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님 탄생일인데 크리스마르사고 하는가

김광섭 목사(샴버그침례교회 담임)

최근 이태원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건 분석을 하는 프로그램의 한 앵커는 요즘 한국 젊은 세대 사이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보다 핼러윈 파티를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는 빅 데이터를 제시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문화의 한 단면인데, 교회 안에만 있어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얼굴이 뜨뜻했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신나고 재미있는 것에서 가치를 찾는다. 그때는 교회 중심의 크리스마스 문화가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핼러윈 문화가 더 재미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카드를 보내고,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선물을 주고 받는 전통적이고 따분한(?) 분위기라면, 핼러윈은 가족을 생각하지 않고 친구들과 마음껏 새로운 것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여서 더 환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에게 즐겁고 재미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독교인에게 크리스마스는 현실 세계에서 무슨 재미와 의미를 줄까? 카드를 보내고, 트리를 장식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교회에서 몇몇 특별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것을 주 안에서 즐기고 있는가? 핼러윈 파티를 하기 위해 이태원에 모였던 사람들처럼 흥분과 기대가 있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오셨다는 소식이 정말 복음으로 다가오는가?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위해 오신 것을 복음으로 믿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흥분과 기대와 기쁨으로 준비하는가, 아니면 의무감으로 12월을 맞이하는가?

기독교인이라면 어느 정도 신앙에 관한 중요한 질문에 대한 정답을 배운다. 그런데 기독교는 설명으로 끝나는 종교가 아니라 살아내야 그 실체를 경험하게 되는 종교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십자가를 이해할 때보다 십자가를 질 때 더 깊이 경험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거듭 헌신을 고백할 때보다 주를 위한 흔적(상처)을 가질 때 더 현실적이며, 영적인 예배는 교회에서 좋아하는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들을 때보다 삶의 현장에서 내 몸을 산 제물로 드릴 때 더 깊어진다. 

젊은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해보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그들의 부모보다 복음과 성경의 중심 주제들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성경에서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지를 잘 알고, 잘 설명한다. 그런데 예수님과 더불어 살려고 마음 다해 노력한 흔적이 적고, 죄를 미워하고 죄와 치열하게 싸운 경험이 적으며, 성경의 진리를 살아내기 위해 자주 넘어지는 영적 여정의 깊이가 얕음을 볼 수 있다.

구원 받은 기독교인들은 죄와 어둠의 종이 되어 죽음으로 끌려가는 길을 생명의 나라로 바꿔 주신 최대 사건의 시작인 크리스마스를 기념한다. 또 크리스마스에는 친히 죄가 되셔서 저주를 받으신 죄 없으신 예수님, 우리에게 임할 진노를 십자가 위에서 대신 받으시려고 하나님과의 단절을 감수하시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기뻐한다.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오랫동안 그 길을 걸어온 사람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그 길을 꾸준하게 갈 사람처럼 삶을 살아낸다.

세상은 “메리 크리스마스”와 “해피 홀리데이”를 두고 논쟁하지만 기독교인은 그런 논쟁보다 예수님의 나심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에 존재하며, 주님 다시 오실 때에는 완성된 형태로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즉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그것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반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찬송가 가사에서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가장 좋은 자리, 왕의 자리를 드릴 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왕으로 오셨다. 우리 모두 왕이신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자!

“좋은 자리 드리고 주실 은혜 구하세 하늘 나라 세우세 모시어 들이세”

 

예수님의 생일에 대해서는 초대교회 때부터 최소한 두 가지 전통이 있었다. 하나는 성탄절로 지키는 12월 25일이고, 다른 하나는 주현절로 지키는 1월 6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증거는 두 날짜 모두 예수님의 생일과 직접적 연관을 보여주지 않는다. 성경의 기록과 당시 팔레스타인의 기후를 고려해보면, 예수님이 겨울에 태어나셨을 확률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 목동들이 양떼들과 함께 들에서 잠을 자는 이야기는 비가 많이 오고 추운 이스라엘의 겨울과 연결시키기 쉽지 않다. 또 당시 호적 등록을 위해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각자 고향으로 이동하는 내용도 우기(雨氣)인 겨울에 일어났을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세 가지 정도 질문이 생긴다. 첫째, 왜 성경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중요한 예수님의 생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둘째, 어떻게 해서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생일이 되었을까? 셋째, 성탄절이 실제 예수님의 생일이 아닐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성탄절을 계속 지켜야 할까?

