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을 못 받는 것이 왜 사회문제인가

올해도 일본은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2000년 이후로만 벌써 18명째. 2000년 이후만 따지면 일본은 노벨 과학계열 상 수상 숫자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한다. 2000년 이전까지 합해 역대 전체 일본인 수상자들의 수상 분야도 다양하다. 전체 23명중 물리학 11명, 화학 7명, 생리의학 5명으로 분야별로 골고루 배분되어 있다. (23명중 2명은 나중에 미국 국적을 취득했으나, 이들은 일본인으로 태어나 일본에서 교육받고 노벨상을 받게 되는 업적을 이룬 시점에 일본 국적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수상을 일본의 성과로 보기로 하자.)

왜 일본에 저리도 노벨상 풍년이 나는지 반대로 왜 우리는 도대체 하나도 없는지 벌써 몇 년째 각종 분석 기사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대답은 하나같이 천편일률이다. 지난 몇 년간 국내에서 나온 분석을 분류해 보면 대략 다섯 가지 답변들이 형태만 바꿔가며 반복되고 있다.

첫째, 투자. 일본은 과학 연구에 우리보다 오랫동안 더 많은 투자를 해왔다.

둘째, 기초과학 중시. 일본은 기초과학을 중시하는데, 우리나라는 응용 연구에 치우쳐 있다.

셋째, 안정적 연구 환경. 일본의 연구자들에게는 맘 놓고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안정적인 연구환경이 주어지는데 우리는 다들 부족한 연구비 신청하고 연구 관련 행정 업무하느라 바쁘다는 것.

넷째, 홍보. 일본이라는 나라가 원래 서양에 잘 알려져 있고, 일본 연구자들은 서양 연구진들과 네트워크가 잘 되어 있어서 연구성과 홍보를 잘 한다는 것.

다섯째, 장인정신. 일본의 과학자들에게는 특유의 성실함과 장인 정신이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오타쿠 문화라는 것이 있어서 한 가지만 파고 들기 때문이라는 것.

매년 껍데기만 바꿔 변주되는 이 다섯 가지 설명들을 듣고 있다 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이 중 몇 가지는 별로 어려워 보이는 해법도 아닌데, 그렇게 간단하고 쉬우면 왜 우리는 실천을 못할까? 일본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폭증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19년째인데, 왜 일본은 하는 것을 우리는 지난 19년 동안 못했을까? 예를 들어 우리도 기초과학에 투자 많이 하고, 연구자들에게 안정적 연구환경을 보장해 주고, 서양 연구자들과 네트워크를 잘 하면 일본처럼 노벨상이 쏟아져야 하지 않나? 아니면 혹시 우리의 진단이 뭔가 근본적으로 오진인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을 풀어 보고자 우선 팩트 체크부터 해보았다.

세계은행 데이터(World Development Indicators, World Bank Databank, 온라인 검색 가능)를 이용해서 지난 20년간 우리나라와 일본을 포함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연구 투자를 비교해 봤다.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항목을 보니 대한민국이 2015년도에 4.2%이다. 일본보다 GDP 대비 수치로 보면 1% 정도 높다. GDP 대비로 봤을 때 다른 주요국들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대개 2%대이고, 영국은 2%도 못 된다. 전세계에서 우리보다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가 많은 나라는 단 한 나라, 이스라엘 밖에 없다. 그것도 불과 0.01% 앞설 뿐이다.

인구 1백만명당 연구개발 인력도 2014년도에 우리가 약 6천9백명인데, 일본이 약 5천4백명이다. 우리가 일본보다 무려 1천5백명이나 많다. 영국, 독일 등과 비교하면 우리가 거의 2천5백명 정도 더 많다. 영국, 독일 등은 인구 1백만명당 연구개발 인력이 대개 4천명대 초중반이다.

과학기술 분야 논문은 우리가 2016년에 대략 연간 6만편 정도를 발표했는데, 이는 프랑스와 비슷한 규모이다. 영국, 독일, 일본은 모두 각각 약 10만편 정도이다. 우리의 논문 편수는 사실 적지 않은 규모이다.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라는 나라들이 모두 우리보다 인구도 많고 경제규모는 2배 내지 4배가 더 크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대학 숫자도 우리나라 대학이 현재 모두 합쳐 4백개 내외인데, 일본에는 대학이 거의 770개 전후로 있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연구개발 투자, 연구개발 인력, 과학기술 분야 논문편수 모두 지난 20년간 엄청난 속도로 증가해왔다는 것이다. 그 중 연구개발 투자와 인력은 대략 지난 20년간 거의 3배로 증가했다. 거의 매년 5% 내외의 속도로 고속 성장해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비교의 대상이 된 주요 국가들 중 다른 어떤 나라도 한국 만큼의 성장세를 보인 나라가 없다.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세 항목 모두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절대 규모로 봐도 우리의 연구개발 투자는 작지 않다. 한국연구재단이 발간한 2018년 R&D통계핸드북에 따르면 2016년 현재 우리나라의 연간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OECD 통계 기준으로 약 8백억 달러(구매력 평가 기준)이다. 거의 1백조원에 육박한다. 미국,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5위이고, 프랑스와 영국을 큰 격차로 제치고 있다. 영국에 비하면 거의 2배에 가깝다.

