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223회 리빙라이브러리 ][건강관리]추워지는 날씨와 집콕생활에서 주의해야 할 '저혈압' 건강관리

Dec 30 2020 37 mins  

- 고혈압, 저혈압은 수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 증상은 가슴이 답답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혈액순환이 잘 안되고 손발이 차고 저리는 느낌 등 - 늘 어지러움을 달고 사는 저혈압의 문제는 쓰러짐 후에 오는 2차 피해가 무섭다는 것이다. - 주요 증상은 어지러움, 기운이 없고, 땀이 많이 나고, 축 처지는 일이 잦다. -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자살율이 높아진다. 무기력증에서 탈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 수분섭취가 중요하고, 차를 꾸준하게 자주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 - 저혈압 운동법은 요가, 많이 걷기, 짐볼 등을 활용한 운동이 좋고, 심장에 무리가 가는 운동은 안 좋다. - 음식 : 인삼, 쇠고기, 오리고기, 계란후라이, 시금치, 해산물(대하), 생강청(차), 흑마늘차, 흑마늘과 뽕나무를 넣은 삼계탕 등 해초류(메생이, 미역, 다시마 등), 구기자, - 저혈압에 좋은 차 : 엉겅퀴차, 구기자차, 생강차, 인삼차, 오미자차, 모과차, 유자차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35-37.42-49

형제 여러분, 35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37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42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3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4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5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4-15

그때에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The parable of the sower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난다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설명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며 비유의 뜻을 알려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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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를 묻는 이들에게,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시며,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길,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상태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파견하시면서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이사 6,10)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이 아니라, 완고한 백성이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고집스럽게 가리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셨다는 뜻의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다음에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도 (마르 4,12; 루카 8,10 참조), 당신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알려 주신다 해도 군중이 당장 알아듣고 실행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은 이 비유를 풀이해 주셨고, 그렇게 우리 신앙인들을 모두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 초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때로 우리는 그것을 전해 들었으면서도 마치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 체험들로 뜨겁게 달구어졌던 마음이 자꾸만 유혹과 죄(“길”), 조바심이나 시련(“바위”), 걱정과 탐욕(“가시덤불”)에 갇혀 식어 버리기도 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썩어 없어질 가치들이 자신 안에서 죽고 묻혀야만 영광과 생명을 피워 낼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일상 속 욕심과 집착, 불필요한 걱정과 불안에 굴복하지 않고,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하느님께 기도와 선행의 열매를 맺어 드리는 좋은 땅으로 살아갑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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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땅에 떨어진 것만으로는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또한 인내하여야 멋진 열매를 얻어 만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경청이 아니라 말씀의 체화입니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려 합니다. 근사한 지식의 열매를 삶의 풍요로움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 가려 하지요. ‘진즉에 공부를 좀 더 할 것을’ 하는 후회가 다양한 지식을 쌓는 열정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도 그러하였습니다. 힘든 시대일수록 지식인의 똑 부러진 단언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요.

사람들 사이에서 예언자로 이름을 날리셨던 예수님께서는 ‘씨앗의 비유’에서 말씀의 체화를 당부하십니다. 속 시원한 삶의 해답을 다른 이에게 얻는다고 네 삶이 달라질 것은 없다, 저 스스로 자신만의 고유한 열매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의 화려한 언변은 아무 쓸모가 없다며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십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그것이 길이든 바위든 가시덤불이든 아니면 좋은 땅이든 삶의 우연과 결을 같이합니다. 누구든 이 집안, 이 사회, 이 나라에 태어나고파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곳이 어디든지 일단 그곳에 떨어진 이상, 그곳에서 나만의 열매를 맺고 고유한 삶의 가치를 건져 내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타인의 지식을 배워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우리 안에서 소화되어 체화될 때, 우리는 구원을 얻어 누립니다.

구원은 본디 제 모습으로의 회복입니다. 다른 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과 쾌락과 유혹에 흔들려 자신을 잃어버린 이에게는 말씀도 구원도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이 있다고 한들, 열매 맺는 내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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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앗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보듯이 씨가 어디에 뿌려졌는지에 따라, 그 결실이 엄청나게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서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먼저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신앙의 여정을 잘 걸어가다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땅이 되려면 형식적인 종교 생활에서 탈피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기도보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뜻을 찾는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우선시하여야 합니다. 개인적인 신앙, 나만을 위하는 신앙 형태에서 벗어나 이웃과 공동선을 생각하며 사회적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아울러 이에 못지않게 영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도 추구해야만 합니다.

더불어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과 함께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는 굳은 신앙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참된 하느님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느님을 바로 알아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기복 신앙 위에 형성된 하느님의 모습을 정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더불어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을 나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께서 관리하도록 맡기신 자연과도 화해해야만 합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우리 각자는 점차 좋은 땅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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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좋은 땅’이 되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말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에 있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뿌려질 때, 우리 마음이 말씀의 씨앗이 싹트지 못하는 굳은 땅이 되거나 싹이 돋아나도 곧 짓밟혀 버리는 길거리 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위나 가시덤불과 같이 싹이 자랄 수 없고 장애물이 많은 땅이 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뿌리신 씨앗은 좋은 것이어서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선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도록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너그러우신 분이어서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열매 맺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몫은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잘 열매 맺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말씀의 밭이지만, 그 밭에는 미움과 세상 걱정, 타인의 공격으로 말미암은 상처들이 자라게 됩니다. 세상의 쾌락과 욕심으로 우리는 열매 맺지 못하는 밭으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땅에서 왔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입니다. 모든 곡식이 땅에서 자라듯 우리 안에 심어진 주님의 말씀은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닿아서 만들어진 인간의 육신과 영혼은 천상의 밭으로 자랍니다. 말씀을 마음 안에 품고 인내로 여러 난관을 극복하는 사람은 좋은 땅이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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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사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뿌린 씨가 좋은 땅이 아니면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몸소 비유에 대한 풀이까지도 해 주십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든 지금의 우리이든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혹시 나는 이 당연한 것 같은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며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봅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씨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씨앗’과 그 ‘씨앗이 뿌려진 땅’, 그리고 ‘열매’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세 가지 유형의 삶(길, 바위, 가시덤불)과 복음을 받아들인 삶의 모습(좋은 땅)이 대조됩니다. 그 기준은 결실인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땅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제 이 비유가 말씀을 듣는 이의 ‘책임’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니 이 비유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이 비유를 알아들었다는 것은 더 이상 표면적 의미의 이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에 필요한 결단과 실천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아직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적 인식’이 어려운 까닭은 ‘존재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부활의 참뜻을 알려면 뿌린 씨가 죽지 않고는 살아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알아듣는 것’은 옛 생활의 ‘죽음’이라는, 존재의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어렵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 꾸준히 머무는 이는 행복한 결실을 거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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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씨 뿌리는 사람은 바로 주님이시며, 씨는 당신의 말씀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밭은 우리입니다. 제자들이 이 비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자, 주님께서는 따로 설명을 해 주십니다.씨앗을 받아들이는 밭은 세 부류입니다. 첫째 부류는 길바닥에 떨어져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짓밟히기도 하고,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합니다. 시련이 닥치면 쉽게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부류는 바위나 가시덤불에 떨어져 물기가 없어 메말라 버리거나, 자라면서 가시덤불에 가로막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합니다. 세상의 재물과 쾌락이나 걱정 등에 얽혀 삶 자체가 복잡해져서 주님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셋째 부류는 좋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물론 좋은 땅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은, 세상의 어떠한 시련이나 유혹이 닥쳐도 거뜬히 물리치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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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편안해지면 기도 생활이 덤덤해집니다. 삶의 아쉬움이 줄어들면 ‘성당 가는 것’도 귀찮아지기 시작합니다. 신앙의 자세가 나태해지는 것이지요. 사실은 그러한 때 ‘감사의 신앙’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한 탓입니다. 물살이 빠른 강을 건널 때는 나룻배에 짐을 많이 싣습니다. 때로는 ‘큰 돌’을 싣기도 합니다. 물결에 휩쓸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의 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삶의 짐’을 무겁게 하거나, ‘시련의 바위’를 싣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통이 있는 것이지요. 불평 없이 받아들일 때, 말씀은 뿌리를 내립니다. 사람들은 ‘삶의 짐’을 가볍게 하려고 재미 있는 것만 찾습니다. ‘득 되는 것’만 손대려 합니다. 모르는 새 겉모습만 좇고 있는 것이지요. 길가에 떨어지고 바위에 떨어진 씨앗과 진배없습니다. 알찬 열매는 뿌리가 튼튼해야 열립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열매를 결정짓습니다. 자연의 법칙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 요소가 있습니다. 인내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고통을 그들은 참아 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시련을 그들은 극복해 냈습니다. 말씀이 뿌리내리도록 ‘좋은 땅’을 만든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은 여건이 형성되면 언제든 피어납니다. 노력 없는 곳에는 은총도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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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결론은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좋은 땅이겠습니까? 유혹이 없고 삭막함이 없고 가시덤불이 없는 땅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들도 유혹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장애를 만났기에 더욱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좋은 땅은 만들어진 땅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땅과 씨앗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자연의 땅도 가꾸지 않으면 버려진 땅이 됩니다. 정성과 애정을 기울여야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평범하게 보이는 이 사실이 좋은 땅의 비결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흐르는 물과도 같습니다. 뛰어넘고 도약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지나간 것에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 어떤 형태로든 다시 시작해야 새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땅으로 가는 삶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저널리스트 찰스 두히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습관은 우리 뇌에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우리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의식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에 크게 공감이 갑니다. 갑곶성지에 부임해서 사제관에 들어갔을 때 커다란 텔레비전이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워낙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또 이제까지 텔레비전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것 하나?’라는 생각으로 전원을 켜고 채널을 돌리다 보니 재미있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온종일 텔레비전을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를 위한 것은 하나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저를 위해 해 오던 기도, 묵상, 책 읽기 등이 텔레비전 시청보다 뒷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뒤에, 텔레비전을 치워 버렸습니다. 아예 없어져야 제가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담배를 끊은 후에 오는 금단현상처럼 허전함이 가득했지만, 어느 순간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습관이 생기면서 이제 더는 방송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고 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대신 저를 위한 다른 생산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습관을 지녀야 할까요? 혹시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습관에 빠진 것은 아닙니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씨 뿌리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지요. 그리고 씨는 주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씨가 뿌려진 곳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길바닥, 바위, 가시덤불과 같은 상태가 된다면 좋은 씨인 주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습관을 간직해야 합니다. 나쁜 습관을 간직하게 되면 결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이 주님과의 대화 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이 재화를 이웃 사랑을 위해 쓸 수 있을까요? 게으름이라는 습관을 지니고 성실하게 주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을까요?

좋은 땅은 우리가 간직하는 좋은 습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습관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단점보다 장점을 보세요.

SNS(Social Networking Servic)를 하다가, ‘1년 전 오늘의 추억’이라는 게시글이 올라온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1년 전에 이 SNS에 올렸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맞아. 작년에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면서 1년 전 오늘의 일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괴로웠던 일을 올리면, 매년 그 사진을 괴로워하면서 봐야 하잖아?’

원치 않은 기억이 나타나서 하루를 힘들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또 다른 피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가 편하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잊을 수 있는 것도 잊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어떤 것이든 장단점이 있지 않을까요? 단점이 있어도 장점이 있으므로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점보다 장점을 보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좋은 땅이 되는 길; 하느님은 정의로우시다는 믿음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몇 년 전 돌아가신 한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1등을 놓쳐본 적이 없고 서울대에 들어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못 하는 것이 없었던 분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을 접고 목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문제는 이분이 칼뱅의 ‘예정설’에 지나치게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도 예정설을 바탕으로 해석합니다.

예정설은 좋은 땅을 만들어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는 땅이 아니라 농부이고 그 농부가 뿌리는 씨라는 것입니다. 예정설은 주님께서 나쁜 땅도 구원하고 싶으면 구원하고 좋은 땅도 구원하기 싫으면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길이나 돌밭에 씨가 뿌려져도 그 씨가 길을 부드럽게 만들고 돌을 깨서 좋은 땅이 되게도 하며, 그 씨가 뿌려지지 않은 땅은 땅이 좋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씨가 땅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좀 억지가 심합니다.

이분은 결국 좋은 땅이었는지, 나쁜 땅이었는지는 몰라도 우울증을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인을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어쩌면 참 좋은 땅이었음에도 잘못된 믿음으로 점점 나쁜 땅에 되어버린 사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땅을 좋게 만들려는 노력보다는 씨의 힘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은 땅이 되어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노력해서 좋은 땅이 되면 그만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믿음입니다. 하늘은 땀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공평한 분이시라 노력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농부는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베트맨으로 유명한 ‘크리스찬 베일’은 궁핍한 가정형편 때문에 연기를 일찍 시작한 배우입니다. 어렸을 때는 명성을 얻었지만, 청소년기는 그저 연기가 평범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의 연기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 이유는 그의 연기에 대한 자세의 변화 때문입니다. 극사실주의 연기자로 변신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를 메소드(인물 몰입형) 연기라고 하는데, 극 중 인물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는 55kg, 81kg, 100kg의 몸무게를 영화 때마다 맞춰 만들어냈습니다. 싸이코를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매일 싸이코처럼 살았고, 배트맨을 연기하면서는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목을 긁어댔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하루 두 시간씩만 자며 살았습니다.

물론 좀 지나친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혹사하는 데는 하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노력한 만큼 보답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참치 한 캔과 사과 하나만 먹으며 체중을 55kg으로 감량했을 때, 그는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고 합니다.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느낀 것입니다. 이런 감정이입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연기 때문에 오는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땅을 만들면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씨가 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열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씨는 어디에나 뿌려집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느님이 공평하다는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합니다. 흙수저, 금수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은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뇌성마비로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가 ‘나’라는 유명한 시를 쓴 이유는 주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해주시니 행복하다는 내용입니다. 그때 “공평하신 하느님”이라는 말은 좀처럼 쓸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저항하다 그 글을 썼을 때 한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가 유명해지자 미국에 사는 한 부부가 그녀를 고쳐주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송명희씨는 “저는 주님께서 주신 몸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주신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해설을 제자들에게만 해 주십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 예언서를 반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신다는 불공평한 말로 들리시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각자의 자유였습니다. 하느님은 그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십니다. 그래서 가리옷 유다 같은 사람도 사도로 뽑혔을 것입니다. 당신께 더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력에 합당하게 보답해 주시는 이것은 예정설과 같은 차별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노력에 합당한 보답을 주신다는 주님 정의로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여 맺은 열매를 들고 주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로또처럼 요행을 바라지 맙시다. 열매는 주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노력이 결정합니다. 주님은 노력한 만큼 갚아 주시는 정의롭고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이 믿음이 우리가 점점 더 좋은 땅이 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땀은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은 ‘비밀의 숲’을 보고 있습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검사와 경위의 이야기입니다. 극중에 검사장으로 승진한 검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법불아귀(法不阿貴), 승불요곡(繩不撓曲)” 중국의 사상가 한비자의 말입니다. ‘법은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모양에 따라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장인이 건축할 때 반드시 자를 기준삼고, 먹줄에 굽음이 없는 것 같이 법은 귀한 사람만 봐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강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비자가 2,300년 전에 한 말입니다. 검사장이 한비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아직도 법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고, 약한 자에게는 냉정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런 상황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도 합니다. 이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그 권력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인들이 늘 마음에 두는 말이 있습니다. “직필인주(直筆人誅), 곡필천주(曲筆天誅).”입니다. 중국의 고서 춘추(春秋)의 춘추직필(春秋直筆)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직필(直筆)은 사람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곡필(曲筆)은 하늘로부터 천벌을 받는다.”라는 말입니다. 한 언론인은 벽에 이런 글을 걸어 놓았습니다. “기자정신이 투철한 참 언론인은 늘 부정한 권력에 맞서 싸우며 정의(正義)의 진실을 혼으로 써서 세계역사에 남기는 기록자로서 국민의 알권리와 시대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론은 “제2의 신(神)”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언론이 가지고 있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사회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역할을 충실하게 하면 사회는 균형과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언론이 어두운 곳을 비추면 밝게 빛날 것입니다. 언론이 부패한 곳을 비추면 사회는 정화될 것입니다. 언론이 바른 길을 가면 진실을 깨우치는 목탁이 될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언론이 직필인주와 곡필인주의 정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 국민들은 언론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뿌리는 분은 하느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밭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세상의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지만 유혹이 다가오면 쉽게 하느님의 말씀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이 열매를 맺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변화되고, 이웃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서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지만 길가에 뿌려진 씨앗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유혹과 시련이 다가오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말씀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열매 맺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우리가 맺을 열매는 세상에서의 재물, 명예, 권력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맺을 열매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씨앗 품은 땅>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씨앗 품은 땅은

결코 씨앗을

재촉하지 않아

이제나 저제나

싹을 띄우기를

묵묵히 기다릴 뿐이지

그날을 희망하며

헛것에 한눈팔지 않고

정성껏 품으면서 말이야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이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 말씀을 풀이해 주시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제 어릴 적 기억에 저의 집 가훈처럼 거실에 붙어 있었던 한자어가 생각이 납니다. 그것은 인지위덕(忍之爲德)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곧 참고 인내함으로서 덕을 이룬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고 해도 그 음식이 맛있게 익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강철이 단련되기까지 달구어지고 두드려지는 것이 반복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처럼 씨앗이 열매를 맺기까지는 싹이 트고 자라나고 성장하고 꽃이 피어 떨어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만약 숙성과 단련, 그리고 성장의 시간을 무시한다면 결국 그 충만한 결실을 거둘 수 없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코로나19로 인해서 어렵게 살아가는 지금의 시간 역시도 우리가 구원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숙성과 단련과 성장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때로는 위기가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시간이 고통스럽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더욱 성장하고 참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혼인성사는 부부의 인내로써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는 성사이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혼인성사, 신자 대 신자의 성스러운 혼인입니다. 축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부부가 있습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고 사랑으로 생명의 씨를 심었습니다. 잉태되고 태어나고 한 가정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는 혼인성사의 시작이며 부부는 성사의 완성을 향해 살아야 합니다.

