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은 대조영 을 어느 나라 사람 이라고 생각 했을 까요

발해사의 주인공들은 누구였는가

1.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일컬었던 발해국?

  발해제국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이 지난 698년 고구려 장수출신의 대조영 등이 고려유민을 이끌고 진국(振國)을 건국하여 발해로 국호를 바꾸어 926년 멸망할 때까지 15대 229년간 황제국을 자칭하였던 왕조였다. 영토는 오늘날 북한(12만㎦)을 포함해서, 중국의 동북 3성 즉 길림성(18만㎦), 흑룡강성(46만㎦)과 요녕성 일부(8만㎦)에 걸쳐 대략 84만 ㎢였던 제국으로서 고구려보다 1.5~2배, 신라 보다 6~7배 정도, 그리고 오늘날 일본보다 2.2배 정도가 되었던 동북아 최대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이었다. 인구는 자료의 부실로 알 수 없으나 200~300만 정도는 되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발해제국은 5경·15부 62주의 행정편제를 갖고 있었으며, 정당성(政堂省),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의 3성과 충忠·인仁·의義·지智·예禮·신부信部의 6부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㰡”신당서㰡• 발해전이 전하고 있듯이 당과 접촉하였던 조공도로 불리는 등주도를 비롯해서 일본도, 신라도, 거란도, 영주도가 있었는가 하면, 발해와 서역간에 ‘담비길’이 있었음도 제기되고 있다. 불교도 성하여 6미터가 넘는 석등이 발해진에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발해사에 대한 정사류의 기본 사료가 없는 관계로 불모지의 역사로 남아 있다.

  발해가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유민의 부흥의지로 인함이었다. 고구려는 668년 신-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유민들이 당으로 강제 이주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로 지방호족 세력이 이동의 중심에 있었는데, 유명한 고선지나 이정기, 그리고 대조영 집안이 이 때에 이주되었다. 모두가 당에 협조하거나 지배력하에 있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요동지역에서의 고구려세력은 그 힘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안시성 등 항복하지 않은 11개성이 있었는가 하면, 당에 압송되었던 보장왕이 677년(문무왕17) 요동주도독 조선왕에 봉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현지의 말갈로 불리는 고구려인과 연합하여 다시 고구려 부흥을 꾀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구려유민들의 힘은 결국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도록 만들었다. 696년 5월 때마침 거란인 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696), 대조영 등은 고구려유민들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여 발해를 건국하는데 성공하였다.

  발해는 제10대 선황[대인수 大仁秀]대에는 당에서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강성한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926년 거란의 침입을 받고 무너졌으며 이후에는 동란국(東丹國)이라는 거란의 괴뢰왕조로 연명하다가 멸망하였다. 후발해(後渤海) 및 정안국(定安國), 대발해(大渤海) 등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서 왕조를 회복하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역사는 거란과 여진으로 계승되어 거란과 고려의 3차 전쟁에서는 거란군으로 다수가 참전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거란사신으로도 활약하였으며 거란의 고급문화를 담당한 지도층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거란에 협조하지 않고 독자적 생활을 하였던 발해유민인 여진인들은 금나라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세계에서 고구려와 발해 후손을 자처하는 국민은 한국인밖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해사가 그동안 잊혀져 왔던 것은 한국고대사가 신라와 백사사 중심이었던 것이 가장 크고 다음으로는 발해에 대한 기록이 㰡”삼국사기㰡• 등에 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아울러 발해사가 228년이라는 한국사에서는 비교적 짧았던 역사를 갖고 있었던 것도 한 이유였지 않았는가 한다.

  신라가 992년이나 되었고, 고구려 705년, 백제 681년, 가야 490년, 고려가 474년이었으며 조선이 518년이었으니 발해는 모두 이들보다는 단명한 왕조였다. 그러나 발해는 중국과 만주지역의 왕조에 비해서는 결코 단명하지 않았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이 겨우 14년이었고 수(隋)나라도 37년, '황인종의 공포(Yellow Terror)'로 천하를 떨게 한 원(元)나라도 고작 97년이었다. 발해보다 장수했던 왕조는 남송과 북송을 합해서 319년이 가장 길었고 한(漢)·당(唐)·명(明)·청(淸)이 230년에서 294년까지로 발해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이로 볼 때에도 발해는 결코 짧은 역사를 가진 왕조가 아닌 오랜 역사와 문화를 남긴 명실상부한 '해동성국'이었다.

  발해는 또한 국제적인 왕조였다. 㰡”신당서㰡•는 발해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길이 다섯 길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신라도(新羅道)와 일본도(日本道), 거란도(契丹道)를 비롯해서 당으로는 바닷길의 조공도(朝貢道)로 불리는 압록도(鴨淥道)와 육로인 영주도(營州道)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발해는 ‘담비길’로 명명될 정도의 돌궐 등 오늘날 중앙아시아로의 루트도 있었을 것으로 주장될 정도로 외국과의 관계도 빈번한 국제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문화도 국제적이고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지금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寧安市)의 발해진(渤海鎭)에 남아 있는 6m 높이의 대형 석등을 통해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발해의 학문도 높은 수준이었음을 발해지성들의 활약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발해 지성들은 당나라의 외국인들을 위한 과거시험인 빈공시(賓貢試)에서도 신라인들보다 높은 점수로 합격하여 최치원(崔致遠)의 질투를 받기도 하였는가 하면, 일본에서도 일본 시인들이 발해사절단과 시(詩)를 함께 읊었던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2.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의 발해사 연구는?

