 보낸 것이 바로 태양신 아폴론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여기서 아폴론은 만물의 생성을 주관하는 양기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듯하다.

불온한 결혼을 막아 집안의 혈통(?) 보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생명이 피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위험한 사냥꾼 오리온을 쫒기 위해

저 하늘에 전갈을 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그리스 버전 천자(天子)인 셈이다.

그리고 저 하늘엔 오리온이 물러나면서 만물이 번성하고 생육하는

생장의 시기가 도래하는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자, 그렇다면 저 전갈은 과연 오리온을 죽일 수 있을까?

이 추격전은 영원히 계속되는 릴레이와도 같다.

전갈은 영원히 오리온을 죽일 수 없다.

전갈자리가 떠오를 때면

오리온자리는 서쪽 하늘 너머 지하계로 달아나버리기 때문이다.

얼마 뒤 전갈이 서쪽 하늘을 가로질러 지하로 쫓아 내려가면

오리온은 다시금 동쪽에서 올라올 것이다.

이 영겁의 추격전을 동양식으로 설명해보면

전갈은 오리온의 화신(化身)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을 것 같다.

전갈은 곧 오리온이 화(化)하여 변한 것이다.

조금 더 추상해보자면, 봄의 목기는 가을의 금기가 전환된 것이다.

지장간의 원리에 의하면,

잡기인 축토(丑土)는 가을 녘의 금기를 갈무리 해 목기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유축(巳酉丑)지지 삼합은 사월(巳月)로부터 비롯되어

유월(酉月)절정에 다다른 금의 기운이 축월(丑月)가서 마무리 되며,

반대의 목의 기운으로 반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축토(丑土)안에 숨은 신금(辛金) 목의 정수가 된다.

즉, 가을이 곧 봄이요,

여름이 곧 겨울이라는 역설이 대자연의 얼굴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하지 않았던가!

하나가 성하고 또 다른 하나가 멸하는 대칭의 양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 대극은 결국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내재하는 관계.

우리의 언어분별이 자아내는 함정에 빠져들어

그저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자연에 어떻게 폭력과 죽음이 가득한가요라고 절망하면 곤란하다.

죽음이 삶으로 이어지며 삶이 다시 죽음으로 기우는 것이 우주 본연의 섭리이기에.

눈앞에 드러난 무수한 대립과 세력다툼의 실체는

결국 부단히 변화하며 생성하는 세상의 본래 면목이기에.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방수(房宿) 이야기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호랑이 이야기를 모두 알 것이다.

홀어머니 슬하의 가엾은 남매를 잡아먹으려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호랑이 말이다.

이웃 잔칫집에서 뼛골 빠지게 일하고 돌아오던 애엄마를 잡아먹고,

저희들끼리 집 지키고 있는 어린 남매까지 노린 걸 보면,

이건 뭐 아주 철저하게 계획된 파렴치한 범행이라고 생각한다.

호랑이씩이나 되가지고선 애들 먹이려고 가져가던 떡까지 다 뺏어먹은 걸 보니,

죄질도 아주 낮은 편에 속한다.

아무리 동화라지만 저런 비열하고 극악무도한 악당들은

왜 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앞에만 들이닥치는 것인지.

하지만 세상은 공평하다.

우리에겐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할 동아줄 씬이 있지 않은가!

남매의 간절한 기도에 하늘은 구원으로 응답했고,

탐욕스런 호랑이에게는 수수밭에서의 비참한 최후를 선사했다.

하늘이 내린 동아줄 한 가닥! 그렇다.

아무리 무법이 판치는 세상이라지만 하늘은 알아주신다는 거다.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진실을!

난데없이 옛 동화를 들이미는 이유,

오늘 이야기할 주인공이 바로 하늘이 내린 동아줄 별이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이 별을 두고

궁지에 몰린 남매에게 내려진 구원의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가 별자리로까지 확실히 자리매김한 거 보면,

옛 사람들에게 하늘의 공명정대함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뢰가 있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늘 어딘가 모나고 치우쳐 있지만

저 하늘엔 이지러진 이 땅을 바로잡을 질서의 수호자가 있다는 믿음.

그렇다, 하늘은 확실히 하나의 신앙이고, 하나의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에 한 줄기 빛처럼 강림할 별자리,

혼란과 파괴를 잠재울 질서의 주재자!

자, 이 대단한 별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방수(房宿)이다.

지난 시간에 내둥 전갈자리 이야기를 했었는데,

오늘부터는 전갈자리의 동양 버전을 소개할까 한다.

오리온을 뒤 쫒는 매서운 전갈을 형상화한 전갈자리는

동양 별자리로 방수(房宿), 심수(心宿), 미수(尾宿)와 겹친다.

그리스의 날고 기는 신들 사이에서 전갈은 좀 캐릭터가 약한 감이 없지 않았는데,

동양에서 이 별들은 무지하니 비중 있는 사성급 별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도 오늘 주인공은 전갈의 머리에 해당하는 방수(房宿)다.

동방 청룡의 형상으로 보면 용의 배에 해당한다.

용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각(角),항(亢), 저(氐),방(房),심(心),미(尾),기(箕)의 순이다.

별자리의 생김새는 네 개의 주홍색 별이 한 줄로 연이은 것이

영락없이 하늘이 내린 동아줄 모양이다.

그런데 동아줄처럼 흐느적하게 한 줄로 늘어선 별 이름에

방을 뜻하는 방(房)자가 붙었다는 점, 다소 의아한 대목이다.

이쯤에서 [천문류초]에 실린 보천가를 한 곡조 청해 들어보자.

(房) 네 개의 주홍색 별이 곧바로 아래로 향한 모습으로 명당(明堂)을 주관하네. 

<이순지, 천문류초, 87쪽>

이 별을 호랑이의 악행을 심판하는 동아줄로 본 것은

별다른 이론적 체계 없이 하늘을 보던,

하지만 그 안에서도 즉각적으로 본질을 꿰뚫어 알던 민중들의 시선이었다.

천문(天文)에서 국가의 질서를 읽으려 했던 왕실의 점성가들은,

노래대로 이 별을 천자가 정무를 보는 방인 ‘명당(明堂)’으로 보았다.

천자가 정치를 베푸는 자리, 곧 왕의 집무실이라는 것.

심판과 구원의 동아줄로 보건 천자의 집무실이라 보건

어딘지 묘하게 통하는 지점이 있다.

결국 이 별이 우주 질서를 구현하는 중대한 자리라는 것이니 말이다.

왕의 집무실은 그대로 우주 질서의 상징물로 말 그대로 명당(明堂)이었던 것.

왕이란 존재가 하늘 · 땅 · 인간을 아우르는 중용의 존재이기에

왕이 거처하는 공간은 이렇듯 우주질서의 총체를 상징해야 했다.

역대의 왕들이 왕궁의 건축에 그리 사활을 걸었던 것은

그만큼 왕실이 내포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우주질서의 총체였기에,

그리고 왕궁을 보면 그가 다스리는 나라를 알 수 있기에!

명당의 위상에 대하여 마르셀 그라네는 이렇게 설명한다.

(명당의) 구도는 병영과 도시 구도를 재현하는 것으로서

세계와 구주(九州)구도를 재현한다. ...

그 형태가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군주가

책력(冊曆)의 집에서 순행(巡行)하여 이 형태를 작동시키는 데에 있으며,

태양과 사계가 대질서나 하늘의 길을 따르는 것이었다.

<마르셀 그라네, 중국사유, 320쪽>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고 생각했던 옛 사람들은

명당을 네모난 기단 위에 둥근 제단이 올라앉은 모양으로 건축했다.

그 위에 올라선 천자는 곧 북극성이자 태양이었다.

명당위에 올라 선 천자는 남면(南面)하고 서서는 뭇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또, 태양처럼 지상을 순행하면서 계절의 운행과 시간의 안배를 주관했다.

하늘, 땅, 인간의 소통의 고리, 어긋난 균형을 바로잡는 질서의 수호자,

그것이 곧 천자의 역할이었다.

하여 왕은 부단히 우주의 질서를 모방하며 체화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왕도(王道)가 곧 천도(天道)와 다르지 않게 하려는 것, 그것이 곧 지상과제였다.

명당 별, 방수는 그런 명당 이상으로 중요한 존재였다.

하늘을 본뜬 명당에서 하늘을 닮은 조화의 정치를 펴려 했다면,

하늘의 명당별에서 자신의 시대가 위치한 우주적 좌표를 읽으려 했던 것이다.

천자는 하늘의 조짐에 귀를 기울였다.

별들의 운행은 우리가 어느 인연의 장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보게 하는 검은 지도였고,

동시에 자신의 통치에 대한 하늘의 즉각적인 응답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기에 왕들은 노심초사하며 저 하늘의 방수를 주시했다.

하늘은 과연 내게 썩은 동아줄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새 동아줄을 내릴 것인가!

이제 각론으로 들어갈 차례다.

동아줄 마냥 그저 늘어 서 있을 뿐인 네 별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석할 거란 말인가.

네 별은 각각 왕을 보필하는 네 명의 신하라 하여

각각 상장(上將), 차장(次將), 차상(次相), 상상(上相)이라 이름 한다.

다른 한편 하늘의 마차나 마구간으로 보기도 한다.

여튼, 이들 별들이 밝으면 임금이 현명할 조짐이다.

별들이 벌어지면 백성이 유랑한다.

맨 위와 맨 아래의 별이 커지면 참모들이 병란을 일으킨다.

재미있는 것은 방수를 읽는데 있어,

별도별이지만 별과 별의 사이, 텅 빈 허공이 더 중요하다는 거다.

네 별의 한 가운데를 대도(大道)라고 한다.

이곳은 태양이 지나가는 길, 즉 황도와 겹친다.

태양, 곧 천자가 드나드는 중요한 길목인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남쪽을 양도(陽道)라 하고 북쪽을 음도(陰道)라 한다.

해와 달, 그리고 오성(이들을 일컬어 칠요七曜라 한다)(房) 가운데를 지나면

천자가 음양이 조화된 가운데 명당을 순행하는 형국이므로 천하가 안정되고 평화롭다.

하지만 이들이 치우친 길을 가면 세상에 재앙이 찾아드는 것이다.

그 해석도 재미있다.

칠요가 양도를 지나면 세상에 양기가 치성해지고,

음도를 지나면 음기가 성해지는 것이다.

양기가 성할 경우 가뭄이 일어나고 음기가 성하면 홍수가 난다.

<천시원(빨간박스)와 마주보고 있는 방수(노란박스)>

방수에 딸린 별자리들의 의미도 재미있다.

방수 바로 위에는 천시원(天市垣) 있다.

천시원은 하늘의 주극성을 삼분한 삼원(三垣) 하나로

이름 그대로 하늘의 시장이요, 저자거리다.

백성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세속적인 삶의 장을 주관한다.

점성가들은 여기서 민생을 읽어냈다.

흥미로운 점은 시끌벅적한 삶의 활기로 충만한 천시원이 천자의 명당,

방수와 마주해 있다는 점이다.

세속의 번잡함으로 가득한 이곳을 잘 주시하고 다스리는 게 천자의 임무다.

세속에 휩쓸려서도 그렇다고 단절되어서도 안되는 게 천자의 임무다.

<방수에 딸린 별자리, 건폐, 구검, 벌, 종관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방수 곁에는 천시원과 더불어 열쇠의 별,

건폐(鍵閉)와 구검(鉤鈐)이 함께 있다.

(鍵)은 열쇠, 폐(閉)는 자물쇠를 말한다.

구검(鉤鈐)은 끝이 구부러진 열쇠를 가리킨다.

모두 하늘을 여닫는 일을 주관하는 것이다.

