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희망은 길과 같은 것…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끝없이 '진화'하여 완전한 인격을 갖게될 미래의 인간, 곧 '초인'의 세상이 다가옴을 기대하며…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가 10일부터 격주 문화기획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연재합니다. 좌정관천(坐井觀天)을 풀어 쓴 이 제목은 본디 견문이 좁음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는 그와 반대로 문학과 세상사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넓고 깊은 안목과 탁월한 식견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육사 선생은 그 나이 40세가 되던 해인 1942년 여름 일제의 경찰대와 헌병대에 붙들려, 1년 6개월 후 주검으로 나오게 될 북경의 감방에 갇혔다. 시 '광야'는 그가 북경으로 압송되던 기차간에서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은 이 시를 통해, 민족의 가장 처절한 고난이 자신의 한 몸을 꿰뚫었던 그 시간을 민족이 자랑해야 할 가장 거룩한 시간으로 바꾸었다. '광야'를 민족서정시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 3구5연의 길지 않은 시는 수난에 든 정신들의 한 첨단이 품었던 굳건한 의지와 순결한 희원을 절실한 어조로 담고 있을뿐더러, 그 기개와 이상을 드러내는 말의 질서에 빈틈이 없고 그림이 선연하고 음악이 비장하여 그 아름다움이 숭고함에 이른다.

당연하게도 이 시는 중고교의 국어 교과서에 거의 빠짐없이 실려 왔던 덕분에 일정한 교육을 이수한 한국인에게는 누구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낯익은 시가 항상 잘 이해되는 시는 아니다. '광야'는 난해시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쉬운 시라고 하더라도 시에는 그 장르의 특성에 따라 압축과 생략이 있고, 하나의 현실을 심화하고 확장하여 또 하나의 현실로 들어올리기 위한 층층의 비유체계가 있다. '광야'처럼 우리의 역사적 현실과 밀착하여 장려한 리듬을 지닌 시는 이해보다 먼저 감정적 동조가 앞서기에 시에 담긴 복잡한 생각은 뒷전으로 미뤄 놓기도 쉽다. 게다가 이 시는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논란 때문에 생각을 여러 갈래로 벌려 놓게 한다. 그 논란을 말하기 전에 우선 시의 전문을 현대의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맞게 적어 놓는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는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던 그 장엄한 순간을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핍박받는 조선의 역사라고 해서 하늘 아래 땅이 생겨나 쉬지 않고 변화하는 역사와 무관할 수 없다. 논란은 세 번째 시구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에서부터 비롯한다. 대체적으로 이 구절은 '들렸겠는가?'라는 수사적 의문으로, 따라서 닭울음소리를 부정하는 말로 파악되어 왔다. 그런데 '들렸으랴'에 관해, 그것이 '들렸으리라'의 축약형이며 이 닭울음소리가 "까마득한 날에 대한 상상을 더욱 어울리게 만든다"는 김종길의 해석이 제시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해석은 논자들 사이에 두 편으로 갈렸지만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설복하지 못했다. 부사 '어데'도 어느 쪽의 손을 결정적으로 들어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닭이 울었을 것이란 해석에서는 '어디선가'라는 단순한 뜻을 지니지만, 반대편의 의견에서는 이런 종류의 수사적 질문에 적합한 부정의 부사가 된다. 마침내는 '어디서 닭 울음 소리가 들렸겠는가. 바로 조선이 아니냐'라는 식의 적지 않게 편협한 해석이 등장하기도 했다.

'닭 우는 소리'에 대해서도 두 주장이 자기편에 유리하도록 각기 다른 성격을 부여해 입론의 근거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닭울음소리를 부정하는 논자들에게 닭은 단지 가금일 뿐이어서, 시의 첫 연은 인간의 역사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저 개벽의 시간과 관련하여 닭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그대로의 광야를 나타낸다. 반면에 이 광야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는 쪽에서는 가금의 한 종류로서의 닭보다는 하루의 새벽을 알려 위대한 한 시대의 개막을 선도하는 그 울음소리, 이른바 설화적 전통의 계명성(鷄鳴聲)에 역점을 둔다.

나는 오래 전에 천지개벽의 순간에 닭이 울지 않았어야 옳다는 점에 대해 글을 한 편 쓴 적이 있지만, 그 닭울음소리의 없음이 시?핵심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다. 내가 썼던 글의 골자를 다시 상기하면서 이제 그 일을 하려 한다.

'광야'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접근이 금지되었거나 개척하기 어려운 땅이라는 점이다. 산맥도 그 땅을 '차마 범하진' 못했다. '바다를 연모해' 한 번 휘달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끝내고 제 위치를 결정해버린 산들은 그 광야에 길 닦기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곳을 터부의 땅으로 남겨 두었다. 반면에 '큰 강물'은 피어선 지기를 그치지 않은 긴 세월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이 땅에 자신의 길을 낼 수 있었다. 그 세월이 '부지런'하다는 것은 그 계절이 쉬지 않고 근면하게 이어졌다는 뜻인 것은 물론이고 그 기간 내내 강물의 노력이 또한 그렇게 부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그 광야에는 눈이 내린다. 본디부터 험난한 그 자리에 인간의 길을 개척하려는 시인의 노력이 더욱 큰 고난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피어 있는 매화의 향기만이 시인의 고고한 이상과 지조를 상징하고 증명할 뿐이다. 이 매화 향기에는 어떤 아득한 높이가 있다. 이 고결함이자 아득함인 것은 시인의 높은 이상이 실현되는 일의 그 아득함과 다른 것일 수 없다. 이상이 실천되기까지의 이 아득함 앞에서 시인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저 큰 강물의 교훈이다. 그는 아득한 세월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장구함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그의 '가난한 노래', 현재로서는 별다른 힘을 지닌 것도 아니고 합창해 주는 사람도 얻기 어려운 고독한 노래의 씨를 뿌리기로 결심한다.

