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모아나는 뭐 바꿀 필요 있나요 아울리 크러발리오 그대로 가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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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숙/책이답하다13] 케이팝을 타고 세계로 날고 싶은 아세안 젊은이들

‘책이 답하다’는 인도네시아를 포함해 동남아시아에 대해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책에서 찾아보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책> 제목: 아시아 시대는 케이팝처럼 온다 아시아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이 다르게 보이고 동남아가 다르게 보인다 저자: 정호재 출판사: 눌민 출판일: 2020년 11월 09일 출간 책소개 책 『아시아 시대는 케이팝처럼 온다』는 오랫동안 기자 활동을 하며 닦은 취재와 분석 실력과 비교아시아학의 학문적 성취, 그리고 다년간의 동남아 체류에서 얻는 경험을 바탕으로 동남아에서의 케이팝 열풍뿐만 아니라 부동산, 물물거래, 이주 노동, 이민, 엔터테인먼트 등 동남아의 중요한 사회 · 문화 현상, 그리고 아웅산 수찌, 탁신, 삼랑시, 니콜 시아, 마하티르와 같은 동남아 유명 정치인들의 업적과 과오를 통해 본 동남아의 현재를 거침없는 필력으로 써내려간 책이다. 이 책은 특히 아시아의 근현대사를 통과하며 도도한 흐름을 형성한 문화적 다양성, 정치적 개방성, 시민사회의 자율성, 반反부정부패 운동 등에 주목하면서 아시아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케이팝의 성공은 한국의 경제적 성공에 따른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문화교류와 네트워크 형성, 합리적인 시스템의 개발, 노예적 계약 관계의 혁신, 미디어의 개방성과 자유, 공정한 경쟁, 도덕적 감수성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동남아에서의 반부패, 반독재, 반군부와 같은 정치·사회적 민주화 움직임이 케이팝의 가치와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아시아적 관점을 도출해낸다. 정호재 작가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학사와 경희대학교 경영대학 석사를 마치고 현재 싱가포르국립대학교 비교아시아학 박사 과정에 있다. 2002년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짧지 않게 활동했다. 그사이 몽골에서부터 중국을 거쳐 아세안을 지나 스리랑카까지 동아시아의 많은 지역을 답사하며 견문을 넓혀왔다. 동시에 태국의 탁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캄보디아의 삼랑시 등 동남아 대표 정치인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관련 책들도 번역했다. 현재 싱가포르와 미얀마를 오가며 아시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책이 답하다> 묻다) 왜 동남아는 한국 걸그룹 블랙핑크에 열광할까? 블랙핑크 멤버 리사는 태국과 더 나아가 동남아 젊은이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답하다) 저자는 아세안 젊은이들에게 세계적인 아시아인이 되고 싶은 꿈이 있고, 한국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가 동남아를 비롯해 더 넓은 무대로 나아가는 지름길로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블랙핑크의 리사는 한국 메이저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데뷔한 첫 번째 태국인 (여성) 가수다. 리사는 4,000대 1의 치열한 방콕 오디션을 뚫고 케이팝 무대에 올랐다. 아세안 젊은이들에게 리사는 그런 욕망을 대변해주는 역할 모델이다. 다른 아세안 젊은이들도 리사와 같은 기회를 얻기를 희망한다. 저자는 태국과 아세안 팬들이 리사에게 보이는 관심과 애정이 블랙핑크가 동남아에서 큰 인기를 끄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고 보았다. 묻다) 케이팝이 다양한 국적의 인재를 영입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답하다) 저자는 국적을 뛰어넘는 범아시아적 발상을 케이팝이 위대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한다. 걸그룹 (여자)아이들은한국인 3명, 태국인 1명, 중국인 1명, 대만인 1명으로 구성됐다. 트와이스는 한국인 5명, 일본인 3명, 대만인 1명, 블랙핑크는 한국인 3명, 태국인 1명, 뉴질랜드인 1명, 호주인 1명으로 구성됐다. 다양한 국적자들이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협력해 성공을 일궈낸다. 저자는 21세기판 인종과 문화 화합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자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방식의 세계화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 케이팝이 명실상부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시장이 됐고, 점점 메이저 장르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외국인 멤버들이 한국사회에는 또 다른 변화의 촉매제가 된다고 피력했다. 묻다)한국회사 JYP엔터테인먼트가 일본인들로만 만든 걸그룹 니쥬와 관련해, 케이팝 기술 유출이라는 논란에 대한 저자의 의견은? 답하다) 저자는 최근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10대 걸그룹 니쥬(Niziu)는 박진영이 이끄는 JYP엔터테인먼트 기획이 만들어낸 큰 성과라며, 케이팝이라는 플랫폼이 외국에서도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의견을 인용했다. 그는 케이팝이나 케이드라마를 수출상품으로 바라보지 말고 문명론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저자는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케이팝의 시스템을 따라 할 수 있도록 부추겨야 한다며, 일본과 중국 그리고 아세안 국가의 엔터테인먼트시장이 케이컬쳐 방식으로 바뀌기를 희망했다. 묻다)케이팝이 쉬이 복제하기 힘든 산업이라고 한 이유는? 답하다) 저자는 케이팝이 혼자서 발전해 어느 순간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진 게 아니라고 말한다. 정치 개혁에서 시작해, 검찰 개혁과 방송 민주화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꾸준히 진행돼 온 여러 개혁과 투쟁 및 타협의 산물에 가깝다며, 케이팝만이 아니라 드라마, 영화, 웹툰, 게임 등 문화예술산업 전체가 동일한 혁신 구조 위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또한 케이팝은 민·관·개인이 촘촘하게 뒤헝킨 한국사회의 구조적 기능과 진화에 막대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며, 그래서 쉬이 복제하기 어려운 산업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개방과 복제를 두려워해서는 1등이 될 수 없다며, 일본과 중국, 동남아 국가들이 아무리 베껴대도, 그보다 더 멋지고 쿨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은 결국 한국사회 전반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묻다) 케이팝이 문화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답하다) 저자는 케이팝에서 보이는 합리적인 시스템, 계약 관계의 혁신, 미디어의 개방성과 공유, 자유로운 표현, 공정한 경쟁, 세계적 수준의 도덕적 감수성 등이 더해져 뚜렷한 문화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를 “아시아 시대의 징후적 현상”이라고 명명한다. 전 아시아를 묶을 수 있는 문명(사)적 관점으로 아시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묻다) 한국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된 이유는? 답하다) 저자는 “개인이 국가와의 대결에서 굴복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다양한 개인들이 국가의 감시와 통제를 이겨내고 창의성을 발현하고, 자신의 (신체적, 예술적) 재능과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합리적인 미디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국적을 뛰어넘어 호소할 수 있는 시야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묻다) 케이팝에서 한국문화 더 나아가 한국문명으로 도약하려면? 답하다) 저자는 ‘도덕적 완벽함’을 갖추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국 문화가 문명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국경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지역적 윤리에서 벗어나 세계적 수준의 윤리적 감수성과 제도적 진보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이팝이 연습생과 노예계약을 일소함으로써 세계적 팝 시장의 대열로 도약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영국과 미국이 노예해방을 통해 세계 초강대국으로 도약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다. (끝)

문화∙예술 주요 기사

미술작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사탕에서 시작되다:

역사 흐름에 따른 일본 동성애 인식의 변화 조인정 2012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쿠바 출신 미술 작가인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 Torres)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관 한 귀퉁이 바닥에는 알록달록한 셀로판지 포장의 사탕들로 쌓여져 있었는데 관객들은 사탕을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었다. 나도 예쁜 사탕을 맛볼 수 있다는 기쁜 마음에 그 사탕을 하나 집어 들었다. 하지만 곧, 그 사탕더미가 총 79kg이며 이는 작가의 동성 연인인 로스 레이콕(Ross Laycock)이 에이즈로 생을 마감하기 전의 체중을 의미함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그 사탕을 입에 넣을 수 없었다. 사탕이 로스의 육체를 상징한다면, 관객들과 내가 무심코 입에 넣은 사탕이란 곧 레이콕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끝내 그 사탕을 먹지 못했다. 그로써 로스의 소멸 혹은 죽음을 늦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 다음날 전시담당자는 줄어든 사탕의 양을 다시 채운다고 한다.) 레이콕의 죽음으로 5년 후에 같은 병으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또한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연인을 먼저 떠나보낸 그리움과 애달픔, 그리고 현생에서 그 둘의 짧았던 사랑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처럼 내 가슴을 애잔하게 적셨다. ▲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Felix Gonzalez Torres, <무제-LA에서의 로스의 초상화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1991 (출처: The Felix Gonzalez-Torres Foundation, 1991) 그 강렬한 작품의 영향에서 였을까? 나는 그 후 일본 대학교 재학 중에 젠더학을 수강했다. 내가 젠더학을 수강하던 당시 2015년 일본에서는 동성애에 관한 기념비적인 일이 있었다. 그 해 초 3월에 도쿄도 시부야구 의회에서 일본에서는 전례 없던 ‘동성 커플 인증 조례안’을 통과했던 것이다. 이로써 동성커플은 결혼에 상당하는 관계를 인정하는 인증서를 발급받게 되고, 아파트 임대 및 병문안 등 가족 관계에서만 인정되었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LGBTQ의 인권과 동성애 이슈에 대해 보수적인 일본에 성소수자 권리 증진의 혁명적 물결을 일으켰다. 하지만 젠더학을 통해 나는 일본의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시선이 처음부터 보수적이지 않았고, 역사의 흐름에서 변천되어 왔음을 깨달았다. 일본역사에서 ‘동성애’는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일본에서 ‘색’을 나타내는 한자 色(iro)는 현재까지도 ‘성적욕망’과 연관되는데, 과거 에도 에도시대(1603-1868)에는 남성이 성적욕망을 두 가지 색으로 구별하여 말했다. 하나는 ‘남성을 향한 욕망’을 가리키는 ‘남색(男色, nanshoku)’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을 향한 욕망’을 의미하는 ‘여색(女色, joshoku)’이었다. 남성들의 공간인 불교 수도원에서의 가르침은 승려들에게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남색과 여색을 일깨웠다. 전설에 따르면 진언종(真言宗)을 설립한 승려 구카이(空海)는, 9세기 초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승려들에게 남색(男色)을 ‘중국의 관습’으로 알리고 전파했다. 중국문화를 우러러보던 일본의 수도원에서는 중국의 수도원에서 실제로 행해지던 그 관습을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의 형태’로 받아들여 행하기 시작했다. 남색관계에서 연륜이 많은 불교 승려 ‘낸자(念者)’는 12-18세 사춘기 나이의 어린 소년인 ‘치고(稚児、 ちご: 스님의 곁에서 수발을 드는 수행자)’와 육체적 사랑을 나눴고 이러한 육체적 관계는 치고가 성인이 될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치고가 어른이 되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깊고 끈끈한 ‘정신적 유대관계’로 발전되었다. 반면, 그들에게 있어 여성을 향한 성적욕망을 뜻하는 여색(女色)은 미성숙하고 경솔한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남색문화는 사무라이계층이 실권을 장악하고 군사봉건국가의 형태를 갖춘 12세기 말, 사무라이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계승되어 일본사회에 더욱 깊게 스며들었다. 사무라이 사이에서 남색이 전파될 수 있었던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교를 숭상하던 사무라이들은 어릴 적부터 수도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는데, 남색의 근원이었던 그 곳에서 어린 소년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수발하던 스님과 남색을 경험하며, 동성애를 이상적인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몸으로 익혔던 것이다. 1603년 에도시대가 막을 열기 전까지 계속된 장기간의 전쟁은 사무라이들이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남성들만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했다. 에도시대(1603~1868)의 국가적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에도 사무라이들은 반란을 막기 위해 집을 떠나 도성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여성과의 만남은 여전히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사무라이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남색문화인 ‘와카슈도(若衆道)’를 생성시켰고 남성간의 사랑을 나누었다. 와카슈도는 글자 그대로 ‘어린 소년의 길’을 일컫는데, 불교 수도원에서의 낸자와 치고의 관계와 동일하게 연륜이 있는 사무라이와 그에게서 무술과 생활양식의 교육을 받던 어린 사무라이는 ‘의형제 관계’에 의의를 둔 육체적인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와카슈도는 빠르게 끓고 식어버리는 한순간의 육체적 로맨스가 아니었다. 두 사무라이는 육체적인 관계보다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관계를 중시했고, 이는 둘의 끈끈한 의형제를 일컫는 동시에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헌신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두 사무라이는 서로에게 육체적, 정신적 지주가 되어 전쟁 중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서로를 지켜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국시대 ‘3영걸(三英傑)’로 불리며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다이묘(大名: 많은 영지와 권력을 가졌던 봉건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富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独川家康) 또한 그들과 와카슈도의 관계를 나눈 어린 사무라이가 있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여러 역사 문헌들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더욱이, 다이묘에게 있어 아내와의 혼인은 자손번영을 위함이 우선이었고, 그들의 남성 애인들은 그들과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교감을 나누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아내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로 여겨졌다. 남색이 상징하는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을 추구한 다이묘는 지방 출장 중 료칸에 들러 머무를 때에도 어린 남성들을 성 상대로 부르기도 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2005) 18세기에 접어들어 수도원과 사무라이 사이에서 성행했던 남색은 교토와 오사카 등지의 대도시 내에서 상업화되기 시작했다. 쇼군의 명령에 따라 막대한 수의 사무라이들은 도성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그 주변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성장하는 도시의 사회기반 시설 축조를 위해 곧 수많은 일반 백성들이 투입되었고 도시 인구는 순식간에 급증하였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사무라이들의 와카슈도는 이상적 로맨스의 형태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무인 계급의 꽃’이라 불려졌고, 남색은 상류층들의 사랑 혹은 여가의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곧 일반 백성들은 남색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특히 시장경제 발전으로 부를 축척하게 된 중산층들은 성매매된 남성 사이의 육체적 관계를 통해 상류층의 순수한 사랑을 즐겼다. 상업적 성매매는 1650-1750년 사이 최고점을 찍었는데, 성매매 종사자의 수는 남녀를 불구하고 상당했고 성매매는 매춘가 뿐 아니라 가부키 극장에 이르기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당시 남성 가부키 배우들은 극장무대에서는 공연을, 공연을 마치면 다른 남성을 상대로 성접대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순수함과 고귀함의 상징이었던 남색은 사치와 성적방종의 그늘에 퇴색되어 갔다. 쇄국 정책을 펼쳤던 에도막부가 몰락하고 도래한 메이지 시대(1868~1912)에서 남색은 문화적 격변기를 맞이한다. 중앙집권적 국가를 수립한 메이지 정부는 개방경제를 펼쳐 해외문물을 수용하고 외국과 통상외교를 이루었는데, 이 때 서양인들과 그들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기독교적 관점을 가지고 일본의 동성애를 바라본 서양인들은, 남색이란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 사악하며 인간의 자연적 혹은 생리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서양에 대항할 만만 국력 증진이라는 야심을 품고 있던 메이지 정부에게 서구의 비난은 국가적 수치였고 망신이었다. 권력향상을 위해 메이지 정부는 결국 서양문화를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한 때 사회주류를 이루던 남색문화는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갔다. 뿐만 아니라 에도시대에는 남색이 정신적 유대감과 결속력 강화를 이끌어 국가의 강력한 봉건질서를 유지하는 핵심적 역할을 했지만, 봉건질서가 붕괴된 메이지 시대에는 정부가 남색 문화를 지속시켜야 할 실질적 이유가 없었다. 그 후 다이쇼 시대(1912~1926)에는 처벌을 가하기까지 하며 억압되었던 남색 그리고 동성애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에 대해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의 일본 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현대에는 각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 만화 등의 대중매체가 동성애가 ‘헨타이(変態)’ 즉, ‘변태성욕’ 이거나 ‘단지 허구세계에서 존재하는 판타지’라는 잘못된 편견을 대중들에게 불어넣어 일본사회의 왜곡되고 편협적인 동성애에 대한 이해를 부추기고 있다. 이토록 일본 사회가 소외시키고, 부정하고, 각색한 동성애는 결국 ‘동성애=비정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쓰라린 차별대우를 겪고 그들의 존재는 외관적으로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회의 그늘로 내몰리고 있다. 물론, 이에 반한 노력도 지속되고 있는데, 1994년부터 매년 열리는 퀴어(Queer)문화 축제인 도쿄 레인보우 퍼레이드에서는 무지갯빛 코스프레와 페이스페인팅으로 치장한 성소수자들과 일반 시민들이 함께 동성애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개혁적 조례, 동등한 권리 보장 등을 주장하며 성소수자라는 사회적 편견을 해방하고 자유로운 사랑이 포용되는 미래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한 미술작품, 사탕더미.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매료되어 집었던 사탕 하나 그리고 그 상징적 의미에 대한 깨달음은 나를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찰로 이끌었다. 학부시절 젠더학을 수강하고, 대학원에서 인도네시아의 통합적 섹슈얼리티 교육(comprehensive sexuality education)에 대해 연구를 했던 내 모습을 돌이켜 보면, 고등학생 때 마주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와 연인 로스 레이콕의 애달픈 사랑이야기는 내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고 내가 한 사회의 동성애를 배우게 되는 계기였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작가의 사랑이야기가 나를 ‘사랑과 섹슈얼리티’라는 주제 그리고 ‘사회담론’이라는 이슈에 대해 탐구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에 큰 감사함을 느낀다. 또한 일본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서양의 의식에 토대를 둔 사회담론에 의해 격변되었고 현재는 동성애자들을 ‘성소수자’라는 카테고리로 정의해 사회의 구석으로 밀어내고 있는 데에 안타까움과 동정을 느끼며, 일본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의식 신장이 있기를 희망하고 그들의 인권 증진을 향한 노력을 지지한다. 한 때 일본인들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 형태의 사랑’으로 여겨지던 동성애를 다시금 이해하고 포용할 때, 궂은비가 끝나고 떠오르는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동성 연인의 사랑도 사회의 편견을 해소하고 아름답게 파란 상공을 빛낼 거라는 부푼 기대를 가져본다.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전시회관람후기]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미술/이혜자

글,사진: 이혜자 (푸드 코디네이터) 올해 3월 세계 보건기구(WHO)에서 팬데믹이 선포되고, 우리는 지금까지 겪어 본적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코로나19사태는 전 세계인류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남기고 있다. '잠시멈춤' '사회적 거리두기'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근본적인 가치,돌아가야 할 익숙한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의 폐쇄사회는 우리의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도 깨닫게 한다. 불확실성만이 확실한 이 시대, 이제 우리는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뉴노멀'에 적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변형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코로나 이후 전세계에서 크고 작은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그중 문화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전세계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의 휴관으로 인해서 전시장에서 전시를 관람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안으로 대부분의 유명 미술관들과 박물관들은 유튜브, 홈페이지를 통해 다양한 전시를 가상현실, 온라인 전시로 감상할 수 있도록 현재 대부분 온라인 서비스를 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온라인으로 즐길 수 있는 공연, 전시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휴관된 국공립 미술관의 온라인 전시 투어가 활발히 열리고 있는 반면에, 개인 갤러리 경우는 전시를 위해서 사람들이 몰리지 않고, 서로 대면하지 않도록 예약제로 전시를 보게 하고 있다. 사실 이렇게 힘든시기에 왜 하필 미술관이냐고 묻는다면, 그림을 통해서 마음을 환기시키고 코로나로 삶의 균형이 무너지고, 움추려 들었던 우리마음에 위안과 감동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우리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 코로나시대, 이제 잠시 생각을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다 볼 시간을 가져보자. 시간을 넘어서, 서로 다른 공간 속에서 작품과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면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APMA-CHAPTER TWO 아모레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고미술 - 소장품' 특별전을 최근에 다녀왔다. 이제 미술관은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예약으로 회차별로 관람객을 제한하고 있다. 입장시 시간대별로 2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코로나 확산 방지와 안전한 관람을 위해서는 발열 체크와 QR 코드 체크인, 마스크 착용은 필수사항이다. 평소에 비해 불편하고 번거로울 수 있지만 2시간 동안 전관을 20명만 관람하기 때문에 조용하고 쾌적한 관람이 가능하다.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병풍, 회화, 도자기, 금속, 목가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모두 폭넓게 6개 전시실에 구성되었다. 전시는 유구한 시간과 미감이 오롯이 녹아내린, 고미술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또한 작품들을 한눈에 마주하는 기분은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전시' 사진에는 담을 수 없는 섬세함은 직접 봐야만 느낄수 있지만, 제가 느꼈던 감동과 고미술의 아름다움을 함께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1 전시실] 고려시대부터 근대시대의 회화들과 벽면을 가득 채운 병풍들. 또한 보물 제1246호인 '수월관음도'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모란도 8폭 병풍 모란은 옛부터 부귀영화를 의미하는 꽃으로 궁중의 다양한 행사에 배설되었다. #고종 임인진년도 8폭 병풍 1902년 덕수궁에서 열린 마지막 궁중 연향을 기록을 목적으로 만든 계병 #수월관음도 관음의 자부심을 맑은물에 비친 달빛에 비유한 수월관음도는 화려하면서도 섬세함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귀족 불교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어 보물 제1462호로 지정되어 있다. [2-3 전시실] 선사시대토기 부터 조선시대까지 도자공예품 #고려시대 상감도자기.청자 12~13세기에 전라도 강진, 부안에서 최고급 청자가 제작되었는데 옥처럼 맑고 영롱한 빛깔을 내는 비색청자는 당시 중국에서 '천하제일'이라 칭송될 정도였다. #조선백자 절제된 형태와 눈처럼 흰 빛깔 당당한 형태에서 느껴지는 위엄과 부드러운 곡선미가 아름답다. [4 전시실 ] 혼례 때 사용되던 가마 ' 서인교' 네 사람이 가마채를 들어 운반하는 서인교. 사대부 부녀자들이나 혼례 때 타던 가마. 불로장생을 뜻하는 십장생과 다산을 상징하는 포도 등 길상물을 가마에 정교하게 부각하고 유리창에는 부부화합을 의미하는 화조화를 그려 넣었다. [5 전시실]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금속공예와 섬유공예작품. 조선시대의 화려한 바느질 문화를 살펴볼수 있는 공간 #활옷 활옷이라고 불리우는 신부의 혼례복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의복이다. #댕기 신부가 혼례복을 입고 족두리나 화관을 쓸 때 쪽머리의 뒷쪽에 붙여 길게 늘어뜨린 뒷댕기를 말한다.검은색 비단에 꽃과 수복문을 금박으로 입혀 제작하였으며 옥, 호박 등의 패물, 색실을 엮어 두 갈래의 댕기를 연결하면서 화려함을 더하였다. #섬유소품 바느질의 기본도구인 바늘집과 바늘꽂이, 골무, 버선본 비단에 정성스레 수놓은 수저집과 화려한 색상, 패턴이 돋보이는 조각보는 정교한 바느질 수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이다. #장도 원래 남녀공용으로 사용하는 실용적 목적의 도구였으나, 조선후기 부터는 절개나 충절을 상징하는 장신구 기능이 강조되어 노리개의 주장식으로 사용 #뒤꽂이.동곳.지환 뒤꽂이와 동곳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장신구 지환은 두짝으로 이루어진 가락지와 한짝으로 된 반지로 구분된다. 보통 은과 옥, 호박 등의 보석으로 만들었고, 박쥐나 수복문과 같은 길상적인 문양을 장식하기도 했다. #노리개, 비녀 등 정교하고 세련된 장신구들 [6 전시실] 주거와 실생할에 밀접했던 목가구와 목공예품 #사각반 소반은 대체로 가내수공업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각 지방마다 전통적인 형태가 있다. 대표적으로 나주반, 통영반, 해주반으로 구분할수 있다. #반닫이 반닫이는 전면에 문을 달아 위아래로 여닫을 수 있는 수납가구이다. 네 면의 모서리를 감싸는 귀장식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통일감을 선사한다. * 이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칼럼] 열 일곱 소녀의 도전/조은아

