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2017년 이전에 올려진 아멘넷 오피니언 칼럼 글입니다. 이름으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Show 예언이란 무엇인가?페이지 정보최송연ㆍ2012-01-09관련링크본문이선님을 비롯 많은 분들이 예언에 관해서 혼란스러워 하고, 이런 헛점을 이용하여,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나, 현대도 예언, 직통 계시가 주어진다라고 호도하는 건전하지 못한 변질된 은사주의자들의 만행이 극에 달했으므로 경계해야겠기에 필자는 정리해 둔 예언에 관한 칼럼 글을 올려서 함께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세가 가까워옴에 따라, 거짓 선지자들이 활개를 치는가 하면, 이곳저곳에 선지(예언자)학교라는 특수 학교가 세워지고 자칭 사도들, 예언자들, 선지자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현재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선지(예언자)학교와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좀 더 좁혀 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이란 어떤 것이며 예언자의 자세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란 사각지대(死角地帶)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벨리알의 사람이냐, 둘 중 하나, 영생의 길이냐, 영벌의 길이냐로 갈라지기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검증이란 대단히 중요한 이슈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예언의 정의: 2.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말씀 언(言)자에 맡길 예(預)자를 사용한 말이다. 인간의 미래를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맡겼다는 뜻이다. (預言)자의 개념: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 혹은 선견자(대선지자, 소선지자 포함)들은 선지 학교 출신들이 아닌, 평민으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로서, 그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골라 특별히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선견자나 선지자, 예언자의 특성상, 인위적인 방법으로서가 아닌, 전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탁에 의해 주어진 말씀이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 또 구약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주님의 영으로 부름을 받은 특별한 대언 자가 필요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신구약 성경이 완성, 정경으로 채택되어 우리 손에 들려져 있고, 주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교훈도 하시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인 제사장’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만인 대언자’가 될 수 있음도 믿어야 한다. 대언이 어떤 특정인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새삼스럽게 인위적인 방법의 선지 학교나 그곳에서 배출된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이 필요치 않다고 보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진정한 예언= 우리에게는 오직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언서인 신구약 66권 외에 다른 예언의 말씀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계22:18-19절).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서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다. 가장 확실한 예언은 성경 말씀이다 (벧후 1:19-20). 3.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령한 예언들은 무엇인가?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 속에는 크게 나누어 몇 가지 형태의 계시가 있는데 특별계시(예수 그리스도), 혹은 기록(문서)계시(성경), 일반(자연)계시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요약해, 특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문서 계시인 성경 말씀 역시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요, 핵심은 인간 구원이다. 일반계시는 자연 속에서 (롬1:19-20절 참조)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시는 것이다. 현 세대에서 우리(성도)는 성경을 다시 쓸 수 있는 특별 계시, 혹은 문서계시는 받을 수도 없고(계 22:18-19절 참조), 또 받을 필요가 없다. 일반 계시도 자연 속에서 찾으면 되기에 우리가 다시 재창조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성도)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란, 곧 성령님의 조명하에 특별계시를 통해서, 기록계시 속에서, 혹은 일반계시 속에서 찾아지고 들려질 수가 있으며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차원으로 해석돼야 한다. 성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손에 이미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따로 선지(예언자)학교가 필요치 않다고 본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14;26).”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대언의 영으로 주시는 말씀도,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a) 은사로서의 예언: b)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신명기18:18-22 ): c)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d)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e)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 f)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1:41-45절) g) 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결론적으로 ************************************************************************* 개혁교의 대표적인 분들(죤 칼빈, 마틴 루터, 벤저민 휫필드. 죤 매카터, 리처드 개핀, 대니얼 월리스) 등, 그분들은, 초대 교회 이후, 은사중단론을 지지한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중단설(cessationism)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초기교회 이후 방언, 신유, 은사, 계시 등이 끊겼고 사라졌다는 주장입니다. 그 이유로는 성경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만 모든 은사들이 필요하였고 그에 따른 임무(성경이 완성)가 끝났으므로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많이 읽기 전에는 그것이 그런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가 모든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안전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 14: 26 말씀이 성도에게 아무런 유익도 필요함도 없게 된다”는 것이 밝히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을 하게됩니다. 믿는 자는, 새 방언을 말할 것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때부터...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습니다.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하심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방언이 우리가 배워서 할 수 있는 외국어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new tongues(νέες γλώσσες)란 말씀을 쓰지 않으셨고,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 혹은, 다른 방언 the other dialects( Οι άλλες διάλεκτοι)를 너희 믿는 자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배워서, 학습으로 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인지....그러나, 그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댓글로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아는 분 중에 어릴 적 부모를 여이고 천애 고아로 성장하신 여성이 있습니다.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가볼 수가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얼마 후, 첫 남편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찾아와 주신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교회를 나가긴 해야겠는데, 말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싫었기 때문에 그분은 미국인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미국 교회에 나가니, 영어로 찬송도 불러야 하고 말씀도 들어야 하고...너무나 힘이 들어서 고통 하던 중, 영어 성경을 읽어보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영어 성경을 들고 읽어나가기 시작(읽는 것이 아니라, "I n t h e b e g i n n i n g 이렇게 알파벳을 한자씩 소리내어 읽었다는 군요.)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읽고...틈만 나면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녀의 입이 갑자기 열려서, 알파벳으로 끙끙거리던 그 말씀이 문장으로 줄줄 이어지고.... 깜짝 놀란 그녀 자신, 그리고 그녀의 그런 음성을 듣고 있던 (재혼한 일본인 2세)남편이 놀라서 소동을 하고요....이렇게 배운 적없는 외국어도 가능합니다. 성령 하나님 안에서는.... 또 고전 14: 2절의 영언(비밀)의 체험 사례: 그야말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교회로 빌려서 사용하는 건물에서 몇 몇 성도님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드리던 때였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님께 기도로 아룁니다. 그날도 우리가 섬기던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의 이름을 넣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저의 혀가 구르면서 내가 평소에 쓰지않던 방언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뜻이 연달아 깨달아지는데 "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그를 침상에 내어 던지리라!" 저는 너무도 놀라서 울며 불며, 조금만 더 참아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주십사...아마도 저와 함께 하는 다른 분이 들으면 안될 것을 아시고...이런 것이 비밀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계시로서가 아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되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런 말입니다. 저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마저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치유도 주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일으켜주십니다. 그런데, 한 번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여서, 자신이 신령하다고 착각을 한다던지, 다른 성도들보다 더 우월하다던지....이런 마음을 먹는 그 순간부터 사단이 그런 사람을 가지고 충동질 하기 시작하지요. "너는 신령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네가 기도해 주면 병도 낫는다." 등등. 그런 사단의 속삭임도 우리의 영혼이 깨어 감지해 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용하여 자신을 신성화시켜서 모든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삯군이요 거짓 선지자요 사단의 졸개일 뿐입니다! 그들이 지금 자신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보이지가 않습니까?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 가르치지요)이 말은 표현적으로 잘못되었기에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개혁교회(다는 아님)중 일부에서는 성령의 은사중 방언과 예언은 중지되었다고 가르치지요. (아래 참조를 올려두었음) 칼빈주의는 사도 시대와 함께 모든 은사가 중지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의 은사는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사도성이나 계시성을 가지지 못한다 지적하고, 이부분은 우리 모두 동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자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체험했지요. 그러니까, 체험을 한 성도님들이 달려갈 곳이 어디겠나요? 사단이 쳐놓은 덫, 극단적 신비주의자, 삯꾼들의 품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찌보면,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순진한 양떼들을 '은사중단론 자'들이 극단적 신비주의, 사단이 쳐논 덫, 그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정통 개혁교회의 입장: " 개혁주의가 중단되었다고 보는 은사는 2. 예언의 은사(the gift of prophecy) 3. 방언의 은사 thomas 2012-01-22 10:34 http://www.frame-poythress.org/Poythress_books/bdisp/bd0.html 이분이 하버드에서 수학 학위를 갖고있는 사람인데, 신학을 공부하여 성경 원문을 번역하는데도 관심이 많은 분입니다. 예전에 The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에 나온 글을 보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어떻게 생겼나도 볼겸^^ 거기서 공부하던 전도사(제가 교사할 때 유스그룹 전도사 하다가 지금은 한국의 어떤 신학교 교수)와 세미나하는데 참석한 기억이 있습니다. http://www.etsjets.org/ 그래서 기왕에 링크하신 중지론 위키에 달린