최소한 데이터를 놓고 본다면 대한민국이 일본이나 다른 주요 국가들에 비해 과학 연구를 등한시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두번째 자주 보이는 설명은 우리나라는 기초과학을 외면하고 응용과학에 치중하는데 반대로 일본은 응용과학보다 기초과학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데, 우리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설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행하는 설명이다. 당장 주변을 돌아봐도 이런 설명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해 OECD 자료를 들여다 보았다. 2016년 기준으로 GDP 대비 우리의 기초연구 투자는 0.69%. 주요국들 중 압도적인 1위이다. 이스라엘이 0.49%, 미국이 0.46%, 일본은 0.39%, 중국은 더 낮은 0.11%이다. 영국의 기초연구 투자는 2012년 이래 4년 내내 GDP 대비 0.28%대이고, 프랑스는 같은 기간 동안 0.54%이다. 상기 한국연구재단의 R&D 통계핸드북을 다시 보자. 한국의 GDP 대비 기초연구 투자 비율을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중국, 이스라엘, 네덜란드, 덴마크, 체코의 9개국과 비교하고 있는데, 우리가 1위이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렇게 통계를 놓고 보면, 기초연구를 등한시하고 응용연구에 치중한다는 비판은 사실 우리나라 과학계가 아니라 일본 과학계가 들어야 할 비판이다. 실제로 응용연구에만 치중한다는 비판은 과거 일본 과학계가 수십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비판이다. 당장의 제품 생산에 도움이 되는 기술 개발에만 집중하다 보니 기초연구나 이론 연구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외국 연구자들이 발표한 일본 과학계를 분석하는 논문들을 찾아보면, 이런 비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엔 총회의 의뢰로 2015년도에 발표된 유네스코 과학보고서, "2030년을 향하여(Toward 2030)"를 보면, 일본에서 2000년도 이후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서, 노벨상 선정 기준이 바뀌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노벨위원회가 선정기준을 발표하지는 않지만, 수상 결과의 추세를 놓고 봤을 때, 2000년도를 전후해서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이론적 측면 못지않게 실제 인류의 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냐를 중요한 기준으로 도입했고, 이것이 실용성을 강조하는 일본의 학문 풍토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0년 이후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들에 대한 선정 이유들을 보면 이들의 업적이 실제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들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들중에는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기초연구 투자비 조달과는 사뭇 다른 방법으로 연구비를 조달하는 사람도 있다. 2015년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오무라 사토시 교수는 민간기업에서 투자를 유치해서 연구비를 조달하고 그 연구에서 비롯된 특허의 출원과 소유는 투자 기업이 갖되 연구팀은 로열티를 받는 소위 '오무라 모델'을 만들어 냈다. 이를 통해 오무라 교수는 무려 150억원의 연구비를 확보했고, 4백 병상이 넘는 병원까지 지었다. 순수하기만 한 기초연구를 갖고 이런 식의 모델 성립이 과연 가능할까?

일본은 전통적으로 주요국들중 국가 전체 연구개발 지원비에서 정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기로 유명하다. 2012년부터 5년간 국가 전체 연구개발비 중 정부 예산 비율을 보면 대략 16% 내외 밖에 안된다. 같은 기간 우리의 경우, 22% 내외. 우리의 정부 예산 비중이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본보다는 일관되게 높다. 정부 투자 이외에 나머지 예산은 민간 부문에서 온다. 그러면 일본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 목적과 방법과 예상 성과가 무엇인지를 민간 부문 연구지원 기관이나 스폰서들에게 설명하고 연구비를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기초연구를 중시하는 나라의 과학계의 풍경인가?

사실 응용과학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편견일지 모른다. 과학의 실용성, 즉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끼치는 영향을 중시하고, 일반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강조하는 추세는 세계적인 조류이다. 위에서 인용한 유네스코 과학보고서도 실제로 인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과학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투자 확대도 아니고, 기초과학 중시도 아니면 그러면 혹시 연구 환경 때문일까? 연구 환경은 수치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경험 많은 일본인 연구자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필자가 근무중인 학교는 사립대학이다. 일본은 국립대에서 근무한 연구자들이 은퇴 후 혹은 은퇴 직전에 사립대로 옮기는 전통이 있다. 일본에서 사립대는 정년 규정이 느슨하다. 재단에서 결정만 하면 계약직 교수로 정년을 넘어서 임용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사립대에서 10년 내지 15년 정도 더 근무하는 것이다.

필자가 근무중인 학교에도 그렇게 일본의 전통 명문인 도쿄대, 교토대 내지 다른 명문 국공립 및 사립대에서 수십년간 근무하고 온 원로 교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 그것도 필자의 연구실이 있는 본관 7층과 바로 아래 6층에 집중 포진해 있다. 그들 중 일부 경험 많은 교수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았다.

최소한 필자가 만나본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연구 환경이 좋아서 노벨상이 많이 나온다는 의견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연구비? 글쎄 별로 풍족했다고 보기는 좀 그런데요. 그리고 그 노벨상 받은 교수 내가 옛날부터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에요. 그런데 그 교수 연구비랑 관계없이 항상 똑같은 자세로 연구만 합니다. 매일 정시에 나와서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죠. 하루종일. 그렇게 단조롭게 연구만 하면서 30년, 40년 살아가는 겁니다. 아마 그 교수 앞으로도 계속 똑같은 패턴으로 살 겁니다."