부부는 시작이 좋은 땅의 여건이라도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좋은 땅의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부족하면 서로가 보완하고 완전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녀가 태어나면 좋은 땅의 조건을 지니고 유지한다는 것은 조금은 많이 복잡해집니다. 장애되는 요소를 만날 때라도 이를 극복하고 살아야 완성이 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8,15).

씨를 뿌리는 농부는 수확까지 생각합니다. 좋은 수확이 없으면 씨를 뿌리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부부의 혼인성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가정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끝까지 약속인 서약에 충실하며 열매를 맺어야 완성 되는 것이 혼인성사입니다.

가정은 생명이 자라고 열매 맺는 축복의 땅입니다. 부부는 생명의 땅, 가정이 좋은 땅이 되도록 축복의 땅을 조성해야 합니다. 인내로써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고난과 죽음을 동반하며 부활을 이루어야 가정은 성공입니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부부가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생명이 때로는 길바닥. 바위 위, 가시덤불 같은 위기상황에 놓일 때가 왜 없겠습니까?

성사부부는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부부의 힘을 지녀야 합니다. 이 부부의 힘을 ‘부부의 영성’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부부의 영성을 자니고 살도록 부부에게 거듭 들려줄 말씀이 있습니다. 부부가 이루는 가정이 좋은 땅으로 행복하게 열매 맺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8,15).

①말씀에 대한 환영 ②말씀에 대한 순응 ③말씀에 대한 충실 ④말씀에 대한 실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당연히 믿어야 할 불변의 진리이자 신조인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신비 앞에 어느 정도 확신을 지니고 있는가요?

언젠가 그간 우리가 깃들었던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날,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힘입어 우리의 영혼은 불사불멸하며,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진리에 대해서는 또 몇 퍼센트나 신뢰하고 계시는가요?

언제나 진리 앞에서 긴가민가, 알쏭달쏭한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확신에 찬 어조로 외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토 15장 42~44절)

곰곰히 돌아보니 이 세상 저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은 외면하고, 이 세상이 전부인양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 세상 좋은 것들에 푹 파묻혀 살아가다보니, 내게 주어진 이 세상의 시간들이 조금씩 지나가는 것을 크게 슬퍼합니다.

이 세상에 목숨을 걸다보니 청춘이 가고 젊음도 가고, 하루 하루 육신이 조금씩 소멸되는 것을 그리도 아쉬워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사라지게 될 육체의 건강에만 몰두했지, 정작 중요한 영혼의 건강은 뒷전이었습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 우리의 이 소중한 육체를 경시한다거나 차원 낮은 대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대상입니다. 존중받고 사랑받고 길이 보존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들의 이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창조물 가운데 으뜸인 너무나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지나침입니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편중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과는 완전 결별하고, 오로지 본능적·세속적·향락적·하위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권고인 것입니다.

루가 복음 사가의 표현대로 우리 각자는 하느님에 의해 지상에 뿌려진 한알의 씨앗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씨앗을 뿌리고 가신 후 악마가 나타나 활약을 시작합니다.

악마는 더 이상 어마무시하게 흉흉하고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로 가장하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를 항구하게 주님 앞에 머물지 못하게 유혹합니다. 수시로 우리 눈앞에 나타나 알짱거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인 것입니다.

씨앗은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아무 탈없이 무럭무럭 성장합니다. ①말씀에 대한 환영 ②말씀에 대한 순응 ③말씀에 대한 충실 ④말씀에 대한 실천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주님의 적극적인 불굴의 열성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루카 8,8)

성경 안에는 예수님의 큰 목소리가 들리는 대목이 가끔 등장하는데, 오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기를 간절히 바라시기에 그렇게 외치실 겁니다. 이 외침에는 군중의 무관심하고 건조하고 냉랭한 마음의 벽을 뚫으시려는 절절한 바람이 묻어납니다. 

"길, 바위, 가시덤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씨가 자랄 수 없는 세 종류의 환경이 등장합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기는 하지만, 짓밟히거나 말라버리거나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서 씨앗이 새 생명을 틔우지 못하고 죽게 되는 상황들입니다. 

"악마, 시련의 때,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

따로 비유의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 맥없이 스러지게 되는 원인들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 요소들은 인생길에서 우리 힘으로 피해가거나, 없는 듯 무시해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까지 포함해 삶이니까요.

'씨뿌리는 사람'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또 씨앗이신 말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관상합니다. 그분은 땅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길바닥이건 바위건 가시덤불이건 개의치 않고 뿌려지십니다. 충분히 대접도 받고 이익이 될 곳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셔도 그러지 않으시지요.

그분은 짓밟히고 먹히고 말라버리고 숨막히는 고통에 삼켜지거나, 설령 죽음까지 당하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치지 않고 우리의 딱딱한 길바닥같은 마음, 물기도 온기도 없는 돌같이 굳은 마음, 세속적 욕망과 탐욕의 가시덤불이 무성한 복잡한 마음을 마다하지 않고 오시고 또 오십니다.

긴 세월 동안 말씀은 번번이 우리에게 거절당하고 외면 받고 문전박대를 당해오셨지요, 하지만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이 당신을 받아들여 품고 새 싹을 틔울 때까지, 열매를 맺을 때까지 다가오고 또 다가오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시랍니다!

제1독서에는 대비되는 개념이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썩어 없어질 것, 썩지 않는 것"

"비천한 것,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 강한 것"

"물질적인 몸, 영적인 몸"

"첫 인간 아담, 마지막 아담"

"생명체, 생명을 주는 영"

"물질적인 것, 영적인 것"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 하늘에서 오신 분"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본래적으로 타고난 육적인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이처럼 구체적 언어로 대비시켜 반복합니다. 전자에 나열된 내용들이 우리에게 퍽 익숙한 인간의 실존적 상태라면, 후자에 나열된 말씀들은 은총으로 얻는 새 희망의 실체들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

오늘 제1독서의 대목은 양 극단의 개념들이 이처럼 조화하고 통합될 가능성을 제시하며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육의 지배를 받는, 물질 세상에 속한 인간이지만,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지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 8,15)

땅의 토질이나 상태를 가리지 않고 당신 자신을 던지신 말씀께서 비로소 생명을 틔우실 곳을 만나십니다. 이 땅에서는 그간 겪으신 짓밟힘도 질식도 죽음도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분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시고 녹아들어 씨앗과 땅이 한몸이 됩니다.

육의 조건에 갇힌 우리와 영이신 말씀께서 함께 머물며 서로에게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곳이 곧 성경이 "좋은 땅"이라 일컫고 그분이 열렬히 갈망하는 우리의 존재입니다.

이는 흙으로 된 우리가 영이신 말씀을 품을 때 일어나는 신비입니다. 우리가 나약하고 불결한 육적 조건을 떼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조건 안에 하늘을 품고 함께 변모하는 것이지요. 하늘에 속한 분의 모습을 담아,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벗님! 내가 어느 땅인지, 무슨 땅이었는지 아픈 과거를 헤집으며  뉘우치느라 귀한 기도의 시간을 흘려버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이미 좋은 땅입니다. 우리가 지닌 인간적 한계와 죄스러움을 활짝 열어 말씀을 품고 머무르면 잠시 피폐해지고 퇴락했던 땅은 본래의 제 모습을 되찾을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치유하도록 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이야기하러 여기 모인 것이지요.

말씀이신 그분이 지치지 않으시니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분은 짓밟혀 죽더라도 우리에게 뿌려지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니, 그분께서 이토록 적극적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 다가오시는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벗님! 우리에게 오신 말씀을 겸손히 듣고 소중히 받아안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불확실성과 고통, 근심으로 복잡한 지상 생활에 지쳐가더라도, 하늘을 품을 수 있는 이 놀라운 신비에 감사드리며 마음껏 누립시다. 이 여정을 통해 부족한 우리가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말씀 안에서 지치지 말고 서로 격려하며 함께 나아갑시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하늘 냄새 언뜻언뜻 풍기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위로의 붕대를 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11-12: CCL 41,538-539)

성서는 주님이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신은 이와 반대로 “여러분은 이 성서 말씀에서 제외될 것이요.” 하고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견책의 고통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하느님 자녀들의 대열에서 제외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반응을 보일지 모릅니다. “그럼 하느님께서 예외 없이 모든 자녀들에게 매를 드신단 말입니까?” 하고.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을 예외 없이, 당신 외아드님까지 견책하십니다. 외아드님은 아버지의 본체에서 탄생하시고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된 말씀이시므로 견책을 당할 까닭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견책당함이 없이 남아 있지 않도록 인간 육신을 취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죄가 하나도 없으신 당신 외아드님까지 이렇게 견책하셨다면 죄 많은 양자들을 고통에서 면제시키시겠습니까? 사도는 우리가 양자 됨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외아드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또 그분의 유산이 되기 위해서 양자가 되었습니다. “내게 청하라. 나는 이방인들을 네 유산으로 주리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겪으신 수난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약한 자가 미래에 닥쳐올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그를 거짓된 희망으로 속이거나 두려움으로 산산이 부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그에게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여라.”고 말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을 때 그는 아마도 전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그때 그에게 다음의 성서 말씀도 상기시키십시오. “하느님에서는 신의가 있는 분이시므로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이렇게 어떤 것을 약속하고 또 동시에 다가올 고통을 예견해 주는 것은 약한 자에게 힘을 주는 것입니다. 누가 지나칠 정도로 두려워하고 겁에 질려 있다면, 그가 유혹에 면역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약속해 주십시오. 이 약속은 부서진 것을 다시 결합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환난이 닥쳐온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을 더욱 굳건히 무장하고 그 고통의 잔을 목말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반 신자들이 겪는 보통의 어려움을 하찮은 치료제로 여기고 순교자의 영광을 열렬히 찾습니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히 닥쳐오기 마련이고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자 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체험하지 않는 그 미래의 피치 못할 시련에 대해 듣고서, 그 시련들이 닥쳐올 때 마음이 부서져 주저앉아 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위로의 붕대를 주어 부서진 것을 싸매 주고 다음의 말을 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시오. 당신이 믿어 온 그분은 시련이 닥쳐올 때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오. 하느님께서는 신의가 있는 분이시므로 당신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소. 이 말은 내 말이 아니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원합니까?’ 하고 말한 바오로 사도의 말이오. 그러므로 당신이 이 말을 들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듣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기르시는 목자에게서 듣는 것이오. 시편 작가는 그 목자에게 이렇게 말했소. ‘주님은 우리에게 견딜 만큼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고 말한 것을, 여기 예언자는 ‘견딜 만큼의 눈물을 마시게 한다.’고 말하고 있소. 여하튼 당신은 당신을 꾸짖으시고 격려하시며, 겁을 주시고 위로하시며, 때리고 또 상처를 싸매 주시는 주님을 버리지 마시오.”

참된 수행자의 삶. -희망, 간절함, 항구함, 인내-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느 은퇴한 유명정치인과의 인터뷰중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생각납니다. 배우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민주당이 배출한 대통령 세분의 리더십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일단 공통점은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합니다.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들정도입니다. 김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보니까, 생각하고 사람만나고 일하는 양이 나보다 두 배는 됩니다. 그때 그분이 70대이고 제가 40대 중반일 때인데도 그래요. 세분 다 마찬가지입니다. 차이라고 하면, 김대통령은 진짜 인동초忍冬草입니다. 참고 참고 또 참아요. 하도 억압을 받아서 그런가 싶습니다. 노대통령은 격정적이고 직선적이죠. 문대통령은 또 굉장히 인내심이 강하고 균형을 잡으려 노력합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더 그러는 것 같아요. 싫은 소리를 거의 안해요.”-

특히 마음에 와닿는 말마디가 ‘인내’입니다. 요셉수도원에 부임 얼마후 원장과 나눴던 대화중 수도생활중 필요한 덕목이 ‘사랑’이라 제가 말했을 때 원장은 ‘인내’라 대답했던 기억이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늘 복음의 총결론과도 같은 마지막 절에서도 ‘인내’라는 말마디가 새삼 크게 와닿습니다. 오늘 새벽에야 비로소 발견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8,15)

참 수행자의 삶을 드러내는 좋은 구절입니다. 인내가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기다림의 인내, 믿음의 인내, 겸손의 인내, 사랑의 인내, 희망의 인내 등 모든 덕목을 총괄하는 말마디가 인내입니다. 인내로써 열매를 맺습니다. 인내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만큼 인내하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 분도회 수도승들의 정주서원의 특징도 항구한 인내의 믿음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을 ‘참 수행자의 삶-희망, 간절함, 항구함, 인내-’로 정했습니다.

참으로 희망이 있을 때,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간절할 수 있고, 항구할 수 있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기에 끝까지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부활의 궁극의 희망이 간절하고 한결같은 인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간절한 소망은 바오로 사도와 같은 부활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은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15,42-44).

죽어서의 부활이 아니라 희망과 인내의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게 시작된 이런 부활의 삶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된 그 사람, 아담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파스카 예수님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점차 그분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이미 실현되기 시작한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그리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의 세부분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앞서는 씨뿌리는 사람이 중심이라면 뒷부분은 씨가 뿌려지는 마음 땅이 중심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이 상징하는 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일희일비함이 없이 한결같이 씨뿌리는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길바닥, 돌땅, 가시덤불땅, 좋은 땅 어디든 상관없이 끝까지 인내하며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음은 하느님께 희망을 둔 간절함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결과의 성취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과정을 보십니다. 하여 실패인생 같지만 결국은 성공인생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루카8,8).

앞부분의 결론입니다. 그러니 씨뿌리는 삶에 한결같이 충실했다면 결코 상심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어디선가의 좋은 땅에서는 무럭무럭 노력의 씨앗들이 자라나 익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런 씨뿌리는 심정으로 매일 강론을 씁니다.

결국은 내 문제입니다. 문제도 나한테 있고 답도 나한테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한결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씨뿌리는 삶에 충실했던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씨앗들과 더불어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땅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앗이 좋아도 마음이 길바닥, 돌땅, 가시덤불 땅같이 나쁘면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 말씀의 씨앗들이 아니라 내 마음 땅입니다.

하여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만들기 위한 부단한 수행의 노력을 필요로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참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기적처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마음 땅도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땅의 마음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들도 잘자라 풍성한 해피엔드 인생으로 끝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시켜 주시고 말씀의 씨앗들도 잘자라게 하시며 참된 수행자로 살게 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8,15). 아멘.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비유의 내용보다는 그 비유를 마치고 나서 예수님이 큰 소리로 외치신 말씀에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들을 귀 있는 사람'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 즉 '청각' 기능에 문제가 없는 사람을 뜻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는 귀, 즉 말에 집중하고 경청할 '의지'가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예수님의 말씀은 후자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닮아 공정과 자비가 넘치는 분이신 예수님은 타고난 능력으로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복음의 비유를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그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가 단순히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구분하기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건조하고 팍팍한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찐득찐득한 진흙땅에서는 미나리가 잘 자랍니다. 또한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라고, 양분이 풍족하여 기름진 땅에서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즉 절대적으로 '좋은 땅'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각기 주어진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제대로 관리해주지 않으면 금방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들을 귀'란 결국 씨앗이 잘 자라도록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고 고랑을 파주는 수고와 노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은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마음의 밭은 기본적으로 선합니다. 선하신 분께서 당신의 숨과 얼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선한 것이 당연하겠지요. 즉 '좋은 땅'입니다. 이 마음의 밭을 잘 관리하는 방법은 항상 하느님 가까이에 머무르면서 그분의 마음과 뜻을 잘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내 마음에 뿌려주시는 말씀과 은총이 금새 뿌리를 내리고 잘 자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그분의 뜻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면 우리 마음의 밭은 금새 척박해지고 맙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느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제대로 들을 리가 없지요.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한 쪽 귀로 흘려버리니 뿌리를 내릴 수도,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도 없게 됩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이 자기만 차별한다고, 자기에게만 은총과 복을 내려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들을 귀'가 없음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여 그분의 은총을 싹 틔울 의지가 없음을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 탓'만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은총으로 여기지 않는 이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져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인내로 잘 극복하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과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루카 8, 4-15> 9월 19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땅에 씨 뿌리는 비유는 농부가 농사를 어떻게 지으라는 말씀도 아니고, 말씀을 듣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는 생명을 받고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시작하면서 많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게 됩니다. 성서 한번 보고 미사에 나와서 듣는 말씀의 전례 시간에 복음 말씀, 강론의 말씀을 들으며 오늘 비유의 말씀처럼 길가에 떨어져 말씀을 깔려서 뭉개지고 가루가 되어 알맹이 없는 말로 듣고, 어떤 것은 바위나 굳은 땅에 떨어져 물기가 없어서 씨가 싹이 트지 못해 말라 죽고, 가시덤불에 떨어져 세상의 걱정으로 들은 말씀을 잊어버리고 싹이 텄다가도 사라져 버립니다. 좋은 땅 준비된 땅은 내용을 알아서 깨닫고, 깨달은 말을 실천하는 사람은 풍요로운 결실을 보아서 봉사하고, 나누고, 친교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진실과 사랑으로 살아가려면 알아야 하고, 깨달아야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알기 위해서는 보고, 듣고, 느껴야 합니다. 하나의 배움인데, 오늘 아침에 수사님이 성모님의 전구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믿음을 살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가장 필요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듣고 주님의 현존을 알게 될까요? 