Poythress 교수님의 글을 조금씩 번역해서 올려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저도 적극 참여하여 관련된 참고내용을 부족하지만 능력이 닿는데로 붙여보겠습니다. 잘 맹글어진거 하나를 자세하고 완벽하게 분해해서 이해하고 재조립하는게 광범한 내용을 이것저것 훑는거 보다 나을거라 사료됩니다! 다시한번 올려주시는 자료들과 JuNick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나무 토마스님 그래주시면 너무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 궁금한사람 교제 바울사도가 자신의 약함을 고치지 못했다고 epistelchristi 2012-01-20 05:20 우짜면 좋을까요!!! <카터라>....<아니면, 가져다 바친 넘이 바부>하는 기다림... 별똥별 2012-01-19 12:51 우리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비록 나와 약간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로 맺어진 한 형제 자매로 생각하고 그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실되고 참된 일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겸손하듯 겸손한 영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겸손이란 가르치는 은사가 없다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르치는 은사를 주신 분들, 잘 가르치는 것도 성령님의 은사로 충만하신 은사 자들이기에 그분들을 배나 존중할 자로 여기라고 바울 사도는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각 분야에서 자신의 받은 은사대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주력하되, 그분의 공급하시는 능력을 힘입고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포하신 바울 사도의 믿음을 본받고 싶습니다. 참된 겸손은 "내게 능력주시는 분이 누구 신가?"하는 사실을 인지하는 그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신 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내가 체험하지 못한 비밀한 일을 체험한 형제 자매도 있다고 믿는 것이고 칼빈 선생님도 가짜들의 이적과 기적놀이에 질린 것 같지만 그분의 말속에는 항상 주님의 영으로 모든 것이 가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제가 보는 칼빈선생님은 과연 대 학자요,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의 사람이십니다. 우리가 사단의 장난질, 주절거림의 방언이나 거짓 은사자들, 삯꾼들, 그리고 자신이 능력 자라고 사람들 앞에서 나팔 부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하셨습니다.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무리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말씀에 있는 것이라면 단 일회적으로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내 지식의 틀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제한시켜 가두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고,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서 크고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주께서 내게 보여주신 만큼만 믿되,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날, 주께서는 제게 성령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ability" 즉,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신 사람은 곧 그분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시간에, 그분이 깨닫게 도와주시는 때, 주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주의 능력을 체험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졌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내 신앙의 뿌리를 든든히 세워나가시는 우리 독자님들이 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토론을 이끌어나가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기자석 별똥별 2012-01-18 18:01 즉, 칼빈 선생님의 뜻이 해설자들의 말에 의해서 호도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1. 기독교 강요 ((그들은(여기서 그들이란, 거짓 기적을 조장해 내는 현대판 신사도 파와 같은 천주교회를 지칭)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했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 든지 혹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 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시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칼빈 여기에서, 현대는 사도 시대와 같은 기적(동일한 능력,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운다던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병들어 죽은 사람 살렸다는 말은 모두 거짓 사도들이 꾸며낸 말일 뿐, 인간의 생명은 유한한 것, 주께서 오라고 하시면 오늘이라도 가야합니다. 잠시 잠간의 기적으로 인해서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신사도 파, 아이홉 파처럼 날라리 사이비(토마스님의 표현을 빌렸슴다.^^)가 그때 당시도 횡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거짓 기적, 사단의 장난질을 경계하자는 단호한 의지가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구분되고 우리(개혁교도들)에게도 성령님에 의한 참된 기적이 있고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 이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붉은색이나 밑줄을 그을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 - 칼빈 , 아멘!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거짓과 참을 구분해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저는 칼빈 선생의 위 문단이 저, 별똥별이 지금껏 힘을 다해 증거하고자 하는 내용과 어쩌면 이토록 합일한지, 성령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참된 성령의 역사로서의 기적은 옛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처럼 그렇게 큰 능력으로 임해야 할 필요가 없기에, 주께서 그들을 사용하신만큼의 기름을 부어주시지는 않지만, 세기를 두고 주님의 뜻에 따라서 여전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은, 거짓 영, 거짓 기적을 성령의 능력으로 분별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장난에 휩쓸려 넘어갈 뿐아니라 거짓 삯꾼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어간다!! 하는 것입니다! 개혁교회 목사님들도 칼빈 선생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을 약간씩 뒤틀어서 이해하지 마시고 '아', 와 '어', 가 다름으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아래 Thomas님처럼 바른 이해를 가짐으로써, 맡겨주신 주님의 양떼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교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은 개혁주의 선배들이
교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별똥별 독해력에 문제가 있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요, 댓글목록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19:56교제 2012-01-18 17:36 [But the gift of hearing disappeared with the other miraculous powers 그렇지만 주께서 당분간만 나타나게 하셨던 다른 이적들처럼,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임시적인 은사인가, 아니면 그의 교회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ychoi408&logNo=50097082910 시대적으로 로만 카톨릭,재세례파를 모두 대적으로 보고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19:56thomas 2012-01-18 12:39 ((이제 치유는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다)) "사도들이 집행했던 <도유>는 이제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듯하다. 그런 사도들의 능력은 우리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로 쓰였습니다. http://www.ccel.org/ccel/calvin/institutes.toc.html <Therefore, even were we to grant that ANOINTING was a sacrament of those powers which were then administered by the hands of the apostles, it pertains not to us, to whom no such powers have been committed.> "도유" 또는 기름부음은 요즘 IHOP 신사도 날라리 사이비가 입에 번지르르하게 달고 다니는 그 뱀기름 anointing으로서, 그당시 카톨릭이 행한 다섯 가지 소위 "성례"라는 것들 중에서 "종부성사" 굿판에 등장하는 (1) 기름 (2) 기름부음 (3) 사제의 안수에 대한 칼빈의 비판 말미에 결론적으로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그 앞에 쓰인 말의 엉터리 인용: <But the gift of hearing disappeared with the other miraculous powers which the Lord was pleased to give for a time, that it might render the new preaching of the gospel for ever wonderful.> 뉴앙스가 상당히 다르죠? 그래서 앞뒤를 계속 읽어보았습니다. 그걸 찾으며 읽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주석에서 발견한 관련 내용의 일부입니다. 같은 19.6에 <It pleased the Lord that those visible and admirable gifts of the Holy Spirit, which he then poured out upon his people, should be administered and distributed by his apostles by the laying on of hands.>하면서 성령의 은사를 visible and admirable하다고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넘치도록 부어주신걸 주님께서 기뻐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또한 그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사도들의 안수에 의해 나누어지고 사도들에 의해 관리/집행되어져야 함을 주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말하면서, 사도직의 특수성을 도처에 언급합니다. 여기서 <안수>는 impartation이란 뜻이 아니고 세례를 할 때와 같은 일종의 상징적인 인증, 제스쳐.. 그런 것입니다. 칼빈시대의 카톨릭은 종부성사에서 <기름 자체>와 <기름부음의 행위>와 함께 동반되는 <사제의 안수>에 어떤 실체적 의미를 두었습니다. 요즘도 아픈 교우와 함께 개인적으로 기도하면서 손을 얹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그런거까진 괜찮을지 모르나, 그걸 가지고 자기 손을 통하여 어떤 능력이 전달된다고 착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당장 때려치시기 바랍니다. 그런거에 구체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딴짓하는 자들이 영지주의 전통에 있는 자들입니다. 칼빈은 이어서 (강요 IV.19.6) 이것 뿐만 아니라 기독교 강요 도처에서 성령의 역사에 관한 증거를 자세히 논증합니다.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로 알려져 왔습니다. (B. Warfield, "John Calvin the Theologian", in Calvin and Augustine) 칼빈은 그의 시대에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주어진(은사) 소명을 다한 그시대의 주님의 종입니다. 그 이전 시대에 한번도 <기독교 강요>와 같이 기독교인의 "체험"들을 건전하게 집대성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가 증거하는 크리스챤의 "체험"들 테두리 밖에서 신앙을 고백한다는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다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게 되어 있습니다. 365일 24시간 내내 철야 방언기도로 기름부음으로 좔좔대며 중언부언하고 구시렁대는 것보다, 주말에 한두시간씩 조용한 골방에서 <기독교 강요>를 찬찬히 읽으며 성경말씀을 상고하고 주님께 기도하며 옷깃을 여미는게, 주님께서 오늘날 당신의 백성들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며 기뻐하시는 성령님의 은사가 여기에도 임하기를 기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님의 뜻이 이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는 성령충만 아닐까 합니다. 여기 아멘넷에 보니까 제가 좋아하는 은퇴목사님이 이런 말을 옮기셨다고 합니다. ((칼빈이 제내바에서 종교개혁한다고 자기와 다른 사상릉 주장하는자를
