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자신도 용서는 커녕 용납도 안되는 형제들이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택하심과 거룩한 삶

골 3:12-17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2-17 /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배려를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겸손하게 온유와 인내로 13) 관용을 베풀어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원한을 품지 마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14)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모두를 완전하게 하나로 묶어 주는 띠입니다. 15) 그리스도께 받은 평화가 항상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에 깃들이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여러분의 책임이며 특권입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교훈을 마음에 간직해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풍부하게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지혜롭게 되어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17)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간에 주 예수의 대리인으로 행동하고 주 예수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를 드리십시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생활을 도전하고 또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정체성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정체성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서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게 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12-14)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 가지는 가장 큰 정체성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주셨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경찰이 되어 평상복을 벗어버리고 경찰의 제복을 입으면 사람이 변합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인지감수성이 변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래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제복을 입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변화된 생각은 모든 것을 바꾸게 합니다. 내면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보여주는 변화는 동정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향한 선의,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느니 자기가 상처를 입겠다는 부드러운 마음, 노여워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기다리는 마음 등 5가지 열매로 나타납니다. 5가지 열매는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여 하나를 이루는 실제적인 삶의 결과를 낳습니다. 이러한 여유와 축복은 변화된 자기 정체성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15-17)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든든한 마음의 바닥짐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일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더 크고 소중한 것을 묵직하게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삶의 평강을 이루고 서로 간에 선하고 옳은 일을 권면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강력한 성품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는 가장 강력한 성품이요 영적인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든지, 또는 없더라도 흔들리거나 시험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이고 이 믿음으로 이겨낸 시험거리가 있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역시 동참한 자들입니다. 그 분의 부활에 동참한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자이기에 그는 ‘산 자’입니다. 오직 사탄의 유혹을 이기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죄인들을 사랑으로 품으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는 자신의 부끄러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십자가에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기에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처럼

골 3:12-17 / 김광일목사

히틀러 나치정권에 저항을 하다 교수직에서 해임되었지만 나중에 튀빙겐 대학교와 함부르크 대학교의 총장까지 올라간 헬무트 틸리케 (Helmut Thielicke)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한스(Hans)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스(Hans)는 공부를 잘하였는데 항상 자기보다 뒤에 쳐진 친구들을 깔보았습니다. 그래서 틸리케를 비롯한 친구들이 한스를 혼내주려고 학교 정문 뒤에 숨어서 한스가 등교하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지역의 유지이며 교육감인 한스의 아버지가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기 위해 나란히 나타났습니다.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육자였던 한스의 아버지는 아들과 헤어지기 전에 몇 번씩이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뺨을 만지작거렸고, 또 학교에 들어서는 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몇 번이나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한스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벼르고 있던 친구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한스가 아버지에게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 신성불가침의 기이한 위엄을 느꼈던 것입니다. 틸리케는 어린 시절의 이 체험을 설교에 소개했습니다. 한스의 아버지가 아들을 뜨겁게 사랑했듯이 하나님 역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흠이 많고 불완전하다고 해도 순전히 이 뜨거운 사랑 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자녀이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입니다.

골로새서를 통하여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거짓 가르침의 성격을 폭로하고 올바른 기독론을 전개함으로 참된 신앙안에 서도록 강권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존재이기에 거룩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처럼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안다면 이에 걸맞는 행동을 하여야 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비록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세 가운데 있는 자들이기에 마땅히 높은 차원의 것을 구해야 합니다. 땅의 것, 옛 시대의 추한 습성을 벗어 버리고 새 시대의 신령한 것들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바울은 이 모든 것 위에 마땅히 더해야 할 것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은 과연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첫째로 사랑을 더하라

미국 댈러스(Dallas)의 성형외과 의사가 들려주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제 남편이 화상을 입었습니다. 불타는 집안에 계시던 부모님을 구하려고 뛰어 들어갔는데, 결국 실패하였고 부모님은 화재로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은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어 흉하게 일그러졌고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그 후 홀로 은둔하면서 아무도 만나주지 않습니다. 아내인 저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은 겁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의사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고쳐드리지요. 최근에 눈부시게 발전된 성형기술의 도움으로 남편의 얼굴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말합니다. “문제는 남편이 누구의 도움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구하지 못한 데 대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벌하셨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충격적인 말을 덧붙였습니다. “선생님이 내 얼굴도 남편처럼 망가뜨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남편의 고통을 직접 나누면 혹시 남편이 나를 다시 그의 삶 속에 받아들여 줄지 모르니까요. 나는 정말로 그를 사랑해요. 그와 함께 있고 싶어요. 내 얼굴을 망가뜨려서라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성형외과 의사는 그녀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고 대신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남편을 찾아갔습니다. 방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자 의사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이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고쳐드릴 수 있습니다.” 대답이 없자 의사는 다시 간청했습니다. “제발 밖으로 나오십시오.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전히 대답이 없습니다. 의사는 문 앞에 다가가서 부인이 자신에게 요청했던 것을 말했습니다. “당신 부인이 자기 얼굴도 망가뜨려달라고 제게 부탁했어요. 그렇게 하면 당신이 자기를 당신의 삶속에 받아줄 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말입니다. 그녀는 그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만큼 당신을 돕기를 원하고 있어요.” 짧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문의 손잡이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화상을 입은 남자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부인의 사랑으로 그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은둔에서 벗어나 이제 새로운 시작이 주어졌습니다. 사랑이 그를 움직인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이 모든 것이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들이 가져야 하는 덕목을 의미합니다.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용서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덕목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강조합니다. 사랑은 이 덕목들이 최대한 발휘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 절망을 이기고 희망을 안겨주는 힘입니다. 모든 분쟁을 끝내고 다툼을 종결하고 허다한 허물을 덮어줍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다면 모든 옷을 입고도 띠를 띠지 않는 것과 같지만 사랑을 더하면 그 모든 옷을 입고 띠를 띠므로 힘이 솟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복음을 위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고통을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알고 충성을 다합니다. 부디 사랑을 더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된 표시는 사랑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여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처럼 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평강을 더하라

어느 대학교수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종이를 한 장 주면서 일생을 통해 꼭 가지고 싶은 것을 적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는 평소에 가지고 싶었던 것을 종이에 열심히 적었습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등을 적어 보여드렸습니다. 교수는 그가 적은 내용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적어온 것들은 훌륭한 것들일세. 그리고 일리 있는 내용일세. 그러나 자네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으면 자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가졌다 해도 오히려 그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거리가 될 지도 모른다네.” 그러자 제자는 놀라며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교수는 그가 적어온 목록을 지우고 그 밑에 평강이라고 써 주었습니다. 그때 제자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건강보다, 지식보다, 명예보다, 사랑보다, 권력보다,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평강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후 청년은 평생 동안 어떤 것보다 평강을 소중히 여기며 살았고, 나중에 ‘마음의 평화’라는 책을 썼는데 수백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조슈아 리브만(Joshua Liebman)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여기의 ‘그리스도의 평강’은 삶의 험난한 문제들과 환난이 존재하지 않게 제거함으로 주시는 평안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험난한 문제들과 환난들을 뛰어 넘어 승리함으로 얻는 평안함을 뜻합니다. 삶의 상황이나 환경이 마음을 지배하면 절대로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평강이 다스리면 어떤 상황 속에도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이 평강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한 몸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평강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화평을 만드는 피스 메이커(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문제와 분열과 불평을 만드는 트러블 메이커(Troble maker)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비록 싸움과 불신과 원망이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평화의 곳으로 바꾸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처럼 평강을 더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말씀을 더하라

런던에 유명한 주정꾼이 있었습니다. 낮에도 술을 마시고 싸우고 부인을 구타하는 등 이웃의 미움을 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술을 마시고 싸우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서로 연행될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이 때 한 소녀가 그 주정꾼 옆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저씨, 힘내세요. 제가 경찰서까지 함께 가 드릴게요.” 곁에서 명랑하게 노래 부르며 함께 걷는 소녀를 보며 주정꾼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소녀는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스의 부인이 된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 여사입니다. 그녀가 열두 살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름난 주정꾼을 소녀의 사랑이 회개시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는 말씀이 그녀에게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는 말씀이 풍성하여야 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여기의 ‘말씀이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많은 성경 지식을 소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말씀 안에 풍성히 거하는 자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은 말씀이 마음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여 생활의 지침으로 삼아야 합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살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일시적으로 말씀을 섭취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말씀 안에 자리를 잡고 살아야 합니다. 즉 말씀이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더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가 자메이카에서 머물 때 한 부호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75세 된 부자가 빌리 그래함에게 “나는 재물을 많이 가졌지만 내 영혼은 이렇습니다. 그러니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라며 절망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몇 시간 후에 빌리 그래함은 75세의 가난한 크리스천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빌리 그래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자메이카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바로 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누굴까’하며 찾는 사람은 안타까운 크리스천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에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부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평강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더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처럼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처럼

