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워 호루라기 불던 어느 위치에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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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 VUNG TIENG HAN 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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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워 호루라기 불던 어느 위치에선가

이 소설은 저의 삶을 그대로 적은 글입니다.

주인공이 죽은 것 말고는 모두 사실입니다.

제가 목숨처럼 아끼던 우리 유리가 죽던 날

너무 힘들어 유리와 같이 가려고 과음을 하고 쓰러졌는데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삶을 산 저지만

제가 이 세상에 머물렀었다는 흔적을 남기고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논픽션 장편소설

사랑이 만든 기적

헤라

희뿌연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진다. 첫눈이다. 하늘을 바라보던 내 눈에 눈송이가 들어가 눈물과 함께 두 볼 위로 흐른다. 환청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초롱인 지금쯤 하늘나라에 도착했을까요? 아님, 아직도 가고 있는 중 일까요?”

그녀는 지금쯤 하늘나라에 도착했을까? 아님, 아직도 가고 있는 중일까?

그녀는 이렇게 눈이 내리는 겨울이 아닌, 라일락 피는 계절에 떠나고 싶어 했었다. 고운 라일락 향기를 타고 승천하고 싶어 했다. 그녀의 시집 ‘그대 있음에’에 나오는 시로 난 그걸 알 수 있었다.

라일락 피는 계절에

언젠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라일락 피는

봄날 오후에 떠나고 싶다.

라일락 고운 향기를 타고

승천하고 싶다.

이 세상에서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만

가슴에 품고

가볍게 날아오르고 싶다.

가슴 아팠던 기억,

슬펐던 기억,

힘들었던 기억,

모두

땅 속에 묻어두고

좋은 것만 품고 떠나고 싶다.

연보랏빛 고운

라일락 피는 계절에

내 삶을 마감하고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라일락 피는 계절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떠났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내가 살아있는 그녀를 본 건 딱 세 번이고, 네 번째 그녀의 마지막을 보았다.

내가 시골 파출소로 이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2016년 8월 5일 저녁 10시 10분쯤, 사무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받으니 여자 목소리였다.

“저, 지... 금... 죽... 을... 것만... 같... 아요.”

마음이 급했다.

“여보세요? 거기 어디죠?”

“…….”

“여보세요? 거기가 어딥니까?”

“…….”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 긴... 오가... 1리... 음... 음... 하얀... 울타리…….”

전화가 끊겼다. 난 이번에 함께 이동된 정경사와 함께 순찰차를 타고 출발했다. 밤이었지만 마음이 급해 속력을 냈다.

‘죽을 것만 같다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동한 다음 날, 언덕 위에 위치한 그 마을로 순찰을 나갔을 때, 마을 입구 왼쪽에 반원 모양이 반복된 아주 예쁘고 귀여운 하얀 울타리에 둘러싸인 집이 있었다. 대지가 천평이 훨씬 넘어 보이는 곳에 집이 두 채 있었는데, 지은 지 좀 되어 보이는 듯한 초록색 지붕의 단층집, 그 집 보다 조금 높은 곳에 새로 지은 듯한 아주 멋지고 예쁜 2층집이 있었고, 울타리를 커다란 벚나무가 감싸고, 정원에도 커다란 나무들이 많아 마치 숲속 동화의 나라와 같은 환상적인 집이었다.

‘저 집에 사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부러움 반, 궁금함 반이었던 그 집, 그래, 바로 그 집에 사는 사람이리라. 그런데 그 예쁜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차를 대문 앞에 세웠다. 대문 안엔 그녀의 차인 것 같은 검은 색 승용차가 서 있었다. 울타리를 닮은 낮은 대문은 밖에서도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헌집은 캄캄했고 새집에 불이 켜져 있어 그리로 갔다.

현관문을 여니 등은 노랗고 배는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거실로 들어가니 파란 원피스를 입은 긴 생머리의 여자가 바닥에 앉아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들어가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피아노엔 ‘은파’라는 악보가 펼쳐져 있었고, 탁자엔 빈 소주병만 두 개 놓여있었다.

“여보세요! 경찰입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조금... 전에 우리... 초롱이가 제... 품안에서... 주, 죽어 갔었어요. 우리... 초롱인.... 지금... 쯤 하늘나라에 도, 도착... 했을... 까요? 아님... 아, 아직 도... 가고... 있는... 주, 중일까요? 초롱아! 초롱아! 흑흑흑…….”

“초롱이가 누굽니까? 아줌마 딸입니까?”

“우리... 초롱이... 분명히 눈은... 뜨고 있었는데... 분명히... 숨도 쉬고 있었 는데... 자꾸만... 자꾸만... 몸이... 차가워지고... 있는... 거, 거였어요.”

“초롱이가 누굽니까?”

“…….”

아! 내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말만 하는 그녀, 안주도 없이 깡소주만 두병을 들이켜야 할 만큼 견디기 힘든, 엄청난 아픔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데 더 이상의 말을 들을 순 없었다. 그녀 혼자 있는 걸로 보아 그 집은 그녀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아닌, 별장 같은 곳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녀의 휴대폰을 열어 맨 마지막에 통화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경찰인데요. 이 폰의 주인과 어떤 사이죠?”

“아들인데요.”

“아, 예. 지금 어머니가 너무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 습니까?”

“아, 예, 이틀 째 병원 치료를 받고 온 길고양이 새끼가 좀 전에 죽었어요. 죽어가는 고양이를 엄마가 울면서 안고 계시다가 차마 숨넘어가는 거 못 보 시겠다며 수건에 싸서 엄마 침대 위에 올려놓고 별장으로 가셨어요. 불안해서 따라가려고 하니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그냥 보내드렸는데……. 엄마 떠나시 고 나서 10분 후에 죽어서 아빠가 묻어 주었다고 엄마께 전화했었는데 그 일 로 엄마가 큰 충격을 받으셨나 보네요.”

“어떡할까요? 너무 많이 취하셔서 혼자 두면 위험할 것 같아서요. 혹시 토하 시다가 기도가 막히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제가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지금 돌아가시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 합니다.”

우린 그녀가 기대고 있던 탁자가 돌탁자라서 일어서다 넘어져 다칠 수도 있겠다 싶어, 탁자를 소파에서 멀리로 밀어놓고 집을 나왔다.

다음 날 아침, 홍소장님께 어젯밤의 이야길 들려 드렸더니 그녀는 지난 해 가을, 집들이할 때 마을 사람들과 그녀의 제자들, 친척, 친구들 등 130 여명을 초대해서 출장 뷔폐로 정원에서 가든 파티를 열었는데 그 때 우리 파출소 직원들도 초대하여 식사도 대접했고, 그 자리에서 그녀의 시집도 선물 받았다며 ‘그대 있음에’란 컬러 시집을 보여주셨다.

“그 선생님이 술 드시고 파출소에 전화하실 분은 절대로 아닌데…….”

난 그녀의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그녀는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이 달의 스승’ 중에서 2016년 ‘4월의 스승’으로 선정되었다는 보도가 인터넷 신문을 도배하고, 2012년엔 ‘올해의 스승상’을 받아 ‘시골 학교에서만 일한 평교사, 어려운 제자에 사비 장학금 30년’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으며, 문화일보의 '좋은 선생님' 코너엔 그녀가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기사가 나와 있었다. 2010년 천안함 폭침시엔 그녀의 시 '어머니의 노래 (아들아, 이젠 널 보내줄게)’가 방송과 각종 신문을 통해 전국민을 울렸다는 기사가 있었고, mbn에서 만든 동영상도 올려져 있었다. 그 당시 나도 SBS TV에서 그 시의 동영상을 보며 너무나 가슴이 아파 이를 악물고 울음을 삼켰었는데, 그 시를 쓴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또한 교육부에서 발행하는 2013년 ‘꿈나래’ 1월호엔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바보 선생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되다’란 제목으로 기사가 실리고, 2013년 ‘새교육’ 5월호엔 ‘학생바라기’란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가 각종 블로그와 카페에 실려 있었고, 2002년엔 그녀가 KBS에서 주관한 ‘TV 동화 행복한 세상’ 독후감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그 작품도 함께 실려 있었으며, 그 외에도 그녀에 대한 기사가 아주 많이 실려 있었다.

‘길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잃고 마치 친 자식을 잃은 것처럼 너무나 아파하던 그녀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난 한동안 멍~~~ 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 때, 그렇게나 아파하던 그녀를 위로해 주지 못하고 지켜만 보다가 돌아온 내 자신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사실 당시 난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찮은 동물 한 마리의 죽음에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었고…….

그로부터 꼭 20일이 되던 8월 25일 오전, 그녀가 파출소를 찾아왔다. 그 당시보다 많이 수척해진 모습으로…….

“진작 찾아와서 사과를 드렸어야 했는데 그동안 몸을 가눌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아팠어요. 우리 초롱이를 잃은 아픔으로 힘들었고, 제가 저지른 엄청난 실수로 제 자신에게 실망하여 아팠고…….”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아니에요, 그 날은 저의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날로 기록될 거예요. 어 떻게 술을 먹고 파출소에 전화를……. 그런데 지금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제 가 전화한 것도, 경찰이 우리 별장에 오신 것도 전혀 기억이 없다는 거에 요. 우리 아들에게 이야길 전해 듣고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했죠. 그런데 통화기록을 보니 제가 전화한 게 맞더라구요. 그리고 CCTV 돌려보니 그 날, 오후 10시 22분에 두 분이 오셨다 11시 18분에 가신 모습이 2번, 3번, 4번 카메라에 찍혔더라구요.”

“필름이 끊기면 그럴 수 있습니다.”

“전 필름이 끊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 자신이 한 일이 이해도 안 되거니와 아무리 그래도 일부라도 기억이 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근데 전혀 기억이 안 나니……. 그리고 제가 주말엔 가족과 함께 별장에 오지만 평일엔 저 혼자 오기 때문에 밤엔 무섭기도 하고,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전화를 하려고 파출소 전화번호를 저장에 놓았어요. 모르긴 해도 파출소에 어떤 도움을 요청 하기 위해 전화했다기보다는 무의식 중에 아무 번호나 누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어쨌거나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비록 무의식 중이라 해도 제 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지금도 제 자신이 이해도 안 되고, 용서도 안 됩니다.”

“괜찮습니다.”

“사실 전 동물보호단체 회원이고 동물 24마리를 돌보고 있어요. 개 2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는 우리 집에서 기르는 동물이고, 나머진 모두 길고양이들이에 요. 올 봄에 고양이가 우리 앞집에 새끼 4마리를 낳았는데 그 공간은 사람이 들어가지 않는 건물 옆의 좁은 곳이라서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해마다 그곳 에 새끼를 낳더라구요. 작년까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다 죽었어요. 그곳은 담이 높아, 젖을 뗀 새끼들이 더운 여름에 물도, 사료도 먹지 못하기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요. 작년까진 사료를 비닐봉지에 싸서 던져 주었어요. 그러다 보니 흘린 사료들이 비를 맞아 부패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걸 먹어서인지 여 름을 넘기지 못하고 다 죽었어요. 그래서 올해는 제가 사다리를 놓고 담을 타 고 넘어가서 담 밑에 매트를 깔아 바닥을 평평하게 해 놓은 다음, 그곳에 줄 을 단 그릇에 사료와 물, 간식을 넘겨주었거든요. 잘 먹어서인지 새끼 네 마 리가 예쁘게 크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가장 덩치가 큰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먹질 못하는 거였어요. 병이 왔구나 싶어서 잡아서 병원에 데려가려했지만 잡히지 않아 가슴만 태우고 있었어요. 고양이가 먹지 않은지 일주일 이상 되던 날, 도망갈 힘조차 없어 잡혀주는 그 앨 안고 동물병원으 로 가서 검사해 보니 파보장염이 걸렸는데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 걱정이 라고 했어요. 또, 치사율이 높은 그 병을 이기기엔 너무 어리고……. 하지만 치료 잘 하면 희망이 있다고 했어요. 그 날, 하루종일 영양제를 맞혀서 집에 데려왔을 땐 처음과는 달리, 점프하여 침대에도 올라가고 생기가 있어 보였어 요. 다음 날 아침, 병원 가기 전에 그 애가 2층에 있는 제 방 창문에 앉아 밖 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거기서 내려다보면 자기 엄마와 형제들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가야, 엄마가 잘 치료해서 네 병 다 나으면 저기로 보내줄게.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응?’ 그리고 병원으로 데려갔어요. 그 날도 영양제와 항생제 맞추라고 병원에 맡겨 놓고 집으로 와서 더 좋아지리란 희 망에 들떠 있었어요. 하지만 오후 5시에 병원으로 데리러 가니 의사가 절망 적인 말을 하는 거였어요. 어제보다 상태가 많이 안 좋고 오늘 밤이 고비라는 거였어요. 전, 충격으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난 그녀에게 티슈를 빼주었다.

“집에 데리고 와서 안아보니 눈은 떠 있는데, 숨은 쉬고 있는데,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거였어요. ‘초롱아, 안 돼! 너 살리려고 엄마가 얼마나 노력했는 데, 엄마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러기가 어딨어?’ 하며 통곡을 했어 요. ‘초롱아, 힘을 내! 죽을 힘을 다 해서 병과 싸워 이겨!’라며 울부짖었어요. 하지만 몸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차마 숨 거두는 거 못 보겠어서 무을로 왔어요. 가슴을 치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어요. ‘초롱아, 미안해! 이렇게 빨리 떠날 줄 알았으면 그냥 너네 엄마 곁에 놔두는 건데, 엄마에게 잡혀 병 원으로 끌려가 피검사한다고 그 가녀린 다리에 주사 바늘 꽂을 때 얼마나 놀 라고 아팠니? 너를 살리지는 못하고 놀래키기만 하고……. 초롱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 엄마를 용서하지 마!’ 그러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어요.”

그녀는 강하게 흐느꼈다. 마치 그 날의 그 상황으로 되돌아간 듯, 아파서 못 견뎌했다.

“가슴이 찢어지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고,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 어요. 너무나 아파서, 정말이지 죽을만큼 아파서, 그 아픔을 피아노로 덜어보 려고 했어요. 손목이 시도록 피아노를 치면 좀 나을까 싶어서……. 그런데 아 니었어요. 음악은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힘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냉장 고 문을 열었어요. 마침, 얼마 전, 우리 별장으로 야유회 왔던 딸의 은행 직 원들이 먹다 남은 소주를 거기 넣어 놓았더라구요. 사실 전 술은 잘 못해요, 주량이 두잔 정도? 하지만 전 소주 한 병을 꺼내 병목을 잡고 물처럼 들이켰 어요. ‘초롱아! 하늘나라에 도착했니? 아님, 어디쯤 가고 있니? 어리디 어린 널 어떻게 혼자 보내니? 엄마랑 같이 가자, 응?’ 하면서 울고 또 울고……. 그러다 울산에 있는 둘째 딸에게 전화를 했어요. 전날, 초롱이 이야길 하니까 보고 싶다며 사진 찍어 보내라 했었거든요. 그래서 흐느끼며 ‘초롱이 사진 못 찍어. 초롱이 방금 하늘나라로 갔어. 엄마 지금 죽을만큼 아파. 차라리 죽고 싶어.’라고 말했어요. 또 친구에게도 전화했어요. 거기까진 기억이 나요. 하지 만 그 후론 기억이 없어요. 전혀…….”

그녀는 계속 강하게 흐느꼈다. 난 다시 티슈를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지금도 우리 초롱이가 마지막 날 아침에 창문에 앉아 자기 가족 내려다보 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져요. 얼마나 가족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까? 생각하면……. 사실 그 땐 그 모습이 마지막 모습일지 몰랐어요. 치료 받 으면 살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요. 사실 초롱일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렇 게 빨리 가진 않았을 것 같아요. 얼마쯤 더 살다가 엄마와 형제들 곁에서 편 하게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안하고 가슴 아파요. 초롱일 살리지도 못하고 고통만 주고 더 빨리 보내서…….”

