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이란 흔들어야 소리가 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

044_0533_b_01L종경록 제100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동국(東國)의 의상(義相)법사가 화엄경을 해석하면서 이르되, “알아야 한다. 이 1부 화엄경이 비록 7처(處)와 9회(會)라 하더라도 10지품(地品)에 있을 뿐이니, 왜냐 하면, 근본으로 법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비록 10지는 같지 않다 하더라도 초지(初地)에 있을 뿐이니, 왜냐 하면, 하나의 지(地)에서 일어나지 않고도 온갖 지의 공덕을 두루 포섭했기 때문이다. 한 지 안에서도 비록 많이 나뉘어서 같지 않기는 하나 한 생각에 있을 뿐이다. 왜냐 하면, 3세(世)와 9세(世)가 곧 한 생각이 때문이다. 온갖 것이 곧 하나이기 때문에 한 생각과 여러 생각은 같으며, 역시 그와 같아서 하나 그것이 곧 온갖 것이요 한 생각이 곧 여러 생각이다.
다라니법(陁羅尼法)도 주인과 벗이 서로 이루어지나니, 하나는 곧 주인이 되고 온갖 것은 벗이 된다. 하나의 법을 들음에 따라서 온갖 것이 모두 포섭되며, 하나의 글 하나의 구절에 이르기까지 모두 온갖 것을 포섭한다. 왜냐 하면, 만일 이것이 없게 되면 저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니, 다라니법의 법도 이와 같은 까닭이다.
경에서 이르되, ‘여래는 한 마디의 말씀 가운데서 그지없는 계경(契經)의 바다를 연출하신다’고 했다”고 했다.
복례(復禮)법사가 이르되, “업(業)의 이치를 관한다는 것은, 무릇 업은 마음으로 인하여 일어나고 마음은 업을 위한 작용이며, 업이 마음을 이끌어서 형상을 받고 마음은 업을 따르면서 경계를 짓는다. 그렇다면, 업으로 인하여 몸을 받되 몸은 도리어 업을 짓는다. 마음으로 경계를 짓고 경계가 다시 마음을 냄은,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면서 굽고 곧고 하는 것과 같고 메아리가 소리를 따르면서 크고 작고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혜집(慧集)법사가 오도송(悟道頌)에서 말했다.

넓은 광명으로 처음 도를 배우매
그지없는 세계가 동요하더니
하늘을 돌고 다시 땅을 구르다가
한 털 구멍으로 함께 들어왔구나.

홍연(弘沇)선사가 이르되, “만일 사람이 중생의 마음 밖에 따로 무정(無情)이 있고 불성은 두루하지 않다고 고집한다면, 모두가 여래장(如來藏)이 법계에 두루하다는 이치에 어긋난다”고 했다.
유식론(唯識論)에 이르되, “감관인 몸과 그릇 세간[器世間]이 바로 아뢰야(阿賴耶)의 상분(相分)이요 상분은 견분(見分)을 여의지 아니한다”고 했다.
또 말했다.

때로는 반연할 바[所緣]에서
지혜로는 도무지 얻을 바가 없으며
2취(取)의 모양을 여의기 때문에
진실로 유식에 머무는 것이다.

제6식(識)같은 것은 현재를 반연하는 마음이나 한 찰나 뿐이거늘 무엇이 능소(能所)가 되겠는가. 설령 3세(世)를 반연한다 해도 역시 현재의 마음인데 망녕되이 능소를 나누는 것이다. 만일 이런 뜻을 얻으면, 3계가 마음일 뿐이요 법계가 한 모양이거늘 또한 무엇이 마땅하지 않겠는가”고 했다.
신개(神鍇)법사가 이르되, “한 생각의 청정한 마음은 미세하여 마치 겨자씨와 같고, 삼라만상은 마치 수미산과 같다. 만상이 비록 많기는 하나 반드시 한 마음의 변화로 일어나야 하므로 마음을 여읜 그 밖에는 마침내 법이 없다. 이는 곧 모양을 껴잡아 마음을 좇는 것이므로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넣는다’고 한다”고 했다.
원강(元康)법사가이르되, “밝게 깨친 이는, 여래가 설법하신 8만 4천의 밝힌 바 지극한 이치이므로 다시는 다른 길은 없다”고 했다.
화엄경에 이르되, “하나의 길[一道]로 생사를 벗어난다”고 했고, 열반경(涅槃經)에 이르되 “하나의 길은 청정하다”고 했으며, 대품경(大品經)에 이르되 “한 모양이나 모양이 없다”고 했고, 정명경(淨名經)에서는 이르되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라고 했다.
논(論)에서 말했다.

다른 것을 따르지 않은 줄 스스로 알면
적멸하여 희론(戱論)이 없나니
다름이 없고 분별이 없으면
이것을 실상(實相)이라 이름하느니라.