골 3:12-17 / 김광일 목사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미국으로 송환된 김학송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김 선교사는 김동철 목사, 김성덕 연변 과기대 교수와 함께 지난달 9일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북한을 찾았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귀국 비행기를 타고 극적으로 돌아왔습니다. 김학송 선교사는 북한에서 풀려나기 직전 자신의 성경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 성경을 돌려주십시오.” 그는 성경을 품고서야 자유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김 선교사는 풀려난 지 20일 만에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동양선교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무사 귀환을 기도해 준 교우들과 미국 정부에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로 살아났다. 성경에서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열심히 기도했더니 베드로의 족쇄가 풀려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러분이 눈물로 기도해주신 덕에 재판도 안 받고 이렇게 여러분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고 자신이 살아 돌아온 사실을 환기시키며 “하나님의 기적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의 기도 또한 여전히 중요하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김선교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성경을 지켰습니다. 그는 “경비가 날 어디론가 데리고 가면서 내 소지품에서 뭘 더 챙겨야 할 게 있느냐고 물어 성경이라고 대답했다”며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성경을 품고 비행기에 올라서야 석방 사실을 알게 됐다”고 기억했습니다. 비록 북한에서 억류되어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갇혀 날짜를 알 수 없었지만 억류됐던 기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 시간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면서 “북한 간부가 기독교에 대해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감사한 시간이기도 했다”고 간증했습니다. 김선교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로 남은 생애 역시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중국 동포 출신 김선교사는 동양선교 교회에서 2005년 목사안수를 받고 2014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돼 평양과기대 교직원 신분으로 농업기술 보급 활동을 했습니다. 지난해 5월 중국 단둥의 집으로 가다 북한 당국에 체포됐습니다. 북한은 김 선교사가 ‘북한 주민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으로 동양선교 교회에 이메일을 보낸 사실과 평양과기대 새벽 예배 때 한 발언을 문제 삼아 ‘반공화국 적대행위’를 했다고 판단하고 억류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자처럼 어려움 가운데도 당당하게 믿음을 지켰기에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본 장을 통하여 성도가 실천해야 할 덕목들을 제시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인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여기의 ‘택하신’의 원어는 ‘에클렉토이’인데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를 가리킵니다. 구약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원리를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하나님의 선택을 먼저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결과인 것을 나타내려 함입니다. 우리가 강하고 잘났기에 하나남이 택한 것이 아니라 약하고 못났기에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기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이란 구절은 하나님의 기대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택하여주셨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용서를 더하라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의 명화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레오나르도가 이 명화를 그리기 직전에 다른 화가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용서를 구하기보다 분노의 폭풍 속에서 헤어졌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에 앉았으나 레오나르도는 여전히 화가 나서 복수를 계획하기 시작했으며 곧바로 계책을 꾸며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팔았던 배신자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 화가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레오나르도는 신속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은 원수의 얼굴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냈고 그것을 유다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자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좌절감에 사로잡혀 붓을 던졌습니다. 그 순간 레오나르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복수심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갈등하던 레오나르도는 결국 진심으로 회개를 한 후 미워하던 친구의 얼굴을 화폭에서 지웠습니다. 그러자 영감이 떠올라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신의 마음에,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 그려 낼 수가 없습니다. 용서 없이는 자신의 인생을 명작 인생으로 완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들을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러하고” 여기의 ‘용서하되’의 원어는 ‘카리조메노이’ 인데 ’빚을 면제하다, 은혜를 수여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에게 잘못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로 인해 교회는 용서와 용납이 넘치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실수와 잘못, 심지어 피해를 준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해친 자와 그 상처를 잊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12장 20절에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면서 원수의 잘못을 용서하고 잊으며 돌아서는 정도가 아닌 도리어 불쌍한 처지까지 돌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렇게 용서하고 돌아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하셨는가 생각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둘째로 사랑을 더하라

스티브 세인트 (Steve Saint)의 ‘창 끝(End of Spear)’이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휘튼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지로 갔지만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모두 살해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들이 남편의 뒤를 따라 아우카족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들의 남편을 죽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추장을 비롯한 아우카족이 이들의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부인들이 떠날 때 아우카족 추장이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합니까?”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이 말했습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이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엘리엇과 선교사들을 창으로 찔렀던 5명의 아우카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가운데 4명은 후에 목사가 한 명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아우카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5명의 아우카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은 그들에게 살해된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의 ’사랑‘은 ‘아가펜’인데 ‘이기심이 배제된 자기 희생적 사랑’을 가리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이요 모든 덕의 기초이자 완성입니다. 따라서 모든 덕 위에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바울이 사랑을 온전하게 매는 띠로 번역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옷을 입고 띠로 묶지 않으면 옷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옷 위에 띠를 매어야만 비로소 온전한 의복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행하는 모든 선행이나 덕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인격에는 언제나 그리스도로 인해 넘쳐 나는 사랑이 기초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택하신 자의 인격을 소유하게 되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셋째로 감사를 더하라

스펄젼 (Charles Haddon Spurgeon) 목사는 40세 이후부터 관절염의 일종인 통풍 때문에 몹시 시달렸습니다. 아스피린이나 혹은 마취제가 발달해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통풍을 고스란히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 한번은 통풍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데 믿음 좋은 성도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통풍으로 아픈 순간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이에 스펄젼이 대답하기를 “예, 감사하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이 병이 나은 후에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성도는 조용하지만 무게 있는 말로 스펄젼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몸이 아플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 아픈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분명히 그 병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그 말에 스펄젼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는 자신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름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여기의 ‘감사하는’은 ‘유카리스토이’라는 원어이며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감사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할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어떤 여건 가운데서도 즉 범사에 감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보여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성령 충만의 정도를 검증하는 가장 좋은 리트머스 시험지가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자는 성숙한 자이며 감사가 없는 자는 아직 미성숙한 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믿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17절에서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되 자기의 힘으로 억지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힘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감사는 감사할 수 없는 가운데 드리는 감사 곧 절대 감사입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잃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는 전천후 감사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가게 주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가까운 교회에 새로 부임해 온 목사를 칭찬합니다. 특히 설교를 잘한다고 말합니다. 한 번은 손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했습니까?”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번도 그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손님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설교를 잘하는 줄 압니까?” 주인이 웃으며 대답합니다. “그 교회 교인들이 그 목사님이 오신 후에 외상값을 잘 갚아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처럼 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택하신 자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자신이 그렇게 사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신앙에 용서를 더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를 더하는 덕목을 실천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자처럼’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입고 품고 더하라

골 3:12-14 / 배 혁목사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택하셔서 사용하셨던 것을 봅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이었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교인들에게 “당신들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인인 골로새교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 삶의 목적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알지 못할 때에는, 내 자신이 모든 선택의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내 자신이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했고, 교회에 나온 것도 내가 원하는 교회를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표는 자신이 정하고 하나님은 이를 이뤄주셔야 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정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선택받은 성도들은 그 선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신 이유에 관심하며, 그 부르심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에 따라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일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참음의 옷을 입어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것에 이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로서 거룩과 사랑스러운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잘 입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잘 벗어야 하고, 잘 품고, 잘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을 덧입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먼저 입었던 옛 사람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일입니다. 한국에는 각 학교마다 체육복이 있어서 체육시간이 되면 활동하기 편한 체육복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것이 꺼려집니다. 제 고향은 철원이라서 날씨도 추운데 따뜻한 평상복을 벗고 얇은 운동복으로 갈아입는 것이 싫기도 하고 귀찮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어떤 친구는 원래 입고 있던 옷을 벗지 않고, 그 위에다가 체육복을 그냥 입기도 합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티가 납니다. 옷 맵시도 투박할 뿐만 아니라, 움직임도 둔해 보입니다. 선생님에게 그 모습을 걸리게 되면 매로 맞기가 일수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던 아이들은 또 그렇게 하곤 합니다.

누구든지 새로운 옷을 입기 위해서는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벗어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교인들 중에는 과거의 옷을 벗지도 않고,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으려고 하는 모습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9절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 옛사람을 벗어 버리지 못하니, 아무리 새사람의 옷을 입으려고 해도 도리어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그 벗어 버려야 할 옛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다른 사람에 대해 분노하고 악의를 가지고 비방하는 모습에 사로 잡혀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는 더 이상 옛사람의 모습을 입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분노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행할 수 있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악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비방하며 살았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같은 상황속에서도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자비를 행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때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옛사람의 모습에 여전히 사로 잡혀서,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는 것을 힘들어 하는 우리의 모습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날마다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로 덧입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2. 이제 두번째로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는, 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이라고 말하면서, 교인들 사이에 불만의 상황이 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간의 관계가 항상 만족할 만한 상태였으면 좋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 사이에도 서로에게 불만스러운 때가 옵니다. 갱년기를 경험하시는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이 짜증나고 감정조절이 안된다고 합니다. 남편의 목소리를 들어도 짜증나고 심지어 현관에 벗어 놓은 남편의 신발을 봐도 화가 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이러한 불만의 순간들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불만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2016년에 미시간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윌리엄 초픽 (William Chopik) 박사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초픽박사는 1981쌍의 중년 남녀 커플을 관찰하면서, 행복감과 건강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연구했던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행복한 파트너와 살면 건강해질 확률이 많지만, 불만이 많은 배우자와 살게 되면 그 만큼 건강에도 해로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초픽 박사는 다음과 같이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불만 속에 사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자신이 경험하는 스트레스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신경써 주고 돌봐줄 생각을 못한 답니다. 반면에 행복감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잘 돌보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배우자의 건강에도 관심을 가지고 돌보기 때문에 더욱 건강해 진다는 것입니다.