  발해사에 대한 연구는 옛 발해지역에서 현대사가 진행되고 있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가 가장 적극적이다. 일제가 대륙침략과정에서 세운 ‘만주국(1932~1945)’ 개발을 위해 깊은 연구를 하였던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때문에 1950년 이전의 발해사 연구는 일본이 가장 많은 업적을 쌓았다. 당시에 실시된 발해 5경 지역의 발굴은 오늘날에도 귀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발해와 일본간의 교섭에 관한 기록이 㰡”속일본기㰡• 등 일본측 사료에 많은 관계로 발해사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남북한에 버금갈 정도이다.

  발해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기록이 다른 왕조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고구려 등 삼국의 역사는 삼국사기에 「고구려본기」 등을 갖고 있어 그나마 체계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그러나 발해사는 당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 기록한 구당서신당서 내용이 가장 체계적일 뿐이고 다른 것들은 단편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㰡”구당서㰡• 등의 내용도 오랑캐 열전의 하나인 「북적열전(北狄列傳)」에 실린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발해의 역사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의 부분이 더 많은 상태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족계통이나 왕조적 정통성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의견차가 심하다고 하겠다. 즉 한국은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라고 보고 있는데 대하여 중국은 발해가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나를 막론하고 모두가 고구려와 다른 ‘말갈(靺鞨)’이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발해사에 있어서 또 한가지 중요한 문제는 발해가 자주성이 결여된 ‘당나라의 지방정권’ 즉 중국사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은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이 줄기차게 주장하여 온 것으로 이러한 주장은 발해만의 문제가 아니다. 즉 㰡”삼국사기㰡•에도 당나라와 달리 「고구려본기」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사였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적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발해도 당나라와 전쟁을 할 정도로 자주적인 왕조였다.

  러시아도 발해사연구에 적극적이다. 1860년 북경조약 이후 러시아는 연해주지역을 차지함으로 인해 그 지역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연해주 고고학이 이렇게 해서 적극화된 것이다. 발해사의 주민 계승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모두를 말갈인들로 보는 것은 중국과 같다. 이 점에 있어서는 중국과 의견이 같다. 그렇지만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닌 자주 독립국이었음을 주장한다. 현대사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발해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니다는 입장이다.

  한편 ‘만주국’으로 인해 적극화된 일본의 발해사 연구는 한국의 발해사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발해국의 주민구성이 ‘지배층은 고구려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학국학계의 일반적인 학설이 바로 일본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의 견해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 출간된 조선사개설(朝鮮史槪說)에도 ‘통일신라와 발해’가 정식으로 한 장을 차지하고 있어 발해사를 조선사의 일부로 서술한 것도 그러한 결과였다. 이렇게 된 원인은 발해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많은 사신들이 고씨(高氏) 등 고구려계가 많았음을 확인한 결과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의 발해사에 대한 입장은 말갈국이자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한결같은 주장뿐이다. 그러나 1960년대 주은래[조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고구려는 물론이고 발해가 조선사라고 인정하여 중국과 북한간의 중국내 고구려·발해유적에 대한 공동발굴을 승인하여 큰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개혁·개방 이후 ‘통일된 다민족국가’ 정책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사화하여 이들의 이탈을 막는 작업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정책실행은 1980년 후반부터였고, 그 중심에는 국책기관인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있었다. 변방의 경제개발정책이 있기 전에 그 지역사의 중국사화 작업이 먼저 수행되었음은 55개 소수민족이 있는 중국이 갖는 특수한 상황이기도 하였다. 티벳에 대한 서남공정(西南工程)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때로부터 ‘동북’ 지역사의 중국사화 작업도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발해사가 좋은 대상이었다. 기록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구려사는 삼국사기가 있었기에 그에 대한 작업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비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중국 ‘동북’ 지역사의 중국사화 작업이 공식화되었던 것은 북한이 2001년 유네스코에 고구려고분벽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고부터였다. 북한의 고구려고분벽화에 대한 세계문화유산등재는 북한으로서는 첫 번째 일이자 한국사적인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한국(조선)의 고구려로 세계 처음으로 인정받는 기회가 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고분벽화의 세계문화유산등재는 중국심사관에 의해 보류판정을 받아 등록이 지연되게 되었다. 바로 2002년부터 중국이 본격적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게 된 것은 고구려고분벽화신청 보류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의 모국인 한국이 강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를 한국인들의 고대사로 소개하던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분노를 사게 하였다.

