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희 어느 소가 더 일을 잘라

역사를 움직인 관능의 대서사, 온몸으로 쓰여진 황실잔혹사!
천하의 역사는 황제와 남자들이 만들지만
황제와 남자는 궁궐의 여인들이 지배한다

오천년 중국 황실의 역사는 사실상 관능과 욕망의 투쟁사다!

유가 사상의 통치 이념 아래 전개되는 구중궁궐의 관능


중국의 왕조들은 유가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어짊과 충효를 연구했고, 효의 핵심이 대를 잇는 것이어서 자식을 못 낳는 것을 가장 큰 불효로 여겼다. 이는 황제 가문의 자손번성이 가장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를 빌미로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합법적으로 여색을 탐닉했다. 그리고 유가 사상에 입각해 그러한 생활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함임을 강조했다.
이는 어린 황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린 황족들은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에 성교육을 받는다. 특히 어린 황제나 태자에게는 이를 더욱 엄격하게 시행했으며, 이 교육은 엄선된 환관들이 담당했다. 궁에는 교육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춘궁도와 환희불 등을 대량으로 보관되고 있었고, 담당자는 이것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성교육을 받은 어린 황제나 태자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성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간혹 황제나 태후가 자신이 총애하는 궁녀를 보내 직접 경험하게 했다. 이때에는 성에 대해 잘 아는 궁녀들이 선정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성교육을 받는 황제들
백치 황제라 불리는 서진의 혜제 사마충은 13세에 혼인을 했다. 하지만 결혼 전 부친인 무제 사마염이 보낸 사구라는 여인을 통해 남녀가 합방하는 법을 배웠다. 얼마 후 태자의 곁을 떠난 사구는 임신한 상태였고, 이후 궁에서 아들을 낳았다. 몇 년 후 사마충은 무제의 궁에서 한 아이를 보았는데 무제로부터 자신의 아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북위의 문성제 탁발준 역시 결혼은 17세에 했지만 13세 때 궁녀와 잠자리를 가졌고 14세에 아버지가 되었다. 청대 황궁의 규정에 따르면 나이가 약간 많은 여덟 명의 단정한 궁녀를 선발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황제와 잠자리를 갖게 했다. 이 규정의 목적은 황제가 황후와의 첫날밤에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성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제 양공, 여동생과 정을 통한 패륜아
춘추 시대 제나라 양공은 황음무도하여 무고한 이를 죽이기도 했으며, 여색을 심하게 밝혔다. 특히 이복동생 문강과 태자 시절부터 정을 통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나중에 문강은 노 환공에게 시집을 갔는데 환공이 너무 늙어 부부 관계가 좋지 못하자 양공을 그리워했다. 그러다 노 환공과 함께 제나라를 방문할 일이 생겼다. 그때 서로를 그리워하던 문강과 양공은 통간하였다. 그리고 이를 알게 된 노 환공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고, 양공은 들통이 날까 겁나 역사 팽생을 시켜 환공을 죽여 버렸다. 이후 문강은 노나라로 귀국하지 않았고, 양공 역시 문강을 보내지 않은 채 계속 정을 통했다. 하지만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양공은 몇 년 후 반란군에 의해 처형되었고, 문강 역시 양공과 정을 통한 죄로 처형당했다.