건폐와 구검이 방수와 가까워지면 천자가 민생을 잘 읽어내고,

멀어지면 불화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형벌로 민생을 다스리는 벌(罰)이라는 별도 있다.

이 경우는 보다 적극적으로 천시를 다스리는 것이라 하겠다.

그밖에도 태양을 상징하는 검은 별 일성(日星)과,

천자를 보위하며 무(巫)와 의(醫)주관하던 주술사의 별 종관(從官)이 있다.

일성은 태양의 정기를 나타내는 별이며,

대도(大道)통과하며 천하를 순행하는 군주의 모습을 표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주위에 종관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천자의 명당에 웬 무당 별자리냐 싶을 것이다.

허나 역사상의 정복왕들이 상고시대 부족의 원로이자 우두머리였던

샤먼들을 포획하면서 출발했다는 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늘·땅과 직접 소통하는 감응의 능력을 국가라는 협소한 테두리에 가둔 것이

국가와 그 통치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도 무기만으로, 병사의 수(數)만으로 안 되는 게 통치의 문제였다.

알 수 없는 위험과 예기치 못할 사건들과 분투하면서

사람들은 우리가 까마득한 우주의 그 어드메를 헤매고 있는 건지 알고 싶어 했다.

종관은 결국 우리의 우주적 좌표를 일러주는 조언자인 셈이다.

방수에 얽힌 이야기를 한 바퀴 돌아 나왔다.

방수는 천자의 명당이고, 자신의 통치에 대한 하늘의 응답을 듣던 첩경이었다.

꼭 왕이 아니더라도, 자기 삶으로 정치를 하려는 자라면,

자신의 몸과 운명에 대한 주인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꼭 귀 기울여야 할 게 이 별 방수가 아닐까 한다.

나의 일상은 음도, 혹은 양도로 치우치지 않았는가,

세속의 웅성거리는 활기에 눈이 멀지는 않았는가.

우주안의 나를 내다보게 하는 운명의 명당(明堂),

방수에서 내 삶의 좌표를 읽어내 보자. 

청룡의 심장을 식혀주세요 - 심수(心宿) 이야기 

대망의 전갈자리 시리즈의 결정판,

오늘 주인공은 청룡의 심장, 심수(心宿)다.

때는 바야흐로 봄꽃들의 황홀한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완연한 봄날,

눈앞의 꽃 잔치 못지않은 볼거리가 자기들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줄,

사람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머지않아 도래할 여름철의 은하수를 예견이라도 하듯,

늦봄 밤하늘은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별잔치를 한바탕 준비해 놓고 있다.

그 첫 주인공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심수 되시겠다.

‘심장의 별’이라는 뜻의 심수(心宿),

동방 청룡의 심장에 해당한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일 테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붉은빛이 흡사 약동하는 심장을 연상시키는 별,

그래서인지 서양의 전갈자리로도 이 별은 ‘심장’에 배속된다.

심장이란 무엇인가?

내경에 “심장은 군주지관으로 신명이 여기에서 나온다(心者 君主之官 神明出焉)

고 했다.

사람의 몸을 국가에 비유할 때,

심장은 통솔하고 주재하는 군주의 역할에 해당한다는 거다.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는 역할을 수행하기에 심은 몸의 전체를 내다보아야 하고,

그렇기에 신명(神明)주관한다.

그만큼 우리 몸의 중심이요, 중요한 장부라는 얘기다.

오늘의 주인공 심수의 이름이 얼마나 범상치 않은 것인지,

아마 짐작들 하셨으리라 믿는다.

<가운데 심대성을 중심으로 좌우로 심전성과 심후성으로 구성된 심수(心宿)>

심수의 모습은, 이 정도 생겼으면 심장의 별이라 할 만하다 싶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심장스럽게 생겼다.^^

심수는 세 개의 별이 둔각을 이루며 연이은 모양이다.

그 모습 심장을 본떠 만들었다는 "마음 심(心)"자와도 흡사하다.

[천문류초]에서는 심수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세 개의 붉은색 별로 된 심수, 그 중 가운데 있는 별이 가장 밝네.

<『천문류초』, 보천가> 

붉은 별 셋이 나란히 연이어 있다 하여 심수를 '대화(大火)'라고도 부른다.

그야말로 거대한 불덩어리라는 거다.

위의 구절에 언급된 대로 특히 그 가운데 별이 유독 강렬한 빛을 뿜어낸다.

밝기로는 뭇 별들 중에 랭킹 16위이며,

태양보다 6만5천배 많은 복사에너지를 발산한다는 이 별,

그야말로 무지하니 밝고 크다! 하여

이 가운데 별에는 별도로 '심대성(心大星)'이란 별칭이 붙는다.

심대성의 빛이 유난히 밝은 이유는 이 별이 '적색거성'이기 때문이다.

적색거성이란 나이 들어 비대해진 별을 일컫는 말이다.

진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핵반응이 점점 활발해져서

크기는 커지고 색이 붉어진 것이다.

별도 무르익고 원숙해 질수록 농익은 때깔을 내는 법이라는 거, 흥미롭지 않은가?!

태양을 화성 궤도까지 부풀려 놓은 규모라고 하는 이 별은,

그 규모와 밝기로 자신의 짬밥을 증험하는 셈이다.

말 그대로 ‘큰 심장의 별’이 아닐 수 없다.

날카롭고 설익은 밝음이 아니라, 깊고 그윽한 향내가 전해올 듯 무르익은 빛깔.

저것이 곧 만물을 주재하는 심장의 기운이다!

평소 우리는 ‘심장이 터질듯이’ ‘심장이 펄떡이듯’이라고 하며,

심장에 무언가 혈기방성한 젊은 역동의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경향이 있다.

근데 심수가 보여주는 심장의 이미지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차라리 오랜 시간을 두고 곰삭은 장맛과 같달까.

시간의 깊이와 주름을 간직한 원숙함,

그렇기에 그 안에 만물을 주재하는 현모한 지혜가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 안에 있어 제대로 알기 힘든 심장의 모습,

저 하늘의 심수에서 ‘내 안의 심장’을 발견해 보는 건 어떨까.^^

<맨 앞에 Sun(태양)이 점처럼 있는게 보이시나요.

그에 비하면 Antares(안타레스)는 후덜덜...>

형혹수심(熒惑守沈)

심장이 몸의 군주 역할을 하듯, 심수는 별 중에 천왕의 자리에 해당한다.

그 중 가운데의 심대성은 천자의 자리인 명당(明堂)을 상징한다.

예로부터 이 별은 천하에 상벌을 내리는 심판의 자리로 해석되었다.

적색거성에서 뿜어 나오는 원숙한 붉은빛이

만물을 통어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천자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별의 좌우에 늘어선 별들은 왕자라 여겨졌다.

천왕의 오른쪽 별이 태자, 왼쪽 별이 서자의 자리다.

이 별들의 밝기와 각도를 보고 태자와 서자의 권력 다툼을 점쳤다.

가령 이 별자리가 일직선으로 펼쳐지면

태자와 서자의 세력이 비슷하게 되는 형국이므로 왕권쟁탈이 극심해지거나,

지진· 해일 등이 일어날 조짐이라 보았다. 

더 중요한 것은 심대성과 다른 천체들간의 관계다.

아마도 심대성은 '안타레스(Antares)'라는 말로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안타레스란 그리스어로 '화성의 라이벌'이라는 뜻이란다.

화성 못지않게 붉은 별이라는 뜻일 테다.

이 이름은 2년에 한 번, 화성이 심대성 옆을 지나는 데서 유래했다.

 
심수의 위로 4척이 되는 곳에는 일월오성이 지나가는 천도(天道)가 있어,

해와 달과 오성이 그 주위를 지난다.

지구에서 보기에 오성의 운행 궤도는 지그재그로 불규칙하게 뻗어나간다.

앞으로 가는가하면 뒤로 빠지기도 하고, 한 자리에 죽은 듯 머물러 있기도 한다.

그러다 갑자기 경로를 틀어 쏜살같이 빠져나가기도 한다.

이 모두는 각 행성과 지구의 공전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로,

이들의 비정형적인 운행궤도는

‘예기치 않은 일’, ‘돌연한 사건’이라는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특히 오성이 특정 별자리의 영역을 침범할 때면 만국의 점성사들은 긴장해야만 했다.

그런데 심수의 입장에서는 특히 화성의 조짐이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화성은 오행으로 화(火)에 배속되어 전쟁과 살육을 상징하는 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쟁의 별 화성이 심장과 군주의 별 심수를 침범한다는 사건은

그야말로 흉조 중의 흉조였다.

왜냐면 불에 불을 더하는 형국이기에,

혹은 화성의 사나운 붉은 빛에

안타레스의 정갈한 붉은 빛이 물들어 버리는 형국이기에!

흥미롭게도 서양의 천문학에서도, 심지어 사라진 마야 문명에서도

화성이 심대성(안타레스) 침범하는 현상은 치명적인 전쟁과 파멸의 전조로 읽혔다.

그리스인들은 화성의 붉은빛이 피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잔인한 전쟁의 신 ‘아레스(Ares)’라고 불렀다.

이에 전갈자리의 주 임무는

파괴와 살육을 자초하는 ‘오만함’을 경계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해 보라.

그런 전갈의 심장이 전쟁의 신에 물들어버리는 형국이니

이는 필경 전쟁의 조짐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동양에서도 화성을 형혹성(熒惑星: 광기의 등불에 미혹되다)이라 하여

전쟁의 별로 본다.

특히 형혹성이 심수에 접근하는 것을 두고 ‘형혹수심(熒惑守心)’이라 칭했다.

화성(형혹성)순행하다 역행하여

심수의 자리에 정체해 있는 모습(守) 일컫는 것이니,

곧 천자의 자리가 광기의 등불에 장악당할 조짐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흉조 중 하나였다.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보면

진시황이 죽기 전에 일어난 3가지 기이한 사건 중의 하나로

바로 이 형혹수심이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 36년(기원전 211년) 형혹성이 심수을 범하고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졌단다.

그야말로 살벌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송미자세가」에도 형혹수심의 기록이 남아있다.

송나라 경공 37년,

형혹수심이 일어났으나 왕이 재앙을 재상들과 백성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며

곡진히 백성을 걱정하고 위하자,

그 마음이 하늘을 감화시켜 형혹이 움직여갔다는 고사다.

어쨌거나 형혹수심은 재앙을 예고하는 대표적인 천상(天象)으로

예로부터 악명 높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형혹수심은 비단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몸 안에 심장을 달고 사는 우리는

저 하늘의 심수처럼 화(火)의 침범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우주를 다스리는 하늘의 심장 심수가 화성의 불 기운에 노출되는 건 2년에 한 번 꼴,

소우주인 우리들은 일상에서 그보다 자주 형혹수심을 경험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곰샘이 즐겨 말씀하시는

‘열심(熱心)’히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열심히 살겠습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우리들이다.

종일토록 분주하게 지내느라 밤을 잊고 산다. 매일이 수고로움의 연속이다.

그러면서도 더 열심히 살겠다는 말을 놓지 않는다.

열심히 산다는 데 문제 될 게 무어냐?!

글자를 곰곰이 살펴보자.

‘열심’이란 다름 아니라 뜨거울 열(熱)에 마음 심(心),

즉 심장이 ‘열 받도록’ 애를 쓴다는 말이다.

심장은 열 받으면 안 된다.

마치 하늘에서 형혹수심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차게 식히고 고요하게 가라 앉혀야 제격인 게 심장이다.

그래야 적색거성에서 뿜어 나오는 현묘한 빛줄기처럼,

존재를 아우르는 신명이 흘러나온다.