“그래도 초롱인 선생님을 고마워할 겁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잘 알 테 니까요.”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꺼낸 첫 위로의 말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곤, 다시 한번 지난 번의 일에 대해 미안하고 고맙다며 자기가 쓴 시집을 나와 정경사에게 주고, 별장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길고양이들 만나러 간다며 바쁘게 사무실을 나갔다.

맑은 햇살 아래 가을빛이 유난히 곱던 날, 순찰차를 몰고 그 마을로 갔다. 그 마을을 지나가려면 그녀의 집 울타리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그녀의 정원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울타리를 둘러싼 벚나무들은 빨간 빛으로, 과수원의 감나무들은 주홍빛으로, 그녀가 가꾸었을 코스모스 밭엔 활짝 핀 코스모스들이 가을을 더욱 찬란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울타리 중간쯤 갔을 때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무슨 곡인진 모르지만 너무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그녀가 지난 번에 펼쳐 놓았던 악보의 ‘은파’라는 곡인가? 꾸밈음이 엄청 많 던데…….’

계속 듣고 싶었지만 근무 중이라 그럴 수 없어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가을이 한창 익어갈 때 또 그녀의 집을 지나가고 있었다. 정원에서 커다란 개와 놀던 그녀는 순찰차를 보자 손을 흔들며 후문으로 다가왔다.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차 한잔 하고 가세요.”

그녀가 후문을 열었다. 후문 안에 차를 넣고 나가려 하자 개가 짖었다. 멈칫하니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 해리 착해요. 절대로 물지 않아요.”

“아, 이름이 해리군요. 진돗개네요.”

“네. 집 나간지 8년만에 돌아온 해리에요.”

“예? 8년만에 돌아와요? 어떻게 그런 일이?”

“네. 이야길 하자면 길어요. 일단 정자로 가시죠. 거기서 차 한잔 하세요.”

난 정경사와 같이 초록색 지붕의 팔각정자로 올라갔다. 그녀는 과수원에서 딴 거라며 단감, 사과, 배를 예쁘게 깎아서 그릇에 담아왔다. 커피와 함께…….

“드셔 보세요. 우리 집 과일들이 약을 안 쳐서 작고 못생겼지만 맛은 그럭저 럭 괜찮더라구요.”

“표정이 많이 밝아지신 것 같아요. 하긴 두달 이상 지났으니…….”

“그렇게 보여요? 하지만 아직 많이 아파요. 그동안 제가 일기를 열심히 썼는 데 우리 초롱이 보내곤 거기서 그대로 멈추어 있어요.”

“그렇군요.”

“‘2016년 8월 5일 금요일 맑음. 우리 초롱이, 하늘의 별이 되다’ 그렇게 제목 만 써 놓고 아직 쓰지 못하고 있어요. 너무 아파서요. 저의 일기가 언제부터 이어질진 아직 몰라요. 어쩜 거기서 영원히 멈추어 있을지도…….”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많이 힘들어 하시는군요.”

그녀는 막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을 손으로 훔쳐냈다.

“우리 초롱이 살아있을 때, 그 애들에게 간식 주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요. 하루에 세 번, 참치에 게살과 닭가슴살이 섞인 캔 간식 5개를 따서 납작하고 둥근 그릇에 담고 영양제를 듬뿍 넣어 잘 비벼주면 새끼 네 마리와 어미가 동그랗게 둘러 앉아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그 이쁜 모습을 바라볼 때, 온몸 에 전율이 느껴지고 가슴은 환희로 가득 했어요. 간식 주는 시간을 기다리기 가 고통으로 느껴질 만큼,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요.”

“그랬군요.”

“고놈들이 시간을 어떻게 아는지 간식 시간이 되면 미리 모여서 우리 집 쪽 을 바라보며 우는 거예요. 간식을 주면서 ‘얘들아, 너희들은 시계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시간을 알아? 너희들 천재지?’ 그러면 고놈들은 고개 를 갸웃거리며 고 예쁜 눈으로 절 바라봐요. 두 눈을 깜빡! 하며 인사도 하 고…….”

그녀의 얼굴에 잠깐 미소가 피어났다.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가……. 그렁그렁 눈물방울을 매단 채 소리 없이 웃는 그녀! 그 순간, 난 그녀에게서 천사를 보았다.

“그럼, 나머지 세 마리는 잘 크고 있나요?”

“네. 우리 초롱이 가고 나서 의사가 다른 애들도 잠복기일 수 있다고 하여 긴장했어요. 피를 말릴만큼……. 그 병이 전염병이라서 더욱 불안했어요. 그 래서 면역력 높이려고 간식에 영양제도 더 많이 섞어주고 사료도 제일 좋은 걸로 사서 먹였어요. 다행히 그 애들은 잘 크고 있어요. 이제 어미와 몸집이 비슷한 걸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처음 선생님 집에 오던 날,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 나가 던데요.”

“아, 우리 아롱이요? 그 앤 무을 길고양이예요.”

“길고양이가 왜 방엘?”

“제가 무을 길고양이 열 아홉 마리 돌보고 있는데 아롱인 제일 늦게 만난 아 이에요. 작년 가을에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보자마자 저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떠는 거였어요. 안아주니 너무 좋아했어요. 보통 길고양이들은 경계 많이 하는데……. 근데 안아보니 너무나 마른 거였어요. 뼈만 앙상하더 라구요. 심각한 병에 걸린 것 같아 바로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피검사, 심 장사상충 검사, 초음파검사를 했는데 영양실조 외에 다른 이상은 없다 하여 몸에 진드기가 많아 진드기약 발라주고 구충제 먹였어요. 아롱인 힘이 없고 달리기도 못해서인지 다른 애들의 공격을 받아 늘 다리와 몸에 피가 묻어 있 었어요. 힘이 없으니 우리 집에 사료 먹으러 와도 다른 고양이 한 마리라도 있으면 못 먹고 가니 영양실조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제가 여기 오면 아롱이 를 많이 챙겨주었어요. 간식도 하루에 세 번 이상 주고, 사료도 좋은 것을 먹 이고, 거실에서 데리고 살았어요. 물론 침대에서 잠도 같이 자고……. 우리 아롱인 강아지 같아요. 제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졸졸 따라다니고 제가 밭 에서 일하고 있으면 옆의 밭이랑에서 대굴대굴 구르며 애교도 부리고, 저에게 다가와 부비부비도 하고, 저의 다리 사이로 빠져 다니며 놀고, 아롱아! 부르 면 네! 하고 대답하고, 아롱아! 이리 와! 하면 바로 달려오고……. 얼마나 귀 여운지 몰라요. 우리 애들이 아롱이 보러 여기에 여러 번 왔었어요, 그러더니 아롱일 집에 데려가 키우자고 해서 지금은 선산 집에 있어요.”

“야생 고양이가 집안에 잘 적응해요?”

“그게 걱정되어 여기에서 실내생활 적응 훈련을 많이 했죠. 제가 올 때마다 집안에서 먹고, 같이 자고……. 첫날밤만 울고 그 후론 잘 적응하던데요.”

“다행이군요.”

“그래도 자기 살던 곳이 그리울 것 같아 제가 일주일에 한번 씩은 여기에 데 리고 와요. 그러니까 늘 엄마와 함께 사는 거죠. 녀기에서 1/3, 집에서 2/3를…….”

“길고양이가 선생님을 만나 정말 행복한 고양이가 되었네요.”

자기가 살던 곳을 그리워할지도 모를 길고양이를 위해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데리고 왔다 갔다 한다는 그녀, 동물의 마음을 잘 읽어내고, 아픔을 덜어주려는 그녀를 보며 진실로 그녀가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집이 참 넓고 아름답네요.”

“네. 그래서 전 죽어서도 이곳에 묻히려구요. 저쪽 코스모스밭에 잔디를 깔고 둘레는 앉은뱅이 측백나무를 심을 거예요. 남쪽에 저의 시비와 묘비를 세울 거구요.”

“아직 젊으신데 묘비라니요?”

“미리 준비해야죠.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멀쩡하게 출근하던 사람 이 교통사고로 죽어서 돌아오는 걸 많이 봤어요. 또 다른 사고로 갑자기 가기 도 하고……. 그러니 미리 준비해 놓으면 마음이 편하죠.”

“그렇기도 하지만…….”

“이미 묘비에 새길 글도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걸요.”

“내용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한 서지원, 여기에 잠들 다.’ 이렇게요.”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있는 그녀가 묘비를 들먹이다니! 어리둥절해 하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이야길 이어갔다.

“저, 정말 우리 아이들 많이 좋아하고 사랑했어요. 매일 새벽 3시 이전에 일 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며 빨리 걷히지 않는 어둠을 원망할 만큼 학교를 가 고 싶어 했어요. 남보다 1시간 이상 먼저 출근하여 창문 열어 놓고 교실 청 소하고, 마지막으로 우리 아이들이 공부할 책상 물걸레로 깨끗이 닦아 놓은 다음 우리 아이들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어요. 들어오는 아이 하나하나, 반갑게 맞아주고 표정이 어두운 아인 왜 그런지 이야기 들어주고 안아서 위로해 주어 밝은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고……. 전 우리 아이 들의 모든 것이 다 귀엽고 예뻤어요. 잘못한 일로 지도 받고 삐쳐서 입을 툭! 내민 모습까지도 어찌 그리 귀엽던지! 터져나오는 웃음 참느라 힘들었어요. 지난 봄, SBS 대구방송국에서 취재 왔을 때 기자가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에게 있어서 아이들은 어떤 존재죠?’ 그래서 그랬죠. 아이들은 저의 전부였다고,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 동안 참으로 행복했다고…….”

“그렇군요.”

“그리고 전 동물도 많이 사랑해요. 동물과 교감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거예요. 저는 아파도 병원에 안 가지 만 동물이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서 치료해 줘요. 전 많이 아끼며 살지만 동 물에게 드는 비용은 아깝지가 않아요. 그런데 돌보던 동물이 아프거나 죽으면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어요. 오랜 시간 동안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 할 만큼 힘들어요. 동물 돌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우리 방울이가 병원 으로 가는 차 안에서 죽은 일이에요. 10분만, 아니 5분만 더 빨리 가서 바로 링거만 꽂았어도 살릴 수 있었는데……. 거품을 내뿜으며 물조차 넘기지 못하 고 토해버리는 아일 주말이라서 병원에도 못 가고 월요일, 6시간 수업 다 마 치고 가다 보니……. 차라리 병원 치료받다 갔으면 덜 아팠을 거예요. 제 인 생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우리 방울일 그렇게 보낸 거예요. 제가 저의 삶을 장편소설로 썼는데 우리 방울이 부분은 퇴고도 못하고, 교정도 못 보고 건너뛰었어요. 그 부분은 너무 아파서 제 자신을 도저히 감당 못할 것 같아서 요. 또 가장 감격스러운 일은 집 나간지 8년만에 우리 해리가 돌아온 거예요. 그 순간의 그 엄청난 감동과 감격! 그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잊지 못 할 거예요.”

자기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도, 가장 감격스러운 부분도 동물이라는 것에서 난 그녀가 동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 자연도 사랑해요. 자연의 빛, 소리, 향기……. 그 순수함에, 그 아 름다움에 반해 제가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 하고 있어요. 자연을 닮은 순수한 우리 아이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더욱 사랑스럽구요. 그리고 전 우리 아이들을 자연 속으로 데리고 가서 자연의 빛, 소리, 향기를 오감으로 느끼며 시를 쓰도록 했어요. 그러면 정말 곱고 아름다 운 시가 많이 나왔어요. 자연의 향기가 가득 들어 있는…….”

“예, 그렇군요. 선생님 반 아이들은 참 행복했겠어요. 좋은 선생님을 만나 서…….”

“전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은 했지만 끝까지 좋은 선생님은 되지 못했어 요.”

“너무 겸손하시네요. 그런데 선생님의 삶을 장편소설로 쓰셨다구요?”

“네. 제가 이 세상에 머물렀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사람들은 제가 드라마 같이 산다고 하고, 동화 같이 산다고도 하고, 영화 같 이 산다고도 해요. 시처럼 산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어떤 선생님은 제가 물처럼 순수하다고, 그냥 물이 아니라 증류수처럼 순수한 물 같다고 해요. 모 두가 절 너무 잘 봐주시는 거죠.”

“선생님의 삶이 참 궁금해지는데요.”

“그러세요? 그럼 이 메일 주소 주시면 저의 작품을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그 작품은 논픽션이에요. 저의 삶을 적나라하게 써 내려간…….”

“예? 정말 적나라한 선생님의 삶을 저에게 보여주시겠다구요?”

“네.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뭐.”

난 당장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카톡으로 이 메일 주소를 보냈다.

“조금 있다가 서재로 가서 컴퓨터에 있는 원고 보내드릴게요.”

“영광입니다. 아직 출간하지도 않은 원고를 제게 먼저 보여주시다니!”

“제가 대단한 삶을 산 것도 아닌데 무슨 영광씩이나…….”

퇴근하자마자 메일의 첨부파일을 열어 그녀의 소설을 인쇄했다. 그녀는 결혼하고부터 올해까지의 삶을, 자신의 이름 석자 중 가운뎃자만 바꾼 채, 3인칭 소설로 썼다.

그 날 밤, 난 그녀의 논픽션 장편소설을 밤새워 읽고 또 읽었다.

그녀의 논픽션 장편소설 제목은 ‘사랑이 있는 풍경’이었지만 그 내용은 ‘사랑이 만든 기적’이었다. 작은 시골 학교 아이들이 글쓰기로 전국대회를 휩쓸고, 시골 학부모들이 독후감 전국대회에서 단체부 준우승을 하고, 청각장애아가 독후감으로 경북에서 최우수를 하고, 전신마비 장애인 청년이 수필가로 등단하고, 집 나간 진돗개가 8년만에 돌아오고……. 아이들을 향한, 동물을 향한, 그녀의 깊고 따뜻한 사랑이 기적을 만든 것이다. 그녀가 이룬 기적은 참으로 곱고 아름다운 기적이었다.

난 그녀의 소설을 읽고서야 왜 시골학교에서만 근무한 무명교사인 그녀가 ‘이 달의 스승’으로 선정되었는지 깨달았다. 그녀의 이 소설이 무너져가는 교단을 살리고, 땅에 떨어진 교권을 회복하고, 나아가 밖에 나가기가 두려울 정도로 불안하고 삭막하기만한 우리 사회를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곱게곱게 수놓아주길 희망하면서 그녀의 삶을 소개한다.

사랑이 있는 풍경

프롤로그

2016년 5월 13일 오전 11시, 서울의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선 제35회 스승의 날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대통령의 축사를 비롯하여 정해진 의식이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교육부에서 주관한 ‘이 달의 스승’ 중에서 ‘4월의 스승’으로 선정된 지원은 5번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기념식 전에 이달의 스승 선정위원은 이렇게 말했었다.

“‘이 달의 스승’은 광복 이후에 처음 실시한 행사였고, 작년 6월부터 올 5월 까지 선정된 12분으로 이 행사를 끝낸답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계신 12분 스승님들은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지원은 어느 외진 곳에서 자신보다 아이들을 더 깊이 사랑하고 따뜻이 보살핀 선생님들이 많을 텐데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그런 분들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그리고 바로 전날 오후, SBS 대구방송 기자가 취재 와서 지원에게 마지막으로 한 질문인,

“선생님에게 있어서 아이들은 어떤 존재죠?”

에 지원은 거침없이 대답했었다.

“아이들은 저의 전부였어요.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 동안 저, 정말 행복했 어요. 전 다시 태어나도 초등학교 교사가 될 거예요.”

그랬다. 그녀는 매일 새벽 3시 이전에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며 빨리 걷히지 않는 어둠을 원망할 만큼 학교를 가고 싶어 했고, 아이들을 사랑했었다.