양이 끄는 마차를 타고 잠자리 여인을 고른 진 무제
서진 무제 사마염은 삼국을 통일한 후 구중궁궐의 규모를 확대했다. 강남의 손오를 정벌한 뒤 궁녀의 수에 있어서 역사상 처음으로 만 명을 넘었기 때문이다. 미인들이 넘쳐났던 무제는 밤마다 어디로 갈지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무제는 양차를 발명해 구중궁궐을 지나다가 양이 멈춰 선 곳의 침소로 들어갔다. 이처럼 여인들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지냈던 무제는 백치 태자를 폐위하는 일도 황후의 뜻에 밀려 이루지 못했다. 결국 무제 사후 백치 아들 사마충이 황제가 되면서 서진 왕조가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주사위, 기름 도장을 이용해 잠자리를 정한 당 현종
역사상 가장 많은 후궁을 거느린 당 현종은 4만 명에 달하는 미인들을 모았다. 풍류를 즐겼던 그는 매일 누구의 침소에 들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러다 생각난 묘책이 매일 미인들을 모아 주사위를 던지게 한 다음 가장 높은 숫자가 나온 사람의 침소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은을 입은 미인의 수가 너무 많아 현종은 다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잠자리를 같이 한 미인의 팔에 계수나무에서 짜낸 붉은 기름으로 ‘풍월상신’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도장을 찍어 매일 다른 여인을 품을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인세에 없는 풍류를 즐기던 현종은 특히 양 귀비에 빠진 뒤로는 정사를 등한시했다. 이는 결국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고, 현종은 사랑하는 양 귀비를 잃은 것도 모자라 황위를 아들에게 양위해야 했다.

황제의 운명을 결정지은 춘약
명나라 영락제 이후 명과 청의 황제들 중에는 단명한 황제들이 많았다. 특히 융경제는 30세에 즉위하여 과도하게 쾌락을 즐긴 탓에 36세에 세상을 떠났다. 본래 체력이 약했던 융경제는 아름다운 미인들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춘약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약을 복용한 이후 종종 자신을 억제하지 못할 만큼 극도로 흥분했으며, 더 강렬한 쾌락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정사를 돌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청나라 함풍제 역시 21세에 즉위하여 방중술과 춘약에 심취하다 11년 만인 32세에 세상을 떠났다.
반면에 명나라 만력제는 10세에 즉위하여 48년 동안 재위에 있었는데 스승 장거정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아 춘약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강희제와 건륭제는 각기 61년, 60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오랜 재위 탓에 잠자리를 같이 한 여인들과 자손들이 많았다. 하지만 춘약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기간 황제로 지낼 수 있었다.

구중궁궐 주인 선발을 둘러싼 권력 투쟁
태후와 황제가 황후를 보는 기준과 견해는 달랐다. 성에 눈을 뜬 젊은 황제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을 원했다. 하지만 태후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황후가 선발되어 외척과 후족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했다. 이들의 등장이 태후의 세력에 영향을 줄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이는 권력욕이 강했던 태후의 입장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였다. 이들은 황후를 결정할 때 자신과 가문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다. 이로 인해 많은 태후들이 자신의 친인척 중에서 황후를 뽑기도 했다. 그래야 자신과 가문의 권력이 더욱 확고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삼촌과 결혼한 조카, 평생 처녀로 살다가 죽다
여후는 자신과 여 씨 집안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딸의 딸, 즉 손녀를 황제인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외삼촌이 조카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혜제는 모친의 뜻에 따라 혼인을 했지만 어릴 때부터 귀여워했던 조카와 도저히 성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혜제와 잠자리를 갖지 못했다. 15세에 황후가 된 그녀는 처녀로 25년 동안 길고 긴 외로운 밤을 홀로 보내다 40세에 죽었다.

외사촌과 결혼한 황후, 평생 사랑을 받지 못하다
청나라 동치제 역시 생모인 서태후의 의향에 따라 마음에 없는 외사촌 누이를 황후로 맞이했다.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던 동치제는 이에 반발하여 평생 황후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처럼 권력 투쟁에 희생되어 황후가 된 여인들은 대부분 불행한 삶을 살았다.

꽃향기 흩날리는 여인들의 전쟁터, 구중궁궐
꽃향기가 흩날리는 아름답고 화려해 보이는 구중궁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다. 구중궁궐 여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전쟁의 주인공은 황후와 비빈들이다. 그리고 수많은 궁녀들 중에서도 황제의 성은을 입은 궁녀만이 이 전쟁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다. 이 전쟁의 승자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황제다. 유일한 남성인 황제가 두 여인을 동시에 총애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총애를 얻은 여인이 승자가 된다.
비록 황후가 황제의 정실이고 구중궁궐을 이끄는 주인이라 하더라도 이 전쟁의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황후는 황제가 다른 여인을 총애해도 넓은 아량으로 질투하지 않고 화내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과 감정에 비추어 볼 때 같은 여성인 황후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질투에 휩싸인 대부분의 황후들은 이런 일을 하려 하지 않았고, 황제의 총애를 뺏어간 여인들을 잔혹하게 제거하기 일쑤였다.