둘째, 쉽게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수면 패턴이 불규칙하고 기운이 없는데 반해, 행복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제시간에 숙면하고 운동도 많이 하기 때문에 자신과 배우자의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삶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술과 담배와 같은 것을 의존하다가 건강을 해치기 십상인데, 행복감을 가지는 사람은 그러한 것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건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살다가 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불만이 생길 때도 있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불만의 상태가 가족간에도 있을 수 있고, 직장이나 이웃들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에 사는 교인들 사이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잘 알았기에, 교인들에게 서로에게 불만이 있으면 어떻게 하라고 미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관심하는 것은 불만의 종류가 아니라, 불만에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다양한 불만의 내용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불만이 있을 때에 그 불만스러운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술이나 담배같은 것으로 그 불만을 해소하려고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불만이 생길 때에 세상 사람들과는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누군가에게 불만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곧, 피차간에 불만이 있을 때에 그 불만을 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가진 불만에 대해서 논쟁하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품을 수 있는 큰 아량과 사랑을 가지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른이 어린아이의 실수와 허물을 품듯이, 어른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품고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른 이들을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하면서, 그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납하고 품는 것의 모범은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품고 용서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용서에 관해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가 일곱번 용서해 주어야 하냐고 묻는 것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용서의 횟수보다 많은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랍비들은 이웃이 자신에게 범죄한 것이 있으면 3회까지만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일곱번을 말한것은, 나름대로 용서함에 대해서 자신의 관대함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술 더 뜨십니다. 일곱번뿐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십니다. 숫자적으로 따지만 490번을 용서하라는 것인데, 이는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정답은 “용서”입니다. 불만의 관계속에 있는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이미 작정된 일이지, 용서할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용서해 주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는 다르게, 이 땅에서는 서로 품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에게는 다른 이들의 죄와 허물을 품고 용서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게 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작은 허물에도 지속적으로 정죄하면서 사람들게 상처를 주고 절망케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상대방의 허물을 품고 용서하며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번에 전교인 수련회에서 간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성도분이 간증을 하시는데 어머니에게 받았던 아픔과 상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다른 사람에 비해 없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자신에 대해서 무관심했고,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애를 썼다고 합니다. 엄마에게 칭찬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와도, 다른 사람들은 칭찬해 주는데, 엄마는 무심하게 상장을 툭던져 버리기 일 수 였다고 합니다. 사탕과 같은 간식이 생기면 보통 엄마들은 자신은 못먹어도 아이들을 먼저 주는 것이 엄마인데, 그분의 엄마는 자신은 먹어도 자식은 안주어다고 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기 어머니가 계모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렇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쓴뿌리가 있어서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그분의 내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즈막히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한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용서한다고 선포하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해서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한다고 일단 말로 선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용서를 선포한 후에, 그 마음속에 있던 엄마에 대한 아픈 마음이 풀리기 시작하게 되었고, 어머니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더랍니다. “엄마도 그 때는 미숙해서 나에게 그렇게 하셨겠구나...” 그렇게 엄마를 용서하니까 엄마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게도 되고 대화도 할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엄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잘 돌보아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행해야 할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다른 사람의 허물과 부족함을 품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품고나갈 때에,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불만이 생겼을 때에 할 수 있는 일은 품고 용서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갚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서로에게 불만이 생겼을 때에 내가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서 판단하고 행하다가 더욱 관계가 어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판단도 하나님의 몫이고 그것을 처리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몫인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을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품으며 용서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귀한 은혜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이 모든 일에 사랑을 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될 때에 지켜야 될 수 많은 신앙의 덕목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참음과 용납과 용서 등의 덕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의무적으로 억지로 한다고 하면, 그것은 율법이 되게 됩니다. 마음에도 없는 위선적인 행위가 되고, 그 안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면 달라집니다. 모든 일들을 할 때에 사랑을 더한다는 것은, 이 모든 일을 행할 때의 동기가 사랑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기쁘고 감사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죄인된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하신 일입니다. 때로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것들도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도 의무나 강제가 아니라,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그 일들을 감당해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모든 일을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을 동기로 해서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임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게 위해서는 잘 벗고 입고, 잘 품고,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죄된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옛것을 버리지 못하면 새것을 덧입을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욕망을 벗어 버리지 못하면, 신령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을 입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품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불만이 있을 때에 그것으로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에 불만을 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품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일을 행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니면 하나님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예수님과 같이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잘 입고, 잘 품고, 사랑을 더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는 예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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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용서하신 것 같이

골로새서 3장 12-15절 / 문기태 목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가장 유명한 명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직전 다른 화가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 교만하여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본노의 폭풍 속에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에 앉았으나 레오나르도는 여전히 너무나 화가 나서 복수를 계획하기 시작했으며 곧바로 완전한 계책을 꾸며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팔았던 악명높은 배신자인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 화가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레오나르도는 미친 사람처럼 신속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은 자기 원수의 얼굴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생각해냈고 그는 그것을 유다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자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영감이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좌절감에 사로잡혀 붓을 던졌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다른 화가의 얼굴을 유다의 얼굴로 그린 자신의 복수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갈등을 하던 레오나르도는 결국 진심으로 회개를 한 후 미워하던 친구의 얼굴을 화폭에서 지우고 나자 다시 영감이 떠올라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용서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신의 마음에,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릴 수 없습니다. 용서없이는 자신의 인생을 명작 인생으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함으로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음으로 직장에서 불화를 종식시키지 못하고 계속 잡음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음으로 교회생활에서 은혜의 통로가 막히고 기도의 문, 전도의 문이 막힌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지음받은 자로 항상 발견되기 위해서는 우리안에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고 삶 속에서 주님처럼 남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삶속에서 실제 용서가 풍성한 사람으로 발견될 수 있습니까?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미움과 악한 감정을 몰아내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채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달을 때 용서의 능력이 임합니다.(12)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12절에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기본적인 성품이 거룩인 것처럼 우리도 이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살 때 자연스럽게 용서하는 삶이 나타납니다.

아마도 골로새성도들은 자신들이 죄를 용서하지 않고 차갑게 율법주의적인 태도로 심판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선생님은 진정한 거룩은 이와는 달리 용서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용서에 인색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지 않은 사람입니다.

1) 하나님의 거룩은 긍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보면서 '목자없는 양과 같다'고 하시며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문둥병자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만져주시며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다면 그들의 잘못한 것에 주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가 겪고 있는 고통에 마음을 쓰며 안타까와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용서를 하려면 먼저 인자하게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엄하게 심판하시기에 앞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보시며 용서하심처럼 우리도 서로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가족을 향해 불쌍하게 여기며 손을 꼭 잡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체간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간 적이 언제입니까? 허물이 크게 보일 때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거룩함은 겸손함으로 표현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겸손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 빌 2:5절 이하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오시고 마굿간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시고 멸시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겸손하셨습니다. 하늘보좌를 자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향해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나의 입장에서 그를 판단하려는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의 형편과 그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겸손은 나의 위치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거룩함은 온유함으로 표현됩니다. '온유'라는 헬라어의 뜻은 다른 사람의 모독을 은혜롭게 견디는 능력이라는 의미입니다. 친절이 다른 사람들이 모독해도 그를 선대하는 능력이라면 온유는 다른 사람들의 모독을 너무나도 은혜롭게 인내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분노조차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의 누이와 형인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여 큰 손상을 입혔습니다. 모세가 흑인인 구스 여자와 결혼하였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모세의 권위를 손상시킨 벌로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걸리게 하였습니다. 그녀에게 몹시 시달린 모세가 '그것봐라 고소하다. 지도자에게 도전하다가 얻어맞을줄 알았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온유함은 우리로 무릎을 꿇고 우리를 모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크고 많은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거룩한 사람이 되면 우리도 용서에 능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이들과 원만하게 잘 지낼 수 있습니다. 미숙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모두 더욱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을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우리가 용서의 원리를 깨달을 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먼저 우리에게 행한 다른 사람의 과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과실에 비하면 매우 작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불평이나 불만은 골로새교회의 교인들을 분열시키는 요소였습니다. 중요하지 않고, 어리석고, 사소한 문제들이 골로새교인들에게 불평의 빌미를 가져다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계속 불평을 하게되고 불평이 그들을 분열시키자 그들의 행동은 유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망과 다툼과 대적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그것은 교회의 연합을 깨트렸습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식어지고 영적 전쟁을 위해 힘을 기르는 일도 소홀해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행한 제일 큰 죄악이나 잘못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지은 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은혜를 거부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죄값이 얼마나 엄청난지 실감하려면 죄없으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당하신 죄의 형벌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상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모와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수없이 맞아 살이 터지고, 십자가에 못박힌채 달려 신음하며 지옥을 경험하며 고통스럽게 죽어가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고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죄는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그에 비교한다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죄악이나 잘못은 아주 사소한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우리 힘으로 갚을 길이 없고 모든 것을 그 빚 때문에 잃어버릴 운명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임금님의 은혜로 엄청난 빚을 모두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금새 잊고는 그가 친구에게 빌려 준 사소한 액수인 백 데나리온을 빨리 갚으라고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받은 용서를 잊고 은혜를 베풀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탕감받은 빚을 잊고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큰 용서를 받았는데 작은 용서에 인색합니다. 크고 많은 죄가 모두 덮어졌는데 작은 죄를 들추어 남을 정죄하기를 잘 합니다.