일본의 연구환경에 대해서 일본인 연구자들은 오히려 걱정이 많았다. 일본의 연구환경이 좋아서 노벨상이 많이 나온다는 의견에 대해 평가를 문의하자, 일본인들이 동의하지 않을 때의 특유의 표현인 "글쎄요. 그런가요?"라는 반응들. 연구환경이 좋아서 노벨상이 많이 나온다는 주장에 대해 일본인 연구자들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들은 23명 전원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국공립대 출신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일본 국내의 국공립대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만약 연구환경이 일본에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 결정적 이유라고 한다면 일본의 국공립대와 사립대간에 뭔가 결정적인 연구환경 상의 차이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필자가 대화를 나눠본 연구자들 다수가 국공립대와 사립대 양쪽의 연구환경을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다들 일본의 국공립대와 사립대간에 연구환경의 차이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국공립대와 사립대 간에 연구환경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립대가 봉급은 30% 정도 더 주고 요즘이야 안 그렇지만 과거에는 사립대가 정년도 더 길게 보장됐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 순수 국내파

연구환경이 일본에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는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일본 과학자들이 외국 과학계와 네트워크가 좋기 때문일까? 그래서 홍보가 더 잘되어 있기 때문일까?

홍보의 정도나 네트워크의 강도를 수치로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거의 전부가 국내파들이라는 점이다. 대부분 유학 경험이 없다. 나중에 연구자로서 다 성장하고 나서 해외 연수를 단기로 가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자기의 학문적 뿌리는 어디까지나 일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고 대학 나오고 박사 학위 받고 일본 연구기관에서 나중에 노벨상을 받게 되는 업적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해외 생활 경험이 부족하고 영어 실력이 그리 좋지 않다. 심지어 역대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 중에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 반대로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주요 대학 교수들이 미국, 영국의 명문 대학 박사들이다. 과연 어느 쪽이 해외 네트워크가 더 좋고 홍보에 유리한 자원을 갖고 있는 것일까?  

 장인정신은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장인 정신이다. 사실 일본인 연구자들과 대화를 나눠 보니 의외로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 때문에 일본인들이 노벨상을 많이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뭔가 한 가지에 깊이 파고드는 소위 오타쿠 문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썩 훌륭한 설명이 아니다. 만약 장인 정신이나 오타쿠 문화 때문에 일본인들이 노벨상을 많이 받고 있다면, 그런 문화라는 것이 어제 오늘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닐텐데, 왜 갑자기 2000년도부터 노벨상 빅뱅이 시작된 것일까?

노벨상은 1901년도부터 수여가 시작됐다. 1901년도부터 1999년까지 99년동안 일본인 중에 과학으로 노벨상을 탄 사람은 5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2000년에서 2018년까지 19년동안 무려 18명이다. 왜 그 장인 정신이라는 것이 99년동안 숨어 있다가 19년전에 갑자기 기지개를 편 것일까?

그리고 노벨상에 그 장인 정신이라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하면, 도대체 그 장인 정신은 왜 지난 120년간 주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에만, 그리고 왜 서유럽과 북미 지역에만 몰려 있는 것일까? 왜 그 장인 정신이 그토록 특정 국가들, 특정 지역들에서만 발현되는 것일까?

사실 장인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정의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별 설명력이 없다. 사후적으로 억지로 끼워 넣은 설명일 가능성이 더 높다. 더욱이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많은 소규모 국가 연구자들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노벨상을 많이 배출하지 못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에서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그럼 연구에 임하는 태도가 철저하지 못하고 장인 정신이 결핍되어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한국 사회와 언론 지상에 횡행하는 일본에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 다섯 가지 이유를 하나하나 따져 보았는데, 별로 딱히 들어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사실 일본이 왜 그리도 노벨상을 많이 받는지를 알려면 우선 노벨상을 많이 받는 다른 나라들을 봐야 한다. 그리고 노벨상을 많이 받는 나라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노벨상을 못 받는 나라들과 많이 받는 나라들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만 들여다 봐서는 제대로 된 답이 나오기 어렵다.

 노벨상은 서방 강대국들의 놀이터

막스 피셔가 2015년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조사 결과를 보면, 1901년부터 2013년까지의 노벨상 역사를 통틀어 전체 수상자의 약 3분의 1은 미국에서 나왔다. 그리고 반 이상이 미국, 영국, 독일의 3개국에서 배출됐다. 프랑스를 포함하면 이 비율이 3분의 2가 된다. 지역으로 나누어 본다면 서유럽과 북미 지역이 역대 노벨상의 80% 가량을 가져갔다. 동유럽을 포함하면 90%가 된다.