기념식을 하고, 식사가 이어지고……. 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지원의 머릿속엔 자신을 그곳에 자리하게 한 사랑스런 아이들과 함께 한 모습들이 아름다운 영상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랬다. 서지원, 그녀의 삶을 행복을 넘어 축복으로 이끌어 주고, 그녀의 삶을 찬란히 빛나게 해 준건 바로 아이들이었다.

‘예쁘고 귀여운 나의 천사들, 선생님을 행복하게 해줘서, 선생님의 삶을 빛나 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 고마움, 선생님이 눈 감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거야. 그리고 선생님은 영원히 너희들을 기억하고 사랑할 거야.’

어느 새 지원의 눈가에 맺혔던 이슬이 두 볼 위를 구르고 있었다.

지원은 어릴 때부터 운명적인 만남으로의 결혼을 꿈꾸어 왔었다. 하지만 그녀 앞에 운명적으로 다가 온 건 사촌 오빠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비록 영혼만의 순수한 사랑이었지만 그녀의 모든 것을 걸 만큼 그녀 자신에겐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끝을 예고했고 그 아픈 사랑의 후유증으로 지원은 결혼을 포기하고 있었으나 부모의 재촉으로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지인의 소개로 이어진 사람과 삭막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감성적인 지원과는 달리 공대 출신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남자와의 결혼, 그 새로운 시작엔 두려움과 불안만이 가득했다. 거기다 직장에 다니는 며느리는 절대로 못 본다는 시어머니의 강력한 명령으로 지원은 충북에서 6년 11개월의 교단생활을 마감하고 1980년 2월 10일에 결혼, 2월 말일자로 교단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지원의 시가가 있는 예식장에서 지원의 결혼식은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신부 입장 순서에 따라 아버지의 손을 잡고 출발선에 서서야 지원은 깨달았다.

‘결혼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운명처럼 만나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 그 삶이 행복할 수 있는 건데…….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메이는 목, 흘러내리는 눈물, 격한 흐느낌…….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었다.

“신부가 와 저리 섧게 우노? 아버지가 의붓아버지 아이가?”

“어머니가 계모인지도 모르제.”

“하여간에 뭔가가 있어.”

“맞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럴 순 없제.”

하객들의 수군거림이 지원의 귀에까지 들렸다. 하지만 결혼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렇게 지원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원은 40대 초반에 병으로 남편을 잃고 한복집을 하며 외동 아들을 키워 온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시어머니의 끊임없는 잔소리, 그리고 이유 없는 심술로 지원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반찬 하나, 하나마다 마늘이 덜 들어갔다느니, 참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느니, 너무 짜다느니, 너무 싱겁다느니, 반찬에서 칼냄새가 난다느니, 하늘같은 남편을 잘 섬기지 못한다느니, 선머슴처럼 하고 다녀 동네 사람들에게 창피하다느니……. 시어머니에겐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잔소리 거리가 되었다.

“야, 야, 머리가 그게 머꼬? 처자 맨치로 생머리를 하고……. 내가 돈 줄 테 니 미장원에 가서 파마 쫌 해라. 아이구! 남사시러버라! 한복 해준 건 우짜고 맨날 바지때기나 걸치고, 아이구! 내가 몬 산데이!”

“…….”

지원은 그 어디에서도 삶의 보람과 기쁨을,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집안 일 하고, 시어머니 가게에 나가서 일 도와주고, 먹고 자는 단순한 삶에, 시어머니로부터 받는 정신적인 학대로 죽지 못해 억지로 사는 비참한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선생님!’ 하고 아이들이 부르는 환청에 늘 시달렸다. 불면증으로 힘들어 하다가 잠시 잠이 들면 아이들을 만나는 꿈을 꾸곤 했다. 지원은 꿈속에서만은 행복했다. 그 꿈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질식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지원은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이 하교하는 오후가 되면 집 뒤의 초등학교 교문 앞으로 가 주저앉아서 하교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귀여운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소리 없이 웃어보기도 하고, 떠나가는 그녀를 붙잡고 울던 아이들이 생각나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내가 지금 미쳐가고 있는 건 아닐 까?’

시어머니의 강한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떠난 교단,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금호초등학교에서 마지막 제자들을 졸업시키고 이별의 아픔으로 이지러지는 가슴을 안고 강벼랑을 돌아나오던 날, 이미 지원의 병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에 비례해 지원의 몸은 피골이 상접하도록 야위어 가고 있었다.

“야가 와 이리 마르노? 뼈다구만 남았네. 아를 못 놓을라믄 살이라도 찌던지, 선을 서른 일곱 번이나 보고 얻어 온 것이 저 모양이니 참말로 남사시럽데이. 하고 다니는 꼴은 또 저게 머꼬? 선머슴 맨치로……. 으이구! 내가 돈 줄 테 니 당장 양장점에 가서 옷 좀 맞춰 입으레이! 긴 생머리도 쫌 잘라서 파마하 라 캐도, 캐도 말도 안 듣고, 참말 가잖데이…….”

“…….”

시어머니의 어떤 잔소리에도, 어떤 억지에도, 지원은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시집오기 전에 친정 엄마가 신신당부하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집살이 잘 하려면 벙어리로 3년, 귀머거리로 3년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 침묵은 병이 되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점점 심각하게 곪아가고 있었다.

남편이 그녀를 병원으로 이끌고 가서 종합검진을 받게 했다. 그러나 병명은 나오지 않았다. 병명조차 알 수 없는 깊은 병, 하지만 지원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병은 학교로 돌아가야지만 고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혼생활을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결혼 예복을 맞춘 손님들이 나가고 옷감을 정리하고 있는 지원에게 방에서 재봉틀을 돌리던 시어머니가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야, 야, 까시개 쫌 도고!”

‘까시개? 까시개가 뭐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나 섣불리 물어볼 수가 없었다. 경상도 말은 억양만 다른 게 아니라 낱말 자체가 달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수없이 되물었었다. 그럴 때마다 짜증 섞인 핀잔을 듣곤 했으므로 지원은 잔뜩 겁을 먹은 채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까시? 콕! 콕! 찌르는 가시? 설마 그건 아닐 테고……. 또 도고는 뭐야? dog? 초등학교도 안 다니신 시어머니께서 영어를 쓸 일은 없는데……. 도대 체 뭐지? 아! 미치겠네!’

“야, 야, 까시개 좀 돌라카이 모하노?”

언성을 높이는 시어머니, 지원은 주눅이 들어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엄마, 까시개가 뭐에요? 또 도고는요?”

“까시개도 모리나? 이거, 이거, 말이다. 으이구! 속 터져!”

지원의 시어머니는 오른 쪽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붙였다, 떨어뜨렸다 하면서 흉내를 냈다.

‘아! 가위 달라고 하시는 거였구나!’

얼른 가위를 집어서 드리고 지원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가시? dog? ㅋㅋㅋ…….’

하지만 그녀의 시어머니는 열을 올리며 가슴을 쳤다.

“으이구! 답다버레이. 저걸 데리고 우째 살꼬?”

‘그러게요. 엄마, 저도 답답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그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도 말대꾸가 될 테니까.

저녁 때가 되어 지원이 가게에 딸린 작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는데 시어머니가 방과 연결된 작은 문을 홱! 열어젖히더니 말했다.

“야, 야, 매 끓이레이. 국을…….”

“네?”

“매 끓이란 말이다.”

‘매? 매국을 끓이라고? 매를 사다가 잡아서 끓이라는 걸까? 경상도 사람은 매국도 먹나? 와! 진짜 잔인하다. 매국 먹는다는 건 또 첨 들어보네.’

“엄마, 매는 어디서 사와요? 시장에서 팔아요? 사와도 전 무서워서 매 못 죽 이는데 어떡해요? 엄마가 죽여 주실래요?”

“야가 지금 무신 소리하고 있노?”

“매국 끓이라고 하셨잖아요?”

“국을 매매 끓이라꼬 했제.”

“매매요?”

“매~~~~ 끓이란 말이다. 으이구! 내 몬 산데이!”

‘아! 오래, 오래 끓이란 말이었구나! 와! 경상도 말 정말 어렵네. 영어보다 훨 씬 더 어려워.’

결혼 초, 가게에 오는 손님들이 대화 중에 ‘파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어? 파이(π)는 3. 14인데, 할머니들이 수학 용어를 어떻게 알지?’

하지만 그건 수학 용어가 아니라 ‘별로다’는 뜻으로 쓴 거였다. 또 가끔씩 언성을 높여

“캤나? 안 캤나?”

해서

‘이상하다. 이 겨울에 캘 것이 없을 텐데 뭘 캤느냐고 자꾸 다그칠까?’

했는데 그건 ‘했니? 안 했니?’라고 물어보는 거였다.

지원이 경상도 사람과 결혼한다니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나 지원은 혼자 쿡쿡 웃었다.

기차 같은 칸에 경상도 학생들과 서울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경상도 학생 쪽이 하도 시끄러워 서울 학생 한 명이 그곳으로 갔다.

“얘들아, 좀 조용히 해 줄 수 없겠니?”

그 말을 들은 경상도 학생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그 학생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하는 말,

“이카이마카니카이가?”

물음표를 단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간 서울 학생이 친구들에게 말했다.

“쟤네는 경상도 애들이 아니고 일본 애들이었어.”

“그래?”

사실 그 말은 ‘이 칸이 모두 네 칸이니?’ 그런 말이었는데 ㅋㅋ…….

전쟁 중, 경상도 출신 소대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적의 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곧 총알이 날아왔다.

“수구리!”

그 명령으로 그는 부하의 절반을 잃었다.

다시 한 번 적이 공격해 왔다.

“아까맹쿠로!”

그 명령으로 그는 부하를 모두 잃고 혼자만 살아남았다.

‘숙여!’ ‘아까처럼!’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타도의 부하들은 경상도 상사를 둔 죄로 천국으로 직행해야만 했다.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경상도 말을 다 알아들어 시어머니로부터 핀잔을 듣 지 않을까?’

지원은 길게,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원은 1981년 1월 1일,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왕눈이와 돌이’라는 동화가 당선되었다. 지원이 충북 영동군 심천면의 금호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어느 여름날 오후, 강가에 빨래하러 가다가, 장정 두 명이 개를 끌고 가는데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개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것을 소재로 지원은 ‘왕눈이와 돌이’라는 동화를 썼고 동화로선 첫 작품이었는데 운 좋게 당선이 된 것이다.

지원은 당선소감에 ‘교단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썼다. 그러자 경북에 근무하는 현직 교사들이 어서 빨리 교단으로 돌아오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었고, 거기에서 힘을 얻은 지원은 아이들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래, 교단으로 돌아가는 거야. 내가 온전히 살 길은 오직 그 길 뿐이므 로…….’

서울에서 발간하는 일간지에 광고가 떴다 경기도교육청에서 교사 350명을 모집한다는……. 지원은 시어머니와 남편 몰래 서류를 준비하고 시험공부를 했다. 서류 제출과 시험 등으로 여러 번 집을 비워야 했지만 그 때마다 친구 결혼이라든가 친구가 상을 당했다고 속이며 시험을 쳤고 합격하여 등록을 마치고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령이 나면 혼자 짐을 싸서 경기도로 갈 심산이었다. 가족이 강력히 반대하면 이혼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문에서 경상북도교육청에서도 임용고시를 친다는 기사를 보고 시험을 쳐서 합격하자 지원은 경기도교육청에 등록을 취소하고 경북에서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981년 10월 12일자로 경북 김천의 위량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지원이 사는 구미 관내는 아니었으나 통근이 가능한 곳이었다. 비포장도로에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곳이긴 하지만 말이다. 발령이 난 이상 더는 가족을 속일 수가 없었다.

“엄마, 저 취직했어요.”

“뭐라? 취직이라꼬?”

“학교에 발령났어요. 저, 학교에 나가야 해요.”

“니가 학교에 나가? 누구 맘대로?”

갑작스런 충격에 입술이 하얘진 시어머니는 몸을 벌벌 떨며 언성을 높였다.

“엄마, 저,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사실 저의 병도 학교에 돌아가고 싶어 서 난 거였구요.”

“누가 니보고 돈 벌어오라카든? 니가 안 벌어도 우리 잘 산데이. 내가 벌어 놓은 재산이 얼만디……. 학교는 절~~~대로 몬 간다.”

“엄마, 저는 돈을 벌러 학교에 가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 러 가는 겁니다. 저는 월급 한 푼 안 준대도 학교에 갈 겁니다. 아니, 돈을 내고 오란대도 전 학교에 갈 겁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이유론 저의 길을 막 지 마세요.”

“머라? 돈을 내고 오란대도 학교에 가겠다꼬? 야가 미쳤군. 여자라 카믄 아 잘 놓고 살림 잘하는 기 최고의 도리인기라. 야, 야, 학교 갈 생각 말고 아 놓을 생각이나 하래이. 그리고 니, 직장 그만두겠다꼬 약속하고 결혼한 거 아 이가? 그렇다면 약속 지켜야 하는 거 아이가? 와 이제 와서 딴 소리고?”

“네. 그렇게 약속했죠. 하지만 정말 이럴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큰 병이 날 줄은……. 이대로는 도저히 살아낼 수가 없어요. 제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학교로 돌아가는 길 뿐이에요. 엄마, 좀 봐주시면 안 돼요? 직장생활 해도 엄마께 잘하려고 노력할게요. 그리고 학교에 가도 애는 낳을 수 있어요. 다른 여자들도 다 그렇게 해요.”

“니가 모라카든 학교엔 절~~~대로 몬 간데이. 가려거든 날 죽이고 가레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로 학교에 몬 간데이!”

“엄마,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하지 마레이. 지발 니 덕에 내 쫌 살자, 엉?”

그로부터 시어머니의 단식투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원은 꺾이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온전히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교단으로 되돌아가는 길 뿐이었으므로…….

지원은 그렇게 시어머니와의 전쟁을 치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화단의 라일락 나무가 빨간빛으로 곱게 물든 가을의 한가운데, 아주 작은 시골학교인 경북 김천 위량초등학교에서 지원은 3학년을 맡았다. 여름 내내 햇볕에 그을려 새까만 아이들, 하지만 시골 아이들의 눈동자는 맑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힘들게 되찾은 ‘선생님’이란 이름, 지원은 그 고귀한 이름에 자신의 모든 걸 걸기로 했다.

‘내 모두를 바쳐 저 아이들을 사랑하고, 저 아이들이 꿈을 이루는데 힘을 실 어주리라.’

교단으로 돌아온 지원의 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행복했다. 얼굴 표정부터 달라졌다. 오랜만에 지원은 미소를 되찾았다. 그래, 지원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학교였다. 순수하고 정직한 아이들의 웃음이 있고 꿈이 있는 곳, 지원의 손길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는 곳…….

수업이 끝난 오후에 지원은 문예부 아이들에게 글쓰기 지도를 했다. 재주가 있어서 오는 아이들이 아닌, 오직 배우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모인 아이들이기 때문에 거북이처럼 진도는 더디었다. 하지만 지원의 지도로 아이들은 시를 알게 되고 자연 속에서 오감으로 느끼는 것들을 아름다운 글로 표현하려 노력했다.

지원은 다음 해에도 3학년을 맡았고 반 아이들과 4, 5, 6학년을 대상으로 조직한 문예부 아이들에게 글쓰기 지도를 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매일 지도하니 문장력이 늘어 도시의 큰 학교 아이들을 물리치고 봄에 야산에서 열리는 김천문화원 주최 매계백일장, 초여름에 강변공원에서 열리는 YMCA 주최 환경백일장, 가을에 직지사에서 열리는 김천예총 주최 김천예술제 문예백일장, 각종 공모전 등, 문예행사에서 큰 상을 휩쓸어 오곤 했다.