첫 번째 의문점은 생일에 무관심한 초대교회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가 주님의 생일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우선 초대교부(敎父)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교회의 주요 절기들을 소개하며 성탄절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3세기 교부 오리겐은 "바로(창세기 40:20)나 헤롯(마가복음 6:21)과 같은 죄인들만 생일을 지키지 훌륭한 신자들은 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은 천주교회가 지키는 성인축일(祝日)의 전통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성인들을 기념하는 이 축일은 성인들의 생일이 아닌 순교일을 기념하는 것으로 생일에 관심이 없던 교회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탄생일은 교회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성탄일이 역사기록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 두 번째 의문점으로 넘어가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생일이 되었을까? 12월 25일은 태양의 탄생(Natalis Invicti)을 기념하는 로마의 겨울축제일이었다. 당시 달력으로 동지(冬至)인12월 25일은 태양이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커지는 것을 축하하여 대규모 파티을 열었던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4세기경부터 이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키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태양이 그리스도를 설명해주는 아주 훌륭한 상징이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 세상의 빛(누가복음 2:32), 공의의 태양(말라기 4:2)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태양축제일보다 더 적합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또 장차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예수님을 경축하기 위해 "정복되지 않은 자"(Invicti)보다 더 나은 상징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12월 25일에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고로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가 주후 221년 그의 [연대기]에서 처음으로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기록했다. 이 주장은 다른 날짜들에 비해 그리 우세한 입장은 아니었으나 최초의 종교회의인 325년 니케아회의 이후 점차적으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한편 태양 탄생일이 예수님의 생일이 된 데는 기독교 문화의 토착화(土着化) 의도가 다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태양축제일은 이미 로마인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교회는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그 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기독교화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동지를 지내면서 대단한 술파티를 벌였고, 교회는 교인들에게 절대 거기에 가거나 술 취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런 배경에서 교회 내부적으로는 목회적 차원에서 신자들을 보호하고, 외부적으로는 세속문화를 기독교화 하는 차원에서 이 태양축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세 번째 의문점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성탄절이 실제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12월 25일을 계속 성탄절로 지켜야 할까?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탄절을 지키지 말아야 할 이유로 그 날짜가 원래 이방축제에 해당하는 날이라는 것과 기독교가 흥청망청 즐기는 이방축제의 습성을 채택한 결과 현재의 상업화된 성탄절의 모습이 생겼으므로 이 절기를 지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위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성탄절이 태양축제일과 같은 날짜이기 때문에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의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탄절을 지킬 때 중요시하는 것은 날짜가 아니라 성탄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이지 "날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성탄의 의미를 무시한 채 노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절기의 상업화를 이방축제에 기원을 둔 날짜 때문이라고 모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만약 성탄절이 다른 날짜에 지켜졌다면 현재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신학적으로 우리에게 날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이다. 엄격히 말해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은 매일 매일 기념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매일 성탄일로 지켜야 마땅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고, 하루를 정해서 특별히 기념을 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이미 전통으로 굳어버린 성탄절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한다. 

둘째로, 기독교가 태양축제일을 성탄절로 정함으로써 타락한 이방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타락한 형태의 성탄절까지 생겨났다는 논리는 역사를 뒤집어 이해한 것이다. 교회가 이방축일을 성탄절로 바꾼 이유는 타락한 세상문화와 타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의 문화를 거룩한 문화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술 파티의 문화를 예배의 문화로, 미신축제의 문화를 그리스도 축제의 문화로 바뀌어진 성탄절 날짜가 원래 태양축제일이었다는 것이 절대 창피스런 일이 아니다. 도리어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화선교의 방편이었고, 세속문화를 기독교화함으로써 세상에 거룩한 기독교적 삶을 전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탄절을 지킬 때 날짜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에 관심을 가지며, 세상의 문화를 기독교의 문화로 변화시키는 문화선교의 입장에서 성탄절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글쓴이: 홍삼열 목사, 벤나이스연합감리교회 CA
올린날: 2009년 8월 31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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