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네가 아닌 이 새끼들에게 맞고 있을까

중/장편소설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담소 2020.11.28 댓글 수 0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네가 아닌 이 새끼들에게 맞고 있을까.

너여야지.

나를 망가뜨리는 것은 너여야지.

너밖에 없으니까.

네가 해야지.

황정은 작가님을 알기 전에도 알고있었던 문장.

묵혀두었다가 리뷰를 쓰려니까 전체적인 흐름만 기억에 남았는데(한 번 더 읽어야지) 나기의 이야기 중 저 구절은 원래도 많이 들어왔던 거라 그런지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다.

황정은 작가님의 문체자체는 굉장히 다크한편이라고 느껴지는데 이 소설은 문체와는 사뭇 다른 내용과 분위기여서 더 좋았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계속, 해보겠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中, 황정은

너를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있을까.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 너는 나를 사랑스럽다고 여겨줄까. 그래서 어느날엔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하게 되는 순간이 올까. 너를 본 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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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中, 황정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네가 아닌 이 새끼들에게 맞고 있을까. 너여야지. 나를 망가뜨리는 것은 너여야지. 너밖에 없으니까. 네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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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中, 황정은

이것은 너의 냄새. 너의 냄새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 자주 피우면 내 냄새가 되어 버리지. 피우는 의미가 사라져. 허공으로 길게 풀어져 사라질 때까지 담배 연기를 바라본다. 사과 냄새가 난다. 이것은 너의 냄새. 너는 작았지. 머리카락이 가늘고 입술이 붉었지. 건방졌지. 난폭했고, 조용했지. 폭발하듯 갑자기 웃을 때가 있었는데 아무도 네가 왜 웃는지를 몰랐다. 네가 그렇게 웃을 때, 매번은 아니고 이따금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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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시죠 당신은, 성기완

눈부신 날이에요 당신과 아무 길이라도 걷고 싶어요 사랑해요 푸른 하늘 잉크를 찍어 그렇게 쓰는데 펜촉이 너무 날카로와요 당신도 이 눈부신 날 내게 그렇게 쓰고 싶다가도 맘으로만 그렇게 하는 게 다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다칠 걸 무릅쓰고 사랑해요라고 내가 먼저 쓰는 건 내가 시인이기 때문이고 눈이 멀어서이기도 하죠 오늘은 당신에게 연락받는 호사를 누리지 못했어요라고 쓰는 사이 당인리 발전소 건너편의 한강은 붉어지겠죠 ㅋㅋ 그래도 기뻐요 당신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 누구시죠 당신은 나를 후려쳐 아프고 즐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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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뉴 이어 1, 성기완

혀끝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당신 몸은 달콤한 바닐라 스트로베리 and 코코넛 믹스

손끝에 파르르 진저리치는 내 몸은 시디신 라스베리 샤베트 with 애플민트 초코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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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이장욱

오늘은 어제의 거리를 다시 걷는 오후.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이건 거의 중독이야. 하지만 어제는 또 머나먼 일몰의 해별을 거닐었지.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훗날 너는 나를 기준으로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펴고. 또 아무런 깊이가 없는 해변을 거니는 거야. 완전한 평면의 바다. 그때 바다를 바라보는 너로부터 검은 연필로 긴 선을 그으면, 어디선가 점에 닿는 것. 그 점을 섬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섬에서 꿈 없는 잠을. 너는 나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나를 접어 종이배를, 나를 접어 쉽게 구겨지는 학을.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과 함께. 그러므로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는지도 모르지. 서서히 늪에 잠겨가는 사람처럼,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일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화점 옥상에서, 지금 막 우울한 자세로 이륙하는 종이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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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 이장욱

조그만 나사는 천천히 회전한다. 한 바퀴를 돌아가는 아주 오랜 동안 구멍 깊은 곳으로 그가 빠져나간 만큼 바람 든다. 안 보이는 그곳을 메우기 위해 사기그릇이 놓인 선반은 느리게 기울어진다. 너를 보내고 돌아오면서 나는 시속 일백 킬로로 질주하는 택시 안에 있었다.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추락에 대해 상상하는 별들은 없었다. 별 하나가 보이지 않게 궤도를 바꾸는 순간 실내의 난은 무거워진 몸을 낮춘다. 소파에 누운 네 몸의 빈곳으로 잠은 별빛처럼 스며든다. 하지만 모든 것은 약간의 이동일 뿐이니까. 그것은 술을 마시며 네가 한 말이었다. 불곡 긴 선들이 사 차선 거리 저편으로 사라진다. 내가 밤하늘의 시선으로 나의 질주를 바라보자 사기그릇이 놓인 선반은 어떤 추락에 대해 상상한다. 조그만 나사는 천천히 회전한다. 구멍 깊은 곳으로 천천히 바람은 든다. 밤거리의 저편으로 나는 조금씩 기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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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하신년-코끼리군의 엽서, 이장욱