작은 학교라서 사무가 많아 늘 일거리를 집에 싸가지고 와야 했고, 교육청이나 다른 기관에서 심사 요청이 쇄도하여 지원에겐 개인 생활이 없었다. 그리고 매년 학급문집과 학교문집을 만들어야 했으며, 지인들 책 내는데 원고 정리를 해주어야 했고, 학교장, 교육장 등 기관장들이 각종 인삿말까지 부탁하니 들어주어야 했다. 늘 일에 쫓겨 수면도 부족하고 입맛을 잃어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입안이 헐어 식사하기도 힘들었고 늘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하지만 지원은 교단생활이 행복했다. 가난하지만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고 자신의 노력으로 아이들의 눈에 띄는 성장을 읽는 것이 그녀를 더욱 행복하게 했다.

‘먼 훗날, 내 삶을 마감할 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바로 교단으로 되 돌아 온 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거야.’

지원이 결혼하고 2년 후에 첫째 딸을 낳고 2년 후, 둘째를 가졌을 때 임신중독증이 왔다. 눈이 안 떠질 정도로 얼굴과 온몸이 퉁퉁 부어오르는데도 지원은 병원에 가지 않았다. 심한 증상으로 보아 입원을 해야 할 처지가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아이들 수업에 지장이 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때만 해도 기간제 교사 제도가 없어서 지원이 입원한다면 옆 반과 합반 수업을 하는 수밖에 없어 지원의 반 아이들이 입을 피해와 옆 반 선생님께 끼칠 피해를 걱정해 방학하면 병원에 가려고 버티고 있었다. 식사도 못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견디기 힘든데도…….

“선생님, 임신중독증은 임산부에게 가장 위험한 병이래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구요. 그러니 빨리 병원에 가보세요.”

“조금 있으면 방학하잖아요? 그 때 가면 돼요. 증상으로 보아 하루, 이틀에 고칠 병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 반 아이들은 어쩌구요? 그리고 연세 높으신 옆 반 주선생님께 드리게 될 부담은 또 어쩌구요?”

“지금 반 아이들이 문제에요? 옆 반 선생님이 문제에요? 선생님과 아기의 목 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도 지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히 교단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겨울방학을 하루 앞두고 수업 중, 지원은 교단에서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지원이 의식을 회복했을 땐 병원 침대 위였다. 의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지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네.”

“그런데 왜 이렇게 미련합니까? 왜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병원에 옵니까? 엄마와 아기, 두 사람의 목숨과 바꿀 만큼, 직장이 그렇게나 소중했습니까? 지금, 임산부도 아기도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론 두 사람의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

지원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식해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왜 이렇게 미련할까? 참내…….”

“…….”

의사의 강한 호통에 지원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할 말이 있다 해도 이미 말 한마디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만한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원이 의식을 잃은 사이에 얼마나 울었는지 남편의 눈두덩이도 퉁퉁 부어 있었다.

아기는 포기해도 임산부라도 살리겠다며 병원에서는 혈압강하제를 계속 투여하고 있었다. 병원에 와서 처음에 잰 혈압이 240을 넘었다고 했다. 얼굴이 터질 것만 같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먹을 수도 없었다. 억지로 넘기면 바로 토해냈다.

다음 날 새벽 3시 반, 배가 조금 아픈가 싶더니 무엇인가 물렁한 것이 빠져나오려는 느낌이었다.

“저기요!”

지원의 부름에 간호사가 달려왔다.

“아니! 벌써 아기가! 선생님! 선생님!”

곧 의사가 달려왔다.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쉽게 아기가 나왔다.

“조산이네.”

임산부라도 살려야 한다는 무리한 치료로 7개월 반만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나온 980g 짜리의 아주 작은 아들, 고 작은 아기는 울지도 못하고 ‘켁! 켁!’ 재채기만 하고 있었다. 급히 인큐베이터로 들어간 아기, 7개월 반짜리 치고는 나무나 작다며 의사는 절망을 말하고 있었지만 신생아 면회 시간이 본 아들, 그 조그만 팔다리를 쉴새 없이 움직이며 치열하게 죽음과 싸우는 아들에게서 지원은 작은 희망을 보았다.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우리 아기를 살려주세요! 우 리 아기를 살려주시는 댓가라면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저의 목숨을 원하시면 목숨까지도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 대신 불쌍한 우리 아기 를 살려주세요!’

종교는 갖고 있지 않았지만 절대자라고 믿어지는 분께 매달려 지원은 간절히, 아주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다. 소식을 들은 지원의 시어머니는 바로 절로 달려가서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귀한 손자 살려달라고…….

다음 날, 회진 시간이 아닌 때, 갑작스런 의사의 방문이 지원에게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아기, 지금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폐가 너무 발달을 못해서…….”

“안 돼요! 우리 아기 살려야 해요! 꼭 살려야 해요! 우리 아기 죽으면 저도 죽어요! 의사 선생님, 제발 우리 아기 좀 살려주세요! 네? 여기서 못 살리겠 으면 서울의 큰 병원으로 보내주세요. 네?”

하지만 굳어진 의사의 표정, 지원의 간절한 부탁에의 무응답, 거기에서 지원은 무채색의 새까만 절망을 읽어냈다.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절대로 그럴 순 없어요!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못했 는데, 이름도 없이 그 먼 곳으로 떠나보낼 순 없는 거잖아요? 하느님! 우리 아기 대신 절 데려가세요! 제가 죽어야 한다구요! 우리 아기에겐 죄가 없다구 요? 제가 바로 죄인이라구요!”

지원의 절규가 끝나기도 전에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줌마, 아기 죽어서 영안실로 갔어요.”

조금 전, 절망을 말하던 의사, 바로 뒤따라 온 간호사, 어쩌면 이미 숨진 아이를 가지고, 둘이 짜고 그런 유희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 영안실? 우리 아기가 영안실엘 왜 가? 거긴 죽은 사람만 가는 곳이잖 아? 우리 아기가 거길 왜 가냐구? 왜? 왜? 아니야! 아니잖아!”

그렇게 되뇌이다 지원은 의식을 잃었다.

한참만에야 깨어난 지원은 또 강하게 울부짖었다.

“아가야! 너 진짜 죽은 거니? 그렇다면 엄마를 용서하지 마! 엄마도 내 자신 을 절대 용서 못한다! 아가야! 엄마도 데려가! 그 멀고 험한 길을 어떻게 어 린 널 혼자 보내니! 아가야! 엄마랑 손잡고 같이 가자! 아가야! 지금 어디쯤 가고 있니? 기다려! 엄마가 달려갈게.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갈게! 엄마가 널 안고 갈게! 기다려!”

지원은 다시 의식을 잃고 깨기를 반복했다.

아이들 수업에 지장이 있을까봐 방학을 기다리던 엄마의 미련함으로, 지원의 아들은 이 세상에 왔다가 채 30시간을 머물지 못하고 엄마 품에 한번 안겨보지도 못한 채, 이름조차 지어지지 못한 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12월 25일 오전에 그렇게 서둘러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서 그렇게 아주 아주 멀리로…….

지원은 식사를 거부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하다 기절하고, 다시 깨어나 오열하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고문이었다.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든 삶이었다.

‘이게 꿈이라면, 깨어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악몽이라면…….’

그러나 잔인하게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콕! 콕! 찌르고 있었다.

“오! 하느님! 부처님! 저 좀 데려가 주세요! 우리 아기가 있는 하늘나라로 데 려가 주세요! 저, 그 아이에게 엄마 노릇 해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반응하지 않았고 무심한 시간만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지원은 겨우내 방황했다. 죄책감으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 채 시간을 죽여가고 있었다. 거기에 대를 이을 손자를 애타게 기다리던 시어머니의 실망이 낳은 끊임없는 잔소리까지…….

“학교 안 가고 집에 있었으면 이 꼴 안날 것을, 이 머꼬? 내 말 안 듣고 지 맘대로 하더니……. 뭐 잘한기라고 밥도 안 묵고 난리고? 이제라도 학교 때 려치아라! 으이구! 내 팔자야!”

그녀가 짊어지기엔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잠자다가 이대로 하늘나라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 가서 우리 아길 만 나면 정말 좋겠는데……. 먼저 가신 할머니와 함께 우리 아길 키우면 정말 좋 겠는데…….’

지원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흘러 겨울이 떠나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나무들은 뿌리로 길어 올린 물로 메마른 나뭇가지마다 연둣빛 새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지원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동요 ‘봄 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 동요가 환청처럼 지원의 귓가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지원은 조용히 그 노래를 불러보았다.

땅속에 꽃씨가 잠을 깨나 봐.

들마다 언덕마다 파란 숨결 소리에

포시시 눈을 뜨는 예쁜 꽃망울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봄 오는 소리

꿈꾸던 나무가 깨어나나 봐.

뿌리로 물을 긷는 고운 맥박 소리에

쏙쏙쏙 고개 드는 밭가에 냉이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봄 오는 소리

두 볼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미끄럼을 타고 있었지만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나에겐 아이들이 있었지. 해마다 봄이면 새로운 모습으로 내 품에 안 겨오는 많은 아이들, 잃은 아들 하나 대신 내 품에 안겨올 귀여운 아이들이 내겐 있어. 그래, 난 그 아이들의 선생님이야. 사랑, 소망, 믿음, 희망, 축복, 행복…….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것만, 가장 아름다운 것만 품고 있는, 그 이름도 거룩한 ‘선생님’이야. 그래, 나에겐 아직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남 아 있었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아직은 남아 있었어.’

그녀의 독백, 그랬다. 슬픔에 빠져 있는,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지원을 일으킬 수 있는 아이들, 그녀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이들, 그녀의 삶의 희망이고 삶의 이유의 전부인 아이들이 그녀에겐 있었다.

1985년 3월 1일자로 지원은 버스를 한번만 타도 되는 개령초등학교로 전근이 되었다. 위량초등학교에 근무할 땐 김천까지 가는 버스와 김천에서 학교로 들어가는 버스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매일 아침, 학교로 들어가는 버스를 놓칠까봐 늘 마음을 졸였는데 한번만 차를 타게 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좋았다.

지원의 학급은 노래로 시작하고 노래로 끝나는 교실로, 수업 전에 그녀의 피아노 반주로 아름다운 동요를 부르고 수업을 마치고도 노래를 불렀다. 봄이면 봄노래, 여름이면 여름노래, 가을이면 가을노래, 겨울이면 겨울노래, 비 오면 비노래, 눈 오면 눈노래, 바람 불면 바람노래를 함께 불렀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 마음씨도 아름다워진다’는 지원의 말을 믿고 아이들은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까딱거리며 좌우로 부드럽게 몸을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

‘이 세상에 저렇게 예쁘고 귀여운 모습이 또 있을까?’

그 모습은 언제나 지원의 가슴을 잔잔한 환희로 물결치게 하곤 했다.

점심시간, 따스한 봄볕이 내리는 화단에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해당화가 곱게 핀 그곳에……. 6학년 미경이였다. 지원이 다가갔다. 그런데 미경이의 얼굴이 너무나 어두웠다.

“미경아, 점심 맛있게 먹었어?”

“아니, 안 먹었어요.”

“왜? 왜 밥을 안 먹어?”

“그냥요.”

“미경아,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밥을 못 먹을 만큼 안 좋을 일이 있는 거 야? 정말 그런 거야?”

“…….”

“점심 굶고 오후 수업을 어떻게 해? 미경아, 아직 급식소 정리 안 했으니 지 금이라도 가서 먹어. 응? 선생님이 같이 가 줄까?”

“생각 없어요.”

그날 오후 수업을 마치고 지원은 미경이 교실을 방문하여 담임에게 미경이에 대해 물어 보았다.

“미경이 걔, 불쌍한 아이입니다.”

“가정환경이 어떤데요?”

“지난 번 가정방문 갔을 때 마을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미경이가 다섯 살 땐가 엄마가 가출했대요. 미경이 동생도 둘이나 있는데…….”

“어머! 그럼 세 아이를 누가 돌보나요?”

“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긴 한데 막노동하던 아버진 아내의 가출로 폐인이 되어 일도 안 하고 술독에만 빠져 산대요. 할머니께서 남의 집 일 거들어 주 고 조금씩 벌어 근근히 생활하다가 다행히 작년부턴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생활 보조금을 조금씩 받긴 하는데 그것으론 생활이 안 되고 이제 할머니도 병이 들어 일도 못하고 어렵게 사나 봐요.”

“그런데 정말 이해 안 가는 게, 미경이 엄만 어떻게 어린 자식을 셋이나 두고 가출을 했대요? 혹시 바람이 나서 가출한 건 아닐까요? 그런 일이 아니고서 야…….”

“그게 아니고 미경이 아빠가 술만 먹으면 이유도 없이 폭력을 휘둘렀나 봐요. 아내 뿐만 아니고 어린 자식들에게까지……. 거의 매일 그런 일이 벌어지니 참고 참다 한계가 오니까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아요.”

“세상에! 어떻게 자식들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른대요? 아무리 술로 이성을 잃 어도 그렇지. 미경이 엄마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가지만 남겨진 아이들이 너 무 불쌍하네요. 병든 할머니도 그렇고…….”

“엄마의 가출은 그렇다 치고 요즘도 술에 취해 들어오면 살림을 때려 부수고 말리는 자기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행패를 부리나 봐요. 미경이 일기는 한숨 없인 못 읽어요.”

“그렇군요. 한 가정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할 가장이 어떻게 가족을 그렇게 학대한대요?”

“그러게요.”

“오늘 미경이 얼굴이 어두운 것도 그런 이유겠군요.”

“오늘 아침, 등교할 때부터 미경이 눈이 퉁퉁 부어있더라구요. 얼마나 울었는 지…….”

“정말 걱정이네요.”

“담임인 저도 괴롭습니다.”

담임의 이야기를 들은 지원의 마음은 무거웠다.

‘어떻게 하지? 저 가엾은 미경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밤 늦도록 뒤척이며 고민하던 지원은 미경이를 문예부에 넣고 글쓰기를 가르쳤다. 그 아이의 비참한 삶을 곱고 아름다운 글로 승화시키게 해주고 싶어서…….

시간에 비례해 미경이의 글솜씨가 늘어 경상북도교육청에서 주최한 화랑문화제에서 금상을 차지하고 각종 백일장과 공모전에서 좋은 성적으로 입상했다. 수상과 함께 미경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글쓰기대회 수상으로 미경이는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쳤다. 성적도 많이 올랐다고 했다.

첫눈이 내리던 날 오후, 대구 경북 어린이 편지쓰기대회 결과가 공문으로 왔다. 미경이가 대상이었다. 상장과 상금 20만원을 받는……. 공문을 읽는 지원의 얼굴엔 함박 웃음꽃이 피었다. 가슴이 크게 뛰었다. 지원은 미경이 교실로 키폰을 했다.

“선생님, 미경이 집에 갔어요?”

“아직 안 갔어요. 지금 청소하고 있는데 거의 다 했어요. 왜요?”

“청소 끝나면 바로 우리 교실로 좀 보내 줄래요?”

“왜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선생님의 목소리가 너무 밝아서요.”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지원은 미경이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담임에게 미리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잠시 후, 지원의 교실 앞 출입문을 노크하는 미경이, 지원이 문을 열었다. 물음표를 달고 안으로 들어오는 미경이를 지원이 와락! 끌어안았다.

“미경아, 축하해!”

“뭘요? 선생님, 뭘 축하해요?”

“미경아, 대상이야!”

“대상이요? 뭐가요?”

“지난 번에 대구 경북 편지쓰기대회 작품 보낸 거 있지?”

“예.”

“오늘 결과 나왔는데 미경이 네가 대상이야! 대상! 정말 잘했어.”

“정말요? 와!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미경이, 정말 대단해! 정말 장해!”

미경이를 안은 지원의 얼굴에도, 선생님의 따스한 품에 안긴 미경이의 얼굴에도,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경아, 고마워! 선생님을 행복하게 해주어서…….”