동의보감에도 “심이 고요하면 신명과 통하여 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밖을 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알게 된다”고 했다.

심장이 제 빛깔이 나게 하려면 모름지기 차게 식히고 맑게 가라 앉히는 게 최선이다.

매순간 ‘열심히’를 외치는 우리 시대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병증, 형혹수심인 셈이다.

일찍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백인 정복자들을 두고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대들 얼굴 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서둘러 원하며,

많은 노력 없이 그것을 얻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더 많은 걸 놓친다.

무엇보다도 사물에 대한 이해를 놓치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해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그 세계에 몸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당장 쉽고 빠른 대답을 원한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류시화, 508쪽>

성급하게 눈 앞의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우리,

도달할 목적지를 설정하고

그 사이의 모든 여정을 하나의 수단과 비용으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 모습은

위에 실린 백인 정복자들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달달 볶아대는 ‘열심증’의 시대.

푹푹 찌는 열기에 신명이 흐려져 버린 모습들.

나는 어디 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린 결코 묻지 않는다.

그저 달리고 또 달릴 뿐!

그야말로 ‘열심’히 사는 사람의 초상이 아닐 수 없다.

열 받은 심장은 한 존재를 아우르는 군주의 역할을 못한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그저 열심 열심을 부르짖을 뿐이다.

이 얼마나 치명적인 악순환의 연속이란 말인가!

스스로 온전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길 원한다면, 운명과 사건의 주인이길 바란다면,

일단 고개들어 저 하늘의 심수를 좀 보는 건 어떨까.

(자기 심장을 꺼내 볼 순 없으니...^^)

내 심장의 온도는 몇 도인가?

심대성(안타레스)빛깔처럼 나의 신명도 맑고 청아한가?

여성의 별, 여성의 지혜 -미수(尾宿) 이야기

미수(尾宿) ‘꼬리’별이다.

동방 청룡으로도, 서양 별자리의 전갈자리로도 이 별은 꼬리다.

북두칠성이 어디서나 국자별로 통하듯, 이 별은 만국 공통의 꼬리별이다.

왜냐? 답은 단순하다.

둥글게 또르르 말린 별자리의 모습이 영락없는 꼬리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두서없는 설명 보다는, 우선 시로 읊은 미수 노래를 한 곡조 청해 듣는 것이 낫겠다. 

“갈고리 모양의 아홉 개의 붉은 색 별이 청룡의 꼬리 미(尾)이며,
미의 아랫머리에 다섯 개의 붉은 색 별이 귀(龜)라네.
미의 위에 네 개의 주홍색 별이 천강(天江)이며,
미의 동쪽에 한 개의 붉은 별이 부열(傅說)이네.
부열의 동쪽에 외롭게 떠 있는 주홍색 별 하나가 (漁)이며,
(龜)의 서쪽에 한 개의 붉은 색 별이 신궁(神宮)이니,
후비(后妃)의 가운데에 놓여 있게 되었네.”

<이순지, 천문류초, 97쪽>

한동안 양기 충만한 남성적인 별들 일색이었는데,

이번에는 모처럼 우아한 별이 찾아왔다!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아홉 개의 붉은 별. 영롱하게 흐르는 은하수의 강물 한 가운데에 자리한 매혹의 별.

은하수의 유장한 강물에 꼬리를 담그고 낚시라도 하려는 것인가!

꼬리를 말아 올리고 유혹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아랍의 점성사들은 이 별자리를 전갈자리의 꼬리라 생각했다.

그 중 가장 밝은 여덟 번째 별 ‘샤울라(Shaula; 세운 꼬리라는 뜻)’는

전갈의 독침이라 보았다.

유혹하듯 우아하게 말아 올린 꼬리 뒤편에 숨은 치명적인 독침.

작고 연약하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그 안에는 방심한 상대의 숨통을 일순 끊어버리는 파멸의 힘이 잠자고 있다.

미수는 음(陰) 별이다.

몸에서 꼬리가 음기(陰氣)를 주관하듯, 꼬리별 미수는 음(陰)을 관장한다.

그 중에서도 ‘여성’을 주관한다.

위의 시에서도 언급되어 있듯, 미수가 관할하는 영역은 후비(后妃)

‘왕의 여자들’을 의미했다.

별이 늘어선 순서는 곧 궁실에서의 서열(?)과 같았다.

미수의 첫 머리가 왕비의 별이요, 가운데의 별들은 왕의 부인,

꼬리의 끝 쪽 별들은 첩의 별들이란다.

전갈자리의 여덟 번째 별 ‘샤울라’는, 미수로 치면 ‘첩의 별’이다.

치명적인 매혹으로 왕들을 주무르던 팜므파탈들.

그런데 화려한 겉모습 그 이면에 파멸의 독침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주왕과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였다는 달기, 비단 찢는 소리를 사랑했다는 포사...

첩과의 향락에 빠져 정신 못 차리던 왕들은 역사에 부끄러운 이름을 남기고 말았다.

아마도 그들은 ‘하늘의 미수가 어지러우니 몸가짐을 삼가십시오.’

라는 천관(天官)들의 충고를 무시했으리라.

망국의 군주들에게는 항상 경국지색(傾國之色)이 있고,

동시에 미수의 침범이 있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이렇듯 미수는 궁실의 내밀한 속사정을 점치던 별이었다.

별의 색이 고르면 왕비에게 질투가 사라지고 후궁들 사이에 질서가 잡히지만,

별이 작고 어두워지면 왕비에게 질병과 우환이 생긴다.

오성이 침범하면 그 별에 해당하는 후궁에게 질병과 근심이 찾아든다.

그리고 문제의 화성과 금성이 이 별을 범하면

후궁들 간에 피 튀기는 세력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꼬리는 몸의 균형을 잡는 기관이라고 한다.

하늘의 꼬리인 미수가 제 역할을 할 때,

(陰)의 무게추로 천자의 양(陽)을 보필하여 기운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꼬리가 제 역할을 못할 때면 파멸의 독침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후미진 곳에 달려 있어 지나치기 쉬운 게 꼬리이지만,

옛 점성가들은 꼬리별 미수의 조짐을 시종 예의주시 했다.

균형을 잡아주는 꼬리가 바로 설 때 몸이, 나라가,

그리고 우주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별이 된 재상, 부열

미수가 은하수 한 가운데 놓인 별자리여서 그런지

미수에 딸린 별들 중에는 물과 관련된 별들이 많다.

미수의 아래에 있다는 거북 별자리 귀(龜)라든지,

미수의 동쪽 너머에 있다는 물고기 별자리 어(魚) 그렇다.

(龜)는 점복(占卜)을 주관하는 별자리이며,

(魚) 음한 일(陰事)을 주관하는 별이란다.

미수의 위에 있다는 하늘의 강,

천강(天江)별자리는 달과 백성의 운을 주관하는 별자리다.

모두 물(水)혹은 음(陰)과 관련된 별자리이다.


그 중 미수의 동쪽에는 부열(傅說)이라는 독특한 별이 있다.

부열은 상나라 무정왕 때 재상 자리를 지낸 실존 인물의 이름이다.

그는 어떤 인물이기에 하늘의 별이 되기에 이른 것인가.

또 하필 ‘여성의 별’ 미수에 속하게 되었는가.

사기의 은본기에는 부열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무정왕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상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무정왕은 나라를 부흥시키려 하였으나 자신을 보좌해 줄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왕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나랏일은 재상에게 돌보게 한 뒤, 인재를 찾아 손수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그러기를 3년째. 어느 날인가 그는 꿈속에서 바라마지않던 성인을 만나게 된다.

꿈결에 들은 ‘열(說)’이라는 이름을 왕은 잊지 않았다.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온 나라를 샅샅이 뒤지게 했고,

마침내 ‘부험’이라는 땅에서 그를 찾아냈다. 열은 죄수였다.

강제 노동 형을 선고 받고 부험에서 길을 닦던 중이었다.

무정왕은 그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눈 뒤,

그 됨됨이를 알아보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했다.

그리고는 ‘부험 땅에서 길을 닦던 열’이라는 뜻의 ‘부열’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위대한 재상으로 덕을 쌓은 부열은 죽은 뒤에 하늘의 별이 되어 영원히 기억되었다.

그게 부열 별자리다.

부열은 현덕의 재상이었다.

그가 무정왕에게 제시한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 서경(書經) 열명(說命)편이다.

의역학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약약불명현 궐질불추

(若藥不瞑眩 厥疾不瘳: 만일 약에 명현반응이 없으면 그 병은 낫지 않는다)

라는 명언을 한 이가 바로 부열이다.

중국의 여성들은 봄 여름이면 이 부열의 별을 주시하며,

부디 아들을 하나 점지해 달라고 기도를 올린다.

자손의 잉태란 사람의 인생사에 가장 절실한 문제에 속한다.

그런 중대사를 주관해 온 것을 볼 때,

중국인들의 무의식속에

그가 얼마나 확고부동한 현자로 자리매김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풍습이 상나라 때 자리 잡은 것이라 치면,

부열성은 장장 삼천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동아시아 여성들의 염원을 주관해 온 셈이다.

그야말로 삼천년의 현자인 셈이다.


불멸의 명성이란 비단 성과를 많이 쌓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역사 동안

세종대왕에게 아들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는 사람 본 적이 있는가.

민중들의 무의식에 각인된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결국 이 문제는 양적인 크기로 환원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거다.


부열은 음덕(陰德)의 달인이다.

곤궁한 일이 닥쳤을 때 그는 자신을 낮추었다.

자기를 버리고 모두를 위한 길을 닦았다.

중요한 것은 이타적 헌신과 희생의 삶 가운데 자족(自足)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써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을 내 놓지만,

그게 결국 자기 자신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는 삶을 실천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지만, 음덕의 힘은 강력하다.

모두를 이롭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길,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인연의 장 전체를 풍성하게 함으로써

결국 스스로를 풍성하게 하는 길, 그것이 바로 음덕인 것이다.

일찍이 노자는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고 했다.

(水)전진하여 치고 나가는 게 아니라, 후퇴하고 우회한다.

스스로를 낮추어 낮은 곳에 임하고, 주변의 상황에 자신을 맞추기를 즐겨한다.

그러면서 만물을 살리는 역할을 하는 게 물이다.

나를 지우고 너를 살림으로써 궁극으로 자기에게 이로움을 얻어가는 게 물의 섭리요,

음의 덕이라는 거다.

부열은 죽어서도 음덕을 실천했다.

백성들의 염원을 들어주는 소망과 헌신의 별로 영원히 남았다.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라고 했던가?

음의 덕(陰德)을 관장하는 별 부열성,

그리고 미수는 꼬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되새기게 해 준다.

베푸는 것이 얻는 것이고, 낮추는 것이 높이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영롱한 은하수의 강물 위에 빛나는 미수. 저 별빛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대, 용의 꼬리를 무시하지 말지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기수(箕宿) 이야기

오랜만에 시골집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시골집 뒤에는 비탈밭들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너른 언덕이 있다.

뒷산 공동묘지로 향하는 상여가 지나던,

나뭇단을 짊어 메고 내려오는 나무꾼들이 지게를 내려놓고 한 숨 돌리던 언덕이었다.

그 언덕을 사람들은 “강신터”라 불렀다.

그 이름이 ‘신이 강림하는 곳’이란 뜻의 ‘강신(降神)’인지 알 길은 없으나,

그곳엔 늘 신의 숨소리 같은 높고도 가느다란 바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소백산맥을 타고 넘나드는 바람이 대지를 휘감아 돌며 내는 소리였다.

강신의 언덕을 지키는 바람소리는

회한과 미련으로 뒤쳐지는 상여의 뒤를 떠밀어 주고,

나무꾼의 지겟단에 실린 삶의 무게를 거들어주곤 했다.