조은아 “당신들은 자녀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녀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 이 가슴 뜨끔한 말은 2018년 12월,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제24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연설에서 한 말이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는 누구인가. 2003년 1월 3일 스웨덴에서 태어난 그녀는 11세에 자폐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는다. 그 주요 증상 중에 하나가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것인데 그레타에게는 환경 문제가 그 대상이 되었다. 특히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주목했던 그녀는 지구의 환경이 파괴되어 가는 것에 침묵하고 기후 변화 대응에 미온적인 어른들에게 반항의 의미로, 2018년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등교를 거부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은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ForFuture)’이라는 해시태그로 자신의 '등교 거부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며 같이 동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의 행동은 서구권 진보 청소년층을 주축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그녀의 지지자들을 양산해 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FridaysForFuture’이라는 캠페인으로 발전하고 200여국 2만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전파되었다. 타임지에 실린 그레타 툰베리 이 물결은 소셜 미디어 밖으로 넘쳐 2019년 3월 15일, 125여개국 2천여 도시에서 100만명 이상이 운집한 적극적인 기후 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학생 주체 시위,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 시위(School strike for climate)’로 이어진다. 2019년 9월 20일과 27일에는 150여개국 4500여 도시에서 400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레타는 또 1년간 휴학(Gap Year) 하고 영국에서 미국, 스웨덴에서 스페인까지 비행기가 아닌 보트로 이동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비행기가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를 발생하는지 알렸다. 지난해 1월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 9월에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UN 기후 행동 정상회의, 12월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UN 기후 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 연단에 서서 기후 변화에 대해 어른들이 적극적인 행동을 해 줄 것을 호소했다. 올해 열렸던 다보스포럼에서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의 설전 중 ‘트럼프 대통령과 기후 변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 할 만큼 세계 정상들 앞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지난해 뉴욕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포브스지 선정 올해의 여성 100위, 과학 저널 네이처 올해의 인물 10인으로 선정되는 등 열 일곱살 소녀의 활보는 누구보다 진보적이고 전 세계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컸다. 그레타 1인 시위 모습 영웅 인가, 꼭두각시 인가. 물론 그녀가 유명해 지면서 각종 반격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비행기 대신 기차를 이용해 이동하면서 먹는 음식들이 일회용 포장지에 싸여져 있고, 비건을 주장하는 그녀가 집에서 최고급 가죽 쇼파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녀가 탔던 무탄소 태양광 동력 요트는 완벽한 무탄소가 아니었고 선원들은 그녀의 퍼포먼스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어야 한다는 등 그녀가 스스로 영웅이 되기 위해 혹은 정치적 노리개로 조정 당하며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 선 비판과 조롱들이 쏟아졌다. 대서양을 가로 지르며 4800km를 항해한 그녀의 최고급 태양열 요트팀의 창설자이자 선장인 피에르 카시라기는 모나코 공가의 외손자로, 최상류층이자 셀러브리티에 속한다. 단지 배기가스를 뿜어내지 않았을 뿐 엄청난 사치성 퍼포먼스였다는 것이다. 일반 유람선을 이용하더라도 비행기로는 10시간이면 갈 거리를 배를 이용해 수 일에 걸쳐 감으로써 식료품, 폐기물, 기타 생필품 등의 수요가 늘어나고, 배 안에서 사용해야 하는 전기도 또 다른 에너지를 태워 얻어내야 한다. 또한 1인당 편도 여행에 드는 유류의 양은 10시간과 10일 내내 엔진을 돌리는 것을 비교할 때 비행기 쪽이 오히려 적다. 할아버지는 영화 감독, 아버지는 배우, 엄마는 오페라 가수라는 뒷배경과 ‘여성, 청소년, 장애인’이라는 관심 받기 좋은 삼박자의 테마로 그녀가 더 급격히 유명세를 탈 수 있었다는 말은 완벽한 억측도 아닐 것이다. 또한 그레타의 주장은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는다는 '위급 상황'임을 강조하며 여러가지 즉각적이고 강도 높은 조치를 취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특히 화석 연료의 사용을 중단하고 탄소 배출 규제를 급격히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흥공업국과 개발도상국들로부터 “경제 성장을 포기하라는 소리”냐는 반발을 사는 등 그녀가 매우 극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소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녀가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환경운동가여서가 아니다. 17세 소녀에게 기대한 그 이상의 것 처음 어린 소녀 그레타가 매주 금요일 학교 가기를 거부하고 스웨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나는 곧 그녀가 학교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해서 미래의 환경 인재로 자라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교과서 같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행보로 나를,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물론 그레타의 활동으로 인해 기후 변화 관련 정책을 직접적으로 바꾼 정부는 없다. 하지만 아직도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그녀가 ‘나의 행동으로 세계가 바뀔 수 있다’는 신념으로 세계의 기후환경 문제에 불을 지폈다는 사실 자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해 말 과학전문지 더 뉴사이언티스트(The New Scientist)는 2019년을 그레타와 시위대의 활동으로 인해 대중이 기후변화에 대해 "마침내 눈을 뜨게 된 해"라고 평가했다. 소셜미디어에서 최신 유행에 열광하던 전세계의 수 백만명의 청소년들이 그녀의 #FridaysForFuture 캠페인으로 인해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된 것은 대단히 큰 성과다. 또 그녀로 인해 비행기 승객 한 명이 1㎞를 이동할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285g으로 기차(14g)보다 20배 이상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스웨덴에서는 비행기 탑승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는 문화 현상인 ‘플뤼그스캄(Flygskam/플라이트 쉐임Flight shame)’이 생겼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기차 여행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뜻의 ‘탁쉬크리트(Tagskryt)’라는 말도 탄생했다. 현실적인 가장 큰 성과로는 장 클로드 융커 유럽 연합 집행위원장으로부터 7년간 EU가 1조 유로를 기후 변화 대비에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환경 운동’은 인간이 행동의 자유를 앞세워 무엇이든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도덕적 도전’이다. 꼭 해야만 하는 행동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서 지속적으로 의미와 의견을 형성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레타는 이슈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을 늘리고 이들을 보고 따라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는 것이다. 완벽한 방법은 없다. 누구에게든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 만약 누군가 완벽한 환경운동가가 되겠다고 한다면 일단 입고 있는 그 화학 섬유의 옷가지부터 벗어 던져야 할 것이다. 천연 소재라도 그 소재가 옷으로 가공되는 동안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이산화탄소와 각종 부자재를 생각한다면 그 조차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회용 비닐 봉지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종이 용기 사용을 권장하지만, 이 종이 용기조차도 일정한 형태를 만들고 내용물이 새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플라스틱이나 포일 등이 포함된 여러 개의 소재 층으로 이루어진다. 이론적으로 각 층을 분리해 종이만 재활용할 수 있겠지만 누가 과연 그 얇은 종이팩의 층을 한꺼풀씩 분리해 낼 것인가. 옥수수, 사탕무, 카사바 등의 작물에서 추출한 원료로 만든 친환경 수지(PLA) 제품들은 ‘퇴비화가 가능하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그냥 던져두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들 제품을 제대로 분해시키기 위해서는 높은 열과 수분 조절이 필요한 전문 퇴비시설이 있어야 한다. 일회용 황색 종이 봉투는 그 제조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물과 천연자원이 사용되면서 재사용 비닐 봉지에 비해 지구온난화 잠재력이 80배나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관심을 갖는 것, 지속적인 이슈에 반응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꼭 해야 할 도덕적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일 것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을 미루는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더 망가진 지구를 물려주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일이다. *이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자카르타 티타임3] 안 보고 안 먹고 운동 안 할 자유

[자카르타 티타임3] 안 보고 안 먹고 운동 안 할 자유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텔레비전 화면에 연예인의 고개 숙인 모습과 자막과 함께 이혼 이야기가 반복해서 흐른다. 개인의 애정사가 전국민의 현안이 됐다. 바람을 폈네 말았네… 불똥이 당사자 주변인에게 튄다. 잠시 후 어느 당 국회의원의 막말하는 장면이 반복된다. 막말한 국회의원은 당장은 욕을 먹는 것 같으면서도 인지도가 급상승해 대선후보급이 됐다. 폭우가 내릴 거라고 주문을 외운다. 이어 침수된 논과 콸콸 흘러 넘치는 물이 화면에 가득 차서 안 빠진다. 발리 화산 분출 장면이 반복된다. 홍수가 난 곳도 화산이 분출한 곳도 이제 다 진정이 되어서 정상생활로 돌아왔지만 사람들의 뇌리에는 여전히 재난 지역이다. 스크린에 시선이 머물자 생각이 멈추었다. 말을 하다가 잠시 텔레비전 화면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디까지 말했더라?” 대화가 끊겼다. 무심코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 드라마 한 장면을 보았는데, 설거지도 못하고 나가게 생겼다. 스포츠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도 올림픽과 월드컵 경기를 실시간으로 보다시피 하고 누가 메달을 땄는지 다 안다. 건물 외벽, 식당 벽과 기둥, 이민국 대기실, 공항 대합실, 열차 안, 버스 안 등등 어디에나 스크린이 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수한 장면이 반복적으로 뇌리에 박힌다. 세뇌 수준이다. 보고 싶지 않다. 이쯤 되면 보는 게 독이다. 성인병을 예방하려면 부아메라를 꼭 먹으란다. 비타민C를 보충하기 위해 로니주스를 먹고, 유산균을 위해 막걸리를 마시고,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오리 고기를 먹고… 눈을 보호하기 위해 카로틴이 많이 든 당근을 먹고, 튼튼한 뼈를 만드는 칼슘을 채우기 위해 멸치도 많이 먹어야 한다. 양파도 먹고 피망도 먹고 가지도 먹고.. 먹고 먹고 또 먹고 계속 먹어야 한다. 내 몫으로 나온 음식은 남기면 안 되고, 편식하면 얼굴이 미워진단다. 모범적인 어린이가 되기 위해 내 그릇에 담긴 국을 국물까지 먹었더니 배가 빵빵하고 체할 것 같았다. 피망은 맛을 모르겠고 소화도 안 된다. 당근을 익혔을 때 강해지는 특유의 향이 거북하다. 어떤 때 고등어를 먹으면 몸이 가렵다. 포도주는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속이 울렁거린다. 빈 속에 주스를 마셨더니 속이 쓰리다. 이쯤 되면 음식이 독이다. 열심히 먹으라고 하더니 이제는 살을 빼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한단다. 걸어라, 달려라, 자전거를 타라, 유산소 운동만 하지 말고 근육 운동도 해라. 국민체조, 에어로빅, 요가, 필라테스 등등 나날이 운동도 발전한다. 똥배 없는 납작한 배, 잘록한 허리, 근육이 탄탄한 등, 날씬한 팔뚝, 곧은 다리, 매끈하고 탄력 있는 피부… 누군가는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차 사고가 났고, 누군가는 마라톤 중독으로 연골이 닳아 없어져서 오히려 못 걷게 됐다. 이쯤 되면 운동이 독이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안 보고, 먹고 싶지 않은 것을 안 먹고, 운동하지 않을 자유를 보장하라!!! (끝)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칼럼] 파자르 부스토미와 부야 함카/배동선

배동선 작가 오늘은 영화 이야기입니다. 2017년 9월에 개봉된 CJ 엔터테인먼트 합작영화 <사탄의 숭배자>(Pengabdi Setan, 조코 안와르 감독)에 420만 명 관객이 들어 그해 로컬영화 흥행 수위를 차지하면서 당시 인도네시아 영화판은 목하 호러 영화 천지로 흘러갈 기세였어요. 하지만 불과 몇 개월 후인 2018년 1월 개봉된 <딜란 1990>(Dilan 1990)이 630만의 관객을 불러들여 그해 로컬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하면서 청소년 로맨스 장르가 급부상합니다. 이 성적은 인도네시아 로컬영화 전체를 통틀어 역대 2위 흥행성적이기 했어요. 불과 30년 전인 1990년대 학생들의 풋풋한 사랑이 그 또래 젊은이들은 물론 당시 학창시절을 보낸 40~50대 인도네시아인들의 감성을 자극한 것이죠. 마치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94> 같은 한국 드라마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그 속편 <딜란 1991>도 이듬해 520만 명 관객으로 2019년 흥행수위를 차지하면서 인도네시아인들이 품은 90년대에 대한 향수가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확인합니다. 3부작의 마지막편 <밀레아: 딜란의 목소리>(Milea: Suara dari Dilan)가 올해 2월 개봉해 310만 명의 관객을 모았는데 현재 코로나 사태로 극장 영업재개일정이 불확실한 현재, 이번에도 이 영화가 로컬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일련의 영화 시리즈가 3년 연속 흥행수위를 차지한 적은 없었으므로 제작사인 팔콘픽쳐스(Falcon Pictures)와 파자르 부스토미(Fajar Bustomi) 감독은 현지 영화사에 큰 획을 긋는 셈입니다. 가린 누그로호, 하눙 브라만티오, 리리 리자같은 유명 영화감독들을 배출한 자카르타 예술대학(Institut Kesenian Jakarta-IKJ) 동문인 파자르 감독은 청소년 로맨스 영화의 전도사 같은 사람입니다. 2008년 감독 데뷔작도 <베스트프랜드?> (bestfriends?)라는 청소년 영화로 25만 명 관객이 들었고 올해 3월 12일 개봉한 청소년 로맨스 코미디 <마리포사>(Mariposa)는 팬데믹으로 극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급히 스크린에서 밀려나는 불운을 맞았지만 그 사이 74만 명의 관객을 모아 올해 로컬영화 흥행 7위에 올라 있습니다. 참고로 웬만한 현지 제작 영화들은 관객 20만 명 정도가 손익분기점이어서 파자르 감독은 데뷔 이후 줄곧 제작사에 적잖은 이익을 안겨준 흥행감독인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난독증때문에 정규 커리큘럼 소화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콘티로 보여주거나 누군가 잘 설명해 주지 않는 한, 글로 된 대본은 그에게 가로세로 줄이 그어진 매트릭스처럼 보일 뿐이었어요. 그래서 영화 디렉팅 전공과목을 낙제한 그는 학교를 1년 더 다녔고 필기 대신 영화테마 실습과제로 A학점을 받아 이듬해 졸업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죠. “장애로 인해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고 더 많은 질문을 던져야 했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이를 피하려 편법을 쓰지 않고 정면으로 극복해 가는 모습은 국적이나 직종을 떠나 항상 감동적입니다. 그런 그가 함카(Hamka, 1908~1981)의 전기영화를 준비 중이란 소식은 뜬금없기도 하고 사뭇 신선하기도 합니다. 미낭까바우 출신 성직자이자 사상가였고 유명한 문인이었던 압둘 말릭 까림 암룰라(Abdul Malik Karim Amrullah)는 훗날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 영웅으로 선정되는데 함카(Hamka)란 그가 메단에서 글을 쓰던 당시부터 사용한 필명입니다. 청소년 로맨스 영화의 대가가 함카 같은 역사적 인물의 생애, 그것도 수카르노 시절 반란혐의로 투옥되는 말년까지를 포괄하는 중량감 있는 일대기를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까요? 1908년 생인 함카는 16살이던 1924년부터 이슬람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이후 인도네시아 양대 이슬람단체 중 하나인 무함마디아를 통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는데 1942~1945년 사이 인도네시아에 진주한 일본군에 협조한 일로 한동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는 여러 저서도 남겼는데 특히 1938년 그가 30세 때 쓴 소설 <반더베익호의 침몰>(Tenggelamnya Kapal van der Weijk)은 곧 한국에서도 첫 번역본이 출간됩니다. 2013년 동명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이 작품에 그려진 미낭까바우 출신 젊은 남녀의 치열한 사랑이 파자르 감독의 청소년 로맨스 취향과 코드가 맞아떨어졌던 걸까요? 파자르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감명받아 영화감독의 길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자신을 옥에 가두었던 수카르노의 장례식을 이맘이 되어 직접 집전했던 그의 꿋꿋하고 진실된 인격을 좋아합니다. 이 영화는 나의 <쉰들러 리스트>가 될 것입니다.” 이 영화의 대본을 준비하는 데에만 4년이 걸렸다는 파자르 감독은 이렇게 자신의 최고작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 개봉을 계획했던 이 영화는 코로나 사태에 밀려 사실상 언제 관객들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작년 조코 안와르 감독이 영화 <군달라>(Gundala)로 새롭게 열어재친 인도네시아 토착 수퍼히어로 장르는 부미랑잇 시네마틱(Bumilangit Sinematik)의 세계관을 토대로 <스리아시>(Sri Asih), <피르고와 스파클링스>(Virgo dan Sparklings) 등 후속작이 기획되어 있습니다. 한편 또 다른 현지 수퍼히어로 세계관인 사트리아 데와 시리즈는 와양 그림자극의 주인공들을 각색한 수퍼히어로 영화 일곱 편을 2027년까지 매년 한 편씩 개봉하기로 하고 올해 그 첫 번째 작품인 <사트리아 데와: 가똣까차>(Satria Dewa: Gatotkaca)가 촬영을 시작하는 등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은 보다 풍성한 한 해를 맞을 예정이었습니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말이죠. 최근 수 년간 매년 100편 이상 로컬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헐리우드나 볼리우드, 또는 한국에 아직 비할 바 아니지만 동남아에서 영화제작이 가장 활발한 나라이고 2016년 현지 영화산업이 해외자본에 개방된 이후 획기적인 질적, 양적 성장을 거듭하던 중이었습니다. <써니>, <여고괴담>, <수상한 그녀>, <7번 방의 선물> 등 한국영화 리메이크작들은 물론 앞서 언급한 감독들이 만든 좋은 영화들도 꽤 많이 나왔고요. 그래서 어쩌면 지금까지 그냥 지나쳤을 인도네시아 영화에도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고 좋은 영화와 좋은 감독에게 한인 영화애호가들도 조금 힘을 실어줄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의 파자르 부스토미 감독의 함카 전기영화 개봉을 손꼽아 기대합니다. (끝)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탐방기] 외로울 때 나는 해양 박물관에 간다/사공경

글. 사공경(한인니문화연구원장) 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알고 싶던 것도 많았던 시절, 외로울 때 나는 바다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순다 끌라빠 지역에 있는 해양 박물관(Museum Bahari)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바다 향기에 흠뻑 취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해양박물관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유럽 시장에서 인기가 많았던 육두구와 후추같은 향신료, 바틱같은 직물, 커피, 차, 구리, 주석, 인디고 염료 등을 보관하고 포장하는 창고였다. 이 상품들은 가까이 있는 순다 끌라빠 항구를 통해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항구로 나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1652년부터 건축하기 시작하여 여러 해가 걸려서 완공했다. 건물 가까이 바다가 있어서 염분으로 건물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식에 강한 주석과 동을 건축 재료로 많이 사용하였다. 1718년, 1719년, 1771년에 세 차례에 걸쳐서 보수했다고 박물관 입구에 적혀 있다. 박물관의 몇 개의 출입구 문 위의 돌에 창고 수리, 확장 또는 추가가 된 연도가 적혀 있다. 건물을 지탱했던 거꾸로 된 Y 자 모양의 큰 철 고리가 건물 벽에 여전히 남아 네덜란드 건물의 튼튼함을 자랑하고 있다. 일본 통치기에는 군수품 창고로 쓰였다가 독립한 후에는 국영전력공사(PLN)와 국영전화전보국(PTT)의 창고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 1976년에 자카르타 주정부에서 4차 복구를 했고, 1977년 7월 7일 자카르타주지사인 Ali Sadikin에 의해 해양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박물관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VOC 시대부터 있었는데, 앞에 있는 문은 박물관 부근에 위치한 암스테르담 게이트에서 가져왔다. 박물관 50미터 앞에 순다끌라빠 항에 입출항하는 배를 감독하는 전망대가 서 있고, 길을 따라 있던 조개와 해산물을 파는 빠사르 이깐(Pasar Ikan, 어시장)은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진귀한 조개도 참 많았다. 닭발모양이나 뼈만 남은 생선을 연상시키는 조개나 꼬인 오징어 발 같은 조개도 있었다. 모두 바다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해양박물관은 1,835 점의 수집물을 주제별로 나누어 전시되어 인도네시아 해양 유산을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특히 대항해시대의 신기하고 값진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의 발달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여정과도 호흡을 같이 한다. 2009년 보수 후 한걸음에 달려갔다. 가장 달라진 것은 서관 전시실 2층에 순다 끌라빠 항구를 거쳐간 유명한 탐험가와 바다에 관한 전설이 밀납인형으로 실제 인물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70년이나 앞선 대항해를 하여 동남아에 화교가 자리잡는 계기가 된 정화장군, 호주와 뉴질랜드를 발견한 쿡선장, ‘지구는 둥글다’라는 것을 입증한 마젤란 등도 있었다.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죽었고 마젤란 배와 남은 선원이 이 항구에 도착했다.) 바다를 지켜주는 빨간 드레스의 아가씨로 기억되는 마조 여신, 배의 침몰을 예견하는 네덜란드 유령선, 바다의 신 포세이돈 등 풍랑이 이는 험난한 바닷길의 역사가 오롯이 이곳에서 배어난다. 2018년 1월 16일 아침, 박물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반 정도의 건물과 많은 수집품이 불에 탔다. 이후 코로나 19 이전에 박물관의 반 정도를 오픈하고 있었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간 것은 2020년 3월이었다. 반쪽짜리 박물관에서 여전히 풍랑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열도인 인도네시아에서 바다의 중요성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가 아득한 수평선 너머의 다른 세계와 부딪힐 때, 거기에는 늘 소중한 목숨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상대방에 대한 공평이라든가 배려라든가 평등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불의란 힘 있는 자의 특권인가. 이에 저항하는 힘은 언제나 미약한 약자의 몫인가. 강요와 불평등 속에서 이를 묵묵히 받아주는 건 오직 바다뿐이었다. 인류가 바다로부터 얻는 건 엄청나다. 우리는 바다에 잠시도 발을 딛고 살지 못하고 본거지를 뭍에 두고 살지만 바다가 없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한다. 바다의 풍부한 이미지들은 그 불가사의만큼이나 차고 넘친다. 인류 역사상 아무도 바다 전부를 읽어내지 못했다. 바다는 늘 미지의 바다로 남아있지만, 인도네시아의 해양박물관엔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그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려 노력한 이들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주 오랜 신화시대의 바다로부터 18세기 순다 끌라빠 항구의 분주한 저녁 풍경까지 그린 디오라마는 우리를 경험하지 못한 과거로 데리고 간다.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선박들의 모습과 항해, 어로 장비들은 길 없는 바닷길을 헤쳐론 발자국들이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각 지역의 배 모형들을 감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항해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바다내음에 취하게 만든 기억에 남는 몇 전시품만 소개하고자 한다. Dugong은 말레이어로 ‘인어’라는 뜻이다. 이처럼 인어로 불리던 큰 두융(Dugong, Duyung)도 박제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두융은 포유류의 한 종으로 열대 바다에 퍼져있고 작은 무리를 지어 산다. 길이는 2-3m 정도이며 몸무게는 150-200kg 정도이다. 임신 기간은 12개월이며 한번에 1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수컷의 엄니와 지방, 눈물을 얻기 위해 많이 포획한다. 두융의 눈물은 향수나 약으로 사용되며 이 생선의 기름은 등불을 켜는데도 사용했다고 한다. 선원들은 배위에서 보았을 때 헤엄치는 모습의 실루엣이 사람을 닮아 두융(듀공)을 인어로 생각했다고 한다. 동성애자인 안드르센은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어서 그 아픔을 작품에서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안드르센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인어공주>라는 동화로 승화시켰듯이 눈물을 향수로 사용한다니 모든 아픔에는 향기가 있는 것이다. 삐니시 배(Kapal Pinisi)는 남부 술라웨시의 부기스(Bugis)족과 마까사르(Makassar)족에서 유래된 전통 범선으로 7개의 돛을 달고 있다. 중요 돛대에 신앙고백이 적혀 있고, 7개의 돛은 이슬람의 성서 코란의 첫 번째 장 Al-Fatihah 기도문 7구절을 뜻한다. 1500년대부터 삐니시 배를 타고 바다를 탐험했지만 14세기부터 이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남부 술라웨시 루우(Luwu)왕국의 사웨리가딩 왕이 청혼하러 삐니시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처음으로 삐니시 배를 탄 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후 삐니시를 타고 돌아오다가 배는 3부분으로 갈라져, 남부 술라웨시의 아라(Ara)와 따나레모(Tanah Lemo), 비라(Bira) 3개의 마을로 밀려왔다. 아라 마을 사람들이 선체를 만든 후에 따나레모 마을 사람들은 선체를 설치했다. 그 다음에 비라 마을 사람들은 7개의 돛을 올려서 마무리를 했다. 배를 고치라고 명령한 사람의 이름이 삐니시라 비라 지역 사람들은 돛을 삐니시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삐니시는 ‘바람과 파도 소리를 들을 때 바다의 향기로 가득차다’ 라는 뜻이다. 순다 끌라빠 항구에는 아직도 삐니시 범선이 큰 돛으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으로 펼쳐져 있다. 여러 개의 깃발을 달고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인도네시아의 암본까지 항해했던 배를 보면 나는 어느새 동화 속을 거닐고 있다. 1700년대에 만들어진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당시 항해 기간은 1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배에 실었다. 심지어는 닭을 키우는 닭장까지 있었다고 한다. 배 앞부분에는 사자상과 여인상이 놓여있다. 사자는 배를 지켜주고, 여인은 성난 파도를 달래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 배의 원형은 암스테르담 박물관에 있는데 네덜란드 정부가 이 배의 모형을 선물했다고 한다. 이 모형 배는 예전에 배 멀미약인 Anytimo를 선전할 때 사용되었던 배의 실제 모델이다. 많은 기회와 희망을 주는 바다를 마음껏 느끼며 인도네시아가 나름대로 구축한 고도의 해양기술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의 창고가 10개 넘게 있었다고 하니 그 엄청난 착취량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라를 빼앗기고 고통당했을 인도네시아인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외로울 때 나는 박물관에 들러 상상의 나래를 펴고 바다로 떠난다. 다약족이 되어 카누를 타고 마하깜 강을 누비기도 하고, 피터팬이 되어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도 한다. 「날개」의 이상(李箱)처럼 박제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삐니시의 의미처럼 새 한 마리가 ‘바람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다 향기 가득 마시며’ 순다 끌라빠 항구의 허공을 날면서 뭍에 딛는 인어공주의 다리의 아픔을 달래주고 있었다.(끝)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에세이]자카르타에서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보낸 7개월/조인정