첫 번째 스승은 자기 자신입니다. 각자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양심의 소리로 듣고 알게 됩니다. 선한 양심, 정직한 양심, 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소리는 너에게서입니다. 어린아이의 선생은 아버지, 어머니이며 형제여, 친구이며 인연이 맺어진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소리가 하느님의 소리입니다. 서로 사랑으로 나누는 말 안에는 하느님의 소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셋째는 역사 안에서 하느님 소리를 듣습니다. 지난 과거는 오늘과 내일을 사는데 좋은 선물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느님이 전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준 말씀이며, 확실한 현실적 의미를 지닌 말씀이며, 듣고 그 깊은 뜻을 찾아 사는 힘이며, 삶의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미사 시간에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고 마음에 깊이 담아두어야 합니다. 또,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고, 입으로 말하고, 실천해야 하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듣고 지나가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 깊이 잘 준비된 땅과 같이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이 내 모든 인격 안에서 자라고 결실을 보도록 살아야 합니다. 기도와 전례를 통해 전해 들은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끝으로, 하느님의 소리는 하늘과 땅 안에 있는 자연과 현실 안에서 들어야 합니다. 새 아침이 시작되면서 눈을 뜨고 일어나는 순간 하느님은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오늘 너에게 새날을 주었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이날을 내 뜻대로 살아다오.” 저는 “감사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일어나 성경을 읽고 아침기도 준비하며 성당에 신명 나게 걸어갑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내 자리에 앉아 감사기도 후 오늘의 묵상을 시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 시간을 기다립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 아멘.” 

나 안에서, 너 안에서, 역사 안에서, 하늘과 땅 안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실천하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 힘 

이회진 빈첸시오 신부님

열심한 신자들의 불평 중 하나는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힘들고, 지치고, 기도에 머무르지 못해 괴롭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일하는데 지치고 힘들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의 씨앗이 지닌 힘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았습니다. 각자 받은 이 말씀의 씨앗은 무한한 사랑의 잠재력으로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이 말씀의 씨앗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고, 내가 성장하는 것이며, 내가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사랑을 베풀고, 믿음의 열매를 맺어서 하늘에 복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 나의 사랑과 열정을 바쳐 무엇인가 더 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말씀의 씨앗이 지닌 힘을 내가 끌어당겨 성장시킬 수는 없습니다. 씨앗은 말씀이 지닌 생명력에 의해 자라는 것이기에,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일하게 하는 힘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은총과 내적 충만함이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의지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자람과

서투름 사이에

우리가 있다.

삶에 서툰

우리들이다.

아직도 삶을

모르는

우리들이다.

점점 바르고

착한 마음을

잃어가는

우리들이다.

점점 소중한

것을 듣고

간직하며 사는

인내의 마음까지

놓치며 사는

우리들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이란

말씀의

연속이다.

사랑하기에

말씀이 있고

사랑하기에

좋은 열매를

맺으려한다.

말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동안 말씀을

많이도 놓치며

살았다.

말씀으로

열매를

맺는다.

자연스러운

말씀의

열매이다.

땅은 열매로

드러나고

드러난 열매는

땅을 다시

성찰케한다.

모든 열매는

말씀의

열매이다.

좋은 땅은

인내의

사랑이다.

사람의 삶이

말씀의

열매이다.

말씀을 듣고

간직해야할

오늘이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얼마 전, 저의 출신 본당에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신학생 때의 제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만 같아서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도 강의 부탁에 대해서 웬만하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으로 허락을 했고 며칠 전에 긴장 속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사실 신부가 되어 그 본당을 떠난 지가 벌써 20년이나 되었으니 저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강의를 듣는 분들을 보니 세월의 흔적은 분명히 느낄 수 있겠지만, 낯익은 얼굴을 많이 볼 수가 있더군요.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신자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신학생 때에도 말씀을 잘 하시더니, 여전히 말씀을 잘 하시네요.”

이 말씀에 저는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분의 기억이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에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늘 뒤에서 조용히 있는 모습이 저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분의 기억은 말 잘 하는 저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바로 지금의 모습으로 과거를 연관시키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과 상관없는 남에 대해 큰 관심을 갖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보고서 과거도 이러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과거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과거에 연연한다고 해서 과거의 사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긍정적인 모습을 통해서 과거의 긍정적인 모습 역시 끄집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사는가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길에 떨어진 씨, 바위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를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져 자란 씨가 백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 땅의 상태가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시지요.

가장 좋은 씨인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어떤 땅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좋은 땅’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이런 마음으로 간직하는 사람은 절대로 과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또한 미래를 걱정하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농부들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분명히 좋은 열매도 또 많은 열매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나의 삶 역시 잠시도 소홀히 할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환하게 드러내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멋진 미래를 만들고, 더불어 과거 역시 멋진 과거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시간과 인내, 그리고 끈기만이 모든 것을 달성한다(허버트 코프먼).

55 관덕정 순교성지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이신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이며, 많은 신앙 선조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참수치명당한 거룩한 곳입니다.

관덕정은 조선 시대 무과 시험 제도의 하나인 도시를 행하던 도시청으로 조선 영조 25년에 세운 건물로 옛 이름은 관덕당이었습니다. 관덕당은 누각과 넓은 마당이 있어 군사 조련이나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장으로 쓰이던 곳이었는데, 그런 이유로 이곳에서 사형 집행도 이루어졌습니다.

관덕당에서는 1815년 을해박해 때 7명이 순교했으며, 1827년 정해박해 때 3명, 1866년 병인박해 때 이윤일 요한 성인을 비롯하여 7명이 순교했습니다.

이윤일 성인은 병인박해 때인 1867년 1월 21일 경상감영의 처형장이던 대구 관덕정에서 치명당한 뒤, 형장 부근에 매장됐다가 아들 형제에 의해 날뫼(현 비산동)로 이장되었고 다시 경기도 묵리와 미리내 성지, 대구교구청, 성모당을 거쳐 1991년 1월 20일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지하 경당에 봉안되었습니다. 이처럼 대구 관덕정은 이윤일 성인을 포함한 많은 천주교인들이 믿음을 버리지 않아 처형된 성지입니다.

미사는 화요일에 오전 10시, 금요일은 오후 3시, 토요일에 오후 5시에 봉헌됩니다. 주소는 대구시 중구 관덕정길 11이고, 전화는 053-254-0151입니다.

진리의 기둥인 교회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개신교는 교회 안에 진리가 주어졌음을 부정하고 ‘성경에만’ 진리가 있다고 믿으며 교회의 성경해석 권위를 부정하였습니다.

물론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났던 루터는 본래 가톨릭 사제였기 때문에 성경에 당신의 살과 피라고 명확히 규정하신 성체의 권위를 전부는 부정할 수 없어서 ‘공재설’이란 주장을 내어놓았습니다. 공재설이란 그리스도께서 성체와 ‘함께’ 존재하신다는 애매한 주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체와 함께 계시기는 하지만 성체가 곧 그리스도의 몸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에 급진적 개혁을 주도했던 쯔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하여 루터의 주장에 맞섰습니다. 그냥 기념하라고 해서 그 마지막 만찬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지 성체를 그리스도의 현존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고 맞섰습니다. 그러나 분명 성경에 “내 살이다. 내 피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그냥 기념만 하느냐며 루터가 반박하자, 이 둘을 중재하기 위해 칼뱅이 나섰습니다. 그리고 ‘영적 임재설’이란 주장을 내어놓았습니다. 사실 이 주장은 더 모호한데, 성체에 주님께서 영적으로 임재는 하시지만, 이것을 믿고 기념하는 이에게는 임재 하시고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마치 과일이 태양은 아니지만 과일을 먹음으로써 태양의 빛과 열을 먹는 것과 같다는 주장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는 것과 같다는 식의 주장으로 둘을 중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과일 안에 들어갔다면 적어도 태양의 일부분이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여기에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를 달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을 당신 살과 피라고 했다고 적혀있다면 있는 그대로 성체성혈이 당신 살과 피로 믿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지 다른 무엇을 먹고 마시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면에서 ‘성경만으로’란 기치를 걸고 가톨릭의 권위에 대항하여 나왔던 주요 인물들의 제각각의 성경해석에 비하면 오히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톨릭교회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성경의 자구적 해석으로 개신교는 수백 개의 종파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해석해 줄 진리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모기는 부모가 필요할까요?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능적으로 피만 빨아먹으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능은 모든 생명체에게 예외 없이 존재합니다. 이를 ‘생존본능’이라 하는데 본능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것이기에 생존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다른 것은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고등동물로 올라갈수록 부모가 필요합니다. 이들은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등동물이 부모로부터 배우는 것은 생존본능을 죽이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입니다. 생존본능으로만 살려면 모기처럼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모기와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동물들에게 부모가 필요한 이유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마치 갈매기 안에 생존하기 위해 더 따듯한 곳으로 날아가야 하는 본능을 넣어주신 것처럼 인간 안에도 사랑의 본능을 넣어주셨다면 인간에겐 더 이상 부모로부터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녀가 가지지 못한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없이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면 굳이 교회를 세우시고 파견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모든 복음을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그 풀이는 당신 제자들에게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만 비유의 풀이를 해 주시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특정한 어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는 모든 “군중”(루카 8,4)이 못 알아듣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약 당신 비유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도 풀이를 해 주셨다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들 성경을 읽고 자기 식대로 해석한 것이 옳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당신이 세우시고 당신이 파견하시는 이들에게만 참 진리를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교회 안에 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진리의 기둥이 필요한데, 진리의 기둥은 성경이 될 수 없고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진리의 기둥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파견하신 것이지 성경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성경을 예수님께서 쓰셨다면 다들 자신들의 해석이 옳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진리를 교회에 넘겨주시고 사람들이 당신이 세우신 교회에 모이게 해 주셨습니다. 이는 교회를 통해 모든 신자들이 하나가 되게 하심인 것입니다. 눈이 가려진 것을 모르고 각자가 자신이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일이 없어야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수원 가까이에 묵주기도 동산이 있습니다. 매일 묵주기도 동산을 찾게 됩니다. 한번 다녀오면 1시간가량 걸립니다. 며칠 전에는 묵주기도 동산에서 밤하늘을 보았습니다. 금성이 반갑게 인사를 하였고, 목성도 있었고, 달 옆에는 화성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는 보기 힘들었습니다. 묵주기도 동산에는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 위에 비친 달과 별을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우주가 생기면서 별들도 생겨났고, 별들은 우주에 존재하는 원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몸에 있는 원소들은 100억년 이상 된 것들이 많다고 합니다. 형태와 모습은 다르겠지만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변하지 않았고 없어지지 않는 원소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변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은 원소로 구성된 우리들이 서로 다투고, 갈등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원소의 입장에서는 우리 모두는 하나일 뿐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원소라는 면에서 변화도 없고, 죽음도 없기에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형태와 모습만 바뀔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한 영원한 삶과 부활은 의미와 가치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100억년 된 원소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의식이고, 정신이며, 영혼입니다. 의미 없는 100억년보다는 하루를 살아도 의미 있는 삶이 좋습니다. 성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습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친절하게도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 성서 말씀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밭은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 마음의 밭에서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우리들 마음의 밭이 좋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밭이 좋은 밭입니까? 잡초가 무성하고, 자갈이 많은 밭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는 아닐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양분이 가득하고, 토질이 좋으며, 잘 다듬어진 밭이 좋은 밭입니다. 우리들 마음의 밭도 그렇게 가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랑의 정원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거름을 줄 때, 우리가 나눔의 물을 줄 때, 공동체는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련의 바람이 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비가 내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갈등과 아픔의 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심을 하지만 삼일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한번 길들여진 습관은 좀처럼 고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운동선수들은 ‘기본기’를 충실하게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기본기에 충실한 선수들은 힘든 시기가 다가와도 곧 극복할 수 있지만, 기본기가 부족한 선수들은 힘든 시기가 오면 좀처럼 예전의 실력을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도 습관이 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잠자리에 들기가 쉽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시작하는 사람은 하루를 기쁘고 충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습관이 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 마음에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내 마음의 잡초들을 뽑아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의 밭에 기도의 거름, 나눔의 거름을 뿌려 주어야 합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어머니가 계신 의정부로 갑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밭을 가꾸어보면 알게 되지만 관심과 애정을 갖고 관리를 잘 해나갔을 때 분명 그 결과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도 매년 정원에 밭을 가꾸어 왔지만 사실 이번 년도엔 여러 가지 일들로 많이 신경을 못 써주다 보니 잡초들이 너무 무성해지면서 그 결실이 별로 좋지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이 씨앗이라고 했을 때 그 씨앗을 받은 우리가 잘 관리를 해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결실은 분명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밭을 갈구듯이 내 마음의 토양을 고르고 기름진 좋은 땅으로 가꾸고, 유혹과 더불어 함께 자라나는 잡초들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가고, 생명의 물과 같은 하느님의 영을 받으며 살아갈 때 내 마음의 밭에서 자라나는 그 하느님의 씨앗은 분명히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기 위한 조건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신앙생활 하는 사람 모두가 말씀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다음의 조건들을 만족시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

첫 번째는 ‘바르고 착한 마음’입니다.

【사람은 마음가짐이나 마음 상태에 따라 똑같은 일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현관문에 부딪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그래, 상관없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겠죠.

하지만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면, 문짝을 발로 차거나 욕을 하며 문짝에게 화풀이를 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현관문에 부딪힌 상황은 같지만 마음 상태에 따라서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틀려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부정적이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현실적이지 않아.. 재미없어..’라는 반응을 보이며 말씀을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르고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이 방향을 제시해 주겠지.. 답을 주겠지..’하는 긍정적인 마음, 믿는 마음을 품고 말씀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품는 것이 열매를 맺기 위한 첫 걸음이겠죠.

두 번째는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있는데, 그 중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티비나 컴퓨터 소리, 그리고 괜한 소문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들이 추구하는 바가 알게 모르게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기 보다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겁니다.

구약에 나오는 솔로몬도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신을 믿는 아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우상숭배에 빠지고 타락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죠.

따라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신앙 안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의 들어야 믿음이 생길 수 있고, 열매가 맺힐 것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보통 신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 미사를 봉헌하는데, 그 때 들은 말씀을 대부분 잊고 삽니다.

그렇게 마음에 간직한 말씀이 없는데, 그 말씀이 싹을 틔우고 자라날 수는 없겠죠.

말씀이 자라나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계속 마음에 간직하고 묵상하고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세 번째는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열매를 잘 맺기 위해서는 기다리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씨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다림이 수동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이 기다림은 능동적인 기다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기를 임신한 여자는 가만히 앉아서 출산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때 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합니다.

먹는 것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 태교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배 속에서 자라는 아이를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아이를 위한 활동을 함으로써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느끼는 그런 기다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간직한 말씀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 되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공부 못하는 아들에게 화가 난 엄마가 말했다.

“아니,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공부를 못하니?”

그러자 아들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 에디슨도 어렸을 때 공부 못했어.”

그러자 더 화가 난 엄마가 아들에게 소리쳤다.

“에디슨은 영어라도 잘 했잖니!”

말씀의 씨앗 결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24주 토요일 

복음: 루카 8,4-1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5절) 나가 땅에 씨를 뿌린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주님의 섭리에 따라 싹이 돋고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리가 들은 말씀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마태 13,8)의 열매를 맺는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물었을 때,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하시며 비유를 설명해 주셨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신다. 그 신비는 믿음과 행실을 통하여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12절) 씨앗은 악마가 쉽게 채간다. 땅이 굳어있기 때문에 씨가 심겨지지가 않는다. 마음이 굳어 있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거룩한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더러운 마귀에게 어울리는 짓밟힌 길바닥과 같이 되고 만 것이다.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 그 씨앗은 악마가 곧 채가고 만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다.”(13절) 성당에 나와서는 신자처럼 행동하지만, 교회를 나오자마자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잊고 예전의 습관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더구나 박해가 일어나고, 진리의 원수들이 교회를 공격할 때에는 싸움에 나서기보다 도망치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14절) 말씀의 씨앗이 제대로 자리 잡고 싹을 틔운 것도 있다. 그러나 세상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 그것의 숨을 막아 쓸데없는 부분만 웃자라 말라버리는 현상이다.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부자 되려는 욕망은 말씀의 씨앗을 숨 막혀 죽게 하는 가시덤불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제 기름지고 잘 가꾸어진 땅에서는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좋은 땅에서는 뱁 배의 결실이라는 것으로 보아 그 땅은 기름진 땅임을 알 수 있다. 돌과 가시덤불과 해로운 모든 것을 없앤 마음이라는 밭에 떨어진 말씀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건강한 싹이 나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는 이 네 부류 중에 어디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부터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서,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자.

참다운 삶. -신망애信望愛, 진선미眞善美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런저런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얼마전부터 수도원 경내 곳곳에 피기 시작한 야생화 유홍초가 참 작고 곱고 예뻐 써놓은 시입니다.

-“꽃처럼/살 수는 없나

무아無我/무욕無慾의 꽃처럼 말이다

누가/알아주든 말든/보아주든 말든

때되면/하늘향해/곱게/폈다 지는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한/꽃처럼 살 수는 없나”-

요즘 산책중 자주 눈길이 가는 가을 김장 배추 모종들 자라는 모습이 하루하루가 달라 바라보는 것도 작은 기쁨중의 하나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큰다/가을모종 배추 포기들

볼 때 마다/생명生命의 기쁨 피어난다

나이에 상관없이/영적靈的성장도 저랬으면 좋겠다”-

가끔 인용하는 젊은 택시 운전사 형제와 나눈 카톡 메시지입니다. 참으로 힘든 삶중에도 결코 좌절함이 없이 줄기차게 노력하며 낙관적 삶을 사는 형제입니다.

-“백만원짜리 양복을 중고매장에서 2만원에 구입했는데 택시 출근에 입을 것입니다.”

“100만원 짜리가 어찌 2만원에! 100만원 짜리 인생을 2만원 짜리 인생으로 추락시켜선 안되겠습니다. 깨어 품위있게 사세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모습대로 어떤 환경 중에도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답은 항구한 기도와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수도원의 먹는 밤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가을 때되면 저절로 밤송이가 벌어져 떨어져 주어다 먹는 굵고 맛있는 밤알들인데 올해는 달랐습니다. 밤알을 주울 때는 은총의 선물을 줍는 느낌입니다. 밤들의 외관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데 맛이 없습니다. 입맛의 신비입니다. 누구나 공통적인 입맛이라 먹어 본 분들은 맛이 없다 했습니다. 웬일인가 한 수사님에게 알아 봤습니다.

-“밤이 맛이 없네요.”