그 바람의 언덕에 작은 땅 한 뙤기를 얻어 ‘화전’을 일구던 나는,

신의 영지에 세 들어 산다는 외경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언제고 바람의 언덕 언저리를 서성이며 살아온 듯하다.

예전 연구실이 있던 해방촌도, 얼마 전에 이사 온 약수동의 새 집도

모두 “강신터”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바람의 언덕에 자리 해 있다.

나는 바람이 좋다. 바람은 나에게 매순간 깃들어 살고 있음을 가르친다.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무수한 인연이

매순간 나에게로 불어 닥치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한다.

바람에 실려 오는 무수한 인연과 함께인 한에서 ‘나’로 살아가는 것임을, 나는 배운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람의 별’이다.

동방 청룡의 마지막 별 기수(箕宿)!

너무도 절묘하게 이 별은 청룡의 ‘똥꼬’ 위치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다.

시원하게 가스라도 내뿜듯, 이 별은 세상에 바람을 몰고 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별에 왜 기수(箕宿)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箕) ‘키’를 뜻하는 글자다.

왜 있잖은가, 오줌 싼 아이를 소금 동냥을 보낼 때 머리에 뒤집어씌우는 기구 말이다.

여기에 나뭇가지 하나를 받쳐 놓으면 훌륭한 참새 덫이 되기도 한다.^^

키의 본래 용도는 곡식을 까불러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것이다.

추수한 곡식을 올려놓고 들썩거리면

곡식에 섞인 검부러기들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린다.

옛 사람들은 하늘의 거대한 키가 오르내리며

우주의 바람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주인공이 오늘의 별자리, 기수이다.

기수의 수거성(宿距星 : 각 수를 대표하는 별을) ‘기성(箕星)’은

이름처럼 네모진 키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모습, 네 개의 주홍색 별이 키 모양의 사다리꼴로 연결된 모습이다.

이 별은 바람을 주관한다.

옛 사람들은 이 별에 바람의 신인 풍백(風伯)이 거하며

세상의 바람을 주재한다고 생각했다.

『풍속통의』에서는 기수를 이렇게 묘사한다. 

“바람을 다스리는 것은 기성(箕星)이다.

기성이 키를 까부르고 드날리니, 능히 바람의 기운을 이르게 한다.” 

바람의 별 기성. 바람을 주관한다는 이 별은, 그렇다면 무엇을 점치는데 소요되었을까?

바람, 날씨, 풍작, 아니면 설마... 성풍속...??

공교롭게도 기성의 해석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바람이라는 게 원채 포괄적인 대상인 고로.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뭐라 단정 지어 말하기가 참으로 곤란한 말이 바람이다.

바람은 언어의 고정화하는 힘 앞에 참으로 완강하게 저항한다.

붙잡아 놓으면 빠져나가고, 새어나가는 게 바람이다.

고대인들은 그런 바람을 신(神)으로 여겼다.

저 너머에서 알 수 없는 무엇을 실어다 나르는, 외경과 숭고의 대상으로 여겼다.

용케도 거기서 종교적 광휘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된 문명사회의 인간들은

바람을 말로써 규정지으려 한다.

하지만 어렵다. 그저 흐름이라고, 순환과 유통이라고, 기(氣)라고 뭉뚱그릴 수밖에.

그런데 여기, 바람의 별 기성을 둘러싸고 펼쳐진 고대 사유는

바람의 문제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산들산들 봄바람 할 때의 그 바람이, 바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우리의 이해는 바람을 너무도 세속적이고 왜소한 의미로 한정짓고 있다.

이순지의 『천문류초』를 보자.

그는 기성이 ‘팔풍’을 주관한다는 고대적 사유를 이어받고 있다.

(기성은) 천계(天鷄)라고도 부르는데,

팔풍(八風) 주관해서 일·월성이 머무는 곳에 바람이 일어남을 맡는다.”

<천문류초, 103쪽>

기성을 하늘의 닭이라고 한단다.

갑자기 닭이 웬 말이냐!

닭이 날개짓을 해서 바람이 나오니까! 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시는 독자분이 꼭 있을 것이다. 음... 그런데 그거, 정답이다.

심오하고도 단순한 게 동양 사상의 매력 아니던가.^^

주역의 ‘손괘(巽卦: ☴)’는 바람을 상징한다.(풍위손風爲巽).

바람이 흐르고 유통하여 만물을 가지런히 한다는 게, 손괘의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손괘를 상징하는 동물로 닭(鷄)이 꼽힌다.

현실에서 닭은 인간의 식량으로 전락해버린 비참한 가축이지만,

고대의 사유에서는 하늘을 가르며 우주의 바람을 주재하던

풍신 봉황(鳳凰) 원형이다.

‘동방에서 나와 해 질 무렵이 되면 풍혈(風穴)에서 잠잔다’는

(『회남자』, 「남명훈」), 바람과 자유의 신이 곧 봉황이자 닭인 것이다.

여기서, 봉황의 날개 짓이 일으킨다는 바람이

우리가 이해하는 단순한 기류변화가 아님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팔풍(八風)’이다.

팔풍이란 동·서·남·북·서북·동북·동남·서남의 팔방위에서 불어오는 우주의 바람이다.

『회남자』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엇을 팔풍이라 하는가?

태양이 동지를 떠나 45일이면 조풍이 이르고,

조풍이 45일에 이르면 명서풍이 이른다.

명서풍이 45일에 이르면 청명풍이 이르며,

청명풍이 45일이면 경풍이 이른다.

경풍이 이른지 45일이면 량풍이 이르며,

량풍이 이른지 45일이면 창합풍이 이른다.

창합풍이 45일에 이르면 부주풍이 이르며,

부주풍이 이른지 45일이면 광막풍이 이른다.”

<『회남자』, 「천문훈」>

팔풍은 대지의 방위에 소속된 것이면서, 천체의 운행을 아우른다.

동서남북이라는 ‘공간’을 주재하면서, 절기라는 ‘시간’을 창출하기도 한다.

하늘과 땅을 아우르고 시간과 공간을 갈마드는 우주의 리듬이자 질서,

그것이 고대인들이 생각한 바람의 모습이었다.

바람은 하늘 · 땅 · 인간을 아우르는 생성의 운율에 다름 아니었다.

“조풍은 동북에 거하면서 만물의 생출을 주관한다.

(條) 말은 만물을 가지런히 다스려 나타나게 한다는 의미이며,

이 때문에 조풍이라고 한다. 남쪽으로 가면 기수(箕宿) 이른다.

(箕)란 만물의 근기를 뜻하기 때문에 기수라 부른다.” 

<사마천, 『사기』,「율서」>

그리고 여기 사마천이 말하고 있듯, 기성은 바람을 주재하는 우주의 키(箕)이자,

생성과 순환을 주재하는 생명의 키(key)이다.

거대한 키를 펄럭이며 바람을 만드니,

세상에 기운의 출납(出納)과 순환(循環)이 발생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기(箕)란 근기를 뜻한다는 말이다.

제 아무리 순환과 소통이 중요하다지만,

mb가 4대강 뚫듯 어거지로 흐르게 하는 건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는 거다.

만물의 근기에 따라, 제각각의 생명의 결과 리듬에 따라,

그야말로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듯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나의 생긴 ‘결’대로 흐를 때,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은 고정되지 않는다.

나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을 나의 알곡으로 취하며,

만일 나와 관계 맺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날려버리면 된다.

내가 놓아버린 무엇은 흐르고 흐르다 다른 이의 알곡이 될 것이다.

기성의 키질은 세상을 규정짓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계속되는 순환의 흐름, 그것이야말로 선이며, 또 신성한 것이라는 거다.

그렇게 하고서 만이 진정 알곡과 쭉정이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기성을 보고 옛 사람들은 천하의 도(道)를 논했다.

이 별이 어둡거나 좁아지거나 흐트러지면 난세가 찾아온다.

대지의 기후가 정미롭지 못하니 생명의 조리가 원활하지 못하며,

인간세상의 정치질서와 사회관계들도 기성에 응(應)하여 어긋나게 된다.

반대로 이 별이 바르고 밝으면 천하의 오곡이 바르고

정치가 안정되는 호시절이 찾아든다.

천지인의 도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별이, 이 별 기성 아닐까 싶다.^^

이 별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막힘없는 순환, 계속되는 흐름, 그것이야말로 지상명령이라고!

(通)하는 게 선(善)이요, 막히는 게(滯)(惡)이라고!

초여름 밤, 기성이 뜨기 시작한다.

저 하늘의 기성을 보고 우리 시대의 순환과 흐름의 좌표를 확인해 보자.

<여름 별자리 이야기>

올 해는 유난히 꽃이 아름다운 해가 아닌가 한다.

봄이 간지도 한참이건만 연구실 뒤 남산에는 아직도 꽃이 한창이다.

이름 모를 꽃들이 연신 현란한 꽃망울을 터뜨려댄다.

연일 계속되는 꽃 잔치는 그칠 줄을 모른다.

언젠가 문득 깨달았다.

무슨 조화인지 올 해에는 꽃들이 하나 같이 크고 선명하다는 것을.

정성들여 기른 남산공원의 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하수구 틈새에 핀 애기똥풀 마저도 탐스럽기 그지없다.^^

여기저기서 배운 지식들로 이를 때려 맞춰 보자면^^;

아마도 이는 계사년의 화(火)기운의 영향이 아닐까 한다.

식물의 일기(一期) 중에 꽃은 번성하는 화기에 해당한다지 않던가.

올 해 유난히도 꽃의 빛깔이 도드라지는 건, 분명 화의 영향일 터!

우선은 계사년의 사화(巳火)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겠다.

푹푹 찌는 때 아닌 무더위가 이상타 했더니,

근래의 일진은 사년(巳年) 사월(巳月)의 불구덩이를 지나고 있다.

그런가하면 계사년은 계(癸)가 야기하는 화불급(火不及) 해이기도 하다.

화의 기운이 미치지 못하기에, 역으로 화의 망동(妄動)이 일어난다.

결핍을 느낀 자가 치열함으로 무장하듯이,

계사년을 살아가야 하는 만물은 불급한 화를 벌충해 내려 악을 쓰는 것이다.

화 기운이 ‘부족한 듯 넘쳐나는’, 이상한 불균형의 해!

‘추운 듯 더운’ 날씨가 펼치는 이중의 부조화!

그래선지 때 아닌 5월 폭염이 대지를 휩쓸고,

살인진드기가 생명을 위협한다는 공포감이 넘쳐난다.

이에 연구실의 수많은 화족(火族)들은

벌써부터 고통스런 썸머 증후군^^을 호소하고 있다.

이 모든 정황을 두고 보건대,

어쨌거나 올해가 화 기운이 도드라지는 해라는 건 확실한 것 같다.

화기 출중한 계사년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축복이 있다면,

온 세상을 만물이 번성하는 화려한 스텍터클의 향연장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꽃만 크고 훌륭한 게 아니다.

유독 크고 훌륭하며 화려한 물건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게, 올해 계사년의 특징이다.

곰샘이 극찬에 극찬을 거듭하시는 가왕 조용필의 화려한 귀환을 보라!

아니면 요즘 출판 복 터진 북드라망의 책들^^

여튼, 계사년은 크고 훌륭한 것들의 범람으로 우리 눈과 입이 즐거워지는 한 해 인 듯.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올해의 화기는 허장성세(虛張聲勢)의 치기어린 불길이니.)


결국 내가 하려는 얘기는, 별을 보자는 것이다.

유장한 은하수가 흐르는 여름 하늘이 드디어 찾아왔다.

가왕 조용필의 귀환 못지 않게 벅찬 감동을 선사하는 여름 하늘의 귀환!