이는 뭇 현성이 나아갈 바요 뭇 이치가 같이 돌아가므로 모두가 한 마음이라는 진실한 길을 지적한 것이다.
지자(智者)대사가 진(陳)의 선제(宣帝)에게 준 글에서 이르되, “무릇 도를 배우는 법에는 반드시 먼저 근원을 알아야 하는데 도는 마음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또 마음의 체성을 알아야 하며, 분명하면 미혹됨이 없어서 공업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를 알면 천이 밝아지지만 하나에 헷갈리면 만 가지가 미혹됩니다. 마음은 형상이 없고 안팎에도 있지 아니하나 경계가 일어나면 마음이 생기고 경계가 없어지면 마음이 소멸되며 물질이 크면 마음이 넓어지고 물질이 작으면 마음이 미소해집니다.
또한 마음이 ≺공≻하여 고요함을 알면 곧 ≺공≻하고 고요한 법문에 들어가고, 마음에 속박이 없음을 알면 곧 해탈의 법문에 들어가며, 마음에 모양이 없음을 알면 곧 모양 없음의 법문에 들어가고, 마음에 마음이 없음을 깨달으면 곧 진여의 법문에 들어갑니다. 만일 마음이 이러함을 알면 곧 지혜의 법문에 들어갈 것입니다“고 했다.
원각소(圓覺疏)의 서문에 이르되, “무릇 혈기(血氣) 있는 무리면 반드시 앎이 있고 무릇 앎이 있는 이면 반드시 체성이 같나니, 참되고 청정하고 밝고 묘하며 비고 사무치고 신령하게 통하여 우뚝하면서 홀로 존재하는 자가 그것이다.
중생의 본래 근원이기 때문에 마음 자리[心地]라 하고 모든 부처님들이 얻은 것이기 때문에 보리라 하며, 서로가 통하고 융화하고 포섭하기 때문에 법계라 한다. 고요하면서 항상 즐겁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며, 흐리지도 않고 새지도 않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고 허망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기 때문에 진여라 한다. 허물을 여의고 잘못을 끊었기 때문에 불성이라 하고 선을 수호하고 악을 막기 때문에 총지(摠持)라 하며, 숨어서 포함하고 포섭하기 때문에 여래장이라 하고 뛰어나서 현묘하고 비밀하기 때문에 밀엄국(密嚴國)이라 한다. 뭇 덕을 통괄하면서 크게 갖추고 뭇 어둠을 녹이면서 홀로 비추기 때문에 원각(圓覺)이라 하나니, 그 실은 모두가 한 마음이다.
그를 저버리면 범부요 좇으면 성인이며, 그에 헷갈리면 생사가 시작되고 깨치면 윤회가 쉬게 되며, 친하면서 그를 구하면 지관(止觀)이고 정혜(定慧)요 미루면서 그를 넓히면 6도(度) 만행(萬行)이며, 끌어서 지혜를 삼은 연후에야 바른 지혜가 되고 의지하면서 인(因)을 삼은 연후에야 바른 인이 되나니, 그 실로 모두가 하나의 법이다.
하루 내내 뚜렷이 깨닫고[圓覺] 있으면서도 원각을 맛보지 못한 이는 범부요, 원각을 증득하려 하면서도 아직 원각이 지극하지 못한 이는 보살이며, 원각에 머물러 지니면서 원각을 두루 갖춘 이가 여래이다.
원각을 여의면 6도(道)가 없고 원각을 버리면 3승(乘)이 없으며, 원각이 아니면 여래가 없고 원각을 없애면 참된 법이 없나니, 실로 모두가 하나의 도(道)이다.
3세의 부처님들이 증득하신 것도 대개가 이를 증득한 것이요, 여래가 큰 일[大事]을 위하여 세간에 출현하신 것도 대개가 이 일을 위한 것이며, 3장(藏) 12부(部)의 온갖 수다라(修多羅)도 대개가 이를 설명하신 것이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마음이라는 한 법을 넓은 법[普法]이라 하지만, 이 마음을 비추려 하면 모름지기 넓은 눈으로 공허하게 보고 고요하게 비추면서 신령하게 알아야 한다. 편소(偏小)하지 않으면서 궁구해야 하고 원만하면서 능히 깨닫기 때문에 원각이라 하나니, 이것은 증득하는 주체[能證]에서 본 것이다. 진여의 묘한 성품은 적멸하여 함이 없고 구족하며 두루하면서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원각이라 하나니, 이것은 증득할 객체[所證]에서 본 것이다. 주체와 객체가 명합되면 이는 한 마음일 뿐이며, 이 한 마음은 온갖 만법의 성질이 된다.
또 3승ㆍ6도의 모양을 나타내며, 모양을 거두어 성품에 돌아가되 일찍이 딴 길이 없다. 곧, 세간ㆍ출세간에 오르고 내리고 함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무릇 갖가지 하는 일이 모두 이것으로 하지 아니함이 없다. 이를 여의면, 위로는 3보(寶)와 1승이 없고 아래로는 4생(生)과 9유(有)가 없다”고 했다.
대산(臺山)의 석개(釋◆)가 능가경결(楞伽經訣)에 이르되, “불법의 대지(大旨)를 요점만 말한다면 마음이 대지가 된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능가경에서는 마음으로 바른 종[正宗]을 삼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은 마음을 종으로 삼고, 문이 없음[無門]을 법문으로 삼는다’고 했나니, 마음이란 것은 부처님의 말씀인 마음이요, 종이라 함은 마음의 진실한 곳이다”고 했다. (◆=日*蓋)
또 이르되, “헷갈리면 온갖 미혹이 마음에 누(累)를 끼치고 깨달으면 법계를 진실로 비추며, 헷갈리면 생사가 어지러이 일고 깨달으면 열반이라 항상 고요하나니, 헷갈림과 깨달음이 다르기는 하나 모두가 이 한 마음이 숨고 드러내지 아니함이 없다”고 했다.
3장(藏) 법사가 이르되, “중생의 무리가 바로 보살이요 불국토이니, 이 여섯의 식[六識]을 증험해 보건대 곧 마지막 과위[究竟果]의 처소인데, 미혹한 이는 종일토록 미혹과 깨달음을 짓고 있다”고 했다.
발타 삼장(跋陁三藏)이 이르되, “진리[理]와 마음[心]이란 마음은 진리 밖의 것이 아니고 진리는 마음 밖의 것이 아니며 마음이 곧 진리요 진리 이것이 마음이며 마음과 진리가 평등하므로 진리라 하고 진리로 비추어서 능히 밝히므로 마음이라 하나니, 마음과 진리가 평등하다고 깨달으면 부처의 마음이라고 한다.
진실한 성품을 아는 이는, 생사와 열반에 구별이 있다고 보지 않아서 범부와 성인도 다름이 없고 경계와 지혜도 한결같으며 본체[理]와 현상[事]이 함께 융합하고 진리와 세속이 같다고 관찰하며 원만히 통하고 걸림이 없으므로, 큰 도[大道]를 수행한다고 한다”고 했다.
석 도세(道世)가 이르되, “4선(禪)은 형상이 없고 3달(達)은 모두 ≺공≻하며, 천(千)가지 부처님의 자취는 다르되 한 지혜의 마음은 같다”고 했다.
징관(澄觀)화상의 화엄소(華嚴疏)에 이르되, “위에서 모든 문은 그지없음[無盡]에 이르기까지 한 마음을 여의지 않았으며 한 마음이 곧 법계이다. 그러므로 기신(起信)에서 이르되 ‘법이란 중생의 마음을 말한다’고 했다.
마음의 체성이 곧 대(大)요, 마음의 근본 지혜가 곧 방광(方廣)이며, 마음이 행을 일으킴이 곧 화엄(華嚴)이요, 마음의 성품과 모양을 깨달음이 곧 불(佛)이니 깨달음은 밖에서 온 것이 아니요 완전히 깨달을 바[所覺]와 같기 때문이다.
진리와 지혜는 다르지 않으므로 진리와 지혜가 모양을 빼앗기고 둘 다 없어져서 고요히 비추면 생각생각마다 이는 다 화엄의 성품 바다[華嚴性海]이니, 그러면 물질과 내가 모두 여(如)해지고 소멸과 동일함이 평등해진다.
아직 알지 못한 이를 위하여 자기 마음을 알게 함에서이니, 만일 접촉되는 물질마다 모두가 마음임을 알면 비로소 심성을 환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범행품(梵行品)에서 이르되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제 성품임을 알면 지혜 몸을 성취하나니, 다른 것으로부터 깨쳐지지 아니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에 교학(敎學)을 받는 이는 대부분이 안을 버리면서 밖에서만 구하고 선(禪)을 익히는 이는 연(緣) 없애기를 좋아하면서 안으로만 비추고 있으니, 다같이 편벽된 고집이요 모두가 두 치우침[二邊]에 걸려 있다. 이미 마음과 경계가 여여(如如)하다면 평등하여 걸림이 없다.
옛날 일찍이 양면(兩面)이 다 맑은 거울로 한 쪽으로는 등잔불을 비추고 한 쪽은 부처님의 얼굴에다 놓았더니 겹겹으로 광명이 엇갈리면서 부처님과 부처님이 그지없이 보였다.
무릇 마음과 경계가 서로서로 비추어 근본 지혜로 둘다 들어가면 마음 속에서는 그지없는 경계를 깨치고 경계 위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마음을 아나니, 마음과 경계가 겹치고 겹치면서 지혜의 비춤이 여기서 있게 된다.
또, 곧 마음이 경계의 부처를 알고 곧 경계가 마음뿐인 여래를 보나니, 마음과 부처가 겹치고 겹치지만 본각(本覺)의 성품은 하나이다. 모두 취하여도 얻을 수 없으면 마음과 경계가 둘 다 없어지고 비추어도 다할 수 없으면 진리와 지혜가 서로 통한다. 마음과 경계가 그러한지라 경계와 경계가 서로 바라보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마하면서 만 가지 변화에 어지러이 휩싸여도 모두가 일치하여진다. 증득한 이만이 상응하므로 불화엄(佛華嚴)이라고 한다”고 했다.
해석에서 이르되, “지금 사람들은 다만 곧 마음이 곧 부처요 이 마음이 부처가 된다는 것만을 알고 곧 경계가 곧 부처요 이 경계가 부처가 된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이제 여(如)로써 부처를 삼는다는 것을 밝히자면, 마음과 경계가 모두 여라 마음의 여가 곧 부처면 경계의 여가 어찌 아니겠는가. 또 마음에 심성이 있어서 마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면 경계도 심성이 있거늘 어찌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마음으로써 경계를 거두면 마음 속에서 부처를 볼 것이므로 이것이 경계의 부처요, 경계로써 마음을 거두면 경계 속에서 부처를 볼 것이므로 이것이 마음뿐인 여래이다”고 했다.
화엄금관(華嚴錦冠)에 이르되, “관심석(觀心釋)에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란 만일 교(敎)에 결부시켜 뜻을 설명하면 여러 문이 있겠지만, 껴잡지를 않고 하나에 돌아간다면 마음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무릇 대(大)라 함은 바로 마음의 체성이니 마음의 체성은 그지없기 때문에 대라고 한다.
방(方)은 바로 마음의 모양이요 그 모양은 덕상(德相)의 법을 갖추었기 때문에 방광(方廣)이라 하나니, 이 마음은 작용하는 마음이며 체성에 칭합되는 작용이 있게 된다.
불(佛) 이것은 마음의 결과요 마음의 해탈된 곳이기 때문에 불이라 하며, 화(華)는 바로 마음의 인(因)이요 마음이 이끄는 행이므로 꽃에다 비유한다.
엄(嚴)은 바로 마음의 공(功)이니 마음은 장엄하게 교묘히 꾸미는 것이므로 일컬어 엄이라 하며, 경(經)은 마음의 가르침이니 마음이 명언(名言)을 일으켜 이 이치를 설명하여 드러내기 때문에 경이라 한다. 그리고 마음[心]이란 한 글자는 비록 온갖 것은 아니나 능히 온갖 것이 된다.
관(觀)이란 3대(大)로 그 안에서 4법계(法界)를 갖추어 저 4계(界)를 상대하기 때문에 4관(觀)을 이루는 것이니, 법이 본래 이와 같기 때문에 법에 의지하면서 관한다.
만일 이에 의지하여 깨쳐서 알면 생각생각이 바로 화엄 법계요 생각생각 그것이 비로자나(毘盧遮那) 법계다”고 했다.
조론(肇論)의 주(註)에 이르되, “가까우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만물의 성품일진저”라고 했고, 상서(尙書)에서 이르되, “하늘은 만물을 내되 사람만이 신령하다”고 했다. 유정ㆍ무정이 만물인 것이요 신령함 이것은 마음의 성품이니, 역시 만물의 성품이기도 하다. 곧 만물의 성품은 ≺공≻하고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먼 것이 아니어서 가깝기는 하면서도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논(論)에 이르되, “멀어서 볼 수가 없음은 마치 공중의 새 발자국과 같고, 가까워도 볼 수가 없음은 마치 눈 속의 약과 같다”고 했나니, 먼 것은 3아승기의 지극한 도[至道]에 비유하고 가까운 것은 곧 진리가 보이지 않음에 비유된다.
위에서와 같이, 조사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세하게 펴 진술했으므로 조그마한 의심까지도 아주 끊어져서 큰 믿음이 원만하게 이룩될 수 있으리라. 만일 신주(神珠)가 손바닥에 있고 보인(寶印)이 마음에 찍힌다면, 모든 부처님이 언제나 눈앞에 나타나고 법계가 말 끝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처음의 표종(標宗)에서부터 한 마음에 대하여 한량없는 이름과 뜻을 펴냈지만, 한량없는 이름과 뜻은 이치[理]와 지혜[智]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이치가 아니면 지혜가 되지 않으므로 이치 밖에는 지혜가 없으며, 지혜가 아니면 이치가 되지 않으므로 지혜 밖에는 이치가 없다. 또한 지혜를 거두어 이치를 좇으면 체성을 떠나서 작용이 없고 작용을 거두어 체성으로 돌아가면 체성이 스스로 떠나기 때문에 체성은 곧 체성이 아니다. 곧 온갖 법은 마치 허공의 성품과 같고 허공의 성품 또한 ≺공≻하여 결국에는 적멸하며 이 사라짐 또한 사라져서 무엇으로 말할까를 모르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붙여 그지없는 참 마음이라 할 뿐이다.
이제, 도리어 한량없는 뜻 바다를 거두어 온통 한 구절부터 구절 없는 데 까지 돌아가면, 한 글자ㆍ한 점도 마르고 폄이 자재하고 한 마음을 움찍하지도 않으면서 마지막에는 뜻과 말과 생각이 끊어지리라. 또 이것이 바로 안에서 증득할 자기 마음의 참 성품이어서 상대가 끊어지고 의지함이 없는 평등한 법문이다.