글,사진: 조인정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2019년 2월 논문 자료 수집 차 자카르타에 한 달 간 체류했다. 체류 기간 중 주말에는 로컬 NGO의 러닝센터를 찾아 학생 및 학부모, NGO 교사들을 인터뷰했고, 주중에는 아트마자야 대학교(Atma Jaya Catholic University of Indonesia)의 국제처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 전략 개발과 홍보 책자 제작 등을 돕는 봉사활동을 했다. 일본으로의 출국 이틀을 앞두고, 대학 국제처 오피스에서 마지막 업무를 하던 중, 함께 일하던 현지인 친구가 아트마자야 대학의 소셜미디어에 올려진 공고 하나를 내게 보여주었다. “인정아, 일본으로 돌아가면 일본 친구들에게 이 정보 좀 공유해 줄래? 접수일이 10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이야.” 친구가 건넨 것은 인도네시아 교육문화부와 외무부가 협력하여 주관하는 외국인 학생 대상 장학프로그램 ‘다르마시스와(Darmasiswa)’였다. 아세안 협력을 위해 1974년 도입된 정부초청 장학프로그램인 다르마시스와는 초기에는 아세안 국가 내 학생들만을 선발했지만 점진적으로 장학금 선발 대상 국가를 넓혀갔다. 1980년대 약 10개국이 참여했던 다르마시스와는 2019년에는 한국을 포함한 101개국이 참여하는 장학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 다르마시스와에 선발된 학생들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총 72개 대학 (2020년 기준) 중 한 곳에서 인도네시아 언어, 예술, 문화 등에 대해 10개월 또는 12개월을 선택하여 학습하고 있다.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친구가 보내준 공고를 상세히 살펴보았다. 그 동안 인도네시아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라 장학프로그램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매년 방학에 인도네시아를 찾았고, 빈곤 아동들을 위한 교육봉사를 해왔다. 교육봉사에서 간단한 인사말 수준의 인도네시아어 밖에 할 수 없었기에, 내 모든 수업은 현지인 친구의 동시통역 없이는 진행이 불가능 헸다. 바디랭귀지와 눈빛으로 인도네시아 학생들과 제약적인 소통을 했던 그 때 자신과 다짐했다. 언젠가 반드시 아이들과의 원활한 대화와 소통을 위해 꼭 인도네시아어를 배울 것이라고 말이다. 더욱이 논문 집필을 위해 현지인들과 인터뷰를 하고, 인도네시아어로 쓰인 교육 관련 통계 자료를 접하면서 인도네시아어 학습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꼈다. 일본에 도착한 나는 분주히 다르마시스와 원서 작성을 시작했다. 4월 학기가 시작되어 나는 석사 논문을 쓰다가도 다르마시스와 합격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간혹 인터넷에 아트마자야 대학을 검색하고 학교 교정을 사진으로 보며 그 곳에 서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드디어 5월에 발표가 났는데 너무 감사하게도 한국 장학생 2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1지망으로 지원했던 자카르타 소재 아트마자야 카톨릭 대학교에서 1년간 인도네시아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클리셰 같은 진리가 실현된 것이다. 자카르타에서의 소소한 일상 오전 9시 15분 나는 꼬스(kost, 게스트하우스 및 원룸 하숙집 등의 인도네시아의 보편적 숙소)를 나섰다. 10시 15분에 인도네시아어 수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차도인지 보행로인지 구별이 안 되는 학교 통행 길을 건너는 것은 매일 연속되는 나의 피할 수 없는 미션이다. 줄지어 지나가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는 보행자를 위해 멈출 기색이 전혀 없는 듯하다. 현지인 친구들이라면 분명 한 손을 내밀어 차를 멈춰 세우고 거리를 당당하게 건넜겠지만, 이는 내게는 마법 같은 광경일 뿐이다. 결국 오늘도 한참을 기다리다가 모든 오토바이와 차가 멈춘 시점에 재빨리 그 틈을 비집고 길을 건넜다. 거리에는 푸르른 열대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로수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식물들을 보며 감탄을 자아내던 것도 잠시, 찌는 건기의 뜨거운 태양아래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땀이 한 줄 한 줄 더 흐르는 것을 느낀다. 육교를 건너고, 울퉁불퉁한 좁은 보행로를 30분 정도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험한 길을 굽이굽이 걸어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한국에서 사온 신발은 눈에 띄게 점점 해져갔다. 매일 왕복 한 시간씩 걸어 통학하는 나를 보며 현지 친구들은 내가 대단하다고 혹은 무모하다고 말했다. 차량·오토바이 호출 서비스인 그랩(Grab)이나 고젝(Go-Jek)을 불러 등하교를 하는 것을 추천해 주며 말이다. 하지만 아직 인도네시아어가 서툴러 간단한 자기소개 밖에 할 수 없던 내게, 그랩과 고젝을 호출하면 받아야하는 운전수들의 확인전화 또는 메시지가 조금 두려웠기에 호출을 쉽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랩이나 고젝을 이용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악명 높은 자카르타의 교통체증 때문이었다. 학교까지 걸어서 30분이면 되는 거리를 차를 타면 훨씬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아트마자야 대학교에서 오전 2시간(10:15~12:15) 동안, 인도네시아 어학연수인 비파(BIPA, Bahasa Indonesia bagi Penutur Asing) 수업을 들었다.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인도네시아에 온 며칠 후 나는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UI, Universitas Indonesia)에서 인도네시아어 레벨테스트를 치렀다. 스피킹 섹션에서 시험관이 인도네시아어로 질문하면 영어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라이팅 섹션에서는 인도네시아로 적힌 시험문제를 이해할 수 없어 시험지에 “저는 인도네시아로 쓸 줄 모릅니다”라고 적어냈다. 당연히 초급과정인 BIPA 레벨 1 클래스에 배정되었다. 아트마자야 대학의 BIPA 레벨 1 클래스는 한국, 일본, 대만, 호주에서 온 학생들 1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학(원)생 신분이었던 나와 대만 친구를 제외하고는 우리 반 학생들은 인도네시아의 기업에서 근무하거나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된 직장인, 직장인의 배우자분이었다. 우리 수업은 Ima선생님의 언제나 활기에 넘치는 한 마디 “Apa kabar semuanya?(모두들 안녕하세요?)”로 시작되었고, 우리는 작은 강의실에서 둥글게 둘러앉아 롤플레이(role-play) 등 참여형 수업 방식을 통해 즐겁게 인도네시아 기초 문법을 학습했다. “인정아 가자!”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나면 항상 나와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두 분의 한국인 주재원 아저씨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학교 옆에 위치한 작은 백화점으로 향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배운 인도네시아어를 최대한 활용해가며 음식점 종업원에게 점심을 주문했다. 내가 가끔 버벅이며 주문 할 때면 아저씨들께서 도와주었고 이렇게 현지 생활에 적응해 갔다. 아저씨들은 식사를 하면서 내게 자신들의 이런저런 인생이야기, 인도네시아에서의 근무 실상 등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러한 그 분들의 이야기 하나하나는 내가 미래에 어떠한 인생을 설계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어쩌면 그분들에게 있어 단지 가벼운 대화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게는 소중한 인생의 교훈이었던 셈이다. 오후 1시 30분, 진정한 인도네시아에서 홀로서기는 이 때 부터 시작이었다. 장학프로그램 원서 접수 시에는 하루 4시간이라고 소개되었던 수업 스케줄은 학교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인도네시아 도착 며칠 전에 2시간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도네시아 홀로서기의 발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시간의 오전 수업을 마치면 하루의 남은 시간은 모두 자유였던 것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논문 집필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던 나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갑자기 주어진 자유 시간에 공허함을 느꼈고 맥이 풀렸다. 하루를 어떻게 가장 생산적으로 활용하여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도 잠시 곧 이전만큼 알찬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당시 아트마자야 대학교는 고등교육 국제화에 발맞추어 활발한 외국인 유학생 유치 전략을 벌이는 중이었고, 한국은 핵심적 국가였다. 아트마자야 대학은 경기도와 대구 소재의 대학들과 교환학생 및 썸머스쿨 프로그램 등을 통한 적극적인 대학 간 협약을 모색 중이었다. 아트마자야 대학의 부총장과 국제처장은 한국인인 내가 한국-인도네시아 대학 간 협약 과정에 있어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부탁했고, 나는 한국 대학 담당자들이 아트마자야 대학을 방문하여 회의를 할 때 영어-한국어 번역을 하는 등의 일을 도왔다. 아트마자야 대학을 돕는 일 외에도 런던대학에 계시는 교수님의 일을 돕기도 했고, 수업시간에 배운 인도네시아어를 복습하고, 현지인 친구들과 맛집이나 카페를 다니면서 자카르타에서의 일상을 즐겼다. 더욱이 한인니문화연구원의 사공경 원장선생님 덕분에 꼬따뚜아(Kota Tua) 역사 연구일,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역사가 있는 문학상 시상식에서의 진행, 해외 외교관들을 만나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 알리기 등의 보람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두 국가의 화합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여 온 인도네시아 한인교민들을 만나 교류하며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다르마시스 장학생으로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는 것 외에도 여러 업무를 맡으며 한국-인도네시아 교육 및 문화예술 교류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 같아 너무도 감사했다. 아쉬운 작별 2020년 2월 말까지만 해도 코로나19 확진자가 없던 인도네시아에도 곧 코로나19는 점진적으로 확산되었고 아트마자야 대학교도 3월 중순부터 캠퍼스 문을 닫았다. 대학의 모든 수업은 대면수업에서 온라인수업으로 변경되었다. 나 또한 8월 말 다르마시스와 프로그램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려 했던 본래 일정을 바꿔 4월 초에 귀국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선택한 인도네시아 유학이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떠나는 길은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을 떠나는 비행기 창밖을 통해 점점 작아지는 자카르타 도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카르타의 따뜻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사랑하는 도시와 조용히 작별했다.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던 BIPA 레벨2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며 다르마시스와 장학 프로그램을 졸업했다. 8월 현재, 한국에서의 생활도 어느새 5개월째에 접어들었다. 인도네시아로 떠날 온갖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도 벌써 작년 이 시기이다. 한국에서의 달라진 일상, 일 년 전과는 다른 모습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내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매일같이 인도네시아 음악을 듣는 일이다. 인도네시아 음악의 가사와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자카르타에서의 아련한 추억에 젖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리고 자카르타에서의 소소한 일상의 기억들을 되새겨 본다. 매일 보던 캠퍼스의 풍경과 도로를 꽉 메운 오토바이와 차들, 하루 다섯 번씩 들리던 모스크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Azan)소리, 저녁 집을 돌아오는 길 까끼 리마(kaki lima)에서의 사떼 굽는 냄새와 나시고랭의 냄새. 내 인생의 소중한 일부가 된 7개월 남짓의 자카르타에서의 생활은 20대 중반의 청춘을 다채로운 감성으로 물들였던 것이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서둘러 떠나야 했던 그 곳. 인도네시아는 곧 만나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는 연인인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그리움이 짙어질수록 인도네시아에 대한 내 사랑은 더욱 더 커져가는 듯하다. 오늘도 나는 그 품 안에 안길 날을 기다리고 있다. (끝)

[에세이] 오늘은 죽기 좋은 날/김은미

글,사진: 김은미 CEO SUITE 대표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을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 속에 녹아들고 모든 사악함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마침내 순환을 마친 저 들판 웃음이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앉은 자식들 그래,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가겠나 -어느 인디언의 시 - 서울 출장 중 주말 아침에 비보를 받았다. 내가 자카르타를 떠나기 전까지도 정정하시던 시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단다. 사방팔방 문의 끝에 자가격리를 피하기 위한 코로나 음성검사증명서를 하루 만에 받았지만, 월요일에 뜨는 비행기가 없었다. 간신히 장례식을 하루 남기고야 돌아올 수 있었다. 시어머니 손에서 자란 보스턴의 아들은 장례식을 맞출 방법을 끝내 찾지 못했다. 인륜도 무시하는 코로나다. 정부의 지침에 따라 직계 가족과 친지들에게만 부고를 보내 문상객도 줄여야 했다. 그런데 빈소를 여러 번 덮을 만큼의 조화가 끝도 없이 배달되었다. 장례식은 자카르타 장례식장과 시어머니 고향에 있는 성당, 그리고 오래전 시아버지께서 중국 고향에 지으신 성당 - 이렇게 세 곳에서 동시에 진행이 되었다. 중국, 미국, 호주, 아시아 곳곳에 사는 친지들과 아들은 온라인으로 실시간 참석을 했다. 좋아하는 꽃과 사랑하는 이들에 둘러싸인 시어머니는 관 속에서도 미소를 짓고 계셨다.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로 평생을 보낸 가정주부가 아니라 어느 유명 인사의 장례 같았다. 재물을 쌓기보다 나누시고, 누가 찾아와도 버선발로 환영하는 시어머니 주변에는 늘 잔칫집처럼 사람들이 북적였는데, 돌아가신 날도 변함이 없었다. 코로나조차 문상객들의 애도를 멈추지 못했다. 진정한 '성공'을 이루신 것이다. 그 성공의 비결은 나눔과 사랑이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나니 더 놀랄 일이 있었다. 오래전 마련된 시아버지 묘소에 합장하지 말고 화장을 해서 바다에 뿌리라 유언을 하셨단다. 자식들에게 조금도 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셨다. 인근 바다에 배를 띄워 붉은 장미 꽃잎과 함께 시어머니를 보내드렸다. 평생 순종, 희생하셨던 시어머니셨는데 떠나실 때는 시아버지보다 더 큰 믿음으로 육신의 허무함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신 것이다. 늘 그렇지만 시간만큼 좋은 약이 없다. 슬픔이 조금씩 가라앉아서 시어머니 유품을 정리할 정신이 든다. 시어머니 방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우리 결혼사진이 나온다. 대머리가 되기 전 남편은 상당히 동안이여 연하남 건졌다며 축하를 받았던 날이다. 그 남자가 엄마를 모시고 살 수 있냐고 조심조심 묻기에 겁 없이 OK 했었다. 결혼식 후에야 인도네시아 내 직계 자손들만 140여 명이 넘는 종갓집인 것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방문객들을 피해 사업한다는 핑계로 수시로 출장 짐을 쌌다. 빵점 며느리가 생존하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은혼식을 순탄히 넘길 수 있었다. 임신이 안 되어 불임 치료를 받던 기간에도, 아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하던 때도, 돈벌이에만 연연한 나와 남편이 수시로 집을 비워도 한 마디 염려나 불평이 없으셨던 분, 그 손에는 늘 묵주가 있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날도 새벽기도와 일요 미사를 빠진 적이 없으셨던 시어머니시다. 우리 아들도 기도로 키워주셨고, 내 사업의 제일 든든한 백도 그 기도였다. 25년간 시어머니와 한집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음성을 높일 일이 없었다. 기 세고 괄괄하던 며느리를 그렇게 기도로 길들이셨던 시어머니께서는 마지막 날 의식을 잃는 순간까지도 묵주를 놓지 않고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고인의 방이 갑자기 위독해져 응급실로 실려 갔던 분의 방 같지가 않다. 마치 떠날 준비를 늘 하고 계셨던 듯 별로 치울 것이 없다. 출장에서 돌아올 때나 생신 때마다 사드렸던 명품백도 옷도 친지에게 미리 나누어 주신 듯 옷장마저 단출하다. 통장에는 딱 마지막 병원비와 장례비용만큼의 현금이 남아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 웰리빙(Well-living)과 웰다잉(Well-dying)을 곁에서 보고 배울 수 있던 이런 분의 며느리여서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다. 어머니,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천국에서도 늘 저희와 함께해주세요.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자가격리 14일의 기록과 단상들/이혜자

글과 사진: 이혜자 푸드코디네이터 인천공항 아침 7시 도착, 텅 빈 활주로와 텅 빈 공항, 위생복을 입은 수 많은 군인들. 코로나가 바꾼 풍경은 우리가 지금 팬데믹의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입국장에서는 군인들이 해외에서 입국한 사람들의 검역과 핸드폰에 자가격리 앱을 설치 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건강검진표와 앱을 확인하면 입국심사가 통과된다. 방역 택시를 타고 지역보건소로 이동. 긴 면봉 같은 것으로 입안과 코안 점막에서 검체를채취하는 방식이다. 보건소에서 대형쓰레기봉투와 마스크, 소독제를 나누어 주었다. 다음날 나온다는 검사 결과가 오후가 되어 '음성'으로 판정되었다고 문자가 왔고 담당 공무원의 전화도 받았다. 자가격리 동안 중요한 일정은 매일 낮12시를 기준으로 오전, 오후 하루에 두 번 체온과 건강 상태를 확인해서 앱에 올리는 일이다. 이제 2주간의 자가격리가 시작되었다. '자가격리'란 정해진 공간을 벗어나지 않고 불필요한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때일수록 몸과 마음의 면역력을 길러야겠다. #Day 1 잠시 멈춘 일상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시 생각해본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Day 2 자가격리 기간 동안 그동안 바쁘게 지냈던 나를 잘 쉬게 해주기로 했다. 삶의 속도를 유지하고 일상에서의 루틴을 지키는 일은 일상을 지탱하는 힘을 준다. #Day 3 교보에서 주문한 책들이 도착했다. 책을 읽고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공부하고 음악을 듣는 시간은 온전히 내 세상 같았다. #Day 4 매일 조금씩 운동을 하려고 한다. 몸의 움직임은 갇혀 있는 감정과 긴장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의식적 움직임'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함께 얻는다. #Day 5 남편과 떨어져 있는 동안 최대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주방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 컸었는데, 혼자 있지만,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다. 매일 올바른 것을 먹으려고 노력한다. #Day 6 “힘들어” 말하려다 조금 더 신중하게 쓰고 싶었다. 정말로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Week 1 자가격리 1주차가 되면서 '코로나블루'라는 우울감이 찾아왔다. 단조로운 일상과 수백 명씩 늘어나는 자카르타의 확진자 수와 그곳에 혼자 남겨진 남편 생각에 마음이 아파졌다. "당신 생각은 어때?" "행복해?" 매일 물어보던 남편의 물음들이 오늘 몹시도 그리웠다. 마음으로 기도하는 밤이다. #Day 8 날씨가 흐리고 몸도 무겁다. 오늘도 창밖을 보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마음은 안 그런데 몸이 그런지, 최강의 달콤한 맛이 필요해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다 먹고 나니 기분도 다시 좋아지고 마음도 너그러워지는 기분이다. #Day 9 이제는 이 집의 공간과 여름과 친구가 되었다. 지금은 집의 배려를 받는 시간. "바람이 솔솔 불어와요". #Day 10 새벽2시, 오후에 마신 커피 때문인지 잠이 안 온다. 굳이 자려고 애쓰지 않는다. 스탠드 등을 켜고 책을 읽는다. 내일도 온전한 나만의 하루가 기다리고 있으니. #Day 11 딸과 통화를 하다. "엄마 이제 며칠 남지 않았어요. 금방 시간이 다 지나갔네", 딸의 시간은 또 다르게 흘러가나 보다. 하루가 길게 느껴지는 날. #Day 12 따뜻한 차 한잔이면 되었다. 나를 위로하는 일에 거창한 무언가가 필요한 게 아니라고 느꼈다. #Day 13 깜빡깜빡하다가 꾸벅 꾸벅하다가 하루가 다 간 날. 별 볼 일 없는 일들로 가득한 오늘 하루의 마무리는 밤하늘 별 보기. #Day 14 반가운 여름비가 내린다. 창문 밖에 여름이 있다. 내일이면 자가격리도 끝이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다. 평온한 밤이다. 안전하고 안락했으나 조금은 외롭고 지루했던 자가격리를 끝내고 건강하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의 희생과 수고로 나의 평범한 일상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소중한 시간. 수많은 미래학자는 코로나가 인류 문명사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하고, 다시 일상의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기로에 서 있다. "의료진 덕분에 ,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 "힘차게 코로나를 극복하고 세계가 더 건강해지고 환해 지기를 응원합니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에세이] 자카르타 그리고 전염병/노경래

노경래 남부 자카르타에 있는 리뽀몰 끄망에 자주 들렀다가 그럴듯한 레스토랑들이 있는 끄망 라야로 가곤 한다. 리뽀몰에서 끄망 라야로 가기 위해서는 차량 두 대가 교행이 어려운 골목길을 지나야 한다. 그 골목길을 지날 때 마다 느끼게 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 참 무던하다고……. 그 골목길의 초입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는 오르막길이다. 그런데 그 오르막길에는 항상 하수구의 물이 넘쳐 흘러내리고 있다. 오르막길 위쪽의 하수구가 더 이상 연결되지 않고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두 발로 걷는 자는 이 시커먼 물을 신발 바닥에 적시지 않고는 이 길을 오르내리지 못한다. 그 오르막길 중간은 한 뼘 정도 깊이로 가로로 길게 파헤쳐진 포트홀이 있는데, 이 포트홀에 하수구 물이 고여 작은 시궁창이 되어 있다. 이 길을 지나는 차나 오토바이는 이 포트홀을 조심스럽게 지나간다. 물론 이 오르막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차나 오토바이 바퀴에서 물이 튀기지 않을까 긴장하며 지나간다. 이 포트홀 옆 길가에는 조그만 와룽(warung)이 있다. 이 와룽에서 포트홀 쪽으로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전거 한 대가 놓여 있다. 이 자전거는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 이게 진짜 자전거인지 조각가 뇨만 누아르따(Nyoman Nuarta)의 작품인지 헷갈린다. 이 자전거를 그렇지 않아도 좁은 길에 떡하니 놓은 것은 지나가는 차나 오토바이의 바퀴에서 시궁창 물이 튕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와룽 주인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보인다. 두 사내가 허리를 쭉 펴기도 어려운 낮은 높이의 비좁은 와룽 속에서 물건을 판다. 봉지 커피나 여러가지 스낵과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네모난 유리 상자에는 여러 종류의 담배가 담겨져 있다. 시궁창이 흐르는 길 옆에서 담배나 과자를 파는 것을 보니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런지 의심이 들지만 그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도 담배를 물고 핸드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번뜻하게 들어선 리뽀몰과 바로 인접한 이 와룽, 와룽 앞 길을 흐르는 시궁창 물, 그 길을 조심스럽게 지나는 차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토요타 벨파이어를 타고 이 길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궁창 물이 자신들의 신발에 묻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이 더러운 물이 묻은 차 바퀴를 자기 손으로 직접 세차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궁창 길을 매번 걷는 사람이나 오토바이로 건너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뭔가 잘못된 것에 대해 항의하거나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다. 싫은 소리 하기 싫어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을 기대하는 것 자체를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애써 그렇게 생각해도 여전히 화가 난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좀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관심을 갖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말라리아 같은 유행성 전염병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카르타에서 또 발생될 것이다. 사실 자카르타는 지난 400년 동안 여러가지 전염병을 겪었다고 알려져 있다. 예부터 자카르타는 국제도시로 외국인의 출입이 잦고, 더구나 유럽인들이 거주를 시작하게 됨에 따라 각종 전염병에 노출이 되어 왔다. 그것보다도 자카르타의 열악한 공중보건과 위생이 여러가지 전염병을 불러왔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바타비아를 점령한 이후 바타비아는 여러 차례 콜레라를 겪었다. 바타비아에 도시가 건설되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슬럼가가 생겨나고, 거주자들이 강에 쓰레기를 버리자 콜레라가 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콜레라를 무기로 전쟁을 하기도 하였다. 쿤(Coen) 총독이 지배하던 1629년에 마타람 이슬람 왕국의 술탄 아궁이 바타비아를 마비시키기 위해 강물을 막고 물에다 동물의 사체를 버리는 전술을 구사했다. 그 전술은 실패했다. 어차피 네덜란드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역사학자 아돌프 호이큰(Adolf Heuken)는 자신의 저서 <자카르타 유적지들(Historical Sites of Jakarta)>에서 “마타람 군인의 절반가량이 굶주림, 병, 과로, 처벌 및 네덜란드 총탄으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쿤 총독은 1629년 당시 바타비아에 창궐한 콜레라로 인한 복통으로 죽었다. 술탄 아궁 자신도 1645년 전염병으로 죽고 족자에서 인도양 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이모기리(Imogiri) 언덕에 있는 술탄 왕족의 묘지에 묻혔다. 술탄 아궁 묘지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는 바타비아에 있었던 쿤 총독의 묘지에서 도굴해 온 유품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바타비아에서는 1600년대에 문둥병이 발생하는데, 문둥병 환자들을 바타비아와 땅그랑 경계 지역에 격리시켰다. 몇 십 년 지난 후 이 지역 문둥병 환자들은 뿔라우 스리브 섬 중에서 바타비아에서 가장 가까운 비다다리(Bidadari) 섬으로 이전 격리되었다. 이삼십년 전에 이 섬에서 수백 개의 사람뼈가 발굴되었는데, 이 사람뼈와 접촉한 한 발굴 요원이 최근에 문둥병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동인도회사가 군무원이나 유럽인들을 위한 병원을 짓기 전에 중국인 공동체가 1640년에 먼저 바타비아에 병원을 건립하였다. 동인도회사는 1700년대에 장티푸스, 말라리아, 수두, 이질로 인한 사망자를 기록하였다.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1800년대에 공중보건소, 백신 접종자 양성 학교, 병원 등을 바타비아에 건설했다. 이들 의료 관련 시설들은 고위층과 그 가족들을 위해 운영되었고, 항상 전염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바타비아 원주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원주민들은 전염병(hawar)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자무(jamu)나 주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바타비아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은 말라리아라고 할 수 있는데, 1733년 말라리아로 2천명에서 3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말라리아는 적도 일대에서만 발생되는 전염병이지만 주로 사람들의 열악한 위생 및 공중보건 시스템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된다. 말라리아는 1939년에도 바타비아에서 유행하였다. 바타비아에서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던 이유는 바타비아에는 망그로브가 자라는 해안 저지대의 진흙탕이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고고학자인 짠드리안 앗따히얏(Candrian Attahiyyat)에 따르면, 망그로브 숲을 거주지, 항구, 어류 양식장 등으로 개조한 후에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버려진 연못 등이 기생충을 옮기는 모기의 좋은 서식처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900년대 초반에도 바타비아는 연달아 콜레라로 거의 마비되었다. 예전에 자카르타를 휩쓴 병의 병원체가 여전히 오늘도 존재하고 있다. 지금 건너고 있는 이 오르막길에 시궁창물이 멈추지 않는 한 자카르타에서 전염병은 다시 발생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 특히 이 지역 주민 – 하수구를 연장하여 시궁창 물이 이 길에서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도록 구청에 연락하여 조치를 취하게 하거나 항의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항의하는 사람은 예의 없는 사람일테니까…….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김상균의 식물원 카페 58

하늘과 포도덩굴 오규원 뒤뜰 포도나무의 덩굴 혼자 하늘을 건너가고 있다 오늘은 반뼘 그 위에 온몸을 얹은 잠자리 『2000 제45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00 “뒤뜰 포도나무의/덩굴/혼자/하늘을 건너가고 있다/오늘은 반뼘/그 위에/온몸을 얹은/잠자리” 팬데믹은 여전히 확산하고 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장맛비에 짙어진 녹음과 함께 여름은 더욱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바깥의 모든 소식과 연결을 끊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 눈을 자연으로 돌려, 그 속에서 위안을 얻고자 합니다. 조속히 코로나19가 마무리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든 생명에게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Jacques Offenbach의 ‘Jacqueline's Tears’입니다. 김상균 약력 김상균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5년 무크지 <가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자작나무, 눈, 프로스트>와 <깊은 기억> 등이 있다. 대학 강사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교감으로 퇴임하였다. 다수의 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는 사진작가이며, 일찍부터 영화와 음악에 대한 시와 글을 써온 예술 애호가이자, 90년대 초반부터 배낭여행을 해온 여행 전문가이기도 하다.