“거름을 하지 않아서입니다.”-

너무나 평범 자명한 진리입니다. 나무나 땅은 정직합니다. 땅에서 나는 작물이나 과일들 거름이 없으면 맛 없음은 불문가지입니다. 새삼 우리 영적 삶의 밑거름에 항구한 기도와 말씀공부와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예화들을 렌즈로 오늘 말씀을 보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참다운 삶, 신망애, 진선미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웁니다. 오늘 복음은 세부분으로 나눠 집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그리고 씨뿌리는 비유의 설명입니다.

먼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그대로 예수님 자신의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흡사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연상시키는 비유입니다. 공통점은 둘다 낙관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환경에 상관없이 삶에 최선을 다하는 신망애 삶의 자세, 진선미 삶의 자세입니다.

씨뿌리는 삶을 살다보면 때로 길바닥 같은 때도 있고, 바위같은 때도 있고, 가시덤불같은 때도 있고, 좋은 땅의 때도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 개의치 않고 항구한 정진의 노력이 있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백배의 열매를 맺으니 결과는 해피엔드, 성공적 인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이런 신망애의 사람들을 방관傍觀, 방치放置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성공적 인생으로 이끄십니다. 이런 진리를 깊이 깨달아 알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전반부 내용이 예수님 친히 발설하신 비유라면 후반부 내용은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입을 빌린 비유의 해설입니다. 전반부의 초점이 ‘씨뿌리는 사람’에 있다면, 후반부는 말씀의 씨가 뿌려지는 ‘토양’이 초점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가 좋아도 씨를 받아 들이는 토양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라는 것입니다.

탓할 것은 말씀의 씨앗이 아니라 우리들의 내적 환경과 자세라는 것입니다. 네가지 사람들의 유형중 우리는 어디에 속할까요? 길에 떨어진 것들의 경우의 사람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의 경우의 사람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의 경우의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져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들의 경우의 사람들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의 때와 장소등, 이런 환경에 개의치 말고 간절하고 진실하고 항구한 정신으로 수행에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삶의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간절하고 진실한 수행이 우리 존재를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여 좋은 땅의 마음 밭으로 변화시킵니다. 하여 모두가 소망하는 네 번째 부류의 성공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참 좋은 신망애, 진선미의 사람들입니다. 간절하고 진실한, 항구한 수행자들이 바로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새삼 우리 수행중의 수행이 바로 이런 거룩한 성서독서, 렉시오 디비나의 수행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이들이야 말로 진정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사람이자 하느님 나라를 오늘 지금 여기서 사는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의 삶자체가 영원한 생명의 씨앗과 같아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게 합니다.

부활 때에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참으로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부활에 대한 고백을 공감하며 믿을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 납니다. 물질적인 몸도 있지만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이런 부활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바로 이런 궁극의 부활의 희망을 심어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좋은 땅의 마음 밭으로 변모시켜 주시며, 당신을 찾고 당신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항구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8,15). 아멘.

좋은 땅을 방치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준비된 씨앗도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선하신 분께서 당신의 숨, 얼을 불어넣어주셨으니 당연히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고 그 땅을 결코 못쓸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루가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 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 딛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이신 그분을 만나려면 사랑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 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 두려하십니까? 풍성한 열매를 기대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신 말씀입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듣는데 익숙하다면 들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우리면 내 말을 적게 하게 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좋은 씨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가 8, 4-15(연중 24주 토)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해설까지도 직접 해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씨에 대한 이야기이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땅에 대한 이야기, 곧 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셋째는 열매 맺음, 곧 결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으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루가 8, 15)

이는 말씀이 우리 안에 뿌려져 선포되고, 선포된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 안에서 간직하고 묵상하며, 그 응답을 하느님께 바치고, 그것을 삶 안에서 실현하는 ‘렉시오 디비나’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으로 현존하신 주님 면전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분을 대면하며, 그분 앞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듣되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마음으로 듣되 ‘착한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곧 말씀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지향하여 듣는 것입니다(말씀의 경청).

<둘째>는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을 ‘품는’ 것이요, 품은 말씀을 곰곰이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말씀을 심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에 비춰진 자신을 깨달아 알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과 교제하고 친교를 나누며, 말씀에 응답하고 대화하며 말씀께 자신을 드리며, 말씀이 자신 안에 육화되는 것을 수락하고 승복하는 것입니다(말씀의 묵상과 말씀에서 솟아나는 기도).

<셋째>는 “꾸준히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말씀이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으로 쓰여 지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말씀이 삶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곧 말씀의 실천을 통해 말씀을 실현되고 성취되게 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열매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자신 안에서 열매를 맺으시는 놀라운 주님의 현존과 활동과 동행을 바라보며 경탄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일입니다(관상).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이요, 그 씨앗은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그것은 선사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씨앗을 틔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말씀을 실현해야 할 소명입니다. 곧 우리는 말씀을, 사랑을, 구원을 이루어야 할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소명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죽어야 맺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그 과정은 자신이 죽어서 타인을 먹여 살리는 열매가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위할 때는 자신에게서 떨어져 썩을 수가 없고 타인을 위할 때만 타인 속으로 들어가 썩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을 내어주어야 그 열매를 맺는 이 과정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바로 이 일을 하십니다. 당신의 열매를 맺는 일, 말씀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러니 당신 구원의 협조자요 도우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입니다. 그래서 내 형제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곧 우리의 관계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입니다. 말씀이 열매 맺어가는 자리요 거처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의 씨앗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 가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아멘.

‘시간과 기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2018년9월22일 토요일 복음묵상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루카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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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씨를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 안에 묶여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주어진 시간은 끝이 있다는 말입니다.

떨어진 씨는 시간 안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기회였고, 기회이며, 기회일것입니다.

하지만 누구의 삶이나 그러하듯, 모든 시간을 기회로 의식하면서 시간을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스쳐가는 인연들을 비롯한 모든 만남들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복음이란 아름다운 삶과 그 방법을 알려주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결국 시간과 그 안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도 각 개인에게는 만료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길,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을 삶 안에서 겪어야 할 과정으로 이해해봅니다.

시행착오 속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좋은 씨를 받아들여 싹을 내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받아들이지만 싹을 내지 못할 때도 있고, 때로는 싹을 내었지만 꽃을 피우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예 씨가 뿌리를 내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굴곡 없는 삶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지요.

하느님께서 뿌리시는 씨는 언제나 옳고 좋은 씨입니다.

이는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전제 조건입니다.

지나간 시간을 탓하는데 너무 시간을 소모하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길, 바위, 가시덤불처럼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회는 지금이라는 시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여, 늘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지금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 지,  무엇을 위한 기회의 시간인지를 살펴보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믿음과 희망으로 씨 뿌리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9. 22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씨 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름진 좋은 땅만이 아니라,

길 위에, 돌밭에, 가시덤불 사이까지

귀중한 씨앗을 아낌없이 뿌리는

세상사람 눈에는 그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그마한 씨앗이 품은

강인한 생명력을 볼 수 있는

지혜로운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좋은 땅, 나쁜 땅 가르지 않고,

비록 그것이 아주 보잘 것 없다 해도

모든 땅이 지닌 소출의 가능성을 믿는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땅에선가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가 맺어져

그동안의 모든 땀과 눈물이

기쁨으로 바뀔 것을 믿는

인내와 희망을 머금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믿음 사랑 희망 가득한 복음의 씨를

온 세상에 아낌없이 뿌리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험난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을

복음의 강인한 생명을 믿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씨를 품을

세상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 하며,

이 사람, 저 사람 가르지 않고

세상 모든 이에게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전하는

온 세상 소중히 보듬는

따뜻하고 넉넉한 사람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주님의 기쁜 소식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비록 세상 사람들이

복음과 다른 길을 걸어간다 하더라도,

결코 힘겨운 현실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며,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용솟음치고

또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아름답게 열매 맺으리라 믿기에,

가슴 벅찬 내일을 희망하며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복음을 선포하는,

인내와 희망의 사람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떤 분이 산에 오르다가 발을 잘못 디뎌 그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답니다. 굴러 떨어지다가 나뭇가지 하나를 간신히 잡고서는 하느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느님 살려주세요.” 그랬더니 하늘에서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 라는 소리가 들려왔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 때 그 순간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하느님 말고 다른 하느님 없어?!”

비단 순교가 문제가 아니라, 살면서 절대절명의 순간에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아니 오히려 내게 손해가 되는 응답의 말씀이 들려올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후속 이야기로 그 사람에게 하늘에서는 물었답니다. “네가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믿을 것이냐? 네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어야 산다고 하는 너의 생각을 믿는 것이냐?” 그리고 또 그 나뭇가지를 놓았더니 바로 발이 땅에 닿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진정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으로 들려옵니까? 실제로 여러분이 기획하고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아니 어쩌면 여러분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손해마저 되는 경우에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수행하고 계신지요?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것을 믿고자 하는지 되새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5) 좋은 땅이 되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잘 새겨듣고, 그 말씀을 잘 소화시켜 내 삶에 참으로 기쁜소식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또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나갑시다.

좋은 바탕을 준비하라 <루카 8, 4-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어리석은 농부가 겨우내 귀하게 보관하여 땅에 씨를 뿌리면서 어떤 것은 길가, 바위 위,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지 않고 잘 준비된 땅에 씨를 뿌려 결실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비유는 열심히 농사짓는 사람에게 맞는 비유가 아닙니다. 좋은 씨를 좋은 땅에 뿌리는 농부의 올바른 농사법을 저는 강조하고 싶어집니다. 신앙의 씨를 전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 구독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준비 없이 비옥한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신앙의 진리를 전해주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해 들으려면 준비가 잘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 신비를 알려면 바탕이 잘 준비되어야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이 되려면 길도 아니요, 바위 위도 아니요, 가시덤불 있는 땅도 아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말씀을 받아들이는 좋은 땅은 나 자신이 되도록 노력해야 주님의 장막에 머무르고 주님의 거룩한 산에 지낼 수 있습니다. 시편 15편에 “이런 사람은 흠 없이 걸어가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로 비방하러 쏘다니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모욕을 주지 않은 사람, 주님에게 순종하고 맹서를 바꾸지 않은 사람....... 이를 실행하는 이는 거룩한 산에 지낼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바탕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지 않고 귀한 하느님의 말씀이 길가에 버려지고, 밟히고, 무시당하고, 말씀을 따르기보다 삭막한 땅에 메마르게 살고 있습니다. 

나라나, 공동체나, 교회나 함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는 자기 안에 바탕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중요하듯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자기 바탕을 잘 가꾸면 씨앗이 떨어져 많은 결실을 보고 가을걷이를 행복하게 춤추며 노래 부르고 한 후 하느님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땅을 아니, 자기 바탕을 시편 기도처럼 살아가도록 기도하며 하느님의 말씀이 하나도 허술하게 여기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준비된 땅이나 바탕을 기다리지 말고 내가 비옥한 땅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제자에게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오늘은 복음을 읽어 내려가다가 예수님께서 외치셨다는 부분이 눈에 띄었고, ‘위엄 있게 말씀하시면 되지 외치실 것까지 뭐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왜 외치셨고,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여러 고을에서 많은 군중이 몰려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오늘 주님은 비유를 말씀하시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까지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쉽게 납득이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니 제자들에게는 풀이를 해주지만 일반 군중은 알지 못하게 하려는 거랍니다.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하느님 나라라는 것이 신비이기에 이 세상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거로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알게 하려고 어머니 사랑을 많이 비유로 들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주님의 말씀이 아니거나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한 말씀인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오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앞서 봤듯이 모든 사람이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중에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주님께서 설명하셔도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에서부터 관심이 많은 사람까지 다양합니다.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해주셔도 관심 밖이기에, 다시 말해서 밖에 버리기에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남 차지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저 같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비유건 뭐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않겠지만 주님은 그래도 비유를 말씀하신답니다.

쉽게 못 알아듣게 하여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인데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여 더 알기를 그만두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거지요.

그럼에도 더 알려고 들지 않고 귀한 비유 말씀을 차버리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지요.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10,21-2)

그러나 알려는 사람, 배우려는 사람, 곧 제자들에게는 이 비유가 마치 불교의 화두와 같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제자들에게는 스승으로서 친절하게 비유의 뜻을 하나하나 다 풀어주시는데 이는 다음의 주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루카 10, 22)

하느님 신비에 대한 비유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스승이 필요하고,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제자의 자세, 곧 겸손과 열의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우리의 비유는 불교의 화두와 같은 면이 있다고 하였는데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를 던지면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열망과 끈기가 있는 제자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마침내 깨닫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제자는 어려움이 닥치면 깨닫기를 포기하고 땡중이 되지요.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제자에게는 스승이 필요하고, 겸손과 열망과 끈기도 필요함을 다시 한 번 명심하는 오늘입니다.

이종훈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참 특별하다. 예수님을 직접 뵌 적도, 그분에게 배운 적도 없는데 마치 그랬던 것처럼 말하고 가르쳤다. 부활에 대한 가르침은 더욱 그렇다. 부활은 관 뚜껑을 열고 시체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대체 알 길이 없다. 그저 이 세상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 혹은 어떤 상태라고 밖에는 표현하지 못한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을 씨앗에 비유한다. 작은 씨앗이 큰 나무와 열매를 맺는 거는 정말 신기하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 씨앗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동물의 먹이가 되지만 땅 속에서 자신을 포기하면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낸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땅은 우리 마음이다. 씨앗이 작고 단순한 것처럼 예수님이 전해주신 하느님의 말씀도 아주 쉽다. 씨앗은 조건이 맞아야 자신을 열어 그 안에 담긴 보물들을 내어 놓는다. 하느님의 말씀도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간직하느냐에 따라 그 보따리를 풀어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만들어 놓는다. 

같은 씨앗이지만 여건에 따라 열매의 양과 질이 달라진다. 같은 하느님 말씀이지만 어떤 이는 심약한 사람들을 위한 헛된 위로라고 여기고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건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자신의 인생을 걸고 이들의 업적 중 많은 것은 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들의 믿음과 헌신이 빚어낸 열매들이다. 

부활은 시체가 되살아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부활은 전혀 다른 생명이고 하느님의 삶이다. 맨 땅에 뿌려진 씨앗들이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만들고 또 숲을 만들어 그 맨 땅을 전혀 다른 곳으로 만드는 것처럼, 내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내 안에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나를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게 할 수 있다. 이 말씀을 심약한 이들의 헛된 위로로 여길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을지(루카 8,15)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하나? 아니면 하느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시나? 내가 바라면 농부이신 하느님께서(요한 15,1) 내 마음의 밭을 그렇게 일구어 놓으실 거다. 그분은 바오로 성인을 180도로 바꾸어 놓으신 분이다.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우리 마음에서 열매를

맺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열매는 인내 없이

맺어질 수 없습니다.

인내가 최고의

답입니다.

인내는 말씀과 함께

말씀의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은 인내로이

우리 마음에서

길을 내며 

자라납니다.

우리의 마음도

말씀을 따라

흘러가야 합니다.

말씀에 마음을

내어주는 

우리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너무도 중요한 말씀에

너무나 소홀했던 우리의 

영적여정이었습니다.

다시금 말씀을

기쁘게 맞이하고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좋은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인내는 말씀 없이

영글어 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말씀에 우리를

맡기는 좋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근처에 최신식 시립 도서관이 생겼습니다. 솔직히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몰랐고 또한 꼭 도서관에서 공부를 해야 할까 싶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서관을 다녀온 친구들이 너무 좋다는 말을 듣고 얼마 뒤에 저 역시 친구들과 가 보았습니다. 너무나 깨끗한 실내 환경, 그리고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 많은 학생들의 연학 분위기는 그냥 도서관에만 있어도 공부가 저절로 될 것만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에 막 나온 컵라면과 새로운 맛의 세계를 열어준 햄버거를 파는 이 도서관의 매점은 정말로 큰 인기였습니다.

이 도서관을 이용하던 저는 과연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학교 성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의 매일 빠짐없이 도서관을 다녔지만 사실 공부를 열심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이 도서관에 엄청난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 책을 보느라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된 것입니다(어떤 책이냐면 영화를 소개하는 잡지였습니다).

분명히 도서관은 책을 보고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저는 학교 성적을 높일 수 있는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재미만을 가져다주는 책만을 보았으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이면 무엇 합니까?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확연하게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 창조를 모두 마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입니다. 이렇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셨는데 우리들은 이 안에서 과연 어떤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나만 원하는 모습을 따르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 씨가 어디에 뿌려졌습니까? 길에, 바위에,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이 자라나서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시지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씨앗입니다. 그리고 씨앗은 너무나도 좋은 것으로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땅이냐는 것이지요. 좋은 땅이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길이나 바위 그리고 가시덤불 같은 마음이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을 바르고 착한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좋은 씨 그 자체이신 주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고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들이 문제 아닐까요? 도서관이 문제가 아니라, 공부하지 않았던 제가 문제인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의 명언: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때로 남보다도 서로를 이해 못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누구보다 상처 주고 상처받는, 구원이자 상처이며 나를 꼭 닮은 타인이 바로 ‘가족’이다(김별아).

나의 자리

신학교에 들어가서 책에 대한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그 뒤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책에 더 큰 관심과 함께, 책을 읽는 시간이 점점 저에게는 행복한 시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니 도서관 사서가 참으로 부럽더군요. 늘 책과 가까이 있고, 그래서 책을 얼마나 많이 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우연히 도서관 사서를 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부러움을 가지고 있었던 대상이었기 때문에 사서로 일하니 얼마나 좋겠냐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랬더니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늘 조용한 공간을 지키고 있어야 하고, 제 생각처럼 책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서는 책을 정리해서 서가에 얌전히 꽂아두어야 하는 것이지, 꺼내어서 읽게 되면 사서로써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서가 진짜로 행복할 것 같았는데, 막상 이런 말을 들어보니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그냥 제가 원하는 책을 사거나 빌려서 볼 수 있는 지금의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였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속담처럼 남의 자리를 굳이 탐낼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주님께서는 내게 가장 좋은 자리를 주셨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경청과 인내로 열매 맺는 주님의 밭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8,4-8)를 들어 복음선포자들을 격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서기 27년경에 활약하셨으나 30년경 말기에는 인기가 떨어져 예루살렘 상경에는 열두제자와 여인들만 함께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분께서는 하느님께 온전히 희망을 두셨습니다. 