천구를 한 바퀴 돌고 온 여름 별자리들이 펼치는 감동의 대서사시!

여기에 더해 계사년의 화기는,

하늘에 펼쳐지는 별들의 향연을 너무도 명징하게 전달해 준다.

꽃이 아름다운 것 이상으로, 노래가 흥겨운 것 이상으로, 찬란한 저 하늘의 별빛!

이따금 밤길을 걸을 일이 있다면 꼭 한번 하늘을 올려보길 권한다.

여느때 보다 선명하고 화려한 계사년의 밤하늘을 만끽해 보시길! 

여름철의 삼각형을 찾아보자  

오늘 포스팅은 ‘여름 밤하늘 일주일만 보면 달군만큼 본다’ 컨셉 되시겠다.

동쪽하늘에서 새로이 떠오르고 있는 여름 별자리를 탐사하기 위한 몸 풀기 과정!

함께 은하수가 펼쳐진 여름 하늘로 여행을 떠나보자.


해가 지고 나면 밤하늘 동쪽 지평선에는 여름 별자리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여름 하늘에서 길을 찾기 위한 첫 번째 길라잡이는 주극성인 북두칠성이다.

여름 하늘의 북서쪽을 올려다보면 어렵지 않게 북두칠성을 발견할 수 있다.

북두칠성을 찾았다면,

북두칠성의 자루를 따라 이어지는 ‘봄철의 대곡선(the great spring curve)’을 그려보라.

북두칠성의 휘어진 자루를 따라 남서쪽으로 길게 곡선을 그려,

화려하게 빛나는 ‘대각성’과 ‘스피카’를 이으면 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방금 그린 곡선과 반대 방향으로 대칭이 되는 가상의 곡선을 그려보자.

그러면 놀랍도록 시린 빛깔로 반짝이는 별 하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별이 바로 직녀성 ‘베가(vega)’이다.

이 별은 기원전 1만 5천 년 경의 북극성이었다.

세차운동으로 지구 자전축이 이동하면서 이 별은 북동쪽 하늘로 밀려 나왔다.

이 별의 별칭은 ‘하늘의 아크등’이다.

아크등처럼 회백색으로 밝게 빛나기 때문이란다.

하늘에서 베가의 독특한 빛깔을 찾아본 사람은 금방 고개를 끄떡일 것이다.

북반구에서 두 번째로 밝게 빛난다는 이 별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여름 하늘의 두 번째 길라잡이다.

다음, 직녀성의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밝은 별을 찾아보자.

직녀성에서 가장 가까운 1등성은 백조자리의 으뜸별 ‘데네브(Deneb)’다.

데네브는 ‘새의 꼬리’라는 뜻,

백조자리의 꼬리 부분에 위치한 별이라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사실 이 백조는 바람기 많은 신 제우스가 변한 것이다.

백조의 탈을 쓴 제우스는 지금,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를 만나러 가는 중이란다.^^

글을 쓰며 살펴보니 ‘데네브’라는 이름을 상표명으로 삼은 물건들이 꽤 있다.

그리고 주로 남성용품들이다.

데네브 낚시대, 데네브 신발, 데네브 바람막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저 데네브들을 선물했을까...

이제는 밝혀야 한다.

데네브란 이름 석자, 다름 아닌 외도의 심볼이라는 것을.

이번에는 직녀성의 남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연인과의 생이별에 서글퍼하는 직녀의 앞에 은하수의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는 알타이르(Altair) 빛난다.

알타이르는 ‘나는 새’라는 뜻,

서양 별자리로 독수리자리에 해당하는 별이다.

한동안 이 별은 ‘견우성’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원래의 견우성은 북현무의 우수(牛宿).

견우가 비루한 소몰이꾼이듯, 견우 별 우수도 외진 곳에 어둡게 빛난다.

그런데 이를 마땅찮게 생각한 일본 학자들이

알타이르를 견우성으로 뒤바꿔버렸다고 한다.

별이 되어서도 무시당하는 비련의 주인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견우에게 제 이름을 돌려줘야 한다.

알타이르는 은하수를 관장하는 별 ‘하고(河鼓)’일 뿐, 견우가 아니다.


어쨌거나 이 셋이 여름 하늘에서 가장 크고 밝은 주연급 별들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세 별을 이어 삼각형을 만들어보자.

이것이 ‘여름철의 삼각형’으로 여름 하늘에서 길을 찾는 기준점이 된다.

가짜 견우(?) 직녀와 제우스라는 유명인사(?)들이 총출동하는 이 세 별은

여름 밤하늘을 밝히는 등대 역할을 한다.

여름철의 삼각형을 찾았다면 이제 웬만한 여름 별자리들은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여름철의 삼각형 주변엔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여름철의 대표 별자리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베가가 속한 거문고 자리, 데네브가 속한 백조 자리,

알타이르가 속한 독수리 자리 등등.

자, 이제는 동양 별자리를 살펴볼 차례.

그렇다면 이 현란한 여름 별무리 속에 동양의 별자리는 어떤 조합으로 펼쳐져 있을까?


동양 별자리에서는 여름 하늘을 주관하는 별자리들로

‘북방 현무’(北玄武)일곱 별자리를 꼽았다.

현무는 뱀과 거북이 어우러진 상상의 동물로 북방의 수기(水氣)가 상징하는 바,

저장하고 감추는 기운을 주관한다.

문제는 여름은 오행으로 남방의 화(火)인데,

왜 북방의 신장이 여름 하늘의 수호신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동양 천문학 특유의 관측법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다.

동양천문학의 적도 좌표계 방식은 서양의 황도 12궁과는 달리

별자리에 지상의 계절적인 시간과

동서남북의 방위론 관점까지 일치시키려는 체계이다.

28수의 별자리들은 애초에 지상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입장에서 매겨졌지만

지상의 시간 흐름이 천체의 운행 방향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이런식으로 거울 대칭과 같은 엇갈림이 발생한 것이다.

이 문제는 남방 주작 별자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때 아닌 겨울에 남방주작의 별들이 하늘에 출현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그런데 보다 흥미로운 건,

여름철의 삼각형을 위시한 크고 밝은 별들이

북방 현무 7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斗), 우(牛), 여(女), 허(虛), 위(危), 실(室), 벽(壁)의 일곱 별들은

크고 훤한 하늘 가운데가 아니라 지평선에 면하는 외진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별 자체도 서양 별자리에 비하면 어둡고 특색 없는 것들 일색이다.

도대체, 왜? 옛 중국인들이 커다랗게 잘 보이는 별을 제쳐두고,

굳이 어둡고 외진 별들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중국의 천문학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천구의 영역을 할당한

‘적도좌표계’ 방식을 택한데 기인한 것이다.

적도좌표계란 북극성이라는 우주의 중심을 가운데 놓고

별들의 자리를 할당한 방식이다

바로 여기에서 동양 천문학의 중요한 특징 하나가 도출된다.

동양의 천문학은 철저히 관계 중심적인 체계라는 것.

이 바닥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별이 크고 밝으냐 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별과 별들의 관계, 북극성과의 거리,

저 별들이 어떤 간격으로 어떤 조합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 하는지의 여부,

즉 ‘배치’였다.

우리 눈에는 외진 곳에 치우친 어둔 별들의 무리로 보일지 몰라도,

하늘의 ‘전체’를 고려해 본다면,

이들은 북극성이라는 천자를 호위하는 제후에 비견되는 것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여름 별 이야기에서는,

서양 별자리에서 주목하지 않은 ‘낮은 곳의 별자리들’을 다룰 예정이다.

북방 현무의 별자리들은 어떻게 직조되었으며,

사람들은 거기서 어떤 지혜와 비전들을 끌어내었을까.

자, 함께 여름 하늘로 여행을 떠나보자.

은하수의 물을 길어 올려라 - 생명의 별 두수

어느덧 하지(夏至)가 가까워오고 있다.

낮의 길이가 가장 길어지는 때,

양기가 최고조에 달하여 만물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차오르는 때,

바야흐로 태양의 전성시대다.

태양이 방사하는 생성의 기운에 힘입어 만물은 성장의 국면에 접어든다.

누가 뭐래도 이 시기의 주인공은 단연, 태양이다.

그렇다면 태양이 저물고 난 밤하늘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지게 될까?

지표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시간,

왕성하게 펼쳐진 초목의 잎들이 잠시 그 맹렬한 기세를 누그러뜨리는 시간.

그대, 여름 밤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있는가?

여름 하늘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은하수다.

무수히 늘어선 별들의 무리가 눈부신 강물처럼 부서지는 하늘 위의 강물.

낮에 끓는 열기가 대지를 뒤덮었다면, 밤에는 은하수의 강물이 하늘을 뒤덮는다.

은하수가 시작되는 길목 어귀엔

여름 하늘의 주재자 북현무의 별자리들이 포진해 있다.

낮에 남방의 화(火) 기운이 세상을 주름잡았다면,

밤에는 북방 수(水) 기운의 주재자인 북현무의 별자리들이 하늘을 장악하는 셈이다.

그중 북방 현무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별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두수(斗宿)다.

두수는 남쪽 하늘 나지막한 곳에 자리해 있다.

그렇기에 서울 하늘에서는 어지간해선 만나기 어렵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이 별을 만나게 된다면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되리라.

두수의 자리는 은하수가 샘솟아 오르는 발원지와도 같다.

깊은 샘터에서 전해오는 영명한 기운이, 이 별에서 전해져 온다. 

(斗)는 곡식을 계량하는 도구인 ‘말’을 칭하는 글자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두수란 곡식을 재는 됫박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넓적한 바가지에 긴 손잡이가 달린 모습, 우리에게 익숙한 북두칠성과 닮은꼴이다.

그런데 별의 개수는 여섯 개다.

이를 북두칠성과 구분하기 위해 남두육성(南斗六星)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두성은 은하수의 강물을 퍼 올리는 바가지이다.

두성은 하지(夏至)의 도래를 알리는 징표였다.

“하지가 지나면 구들장마다 비가 내린다”는 속담도 있듯이,

두성이 나타나는 시점이 되면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들었다고 한다.

벼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하지 무렵 내리는 비는,

논물을 채우는 데 쓰이는 긴요한 생명수였다.

따라서 두성이 뜰 무렵, 농부들은 저 하늘의 두수를 향해 기원했던 것이다.

넓은 바가지 하나 가득, 은하수의 강물을 퍼다가 세상에 비를 뿌려주기를!

동양의 점성학에서 두수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두수의 다른 이름은 천기(天機), ‘하늘의 기틀’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심장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두수의 여섯 별 사이로 해와 달과 오성이 지나기 때문이었다.

두수의 자리는 천체가 지나는 바른 길목이므로,

이 별은 정치의 안정, 특히 재상의 어짊을 점치는 데 소요되었다.

천자의 일에 있어서 남두로써 점을 칠 때에

크게 밝으면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이 되고, 천하가 화평해지며,

벼슬과 녹봉이 제대로 행해지나,

별빛에 까끄라기가 일면서 뿔처럼 솟고 움직이며 흔들리면,

천자에게 근심이 생기며, 또한 병란이 일어난다.

또 자리를 옮기면 신하를 쫒아내게 되고,

일월과 오성이 거꾸로 들어오면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다.

패성이 범하면 병란이 일어나고, 작고 어두우면 재상을 폐하고 결국 죽이게 된다.

<이순지, 천문류초, 111쪽>

위의 글은 천문류초에 실린 두수의 해석이다.

임금과 신하, 정치의 안정과 병란까지!

두수는 그야말로 국운(國運) 총체적으로 관망할 수 있는

점성학의 대박 아이콘이었다.