막스 피셔의 통계는 노벨 평화상과 문학상도 포함하고 있다. 통상 평화상과 문학상의 경우, 서유럽과 북미 이외 지역에도 상당수가 수여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과학 계열 노벨상의 경우 서유럽과 북미 지역에의 집중도는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쉽게 말해 노벨상이라고 하는 상은 지난 120년간 유럽과 북미 지역 국가들, 특히 그 중에서도 소수의 강대국들의 놀이터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유럽과 북미 이외의 지역에서 이 아성을 깬 것이 일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던져야 할 올바른 질문은 '왜 지난 120년 가까이 노벨상이 몇몇 국가 내지는 몇몇 지역에 의해 독점되어 왔는가?', 그리고 '2000년대 들어 갑자기 그 독점의 틈바구니를 일본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노벨상을 싹쓸이한 지역, 국가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본주의와 산업경제가 발달했다는 점이다. 특히 노벨상의 무려 3분의 2를 싹쓸이한 4개국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는 사실 지난 2세기 동안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호령했던 나라들이다. 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여 비교적 인구가 크고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이들 나라들이 노벨상을 싹쓸이했을까?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 나오려면 장기간에 걸쳐 꾸준한 투자와 관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 연구자가 혼자서 골방에 틀어 박혀 하는 그런 공부가 아니다. 특정 세밀한 전문 분야 전공자들이 다수가 모여서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장기간에 걸쳐 활발하게 교류하고 협력을 해야 한다. 능력 있고, 특정 분야에 높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모여 앉아서 하나의 팀이 되어 서로 돕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동일 주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장기에 걸쳐 새로운 발견을 위한 시도를 거듭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과학적 업적 창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대규모 장기 연구 투자를 가능케할 강력한 경제력이 필수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대규모 고등연구기관 혹은 그런 기관들로 구성된 연구 클러스터가 조성되어야만 한다. 다수의 전문가들을 지리적으로 압축적인 공간 속에 대규모로 밀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만 가지고는 안된다. 연구기관 간의 경쟁과 교류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대규모 고등 연구기관의 클러스터가 복수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규모 고등연구 기관의 클러스터를 복수로 확보하려면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인적, 경제적 투자가 필요하다. 그 정도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나라가 전세계에 몇 나라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수의 대규모 인구-경제 국가들이 노벨상을 싹쓸이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고등 연구 클러스터의 중요성은 실제로 데이터로도 확인되고 있다. 1994년에서 2014년간 과학 계열 노벨상 수상자를 전수 조사한 2016년도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보면, 1994년에서 2014년간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기관이 3개 있다. UC버클리, 콜럼비아 대학교, 그리고 MIT이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소속 기관을 세 시점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즉, 노벨상 수상자들의 박사학위 취득 대학, 노벨상을 받은 업적을 산출했을 당시의 소속 기관, 그리고 노벨상을 받을 때의 소속 기관이다. 이 세 시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기관이 이 3개 대학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세 대학교가 미국의 3대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UC버클리는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클러스터, 콜럼비아 대학교는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클러스터, 그리고 MIT는 보스턴을 중심으로 하는 북동부 클러스터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규모와 고등연구 클러스터의 중요성이 실제로 일본의 사례에서 확인되고 있을까? 일본은 이미 1967년에 영국, 독일,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세계은행 세계개발지표 자료). 이 지위는 2010년도에 중국에게 2위 자리를 내주기까지 무려 43년간 유지된다. 세계은행 데이터로 달러화 경상가격 기준으로 비교해 보면 1980년대 후반 일본의 GDP는 미국의 절반을 돌파하게 된다. 1995년이 되면 일본 경제규모가 미국의 70%를 넘어선다. 일본의 인구가 미국의 절반도 안되고 땅 넓이는 캘리포니아 주보다 작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엄청난 성과이다. 일본 경제의 전성기에 일본 경제의 규모는 독일의 2배를 넘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것의 2배 정도에 이른다. 중국이 미국을 아무리 많이 따라잡았다 해도 2017년 달러화 경상가격 기준으로 아직 중국 경제는 미국의 63% 밖에 안된다.

쉽게 말해 지난 반세기의 일본 경제를 돌아보았을 때, 경제규모 면에서 일본은 복수의 대규모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만들어낼 힘을 갖고 있던 것이다.

 일본의 3대 고등연구 클러스터: 관동, 관서, 중부

실제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이 동경대, 동경공업대, 동경이과대를 중심으로 하는 관동 클러스터, 교토대, 오사카대, 오사카시립대를 중심으로 하는 관서 클러스터, 그리고 나고야대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클러스터의 세 군데에서 나왔다. 수상자의 분포도 어느 한 쪽 클러스터에 치우치기보다는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 3대 고등연구 클러스터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이 세 개의 클러스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일본의 과학연구를 이끌어 나가는 3두마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세 개의 클러스터는 일본에서 가장 커다란 세 개의 산업 중심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4년도 지역총생산 기준으로 일본에서 가장 큰 지방 단위는 단연 동경도(약 940조원)이다. 그 다음이 오사카부(약 380조원) 그리고 3위가 바로 나고야시가 위치한 아이치현(약 360조원)이다. 2014년도 서울시의 지역총생산이 328조원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3개 산업 클러스터는 서울시를 5개 정도 묶어 놓은 것과 유사한 규모가 된다. 이러한 거대 산업경제 클러스터가 일본의 3개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떠받치고 있는 경제적, 산업적 기반이 되고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의 분석을 놓고 본다면, 투자 확대, 기초과학 중시, 풍족한 연구환경, 해외 네트워크, 장인 정신 등으로는 일본의 성공 그리고 서방 대형 국가들의 노벨상 싹쓸이가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가 지난 120년간 노벨상의 대부분을 가져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들이 강력한 경제력과 산업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복수의 대규모 고등연구 클러스터라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이 2000년도 이후 이들 4개국가들을 추월하거나 혹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 역시 일본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가 해낸 것처럼 강력한 경제력과 산업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복수의 대규모 고등 연구기관 클러스터라는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역시 뚜렷해진다. 지금 우리가 지난 수십년간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되고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추가적으로 가일층 투자 규모를 늘리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리고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구개발 투자를 양적으로 늘리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복수의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만들어서 과학기술 연구의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복수의 산업경제 기반과 철저히 결합시켜야 한다.