성경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한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명령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을 마음에 새기고 똑같이 용서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의 은혜를 바라보며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던 용서와 동일한 태도로 용서해야 합니다. 골2:13-14에 보면 의문에 쓴 증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부채증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범한 죄의 목록입니다. 그런데 도말하시고 하였습니다. 지원버렸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누군가 빚을 갚으면 부채의 기록을 지울 때 헬라어 알파벳중 대문자 카이(X)로 표시하였습니다. 그러면 부채기록을 지운 후에도 빚을 졌던 흔적이 여전히 문자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아 아무개가 과거에 이렇게 큰 빚을 진 적이 있었구나!"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X 표시를 하신 것이 아니라 흔적이 남지 않도록 완전히 잉크까지 지우셨습니다. 우리는 용서할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행한 악의 기억을 지워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명단을 남기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의 이름이나 죄의 종류, 죄의 경중, 죄의 횟수 모두를 지워버립니다. 과실을 들춰내지 않으며 다시 거론하지도 않습니다.

1986년 11월 25일 47세의 남침례교 선교사인 리비 센터와 그녀의 10살된 딸 레이첼은 라이베리아의 예케파에 있는 집에서 저녁놀을 바라기도 하며 애완동물 가정용 도마뱀에게 줄 먹이로 곤충을 잡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벤자민 모리스가 선교사 조지 센터의 집에 들어섰을 때 센터부인이나 그녀의 딸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여러차례 센터 선교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벤자민은 그날 아침도 생계를 위해 별 필요없는 잡다한 일들을 센터의 집에서 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벤자민이 센터선교사의 집문을 두드렸을 때 남편 조지는 나가고 없었지만 센터부인은 그를 집안으로 들였습니다. 그런데 신뢰하였던 벤자민은 그 밤에 돌변하여 레이첼을 구타하고 강간했으며 칼을 빼어 레이첼과 그녀의 어머니를 살해했습니다.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조지는 방송을 통해 소름끼치는 소식을 듣고서는 차를 몰아 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리스는 자살하기 위해 막힌 싱크대를 뚫을 때 쓰는 화학약품을 한 병이나 마시고 실신해 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500명이 넘는 군중이 모리스를 죽이겟다고 교도소 담장에 장사진을 쳤습니다. 조지 선교사는 경찰서로 걸어가면서 벤자민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리스의 맞은 편에 앉은 조지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레이첼이 잠자리에 들면서 해줬던 포옹과 따스한 웃음이 폭풍처럼 조지의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또한 아내가 부드럽게 만져주고 달콤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추억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잔혹한 살인장면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살인자의 입과 턱에 화학약품의 독성때문에 입은 화상자국을 보았을 때 조지는 그 독성이 더욱 강하여 벤자민이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그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조지 센터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지는 벤자민의 눈을 쳐다보면서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려 놓고 말했습니다. "벤자민, 자네가 하나님께서 자네를 용서하시도록 허락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자네를 용서하길 원하신다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나도 자네를 용서하네."

조지 센터가 살인자를 용서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온 국민은 살인사건 그 자체보다 그의 용서에 더욱 놀랐습니다. 온 나라 전체에 수년동안 쌓였던 원한들이 용서되고 잊혀졌습니다. 깨어진 교회들이 다시 새로운 일치와 조화로 채워졌습니다. 님바 카운티에 있는 한 교회는 서로 분리되었는데 다시 합쳐졌습니다. 한 아프리카 여인은 그녀의 원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햇습니다. "조지는 자기 가족 전부를 죽인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분명히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동안 서로 철천지 원수였던 사람들이 서로 끌어 안았습니다. 자기 형제요, 믿음직한 친구로 생각했던 사람의 극단적인 배신을 용서한 한 그리스도인의 심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려고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자 라이베리아 전역에 걸쳐 선포되었던 복음에서 새로운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라이베리아 국민들은 주님을 생생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진심으로 용서하려고 몸부림칠 때 그의 얼굴을 통해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처럼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 땅에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입

골로새서 3:12-17 / 이수영 목사

빌립보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신자들에게도 같은 뜻에서 "위의 것을 찾으라."(골3:1) 하며 그러기 위하여 벗어버려야 할 것들을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며 비유적으로 옷을 입고 벗는 일로 그리스도인 됨을 여러 번 설명했습니다. 2:11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했고, 3:8-10에서는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옷 입으라는 말을 합니다.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고 성별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성별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입어야 할 옷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곧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는 것입니다. "긍휼"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며 그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입니다. "자비"는 친절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선을 행하되 선행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라도 선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춤과 섬김의 자세를 말합니다. "온유"와 "오래 참음"은 설명을 보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하는 옷은 더 있습니다. 본문 13-14절을 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서 말하는 옷은 불만을 품게 하는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서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는 근거는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생각하며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내 대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며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용서 못할 일, 용서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입을 새 옷들인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는 모두 사랑과 깊이 연관된 덕목들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합쳐 한 마디로 말하라면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하는 말은 사랑이 그 덕목들과 나란히 오는 또 하나의 덕목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모든 것은 진정 사랑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들이고 사랑의 동기에서 이루어질 때 진정 가치 있는 덕목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일 것입니다.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한 말의 뜻이 그것입니다. 띠도 의복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입니다. 속옷, 겉옷, 상의, 하의 등 여러 가지 옷을 입고 마지막에 띠를 매야 의상이 완전히 갖춰지는 것입니다. 띠를 매지 않으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들이 제 자리에 있게 되질 않습니다. 띠를 매지 않으면 셔츠가 바지 밖으로 튀어나오게도 되고 블라우스가 스커트 밖으로 삐져나오기도 하는 등 옷매무새가 금방 흐트러집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가 순수하고 참된 것으로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런 덕목들이 오히려 위선처럼 흉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계속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여기서 "주장한다"는 말은 운동경기에서 심판의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심판은 모든 선수에게 꼭 같이 적용되는 경기규칙을 가지고 경기가 바르게 치러지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는 것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이런 저런 사고와 이해의 차이로 말미암아 오해와 긴장과 갈등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누구나 다 마음에 간직하고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멀리 떨어진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가 영원한 평강의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인들끼리 다투고 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진정 감격과 감사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평강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완전한 복장을 갖추고 서로 평강 가운데 하나가 되기 위하여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또 말합니다. 본문 16-17절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되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즉 그가 누구이시며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관한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풍성해야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더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풍성한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잘 가르치고 바르게 권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지혜로 가르침과 권면을 서로 나눌 때 공동체에 평강이 깃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친다"은 진리를 질서 있게 나열하며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권면"은 가르침과 달리 추상적이거나 신학적이지 않고 일반적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입니다. 권면은 가르침을 그것을 듣는 사람의 삶 속에서 강화하며 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가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1:28에서 "우리가 그(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쓴 바 있습니다.

아름다운 새 의복을 입은 사람들이 은혜롭고 지혜로운 말로 서로 가르치며 권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라는 세 가지 말은 의미가 서로 겹치기도 하고 그래서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굳이 구별하자면 "시"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고, "찬송"은 축제일에 부르던 노래였지만 오늘날의 일반적 찬송과 같이 된 것이며, 신령한 노래는 말하자면 오늘날의 복음성가 같은 기타의 곡에 해당될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세 가지 종류의 찬송은 고대 교회의 예배음악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찬송이든 메시지가 전달되는 수단이라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 어떤 형식의 찬양이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가르침들과 권면들을 잘 암기하도록 돕는 방법의 하나가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은 교회의 예배와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신앙을 노래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도 대부분 노래로 표현되었습니다.

가르침과 권면에 있어서 중요한 또 다른 점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에 감사하는 마음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해와 함께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서 일어난 모든 변화와 그들이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왔음을 깨달음 속에서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의 자리는 마음입니다. 입으로만 부르는 찬양, 진정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함께하지 않는 찬양은 그냥 노래이지 찬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찬양만큼 가르치고 권면하는 효과가 큰 것도 없을 것입니다.