13명 교수대로, 10명은 절두, 35명 화형시켰습니다. 이것 또한 전혀 facts가 아니며, 조작 왜곡된 악랄한 모함으로서, 예전에 holykang이란 사람이 비슷한 얘기를 해서 망신을 준 적이 있습니다. 정신나간 자들 외에도 알만한 분들이 이런 악의에 찬 낭설에 휩쓸려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데 사용한다는건 어처구니 없습니다. 이게 Servetus라는 사람과 관련된 아주 유명한 일인데, 최근에 발견된 칼빈의 편지를 차치하고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유일하게 칼빈이 사형집행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있지만, 카톨릭 신학자라도 위에 인용된 망발을 입에 담으며 칼빈을 비난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순히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걸 개신교인이라는 작자들이 없는 말을 지어내서 인터넷 상에서 옮기는걸 맞장구친다? 한국교회의 저열한 "영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칼빈의 고린도전서 주석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하는 모든 것에서 나오는 모든 선한 결과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주신 것이 아니면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잊어버리고서 자신들에게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칼빈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사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오류를 교정하려고 한다고 한다. 즉, “사랑에 대해 별 고려가 없든지 전혀 생각이 없이 과시와 겉치장으로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런 문제요 교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영적 은사들을 주신 이유는 “교회가 그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서로의 유익을 위해 그들이 서로를 돕도록,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형제들을 세우기 위한 것”,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라고 고린도전서 주해에서 말합니다.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19:57교제 2012-01-18 00:04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너희들에게는 또는 사도들에게는" 그러나 말씀의 반석위에 서서 행하고자 하는 신자들은 성경의 오늘날의 방언은 모두 귀신방언이다 라고 주장하는 질문님이 방언 은사들을 성경에 교훈된 바를 넘어서 필요이상으로 성도의 유일하고 참된 교과서인 성경으로, 여러 신학 이론이나 저는 시대적 현상을 통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입장이 아니라 별똥별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19:58별똥별 2012-01-17 00:26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영적 현상을 믿으면 안되고,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검증을 하되, 하나님의 음성으로 우리 속에 각인 시켜주시는 말씀이 주입될 때, 그 말씀이 설사 예언적 형태를 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성경 말씀을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경은 완성되어 우리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가감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천사라고 할지라도!! 게시판에도 올려두었지만, 다시 잠시 정리해 보면... 내가 지금까지 접한 동영상, 예언 글, 입신상태의 말, 치유사역, 금가루현상, 그리고 초자연적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등등…,이런 현상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의 상태도 모두가 다 똑 같다고 볼 수는 없는 것같고, 다음 몇가지의 다른 부류로 분류해 볼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1.부와 명예를 갈구하는 마음이 앞서 신앙양심을 팔아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희대의 종교사깃꾼들(이런 류는 과거 박태선씨, 현대 전주의 윤율리아, 그리고 벤틀리나 그 외에 두드러진 다수의 지도자 급) 2.다른 성도들보다는 자신이 뭔가 조금 더 하나님과 가깝고 신령하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착각 내지, 신앙 교만이 들어있는 일반 성도 및 직분 자들 3.‘샤머니즘’적 신앙, (무당 종교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월등히 많음.) 이런 사람들이 몸에 병이 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강한 육신의 소원이 있어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에 교회를 찾기는 했으나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일반 목회자들은 무능해 보여서 그런 것 같고, 눈을 두리번 거리다가 신령하다고 자처하는 강사나 집회자들의 사단의 하수인에게 꼬드김을 당해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성도들 4.자기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목사님들 중에도 말씀만 해석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어딘가 좀 딱딱해 보이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든 차,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현대판 바리새파라고 꼬드기는 말이 논리적으로 들리고 이에 더욱 높은 차원의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느끼는 지식인들, 이런 사람들로 나눌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러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접하고 본 자료들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같고 이런 사람들의 배후에는 미혹의 영인 사탄이 실제로 신비주의 자들의 요구를 조금씩 충족시켜 주는 방식, 영계가 보이는 듯,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금가루가 흩날리는 듯 보이게도 하고 하여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성도들의 대처 방법 1.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하거나 사사로이 풀지 말아야한다는 성경 말씀의 원칙을 무시하지 말 것 (계22:18_19절, 벧후1:20절 참조) 2.이적과 기사가 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님을 성경이 말씀했으니 그 말씀에 따라서 반드시 영을 다 믿지 말고 말씀을 토대로 검증할 것 (요1서4:1절 참조) 3.천국과 지옥도 성경에 있는 만큼만 믿고 그 이상 다른 이들의 입신체험을 성경권위 위에다 두지 말 것 4.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할 것 (요14:26절, 요15:26, 고전12:3절 등)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도와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이 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 됨을 인 쳐주시는 사역, 한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 누군가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싶으시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풀이할 때, 뜨거운 감동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눅24장32절 참조) 사이비지도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입신’이란 단어를 좋아하기도 하고 하늘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 그리고 땅을 제집 안방을 드나들 듯… 쉽게 왕래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보았다고 하고 들었다고 하는 말들을 간증의 형태로 올려진 것을 읽어 볼 때, 예수님의 마음보다는 어떤 특정인의 모습과 어떤 특정 교회를 올려주고 키워 주고 세워주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자체를 검증없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그 상태가 꼭 ‘입신’이다 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입신’이란 단어 자체는 이방 잡종교에서도 사용해 내려오는 단어로서 구태여 성도들이 도입해서 상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모든 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모두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잠긴 동산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은 필요없는 것이 되는 건가요?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 1)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write25&command=body&no=157&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19:59thomas 2012-01-16 23:10 ((한동안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치유의 은사는 다른 모든 칼빈이 이걸 그의 주석이나 다른 설교에서 말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에는 없는거 같습니다. 그 이유는 <치유> 또는 <병 고치는 은사>에 해당하는 gift(s) of healing을 healing으로 검색했을때 나오는 부분들을 살펴보면 위와 같은 언급이 없습니다. <...이 가운데서 두가지는 일시적인 것이며 길게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생략하겠다..> 이게 전부입니다. 거기 두가지 중의 하나가 <치유의 은사>입니다. 반면 4권 19장에 gift of healing이 몇번 나오는데, 중세의 카톨릭 제도에서 healing한다고 카톨릭 교회와 사제들이 <성례>를 빙자해 기름 팔아먹으며 사기를 많이 쳤습니다. 4권 19장의 제목이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입니다. 20절 초두에: 이밖에도 카톨릭 성례전의 허구를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기름..하니까 요즘도 사기치는 자들 생각나죠? 치유은사집회 한다며 기름부음이 어쩌구 하며 사기극을 벌이는 자들이 요즘도 횡행합니다. 이런게 한국(인)교회에 특히 심합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둘 때도 있습니다. 원래 라틴으로 쓰였고 불어로도 쓰였으니 원본을 원어로 검색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고침의 은사>는 원체 고유한 단어이기 때문에 정확할 것입니다. 이런거 하나 주해를 철저하게 학문적으로 붙인 한글 번역판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읽어본 사람도 없겠죠? 그걸 영어로 라틴어 원문으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쉽게 이해되는게 아닙니다. 이름아이콘 김성훈 2012-01-16 22:35 "제갈공명이 성경을 만났었더라면 어떠햇을까요? " 바람을 부리는 것처럼, 방언을 하는 '쇼'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판단력은,상황분석과 정보처리의 종합선물셋트 입니다. 시간 날때, 한 번 쓰겠습니다.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03thomas 2012-01-16 12:28 오늘 별똥별님 칼럼을 다시 읽어보니 아래 쓰셨던 내용이 칼럼 본문에 올라와 있고 덧붙인 내용이 있어서 몇가지 사실을 지적합니다.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 가르치지요> <성령의 인도가 없다고 가르친다>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 말씀에 의거한
