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엄마가 되지 않는 방법

나쁜 아이가 아니라, 상처받은 아이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심리전문가 김혜진

「I killed my mother」

칸의 총아라고 불리 우는 자비에 둘란 감독의 2009년 데뷔작입니다. 자비에 둘란 감독은 영화에서 16세 사춘기 소년인 주인공 역까지 겸하고 있죠. 영화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더 이상 엄마의 아들이긴 싫다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아들은 "나는 누군가의 아들일 수는 있지만 엄마의 아들이긴 싫다." 고 말합니다. 영화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참 안 맞는데요. 특히 대화가 안 통합니다. 교통 신호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잘잘못을 따지며 훈계하고, 자신이 이야기할 땐 뉴스 듣는 데 방해가 된다고 조용히 하라고 하더니 음악을 듣고 있는데 이어폰을 빼버리며 이야기 좀 하자고 하는 어머니의 모순을 아들은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화내는 아들에게 급기야 어머니는 ‘니네 아빠랑 똑같지’라는 말을 합니다(‘지 애비 닮아서’ 라는 말은 어머니들의 만국 공통어 인가 봅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아들을 기숙학교에 보내려고 하죠. 기숙학교에 데려다 주는 어머니에게 독설을 날리며 아들은 묻습니다. “내가 오늘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영화에서 어머니는 이혼 후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습니다. 아들은 4세 이후로 항상 혼자였다고 말하죠. 아들은 어머니가 싫어하는 행동을 보란 듯이 다 하면서 어머니에게 “이래도 날 사랑해?” 라고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 행동은 부모 역할을 재확인하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불안할 때 ‘나쁜 행동(부모님이 싫어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이 안전한지 묻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이 때 부모님이 아이의 두려움을 읽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체벌하거나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것은 설령 일시적으로 그 행동을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화가 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폭력이든 심한 말이든 어떤 방법이든 다 동원해도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잠깐 나타나는 효과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큰 것 같습니다. 대신 부모님이 조절된 행동을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부모님을 통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 입니다. 감정 조절은 부모님들 편에서 아이가 하길 바라는 것이지만, 부모님도 하셔야 하는 것이죠.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 몇 가지만 소개할까 합니다.

우선, Stop & Think

화가 났을 때 잠시 멈추고,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생각하고 행동하세요. 지금 내가 아이한테 화풀이를 하는 건 아닌지, 아이가 한 행동에 비해 지나치진 않은지. 어떻게 말해야 아이에게 도움이 될지 멈추고 생각하세요. 부모님이 바라시는 건 아이가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이니까요. 화가 잘 조절되지 않을 때는 10을 거꾸로 세거나 물을 한잔 마시면서 잠깐 숨을 돌려도 되고 심호흡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I message

I message는 아이의 행동이 아닌 나의 감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차가 다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다니는 아이에게 “니가 제 정신이니” 하지 마시고, "밖에서 자꾸 뛰어 다니면 엄마는 너가 사고 날까봐 걱정돼" 라고 말하시면 됩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아이들은 부모님이 자신의 감정을 알아주길 원합니다. 아이들이 감정을 읽어주길 바라고 하는 질문이나 이야기에 비난이나 훈계를 하는 것은 오히려 반항심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시험을 망친 후 시험 문제를 낸 선생님을 탓하는 아이가 못마땅하더라도 “그러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 그랬니.” 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냥 “그래 잘하고 싶었을 텐데 못 봐서 속상하겠다.” 여기까지만 하시면 됩니다. 영화에서 4살 이후로 항상 혼자였다고 말하는 아들이 듣고 싶었던 말은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보다 “너가 많이 외로웠겠다” 는 말이었을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부모로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사실 아이는 잘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서 좌절감과 두려움, 무력감과 슬픔으로 떨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때 아이를 나쁜 아이로 본다면 부모조차도 화가 나고 등을 돌리고 싶어질지 모릅니다. 부모가 아닌 다른 성인은 오죽할까요. 그러면 아이들은 갈 곳이 없어지고 그 안에 두려움은 더 커지고 사랑받지 못할 행동만 골라서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아이로 본다면 안타깝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눈빛을 보고 진심을 알아차립니다. 아이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 보고 나쁜 아이로 규정짓고 내면의 마음은 공감하지 못한다면 어떤 훌륭한 조언도 약이 되지 못합니다. 그건 성인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몸에 상처가 났을 때는 아물 때까지 연고도 바르고 반창고도 붙여서 다시 상처가 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내가 오늘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라는 질문을 던진 후 대답을 듣지 않고 등을 돌리는 아들 뒤에서 어머니는 나지막하게 말합니다. “그럼 난 내일 죽을 거야.” 이런 저런 조언을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부모님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만큼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좌절감도 크겠죠. 마음이 잘 전달되지 않고, 전달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영화는 기숙학교에서 사라진 아들을 어머니가 찾아오는 장면으로 막을 내립니다. 아들은 부모가 이혼하기 전에 살던 집, 어머니를 사랑했던 장소에 와 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마음에 안 들고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으면서 아들은 어머니와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곳에 와 있습니다. 아이들의 미운 행동 뒤에는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이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이가 이렇게 묻는 날이 올 지 모릅니다. “이래도 날 사랑해?” 당신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담담하면서도 무심한 말투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이 흥미를 가지고 계속해서 글자를 읽어나가게 만들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첫 문장에서처럼 무심하고 담담한 사람이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한다는 주인공. 그 점이 여타 소설들과는 다른 점이라고 느껴졌고 재밌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첫 문장에 이어 주인공이 엄마의 장례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엄마가 죽은 게 오늘인지 어제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주인공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무관심해 보인다. 보통 부모님의 죽음을 겪은 사람에게서 기대할 만한, 슬픔을 표출하는 반응 하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의 엄마의 죽음에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장례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 뜨거운 햇빛과 녹아 갈라 터진 아스팔트의 끈적거리는 검은색 등, 녹아내리고 끈적거리는 검은색에 대한 묘사들이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죽음에 대해 주인공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뜨거운 태양 빛이 또다시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주인공이 아랍인 하나를 살해하는 장면에서였다. 그걸 실수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법정에서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죽였다고 증언할 정도로 태양이 무언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태양, 햇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장면의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 라거나 '타는 듯한 칼날이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친다'는 묘사가 태양에 관한 서술 중 흔치 않으면서도 태양빛이 숨이 막히도록 무겁게 내리누르는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해준다. 사실 '이방인'에서 태양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책 뒷편의 해석도 인터넷 검색 결과도 이거다 싶은 게 딱히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총을 쏜 주인공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저 그 순간에 태양이 내리쬐었을 뿐인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실제로 총을 쏴 본 적도, 사람을 죽여본 적도 없긴 하지만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그 순간의 '모든 것이 기우뚱' 하면서 갑자기 일이 일어난 그 느낌을 알 것도 같은 것이다.