마치 화엄소초(華嚴疏鈔)에 이르되, “온갖 법의 자성이 평등함을 깨치면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에 들어가기 때문에 진실한 성품 안에는 차별된 모양이 없고 갖가지 모양도 없고 한량없는 모양도 없다고 하나니, 만법이 한결같거늘 어찌 평등하지 않음이 있겠으며 이것이 진실한 성품이거늘 무엇에 의지하여 까닭을 세우겠는가”고 함과 같다.
다음에는 의지함이 없음[無依]을 증득하는 법을 밝히겠다. 이른바, 물질에 의지하지도 않고 ≺공≻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만일 만법이 ≺공≻에 의지한다면 ≺공≻은 의지할 데가 없는 것이요 지금 만법이 진실에 의지한다면 진실은 의지할 데가 없나니, 곧 의지함이 업는 인의 법문[無依印法門]이기 때문에 세간을 여읜다.
세간에는 곧 갖가지의 차별이 있지만 이는 곧 성품조차도 오히려 성립되지 않거늘 하물며 모양에서겠는가. 역시 ≺공≻에 의지하여 물질을 세우지도 않고 물질에 의지하여 ≺공≻을 세우지도 않으며 다름도 없고 다르지 아니함도 없으며 그것도 없고 그것이 아님도 없나니, 이런 소견이 곧 끊어지면 안에서 증득한다[內證]고 이름할 뿐이다.
【문】위에서의 해석과 인용하여 증명함과 같은 것은 모두가 조사와 부처님의 말씀이거늘, 어찌하여 스스로의 말은 되지 아니한가.
【답】내가 만일 스스로의 말이라면 온갖 것에 아득해져서 끝없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거늘, 어찌 질문하는 것에 대답할 수 있겠는가. 설령 조사와 부처님 가르침이라 해도 모두가 다른 이의 뜻과 말과 굽힘과 순종과 시기와 근기에 따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3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법을 나는 49년 동안 한 글자도 더 보태지 아니했다”고 하셨다.
또 경에서 이르되, “먼저의 부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나중의 부처님이 따르신 것이다”고 했나니, 만일 이렇게 요달한다면 부처님 말씀이 바로 자신의 말이요 자신의 말이 부처님의 말씀인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본사(本師)께서 이르되, “온갖 외도의 경서(經書)는 모두가 부처님 말씀이요 외도들의 말이 아니다”고 하셨으며, 또 이르되, “석가여래의 말씀이 제바달다(提婆達多)의 말씀이어서 둘도 없고 구별도 없다”고 하셨나니, 만일 이것을 믿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다면 모두가 두 가지 소견이 이루어져서, 언제나 범부ㆍ성인을 분별하는 생각에 얽히고 항상 나와 남에 취하고 버린다는 뜻을 내리니, 우리의 종(宗)을 잇고자 한다면 옳지 못한 일이다.
【문】앞의 표종장(標宗章)에 이미 자세하게 유심(唯心)이라는 뜻이 설명되었거늘, 무엇 때문에 10질(帙) 가운데서 권권(卷卷)마다 간곡하게 거듭 설명하는가.
【답】이것은 비밀이자 요긴한 문이며 믿기 어려운 법이라 갈수록 깊고 갈수록 미세하며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므로, 모두가 의심을 품고 미혹의 땅에서 살고 있다.
무릇 의심이란 것은 모든 진실한 이치에 대해 망설이는 것으로 성질을 삼고 착한 품류를 장애하는 것으로 업(業)을 삼기 때문에, 의심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요약하여 말하면 세 가지가 된다.
첫째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니, “자기는 진리에 들어 갈 수 없으리라”고 한다. 둘째는 스승을 의심하는 것이니, “그는 잘 가르칠 수 없으리라”고 한다. 셋째는 법을 의심하는 것이니, “배우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게 될까, 벗어나게 되지 못할까”고 하는 것이다.
마치 병든 사람이 자기를 의심하고 의사를 의심하고 약을 의심한다면 그 병은 끝내 낫지 않는 것과 같아서, 만일 앞의 세 가지 의심이 갖추어진다면 끝내 결정된 믿음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지금 종경록(宗鏡錄)에 기록된 것은 모두가 곧장 반편을 버리고 위없는 도를 말한 것뿐이므로 어느 한 법을 들어도 모두가 원종(圓宗)에 계합되리니, 실로 깊은 의심을 끊고 큰 믿음을 이룰 수 있으리라.
마치 청량기(淸凉記)에 이르되, “≺공≻하다는 것을 듣고는 아주 없는 것일까고 의심하지 말지니, 이는 현상[事]에 즉한 ≺공≻이요 아주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있다[有]는 것을 듣고 항상한 것일까고 의심하지 말지니, 결정된 성품으로 있는 것이 아니요 인연으로 좇아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옳다[雙是]는 것을 듣고는 두 갈래일까고 의심하지 말지니, 두 이치[二諦]를 쌍으로 비추면 두 체성이 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둘 다 아니다[雙非]는 것을 듣고는 근거가 엇으리라 의심하지 말지니, 허물을 막고 집착하지 않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또, ≺공≻을 듣고는 있다고 의심하지 말지니, 이것은 있음에 즉한 ≺공≻이기 때문이다. 있음을 듣고는 ≺공≻하다고 의심하지 말지니, 이것은 ≺공≻에 즉한 있음이기 때문이다. 둘 다 옳다는 것을 듣고는 둘 다 아니라고 의심하지 말지니, 이것은 있고 없음에 즉하여 있고 없음이 되기 때문이다. 둘 다 아니라는 것을 듣고는 둘 다 옳다고 의심하지 말지니, 이것은 있고 없음에 즉하여야 있고 없음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로써도 알 것이다. 진실로 한 마음임을 알아서 뭇 의심이 단번에 끊어지면, 있음도 있음일 수가 없고 ≺공≻도 ≺공≻일 수가 없다. 범부도 범부일 수가 없고 성인도 성인일 수가 없거늘, 어찌 세간의 언어와 시비로 미혹될 수가 있겠는가.
마치 불장경(佛藏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사리불(舍利弗)에게 말씀하셨다. ‘수미산은 높고 크냐, 높고 크나이다,’세존이시여,‘ 사리불아, 4천하(天下) 안에서 모두가 수미산만큼한 큰 돌을 두루 비내릴 때에, 어떤 사람이 손으로 이 돌들을 다 받아서 겨자씨만큼의 것도 떨어뜨림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해 생각하느냐. 희유하느냐.’ 희유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가 설한 모든 법은 생김도 없고 소멸도 없고 모양도 없고 함이 없는 것인데,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한다면 그것보다 갑절 더 희유하느니라.
사리불아, 마치 어떤 사람이 모든 중생을 왼 손바닥 안에 놓고 오른 손으로는 3천세계의 산ㆍ강ㆍ풀ㆍ나무를 들고는, 모두 이 모든 중생들을 똑같이 마음에 기뻐하면서 그 뜻들이 다르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느냐. ‘희유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가 설한 모든 법은 생김도 없고 소멸도 없고 모양도 없고 함도 업는 것인데,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한다면 그것보다 갑절 더 희유하느니라’고 하심과 같다”고 했다.
이 종경록의 글을 앞뒤에서 널리 인용한 까닭은, 다만 이 마음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믿기 어렵고 비밀하기 때문에 알기 어려움에서이다. 보살의 큰 지혜까지도 오히려 부처님의 힘이 더해져야 하겠거늘 하물며 천근하고 하열한 이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마치 보우경(寶雨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로서 여래의 의업(意業)의 비밀을 깊이 믿는다고 하는가. 만일 모든 보살이 여래의 뜻에서의 비밀한 것을 들으면 ≺여래의 모든 의요(意樂)의 법 이치는 마음에 의지하고 마음에 의지하면서 머무른다≻고 하나니, 온갖 보살과 성문과 연각 및 모든 유정들로서는 알 수 있는 이가 없다. 단 여래의 가지(加持)를 받은 이만은 제외된다’고 함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비록 앞에서 인용하고 뒤에서 증명하며 글이 자세하고 뜻이 번거롭다 하더라도, 말과 말 안에서 근기에는 이익되고 듣고 듣는 가운데서 귀와 눈이 새로워지거늘, 어찌 거듭 말한 것을 싫어하여 이런 오만한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그런 까닭에, 본사(本師)께서 이르되,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데서 언제나 묘한 법을 설하느니라”고 하셨고, 또 이르되 “나는 도를 얻었던 그 밤과 열반하는 이 밤의 두 밤 사이에 언제나 반야(般若)를 말하였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근기에는 설고 익은 것이 많고 믿음에는 얕고 깊음이 있으므로 앞서 듣고 쪼여서도 아직 견고치 못하다가 뒤에서 듣고 쪼여서야 비로소 들게 된다.
마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되, “비유하면 나무를 흔들어서 과일을 딸 때에 익은 것은 먼저 떨어지지만, 아직 익지 못한 것이면 다시 나중에 흔들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고기를 잡을 적에 앞의 그물에서 다 잡지 못했으면 나중 그물로써 잡게 됨과 같다”고 했다.
또 이르되, “또 이 반야바라밀의 모양은 매우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과 근기의 영리함과 둔함을 아시는지라, 근기가 둔한 이는 지혜가 적으므로 그를 위하여 거듭 말씀하셨고, 만일 근기가 영리한 이면 한번 말씀하고 두 번 말씀해도 곧 깨쳤으므로 여러 가지로 말씀할 필요가 없으셨다. 마치 준마는 채찍을 한번 때려도 얼른 달려가고 둔한 말은 여러 번 채찍을 맞아야 떠나는 것과 같나니, 이러한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경에서 거듭하여 말씀해도 허물은 없다.
또 물었다. ‘위에서 자주 말씀한 이 반야바라밀은 인연이 심히 깊거늘, 이제 어째서 거듭하여 설하는가.’
대답했다. ‘곳곳에서 설명하면 더욱 깊어지며 이익됨이 많이 있는데도 범부들은 모르고 거듭 말한다고 한다. 비유컨대, 큰 나라 왕이 적자(嫡子)가 없었으므로 신기(神祇)에 여러 해를 기도하였으나 감응이 없었다. 대마침 왕이 밖에 나와 있을 때 부인(夫人)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심부름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게 했다. ≺대부인께서 아들을 낳았습니다≻고 했더니, 왕은 듣고 기뻐하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열번을 되풀이하고서는, 그 심부름하는 이가 왕에게 아뢰기를 ≺아까 왕께 아뢴 것을 듣지 못하셨나이까≻ 하자, 왕은 말하기를 ≺나는 들었다. 오랜 동안의 원이 이룩됐기 때문에 기뻐서 마음 속으로 즐거워하느라고 한없이 들었을 뿐이니라≻고 하고, 곧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이 사람에게 백만량의 돈을 내리게 하였으니, 한 번 말하는 데 10만량씩이었다’고 함과 같다”고 했다.
왕이 심부름한 이의 말을 듣는 그 말과 말 속에서는 이익이 있었던 것이요 이것은 거듭하여 말한 것이 아닌 데 모르는 이는 거듭 말한 것이라 한다.
곳곳에서 설명하여 더욱 깊어진 것이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니, 부처님은 보살 수보리에게 큰 이익이 있음을 아셨고, 수보리는 부처님이 말씀한 깊은 반야를 듣고 밑까지는 얻지 못했으나 더욱더 깨달으면서 심히 깊어진 것이다.
듣는 이도 곳곳에서 들을 적에 심히 깊어지면서 선정과 지혜 등의 이익을 얻는 것인데도, 범부들은 거듭 설명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마치 국왕이 한 번 말을 들을 적에 큰 이익이 있어서 10만량의 돈을 주었고 이것은 생사의 뿌리를 불리고 식(識)의 즐거움을 이룬 것처럼, 지금 종경록에서 책과 책 안과 글과 글 속에서 거듭거듭 도(道)를 부르짖고 낱낱이 종(宗)을 드러내는 것은 보리의 뿌리를 자라게 하고 법락(法樂)을 이루게 한 것이다. 온 대지(大地)를 황금으로 만들어도 그 한 글자 값도 값지 못하리니, 청컨대, 게으름을 피우거나 자주 듣는 것을 싫어하지 말 것이다. 이미 통달한 이면 거듭 신심을 견고하게 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이면 빨리 문혜(聞慧)를 일으키게 할 것이다.
【문】이 종경의 문에서 도로 받아 익히고 배울 것인가.
【답】배운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요약하여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만일 대종(大宗)을 논한다 하면 근본의 바른 지혜는 마음으로부터 배우지도 아니하고 의사(意思)에도 있지 않나니, 뚜렷한 밝음과 환히 알게 됨은 마음으로 인하여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천태교(天台敎)에서 이르되 “손으로는 책을 잡지 않는데도 항상 이 경을 읽고, 입으로는 소리가 없는데도 뭇 경전을 두루 외며, 부처님은 설법하지 않는데도 항상 범음(梵音)을 듣고, 마음은 사유(思惟)하지 않는데도 법계를 두루 비친다”고 했나니, 이것은 상상근(上上根)의 그릇이 들으면서 단번에 깨치고 몸소 증득한 때를 말한다.