죽음의 됫박, 생명의 됫박

그밖에도, 두수는 탄생을 주관하는 별로 유명하다.

일전에 우리는 북두칠성의 점성학적 의미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오행으로 북쪽은 수에 해당하여 만물이 죽어가는 겨울에 상응한다.

북쪽 하늘에 붙박힌 영원의 별,

북두칠성은 하늘을 순행하면서 세상의 소멸과 죽음을 관장한다.

민간에서 북두칠성은 망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별이라 믿어져 왔다.

그렇기에 망자를 매장하는 칠성판에 북두칠성 무늬를 그려 넣었더랬다.

이번엔 반대로 북두칠성의 자루 끝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따라가 보자.

그러면 또 다른 됫박이 나온다. 그것이 남두육성.

남쪽은 화요, 만물이 성장하는 여름에 상응한다.

여름 중에서도 양기가 극에 이른 하지 무렵에 떠오르는 별답게,

두성은 생명의 기운을 주재한다.

민간에서도 두성은 탄생과 건강을 주재하는 별로 알려져 왔다.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죽음을 관장하는 북두칠성과 탄생을 관장하는 남두육성은,

북극성이라는 하늘의 축을 가운데 두고 빙그르 밤하늘을 선회하고 있다.

밤하늘에 두 개의 됫박(斗) 있는데,

북쪽의 것(북두)은 죽음을 퍼 올리고, 남쪽의 것(남두)삶을 퍼 올리는 셈이다.

마치 남두육성이라는 국자가 생명수인 은하수의 물을 푸면

북두칠성이라는 국자가 이 물을 다시 쏟아 붓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강진원, 역으로 보는 동양천문 이야기, 212쪽>

풍차의 두 날개가 엇갈리듯이 남두와 북두의 됫박이 서로 엇갈려 돈다.

이렇듯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도 동시에 굴러간다.

엇갈려 반대로 정향된 채로, 이들은 하나다.

옛 사람들은 일찍이 알았으리라.

태어남과 죽음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생이 있음으로 사가 있으며, 사는 다시금 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삶이란 곧 생과 사가 동시에 함께 하는 총체적인 흐름이라는 것을!


우리라면 탄생의 별을 기리고 죽음의 별을 배척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옛 사람들은 달랐다.

남쪽을 향해 빌고, 북쪽을 향해 빌었다.

탄생을 기리고, 죽음을 축원했다.

생과 사가 곧, 하나의 다른 두 얼굴임을 이해했다.

이때 우주의 운행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죽음이란 유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되는 순환의 흐름 가운데 다시,

새로운 생으로 이어지는 통로라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자연엔 죽음이란 없다!

오히려 진정한 죽음이란 인간이 자아내는 분별의 산물이다.

생과 사의 상호 연결된 흐름을 하나로 고정시키는 순간,

생을 추구하고 사를 멀리하는 순간,

생과 사는 모두 우리에게 죽음으로 찾아온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나는 무엇에 애착을 두며, 또한 무엇을 미워하고 있는가.

하늘을 보고 삶을 알며,

별을 보고 인간을 이해했던 옛 사람들의 지혜에 귀 기울여 보자.

견우의 별-우수

오늘의 주인공은 여름하늘의 대표주자 견우별이다.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펼쳐지는 여름 하늘의 로맨스

견우직녀설화(牽牛織女說話)의 그 견우 말이다.

먼저 별자리를 찾는 법부터 알아보자.

북두칠성의 구부러진 자루 반대 방향으로 곡선을 그려 직녀성 ‘베가(vega)’를 찾는다.

다음, 곡선을 이어나가 은하수에 이르면 하고성(河鼓星)을 마주치게 된다.

하고성은 서양 별자리로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Altair)’에 해당한다.

세간에는 이 별이 은하수 건너편의 직녀를 그리워하는 견우별이라 알려져 있으나,

28수에 기록된 견우별은 그보다 더 후미진 남쪽 하늘에 있다.

곡선을 계속해서 이어나가 보자.

곡선이 은하수를 빠져나가면 남쪽하늘 아래, 어둔 별들의 무리가 보인다.

견우별은 이 별 볼일 없는 별들의 무리에 섞여 있다.

견우별을 찾으려면 여기서 어설픈 역삼각형 모양의 별자리를 찾으라.

이것이 서양의 염소자리다.

그 오른쪽 모서리에는 3등성짜리 희미한 별이 빛나는데,

이 별이 다비흐(Dabih)로, 오늘의 주인공 견우별 우수(牛宿)다. 

서양 사람들은 이 별을

염소의 머리에 물고기의 몸을 한 괴이한 모습의 신 ‘판(PAN)’이라 생각했다.

오늘의 주인공 다비흐는 염소의 뿔이요,

반대편의 모서리는 물고기의 꼬리에 해당하는 셈.

판은 소 ․ 말 ․ 양 등 가축을 주관하는 목축의 신이다.

몰골이 이 모양인 까닭은 괴물 티폰(Typhon)의 습격을 받아 도망가느라

변신술이 제대로 먹히지 않아서란다.^^

이 신의 특기는 ‘버럭’이다.

언젠가 제우스와 거인족들 간에 싸움이 붙었는데,

판이 버럭 소리를 질러 거인족들을 혼비백산시켰다고 한다.

서양의 양치기들은 가축들이 집단적으로 날뛸 때면,

누군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가축들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다고 믿는다.

그가 바로 판이다.

어딘가 원인모를 혼란이나 아수라장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목축의 신, 버럭의 제왕 판의 작품이다.

영어 ‘패닉(PANIC)’도 여기서 유래했다.


흥미롭게도 동양사람들은 비슷한 듯 다른 별자리를 구성했다.

동양 사람들은 이 별을 목동 견우(牽牛) 생각했다.

이름도 우수(牛宿), 즉 소의 별이라는 의미다. 견우는 소몰이꾼이다.

그가 소를 모는 건 유목과 목축이 아니라 농경을 위해서다.

견우는 쟁기 걸어 밭 가는 농사꾼이다.

별자리의 모양도 야릇하게 다르다.

동양의 우수(牛宿) 뿔 달린 황소 모양이다.

흥미롭게도 염소자리의 뿔이던 다비흐(Dabih)

알게디(Algedi) 우수에서도 황소뿔이다.

견우직녀설화를 상기해보자.

우연히 마주친 견우와 직녀는 그 자리에서 눈이 맞았다.

과도한 연애질로 옥황상제의 미움을 산 이들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지게 되었다.

이 비련의 커플이 일 년에 한 번 재회하는 날이 칠월 칠석이다.

칠석이 되면 비가 내린다.

은하수를 마주한 두 연인이 회한의 눈물을 쏟기 때문이다.

오작교를 놔주느라 까치 머리도 벗겨진다.

(까치 머리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요새 비는 영 뜸하다. 그들, 어느새 권태기인가!)


염소자리가 ‘패닉’의 별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수 역시 부정함의 상징으로 통용 되었다.

언젠가 서양의 발렌타인 데이에 대항해

우리의 칠석날을 연인들의 날로 기리자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다.

이 시대의 청년들이 온갖 상술로 범벅이 된 외래의 풍습에 빠져들기보단,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을 다시 향유하게 하자는 취지였으리라.

그런데 이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민간에서 칠석은 굉장히 부정적인 날로 여겨져 왔다.

사실 뭘 해도 되는 게 없는 캐릭터가 견우 아니던가.

호박이 넝쿨 째 굴러오는가 했더니, 결국 남은 거라곤 영원한 천형이고,

오랜 기다림 끝에 연인과 재회 하는가 했더니

은하수 강물이 눈앞에서 범람을 하는가 하면,

오색 주단을 밟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까치와 까마귀가 밟힌다!

그렇기에 민중들은 하늘의 우수를,

비 내리는 칠석날을 몹시 부정한 날로 생각한 것이다.

특히나 소를 부려 농사짓던 동양인들에게 이 날은,

소의 주인 견우가 눈물짓는 때이니

소의 질병이나 흉작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날로 인식되었다.

혼인를 앞둔 남녀에겐 금기중의 금기가 칠석날이었다.

영원한 이별과 단절과 좌절의 상징인 칠석날을 연인의 고백의 날로 기리다니,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어쨌거나 유목과 농경이라는 문명의 코드를 사이에 두고

각기 신화가 기묘하게 닮은꼴로 변주 된다는 점, 그저 흥미로울 따름이다.

우수를 읽는 또 다른 키워드,

민중들의 소망이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점치는 데 이르면

이 별은 또 다른 각도로 읽힌다.

이순지의 『천문류초』를 보자.

우는 백성의 운을 주관하는 별이다.

하늘의 관량으로 해와 달 및 오성이 다니는 길이며,

주로 제사에 쓰이는 제물과 관련이 있다.

우의 제일 위에 있는 두 개의 별은 관량(關梁: 관문과 교량)을 주관하며

그 다음 두 별은 남쪽 변방국가를 주관한다.

<이순지, 천문류초, 117쪽>

우수는 기본적으로 민생을 읽는 별에 해당하는데,

여섯 개의 별이 각기 담당하는 영역이 다 다르다.

소뿔에 해당하는 위의 두 별은 일월과 오성이 지나다니는 길목이기에,

길과 소통을 상징한다.

이 별을 보고 관문과 도로의 소통의 원활함을 점친다.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부(富)의 흐름, 경제의 번성을 읽어낼 수도 있다.

그 아래 가운데의 별 하나는 희생에 쓰일 소를 점치는데 쓰인다.

그리고 그 아래의 별을 보고서는 남쪽의 변방국가의 움직임을 읽는다.

이 해석 가운데 중요한 것은 희생을 상징하는 가운데 별이다.

이 대목이 의문이다.

도대체 희생에 바쳐질 소가 뭐 그리 중요했던 것일까?

천문류초의 뒷장에는 이 별 하나를 두고 갖가지 해석의 경우를 나열하고 있다.

(이 별이) 밝고 커지면 관량이 잘 통하고 소가 귀하게 되며,

(怒) 하면 말이 귀하게 되고,

밝지 못하고 평상시의 자리를 잃으면 곡식이 잘 자라지 않으며,

작고 가늘면 소가 천하게 되고, 별이 상하로 이동하면 소가 많이 죽으며,

주변의 작은 별들이 없어지면 소에 질병이 돈다. 

<같은 책, 118쪽>

별이 노한다는 표현(아마도 성난 듯 번뜩인다는 말일 터) 흥미롭지 않은가.

그런데 도대체 그건 밝고 큰 것과 어떻게 다른가?

별이 밝지 않은 것과 미세해 지는 것은 또 어떻게 구분되는가.

이 작은 별 하나의 조짐을 이렇게 미세한 단위까지 세분해 묘사해 놓은 것만 봐도,

우수의 가운데 ‘희생’의 별이 얼마나 중요한 위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희생은 우수를 읽는 핵심 키워드였다.

『사기』의 「천관서」에도“견우는 희생(犧牲)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고대 사회에 있어 희생은 중요했다.

그것은 국가의 중심적 종교 의례였고, 한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제의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는 한자만 봐도 알 수 있다.

종(宗)·신(神)·축(祝)·사(社)·사(祀)·조(祖)·복(福) 종교와 관련된 글자를 보면

어김없이 보일 시(示) 들어간다.

이 글자는 제단 위에 제물을 올려놓은 모습을 본뜬 것이다.

글자 가운데의 고무래 정(丁) 제단의 상형이고,

제단 위에 올려놓은 제물에서 흘러내리는 피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희생은 갱생(更生)동력이었다.

제물의 죽음은 인간 사회에 소생의 동력을 부여했다.