체험> 문제는 그 "음성"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거지요. 그 음성이 성대가 뇌신경의 의지적 명령에 따라 신체 에너지에 의해 진동되고 혀/입/입술의 구조/모양에 따라 조절되어 공기분자를 진동시키며 longitudinal wave 형태로 에너지를 전달하여 그 파동이 듣는자의 고막을 같은 파장/주기로 진동시켜 "체험"정보가 축적된 뇌신경에 의해 해석되는 음성과 동일한 음성으로 자주 듣는다면 큰 문젭니다. 그게 일상적 음성이 아닌게 확실하지만, 그런 증상이 자주 발생하면 목사님이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서 상담해야 합니다. ***다음은 방언과 은사에 대해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온 말씀입니다. 자의적 해석에 의해 성경말씀이 왜곡됨을 사실적으로 지적하는 것이고, 무슨 "역사주의적 개혁주의"에 의한 주장이 아니니 성경에 나온 글자로 응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막16:17 <새 방언>=<새 방언> ≠ 영언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new tongues(νέες γλώσσες))란 말씀을 쓰지 않으셨고,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 혹은, 다른 방언 the other dialects(Οι άλλες διάλεκτοι)를 너희 믿는 자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ㄱ) 신약성서에는 dialects가 쓰이지 않았습니다. NASB같은데를 보면 사도행전 3곳에 dialect라고 나오지만 KJV에는 그것마져도 tongue라고 나옵니다. 오히려 διάλεκτω가 행2:6에 쓰이는데, 거기 <각각 자기의 방언>이라고 우리말 개정역에 뚜렷히 인쇄된 글자가 "외국어"를 뜻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지요? 그게 문제의 행2:4에 나오는 방언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행2:4의 <방언>=<다른 언어>=외국어 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ㄴ)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도 마찬가지로, 영어문법을 가지고 헬라어 단어를 끼워맞춘 이상한 헬라 단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παράξενη <--이게 아마 παρά[δο]ξενη의 δο를 빼먹은 듯한데, 그나마도 용법이 전혀 틀렸습니다. "파라독스"라는 말은 우리말에도 거의 고유명사처럼 됐지요? "역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중요한 말이고, 여기 또 댓글로 도배해야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장자의 글을 보면 이말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솝이야기의 토끼-거북이 얘기가 바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킬레스-톨토이즈 얘기 카피본으로서 파라독스에 관한 얘깁니다. 여하간 성경에 παράδοξοσ는 "contrary to the received opinion"이란 뜻으로, 눅5:26에 쓰일 때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는게 그걸 목격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개정) <신기한 일>(새번역) 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strange하다기 보다는 "기이하다", 즉 그당시 사람들에게는 더러 존재하는 사건에 대한 평범한 해석, 그러니까 중풍병자가 침맞고 굿하여 차도가 있는 듯~말듯한 경우는 가끔 있지만, 예수님이 행한 일은 그것들과 구별짓는 유니크한게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내용 외에도 예수님이 <예수께서...이르시되>하신 말투가 어쩌면 그들에게 더욱 오펜시브하게 들렸을겁니다. <주(יהוה)님이 말씀하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다> 이런 문장구조가 아주아주 중요한데 이건 다음에... 여하간 strange language같은 용법은 애당초 헬라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알려드립니다. (ㄷ) 고전14: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걸 새번역으로 보면 <tongue 혀>란 말이 나와서 또 방언을 공공연히 즐기는 사람들이 홀까닥 할 수 있겠죠? <율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방언[다른 말(난하주)]을 하는 사람의 혀와 딴 나라 사람의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은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여기 <율법에 기록된 바>는 이사야 28장 11절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개정) 고전14:21에 나온 <헤테로글로싸>를 <다른 방언>으로 번역하면서 <다른 나라 말>(사28:11)로 이해합니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서가 LXX에서 어떻게 쓰였고 히브류성서와 왜 다른가 문제삼기 시작하면 댓글이 정말 길어집니다. 저도 지겹습니다!^^* (ㄹ) 사실적으로 틀린 것보다 이런식의 논리가 더 문제입니다. (2) 사도행전 2:4 <다른 언어>(개정) <방언>(새번역) = <다른 언어> ≠ 영언/하늘비밀언어 자 여기 아무 의견 없으시죠? 문자적으로 성경적으로? (3) 행2:4에 나오는 "방언 말하기" 헬라어 본문은, "글로싸"가 "말한다"의 목적어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tongue라고 영어로 쓰였다고 묘한 느낌을 받지 말고, mother tongue(모국어)하지 않습니까? 옛날사람들의 표현방식의 차이로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말로 "혀를 놀린다"같은 표현이겠죠? 한편 고전 14장에 쓰인 <방언>이 행2:4이나 몇몇 장소에 나온 "외국어"라고 우기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고전에는 <방언>이란 단어가 "말하기"와 한덩어리같이 사용돼서, 이럴경우에 동일한 사용 례를 그때 당시의 문서들에서 찾아 참고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그때의 문서들에 그런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4) 흔히들 BDAG이라고 하지요? 보수적/진보적 가릴 것 없이 신약성서와 초대기독교 문서에 나오는 헬라어 Lexicon입니다. 거기 아주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지만 고전14에 등장하는 방언은 "an utterance outside the normal patterns of intelligible speech"하면서 관련 성구를 다룹니다. 거기도 언급되지만, 막16:17절과도 관련해서, 제가 두어번 말한 불트만의 강연집 Jesus Christ and Mythology(제목만 보아도 두드러기 나시죠?) 언급된 궁켈이 쓴 thomas 에고..(위에서 계속) The Influence of the Holy Spirit 이 책은 궁켈이란 사람이 쓴 성령의 은사에 대한 기념비적 연구입니다. 이것도 궁켈이란 이름 때문에 나무목사님께 야단 맞을지 몰라서, 그리고 몇년은 여기다 써대야 할테니 자제하겠습니다.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거 같은데 Weizsacker라는 분의 Das apostolische Zeitalter엔 좀더 많은 자료가 잘 정돈되었나 봅니다. 1/16 12:46 thomas 거기에 보면 본문비평을 떠나서 다소 이해하기 편한 역사적인 관련자료를 언급하며 헬라어 본문을
설명하며 언어학(성서?)적으로 마가복음에 나오는 <새 방언>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thomas 상당히 분명하게 설명한 성경구절들은 그대로 읽고 이해하는게 군자의 도리라고 생각해서 몇자 적었습니다.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07JuNick 2012-01-15 20:18 The Argument of 1 Corinthians 12-14 성경 어디에서도 사도 시대의 기적이 그 후의 시대에도 계속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기적을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 전체를 통틀어서 성령과 관계된 신자를 향한 명령은 오직 다섯 부분만 있을 뿐입니다. 은사는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방언 안 받아도 괜찮습니다. '성령으로(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방언으로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기도한다면 하나님도 이해 못하실 것이 뻔합니다. 성령은 때 쓴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기적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세에는 사단이 일어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이 있음을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제 저는 <다 방언 말하는 자겠느냐>는 말씀으로 교제 성경은 그 어디에도 사도시대 일어난 표적,이적이 교제 사단의 역사를 따라 나오는 것은 능력과 표적과 교제 견해차이로 가족과 아무리 치열한 변론을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08교제 2012-01-15 18:08 ->같은 논리가 은사지속론자들에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비성경적인 은사주의나 비 성경적인 은사중단주의나 교회에 아멘넷에서 [방언중단론--방언귀신론]을 주장하는 질문님 은사주의 잡는다고 성령의 은사받아 잘 활용하는 성도들의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모든 성도에게 특별히 사모하라고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모든 성도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사단의 미혹은 어느 한 방향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니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09thomas 2012-01-15 15:50 개신교의 은사는 (1) 성령-주(그리스도)-(성부)하나님 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고, 그걸 선물(은사 gifts)로 거저 받으며 (2)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표현하는걸 특징으로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그리고 그게 (3) <공공 이익>에 봉사하는 일(직분/직업/일상생활)이라는 시금석을 통해 가늠된다고 했습니다. 은사/선물/은혜를 칼빈의 말을 빌어 설명하면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이게 성령님을 effectually resisted 할 수 있다는 (불건전하지 않은)아르미니안주의에 반하는 The Efficacious Call of the Spirit 또는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를 말한 개혁주의 <은사>관 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개혁교회와 은사는 서로 상충되는게 아닙니다. 이건 불건전하지 않은(저의 표현) 또는 "heart"가 아르미니안주의(Alan P. F. Sell의 표현, The Great Debate: Calvinism, Arminianism, and Salvation, 1983)인 기독교인들 보다 훨씬 강한 <은사>에 관한 선언입니다. 개혁주의자는 이 세상이 창조된 첫날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그날까지 은사로 태어나서 은사로 살며 은사로 세상을 정복하다가 은사로 죽어 주님을 맞이하는 은사주의자입니다! heart가 아르미니우스라는건 head가 아르미니안주의인 semi-펠라기우스와 구별하려고 붙인 이름입니다. 오순절교의 신학자인 Roger E. Olson <Arminian Theology: Myths and Realities>이란 책에 나온 표현인데, 이걸 읽고 저는 오순절교회 신학의 긍정적인 면, 그러니까 펠라기우스적이고 head펠라기우스인 아르미니안니즘을 분리해서 웨슬레가 의도한 "마음이 아르미니우스"적인 "거룩함 추구" 또는 perfection thingies로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개혁주의 은사론의 문제는, 소위 칭의-성화-영화..등등으로 세분한 총체적 구원론에서 예수믿는다는 자의 꼬라지가 전혀 아니올시다..하니 그의 구원을 철석같이 담보한다는 칼빈의 이론에 의문을 던지는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화같은 거룩함 같은걸 어떻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교화(edify)하느냐..하는 측면에서 <은사> 등을 포함한 다소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된 인간의 <호응>을 강조하다보니, 한편으로 오감을 통해 감지되는 어떤 성화의 "증거"를 <모조>하는 껍데기 "표적" "계시"로서 방언같은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도 소위 보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목사들이 비대교회가 되어가지곤 자식들에게 교권을 물리고 방자한 삶을 살면서 부패하니까 그들이 표방한 신학이 쓰레기 취급을 받는거겠죠. 이들이 형편없는 목사이며 개혁신학의 ㄱ 도 이해하지 못한 head fake 직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한데 거룩함의 perfection을 추구하는 감리교를 보면 더 어처구니없을 때도 있습니다? 여기 아멘넷에도 크게 사진에 난 자는 딴짓하는데 perfection이지요? 은사와 거룩함의 perfection을 근본으로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개혁주의가 한국에서 아주아주 형편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걸 저는 아멘넷을 통해 실감했습니다. 그렇다고 조용기 목사를 필두로 하용조 목사와 그 잔챙들이 펼치는 방언과 각종 "은사" performance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은사라고 믿지 않습니다. ...자이언츠 풋볼 보고 (이걸 여러 사람과 같이 보면 이웃들간에 소통하시는 성령님이 주신 사랑이 흘러넘칠 수도..ㅋㅋ) 내일 계속합시다! Let's Go Giants!! 이름아이콘 thomas 2012-01-15 09:58 교제님 글을 대할 때마다 제가 평소에 생각지 못한 여러 측면을 지적해주셔서 늘 돌아보아 배우고 성숙하게 하시는 성령님 은사의 풍성함에 거하게 하시는거 같습니다! 학하야 시로 습하면 또한 열홉디아니랴! ㅎㅎ (1) ((성경적인 분류를 간과하고 신학적으로 그렇게 분류를 하시며 ((성경에 열거된 은사(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은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1.직임적 은사 2.역사적 은사))는 고전 12:4-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아마 그 구절은 은사의 분류법이라기 보다 오히려 성령-주(그리스도)-(성부)하나님으로 쓴 <성령의 은사>에 대한 "삼위일체적" 표현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성경에 나오는 은사의 나열을 보면 은사-성령 직분-그리스도라는 고전12:4-의 대조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고전7:7에서 결혼(독신)을 은사라는 다소 엉뚱한 지적은 차치하더라도, 고전12:28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27절)이라는 전제하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하면서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나옵니다. 