  발해사는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중국사의 일부로 간주하여 왔지만 이때부터 고구려사와 함께 발해사도 한국인들의 기억속에서 되살아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주변국에 대한 ‘역사침탈’은 내부적으로 소수민족의 중국화 전략차원을 넘어 아시아의 패권을 염두에 둔 제국주의적인 논리로 간주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세계에서 고구려뿐만 아니라 발해까지 그들의 고대사 즉 조상의 역사로 생각하는 국민은 한국인밖에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인들의 기억속에 있는 내용은 환상이나 국가이데올로기에서 생성된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기억들이다. 이에 대한 근거와 생각들을 다시한번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3. 자주적이었던 발해국

  발해국이 당나라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적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당시 동아시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있다. 발해가 있던 7세기로부터 10세기 전반까지의 동아시아는 당중심의 국제질서에 놓여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한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책봉과 조공질서를 통해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책봉과 조공의 관계가 곧 당나라와 주변국과의 관계를 곧 ‘당의 지방정권’이었다고 보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특히 발해의 경우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당나라에 대하여 자주성이 강했던 왕조였다. 당과의 군사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정치적 자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행정기구명이라든지 시호(諡號)와 연호(年號)를 ‘사사로이’ 결정하였다고 한다. 연호란 지금 세계에서 연대를 계산하는데 통용하고 있는 서력기원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국가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위이다. 지금도 일부 국가에서는 서력기원보다 우선해서 ‘헤이세이’[平成: 일본]나 ‘주체’[북한] 등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연호가 국가의 자주성을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놓여있던 발해국 시대에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당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신라도 통일 전에는 연호를 사용하다가 당과 연합하여 통일한 이후에는 당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당나라에 자문도 구하지 않고 ‘사사로이’ 사용하였다고 중국 고대사서인 㰡”신당서㰡•는 전하고 있다. 고구려도 영락(永樂) 등의 연호 사용이 있었음이 광개토왕비문 등에 4군데에 확인되고 있는데 반해, 발해는 15대 왕 중에서 기록상 남아 있는 연호가 제10대 선왕이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이후의 왕들도 연호를 사용하였을 것이나 기록이 없을 뿐이라고 여겨진다.

  시호는 황제가 죽으면 사용하는 이름이다. 초대 황제 대조영(大祚榮)은 ‘고왕(高王)’이었고 제2대 대무예(大武藝)는 무왕(武王), 제3대 대흠무(大欽茂)는 ‘문왕(文王)’이었다. 이러한 시호도 관례는 당나라에 자문을 구하고 난 이후에 사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발해는 이도 ‘사사로이’ 결정하였다.

  발해가 그들의 왕을 황제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발해 제3대 문왕의 넷째딸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에서 출토된 묘비명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 묘는 1980년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용수향(龍水鄕) 용해촌(龍海村)에서 언덕에서 발견되었는데, 묘비에는 728자(字)의 글이 새겨져 있어 기록이 없는 발해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이 비문을 통해서 발해의 학문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발해가 문왕을 ‘황상(皇上)’ 즉 황제라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2004~2005년 길림성 용두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굴된 발해 제3대 문왕(文王 737~793)의 효의황후(孝懿皇后)와 9대 간왕(簡王 817~818년)의 순목황후(順穆皇后)의 묘지명을 통해서도 ‘황제(皇帝)’와 ‘황후(皇后)’를 자칭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인이 당에서 치른 과거시험은 외국인에게 자격이 주어지는 빈공과(賓貢科)였다. 이 점은 발해가 신라 등과 함께 당의 지방정권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발해는 당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정도로 자주성을 갖고 있기도 하였다. 제2대 무왕은 732년 발해에 허락없이 당과 가까워지려는 흑수말갈을 응징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당으로 도망한 그의 동생 대문예(大門藝)를 보호하는 당을 공경하였다. 해로와 육로를 통해 당을 공격하여 당의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당과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던 사건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 고구려 장수 대조영의 발해건국

  대조영의 청춘기는 지금의 중국 요령성(遼寧省) 조양(차오양朝陽)에서 보냈다. 조양은 당시 영주(營州)로 불리던 곳으로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698년 발해를 건국하기까지 대조영 집안이 30년 가까이 살던 곳이다. 대조영이 조양을 떠난 때는 696년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때였고 발해를 건국하고 21년만인 719년에 사망하였으니 그 청년기를 대부분 조양에서 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조양은 한국인들에게는 고조선문화의 상징인 비파형[요령식]동검이 많이 나온 12대영자가 있는 지역이다. 현지인들은 5호16국의 하나인 선비족 후연(後燕, 384∼409)의 수도라는 의미의 ‘연도(燕都)’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전연의 모용황(慕容愰)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킨 일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가까운 능원(淩源)시의 우하량(牛河梁) 홍산문화유적 또한 지금 중국이 황하문명권에 앞서 ‘요하문명(遼河文明)’이 있었음을 주장케 하는 유적들이다. 한편 조양은 SBS 사극 ‘연개소문’이 그가 젊었을 때 스승으로 꾸밀만큼 중국사에서는 항우와도 비견되는 이밀(李密, 582~618)의 고향이자 유명한 안사의 난의 주모자였던 안록산(安祿山, 703?~757)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조양은 고구려가 신․당[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유민들이 강제로 이주되었던 곳이다.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이듬해부터 평양과 요동지역의 민호(民戶) 38,200호 약 15만명을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하였다고 하는데, 대조영집안도 그 한 세력이었다. 강제 이주세력은 이외에도 대조영과 함께 건국길에 올랐다가 전사한 걸사비우(乞四比羽)나 안서도호부 고선지장군(?~755), 그리고 이 지역의 지방 장관이 되어 당조정까지 위협하였던 이정기(732~781)의 선조 등이었다.