[시]사적(私的)인 편지/조현영

사적(私的)인 편지 -인니에서 나고 자라서 떠나갈 나의 딸에게 조현영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 땅을 밟고 자란 나의 딸아, 엄마 품에서 인도네시아의 푸름 속에서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주어 고맙다. 나면서부터 두 개 언어를 말하고 들어온 딸아, 어떤 언어로 어떤 말을 하든 그 말에는 선한 뜻을 담거라. 아파트 로비에서 유모차 동기를 만나고 함께 걸음마를 떼던 딸아, 그렇게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것임을 기억하거라. 오빠의 세발 자전거 뒤에 타고 신나게 동네를 누비던 딸아, 어느 날 세발 자전거 운전석에 앉아 있더구나. 차근차근 하나씩 배우며 겸손을 알고 발전하는 모습을 응원한다. 유치원 소풍 때 카메라 앞에서 아주 그럴듯하게 모델 포즈를 취하던 딸아, TV에서 봤던 모델을 따라한거라고 별일 아니란 듯 말했지. 그 때 엄마는 알았다. 네가 모델이 될 줄 .. 아니, 너의 남다른 눈썰미와 관찰력. 그 재능이 네 삶을 다채롭게 하는데 쓰였으면 좋겠구나. 엄마에게 고운 꽃반지 만들어 주던 딸아, 이제는 빛나는 돌이 박힌 반지를 준비하거라. 하지만 꽃반지를 엮던 그 감성은 오래 간직하렴. 네가 살아가는 세상이 더 따뜻해질테니. 친구가 놀린다고 엄마에게 울며 일러바치던 딸아, 네가 어른이 되어도 너를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언제라도 엄마에게 일러바치거라. 힘든 일일수록 나누어야 할 것이며 엄마는 나이가 들어도 너의 든든한 빽임을 잊지 말아다오. 새끼 밴 길냥이를 살뜰이 거두어 주던 딸아, 자신보다 약자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엄마에게도 그 다정함을 조금만 나눠주겠니. 엄마도 자식 앞에서는 약자란다. 인형뽑기 기계를 집에 들이고 전용 비행기를 사겠다며 눈을 반짝이던 딸아, 그날 이후 엄마의 꿈도 바뀌었다. 너의 집에서 뽑은 인형을 들고 네 전용 비행기에 오르는 꿈으로. 엄마 얼굴보다 거울을 더 자주 보며 자기가 못생겼다고 투덜대던 딸아, 자꾸 못생겼다고 말하면 진짜로 못나진다고 엄마가 진부하게 말했었지, 하지만 그건 정말이란다. 못 믿겠으면 어디한번 해보렴. 말하는대로 이루어지더라. 엄마가 옷 차려 입고 엄마 괜찮은지 물어보면 1초만에 대답하던 딸아, 엄마도 1초 서운하단다. 엄마도 여자라는 걸 너는 아직 모를 때지. 사실은 엄마도 그랬었다. 반성한다. 속마음을 얘기하며 울먹이던 딸아, 묻어뒀던 속마음을 얘기할 때는 엄마도 눈물이 난다. 우리 가끔씩 속마음은 털어내며 살자. 딸이라고 무조건 이쁘다고만 하지 말고 객관적인 엄마가 되라던 딸아, 너도 딸 키워보면 알게 될거다. 안 이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걸. 인도네시아를 곧 떠나갈 딸아,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것은 너의 선택이 아니었으나 앞으로 펼쳐질 선택과 결정은 온전히 너의 몫이 되겠구나. 다양한 선택지를 찾고 어떤 결정이든 그 기준은 너의 행복이어야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몸에 익힌 여유로움으로 나와 다른 이들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느낀 결핍은 한국의 스마트함으로 채우며 너를 성장시키거라.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걱정을 할 시간에 미래에 일어날 너의 꿈을 위해 ‘ 지금-여기(Here&Now)’에 투자하기를 바란다.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너’여야 하고 그 다음으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이기를. 유쾌함을 잃지 말며 긍정 에너지로 곧 펼쳐질 너만의 세상에서 또한 반짝이기를. 2020년 6월 끝자락에 너를 두번째로 사랑하는 엄마가.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신세 고와 한인2세 그리고 코로나19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나는 중국을 몰라.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살고 있어. 나는 인도네시아 사람이야. 우리 어머니는 중국에 가고 싶어 하셨어. 내가 중국에 간다면 여행이지 살러 가지는 않을 거야.” 신세 고. 중국이름 고칙민(Goh Chik Min). 1940년대생. 인도네시아 독립 후 혼란기에 성장했고 9.30사태도 겪었다. 수하르토 집권기의 중국인 탄압도 기억한다. 하얀 맑은 얼굴은 누가 봐도 중국계 후손이다. 그리고 그는 인도네시아어, 중국어(광둥어),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의학 관련 한국말도 구사한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에서 중의학을 공부한 한의사이다. 신세는 인도네시아에서 중국 한의사를 부르는 호칭이다. 신세 고는 한국인들에게는 중부자카르타 빠사르 바루에 사는 침을 잘 놓는 중국계 한의사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그에게 침을 맞으러 다녔다. 그런데 이건 내가 확인한 내용이고, 어쩌면 그 이전부터 한국인이 다녔을 수도 있다. 나는 2000년대 초반부터 다닌 것 같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저녁에는 어깨가 너무 무겁고 아팠다. 눕지도 앉지도 서지도 못하다가 침을 맞고 오면 통증도 가시고 몸도 가벼워졌다. 신세 고는 침을 깊숙이 꽂은 후 침 끝에 쑥을 올려서 태웠다. 쑥을 태우며 나오는 열기가 침을 통해 몸으로 전달되는 방식이다. 한국 한의사들이 침을 얕게 꽂은 후 전기자극을 주는 방식과 다르다. 2000년대 초반에는 늘 환자가 기다리고 있어서 증세 말하고 침만 맞고 왔지만,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환자가 줄어 우리만 있을 때가 많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여유가 생겼다. 침을 꽂고 누워서 ‘신세’라는 말의 뜻을 물었다. “혹시 신세가 선생(先生)에서 온 말인가요?”라고 물으니, 그는 “맞아. 사람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데서 온 명칭이야”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인도네시아에 대해,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중국을 몰라.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서 살고 있어. 난 인도네시아인이야”라는 말이 내 귀에 꽂혔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중국에 가고 싶어 하셨어”라는 말까지. 우리 아버지는 황해도에서 월남하셨다. 황해도만이 아니라 평안도와 함경도, 경기도 북부에서 월남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피난민, 실향민, 북한사람’ 등으로 불렸지만 이젠 거의 남한 사람들과 구별이 안 되고 그저 대한민국 사람이다. 지금도 그들은 고향에 가고 싶어하지만 살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자신들의 삶이 시작됐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고 부모님이 묻혀 계시는 땅을 확인하고 싶은 정도이다. 그들의 자녀들은 북한을 모르고, 모르는 만큼 북한이 별로 궁금하지 않고 북한에 가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신세 고는 9.30사태로 이후 중국과 교류가 자유롭지 않았고 중국계임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을 살았고, 우리 아버지도 남북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로 북한과 교류하거나 방문할 수 없는 세월을 사셨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실각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민주화가 진행되고 중국과 교류를 재개하고 활발해질 때도 인도네시아에 사는 중국인들은 중국계임을 드러내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조심스럽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전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던 시대에도, 남한에 사는 실향민들은 북한에 있는 고향에 갈 수 없었고 여전히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한인2세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은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수없이 오가며 양국의 좋은 점들을 누리며 산다. 그들은 단절된 뿌리가 아니라 교류하고 도움이 되는 뿌리로서 한국을 인식한다. 그들은 신세 고나 우리 아버지와 달리, 국경이 단절을 만드는 높은 장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으로 그들은 국경을 장애물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각국이 입국 절차를 강화했다. 열이 나면 비행기에 탈 수도 다른 나라에 갈 수도 없다. 나라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강해지고 있다. 지난 20년 간은 한국인들이 비교적 인도네시아에서 자유로웠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달라질 미래. 코로나19가 국경을 너무 높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을 과도하게 구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에세이] 로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공경

로소, 미안해. 정말 미안해! 글. 사공경(한인니문화연구원장) 바틱 작업장인 ‘바틱 로소(Batik Rosso)’ 에 천연염색 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색색의 다양한 문양은 여러 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작업장 뒤쪽에 펼쳐진 논밭에는 전형적인 자바 풍경이 평온하게 펼쳐져 있었다. 1995년부터 직물박물관에 다녔던 나는 박물관 직원인 아리(Ari)와 여행도 하며 가까이 지냈다. 아리는 바틱을 좋아하는 나를 좋아했다. 아리는 족자에 가면 구루 사공이 만나야 할 바틱 예술가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로소(1970~2014년)는 족자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바틱 천연염색 예술가였다. 바틱 예술세계에서 주목 받는 그는 천연염색 예술세계에서는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다양한 천연색깔과 문양을 타이-다잉(Tie-Dying)과 바틱기법을 콜라보로 만들기도 했으며, 바틱 만드는 과정을 춤으로 형상화하기도 한 춤꾼이기도 했다. 또한 가믈란 연주, 다양한 패션 디자인으로 유명했다. 문화보존 영역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아 일본·태국·인도 등에서 족자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국제적인 상을 여러 번 수상하였다. 특히 2010년 태국 방콕에서 아세안 국제 실크 콘테스트에서도 우승하였다. 내가 로소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작업장에서였다. 작업장의 뻔도뽀에는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정원에는 다양한 과일 나무가 있었다. 정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2층 높이에서부터 지상까지 높게 혹은 낮게 펼쳐져 있는 젖은 바틱 천은 바람이 불때마다 흔들렸다. 햇빛에 빛나는 바틱 천은 밝은 옷을 입은 무희의 아름다운 움직임처럼 보였다. 다채로운 색의 드레스를 입은 무희들의 우아한 움직임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무희는 하늘을 닮은 인디고색을, 어떤 이는 땅을 닮은 황색을, 어떤 이는 나무를 닮은 소간색을, 어떤 이는 나뭇잎을 닮은 초록색을 입고 바틱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었다. 뒤쪽에는 짠띵으로 그리는 바틱 뚤리스과 짭으로 찍는 바틱짭을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천연염료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채색 과정을 잘 설명해 주었다. 망고 잎에서는 녹색을, 심황과 낭까(잭 프루트) 나무껍질에서는 황색을 얻었다. 천연 성분을 사용하기 때문에 염색 공정이 오래 걸리고 또 여러 번 염색해야 한다고 했다. 소가 나무에서 갈색, 떼게르(Teger) 나무에서 황갈색, 띵기(Tingi) 나무의 붉은색, 잠발(Jambal) 나무의 붉은 갈색, 인디고 잎의 푸른색을 추출하는 과정도 설명하면서 인내 없고 자바철학을 이해하지 않고서 천연염색은 만들어질 수 없다고도 했다. 왜 천연염색만 고집하느냐, 너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심플하게 대답했다. “원래 자바 전통 바틱은 천연염색을 사용합니다. 저는 전통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천연염색은 사람의 피부 톤과 같습니다. 사람이 곧 자연입니다. 자연과 사람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무질서하게 변화하는 디지털의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는 천연염색의 불확실성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색상 결과에 따른 여러 가지 조건 중에서 예를 들어 태양열에 많이 노출되면 밝은 색상이 된다고 했다. 같은 색상의 색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더 창의적이라고 말했다. 완전하지 않고 불확실한 인생처럼. 2010년에 직물박물관에서 열린 바틱 전시회 오프닝 때 한 남자가 한 스텝 한 스텝 절도 있는 느린 춤사위로 무대를 꽉 채우고 있었다. 저 무용수가 누굴까? 멋지다. 당시 막연하게나마 인도네시아와 한국 예술의 콜라보를 통해 새로운 예술세계를 꿈꾸던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공연, 전시 등 예술 활동을 예민한 시선으로 보는 편이다. 그 춤사위는 강렬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부관장 아리에게 물었다. 저 남자 무용수가 누구냐고. 족자에서 만난 그 바틱 예술가, 로소라고 했다. 춤을 만들고 전시와 공연을 세련되게 연출하는 예술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단한 춤꾼인 줄은 몰랐다. 2011년에 한인니문화연구원이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로소가 찾아왔다. 바틱 전시나 콜라보 공연을 하고 싶으니 후원자가 되어 달라고 했다. 당시 그런 능력이 없었던 나는 짜증부터 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로소의 예술성을 잘 알게 되었고 보존해야 할 예술가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부담으로 다가왔고, 부담은 짜증으로 표현되었다. 나는 그를 무대로 불러내 한인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2년 9월에 한인니문화연구원 주최로 ‘누산따라에서 한반도까지’라는 음악회를 개최했다. 당시 민간 문화 교류 행사가 많이 없었던 시절이라 반응이 좋았다. 로소 팀(2인)의 바틱춤 공연을 나는 숨죽이면서 봤다. 바틱은 결과가 아니라 원사가 패션이 되는 과정이다. 그는 실을 뽑아내고 천을 만들고 바틱을 그리고 염색을 하고 완성된 한 벌의 바틱을 입고 뽐내는 장면을 춤으로 연출하였다. 그의 바틱 춤에는 인내와 족자의 느림의 미학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행사 후 사람들에게 물었다. 어떤 공연이 가장 좋았으며, 어떤 공연이 가장 어필되지 않았느냐고. 모든 공연이 수준 이상이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로소 팀의 무용이 지루했다는 대답도 있었다. 그의 예술성이 표면적으로 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나는 안타까웠다. 그 후, 탐방팀을 꾸려서 족자 피닉스 호텔에서 그의 공연과 작은 전시를 봤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해야 할 일을 저 예술가가 고독하게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은 한 켠으로 미루어 두었다. 1년 뒤 그의 작업장을 다시 찾았을 때 우리를 위해서 그가 춤을 추었다. 바틱 작업 과정처럼 진지하고 아름다운 춤이었다. 2014년 로소가 한인니문화연구원에 와서 그가 걸어온 길과 로소 바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가 살아온 길에서 외롭게 서 있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되었다. 사회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하겠지... 어두운 밤하늘 보다 더 짙게 내려앉은 로소의 슬픔을, 사명감의 무게를 나는 보았다. 2014년 6월에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지속가능한 문화예술 교류를 위해 로소가 이끄는 족자예술단체와 한인회 한인니문화연구원과 MOU를 체결하였다. 체결을 축하하며 자바 전통 복장을 하고 그는 춤을 추었다. 직접 만든 바틱 춤을 추었다. 이 춤이 그가 마지막으로 춘 춤이었다. 초췌한 모습에 좀 놀랐다. 옛날의 빛나던 모습은 아니었다. 2002년에 문을 연 작업장인 바틱 로소는 오랫동안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내가 혹은 연구원이 기회가 생기면 로소의 무대를 만들어 주리라고. 그 무렵 연구원 또한 운영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많은 일들이 쌓여 있었다. 여력이 없었던 나는 로소의 예술성이 부담으로 다가왔고 힘든 내 모습이 연상되어 눈감아버리고 싶었다. 로소는 1970년 12월 족자의 반뚤(Bantul)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다양한 콘테스트 및 패션과 관련된 활동에 참여하였다. 로소는 1990-1991년부터 PAPMI (인도네시아 패션 디자이너 협회 산하 족자카르타 패션 스쿨)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으며, 1991-1992년에 바틱 의류를 전공하여 패션세계를 마스터하고 ABA 족자카르타(족자카르타 외국어 아카데미)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패션세계를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인도네시아 패션계를 주름잡았다. 2002년에 Batik Rosso를 오픈하고 꿈을 펼치기 시작하였으나 전통 천연염색보다는 실용을 추구하는 시기였다. 2014년 8월 족자한인회 행사에 로소 팀을 소개했다. 로소 춤이 보고 싶어서 족자로 갔다. 로소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로소의 제자들이 와서 행사를 빛내주었다. 로소 작업장에 가서 바틱 냄새와 자연 냄새를 맡고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젊은 예술가 로소가 걱정이 되었다. 2014년 10월 제2회 문예총 종합예술제에 로소 팀을 초청했고 공연장인 한국학교에 로소가 제자들을 데리고 왔다. 8월 입원 이후 곧 퇴원했다고 들었는데 지난 6월보다 더 수척하고 병든 모습이었다. 항상 자바 양반의 예의를 갖춘 그였지만 예술가로서의 자부심 있는 당당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꾼과 선녀”를 공연하였다. 그날의 공연은 주문한 대로 빠르고도 품위 있는 공연이었다. 이렇게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만나는구나 생각하며 공연 후 훌륭한 공연을 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곧 있을 “제5회 인도네시아이야기 문학상 시상식”에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공연장 한쪽에 바틱을 전시해 줄 수 있는지도 물었다. 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구루 사공. 바나나 섬유 직물로 만든 바틱 드레스를 입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2010년 로소는 바나나 줄기에서 나온 섬유에서 바틱 천을 만드는 새로운 혁신을 일으켰다. 바나나 나무는 매우 경제적이며 손쉽게 얻을 수 있으면 면보다 부드럽고 실크보다 실용적이라고 언젠가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바틱 기법으로 만든 천연염색의 아름다움을, 바나나 섬유에서 로소 바틱 패션으로 변신하는 것을 한국예술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뒷뜰이 있는 전시장이면 좋겠어. 천연바틱의 아름다움이 춤추고, 흔들리는 바틱 천 아래에서 로소가 ‘바틱 춤’을 추면서 오프닝을 해주면 좋겠어라는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날이 언제 올까’라고 생각하니 좀 서글퍼졌다. 문학상 시상식에 초대하기 위해 그에게 여러번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았다.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다. “며칠 전(2014년 12월 21일)에 돌아가셨습니다.”고 했다.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천연염색의 철학, 인생은 불확실하다는 것. 완전하지 않다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갔다. ‘그날이 왔다.’ 2016년, 2017년, 2019년 이어서 한국에서 바틱 초대전이 있었다. 그러나 로소는 없었다. 2016년 6월 바틱 전시회, 한세 24 초대전 (서울 인사동) 때 그가 2005년에 무대의상으로 만든 것을 전시했다. 2017년 (한국문화원) 바틱 전시회 때 한 공간에 나는 로소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그를 기리며. ‘미안해’를 되뇌이며. 정체성과 작가정신에 끊임없이 고민하던 한 예술가가 무너져가는 모습을 나는 마음 아프게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였다. 정말 미안해. 그때는 나도 정말 힘들었어요. 2017년, 다시 찾은 Batik Rosso에는 바람만 펄럭이고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흔들리던 자연의 몸짓은 없었다. 뒤쪽에도 천연색을 추출하고 바틱을 삶고 하던 큰 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옆의 논밭에서 아궁이로 휘어지던 불꽃도 없었다. 잠자리 몇 마리 빨랫줄 위를 맴돌고 있을 뿐. 로소. 미안해. 정말 미안해! -------------------------------------------------------------------- 참고자료 Ketika Rosso Membagi Ilmu Membatik... kompas.com 2011.12.19 Pesona Batik Warna Alam book by Rosso &Heni Nur Afni

[몰틀알틀]농사일, 예사말, 예삿일

“준비 없이 농사일/농삿일을 시작하다 보니 이 정도 시행착오는 예사일/예삿일이 되었어.” “농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예사말/예삿말이 아니었어.”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제나라 사신 안양과 초나라 왕이 주고받은 대화에서 유래하여 환경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면 자주 인용되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 말은 제나라 사람을 모두 도둑으로 몰아가는 초나라 왕에 대한 안양의 반박일 뿐입니다. 우리는 환경이나 상황을 탓하곤 하지만 어떤 환경에서든 얼마든지 자신의 가치를 선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핍 환경에서도 선한 가치를 실현해 갑니다. ‘n번방’의 실체와 ‘코로나19’ 재확산 사태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공동선을 향해 가는 길은 분별력과 인내력이 필요합니다. 느리더라도 함께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합니다. 나로부터, 내 가족으로부터 시작되어야겠지요. “준비 없이 농사일을 시작하다 보니 이 정도 시행착오는 예삿일이 되었어.” “농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예사말이 아니었어.” 농삿일, 예삿말 × ⇒ 농사일, 예사말 ○ 예사일 × ⇒ 예삿일 ○ ‘농사+일’, ‘예사+말’은 각각 ‘농사일’, ‘예사말’로 쓰고 발음하고, ‘예사+일’은 왜 ‘예삿일’로 쓰고 [예산닐]로 발음할까? 이는 표준 발음에 근거합니다. 이들 각각의 표준발음은 [농사일], [예사말], [예산닐]입니다. 표준어 규정에 의하면 순우리말 합성명사, 또는 순우리말과 한자어가 만나 이루어진 합성명사 중 뒷말의 첫소리가 ‘ㄴ, ㅁ’ 또는 ‘모음’일 때, ‘ㄴ’ 소리가 덧날 경우에도 ‘ㅅ(사이시옷)’을 받치어 적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몸 → 잇몸’, ‘노래+말 → 노랫말’, ‘제사(祭祀)+날 → 제삿날’, ‘나무+잎 → 나뭇잎’ 등은 ‘사이시옷’을 받치어 적는데 이는 발음할 때 각각 ‘[인몸], [노랜말], [제산날], [나문닙]’과 같이 ‘ㄴ’ 또는 ‘ㄴ,ㄴ’이 덧나기 때문입니다. 냇물[낸물], 빗물[빈물], 훗날[훈날], 툇마루[퇸마루], 양칫물[양친물] 등도 같은 사례들이지요. 그러나 ‘농사일, 예사말’과 같이 ‘머리말, 인사말, 반대말’은 ‘사이시옷’을 받치어 적지 않습니다. 이는 발음할 때 ‘ㄴ’ 소리가 덧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머린말], [인산말], [반댄말]로 발음하지 않고 [머리말], [인사말], [반대말]로 발음합니다. 이처럼 사잇소리 현상은 동일한 음운 환경에서도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데, 이에 대해여 명확하게 판단할 만한 근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언중들의 발음 습관이 어떻게 정착되었는지를 조사하여 그 발음에 따라 규정한 것으로서 ‘사이시옷(ㅅ)’ 표기에 대한 논란이 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편집하실 때 출연자가 말하지 않은 속마음을 꼬리말[꼬리말](○)/꼬릿말[꼬린말](×)로 달아주세요.” “3세 아이들의 혼자말[혼자말](×)/혼잣말[혼잔말](○)은 생각과 언어 능력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고 해요.” ♠ 알고 보면 쉬운 우리말, 올바르게 쓰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 * 한글 맞춤법, 표준어 검색을 위한 추천 사이트 국립국어원 http://www.korean.go.kr/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main.jsp * 이익범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교사를 지냄. 현재 한국어 교사