 일본의 노벨상 빅뱅이 제기하는 세 가지 수수께끼

 이 과제를 달성하는 것은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전세계 많은 나라들이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원하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대규모 국가들이 노벨상을 싹쓸이 하는 것은 이것이 뜻만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제의 달성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이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본의 노벨상 빅뱅이 제기하는 세 가지 수수께끼에 대해 답해 보자.

 수수께끼 하나: 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 국내파인가

첫번째로 일본의 노벨상 빅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수수께끼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대부분 국내파이냐는 것이다. 대학 학부도 일본에서 나오고 박사도 일본에서 취득 하고, 노벨상을 받게 되는 업적도 대부분 일본에서 이뤄낸 것이다. 대학교 교수라고 하면 대부분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오는 것이 상례인 우리나라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것이 수수께끼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적 기준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노벨상 수상자들은 생애를 통틀어 여러 연구기관을 오가지만 나라는 잘 바꾸지 않는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는 1994년에서 2014년간 과학 계열 노벨상을 수상한 모든 수상자들의 박사 학위 취득 당시의 소속 기관, 노벨상을 받게 되는 업적을 산출했을 당시의 소속 기관, 그리고 노벨상을 받았을 당시의 소속 기관의 세 시점을 파악해서 이 세 시점의 소속 기관들이 같았는지 달랐는지를 검토해 보았다.

이 세 소속기관이 모두 같은 경우는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반면, 세 소속기관이 모두 다른 경우는 36%였다. 셋 중 하나라도 다른 경우가 54%였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 뿐 아니라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기관간 이동성을 조사한 다른 연구 결과들을 보아도 전반적으로 노벨상 수상자들은 소속 연구기관을 바꿔 가며 연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연구자들의 이동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반대로 막스 플랑크 연구소 연구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라를 바꿔서 다른 연구기관으로 옮긴 사례를 확인해 보니 전체 수상자의 77%가 한 나라에서만 쭉 연구를 했다. 2015년에 나온 영국 브리티쉬 카운슬의 조사 결과를 보아도 1901년부터 2014년까지 노벨상을 수상한 860명 중 해외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조금이라도 수학했던, 즉 해외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은 131명, 대략 15%에 불과했다. 바꿔 말하자면 노벨상을 받는 과학자들은 주로 한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연구 클러스터 간에 자리를 옮겨 다니며 연구한다는 것이다.

이 조사 결과는 창의적인 연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서로 분리 독립된 연구 클러스터들은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시각과 연구자 양성 체계를 갖게 된다. 연구자가 한 연구 클러스터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면 그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방법론을 가진 새로운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이렇게 같은 분야에 속하지만 서로 다른 시각과 방법론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일 때 뭔가 새로운 시각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의 추구는 국경을 넘어가지는 않는다. 나라를 바꿔서 완전히 다른 문화권, 언어권으로 옮기게 될 경우에는 자칫 득보다 실이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연구자들간 긴밀한 의사소통이 창의성의 중요한 기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수수께끼 둘: 왜 2000년대 들어 일본의 노벨상이 빅뱅했나

일본의 노벨상 빅뱅이 제기하는 두번째 수수께끼는 왜 2000년대 이후에나 와서야 갑자기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가 폭증했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고등연구 기관이 바로 생겨나고 과학적 업적을 쏟아내지는 않는다. 경제 규모가 과학 연구기관으로, 업적으로 반영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이 걸린다.  

미국의 사례를 보자. 경제사가들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미국은 대략 19세기말에 산업생산 능력으로 세계 최대 국가가 된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를 전수 조사한 위르겐 슈미트후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누적 기준으로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숫자가 독일을 제치고 세계 1위에 도달하는 것은 1956년이다. 1956년은 노벨상 수상자의 수상 당시 국적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이다. 출생지를 기준으로 미국인 수상자를 계산했을 때는 1965년이 되어야 비로소 전체 과학 분야 미국인 노벨상 수상자의 누적 총합이 독일을 넘어서게 된다. 미국 국적 노벨상 수상자의 상당수가 사실은 2차대전을 피해 유럽에서 건너온 유럽 출신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3년이나 되어서야 비로소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상 3개 개별 분야 모두에서 미국인 출신 노벨상 수상자 숫자가 각각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즉 전분야에서 미국이 1위가 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국적 기준을 적용했을 때, 미국이 세계 최대 경제를 가진 국가가 되고 나서도 약 60년 후에야 세계 최대 노벨상 배출 국가가 되었고, 출생지 기준을 적용하면 70년이 걸렸다. 그리고 전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되는 데는 무려 1백년 정도가 걸린 것이다.