본문 17절은 오늘 본문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음과 삶은 말과 일 모두에 관계된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아 복 있는 사람 된 이들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삶을 살며 그처럼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의 권능을 의지하며 그의 뜻에 합치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말도 그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옷을 입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의 뜻은 또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지체들이고 그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말입니다. 아름다운 입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옷 입는 것을 비유로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덕목을 말했습니다. 그 위에 마지막으로 맬 띠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해도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이 험하고 거짓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말이 상스럽고 악의에 차 있으면 옷이 아깝다는 말밖에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입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늘 참되고 선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말도 사랑에 넘쳐야 합니다.

지난 주일 오후찬양예배 때 설교하신 목사님이 설교 중간에 흥미로운 동영상을 보여주셨습니다. MBC방송에서 방송된 내용의 일부였는데 꼭 같이 투명한 유리그릇에 꼭 같이 지은 밥을 담고 뚜껑을 닫은 후 여러 사람들에게 두 병씩 나누어주면서 부탁을 했습니다. 한 유리그릇에 대고는 수시로 좋은 말을 해주고 다른 유리그릇에 대고는 수시로 나쁜 말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그렇게 하고 나서 두 유리그릇을 다 수거했는데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좋은 말만 해준 유리그릇의 밥에는 곰팡이가 피긴 폈어도 엷은 색깔의 곰팡이가 보기 좋게 피었고 나쁜 말만 해준 유리그릇의 바에는 시커먼 곰팡이가 보기 흉하게 핀 것입니다. 믿을 수 없지만 실제의 실험결과였습니다. 생명체가 아닌 쌀밥도 나쁜 말에는 보기 흉하게 반응한다면 하물며 사람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요즈음 사람들의 쓰는 말이 날로 험악해지고 사나워집니다. 익명성을 악용하는 네티즌들은 너무나 쉽게 타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언어를 마구 쏟아냅니다. 그것은 결국 이 사회를 흉하고 험악하게 만들어 그 피해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당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국회의원이라 하는 자들조차 대통령을 향하여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한심한 우리의 세태입니다. 나라와 민족성을 망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순화도 우리가 힘써야 할 급선무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에 앞장서고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거창한 개혁의 구호를 외치는 것 말고 언어를 순화하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이 늘 힘써야 하는 개혁의 하나일 것입니다.

풍성한 생활

골 3:12-17 / 조재호 목사

요즘 교우들을 만나면 “요즘 어떻습니까?” “어렵지는 않은지요?” 하고 물어보게 됩니다. 그만큼 경기가 좋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기가 침체되고 살기가 힘들어 지면 줄어드는 것이 있고 잘 팔리는 것이 있는데 물 소비량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물소비량이 줄어든다는 것은 물 쓸 일이 적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은 IMF 위기 때보다 물 소비가 22%나 줄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불황기에 늘어나는 것이 있는데 늘어나는 것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소주, 라면, 만두 소비량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외식대신 만두나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기 때문입니다.

어려울수록 믿음의 힘은 위대합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을수록 믿음은 큰 힘을 발휘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며 나가는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잘 이길 수 있는 인내와 지혜를 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백성들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축복을 예비하십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

1.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심리가 있습니다. 풍성의 심리와 빈곤(부족)의 심리입니다.

풍요의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우리가 나누어 갖기에 풍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와 네가 함께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많이 가져도 내가 가질 것이 얼마든지 있고 네가 성공해도 내가 성공할 몫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들어도 내가 인정받을 부분과 칭찬 받을 부분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빈곤(부족)의 심리는 반대입니다. 무엇이든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더 갖기 위해서 상대방이 덜 가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뷔페식당이 처음 생겼을 때 다른 사람이 큰 접시를 갖고 와서 담아가는 것을 보면 뷔페 음식이 금방 바닥이 나서 내가 먹을 것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음식을 접시에 산 같이 쌓아옵니다. 다 못 먹고 남길지언정 우선 많이 확보하자는 것입니다.

빈곤의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이 나 보다 더 가질까, 칭찬들을까 늘 불안해 합니다. 빈곤의 심리를 가진 사람은 옆 사람의 성공을 진정으로 기뻐해주고 축하해 줄 마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빈곤의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체험하지 못하고 가난하게 삽니다. 그러나 풍요의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도 인정하고 상대방도 인정합니다. 풍요의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마음의 여유와 삶의 진정한 풍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풍요의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요하신 하나님에게서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삽니다. 풍요의 심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배려 할 줄 알고 성품이 좋습니다.

2. 하나님은 부족하거나 가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모든 일에 부요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를 베푸심에 풍요로우십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부요하신 하나님, 풍요로우신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피곤하고 곤고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며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면” (16)

[풍성히]라는 것은 넉넉하다 부유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넉넉하시고 부요하시고 풍성하십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면 우리의 믿음과 삶이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풍요로운 삶의 시작은 말씀이 내 속에 풍성하게 거하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것은 거주하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주하고 산다는 것은 하루 자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살림을 가지고 들어와서 터를 잡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와 사랑과 능력의 말씀의 씨앗이 여러분의 마음 밭에 뿌려지고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알의 씨앗이 아니라 수천 수만의 풍성한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3. 그리하면 오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세 가지의 풍성한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 나에게서 옆으로 나타나는 풍성한 삶, 둘째는 아래서 위로 나타나는 풍성한 삶, 셋째는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풍성한 삶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가득할 때 나타나는 풍성한 삶은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는 믿음과 사랑의 교제입니다(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면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교회 안에서 믿는 사람들이 서로 이끌어주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풍요의 심리, 부요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일본에서 실험한 내용입니다. 밥을 해서 2개의 병에 각각 담은 후에 한 병을 향하여 오고 가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한 병을 향하여는 ‘못된 놈 망할 놈’하면서 차별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이 한 달 동안 매일 병 앞을 지날 때마다 그렇게 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고맙습니다’는 소리를 들은 밥은 발효가 되어서 누룩처럼 향기가 났고 ‘망할 놈’ 소리를 들은 밥은 새까맣게 부패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수백 가정이 실험을 했는데 똑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특이한 실험을 한 가정이 있었는데 그 집은 병 한 개를 더 만들어 아무 말도 안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내버려두고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밥은 ‘망할 놈’ 소리를 들은 밥보다 더 빨리 썩어 버렸습니다.

믿음의 말은 사람을 살립니다.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세상에서는 상처를 받더라도 교회 안에서는 치유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는 경쟁하는 곳이 아니고 서로 붙잡아 주고 서로 격려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기 위해 다투는 곳이 아니고 서로 이해하고 권면하는 곳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가득할 때 나타나는 풍성한 삶은 위로 향하는 감사와 찬양입니다.(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6)

의학전문지에 기고된 전문의사의 글이 있습니다. 같은 조건에서 같은 치료를 했는데 치료가 빠른 사람과 치료가 늦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치료가 현저하게 빠른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의사를 신뢰하는 사람, 병원의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 신앙을 가진 사람,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치료가 잘 안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사람, 의사를 무시하고 지시를 잘 안 따르는 사람, 신앙이 없는 사람, 원망과 불평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가득할 때 나타나는 풍성한 삶은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믿음의 행함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 이름으로 하고” (17)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3-4)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사람은 예수의 사람이고 예수의 사람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향기가 피어납니다. 하나님은 부자입니다. 부요하시고 풍요롭습니다. 주의 말씀과 은혜가 풍요로운 사람은 생각과 말이 풍요롭고 삶이 풍요롭습니다. 없어도 넉넉하고 부족해도 부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3:12-17 / 정필도 목사

과거에는 중학교때부터 입학시험을 쳐서 학생들을 선발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하면 반드시 학교에서 지정한 교복을 입고 또 교모를 써야 했습니다. 교복과 교모가 학교마다 다 달랐기 때문에 학생의 교복과 교모를 보면 어느 학교 학생인지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위 일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교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저는 입학식 때 교장선생님께서 특별히 학생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교복과 교모는 곧 경기중학교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걸음을 걸을 때나 말을 할 때나 언제 어디서나 학교의 명예를 생각하고 조심하여 행동하라”는 당부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대로 학창시절 내내 나의 행동 하나 하나에 우리 학교의 명예가 달려있다고 생각하여 걸음걸이도 점잖게 걷고 말 한마디라도 반듯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새사람을 입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순간은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순간이며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성도는 믿음이 자라는 만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3:12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자이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이므로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입어야 하는 새옷은?

1? 긍휼의 옷입니다.

2? 자비의 옷입니다.

3? 겸손의 옷입니다.

4? 온유의 옷입니다.