“아니, 제가 더 고마워요. 문예부도 아닌 절 문예부에 넣어주시고 글쓰기를 잘 가르쳐 주셔서 저를 입상시킨 건 바로 선생님이니까요. 선생님이 아니었으 면 전 글을 쓸 줄도 몰랐을 테니까요.”

“아니야. 미경이 네가 열심히 글쓰기 공부를 한 덕분이지.”

“아니에요. 열심히 지도해 주신 선생님 덕분이에요.”

“아니야. 미경이 너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야.”

“아니에요. 선생님 덕분이라니까요.”

“아니래두!”

지원과 미경은 그렇게 서로 ‘덕분’ 씨름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 지원이 교실에서 사무를 보고 있을 때 미경이가 편지 한통을 건네주었다.

서지원 선생님께

선생님, 문예부도 아닌 저를 문예부에 넣어주시고 열심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을 만나기 전엔 저의 삶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매일 술에 취해 들어와 할머니와 우리를 괴롭히는 아빠 때문에 사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의 가장 편한 휴식처가 집이라지만 우리 집은 저에게 지옥이었습니다. 전, 밤이 무서웠습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오시는 아빠는 이유도 없이 그릇을 깨고 선풍기를 집어 던지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말리면 바로 주먹이 날아드니까요. 술 취한 아버지 눈엔 할머니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살림을 부수는 아빠를 할머니가 말리니까 할머니를 세게 밀어 벽으로 나가떨어지게 한 적도 있습니다. 그 뒤로는 무서워서 할머니도 아빠를 그냥 내버려 둡니다. 그런 아빠로 인해 삶이 지옥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주셔서 글을 쓰는 동안엔 비참한 현실을 잊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을 받고부턴 저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저의 꿈은 간호사였는데 이젠 바뀌었습니다. 문학가로……. 전 곱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처럼, 아니, 저보다도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꿈을 갖게 해주신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선생님, 사랑해요!

미경 올림.

미경이의 편지를 읽는 지원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굴엔 엷은 웃음이 일었지만 두 볼엔 계속 눈물이 방울 방울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미경아, 고마워. 힘든 일 참고 열심히 공부하고 예쁘게 자라줘서……. 우리 미경인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그 예쁜 꿈으로 삭막한 이 세상을 따뜻하고 곱게 물들이렴. 선생님이 지켜보며 응원할게. 미경아, 사랑해!’

다음 해 2월 18일, 지원은 미경이가 졸업식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다른 사람을 시켜 장학금 50 만원을 편지와 함께 주었다. 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게 하라는 간절한 부탁과 함께…….

다음은 지원이 미경이에게 쓴 편지다.

착하고 예쁜 미경에게

미경아, 우선 너의 졸업을 축하한다.

힘든 상황에서도 할머니를 잘 모시고 맏이로서 동생들을 잘 보살피며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너의 모습이 참 예쁘게 보였어.

춥고 삭막한 긴 겨울 동안 봄을 준비한 나무들이 새순을 틔우듯, 이제 너의 찬란한 새봄이 시작되는구나.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약해서 밖에 내놓으면 살지 못하지만 거친 비바람과 매서운 눈보라를 이겨낸 식물들은 생명력이 강하지. 미경이 넌 어렵고 힘든 상황을 잘 이겨내고 있기 때문에 너의 미래는 그 누구의 미래보다 밝을 거라고 믿는다.

미경아, 중학교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네가 가지고 있는 재주를 열심히 갈고 닦으며 너의 고운 꿈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기 바란다. 어디선가 너를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 잊지 말고…….

미경아, 사랑해!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게 쓰려니 그 숨바꼭질이 참으로 힘들었다. 혹시 들킬까봐 길게 쓸 수도 없어서 더 안타까웠다.

다음 해 늦은 봄날 오후, 미경이가 지원을 찾아왔다. 중학교 교복을 입을 채로…….

“선생님!”

“어? 미경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가가서 서로 얼싸안았다.

미경인 너무나 활기차고 밝아보였다.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구요. 그래서 연락 안 드리고 왔어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니 반갑긴 더 반갑다. 그런데 미경이 너 일년간 키가 엄청 큰 것 같다. 초등학교 땐 맨 앞에 앉더니……. 얼굴도 너무 예뻐졌네.”

“예, 진짜 많이 컸어요. 친구들도 놀라요.”

“그동안 잘 지냈어? 표정 보니 잘 지낸 것 같은데…….”

“예, 너무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선생님께 좋은 소식 전해 드리 러 왔어요.”

“좋은 소식? 어떤 소식인데? 기대된다.”

“어제 중간고사 쳤는데 제가 우리 반에서 1등을 했다는 소식과 아빠 소식이 요.”

“그래? 축하해! 우리 미경이 정말 열심히 공부했구나. 쟁쟁한 도시 아이들을 제치고 1등을 했다니……. 정말 장하다! 그런데 아빠 소식이라면?”

“저희 아빤 이제 완전한 새사람이 되었어요. 그리고 얼마 전엔 김천공단에 있 는 큰 공장에 취직도 했어요.”

“그래? 정말 잘 되었구나! 진짜 좋은 소식이네!”

“그런데 아빠가 달라진 게 누구 때문이게요?”

“물론 너 때문이지. 착하고 예쁘고 알차게 자라는 딸을 보고 자신의 삶을 반 성한 게 아닐까? 그래서 달라지시지 않았을까?”

“땡! 아니에요.”

“그럼?”

“아빠가 변한 건 선생님 덕분이에요.”

“내 덕분이라니? 무슨 말이야?”

“선생님, 제가 졸업할 때 저에게 장학금 주신 분이 선생님 맞죠?”

“자, 장학금? 내가 너에게 장학금을? 아, 아닌데…….”

“에이, 선생님도……. 전 봉투 안에 같이 들어 있던 편지 읽고 바로 감을 잡 았어요.”

“아, 아닌데…….”

“선생님, 아무리 부정하셔도 지금 선생님의 표정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으 니 인정하세요. 예?”

“…….”

“사실 저에게 장학금을 주실 분은 선생님 외엔 없어요. 또 진심이 느껴지는 글로 전 직감했어요. 이 세상에 선생님 만큼 절 깊이 사랑하시는 분은 없으니 까요.”

“내 글솜씨가 많이 부족했구나. 그래서 바로 들켜버린 거구나. 들키지 않으려 고 꽤 신경썼는데, 들킬까봐 길게도 못 썼는데…….”

“들켜서 억울하세요?”

“그래. 끝까지 몰랐어야 했는데, 억울해. 억울해 죽~~~겠어.”

“호호호……. 그러시니까 선생님이 마치 어린 애 같아요. 너무 귀여우세요. 호호호…….”

“아! 진짜 안 들키고 싶었는데…….”

“선생님의 그 편지 보시고 아빤 크게 감동을 받으신 것 같더라구요. 읽고, 또 읽고, 한숨을 길게, 길게 내쉬고……. 아빠의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전 아빠 께 장문의 편지를 썼어요. 방황을 끝내고 믿음직한 가장의 자리로 돌아와 달 라는 호소의 편지를……. 그로부터 아빤 달라지려 노력하셨고 아빨 망가뜨린 술도 끊으셨어요.”

“그랬구나. 하지만 너의 아빠를 변화시킨 건 내가 아니고 바로 너잖아? 너의 진심이 담긴 장문의 편지가 아빠를 감동시킨 거잖아?”

“아니에요. 선생님의 편지가 아빠를 크게 감동시켰어요. 아빤 그 편지로 그 때까지의 자신의 삶이 무척 부끄러우셨을 거예요. 타인도 자식을 그렇게나 깊 이 사랑하는데 도대체 난 뭐지? 그런 생각을 하셨을 거예요. 또 저의 문장력 은 순전히 선생님이 길러주신 거니까 모두 선생님의 공이죠.”

“그게 어디 내 공이야? 미경이 너, 자꾸 이럴래?”

“아니에요. 그건 저 혼자선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아빤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오신 걸요. 그런데 쉽게 변하겠어요? 저에 대한 선생님의 깊은 사랑이 아빠를 감동시킨 거죠. 그 후, 아빤 바로 술 끊고 건축 공사장에서 막일 하시 다 얼마 전에 공장에 생산직으로 취직이 되었어요. 아빠의 표정이 얼마나 밝 아졌는지…….”

“어쨌거나 아빠가 가장의 자리로 돌아오시고 안정된 직장도 얻으셨다니 정말 다행이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네.”

“예, 이제 우리 집엔 웃음이 넘쳐요. 이제 저도 살맛이 나요. 아빠께서 술 마 시고 행패부릴 땐 저의 미래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이젠 모든 일 에 자신감이 생기고 선생님께서 편지에 쓰신 것처럼 저의 밝은 미래가 보여 요. 세상이 온통 저의 것 같아요. 너무너무 행복해요.”

“우리 미경이가 오늘 선생님을 너무 많이 기쁘고 행복하게 하네. 정말 반갑고 좋은 소식으로…….”

지원은 다시 한번 미경이를 따뜻이 안아주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미경아, 고마워.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선생님, 자주 연락드릴게요.”

“그래. 잘 가. 건강 잘 챙기고…….”

“안녕히 계세요.”

미경이가 가고 난 뒤 지원은 노트를 들고 학교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여러 번 뒷동산에 올랐으나 그 날의 느낌은 다른 때와는 많이 달랐다. 조금 전, 미경이가 주고 간 행복 때문이리라.

맑은 햇살 아래 초록빛으로 우거진 숲, 산새들과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속삭임, 향긋한 풀냄새, 야생화의 고운 향기……. 빛, 소리, 향기가 오월을 곱게 곱게 채색하고 있었다.

‘아! 역시 자연은 아름다워!’

지원은 풀밭에 앉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의 시작이었다.

오월에

그대

파아란 하늘 머리에 이고

초록빛 그리움으로

오시는가?

그대

풀벌레 노래 싣고

하얀 미소로

오시는가?

그대

풀빛 사랑

가슴에 품고

찔레꽃 고운 향기로

오시는가?

그대

보리피리 소리에

발맞추어

하늘 빛 희망으로

오시는가?

숲 속에서

나무와 풀과

작은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나무와 풀들은

평생을 그 자리에 서 있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운명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생명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바람이 오면

그를 맞아 춤을 추고

햇살이 다가오면

더욱 눈부신 색으로 빛났다.

밤이 오면

달빛, 별빛 받으며

또 그렇게 노래하리라.

숲은 그렇게

평화를 지키고 있었다.

태고적부터

그래온 것처럼……

꽃처럼

꽃처럼 아름답게

꽃처럼 향기롭게

살고 싶다.

한적한 길섶에 피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고운 향기로

세상을 곱게 물들이는

꽃처럼 살고 싶다.

나만의 모습으로

나만의 향기로

나만의 언어로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희망을 주는

행복을 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져버리는 꽃처럼

내 마지막 시간이 다가옴에

오히려 감사하며

미련 남기지 않고

홀연히 떠나고 싶다.

머물렀던 자리가

흔적도 없이 깨끗한

그런 마지막이고 싶다.

꽃처럼…….

누구나 그렇겠지만 지원의 삶에도 작은 이별들이 많았다. 가르치던 아이의 전학, 지원의 전근으로 인한 이별……. 남들은 눈물 없이 전학도 잘 보내고, 다른 학교로 이동할 때도 웃으며 떠나가는데 지원은 그렇지 못했다. 이별할 때마다 몹시도 아파했고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함께 외가에 살던 소영이, 몸집은 작았지만 정이 많은 아이였다. 유난히 지원을 잘 따랐고, 하교시 전체적으로 인사를 하고 나가도 앞 출입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며

“선생님, 행복하세요!”

하던 아이였다. 그 예쁜 소영이가 전학을 간다고 했다. 엄마의 재혼으로 여동생과 함께 아빠에게 가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원에겐 더 아픈 이별이 될 것이었다.

“소영아, 조금 있으면 5학년에 올라갈 텐데, 5학년에 올라가서 전학가면 안 돼? 선생님은 널 보내곤 못 살 것 같은데, 큰 병이 나서 죽을 것만 같은데, 소영아,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좀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지원은 그렇게 어린 소영이에게 떼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결코 소영이를 위한 일이 아님을, 자신의 아픔을 덜어보려는 것일 뿐임을 깨닫고 지원은 이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별 선물을 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결국, 눈물로 소영이를 떠나보내고 김천중앙초등학교로 전학간 소영이에게 편지를 썼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소영아

소영아, 잘 있었니?

소영아,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선생님은 너와의 만남을 축복이라고 생각했어. 비록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 동생과 함께 외가에서 생활하지만 누구보다도 밝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는 네가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지. 집에 갈 때 다 같이 인사를 해놓고도 복도를 지나가다 앞 출입문을 열어 고개를 들여밀고는

“선생님, 행복하세요!”

하던 너, 그 때, 그리고 그 후에 그 예쁜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선생님은 정말 너무너무 행복했단다. 그런데 어느 날, 네가 내게 말했지.

‘엄마가 다른 아저씨와 결혼하게 되어 동생이랑 아빠에게 가서 살아야 해요. 그래서 김천으로 전학가야 해요.’

퇴근 길, 선생님은 한손으론 눈물을 훔치면서 운전을 했고 집에 가서 저녁 식사도 하지 않고 베갯잍이 다 젖도록 울었단다.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그리고 다음 날, 너에게 떼를 썼지. 제발 몇 달만 더 참고 5학년에 올라가거든 전학 가라고, 지금 이대로 널 보내면 선생님은 큰 병이 나서 죽을 것만 같다고, 제발 가지 말라고…….

하지만 나의 떼씀이 너를 붙잡지 못할 것임을 알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널 보내기로 마음 먹고 너에게 줄 이별의 선물을 사기 위해 인형 가게로 갔어. 지난 어린이날, 갖고 싶은 선물을 말하라고 했을 때 네가 망설임 없이 인형이라고 말했고 인형을 골랐기 때문에 네가 인형을 좋아하는 줄 알고 말이야. 안으면 한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곰인형을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은 또 흐느꼈단다.

다음 날, 너에게 인형을 주며

“소영아, 선생님 생각날 때마다 이 인형을 안아줘. 응?”

목이 메어 간신히 그 말을 하고 선생님은 입술을 깨물며 또 눈물을 삼켜야 했어. 그리고 인형을 안고 떠나가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네가 좋은 이유로 간대도 슬펐을 텐데 말이야. 유난히 몸집이 작고 야위어서 더욱 가슴이 아팠단다.

하지만 소영아, 지금 너의 이 힘듦은 너를 더욱 크고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힘내기 바란다.

소영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적이 누군 줄 아니? 그건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야. 누구든지 자신만 이기면 성공할 수 있단다. 게을러지려는 마음,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려는 마음을 이기고 열심히 공부하고 바르게 자란다면 넌 꼭 성공할 수 있어. 우리 소영인 해낼 수 있어! 선생님은 우리 소영일 믿는다!

소영아, 힘들 땐 언제라도 선생님에게 연락해. 무슨 일이든지 선생님이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바람처럼 달려가서 도와줄게.

소영아, 너와 함께 한 시간 동안, 선생님이 너의 담임이어서 참으로 행복했어. 선생님에게 커다란 행복을 주던 우리 소영이, 우리가 함께 할 때 그랬던 것처럼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소영이로 자라, 너의 예쁜 꿈을 활짝 꽃피우기 바란다.

소영아, 안녕! 사랑해!

우리 소영일 깊이 사랑하는 서지원 선생님.

지원은 개령초등학교에서 5년 만기가 되어 개령보다 집에서 조금 더 가까운 곡송초등학교로 가서 5년을 근무했다. 늘 그랬지만 지원은 곡송초등학교에서도 문예부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글쓰기 지도를 하여 각종 문예 행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6학년 김소희 엄마는 매일신문 주최 한글 백일장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또한 지원이 독서지도상으로 받은 상금 전액으로 학교에 성인용 도서를 기증하고 학부모들에게 독후감쓰기 지도를 하여 새마을문고중앙회가 주최한 제17회 대통령기 국민독서경진 독후감 단체부에서 곡송초등학교 어머니들이 경북 예선대회에서 최우수, 전국 대회에서 2위를 했으며, 다음 해엔 곡송초등학교 어린이 단체부가 전국 대회에서 최우수를 하여 교육부장관상을 받아 각종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었다.