일본이 경제 규모 면에서 세계 2위 국가가 된 것이 1967년이다. 2000년 이후만을 계산했을 때 세계 2위의 과학 분야 노벨상 배출 국가는 일본이다(16명, 2016년 기준). 그러나 아직도 과학 계열 노벨상 역사 전체를 통틀어 총 누적 기준으로 세계 2위의 노벨상 배출 국가는 영국(103명)이다. 일본은 독일(89명), 프랑스(37명) 보다 뒤지는 5위이다 (22명, 2016년 기준).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던 것이 벌서 51년 전이지만, 누적 기준으로 봤을 때, 일본은 아직도 자신의 경제규모에 걸맞는 노벨상 수상 규모 순위를 얻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서방 국가들이 지배했던 지난 120년간의 지식의 역사를 뒤집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일본이 산업경제 기반과 결합된 3개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완성했고, 이들이 연구 업적을 산출하기 시작했으며, 이들 업적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이상, 앞으로 일본 경제의 세계 순위가 갑자기 폭락하거나 연구비가 중단되거나 이들 연구 클러스터들이 갑자기 기능 부전에 빠지는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 한, 일본의 노벨상 빅뱅은 앞으로도 계속되어 수십년이 지나면 일부 서방 국가들을 따라잡게 될지 모른다.

 수수께끼 셋: 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국공립대에서만 나오나

일본의 노벨상 빅뱅이 제기하는 세번째 수수께끼는 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100%가 국공립대 출신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인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내부적으로도 의견들이 분분하다.

혹자는 국공립대가 학비가 싸서 가난한 인재들이 많이 몰리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출신 고등학교를 보면, 절반 이상인 13명이 대도시 고등학교 출신들이 아니라 지방 소재 현립 고등학교 출신들이다. 한 마디로 시골에서 올라온 수재들인 것이다. 또 다른 어떤 교수는 국공립대 입시가 사립대 입시에 비해서 시험 과목이 많고 암기 과목도 많기 때문에 국공립대 학생들이 지식량이 많고 더 종합적인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국공립대의 저렴한 학비와 입시 과목의 복잡성이 노벨상 수상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사실 전후 일본이 고등 연구와 교육 기관을 재건하려고 할 때, 당시의 대학 행정을 책임졌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의외로 쉽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2차대전 당시 일본은 전국토가 미군의 철저한 폭격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다. 2차례의 원자탄 공격과 그보다 훨씬 많은 대규모 소이탄 융단폭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일본 대도시들은 단 하나의 예외, 교토만을 제외하고 모두 잿더미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토는 당시 미국의 전쟁장관 헨리 스팀슨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폭격 대상에서 제외)

전후 일본이 경제 재건에 나서면서 고등교육과 연구의 기관들도 재건되어야 했다. 당시 일본의 고등교육과 연구 행정의 책임을 지고 있는 지도자들은 연구기반의 재건을 위해 제한된 투자자원을 배분할 때 그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했을까? 당연히 투자효율이 가장 높은 곳에 투자 우선순위를 두었을 것이다.

전쟁 전에 일본은 고등교육과 학술 진흥을 위해 제국의 판도 안에 9개의 제국대학을 설립하고 이들 연구기관들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그 중 7개가 일본 열도 안에 그리고 2개가 일본 열도 밖(서울과 타이뻬이)에 있었다.

당시 제국 대학은 일본 사회의 엘리트 코스의 상징이었으며, 교수진과 학생 모두 당시 일본 사회의 최고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쟁으로 고등교육과 연구의 기반이 파괴되었지만, 그 인적 자산과 명성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당연하게도 여전히 높은 수준의 연구를 위한 인적 자산이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전후의 복구 과정에서 인적, 물적 투자가 집중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많이 배출한 도쿄대, 교토대, 나고야대는 모두가 구 제국대학들이다.

이들 전통 명문대학들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는 다시 기존의 명성을 재강화하여 유능한 인재들을 더욱 더 국공립대로 끌어 당기는 효과를 낳았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생각해 본다면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국공립대에서만 나오고 있는 사정이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첫번째 교훈: 복수의 클러스터를 만들어라

이상의 분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세 가지이다. 첫째, 노벨상을 원한다면 복수의 고등 연구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우리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과학연구 기반을 만들어 냈다.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의 SCI등재 논문 건수는 6만건 정도로 세계 12위. 스페인에 필적하며, 호주와 인도를 바짝 뒤쫓고 있다. 2006년에서 2016년간 피인용 상위 1% 논문 건수는 약 4천건으로 세계 15위이다. 2012년에서 2016년간 3대 과학저널에 실린 논문은 562건으로 세계 16위. 우리 경제 규모가 세계 12위권 내외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경제력에 비해 그다지 떨어지는 성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또한 높은 수준의 고등 연구기관들도 만들어 냈다. 2018년도 QS평가에 따르면 일본 노벨상의 양대 산실인 도쿄대가 28위, 교토대가 36위이다. 그런데 같은 평가에서 서울대는 36위, KAIST가 41위, 포항공대가 71위를 차지했다. 2018년도 THE 평가에서도 도쿄대가 46위, 교토대가 74위인데, 서울대가 74위, KAIST가 95위, 포항공대가 137위를 차지했다. 개별 연구기관의 수월성만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의 고등연구기관들이 특히 일본의 대학들에 비해 뒤쳐진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번 더 질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복수의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만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과학연구 역량은 지나치게 서울대를 중심으로 하는 서울 클러스터에 집중되어 있다. 2016년 기준 SCI 등재 논문건수를 보자면, 서울대를 비롯한 서울지역 9개 대학이 전체의 52%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모든 대학의 논문 건수를 합해도 이 9개 대학을 능가하지 못한다. 영남권에 위치한 부산대가 3.8%, 경북대가 3.6%, 울산대 3.4%, 포항공대 2.8%로, 이들 경남북 소재 주요 4개 대학 총합이 13.6% 밖에 안된다. 서울 지역 9개 대학 논문건수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충청권은 어떤가? 충청권의 상위 랭커인 한국과학기술원이 4.6%, 충남대가 2.4%이다. 도합 7% 밖에 안된다.