온갖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씨뿌리는 사람은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둡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힘과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난관에도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일으켜 세우시려고 오늘도 말씀의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따라서 가난하고 보잘것없어보이는 이들, 핍박받는 이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가 생명의 씨앗, 희망의 씨앗을 뿌려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영원한 행복을 맛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인내하며 투신하여야 합니다. 인내하는 동안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힘겨운 나날일 수 있으나 바로 그 시간들 안에서 사랑의 씨앗은 자랍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그렇게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희망하며 견딤으로써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8,11-15)는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복음선포에 어려움을 있었고 실패를 겪었으며, 신자 생활에도 부실한 면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복음선포자들을 격려하고 신앙생활이 미흡한 이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이런 해설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생활태도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온 주님의 밭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주님께서 당신의 선과 사랑, 평화와 정의의 씨앗을 뿌리시는 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어 공동의 선을 이루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며 씨를 뿌리십니다. 

그런데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거나 되새김이 없는 이들,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처럼 건성으로 말씀을 듣기에 시련이 닥치면 즉시 꺾여버리는 이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처럼 믿음이 약해서 세속과 물질에 애착하고 결단이 부족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내 영혼에 뿌려주신 씨앗은 이처럼 악으로 기우는 경향, 변덕, 고집과 편견,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 미움과 마음의 상처, 근심걱정, 명예욕, 자신이 주인이라는 착각과 같은 수많은 위험에 직면합니다. 

우리의 몫은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잘 열매 맺도록 항구히 기도하며,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여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악이 아닌 선을, 변덕이 아닌 항구함을, 근심걱정이 아닌 희망을, 소유와 애착이 아닌 가난함을, 냉정함이 아닌 따뜻한 애정과 관대함의 거름을 주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좋은 밭이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말씀을 경청하고 몸과 마음에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며, 주님께 희망을 두고 온갖 고난과 시련, 세상 유혹과 불의에 맞서 인내하는 복된 날이길 기도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민태원 선생님의 ‘청춘예찬’이라는 수필을 읽었습니다. 이상을 품은 사람은 청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있는 사람은 삶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꿈이며, 이상은 현실의 고난을 견디어내는 힘이며, 이상은 나를 온 우주보다 더 고귀한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금 청춘예찬의 일부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상!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고 간에 이상이 있음으로써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석가(釋迦)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광야(曠野)에서 방황하였으며, 공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를 철환(轍環)하였는가? 밥을 위하여서, 옷을 위하여서, 미인(美人)을 구하기 위하여서 그리하였는가?아니다. 그들은 커다란 이상, 곧 만천하(萬天下)의 대중(大衆)을 품에 안고, 그들에게 밝은 길을 찾아 주며,그들을 행복스럽고 평화스러운 곳으로 인도하겠다는, 커다란 이상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길지 아니한 목숨을 사는가 싶이 살았으며, 그들의 그림자는 천고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면서 지하철의 좋은 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다리면서 스크린 도어에 있는 시를 읽으니 마음이 정화됩니다. 낮은 곳에서 움직이니 겸손함을 배우게 됩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니 좋습니다. 가격이 저렴하니 경제적이고, 정시에 도착하니 시간절약도 됩니다. 지하철을 타고 춘천도 가고, 천안도 가고, 이천도 가고, 용문도 갈 수 있습니다. 가는 중에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인터넷 검색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요즘 바오로 사도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활예찬’입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나눌 수 있어서 좋고, 지금 시련 중에 있는 사람은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는 것들이 부활의 삶에서는 명확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죽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듯이, 우리가 죽음이라는 문을 지나면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필귀정과 인과응보는 현실의 삶에서는 기대하기 힘들 수 있지만 부활의 삶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포기하는 사람보다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비관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자리에 긍지를 가지는 사람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원망하는 사람보다는 그 돌부리를 옮기는 사람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물방울이 시간을 만나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내듯이, 성실함이 희망을 만나면 반드시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망치와 정을 들고, 산을 뚫어서 길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그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로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태산이 높아도 하늘 아래 있다고 합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오르지 않고 산만 높다고 원망한다고 합니다.’

각자의 삶에서 ‘예찬’을 만들면 어떨까요? 그런 사람은 좋은 밭에 뿌려져서 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처럼 지나간 길에 아름다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입니다.

신망애信望愛의 참된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봄 꽃 향기도 좋지만 가을 열매 향기는 더욱 좋습니다. 깊고 그윽합니다. 마음 편안하고 넉넉하게 합니다. 요즘 배밭사이 오솔길을 거닐 때 배열매들의 은은한 향기가 그러합니다. 아마 주님 안에서 잘 산 이들의 가을 인생 신망애信望愛 열매들의 향기도 이러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이 심오합니다. 무한한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예수님 평소 삶의 모습이 환히 드러납니다. 세 관점에서의 풀이가 우리 삶에 직접적 도움이 됩니다.

첫째, ‘씨뿌리는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말그대로 시종여일, 초지일관 한결같은 항구한 삶의 자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 삶의 표현입니다. 도대체 삶에 불신이나 의심이 없습니다. 아무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좌절이나 절망이 없습니다. 삶 깊이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믿음, 희망, 사랑의 사람입니다. 낙관적 긍정적 인생관의 사람입니다. 삶의 환경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환경을 겪기 마련입니다. 오늘 비유에서처럼 길바닥 같은, 바위같은, 가시덤불 같은, 좋은 땅 같은 환경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날씨의 변화와 비슷한 환경의 변화입니다. 늘 젊고 건강할 때 만 있는게 아니라 늙고 병약한 때도 있는 법입니다. 이런 환경에 개의치 않고 한결같이, 항구히 씨뿌리며 노력하는 삶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요. 이런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하느님을 닮은 신망애의 참된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이런 이에게서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신망애의 삶은 영원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때와 장소의 환경에 개의치 않고 죽을 때까지 씨뿌리며 노력하는 충실한 삶입니다. 이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루하루의 과정에 충실한 삶이 성공적 삶이요 결과는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배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둘째, 마음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토양이 상징하는바 사람입니다. 사람은 마음입니다. 탓할 것은 말씀의 씨앗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밭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앗이 좋아도 그 마음밭이 길바닥 같다면, 바위같다면, 가시덤불 같다면 별무소득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느님 책임이 아니라 사람의 책임입니다. 배밭의 비근한 예만 봐도 입증됩니다. 아무리 품종 좋은 ‘신고’도 거름 주지 않고 방치하면 병충해로 돌배가 되어 버립니다. 각고의 항구한 수행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좋은 마음에서 좋은 행동이지만, 반대로 좋은 행동이 좋은 마음을 만듭니다. 각고刻苦의 수행의 노력이 마음밭을 변화시킵니다. 언젠가 하느님의 때가 되면 길바닥, 바위, 가시덤불같은 마음밭도 좋은땅의 마음밭으로 변모될 것이며 마침내 백배의 수확을 낼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부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1.길에 떨어진 것들-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2.바위에 떨어진 것들-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3.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대부분이 이 셋중 하나에 속할 것입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도, 말씀도 아닌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탓이 아니라 사람 탓입니다. 변명도 핑계도 소용없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사람은 다음 넷째 부류의 사람입니다.

4.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과연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영성생활에 요행이나 비약은 없습니다. 첩경의 지름길도 없습니다. 저절로 열매 풍성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을 지니는 항구한 마음의 수행, 그리고 이런 옥토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간직하여 항구한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삶만이 있을뿐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선사되는 생생한 부활의 희망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전해 주는 부활의 신비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첫 인간(아담)인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둘째 인간(그리스도)인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

좋은 땅 우리 마음에 선사되는 이런 부활의 희망이요, 이런 부활의 희망이 지칠줄 모르는 수행의 원동력이 됩니다. 아니 지금 이미 우리는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고 부활의 삶을 살아 가게 됩니다.

결실結實의 계절, 열매의 계절 가을입니다. 봄, 여름 인생 헛되이 써버려 인생 가을이 되어도 하느님께 봉헌할 신망애의 인생 열매들이 빈약하다면 그 인생 얼마나 허무하고 허망하겠는지요. 오늘 비유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도 되지만 회개를 위한 경고도 됩니다. 환경을 탓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항구한 신망애 수행의 노력으로 좋은 땅의 마음밭을 가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마음밭을 신망애 가득한 옥토沃土의 좋은 땅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카8.15). 아멘. 

좋은 땅을 방치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준비된 씨앗도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선하신 분께서 당신의 숨, 얼을 불어넣어주셨으니 당연히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고 그 땅을 결코 못쓸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루가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 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 딛기를 소망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 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 두려하십니까? 풍성한 열매를 기대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들을 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들을 귀>란 무언인가?

들을 수 있는 귀, 달리 말하면 귀의 능력을 뜻하는가?

아니면 들으려고 하는 귀, 곧 귀의 의지를 뜻하는 것인가?

제 생각에 들을 귀란 두 가지를 다 포함하는 말일 것입니다.   

들을 귀란 우선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가는귀가 먹거나 귀가 완전히 먹은 사람은 잘 못 듣거나 완전히 못 듣는데 영적으로도 하느님 말씀을 잘 못 듣거나 완전히 못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영적으로 가는귀먹은 사람에 대해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는데 첫째는 마음이 길바닥과 같은 경우입니다.

비유에서는 길에 떨어진 씨라고 했지만 좀 더 실감이 나게 제가 길바닥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길바닥이란 장바닥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길바닥과 같고 씨가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 모르게 잘 간수하지 않고 길가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채 가도록 내버려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으로 내놓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지요.

저의 경우 매일 복음을 읽지만 말씀을 제 마음에 새기기보다 여러분에게 말씀 나누기를 하는 것에 치중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이 바위와 같은 것입니다.

바위란 흙이 거의 없는 곳이니 바위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내게 떨어져도 영 뿌리내리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 씨는 비바람에 쓸려가거나 뙤약볕에 말라버리겠지요.

하느님의 말씀도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면 환난이나 시련을 겪게 되면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마음에서 밀어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를 사랑하시기에 결코 버리지 않으실 거라는 말씀이나 인간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고 언젠가는 구해주실 거라는 말씀도 막상 내가 고통을 당하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 거짓말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이렇게 믿습니다.

환난이나 시련은 약한 신앙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불신케도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굳세어지도록 단련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이 가시덤불과 같은 것입니다.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이란 걱정, 재물욕심, 쾌락이 무성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상 작은 걱정꺼리 하나만 생겨도 그것이 분심이 되어 아무리 기도하려 해도 기도할 수 없었던 경험이 우리에게 다 있지요.

걱정 하나도 이러하니 우리 마음 안에 큰 욕심이 들어앉아 있거나 쾌락에 빠져 생각이 온통 그것뿐이게 되면 하느님 말씀은 도무지 들어갈 수 없게 되겠지요.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하는 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것들보다 더 고약하게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가장 완벽하게 우리 귀를 틀어막는데 듣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교만한 사람은 자기 말만 하지 남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지요.

이것은 가는귀먹은 정도가 아니라 영적인 감각이 완전히 죽은 겁니다.

하느님 말씀조차 우습게 생각하는 이런 교만이 우리 맘 안에 자리하게 되면 아무 말도 들으려하지 않기에 그야말로 구제불능이지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들을 귀> 있는 사람입니까?

가는귀먹든 완전히 먹든 귀먹은 사람입니까?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1코린 15,49)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 인간은 육신을 지니고 있어 생로병사를 겪을 수밖에 없는 약하고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육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별로 위대한 동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고 있는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이기에 약한 육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영이신 하느님의 모습도 닮고 있기에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뛰어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영은 거의 없는 사람처럼 아주 육적인 사람도 있고 영이 충만하여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사같이 보이는 성인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적인 사람인가요?

육적인 사람인가요?

영적인 사람이 되는 비결은 다른 사람들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내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보도록 해 보시면 어떨까요?

좋은 씨를 심자< 루카, 8/4-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농부는 가을 걷이가 끝나면서 다음 봄에 땅에 심을 씨를 준비 합니다. 준비 없이 좋은 씨앗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심은 씨앗은 어디서 구할 까요? 하느님 말씀 안에 참으로 좋은 씨앗이 준비 되어 있으나 하느님의 말씀을 준비 없이 뜻도 모르고 아무렇게 취급합니다. 땅은 씨를 오래 품고 있어야 새싹이 트는 것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어제 저녁에 마음에 품고 잠자리에 든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상기시키며 일어나는 사람은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고 그 의미를 따라 새로운 하루가 시작 됩니다. 아침 에 기도를 하거나 미사에 나가는 사람은 밤새 마음에 새기고 준비된 말씀을 기도와 미사 중에 마음에 새기면 오늘하루 성장의 원칙이 됩니다. 저녁이면 풍부한 결실을 맺으며 하루를 마감합니다.

성경을 읽고 그 중심 의 뜻을 마음에 새기면 꿈속에서 까지 말씀이 마음 안에 무르익어 새날 시작을 아름답게 시작 합니다. 술 마시고 정신없는 놀이에 빠져 있거나 생각이 없이 밤을 지내고 내일을 맞이하는 사람은 좋은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지지 못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머물지 않으면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일회용이 아닙니다. 필요할 때 주머니에서 끌어 내어 사용하다 필요 없으면 다시 주머니에 넣은 것이 아니라 항상 마음속에 자리 잡고 나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어떤 말씀이 나에게 주어지는지를 알고 그 의미를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땅이 씨앗을 품듯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왜? 당신의 비옥한 땅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습니까?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하느님 말씀의

신비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자라나야 할 곳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말씀을 듣고

간직해야 모난

우리마음이 

바르고 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매순간 또한

말씀으로

돌아서야 할 

순간들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말씀의 힘을

믿는 것이

인내입니다.

좋은 땅은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나 신앙의 

열매를 맺는 

땅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말씀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억지로 좋은 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

중심이 되었기에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하느님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인이란

말씀을 통해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임을 

기억합시다.

견디는 인내없이

생명의 말씀은

자라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먼저 어제 저의 축일을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축하의 인사를 받았네요. 이러한 축하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라는 생각 때문에 축하의 자리 자체가 항상 부담이 되었는데, 아마도 더 열심히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더 열심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빠다킹 신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경기도 개성시 북쪽 16Km 지점에 솟은 천마산 아래에는 박연폭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폭포를 향하여 가는 길에 두 절벽이 마주보며 만나는 곳이 있는데 그 간격은 약 1미터라고 하네요.

1미터. 어린 아이도 건너 뛸 수 있는 거리이지요. 그런데 이 1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를 건너뛰는 사람이 몇 안 된다고 합니다. 누구나 건너 뛸 수 있는 거리이지만 낭떠러지를 바라보면서는 건너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바위를 결단의 바위라고 합니다. 밑을 바라보지 않고 평지라고 생각하면서 앞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결단을 내려서 뛰라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렸을 때 저의 체험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길을 가다가 1미터도 되지 않는 개울을 만났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그냥 폴짝 뛰면 되는데, 이 개울을 못 넘을 것 같은 생각이 제 머릿속에 강하게 스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1미터도 되지 않는 개울이 한 100미터 넓이의 개울처럼 보이더군요. 결국 뛰기는 했지만 그 개울을 넘지 못하고 빠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할 수 없다는 생각, 즉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약한 마음이 이 개울을 못 넘고 빠져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지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딱 그만큼의 사람이 된다.’고 말입니다. 바로 제가 생각한 만큼 딱 그만큼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만큼 결단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결단은 주님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우리가 반드시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선택하느냐라는 결단의 순간이 계속해서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있었을까요?