[칼럼] 피아노 치는 남자 / 홍윤경

글: 홍윤경 Pleats kora Indonesia 대표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펜더믹 코로나19'라는 생소하고 낯선 상황으로 조금 망설여지는 그런 날이었다. 2020년 3월 24일 그를 만나기로 한 곳이 땅그랑 서르뽕 지역의 빈민가였기에 감염 걱정이 영 없지는 않은, 그래서인지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불안한 길이었는데 그 남자는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약속 장소에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가 안내하는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그의 삶만큼이나 구불구불하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좁고 어두웠다. 그는 YPKP65 (1965대학살연구소)의 대표이자 인도네시아의 인권활동가이신 베조 운뚱 씨(Bapak Bedjo Untung). 오늘 그와 만남은 그가 2020년 40주년 518광주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직접 축하도 하고,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주선하기 위함이었다. 인도네시아의 현대사 가운데 1965~1966년은 9월 공산당의 쿠데타를 진압하며 권력을 쟁취한 수하르토를 주축으로 하는 군부로부터 무고한 5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반공 대학살을 당한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이 참담한 역사를 미국 중앙정보국은 '20세기에 벌어진 가장 처참한 집단학살'이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그 시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남자 베조 운뚱. 남자의 나이 겨우 17살, 그는 가장 어린 나이의 수감자가 되어 모진 고문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녔던 짧은 기간과 이 감옥 저 감옥 옮겨 다니며 치러 내어야 했던 기아와 전기고문, 그리고 7년 간의 처참하기만 했던 강제노역이 남자의 성성한 눈 속에 그대로 담겨 있는 듯했다. 남자의 시련은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끝나지 않고 질기게 그의 삶을 따라다녔다. 정치범이라는 낙인과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는 감시를 자유 아닌 자유로 여기며 살아온 그 기막힌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더해진 그는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다. 수용소에서 풀려 난 후 그는 한 여인 엔당(Endang)을 만난다. 그 음산했던 시절 7살 어린 소녀의 눈은 아버지의 잘린 목이 걸려있는 것을 보아야 했고, 아직도 그때의 이야기를 본인의 목소리로 직접 누군가에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저 인권 활동을 하는 남자를 옆에서 말없이 그 세월에 대해 저항을 하듯 남자를 지켜내는 것으로 조용히 저항하는 듯했다. 성성한 그의 흰 머리카락과 아직도 날카롭게 살아있는 눈빛이 그 남자의 비범하지 않은 인생을 말해주는 듯 할 뿐 남자와 여자는 그저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지는 따뜻하고 착한 오늘을 살아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남자와 여자의 오늘은 켜켜이 쌓인 먼지와 낡고 허물어져 가는 그래서 시급한 수리와 보수가 필요해 보이는 작고 좁은 집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집 안에는 그 집 상황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아주 낡고 오래된 그러나 정성스레 닦고 관리한 먼지 앉지 않은 피아노 한 대가 남자와 여자의 지난한 삶을 여전히 연주하는 듯 집 가장 좋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 남자의 인생 여정을 듣는 3시간의 시간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아무렇지 않게 너무도 담담히 그가 그려내는 지난 날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나에겐 상상조차 되지 않는 그런 삶이었기에 차마 그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도, 공감한다는 끄덕임도 표현할 수 없었다. 아직은 부모 옆에서 보호를 받고, 친구들과 어울려야 할 그 파란 나이에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지지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 그 역시 지지했던 수카르노라는 한 사람 때문에 그의 인생은 채 피기도 전에 부러지고 말았다.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의 단절만으로도 힘겨웠을 그에게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자카르타에서의 생활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그의 나이 겨우 16살 고등학생이었는데…… 독재 정권의 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닌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신분을 숨기고 백화점 점원이 되어 일하던 때, 함께 일하던 동료의 밀고로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수배자의 삶보다 더한 나락의 길로 떨어져야 했다. 여러 감옥으로 옮겨지는 불안감과 모진 고문은 차라리 견딜 수 있었다 한다. 그러나 배고픈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는 17살의 소년…… 이 감옥, 저 감옥으로 이송되다 지금의 땅그랑 서르뽕 지역에 위치한 감옥으로 이송되면서 소년은 강제노역장으로 새벽부터 끌려나가야만 했다. 그곳에서도 고문보다 더 지독했다는 배고픔은 소년으로 하여금 쥐, 뱀, 도마뱀, 곤충 등을 잡아먹으면서 살아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다 했다. 그렇게 흘러간 7년의 세월. 그 열악하고 암울한 그 시간에서도 소년은 꿈을 꾸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넘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리고 혼자서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혔다 했다. 비록 종이 건반에 연주하는 선율이었지만 그의 귀에는 그 아름다운 선율이 생생히 들려오는 듯 했다고, 아련히 말하는 그의 표정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를 그 지옥에서 견디게 한 것이 그를 살게 했다. 국제적십자 등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감옥으로부터 석방이 되었고, 그곳에서 독학으로 익힌 영어와 피아노 덕분에 그는 새로운 삶으로 나왔다고 했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쉬지 않고 수용소 안에서도 그렇게 강제 노역을 했는데 이렇게 밖에서 돈도 벌면서 일하는 것이 너무도 좋아서 일을 찾아서 했다고 했다. 그리고 외로워서 더 열심히 일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고향의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도 없었다. 정치범이라는 꼬리표가 그렇지 않아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가족들에게 짐이 될까봐 소년에서 청년이 된 그는 고스란히 그 외로움을 일을 하면서 견디어 냈다. 죽어라 일한 만큼의 보상이 주어졌을 때 그가 처음 한 일을 진짜 피아노를 사는 거였다. 생의 첫 피아노를 사고 혼자서 또 죽어라 독학으로 연습하고 다음날이면 피아노 레슨으로 그는 살아냈고, 지금의 집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했다. 그 피아노가 긴 세월 그와 함께 세월을 살아내며 집 안 가장 좋은 자리에서 반짝반짝 그와 함께 나이 들고 익어가고 그랬나 보다. 그 집을 구입하고 그는 1999년 함께 투옥했던 정치범 동료인 프라무디야 아난타투르를 비롯한 7명의 동료와 지금의 연구소를 그 집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다들 가난했다. 십시일반 돈이 조금 모이면 실종자와 희생자를 찾는 일을 하고, 돈이 벌리지 않으면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된 엔당의 교사월급으로 생활하고, 그는 희생자와 실종자를 찾아 인도네시아 전역을 돌아다녔다. 감시와 미행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도 그는 그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실종자와 희생자를 찾아다니고,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조금씩 더디지만 한걸음한걸음 그와 그의 동료들의 활동으로 그들은 세상으로 다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국제사회를 움직였고, 그들의 활동은 세계 각국의 인권단체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다 했다. 우리가 잘못하지 않은 것을 알아주고,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다시는 이런 부당한 일들이 후대에는 일어나지 않는 거라 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아직 진행 중이다. 수감자중 가장 어렸는데 이제는 이렇게 늙어버렸다는 자조적인 그의 음성이 아프다. 반세기 훌쩍 넘게 진상 규명이나 공식적인 사과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그저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듣고 싶은 것인데……사는 동안 들을 수 있을까? 하시며 기인 인터뷰를 끝내셨다. 공식적인 인터뷰가 끝이 나고, 그는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가 7년간이나 강제 노역한 장소로 함께 가주기를 원했다. 속으로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조금 난감했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그의 인생과 세월을 느낄 수는 없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예의로 그와 함께 그 자리에 서 있기는 해야 할 것 같은 무거운 마음에 그를 따라 나섰다. 72세의 노인이라고는 느낄 수 없게 상기된 그는 그때 여기는 어디였고, 이곳에서 어떻게 노역을 했는 지에 대하여 너무도 생생하게 알려주었다. 이미 그곳은 현대화가 진행되어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각종 관공서가 즐비하며,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즐겨 생활하는 쇼핑센터까지 들어서 있었다. 그는 그 쇼핑센터를 바라보며 너무도 아파했다. 저기에…… 저 자리에……기념비라도 하나 세워지길 바랐는데, 이곳에 우리가 왜 있었는지 알려주는 기념비 하나만이라도……초로의 그 남자는 그 성성한 눈빛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붐비는 쇼핑센터를 슬프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할아버지하고 불렀다. 그리고 가지고 온 마스크 5장을 나눔하며 조만간 다시 만나기를 약속했다. 할아버지를 집에 모셔다드리고 돌아오는 길이 참으로 길었다. 할아버지가 피아노를 열고 연주해 주시던 선율이 귓가를 따라온다. 피아노는 언제 조율했는지 그 소리가 둔탁했다. 둔탁하고 삐걱이던 그 소리가 마치 세상은 아직도 정의롭지 않은 듯 절망스럽기도 했고, 어둠은 빛을 이긴다 했지만 그 어둠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아 절망스럽기도 했다. 한국의 4·19혁명과 5.18 광주 민중항쟁, 2016년 세월호 침몰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돌아보게 되는 길이었다. 헤어지면서 할아버지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 것 같아요? 라는 나의 물음에 그 남자는 “다시 돌아가도 나는 옳다고 믿는 일을 했을 거야” 라고 하셨다. 그 한마디가 오래 귓가를 돌아다닌다. [데일리인도네시아]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 자카르타 슬럼에서 만난 아이들, 나 그리고 우리들의 꿈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 – 미국의 시인이자 래퍼인 투팍 샤커(Tupac Shakur) - 그대는 들었는가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장미에 대해 두 발 없이도 걷는 법을 스스로 깨달아 자연의 법칙 따위는 엉터리라는 걸 증명하였고 누구도 믿으려 들지 않겠지만 장미는 꿈을 포기하지 않기에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네 시선 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도 콘크리트를 뚫고 자란 장미는 오래오래 피어있으리! 친구 벨라가 태워주는 오토바이 뒤에서 혹시나 떨어질세라 두려운 마음에 그녀의 옷깃을 두손으로 꼬옥 붙잡고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 역으로 향한다. 그 역에서부터 느릿느릿 모든 정거장을 서는 크레타(kereta, 전철)를 타고 삼십분을 걸려 도착한 역에서 하차한다. 빵빵거리며 눈 앞에 멈춰서는 앙콧(angkot, 미니버스) 안으로 들어가 몇 뼘 남짓한 공간에 비집고 앉아 차의 덜컹거림을 온몸으로 느끼며 십분 정도달려간다. 길가에 앉아있는 오젝(ojek, 영업용 오토바이) 아저씨들에게 가격을 흥정하고 탄 오토바이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달린다. 인스턴트 커피와 크루푹(kerupuk, 튀긴과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조그마한 한 와룽(warung, 노점상) 앞에서 내린다. 부패되어가는 쓰레기더미, 모래와 시멘트가 날리는 폐허, 악취가 진동하는 구정물이 흐르는 좁다란 골목을 걸어간다. 조금 걷다 보면 저 먼발치에서 내 모습을 본 아이들이 “kak 인정”을 외치며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아이들은 자그마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우리는 마음씨 좋은 학교 선생님 댁 앞에 다다른다. 그 집 문 앞 작은 공간, 전등이 없어 어둑어둑하지만 비는 피할 수 있는 그 곳. 내가 약 두 시간 발걸음을 해 찾은 이유다. 겨우 걸음걸이를 뗀 듯한 어린 아이들부터 늠름해 보이던 초등학생 고학년 아이들까지 모두 모여 옹기종기 앉아있던 그 곳.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로 가득 메워진 그 곳. 그곳은 바로 내가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는 소중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와세다대학교 국제교양학부 재학 중, 알 수 없는 미래와 목표를 향한 선택의 길목에서 고민하던 나는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UI, Universitas Indonesia)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 벨라를 어느 수업시간에 우연히 만났다. 둘 다 여태까지 사회 빈민층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해 왔다는 것에 공감하며 우정을 쌓았고, 벨라는 내게 인도네시아 도시 슬럼가에서의 교육봉사 활동을 권했다. 2016년 여름방학, 처음 마주한 인도네시아에서 나는 열악한 환경에도 환한 웃음과 명랑함을 잃지 않던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수업에 집중했고, 손을 번쩍번쩍 들고 수업 중 내가 던지는 질문들에 열정적으로 답했다. 아이들의 이러한 모습은 내 마음 속 따뜻이 스며들어 내가 교육학의 길을 선택하게 했고, 그후 인도네시아 빈민층 아이들의 교육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다. 그 후로 매 방학마다 나는 그 아이들이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를 찾아 꾸준히 교육봉사를 했고 아이들에게 조금 더 나은 교육환경과 정책을 구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꿈을 가슴에 안았으며 ‘도시 슬럼교육’에 대해 연구해보자고 결심했다. 도시 슬럼에 대한 자료와 통계 수치를 찾으면 찾을수록 나는 인도네시아의 도시 슬럼이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도네시아의 도시화율은 이미 53.7%에 다달아 약 1억 3,740만을 이루고 있었으며, 자카르타는 동남아지역에서 가장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었던 것이다. 또한 급격한 도시화로 도시 개발이 교외지역으로 무분별하게 팽창하는 도시스프롤 현상을 겪으며 무질서한 교외화가 벌어지고 있었고, 그 확산속도는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증가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도시화로 땅값과 임대료가 급등하여 문제는 적은 임금으로 주거비를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운하와 철도 근처의 무허가 주택이나 다리 밑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이른바 ‘슬럼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2019년 세계은행과 인도네시아 농지공간기획부가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자카르타의 267개의 끌루라한(kelurahan) 중 44%에 슬럼이 있고, 그 곳의 거주민 중 전체의 절반이 강 주변에 주거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슬럼교육(Slum Education)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겠습니다!” 2018년 와세다대학대학원 아시아태평양 연구과, 일본 내 교육학으로 정평이 나 있는 쿠로다 카즈오 교수님의 세미나 시간, 나는 이십여명 남짓한 학생들 앞에서 내가 정한 연구주제와 연구방향에 대해 발표했다. 아이들과의 따스했던 기억들을 토대로 한 이 연구주제로 내 열정을 200% 어김없이 쏟아낼 수 있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 후 며칠 뒤 연구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 교수님의 오피스에서 쿠로다 교수님과 일대일 면담을 가졌다. 교수님은 내 연구 계획서를 다시 읽어보시며 말씀하셨다. “교육학에서 ‘슬럼교육’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단다. ‘도시빈민을 위한 교육 (education for the urban poor)’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니? 그렇지 않다면 다른 연구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 같구나.” 교수님의 조언은 현재까지의 교육정책학 동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각 정부는 도시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교육정책으로, 그들을 거리의 아이들(street children), 근로 어린이(working children), 고아(orphans) 등 여러 그룹으로 분류하여 특정 그룹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상별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슬럼교육’이라는 용어는 교육정책에서는 사용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정책 담론의 부재는 내가 더욱 ‘슬럼교육’을 고집한 이유였다. 즉, 정부가 시행하는 분산적 성격을 띄는 교육 프로그램과 정책은 그들이 정한 카테고리에서 배제되는 슬럼 거주 아이들을 지원해줄 수 없었고 이들을 자동적으로 정책영역 안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슬럼에 거주하는 취학 아동 및 장애학생 등). 따라서 슬럼 아동을 위한 포괄적 프로그램의 생성이 절실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펼치고 있는 슬럼 관련 정책 안 교육 분야의 부재 또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유엔은 2016년부터 2030년까지 국제사회가 달성해야 할 17개의 목표를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로 명시했는데, 목표(Goal) 11번 중 1번째 세부목표는 슬럼에 관한 목표로 “2030년까지 안전하고 저렴한 충분한 주거공간과, 기초 서비스에 대한 전면적인 제공 및 빈민촌의 재개발 추진 (ensure access for all to adequate, safe and affordable housing and basic services and upgrade slums)”을 일컫는다. 거주민의 안전과 위생을 우선시한 건축 구성요소에 대한 법정 최소 표준 충족을 강조하는 이 목표 아래,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유 저소득 임대주택인 루수나와(Rusunawa, Rumah Susun Sederhana Sewa)를 축조하여 슬럼 거주민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현실화시켜 왔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 루수나와 정책은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의 교육 지원책을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사회・문화 참여도의 확대를 이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정책상의 부재에 더불어, 슬럼거주 아이들은 학교 안팎에서 가정까지 그들이 접하는 모든 환경적 요인의 영향으로 심각한 수준의 학업 및 사회정서 학습에 대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내가 그동안 슬럼가 교육봉사와 논문을 위한 인터뷰를 하는 중에 많은 슬럼 거주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만나 그들이 전하는 잊지 못할 스토리를 접하며 알게 되었다. 아빠를 일찍 여의고 엄마를 도와 12시부터 오후 6-7시까지 나시우둑을 요리하고 파는 것이 하루의 주요 일과인 10살 여자아이도 있었고, 언제나 빵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학교 안에서도 방과후에도 빵을 파는 10살 남자아이도 있었다. 아들이 갓난아기였을 때 발작이 났어도 금전적 형편이 되지 않아 병원에 갈 수 없었던 것을 영원히 후회하고 있는 엄마도 있었고, 어릴 적 발작이 빚은 학습지체로 같은 학년을 두 번이나 반복하며 학우들에게 놀림 대상이 된 12살 남자 아이도 있었다. 자격증을 소지하지 않은 조산사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나 출생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어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13살 남자아이도 있었고, 가정불화의 영향으로 인해 발병한 ADHD로 수업 시간 교실 여기저기를 산만하게 움직여 다니는 7살 여자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도 슬럼 아이들의 교육환경을 가장 크게 저해시키는 요소는 어쩌면 ‘슬럼을 향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사회적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내게 너무나 충격적이고 가슴 쓰린 현실이었다. 2019년 8월 말부터 나는 인도네시아 교육문화부에서 주관하는 다르마시스와 장학생으로 아트마자야 가톨릭 대학교에서 BIPA를 공부했는데, 나는 현지인 친구들과 함께 때때로 인도네시아 사회 문제에 대해 논하고는 했다. 내가 동정어린 마음으로 슬럼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놀랍게도 나의 가장 친한 인도네시아 친구들조차 내 의견에 공감하지 않았다. “정부는 국가세금으로 빈곤층, 슬럼 거주민들을 위한 많은 혜택을 주고 있어. 최근에는 사회복지 카드도 제공하고 있고, 그 카드를 쓰면 건강보험도 무상교육도 받을 수 있어.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정부의 혜택을 원하고 있잖아. 내 생각에는 그들의 나태함과 의존성이 근본적인 문제야. 정부의 정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문제라는 말이야.” 친구들의 말에서는 슬럼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와는 다른 그들을 일컬으며 말이다. 실제로, 슬럼은 단순히 공간적・물질적 개념으로써 수도, 위생시설, 생활공간, 2016년 여름, 슬럼가 아이들에게 영어 수업을 하며. 주택내구성, 거주권 등의 유무에 입각하여 이해될 수도 있지만 (유엔해비타트(UN Habitat)의 정의), 비판적 사회공간론적 관점에서 또한 중요시 해석된다. 후자는 즉, 상대주의에 입각하여, 슬럼을 도시 중심부에 거주하는 상류층에 대비되는 경제적・인종적・문화적으로 나약한 사회 소외계층’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슬럼이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 ‘편견’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던 것일까? 이는 19세기 네덜란드 식민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 도시 중산층은 관습법(adat)에 따라 고유마을 깜풍(kampung)에서 살아가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천박하고 격식이 없으며 문화가 뒤떨어진다고 느꼈다. 이러한 식민지 차별의식이 스며든 공간인 ‘깜풍’이 오늘날 슬럼의 원천이었고, 현재까지도 사회 불평등의 상징으로 ‘슬럼’ 혹은 ‘깜풍’으로 불려오게 된 것이다. 그 후 역사의 연장선에서, 깜풍의 규모는 더욱 확장되었는데, 특히 1945년 독립 이후에는 자카르타에 대규모 도시 이주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정부의 눈을 피해 깜풍에 불법주택을 지었다. 그리고 현재는 근대화와 자본주의가 상류계층이 우위자를, 슬럼 거주민들이 하위자를 차지하는 사회적 불평등 권력관계를 더욱 확고하게 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며 문득 이런 의문들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역사가 만들어낸 도심 안 불평등 구조를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 단념하고 그 존재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슬럼에 살고 있는 ‘그들’이 형성하는 사회와 다르다고 믿으며 우리들의 사회 정체성의 우월한 사회적 지휘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나는 잔잔한 인도네시아 노래를 듣다가 핸드폰 갤러리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찾아본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 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했던 순간순간이 새록새록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따스한 감성에 젖는다. 하지만 그 감성 뒤에는 항상 여러 고민들이 따른다. 어떤 교육이 슬럼 아이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아이들에게 긍정적 사회정서를 함양시킬 수 있을까? 그 아이들에게 질좋은 교육이란 무엇일까? 자카르타 시민들이 그 아이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언젠가 자카르타인들이 서로가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돕는 날이 올까? 수많은 질문을 가슴 한편에 고이 담아 간직하고 오늘도 학업에 임한다. 또 다른 저널 하나를 읽고, 또 다른 리포트 하나를 쓰며. 언젠가 아이들을 다시 볼 날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언젠가 교육정책을 만드는 자리에서 그 아이들의 어려움을 표하고 다른 교육자들과 함께 슬럼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정책수단과 프로그램을 모색하는 순간을 꿈꾸면서. 내가 만난 아이들, 그들이 가진 스토리는 매일같이 삶의 목적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밝은 웃음과 각자가 마음 속 가지고 있는 꿈의 이야기를 되짚으며 나는 슬럼이 더 이상 도시의 그늘과 슬픔만이 만연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곳에는 수많은 아이들의 희망에 가득 찬 모습이 항상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마치 도심의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아름다운 향기를 피어내고 있는 장미들처럼.

[에세이] 코로나19가 앗아간 2020년 봄/이혜자

글.사진: 이혜자 4월 ,어느새 봄이다. 어린 잎사이로 봄의 전령사인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코로나19사태로 우리는 지금까지 없었던 계절에 살고 있다. '팬데믹(pandemic)'이라니, 마치 역사 속을 헤매는 듯하다. 중국의 우한에서 시작된 바이러스 전파는 이제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매일같이 언론에서는 세계 각국의 코로나19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보도한다. 그야말로 세계는 코로나와의 전쟁 중이다. 인류는 바이러스라는 적으로부터 무자비한 공격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을 지닌 것과의 전쟁 (invisible war)이다. 어떤 무기로도 대항할 수 없고 결정적으로 치료제는 없다. 바이러스의 창궐은 아주 긴 싸움이 될 것이다. 전염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위험에 노출 되어있다. 가장 큰 해결책은 백신 개발이지만 앞으로 1년은 넘게 걸린다는 전망이다.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매일 죽어가고 있는 참상을 지켜보고 있다. 세계는 출구를 알 수 없는 공황 상태에 빠져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사람들은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우리 인류가 얼마나 취약한 문명 기반에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또한 세계가 생각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연대의식을 가지고 행동할 때 힘을 갖게 되었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또한 우리에게 자본주의와 공공의료문제에 대한 필요성과 효율성을 생각하는 기회도 갖게 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국가적 재난으로 힘없이 무너지는 경제 시스템의 취약성도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큰 깨달음은 아마도 '일상의 소중함' 일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 한일인지 알게 된 참으로 귀한 시간도 갖게 되었다. 이제 우리 인류는 전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는 과정을 통해 그전과는 다른 세상을 준비할 필요가 있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우리는 많은 걸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재점검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인내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지나간다. 그래도 언제가 이 상황은 끝날 테고, 백신도 개발 될 것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얼마 지나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서로 조심하며 하루하루 건강하게 힘을 내자. 불안감에서 벗어나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잘 이겨 내겠다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 삶에 존재했던 시간을 잃어버린 지금. 내가 누리던 소중한 일상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이웃들.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맞추며 손을 잡고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그날. 우리가 힘들게 건너온 시간이 가르쳐준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 좋겠다. 두려움 앞에서도 사람이 희망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때까지 계속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이어지길 기도해본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stay safe, stay happy" <아프리카 오지의 나라 챠드의 아름다운 문인 무스타파 달렙의 글> 아무 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에 의해 흔들리는 인류 그리고 무너지는 사회.. 코로나 바이러스라 불리는 작은 미생물이 지구를 뒤집고 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인가 나타나서는 자신의 법칙을 고집한다. 그것은 모든 것에 새로운 의문을 던지고 이미 안치된 규칙을 다시 재배치한다. 다르게...새롭게... 서방의 강국들이 시리아,리비아, 예멘에서 얻어내지 못한 (휴전, 전투 중지) 것들을 이 조그만 미생물은 해냈다. 알제리 군대가 못 막아내던 리프 지역 시위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기업들이 못해냈던 일도 해냈다. 세금 낮추기 혹은 면제, 무이자 ,투자 기금 끌어오기, 전략적 원료 가격 낮추기 등... 시위대와 조합들이 못 얻어낸 유류 가격 낮추기, 사회보장 강화 등등 ( 프랑스 경우). 이 작은 미생물이 성취해 내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매연 , 공기 오염이 줄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시간이 갑자기 생겨 뭘 할지 모르는 정도가 되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서 알아가고 시작했고, 아이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으며 일은 이제 더 이상 삶에서 우선이 아니고, 여행,여가도 성공한 삶의 척도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곧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으며 '약함'과 '연대성'이란 단어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모두 한 배에 타고 있음을... 시장의 모든 물건들을 맘껏 살 수도 없으며 병원은 만원으로 들어 차 있고 더 이상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는 우린 모두 똑같이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도... 외출할 수 없는 주인들 때문에 차고 안에서 최고급 차들이 잠자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단 며칠 만으로 세상에는 사회적 평등(이전에는 실현 불가능해 보였던)이 이루어졌다. 공포가 모든 사람을 사로 잡았다. 가난한 이들에게서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에게로 공포는 자기 자리를 옮겼다. 우리에게 인류임을 자각 시키고 우리의 휴머니즘을 일깨우며.. 화성에 가서 살고, 복제인간을 만들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던 우리 인류에게 그 한계를 깨닫게 해 주었다. 하늘의 힘에 맞갖으려 했던 인간의 지식 또한 덧없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확신이 불확실힘이 연약함으로, 권력이 연대감과 협조로 변하는 데에는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인간은 그저 숨 하나, 먼지일 뿐임을 깨닫는 것도..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섭리가 우리에게 드리울 때를 기다리면서 스스로를 직시하자. 이 전세계가 하나같이 직면한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에서 우리의 휴머니티가 무엇인지 질문해보자. 집에 들어앉아 이 유행병이 주는 여러가지들을 묵상해 보고 살아있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자. <코로나19 극복 프로젝트> 집에서 할 수 있는것들 공유하기 1. 규칙적인 운동하기 필요한 장보기외에는 외출도 안하고 밖에서 운동도 못하는 나날들 이렇게 계속 생활한다면 머지않아 살이 '확찐자'가 될 수 있다. 홈트레이닝 유튜브를 잘 활용하면 집으로 개인 트레이너가 와서 함께 운동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스미홈트 # 레베카 루이즈 #주원홈트 #제니요가 2. 건강한 집밥을 먹자 코로나19 사태로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겪고 있으면서 집에서는 모든 가족이 함께 있고, 외식도 마음 편하게 할 수 없으니 '삼시세끼 전쟁'이다.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지금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매일 먹으면 좋은 음식을 소개한다. #통곡물#등푸른생선 #다양한과일과채소#마늘과양파 #올리브오일#녹차 3. 집에서 문화생활 즐기기 코로나19확산으로 대부분의 문화예술 관련 공연은 취소되었다. 전세계 상당수의 박물관과 미술관도 휴관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그렇다고 문화 생활이 멈춘 것은 아니다. 세계 유수의 공연이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방구석 1열 문화생활'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처럼 온 것이다. #www.culture.go.kr/home # 내손안의 콘서트 #코로나극복k-Arts온라인콘서트 #metropera.com #독일 배를린필하모니오케스트라 #아트앤컬쳐-Google 4. 책 읽기 두려울 때, 불안할 때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읽는 힘만큼 생각의 실력이 생긴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해서 통찰할 수 있는 힘, 저항할 수 있는 생각의 힘, 지적인 힘은 책을 읽지 않으면 안 생긴다. 독서는 내 삶을 강단있고 내실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만든다. 어떤 고난과 위험에서도 내 영혼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자양분은 책읽기이다. #다시 고전 읽어보기 # 미술사 읽기 #지금처럼 주어진 시간이 많을 때 역사 관련 책을 읽어보자. 바이러스도 역사가 있다. 5. 나에게 맞는 취미 생활 찾기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집에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취미생활은 심리적으로 여유를 찾고 정서적인 안정을 가질 수 있다. 나만의 개성 가득한 취미생활로 삶의 질을 높이고 그동안 몰랐던 재능 계발도 해보자. 6. 마음 밭 가꾸기 우리 마음은 몸과 연결 되어 있다. 불안과 걱정 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자.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숭고한 희생과 많은 사람들의 봉사가 있어서 안전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 또한 길어진 재난 상황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져도 없어진 수입만큼, 사랑하는 마음은 줄어들지 않도록 하자. 매일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오늘을 행복하게 살면 어느 순간 행복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 혼자는 아무리 큰 행복도 의미가 없다. 함께 나눌 때 행복의 가치는 더욱 빛날 것이다. <끝>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칼럼] 경제 발전(위기)과 중앙은행의 독립성:김성석