둘째는, 설령 깨닫지 못한 이라도 역시 도와 일으키는 힘과 인가(印可)의 공은 있다. 혹은 기틀의 생각함이 더디거나 중근(中根)ㆍ하품(下品) 및 배움에 차별지문(差別智門)까지는 모름지기 밝은 스승에 의지하여 그릇됨과 바름을 가리어야 한다. 먼저 들은 것을 이해하고 믿어 들면 뒤에는 생각 없음[無思]에 계합될 것이니, 물건마다 원만하게 통하고 일들마다 걸림이 없어야 비로소 인연을 만나 경계를 대하면서도 뜻을 잃거나 종(宗)에 미혹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르되 “만물을 깨달아 자기 것으로 삼는 이는 오직 성인 뿐일진저”라고 했다.
또 만일 대강(大綱)에서 보면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나니, 설령 서로 도움이 있다 해도 역시 스스로가 알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학인이 선덕(先德)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선(禪)입니까.”
“스스로가 진리를 개침이 선이니라.”
“진리같은 것은 심성이 거짓으로 붙인 이름 뿐이거늘, 어느 것이 진실입니까.”
“3아승기 백천의 이름도 다만 거짓으로 가져다 붙였을 뿐이다. 참 모습[實相]은 모양이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으므로 모름지기 스스로 돌이켜 깨쳐야 한다.”
“깨친 뒤에는 다시 어떤 법이 있습니까.”
“이 깨친 곳이 바로 법이며, 인연 따라 밝히면 도리어 스스로의 진리를 얻는다.”
“이 성품은 사람에게 보게 할 수 있습니까.”
“그대에게 보인다 해도 스스로가 깨쳐야 얻게 되는 것이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뜻으로 아는 일이 아니다. 이 참되고 정밀하고 묘하고 밝은 성품은 하늘이나 나무나 돌과 같지 아니하며, 저절로 생긴 영묘하고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곧 제 성품의 불ㆍ법ㆍ승이다. 만일 깨치지 않고 추구하며 보려고 한다면 한 털끝만큼도 얻을 수 없으며, 다만 앞 대경의 곱고 밉고 함을 여의기만 하면 바로 그것이 제 집의 본래 마음이니, 만일 한 털끝 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하고서 불도와 함께한다면 옳지 못하느니라.”
“물질을 보는 것은 물질을 볼 뿐이거늘, 어떻게 마음을 봅니까.”
“곧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누가 물질을 보겠는가.”
“어찌 경계에 해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는 보려고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스스로가 헤아리면서 이것인가, 아닌가 하고 살펴보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묻지 말라. 만일 곧바로 보게 되면 다시는 헤아리지 않게 된다. 불법은 다만 마음[方寸]에 있을 뿐이니, 마음 밖에는 발자취가 없으며 한 마음이요 한 지혜일 뿐이다. 안팎과 중간을 여의고서 취하고 받으면 3제(際)의 도리가 현묘하여져서 곧 함이 없는 도[無爲道]에 드느니라.”
“무슨 마음을 깨치면 그것이 도(道)입니까.”
“마음에 마음이 없음을 깨치면 그것이 도이니라.”
“지시하여 주십시오.”
“지시하여 주었는데도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하고 있느니라.”
“이 무슨 물건을 학인에게 보게 하셨습니까.”
“그대에게 곧바로 보게 했으나 역시 물건은 아니니라”고 했다.
또 선덕(先德)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물건을 보십니까.”
“본 마음을 보느니라.”
“보시는 것과 본 마음과는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지 않느니라. 진여의 본체 위에는 스스로 비춤[照]과 작용[用]이 있지만, 밝기 때문에 본다고 이름 붙이고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이름 붙인다. 또 제 성품이 청정하므로 비춤이라 하고 항상 제 성품을 보는 것을 작용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 마음은 눈앞에 드러나 있나니 어찌 문답할 필요가 있겠으며, 어찌 추궁을 빌리겠는가. 곧 원만한 문이어서 이것이 현법(現法)을 이룬다.
마치 어떤 학인이 혜충 국사(慧忠國師)에게 물었다. “화상의 어떤 것이 해탈한 마음입니까.”
“해탈한 마음이란, 본래 스스로 있는 것이어서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잡으면서도 얻지 못하나니, 중생이 날마다 쓰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바로 그것이니라”고 했다.
이야말로, 눈으로 보는 데에 도가 있음을 직접 지시한 것이어서, 이제나 예나 항상 그러하며 범부와 성인이 같이 소유한다.
무릇 종경록에 기록된 것은 모두가 부처님 말씀이다. 설령 보살이 지었고 법사가 해석함이 있다 해도 역시 이는 부처님이 말씀한 뜻을 통달하여 부처님이 말씀한 바를 따른 것이다.
이 땅의 중생들은 모두가 문혜(聞慧)로써 3마지(摩地)에 들었기 때문에, 모름지기 음성으로 불사(佛事)를 삼아 바른 이치를 드러내 보이면서 그릇된 고집을 부셔 없애야 하리니, 말이 아니면 통하지 아니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듯이 있다. 첫째 필경문(畢竟門)에서 보면 실로 말로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되, “온갖 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모양을 여의고 이름의 모양을 여의고 마음의 반연한 모양을 여의었다”고 했고, 또 이르되 다시, 마지막이 허망한 집착을 여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듦의 법과 청정한 법은 모두 상대(相待)라 말할 만한 제 모양이 없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본래부터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식(識)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에는 말할 만한 모양이 없건만, 언설이 있는 것은 여래가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려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하리니, 그 뜻은 다 생각을 여의고 진여에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온갖 법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생기고 소멸하게 하여서 진실한 지혜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했나니, 이것이 처음 보리심을 낸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며, 또한 자기를 이익되게 하는 이치와 수행을 성취하여 진실한 지혜에 돌아가게 하며 마지막에는 종경(宗鏡)에 돌아가기를 지시한 것이다.
둘째 방편문(方便門)에서 보면 이것은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행이기 때문에 “여래가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려서 중생을 인도한 것이다”고 한 것이다. 또 한결같이 말을 하면 잘못이 되고 생각을 일으키면 허물이 된다고 고집하지 말 것이니, 왜냐 하면, 말에 즉해서 말이 없고 생각에 즉해서 생각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과 말에서 도에 계합되고 생각과 생각에서 종(宗)으로 돌아간다.
분별문에서는 두 설명이 없지 않지만, 필경문에서는 말과 생각이 끊어진다.
【문】위에서 세운 바의 한 마음이라는 뜻은 한량없는 법문을 포섭하여 온갖 것에 융통한 것이므로, 이 마음은 또 온갖 법을 포함할 수도 있고 온갖 법을 낼 수도 있는가. 또 스스로 난 것[自生]인가, 다른 것이 낸 것[他生]인가, 다 같이 낸 것[共生]인가, 인이 없이 난 것[無因生]인가.
【답】이 마음은 세로도 되지 않고 가로도 되지 않고 다른 것도 아니고 저절로도 아니다.
왜냐 하면, 만일 “마음이 온갖 법을 포함한다”고 하면 이것은 곧 가로요, “마음이 온갖 법을 낸다”고 하면 이것은 곧 세로며, “스스로 난 것”이라고 하면 마음은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다른 것이 낸 것”이라고 하면 벌써 스스로도 될 수 없나니 어떻게 다른 것이 있겠는가. 만일 “다 같이 낸 것”이라고 하면 자기나 다른 것이 이미 없거늘 무엇을 가져서 같이한다 하겠으며, “인이 없이 난 것”이라고 하면 인이 있는 것도 오히려 나지 않거늘 하물며 인이 없는 것이겠는가.
【문】마음이 네 가지 성질이 아니라면 교(敎) 안에서 어떻게 말했는가. “뜻 감관은 의식(意識)을 내고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이와 같아서 마음으로부터 짓지 아니함이 없다”고 했나니, 그렇다면 스스로 난 것이다.
또 이르되, “마음은 외로이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연(緣)을 빌려서 일어나므로, 연이 있으면 생각이 나고 연이 없으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나니, 그렇다면 다른 것이 낸 것이다.
또 이르되, “이른바 6촉(觸)의 인연으로 6수(受)를 내어서 온갖 법을 얻는다”고 했나니, 그렇다면 다 같이 낸 것이다.
또 이르되, “12인연(因緣)은 부처나 하늘이나 사람이나 아수라가 지은 것이 아니고 그 성품 저절로 그러하다”고 했나니, 그렇다면 인이 없이 난 것이다. 이미 교문(敎文)에서 그렇거늘 어째서 허물이 되는가.
【답】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인연의 차별에 따라 굽히면서 뭇 근기들에게 선행을 내고 악행을 부수면서 첫째가는 이치에 들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는 다 4실(悉) 방편의 권도로 베푸신 것이다. 빈 주먹으로 어린아이를 속여서 온갖 것을 제도하는 것과 같다.
【문】이미 세로도 가로도 아니어서 네 가지 성질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온갖 법이 바로 마음인가. 마음이 바로 온갖 법인가.
【답】그것이라 하면 두 가지가 성립된다.
【문】그렇다면, 온갖 것이 성립되지 않으면 모두가 아닌 것인가.
【답】아닌 것에도 두 가지가 성립된다. 마치 문수(文殊)가 말하기를 “나의 참 문수는 문수가 없다. 만일 이것이 있다면 두 개의 문수이다. 그러나, 나의 오늘에는 문수가 없는 것도 아니다”고 함과 같나니, 그 안에서는 실로 이것이다 아니다 하는 두 모양이 없다.
【문】이미 두 모양이 없다면 종(宗) 하나가 이것인가.
【답】이것이다 아니다 하면 벌써 대지(大旨)에 어긋나며 하나다 둘이다 하면 도리어 원종(圓宗)에 위배된다.
【문】어떻게 하면 이런 뜻에 계합될 수 있는가.
【답】경계와 지혜가 모두 없어졌거늘, 어떻게 계합을 말하겠는가.
【문】그렇다면,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과 지혜의 길이 끊어질 것이다.
【답】그것도 억지 말이어서 다른 이의 뜻을 따라 생긴 것이니, 비록 형상을 숨기려 한다하더라도 자취가 없지 못하다.
【문】어떻게 하면 행적이 모두 없어진 것을 얻는가.
【답】본래 조짐의 자취조차 없거늘, 어째서 없애려고 하는가.
【문】그렇다면,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실 때 차고 더운 것을 자신만이 아는 것과 같아서, 크게 깨치는 때라야 이런 뜻에 계합 될 것이다.
【답】우리의 이 문중에는 역시 미혹과 개침이거나 계합과 계합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도리가 없다. 손을 놓으면 그대에게 보일 한 물건도 없고 수천마디의 간절한 설명도 헛수고며 이 일은 만 가지로 비유해도 성립되지 않고 천의 성인도 꼭 얻지 못하며 대지(大地)가 실으면 일어나지도 못하고 허공이 쌓아도 넣지를 못하리니, 큰 그릇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짐을 질 이가 없다.
마치 고덕(古德)이 이르되, “온 10방 세계가 한 사람을 찾아서 벗을 삼을 수도 없다”고 했고, 또 이르되 “한 사람만이 조사의 지위를 이어받음이 있고 끝내 제2의 사람은 없다”고 했다.
만일 친히 이르지 못한다면, 한갓 정신만 수고로울 뿐이며 설령 현묘하고 또 현묘함을 말한다 해도 미묘함 가운데서 다시금 미묘하다. 설령 방편으로 찬양한 문 안에서 다른 이가 믿어 들어감을 도우면서 일 평생 동안 곁에서 칭찬을 해도 곧 옳지 못하며, 또는 자기의 분수 위에서 친히 비추는 때에 유달리 현묘함을 말하고 미묘함을 말하면서 한 생각의 뛰어나고 불가사의한 앎을 일으킨다 해도 모두가 악마의 경계에 떨어진다.
그런 까닭에, 원각경(圓覺經)에 이르되, “거짓되고 허황한 마음으로 여러 교묘한 소견이 많아도 원각을 성취할 수가 없다”고 했다.
또 선덕(先德)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얻고 얻지 못한 것 하늘 악마의 얻음이요
현묘하고도 현묘한 것 외도의 현묘이다
부모를 마을의 풀 속에 버리고서
노란 잎을 잘못 알며 돈이라 하는구나.