연적의 눈과 귀, 입, 사지를 자르고 인간 돼지로 만든 여 태후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황후는 한 고조의 황후인 여후다. 고조 유방의 총애를 받고 황후의 자리까지 노리던 척 부인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녀는 유방이 세상을 떠나고 자신의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숨겨두었던 발톱을 드러냈다. 척 부인을 관노로 전락시켜 온종일 냉궁에서 쌀을 찧게 했으며, 그녀의 아들을 독살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자 척 부인의 두 손, 두 발을 모두 자르고, 눈을 파내고, 귀를 멀게 했다. 그리고 약을 먹여 말도 못하게 했다. 끝내 변소에 끌려 들어가 인간 돼지라 불린 척 부인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황제의 주검이 식기 전 연적을 살해한 두 황후
한 환제의 황후 두 씨는 환제가 채녀 전성을 총애하자 질투심이 끓어올랐지만 환제의 생전에는 겨우 참았다. 그리고 환제가 죽자 두 씨는 환제의 주검이 채 식기도 전에 사람을 보내 전성을 잔인하게 죽였다.

궁녀의 두 손을 잘라 찬합에 담아 황제에게 보낸 이봉낭
남송 광종의 황후인 이봉낭은 사납고 질투심이 많았으며 방자한 여인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광종이 손을 씻다가 시중을 들던 궁녀의 손이 희고 보드라워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황후는 아름답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찬합 하나를 광종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안을 들여다본 광종은 깜짝 놀랐다. 그 안에는 광종이 아름답다고 여긴 궁녀의 두 손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광종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궁을 나간 사이 이 황후는 광종이 총애하던 황 귀비를 때려죽여 버렸다. 이 일로 크게 충격을 받은 광종은 병을 얻었고, 얼마 후 죽고 말았다.

황제가 스스로 아들을 살해하게 만든 조 씨 자매
한 성제의 총애를 듬뿍 받았던 조 씨 자매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자 표독스러워진 자매는 다른 여인들도 황제의 아이를 낳지 못하게 했다. 언니인 조비연이 황후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 씨 성을 가진 궁녀가 황제의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조 씨 자매는 그녀가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고 모함해 그녀를 옥에 가둬 자결하게 하고, 11일 된 그녀의 아들도 죽였다. 또 허 미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성제가 그 사실을 동생인 조 소의에게 알렸다. 그러자 그녀는 그 순간 대성통곡을 터트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황제와의 잠자리를 거부한 다음 화가 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진심으로 저희 자매를 아끼신다면 허 미인이 낳은 아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세요.” 그녀의 비위를 맞출 생각밖에 없던 성제는 결국 허 미인의 아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임신한 궁녀의 배를 창으로 찔러 죽인 가 황후
진 혜제의 황후 가남풍은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걸핏하면 죽여 버렸다. 태자비 시절 한번은 태자의 아이를 임신한 궁녀가 곧 출산한다는 말을 듣자 그 궁녀를 당장 끌고 오게 했다. 궁녀를 보자마자 가남풍은 옆에 있던 창을 들어 볼록 솟은 배를 사정없이 찔러 버렸다. 궁녀와 뱃속의 아기는 시뻘건 피를 내뿜으며 그 자리에서 죽었다.