 책의 2부에서는 1부의 말미에서 일어난 주인공의 살인에 관한 재판이 주요 내용이다. 재판을 보면 나로서는 답답하고 이래서는 안되지 않은가 싶은 부분들이 많았다. 먼저 검사 측에서 엄마의 죽음과 관련해 주인공의 부도덕적인 모습들을 걸고 넘어지는 것을 부적절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의 죽음을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와 주인공의 살인이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히려 살인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 마냥 증인까지 대동해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이 불편하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로서는 엄마의 죽음에 주인공이 보였던 행동들이 부적절하다는 전제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어머니의 관 옆에서 담배를 피운 것,  밀크 커피를 마신 것, 관 속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 않은 것, 울지 않은 것, 다음날 여자를 만난 것, 희극 영화를 본 것 모두 뭐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부모와 친밀하게 지내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주인공이 만났던 의도 자체와는 관계없이 이성을 만나 관계를 가지고 희극을 보는 일도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채우기 위해서 빈번히 행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행위 자체는 비난 받아서는 안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또한 계속해서 종교적 색채가 묻어 나오는 것 또한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물론 등장인물들의 종교를 존중하지만 종교를 꺼내 들 자리가 있고 아닌 자리가 있는 법이지 않은가. 예심 판사는 다짜고짜 십자가를 꺼내 휘두르면서 주인공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등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이후 증인들을 대동하고 벌어진 재판에서는 앞 문단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검사 측에서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의 '영혼'을 들여다봤지만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두 장면 모두 나를 아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는 재판이 이루어지는 동안 주인공이 소외되고 있다고 느껴졌다는 점이다. 분명 주인공의 재판임에도 주인공을 빼고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 느낌을 극대화 시켜주었던 것이 변호사가 '내가 죽인 것은 맞지만~'과 같이 자신이 뫼르소가 아님에도 뫼르소인 것처럼 말했을 때였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에도 거짓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죄를 뉘우친다는 말을 자신에게서 이끌어내고자 하는 순간에도, 거짓으로라도 그렇다고 말함으로써 조금 더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음에도 귀찮은 일이라고 여긴다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또한 엄마의 죽음에 대해 보인 태도는 슬픈 감정을 억제한 것이냐는 변호사의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런 진실 된 주인공의 모습은 분명 바람직한 것임에도 어색하고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반성하지 않더라도 반성한다고 말하고, 변호사의 물음에 감정을 억제하고 있던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예심 판사가 십자가를 들이대며 하느님을 믿지 않느냐고 압박할 때도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렇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 당연해진 사회적인 인식의 밖에 선 주인공이 이 점이 책의 제목인 '이방인'이 나타내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책 속의 세상에서는 어쩐지 당연해 보이는 어머니의 죽음에 슬픔을 보이는 행동도, 하느님을 믿는 것도 하지 않는 주인공이 이방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