세계는 음양이라는 거대한 순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죽음은 결국 다른 하나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현대인들의 감각으로는 일 없이 짐승을 죽인다는 일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인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죄 없는 짐승의 목숨을 지불하는 일은

이기심과 탐욕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고대의 희생은 전혀 다른 의미의 것이었다.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가기 이전에 먼저 나의 것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였고,

가지기 전에 먼저 베푼다는 의미였다.(말이 참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다.)

고대에 있어 중요했던 것은 순환과 갱생이었고,

소유로 인해 흐름이 정체되는 일이 없게 먼저 비워내려는 배려가 곧 희생이었다.

이들의 희생제의에는 늘 소유에 대한 경계가 뒤따랐다.


그런 의미에서 수확보다 공들이는 것이 희생이었다.

희생에 바쳐질 제물은 굉장히 세심한 관심 속에 길러졌다.

계절의 일기와 때에 맞는 행위의 준칙들을 기록한『월령』에는

각각의 달(月)마다 희생에 쓰일 가축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가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희생 자체가 대자연의 영구불변하고 순환하는 리듬,

차서(次序)로서의 시간과 함께 하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사시의 운행에 맞추어 천지의 기운을 버무린 제물을

생사의 영원한 순환의 장으로 던져 넣음으로써,

자연의 흐름과 감통(感通)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우수는 희생을 주관하는 별이다.

아마도 이 별이 뜨는 시기가 되면

더더욱 희생에 쓰일 가축들을 공들여 살피라는 의미였으리라.

우수가 전하는 견우직녀 설화도 그런 점에서 비슷한 맥락이었으리라.

풍요의 수확철을 앞두고 먼저 생의 비애를 상기하라,

이별의 슬픔을 먼저 상기하고, 죽음의 비감을 앞당겨 겪으라!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

주어진 현실을 긍정하는 태도를 체득했다.

뭇 존재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배워갔다.

견우 별 우수가 뜨는 시간, 내 삶을 돌아보자.

이 순간 내가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비움 가운데 열리는 삶을 나는 살아가고 있는가.

여수(女宿)의 추억

물병자와 홍수신화


장마가 한창이다.

꿉꿉한 이부자리, 밀린 빨래가 주는 압박이 우리를 힘겹게 하는 때,

바야흐로 습(濕)의 전성시대다.

남산 자락에 깊숙이 감싸인 이곳 연구실은

가히 습(濕) 향연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연구실이 세 들어 사는 깨봉빌딩은 하필 복개천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터라,

이즈음이 되면 ‘습지’를 방불케 할 눅눅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강의실 바닥엔 달팽이가 기어 다니고,

눅눅해진 종이는 연신 복사기 안으로 말려 들어가며,

바닥 타일의 우아한 꽃무늬를 따라서는 까만 곰팡이가 피어오른다.

이 장마의 퀴퀴함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뻔질나게 걸레질, 솔질을 해야 했던가!

깨봉시대 2년차를 목전에 두고서, 문득 하나의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각 잡고 반듯하게 살길 바라지만,

대자연의 힘은 끊임없이 인간이 잡아 놓은 각을 허물려 든다는 것을.

구획과 분별을 끊임없이 흐리려드는 ‘어머니 자연’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게 결국 우리 삶의 양상을 결정할 거라는.

누가 들으면 귀농이라도 한 줄 알겠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별을 봐야 원고에 뭐라도 좀 쓸 텐데 장마통에 한동안 별 구경이라곤 해 본 적이 없어,

심히 걱정스러웠던 게 이번 원고다.

서두에 미리 밝혀두건대,

이번 별자리 연재분은 필자도 아직 미처 보지 못한 별들에 대해,

이러저러한 책들에서 읽은 바를 ‘유추’ ‘종합’하여 끄적인 것임을 고백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오늘부터 연재할 별자리들은

장마철의 이 꿉꿉한 날씨와 묘한 매치를 이루는 별자리다.

물병자리라고 들어들 보셨으리라.

(동양의 별자리로는 북방 현무의 여수(女宿), 허수(虛宿), 위수(危宿)가 이와 겹친다.)

하늘의 물병이 뒤집히기라도 한 듯, 쉼 없이 장마비가 내리는 요즘,

저 하늘에 물병자리가 떠 있다니 뭔가 기묘한 관련이 있는 것도 같다.

먼저 물병자리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자.

<도대체 어디를 봐서 물병을 든 소년이란 말인가!>

물병자리는 물병을 들고 선 소년의 형상이다.

별자리의 모습을 보자. 대체 어디가 소년이고, 어디가 물병이냐고?

실제로 이 물병자리는 구분하기 몹시 어려운 별자리에 속한다.

특출나게 밝은 별도 그닥 없는데다, 넓은 영역에 광범하게 산개해 있기 때문이다.

웬만한 상상력이 아니고선 별자리를 이렇게 그려내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 별자리를 만든 건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다.

별 특징도 없는 별들을 길게 연결해서 물병을 든 소년이라고 우겼던 이유,

그건 그들에게 이 별이 황량한 겨울이 가고

생명의 단비가 내리는 계절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각수(角宿)처럼 말이다.)

물병자리는 얼어붙은 세상을 깨워주는 단비와 같았다.

이 별이 뜰 즈음에 세상에 촉촉한 봄비가 내렸고,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은 생기를 머금고 넘실거렸다.

하지만 물병자리가 뜨는 계절이 오면 잠시도 경계를 게을리 해선 안 되었다.

적당히 오면 문전옥답의 단비겠지만

조금이라도 넘쳐나면 홍수를 불러들이는 재앙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었다.

카렌암스트롱의 설명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강의 범람은 곧 치명적인 재앙으로 여겨졌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은 불규칙적이었고 종종 파괴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강에는 자연적인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물길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곤 한다.

따라서 강은 자주 범람했고, 재난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강의 범람은 이집트에서와는 달리 축복이란 의미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분열을 빗대는 말로 쓰였다.

<카렌 암스트롱, 『신화의 역사』, 문학동네, 71쪽>

이러한 두려움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홍수신화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서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라든지,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우트나피슈팀의 홍수이야기가 그것.

등장인물의 이름이야 어찌되었건,

이들 신화는 결국 홍수와 해일로 세상이 파멸에 처하고,

한 무리의 인간만이 파국 속에서 극적으로 살아남는다는 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강의 범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감을 이야기에 담았고,

이 이야기를 전해 받은 그리스인들은 천성적인 이야기꾼 기질을 발휘하여,

흥미진진한 물병자리 신화로 승화시켰다.

다음 이야기가 바로 물병자리에 얽힌 신화다.

제우스는 오만해진 인류를 홍수로 멸망시키려 했다.

그러자 프로메테우스의 아들 ‘데우칼리온’은

그의 부인 ‘피라’와 함께 방주를 건조하여 재난을 피했다.

이 최후의 생존자 한 쌍은 하늘의 제우스에게 간청한다.

다시금 인류에게 번성의 기회를 달라고.

그러자 제우스는 그들에게 어머니의 뼈를 등 뒤로 버리라는 전언을 내렸고,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는 등 뒤로 돌을 던졌다.

그러자 이들 부부가 던진 돌에서 남자와 여자 한 쌍이 태어나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단다.

(뼈가 아니라 돌을 집어든 실수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이 모양 이 꼴을 하고 산다.)

저 하늘의 물병자리는 인류를 종말의 나락에서 구원한 데우칼리온을 기리는 별자리다.

별자리의 모습을 보자.

뒤집힌 물병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재앙의 홍수를 일으키지만,

그는 등 뒤로 힘껏 팔을 뻗어 인류의 갱생을 위한 돌을 던지고 있다.

장마철이라 별은 안 보이지만

지금 밤하늘 동쪽 어딘가에는 저 물병자리가 빛나고 있으리라.

그 별은 수 천 년 전의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공포와 외경으로 바라보았던,

신성의 빛이다.

저 빛이 우리에게 풍요와 번성을 가져다 줄 것인지,

아니면 재앙과 파멸을 선사할 것인지,

사람들은 하늘의 미세한 조짐들에 이목을 집중했다.

아낙네들의 별 여수 

동양의 별자리로 앵글을 돌려보자.

물병자리와 함께 펼쳐지는 장대한 서사는, 공교롭게도 동양의 하늘에 없다.

끊임없이 신과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오만과 이에 처벌을 내리는 신들,

또한 신의 처벌에 대항하며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영웅들...

안타깝게도 동양의 상상력엔 이런 류의 혹~하는 이야기가 없다.

똑같이 자연의 리듬을 말하고 생멸의 순환법칙을 얘기하면서도

동양인들은 서양인들이 꼭 한 번씩들 즈려밟고 가는,

처벌-파국-초극의 서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음과 양은 부단히 교대되는 양상일 뿐이다.

양이 극에 이르면 음으로 전환되고, 음은 다시금 양으로 전환된다.

이 순환의 고리에 신의 의지나 죄의식 따위는 개입하지 않는다.

물병자리에 면한 별들은 동양에서도 확실히 어떤 전환의 계기가 된다.

하지(夏至)가 지나면서 치성하게 자라나던 양기(陽氣) 한 풀 꺾이고,

음기(陰氣)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양인들은 이 전환점을 여여(如如) 자연의 마디로 바라보았다.

유별난 모험과 투쟁하는 영웅 따윈 여기 없다.

동양인들은 처벌과 구원의 서사 없이 자연의 운행을 받아들였다.

물병자리의 데우칼리온이 미래의 인류를 위해 돌덩이를 던지는 그 자리에,

동양의 여수(女宿)가 있다.

왜 여수인가? 단순하다.

하지가 지나 음기가 자라는 시기이기 때문에,

음을 주관하는 여자의 별이 뜬다고 본 것이다.

이 심연 없음!

옛 동양인들은 소멸이니 파국이니 하는 근원적 공포감에 휘둘리지 않고,

천지자연의 호흡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했다.

여수는 물병자리의 3등성 별 ‘알바리(albari)'를 포함한 사다리꼴 모양의 별자리다.

이순지의 『천문류초』에서는

이 별을 길쌈하는 여자를 뜻하는 수녀(須女) 빗대고 있다.

이 별이 뜰 무렵부터 부녀자들의 길쌈하는 시기가 도래하기 때문이었다.

하지가 지나고 음이 자라나는 시기,

이 때가 되면 닥쳐올 겨울에 대비해 겨울 옷감의 길쌈에 돌입했다.

곧 하늘의 여수는 길쌈하는 때를 알려주는 신호탄과 같았다.

점성학의 해석도 뭐 크게 다를 건 없다.

여수가 밝으면 길쌈이 잘 되어 그 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징조였다.

조금 확대해서 해석도 가능하다.

여인네의 일 전반을 범치는 표지로도 읽을 수 있었다.

별이 밝으면 풍년이 들어 먹고 살기 좋아지고,

별이 흐리거나 이동하면 부녀자가 재앙을 입게 되어

아이를 낳다가 죽는 일이 많아진다.


여수를 가운데 놓고, 일월오성이 어떻게 지나드는지를 보고,

조금 복잡한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여수는 해와 달이 드나드는 길목이다.

하지만 해와 달이 정상적으로 지나다니지 않고 여기서 일식 혹은 월식이 일어난다면,

이는 나라에 우환이 생길 징조로 본다.

목성은 왕을 상징한다.

따라서 목성이 여수를 지난다면 황후, 즉 여자 대통령이 나올 징조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도?!)화성과 금성은 전쟁과 군대의 상이니,

이들이 여수를 범하면 병란이 일어나거나 여자들이 많이 죽게 된다고 한다.

또한 상벌의 상징인 수성이 머무르면 자라나는 음기를 벌하는 형국이므로

만물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고,

제후와 임금의 상인 토성이 머무르면 여자들이 죽는 일이 벌어진다.

