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회 계명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 오른쪽으로 돌아가시오 오른쪽으로 돌아가시오 오른쪽으로 돌아가시오 K는 머리에 통증을 느낀다. 머리가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다. 웅 웅, 이명이 멈추지 않는다. 가전제품들에서 나는 소음 같기도 하다. 오른쪽 귀가 멍멍하다. 새우잠을 자는 버릇 때문에 귀가 머리에 눌린 탓이다. 똑바로 누워서 자는 버릇을 들이려 베개도 바꿔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K는 반대쪽으로 돌아눕는다. 오른쪽 귀에 피가 통하면서 찌잉 전기가 오른다. 그는 눈을 뜰까 말까 고민한다. 눈곱이 속눈썹들에 달라붙어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눈을 뜨는 일이 너무도 힘들다.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잘까, 생각하는 순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뒤따라온다. 머리가 아프다. 하루가 시작되고 가장 처음
느끼는 것이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라니. 아직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벌써부터 피로가 쌓인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어제의 연장일 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바람이 차다. K는 딸아이를 팔로 감싸 안는다. 하지만 바람은 그 사이를 더 매섭게 파고든다. 옷을 더 챙겨 입히고 나올 걸, 후회가 된다. K는 가디건을 벗어 딸아이에게 둘러준다. 새 학기라 그런지 어린이집 앞에 학부모들이 잔뜩이다. K는 눈대중으로 사람들을 세어본다. 어림잡아도 열댓 명은 넘어 보이는 것 같다. 남자는 K뿐이다. 다들 한 번씩 힐끔거리며 K를 쳐다본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K는 부러 옆 사람에게 말을 붙인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무사히 보내고 K는 회사로 향한다. 딸이 다른 아이들처럼 울며 떼쓰지 않아서 빨리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딸아이 혼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아이에게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쿵. K가 반대편에서 오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친다. K와 어깨를 부딪친 사람은 K를 한번 쏘아보고는 다시 뛰어간다. K는 떨어트린 핸드폰을 주우며 애써 안 좋은 생각을 떨쳐내려 한다. 이제 모든 게 괜찮아 질 것이다. 밖에서 슬쩍 본 것뿐이지만 어린이집은 밝고 활기차보였다. 아이들이 쿵쾅거리며 뛰어다니고 거리낄 것 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소음으로만 느껴졌었던 것들이었는데 그 안에서는 모두 어린생명 특유의 활기로 느껴졌다. 딸 또래의 아이들은 벌써 서로 친구가 되어 있기도 했다. 좋은 어린이집 같았다. 그는 혼잡한 대로변을 피해 역 뒤쪽
상업지구 안으로 들어간다. K는 지하철에 올라탄다. 축축한 먼지 냄새가 콧속에 들이찬다. 약간의 흔들림과 비틀거림, 살내음의 끈적함과 약간의 소란스러움. 적당한 불쾌함들이 K에게 현실에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 K는 지하철 문에 기대선다. 건너편의 검은 창으로 자신의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보인다. 비로소 돌아온 느낌이다. 지하철은 언제나와 같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너무 멀쩡하다.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출퇴근 시간에 역 바로 근처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났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긴 하다. K는 출근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회사에
도착한다. K가 사무실에 들어가도 누구 하나 그를 맞이하거나 혼을 내는 사람이 없다. K가 없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듯하다. K는 자신이 2년간 단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긴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마 전자 출결 기록 시스템뿐인 것 같다는 생각에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힘이 빠진다. K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사무실 구석 쓰레기통 옆에 있는 K의 자리는 파티션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책상 옆으로는 부서로 온 물건들과 이면지들이 쌓여있다. 사람이 앉아있지 않으니 꼭 누군가의 자리라기보다는 물건만 쌓아두는 창고 같아 보인다. K는 자신 또한 그 물건 중 하나라고 느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언젠가는 치워질 물건. 서늘한 바람이 셔츠 소매 사이로 들어온다. 소름이 돋는다. K는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 한 팩을 꺼내 마신다. 달큰한 오렌지 과즙이 입안에서 감돈다. 아침에 마셨을 때와는 달리 술술 잘 넘어간다. K는 몇 개 더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오렌지주스 팩을 본다. ‘엄선된 100% 오렌지 과즙’이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포장지에 저 문구가 쓰여진 이후 30대 주부들의 매출이 늘었다. 물론 조금만 생각해 보면 100%
