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지 않는 교사 왜 위험

여러 학생자치활동을 살펴보면, 학생자치회 임원들은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자신들의 노력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신들의 노력과 능력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교사와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학교 내에서 의견이 관철될 만한 목소리를 가지고, 학생자치회를 지원해주는 역할을 왜 교사가 맡아야 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20세기의 교사집단은 학생들에게 명령과 통제를 내리는 권위적 집단에 더 가까웠기 떄문에 학생자치활동은 당연히 발전하기 어려웠다. 관제문화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민주성과 자율성은 온데간데 없고, 성적 순으로 교사가 시켜서 반장을 하는 시기가 있었다. 군사정권 시절을 거쳐오면서 그러한 경향성은 더 짙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학생자치에 관한 의식들이 싹트기 시작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학생 인권 의식까지도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학생자치가 발전할 수 있는 의식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자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공직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책임이다. 왜냐하면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사고를 미리 걱정하는 이유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는 문제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책임의 소재를 가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라고 여겨지는 공무원 사회에서 혁신과 변화, 발전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한계가 있다. 학생자치회는 학생들이 이끌어나가는 모임이지만, 학교라는 조직의 구조상 교사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학생자치회가 변화와 쇄신의 의지를 보인다해도 일면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학생자치회가 어떠한 활동을 하고자 할 때, "뜨거운 물"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혹은 여러 부서에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적이 많을 것이다. 갖가지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서는 교사가 "승인"을 해주지 않는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물론 그들의 사유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의 안전사고를 책임지고 또 조심해야 할 역할도 교사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갖가지 사유를 가지고서 학생자치회의 활동을 계속 불허한다면, 학생자치회도 교사도 전혀 발전할 수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 조심해서 도전하는 것만이 새로운 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학생자치회와 교사는 타협을 봐야 한다. 학생자치회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면서, 교사는 안전의식과 학교폭력 등 학교 내의 여러 난관을 뚫어가는데에 집중하면서 서로에게 한 발짝씩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단순하게 정당한 사유 없는 "불허"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여러 부서를 거쳐야 한다는 이유나 복잡하다는 이유로, 학생이 학교운영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타당하지 않은 이유를 바탕에 둔 불허는 본질적으로 옳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는 학생자치회가 여러 교사들에게 타당성을 알려 도움을 청하는 방법과 법적 근거나 행정적 지침 등 공무원 사회에서 통용되는 근거를 바탕으로 주장한다면 담당교사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위의 현실은 '교사 개인들의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다. 공무원 사회의 제도적인 특징에서 기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하나의 행사를 주최하고 주관하기 위해서 여러 결재를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난관을 뚫어야 한다. 교사 본연의 업무인 수업 외의 여러 가지 많은 업무의 피로도가 이미 높아져 있는 교사들은 이러한 혁신적이고 쇄신적인 변화를 꾀 하는 것을 기피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교사와 공무원 집단의 특성이라 하더라도, 교사 개인이 노력하지 않는 한 변화와 쇄신의 학생자치회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리뷰

교사의 내면을 이해해 주는 문화가 생겨나길 

이혁규 씀, 《수업 비평가의 시선》, 교육공동체 벗, 2018

김태현

경기 안양 백영고 교사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이며, 좋은교사 수업코칭연구소 부소장이기도 하다.
쓴 책으로는 <교사, 수업에서 나를 만나다>, <교사, 삶에서 나를 만나다>가 있다.

현실의 무게를 말하지 않는 이야기는 참 공허하다. 간혹 현장의 고충을 잘 모르고 “수업을 이렇게 해야 한다” 당위적으로 외치는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답답하다. 역량 중심 수업, 과정 중심 평가, 배움 중심 수업, 프로젝트 수업, 하브루타 등 참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이지만 교사의 아픔을 이해하지 않고, 이런 것들이 한국의 교육을 해결해 주는 구원책인 것처럼 열변을 토하고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며 교사들을 은근히 압박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한마디 하고 싶다. 그렇게 좋은 것이면 “당신이 직접 한번 시험을 보이라!”라고 말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중학교 학생들과 입시 경쟁에 찌들어 학교에서 그저 엎드려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교사들은 수업을 안 하시는 분들이 수업에 대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야기할 때 불편함을 참 많이 느낀다.


수업의 변화는 지식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분명 좋은 수업의 요건에 나오는 대로, 수업 내용을 삶의 맥락에서 재구성하고, 학생들과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부르지만 수업은 여전히 시끄럽다. 학생들에게 다가서려고 노력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교사의 이런 시도들을 버거워한다. ‘왜 안 될까?’ 교사들의 질문은 늘 계속된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애써 보지만 왜 생각하는 대로 학생들은 움직여 주지 않고, 수업은 나날이 힘들어질까?