너에게 나는 소문이다. 나는 사라지지 않지. 나는 종로 상공을 떠가는 비닐봉지처럼 유연해. 자동차들이 착지점을 통과한다. 나는 자꾸 몸무게가 제로에 가까워져 밤새 고개를 들고 열심히 너를 떠올렸다. 속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가 있을 뿐. 나는 아무 때나 정지할 수 있다. 완벽하게 복고적인 정신으로 충만하고 싶어. 가령 부르주아에 대한 고전적인 적의 같은 것. 나를 지배하는 기압골의 이동 경로, 혹은 저녁 여덟 시 홈드라마의 웃음. 나는 명랑해질 것이다. 교보문고 상공에 순간 정지한 비닐봉지. 비닐의 몸을 통과하는 무한한 확률들.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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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을 아주 가끔 피운다. 아주 가끔으로 정해두고 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라서 삼가는 것은 아니고 혀가 둔해져 조리에 영향이 있을 것을 걱정한다거나 담뱃진이 밴 손가락으로 식재료를 만지는 걸 꺼리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너의 냄새. 너의 냄새로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 자주 피우면 내 냄새가 되어버리지. 피우는 의미가 사라져. 허공으로 길게 풀어져 사라질때까지 담배 연기를 바라본다. 사과 냄새가 난다. 이것은 너의 냄새.

너의 목이 보라색이었다. 왼쪽 귀 뒤에서 맨드라미 모양으로 번져나간 보라색 멍이 목덜미에서 옷깃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녀석 또 멍들었네.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게 그것을 보고 있을 때 네가 왼손으로 목을 긁었다. 손톱으로 천천히 목을 긁고 방금 긁은 피부를 손으로 덮었다. 약지와 소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이 접힌 옷깃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 멍은 어디까지 이어졌을까. 멍과 살갗의 대비가 또렷했고 가느다란 약지가 그 경계를 더듬듯 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있다가 얼굴을 붉혔다. 예쁘다고 느꼈고, 외설적이라고 느꼈다. 당시엔 외설이라는 어휘도 몰랐으므로 뭐라 표현할 말이 없어 다짜고짜 안타까웠다. 옷깃 속으로 숨어 들어간 멍을 마저 보고 싶었고, 그 등에 손바닥을 대보고 싶었다.

네 정수리는 어째서 그런 모양일까. 귀는 왜 이렇게 되어있을까. 이걸 만져봐도 좋을까. 만져도 좋을까. 네가 만지는 것처럼 너의 목을. 목을 만지는 버릇, 너는 그것을 알까. 그게 얼마나 안타깝고 가련해 보이는 지를 알고 있을까. 그 밖의 너의 버릇들, 말하기 전에 허공을 바라보는 버릇, 양쪽 팔을 책상에 올리고도 한쪽 팔꿈치에만 체중을 싣는 버릇, 책을 읽을 때 책장 모서리를 만지는 버릇 같은 것을 너는 알까. 그걸 전부 알고 있을까. 네가 그렇게 한다는 것을 나는 너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는 왜 그렇게 할까. 왜 이렇게 할까. 묻고 싶었고, 듣고 싶었다.

너는 개입하지 않았다. 보태지도 않았고 말리지도 않았다. 너는 삼분의 일쯤 타다 남은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었다. 나는 너를 보았다. 맞아가면서도 언제나 보는 것처럼 너를 보았다. 이런 순간에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너를 열망하고 원망헀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네가 아닌 이 새끼들에게 맞고 있을까. 너여야지. 나를 망가뜨리는 것은 너여야지. 너밖에 없으니까. 네가 해야지.

나는 너를 따라갔다. 너는 교복 위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고 납작한 단화를 신고 있었다. 등엔 모래가 묻었고 단화 한쪽의 끈이 풀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질질 끌리거나 밟히고 있었다. 불러세워서 끈을 제대로 매어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너를 따라갔다.

모퉁이를 돌 때 버스는 틀림없이 한쪽으로 기울었고 그러면 나는 그 긴 좌석이 시소와 같다고 생각했다. 네 쪽으로 기울어지거나 내 쪽으로 기울어지거나. 그러다 어느 순간 한쪽이 나머지 한쪽으로 흘러내린다면 좋겠다. 시소를 타고 흘러내려 더 곁에, 앉게 된다면 좋겠다.... 멍청하게 그런 상상을 하며 창 밖을 보았다. 얇은 성에로 덮인 유리창에 이따금 네가 비쳤다.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네 손등이 어떻게 구부러져 있었는지, 손바닥의 어느 부분이 오목하고 볼록했는지. 검지의 두번째 마디가 어느 방향으로 휘어있었는지. 그것을 전부 기억하고 있고 또 그것을 얼마나 내 입에 넣고 싶었는지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감촉에 관한 기억이고 열망이므로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라지더라도 맨 마지막에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에야 사라질 것이다.

너는 나를 걷어차고 밟았다. 배와 등과 넓적다리와 무릎과 종아리와 등과 머리... 한 마디 말도 없이 너는 자꾸 내게 충돌해오고 있었다. 나는 웃었다. 비통하게 아팠지만 선명했으니까 차라리. 나는 그것을 네게 받았다. 이렇게 분명한 것을 받았다. 이것은 막연한 기다림보다는 낫다. 열배 백배는 낫다.

네가 머물고 간 그 방을 생각했다. 그 방은 여태 있을까. 내가 그 방을 알기 전에도 수십년동안 있어왔으므로 여태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다시 가 보게 되는 날도 있을까. 너를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있을까. 다시 만나게 되는 날에 너는 나를 사랑스럽다고 여겨줄까. 그래서 어느 날엔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하게 되는 순간이 올까. 너를 본 지 오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