여수는 여자의 별이다.

단순하고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 동양적 사유의 본질이 있다.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동양인들은 자신에게 닥쳐온 시절을 투쟁하고 초극하려들지 않고,

녹아들고 살아내려 했다.

물이 형세에 부합하며 흐르듯, 자연의 그러한 바를 거스르지 않으며 살아가려 했다.

나의 일상을 돌아보자.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양기 퇴장, 음기 입장- 허수와 위수

며칠 전 한 연구실 학인 분이 내게 이런 말을 건냈다.

“혈자리 서당, 본초 서당, 절기 서당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근데... 별자리 서당도 있더라구...” 그렇다,

별자리서당...^^;; 작년 4월 연재를 시작해,

홀로 외로이, 꾸역꾸역, 격주 마다 원고를 뱉어 냈다.

그게 어느덧 28개. 어느덧 마지막 원고를 써야 할 시점이 왔다.

평소에 별에 관심이 있던 것도, 천문학에 기본적인 소양이 있던 것도 아닌 내가,

그저 꿈에 암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시작한 연재였다.

매연과 공해로 뒤덮인 서울 하늘에서

잘 뵈도 않는 별을 짚어가며 하늘바라기 노릇을 해 본 것,

정말이지 남다른 경험이었다.

자정마다 남산의 으슥한 봉우리를 서성거리면서,

28수 별자리를 따라 펼쳐진 옛 사람들의 지혜와 비전을 읽어낼 수 있길,

간절히 염원했다.

하지만 동양 고대 천문학은 원체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늘의 무늬를 읽는다는 천문(天文)은,

이름에서 풍기는 낭만적인 정조와는 달리

수 세기 동안 군사와 국정을 점치는 일에 복무해왔다.

그만큼 철저한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서양의 점성학이 인간의 몸을 보는 일에,

그리고 개인의 운명을 보는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것과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연구서도 의외로 많지 않았다.

조선조의 천문가 이순지가 정리한 『천문류초』와 사마천의 『천문서』,

『회남자』 정도가 고작이었다.

28개 별자리에서 몸과 마음의 지도를 읽어보겠다는 계획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별자리서당은 내게 더 없는 스승이 되어 주었다.

이렇다 할 레퍼런스(reference)가 없다는 것,

그건 다른 한편 새로운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그 어떠한 의지처 없이 맨몸으로 텍스트와 부딪쳐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별자리서당은 더없는 스파링 파트너(sparring partner)였다.

천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연재를 시작한 자리로 돌아온 시점,

이룬 것도 남은 것도 없다.

여전히 ‘하늘 공부는 이제 시작이다’ 라는 마음뿐이다.^^

허나 연재는 마치지만 공부는 계속된다는 일념으로,

서울하늘에서 별 보는 우매한 별바라기의 길을 나는 계속 갈 것이다.


어쨌거나 1년에 걸친 장기 레이스를 자축하며,

나의 마지막 길을 밝혀줄 두 개의 별을 소개하고자 한다.

마지막 주인공답게 음기(陰氣)충만한 별들이어서 더 반갑다.

이름만으로도 으스스한 음기가 느껴지는 허수(虛宿)와 위수(危宿)그들이다.

보름이 넘게 서울 하늘을 무겁게 짓누르던 장마가 그치고

드디어 맑은 하늘이 얼굴을 드러냈다.

은하수가 펼쳐진 여름 하늘을 볼 절호의 기회다.

자, 함께 저 하늘을 올려보자!

허수(虛宿)와 위수(危宿) 지난 회 여수의 추억의 주인공 여수(女宿)함께

서양의 물병자리에 겹쳐지는 동양 별자리이다.

이 별들은 모두 하지(夏至)가 지나면서 양기가 시들고,

음기가 자라는 역전의 시기를 주관한다.

음기 충만한 별들답게, 몹시도 어두운 밝기를 자랑한다.

서울 하늘에서 이 별들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은 여수의 사다리꼴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면 만나게 되는

두 개의 별자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허수를 찾는 또 다른 방법은 ‘페가수스’를 찾는 것이다.

자정이 넘어가면 동쪽하늘 낮은 곳에서 페가수스의 ‘가을철의 사각형’이 떠오른다.

사각형의 서쪽 변에서 서쪽으로 짚어 나가면 금방 위수와 허수를 만날 수 있다.

이 중 후자의 것이 보다 쉬운 관측법이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위수와 허수이다>

먼저 허수를 만나보자.

이순지의 『천문류초』에서는

“허는 위와 아래로 각기 한 개의 별이 구슬을 이은 것 같은” 모양이라 노래하고 있다.

노랫말은 퍽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별자리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으스스하다.

구슬보다는 뼈다귀나 해골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허수의 영역에는 모두 10개의 별자리가 속해 있는데,

그 중 7개의 별자리가 이처럼 2개의 별이 연이은 모습이다.

허수가 지배하는 영역은 광대한 묘지, 혹은 뼈다귀 무덤을 연상시킨다.


(虛)는 빌 허다.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는 뜻이다. 무엇이 없다는 뜻인가?

보통은 양기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때는 바야흐로 입추가 가까워오고,

하지 이후 성장을 멈춘 양이 쇠락의 길에 접어든지 오래인 시점.

양이 비워놓은 공허의 자리에 서서히 음이 자라난다.

찬밥신세로 밀려난 양의 신세!

하지만 절대적인 소멸은 아니다.

사마천은 『율서』에서

“허(虛)란 실할 수도 있고 허할 수도 있는 것으로,

양기가 허공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풀어 놓았다.

허할 수도 실할 수도 있다니, 이 무슨 말인가?

양이 지금 비록 쇠퇴일로를 걷고 있지만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며,

동지가 지난 다음에는 다시금 자라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양기가 ‘허공에 감추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절묘한 표현이다!

양이란 것이 원체 무형(無形)기운이기에

딱히 돌아갈 곳이나 숨을 곳이 따로 있지 않다.

그저 허공에 맥 없이 흩어질 뿐!

하지만 흩어지는 듯 감추어졌다가 때가 되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양이다.

허공에서 나서 허공으로 돌아가는 것, 이게 양의 운명인 것이다.


허수는 이런 양의 무덤, 혹은 허공의 집이 된다.

이순지는 『천문류초』에서 이렇게 푼다.

“허수는 빈 집(虛堂)이다.”

허공에 흩어져버린 양을 상징하는 자리, 그게 바로 이 허수다.

그럼 이 별은 무엇을 주관하는가.

보아하니 허수는 양이 힘을 상실하여 흩어진 시점,

하지만 그렇다고 음의 활약은 아직 미흡한 시기를 지키는 별이다.

양이 주관하는 영명한 정신이 힘을 잃고,

음이 주관하는 바 몸마저 얻지 못하였으니, 분명 망자의 자리임에 틀림없다.

허수는 죽은 이의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에 비견된다.

묘당과 제사의 일을 주관하며, 나아가 바람과 구름 죽음에 관한 일을 주관한다.

모든 부유하는 것들의 고향, 정처 없이 흐르고 떠다니는 희미한 것들의 대합실,

그것이 빈 집, 허수의 이미지이다.


허수의 해석에서 중요한 건 모든 변수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흔들려도 안 되고 작아져도 안 되고,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나도 안 되고,

오성이 침범해서도 안 된다.

제사를 주관하는 성스러운 영역이어서인지,

이곳은 그 어떠한 이변이나 이질적인 요소의 틈입도 허락하지 않는다.

보통 이 별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은 병란과 천재지변으로 곡하는 소리가 늘어날 조짐으로 해석된다.


허수의 영역에 동반된 뼈다귀 모양 별들은

각각 사명(司命), 사록(司祿), 사위(司危), 사비(司非),

그리고 읍(泣), 곡(哭)이라 불린다.

(司)자가 들어가는 네 별은 상벌을 주관하여 부정한 것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며

곡과 읍은 죽음을 주관한다.

사마천의 『천관서』에는‘허수는 울부짖음을 주관한다’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읍과 곡을 칭하는 말로 짐작된다.

여튼, 허수는 죽음의 자리, 혼령의 자리다.

위수(危宿)는 세 개의 별이 꺾쇠 모양으로 모인 별자리다.

(북방 현무 7수에 속한 위수(危宿)는 서방 백호에 속한 위수(胃宿)와 발음이 같다.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위수(危宿)를 위험 위수, 위수(胃宿)를 밥통 위수라 부른다.)

(危)는 위태로울 위자다.

앞의 허수와 마찬가지로 이름만으로 무겁고 음산한 분위기가 강하게 전해져 온다.

사마천은 『율서』에서

“위는 허물어진다는 뜻이다.

양기가 여기에 이르러 허물어지는 까닭에 위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풀었다.

사마천처럼 위(危)자를 ‘허물어지다’로 보는 게 정확할 듯하다.

위수는 허수에서 흩어진 양기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자리다.

이순지의 『천문류초』에서는 위수를 이렇게 해석한다.

위는 하늘의 곳간이고, 하늘의 시장에 지은 집으로 물건을 잘 간직하는 일을 맡아한다.

또 바람과 비를 관장하고 분묘(墳墓)의 일 및 상사(喪事)가 나서

사람이 죽고 그에 따라 곡을 하고 우는 일을 맡아하니

도읍에 거처해서 묘당(廟堂)과 사당(祠堂)의 일을 맡은 총재(冢宰)의 직책에 해당한다.

일단은 윗 장에 언급한 허수와 비슷하게 죽음과 상례를 주관하는 별로 볼 수 있다.

여염집의 상례에서부터 나라의 제사까지,

죽음에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다루는 하늘의 장의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허수보다 음기가 더 자라난 시기이므로,

음기를 써서 물질적인 것, 유형의 것을 만들어내는 일을 주관하기도 한다.

인용구 서두의 ‘물건을 간직하는 일을 맡는다’는 뜬금없는 구문은,

음기를 써서 어떤 것을 지키고 소유한다는 의미다.

나아가 유형의 물건을 만든다는 의미도 있다.

위수는 토목공사나 건축물의 축조를 점치는 별이기도 하다.

위수가 흔들리거나 오성의 침범을 받으면 울 일이 많아지는 형국이므로

세상에 죽음이 창궐한다.

혹은 음기를 써서 뭘 도모할 일이 많아지므로,

토목공사가 벌어진다거나 부역에 동원될 일이 많아지고, 병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위수의 영역에 속한 그 밖의 별들은 무척 서민적인 별들 일색이다.

음기가 부쩍 자라난 탓인지 구체적인 물질적 필요를 주관하는 별들이 많아지는 듯.

야간 순찰과 치안을 주관하는 별 인성(人星),

곡식을 찧는 일을 주관하는 (杵)와 구(臼),

비단 창고를 주관하는 천전(天錢),

수레 창고를 주관하는 거부(車府), 천구(天鉤),

말을 주관하는 조보(造父),

묘지와 매장의 일을 주관하는 분묘(墳墓)와 허량(虛梁) 등.

이 별들은 백성의 구체적인 삶을 주관하는 별들이기에 “민성(民星)이라고도 부른다.


양기가 물러나고 음기가 살아난다!

이제 양기를 써서 펼쳐낸 기운을 음기로 수렴시켜야 할 시기가 되었다.

확장을 멈추고 결실의 때를 향해 가야한다.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하고, 어떻게 무르익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수확과 결실의 가을이 임박해 있다!

오늘의 주인공 허수와 위수는

양에서 음으로 전세가 엇갈리는 거대한 전환의 마디를 일러주는 등대다.

어둡고 무거운 음의 별이 뜨는 시기,

각자의 일상을 돌아보자.

양기 퇴장, 음기 입장이렷다!

출처 : 별자리 서당 (손영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