백 척의 긴 장대에서 손을 쾌히 놓고서 뒤를 보거나 앞을 살펴볼 필요가 없다. 지금에 다만 비슷한 형상과 말의 자취만으로 문채(紋綵)가 생길 때면 모두 이는 방편문을 고집하고 진실한 도에 헷갈린 것이니, 다 같이 이는 저 노란 잎을 잘못 알고 돈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만일 크게 깨치는 때는 마치 백 척의 긴 장대에서 몸을 놓고 다시는 앞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과 같나니, 이 종경(宗鏡) 안이 바로 온갖 범부와 성인이 신명을 크게 버릴 곳이다. 이 종(宗)에 들지 아니하면 모두가 마지막이 아니다.
【문】필경에는 어떠한가.
【답】역시 필경은 없다.
【문】앞에서 이르되, ‘이 종에 들지 아니하면 모두가 마지막이 아니다’고 하고서, 여기서는 또 어째서 필경이 없다고 하는가.
【답】앞에서는, 증상만인(增上慢人)이 아직 얻지 못했으면 얻었다 하여 허망을 잘못 알고 진실로 삼으며 뒤바뀜을 고집하여 원상(圓常)을 짓는 것에 대하여 그 망정의 대경을 부수기 위하여 권도로 마지막이라 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견성(見性)을 논하고 있거늘 어찌 거짓과 진실을 말하겠는가.
【문】이 통하고 밝힌 뒤에는 어떻게 이행하는가.
【답】누구로 하여금 이행하게 하겠는가.
【문】아주 없다[斷滅]고 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답】오히려 항상 머무름도 얻지 못하거늘, 어떻게 아주 없다는 것인가.
【문】최후로 한 말씀 해 주시오.
【답】허깨비[化人]이다.
【문】요술로 된 사람이요 골짜기의 메아리인가.
【답】샘물 소리[泉聲]니라. 우리 종지를 통달하고자 하면 진흙 소가 물 위를 다니느리라.
【문】이 녹(錄)을 총괄하여 요약하면 미세하고 본체[理]와 현상[事]이 뚜렷이 밝은데, 도(道)룰 사모하는 사람에겐 어떠한 도움이 되는가.
【답】만일 첫째가는 이치에서라면 이익도 없고 공덕도 없지만, 세속의 문에 나아가면 찬양할 것이 있을 듯도 하다.
통틀어 두 길이 있어서 처음 배운 이에겐 도움이 될 수 있다. 첫째는 아직 믿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는 바른 믿음을 이루게 하나니, 거두어 한 생각으로 돌아가서 밖으로 내달으며 구하지 아니한다.
둘째는 이미 믿은 사람을 위해서는 관(觀)의 힘을 도와 도리와 수행이 견고해지면서 빨리 보리를 증득하나니, 걸음걸음마다 보배 처소로 가는 공든 길을 지체하지 않고 생각생각마다 살바야(薩婆若)의 바다에 흘러듦이, 마치 광대한 연(輦)을 타고 보배 마을에 닿는 것 같으며 견고한 배를 타고 앉아서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는 것과 같다.
【문】이 종경(宗鏡)을 쌓으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가.
【답】이것은 불가사의하고 큰 위덕이 있는 법문이니, 다만 보고 들음만 있어도 좋은 이익을 크게 얻음은, 마치 한 개의 티끌이 높고 큰 산등성이에 떨어지면 벌써 구름이 되어 올라가고 한 방울 이슬이 큰 바다의 물결에 들어가면 곧 넓은 물과 같아지는 것 같다. 가위, 보리의 종자를 바로 잇고 부처님들의 집에 온전히 나거늘 하물며 믿고 이해하고 받아 지니어 바른 기억으로 관찰하면서 사람들을 위해 펴 연설하고 전하며 보시하는 행이겠는가.
좋은 이익 문에서 보면, 비유할 법도 없고 공덕은 그지없으며 종지(種智)가 아니면 칭량할 수가 없거늘 이익과 즐거움이 어찌 다하랴. 하늘보다 뛰어나서 맨 끝을 모른다.
허공에 가득 찬 값진 보배로 항하 모래만큼 많은 여래께 공양하고 10방 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벽지불(辟支佛)의 과위를 증득하게 한다 해도, 이 뜻을 널리 펴고 이 종을 열어 연설함보다는 못하나니, 이를 교량(校量)해 본다면 짝할 만한 것이 없다.
가위, 부처의 종자를 중생의 몸 밭 안에 뿌려서 바른 법의 싹이 나와 번뇌와 욕심의 진창 속을 향한 연후에는 7각(覺)의 꽃이 피고 보리의 열매가 이룩되어 차츰차츰 서로가 나면서 그지없는 끝에 이른다 하겠다.
마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서 이르되, “남겨 주신 법 가운데서 이 그지없는 법을 보고 듣고 믿고 향하면, 금강의 종자가 이룩되어서 장차는 반드시 이 원융하고 두루한 법을 얻으리라”고 함과 같다.
마치 경에서 이르되, “금강을 삼킨다는 비유며, 작은 불이 널리 태운다는 비유이다”고 함과 같다.
또 마치 도솔 천자(兜率天子)가 지옥으로부터 나와서 10지(地)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면 갈수록 이익이 다할 수 없음과 같나니, 모두가 전생에 이 법을 들었던 것이 본인(本因)이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했다.