주님을 선택하는 우리가 바로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에 등장하는 좋은 땅에 뿌려진 좋은 씨의 모습입니다. 길, 바위, 가시덤불 속에 떨어질 수 있는 선택을 버리고 대신 좋은 땅을 선택해야지만 백배 이상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법이지요. 마찬가지로 순간의 만족을 위해 세상의 것만을 쫓게 되면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 나의 결단은 어느 쪽에 있을까요? 나의 결단을 통해서 내가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듣기 싫은 성난 말을 하지 말라. 남도 그렇게 너에게 대답할 것이다. 악이 가면 화가 돌아오니 욕설이 가고 주먹이 오간다.(공자)

행복이라는 선물

종종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 마친 뒤에 시골로 내려가서 예쁜 집을 한 채 지어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미래 설계를 하시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아니 그런 분들이 생각보다 많더군요. 그런데 행복이 미래에 해당하는 단어일까요? 아닙니다. 행복이란 ‘다음’이라는 미래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이라는 순간에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요? 미래라는 시간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매순간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 역시 살지도 않은 미래에 이룰 것으로 소망만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은 특정한 기회에, 또 특정한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행복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입니다. 과거라는 시간도, 또 미래라는 시간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행복해야 먼 미래의 시간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일구어 가는 것

윤성희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공관 복음서에 모두 실려있을 만큼, 초대교회 공동체의 자기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가르침이고,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알려진 비유 중 하나다. 여기서 먼저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은 씨 뿌리는 사람이 얼마나 아낌없이 씨를 뿌리는가이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은 농부라면 아무 곳에나 씨를 뿌리지 않는다. 어디에 뿌려야 열매가 잘 맺을지 정확히 알고 골라서 뿌리지, 길이나 바위, 심지어 가시덤불 같은 데 씨를 뿌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씨 뿌리는 이’, 곧 하느님은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신다. 가늠도 셈도 하지 않은 채 당신의 귀한 씨를 마구 뿌리신다. 말씀이신 당신의 외아들도 그렇게 아무에게나 보내셨다. 그 때문에 말로 옮기기 힘들 만큼 모진 아픔을 겪게 된다 할지라도, 그분은 구원의 손길을 미리 정해둔 사람들에게만 내밀지 않으셨다.씨를 아낌없이 뿌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씨가 열매를 맺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으신다. 분명히 ‘좋은 땅’이 있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이나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이들’은 누구일까? 신앙과 이성이라는 문제에 오랫동안 천착했던 복자 존 헨리 뉴먼은 신앙이 논리적 설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자양분을 흡수하여 신앙의 씨앗을 키울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곧 ‘좋은 땅’은 하루아침의 결심이나 벼락 같은 깨달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평생 죽은 나무에 물을 주었다는 전설 속의 수도승처럼, 무의미해 보이는 몸짓을 변함없이 계속하면서 조금씩 일구어 가는 것이라는 말이다.요즘 들어서 내 마음을 ‘좋은 땅’으로 가꾸는 것만큼 중요한 게 우리 자녀들, 그리고 신앙의 후배들이 하느님의 씨앗을 키울 준비가 되도록 돕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부모가 성당에 간다고 아이들에게 신앙심이 생기는 게 아니고, 가톨릭학교에 보낸다고 아이의 신앙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노력, 이를테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말이나 행동, 소외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조그만 실천, 이런 것들이 우리 자녀들의 마음 밭에 조금이나마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보면 지금은 비록 가시덤불이 가득해 보여도 언젠가 스무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을지 모른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입니다.'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가르침은 어렵지 않습니다.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처음에 사도들이 세웠던 교회들 가운데 많은 교회들이 지금은 사라져서 없는 일이 많고, 그 시절에는 복음화 되었던 지역들이었는데 지금은 그리스도교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 많습니다.또 옛날에는 전 국민이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모범적인 그리스도교 국가였는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 냉담을 하고, 성소자도 없고, 신심이 말라버린 곳들이 있습니다.처음에는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었는데 지금은 길이나 자갈밭이나 가시덤불로 변해버린 것입니다.반대로 옛날에는 전혀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곳이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성소자도 많이 배출하는 곳들이 있습니다.옛날에는 아예 씨를 구경도 못해본 황무지였지만 지금은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이것은 각 개인의 경우에도 똑같습니다.처음에는 열성적인 신앙인이었는데 나중에 신앙이 식어버리거나 잃는 경우도 많고, 남들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누구보다도 더 훌륭하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좋은 땅이었는데 안 좋은 땅으로 바뀐 경우를 보면, 박해 때문이거나 종교전쟁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도 있고, 세속화나 물질주의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박해나 종교전쟁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에는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더 심한 박해를 받고서도 견디어낸 지역들이 있으니 그것은 불가항력이 아니라 인내가 부족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세속화, 물질주의, 향락주의가 원인이 되어서 신앙이 식은 것이라면 누굴 탓할 수도 없습니다.어떻든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든지 개인이든지 간에 지금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지금 좋은 땅이더라도 방심하면 안 좋은 땅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과 지금은 안 좋은 땅이지만 회개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옛날에 소련의 스탈린이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일이 있었습니다.그때 그곳의 조선인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로 황무지에서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그러나 조선인들은 그곳에서 살아남았고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었습니다.일단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이 놀랍습니다.그리고 사람이 노력하기만 하면 아무리 척박한 황무지라도 옥토로 바뀔 수 있다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이백 년 전의 조선 천주교회는 사실상 고립되어 있었습니다.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 오기는 했지만 박해를 받고 있는 신자들과 함께 박해를 견디어 내거나 아니면 그냥 순교하는 일 외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말하자면 원래 황무지였던 땅을 옥토로 개간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도 못하고 그냥 황무지로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만일에 포기했다면 그렇게 끝나버렸을지도 모릅니다.얼마 전에 4대강 공사로 생긴 흙을 강 옆의 논과 밭에 쏟아 부어서 원래는 좋은 땅이었는데 전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자갈밭으로 변해버린 곳이 있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그렇게 망가진 그 땅을 원상복구하기도 어렵다고...)조선의 박해 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 교회의 상황은 (개인의 상황도) 옥토에서 편안하게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세속화라든지 물질주의라든지 향락주의에 물이 들거나 그런 것에 한눈을 판다면 옥토에 자갈을 퍼부어서 논과 밭을 망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사실 물이 든다는 것은 방심하고 자만하다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한눈을 파는 것도 긴장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일입니다.)어쩌면 황무지를 개간해서 옥토로 만드는 일보다 옥토를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박해자 바오로를 사도로 변화시키는 일보다 사도인 유다가 배반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더 어려웠던 것처럼.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어떤 고객이 백화점에서 출장을 위해 양복을 하나 구입한 뒤에 수선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제때에 수선을 하지 못해서 이 고객은 구입한 양복을 입지 못하고 출장을 갈 수밖에 없었지요. 이 백화점은 양복을 출장 간 고객 호텔로 배달료 98달러를 들여 항공 화물로 보냈답니다. 그리고 약속 시간에 맞추어 수선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하면서, 주문하지 않은 넥타이 세 장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러한 백화점의 노력에 양복을 구입한 고객은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을까요? 이 이야기는 꾸며낸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의 노드스트롬 백화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사실 어떤 백화점도 자신들의 영업 손실을 감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윤 추구가 경영의 주목표이기 때문에, 그렇게 손해나는 행동을 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도 이 백화점은 다른 백화점처럼 논리적으로만 따지려 들지 않고 오로지 고객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계산적으로 따지고 들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너도 한 번 생각해봐. 이것이 도대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니? 생각하며 살자.”

이런 식의 대화를 유도했던 적, 솔직히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어떠할까요? 분명 논리적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나름 많이 서운했을 것이고 그래서 부끄러움도 간직했을 것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비록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아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떨까요? 아마 그 상대방은 더 큰 감동을 받는 것은 물론, 이를 통해 내 자신 역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눈과 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그 좋은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땅인 사람을 이렇게 정의내리시지요.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 마당에는 많은 과일나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별로 맛이 없었습니다. 앵두는 너무 시었고, 배는 아무 맛도 없는 돌배였습니다. 살구 역시 그렇게 손이 가는 과일은 아니었습니다. 사과나무도 있었는데, 이 집에 몇 년 동안 살면서 딱 한 개의 사과만이 달렸었습니다. 처음에는 과일나무 많은 집에 이사 왔다고 정말로 좋아했었지요. 그러나 제대로 된 과일을 내지 못하는 이 나무들이 오히려 지저분하기만 할 뿐 별로 좋지 않게 보였습니다.

과일나무는 맛있는 과일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 나왔다면 좋은 열매를 맺어 주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주님의 말씀처럼 좋은 땅인 사람의 모습인 착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고 계십니까?

세상은 감사하는 자의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진다(레오 버스카글리아).

개꿈

어제는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글쎄 꿈에 제가 군대에 간 것입니다. 그리고 군대 내무반에서 저의 철모가 없어져 이 철모를 찾느라 돌아다니다가 깼습니다. 이 꿈이 얼마나 생생하던지, ‘철모가 어디에 있지?’하면서 잠결에 두리번거렸다니까요.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대 제대한 지가 벌써 20년이 되어 가는데, 이제는 민방위 훈련까지도 모두 끝내서 군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군대에 간 꿈을 꿉니다. 왜 이러한 꿈을 꿀까요? 그만큼 그때의 생활이 제 인생에 있어 강렬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문득 주님에 관한 꿈은 왜 꾸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아직도 제 생활 안에 주님이 강렬하게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생기면서 ‘좀 더 열심히 살자.’, ‘좀 더 열심히 기도하자.’, ‘좀 더 열심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사람이 되자.’라는 다짐을 해봅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종종 휴대전화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외출을 나가서 잊어버린 것은 아니고, 집 안 어디에 두었는지가 기억나지 않아서 한참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워낙 지저분하고 정신없이 살다보니 책상 위에 쌓여있는 책들 사이에서 그리고 방에 널려 있는 각종 물건들 사이에서 찾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도 집에서 찾을 때에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화를 하면 되니까요. 전화벨 소리를 듣고 휴대전화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이었습니다. 외출을 나가야 하는데 휴대전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강의 준비를 하느라 책상 위에는 책들이 가득했고, 그래서 이 책들 사이에 휴대전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전화를 했지요.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전화벨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낮에 회의가 있어서 소리가 나지 않는 무음으로 변경했음이 기억났습니다. 결국 온 집안을 다 뒤진 끝에 소파 틈 사이에서 어렵게 발견했습니다(소파에 앉다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빠진 듯합니다). 아무튼 이 일을 통해 소리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렇게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함을 묵상해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내는 소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께서 들을 수 있는 소리, 즉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를 통해 내 존재를 주님께 알릴 수 있으며, 주님의 선택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 내 마음의 밭 역시 잘 가꿀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과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좋은 땅이 될 때 주님의 좋은 씨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시지요. 그러므로 좋은 땅이 되도록 내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주님께 끊임없이 소리를 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나의 필요에 의해서만 기도를 하려 하기에, 내 마음의 밭을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형편없는 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 신경을 쓰이게 만드는 소리가 나면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지요. 우리가 이렇다면 주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주님의 모상대로 그리고 주님의 숨을 받아 창조되었기에,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주님께서도 싫어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주님께서 원하는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 영적인 몸이 되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라면, 당신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토마스 머튼)

받아들이는 마음(‘좋은생각’ 중에서)

일본 고전 연극인 가부키의 대부 모리타 간야가 나그네 역을 맡아 공연할 때였다. 분장을 마치고 무대에 오르려는 찰나 한 문하생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스승님, 잠시만요. 짚신 끈이 풀렸습니다.”

간야는 문하생의 지적에 고맙다고 대답한 뒤 무릎을 굽혀 짚신 끈을 꽉 맸다. 그러고는 문하생이 없는 곳에서 다시 느슨하게 풀었다. 사실 그는 오랜 여정에 지친 나그네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끈을 느슨하게 맸던 것이다.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기자가 공연이 끝나고 간야에게 물었다.

“왜 말하지 않으셨나요? 그 문하생은 공연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던데요. 그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 선생님의 의무 아닌가요?”

그러자 간야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의 친절한 관심과 호의는 받아들여야지요. 그러고 나서 가르쳐도 충분합니다. 연기 기술을 가르칠 기회는 많으니까요.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호의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저는 야구선수를 아주 잠깐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야구를 무척 좋아하지만, 어렸을 때에는 밥 먹는 것보다도 더 야구를 좋아했거든요. 또한 같은 친구들끼리 야구를 하면 강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곧잘 했기 때문에 꼭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졸라서 학교 야구부에 입단할 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야구선수로서의 생활은 그리 길지가 않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거든요.

사실 저는 들어가자마자 주전이 될 줄 알았습니다. 4번 타자가 되고 투수가 되어서 이름을 날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손에는 야구배트와 글러브가 주어지기 보다는 주전자가 들려졌으며, 주로 이곳저곳으로 버려져 있는 공을 찾으러 다니는 볼보이가 저의 첫 번째 보직이었습니다. 또한 가끔씩 무섭게 내려지는 감독님의 몽둥이 채벌을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2개월 만에 야구부 생활을 포기했습니다. 주전이 되지 못하고 볼보이나 해야 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처음부터 주전이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요. 또한 주전을 돕는 또 다른 선수들이 있기에 그 팀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즉, 조연이 있기 때문에 주연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주연이 아니라는 이유로 쉽게 포기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때 포기했기 때문에 이렇게 신부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볼보이 한다고 그리고 감독님께 매 맞는 것이 싫어서 그만두었던 제 자신을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한심해 보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노력하는 사람은 분명히 커다란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고 요행이나 바란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씨를 뿌리는데, 그 씨들이 길에 바위에 가시덤불에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지지요. 그렇다면 어떤 씨가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좋은 땅입니다. 그 좋은 땅이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이렇게 설명해주시지요.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바로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끈기 있게 주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요. 바로 길 위에, 바위에, 그리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의 모습인 것입니다. 비록 좋은 씨였지만 이러한 사람에게서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나는 어떤 땅의 모습일까요? 주님의 좋은 씨를 받아 백배 이상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경쟁력은 강점에서 시작한다(김익겸, ‘행복한 동행’ 중에서)

야구의 꽃이라 불리는 홈런. 홈런왕들은 늘 최고 선수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홈런왕들은 삼진도 많다.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승엽 선수는 지난해까지 439개의 홈런을 쳤지만 삼진은 무려 1,239개를 기록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행크 아론도 통산 735개 홈런을 쳤지만 1,383개의 삼진을 당했다. 최다 홈런 기록을 갖고 있는 배리 본즈 역시 홈런 762개에 삼진 1,539개를 기록했다. 만약 이들이 삼진을 의식한 채 방망이를 휘둘렀다면 홈런왕은 다른 사람들이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위대한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문법상의 실수나 철자를 잘못 쓰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약점은 편집 담당자에게 일임했고 고는 자신이 구상한 내용이 잘 전달될 수 있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랬기에 전쟁문학의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탄생할 수 있었다.

영화배우 성룡은 교육받을 기회가 없어서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이 때문에 난독증이라는 소문까지 돌았지만, 기죽지 않고 오히려 남들보다 더 빨리 대본을 외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성룡의 강점은 액션이다. 몸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모든 시선을 끌어 모았고, 마침내 최고의 액션 스타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강점과 약점이 존재한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하지만 약점을 보완한다고 해서 강점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강점이 더 큰 빛을 발하려면 약점이 아닌 강점에 집중해야 한다. 삼진 수가 줄어든다고 해서 홈런 수가 늘어나지 않는 것처럼 홈런이 강점이라면 홈런이 많아지게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나만의 강점 살리기, 경쟁력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인간성숙 그 위에 신앙의 씨앗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정한 방법이 아니라 열심히 노력해서 큰 부를 축척하는 사람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 운이 좋아서 부자가 된 것이 절대로 아니더군요.

우선 자신의 현실을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지출 및 투자 혹은 적금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최선을 다해 세운 계획에 따라 자신의 씀씀이를 조절하고 통제합니다. 연말이 되면 당연히 지난 한해 경과를 진단하고, 계획이 어긋났다면 수정을 가합니다. 이런 노력의 되풀이가 부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은 영적생활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총장이신 파스칼 차베스 신부님께서 자주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강조하시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바로 ‘계획하는 사고(Planning mentality)’입니다.

저희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은 연초에 한번씩 7일간의 의무 대 피정에 참가하는데, 피정 끝에 한해를 살아갈 개인생활계획서를 작성합니다. 영적 계획, 지적 계속, 청소년사목을 위한 계획, 인간적 계획...

여러 측면의 계획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측면이 ‘인간 성숙’을 위한 계획입니다. 끊임없는, 그리고 반복적인 인간성숙을 위한 노력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신 평생에 걸친 과제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어른이라고, 나이 60, 70이라고 한 인간이 완성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연세가 80이 넘은 분들 중에 아주 미성숙한 어르신,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의 어르신, 독단적 삶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어르신들도 계십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어덜트 차일드(Adult child)란 말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어른 아이’입니다. 몸은 어른입니다. 나이는 40이 넘었습니다. 외모도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의 미성숙이 온 천하에 다 드러납니다.

허우대도 멀쩡하신 분이, 가만히 계시면 정말 신사인데, 입을 다물고 있으면 참 좋은데, 입만 열었다 하면 괴물로 변합니다. 함부로 말해서 주변 사람들 상처를 줍니다. 이 사람 저 사람 힘들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좋은 땅’에 대한 강조를 하고 계십니다.

농사가 성공하기 위해서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적절한 수분, 적당한 일조량, 지속적인 잡초제거, 농부의 자식 키우는 듯한 마음...

그리고 빼놓은 수 없는 조건이 한 가지 있지요. 바로 좋은 토양입니다. 넉넉한 양질의 비료가 듬뿍 들어간 토양은 병충해를 극복하게 합니다. 알찬 결실의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좋은 토양은 어떤 것일까요?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 성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그러운 성품, 넉넉한 인품, 관대한 마음, 편안한 얼굴, 이타적인 태도, 합리적인 사고, 원만한 대인관계...

인간성숙,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평생에 걸친 과제입니다. 특별히 모든 지도자들이 끝도 없이 고민해야 할 측면입니다.

인간성숙 그 위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질 때 훨씬 더 바람직한 결과를 낳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신앙도 인간성숙 그 위에 쌓아올려진 신앙의 성숙입니다.

씨앗이 잘 자라도록

최영균 신부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종종 농사짓는 것에 비유되곤 합니다. 씨를 뿌리는 이유는 결실을 맺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결실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뿌리는 씨앗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의 세력들도 많이 있습니다. 불신, 시련, 걱정, 재물, 쾌락…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인생 앞에 놓인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도전들입니다. 씨앗이 이런 도전들에 의해 성장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별히 좋은 땅을 골라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좋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때 씨앗은 잘 자라납니다. 결실을 맺은 농부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 오늘도 좋은 땅을 찾도록 노력합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

김동욱 부제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계획을 세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시겠지만,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잘했는데도 결과는 저에게 실망과 좌절만 안겨줄 때도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기도가 부족했나 ?’, ‘정성이 부족했나 ?’ 가끔은 그 탓을 밖에서 찾아보기도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결국 다시 제 안에서 문제의 답을 찾아갑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두려움’ 입니다.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상처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자신감을 잃게 하고 온갖 것을 걱정하도록 저를 부추깁니다. 저는 어릴 때보다 지금이 더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피정 지도를 하면 수입이 얼마나 있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피정의 집 운영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역시 순수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그리고 힘이 들면 나를 기분 좋게 하고 흥미를 자극하는 오락거리를 통해 잠시나마 기분전환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순간적일 뿐입니다. 끝나면 아쉽고, 아쉬워서 더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런 제 모습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생각해 보면 저를 숨 막히게 한 온갖 걱정과 재물, 쾌락을 허락한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제가 저를 좀 더 자유롭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편없는 농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형편없는 농부.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는데,씨가 길에도 떨어지고,바위에도 떨어지고,가시덤불에도 떨어지고,좋은 땅에도 떨어져서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하고 많은 열매를 맺기도 한답니다.이 비유에 대해 묵상할 때 과거에는 씨가 뿌려지는 곳들의 상태에 대해서만 봤는데이번에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 봤습니다.왜냐면 이 복음의 제목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이렇게 형편없는 농부가 있습니까?그 귀한 씨앗을 아무 데나 뿌리는 농부가 어디 있습니까?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함부로 뿌려도 됩니까?저는 가끔 입을 앙 다물 때가 있습니다.저의 말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 같으면 입을 꽉 다무는 것입니다.이는 마치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는 이사야 말씀처럼저도 감히 제 말이 허사가 되지 않고 싶기 때문입니다.이것이 저의 자존심입니다.그런데 저의 말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치 않음에도 저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이렇게 말을 아끼는데정작 당신의 말씀은 완수하고야 돌아온다고 하시는 주님은당신의 말씀을 낭비하십니다.그런데 이렇게 당신의 말씀을 낮추는 하느님에게서 우리는 사랑을 봐야 합니다.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잔소리가 많습니다.잔소리가 입에 붙었다고 부정적으로 얘기하기도 하지만어머니니까,어머니의 사랑이니까 그렇게 줄기차게 잔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대단한 말씀이 아니고 잔소리 취급을 받고고귀한 말씀으로 우러름 받지 않고 낮은 소리로 짓밟힐지언정말씀을 아니 할 수 없는 겸손이고 사랑입니다.하느님의 말씀도 이러합니다.듣지 않는 우리도 듣기를 바라시며 계속해서 말씀을 내리십니다.이런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당연히 귀 기울여야 하고 우러러야 하지요.그러나 그것도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하느님은 나를 위해 말씀하시지 당신을 위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그러기에 안 받아들이면 길바닥이나 돌밭처럼 내 손해고받아들이면 좋은 땅처럼 많은 소출을 내기에 내 유익입니다.왜냐면 하느님 말씀은 사실소리가 아니고, 말도 아니고사랑이기 때문입니다.그러니 하느님 말씀은 듣는 것이 아니라보는(관상하는) 것이고느끼는 것이고누리는 것입니다.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잔소리로 듣는 사람은 불행하고 사랑으로 누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먼저 막스 에르만의 시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를 여러분에게 먼저 전해드립니다. 