그래서 많은 교사들은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교사가 되었는데, 수업을 하면서 그런 마음이 점점 사라져 간다. 관료주의와 입시 경쟁의 학교 문화 속에서 교사들은 지쳐 가고 결국에는 무기력이 학습되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냉소주의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수업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교사의 교육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애쓰고 있는 교사의 마음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업의 외형을 바꾸는 기술과 방법이 아니라, 교사의 한 수업 한 수업을 따듯하게 바라봐 주는 위로의 시선이다. 이런 점에서 이혁규 교수의 새 책 《수업 비평가의 시선》은 교사들에게 큰 위로를 준다. 연구자들 중에서 교사들의 수업을 어떤 틀로 가두지 않고, 교사의 수업 행위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바라봐 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교사들은 힘을 얻는다.

교사들은 하루에도 많은 수업을 한다. 그런데 이상하리 만큼 그 수업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름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배움을 주려고 디자인을 한 수업인데도, 하루가 지나면 그 수업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어떤 상황이 있었고,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혁규 교수는 비평가의 시선으로 교사의 작은 행위까지도 소중하게 봐 준다. 교사의 교육적 선택이 학생들의 배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수업 내용에서 교사의 신념과 철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세심하게 바라봐 준다. 이런 그의 시선은 교사를 인상파 화가처럼 묘사한다. 기계적으로 교육과정을 이해하는 교육 기관의 부속물이 아니라, 수업 내용으로 학생들을 의미 있게 성장시키려는 교육 예술가로 교사들을 의미 있는 존재로 바라봐 준다. 그래서 그의 책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분명 남의 수업을 보는데도, 내 수업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혁규 교수가 묘사하는 수업 장면을 보면서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고민하게 한다.

다양한 수업의 의미를 찾는 비평


이 책에는 요즘 소위 ‘핫하다’고 하는 교육 콘텐츠들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담겨 있다. 이것은 현장의 교사들에게 굉장히 의미 있어 보인다. 배움의 공동체, 하브루타, 프로젝트 수업, 학원 강사 설민석의 강의까지 이미 교사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교육 콘텐츠에 대해 이혁규 교수는 본인 특유의 시선으로 각 콘텐츠들을 비판적으로 비평하고 있다. 사실 교사의 수업은 한 가지 빛깔로 확정 지을 수 없다. 지난 시절 우리가 경험해 왔던 수많은 교육운동들은 나름 의미가 있었던 반면, 자꾸만 교사들의 다양한 빛깔의 수업을 하나로 획일화시키는 단점도 있었다. 배움의 공동체식 수업이 아무리 의미가 있어도 모든 상황에서 통할 수 있는 진리는 아니다. 하브루타가 학생들의 사고력을 신장시키는 수업 모형일지라도 모든 교사가 이것을 사용할 수는 없다. 교사의 수업은 같은 내용을 다룰지라도 교실의 분위기, 학생들의 정서적인 느낌, 교사의 수업 디자인 등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반되기 때문에 교사들마다 다른 빛깔의 수업이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가지 색깔로 수업을 통일시키려는 우를 범한다. 디베이트 수업, 질문이 있는 수업, 비주얼 씽킹, 거꾸로교실 등 아직도 교육부, 교육청에서는 수업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강의식으로 수업을 하게 되면, 소위 ‘못하는 수업’, ‘준비가 덜 된 수업’이라고 지적받는 분위기다.


그런데 이혁규 교수의 수업 비평은 이런 획일화된 수업에 경고를 준다. 모든 수업이 의미가 있고, 그 수업은 다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강의식 수업에서도 교사가 어떻게 설명을 하고, 어떤 예로 학생들과 교감하느냐에 따라서 그 수업도 의미 있는 수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배움의 공동체, 하브루타, 프로젝트 수업도 각기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 그의 이런 수업 비평이 소중하다. 교사가 더 깊이 있는 시선으로 자신의 수업을 들여다보게 하고, 자신만의 수업, 나만의 수업을 찾게 해 주는 길잡이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끝으로 《수업 비평가의 시선》에는 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비평가의 시선과 수업 실천가인 교사의 시선이 충돌할 때이다. 이혁규 교수가 아무리 탁월한 수업 비평가일지라도, 수업을 직접 한 교사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책에서는 비평가의 과 수업자의 을 동시에 배치하면서, 수업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혁규 교수의 비평에 대해 동의하는 교사도 있지만, 그의 비평에 동의하지 않는 교사들도 제법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더 값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비평과 실천이 공존하면서 서로 충돌하고 이해하려는 모습과 노력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교육 현장이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디 이 책을 많은 연구자와 교사들이 읽어서 수업을 ‘수업’으로 이해하는 문화가 생겨나길 기대한다. 그리고 수업의 외형과 장식이 아닌 본질을 말하고, 수업을 하는 교사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는 문화가 생겨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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