비록 큰 바다와
겁(劫)이 다할 때 불 속에 있다 해도
결단코 믿으면서 의심이 없으면
반드시 이 경을 얻게 되리라.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되, “받아 지닌 반야의 공덕을 교량한다면 이 지니는 편에서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 이제 모든 부처님이 중생을 가엾이 여겨 그 뜻을 해설하여 알기 쉽게 함은 훌륭하게 스스로가 행하고 바르게 기억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에 부처님은 복덕을 널리 분별하기 위하여 말씀하시되, ‘만일 어떤 사람이 목숨이 다하도록 10방 부처님들께 공양하여도, 다른 이들을 위하여 반야의 뜻을 해설함보다는 못하나니, 이 안에서는 훌륭한 인연을 말씀하셨으므로 3세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를 배워서 위없는 도를 이룬 것이다.
또한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세계 사람들을 가르쳐서 성문과 벽지불의 도를 얻게 하였어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의 뜻을 연설함보다는 못하나니, 이 중에서 말씀한 인연은 이 모든 현성들이 다 반야바라밀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고 했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 이르되,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10방에 두루한 허공에 7보(寶)를 가득히 쌓아서 작은 티끌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들께 받들어 올리고 섬기고 공양하면서 마음으로 그냥 지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이렇게 부처님들께 보시한 인연으로 복을 많이 얻겠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허공도 다함이 없고 값진 보배도 그지없나이다. 옛날에어떤 중생이 부처님께 7전(錢)을 보시하고도 죽어서 전륜왕(轉輪王)이 되었거늘 하물며 눈앞의 허공이 다하고 부처님 국토에 충만한 값진 보배로 모두 보시한 것이겠나이까. 겁(劫)이 다하도록 생각하고 의논하여도 오히려 미칠 수 없거늘, 이 복이 어찌 맨 끝이 있사오리까.’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말씀은 허망하지 않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몸으로 4중죄(重罪)와 10바라이죄(波羅夷罪)를 완전히 짓고 순식간에 이 지방과 다른 지방의 아비(阿鼻)지옥을 낱낱이 돌아다니고, 10방의 무간(無間)지옥까지도 샅샅이 돌아다녀야 할 것이로되, 능히 한 생각에 이 법문을 가져다가 말겁(末劫)에게 열어 보이면, 이 사람의 죄장은 즉시에 소멸하고 그 받아야 될 지옥 고통의 인연이 변해지면서 안락국(安樂國)이 될 것이요, 얻는 복은 앞서 보시한 사람보다 뛰어나서 백배ㆍ천배ㆍ천만억배가 되며, 또한 산수와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이 법을 찬탄하고 넓히는 좋은 이익은 그지없나니, 수능엄경에서는 “여래장은 마음을 종(宗)으로 삼는다”고 했다. 여래장이란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밀엄경(密嚴經)의 게송에서 말했다.