한 친구에 대해 난 생각한다. 

어느 날 나는 그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손님으로 만원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늦어지자친구는 여종업원을 불러 호통을 쳤다. 

무시를 당한 여종업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난 지금 그 친구의 무덤 앞에 서 있다. 

식당에서 함께 식사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는데

그는 이제 땅속에 누워 있다. 

그런데 그 10분 때문에 그토록 화를 내다니……. 

우리는 미래에 대해 조금도 알 수 없습니다. 지레짐작을 하지만 그 짐작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냥 짐작에만 머물 때가 더 많았습니다. 하긴 그것이 더 정상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이 미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 아닌, 주님께 맡겨진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행해야 할 것은 미래를 탐내는 것이 아닌, 또한 과거에 연연하는 것도 아닌, 바로 지금이라는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에 좋은 씨를 심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씨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길, 바위, 가시덤불로 표현되는 마음의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씨라 할지라도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먼저 좋은 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 거름을 주고 땅 속에 묻혀있는 자갈도 골라내는 것처럼, 내 마음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들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바로 지금이라는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0분 뒤의 일도 알지 못하는 나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기억하면서, 주님이 아닌 내 자신을 드러내려는 어리석음은 이제 피해야 합니다. 대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지금 이 자리에서 실천하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이것이 미래를 가장 잘 준비하는 모습이니까요.

사람들은 비록 질그릇처럼 가난해도 참깨 같은 행복을 햇살에 턴다(이준관).

더 없이 따뜻했던 사람(‘좋은 생각’ 중에서)

주위 사람들은 그를 ‘정 많은 아저씨’라고 회고한다. 납치, 고문, 가택 연금, 사형 선고, 투옥 등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늘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 그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으며 가택 연금 당할 때였다. 그가 작은아들과 일주일 동안 읽을 책을 사러 서점에 가는 길이었다. 이번에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감시를 전담하던 형사가 따라붙었다. 불청객이나 다름없을 텐데도 그의 작은아들은 형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이 드신 분을 이렇게 따라다니게 해서 부담이 큽니다. 어디 다방에 가서 편히 계시면 책을 산 뒤 그 다방으로 가겠습니다.”

당황스러운 제안이지만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니 형사는 그 말을 따랐다. 그러자 정말 30분 뒤 작은아들은 약속한 장소로 찾아와 구입한 책 열두 권을 내려놓으면서 한눈에 보기 쉽도록 책의 이름과 저자를 적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이런 부자의 행동은 오히려 형사가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는 주변 사람을 시켜서 그날 누가 집에 왔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감시 요원에게 알려 주기도 했다. 혹시라도 감시 요원이 보고를 못해 윗사람에게 혼날까 봐 배려한 일이었다.

“내가 기록되고 싶은 역사의 한 페이지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이룬 사람의 페이지가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느냐 하는 사람의 페이지입니다.”라고 말한 김대중 전 대통령. 그 말처럼 자신 역시 인간답게 올곧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고, 모든 ‘인간’에 대한 예의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좋은 땅

김정미 수녀님

어느 신부님께서 “어떤 날은 열심히 강론 준비를 해서 강론을 하면 신자들이 모두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어떤 날은 강론 준비를 못해 허겁지겁 강론을 마치면 미사 후 신자들이 강론이 좋았다고 인사하더라.”시며 “어차피 강론은 하느님 말씀으로 하니 좋은 소리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복음에 따르면 ‘밭’의 상태에 따른 것이니 마음이 참 가볍다.”고 협박성(!) 발언을 했다.오늘 복음에서 뿌려진 ‘씨’는 ‘하느님 말씀’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복음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아도 그 뿌려진 씨는 밭이 관건인 것은 분명하다.2년 전에 빈 땅이 딸린 집을 구해 수리를 마치고 쉼터 이사를 했다. 공사하는 분들께 ‘이 빈 땅은 쉼터 소녀들이 꽃밭으로 예쁘게 꾸밀 정원 자리’라고 누누이 상기시키며 가능하면 시멘트나 공사자재가 닿지 않기를 반복해 부탁했다. “네, 네.” 하는 대답이 쉬웠다. 공사 기간 내내 공사장을 들락거렸어도 집이 꾸며지고, 드디어 아이들과 마당 딸린 집에 살게 되었다는 흥분 때문에 마당의 상황이 눈에 띄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사하고 겨울을 났다. 땅이 녹기 시작하면서 자꾸 마당에 철사·쇳조각·스티로폼 조각 등이 눈에 띄었다. 보이는 대로 주워 모으다 보니10포대가 넘었다. 어떻게 하나 걱정하며 아이들과 돌을 고르고, 눈에 띄는 대로 폐기물을 골라내며, 마당 한편에 꽃씨를 뿌렸다. 아이들은 꽃씨 뿌린 곳을 밟을까 봐 골라낸 돌로 경계도 만들고 나름대로 꽃밭 장식을 하고 열심히 물을 주었다. 씨를 심은 다음날부터(!) 싹이 나나 들여다보고 물 주고, 또 들여다보고 물을 주다 보니 더러 싹이 나기도 하는데 너무 비실거린다. 쉼터에 정원이 생긴다고 미국에서 독일에서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이름과 키우는 방법을 적어 씨앗들을 보내주었는데, 종자가 나쁘거나 심는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며 싹을 틔운 꽃들도 끝내 자라지 못하고 죽어갔고 정원은 다시 삭막한 빈터로 돌아갔다. 땅을 파보니 속까지 건축폐기물이다. 이웃에서 흙을 바꿔야지 안 된다며 공사할 때, 동네 주변의 건축폐기물들을 다 그 빈 땅에 묻고 겉만 흙으로 덮었다고 했다. 작년 겨울 이사 왔을 때와 똑같이 추운 집이 되었다. 나쁜 아저씨들! 그렇게 정원할 공간이라고 부탁을 했는데.올봄, 우여곡절 끝에 마당의 흙을 실어내고 여러 곳의 도움으로 마사토와 퇴비를 구해다 섞고 다시 정원을 꾸몄다. 젓가락 같은 과실나무들도 심고, 장미도 심고, 꽃잔디도 심었다. 남은 공간은 고구마를 심었다. 우리집 동물치료견인 ‘천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당에 나가 자연비료를 선사한다. 그리고 올해는 심어놓은 과실수 꽃들이 피고, 장미도 피고, 고구마 순도 자라고, 덤으로 심지 않은 각종 풀도 튼실하게 잘 자란다. 씨앗을 심어 백 배의 열매를 거두려면 ‘좋은 땅’, 곧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마음 밭’을 갈아야 한다. 어떤 때는 돌만 고르고, 어떤 때는 풀만 뽑고, 어떤 때는 퇴비를 주면 되지만 어떤 시기에는 우리의 마음 밭을 통째로 갈아엎어야 할 때도 있다. 인생의 단계마다, 인생의 고비마다 그리고 일상의 나날에서 우리의 마음 밭을 예수님과 함께 토실토실 일구자!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오랜만에 꽤 먼 거리를 탔지요. 총 122Km. 돌아오는 10월 3일에 자전거 순례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 답사 차원으로 인천에서 서울 잠실체육관까지 다녀왔습니다. 도시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아서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면서 문득 사람들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보게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지요. 지나가는 사람 얼굴 하나하나……. 저도 남자라고 미인인 여성만을 쳐다본 것이 아닐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고 저를 바라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성만 쳐다 본 것이 아니라, 걷기도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꼬마아이들의 얼굴까지……. 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표정이 다 다르고, 얼굴이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본 사람의 얼굴을 지나치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기억하려해도 도저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너무나도 귀여운 꼬마아이라 할지라도 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그 순간뿐입니다. 지나가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머리 나쁜 탓도 있겠지요. 그런데 아마도 여러분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고 계시면서 너무도 다른 우리들 각자를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세요.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그래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 지나가면서 얼핏 본 사람을 기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 각자를 기억하시는 것이고, 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이 보다 더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지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복음을 통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이 좋은 땅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나를 사랑하시기에 계속해서 기억을 멈추지 않으시는 분. 조금이라도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시기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시면서 당신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분.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 이러한 분이시기에 주님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절로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갈고닦지 않은 보석('행복한 동행' 중에서)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 변화라는 사람이 초산에서 옥 덩어리를 얻었다. 겉보기에는 돌 같았지만 그는 진귀한 옥의 원석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려왕에게 옥 덩어리를 선물했고 려왕은 옥장이에게 이를 감정하게 했다. 옥장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돌입니다."

려왕은 자신을 우롱했다고 생각해 변화의 왼발 발꿈치를 잘랐다. 시간이 흘러 려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했다. 변화는 그것을 무왕에게도 선물했다. 무왕도 옥장이에게 이를 감정하게 했는데, 그도 똑같은 대답을 했다. "이것은 돌입니다"

화가 난 무왕 역시 그의 다른 쪽 발꿈치를 잘랐다. 그 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하였다. 변화는 초산 아래에서 3일 밤낮으로 울었다. 문왕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변화를 불렀다.

"천하에 형벌을 받은 자가 많은데, 그대는 어째서 슬피 우는가?"

"형벌을 받은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옥을 돌이라 품평한 것을 슬퍼하는 것이며, 곧은 선비를 사기꾼이라 부르니, 이것이 슬퍼하는 바입니다."

문왕은 옥덩이를 갈고닦도록 지시했다. 그랬더니 돌처럼 보이던 옥 덩어리는 마침내 그 가치를 드러냈다. 후에 이 옥은 15개 성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가치를 인정받았고 진시황의 옥새로 쓰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좋은 원석이라도 갈고닦아야 그 가치를 알아 볼 수 있다.

희망 뿌리기

김인한 신부님

신학교 뒷동산에 텃밭을 일군 적이 있습니다. 산 아래쯤에 있는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었는데 물도 잘 빠지지 않는 좋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기껏 해놔봐야 고라니나 멧돼지들이 내려와서 채소들을 먹을 때는 허탈하기도 하고, 그만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들인 땀에 대견하게도 뭔가 피워내는 것을 보고 마음 흐뭇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지대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농사를 짓기보다 양이나 염소를 키우는 일을 합니다. 기름진 땅이 있긴 하지만 그건 아주 일부여서 좋은 땅이든 자갈밭과 풀이 난 곳이든 일단 씨를 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처럼 씨를 뿌린다는 것은 농부가 게으르고 무능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소출을 얻기 위해 척박한 땅이지만 희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에게도 복음의 씨앗, 사랑의 씨앗, 화해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우리가 씨앗을 싹틔우기 힘든 척박한 땅인데도, 주님께서는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묵묵히 우리 가운데 씨앗을 뿌리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희망하시는 주님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풍부히 받아들이고 열려 있다면 열매 맺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데 희망을 지닌 농부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쇠귀에 경 읽기

변진흥

우리 속담에 ‘쇠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지요.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이처럼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은 오히려 예수께서 일부러 이런 혼란을 조장하시는 듯한 상황이어서 알아듣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다시 곱씹어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시지만 그분의 선택과 은총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일러주어도 ‘쇠귀에 경 읽기’일 수밖에 없으니 그저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어라 하는 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실제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기는 힘듭니다. 마치 햇빛이 사물을 구분하게 하듯이 그분 은총의 빛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 은총의 빛으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수월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요. 성경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말입니다.그러나 신앙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해 주어도 ‘쇠귀에 경 읽기’이기 십상이라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이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알아서 하라.’는 식의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우리로 치면 자기 자식 챙기는 모습처럼 그분만의 독특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내가 많은 열매를 맺는 영혼이 될 수 있을까?

강성덕 목사

작년에 봉사하던 공동체에서 여러 가지 작물을 심었다. 필요한 먹을거리의 상당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검은콩과 메주콩이다. 처음 밭에 심었을 때는 새들이 와서 모두 먹어치웠다. 결국 몇 곱의 노동량을 투입하여 모종을 해 옮겨 심었다. 자라는 콩에 흙을 북돋워주고, 웃자란 콩은 잘라주었다. 가을 추수 때 과연 얼마나 달렸는지 궁금해서 한 포기를 잡고 열매를 헤아려 보았다. 무려 430개나 달린 것도 있었다. 물론 가장 무성하게 달린 것은 메주콩이었다. 반면 검은콩은 잎은 무성하고 키도 컸지만 열매가 없는 것이 많았다. 

올해도 스무 가지가 넘는 작물을 심었다. 무농약·무비료를 고집하고 있다. 이미 많이 거두어 먹고 남는 것은 나누어주고 있다. 그렇지만 다 잘된 것만은 아니다. 토마토는 병이 들어 실패하였고, 옥수수는 큰 수확을 거두지 못할 것 같다. 고구마는 반 이상이 말랐다. 하지만 20포기 안팎으로 심었던 오이와 애호박은 매일 수확하는 기쁨이 넘친다. 씨를 뿌려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은 생명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예수님의 비유는 늘 현장감이 있어 좋다. 예수님도 농사일을 잘하시지 않았을까? 하지만 말씀을 읽으며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내가 많은 열매, 백배의 열매를 맺는 영혼이 될 수 있을까? 만일 맺지 못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분명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맺는다면 그것은 부지런한 농부이신 하느님과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의지한 우리가 하나 될 때일 것이다.

기름진 마음의 밭을 가꾸자.

최현욱 신부님

어떤 유명한 성자(현자)에게 가르침을 받던 제자가 하루는 스승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삶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삶은 진리를 깨달아 가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란 깨달은 사람이 말하는 것은 다 진리이다. 진리란 눈 뜬 사람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고, 눈 뜬 사람입니까?”

“깨닫고 눈 뜬 사람이란 자신의 삶의 중요성을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에 두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 에 두는 사람이다.”

그러자 제자가 또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인가?’ 라는 것은 자신의 가슴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인가? 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자신의 가슴속에 악을 품고 있으면 악이 나오고, 슬픔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슬픈 얼굴이 나오고, 기쁨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기쁜 삶의 모습이 나온다.”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가슴속에 무엇을 품고 살아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이 이제는 아주 근엄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 가슴속이 하나의 토양이 되게 하라. 그대 가슴속에 담긴 것이 밖으로 싹트게 된다. 그대 가슴속에 담긴 진리가 드러나서 그대의 삶을 결정하게 된다. 만일 그대의 마음속이 좋은 토양이라면 그대로부터 싹터 나오는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속이 나쁜 토양이라면 결코 좋은 것들이 싹터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마음은 그 씨가 뿌려지는 밭, 토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토양은 씨앗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네 부류의 사람으로 나뉘어 진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길바닥으로 표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 한쪽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돌밭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머리로, 지식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세 번째는 가시밭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기는 하지만 세상의 온갖 걱정이나 유혹이 있을 때마다 쉽게 흔들리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 삶과 연결이 되지 않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마지막 네 번째는 좋은 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온갖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지는 내 마음의 밭이 길바닥인지, 돌밭인지, 가시덤불인지, 비옥한 땅인지, 우리 각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리고 과연 나는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이 누구는 좋은 땅이고, 누구는 길바닥이고, 누구는 돌밭이고, 누구는 가시덤불이라고 구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누군가에 대해서 “저 사람은 가시밭이다, 저 사람은 길바닥이고 돌밭이다”라고 함부로 구분하고 그렇게 사람을 평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은 이렇게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비옥한 땅, 좋은 땅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마음의 밭이 도저히 씨앗이 뿌리내릴 수 없는 밭이라면 거름을 주고 잘 가꾸어서 좋은 토양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밭이 가시덤불이라면 삽과 곡괭이를 들고 그 가시나무를 뽑아버릴 수 있습니다. 또 내 마음의 밭이 돌밭이라면 그 돌들을 골라내면 되고, 길바닥이라면 쟁기로 갈아엎으면 다시 좋은 토양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기름진 마음의 밭을 가꾸라고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을 잘 받아들이고, 또 잘 가꾸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은 우리 마음의 밭이 좋은 밭이 될 수 있도록 어떻게 가꾸고 있는지 오늘 하루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를 살다

최혜영 수녀님

날이 갈수록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유의지가 있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할 수도 있고 응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신앙이 나에게 또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준다는 깨침을 누구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제가 잘 아는 황 진(라파엘) 선배님은 척수 공동증이란 희귀병으로 30년 넘게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제가 수도회에 입회할 무렵부터는 아예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라잉맨(누워 있는 사람)이라 부르며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의 불꽃을 태우셨습니다. 제 수도생활의 햇수만큼 그의 투병생활이 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하느님, 왜?”라는 질문과 함께 연말이면 그분이 만드신 달력을 파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그에게는 달력을 보내는 일이 자신이 아직도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그가 병만 나지 않았더라면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그림도 그리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을 텐데 하느님께서는 “왜?” 그토록 무거운 십자가를 주셨을까요? 그는 묵묵히 고통 받는 욥처럼 인내롭게 살아냄으로써 “살아 있는 존재는 누구나 존귀하며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몸으로 살아준 라파엘님께 경의를 표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가시덤불 사이로 자리는 싹

김덕진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덤불에 둘러싸여 있다. 물질이나 명예, 더 편하고 나은 삶을 원하는 우리의 욕심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도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거나 금세 시들어 버리게 하는 가시덤불을 만들어 낸다. 치열한 경쟁 시대, 돈이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세상을 살면서 욕심을 가지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욕심을 채워 나가는 과정이 어떠한가는 매우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내가 행복해지려 하는 것은 아닌가, 더 많은 다수에게 득이 되는 길이 있는데도 오직 나만, 내 가족만을 위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는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돌아보지 않는 순간 가시덤불이 나를 둘러싸고, 비옥하던 땅에는 바위들이 굴러오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은 불의를 보면 참지 않으셨고 가난한 이들, 억압받는 이들 편이셨다. 적극적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싸워주셨고,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셨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그러한 일들을 마주칠 때마다 번번이 그렇게 자신의 일처럼 나서셨다. 이렇게 살아야 좋은 땅에서 가시덤불도 돌덩이도 없이 싹을 틔우고 잘 자랄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애초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기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포기하기는 이르다. 그분께서는 당신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에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가시덤불을 다 잘라내지 못하더라도 잘라낸 몇 개의 가지 사이로 안간힘을 쓰며 자라나는 줄기를 기뻐하실 것이고, 돌덩이를 힘껏 밀어내고 자리잡은 뿌리에 박수를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땅과 씨앗

이회진 신부님

수도원에 들어올 때는 세상을 위해 훌륭한 봉사를 하고자 했습니다.