오렌지과즙에 파인애플 과즙과 정제수, 액상과당, 합성착향료, 오렌지향은 왜 들어가나 하는 의문이 들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애초에 그런 의문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만들어 먹지 못할 것이라면 적당히 ‘100% 오렌지 과즙’일 거라고 믿는 쪽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K가 하는 일은 바로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고도의 소비자 심리 분석 마케팅이다. 그는 이 오렌지주스의 성분함량에서 파인애플과즙 농축액의 원산지를 ‘필리핀’에서 ‘수입산’으로 바꾸고는 ‘오렌지 농축액 12%’를 '오렌지과즙 농축액 (오렌지과즙으로 100%)'로 고쳤다. 그 과정에서 오렌지에 달려있던 ‘유전자 변형’ 표시는 사라졌다. ‘엄선된 100% 오렌지 과즙’이라는 문구는 이렇게 K가 성분표시를 상업용으로 고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끔씩 아이들이 먹는 음료수를 유전자 변형 오렌지로 만들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K 자신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기에 자식에게 좋은 것을 먹이려는 부모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법을 어긴 것은 아니니 문제 될 것이 없다. 무엇보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내 아이를 먹여 살릴 수 없다. K는 오렌지주스 팩을 거꾸로 든다. 주스 몇 방울이 K의 입 안으로 떨어진다. 액상과당의 끈적함이 K의 입 안의 남는다. K는 팩을 접어 휴지통에 버린다. K는 밥을 열심히 목구멍에 밀어 넣는다. 밥을 먹는다기보다는 의무적으로 음식을 몸 안에 채워 넣는 쪽에 가깝다. 머리가 복잡하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먹어서인지 속도
더부룩하다. K는 수저를 내려놓고 고개를 든다. 건너편 테이블에 한 남자가 앉아있다. 순간 K의 눈에 그가 아침에 본 시체로 보인다. K는 눈을 비비고 다시 그를 본다. K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간다. 옥상에는 K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K는 난간에 붙어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남자는 눈인사를 한 후 고개를 돌린다. K도 눈인사를 한 후 남자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는다. 점심시간 후 옥상에서 매번 보는 얼굴이다. 자연스레 그가 어느 부서의 누구인지 알게 되었지만 K는 그와 눈인사 이상의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오후가 되니 감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모양이다.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K는 연신 콜록거리며 휴지에 코를 푼다. 열도 나는지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없다. K의 기침소리가 신경이 쓰이는지 건너편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파티션 너머의 K를 째려본다. K는 입을 다물고 소리 없이 기침을 하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기침이 더 멈추지 않는다. 하. 누군가가 짜증을 내는 소리가 들린다. K는 어린이집에 도착한다. 문 앞에는 퇴근길에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가 몇 명 서있다. K는 그들을 밀치고 어린이집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뒤에서 뭐라 소리치는 것이 들리지만 그는 아랑곳 앉는다. 신경 쓸 겨를이 없다. K는 방을 하나씩 돌아다닌다. 딸은 보이지 않는다. K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는 숨을 가다듬는다. 심장이 터질듯이 쿵쾅거리던 것이 겨우 안정이 된다. 그는 다시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이며 어린이집 안을 걷는다. 곧 그는 새싹반에서 나오던 교사 한명과 마주친다. 밖으로 나온 K는 어린이집을 바라본다. 해가 지고 차가운 네온사인만 잔뜩 켜진 어린이집은 어딘가 기괴한 느낌이 든다. K는 어린이집을 찬찬히 살핀다. 놀이터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한쪽 끝이 부러져 있고, 차고로 향하는 철문은 잠겨있지도 않다. 아침과는 달리 안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창을 통해 보이는 아이들은 지루한 표정으로 부모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드디어 부모가 데리러 온 아이 하나가 부모의 등에
짐짝처럼 매달려 어린이집 밖으로 빠져나온다. 아이와 부모 모두 얼굴에 피곤만이 가득하다.
K는 집에 도착한다. 현관문이 닫힌다. 쿵. 거실에서 졸고 있던 아내가 깬다. 왔어? K는 대답 없이 신발을 벗는다. 아내는 하품을 하며 TV를 킨다. TV에서 뉴스가 나온다. 딸은 아내의 옆에서 머리핀이 뜯어진 키티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 K는 아내의 앞으로 가 조용히 앉는다. 기침이 나온다. 뒤에서 아내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