여래의 청정한 장[淸淨藏]은
세간의 아뢰야식이니
마치 금과 가락지는
차츰 바뀌면서도 차별이 없음 같다.

모든 부처님은 환히 아시므로 청정한 장이 되고 중생들은 집착하므로 아뢰야식이 된다. 마치 순금은 세공장이와 용광로의 연(緣)을 따라 가락지라는 다른 이름으로 되며 둥글고 작고 하는 요술 모양을 짓되 금 자체는 동요하지 않고 이름과 모양만이 망녕되이 늘어서는 것처럼, 참 마음은 중생의 물듦과 깨끗함의 연을 따라 범부와 성인이란 다른 이름으로도 되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요술 모양을 나타내되 심성은 동요하지 않고 이름과 모양은 본래 ≺공≻하다.
거짓 붙인 이름을 잘못 알면서 두 가지 소견이 갑자기 분류되고 참된 체성을 깨치면서 한 마음이 원만히 증득되며. 미혹과 깨침은 말 끝에 즉(卽)하고 법과 비유는 눈앞에 밝나니, 그에 어두우면 겁(劫)을 지나면서 쓸데없이 닦게 되고 이를 통달하면 자체에 맞으면서 엉키어 고요하다.
법화경(法華經)에 이르되, “내가 멸도(滅度)한 뒤에 가만히 한 사람을 위하여 법화경의 한 글귀라도 해설하면, 이 사람이야말로 여래의 심부름으로 여래가 파견하여 여래의 일을 행한다고 알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대중 가운데서 널리 사람들을 위하여 해설함이겠는가”고 했다.
‘가만히 한 사람을 위하여’라 함의 가만히[竊]란 사사로이[私]라는 것이다. 만일 사사로운 자리에서 한 사람만을 위하여 이 한 글귀를 해설할 뿐일지라도, 이 사람은 한 마음의 진여 안에서 파견된 심부름꾼으로서 중생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일여(一如)의 이치를 곧장 알면 바로 그것이 진여 중의 일을 행하는 것이니, 진여는 그지없어 온갖 처소에 이르기 때문에 얻게 되는 법의 이익 또한 진여의 성품을 따르면서 한량없고 그지없다.
도 이르되,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여래와 함께 묵는 이며 그를 위해 여래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만진다. 또한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느니라”고 했다.
요점을 들어 말하건대, 이 경을 지닌 사람은 4위의(威儀) 안에서 발을 들거가 딛거나 모두가 한 마음으로 진여의 모든 부처님이 행한 곳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앙굴마라경(鴦崛魔羅經)에 이르되, “만일 사람이 지나간 세상에 일찍이 모든 부처님들을 만나 공양하고 섬기면서 여래장을 들었다면, 손가락을 튕기는 동안의 잠시에 들어 받게 된 이 착한 업으로 인연하여 모든 근기가 순숙(純熟)하여져서 나는 곳이 뛰어나며 부귀가 자재 하였었고 이 중생은 지금도 오히려 순숙하여 난 곳이 뛰어나며 부귀가 자재하나니, 그는 전생에 일찍이 부처님들을 만나 잠시 동안이나마 여래장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니라.
또한 부처님이 앙굴마라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여래의 제일 어려운 일이 아니고 다시 더 어려운 일이 있느니라. 앙굴마라야, 마치 사람[士夫]이 수미산과 대지(大地)며 대해(大海)를 짊어지고 백천 년 동안을 지낸다면, 이는 큰 힘이요 제일 어려운 일이겠느냐.’ 앙굴마라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는 여래의 경계요, 저 성문과 연각으로서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부처님이 앙굴마라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큰 힘도 아니요 심히 어려운 것도 아니니라. 만일 큰 바다의 한 티끌을 백억으로 나누고서 백천억 겁 동안 하나의 티끌씩을 가져다 버리어 소 발자국만큼 남아 다하려 할 적에, 다시 수미산과 대지며 강물과 바다를 백천억 동안 짊어질 수가 있어도, 그는 정법(正法)이 세간에 머무르는 나머지 80년 동안에 여래의 항상하고 변하지 않는 여래장을 연설할 수는 없느니라. 오직 보살로서 인간 안의 영웅만이 여래의 항상하고 변하지 않는 여래장을 연설하여 정법을 수호하고 지닐 수 있으리니, 나는 이 사람이 제일 심히 어렵다고 말하느니라’고 하셨다”고 했다.
도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에 이르되, “설령 수미산을 붙잡아 딴 지방의 수없는 불국토에 던져 놓는다 해도 어려운 것이 못되고, 또 발가락으로 대천세계를 멀리 던진다 해도 역시 어려운 것이 못된다”고 했다. 또 이르되 “가령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고서 유람하며 다닌다 해도 역시 어려운 것이 못된다”고 했으며, 또 이르되 “가령 겁소(劫燒) 때에 마른 풀을 짊어지고 그 속에 들어가 타지 않는다 해도 역시 어려운 것이 못되나, 내가 멸도한 후에 만일 이 경을 지니면서 한 사람을 위해 해설한다면, 이야말로 어려운 것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바다를 말리고 산을 이동시켜도 함이 없는[無爲] 힘이 아니요 허공을 걷고 물을 밟게 됨도 모두가 샘이 있는[有漏] 신통이거늘, 어찌 모든 부처의 마음을 열어 여래장을 연설하고 보리 종자를 이어 1승(乘)의 문에 들며 성인의 태(胎) 안에 의탁하여 참 불자가 될 수 있는 것만 같겠는가. 왜냐 하면, 근본을 얻기 때문이니, 마치 근원으로부터 물을 내고 젖으로 인하여 소(酥)를 얻는 것과 같다.
마치 앙굴마라경(鴦崛摩羅經)에 이르되, “다시 문수사리여, 마치 젖에 소가 있음을 아는 까닭에 방편을 사용하여 구하면서도 물에서는 구하지 아니함은 소가 없기 때문임과 같나니, 문수사리여, 중생은 여래장이 있음을 아는 까닭에 부지런히 계(戒)를 지니고 맑은 행[梵行]을 깨끗이 닦느니라.
또 문수사리여, 마치 산에 금이 있음을 아는 까닭에 산을 파 금을 구하면서도 나무를 파지 않음은 금이 없기 때문인 것과 같나니, 문수사리여, 중생은 여래장이 있음을 아는 까닭에 애쓰면서 계율을 지니고 맑은 행을 깨끗이 닦으면서 ‘나는 반드시 불도를 이루게 되리라’고 하느니라.
또 문수사리여, 만일 여래장이 없다면 공연히 맑은 행을 닦음은 마치 겁(劫)이 다하도록 물에서 구하여도 끝내 소를 얻지 못함과 같느니라”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종경(宗鏡) 안에 들어가 여래의 성품을 보면 보리도의 열매가 즉시 모두 이루어지리니, 마치 내려가는 물에 띄운 배와 같고 바람을 타고 일어나는 불과 같으리라.
만일 종경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면, 설령 복과 지혜를 같이 닦는다 해도 끝내 성취하지 못함은 마치 젖을 구하면서 물을 거르고 산을 여의고서 금을 파는 것과 같으리니, 3아승기를 지난다 한들 어찌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마치 종경록(宗鏡錄)에 기록된 앞뒤의 글은 부처님들의 다섯 가지 눈[五眼]으로 보신 바요, 다섯 가지 말씀[五語]으로 설하신 바라, 한 마디 말도 진실하지 아니함이 없고 한 이치도 원만하지 않는 것 아니니, 후현(後賢)들이 결정코 믿어 들어갈 것을 기다릴 수 있다.
마치 월상경(月上經)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수미산을 움직여 땅에 넘어뜨리고
아수라의 사는 곳이 모두 다 없어지며
큰 바다가 바짝 말라 월천(月天)이 떨어진다 해도
여래는 끝끝내 거짓 말씀 안하시네.