5? 오래 참음의 옷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은 우리 주님의 성품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새옷을 입어야 하며 예수 믿기 전과 그 후의 삶도 달라져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13절에서,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가 많습니다. 남에게 못할 짓을 할 때도 많습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허물과 죄투성이의 인간들을 용서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그 때가 가장 하나님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손해가 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19:11을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할 때가 가장 영광스러울 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에게 복이 되고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 구별하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10을 보면 사람을 볼 때 그가 의를 행하는지, 의를 행치 아니하는지 또는 형제를 사랑하는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지 그것을 보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일서 3:14-15에서『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구원받은 자라면 반드시 그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습니다.

3.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5-17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너무나 만족하여 기쁨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기쁨이 넘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2? 눈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드리는 감사입니다. 고민과 근심과 괴로움 속에서도, 몸이 아프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 동안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눈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는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보다 더 위대한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한 병원에서 설암환자를 수술하기 위해 암세포가 퍼진 혀의 일부분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이 환자는 수술을 하게 되면 이후로부터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의사는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때 이 환자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감사는 남과 비교하여 자신의 처지가 더 낫다고 생각할 때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나보다 훨씬 잘된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감사는커녕 도리어 원망불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전보다 지금의 형편이 매우 좋아졌을 때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까지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누구나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의 형편이 좋아진 사람은 감사하게 되지만 이와 반대로 지금의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면 감사가 잘 나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과 비교하여 하게 되는 감사는 일시적인 감사가 되기 쉽습니다.

또 원하는 것이 충족되었을 때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먹고 싶을 때 먹었기 때문에, 사고 싶은 것을 샀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에 갔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적인 감사는 그때뿐입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감사하는 마음도 없어집니다.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감사는 영원한 감사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감사의 이유가 많겠지만 그 중에서도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로마서 8:28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은 억울하지만 지금은 고생이 되고, 지금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로 인해 나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1? 깨달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감사할 일이 많다고 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복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면 감사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는 줄 믿습니다. 건강을 주신 것도 감사하고, 오늘 먹을 양식이 있다는 것도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넘치는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베푸시는 사랑을 깨달을 때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나게 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임을 깨달을 때 감사하게 됩니다.

몸에 잘 맞던 옷이 이제는 작아져서 몸에 꽉 끼인다고 하면 이것은 그 동안 잘먹어서 살이 찐 것이므로 풍요한 생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닦아야 할 유리창이 있고 쓸어야 할 마당이 있으며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이것은 집이 있다는 증거이므로 감사하고,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국민들이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이 많다면 이것은 우리가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 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직장이 있고 사업이 있어서 그만큼 수입이 있었다는 표시이므로 감사하고, 가까운 곳에 주차하려 했으나 주차장이 만원이라 먼 곳에 주차하게 되었다면 그만큼 걷게 되어 건강에 좋으니 감사하고, 냉난방비가 많이 나왔다면 이는 지난달을 편안하게 살았다는 증거이므로 감사하고...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을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2?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크리소스톰은 항상 복음을 전하면서 감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로마황제가 기독교를 핍박하던 때에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이곳에 파송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얼마 후 사형언도를 받게 되었을 때에 “순교는 성도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하는데, 나 같은 죄인을 순교자의 반열에 동참케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갑자기 사형을 중단하라는 명령으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때도 크리소스톰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이 종에게 할 일이 남아있었군요.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감사부터 했습니다. 이 역시 위대한 믿음의 사람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감격스러운 모습입니다.

또 감동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메리 리드 선교사는 인도에 건너가 그리스도의 선한 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그 당시 인도에는 나병환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며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고심했지만 좀처럼 그들을 도울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메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렸습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하던 사역을 접어두고 인도를 떠나 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정밀검사 결과 그녀의 병명은 놀랍게도 나병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메리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게 나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인도로 돌아가 나병환자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즉시 인도로 들어가 나환자들곁에서 그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성경 주석으로 유명한 영국의 주석가 메튜 헨리 목사가 하루는 골목길을 가다가 강도에게 맞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를 보고 온 가족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헨리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로 들어가 엎드려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목숨만은 건지고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를 때린 강도와 같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강도가 안되고 목사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또 제가 모든 것을 다 잃었어도 천국을 소유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라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말과 감사의 행위가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늘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오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복을 주십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평강이여

골 3:12-17 / 김삼한 목사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누가 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아무리 안 되던 일도 사람을 잘 만나면 그 일이 살아나고 피어나며 열매를 맺습니다. 저희 집 주변에 어떤 가게는 사람이 열 번 바뀌어도 안 되었습니다. 그 가게에 오는 사람은 일 년 이내에 또 보따리를 싸서 몇 억 손해보고 나갑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또 한 번 바뀌었는데 새 주인이 오면서 이 가게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주인에 의해서 그 가게만 사는 게 아닙니다. 그 빌딩이, 주변이 사는 것입니다. 그 쪽에 오는 손님들이 많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주변을 맴돌면서 그 주변 전체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십년 이십년 안 되던 가정도 사람 하나 잘 들어오니 그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날마다 시험을 허가내서 하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안 되던 교회들, 창피만 당하던 교회가 주의 종 한 사람이 바뀌면서 교회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국가도 그렇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땅도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해도 안 되고 저 사람이 해도 안 되던 땅을 한 사람이 들어가서 이 땅을 살립니다. 문전옥답을, 황금이 쏟아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들이 4 백 년 동안 사사시대를 거쳐서 얼마나 어려움을 당합니까? 열 두 지파가 나누어져서 아주 어렵게 살아가던 그 시대에 다윗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나라는 한 나라로 뭉쳐지고 힘 있으며 강대한 국가가 됩니다.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미국이라고 지도자가 늘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1대 워싱턴, 3대 제퍼슨 그 다음 16대까지 별반 특별한 사람이 안 나오다가 링컨이 나옵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링컨 때문입니다. 그 기초위에 세워졌기에 이렇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발전하여 세계 최고의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 뿌리에 그 기초에 누가 있느냐 링컨이 있습니다. 링컨 없이 흑인들을 아직까지 그대로 두고 있었더라면, 링컨이 아니면 이 일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미국이 그것 때문에 큰 짐이 되고 오히려 미국은 역사에 부끄러움을 당할 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이 놀라운 그 손길이 나라를 살리고 인류에게 소망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이 이렇게 놀라운 일을, 사람이 모든 일을 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사람은 아닙니다.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잘났느냐 못났느냐 어떤 환경에 있느냐 어떤 가문이냐 어떤 좋은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류와 세계역사에 오늘 날까지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은 다 인간적으로 보면 불가능한 사람들,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도 살고 가정도 살며 나라와 민족과 인류와 세계를 살릴 수 있는 큰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도 보면 다윗이 능력이 있었습니까? 목동입니다. 온 몸에 양 똥냄새가 가득차 있는 전혀 교육과 대접을 못 받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할 뿐 만 아니라 어떤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좀 세상을 모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세상을 다 아는 사람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링컨도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합리적으로 객관적으로 볼 때 링컨이 그런 조건을 갖추었습니까? 일찍이 어머니가 여덟살에 돌아가시고 남의 어머니 밑에서 지내면서 배운것도 없고 교양도 없습니다. 링컨의 통나무집 다 알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앞서고 모든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우리 인간은 놀라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만군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나라를 살리고 인류를 살릴 줄로 믿습니다.