그런데 <능력을 행하는 者>는 직분者 같은 뉴앙스를 주는데 바로 뒤에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하며 <돕는 것 (집사-봉사의 직분) 다스리는 것 (장로/목사의 직분??)>과 함께 직분과 연관이 가장 먼듯할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나왔습니다. 여기 나오는 <방언>은 행전2:4 우리말 성경 난하주에 나온 방언, 그러니까 교회가 보편적--사도신경에 나오는 <공회>라는 뜻으로 저는 사용하겠습니다. 이를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쓰이지 않았더라도!--으로 <다른 방언>이라기 보다 고전14:2에 나온 <입신 상태에서 상태에서 하는 알수 없는 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전12:28-에 연이어서 29, 30절에 사도 선지자 교사의 "직분"을 열거하면서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방언을 말하는 者...통역하는 者...>라며 "직임적 은사者"라고 이해할 수 있는 언급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분류를 간과하고 신학적으로 그렇게 분류를 (2) 방언이 "표적적"인 기능과 함께 "계시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는 말은 어떤 방언을 통변한 내용이 어떤 예언적 계시를 담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방언을 동반한 "예언"에 따른 각종 현란한 현상 자체가 계시가 임한 표적이라는 해석 때문입니다. 흔한 논란 중 하나는 요엘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같은 말씀을 들어 <<오늘날>>도 <장래 일을 말할 것..꿈을 꾸며..이상을 볼 것..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사역)>을 방언/예언 <은사>를 받아 시연할 수 있는 <者>로서, "방언 직임者"로서, 동시에 사도적/예언자적 권위를 "표적"하며 "계시"하는 예언/방언 은사를 시현해 보인다는 말입니다. 교회 갔다와서 계속합시다~^^* thomas 아 참고로, 한인 성도들이 특히 부족한 성서이해 중 하나는, 예를 들어 엡4장에 <사도로 [주셨고]..선지자로 [주셨고]..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주셨으니]>다고 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thomas 결혼(독신)의 은사도 주면 받을만한 사도직분자 바울에게 성령-그리스도-성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1/15 10:19 thomas
신약성서에 나열된 은사들 중 <지금> 뭔지 모르는, 또는 참된 그 은사의 구체적 실체를 모르는. 또는 "중단"된 진짜 은사라 하더라도, <은사>의 근본적인 특징은 <주어진다>는데 있습니다. 그럴땐 누가 주었냐? 하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thomas
은사가 gifts지요? 그걸 특징짓는, 또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건 (1) 그게 무엇이든 성부-성자-성령 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는가 (2) 그게 gifts라는건 거저주어졌다 또는 은혜이다..이겁니다. thomas 그래서 직임적
은사가 아니라 할지라도(성서에는 명확한 구분 없이 나열되었고, 누가 <주었다>라는것과 그게 주는자의 <은혜>다 라는게 성서적 분별법이라 다시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지는 어떤 특별한 표적/기적/이사 등을 "반복적"으로 시현할때 그 수혜자 또는 퍼포먼스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상당히 "직접적"인 표적을 계시하는 멧신저가 되는겁니다. 교제 역사주의적
개혁주의 은사관에 입각한 분들은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10교제 2012-01-15 07:58 [성령의 역사(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하실땐 성령님이 하시는 ->"성령의 나타남"에 대한 성경(개역/NIV/KJV/NASB)말씀을 보면 <또 역사(working/operations/effects)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manifestation-나타남,표시,표현 ,현시 성령의
manifestation의 의미를 성령의 사역과 연관지어 "계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모세율법 얘기가 무슨 연관이 있나 아리송하지만^^] ->모세오경도 광의적 측면에서는 율법(토라)으로 간주되나 [ 은사를 논할 때 "계시-표적-교회"라는 관점은 전통적인 ->성령의 "나타남"과 성령의 "사역,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역사주의적 개혁주의에 따른 전통적인 신학의 관점, 기존의 방언은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위 성경말씀에도 설명되었듯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전달한 주의 계시(하나님의 말씀)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그 영으로 말하는 기도, 찬미이고, [성경에 나열된 은사들은 "계시"와 "표적"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에 열거된 은사(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은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일에 필요한 직임자를 불러 성경적인 분류를 간과하고 신학적으로 그렇게 분류를 [그리고 "계시"라는 특성이 사도/선지자의 직분에 포함되었을 ->그 판도라 상자에 "계시"라는 특성은 사도 선지자로 세움받은 이미 언급했듯 직통계시를 받아서 사도적 사역을 한다는 은사중단론자의 신학적 이해와 달리 저는 사도 선지자 만약 나무님이나 토마스님이 방언과 방언통역 예언의 은사를 방언,통역,예언은사를 성경의 교훈을 순전히 받아 건덕적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10thomas 2012-01-14 18:23 (아 얼듯 보니까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새번역 성서에 사도행전 2:4 <방언> 난하주에 <다른 언어>라고 쓰였고 고린도전서 12:10, 14:2의 난하주에는 <입신 상태에서 하는 알수 없는 말>이라고 나왔군요.) "다른 언어"나 "알수 없는 말"이나 성경말씀에 나온 이런 언어가 담고 있는 실체가 오늘날 구체적으로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것들도 있으니 예수믿는 사람답게 일단 자세를 가다듬고 사리판단을 하며 신중했으면 좋겠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14:4)에서 <덕을 세우다>라는 말이 영어로 edify (교화하다)라고 쓰였는데, 이게 건축물 짓는데 쓰이기도 해서 <덕>이라는 내용이 생긴다기 보다, 그 사람 또는 그가 속한 집단으로서의 교회가 오합지졸이 아니라 기초가 든든하고 기둥과 벽이 견고하며 성숙한 모습을 한 결사체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우리 전통도덕에서는 덕을 크게 숭상하기 때문에 덕의 "내용"을 쌓을려는 경향이 있지만, 여기 이말은 덕스런 사람의 위용같은걸 말합니다. 한편 베드로후서에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에 나오는 덕은 어떤 "남성적인 용기" 같은걸 말합니다. 우리식으로는 절제 인내 형제사랑이 덕에 다 들어 있지 않습니까? 덕이 있는 사람은 이미 인내와 절제를 아는 사람이지요? 여기서는 믿음을 옹호하는 어떤 분연히 일어섬, 아직 인내 절제까지 안갔으니^^ 다소 무모하더라도 용감하게 믿음을 변호하는 덕을 말합니다. 여하간 방언을 하는 사람이 나름대로 edify하여 내공이 강해져서 마방파를 쏘거나 권두운을 타고 공중부양을 하면서 우랑바리다라나~ 하는 "덕"을 나름대로 쌓는걸 누가 말립니까? 그게 고전 14장 말미에 사도바울이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라는 뜻이 아닙니까?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는 사람>이 공동 이익, 그러니까 주님께서 주신 봉사의 직분을 바로 감당하는 충성된 종입니다. 개혁교회가 말하는 참된 직분과 은사는, 뭔가 안달내고 닥달해서 용한 자에게 받아다가 대박터트리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각종 사역이라 해서 교인들 취미사회생활하는 소박한 자기만족의 은신처/피신처에 자리매김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 자식이 이번 겨울에 와서 그러더군요. 신사도/뉴에이지 같은 기독교는 Facebook 신앙이라고. 자기와 자기 동아리에서 소소한 자기과시와 자기만족을 위해 나름대로 테두리를 정해놓고 상대방이 귀찮게하지 않는 범위에서 적당히 끼리끼리 관심을 보이고 자기들끼리 통하는 미친짓도 해가며 동변상린하고 노닥거리며 이해관계를 추구하는거와 같다고. <병 고치는 은사>가 횡행해서 치유집회에 가서 고질병이 완치되고 소아마비가 일어나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단번에 일어나는 것도 좋지만, 개혁신앙이란 오랜 인내와 연단의 시공간 속에 펼쳐지는 지루하고 별 차도없는 듯한 평범하지만 치열한 struggle 아닙니까? 이게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직분을 수행하는 자의 충만함 아니가요? 병리학자가 되어서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여 모든 어린이들에게 보급하여 오늘날 한국이나 선진국에 소아마비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신앙인들이 평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추구하는 하나님의 일이며, 이경우는 일의 성과가 있게된 덕스럽고 복된 일이 아닙니까?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개발도상국의 정치가로서 사회운동가로서 학교선생님으로서 필요한 재정을 예산수립하고 효과적으로 집행해서 벽지의 산촌 어린이들까지 예방접종을 성실하게 시키는 사회 제도를 구축하는 일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성령님이 주신 은사를 공동이익을 위해 올바로 사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참된 은사가 아닙니까? 이걸 평생걸쳐 하는게, 뭐 대단한 손바닥 마방파로 존귀한 사람을 뒤로 자빠뜨리며 각종 사기행각을 벌건대낮에 벌이는 은사광들의 대단한 내공보다 귀하지 않습니까? 사실 진짜 예수믿는 성령충만함은 이런 은사와 직분의 좌절 가운데 있습니다. 개혁신앙이 말하는 은사가, 개혁교회에서 예수 믿는게 뭐 무슨기도하고 방언하며 안수한다며 손가지고 함부로 존귀한 인간에게 들이대는 경거망동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 주님이 부르신 소망 가운데서, 성령님이 주신 은사와 주님 그리스도께서 주신 직분이 삐꺽거리는거 같다 할지라도 그때 한없는 추락으로 모든 삶의 기반이 무너진 듯한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진실로 의지하게 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이지 않습니까? 갖가지 공공의 부조리와 삶의 절망으로 가장 처참한 지경에 처했을 때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공공 이익>을 위해 교회를 순결한 결사체로 단결하게 하는 평생동안의 일상적인 품위 있고 질서 있는 헌신으로 은사와 직분의 실패에서 하나님을 만나는게 그게 제가 체험한 개혁신앙입니다! 이름아이콘 thomas 2012-01-14 14:35 좀 늦었습니다. 장도 보고 집안 청소도 하느라..ㅎㅎ 성도는 모두 은사자요 직분자라는 교제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모세율법 얘기가 무슨 연관이 있나 아리송하지만^^ 그 다음에 언급하신 은사와 직분(고전12:4,5)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신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얘기하려는 문제의 발단이 고린도전서와 관련되어서, 이경우 ((성령의 역사(성령의 나타남)와 관계된 은사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지적도 옳다고 생각해서 저도 이 ((성령의 역사))에 촛점을 맞추겠습니다. 한편, 논의의 촛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몇가지를 짚고 넘어갈게 있습니다. (1) 사람들이 흔히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데, 여기서 "役事"라는 말과 흔히 쓰이는 "사역(使役)"이라는 말이 어떻게 다른가 알아보고, 그걸 혼동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그 뜻과 용도가 모호하다는걸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건 나무님이 지적하신 계시-표적-교회론적인 측면과도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정리하고 싶습니다. (ㄱ) ((성령의 역사(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하실땐 성령님이 하시는 일(事)의 기능이 "계시적(나타남)"인 특성이 있다는 말이시지요? "사역"이란 말은 "남을 부려 일을 시킨다"는 뜻으로 성령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은사"라는걸 줘서 그걸 받은 사람을 부려 일을 시킨다라는 뜻일겁니다. 나무님이 "계시"를 말씀하실땐 은사의 "기능"이랄까..교제님이 ((나타남))으로 이해하신 성령님의 작용의 한 특성을 뜻하신 것으로 저는 이해했고, 그게 일반적인 신학적 접근방식입니다. 성경에 나열된 은사들은 "계시"와 "표적"이라는 관점에서 그 은사의 기능/작용을 분류하여 경우에 따라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령 <병 고치는 은사>는 "표적"적인 특징이 많겠지만 그걸 통한 "계시"적인 해석이 따를 수도 있겠지요. 반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예언함> 등은 "계시"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교회론"적 관점에서는 <지혜/지식의 말씀> <믿음> 같은 은사들이 두드러지겠는데 로마서에 나온 <가르치고 권위하고 구제하고 다스리는> 은사들은 직분들과 함께 단연 "교회론"적 특징을 가졌습니다. ((성령의 은사의 목록에 계시가 따로 없는 이유는 계시가 그리고 "계시"라는 특성이 사도/선지자의 직분에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은사들>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중에 어떤걸 열어주면 판도라상자를 열게되어서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까지 나아가는 문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나무목사님의 지적은 옳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방언이 어쩌구 하는건 문제의 심각성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고, "자기의 부조리한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정당화할 우려도 있다는 말입니다. "은사중단"이라는 말은 "개떡같이 얘기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는 소립니다. 