가령 10방 중생의 마음을 같이하고
혹은 불이 물이 되고 물이 불이 된다 해도
한량 없는 공덕은 가장 크고 높으시어
중생을 이롭게 함에 딴 말씀은 없네.

대지와 허공이 혼돈(渾沌)을 이루고
백 세계가 한꺼번에 겨자 속에 들어가며
그물로써 맹풍(猛風)을 얽맬 수 있다 해도
여래께선 끝내 거짓 말씀 없으시네.

이런 성실(誠實)로써 두루 전하고 지녀야 하리니, 그 공덕은 그지없어서 말로나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유식론(唯識論)의 게송에서 말했다.

이 유식론을 짓게 된 것은
나의 헤아림의 곳이 아니니
모든 부처님이 묘한 경계로
복덕을 중생에게 베푸신 것이니라.

여기서 논한 대지(大旨)는 정식(情識)과 알음알이[知解]로 헤아릴 바 아니요 이야말로 부처님[大覺]의 불가사의하고 절대 미묘한 경계이니, 이로써 불가사의한 그지없는 복을 널리 드날리어 법계의 한량없는 중생에게 두루 베풀면 다같이 이 종(宗)에 들어가고 나란히 부처지위에 오르리라.
화엄소(華嚴疏)의 주인 장(藏)법사의 발원게(發願偈)에서 말했다.

서원하노니, 이 원융하고 걸림없는
보현법(普賢法)을 보고 듣고 닦아 익히어
죽기까지 끝내 여의지 않으면서
미래 세상 다하도록 원(願)과 상응하여지이다.

이 착한 뿌리 등의 법 성품으로
그지없는 중생계를 두루 적시어
한 생각 여러 겁[一念多劫]에 보현행 닦아
위없는 불 보리를 모두 이루어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