더 많은 사랑을 나누고, 더 많은 땀을 흘리며 사람들 가까이에 다가가 도울 수 있는 그런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수도회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더 열심히 살면서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더 많이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그때 양성 담당 신부님은 제게 자꾸 이것에 대해서 묵상을 반복해서 시켰습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자 한다는 생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며 반복해서 묵상을 시키는 양성 담당 신부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혈기 왕성한 제가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끝끝내 버티자 신부님은 제게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지향을 두기보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는 지향을 두고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제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던 어린 시절부터 성당에 대해 제 무의식 속에 잠긴 것은 무엇인가 열심히 착한 일을 하는 곳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마음에 받았습니다.

각자 받은 그 말씀의 씨앗은 무한한 사랑의 잠재력으로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그 말씀의 씨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고, 내가 성장하는 것이고, 내가 열매를 맺는 것이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사랑을 베풀고 열매를 맺어서 하늘에 복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늘에 복을 쌓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하늘에 (나의) 복을 쌓기 위한 것”이 되는 것이죠. 

많은 경우 우리는 봉사하지 못해서, 기도하지 못해서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돌아보아야 하고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봉사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 안에 하느님을 향한 내적 충만함이 자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움직이는 데 실제로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힘은 다른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의 근본은 자신의 힘과 의지, 용기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은총과 내적 충만함이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의지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씨앗의 성장하는 힘은 자신의 작은 몸이 아닙니다.

씨앗의 성장하는 힘은 그 안에 담긴 생명에 대한 잠재력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생명의 씨앗으로, 사랑과 희망의 잠재력으로 받은 우리기에,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님께 더 해드려야 하는가?” 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은 먼저 우리에게 당신 안에 머무르라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의 좋은 땅에 머무르며 당신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연히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루가 10,42 참조). 

아래 글은 하느님 안에 먼저 머무르려 했던 오상의 비오 신부님의 묵상 기도입니다.

좋은 땅에 머무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제게 늘 머물러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더욱 더 많이 사랑하고

주님과 함께 길동무가 되고자 합니다.

예수님, 제게 늘 머물러 주십시오.

이 삶의 어두운 밤과 저 많은 위험 속에

꼭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제게 늘 머물러 주십시오.

굳센 사랑만을 제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주님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주님, 제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제게 뿌려진 은총의 말씀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며칠간 세미나를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형제들을 위해 보다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겠는가?’하는 주제로 진행된 세미나를 위해 훌륭한 강사께서 물 건너 오셨습니다.

제대로 된 형제적 봉사를 위해 리더십, 조직력, 친화력, 참신한 아이디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등등 여러 덕목들이 요구되지만, 보다 우선적이고 중요한 덕목은 ‘영적생활에 우선권을 두는 삶’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봉사를 하기 원한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복잡한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심산유곡에 위치한 봉쇄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하루 온종일 기도 속에 보내는 사람일까요? 하루 10시간 이상 감실 앞에 앉아 성체조배에 전념하는 사람일까요?

그보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 무얼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운동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기도, 미사, 영적 독서, 피정뿐만 아니라 공부 휴식, 운동, 취미활동, 잠을 잘 때에도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은 바로 영적인 사람이며 제대로 된 영성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보다는 성령의 활동에 많은 부분을 내어맡기는 사람, 밤이슬 내리듯, 미풍이 불어오듯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영적인 사람이야말로 보다 효과적인 형제적 봉사를 위해 적합한 사람입니다.

좋은 말씀들을, 핵심을 찌르는 말씀들에 다들 많이 반성을 했고, 형제들과의 공동체 생활에 새로운 전망을 지니게 되어 다들 기뻐했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주신 뜻밖의 선물로 여겨졌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들은 그 말씀들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는 일입니다. 피부로 와 닿는 만만치 않는 현실 앞에서 가르침을 떠올리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인내를 통해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앞에 펼쳐진 현실은 이론과는 너무나 다르더군요. 집으로 돌아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인내심이 흔들립니다. 갑자기 다가온 잡다한 걱정거리들로 인해 숨이 막힙니다. 밀린 숙제들이 압박합니다. 그 주옥같은 말씀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뿌려진 은총의 말씀들이 바람에 흩어지지 말고 제 마음의 밭 안에 뿌리내려지길 기대합니다. 지속적인 자기 비움과 낮춤으로 말씀의 씨앗들이 숨 막히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작고 초라하나마 싹을 틔우고, 작은 열매나마 맺히기를 소망합니다.

마음 땅 가꾸기

조성풍 신부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 한 해의 결실을 나누는 시기입니다. 자연이 제공한 결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마련한 신앙의 열매를 하느님 안에서 나눈다면 더없이 좋을 시간입니다. 한 해의 풍요로운 결실을 위해 농부는 기름진 땅을 만들고, 곡식을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의 땅을 잘 가꾸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종종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항상 좋은 땅과 같은 마음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에는 길바닥인 때도, 바위투성인 때도, 그리고 가시덤불 같은 때도 있습니다. 새가 쪼아 먹거나 발에 짓밟혀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게만 느껴지는 길바닥의 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 안에서 그 관계가 깨져버린 바위투성이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었다고 여겼으나, 나를 옭아매 숨이 막혀버리게 하는 가시덤불 같은 만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는 이런 길바닥이나 바위투성이,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의 체험들이 있습니다. 서로 그런 체험들을 나누며 위로를 주고받으면서 한 가족으로서의 깊은 정을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캐나다의 리코크라는 문학가가 「오늘」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경고의 글을 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은 이상하다. 어린 아이는 「내가 큰 아이가 되면……」이라고 말한다. 큰 아이는 「내가 성인이 되면……」이라고 말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내가 결혼을 하면……」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는 그는 또 「내가 은퇴하면……」이라고 말한다. 마침내 은퇴하였다. 그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거기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을 뿐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 늦게 깨달았다. 현재 살고 있는 그 가운데에 인생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미래만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현재라는 이 순간을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들의 우둔한 모습들을 꾸짖고 있는 글이 아닐까 싶네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값진 선물을 주셨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소중한 선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우리 각자의 모습입니다. 혹시 더 큰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 때문일까요? 그래서 ‘오늘’이라는 또한 ‘지금’이라는 이 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내가 .... 이 되면’이라는 조건이 담긴 미래의 시간만을 바라보면서 정작 현재를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다 보니, 이제까지 예수님께서는 어떤 결과를 직접 주시지는 않았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열매를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씨만을 주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는 그 씨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만을 원하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들의 마음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어떤 결과를 뜻하는 열매를 나눠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 시작을 의미하는 ‘씨’를 나눠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딱 하나의 씨로 딱 한 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의 자그마한 씨로도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딱 하나의 열매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지요. 딱 한 개의 열매만을 원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대신 씨를 주심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이 순간에 주님으로부터 받은 ‘씨’를 가지고 풍성한 열매들을 만드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금이라는 이 순간에 당장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밭을 잘 갈아야 할 것이고, 거름도 주어야 할 것이며, 말라 죽지 않도록 물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언제 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지금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열매를 주시지 않습니다. 씨만 주십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 씨를 키워나가는 것은 바로 나의 몫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오늘을 만드는 멋진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열매를 주시지 않는다고 주님을 탓하지 맙시다. 더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씨를 주셨으니까요.

열정적으로 오늘을 사는 10가지 지혜(‘좋은글’ 중에서)

1. 오늘만은 행복하게 지내자.

인간은 자신이 결심한 만큼 행복해진다.

2. 오늘만은 나 자신을 주어진 장소와 상황에 순응시켜 보자.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가족, 사업, 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3. 오늘만은 내 몸을 아끼자.

운동을 하고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자. 내 몸을 혹사하거나 함부로 부리지 말자.

4. 오늘만은 한 가지라도 유익한 것을 배워 보자.

정신적인 게으름뱅이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사고와 집중을 필요로 하는 책을 읽자.

5. 오늘만은 세 가지 방법으로 내 영혼을 훈련시키자.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하자. 싫었던 일을 자진해서 해 보자.

6. 오늘만은 유쾌하게 지내자.

활발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자. 무슨 일이든 꾀를 부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꾸짖지 말고 칭찬하자.

7. 오늘만은 오늘 하루로써 살아 보자.

삶의 모든 문제를 앞에 놓고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덤벼들어선 안 된다. 그러나 일생을 두고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라면 오늘 하루 만에 해결해 보자.

8. 오늘만은 하루의 계획을 작성해 보자.

시간에 따라서 해야 할 일들을 적어보기로 하자. 충동과 주저라는 악습을 제거할 수도 있다.

9. 오늘만은 30분이라도 혼자서 조용히 쉬는 시간을 가져 보자.

그러면서 자신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과거와 미래의 내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0. 오늘만은 두려워하지 말자.

행복해지도록 노력하자. 사랑 앞에 겁내지 말자. 내가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나에게도 사랑을 주리라고 믿어 보자.

내 행복을 자로 재어 보세요.

1~10까지의 눈금자를 가지고 지금은 몇인지 더 올리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찾아보세요.

찾았으면 오늘 바로 하나를 해보세요.

톰피터스는 말합니다. 여기 행동가가 죽었다라는 묘비명을 가지고 싶다고 말이죠!

행동하는 하루 어때요!

씨 뿌리는 사람

강영구 신부님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서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가 쪼아 먹기도 하였다.

찾아갈 고향이 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반겨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고생을 마다하고 고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 사랑 나누는 행복하고 즐거운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던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 심은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갈라디아 6,8-9)

인생살이는 씨 뿌리는 것입니다.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탐욕(貪慾)과 이기(利己)의 씨를 뿌리는 사람도 있고, 하늘의 소리를 듣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은총의 씨를 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받고,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 받습니다. 나누고 베풀며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자비를 받습니다. 

하늘나라(天國)를 뿌리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거두고 누립니다.

미움과 증오, 원한과 원망, 탐욕과 이기심으로 지옥(地獄)을 심은 사람은 지옥(地獄)을 거둡니다.

행복도 불행도, 천국도 지옥도 내가 뿌리고 거둡니다. (一明)

마음이 비뚤어진 아가씨 당신은 정원을 어떻게 가꾸시나요

어떤 사람이 어떤 고승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고승은 그에게 축복을 내리면서 성스러운 주문을 속삭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절대 이 주문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그러자 그 제자가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이 주문을 발설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문을 들은 사람은 무지와 고통에서 해방되겠지. 하지만 너는 이곳에서 쫓겨나고 평생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스승은 이렇게 엄중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제자는 벌떡 일어나서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광장으로 가서 백성들을 불러 모은 다음, 신성한 주문을 크게 외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다른 제자들은 아우성치기 시작합니다.

“저 자를 막아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 고승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고 해요.

“놔두어라. 그는 내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이미 스승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

왜 이 제자가 고승의 칭찬을 받게 되었을까요? 다른 제자들은 주문을 발설하면 쫓겨나고 평생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말에 침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제자는 달랐지요. 이 제자는 주문을 들은 사람들이 무지와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말에 광장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전해줍니다. 즉, 자신이 받을 비난과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다른 이들의 해방을 위해서 밖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 놓일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어떤 판단 기준을 따르고 있는지요? 자신이 받을 비난과 고통을 생각하면서, 결국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의 계명은 맨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 비유 말씀을 해주시면서 그에 대한 설명도 하십니다. 즉, 우리들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래야 꾸준히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 그토록 강조해서 말씀하셨던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착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강조하시는 그 사랑인데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랑만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나요? 스스로 내 마음을 길바닥, 바위, 가시덤불로 만들어서 남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기 사랑만을 추구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좋은 땅을 만들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마음이 이렇게 좋은 땅이 되면 어떨까요? 아마도 열매로 가득한 세상, 사랑이 가득한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그 행복한 세상의 시작이 바로 내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다른 이를 위한 배려를 먼저 합시다.

내일은 공짜(행복한 동행 중에서)

작은 마을의 동네 서점에 '내일은 책을 무료로 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었다.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왔던 사람들은 현수막에 저긴 문구를 보고는 '내일 다시 와야지'하며 책을 사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그 다음날, 현수막을 보고 책을 사지 않은 채 돌아갔던 사람들이 서점을 다시 찾았다. 사람들은 고를 수 있을 만큼 많은 책을 집었다. 그런데 계산대에서 다른 손님이 책값을 내고 있었다. 이를 본 한 사람이 주인에게 물었다.

"오늘은 책을 무료로 준다고 해 놓고 왜 돈을 받는 거요?"

그러자 주인이 대답했다.

"내일 무료로 드린다고 했지, 오늘 무료로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돈을 내셔야 합니다."

그제야 그 사람이 현수막 아래 작게 쓰여 있는 글씨를 발견했다.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은 과거는 묻어 버려라.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현재에 행동하라. -롱펠로우"

† 땅을 탓하지 말자.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 모두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다.(마르 4,1-20; 마태 13,1-23) 루가는 마르코의 전승을 그대로 베끼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다. 마르코는 등불의 비유,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와 함께 씨 뿌리는 비유를 맨 앞에 놓았고, 마태오는 7개의 비유들(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을 모아 놓은 비유설교집(13장)에서 첫 번째 비유로 다루고 있다. 서로 약간의 차이는 보이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거의 같다. 특이한 점을 지적한다면,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서는 비유의 해설이 예수의 제자단에게만 따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마르코는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 제자들이 다가와 비유의 뜻을 물었다(마르 4,10)고 하며, 마태오는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오자(13,10) 그들에게만 비유의 뜻을 밝혀주신 것(13,18)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말씀 자체나 그에 대한 해설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물론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오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① 우선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곧바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거나 새의 밥이 되고 말았다. ② 바위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피웠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만 습기가 없어 말라 죽어버렸다. 그래서 마르코와 마태오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고 했다. ③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은 왕성한 덤불에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④ 마침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자라서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그 열매를 30배, 60배, 100배로 기록함으로써 토양(土壤)의 질(質)을 암시하고 있다.이렇게 오늘 비유는 그 자체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파종(播種)의 방법이나 그에 따른 수확을 가르치려 하신 것은 아니다. 비유란 원래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므로 예수께서 ‘무엇을’ 파종에 빗대어 말씀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선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씨앗이 떨어지는 곳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① 길바닥은 그야말로 가능성 제로의 상태를 말하며, 길바닥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은 충분히 세속적인 환경을 말한다. 하늘의 새는 그 말씀을 빼앗아 가는 악마를 뜻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믿음도 구원도 없다. ② 바위는 수분이 없어 씨앗을 감싸 않을 수 없는 마음이다. 말씀에 대한 반응은 있으나 세상의 시련과 고통이 닥치면 뿌리가 없어 믿음도 사라진다. ③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힌 마음이다. 말씀을 수용하여 믿음의 생활을 하지만 그 마음은 늘 세상의 온갖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더 가까이 있음을 뜻한다. 이것들에 눌려 믿음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것이다.④ 좋은 땅은 바르고 착한 마음을 뜻한다. 이 마음은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믿음의 뿌리와 생활의 줄기를 뻗어 꾸준히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나무에게는 슬픈 운명이 있다. 씨앗이 뿌려진 그곳에 싫든 좋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자신의 힘으로 옮겨 다닐 수 없는 슬픈 운명이다. 심겨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더워도 추워도 옷 한 벌 벗고 입지 못하는 그런 슬픈 운명이다. 그러나 진작 나무는 자신의 그런 운명을 슬퍼하지도 나무라지도 트집 잡지도 않는다. 자연이라는 큰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저 슬프다고 생각하는 쪽은 우리 인간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늘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남의 것이 더 크고 좋게 보이면 기뻐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슬프고 실망하며 포기한다. 그래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의 마음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토양과도 같다. 그러나 그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유로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의 토양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람이 나무에게서 배울 점은 많지만, 분명한 것은 나무와 사람은 다르며, 나무보다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이다. 길바닥이나, 바위나, 가시덤불과 같은 자신의 딱한 처지와 환경을 나무는 불평해도 바꿀 수 없으나, 사람은 바꾸어 개선(改善)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