  거란의 이진충(李盡忠)과 이해고(李楷固)도 조양에서 대조영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거란 추장 이진충이 당나라 영주도독 조문홰(趙文翽)의 학정에 분을 품고 그를 살해하면서 일어난 ‘이진충의 난’(696~697) 즉 ‘영주의 난’은 발해건국의 도화선이 되었다.

  구당서(940~945)는 발해건국과정에 대한 영주에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가 살았다. 만세통천연간(696~697)에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 대조영이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동쪽으로 망명하여 요새지를 차지하고 수비를 굳혔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가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남은 무리를 토벌케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죽이고 또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연합하여 이해고에게 항거하자 왕의 군대가 크게 패하고 이해고는 탈출하여 돌아왔다 ····· (대조영은) 성력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올랐다.”고 전한다.

  발해는 건국 직후 국호를 ‘진(振,震)’이라 하였으나, 어느 때부터인지는 몰라도 '발해'라 국호를 바꾸어 불렀다. 발해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고려(高麗)' 즉 '고구려'로 국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은 발해가 건국될 때부터 정식 국호를 사용하지 않고 ‘말갈(靺鞨)’이라 멸시하다가 발해와 수교하면서 내린 책봉에서 처음으로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발해건국은 30년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고씨 고구려'에서 같은 지역, 같은 주민이 계승된 '대씨 발해'로의 정치 순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5. 고구려인들이 살던 곳에 세워진 발해국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고, 거기에 동북쪽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였다. 발해의 영역은 9세기 말엽 제10대 선왕(宣王) 및 제13대 대현석(大玄錫) 시대에는 사방 5천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체로 보아 발해의 영역은 남쪽이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이었고, 서쪽은 요하 경계에 이르렀다. 북쪽은 대체로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 남단에 뻗쳐 있었다. 고구려의 1.5배, 신라의 3~4배에 달해 한국사 최대의 영토였다고 분석되고 있다.

  고구려영역을 어디까지로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발해의 고구려 영토계승은 주민과 함께하였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산업이 주로 농경위주였다는 점도 이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370만 정도의 고구려인들로 보았을 때 고구려멸망 후 당을 비롯한 신라 등으로의 이주민은 20만을 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발해인들의 종족계통은 고구려인들의 계통과 관련된다. 고구려가 다민족 국가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705년간의 긴 시간은 초기의 옥저(沃沮)나 예(濊) 등도 모두가 고구려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멸망 시점에서의 고구려란 초기의 고구려족이 아닌 재구성된 고구려국민이 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곧 발해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6세기 이후 고구려와 함께 㰡”수서㰡• 등에 오랑캐열전으로 분류된 「동이열전」이나 「북적열전」에 말갈이 등장하는 것이 고구려 주민구성의 진실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다수의 피지배주민들이 고구려와 다른 말갈이 아니었다는 점은 한국과 중국 모두 인정하고 있다.

  발해의 종족계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말갈’이다. 즉 중국과 러시아와 같이 발해는 고구려와 다른 계통인 말갈인들의 왕조였다고 한다든지, 한국과 일본의 많은 학자들이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그들과 다른 말갈인이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발해는 만주사의 입장에서 말갈국이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그런데 말갈이란 고구려의 피지배주민에 대한 멸시어이자 당나라 동북방 주민들을 통털어 부르는 범칭(汎稱)이었다. 말갈이란 종족명은 당시 스스로가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당나라나 고구려인들이 고구려 피지배주민들을 이민족처럼 낮추어 부른 호칭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도 주장되었다. 발해가 ‘진(振)’으로 건국되었을 때에 당나라는 발해를 ‘말갈(靺鞨)’이라 멸시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말갈의 선조로 알려진 진(秦) 이전의 숙신(肅愼)과 한대(漢代)의 읍루(挹婁) 등은 중국 왕조가 바뀌면서 멸시하여 타칭되었던 종족명이었다.

  고구려시대 말갈로 불리는 사람들은 고구려를 위해 싸우기도 하지만 고구려에 대항하여 싸우기도 한다. 이는 고구려 정규군과 지방 토호군인 ‘말갈’군으로 모두가 중앙과 지방의 관계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645년 당나라와 대항해 싸우다 붙잡힌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보아도 알 수 있다. 㰡”삼국사기㰡•의 내용이 참고가 된다.

  “고구려 보장왕4년(645) 당주(唐主: 당태종)가 안시성에 진군하여 치니,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아군(고구려군)과 말갈병 15만을 거느리고 안시를 구하려 하였다····연수와 혜진은 그 무리 3만6천8백명을 거느려 항복을 청하고 군문(軍門)에 들어와 엎드려 절하고 목숨을 청하였다. 당주가 욕살 이하 관장(官長) 3천5백명을 가려서 (당)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갈 사람 3천3백명은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수천인이 매장된 ‘말갈’군은 현지 주민들이었지만 ‘평양’으로 귀향한 사람들이야말로 ‘고구려군’으로 기록되는 사람들이다. 왕조시대의 나라사람인 ‘국인(國人)’이란 수도나 도성중심의 사람만을 대개 의미했다. 신라왕실이 멸망할 때 삼국사기가 ‘신라를 경주로 고쳤다’라고 기록한 것은 그러한 역사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중심의 사람을 ‘고구려인’으로 그리고 부여·공주사람만을 ‘백제인’으로 불렀던 시대의 역사관에서 고구려 변방인은 그들과 종족적으로도 다른 ‘말갈인’일 뿐이었다.