서울 클러스터 이외에 그와 독립되어 그에 필적할만한 대규모 고등연구 클러스터가 최소한 하나 더 필요하다. 일본에서 관동, 관서, 중부 클러스터가 상호 협력하고 경쟁하는 것처럼, 이 2개 이상의 클러스터가 서로 경쟁, 협력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 갖추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교훈: 독자적인 연구자 충원 시스템

두번째 교훈은 독자적인 연구자 충원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서울 클러스터"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서울대를 필두로 하는 서울 클러스터를 과연 독자적인 하나의 클러스터로 볼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서울 지역 주요 대학 거의 모두가 자신의 교수 요원들을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아직 학문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는 식의 학문 민족주의 관점에서 볼 일이 아니다. 독자적인 충원 체계없이 노벨상을 다수 배출하는 나라가 없었다. 독자적인 충원 체계가 없는 한 우리는 언제나 서방 강대국들이 생산한 과학기술 지식의 소비자일 뿐이다. 이제는 독자적인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 독자적인 충원 체계는 장기적으로 창의성을 제고하고 연구 업적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우리로서는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대부분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 나라에서 박사를 받고, 연구를 하고, 노벨상을 받았다. 더 중요한 것은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이 박사를 받고 나서 자기에게 박사를 준 연구기관에 취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기를 낳아준 학교가 아니라 일단 다른 시각과 연구 경험을 가진 연구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다른 연구기관으로 떠난 것이다.

이렇게 높은 이동성을 갖되 나라를 잘 바꾸지는 않는다는 것이 노벨상 수상자들의 학문적 배경 조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다. 그리고 이 교훈은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학문적 성장 배경을 보아도 대략 들어 맞고 있다. 대부분의 수상자들이 국내파이지만 여러 연구기관들에서 연구를 수행했고, 그러한 와중에도 주로 일본을 근거지로 했다.

노벨상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는 서구의 연구자들이 정한다. 그러나 서구의 연구자들이 동양인의 연구 결과라고 해서 차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벨상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서구의 연구자들은 자기들에게서 배워간 것을 변주하는 정도로는 업적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양인에게 노벨상을 줄 정도가 되려면 자기들이 보기에도 뭔가 새로운 업적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동경대가 1877년에 설립되었으니 이제 대략 140년이다. 일본의 근대 고등연구기관들도 처음에는 거액을 들여 외국인들을 초빙하고, 해외에 대규모로 유학도 보내고 하면서 서구의 과학기술을 열심히 베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일본인들은 스스로의 독자적인 학문 연구의 사이클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스로 박사를 만들어 내고 이들 간에 경쟁시켜 교수를 임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국내에서 산출된 교수들이 다시 새로운 박사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렇게 몇 세대가 지나고 나서부터 일본의 노벨상 빅뱅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교훈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처럼 대부분의 주요 대학 교수들이 해외유학파로 채워지는 현실이 계속되는 한 노벨상 수상의 소식은 요원할지 모른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복수의 연구 클러스터를 만들고 각 클러스터들이 독자적으로 박사를 배출하여 그 박사들이 다른 클러스터에 가서 교수로 취직하는 전통이 만들어질 때, 우리가 노벨상을 받게 될 확률 역시 상승할 것이다.

 세번째 교훈: 기존 거점 중 하나를 집중 육성하여 해외 클러스터와 직결시켜라

셋째, 단기적인 대안을 생각해 봐야 한다. 상기 분석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복수의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만드는 것은 막대한 투자와 장기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많이 크긴 했지만 현재 한국경제의 규모는 영국이나 프랑스 경제의 대략 60% 정도에 불과하다.  일본 경제의 4분의 1이 조금 넘는 수준. 지난 1백여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 일본이 쌓아온 연구 자원과 역량 등 제도적 유산을 감안한다면 그 격차는 훨씬 더 클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경제적 능력과 과학기술 자원을 놓고 봤을 때 과연 우리에게 서울 클러스터의 독자적 충원 시스템을 완성하고 그 이외에 최소 하나 이상의 클러스터를 더 만들만한 역량이 있을지 미지수이다. 수십년이 걸릴지 1백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 단기적으로 하나의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막스 피셔는 과거 1960, 70, 80년대에 동유럽의 일부 소국들이 노벨상 수상자들을 대거 배출했던 시기를 지적했다. 그 당시 이들 국가들은 자체적인 대규모 고등 연구 클러스터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업적을 이뤄냈다. 피셔는 그것은 이들이 당시 소련이라고 하는 냉전 시기의 대규모 고등연구 클러스터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단기적으로는 타국의 성공적인 연구 클러스터와 다방면에 걸친 대규모 공동연구를 통해 일종의 '노벨상 점프'를 노려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 마치 일본이 패전 후 전쟁 전의 제국대학 구조를 과학연구 투자의 기반으로 활용했듯이 우리측의 파트너가 될 클러스터는 서울 클러스터 이외에 기존의 여러 클러스터 후보들 중 그래도 연구의 경험과 유산이 가장 많이 축적된 곳으로 골라, 이를 집중적으로 성장시키는 전략을 선택해 볼 수 있다.