임신한 궁녀에게 억지로 낙태약을 먹인 만 귀비
명나라 성화제의 후궁이 된 만 씨는 성화제가 즉위한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다. 성화제는 매우 기뻐하며 전국에 특사를 파견해 산천과 천지신령께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고, 만 씨를 귀비로 책봉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만 귀비의 아들은 요절했다. 만 귀비는 다시 임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이후로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화풀이를 다른 후궁들에게 퍼부었다. 황제의 성은을 입었거나 황제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들이 만 귀비에게 낙태를 강요당한 것이다. 만 귀비는 그녀들에게 낙태약을 억지로 먹게 했다. 이는 여인들로서는 죽거나 노역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처사였고, 낙태약을 먹은 여인들은 비통해하며 죽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구중궁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만 귀비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황후가 되기 위해 갓 태어난 자신의 딸을 죽인 무측천
당 고종의 후궁 무측천은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통통하고 귀여운 고종의 딸을 낳았고, 고종은 그 딸을 매우 사랑했다. 무미는 이것을 기회로 여기고 갓 태어난 자신의 딸을 주저 없이 죽인 다음 그 죄를 왕 황후에게 뒤집어씌웠다. 이로 인해 왕 황후의 폐위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 사건은 강력한 피바람을 몰고 왔고 무미는 이 사건의 최대 수혜자이자 승리자가 되었다.

무측천, 첫째 아들을 독살하고, 둘째 아들에게 자결을 강요하여 권력을 지키다
한편 권력욕이 강했던 무측천으로서는 황후가 된 뒤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권위를 침해하는 자가 생기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친아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무측천의 처사가 과할 때마다 태자 이홍은 완곡하게 진언을 했고, 그로 인해 무측천은 점차 아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때마침 소 숙비의 두 딸 의양공주와 의성공주는 감금되어 지낸 탓에 서른이 될 때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다. 이에 마음이 아팠던 이홍은 두 누이의 결혼을 청했고, 고종은 흔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이 일은 무측천이 태자 이홍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게 된 이유가 되었다. 무측천은 황후가 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죽였던 것처럼 권력을 지키기 위해 태자 이홍을 독살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이현이 태자가 되었지만 형처럼 강직했던 이현도 얼마 후 무측천에게 미움을 사 폐서인 되었고, 끝내는 자결을 강요받았다.

동성애 - 황제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던 남성들
황제가 남색을 즐기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무절제한 성생활의 일부분이었고 또 다른 즐거움의 하나일뿐이었다. 황제의 동성 연인인 남총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궁에서 황제의 시중을 드는 잘생기고 여성 같은 환관들이었고, 또 한 부류는 조정의 신하나 궁 밖에 있는 미남들 중 아름다움이 마치 여성을 방불케 하는 이들이었다.

남성들과 쾌락을 즐긴 한 무제
역사상 동성연애에 가장 심취했던 황제는 바로 한 무제 유철이다. 정력이 왕성했던 무제는 황후와 마음껏 성애를 나눴을 뿐만 아니라 넘치는 정력을 주체하지 못해 남성들과도 쾌락을 즐겼다. 사실 무제는 황제가 되기 전부터 동성애를 즐겼는데 그의 첫 번째 동성 연인은 미소년 한언이었다. 무제는 3세 때 교동왕으로 봉해진 이후 어린 시절을 그와 보냈다. 두 사람은 함께 공부하고 무술을 익혔으며, 함께 밥을 먹고 잠도 같이 잤다. 태자가 되었을 때 한언과의 관계는 더 깊어졌고, 황제가 되었을 때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를 좋지 않게 보았던 태후가 트집을 잡아 한언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 소식에 놀란 무제는 곧장 태후에게 달려가 한언의 용서를 간청했지만 태후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무제의 총애를 받던 한언은 이렇게 황천길로 떠났다.

황제의 순간적인 호기심에 생식기가 제거된 소년
명과 청 두 시대는 동성애가 매우 성행했었다. 풍족한 생활을 하던 귀족들은 모두 남색에 많은 흥미를 가졌다. 황제는 두말할 것도 없었는데, 특히 명나라 정덕제와 만력제가 관심이 많았다. 정덕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환관들 중에서 준수한 자들을 뽑아 성은을 내렸다. 그들을 ‘노아당’이라 불렀으며, 나중에는 ‘금강노아당’이라고 하는 성은을 입은 다른 환관들도 있었다. 정덕제의 남성 편력은 유별났다. 유람을 하던 정덕제는 노래하는 남자아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 정덕제가 아이의 이름을 묻자 옆에 있던 자들이 ‘두상백’이라는 별명을 알려주었다. 그 말에 한참을 웃던 정덕제가 놀리듯 물었다. “머리가 하얗다면 허리도 하얀 것이냐?” 그 말에 곁에 있던 환관들은 황제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하고, 아이의 생식기를 제거했다. 하지만 정덕제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었고, 그 아이를 다시는 찾지 않았다.