글: 김성석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트럼프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지속적으로 이자율을 높인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연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거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많은 나라들이 이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제도를 바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쉬웠던 국가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없더라도 중앙은행이 정부의 시책을 시행함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또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더 높아지는데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도네시아가 독립하면서부터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이 독립성을 갖추기까지의 상대적으로 긴 시간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의 중요성을 어떤 면에서 잘 보여주는 사례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32년간 수하르토 정권하에서의 인도네시아의 중앙은행이 역할과 그 결과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정책 금융의 실행처로서 중앙은행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반공산주의 성격이 강하던 군부의 장성들을 죽이고 집권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루도 못되어 이 사태는 군부에 의해 진압됩니다. 9.30 사태는 군부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지원하던 모습을 지녔던 수카르노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습니다. 이후 수카르노는 9.30 사태를 수습하면서 등장한 수하르토에게 1967년에 정권이 이양되게 됩니다. 수하르토는 유엔과 IMF와 같은 국제기구의 복귀와 말레이시아와의 대립 정책의 청산 등으로 구질서(orde lama)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신질서(orde baru) 시대를 엽니다. 1945년 헌법과 빤짜실라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신질서 하의 정부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경제였습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66년 한 때 1500%에 이르렀던 (Hill, 2001, p.45) 초인플레이션입니다. 지나친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존하는 구질서 시대 정책의 실패를 본 신질서 정부는 경제에 있어서 정부의 지나친 역할을 줄이고 시장과 민간에게 참여 기회를 주는 정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Grenvile, 1990, p.134). 이런 정책 기조에 의해 수많은 제도들이 바뀌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중앙은행의 변화입니다. 수하르토 정권의 첫번째 내각인 암페라 내각(Kabinet Ampera)은 1966년 7월 그동안 내각의 일부로 편재 되어있던 중앙은행의 위치를 독립적인 국가기구로 격상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그동안 하나의 은행(Bank Tunggal) 정책의 폐지를 의미하며 또한 중앙은행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첫 단계였습니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그 역사를 서술하면서 1966 당시 여전히 인도네시아 국립은행 제1국으로 불리웠지만, 중앙은행으로서 정치적인 결정으로부터 자율성을 지키며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BI, 2007) 이후 1967년 시행된 은행법 (UU No.14/1967)에 따라 기존의 ‘하나의 은행’(Bank Tunggal) 정책이 폐지되고, ‘하나의 은행’으로 묶여 있던 은행들은 중앙은행과, 여러 개의 국영 은행들로 나누어집니다. 중앙은행에 대해서도 1968년 새로운 중앙은행법 (UU No.13/1968)이 시행되게 됩니다. 다시금 중앙은행은 인도네시아은행(Bank Indonesia)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몇 가지 변화를 가져옵니다. 대표적인 것은 중앙은행으로서 상업은행 업무를 취급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953년의 네덜란드의 상업 은행인 자바은행(De Javasche Bank)을 중앙은행의 업무를 담당함으로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이 시작했기에 지녔던 상업은행의 성격을 이제 완전히 지우게 된 것입니다. 중앙은행이 가지고 있었던 상업은행으로서의 역할은 다른 국영 은행들에게 이전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리안 자야에 있었던 상업은행의 역할을 하던 중앙은행 지점은 폐지되고 수출입은행이 그 업무를 인수하게 됩니다(BI, 2007). 1968년 중앙은행법은 루피아의 가치 안정과 경제 성장과 또한 일자리 창조를 통한 국민 생활의 수준을 높이는 것을 중앙은행의 주된 업무로 지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통화 정책의 시행, 은행의 감독과 쇄신 등의 일반적인 중앙은행의 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국가 발전을 뒷받침하는 역할, 특별히 ‘정책 자금 조달’의 역할을 부여 받게 된 것입니다. 중앙은행 뿐 아니라 다른 국영 은행들의 역할도 1967년 이전에는 정부 재정 적자 융자에 머물렀습니다(Grenville, 1990.p.133). 그러나 새로운 변화 속에서 처음으로 일반 국민들의 저축을 통한 자금을 확보하기 시작하였고 실제로 국영 은행들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약 80%의 경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였습니다. 중앙은행은 여러 국영 은행을 통해 정부의 정책 금융의 방향에 따라 특정 산업과 사업들을 지원하는 자본을 조달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만 인도네시아은행은 중앙은행으로서 직접적인 자본 조달의 양과 분배를 통제가 아닌 여러 국책은행들과 새롭게 등장한 민간은행을 통한 간접 통제 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인도네시아은행은 일반적인 금융정책으로 알려진 지급준비율 정책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은행권을 감독하여 그 총량을 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은행이 중앙은행으로서 행한 여러 통화정책조차도 실제로는 정부가 원하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Grenville, 1990. p.140) 1967년 이래로 인도네시아은행은 독립된 정부기구가 되었고, 인도네시아은행 총재, 재무부 장관, 그리고 통상부 장관으로 구성된 통화위원회가 있었지만, 통화위원회의 의장은 인도네시아은행 총재가 아닌 재무부 장관이었습니다. 또한 정부의 대출은 국회(MPR)의 동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골까르당(Golkar)으로 대표되는 집권당을 반대할 수 있는 야당의 힘은 매우 약했습니다. 이런 사정들로 인하여 중앙은행으로서 인도네시아은행의 독립성은 부족하였습니다. 독립 국가기관이지만 실제로 이 시기에는 정부의 정책을 시행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했던 것은 인도네시아은행 총재들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신질서 시대의 초기 약 15년 인도네시아은행 총재는 라디우스 쁘라위로 (Radius Prawiro, 1966-1973)와 라흐맛 살레(Rachmat Saleh,1973-1983) 두 분이었습니다. 1968년 중앙은행법에 따르면 중앙은행 총재의 임기는 5년이었는데, 쁘라위로는 인도네시아은행 총재를 역임한 이후 통상부 장관 (1973-1983), 중소기업부 장관 (1978-1983), 재무부 장관 (1983-1988), 경제금융산업개발조정 장관 (1988-1993)을 역임합니다. 반면, 살레는 통상부 장관(1983-1988)을 역임합니다. 이 분들의 행보는 분명히 그 분들이 그 분야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결과임을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 총재로서 그들의 역할은 금융정책의 독립보다는 정부 정책의 실행에 중점을 두었던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2. 경제 성장과 경제 위기 중앙은행의 독립성과는 상관없이 1967년 이후 시장 중심과 민간 참여로 바뀐 경제 정책의 변화는 인도네시아에 눈에 띄는 경제적인 성과들을 가져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초인플레이션 현상이 단기간에 사라지고 안정된 것입니다. 1969년의 인플레이션은 15%로 억제됩니다(Hill, 2001). 물론 석유 가격의 폭등 시기인 1973~1974년에는 30%가 넘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대체로 인플레이션은 안정적으로 관리됩니다. 더 나아가 1971-1981 시기에는 실질 GDP 성장률이 7.7%에 이르고 적어도 5%에 이르는 결과를 이루어냅니다 (Hill, 2001. p.24). 1968년에 15% 정도이던 2차 산업과 55%에 이르던 농업의 비중이 1974년을 기점으로 약 30%대로 비중이 같아지고, 1980년 초기에는 25% 이하로 농업의 비중이 들어들고, 2차 산업과 서비스분야의 비중이 증가합니다 (Hill, 2001. p.29). 정책 금융으로 산업 구조의 개선이 급격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정부의 정책 금융과 시장이 함께 성장하는 데에는 분명히 충돌되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Hill, 2001, p.57). 관 주도의 금융과 자본 시장이 성장은 상대적으로 느렸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는 1977년에 다시 주식 시장을 개설하였지만, 주변의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그 발전속도는 느렸습니다. 예를 들어 1992년을 기준으로 볼 때, 인도네시아 주식시장은 GDP 대비 7%였습니다. 반면 필리핀은 36%, 태국은 59%, 싱가포르은 109%, 그리고 말레이시아는 153%에 이르렀습니다 (Hill, 2001, p.57).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의 정책금융과 보조금이 주도하던 금융은 시장의 자율성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갔습니다. 1983년 은행 관련법의 개정으로 금융시장의 자유화가 이루어지고, 인도네시아은행은 중앙은행으로서 은행에 대한 관리감독 권한을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여 시행하게 됩니다. 정책금융과 보조금의 잘못된 산업 또는 기업에 투자되고 더불어 국민 경제 발전에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도 정부 주도의 금융정책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Hill, 2001, p. 57). 예를 들어 1974년 원유가격의 폭등으로 국영 석유회사인 뻐르따미나(Pertamina)는 당시 인도네시아 GDP 1/6에 이르는 수익을 내게 됩니다. 당시 정치인들이 뻐르따미나를 사금고처럼 사용하였었는데, 1975년 수익성이 크게 떨어져 해외 채무 변제 능력이 상실되어 국유화해야 했습니다. 이 국유화로 인도네시아 정부의 해외 채무는 이전에 비해 두배로 증가하였습니다. 1975부터 1977년까지 뻐르따미나는 전체 은행권의 대출의 27% 이상의 대규모 자금이 투자되어야 했습니다 (Grenville, 1990, p.138). 어쩌면 독립적이지 못한 중앙은행으로, 중앙은행이 정부의 정책금융의 집행자가 되었을 때 치루어야 할 댓가는 이 정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율성을 가지고 금융정책을 펼치지 못한 중앙은행은 결국 금융 위기를 불러오고 국민경제 파국을 가져옵니다(Sucipto, 2008). 수찝또(2007)는 수카르노의 구질서(Orde Lama)시대가 초인플레이션이 끝난 것과 수하르토의 신질서(Orde Baru) 시대가 경제 위기로 끝난 원인을 독립적 금융 정책을 가질 수 없었던 중앙은행에서 찾고 있습니다. 두 번의 큰 실패가 경험 이후 1999년에 인도네시아 중앙은행법이 개정이 되고,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법 조항으로 명시가 됩니다. 참고 문헌 Bank Indonesia, (2007) Sejarah Kelembagaan Periode 1966-1983. https://www.bi.go.id/id/tentang-bi/museum/sejarah-bi/bi/Pages/sejarahbi_1.aspx Bank Indonesia, (2007) Sejarah Kelembagaan Periode 1983-1997. https://www.bi.go.id/id/tentang-bi/museum/sejarah-bi/bi/Pages/sejarahbi_1.aspx Greenville, S. (1990). Kebijaksanaan Moneter dan Sektor Keuangan Formal. dalam Anne Booth dan Peter McCawley (eds.), Ekonomi Orde Baru, LP3ES, pp.132-165. Hill, H. (2001). Ekonomi Indonesia ed ke-2. Pt RajaGrafindo Persada. Sucipto, H. (2007). Independensi Bank Indonesia dari masa Orde Lama dampai Orde Reformasi dan prospeknya ke depan (Doctoral dissertation, Universitas Gadjah Mada).

[에세이]바오밥 나무와 나시고렝/노경래

바오밥 나무와 나시고렝 노경래 마다가스카르 하면 바오밥나무가 떠오른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에서 개코원숭이들이 집처럼 뛰놀던 바로 그 나무다. 마다가스카르 하면 또 인도네시아인들이 Pisang kipas라고 하는 여행자나무(Traveler's tree)로도 유명하다. 마다가스카르는 면적 기준으로 세계 4번째 크기의 섬이다. 동아프리카 해안으로부터 약 400km밖에 안 떨어져 있고, 자카르타로부터는 약 6,300km 떨어져 있다. 마다가스카르와 아시아 또는 호주 사이에는 인도양이 가로놓여 있다. 판구조론에 의하면, 마다가스카르는 1억 3,5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와 떨어졌고, 8,800만 년 전에는 인도와 헤어졌다. 마다가스카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언어를 Malagasy라고 한다. 마다가스카르에는 현재 크게 봐서 두 종족이 섞여 살고 있다. 그중 하나는 당연 아프리카 흑인이지만, 또 하나는 얼굴만 보아도 동남아시아인임을 금방 알 수 있는 사람들이다. 2012년에 영국의 자연과학학회인 Royal Society의 저널에는 약 1,200년 전에 30명의 인도네시아 여자들이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했다는 논문(‘마다가스카르에서 발견된 소규모의 동남아 여성 집단’)이 실렸다. 대규모로 계획된 식민 방식이 아닌 소규모의 의도치 않은 대양 횡단을 통해 정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2005년부터 시작된 이 연구는 인도네시아인 2,745명과 마다가스카르인 266명의 개인별 미토콘드리아 DNA를 테스트하였다. 그 결과 Malagasy의 모계는 인도네시아인들의 DNA가 지배적이었으며, 30명의 인도네시아 여자들이 그들의 DNA를 Malagasy인들에게 물려주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논문은 유전학적으로 Malagasy인과 인도네시아인들이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명백하게 제시하였지만, 이 30명의 인도네시아 여자들이 인도네시아의 어떤 종족에 속했는지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이 과학자들이 밝혀내지 못한 비밀을 밝혀내게 된다. Malagasy인들은 아시아인이든 흑인이든 혼혈이든 모두 오스트로네시아계 언어를 사용한다. 오스트로네시아는 서쪽의 마다가스카르에서 말레이 반도를 거쳐 동쪽의 하와이, 이스터 섬에 이르는 광대한 대양의 섬 지역을 말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오스트로네시아어라고 한다. 오스트로네시아어는 교착어(언어의 문법적 기능을 어근과 접사의 결합으로 나타내는 언어)를 사용하고, 명사를 두 번 반복해서 복수를 표시하거나 강조하는 어법이 특징이다. 언어학자들은 마다가스카르인의 국어인 Malagasy가 마다가스카르에서 약 7,000km도 넘는 광활한 인도양 너머 남부 칼리만탄에서 사용되고 있는 마아냔어(Ma'anyan)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1614년 예수회 신부인 Luis Mariano는 Malagasy인의 언어가 칼리만탄 Dayak족의 한 부류로 칼리만탄 남동부에 있는 Barito 강변을 따라 살고 있는 Ma’anyan어로부터 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유럽인들이 처음 마다가스카르를 찾아왔던 1500년경에도 Ma’anyan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미 마다가스카르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언어학자들에게 그 동안 과학자들이 풀지못한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를 비교해보면, Malagasy어와 Ma'anyan어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총, 균, 쇠≫(1998)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것이야말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인문지리학적 사실인 듯하다. 이것은 가령 콜럼버스가 쿠바에 도착했을 때, 가까운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아메린드계 언어를 사용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쿠바에는 스웨덴어와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는 푸른 눈, 금발 머리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도대체 보르네오인들은 지도나 나침반도 없이 배를 타고 항해하여 어떻게 마다가스카르까지 올 수 있었을까?”라고 하였다. 마다가스카르를 탐사한 고고학자들은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 적어도 A.D. 800년 이전에 그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럼, 약 7,000km나 되는 Ma’anyan인들의 대장정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A.D. 800년 이후는 이슬람 세력이 확산되는 시기였다. 이슬람 상인들은 순풍을 기다렸다가 인도양을 건너 동아프리카와 인도 사이를 왕래하였고, 동 아프리카 해안에도 많은 고고학자적 증거를 남겨두었다. 1497년 포르투갈의 선장 바스코 다 가마는 함대를 이끌고 폭풍곶(그는 이름을 희망봉으로 바꿈)을 돌아 그때까지는 유럽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가는 대규모 항해 끝에, 인도의 캘커타(현 Kolkata)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인도에서 동쪽 방향, 즉 인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서도 역시 활발한 해상 교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Ma’anyan인들은 남부 칼리만탄을 출발하여 이 교역로를 따라 인도에 도착했다가 다시 서쪽의 교역로를 따라 동아프리카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아프리카인들과 합류하여 마다가스카르 섬을 발견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마다가스카르는 얼굴 생김새 및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의 동질성도 인정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악기들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마다가스카르의 악기인 발리하(Valiha)는 대나무로 된 둥근 울림통에 12~24개의 현을 매단 마다가스카르의 전통 악기이다. 이 악기는 남부 칼리만탄에서 온 정착인들이 이 섬에 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물론 이 악기는 인도네시아의 여러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Valiha가 NTT의 Sasando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건축 양식 또한 남부 칼리만탄의 건축 양식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한다. Malagasy인들은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삼시 세끼를 쌀을 식재료로 하는 나시고렝 등을 먹으며, 식사 후에는 숭늉을 마신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증거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이 마다가스카르의 정착 과정에 실로 놀랍고 중대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왜 칼리만탄의 Ma’anyan인들이 이역만리 마다가스카르까지 가게 되었는지, 그들이 혹시 전통적인 무역로를 이용하지 않고 예기치 않게 표류하여 인도양을 가로 질러 –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 곧장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실제로 어떤 이유로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인도네시아인들이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했는지는 2000년을 산다고 하는 바오밥나무는 알고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1998) - Murray P. Cox 등, A-small-cohort-of-Island-Southeast-Asian-women-founded-Madagascar(2012) - Charles Randriamasimanana, The Malayo-Polynesian Origins of Malagasy(1999) - Wikipedia, Malagasy language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에세이] 인도네시아에서 살아남기- 나만의 인니 연관 검색어/조현영

조현영 어느새 인니 생활 20년차에 들어선다. 3년만 살고 돌아가자던 계획은 그저 계획이었을 뿐, 다들 그렇게 시작해서 20년을 훌쩍 넘기게 된다는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인니에 한번 발을 들였던 사람은 자바의 여신이 당겨 다시 돌아오게 만든다는 ‘썰’이 3년차를 넘기니 진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생활은 단순했다. 해외에서 사는 일은 꽤나 근사하고 버라이어티할 줄 알았던 막연한 기대는 하루하루 적응하고 사는 데 집중하느라 일찌감치 사라졌다. 그곳이 어디였더라도 살아내야 할 기본에 낯선 환경이라는 옵션만 추가됐을 뿐. 초창기에는 다른 문화와 환경을 경험하는 것 만으로도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국의 가족, 친구를 불러 들였다. 5년 차가 넘어가면서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버거웠다. 버라이어티한 외국생활이 이런거였나 싶었다. ‘가지가지 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혹여 누구라도 찾아올까봐 그때는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다. 10년이 훌쩍 지나고 나니 많은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게 서서히 인도네시아에 스며들었다. **** 처음 도착한 수카르노하타 공항의 냄새와 공기, 이국적인 분위기의 아파트와 수영장, 어두운 밤 거리, 마음 놓고 걸어다닐 수 없는 길 ( 차량 중심적), 자띠 가구( 내 취향은 아니나 감탄할 만한 솜씨), 지루한 초록색 이파리와 노란 캄보쟈, 갑자기 쏟아지던 우기의 스콜, 그 비에 오토바이 세우고 길가에서 비 긋는 풍경 (서두르지 않는), 아파트 하얀벽에 찌짝 (마주칠 때마다 매번 깜짝), 흰 개미 라얍 ( 나무 갉아먹는 소리가 들리던 이층 주택 창가), 이슬람 사원의 아잔 (새벽 단잠 제대로 깨우는), 비가 잠긴 아파트 뒷동네 (차 지붕만 보였던). 운전기사, 가사도우미, 신발 가격표보다 적은 가사 도우미 월급 (2001년도 도우미 월급이 35만 루피아였다), 심심치 않았던 기사와 도우미 관련 해프닝(너무나도 많은 사례가 쏟아져 나올 법한 이슈), 눈에 보이는 그들의 거짓말, 수백만 가지의 핑계와 변명 그리고 의심 (자카르타에서 얻은 고질병), 루피아 화폐단위(나 부자인줄), 교통체증, 지켜지지 않는 약속 (납기 1달 지연은 기본). 전화선으로 연결한 인터넷(전화오면 뚝 끊어지는,하..), 인터넷 한 페이지 넘어갈 동안 바라보던 창 밖의 지평선(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 성모유치원(한국어 유치원이라니 와락), 특례입시( 12년을 버티게 하는), 오래 보관했던 신발 신고 나간 날의 당혹감(걷다가 떨어져 나간 신발 밑창. 어쩔), 오자 마자 배운 골프 (구력만 늘고 있는), VHS비디오테잎 대여(보고 싶은 편이 없을 때의 실망감이란..대장금), 이민국, 비자. 작은데 거대한 오토바이(4식구가 탔는데 짐도 실려), 바틱(아름답지만 내겐 어울리지 않는), 한인니 복합어의 대표적 사례 ‘pulang하지마’(레전드로 남아 있는 웃픈 에피소드), 화려한 쇼핑몰과 초라한 서비스, 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여인, 3in1시내 통과를 위한 조끼(Joki, 대놓고 편법), 으슥한 밤골목의 벤쫑(여장 남자), 짝퉁 명품 시장 (그 와중에 특급은 dari korea), 버스 지붕 위에 올라탄 군중, 마을버스 kopaja (코파자, 한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큰 웃음 안겨주던), 동네잔치 대형 스피커에서 울려대는 당둣(dangdut)가락(나도 모르게 내적 댄스). 찰기 없는 쌀 (고슬고슬 맛있는), 사 먹는 물, 르바란 금식, 자차로 돌아보는 따만 사파리, 반둥가던 고갯길 파인애플(개꿀맛), 뿐짝 꿀 고구마, 삼발 뜨라시, 미고렝, 나시고렝, 고렝안(최애 인니 메뉴), 썩지 않는 빵(이거 먹으면 안 늙을지도 모른다는 착각 주의), 까끼 리마(Kaki lima)의 진실 (밥 공기 하나에 밥숟가락 하나가득MSG), 손으로 먹는 식사 (어쩜 흘리지도 않아). 간간이 들려오던 한인 사건사고 소식, 몇 단어로도 통했던 인니어 (주재하는 3년 동안 손가락과 ‘ini’ 하나로 잘 살았던 어떤 그녀), 얼마 안가서 배우러 간 인니어 강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BIPA 할걸..약간 후회), tidak apa-apa (두루두루 참 편리하게 쓰이는, 띠따빠빠..자꾸 듣다보면 빡치는). ****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던 인니생활 선배들의 말씀은 살면서 저절로 알아졌다. 되면 고맙고 안되면 말고다. 오죽하면 고무줄 시간(Jam karet)이라고 할까 싶게 안 지켜지는 약속들에 은연 중 나는 동화되어 갔다. 자카르타에서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공공연한 핑계 뒤에 숨어서. 거짓말만 하는 것 같았던 그들의 말 속에서 진심을 찾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끝도 없이 늘어놓는 핑계를 걸러낼 줄도 알게 되었다. 아주 천천히 경계를 허물어 갔다. ‘인도네시아에 사는거 좋아요?‘ 불쑥 받은 질문에는 대답을 못했다. 나름 잘 적응하며 산다고 믿었던 나 조차도 의외였다. 어쩌다 오게 된 인도네시아였고 간간이 힘들었지만 누릴 수 있는게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개박수치며 좋다고 하기엔 불편함이 많았고 결핍도 많았다. 그렇다면 ‘좋았다 싫었다 한다’가 대답일까.(어정쩡한 내 성격때문인가) 애초에 인도네시아의 삶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을 우선으로 결정했고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것을 피하고자 따라나선 길이었다. 그렇게 정해진 나의 수동적인 결정은 내가 인도네시아에 적당한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속마음을 깔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곁을 주지 않았으니 좋다는 말이 쉽게 나올 수 없었던 이유다. 시간이 지나서야.. 사실은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음을 털어놓는다. 인니에 있었던 이 시간들을 한국에서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이 혹은 미련이 무쓸모한 일일지라도, 내가 발 딛고 사는 곳이 어디였든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거란 결론을 내리고는 ‘ 나는 인도네시아가 좋아’라고 혼잣말을 내어본다. 인도네시아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내게 될지 모르겠으나 남아있는 시간들 만큼 또 다른 연관검색어는 늘어날테지. 이를테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나와 눈을 맞추고 순수하게 웃어 주던 그 소녀, 회색벽 앞 그림 같았던 길가의 꽃나무, 우기에 나타나는 연탄불 같은 노을빛, 뾰루퉁한 심기를 누그러뜨리는 은은한 자바 커피향,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던 길 모퉁이 바람의 위로.. 같은 아름답거나 다정하며 따듯한 단어들 말이다.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 에세이] “사람이 책이다” /조연숙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국장 /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 편찬위원 “사람이 책이다.” <인도네시아 한인100년사>(가제, 이하 한인사)를 취재하면서 드는 생각이다. 한국 기업이 인도네시아에 오게 된 이유, 한국 기업이 파산한 이유,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신발업체들의 지속가능성, 인도네시아에서 자란 한국인 2세와 성인이 되어서 한국에 온 한국인 1세들의 다른 점, 새로 온 사람과 거리를 두는 이유 등. 뻔한 질문이고 뉴스, 책, 논문 등 여러 가지 컨텐츠를 통해 쉽게 답을 구할 수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인만이 답할 수 있는 좀더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답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한인사 인터뷰를 하며 그 답을 사람들로부터 듣고 있다. 요즘 내가 만나서 질문하는 사람들은 목재산업, 봉제산업, 신발산업, 전자산업 등이 인도네시아로 진출하던 초기에 와서 기업의 흥망성쇠를 함께 하며 수십년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또 꼬마 때 부모님을 따라 인도네시아로 와서 한국 학교, 인도네시아 학교, 영미권 국제학교, 한국 대학과 외국 대학 등을 다니며 성장기에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며 경계에서 성장한 사람들이다. 인도네시아에서 계속 살 사람, 고국으로 돌아갈 사람 또는 다른 나라로 이주해 살 사람 등 책에 없는 답을 하는 그들을 보며, ‘사람이 책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사람들을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 한인사 인터뷰를 시작할 때 예상했던 것보다 개개인의 경험이 훨씬 다양함을 확인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에 다닌 사람과 한국에서 한국학교에 다닌 사람은 얼마나 비슷할까? 인도네시아에서 JIKS에 다닌 사람과 영어권 학교에 다닌 사람은 생각하는 방식이 같을까? 한국인이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나 영어로 공부하면서 외국인 공동체에서 성장했을 때와 인도네시아어로 공부하고 인도네시아인들 속에서 성장했을 때 현지에 동화되는 차이는? 이런 내용을 정리한 책이 있나? 그 책은 이렇게 여러 모습을 한 한국인의 모습을 얼마나 기록했을까? 인도네시아 한인 1세, 1.5세, 2세 그리고 3세들은 ‘다양성 속의 통일(Bhinneka Tunggal Ika)’을 모토로 삼고 있는 인도네시아만큼이나 다양하게 살고 있다. 아직 글로 기록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책장을 넘기듯 듣는다. 한인사에 기록할 다양한 한인들의 모습을 통해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인들의 정체성이 드러나길 기대하며… [데일리인도네시아]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동시에 실립니다.