  심지어 삼국사기 집필자들은 백제와 신라변방인마저도 ‘말갈’로 기록하여 기원전인 동명성왕이나 온조왕대에도 말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관계가 깊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구려의 ‘광개토왕비’에도 말갈은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측 기록처럼 말갈이란 종족명은 6세기 이후에나 등장한다고 하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 㰡”삼국사기㰡• 기록자들은 다만 변방인이라는 말갈에 대한 의미를 빌려서 백제와 신라변방인들도 ‘말갈’이라 기록하였을 뿐이다.

  지금까지 발해를 말갈이라 하였던 것은 중국측의 신당서에 대조영을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100년 정도 먼저 나온 㰡”구당서㰡•에서는 대조영을 ‘고려별종(高麗別種)’ 즉 고구려의 별종이라 하고 있다. 말갈은 ‘속말부’나 ‘백산부’, ‘흑수부’ 등 7부가 등장한다. ‘속말말갈 대조영’이란 속말수(粟末水) 즉 ‘송화강지역 시골사람 대조영’이란 의미로서, 말갈은 가야와 같이 지역명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별종’을 강조하는 㰡”구당서㰡•가 대조영의 고구려출신을 강조한 기록이라면, ‘속말말갈’을 강조하는 㰡”신당서㰡•는 대조영이 속말수 지방출신이었던 점을 반영한 결과였다. 결국 말갈로 불리는 고구려말갈도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6. 고구려의 풍속과 언어를 쓰던 발해인

  발해와 고구려, 말갈의 관계를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구당서는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다”고 전한다. 풍속이나 다른 모든 것에서 발해와 말갈의 관계는 전무하다. 만약 발해가 말갈족의 왕조라면 구당서신당서 어느 곳에도 발해와 말갈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발해의 풍속은 말갈과 같다’는 식의 기록이 있어야 하나 그러한 내용은 없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서도 스스로를 “고구려의 옛 땅을 찾고 부여의 풍속을 갖고 있는 고려국(高麗國)”으로 자칭하였다. 발해는 스스로도 고구려의 풍속을 계승했다고 자칭하였던 것이다.

  풍속이란 대체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의미한다. 그리고 풍속이 같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고, 생활 공동체로 상당한 기간 함께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풍속의 범주에는 언어까지도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와 발해는 언어가 같았다는 것이다. 발해는 그들의 왕을 토착어인 ‘가독부(可毒夫)’로 사용하였으며 처음부터 ‘황상(皇上)’이나 ‘왕(王)’으로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하였다는 점은 일본에 파견된 발해사신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740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蒙) 일행이 일본에 당도하여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하였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과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하여 배석한 인사였다. 고구려와 신라가 언어가 통했으며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신라가 말이 서로 통했기에 취해진 조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발해와 고구려와의 문화적 계승관계는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고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 문왕의 둘째딸) 및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 삼령분(三靈墳) 등과 같이 발해의 왕릉 및 지배층의 석실분(石室墳)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묘제는 대체로 돌을 많이 사용하는 계통으로 그리고 당나라의 묘제는 벽돌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언급한다. 그리고 말갈의 전형적인 묘제는 흙구덩이의 토광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결론을 갖고 고구려나 발해유적에서 토광묘가 나오면 고구려와 계통이 다른 ‘말갈’ 묘제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토광묘는 고구려나 발해 서민들 대부분이 사용하였던 매장방식이었다.

  석실분이나 석곽묘와 같은 돌계통의 무덤떼 주변에서 토광묘가 발굴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고고 발굴에서 많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의 견해로 말하자면 서로 이질적인 고구려와 말갈사람들이 같은 지역에 무덤을 축조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내지 유력자와 일반 서민의 차에서 온 묘제의 차이일 뿐이다. 흙구덩이의 토광묘 문화는 전근대 일반 서민들이 쓰던 인류 보편의 문화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유물이 없고 유적이 빈약하다고 해서 이것을 고구려나 발해시대의 부수적인 묘제로 보거나, 고구려나 발해와 다른 말갈묘로 볼 수는 없다. 사료를 통해 볼 때, 말갈은 고구려의 변방피지배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토광묘는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 주민들이 일반적으로 쓰던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7. 고구려인들의 온돌과 토기를 쓰던 발해인