만력제의 잠자리 시중을 든 10명의 미소년들
만력제도 남성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총명하고 예쁘게 생긴 어린 환관 10여 명을 뽑아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거나 잠자리를 같이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십준’이라고 불렀다. 훗날 이들은 황제의 총애만 믿고 교만해졌고, 좋지 못한 무리들과 결탁해 재산을 축적했다. 그리고 만력제는 그러한 사실이 드러날 때마다 아무런 미련 없이 그들을 때려죽였다. 그렇게 하나씩 죽게 되자 십 수 년 후에는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환관 - 황제의 관능 독점을 위한 안전장치
황제는 태어날 때부터 환관들과 함께 생활한다. 유모의 품을 벗어날 정도로 자라면 환관들이 양육을 담당하였다. 황제는 환관을 대동하여 공부하였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산책을 나가고 예를 행했다. 심지어 환관에게 다양한 문화를 배우기도 했다.

황제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로 남녀의 경계에 선 환관
무엇보다 성 정체성을 잃은 환관은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중궁궐의 유일한 남성이고 싶어 한 황제의 욕심에 가장 부합한 존재들이었다. 황제의 특별한 신임을 받은 환관들은 모두 유년 시절부터 황제와 함께 한 동무이자 동지였다. 평생을 자신과 함께한 환관들에 대한 황제의 신임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환관의 횡포가 많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생계를 위해 스스로 거세한 남성들
송나라 시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환관이 되고 싶어 했다. 환관이 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생계유지였다. 의식주를 갖추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지만 그것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시골에 사는 남자들 중 일부는 결혼을 꿈도 꾸지 못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 하인이 되길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구중궁궐로 들어가 황제와 그의 여인들의 시중을 드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명대에는 스스로 거세한 사람들이 많았다.

남성으로서의 성적 욕구는 그대로 남아 있어
비록 남성의 상징을 잃은 환관이지만 생리적, 심리적 욕구는 여전히 남아 있어 아내를 맞이하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남성의식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은 여전했다. 물론 그 강도는 정상적인 남성들과 비교해 현저히 떨어지겠지만 이성을 원하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환관들은 타인이 자신을 정상적인 남성으로 봐주길 원했다. 그리고 아내를 맞이함으로써 남성임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원나라 때 조백안불화라는 환관이 있었는데, 그는 원래 거란 출신으로 궁형을 당한 후 구중궁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혼인을 한 상태였고, 후에 신뢰를 얻자 부인도 입궁시켜 부부생활을 지속했다. 기록을 살펴보면 조백안불화와 그의 부인은 서로 헤어지길 원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남편이 남성을 잃었어도 부인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백안불화 역시 성기능이 사라졌어도 부인을 향한 사랑만은 잃지 않았던 것이다.

성기능 회복을 위해 남자아이의 골수도 먹어
환관을 총지휘하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우두머리 환관의 권력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무엇이든 그가 마음먹은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이 강해도 거세로 인해 잃어버린 남성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을 동원하여 해결 방법을 알아보았다. 환관 고채는 복건에서 세수를 담당했는데 어떤 도사로부터 남자아이의 골수를 먹으면 성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남자아이의 골수를 구하기 위해 살수를 고용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남자아이들이 무고하게 살수의 칼에 죽었다. 위충현 역시 이와 똑같은 처방을 듣자 7명의 죄인을 죽여 그들의 골수를 먹어치웠다.
하지만 아무리 기록을 찾아봐도 생식기가 회복되었다는 환관의 이야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반면에 가짜 양물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있다. 명나라 정덕제 때의 우두머리 환관 유근이 가짜 양물을 사용하여 궁녀와 쾌락을 즐기던 중 궁녀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만력제 때에도 어떤 환관이 춤을 추러 온 여자아이와 가짜 양물을 사용해 쾌락을 즐겼는데, 여자아이가 그만 숨지고 말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덕제는 그 환관을 처형시켜버렸다.