[여행]발리를 키운 건 팔할이 예술이었다/사공경

발리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었다 - 자연과 종교와 예술혼의 합작품, 발리 - 사공경(한인니문화연구원장) 여행을 가본 지역은 대부분 다시 가지 않는다. 발리는 다르다. 발리를 갔다 와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깊은 향수로 몸살이 나 다시 발리를 찾게 된다. 발리를 태어나게 한 것은 자연과 인간을 만든 신의 손길이지만, 발리를 키운 것은 무엇보다도 푸른 눈을 가진 예술가들의 예술혼과 발리문화를 서구에서도 통용되는 문화로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우붓의 수까와띠 왕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 자연이 만든 발리 항상 꽃이 지지 않는 나라 인도네시아. 발리에 오면 파아란 하늘 때문일까. 발리 꽃들은 더 특별해 보인다. 그중에서도 ‘발리 꽃’이라고 불리는 깜보자는 꽃잎이 5장으로 되어 있으며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향기 때문일까. 고혹적이다. 발리는 천리향이라고도 불리는 깜보자 향기로 가득하다. 또 발리에서 해변에 줄지어 늘어선 야자수 아래에 서면 섬세하고 강렬한 햇빛 때문에 야자수가 수묵화로 보이기도 한다. 발리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인도양 맑고 푸른 바다나 수평선을 활기차게 잘 연주하면서 불타는 석양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영화 “에마뉘엘 부인”의 무대가 된 후에는 발리 섬에서도 최고의 명소가 된 따나 롯 사원의 석양도 유명하다. 울루와뚜 사원은 해발75km의 절벽위에 세워져 끝에 서면 눈앞이 아찔하다. 이곳에서 께짝 댄스를 감상하면서 울루와뚜의 일몰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살던 세상은 저 멀리에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발리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기에 충분하다. 발리의 인구는 4.2백만 명(2015년 기준)으로 이 중 힌두교도가 85%, 무슬림이 12%, 크리스천 등이 3%이다. 발리의 서쪽에 있는 자바와 동쪽에 있는 롬복은 무슬림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지역인데, 그 두 섬 중간에 위치한 발리가 이슬람의 영향에서 벗어나 힌두교를 유지해온 특별한 이유가 있다.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해 발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외부의 침략을 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발리는 북쪽으로 갈수록 표고가 높아지고, 아궁 산 (Gunung Agung, 3,148m) 등이 위치하여 발리의 동서남북 간 이동이 쉽지 않다. 동쪽으로는 산이 바로 해안선까지 연결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석회암의 침하로 많은 절벽이 있어 농사를 짓거나 배의 정박이 어렵다고 한다. 발리는 말루쿠 지역처럼 향신료도 많이 나지 않고, 플로레스처럼 백단향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세력의 관심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가 발리에 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발리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자바와 롬복 동쪽의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완충지로서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발리인들은 부지런하고 농사 잘 짓기로 유명하다. # 신이 만든 발리 ‘발리(Bali)’는 산스크리트어로 ‘바친다(Wal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에게 제물이나 자신을 받친다는 의미인지, 이 지역을 전체로 신에게 받친다는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발리에 오면 언제나 축제를 만날 수 있다. 집집마다 ‘뺀조르(Penjor)’를 높이 올리고 끄바야 발리를 정성껏 차려 입고 제물인 그봉안(Gebongan)을 높이 이고 사원으로 가는 제례행렬에는 종교적 신성함이 느껴진다. 뺀조르는 끝이 휘어진 긴 대나무 막대기에 노란빛 코코넛 잎인 자누르(Janur)로 꾸며진 것이다. 이것은 발리 힌두교 신자들이 중요한 의식에서 쓰는 도구이며, 산과 우주 공간을 상징하며, 발리인에게 가장 영적인 산인 구눙 아궁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겸손한 마음으로 신께 헌신하고 조상께 기도하며 비옥한 땅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나타낸다. 뺀조르를 만들 때 자신의 염원을 담고 다음 생애에는 좋은 생명체로 태어나기를 기원한다고 한다. 자연물로 만드는 뺀조르는 그 자체가 예술작품이다. 발리력은 일 년이 210일이다. 일 년에 한번 조상영혼이 지상을 방문하는 날을 기리는 갈룽안(Galungan) 축제 때에는 대로변 양쪽에도 골목골목 집집마다에다도 뺀조르를 달아서 마치 숲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리 힌두의 최고 신인 상향위디와사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발리는 온통 축제 속에 들어간다. 뺀조르 숲 속을 걸으면 저절로 신이 주신 생명에 감사하며 굽은 뻰조르처럼 머리가 숙여진다. 뺀조르를 만들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굽은 대나무라고 한다. 갈룽안 축제는 보통 10일 동안 열리며 마지막 날 축제가 꾸닝안(Kuningan) 축제이다. 사원이 세워진 날을 기념하는 오달란(Odalan) 축제 또한 발리의 대표적인 축제이다. 오달란 축제만도 6,000번이 열린다. 발리에는 6,000개의 힌두사원인 뿌라(Pura)가 마을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집마다 신당처럼 꾸며 놓은 기도처가 있다. 축제 때 할머니들이 우아하게 춤추는 것을 볼 수 있다. 발리 사람들에게 춤은 또 다른 신과 신위에게 바치는 봉헌물이다. 축제를 통해 그들은 신께 더 가까이가고 전통문화를 전승시키면서 과거와 오늘을 살아간다. 또한 축제를 즐기면서 유대감이 생기고 신화적 이야기를 통해 창조적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축제는 예술이며 역사이며, 문화이며, 전통이다. 이는 곧 인문학이다. 얼마 전 발리 힌두의 총본산인 브사키(Besakih) 사원 가는 길에 제물인 짜낭사리(Canang Sari)을 사고 사진을 찍기 위해 재래시장에 내린 적이 있다. 택시 기사는 차문도 잠그지 않고 꽃과 과자 등 제물을 골랐다. 나는 불안해서 계속 차 쪽을 지켜보았다. 기사는 “힌두교는 곳곳에 신이 있습니다. 외지인이 많은 누사두아 쪽은 몰라도 발리인들만 있는 이곳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가까이 느끼고 삽니다. 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 예술인이 만든 발리 1920년~1930년대 발리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예술가 중 한사람인 멕시코 작가 미겔 코바루비아스(Miguel Covarrubias, 1904-1957)는 「발리 섬」 (1937년)이라는 책에서 “발리만큼 자연과 사람, 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곳은 없다”고 했다. 그는 문화인류학자이기도 하다. 코바루비아스의 <사누르 해변>이라는 작품에는 코발트색 하늘을 이고 아름다운 인도양 해변에 앉아있는 여인이 있다. 발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벼 이삭을 이고 가는 여인들 뒤에는 우붓의 초록빛 전원이 펼쳐진다. 발리 회화에는 까인빤장(Kain Panjang)만 입고 끔번(Kemben)도 가슴에 두르지 않은 발리 여인들이 논농사를 하거나 자연 속에 있는 그림을 보면 아름답다 못해 찬란하다. 1950년대까지 발리여인들은 끔번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벼를 추수하는 여인들이나 벼를 이식하는 관상적이면서도 생생한 그림 앞에 서면 사람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예술임을 알 수가 있다. 예술의 열정으로 여성을 그린 스페인 작가 안토니오 블랑코(Antonio Blanco, 1912-1999)는 1952년에 발리에 왔으며 발리 회화의 대표주자이다. 발리에 문명이 들어오고 관광객이 들어오면서 옷을 입지 않는 문화는 지킬 수 없었지만, 자신의 박물관 내에서 1990년대까지 발리 문화를 지켜왔다. 발리는 안토니오에게 예술적 독창성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아름다운 풍경, 환상적인 분위기, 널리 퍼진 위대한 예술품을 주었다. 발리 무희와 결혼했으며 발리에 정착한 그는 삶과 일에 대한 꿈을 깨닫기 시작한다. 우붓의 기안야르 지역의 왕, 조꼬르다 그데 아궁 수까와띠(Tjokorda Gde Agung Sukawati)는 안토니오에게 땅을 주었다. 지금 안토니오 박물관 자리이다. 그의 그림은 낭만적이고 몽환적이다. 영원한 여성 화가이며 그에게는 여성이 곧 예술임을 알 수 있다. 네덜란드 작가 루돌프 보넷(Rudolf Bonnet, 1895–1978)은 1929년 발리에 도착하여 작가 월트 스파이(Walter Spies, 1895–1942)와 우붓의 왕궁과 가깝게 지냈다. 보넷은 우붓에 머물면서 의료 및 교육을 포함한 지역 사회 문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억류 수용소에서 보냈다. 수카르노 대통령이 발리 땀빡시링(Tampaksiring)에 궁전을 세운 후 보넷을 자주 찾아 방문했다. 허나 보넷은 1957년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특정한 그림을 팔기를 거부 한 후 발리에서 강제 추방되었다. 그는 15년 후 노인이 되어서 돌아 왔다고 한다. 그는 동성연애자로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발리의 예술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 헌신했으며 우붓의 뿌리 루키산(Puri Lukisan) 박물관을 만들었다. 보넷은 1978년 네덜란드에서 죽는다. 1979년 발리의식으로 화장되었고 유골은 그의 친한 친구 아궁 수카와티 (Corkorda Agung Sukawati) 왕자와 함께 바다에 던져졌다. 발리의 전설적인 독일 화가이자 음악가인 월트 스피스는 1925~1940년 우붓에 살았는데 보넷과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끄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스피스는 무용가이기도 했다. 우리가 발리에서 만나는 께짝댄스나 바롱댄스를 재연출한 것도 스피스였다. 그는 뛰어난 예술가였으나 참된 조국이 없는 문화적 방랑아이기도 했다. 그는 독일 국적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 성장하지만 1차 세계대전 중 제2의 조국인 러시아에서 억류생활을 하게 된다. 조국인 독일에서도 동성연애자인 그는 적응하지 못한다.우붓의 수까와띠 왕은 유럽의 예술가들을 통해 발리예술을 세계화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아리 스미스(Arie Smith, 1916-2016)는 1938년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에 파견되어 바타비아에 있는 네덜란드 육군 지형 서비스의 석판인으로 일했다. 1942년 초 스미스는 싱가포르, 태국, 버마에서 도로, 교량 및 철도를 건설하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 3년 반을 보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스미스는 석방되어 새로운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 돌아 왔다. 그는 1951년 인도네시아 시민이 되었으며 반둥공대(ITB)에서 그래픽과 리소그래피를 가르쳤다. 미술 상인 짐 판디(Jim Pandy)의 초대에 따라 1956년 발리를 방문하여 사누르 해변에 있는 작은 집에 머물렀다. 그는 밝은 색을 사랑했으며 발리의 풍경에 강렬한 빛을 사용한 색깔을 사용하였다. 발리의 그림 발전에 대한 그의 역할을 인정받아 1992년 발리 주정부로부터 다르마 꾸수마(Darma Kusuma) 상을 받았다. 테오 마이어 (1908-1982)도 손꼽히는 작가이다. 스위스 화가로 타히티에서 놓친 열대의 원시적 단순성을 발리 사누르에 정착하고 찾는다. 타이티는 기독교가 들어와 전통문화가 많이 파괴된다. 그는 월터 스파이를 비롯한 발리섬의 다른 예술가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수카르노의 신임을 받게 된다. 인니 작가 Ida Bagus Nyoman Rai(1915-2000) 등의 작품을 느까 박물관(Neka Art Museum)이나 아궁 라이 박물관(Agung Rai Museum of Art)에서 만날 수 있다. 이들 발리 그림 속에서도 사람과 신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붓에는 50여 곳이 넘는 갤러리가 몰려 있다. 그림이나 목공 작품을 파는 작은 상점까지 포함하면 마을 전체가 갤러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붓이 있어서 발리를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붓은 유명한 예술촌이다. 이렇게 발리는 자연, 신, 사람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발리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된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써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 되며 우리 삶에 색깔을 부여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다시 발리를 찾게 된다. 발리는 다르다. 참고문헌 가종수 「신들의 섬 발리」 2010 노경래 「한국인이 알아야할 인도네시아」 2017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칼럼]특이점이 온 재인도네시아 한인사회

글: 배동선 중국, 일본, 미국 같은 나라는 한인교민사가 100년을 훌쩍 넘은지 오래고 2019년엔 프랑스와 대만이 교민 100년사를 편찬했다. 이번엔 인도네시아 차례다. 자신이 일하던 은행에서 돈을 빼돌려 독립군자금을 지원했다가 발각되어 일제에 쫒기던 장윤원 선생이 중국을 거쳐 1920년 9월 2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전신인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바타비아에 첫 발을 딛은 것을 기념해 한인회에서 작년부터 100년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자료수집과 집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올해 9월 출간예정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동포사회는 영미 대륙 선진국과는 사뭇 다른 특징을 보인다. 100년이라면 현지에서 여러 세대가 태어나고 자라나 현지사회에 융화되고 편입되어 국가의 일부분을 이루는 게 보통이지만 인도네시아의 한인사회에 붙은 이방인이란 꼬리표가 여전히 너무나 선명하다. 왜 그럴까? 학병들, 징용자 1,400여명과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함께 깔리만탄과 말루꾸, 자바에 들어오기 시작한 1942년부터 쳐도 약 80년, 수교가 이루어진 1973년부터 치면 약 50년 동안 인도네시아에 제대로 뿌리내린 한인들이 한줌도 되지 않는 이유는 교민 대부분이 임기를 마치면 귀국하게 되는 공관원들과 지사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임기 중 또는 임기를 마친 후 현지에서 독립해 성공적으로 독자적 사업을 일군 이들도 있지만 태반은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했거나 쓰디쓴 사업실패 후 패자부활전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절치부심 무너진 가슴을 끌어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재인도네시아 한국교민들의 평균 체류기간은 구한말, 또는 일제 강점기 간도와 중국, 일본, 미주로 나간 해외 이주자들에 비해 턱없이 짧았다. 인도네시아의 한인들이100 년이 지나도록 이방인이란 꼬리표를 떼지 못한 것은 그런 이유로 아직도 깊고 튼튼한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일 듯하다. 교민들의 문화활동이 그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하러 온 나라', '돈 벌러 온 나라' 였던 인도네시아에서 본격적인 문화에 대한 공부와 교류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에 당시 한국국제학교의 한 교사가 문화탐방을 시작하면서다. 인도네시아 문화를 한인사회에 소개하는 문화탐방은 한인니문화연구원(사공경 원장)을 중심으로 계속되어 330회를 훌쩍 넘겼고 유명인사와 학자들을 초빙하여 현지 문화, 역사의 식견을 넓히는 열린강좌도 70회에 육박한다. 이젠 다양한 한인 문화단체들이 어느새 교민사회 안팎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지 대학에 유학하거나 교환학생으로 온 학생들, 현지에서 연구하고 학위를 받은 교수, 박사들도 지난 수십 년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100년의 기간이라면 그 나라의 문화와 지식을 현지인들에게 가르치는 한국인들이 얼마든지 자리잡을 만한 시간이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한국문화를 인도네시아에 소개하고 현지 문화를 배우는 단계, 즉 대체로 자기 것을 주고 남의 것을 받는 초보 교민사회의 모습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외대 양승윤 명예교수가 가자마다 대학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 정치를 비교 강의하고 안선근 교수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이슬람을 가르치는 것 정도가 다음 단계에 깊숙이 진입한 모양새다. 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한국인, 유럽인들에게 예술과 음악을 지도하는 한국인들처럼 인도네시아 것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가르치는 한국인 전문가의 출현, 그것이 연조깊은 현지 한인사회라면 언젠가 반드시 거치게 되는 특이점이다. 올해 2월 인도네시아 최대 출판사 그라메디아는 'Setan Lokal' 이란 제목의 만화시리즈를 내놓는다. '토착귀신이야기'정도의 제목이다. 채색 등 일부 과정에 현지인들도 참여하지만 기본적으로 스토리보드와 작화를 한국인들이 맡아 올 상반기 중 인도네시아 귀신과 무속에 대한 100개의 에피소드를 창작해 다섯 권의 만화책에 담아 현지 독자들을 위해 인도네시아어로 출판하는 것이다. 이슬람 기치가 휘날리는 인도네시아의 수면 밑 무속문화를 한국인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그려내는 이 작업은 그 특이점을 통과하는 또 하나의 드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한 두 개의 사례만으로 한인사회 전체가 특이점에 도달했다고 말하긴 힘들다. 한인들이 그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인도네시아에 적응하고 융화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례가 필요할 것이다. 헤로니모 영화 포스터와 전후석 감독 얼마전 뉴욕 사는 한국계 미국인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헤로니모'를 통해 쿠바의 한인사회를 알게 되었다.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킨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에 적극 가담했고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공산정권 초창기에 신명을 다해 일했던 임은조씨 즉 헤로니모 임은 누구보다도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특이점을 찍었다. 그후 그가 현지에 동화해버린 쿠바 한인사회에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한인회 재건을 위해 말년을 모두 바친 이야기는 무척 감동적이다. 해외에서 정체성을 지키는 것도, 특이점을 넘는 것도, 많은 노력과 희생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임을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새삼 깨달았다. 작년 대사관저 오찬에서 만난 최초 교민 장윤원 선생 후손들 중 증손자의 혈관에 흐르는 한국인의 피는 12.5%로 희석되었고 국가와 교민사회가 그들에게 무관심한 동안 현지 화교사회에 완전히 편입된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특이점을 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 외모로는 절대 한국인이라 알 수 없게 된 서구적 모습의 쿠바 한인들, 헤로니모의 후손들이 한국인 정체성을 지키려 애쓰며 ‘아리랑’과 ‘고향의 봄’을 노래하는 모습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우리 인도네시아 한인사회는 진출 100년을 맞아 예의 특이점을 넘어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갈지, 현지에서 성장해 가는 우리 2세들에게 어떤 정체성을 물려주게 될지, 경자년 새해를 맞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끝)