학교 만기로 다시 개령초등학교로 가게 된 지원은 맡은 아이들을 바르고 알차게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 했고 문예부를 조직하여 열심히 독서지도와 글쓰기 지도를 했다.

다음은 개령초등학교 6학년 권은진이 LG에서 공모한 ‘고마우신 선생님󰡑 수기에서 카네이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선생님

재작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니 엄마는 서울에서 펴낸 어린 잡지인 ‘어린이 동산'을 열심히 읽고 계셨다.

엄마는 그 글 가운데 이웃 학교인 곡송초등학교가 서지원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글짓기대회에서 전국을 휩쓴다는 기사를 전하며 내게 보여 주셨다. 나는 얼른 엄마가 건네 준 기사를 읽으며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우리 학교에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그건 꿈속에서나 만족해야 하는, 엄마와 나의 간절한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서지원 선생님과 나, 그리고 엄마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책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난 해 3월, 뜻밖에도 곡송초등학교에 계시던 서지원 선생님께서 우리 학교로 오신 것이었다.

엄마와 내가 바라던 희망 사항이 현실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엄마는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이고 손등을 꼬집어 확인, 또 확인을 하신 후, 천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나 역시도 선생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운명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성당엘 열심히 나가고 있는 우리들의 간절한 바램을 천주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 거라 여기며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작년 3월 2일, 서지원 선생님께서는 책에서 만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었다. 이렇게 귀한 만남의 시작으로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신 선생님께서는 전 학년 모두의 일기장을 검사하신 후, 문예부를 만들어 아이들을 모아 열심히 지도해 주셨다. 나와 두 동생은 컴퓨터 배우기를 뒤로 한 채 당연히 문예부에 들어가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다.

우리 학교는 도서관이 따로 없어 선생님께서 직접 각 학년에 맞는 도서를 골라 분류하여 교실에 꽂아두고 언제나 자유로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셨다.

서지원 선생님께서는 계절에 따라 예쁜 들꽃을 꺾어 나누어 주시며 꽃향기를 맡게 하셨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있는 아름다운 글을 조금이라도 더 잘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우리들은 이렇게 훌륭하신 선생님께 열심히 배운 결과 글짓기대회에서 전국을 휩쓰는 행운을 얻었다. 선생님께는 크나 큰 기쁨의 영광을 안겨 드리고 70명 남짓한 우리 학교를 빛내는 해가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어머니들께도 글쓰기를 지도하신 후, 김천예술제에 참가하도록 하신 보람으로 많은 어머니들께서 장원, 차상, 차하 등, 좋은 성적으로 입상을 하여 기쁨이 넘치는 학교로 만들어 주셨다.

좋은 작품을 많이 읽게 하고 모든 아이들의 글을 모아 예쁜 이름을 붙여 전시해 놓으실 정도로 자상하신 우리 선생님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생님’이라 부른다.

풀꽃 반지를 만들어 반 아이들에게 일일이 끼워 주시고 생일을 맞는 아이에겐 선물과 함께 예쁜 칼라 복사지에 선생님의 마음을 담아 축하 편지를 전해 주시는 우리 선생님, 우리들의 가슴을 온통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시는 선생님을 위해 우리는 더욱 힘찬 걸음으로 우리들의 꿈을 꽃피우기 위한 지름길로 달려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생님께 드리는 가장 큰 선물이므로…….

지원이 개령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중 곡송초등학교의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곡송으로 내신 서류를 내려 하자 갑자기 희정이가 결석을 했고 희정이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희정이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몸을 가눌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고 유일한 약이 있다면 담임인 지원이 다른 학교로 가지 않는 것이라 했다. 담임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가지 말란다고……. 병까지 나면서 담임을 붙잡는 희정이, 그런 희정이를 차마 뿌리치고 갈 수가 없어 지원은 다시 개령에서 일년을 더 근무하게 되었다. 학교 사정상 희정이의 담임은 되지 못했지만 희정일 문예부에 넣고 글쓰기를 가르쳐 좋은 성적으로 입상도 많이 했다.

그런데 일년 후, 지원이 이동하려고 하자 새로 맡은 아이들이 또 붙잡는 것이었다.

“선생님, 작년에도 가신다고 하고 안 가셨잖아요? 일년만 더 계시면 안 돼 요?”

“작년엔 4학년 언니들이 병나서 못 갔어. 하지만 이번엔 곡송 아이들과의 약 속을 꼭 지켜야 해.”

“선생님, 그럼 저도 병날래요!”

“선생님, 저두요!”

“저도 병날 테니 제발 가지 마세요, 네?”

아이들은 마치 병나기 내기라도 하듯이 서로 병나겠다고 난리였다. 하지만 지원은 내신서류를 냈고 곡송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2월 20일 아침, 지원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서선생님, 축하합니다. 곡송으로 발령 났던데요"

지난 해 교무를 보다가 아포초등학교로 간 최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잠깐 현깃증이 났다. 원하던 일이었지만 기쁨보다는, 아이들과의 아픈 이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하는 데서 오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원은 그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그 날 밤, 지원은 아이들에게 울면서 편지를 썼다.

착하고, 예쁘고, 사랑스런 우리 2학년 친구들에게

선생님은 지금 여러분에게 하기 힘든 말을 하려고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았어요. 사실 오늘 아침에 곡송초등학교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받았어요. 여러분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그런데 어쩌면 여러분보다 선생님이 더 이별을 아파하는지도 몰라요. 여러분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도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여 한참씩 눈물을 닦으며 쓰고 있어요. 그리고 흐느낌으로 자꾸만 틀리는 글씨를 고쳐 가며 말이에요. 혹시 선생님이 곡송으로 가지 못하면 한 해 더 여러분을 가르치겠다는 계획도 세워 놓았었는데……. 하지만 여러분은, 선생님이 왜 곡송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선생님이 해준 말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조금은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매일 아침,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로 함께 불렀던 노래, 선생님이 만든 급가와 아름다운 동요를 불러 여러분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어 주려고 노력하던 일이, 오히려 선생님의 마음을 더 아름답게, 더 행복하게 했던 일을, 여러분은 모를 거예요.

그래요. 선생님은 여러분을 가르치면서,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바르고 알차게 자라는 여러분을 보면서, 얼마나 큰 행복을 얻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늘 여러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우리는 한 가족처럼 서로 돕고 아껴주며 일년을 보냈고, 여러분의 아름다운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 힘차고 아름다운 날갯짓이 3학년에 올라가서도 계속 되기를, 선생님은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급가와 선생님이 가르쳐 준 동요를 함께 부를 수 있는 날도, 겨우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선생님을 안타깝고 슬프게 하는군요. 여러분의 그 예쁜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2학년 어린이 여러분!

지난 일년간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따라 주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한 여러분에게 선생님은 참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그런 여러분에게 좀더 잘 해주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선생님은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워요. 이렇게 빨리 떠날 거면 선생님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고 갔어야 하는 건데…….

선생님은 이제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되지만 교실 남쪽 창가 갈대 밭 아래 작은 연못에서 언제나 들리던 물소리,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했던, 정말이지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워, 머무르고 싶었던 지난 일년을,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떠나더라도 여러분이 그립고, 못 견디게 보고 싶을 때면 언제라도 달려와 여러분을 안아 줄 거예요. 그러니 너무 섭섭해 하진 말아요.

2학년 어린이 여러분!

3학년에 올라가서도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담임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알차게 자라며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기 바래요. 그리고 그동안 선생님을 믿고 여러분을 맡겨주시고, 뒤에서 힘차게 응원해 주신 여러분의 부모님께 감사의 말씀을 대신 전해주세요.

2학년 어린이 여러분!

앞으로도 바르고, 곱고, 알차고, 건강하게 자라 여러분의 아름다운 꿈을 활짝 꽃 피우세요. 그게 바로 선생님의 가장 큰 소원이랍니다.

2학년 친구들! 사랑해요! 안녕!

2월 20일 깊은 밤에

여러분을 깊이 사랑하는 서지원 선생님.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지원은 2쪽의 편지를 서로 다른 색깔의 칼라 복사지에 인쇄하곤 맞대어 코팅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집에 갈 때 돌려주려고 감추어 놓았다.

넷째 시간은 개령에서의 마지막 수업시간인 ‘즐거운 생활' 시간이었다.

“여러분, 이 시간은 2학년 때의 마지막 수업시간이니까 우리 1학기 때부터 배운 노래들을 한번씩 불러봐요"

“예!"

아이들은 봄노래부터 시작하여 겨울노래까지, 사계절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열심히 불렀다.

지원은 수업을 마치고 코팅한 편지를 나누어 주었다.

“와! 예쁘다! 선생님, 이게 뭐에요?"

“글쎄, 여기서 보지 말고 집에 가서 봐요. 알았죠?"

“예!"

지원의 착한 아이들은 궁금함을 참고 받자마자 가방에 넣었다.

지원이 가장 힘들어하는 날, 그것은 바로 아이들과 이별을 해야 하는 종업식날인 오늘이다. 그 아픈 이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지원은 갑자기 무슨 병에라도 걸려 하루쯤 의식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철부지 어린애 같은 바램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변함없이 날은 밝아오고, 지원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몰고 나섰다.

지원이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잡이가 달린 사탕을 한 개씩 내미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먼저 사니 너도 나도 선생님에게 줄 마지막 선물을 그렇게 준비한 모양이었다.

“고맙다."

그렇게 말하는 지원의 목이 메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도 밤 늦도록 준비한 선물을 일일이 이름을 불러 나누어 주었다. 학용품 세트에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붙인 선물을…….

“선생님, 가지 마세요, 예?"

“이미 곡송으로 발령이 났어. 그러니 가야 해."

“발령이 뭔데요? 그냥 안 가시면 안 돼요?"

아홉 살짜리 꼬마들에게 인사 관계를 설명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드디어 종업식은 시작되고……. 교장 선생님이 이동 소식을 전하고 떠나는 선생님의 인사 말씀을 듣겠다며 조회대로 올라가기를 기다렸지만 쏟아지는 눈물과 흐느낌으로 지원은 감히 조회대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며 곧장 교실로 가서 책상에 엎드려 오열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교무부장이 와서 물었다.

“선생님, 2학년 아이들 보낼까요?"

지원은 교무부장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없인 아이들의 얼굴을 볼 자신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 아이들의 마지막 뒷모습을 바라볼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아이들이 교실로 몰려와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정말 가셔야 해요? 우리랑 같이 더 계시면 안 돼요?"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선생님도 그러고 싶지만……."

얼마 후, 울음이 좀 잦아들었을 무렵, 지원은 아이들에게 아침에 받은 사탕을 한 개씩 나누어 주며

“이거 너희들 먹어. 선생님은 너희들의 고마운 마음만 받을게."

라고 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교실 창밖으로 교문을 나가는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는 지원의 얼굴엔 뜨거운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얘들아, 정말 고마워. 지난 일년간 선생님은 착하고 예쁜 너희들의 담임이어 서 참으로 행복했어. 몸은 헤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오래도록 너희들 곁에 있 을 거야.’

지원은 주전자로 물을 떠와서 교실 연못가에 줄지어 서 있는 화분들에게 주었다. 새 주인이 올 일주일 후까지 목마름을 견딜 수 있도록 충분히…….

‘얘들아, 지난 봄부터 내가 떠날 때까지 죽지 않고 잘 자라 주어서 정말 고맙 다. 그리고 너, 철쭉아, 지금 만들고 있는 꽃봉오리는 조금만 참았다가 새 주 인이 오는 날 아침에 활짝 피우렴. 곱고 예쁜 모습으로 새 주인의 첫날을 행 복하게 해주렴. 알았지?'

지원의 시선은 ‘정성엽’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아주 조그만 베고니아 화분에 머물렀다. 성엽이는 엄마가 가출하여 지난 해 1학기 종업식하던 날, 친가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로 간 아이였다. 남자 아이였지만 감성이 풍부하고 책을 많이 읽어서 독서 퀴즈를 낼 땐 자신이 넘치던 아이였다. 성엽이 아빠가 학교에 와서 전학 의사를 밝히며 가출한 엄마가 돌아오면 다시 오겠다고 해서 성엽이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래서 급식소의 성엽이 자리도 마지막 날까지 비워 놓았었다. 그리고 성엽이 화분은 더욱 정성을 들여 보살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성엽이……. 그래서 지원은 종교는 갖고 있지 않지만 하루 속히 성엽이 엄마가 돌아와 성엽이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아주 간절히 기도했다.

다음엔 등나무숲으로 올라갔다. 봄, 여름 동안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던 등나무, 제일 먼저 연노란 꽃으로 봄소식을 전해주던 산수유나무, 봄이면 연분홍 벚꽃을 피우고 바람에 꽃잎을 눈처럼 흩날리던 다섯 그루의 벚나무, 사월 초순이면 연보랏빛 작은 꽃송이로 고운 향기를 내뿜던 라일락, 그리고 작은 동산에 하양, 노랑, 분홍, 보라빛의 작은 꽃으로 피어나 바람에 일렁이던 야생화들……. 아직은 모두 맨 몸으로 찬바람을 맞고 있지만 3월이면 기지개를 켜고 찬란한 봄을 준비할 등나무 숲의 친구들과도 이젠 이별이다.

‘얘들아, 나는 간다. 너희들, 이제 언제 볼 수 있을지 몰라. 내가 떠나도 아름 다운 모습으로, 고운 향기로, 개령 식구들에게 기쁨을 주어야 해. 알았지? 모 두 모두 안녕!'

지원은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

‘우리 아이들과 나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교실아, 안녕! 남쪽 창가 갈대들도, 연못가의 화분들도 모두 모두 안녕!'

마지막으로, 언제나 시원한 물소리를 들려주던 우산분수의 플러그를 뺐다. 그리고는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들께 작별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손을 흔들어 주는 선생님들, 그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지원은 교문을 나섰다.

눈물 어린 눈으로 바라본 차창밖엔 맑은 봄햇살이 내리고 있었고, CD에서 흘러나오는 쇼팽의 ‘이별곡’이 그녀의 마지막 이별 장면을 생생하게 재생해 주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낸 오후, 지원은 먼저 복잡한 공문을 발송하고 나서 머리도 식힐 겸 피아노에 앉아 평소에 즐겨 치던 피아노 명곡들을 연이어 치고 있었다. 와이만의 ‘은파’,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바다르제프스카의 ‘소녀의 기도’,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그 때 가사도우미로부터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3학년인 쌍둥이 아들이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자기 선생님이 출장 간다고 학교에 오지 말랬다고 하던데요.”

“여기 오다 보니까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 가던데요. 그래서 왜 안 갔느냐고 물으니까 가기 싫어서 안 갔다고…….”

아이들의 말이 좀 이상하긴 했었다. 담임이 출장이라도 다른 교사가 보결수업을 할 텐데 담임반 아이들을 오지 말랬다는 게……. 하지만 그 땐 너무나 바빠서 그런 거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어 무심코 출근했었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지원은 수업을 마치고 조퇴를 달아놓고 집으로 달렸다. 차라는 차는 모두 다 추월하며 목숨을 걸고 달렸다.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엄마를 속이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쌍둥이에게 다그쳤다.

“왜 거짓말했어? 왜 학교에 가지 않았어?”

“학교에 가기 싫어. 애들이 때리고 놀려.”

엄마의 퍼런 서슬에 주눅이 든 막내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왜 때려? 맞을 짓을 왜 했어?”

“맞을 짓 안 했어. 그냥 발로 차고 때리고 놀리고…….”