결국 중국 오천 년을 실질적으로 만들어온 황실(구중궁궐)의 역사는 이렇듯 관능과 욕망이 뒤엉킨 전쟁터였음을 이 책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관능이 자리를 벗어나 권력이 될 때, 욕망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집착이 될 때 개인적으로는 죽음이 찾아오고, 왕조의 경우에는 멸망이 초래되는 구중궁궐의 역사를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역사, 어느 나라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중국 최고의 황실 역사 전문가로 1962년 후베이湖北성 마청麻城시에서 태어났다. 1979년 우한武漢대학을 졸업했다. 1983년 학위를 취득한 이후 줄곧 중국 황실의 역사와 문화, 그 중에서도 황실의 장서와 비밀리에 전해져오는 기록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며 중국 황실 역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 정사는 물론 정사에 없는 황제의 생활과 황실 문화에 관한 권위자로도 각광받고 있다. 2014년 현재 베이징 고궁박물관 연구원 겸 도서관 부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후궁적금지옥엽后宮的金枝玉》을 비롯하여《황제적불연皇帝的佛緣》, 《제왕후궁기실帝王後宮紀實》, 《궁금후비생활宮禁后妃生活》, 《중국황제유락생활中國皇帝遊樂生活》, 《중국역조황제생활전서中國歷朝皇帝生活全書》, 《중국역조황궁금위실록中國歷祖皇宮禁衛實錄》, 《여인자희女人慈禧》, 《 건륭양성지미乾隆生之》등이 있다.

제1장 구중궁궐에 피어나는 능소화
01 어린 황태자를 쟁취하려는 관능의 치마폭 | 02 젖을 물려 키운 황제를 유혹한 여인 | 03 평생 처녀로 살다가 죽은 황후들 | 04 구중궁궐의 여주인이 되는 길 | 05 첫날밤이 여자로서 황후의 운명을 결정한다 | 06 평생 고독 속에 살다 죽어간 황후들 | 07 비운의 황후들 - 연금, 폐위, 자결한 여인들 | 08 구중궁궐 - 꽃향기가 흩날리는 여인들의 전쟁터 | 09 하룻밤 잠자리에 목숨을 거는 여인들 | 10 황제를 따라 죽어야 하는 여인들 | 11 강희제를 보필한 황후 자매들 | 12 죽은 뒤에 황후가 된 여인들

제2장 관능과 암투의 전쟁터, 구중궁궐
01 시집간 누이 동생도 품은 제 양공 | 02 남녀 가릴 것 없이 온통 성애에 빠진 한 왕조 | 03 황제에게 성애의 기법을 전수한 여신들 | 04 방중술을 칭송하고 연구하던 남북조 시대 | 05 현종 한 남자만을 기다리던 4만 명의 여인들 | 06 늙어서도 젊음을 유지한 무측천 | 07 전족(작은 발)을 유행시킨 천재시인 이욱 | 08 춘궁화가 유행했던 송나라 | 09 밀교의식의 성생활이 범람했던 원나라 황실 | 10 인쇄술의 발달로 춘궁화가 성행한 명나라 | 11 명나라 영락제를 흠뻑 빠지게 한 조선의 여인 권비 | 12 구중궁궐에 방중술을 몰래 반입하는 자들 | 13 전쟁터에서도 황제의 곁을 지킨 여인 | 14 황제의 불로장생을 위한 명약으로 바쳐진 소녀들 | 15 권력을 생모에게 모두 뺏기고 방중술과 춘약에 빠진 동치제

제3장 기녀에서 만백성의 어머니가 된 여인
01 천하를 휘어잡은 진시황의 출생의 비밀 | 02 욕정에 끌려 아들마저 배신한 조 태후 | 03 일장춘몽으로 끝난 불륜의 사랑 | 04 조 태후를 진시황과 극적으로 화해시킨 충신 모초