[칼럼]교도민주주의 시기의 인도네시아 중앙은행:김성석

[칼럼] 교도민주주의 시기의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거듭된 개편, 조정 그리고 국립 인도네시아 은행의 제 1부처가 되기까지 글: 김성석 UPH 경영학부 교수 인도네시아사에서 교도민주주의의 시기라고 불리는 1959-1965년 사이의 시기에는 의회민주주의가 많이 후퇴되는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다양성에 대한 포용성을 보여주는 인도네시아의 국민성이 있었기에 이런 시기가 가능했던 것 같다. 종교와 공산주의, 그리고 민족주의를 함께 인정하고 경쟁하는 나사콤(Nasakom)체제가 교도 민주주의 시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경제적 지향점이 다른 이 세가지 세력이 경쟁하는 가운데, 실제로 실행된 경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나사콤 체제 안에서의 경제는 ‘교도 경제’라 불리는 체제였다. 부디요노는 그 체제를 ‘핵심 경제 분야에 대한 확고한 명령과 규정에 따라 국가 경제를 ‘인도하는’역할을 하는 체제라 (Boediono, 2016)라 정의한다. 이런 시기에 중앙은행은 어떻게 조직되고 국민경제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번 글에서는 교도민주주의 시기의 중앙은행의 변천 과정과 ‘교도경제’에서의 역할을 알아보고자 한다. I. 교도 경체 체제 독립 초기 지지 부진하던 인도네시아 경제는 1957년부터 시작된 네덜 란드 민간 자본의 국유화를 단행함으로 인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었지만, 인도네시아 경제 상황은 매우 높은 인플레이션을 경험하며 약화 일로의 길로 들어선다.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인도네시아 국내 정치 상황의 변화로 인한 수카르노가 부상하고, 수카르노는 1945년 헌법으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1945년 헌법 체제로의 복귀는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많은 권력을 주게 된다. 수카르노는 주어진 권력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소위 교도 민주주의 체제로, 또한 인도네시아 경제를 교도 경제 체제로 이끌어 나아가게 한다. 부디오노 (2018)는‘새로운 나사콤 체제 내에서 교도경제 체제 부상은 무엇보다 1950년대에 보여주었던 인도네시아 국민 경제에 있어서의 정부의 방향성과 관리 실패라는 인상에 기인한 측면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보여 주었던 높은 경제 성장으로 보여준 계획 경제의 성공은 인도네시아 지도자들 특별히 수카르노에게 계획 경제의 큰 매력을 갖게 하였다. 이 ‘교도경제’ 체제에서 국영기업은 이 체제 아래에서 경제의 주축이었고 모든 산업 부분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게 된다. 국영기업은 정부 예산과 은행권의 지원을 받았다. 은행권은 확고한 일원화된 자금 공급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결국 ‘하나의 은행’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으로서의 정책 독립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정부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2. 오늘도 개편 중인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정부의 중앙은행 정책 결정에의 개입은 처음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의 성립 때부터 열려 있었다. 1950년대에 증가 일로에 있던 재정 적자를 위한 자본 조달 등에 대한 정부의 압력에 대해 중앙은행은 저항할 만한 어떠한 위치도 없었다. 1957년에는 심지어 재정 적자 등에 관한 법적인 안전장치 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재무 안정성을 지키는 역할을 하던 중앙은행의 역할은 1958년 2월 수마트라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과 관련하여 샤리푸닌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장의 직위를 사임하고 두 명의 정부 각료가 통화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됨으로 더욱 약화된다 (Arndt, 2007). 교도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인도네시아의 발전을 위해 1959년 8월 15일에 국가계획위원회가 구성되고, 1960-1969년에 이르는 국가 발전 계획이 입안된다. 국가발전계획안은 1960년에 임시로 구성된 국회를 통과했다. 국가발전계획에 따라 거의 모든 정부 조직이 변화를 맞게 되는데, 인도네시아 중앙은행과 은행권들도 ‘교도경제’ 체제를 위해 조직과 체제를 계속해서 변화해 나가게 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단 두 개의 조문으로 되어 있는 1960년 제 9호 대통령령은 국가발전계획에 따라 중앙은행의 조직과 업무를 개편하도록 명시한다. 이로 인해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더 많이 약화된다. 정부의 개입의 증가와 중앙은행의 독립성의 약화는 1962년에 더 심화된다. 제 3차 ‘일하는 내각’에서 정부의 재무 관련 부서들이 재편이 되는데, 그 중에 중앙은행도 포함되게 된다. 당시 중앙은행장이 었었던 수마르노는 중앙은행의 장관으로 임명된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장관으로서 그는 중앙은행의 모든 인력과 기관들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통화위원회는 폐지되고 통화정책에 대한 결정권이 내각으로 넘어 간다. 이와 함께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의 위치도 정부의 재정 정책을 실행하는 정부의 기관으로 변화되게 된다. 수카르노 대통령이 중앙은행으로서 가진 고유 업무에 대한 직접 통제권을 행사하게 되고,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그 독립성이 점점 더 약화된다. 1963년에는‘일하는 내각’이 두 번 재편되는데, 1963년 11월에 내각은 제국주의에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모토로 재편되게 된다. 이는 당시 1960년부터 시작된 이리안자야(현 빠뿌아)의 독립 문제를 둘러싼 네덜란드와의 외교적 갈등과 전쟁 뿐 아니라 영국으로부터 말레이시아의 독립과 관련된 국제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네덜란드와 영국 등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 간주하고 이미 이리안자야에서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고 깔리만딴 북부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새롭게 재편된 내각에서 경제 관련 부처는 재편과 함께 은행과 민간 자본 정비를 담당하는 새로운 부서가 설치된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이 이 부서에 속하게 되는데,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이제 국책과 민영은행 조정장관과 민영은행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처럼 1960-1965년 사이에 중앙은행의 구조는 반복적인 개편과 확대 그리고 재편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반복적인 개편과 확대는 무엇보다 중앙은행의 담당 업무가 점점 많아지고 다양해짐에 따라 각 부처 간의 협력과 조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은행의 은행과 최후의 대출기관으로서의 중앙은행의 역할과 업무에 적응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셋째로 이러한 변화는 교도민주주의 시기에 어느 분야에서나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지나친 정치 논리에 대한 조직 개편과 확대 재조정 등이라 할 수 있다. 3. 결국은 ‘하나’의 은행 (Bank Tunggal)으로 지속적인 중앙은행의 조직 개편과 확대 등은 결국 1965년에 이르러 모든 국책 은행을 하나의 은행으로 통합하는 하나의 은행(Bank Tunggal)이라는 체제로 재편된다. ‘교도 경제’의 기치를 실행하기 위해 1964년에 이르면 이리안자야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전지역의 국영과 민영은행의 대표자들이 참가하여 협동과 가족주의에 기치 아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은행권의 임무를 수행하는 기반으로써 ‘투쟁은행(Bank Berdjoang)’의 원칙이 만들어진다. 참석자들은 은행은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는 금융 기관이 아닌 혁명을 위한 도구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달리 표현하자면 은행의 임무를 정부가 경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도록 돕는 것으로 조정한 것이다. 이를 위해 특정한 산업 부문을 지원하도록 국책 은행 간의 업무가 분담되어졌는데, 이는 각 은행의 전문화와 은행 간의 통합의 초기 단계로 볼 수 있다. 1965년 수카르노 대통령은 국회 연설에서 인도네시아 은행권은 정부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하나의 은행’으로 재편될 것을 천명하게 된다. 대통령은 이는 재무와 은행 관련 정의 시책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한 조치이며, 정부의 투쟁 계획의 성공적인 실천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라 말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계속되는 중앙은행의 개편과 재편 확대와 함께 일반 국책 은행과 저축 은행 등이 통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965년 6월 국립 일반은행, 국립 저축은행, 국립 인도네시아 은행이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안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은행’의 설립으로 만들어진 통합은 더욱더 확대되고 전체 은행을 말그대로 하나의 은행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하나의 은행’ 사업으로 국립 인도네시아 은행(Bank Negara Indonesia)이 성립된다. 이 은행은 국책 은행으로서 화폐의 발행과 유통, 중앙은행, 그리고 일반 은행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하나의 은행의 구조에서 인도네시아 중앙은행과 다른 국책 은행들은 각각 서로 다른 부서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국립 인도네시아 은행은 그 각각 국책 은행들의 역할에 따라 5가지 부서로 나누어지는데,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제1부서의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형식적으로 하나의 은행으로 통합되었지만 여전히 각각의 부서의 이름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고유의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하나의 은행’ 구조 속에서 국립 인도네시아 은행의 제 1부서로서 중앙은행의 고유 업무인 은행권 발권과 유통에 대한 업무 이외에 국영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 뿐 아니라 정부 예산 이외의 필요한 자금을 정부에 지원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하나의 은행’의 시책 안에서 중앙은행을 포함한 모든 국책 은행은 혁명의 도구, 다시 말하면 정부의 도구로써 역할을 하도록 방향 지워졌다. 모든 은행은 정부 사업들에 자본을 조달하는 일종의 개발은행이 되었다. 1950년대 인도네시아 민간에게 자본을 조달하던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1960년대에는 정부의 사업들에 자본을 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그러나 ‘하나의 은행’은 계획대로 잘 이행되지는 못하였다. 예를 들면 각 국책 은행의 은행장들을, 중앙은행에서 이사들이 되게 하고자 하였지만 실행되지 못하였다. 국립 인도네시아 은행의 제1부서로서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여전히 기존의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의 건물에서 본래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실제적인 통합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은 각 국책 은행에 관한 서로 다른 규정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조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실제 적용과 실행에서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인도네시아 국내의 정치 상황의 변화, 곧 1965년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란의 도모 실패로 인해, 교도민주주의가 막을 내리게 되고,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또 한번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면 독립적인 금융 정책이 아닌 정부의 정책을 시행하는 역할을 했던 이 시기의 인도네시아 경제는 어떠했을까? 1950년대 다수의 계획 경제가 보여주었던 그런 성과가 인도네시아에서도 나타났을까? 전혀 그렇지 않아보인다. 국민총생산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반면에 1961년 통화량은 41%가 증가하였다. 계속해서 1962년에는 101%, 1963년에는 94%, 1964년에는 156%, 그리고 1965년에는 282%의 기록적인 통화량의 증가를 가져왔다. 거의 모든 통화량의 증가는 정부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Arndt, 1960). 급격한 통화 증가로 인한 피해는 초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나 인도네시아 경제에 타격을 주게 된다. 인플레이션이 1961년에는 95%, 1962년에는 156%, 1963년에는 129%, 1964년 133%, 1965년에는 600%에 이르게 된다(Arndt, 1960). 또 한번 인도네시아 정부는1959년에 이르러 지나친 인플레이션 등을 이유로 500 루피아를 50 루피아로, 1000루피아를 100루피아로 바꾸는 90% 액면가를 감소시키는 화폐개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경제 지표는 당시 정치가 주도하는 경제라는 특수한 상황이 이끌어낸 종합적인 결과이다. 동시에 특별히 그 시기에 있었던 이리안자야와 말레이시아를 둘러싼 국제적인 문제, 유엔과 국제통화기금의 탈퇴 등으로 인한 대외적인 문제의 영향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금융 정책이 가능성이 없었던 중앙은행도 이러한 경제적 결과에 일정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고도서 Arndt, H. W., (2007) Economic policy making in Indonesia, 1950-1957, Eds by Glassbuner, B., in The Economy of Indonesia: Selected Readings, Equinox Publishing. 359-395. Boediono, (2016), Ekonomi Indonesia: dalam lintasan sejarah, Bandung, Mizan Pustaka History of Bank Indonesia https://www.bi.go.id/en/tentang-bi/museum/sejarah- bi/bi/Pages/historybi1.aspxa

무대를 잃어버린 예술, 온델온델(Ondel-Ondel)

노경래 자카르타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Ondel-Ondel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생김새가 다소 우스꽝스럽고 음악 소리는 촌스럽게 들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있는 둥 마는 둥 그냥 지나칩니다. 어느 날인가 Ondel-Ondel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귀에 익은 저 음악이 무엇인지, Ondel-Ondel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Google에 들려주고 What’s this song?이라고 해도 나오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니 Betawi 전통 음악인 ‘Sirih Kuning’이라고 하였습니다. Ondel-Ondel은 예전에는 Barong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Barong은 Austronesian(南島語族: 동남아시아와 마다가스카르, 태평양에 걸쳐 사용되는 언어들의 어족) 지역에서 힌두교 전래 이전부터 발견되며, 재앙이나 악령을 쫓는 수호신 또는 조상신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Barong은 인도네시아 각 지역에 따라 이름과 생김새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 상징성은 거의 유사합니다. Ondel-Ondel은 중국의 Barongsai와 닮은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Ondel-Ondel은 한국으로 치면 장승인데 움직이는 장승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970년대 인도네시아 국민가수 Benyamin Sueb가 부른 ‘Ngarak Ondel-Ondel’이 유명하여, 이때부터 자카르타에서는 Barong이 아니라 Ondel-Ondel로 불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Ondel-Ondel이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 큰 인형의 건들건들 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 ‘Gondel-Gondel’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이 큰 인형의 머리에 있는 코코넛 꽃을 나타내는 산스크리스트어 ‘Kundil’에서 유래했다는 설입니다. Ondel-Ondel은 Betawi 전통 예술입니다. Betawi는 원래는 17세기 이후 Batavia 및 인근 교외에 거주한 원주민 그룹을 칭했습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다양한 종족 집단이 Batavia로 이주하고 서로 동화되었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원주민’이라 칭하는 것은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반에서야 말레이계, 순다족, 아랍족, 중국계 등이 혼합된 Batavia 거주자들이 자신들을 Betawi로 칭하였다고 합니다. Ondel-Ondel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세기 초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 상인 William Scot이 1605년 Batavia에 있었던 Abdul Mafakhir 왕자 할례 의식에 ‘Een Reus Raksasa(큰 거인 인형)가 사용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Hotel des Indes(1829-1971, 현 Duta Merlin Mall)의 호텔 증축 완공 기념 시 Ondel-Ondel이 공연되었습니다. 당시 <막스 하벨라르>를 지은 Multatuli가 이 호텔명을 Hotel de Provence에서 Hotel des Indes로 바꾸도록 제안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후 자카르타 주지사 Ali Sadikin이 Ondel-Ondel을 자카르타 문화의 아이콘으로의 변경을 시도하였습니다. 무서운 모양에서 더 친근하게 보이도록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가미하였습니다. 그 당시까지 Ondel-Ondel은 무언극이었으나, 이때부터 Betawi 음악인 Tanjidor 또는 Gambang Kromong 악단을 동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도네시아가 거의 이슬람화 되었음에도 Ondel-Ondel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이슬람은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예술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카펫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무함마드 형상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조상신인 Ondel-Ondel이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자카르타의 마스코트가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이 현지 문화에 동화되었다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다양성을 쉽게 받아들이는 인도네시아 문화의 특징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Ondel-Ondel 생김새를 들여다보면, 몸통은 사람이 들어가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도록 대나무 또는 Kapuk 얼개로 되어 있으며, 2m 정도의 키에 몸통은 지름 80cm 정도입니다. 머리에는 섬유질에 코코넛 입의 주맥(主脈, midrib)을 종이 등으로 감싼 화관을 남자 Ondel의 경우 25개, 여자 Ondel의 경우 20개를 씌웁니다. 남녀 Ondel 공히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남자 Ondel의 얼굴은 붉고 두꺼운 눈썹과 콧수염이 두드러지는 반면, 여자 Ondel의 얼굴은 희고 빛나는 눈동자와 붉은 입술이 특징적입니다. 남자 Ondel은 무늬가 없는 밋밋한 셔츠에 Batawi Batik으로 되어 있는 숄과 벨트를 착용하며, 여자 Ondel은 레이스가 달린 상의에 Betawi Batik의 하의와 숄과 벨트를 착용합니다. Betawi들은 왜 Batik을 아주 일부만 Ondel-Ondel에 사용할까요? Ondel-Ondel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혹은 Betawi들은 Batik을 완전하게 입힐 정도로 Ondel-Ondel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Ondel-Ondel로 생계를 이어가는 동네가 중부 자카르타에 있는 Kramat Pulo입니다. 이 동네는 Ondel-Ondel을 만들어 악기와 스피커를 단 수레(Gerobak Musik)와 함께 대여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Ondel-Ondel은 <라마야나> 또는 <마하바라타> 같은 서사나 스토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조상신이 말을 건네는 것이 이상할 수 있기 때문에 Ondel-Ondel에는 스토리가 없는 것으로 이해는 됩니다. 스토리가 없으니, 누구나 맘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길거리 공연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Ondel-Ondel 공연에는 Tanjidor와 Gambang Kromong 등의 합주단이 함께합니다. Tanjidor는 19세기 이후 네덜란드 군대 병영에서 병사들끼리 연주하는 것으로부터 유래한 Betawi 음악으로 알려져 있으며, 요즘은 자카르타 주정부 행사나 화교 공동체의 Cap Go Meh(정월 대보름)에 거리 축하 공연 등에 사용됩니다. Gambang Kromong은 Gamelan 형태의 Betawi 전통 오케스트라입니다. Gambang Kromong은 Gambang Kayu(Ironwood로 만든 음판이 있는 실로폰)와 Kromong(5개 청동 Gong으로 되어 있는 Bonang)을 합한 것입니다. 전통 Gamelan에는 없는 5음계인 중국의 현악기도 사용되며, 주로 화교 공동체에서 공연되어 왔습니다. Gambang Kromong의 대표곡은 Sirih Kuning과 Jali-Jali입니다. 이 2곡 모두 자카르타의 전통음악입니다. 이 노래가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카르타에 오래 살았다면 이미 귀에 익숙한 음악일 것입니다. Ondel-Ondel의 길거리 공연을 보면 이게 예술인지, 구걸인지 헷갈립니다. 그 경계가 아주 모호합니다. 그래서 거리의 악사(Pengamen)에게 2,000 루피아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국가 초청 공연자인 Hasan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Ondel-Ondel 공연 예술가인 부모님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7살 때 Full Moon Duta Ambassador 공연단의 단장을 맡았다고 합니다. 한때는 잘 나갔던 예술가였던 셈이죠. 그러나 거리에 차량과 행인이 점점 많아져 공연하기가 힘들게 되고, 차량과 반대 방향으로 가지만 차량 흐름을 방해한다고 가끔 손가락질도 받는다고 합니다. 2.5시간 공연에 2,500,000 루피아를 받아 공연에 참여한 총 13명이 나눠 갖고 숙박비를 제외하면 Hasan의 손에는 100,000 루피아가 남는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Ondel-Ondel 공연에 열의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와 반면, 버스킹을 위해 Ondel-Ondel을 이용하는 걸인의 경우인데, 이들은 공연 장비를 대여하는 스튜디오(Sanggar)에 임대료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행인들로부터 받을 돈을 공연자 머릿수 당 많이 배분하기 위해서는 공연 참가자 수를 최대한 줄이며, 심지어 12살 이하의 어린이로 하여금 플라스틱 통이나 깡통을 들게 하고(사진: www.gulftoday.ae), 악기들은 Gerobak Musik으로 대체하고, 남녀 한 쌍이 아닌 하나의 Ondel만 사용하기도 합니다. 비가 오면 완전 공치는 날이 되며, 가끔은 Ondel을 메고 하수구나 도랑에 처박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예술가와 걸인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공연자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든 조상이 그들의 배를 채우게 하고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Ondel-Ondel 공연으로 버스킹을 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Pengamen들에게 기꺼이 돈을 건네 주는 사람들은 그들이 Betawi 문화를 보전하고 있기 때문에 공공질서나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어디서든 공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대쪽의 사람들은 그들이 Ondel-Ondel 문화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고 단지 구걸 하는 것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거리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카르타 주정부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것을 금하고, Betawi 전통 복장을 하고 공연 장비를 제대로 갖춘 경우에만 특정 시간대에 공연하여 관광객을 유인할 계획이라는 원칙적인 이야기만 몇 년째 되풀이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Ondel-Ondel의 미래를 아주 밝게 봅니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문화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기 마련이며, 여기에 혁신적인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와 Ondel-Ondel의 공연 방식에도 획기적인 진보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로봇이 Gambang Kromong에 맞추어 멋들어지게 춤을 출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Ondel-Ondel의 이미지를 이용한 예술 작품이 많이 나오고 아이디어 상품도 개발될 것으로 보여 상업적으로도 괜찮은 아이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Ondel-Ondel은 지금은 무대를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는 화려한 아이콘으로 변모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는 무대로 복귀할 것입니다. <끝>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

[칼럼] 위기의 인간/조은아

플라스틱 빨대가 코에 꽂힌 거북이가 오염된 물을 마시고 죽어가는 물고기가 플라스틱 조각을 가득 주어 먹은 기러기가 쓰레기 더미를 헤집던 원숭이가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도 ‘멸종 위기종’이라고. 위기의 인간 2020년 새해가 밝기가 무섭게 자카르타는 홍수와 침수로 대혼란을 겪었다. 10년을 이곳에 살아보니 그닥 새롭지도 않은 일이지만, 매년 같은 일을 겪고 있으면서도 매번 달라지지 않는 모습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하천과 하수구 정비가 시급한 문제라고 하면서도 우기가 지나가면 문제 의식도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인가. 우기 전에 하천에 가득 버려진 있는 생활 쓰레기만 처리해도 하수 정비의 반은 이뤄진 것이리라. 연초부터 심각해지기는 싫지만 사실, 기후와 환경 변화로 인한 대혼란은 자카르타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구는 이미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잃었다. 나무심기를 하면 공기가 맑아지고, 깨끗이 정화하면 맑은 물을 먹을 수 있다고 믿던 시대는 사라졌다. 우리는 지금 쓰레기 속에 갇혀 마스크를 쓰고 좋은 먹거리가 아닌 깨끗한 먹거리 걱정을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진심으로 우리는 동물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멸종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나마도 규제와 단속으로 공기의 질과 급속한 기후 변화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미 넘쳐나고 있는 쓰레기와 싸워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물을, 먹거리를, 삶터를 점령하고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쓰레기는 바로 ‘플라스틱’. 플라스틱은 빨대, 페트병 등 온전한 형태에서부터 5mm 이하의 ‘미세 플라스틱’, 현미경으로도 관찰하기 어려운 ‘나노 플라스틱’까지 나뉘어져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수백 년에 걸쳐도 썪지 않는 플라스틱 폐기물과 지구 인간과의 공존은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구를 떠나야 할 판국이다. 당장 플라스틱 봉투를 들고 있다고 하지 않더라도, 지금 당신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셔츠의 단추와 합성섬유는 물론이고 당신이 오늘 아침 사용했던 치약에도, 식탁에 올라왔던 생선의 뱃속에도 플라스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플라스틱의 개발과 역습, Plastic pollution 플라스틱의 발견 신이 창조할 때 실수로 빠뜨린 유일한 물질로 꼽히는 이 플라스틱이 탄생한 것은 당구공 덕분이었다. 1860년대, 아프리카 코끼리의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 일로 당구공의 재료로 쓰이던 상아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자 미국 당구업자들은 상아를 대체할 물질을 개발하는 자에게 1만 달러의 상금을 지급한다는 공모에 나서게 된다. 1869년 하야트란 인쇄업자가 상금을 탈 욕심으로 동생과 함께 톱밥과 종이를 풀과 섞어 당구공을 만들려다, 우연히 니트로 셀룰로오스와 장뇌(녹나무를 증류하면 나오는 고체 성분)을 섞었을 때 매우 단단한 물질이 된다는 것을 알아낸다. 이것이 천연수지로 만든 최초의 플라스틱 ‘셀룰로이드’다. 이러한 플라스틱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9년 벨기에의 베이클랜드가 합성수지를 만들어내고 그는 이로 인해 1919년 퍼킨상까지 수상했다. 그 후 1938년, 뒤퐁사(社)의 캐러더스가 나일론을 합성, 스타킹을 만들면서부터 플라스틱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잠복기를 끝내고 증상이 나타난 암과 같은 ‘플라스틱’ 육지에서 버려졌건, 바다에 직접 버렸건 대부분의 쓰레기가 모이는 곳은 바다가 된다. 해양 쓰레기는 분포에 따라 해안쓰레기, 부유쓰레기, 해저 침적 쓰레기로 분류할 수 있다. 해양 쓰레기는 선박 사고의 원인이 되고 어업 생산량은 떨어뜨릴 뿐 아니라 해양 동물의 생존 과 우리의 식생활까지도 위협하고 있다. 플라스틱 해양폐기물 문제는 이미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더는 견딜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에릭 솔하임 유엔환경계획(UNEP) 사무총장은 "현 수준대로라면 2050년에는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의 무게가 물고기의 무게와 맞먹게 될 것" 이라고 경고했다. 지난해 세계의 플라스틱병은 4천800억개로 집계됐고 2021년에는 그 수가 5천830억개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1997년 태평양에서 발견된 거대한 쓰레기 지대는 2007년에 이미 한반도 크기의 7배 이상으로 불어났고, 현재의 기술로 바다 위의 쓰레기를 모두 치우려면 약 7만 5000년이 걸린다고 한다. 미세 플라스틱이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크기 5㎜ 이하의 플라스틱으로 정의되는 미세 플라스틱은 발생원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처음부터 작은 크기로 만들어져 치약, 스크럽 등 사용된 뒤 하수도를 통해 배출된 1차 미세플라스틱과 바다로 들어온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자외선과 바람, 파도의 힘으로 부서지면서 만들어진 2차 미세 플라스틱이다. 이들은 대부분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처음에는 보였던 것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와 나노미터(10억분의 1m) 크기까지 쪼개져 결국은 보이지 않아 마치 바닷물에 ‘함유된’ 미량 물질 가운데 하나로 보여질 정도가 된다. 미세 플라스틱은 바다 생태계의 기초인 동물성 플랑크톤에서부터 갯지렁이, 새우, 게, 가재, 작은 청어에서 대구와 참다랑어 등의 대형 어류에 이르는 다양한 생물종에서 발견되고 있다. 바다 생물들이 미세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해 먹고 있을 뿐 아니라 먹이사슬을 통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이미 유럽에서는 평균적인 유럽인이 홍합과 굴 섭취를 통해서만 해마다 1만1000개의 미세플라스틱을 먹게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사람의 체내로 들어온 미세 플라스틱이 인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 결과가 쌓이지 않아 과학자들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미세 플라스틱 제조 과정에 첨가된 다양한 유해 화학물질 뿐 아니라 물 속에 녹아 있는 다른 유해물질까지 끌어당겨 흡착하기 때문에, 몸 속에 들어온 미세 플라스틱이 체외로 배출될 수 있다 하더라도 플라스틱에 함유돼 있던 이 유해물질은 체내에 흡수될 위험이 있다. 유엔환경계획은 2019년 5월 발표 보고서에서 “마이크로플라스틱보다 작은 나노플라스틱은 태반과 뇌를 포함한 모든 기관 속으로 침투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나노 플라스틱이 조직과 세포 속으로 이동한 이후의 위험을 ‘블랙박스’로 표현했다. 우리는 살아 남을 수 있는가, Stop Using! If not, Reduce Reuse Recycle 전체 플라스틱 제품의 약 40%를 차지하는 포장재, 일회용 봉투와 컵 사용금지 등이 가장 기본으로 꼽히는 실천 덕목이지만 이마저도 외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지금 당장 전 인류가 플라스틱 사용을 중지한다고 해도, 이미 버려진 쓰레기와 앞으로 몇 백년을 더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비가 오면 빗물의 흐름을 막고 버티는 쓰레기 더미로 인한 범람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강 하류민들의 생활은 처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책감 없이 마구 버리는 사람들도 범람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1분 마다 200만개의 비닐 봉투가 사용되고 있고, 한 개의 비닐봉투는 평균 12분 동안 사용되어진 뒤 버려진다. 비닐 봉투 1개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석유의 양으로 자동차를 11m 운전할 수 있다. 플라스틱이 분해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500년. 당장 사용을 중지할 수 없다면, 줄이고, 다시 쓰고, 재활용하는 방법이 지금의 최선이다.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땅에 묻어 자연스럽게 해소하게 하거나 열로 소각하는 방법 등이 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막대한 비용과 함께 2차 환경 오염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BBPB’(Bye Bye Plastic Bags)은 2013년 당시 10살 12살이던 멜라티와 이자벨 자매가 발리에서 만든 환경 보호 NGO 단체다. Youth Climate Action은 심각한 기후 위기에 맞서 스웨덴의 십대 소녀 그레타 툰베리를 중심으로 모인 청소년 환경 단체다. 어린 학생들까지 나서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애쓰고 있다. 먹을 만큼의 음식만 만들고 주문하기, 한 번 사용한 봉투 재활용하기, 쓰레기의 품목별로 분리수거 하기, 장바구니 사용하기 등등 우리가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환경 운동은 여러 가지다. ‘오늘만 하루만, 이번 한번만’ 이란 안일한 생각을 하기엔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다. 환경운동은 특정 단체, 특정인들만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편견도 버려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이것은 더 이상 ‘누군가만’ 하는 ‘환경 운동’이 아니다. ‘모두가’‘꼭’ 해야 하는 처절한 생존 싸움이다. <끝> *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경제신문에 함께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