  어떤 이는 고구려와 말갈토기를 구분하며 그 기준을 돌림판[輪制]을 쓴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또는 굽는 온도의 차이 등에 두는 경우가 있다. 토기 사용에 있어서도 말갈문화는 아직 미개한 문화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발해삼채 등을 언급하면서 말갈관을 구별하는 것은 마치 귀족문화와 변방문화를 비교하는 논리임과 동시에, 지배층과 피지배층문화를 이민족으로 구별하려는 자세이다. 종족에 따라 고급의 도자기와 토기로 구별해서는 안되고 지배와 피지배 내지 중앙과 지방문화의 차이로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것으로는 고분과 함께 주거문화를 생각할 수 있다. 온돌을 고구려인들이 썼다고 하는 사실은 중국측 사료인 㰡”구당서㰡•가 고구려인의 주거생활에 대한 특징 을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하는 온돌장치를 한다고 전하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㰡”구당서㰡•에서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이렇게 그린 것은 당(唐)·오대(五代)의 지성들이 고구려를 보았을 때 그들과 다른 주거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남긴 기록이다. 물론 일반인들이 가난하다는 것은 고구려나 당․오대인을 막론하고 피지배인들의 생활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고구려인들이 당과 오대인들과 다른 주거생활을 누리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이것에 근거하여 한국학계에서는 온돌의 기원을 고구려로 언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구려의 온돌은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유적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나아기 이러한 온돌은 발해시대에도 많이 발견되었다. 발해국 상경룡천부의 궁성 서쪽 ‘침전터’에서 7개가 발견되고 있으며, 북한의 함남 신포시 오매리 발해유적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또한 고구려유적에서도 많은 온돌유적이 발견되어 이 문화가 고구려부터 지속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발해인들이 온돌시설을 하였던 근거는 러시아의 연해주의 발해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고구려에서 사용되던 온돌이 발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중요한 근거이다. 또한 말갈 지역으로 불리는 고구려와 발해 변방 지역에서도 온돌은 발견된다. 그러나 온돌은 당나라 건축유지에서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 점은 고구려나 발해문화가 갖는 독자성이 분명했다는 반증이다.

8. 남북국시대의 신라와 발해

  한국사에서 신라와 발해가 양립하던 시기는 조선시대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이래 ‘삼국시대’에 이은 ‘남북국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남북국시대론의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가 발해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삼국의 상쟁이 삼국시대로 여길 수 있게 한 이유가 되듯이 남북국의 교섭과 대결이 갖는 애증의 양면적 관계 역시 남북국시대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인접국간 교섭과 대결은 하나의 역사가 되기 위한 ‘역사공동체’의 요건이다. 때문에 역사에서 교섭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주변국과의 전쟁까지도 ‘적극교섭’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남북국의 관계에 관한 기록은 아주 적다. 그러나 기록이 없다고 해서 남북의 교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피지배 주민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남북 왕조가 교섭했던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고, 발해에서 신라로 통하는 ‘신라도(新羅道)’인 신라 천정군(泉井郡;함남 덕원)으로부터 발해의 책성부(柵城府; 간도 훈춘)까지에 걸쳐 39개의 역도 있었다.

  신라와 발해 왕실이 첫 접촉을 가졌던 시기는 발해가 왕실을 개창한 지 2년째가 되던 발해 대조영 고왕 2년(700)이었다. 발해가 당의 방해를 받으면서 나라를 세우고 신라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과거 신라와 당의 연합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였다. 최치원이 당에 보낸 편지글은 “(발해가)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와서 인접하기를 청하였기에 그 추장 대조영에게 비로소 신라의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고 전한다. 신라가 발해건국을 묵인하는 명분은 신라의 대아찬 벼슬을 대조영이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에 조공이나 어떠한 정치적 배려를 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신라와 발해가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던 계기는 발해의 당나라 공격(732)에 신라가 개입한 사건에서 비롯한다. 발해와 당은 발해 건국 과정에서부터 대립적이었다. 발해가 당을 공격하게 된 배경은 당이 발해 견제를 위해 흑수말갈과의 관계를 긴밀히 한 이후였다. 발해의 당나라 공격은 732년, 해륙 양면으로 결행되었다. 이럴 즈음 신라는 당나라를 돕기 위해 신라군을 발해의 남쪽 국경 지역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마침 일기상의 이유로 신라군이 철수하였으나 이 사건 이후 남북국은 더욱 대결하게 되었다.

  남북국은 일본과 발해가 신라를 협공하려 했던 발해 3대 문왕(737~793) 때도 적대적이었다. 일본 내부의 문제로 일본이 신라를 발해와 협공하려 했던 이른바 ‘신라협공계획’(758~764)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 계획은 발해의 중도 포기와 안사의 난(755~763년)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 그리고 일본의 정세변화로 무산되었으나 이것은 양국의 대결관계가 있었기에 일본이 이를 이용하려 한 사례였다.

  남북국이 대결에서 교섭으로 변화하는 국면은 신라의 정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제3기). 㰡”삼국사기㰡•는 신라가 원성왕 6년(790)과 헌덕왕 4년(812)에 각각 ‘북국(北國)’ 즉 발해에 6두품급의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전한다. 왜 신라가 북국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그 경과와 결과 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당시 신라정세를 통해 일정하게 추측이 가능하다. 원성왕과 헌덕왕 모두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 왕들은 신라하대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발해와의 교섭을 시도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신라 하대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 하에서 이루어진 남북국의 교섭은 발해의 영토 확장과 신·당의 군사 협력을 계기로 대결하게 되었다. 신라와 발해가 결정적으로 교섭에서 대결로 상황이 바뀌게 된 동기는 당 내부의 문제로 신라에 군사적 도움을 청하고부터였다. 당나라는 그들 내부에서 819년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에 도움을 청하였고 신라 또한 이에 응해 신라군 3만을 파병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사도는 본래 고구려계 사람으로써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에 강제 이주되었던 이정기(李正己)의 손자였다. 따라서 당이 이사도 반란 토벌에 도움을 청하였던 것은 이사도를 발해계로 생각하여 남북국의 대결관계를 이용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신라와 당이 가까워지는 계기는 되었으나 남북국의 관계는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신라쪽 기록만 남아 있지만 이 사건이 있고나서 3년째가 되던 해에 헌덕왕은 김헌창의 반란 세력 239명을 과감히 처형하였으며(822), 발해와의 북쪽 경계에다 일만 여명의 한산 북쪽 주민들을 동원하여 긴 성을 쌓았다(826). 당의 영향력을 믿었던 헌덕왕의 대내외적 자신감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었다고 본다.