모세의 손, 그 손 들면 나라가 이깁니다. 내리면 나라가 집니다. 반석의 샘과 홍해를 가릅니다. 그러나 그 손이 모세의 손이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잡고 계시는 그 배후에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모든 지체를 하나님이 사용할 때 창세기 1장에 있는 대로 만물을 다스리고 보존하며, 땅에 충만하고 온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 번영하고 발전하며 충만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참 귀한 것입니다. 아무리 귀할지라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같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 하나님이 함께하는 가정이어야 됩니다. 그가 나의 친구가 되고 그가 나의 인도자가 되며, 그와 함께 걸어가는 발걸음 그 발걸음이 귀하게 되고 그와 함께 걸어가는 모든 삶, 행하는 모든 일, 그가 주장하는 모든 삶은 어느것 하나 남김없이 다 귀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성가대에서도 찬양을 했습니다. 위험한 세상 지날 때 언제나 어디서나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위험한 세상 지날 때 주께서 날 인도 하시니 변치 않고 두렴 없네♬ 위험한 세상 지날 때, 이 어려운 세상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 이것이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를 주장하게 하라” 주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부락푸토’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중요해서 찾아보니까 ‘심판자’ 라는 뜻입니다. 너의 마음을 주님이 주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심판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농구나 배구할 때 심판이 있지 않습니까? 심판이 결정하면 따릅니다. ‘예수님이 옳다. 이렇다.’ 그러면 너는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길로 가라고 하면 그 심판자의 명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 이 사람과 결혼하라.’하면 주님의 결정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것 버리라.’하면 심판자의 명령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너의 몸을 네 마음대로 하지 말고 주님이 주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면 여러분의 마음은 평강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길을 인도하면 여러분의 길은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이끌어 가시면, 주님이 여러분을 주장하시면 여러분은 기쁨의 삶, 소망의 삶,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감사가 넘치는 삶, 사랑이 넘치는 삶 이런 생애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곧장 내가 능력이 많은 줄 알고 내 능력으로, 내 힘으로, 내 지식으로 살며 내가 이렇게 똑똑하고 가진 것이 많으며 능력이 있는데 내가 왜 주의 도움을 받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능력이 많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가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없이 태어나서 우리 인간은 마귀의 종이고 마귀의 소속이 되어서 죄의 지팡이를 짚으며 이 땅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인간 속에는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옷을 입었으니까 대단한 것 같지만 미움과 증오와 음란과 불의와 방탕과 악함과 핵폐기물과 같은 온갖 것들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의 삶과 인생은 내 마음에 천사가 있고 내 삶을 천사같이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에 의해서 우리는 엄청난 불행한 일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을 보십시오. 능력이 많은 것 같지만 이렇게 답답하게 살고 우울하게 살며 정신병자가 이 작은 나라에 3백만이 될 정도로 정신적으로 불안한 가운데 있습니다. 초&#8228;중&#8228;고등학교 대학생 3분의 1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교육을 받고 이렇게 좋은 혜택을 받고 있지만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주의 지배를 받을 때에 우리 마음에 주님의 평강이 우리를 주장하시고 주의 거룩하심과 주의 생명과 주의 은혜가 내 안에 거하여 이 모든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고 주의 빛으로 우리를 환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요사이 인터넷이 발달해서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정보가 조금씩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하루에 만드는 정보만 하더라도 큰 책을 2천 5백 권을 만들 정도로 정보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정보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람들은 그 좋은 정보를 접하는 게 아니랍니다.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이 지식을 얻고 꼭 필요한 정보를 찾는 사람은 6.4퍼센트 밖에 안 되고 95퍼센트 정도의 사람들은 거의 다 쏟아지는 음란물들, 폭력적인 것들, 여기는 또 도박도 게임도 많답니다. 창을 여는 곳마다 그냥 게임이랍니다. 그런 쪽으로 갑니다. 우리 인간이 위의 정보를 무시하고 또한 진짜 좋은 정보는 인터넷에는 안 나온답니다. 예를 들어 삼성이 평범한 정보야 내보내 주지만 실질적인 소중한 것은 안 내보냅니다.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은 세상 정보를 얻으려고 오는 게 아닙니다. 그 정보는 아무리 보아도 구원의 정보는 나오지 않습니다. 생명의 진리의 정보는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은 천국을 향하여 신령한 창을 열고 위의 말씀을 듣고 구원의 말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정보를 어디 땅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새로워지고 강건해지는 이런 축복의 삶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잘 길러서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가지고 좋은 집에 살면 그리스도가 없는 삶에 굉장한 기대를 하고 엄청난 일을 할 것 같지만 별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이 갈 곳이 어디 있습니까? 돈을 많이 벌면 아마 강남에 고급 룸싸롱으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해외에 골프 치러 갈 겁니다. 뭐 그런 정도지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갈 곳이 별로 없습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 아닙니다. 그리고 답답해서 저녁에 술 많이 먹고 잠들 것입니다. 전화하면 ‘아~ 나는 지금 피곤합니다.’ 그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이 다 괴롭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월트는 말하기를 ‘인간은 살고 고통하는 그대로 죽는다.’라고 말합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암 브레이크도 말하기를 ‘얼굴마다 슬픔의 그림자와 피곤의 빛이 끼어 있는 것이 인간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피곤하기 그지없고 이 세상을 근심 걱정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무거운 짐은 예수님만이 져 줄 수 있고 예수님만이 해결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국가, 그리스도가 없는 문화는 별로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교회는 총회를 몇 번 여기서 했습니다. 총회를 하면 전국에 있는 총대만 1천 5백 명이 지방에서 올라오십니다. 외국의 많은 지도자들이 와서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회의를 하는데 적어도 6개월 전에는 이 주변의 호텔과 여관을 다 잡습니다. 전부 와서 먼저 예약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곳 길동지역이나 천호동에 여관이 많은 대도 못 잡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 주일을 예약을 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그리고 또 돈을 엄청나게 몇 배를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돈을 많이 달라고 하냐 하니까 ‘아저씨! 그것도 모르세요? 우리는 하룻밤에도 두 탕 세 탕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나라가 이만큼 풍요롭게 엄청난 축복을 받아 늘어나는 것은 술집이고 늘어나는 것은 러브호텔이고 이 많고 많은 러브호텔이 하루에도 몇 탕씩 할 정도로 이 사회는 썩어 병들어있습니다. 사람이 돈 벌어가지고 잘 살고 성공해서 좋은 길로 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길은 사망의 길,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그리스도가 주장하고 인도하는 발걸음,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심령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삶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평강이 있습니다. 이건 능력입니다. 헬렌켈러는 3중고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3중고가 무엇입니까? 못보고 말도 못하고 또 듣지도 못하고 대체로 안 그렇지 않습니까? 말을 못하면 보든지 또 못 보면 말을 하든지 그렇게 됩니다. 3중고의 어려움을 가지고도 누구를 만났습니까? 누가 함께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실 때... 오늘 눈을 가지고도 모두 어둡게 살고 있는 이 시대, 입을 가지고도 모두 불평불만 가득한 우리의 삶들, 귀가 열려도 생명의 말씀을 못 듣는 이 닫힌 귀들 속에 헬렌켈러는 행복한 삶, 능력 있는 삶을 살아 온 인류와 세계를 위하여 큰일을 하는 20세기 최대의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귀가 있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배워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함께하시고 주장해 주시고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벤허라는 영화 아십니까? 유다 벤허는 유대인으로서는 제일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로마 총독이 들어와서 행군하는데 이 유다 가정의 식구들이 나가서 밖을 내다보는데 이 벤허의 동생 티자라고 하는 여동생이 이렇게 내려 보다 기왓장 하나가 총독의 머리에 떨어지면서 이 가정은 한순간에 불행해집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로마는 이 가정을 의심합니다. ‘총독을 죽이려고 이랬다. 로마를 대적하려고 이랬다.’ 이렇게 해서 마살라라고 하는 이 벤허의 친구는 예루살렘의 사령관인데 벤허를 불러 이 사랑하는 둘도 없는 친구를 노예로 완전히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정치인은 못 믿습니다. 비참하게 옷 다 찢어지고 벗겨서 노예선을 타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여동생하고 어머니는 감옥으로 들어가서 4년 만에 그곳에서 문둥병 환자가 됩니다. 온몸에 문둥이가 들려 썩어지는 이런 비참한 비극을 당합니다.

또한 이 벤허는 이제 버림을 받아 배를 타려고 막 매 맞으면서 가는 그 순간에 물을 주는 한분을 만납니다. 나사렛에서 그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그때는 몰랐지만은 그 분이 주는 물을 먹고 난 다음 벤허는 이상하게 길이 열립니다. 자기는 자꾸 ‘운이 좋다. 운이 좋다. 나는 누군가가 내 길을 열고 있다.’ 그러지만은 주님이 이 벤허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첼리선이라고 하는 이 배에 올라탔지만은 그 배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배가 큰 몇 척을 이끌고 로마로 가는데 여기에 아리우스라고 하는 호민관이 탔습니다. 로마에 아주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타고 가는데 가다가 전쟁이 일어납니다. 노예는 노를 저어도 다리에 쇠사슬을 매서 젓습니다, 도망치면 안 되니까, 묶어놓고 하는데 ‘41번 풀어줘라.’ 그러는 것입니다. 벤허는 41번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를 젓는데 그만 이 전쟁에 아리우스가 탄 배가 침몰합니다. 다 죽고 물에 빠지고 하는데 아리우스도 물로 뛰어들어 자살합니다. 그런데 벤허가 바로 뒤를 따라서 물위로 헤엄쳐 건져냅니다. 한쪽으로 이러면서... 싹싹 올립니다. 그래서 아리우스가 물 위로 올라 와보니 자기나라 군대가 모두 죽었습니다. 어떻게 로마로 갑니까? 그 사령관이 칼을 빼가지고 자살하려고 그러는데 벤허가 막습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살아서 나라를 건져야지 죽으면 안 됩니다.’ 계속 바다로 뛰어들려고 그러는데 그것까지 잡습니다. 그런데 바다위에 배위에 떠있는데 저쪽에서 배 하나가 옵니다. 이렇게 보니까 무슨 배인지 살려달라고 이제 벤허가 흔듭니다. 발거 벗고 막 흔듭니다. 그런데 그 배가 로마 배입니다. 그래서 배 위에 올라타니까 막 경례하고 야단입니다. 왜 그러냐 그러니까 ‘각하! 각하의 군대가 전쟁에 이겼습니다. 각하 배만 침몰하고 나머지가 다 전쟁에 이겼습니다. 지금 각하 찾으러 해매였습니다.’ 아리우스 찾다 이 아리우스를 만났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드디어 이 벤허하고 로마로 돌아와서 로마 황제가 대단한 환영식을 합니다. 수많은 로마 시민이 모여가지고 황제가 직접 나와 가지고 꿍짜작작 작작작작 파파박박 둥둥 뭐 이런 악기를 다 동원합니다. 뿡뿡~ 뿡뿡~ 이런 뭐 야단납니다. 로마로 들어갈 때 이제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황제는 이렇게 누워있고 이제 그 위로 올라갑니다. 계단으로 아리우스가 황제 있는 대로 열심히 올라가서 그리고 딱 지휘봉을 넘겨받습니다. ‘너 옆에 있는 저 젊은이는 누구냐?’, ‘전쟁에서 제 생명을 건져준 은인입니다. 유다 사람입니다.’, ‘그래 로마는 세계에 포로들이 많으니까 그러면 이 포로 너에게 준다.’ 그래서 아리우스는 큰 지휘자가 될 뿐만 아니라 엄청난 영광으로 생명을 건져준 분이 벤허니까 벤허에게 자기의 양자됨을 허락하고 ‘너는 내 아들이다. 내 생명 건져주었으니까.’ 그래서 도장을 탁 넘겨줍니다. 그러나 벤허는 자기 가족이 지금 문제이지 않습니까? 로마에 있어라고 하는데도 기어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친구 마살라가 예루살렘 사령관으로 있는데 찾아갑니다. ‘내 동생 찾아내라. 나 살아왔다. 나는 지금 아리우스 2세다. 네 힘으로 능력으로 나를 바다에 던져서 노예로 보냈지만은 나는 그 바다에서 살아왔다. 아리우스 2세로 살아왔다. 너 내 동생 어머니 찾아내라. 안 그러면 내 너를 가만히 안두겠다.’ 벤허는 그것만 가지고 칼을 항상 갈고 있었습니다. 벤허는 지금 주님을 만난 이후로 계속 주님이 같이 합니다.