은사중단이라는 말은 은사주의를 경계하는 말로서, 은사주의는 은사중단보다 해악이 훨씬 크구요 그 파국적 결과는 은사중단이 주는 부작용과 비교가 안됩니다. 피터 와그너 같은 사람이 이걸 간파해서 나름대로 치밀하게 주장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사도와 선지자로 가려는 노림수를 미연에 차단하자는 것입니다. (ㄴ) 성령-역사가 함께 나오는 구절은 개역한글 로마서15:18뿐입니다. 개역 한글과 개정이 상당히 다르게 번역된 곳 중의 하나인데, 개역한글은 18절에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으로 나오지만 개정에는 19절에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뤄졌으며]>라고 되었습니다. 개정이 문장구조와 더불어 원래 뜻을 정확히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개정에 [이루어졌으며]는 조그만 글자로 쓰였는데, 원문에는 없는 말로서 [unknown] tongue와 같은 용도입니다. 그러니 ((역사))라는 말은 첨가된 말입니다. (ㄷ) 고전 12:4-를 자세히 보면, <<은사--성령, (봉사)직분--주(그리스도), 사역(일의 성과)--하나님>> 구도 입니다.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개정)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새번역)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직분을 보면 4:7에 <그리스도의 선물>이라 하고, 그 선물을,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같은데선 <은사>를, 분량에 따라서 은사/선물의 원뜻인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와 같이 "직분 은사"를 <주시는> 분은 주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준다>라는 헬라어는 반복되어 중요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주셨고],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주셨고],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주셨고],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고전12장의 <직분>이란 말은 새번역에서는 <섬김을 받으시는>라고 했습니다. 여기 직분이 <집사>라는 말의 어원과도 동일해서 <크고자 하거는 남을 섬기라>할 때와 같이 섬긴다는 뜻으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김으로써 은사와 직분의 궁극적인 존재이유인 <모든 사람을...유익하게 하려함(공동 이익을 위한)>(고전12:7)입니다. (ㄹ) 고전 12장에 <사역은 여러가지나...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사역"이라는 말이 한국교회의 유행어가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이것저것 사역이라 하며 일을 잔뜩 벌려서 이사람저사람 마구잡이로 시키니 "크고싶은 사람" "고급인력"이라며 설치는 사역자들로 엉망입니다. (2) 교제님께서 "덕을 세운다"는 측면에서 은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는데 저도 찬성입니다. 저는 그걸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고전12:7)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로 받겠습니다.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11thomas 2012-01-13 23:24 님의 간증을 읽어보니 아래 JuNick님이 달아주신 싸이트에 나온거랑 별로 다른게 없습니다. 중간중간에 보면 잠긴동산님 얘기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것도 있네요? 기왕에 다음에 또 카피하실땐 거기 나온 사례도 카피하시기 바랍니다. ㅎㅎㅎ 아 그리고 자칭타칭 "크신분에다 고급인력"이신 여야님 또는 잠긴동산님, 뭐가 큰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말이라고 옮기는 님이나 그렇다고 하는 잠긴동산님 교회나 좀 그렇군요... ((이선님의 방언
이해에..)) 잠긴동산 오늘 새벽찬송 찬 532장 마지막 가사 잠긴동산 "자칭타칭" 자랑이 될수도 있겠다? 접수 합니다. 이름아이콘 잠긴동산 2012-01-13
22:42 " <방언>하는 사람이 있고, 방언이 그 사람의 신앙에 유익이 된다는걸 인정하는 것은 저로서는 큰 변화입니다. 한편 그걸 더 큰 테두리 내에서(카리스마타) 소화시킬 기회가 주어진 점, 주님께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 교제님은 제가 방언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하셨는데, 맞습니다. 이민 와서 신앙생활 하며 은혜를 깨닳은 이후 나의 행동반경은 교회, 가정, 직장 삼각지대를 벗어나 본일이 없습니다. 교회 중심적인 생활이지요. 당연히 수십년을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뒤로 잠그고 나오는 그러한 신앙생활로 모든 공예배와 부흥회, 특별집회의 현장에 제가 있습니다. 여야는 당연히 sanctuary 예배준비와 뒷정돈까지 담당 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세례 받고 기뻐 어쩔줄 몰라하는 여러 성도님들 수없이 보아 왔습니다. 1. 그 중에는 한국에서 갓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유학생활로 미국으로 와서 10년동안 공부하며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 부부박사 학위에다, 아들 딸 낳고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 부부가 성령세례 받고 금의환향하는 복된 성도의 귀환을 여럿 보아 왔습니다. 성령세례 받고 기뻐서 얼굴에 홍조를 뛰며(신부의 얼굴에 연지 곤지 발라야만 있을법한 그런 홍조) 기뻐하는 모습, 자신이 처음 성령세례 받을 때의 담담하던 기쁨보다도 더한 기쁨으로 다가오곤 하던 기쁨, 세상에서는 맛볼수 없는 그런 기쁨 입니다. 2. 친한친구 사이에 성령세례에 대하여 공부한 이후, 부흥회에서, 한 자매는 성령세례 받고, 다른 자매는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예배 후 성전에서 대성통곡을 하게 됩니다, 이를 아시게 된 목사님이“모든 죄를 자복하라 하며 안수를 합니다. 그 자매“주님! 잘못 했습니다. 주님! 잘못 했습니다”하며 째지는 듯한 절규의 자복이 있자, 그 자매의 입에서 따라락 하며 금속성 같은 소리로 방언이 터져 나올 때의 그 모습이 선합니다. 그 두 자매의 남편들은 한전에서 wasting house에 파견 나와있는 engineers 님들. 여야는 그 이후로 죄를 자복할 때 성령세례를 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고, 집회 후에도 나타나는 성령님의 민감한 역사를 놓치지 않으려 끝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3. 이미 주님 품에 안기신 김종기 목사님은 목사가 된지 7년이 되기까지도 성령세례를 못 받고 방언을 할줄 몰랐다고 합니다. 성령세례을 간절히 사모하며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서 별을 세며 기도를 해도 방언을 안 주시더랍니다. 오순절 교회의 목사이기에 얼마나 더 간절 했겠나 짐작이 가는 대목 입니다. 그런데 주일 날에 흑인아이 하나가 성전에서 슬피 울고 있더랍니다. 아이가 슬피 우는 것이 어찌나 불쌍한지 그 아이를 껴 앉고 같이 기도하는데, 그리도 간절히 사모하던 방언이 갑자기 터지게 되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4.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해 성도들 섬기기를 즐겨 하는 여 집사님, 목사님과 면담을 하는데 목사님이 “집사님은 음식으로 섬기기를 좋아하는데 그 섬김이 주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지 않고 자신의 기쁨을 위해 하기 때문 입니다. ? 아니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할수 일이라고는 음식 만드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없기에 부엌에서 헌신하는데 목사님은 그것도 모르시고 야단만 치시다니, 분하고 억울하고 속상해서 예배실에서 기도 합니다. 독이 올라 주님께 하소연하며 기도를 하는데, 하고자 하는 기도는 안 나오고 말이 꼬이며 바라지도 않던 방언, 성령세례를 받음. 5.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는 감사의 눈물로 밤낮을 지새는 집사님, 성찬예식에서 반주자의 때롱하고 시작하는 반주에 맞추어 성령님께서 눈물 button을 누르셨는지, 동시에 눈물이 펑 쏟아지며 주체할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성찬위원으로 떡과 잔을 돌리던 집사, 그 후에 성령이란 단어에 눈을 뜨게 되고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가족수련회에서 방언 받기 원하면 앞으로 나오라 초청 합니다. 일착으로 앞으로 나가 산 땅바닥에 무릎 끓고 기도를 한다. 강사목사님, 성령님이 임하실텐데 모두들 죄를 회개하라고 외친다. 집사님 모든 죄를 자복하며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나는 잘못까지도 낱낱이 고백하며 회개 한다. 안수하며 무엇을 원하느냐는? 강사목사의 질문에.“방언을 원 합니다” 큰소리로 답해 외치며, 할렐루야를 외친다, 계속되는 할렐루야가 이상한 소리로 꼬이며 알지 못하던 소리로 기도한다. 사모하던 방언, 성령세례의 순간이다. 그 도시 교계에 급뉴스, 여야(잠긴동산) 집사가 요~오~란하게도 성령세례를 받았다더라. 여러 말로 방언 받은 예들을 열거함은, 은혜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에게, 주시고마 약속하신 성령세례의 역사를 나타내고자 함 입니다. 여야 집사, 방언 허락하심을 감사함으로 새벽기도, 부흥회 때 열심으로 사용하던 중. 10여년 동안 사용하던 랄랄랄 방언, 한 순간 거두어 가시고 새로운 방언을 주셨는데, 순전한 각종 언어 방언 이다. 금요예배에서, 당시 가장 사모하던 말씀이 본문으로 선포되는 순간, 내 심장은 쿵쾅되며 온 몸에 전율이 온다. 예배후에 기도 시간이다, 자신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이 억제 당하여, 성령님께 붙잡힌 듯한 상태로 기도를 한다, 평소 같으면 기도한지 얼마 후 시간이 지나서 깊은 기도에 들어 갔을 때에야 나오던 방언이, 기도 시작과 동시에 컨트롤 할수 없는 언어로 나온다, 마치 audio cassette tape이 뒤집혀서 돌아갈 때 들리는 소리와 동일하다. 이렇게 새로운 방언을 받게 되었다. 별똥별 저는 가짜가 있으면 진짜가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가짜 방언이 저토록 활발하다는 것, 사단이 흉내를 낸다는 것, 그것은 반드시, 비록 극소수일지라도 성령님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있기에 그 부분을 흐리게 하려고 극성을 부리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여, 영적인 일은 주님의 영으로라야 깨달을 수 있는 법,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과 검증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잠긴동산님께서도 사단의 방언을 흉내내거나 강조하거나 거짓으로 자신을 우상화 시키는 삯군들을 분별하시는 분별의 은사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야님의 변화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keep it up~! 1/13 22:57 잠긴동산 "알지못하는 신" 에게 경배하는 곳에 사탄이 끼어들어 속이는 영적인 행위 존재 합니다. 사모님은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가짜 은사자들을 만나시는지요.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중에 몇%의 가짜 방언하는 성도가 교회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잠긴동산 채워져 있어 사단의 역사가 횡횡하는 틈을 보이지 않는다 말씀 들리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은사론으로 정립된 은사자들이기에 사단의 졸개로 부터 영향을 받는일이 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베레아파들은 귀신을 ㅤㅉㅗㅈ아내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한다지만 하성에서는 선하신 성령님의 역사에 순종하며 따르는 교단이기에 이단에 빠지는 일이 염려하시는 것보다 흔하지 않습니다. 아멘넷을 접촉하고서야 횡횡하는 이단의 역사를 알 정도로 제 주위에서는 전혀 볼수가 없습니다. 별똥별 저는 정통 개혁교 출신인 것 아시죠? ㅎㅎㅎ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12교제 2012-01-13 17:49 그런데 은사가 아니라 직임이라고 하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먼저 [모든 은사자가 직임자인 것은 아닙니다]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가지나 주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위의 네 구절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것, 가르치는 것,서도 돕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
광의적으로는 모세 오경 전체를 율법으로 간주하나 일반적으로 이와 마찬가지로 은사(gift)는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니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어떤 존 맥아더나 개핀 같은 은사중지론 입장에 있는 신학자들조차도 그렇기에 제가 별똥별님의 이전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만약 은사중단주의가 건물의 터가 되고 터를 닦는 사역, 곧