  신라와 발해가 대립적이었다는 사실은 일본 승려 에닌[圓仁]의 기행문에서도 확인된다. 신라인들이 발해와 싸워 이긴 날을 기념하기 위해, 8월 15일이 되어서 백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3일 동안 밤낮으로 춤과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고 한다. 한민족의 추석 명절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이로써 더욱 성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당 조정에서 신라와 발해사신들이 자리다툼을 하였던 사실도 기록에 남아 있는가 하면 당에서 유학하던 양국의 학생들도 경쟁하였다. 당이 외국인들을 위해 설치한 빈공과(賓貢科) 시험에서 875년 발해의 오소도(烏昭度)가 신라의 이동(李同)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 수석의 영광을 차지하자, 최치원은 이 사건이야말로 “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치욕스럽게 여기었다. 또한 906년에는 신라의 최언위(崔彦撝)가 오소도의 아들인 오광찬(烏光贊)보다 상위에 합격하자, 당에 있던 오소도가 자기 아들의 순위를 최언위보다 올려달라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했던 사건 등이 그것이다.

  신라와 발해의 대립관계가 또 다시 교섭의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던 시기는 발해가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10세기 무렵이었다. 당시 남북국이 교섭하였음을 알려주는 㰡”거란국지㰡•는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이 거란의 팽창을 두려워한 나머지 은밀히 ‘신라(후삼국)의 여러나라’들에 구원을 요청하여 이것을 약속받았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의 은밀한 도움 요청을 받고 돕기를 약속하였던 신라제국(新羅諸國)들이 발해를 돕지 않고 결국에는 거란을 도왔다고 한다. 오히려 신라는 이 일로 인해 거란으로부터 고마움에 대한 선물까지 받았다고 한다.

  요컨대, 남북교섭에서 신라는 그들 특정 정치집단의 이해관계 아래에서 발해와 그리고, 발해는 고구려멸망에 대한 대립감정으로 인해 안정이 아닌 위기하에서만 신라와의 교섭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남북국의 교섭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양국이 서로가 당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이었을 때였다. 그러나 두 나라는 각기 당과 일본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남북교섭은 그들의 필요에 의한 차선책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한계는 결국 신라와 발해가 문화적 이질성의 심화, 대결이 현상고착되는 결과를 낳아, 신라 중심의 고려후손들이 발해와 그 후손인 거란 속의 발해인과 여진을 이민족으로 보는 원인이 되었다.

9. 발해 멸망 후의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많은 이들이 ‘후삼국시대’를 남북국시대의 연장선에서 보려는 시각은 그리 익숙하지 못한 것 같다. 한국사에서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시각에 익숙한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삼국이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의 후삼국이 아닌 대신라[통일신라]의 후삼국일 뿐만 아니라, 후백제의 견훤이 등장하는 892년부터 후삼국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926년까지 북방에서는 엄연히 발해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울러 발해 주민의 역사가 왕실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 하였던 것은 아니다. 발해사는 대씨 왕실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민들에 의해 ‘후발해’라든가 ‘정안국(定安國)’으로 일정 기간 지속되었고, 또 다른 유민들에 의해서는 거란이나 여진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여 발해 문화를 잇고 있었다. 따라서 남북국 시대의 하한선은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소멸되는 때로 볼 수도 있다.

  남국의 후삼국과 북국의 발해사가 갖는 유기적 관계 변천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발해 멸망을 계기로 후삼국의 대·내외관계가 변화하는 등 후삼국과 발해사는 별개의 역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발해는 신라가 후삼국의 분열기에 들어 있었던 926년에 침략자 거란에게 멸망하였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발해사의 대부분이 거란과 여진에 의해 계승되었던 사실은 고려에 의한 신라계승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라의 붕괴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김씨 신라”에서 “왕씨 고려”로의 역사 전환 과정이었고, 결국 이것은 민족사 발전의 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북국이 “대씨발해”에서 이민족의 “야율씨 거란(요)”으로 그 모습을 바꾼 것은 이민족에 의한 왕조의 단절이자 민족사의 단절이었다. 따라서 발해 멸망은 곧 한민족의 활동 공간이었던 만주를 민족사에서 멀어지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발해 멸망으로 인해 발해 역사의 주체였던 그 주민들이 모두 다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역사적 생명은 비록 이민족의 지배 밑이었지만, 거란의 역사 속에 일정하게 계승되고 있었다. 특히 발해유민들이 그들의 왕조를 회복시키고자 벌였던 발해 부흥운동은 발해사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비록 발해 부흥운동의 주체는 되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거란에 의도적이었든 그렇지 않았든간에 거란에 협력하였던 발해유민들의 역사도 있었다. 이렇다면 고려와 거란의 역사상도 남북국 시대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된다. 고려와 거란의 3차 전쟁에서 상당수의 거란인들이 발해유민이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역사의 결과였다.