“뭐라고 놀려?”

“공부 못한다고 바보라고…….”

“그런다고, 그런 이유로 학교를 안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당장 일어 나!”

지원은 두 아이를 양손에 잡아 끌고 학교로 가서 교실로 들어갔다. 담임 선생님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잖아도 쌍둥이가 결석을 해서 궁금하던 참이었어요.”

“선생님이 출장이라서 학교에 안 간다고 하더군요. 그런 거짓말까지……. 자 식을 잘못 키워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학교에 가기 싫으냐고 물으니 다른 아이들이 우리 쌍둥이를 괴롭 힌다고, 그래서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네요. 사실인진 모르지만…….”

“그랬대요? 전혀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지도해서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담임은 쌍둥이 둘 다 학습의욕이 부족하고 발표도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통 쌍둥이들은 같은 편이 되어주는데 지원의 쌍둥이는 자기들끼리 자주 싸워서 다른 아이들이 말려준다고도 했다. 준비물을 잘 챙겨오지 않는다고도……. 그러고 보니 지원은 쌍둥이의 알림장을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알아서 챙겨가려니 했다. 담임에게 면목이 없었다. 담임은, 같은 교사로서 어린 자식을 전혀 돌보지 않는 지원을 어떻게 평가할까? 생각하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자식에게 엄마 노릇 못하는 게 선생님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되네요. 앞으로는 신경쓰겠습니다.”

돌아오는 길, 지원은 몇 번이나 길가에 주저앉았다. 다른 아이들이 쌍둥이를 괴롭히지 않도록 철저히 지도하겠다는 담임의 말도 위로가 되진 못했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저녁도 먹지 않고 밤이 깊도록 그동안 너무나 바빠서 돌아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출근시간은 8시 반이었지만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했다. 빨리 걷히지 않는 어둠을 원망하며……. 식사도 하지 않고 한 시간 내지 두시간 전에 출근하여 교실 청소를 해 놓고, 여름엔 교실을 시원하게, 겨울엔 따뜻하게 데워 놓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등교하는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 반갑게 맞아주었다. 표정이 밝지 못한 아이는 왜 그런지 묻고 손잡아 주며, 안아 주며, 기분을 풀어주기도 했다. 문예부 아이들이 전날 써낸 글을 일일이 봐주고 다듬어 주고 댓글을 달아주기도 했다. 남보다 두 시간 반이나 먼저 출근하여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지원을 여동생이 자주 핀잔했었다.

“언니, 그런다고 누가 알아줘? 언니 애들도 챙기고 집안 일도 하고 출근해. 그렇게 산다고 누가 알아주냐고?”

“누가 알아주라고 이러는 거 아냐. 내가 이렇게 하고 싶어서 할 뿐이야. 내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

“그러려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았어야지. 돌보지도 않을, 감당도 못할 애들 을 낳긴 왜 낳았어? 그것도 네 명씩이나……. 수란이만 해도 그래. 지능지수 가 2천명이 넘는 학교에서 제일 높았다며? 엄마 잘 만났으면 서울대 갈 아이 를 언니 같은 엄마 만나 경희대밖에 못 간 거 아냐?”

“인정해. 내가 엄마 노릇 못 한 거. 일에 지치고 지쳐서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수란이가 야간자율학습하고 돌아온 거, 단 한번도 보지 못했어. 수란이 뿐 아 니고 앞으로 수정이와 쌍둥이 고3 때도 그렇게 밖엔 못 할 거야. 다른 집 애 들은 엄마가 간식도 해주고 한다던데 말이야. 그 잘못은 인정해. 하지만 일류 대학을 나왔다고 다 일류 인간이 되는 건 아냐.”

“씨도 안 먹히는 소리 하지 마. 그 공자 같은 소리, 이젠 질린다 질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좋은 신랑감 만날 거 아냐? 언니 반 애 들한테 하는 것의 1/10 만큼이라도 자식들한테 해봐. 그럼 애들 인생이 확! 달라질 테니…….”

하긴 그랬다. 해마다 시업식 하자마자 담임 반 아이들 생일을 달력에 적어 놓고 생일 선물, 생일 편지와 출근길에 차를 세워 놓고 야생화를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축하해 주고 생일 기념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리고 생일을 맞은 아이의 부모에게도 책을 사서 안 표지에 ‘귀한 자식을 저에게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써서 선물로 주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돌보는 아이 생일엔 그 아이의 선물 뿐만 아니라 어르신들의 옷과 이부자리, 그리고 먹을거리도 사드렸다. 하지만 자기 자식 생일엔 선물은 커녕 편지 한 줄 써준 적도 없고, 가끔씩 생일을 까먹은 적도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발렌타인데이엔 커다란 초콜릿에 컬러복사지로 인쇄한 사랑한다는 메시지 ‘은지야, 너무너무 사랑해! ****년 발렌타인데이에 서지원 선생님’의 둘레를 펭킹가위로 오려 사랑표 스티커로 둘레를 붙여서 주고, 화이트데이엔 밤을 새워 사탕 목걸이를 만들고 사랑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목에 걸어주었다. 빼빼로데이, 어린이날, 크리스마스도 챙겨주었다.

급식이 없는 토요일엔 김밥 등 간식을 챙겨주고 월드컵 기간엔 ‘월드콘’을, 포켓몬스터 만화영화가 인기일 땐 ‘포켓몬스터’ 빵을 사주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여러 가지 과자와 빵, 햄버거, 피자, 통닭도 자주 사주곤 했으며, 운동회 연습기간엔 힘들다고 코코볼, 콘프로스트를 사주어 우유에 타 먹게도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겐 옷, 신발, 가방, 학용품도 사주었으며 배고픈 아이에겐 먹을 것을 사주며 격려했다.

“미쳤어. 완전히 학교에 미쳤어. 언닌 제 정신이 아니야.”

“어딘가에 미칠 곳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야. 안 그래?”

“언니만 행복하면 뭐해? 언니 때문에 피해 보는 가족은 어떻고? 그러려면 아 예 결혼을 하질 말던가.”

“그러게.”

그랬다. 어쩌면 지원은 복직하고부터 학교에만 미쳐 있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이 무얼 원하는지, 얼마나 외로워하고 아파하는지, 무얼 챙겨줘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른 집의 아이들은 지나친 부모의 교육열로 병들어 간다는데 지원의 네 아이는 모두 학원이란 곳을 다녀 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시험을 언제 치는지 관심도 없었고, 그날 시험쳤다고 말해줘도 잘 쳤냐고 물어보지 조차 않았다. 그러니 아이들의 성적은 늘 엉망이었다.

자신의 반 아이들의 알림장엔 알뜰히 준비물을 적어주고 꼭 챙겨오도록 당부하고 준비물을 챙겨 오지 않은 아이에겐 자신의 돈으로 문방구에 가서 준비물을 사다 주곤 했다. 그런데 자기 자식의 알림장은 구경조차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쌍둥이 통지표 특기 사항란에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음’이라고 써주었을까? 다른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만들기를 하는 동안, 준비물이 없는 쌍둥인 무얼 하고 있었을까? 그 긴 시간 동안……. 가슴이 무너졌다. 날밤을 새우며 지원은 그렇게 자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럴 뿐,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지금까지 살아 온 것처럼 그렇게 밖엔 살지 못할 거야. 얘들아, 빵점짜리 엄마라서 미안하 다. 정말이지, 이러려면 결혼이란 걸 하지 말걸. 독신으로 살면서 맘 편히 내 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만 올인할 걸.’

학교에서 가장 바쁜 달은 3, 4월이다. 그 중에서 3월은 맡은 업무의 계획 세우기, 환경정리, 기초학력평가, 진단평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공문보고와 처리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일거리를 집에 싸가지고 가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3, 4월만 아니라면 선생도 할만하다’고……. 그 와중에 지원에게 청혼하고 빨리 결혼하자는 남자가 있었다. 하필 일년 중 가장 바쁜 달인 3월에…….

지원이 맡은 4학년, 그 중에 키가 제일 크고 뚱뚱한 정우는 일기에 쪽지를 끼워 넣곤 하였다. 사랑표까지 넣어서…….

‘선생님, 너무너무 좋아요.’

‘선생님, 사랑해요!’

‘선생님, 우리 결혼해요!’

‘선생님, 급해요! 빨리 결혼해요!’

제법 단계를 갖춘 정우의 고백 쪽지에 계속 웃어넘기기만 하던 지원은 아이들을 하교시키고 정우를 남겼다.

“정우야, 선생님의 어디가 좋아?”

“다 좋아요. 선생님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예쁘고, 목소리도 예쁘고, 피아노 치는 모습도 예쁘고…….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요.”

“정우야, 결혼이 뭔데?”

“남자하고 여자하고 예식장에서 손잡고 걸어가고 나서 같이 사는 거요.”

“선생님은 이미 결혼했는데 어떻게 또 결혼해?”

“다른 사람들도 세 번, 네 번, 다섯 번도 결혼하던데요.”

“그렇긴 한데 음, 선생님하고 정우하고 나이 차이가 엄청 많은데 넌 그거 극 복할 수 있어?”

“그까이 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어요.”

웃음이 나왔다. 정우는 무얼 극복해야 하는지 알기나 할까?

지원의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은

“우와! 서선생님 횡재했다. 도대체 나이 차이가 얼마야?”

“우리 정우는 그 많은 나이 차이 극복할 자신이 있대.”

“예? 우하하하……. 부럽다, 부러워!”

“정우도 보는 눈은 있네요. 서선생님 몸매는 처녀 뺨치고, 긴 생머리에 얼굴 도 예쁘시잖아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선생님보다 시어머니가 더 젊잖아요? 넘 재밌다. 하하하…….”

그렇게 지원에게 정우의 청혼은 교사들에게 유쾌한 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동안 지원과 결혼하고 싶다는 아이는 여러 명 있었으나 그건 단지 희망사항이었을 뿐, 정우처럼 적극적이진 않았었다.

학교에선 3월 하순경에 가정방문을 가라고 했다. 수업을 마친 지원은 정우의 손을 잡고 정우네 집으로 출발했다. 정우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정우,

“정우야, 그렇게나 좋아?”

“예! 너무 너무 좋아요! 선생님의 손을 잡고 가니까 진짜 진짜 행복해요!”

“선생님도 행복해.”

그런데 정우네 집은 산중턱에 있는 외딴 집이었다. 디귿자로 늘어선 축사에선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개를 500 마리 넘게 기른다고 했다. 정우 부모가 출타 중이라서 집 구경만 하고 나왔다.

다음 날, 지원은 정우에게 말했다.

“정우야, 선생님은 정우하고 결혼 못 할 것 같아.”

“왜, 왜요?”

“너넨 개를 그렇게나 많이 키우는데 우리가 결혼하게 되면 선생님도 일을 해 야 하잖아? 개밥은 줄 수 있지만 개똥 치우는 일은 못할 것 같은데……. 선 생님은 비위가 아주 많이 약하거든.”

정우는 강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선생님은 일 하나도 안 해도 돼요. 일은 저 혼자서 다 할 거예요. 선생님은 놀기만 하면 돼요.”

‘이 무슨 횡재? 엄청난 나이 차이만 해도 황공한데 뭐? 놀기만 하라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지원은 억지로 참았다.

며칠 전에 친 진단평가에서 정우의 성적은 뒤에서 두 번 째였다. 회심의 미소를 띤 채 지원이 말했다.

“정우야, 선생님은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좋거든. 그런데 이번에 시험친 거 보니까 정우 네 성적이 좀…….”

“꼴찌죠?”

“꼴찌는 아니지만…….”

“선생님, 작년까지는 공부 하나도 안했지만 이제부턴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안 놀고 잠도 안 자고 공부만 할 거예요. 그래서 1등할 거예요. 선생님, 그러 면 저와 결혼해 주실 거죠?”

“그 말, 믿어도 돼?”

“예!”

“그렇다면…….”

며칠 후, 보건 교사가 지원의 교실로 왔다.

“선생님, 비만인 아이들 아침마다 운동 시키는데 제일 심각한 정우는 첫날만 나오고 한 번도 안 나왔어요. 살 안 빼면 결혼 못하겠다고 하세요. 예?”

“알았어요. 우리 정우는 내가 책임질 게요.”

그날 오후, 지원이 정우에게 말했다.

“정우야, 선생님은 뚱뚱한 남자는 좀 그래. 날씬한 남자가 나는 좋아.”

“선생님, 살 뺄게요. 열심히 운동해서 살 뺄 거니까 결혼 못한다는 말씀은 제 발, 제발 하지 마세요. 예?”

“정말이지?”

“예!”

사랑하는 선생님과의 결혼을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 견디기 힘든 식욕을 참고 살도 빼겠다는 정우…….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아이들을 보내고 보고할 공문을 작성하고 있을 때, 집으로 간 줄 알았던 정우가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우야, 아직도 집에 안 갔어?”

“선생님께 드릴 것이 있어서요.”

“내게 줄 것? 그게 뭔데?”

정우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지원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제가 약혼반지 끼워 드릴게요.”

“뭐? 약혼반지? 하하하…….”

“선생님, 왼손 내밀어 보세요.”

지원은 정우가 시키는 대로 왼손을 펴서 내밀었다. 정우는 연두색 플라스틱 반지를 지원의 넷째 손가락에 정성스럽게 끼워주었다. 반지의 한쪽이 틔어 있어서 무리없이 들어갔다.

“와! 이쁘다! 딱! 맞네! 정우야, 이거 어디서 샀어?”

“학교 앞 문방구에서 300원 주고 샀어요. 맘에 드세요?”

“그럼, 맘에 들고 말고……. 정말 예쁘고 귀엽다.”

“와! 진짜 다행이다. 저는 선생님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하지? 하고 진짜 많 이 걱정했는데…….”

“정우야, 고마워! 이 선물, 오래오래 간직할게.”

“이제 약혼까지 했으니까 저하고 꼭 결혼하셔야 해요? 아셨죠?”

“알았어. 하하하…….”

지원과 정우와의 약혼 상태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진행형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지원을 존중하고 좋아했다. 그래서 자기 자식을 맡아주길 원했다. 어떤 학부모는 학년 말에 교장 선생님에게 전화하여 지원이 자기 아이 담임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녀를 충격에 빠뜨린 사람도 있었다.

지원은 아이들이 주는 사탕 몇 알 정도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여겨 기쁘게 받아 주었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주는 부담스런 선물은 절대로 받지 않고 돌려주었다.

5월 15일 스승의 날 아침, 지원의 반 상혁이란 남자 아이가 가방을 멘 채 지원에게 다가와 네모난 선물을 내밀었다.

“선생님, 이거 우리 엄마가 선생님 드리래요.”

잔잔한 무늬로 포장된 두 개 짜리 팬티스타킹 세트 안엔 5만원짜리 신세계 상품권 1장이 들어 있었다. 전의 학교에서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어서 준 사람이 무안하지 않게 지원이 지니고 있는 문장력을 총 동원하여 편지를 쓰고 책을 한권 사서 그 안에 함께 넣어 돌려보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선생님을 너무 몰랐다며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었다.

그 날도 지원은 편지를 썼다. 교사가 아이들 가르치는 것은 무료봉사가 아니라 나라에서 월급을 받고 하는 당연한 일이니, 따로 선물은 하지 않아도 된다며 성의는 고마우나 그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마음이 상했다면 용서하라고 썼다. 또한 상혁이의 학교생활 중 좋은 점을 소상히 쓰고 큰 인물이 될 아이니 뒷바라지 잘 해달라는 부탁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는 월간 ‘좋은 생각’을 사서 거기에 편지와 함께 끼워 넣어 돌려보냈다.

그런데 다음 날 오전, 그 아이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재수 없어. 당신은 너무 가식적이야.’

문자를 읽는 지원의 손이 떨렸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귀속에선 쐐~~~ 하는 금속성이 들렸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엄청난 수모! 감당하기엔 너무나 강한 수모였고 충격이었다..