제4장 한나라를 쥐고 흔들었던 여 태후
01 황제의 상을 지닌 남자와의 강제결혼 | 02 피바람을 예고하는 여 태후와 척 부인의 만남 | 03 실패로 끝난 태자 교체 | 04 천국에서 지옥으로도 바뀌는 구중궁궐 | 05 권력과 색정에 대한 욕망은 같은 뿌리 | 06 어둠 속으로 저물어가는 여인의 야망

제5장 황제를 동시에 차지한 조 씨 자매
01 경국지색의 근원을 구중궁궐에 들인 공주 | 02 여자의 숨은 적은 언제나 또 다른 여자 | 03 사랑을 포기하고 목숨을 건진 여인 | 04 황제를 꼭두각시로 전락시킨 쌍둥이 자매 | 05 조비연 때문에 충신을 버린 황제 | 06 황후의 임신을 위해 동원된 남자들 | 07 황제의 주검을 품은 여인의 눈물

제6장 여인들이 지배한 진나라 황실
01 우매한 아들을 태자로 책봉한 황후 | 02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한 가 씨 집안 여자 | 03 대참사의 서막을 알리는 가남풍의 입궁 | 04 임신한 궁녀들을 사냥하는 여인 | 05 내란을 조장해 숙적들을 제거한 가 황후 | 06 남자들도 마음껏 활용해 궁궐을 장악한 여인 | 07 황실의 모든 남자를 지배한 여인 | 08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태자의 운명 | 09 결국 왕조의 몰락으로 귀결된 여성 절대권력

제7장 요물과 여걸 두 얼굴의 운명
01 여황제의 출현을 알리는 예언 | 02 사나운 야생마의 영혼을 타고난 여인 | 03 아버지와 아들 모두에게 성은을 입은 여인 | 04 갓 태어난 친딸을 죽인 여인 | 05 혈육도 용서하지 않는 냉철한 여인 | 06 드디어 황제를 유폐시키고 대권을 독점하다 | 07 궁궐의 모든 남자를 거느리고 즐긴 여황제 | 08 비석에 아무 말도 새기지 말라 한 여인

제8장 경국지색의 미녀 양 귀비
01 천하의 미인들이 가득 몰린 구중궁궐 | 02 시아버지의 마음을 홀린 아름다운 며느리 | 03 권력을 쟁취하려면 남자의 마음을 읽어라 | 04 술을 마시면 더욱 아름다워지는 여인 | 05 돌에 새겨진 여인의 얼굴 | 06 경국지색 양 귀비를 배신한 건 양아들부터

제9장 권력 대신 사랑을 택한 기녀
01 재색을 겸비한 만능 예술인 | 02 죽음으로 황제의 사랑에 보답한 여인 | 03 낭만적 사치가 절정에 이른 시대 | 04 포로가 되어 사막으로 향하는 황실가족 | 05 치욕으로 생을 마감한 송나라 마지막 황제

제10장 어린 황제를 사로잡은 여인
01 18세 연하의 황제를 손에 넣은 여인 | 02 황제의 잠자리를 감시하다 | 03 만 귀비 몰래 아들을 낳은 궁녀 | 04 연인의 죽음에 죽음으로 답하다

제11장 여성과 남성의 경계에 선 남자들
01 남색을 즐긴 황제들 | 02 대제국을 멸망시킨 진시황의 남자 | 03 미녀만큼 미남을 사랑한 한 무제 | 04 귀족들도 남색을 즐긴 명청 시대

제12장 구중궁궐의 회색인들, 환관
01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노비 | 02 환관은 어떻게 되는가? | 03 ‘꿈의 직업’이 환관이었던 시대 | 04 환관의 공급과잉으로 생긴 규정 | 05 모든 업무는 오직 황제를 위하여 | 06 환관들만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한 | 07 희로애락을 표현할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 | 08 신체적 제약을 극복한 환관의 사랑 | 09 꺼지지 않는 성욕이 빚어낸 비극들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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