  발해유민은 그들이 처신하였던 태도와 행방에 따라서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① 거란 침략자를 피해 거란의 통치력이 약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던지 인접국에 망명하였던 사람들로서, 대광현(大光顯) 등과 같이 대부분 고려로 이동하였던 유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거의 ‘발해’인이었으나, 발해가 망하고 나서 어느 시점부터는 ‘발해’가 아닌 ‘거란’이나 ‘여진’인으로 고려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②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거란에 협조했던 지배층 유민들로서 거란의 힘에 굴복하여 거란의 협조자가 되었던 유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고려와 거란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가 하면, 두 나라간의 전쟁에서는 거란군의 장군으로서 피지배 발해유민들을 이끌었다. ③ 발해시대의 피지배 유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생활 근거지를 박차고 과감히 고향을 떠나지도 못하였고 어쩔 수 없이 거란에 복종하여야 하였다. 이들은 기록에서 주로 ‘거란’이나 ‘숙여진(熟女眞)’ 등으로 등장하는 예가 많다. ④ 거란과는 반독립적 상태에서 그들의 생존과 관련된 실리를 추구하며 대처했던 사람들로서 주로 고려와 관계가 깊었던 ‘생여진(生女眞)’ 부락들의 유민들이 있었다. ⑤ 발해국의 옛 강토 안에서 거란과 맞서거나 대항해 싸웠던 유민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발해멸망 직후에 이른바 ‘후발해’와 ‘정안국’을 건설한 사람들도 있었고, 대연림(大延琳)과 고영창(高永昌)과 같이 발해가 멸망한 지 100년이 지난 후에 ‘흥료국(興遼國: 1029~1030)’과 ‘대발해국(大渤海國: 116)’을 각각 건설하기도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발해 왕조의 정통성은 이민족인 거란의 침략으로 단절되며 그들에 의한 왕조부흥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왕조사적으로 보아서 고구려계승을 표방하고 발해를 친척의 나라로 여기고 있던 고려가 발해의 정통성을 계승한 왕조로 여길 수 있다. 반면에 주민들은 왕조와 달리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거란이나 여진의 이름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발해멸망 후 100년이 지나도 발해인을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이란 대연림이나 고영창과 같은 발해의 귀족유민들에 불과했다. 고려가 여진을 인면수심(人面獸心)을 가진 미개 야만족으로 멸시하면서 발해유민으로 대우하지 않았던 것은 왕조중심적 역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10. 고구려·발해의 후손 한국인

  삼국사기가 한국인들의 고대 역사책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다. 이 이야기는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한국인들의 옛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과도 통한다. 한편 중국사에서 황제의 역사가 기록되는 「본기」가 삼국사기에 설정되어 있다는 것은 삼국이 ‘해동삼국(海東三國)’으로 수·당과 독자성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땅에 세워진 발해였다는 점이 가장 크다. 주민들을 계승한 발해가 고구려와 다른 말갈인들의 왕조가 될 수 없는 것 또한 자명하다. 말갈이 고구려와 달리 기록되고 있는 것은 근대 이전 지성들이 갖는 역사관에 기인한다. 중앙이나 도성에 편제되지 않은 변방 주민들을 이와 같이 불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삼국사기 기록자가 이와 같은 역사관을 차용하여 백제와 신라변방인에게까지 적용하여 기록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700년 넘게 하나의 국민, 하나의 민족을 형성케 한 왕조였다. ‘민족’이란 19세기 이후에 일반화된 용어이지만 700년 내지 1000년, 500년이 지속된 한국사에서는 왕조사가 곧 민족사의 형성과정이자 발전과정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들이 고구려와 발해 후손을 자처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고구려와 발해왕손을 자처하는 씨족들은 한국밖에 없다. 즉 고구려 왕손을 자처하는 씨족으로는 횡성(橫城) 고씨(高氏)가 있으며 협계(陜溪) 태씨(太氏), 영순태씨, 남원(南原) 태씨 등은 모두 대중상(大仲象) 즉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을 그들의 시조로 삼는 족보를 갖고 있다. 이 족보가 조선시대에 본격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들 씨족이 고구려와 발해왕손을 자처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기억 속에서 형성된 조상관으로 의미있게 생각할 수 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한국인들은 고구려와 발해후손을 자처할 만하다. 고구려와 발해인들은 당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온돌을 사용하였다는 것이 기록과 고고자료가 말해 준다. 그런데 오늘날 아파트에 온돌이 보편화된 나라가 한국밖에 없다는 점과 고구려·발해인들이 온돌을 쓰던 것은 같은 계통의 주민들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문화사적 측면에서 발해사의 민족사적 귀속문제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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濱田耕策, 2000, 海國興亡史 吉川弘文館,

한규철 외, 2007, 『발해의 역사와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편

한규철, 2007, 「발해의 주민구성과 귀속문제」『한국고대사연구의 새동향』, 한국고대사학회

한규철 외, 2008, 『발해의 5경과 영역 변천』, 동북아역사재단 편

정석배 외, 2009, 『동아시아의 발해사 쟁점비교연구』, 동북아역사재단

송기호, 2011,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한규철의 발해사 홈페이지 http://www.ks.ac.kr/~palhae)


신라와 당의 축약어를 나당(羅唐)이 아닌 신당(新唐)으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