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약속도 없는 그런 날에

   “저는 약속이 취소되면 마음속으로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가끔은 그게 나라는 인간의 본질인 것 같다. p.15

   친구도 좋고 피자도 좋고 노래방도 좋은데 어째서 친구와 피자를 먹고 노래방에 가기로 한 약속이 깨지면 미안할 정도로 기쁜 걸까? 원하는 만큼 충분히 혼자 있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톨이가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모순이 궁금했다. p.16

날이 궂은 것도 아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싫은 것도 아닌데 약속이 취소되면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는 대목을 읽으며 얼마 전 읽은 캐롤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떠올렸다.

   저녁 약속이 일주일 뒤로 다가온다. 마음 한구석에선 가고 싶으면서도, 나는 빠져나갈 계획을 짠다. p.15 

<명랑한 은둔자(캐롤라인 냅)> 중에서

외롭지만 혼자 있고 싶고, 혼자가 좋다 하면서도 사람들의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하지만 왠지 알것만 같은 그 느낌. 캐롤라인 냅의 글에서 나의 모습을 엿보았던 순간이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그리고 문장을 읽는 순간 다시 한번 떠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 하현 역시 명랑한 은둔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듯 하다(어쩌면 내가 가장 늦게 합류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행복하게 혼자이고 은둔하는데 명랑한, 외톨이가 아닌 채로 혼자일 수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서로 닮았다 한들 모임을 만들기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

   이 말을 다시 들어보라. 산뜻하고 멋지게 들리지 않는가? p.41

   행복하게 혼자라고? 은둔하는데 명랑하다고? 그런 모순이 어딨어! 그건 불가능해!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p.41

<명랑한 은둔자(캐롤라인 냅)> 중에서

   외톨이가 아닌 채로 혼자일 수 있는 사람.

   약속이 취소되면 나는 함께라는 가능성을 가진 채로 기쁘게 혼자가 된다..(중략)..친구도 피자도 노래방도 좋지만 그게 조금 더 좋을 때가 있다. 그 안전한 고립감이 너무 달콤해서 들키지 않게 조용히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창밖은 푸르고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어느 맑은 날에. pp.18-19

하현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어딘가 눈에 익는다 생각했는데, 몇 해 전 달의 조각으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글을 읽으며, ‘조금은 과한 감성과 건조함이라는 상반된 느낌을 준다 적어두었었는데, 다시 만난 그녀는 좀 더 담백하고 편하게 말을 건네온다.

   이 책은 내게 조금 과한 듯한 감성과 건조함이라는 다소 상반된 느낌으로 남아있다. 한껏 넘칠 듯한 감정에 오글거리려는 두 손을 꼭 쥐어야 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 냉정한 시선으로 돌아와 유리창 너머로 세상을 보듯 이야기를 건넨다.

달의 조각을 읽고 남긴 글http://blog.yes24.com/document/11270440 )

그간 그녀의 글이 바뀐 것인지 내가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둘 다 변한 것일 수도) 이왕이면 둘 다 조금은 좋은 쪽으로 단단해져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건 앞서 이야기한 것 처럼 자꾸만 그녀의 글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거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고요해질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p.33

   이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보다 스스로의 유일무이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 더 두렵다. 내 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든, 그들이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든 내가 되어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어떤 아픔과 슬픔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어떤 문제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어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p.79

   그래서인지 친구를 사귀는 일에 서툴렀다. 필사적인 노력 끝에 어찌어찌 무리에 섞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지내다 보면 묘하게 겉도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묘하게 겉돈다는 건 무엇인가. 공적인 친분을 사적인 친분으로 확장하는 능력 혹은 의지의 부족.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에서 내가 생각한 겉돌다의 정의는 그랬다. p.136

비가 많이 내렸던 여름밤, 낯선 곳에서 만난 이 책은 친구와의 대화같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오랜만에 만난, 조금은 변한 모습의 친구와 그간의 일을 가볍게 수다 떨 듯 나눈 기분이었다.

*덧붙이는 글

그렇게 동질감을 느끼던 그녀가 나를 배신(!)한 대목이 있었으니, 바로 믹스커피를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는 문장이었다. 아니, ? (커피는 설탕맛으로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항변ㅎㅎ)

   나는 이제 믹스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너무 달고 느끼해서 먹고 나면 입안이 텁텁해지는 느낌이 싫다. 그래도 오늘처럼 어쩌다 한 번씩 마시게 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의 첫 커피가 떠오른다. p.200

어느 약속도 없는 그런 날에

   

*기억에 남는 문장

제 삶은 밑반찬처럼 평범합니다.

같은 곳에 살아도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에 따라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세계를 본다. 집을 찾기 시작하면 집만 보이고, 나무를 찾기 시작하면 나무만 보이는 것처럼. 집을 찾는 사람이 나무를 찾는 사람을 만날 때 세계는 조금 낯설어지고, 꼭 그만큼 넓어진다. p.42

그날 그는 내 앞에서 맘충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두 번 사용했다. 그게 몹시 거슬렸지만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을 때처럼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서로에게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는 사이는 이토록 깔끔했다. p.48

10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20대에는 냉정한 현실을 깨달으며 끊임없이 좌절하고 나를 미워했다. 그렇다면 30대는 평범한 나로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시간이지 않을까. p.90

어릴 때는 마냥 무섭기만 했던 어른이 어느 순간 안쓰럽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면 사는 게 덕컥 두려워진다. 나는 아직도 내가 덜 자란 것 같은데 삼촌도 가끔 그런 기분이 들까? p.144

몸에도 마음에도 부스럼 나지 않기를, 좋은 손님만 만나기를, 우리의 밥벌이가 우리를 해치지 않기를. 언니들 틈에 섞여 열심히 땅콩을 까먹는 동안에도 나는 예의 그 희미한 슬픔을 느꼈다. 뒤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앞에서 보니 그건 사랑이었다. 사랑인 줄 모르고 사랑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 바짓단에 붙은 땅콩 껍질처럼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발견하게 되는 마음이. pp.152-153

걱정은 꼭 솜사탕 같았다. 후 불면 날아갈 만큼 가벼운 것도 계속 손에 쥐고 있으면 끈적하게 녹아 여기저기 들러붙었다. p.161

나는 적당히의 감각이 떨어지는 편이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알맞은 상태. 그 중간 지점에 도달하는 일이 자주 어렵게 느껴진다. p.175

만약 다음 생에 고양이로 다시 태어난다면? 어느 날 갑자기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쌍둥이 언니를 만나게 된다면? 돈을 받고 수명을 팔 수 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며 사서 고민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지만 재미있다. p.188

스스로의 욕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내게 없던 새로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p.226

내가 되고 싶은 건 세상을 구하는 위인이 아니라 나를 구하는 보통의 인간일 뿐이니까. p.226

소리에 예민한 나는 녹음에 금방 재미를 붙였다. 막상 해보니 촬영만큼이나 신경 쓸 부분이 많은 작업이었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재미있었다. 헤드폰을 쓰고 녹음 버튼을 누르면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이상하게 좋았다. 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