며칠 후에 예루살렘에서 전차 경기가 일어납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 세계 최고의 지도자들하고 마차 경기를 하는데 마차 경기에 벤허하고 마살라가 붙습니다. 마살라는 어쨌든 벤허를 못 가게 하려고 바퀴 옆에다가 톱날을 답니다. 그래서 막 하니까 다 죽습니다. 벤허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막 채찍 때리고 그러면 벤허는 뺏어가지고 막 이러면서 갑니다. 이 전차 경기에 벤허가 이겨 승리합니다. 승리하고, 마살라는 피투성이가 되어 죽습니다. 그리고 부상을 당해 총독부에 와있는데 벤허가 가서 말합니다. 끝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내 동생, 내 어머니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 이 마살라가 말하기를 문둥이 촌에 가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꺼내 문둥이 촌으로 보냈습니다. 문둥이 촌에 갑니다. 가서 보니까 누가 있느냐 에스더라고 하는 옛날 애인이 거기 있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만납니다. 어머니가 오지 말라고 했지만 만납니다. 며칠 이후에 듣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지금의 누구와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고 나환자도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에스더와 티자와 함께 티자는 이미 문둥병으로 다 죽어갑니다. 여동생을 직접 안고 벤허가 예수님 계신 곳으로 은혜 받으러 가는데 그날이 세상에 예수님 돌아가시는 날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 입니다. 십자가를 이미 지고 막 채찍 맞으면서 올라가는 것을 구경하는데 벤허가 예수님 십자가 지신, 쓰러진 자리에 가서 물을 그릇에 담아 부어드립니다. 물을 드리면서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5년 전에 자기에게 물 떠준 분임을 발견합니다. 저분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분이 나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 여동생과 어머니에게서 이 문둥병이 깨끗하게 치료됩니다. 이제 벤허는 늦게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니 문둥병이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마차 경기도 아닙니다. 저도 대한극장에도 70년대에 세 번 가 봤습니다. 열 번 이상 봤지만은 우리는 항상 마차 경기에만 맞추었습니다. 문둥병 낫는 데만 맞추었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뭔지 아십니까? 마지막 순간 이 영화 끝맺는 게 뭔지 아십니까? 어머니를 안고 벤허가 새사람 된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놀라운, 내 마음에 있는 무서운 증오심, 칼이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전차경주에 이겨도 칼을 못 버렸습니다. 아리우스 2세가 되어도 증오의 칼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평강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안에 그 많고 많은 인간적인 온갖 욕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사라진 것입니다. 벤허가 새 사람이 되면서 세 사람이 부둥켜 안으면서 END, 이게 끝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교회 나온다고 해서 이 증오의 칼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를 주장해야 됩니다. 이번에 우리 조승희 사건을 보면서 이게 딱 하나입니다. 인간의 증오심입니다. 섭섭한 마음, 소외감, 좌절감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살인 사건이 있었는데 살인 사건의 100%가 전부 이런 증오심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김대두는 17명을 희생시켰습니다. 75년 8월부터 55일 동안 노인부터 3개월 된 아이까지 막, 그게 딱 하나입니다. 소외의식,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이었습니다. 지존파는 여섯 명이 사람의 인육을 그냥 베어 먹었습니다. 집 방 안에 앉아 사람을 불태워 죽이면서 같이 앉아 구경하고 담배피우며 술 먹고 있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막가파는 96년에 산 사람을 구덩이에 직접 집어넣으면서도 그렇게 살려 달라 그러는데도 히히 웃으면서 그랬습니다. 모두 증오심 때문입니다.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1명이나 살해해서 11명을 그냥 전기톱으로 토막을 내서 죽이는 이런 비참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유영철도 다 비관입니다. 좌절감, 부유층에 대한 세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좋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 마음에 가득찬 이 미움과 증오는 스스로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못 이깁니다. 이 마음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버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가정에서도 잘 살지 못하고 하루에도 수백 가정이 무너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우리를 주장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장하는 인생, 그리스도께서 주장하는 인격, 마음, 생각, ‘네 손을 주님이 주장하신다.’ 그러면 이 손은 능력의 손이 됩니다. 축복의 손, 보통 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함께하는 손입니다.

이번에 미국에 조승희 사건을 보면서 얼마나 우리가 많은 것을 깨닫지 않습니까? 한국이 낳은 아들 하나가 유학 가서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죄를 엄청난 범행을 할 수 있습니까? 딱 이유는 하나입니다. 섭섭한 마음입니다. 증오하는 마음들, 문제를 자기에게서 찾아야 되는데 너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엄청난 비극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미국 사람들 보십시오. 그 많은 유족들이 대학에도 원망하지 않고 경찰에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같으면 경찰 살아나겠습니까? 경찰서 습격을 할 것입니다. 아마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한명만 그래도 습격합니다. 사표 또 다 내야 됩니다. 국무총리부터 몽땅 사표 낼 것입니다. 미국은 사표 하나 없습니다. 누구보고 원망을 도무지 안 합니다. 우리 같으면 장례 지내겠습니까? 사흘만에 장례식 다 끝났습니다. 우리는 서른 세 명의 시체를 갖다놓고 전 국민이 다 모일 것입니다. 우리끼리도 그렇습니다. 미국 사람이 우리나라 와서 이런 일 했다 하면, 아니 다 안 죽이고 한명만 죽였다 그러더라도 미국 사람은 살지도 못 합니다. 미군 부대에 있지도 못 합니다. 지난번 효순이는 미국 군인들이 우리 때문에 와서 이 교통사고 난 것도 전 나라가 일어나 촛불 집회 다 해서 온갖 미국 성조기 다 태우고 미국 대통령 불 다 태우고 그랬습니다. 만약에 이번 사건 가지고 미국 정부나 미국에 있는 방송사 언론들이 ‘이거 한국 사람은 이렇게 악질적이다.’ 한마디만 하면, 미국의 언론은 세계를 지배하니 우리는 전 세계 가는 길이 다 막힙니다. 이렇게 잔인한 민족이다, 그러면 자동차 타겠습니까? 그 귀신이 다 들어와 있는데 타겠습니까? 우리 자동차 수출한 거 누가 사겠습니까? 그 사람들 보십시오. 한국 사람하고 조승희 하고는 관계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배웁니까?

이 사회를 누가 주장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가 주장해야 합니다. 똑같은 일, 천분의 일도 안 되는 일도 우리가 주장하면 막 증오와 미움과 악한 마음뿐입니다. 우리 사회에 증오심을 일으키는, 온 국민을 선동하는 사람들 배후를 다 찾아가 보면 그 배후에 목사들이 있답니다. 우리나라 목회자들, 정말 악한 목회자들 많습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들어 가 보면 다 교인들이 있답니다. 그래서 되겠습니까? 배워야 될 거 아닙니까? 교회에 나와도 그리스도가 주장하지 않으면 교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을, 내 마음을 주님이 주장하여 주셔 평강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내 마음 주께 바치고 이 몸도 드리옵니다, 내 마음 주께 바치옵니다 오 나의 주님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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