계시의 종결과 완성을 선언하며 그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 *성령의 은사의 목록에 계시가 따로 없는 이유는 계시가 *성경은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움을 받은 성도들에게 긴 글을 정리하자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모퉁이 돌이 되신 하나님의 이런 복잡한 변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며 지루해 하는 이름아이콘 thomas 2012-01-13 12:27 저 밑에 나무님이 "은사와 직임"과의 관계를 언급하신걸 읽었을때 아! 싶었습니다. 전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건데, 그걸 나누어서 그 사이의 연관성을 따져보면 문제가 좀 더 분명해지겠다 싶었습니다. 교제님이 "은사 중단"을 "직임 중단"으로 해보는게 어떻냐고 하시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인데, 예를 들면 <삼위일체>같은 논의에서도 "인격"이란 말보다 "신격"이란 말이 적합하다...같은 제안입니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는 "직임"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지만, <방언>을 수행하는 "직임"이 성서에 없기 때문에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드는거 같습니다. 그리고 나무님께서 ((계시적인 측면과 표적적인 측면과 교회론적인 측면))을 언급하신걸 읽으며 정신이 번쩍들었는데 역시 목사님이시구나..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목사님께서 언급한 교회론적인 측면 중에 "교회사적인 후면"을 예로 들어서 문제의 복잡한 상황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피차간에 눈높이/차원을 맞추어서 대상을 설정하고 서로다른 가정과 대상을 조정하여 같은 평면에서 예언과 방언을 논함으로써 논의가 엊나가는걸 피해보고자 합니다. 클레멘트(로마), 순교자 저스틴, 이그네시우스(순교자), 폴리캅(순교자) 등이 쓴 서신들과,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등이 쓴 anti-이단서들, 그리고 디다케 같은 2세기 문서들, 또한 그 뒤를 이은 오리겐, 아타나시우스, 유세비우스(가이샤랴) 등이 기록한 설교(주석?), 편지, 역사서 등은 사도행전 바로 뒤에 따라오는 교회사를 연구하기 위한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사료들입니다. 이들의 남긴 글과 함께 요세푸스의 각종 역사서나 그리스로마 신화영웅전 등과 함께 로마제국이 남긴 각종 행정 문서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요즘엔 이집트(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 사용한 콥틱이라든지, 소크라테스와 그 이전 시대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마르크스가 학위논문으로 삼은 철학자) 등의 고대 희랍어 등 뿐만 아니라, 시리아 지방언어 시리악, 아르메니아 지방언어 등으로 번역된 초기(1~4세기) 신약성서들과 기독교관련 자료들, 또한 쿰란에서 발굴된 사해사본(대부분 히브리어)도 더하여 도데체 성서에 나타난 <말>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걸 연구해 놓은 귀중한 자료가 많습니다. 지난해 한국에서 뿌리깊은 나무라는 사극이 인기를 끌었나본데, 아시다시피 한글도 지난 500년간 변화가 심해서 쓰는건 물론이요 발음 자체도 상당한 미지수인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휘>에 있어서, 가령 논어 맹자에 나온 한자를 소릿말 한글로 어떻게 읽고 썼는지 제대로 정리되고 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뜻은 둘째로 하고... 율곡 이이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쓰고 소리내지 않고 훈하기를, <ㅎ.ㄱ ㅎ.야 시로 습ㅎ.면 ㅅㄷㅗ ㅎ.ㄴ 열홉디아니랴> (. -->ㅏ)했답니다. 일본의 오규 소라이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를 일본말 훈으로 읽는다고 하여(일본글은 이렇게 읽는 습관 때문에 고어의 뜻을 알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할 때가 많습니다) 그게 공자가 원래 뜻한 바를 말하는게 아니라는 <근대적>인 발상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자의 논어 해석이 불교 철학이 들어간 이원론적해석으로서 주자가 살았던 시대의 의미를 반영한 해석이지 공자 자신이 공자시대에 말하고자한게 아니라는 전제로 일본의 <근대>를 열었습니다. 물론 공자시대라 할지라도 공자의 글을 <기록>한 당시의 공자상을 그린 것이라는 말입니다. 공자 자신의 참뜻은 오히려 공자가 직접 쓴 <춘추>를 연구하여 공자시대의 풍습을 먼저 고증하고 논어의 뜻을 해석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후에 정약용에 의해 전통적인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해 보지만, 소라이처럼 전일본의 학문을 새롭게하여 권력자를 도와 정치에까지 적용하지 못한 한낱 귀향살이하다 죽은 소수파로 끝쳤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자기나라의 귀한 보배조차 제대로 집대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여하간 그 "방언"이 요 "방언"이 아니며 한국교회에서 하는 고놈의 "방언"과는 또 다를 수도 있음을 명심하십시요.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한자로 기록된 신라 향가를 한글로 해석한 양주동 박사를 기억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게 일제시대에 한 일본의 젊은 학자가 신라향가를 연구하여 처음으로 그 뜻을 밝힙니다. 그걸로 그는 당시 전일본(조선 만주 포함) 최고의 학자상을 받습니다. 하루는 양주동 박사가 똥투깐에서 그 기사를 읽으며 식민지배자 왜놈이 조선민족의 보물인 향가를 해석해내는데 조선인은 뭘하고 있는가..하며 울분에 차서 그날로 평양에 사는 누구를 발로 걸어 찾아가 관련 책을 얻어다가 연구하여 그 일본인 학자를 누르는 향가해석을 내놓게 됩니다... 지금도 양주동 박사가 남긴 해석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걸 보면 그가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보다 한국의 학자들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더 듭니다. 한번 어떻게 양주동 박사가 "얄리얄라 얄라셩~"같은 방언을 통변했나 그가 쓴 글을 읽어보고 그나마 그 설명이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 한번 각자 자신의 한글 실력을 점검해 보시기를!ㅎㅎ 조선왕조실록을 한글로 완간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을걸로 아는데(북한은 훨씬 전에 완간했습니다) 아직도 거기에 나온 관직이나 명령등 모르는 내용이 부지기수입니다. 요지는, 1000년전 제나라 말도 거의 모르고 500년전 자기시대 바로 전시대의 기록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는 지적수준에다가, 아직도 일본과 미국의 저급문화에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2000년전 그것도 먼 동네 그레꼬로망 문화와 쥬대오크리스챤 사상을 언어/역사/철학 등의 광범위한 토대 없이, 게다가 주체적인 문화가 결핍된 날라리 문화에 흠뻑젖어 방방거리며 룰루랄라 나불댄다... 가소로운 소립니다!! 위에 언급한 2세기 문헌들에 <방언>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방언으로 추정될 수도 있을 가능성이 1%정도 될 말을 위에 누군가 언급할 때도 (오순절 교회가 대다수인 남미의 개신교에서 선교한 경험이 있는 교회사 교수 나그네님이 예전에 자신없이 지적하셨었지요?) 긴가민가... 그리고 이레니우스나 유세비우스 등이 heresy들로 정죄한 컬트들의 한 특징으로는 언급됩니다. 오리겐같은 사람들의 "삼위일체론"등을 문제삼을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시대를 산 초대교회 교부들이 남긴 성경해석들은 기독교신앙의 귀중한 보물로서 너무나도 귀중한 사료입니다.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1700년 전에 그동네에 살았던 당대 최고의 기독교 신앙인들의 신앙 수준은 지금의 상당히 기합빠진 허벌레한 신앙인들과는 기본적으로 차원이 다를 뿐더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수준과 지적능력, 물론 영성인지 뭔지하는 야리꾸리한 몽롱성에 있어서도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언어/철학/역사를 포함한 사람됨됨의 열심은 요즘 사람들이 좀처럼 따라가기 힘들겠지요? 여하간 이런 사람들의 방대한 저술에서 <방언>은 긍적적인 은사로 언급한 예가 하나도 없다는걸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반면 <예언>에 대한 언급은 많습니다. <예언>은 직임과의 연관성도 있으니 때맞춰 정리하신 별똥별님께 감사드리구요, 이걸 좀더 논하고싶습니다. 미동부에는 바람과 추위가 온다는데 다들 건강하시고 은혜로운 주말이 되시기를~ 별똥별 ㅎㅎㅎ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13 짐보 별똥별님의 글을 읽는 것이 저의 기쁨이 됩니다. 선한 것이 비방받지 않게 하시려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약한자의 약점을 감당하시기에, 은사를 선물이라 성경을 우리를 깨우침니다. 공급하시는 분의 주권을 별똥별 짐보 형제님께서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15교제 2012-01-12 21:46 [나무-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사도와 선지자가 중단되었다 할때 여기서 ->신학자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성령의 사도와 선지자는 직임적 은사로 분류가 되고 사도와 선지자라는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그런 당연한 이치를 간과하였기에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중단과 제가 "사도와 선지자 은사 중단"이라는 용어대신 "사도와 선지자 지금까지 개혁주의에서
나온 은사중단론이 사도와 선지자의 건덕적 은사인 예언과 방언을 계시적 은사라 하고 그런 은사의 현재 신사도들과 아이합 자칭 선지자들은 사도와 선지자의 과연 이런 현실에서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나무 은사중지론이라는 용어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것을 직임으로 바꾸었을 때 올 수 있는 더 심대한 문제점을 말한 것입니다. 교제 나무님께서 직임중지론 용어에 대한 단순한 교제 사도 ,선지자 중단을 말하면서도 기존의 은사 이름아이콘 나무 2012-01-12 19:28 이름아이콘 나무 2012-01-12 15:31 별똥별 개혁교회의 수가 많으니까요... 나무 그리고 개핀의 은사중지론의 견해를 발취한 것을 올린적이 있습니다. 그 중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이해가 잘 안되어서 가능하면 그 책을 구입하여 읽어보려고 합니다. 혹 개핀의 주장들에 대해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도 되겠지요 1/12 15:50 JuNick 나무님, 바쁘신 줄 알지만 질문을 드립니다. "방언과 같은 은사가 교회의 건덕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 고 하시는데 '방언과 같은 은사'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같은 일들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습니까? 개핀의 은사 중지론은 은사가 다 그쳤다는 말은 아니지만 방언이나 예언 같은 표적의 은사는 그쳤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나무 준익님 저는 방언과 그 통역에 계시적인 측면과 표적적인 측면과 교회론적인 측면이 다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쟁점이 되는 부분에 대하여 석의적이고 해석적인 측면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한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준익님이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직접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토론은 준익님과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유익하겠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서로간의 의견을 개진하다보면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16별똥별 2012-01-12 12:05 목사님, 본의 아니게, 설명부족으로,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그 부분은, 방언은 중지론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더 엄밀히 말하면, 부분적인 은사 중단론자들이 많다고 했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교단에서 성장했기에...개혁교회도 모두가 다 그런 것은 분명히 아님을 믿고 있는데, 표현부족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다음은 개혁교회의 입장에 관한 간추린 도움말입니다. " 개혁주의가 중단되었다고 보는 은사는 2. 예언의 은사(the gift of prophecy) 3. 방언의 은사 교제 은사주의에도 수정 은사주의가 있으나 은사주의 교제 [황상하 목사님 칼럼글중: 이름아이콘 비둘기 2012-01-11 16:03
혼탁하다는 것은 기록하게 하신 대로 불의을 믿었고 불법인지 모르고 좋아했던 진리요 성령이요 말씀이신 별똥별님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시고자 참고로 큰 교회에서 부흥 집회와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18나무 2012-01-11 05:37 thomas ((사도나 선지자의 계속성을 주장하지 않는 이상 모두가 (부분적) 은사중지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제 예^^은사중지론이 모든 은사를 부정하는 이론이 교제 사도 선지자 직임이 중지되었다면 사도,선지자 교제 것이지 나무님을 개핀과 같은 입장에 있는 자로 별똥별 토마스님과 교제님께서 제가 없는 사이에 분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저의 부족한 부분을 감싸 주시고 이끌어주신 그 사랑의 수고를 우리 주님께서 기억해 주시기를...!! 1/12 12:25 나무 정경의 완성과 함께 등장하는 사도나 선지자의 계속성이나 중지됨의 논의는 교회에 주어진 은사라는 항목과 관련하여 논의가 되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도나 선지자도 교회에 주어진 은사/선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이 직임과 어떤 관계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여러의견들을 내고 있습니다. 설사 이런 은사와 직임이 밀접하게 얽혀있다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대로 은사의 항목아래서 논의함이 좋을 듯합니다.
