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폐하 교육은 어떻게 하나요 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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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의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 전 국민이 청일전쟁스고로쿠와 환등회라는 놀이와 오락을 통해 제국일본의 상무의식이 함양되어 전쟁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소비했다는 점을 분석했다. 스고로쿠는 어린이 대상의 주사위 놀이로써 청일전쟁 시기 1년 동안 발매되었고 주제는 일본 대승리와 정청이었다. 12칸으로 분할된 각 칸의 내용과 이미지들은 제국일본의 상징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신화를 만들어냈다. 동아시아의 문명국으로서 개전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기존의 진무천황의 금치이야기를 함대 다카치호의 “매”로 교체하고 평양성의 하라다병사와 같은 영웅미담, 과장된 평양전투에서의 일본군 승리만을 강조하며 근대화된 군함과 병력의 군국주의적 행태를 보여주었다. 또한 환등회에서는 변사로 하여금 “대일본제국만세”, “황제폐하만세”라는 감정적 호소로서 단순화된 이미지에서 손실된 제국의식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일시적인 환등회의 슬라이드는 반복적인 놀이를 할 수 있는 스고로쿠로 재탄생되었다. 결론적으로 시청각자료를 체험하는 국민들, 특히 교육이 필요한 어린이들은 스고로쿠를 통해 “놀이로서의 전쟁”을 신체적 감각으로 체험하면서 제국적 상무의식 고양에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했다. 전쟁스고로쿠와 환등회라는 대중적인 방법을 통해 교육되고 학습된 전쟁은 무의적으로 제국일본의 훌륭한 국민, 그리고 군인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시청각 자료의 역할에 충실했다.

This paper analyzes how the Japanese people persisted with a consciousness of nationalism, recognizing and then consuming the war, through visualized devices for entertainment, Sugoroku, and slideshows. After the initiation of the Sino-Japanese war, its nishiki-e were mass-produced and merchandised. The events, showing informational slides about the war, were held nationwide. Around the end of the major battles in December 1894, after the Sugoroku game was issued, adults and children could learn the amount of military expenditures and the size of the military forces of Japan and its opponent, and Japanese soldiers, who contributed to the winning of the war, through the board game to provide indirect, virtual experiences of the war. Two entertainment devices, the individual, independent Sugoroku, and collective, compulsory slideshow events, transformed the war into an object of interest. The Sugoroku board game tried to justify the initiation of war by presenting images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Battle of Pyongyang (1894) in an exaggerated way, the Emperor’s identification with the nation, and modernized battleships and armed forces. While the slideshow events explained metaphors, not to be represented in one image, in writing, those were a direct, educational place to make an appeal in an emotional way such as “hooray for the Empire of Japan” and “hooray for the Emperor”. In conclusion, we found that, for the game of Sugoroku and the slideshow events based on the Sino-Japanese war, only imperial images chosen to unconsciously instill the war in the minds of the Japanese people and, thus, had an impact on the enhancement of national consciousness through constant pl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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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sikie, Sugoroku, slideshow, game, education, the Sin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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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현황

람즈도르프 백작의 상주 보고

 

  • 구분보고서
  • 저필자람즈도르프
  • 수신자러시아 황제
  • 발송일1902년 1월 30일
  • 문서번호АВПРИ,ф.143,оп.491,д.30,лл.32-33
  • 원소장처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외교
  • 세부분류동맹·조약·협정
  • 주제어영일동맹, 러일협약, 한만문제
  • 색인어영일동맹, 페테르부르크, 구리노, 람즈도르프, 황제, 중국 및 한국의 안전과 독립, 이토, 영일동맹, 일본 공사관, 도쿄 내각, 영국, 랜즈다운, 러시아 대표,
  • 형태사항3 타이핑 러시아어 

전반적으로 귀관의 견해에 동의한다. 우리와 일본 간의 회담 과정이 중단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만 새로운 영일조약의 45번째 단락이 회담에 장애가 되지 않아야 한다. [주001]

페테르부르크
1902년 1월 ?일

도쿄로부터 접수한 지시를 이행하기 위하여 페테르부르크주재 일본 공사는 영국과 일본 간에 성립된 조약 원문을 저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이에 황제 폐하의 그 내용을 여기 어람에 바치옵니다. 본 협약은 랜스다운(Lansdowne) 후작과 구리노 [주002]

씨의 비밀 해독 전문에서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 전반을 보면 일본 의회는 자신이 처한 절박한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상투적인 정치적 계략이 드러나 있다고 감히 생각하옵니다. 즉 해외 시장에서 차관을 도입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도쿄 정부는 대외정책 분야에서 어떤 식의 적극적 정책에 의존할 것인지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위 협약을 공표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사회여론이 러시아가 만주에서 성공하지 못하도록 대러 개전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협약 체결을 공표하는 방법으로 일본의 사회여론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을 수도 있습니다.
도쿄 내각이 일본 공사관을 통해 구두 통첩의 방식으로 우호적이고 완전히 공개된 형태로 조약의 내용을 통보해 온 것에 관해 말씀드리면,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황제의 정부는 영일동맹의 내용을 이의 없이 전적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과 한국의 안전 및 독립과 관련된 본 협약의 본질적인 조례들이 러시아가 상기 두 국가의 관계에서 근본 정책으로 애초부터 선언했던 바로 그 원칙들이기 때문입니다. 극동에서 공동의 평화와 현상유지의 보호는 언제나 러시아의 특별한 고려 대상이었습니다. 본 조약에 의해 영국은 향후 5년 동안 한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할뿐만 아니라 보호해야 한다는 점에서, 현 시점에서의 본 조약은 더할 나위 없이 황제 정부의 희망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자하신 황제 폐하께서 위에 기술된 내용을 승인해 주신다면, 해외주재 러시아 대표들에게 본안을 토대로 하여 위와 같은 의미에서 회람전문을 발송하겠습니다.
이와 동시에 수도 언론의 수석기관지들이 자신의 입장에 입각하여 영국과 일본 간에 성립된 협약을 왜곡하여 설명을 하지 않도록, 매체 검열 및 조사 수석본부(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по делам печати)를 통해서 상응하는 지시를 통보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에 감히 첨언하오면, 일본 측의 통보 내용을 저에게 전달해 준 구리노 씨는 자기 본인의 견해로는 본 협약이 썩 합목적적이지 않아 보이며, 바로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본 협약의 체결에 극도로 경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구리로 씨는 도쿄 내각이 어떤 오해의 결과로써 이토 후작의 견해에 반하여 본 협약에 조인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리노 씨는 일본의 덕망 있는 고관이 S. 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할 당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직접적인 협약 체결 [주003]

과 관련되어 있었던 협상을 중단하지 말자고 힘주어 요청했습니다.
저는 일본 공사에게 그의 청원을 황제 폐하의 고람에 알리겠으며, 폐하의 지시를 청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람즈도르프 백작

S. 페테르부르크
1902년 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