이 노래의 씨앗은 또다시 '부지런한 계절'을 따라 싹이 돋고 '피어선 지'기를 거듭한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초인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름지기 그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며, 저마다 제 자유의지로 행동하게 될 미래의 인류이다. 이 '초인'이라는 표현에는 고난의 극한에서 노래 부르기를 선택한 자신의 의지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과 높은 정신적 경지를 확보할 미래의 인간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겹쳐 있다. 이 새 시대의 새 인류는 지금 시인이 숨죽여 부르는 이 노래를 마음 놓고 '목놓아' 부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초인이 도래할 미래의 시간이 '천고의 뒤'인 것은 야릇하다. 천고는 '긴 세월'을 뜻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먼 옛날'을 말하기 때문이다. 천지개벽의 시간이야 말로 그 먼 옛날이다. '다시 천고의 뒤'가 이 시의 눈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천고'는 저 태고의 '까마득한 날'을 미래의 아득한 날과 연결시킨다. 그 까마득한 날에 하늘과 땅의 새벽이 있었다면 이제 아득한 날을 거쳐서 와야 할 것은 '인간의 새벽'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유인이 되어 제 새벽을 맞는다. 이 새로운 천고에, 아득한 미래의 새벽에, 초인이 목 놓아 부를 노래는 바로 그 인간 개벽의 '닭울음소리'가 된다.

이 초인의 노래와 함께 다시 첫 연으로 돌아가면, 까마득한 날 하늘이 처음 열릴 때 어디선가 들렸으리라고 흔히 생각될 만한 저 '하늘 닭의 울음소리'를 시인은 부정하고 있다.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 하늘이 어떤 지고한 소리를 울려 자신을 진리 그 자체로 선포하고, 신성한 뜻을 가르쳐 인간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미리 정해 놓았던 것은 아니라고 시인은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천지개벽의 닭울음소리를 부정할 때, 그것은 이른바 저 섭리의 목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천지가 단지 그렇게 열렸을 뿐 어찌 지엄한 닭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겠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제 운명을 제가 설계해야 하며, 제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불러야 한다. 하늘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그 진보를 믿는 자인 육사(陸史)의 의지가 바로 이렇게 한 '땅의 역사'로 표현된다.

구성은 완벽하다. 시는 중층적 대립구도로 짜여 있다. 이 구도의 최소단위에서 제2연의 '산맥의 성급한 포기'가 제3연의 '강물의 끈질긴 도전'과 대립하고, 제4연의 '시인의 가난한 노래'가 제5연의 '초인의 당당한 노래'와 대립하며, 중간단위에서 '자연의 교훈'을 우의하는 제2ㆍ3연이 '인간의 실천'을 나타내는 제4ㆍ5연과 대립하며, 마지막 단계에서 첫 연의 '닭울음소리가 없는 천지개벽'과 마지막 연의 '초인의 노래가 있는 인간개벽'이 대립한다. 이 대립구도는 닭울음소리가 부정될 때만 보인다.

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수구주의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터부의 자리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었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선생은 1936년 루쉰이 타계했을 때, 그를 애도하여 추도문을 썼고 단편소설 '고향'을 번역하여 발표하였다. 육사는 '광?를 쓸 때, 소설의 저 마지막 구절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광야'의 밑거름이 된 것은 루쉰의 저 소설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선생이 프랑스 대혁명기의 수학자이자 정치가인 콩도르세의 유작 를 비록 읽지는 않았어도, 그 내용을 개설한 글을 읽거나 강의를 들었을 것으로 믿는다. 이 책은 서구에서 19세기 내내 모든 진보사상의 기초가 되었으며, 낙관적 진보론의 신용이 떨어진 20세기의 초엽에서도 열성적인 사회운동가들은 자신이 희구하는 미래의 모습을 이 책에서 발견하곤 하였다. 콩도르세는 에서 신의 섭리를 부정하고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 정신에 내재된 힘으로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그 정신에 악덕과 정염이 담겨 있어 그 활동이 자주 빗나가지만, 이성의 개발과 자유의 증가를 통해 끝내는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그는 인간의 역사를 열 개의 단계로 나누었다. 원시의 부족에서 출발한 인간이 그 이성을 연마하여 프랑스 대혁명에 이른 역사를 아홉 단계로 설명하고, 마지막 열 번째 시대에 학문과 예술의 힘으로 인류가 끝없이 진보하여 완전한 인격을 갖게 될 가능성을 예언하였다.

'천고의 뒤에' 인간은 누구나 초인이 된다. '광야'는 의 미학적 압축판과 같다. 육사가 조국의 광복이나 민족의 해방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천고'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압박하는 사람도 압박 받는 사람도 없는 세상에서 저마다 인격이 완성된 인간들이 제 자유를 목 놓아 구가하는 인류 전체의 미래를 생각했다. 우리는 이 생물학적 수명으로 그 미학적 유토피아를 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세계의 저 까마득한 시간 뒤에서 지금 이 시간의 내 실천을 지시한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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