교제 은사의 항목아래서 논의는 하되 중지론 측면에서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20교제 2012-01-10 22:04 [개핀-나의 주된 관심사는 모든 계시적 은사(예언, 예언에 대한 ->사도가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사도적 예언,방언은사는 사도와 선지자에게만 주어지는
은사가 사도가 오늘날 이 땅에 없다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도 없고 <너희(성도)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주의 계시를 받아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에는 방언 예언을 계시적 은사라 해석하고 그런 은사는 중단되었다라고 [나는 오늘날에도 어떤 측면에서는 계시적인 말씀의 은사와 그외
->그 부정하지 않음의 이유가 -어떤 측면에서는 계시적인 말씀의 *저자가 표현을 두리뭉실 모호하게 흐리지 않고 쉽고 분명하게 정경의 완성과 함께 사도와 선지자의 사역도 완성되었고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케 하고 완성시킨 하나님의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방언이 은사중지론자들의 주장처럼 계시적 은사로서 사도시대 [방언은 분명히 성경적이고 또한 성도를 유익하게 하는 좋은 은사이다. 바울의 가르침속에서 방언이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또한 어떻게 방언이 지금도 성도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인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원하시면 말 못하는 짐승의 둔한 혀로 사람이 알아듣도록 유창하게 그러면 성령으로부터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별똥별 아멘, 아멘입니다!^^ 1/12 11:45 이름아이콘 나무 2012-01-10 15:13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라는 책에서 네가지 관점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리처드 개핀이 "은사중지론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책에서 개핀교수는 은사중지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개핀) 분명히 성령의 모든 은사가 중단되었다거나 오늘날 교회에는 그런 은사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별똥별 존경하는 나무 목사님, 늘 잘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21예전부터 2012-01-10 11:15 별똥별 고맙습니다, 예전부터님... 예전부터 그때 크리스마스 동영상 때문에 그러시군요 이름아이콘 기다림... 2012-01-10 10:22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가르치지요, 자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 말씀에 의거한 체험을 했지요. 그러니까, 체험을 한 성도님들이 달려갈 곳이 어디겠나요? 사단이 쳐놓은 덫, 극단적 신비주의자, 삯꾼들의 품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찌보면,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순진한 양떼들을 '은사중단론 자'들이 극단적 신비주의, 사단이 쳐논 덫, 그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 귀한 말씀 감사 드립니다. 저 역시 '강렬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장애우를 위한 특새 중에 '심장이 터질듯한 가슴'이었습니다. 별 사모님께서 정확히 지적해 주셨듯이, 처음 방언을 받은 이들은 너무 신비하고, 신기합니다. 그런 그들을 말씀으로 천천히 인도해 줌 없이, 교회에서, 먼저 믿은 이들이 '내 친다'면... 버젓이 지금도 방언을 받고, 실제 존재하는 강렬한 체험들이 있는데... 그 '산 증거'를 받은 이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 감별론'처럼 '영적 체험'은 중립적이기에 성경으로 돌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별 사모님께서 말씀해 주셨듯이, 그 체험은 공동체에 '반드시' 덕이 되어야 하고, 주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자랑치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혼탁한 장에서 바른 분별의 글 너무 반갑고, 귀한 사모님을 통해 역사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별똥별 고맙고 감사하신, 이름아이콘 호크마 2012-01-10 03:57 사무엘이후 엘리야/엘리사 시대에 가장 활성화되었던 [선지학교]가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현재의 [신학교형태]였는지, 아니면 기도하고 묵상으로 개별적 혹은 그룹별로 영적훈련을 하는 [기도원형태]였는지, 아니면 선교나 신앙교육, 훈련등 특수목적으로 운영되는 [para-church적인 기관/단체]였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들의 관점과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별님의 개별적인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최송연님의 댓글최송연 17-01-14 20:22별똥별 2012-01-10 01:47 성경을 많이 읽기 전에는 그것이 그런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가 모든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안전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요 14: 26 말씀이 성도에게 아무런 유익도 필요함도 없게 된다”는 것이 밝히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직통 계시적, 성경 말씀을 벗어나고 그 말씀을 대치할 예언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가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내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신, 견인의 능력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그 말씀을 지키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성도들이 수많은 기적의 능력들을 실생활에서 체험을 하게됩니다. 믿는 자는, 새 방언을 말할 것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때부터...그 약속이 어떤 다른 데 기초를 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속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각나고 떠오름으로 내 앞길 인도함 받는 것 그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신약 시대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없습니다. 완성된 기록 계시 속의 예언이 마음속에 떠오르고 생각나기도 하고…이런 성령 하나님의 역할하심마저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네 같은 선교사들, 제 3국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필요없는 구절이 없이 중요하지만, 앞 뒤 전 후 문맥도 살펴야 하고 통전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방언이 우리가 배워서 할 수 있는 외국어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new tongues(νέες γλώσσες)란 말씀을 쓰지 않으셨고, strange language(παράξενη γλώσσα) 혹은, 다른 방언 the other dialects( Οι άλλες διάλεκτοι)를 너희 믿는 자들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배워서, 학습으로 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인지....그러나, 그 역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성령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믿기에,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댓글로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아는 분 중에 어릴 적 부모를 여이고 천애 고아로 성장하신 여성이 있습니다. 그분은 학교 문턱에도 가볼 수가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얼마 후, 첫 남편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고통 중에 있을 때 찾아와 주신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교회를 나가긴 해야겠는데, 말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싫었기 때문에 그분은 미국인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미국 교회에 나가니, 영어로 찬송도 불러야 하고 말씀도 들어야 하고...너무나 힘이 들어서 고통 하던 중, 영어 성경을 읽어보기로 작정을 했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영어 성경을 들고 읽어나가기 시작(읽는 것이 아니라, "I n t h e b e g i n n i n g 이렇게 알파벳을 한자씩 소리내어 읽었다는 군요.)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읽고...틈만 나면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녀의 입이 갑자기 열려서, 알파벳으로 끙끙거리던 그 말씀이 문장으로 줄줄 이어지고.... 깜짝 놀란 그녀 자신, 그리고 그녀의 그런 음성을 듣고 있던 (재혼한 일본인 2세)남편이 놀라서 소동을 하고요....이렇게 배운 적없는 외국어도 가능합니다. 성령 하나님 안에서는.... 또 고전 14: 2절의 영언(비밀)의 체험 사례: 그야말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교회로 빌려서 사용하는 건물에서 몇 몇 성도님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드리던 때였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님께 기도로 아룁니다. 그날도 우리가 섬기던 교회의 집사님 한 분의 이름을 넣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저의 혀가 구르면서 내가 평소에 쓰지않던 방언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뜻이 연달아 깨달아지는데 "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그를 침상에 내어 던지리라!" 저는 너무도 놀라서 울며 불며, 조금만 더 참아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주십사...아마도 저와 함께 하는 다른 분이 들으면 안될 것을 아시고...이런 것이 비밀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계시로서가 아닌, 성경 말씀을 들려주시되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이분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신가 이런 말입니다. 저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마저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치유도 주님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때, 주님의 뜻에 따라 일으켜주십니다. 그런데, 한 번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여서, 자신이 신령하다고 착각을 한다던지, 다른 성도들보다 더 우월하다던지....이런 마음을 먹는 그 순간부터 사단이 그런 사람을 가지고 충동질 하기 시작하지요. "너는 신령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네가 기도해 주면 병도 낫는다." 등등. 그런 사단의 속삭임도 우리의 영혼이 깨어 감지해 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용하여 자신을 신성화시켜서 모든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삯군이요 거짓 선지자요 사단의 졸개일 뿐입니다! 그들이 지금 자신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 보이지가 않습니까? 개혁 교회는 성령의 음성과 인도가 없다고가르치지요, 자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을 말씀에 의거한 체험을 했지요. 그러니까, 체험을 한 성도님들이 달려갈 곳이 어디겠나요? 사단이 쳐놓은 덫, 극단적 신비주의자, 삯꾼들의 품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찌보면,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순진한 양떼들을 '은사중단론 자'들이 극단적 신비주의, 사단이 쳐논 덫, 그 함정으로 밀어넣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보충 설명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남겼습니다. 대장쟁이 제겐 보충설명이 본글보다 더욱 절절히 와 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선교사로 험지에 달려 가셨던 사모님의 체험이기 때문이겠지요. 별똥별 고맙습니다, 목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