동시에 해외의 클러스터들 중 지리적으로 가깝고 원활한 소통과 공동연구가 가능한 곳을 한 군데 선정하여 우리측 파트너 클러스터와 긴밀히 연계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산경남권의 연구기관들을 하나로 묶어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이를 일본 중부지방이나 관서 지방의 연구 클러스터와 단단히 결합하는 것이다. 양 클러스터 간에 대규모로 연구자를 상호 파견하고 대규모 공동연구를 실시해 보는 것이다.

필자의 예상으로는 상당한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여전히 국경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지리적 제약, 긴밀한 의사소통에 장애가 될 언어 장벽, 또한 일본에 대한 현재의 국민 감정 등을 생각해 봤을 때 그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이다. 창의적인 정책 대안과 우리 정치 지도자들 및 국민들의 커다란 결단이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도된 분석에서 올바른 해법이 나오지 않아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일본의 과학연구가 강한 이유를 분석하거나 우리 과학계의 약점을 분석할 때, 오도된 분석에 휘둘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현재 한국 사회와 언론에 횡행하고 있는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받는 이유에 대한 분석은 근거가 취약하고 분석이 정밀하지 못하다. 이러한 분석에서 올바른 해법이 나오기 어렵다.

신문 지상만 훑어 보아도 현재 한국의 과학계에 대한 비판은 매우 다양하다. 위계를 강조하는 도제식 연구, 교육 시스템이 혁신을 가로 막는다. 박사과정 학생들이 교수에게 너무 의존적이고 독립성이 없어서 개인의 창의성이 마비된다. 산업 수요 위주의 연구개발 투자가 기초 연구를 질식시킨다. 연구지원을 위한 정부의 지원 시스템이 전문성이 없고, 연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운용되고 있다. 연구비에 대한 통제가 너무 강해서 교수들이나 대학원생들이 연구과제를 자유롭게 선정하지 못한다. 대학생들이 전공을 너무 일찍 선택하다 보니 시야가 좁고 학제적 접근을 못한다.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너무 암기위주 교육만 시키다 보니 학생들이 창의성이 떨어진다. 학계의 풍토가 외국인 연구자들에게 폐쇄적이다.

이와 아주 똑같은 비판들을 2000년대 초반까지 노벨상을 배출하지 못한다며 일본의 과학기술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논문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국내는 물론 해외로부터도 커다란 경제 규모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자를 너무 적게 배출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일본 국내외의 비판가들은 위에 든 것과 같이 바로 지금 한국 과학계에 가해지는 비판을 일본 과학계에 제기하면서 그런 이유 때문에 일본이 노벨상을 못 받고 있고 그래서 일본의 연구와 교육 시스템을 싹 뜯어 고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의 노벨상 빅뱅이 시작되면서 일본 과학계에 대한 그 신랄한 비판들은 어느 새 칭찬으로 바뀌어 버렸다. 2016년 10월 중국 환구시보 영문판이 내놓은 논평을 보면 아주 일본 과학계에 대한 칭찬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일본의 연구환경은 개방적이고 혁신을 장려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일본 학생들은 자유롭고 사고가 독립적이다. 일본은 학계의 풍토 자체가 자유로운 사고 표현에 관대하다. 일본은 전략적으로 학술연구의 우선순위 선정을 잘 하고 있다. 일본은 서방 학술 선진국들과 인적 교류를 잘하고 있다. 일본은 기초 연구에 우선순위를 두는 데 중국은 응용연구만 하고 있다 등등.

그러나 사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면, 일본 국내외의 비판가들이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하던 그 낡아 빠진 교육 시스템 하에서 교육을 받고, 혁신과 창의성을 질식시킨다는 그 잘못된 연구 시스템 속에서 수십년간 묵묵히 연구를 해온 사람들이다. 198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의 과학 교육과 연구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일본 국내에서 연구하던 수많은 토종 일본 과학자들이 세계가 인정하는 과학적 업적을 산출했다.

이것은 일본 과학계에 대한 과거의 비판들이나 현재의 칭찬들 모두 상당수가 피상적인 관찰과 분석의 결과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오도된 분석에서 올바른 방향 설정이 나올 리 만무하다. 올바른 방향 설정은 오로지 올바른 현실 인식과 분석에서만 나올 수 있다.

소망과 투지를 다지고 새로운 길로 도전하자

우리가 일본의 노벨상 빅뱅에 대해 부러워 할 필요도 질투할 필요도 과공할 필요도 경시할 필요도 없다. 노벨상을 떠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첨단의 과학 업적을 산출할 수 있는 역량이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독자적인 연구자 충원 시스템을 갖춘 복수의 고등 연구 클러스터가 필요하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기술을 여기서 한 단계 더 도약시키자면 이것은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소망과 투지를 다지고 새로운 길을 향해 도전하자.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