‘그게 그렇게 재수 없는 일인가? 더구나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위인 담임에 게 반말로 항의할 만큼? 내가 언제 그렇게 가식적이었을까? 가식적으로 사람 을 대해야 할 만큼 큰 것을 얻고 싶어 한 적도 없는데…….’

지원의 삶이 그때만큼 헐값에 매도된 적은 없었다. 또 그럴 만큼 아무렇게나 살아오지도 않은 지원, 그래서 충격이 더 컸다. 그 충격으로 지원은 며칠간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 채 심하게 앓아야 했다.

지원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자존심 하나만은 목숨을 걸고 지켜왔다. 사실 서푼어치도 안 되는 자존심, 그 자존심으로 인해 그녀의 삶이 힘들게 느껴질 때도 많았지만 그녀를 온전히 지켜준 것은 바로 그 높은 자존심이었다.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지원은 오랫동안을 심하게 앓아야 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녀에게 엄청난 상처를 준 사람의 아들, 상혁이가 결코 밉지 않은 것이었다. 다른 교사들은 부모가 미우면 자동으로 그 자식도 밉다는데 지원은 아니었다. 부모는 부모일 뿐, 상혁인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지원에겐 귀엽고 사랑스런 제자였다.

지원은 상혁이 엄마가 교통사고를 내어 오토바이 운전자를 다치게 하고 입원해 있을 때 문병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읽을 책과 음식을 보냈다. 직접 찾아가 전달할까 생각도 했으나 상대방이 불편해 할까봐 그렇게 했다.

“그 사람한테 받은 엄청난 수모로 큰 병까지 났었으면서 왜 그딴 짓을 해? 바보는 뭐가 달라도 달라!”

또 이어지는 동생의 잔소리,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지원은 그렇게 한 것이다.

지원은 KBS TV에서 방영하는 ‘TV 동화 행복한 세상’을 열심히 보았다. 비록 방영 시간은 짧지만 그 안엔 사람을 감동시키는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도덕 시간이나 틈틈이 반 아이들에게도 교육자료에 묶어 놓은 그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비록 어린 아이들이지만 그 동영상을 보는 아이들의 표정은 진지했고, 이론이나 설명으로의 도덕 교육보다 효과가 훨씬 더 컸다.

그러다 지원은 책으로 나온 ‘TV 동화 행복한 세상’을 읽게 되었고, KBS와 샘터사가 공동 주최한 ‘TV 동화 행복한 세상’ 독후감 공모 대학, 일반부에서 대상을 차지하여 2002년 7월 26일, 서울에 가서 KBS 사장상도 받았고 수상자를 대표하여 인터뷰도 했다. 그리고 상금은 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다음은 수상 작품의 전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선물

‘TV 동화 행복한 세상’이란 아름다운 책을 만난 것은 좀 특별한 날이었다. 내가 처녀 때 자원해 간 벽지학교인 강마을 학교에서 글짓기를 가르쳤던 정민이란 아이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선생님을 찾으려고 애를 쓰다 인터넷에서 찾았어요. 저는 한 순간도 선생님 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라는…….

내가 자원해서 강마을 벽지학교인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금호초등학교에 부임해갔을 때 정민이는 아버지가 청각장애인이고, 어머니가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지체장애인이었으며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이유로 정민인 아이들에게 돌팔매를 맞아야 했고 얼굴엔 늘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난 그 아이의 불행을 글로써 승화시키기 위하여 글짓기 지도를 했다.

난 그 아이를 산으로 강으로 데리고 다니며 무딘 감각의 문을 열어주려 노력했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악’에서 목사님이 장님인 ‘제르뜨뤼드’의 감각의 문을 열어주기 위해 노력했듯이…….

정민이의 글짓기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 정민이가 영동군 대표로 도대회에 나가게 되었을 땐 하숙집 주인에게 하숙비를 두 배로 줄 테니 한 달간만 정민이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허락을 얻어냈다.

이른 아침, 강가에 피어오르는 뽀얀 물안개를 보며, 또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내리는 강둑을 함께 걸으며 정민이의 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공부를 하게 했다.

드디어 정민인 도대회에서 장원을 했고 전국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어 단숨에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높은 분께 감동적인 편지를 써서 남편을 제자리로 돌아 가게 했습니다. 선생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참으로 오랜만에 받은 정민이의 전화로 기쁨에 넘쳐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여고 1학년인 둘째 딸이 엄마 생일을 까먹고 생일 선물도 못해 미안하다며 ‘TV 동화 행복한 세상’이란 책을 내미는 것이었다.

거기엔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노인들을 위해서 일부러 느림보가 된 버스기사 이야기, 하늘나라로 가신 아빠가 이사한 집을 찾지 못할까 봐 이사를 가며 담벼락에 그려놓은 약도가 지워지자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그리는 어린 두 형제의 이야기, 삭막한 시골길에 꽃을 심어 아름다운 꽃길을 만든 집배원, 섬마을에서 평생을 봉사하는 노인 의사, 자기 집에서 빵을 훔쳐서 지하도의 구걸하는 소년에게 갖다 주는 소녀, 음악회에서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절정을 앞두고 멈추고는 장애인 소년에게

‘네가 내 손을 잡아준다면 끝까지 부를 수 있다.’

면서 소년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일,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 부부가 이웃 사람들을 위해 가로등을 켜고 끄는 일을 성실히 해내는 일, 같은 병실에서 친해진 일곱 살 난 소녀와 사고로 실명을 한 청년의 사랑,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소녀가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아저씨, 나 아무래도 아저씨랑 결혼 못할 것 같아. 그러니까 아저씨 눈 할래.’

라는 편지를 보내고 안구를 기증한 일……. 모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연이었다.

아! 그리고! 난 오랫동안 교단생활을 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며,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 삶보다는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 삶이 바로 보석처럼 빛나는 삶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나의 생각에 동의하는 또 한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다름 아닌 ‘TV 동화 행복한 세상’에서 ‘후원자의 충고’에 나오는 구두병원 원장님! 그는 자기가 후원해 준 학생이 찾아오자 바로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온 말을 그대로 하는 것이었다. 그 때의 감동이란! 정말이지 눈물이 핑 돌만큼 강한 것이었다. 그 순간, 난 책속의 구두병원 원장님과 강한 동류의식을 느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삭막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TV 행복한 세상’이라는 책에서처럼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고, 따스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은 살아 볼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TV에서 방영하는 ‘TV 동화 행복한 세상’, 비록 방영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지만 그것이 주는 감동은 장편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진했으며 책으로 나온 ‘TV 동화 행복한 세상’도 다른 그 어느 책에서 얻는 감동보다 몇십 곱절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TV 동화 행복한 세상’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표에 성실한 대답을 해주는 책이다. 또한 행복이란 높고 화려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장애로 살아내기가 힘든 사람들에게 듬직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무채색으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축복으로 이끌어가게 힘을 주는 책이다.

이 ‘TV 동화 행복한 세상’이란 책이 사랑의 씨앗이 되어 더 많은 열매를 거두고 또 다시 뿌려진다면 이 세상은 한층 더 아름다운 색깔로 수놓아지지 않을까?

딸이 나에게 준 ‘TV 동화 행복한 세상’이란 책,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받아본 선물 중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가 지나가고 구름 속에 숨었던 해가 얼굴을 내밀자 지원은 마을의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비로 세수한 나무들은 맑은 햇살에 더욱 고운 초록빛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진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원은 노트를 펼치고 눈에 보이는, 가슴으로 다가오는 느낌을 시로 써내려갔다. 시 한 편을 쓴 지원은 갑자기 가슴 아픈 첫 사랑에의 기억이 떠올라 페이지를 거꾸로 되돌려 그 때 쓴 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그대 작은 숨결에

한 잎

또 한 잎

사르르

사르르…….

작은 우주가 열리고

파란 하늘이 열리고…….

지나가던 바람도

숨을 멈춘 아침,

한 송이 꽃이

세상을 보았네.

그러나

그대의 숨결 없인

열지 못하는 잎인 것을,

그대의 시선 없인

내뿜지 못하는 향기인 것을,

그대의 영역 밖에선

결코 빛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목소리

푸른 산빛을 깨치고

투명한 물빛을 깨치고 들려오는

그대 목소리,

멀리서

풀빛으로 젖어 오는

그대의 맑은 목소리가

오늘

내 작은 가슴을 울립니다.

깊은 산골짜기를 타고

시내를 건너

언덕을 넘어 온

그대 목소리,

맑은 하늘 아래 내려온

그대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잔잔한 물가에

곱게 반향합니다.

우리 사이를

수많은 시간이 흘러갔고

수많은 공간이 지나갔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들리는

그대 목소리…….

그대 목소리가

내 삶의 색깔을 바꾸고

그대 목소리가

내 삶의 무게를 바꿀 수 있음은

그대가 내 안에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입니다.

오늘도

나는

푸른 목소리로

그대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대는

그대는

주홍빛 저녁 노을로

내게 오십니다.

나는 오늘

노을빛으로 곱게 물든

내 작은 창가에서

조용히

그대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대는

서쪽 하늘에

가장 먼저 돋아나는

저녁별로 오십니다.

나는 오늘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 별 하나를

가슴에 새겨둡니다.

그대는

밤새 몰래 내린

영롱한 아침 이슬로 오십니다.

태양이 솟아오르기 전에

나는 얼른

아침 이슬을

가슴에 묻어둡니다.

삶이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고운 노을빛으로,

영롱한 아침 이슬로

살며시 젖어드는,

하나의 별이 되어

내 안에서 빛나는,

아름다운 그대여!

그대는

내 삶의

밝은 희망입니다.

이름

그대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우린 그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대가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부터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준 순간부터

우린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대가 부르는

내 이름,

내가 부르는

그대 이름은

초록빛 이파리마다

고운 꽃 이파리마다

영롱한 이슬처럼

반짝입니다.

그대가 눈을 감는 날까지,

내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서로의 가슴에

또렷이 살아남아

잊혀지지 않을

우리 둘의 이름이여!

그리움

이렇게 햇살이 맑은

봄날 오후면

그대의 그림자를 찾아

뒤뜰로 나섭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빛 풀 위로

나직이 속삭이는

연초록 나뭇잎,

낮은 언덕을 뒤덮은

하양, 노랑, 보라,

이름 모를 야생화…….

싱그러운 봄향기에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가까이서 들려오는

산비둘기 울음소리에

내 푸른 목소리로

그대 이름을 불러봅니다.

보일 듯 말 듯한

그대의 미소가,

들릴 듯, 말 듯한

그대의 음성이

초록빛 공간에

햇살처럼 부서집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대의 모습은 간 곳 없고

가슴엔 겹겹이

그리움만 쌓입니다.

지원은 근무하는 학교마다에서 글쓰기 지도를 했다. 그런데 지원의 글쓰기 지도는 자연 속에서 더욱 밝은 빛을 발했다. 온갖 봄꽃이 피는 봄이면 개나리 울타리, 벚나무 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오감으로 자연을 느끼고 자연과 대화하며 글을 쓰게 하고, 단풍이 고운 가을, 그리고 낙엽지는 늦가을날에도 아이들을 자연 속으로 데리고 가서 글을 쓰게 했다. 또한 봄에 산에서 열리는 김천문화원 주최 매계백일장과 가을의 한가운데에 직지사에서 열리는 김천예총 주최 김천예술제 문예백일장엔 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얘들아, 결과에 부담 갖지 마. 우린 지금 추억을 만들러 가는 거야. 먼 훗날 까지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을 말이야.”

그랬다. 지원은 수상 자체보다는 아이들에게 먼 훗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항상 결과도 좋았지만…….

네모난 교실에서 쓰는 시는 관념적인 경우가 많았으나 자연 속에서 쓴 글엔 생명이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래서 지원은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갔고 봄, 가을의 현장학습 땐 글쓰기 준비를 해가지고 가서 작은 백일장(무지개 백일장)을 열고 담임 이름으로 상장과 상품을 주었다.

전교생이 70명 남짓한 시골학교에서 쟁쟁한 도시 아이들을 물리치고 각종 문예전을 휩쓸고, 동료교사와 학부모들이 도시 사람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큰 상을 수상한 것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 지원의 가르침에 대한 열정과 배움에 대한 아이들과 학부모, 동료 교사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였다.

글쓰기 지도로 인한 수많은 수상은 상 자체보다는 가난하여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포기한 시골 아이들에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 가장 값진 수확이었다. 그리고 시골 학부모들에게 글로써 자신의 삶을 윤택하고 아름답게 가꾸어갈 수 있게 도와주고, 문학의 길을 열어준 것도…….

지원은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에겐 글쓰기 특별지도를 했다. 그들의 아픔을 글로써 승화시키게 해주고 싶었다. 그 아이들을 문예부원들과 함께 지도하는 건 물론, 시간 날 때마다 수시로 문예지도, 독서지도를 하고 따뜻이 보살피며 삶의 희망을 북돋워 주었다.

어머니의 가출로 할머니가 돌보는 4학년 안연지는 ‘집 나간 엄마께’라는 편지로, 어려서 암으로 아버지를 잃은 4학년 선호는 태국인 엄마께 쓴 ‘엄마, 이젠 울지 마세요’란 편지로, 우정사업본부에서 주최한 전국민편지쓰기대회에서 금상을 차지하여 각각 상장과 함께 50만원씩의 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아내를 병으로 잃고 폐인이 되어 자식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를 가진 현지, 어머니의 가출로 할머니가 돌보는 명훈, 명준 형제,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소년가장이 된 희성이, 아버지가 청각장애인인 혜지, 부모의 이혼으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성훈이……. 가슴에 깊은 상처 하나씩을 품고 사는 가엾은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많은 수상으로 자신감을 갖게 해주고 그 자신감이 학습으로 전이되어 눈에 띄게 오르는 성적을 보는 지원의 가슴엔 뭉클한 것이 차오르고 있었다. 뚜렷한 형체가 없어 이름은 지을 수 없으나 뜨거운 감동의 강한 울림이…….

‘우리 아이들의 지금의 아픔은 그 아이들의 찬란한 미래를 예약할 거야. 난 그걸 믿어. 아픔으로 자란 아이들이기에 누구보다도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다른 꽃나무들은 꽃피울 준비를 하고 부지런한 산수유 꽃만이 맑은 햇살에 곱게 빛나던 봄날 오후, 지원은 대우에 다니다 희귀병으로 회사에서 쫓겨나고 아내에게 이혼당하여 시골에 내려와 부모와 함께 사는 연지 아빠를 찾아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가볍지 못한 것은 연지 아빠의 무거운 병 때문이기도 했지만 연지의 일기에 담긴 가족들의 힘든 삶 때문이기도 했다.

연지의 일기엔 언제나 안타까움과 아픔만이 담겨 있었다. 아침부터 아빠와 할아버지가 싸워서 밥도 굶고 온다고 했다. 치료 방법도 없어 치료할 수도 없는 병, 그래서 맥없이 앉아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병, 그 새까만 절망으로 연지 아빠는 늘 신경질을 부렸을 것이고 그런 일에 지친 부모와의 마찰이 이어지고 있으리라. 그래서 지원은 아침마다 연지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사다주었고 연지는 맛있게 먹어주었다. 하지만 그런 일만으로 근본적인 연지의 아픔을 치유할 순 없는 일이었다.

지원이 연지네 집에 들어가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밭으로 일 나가고 연지 아빠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키는 컸으나 야윈 모습에 병색이 짙어 보였다. 커피를 타주며 그가 말했다.

“선생님, 우리 연지가 얼마나 속이 깊던지, 글쎄 우리 부부가 이혼하려 할 때 우리 연지는 아빠가 더 불쌍하다며 자기는 아빠하고 살겠다고 했답니다. 겨우 여덟 살 어린 나이에…….”

그의 웃음이 참 쓸쓸해보였다. 그의 병이 희망이 있는 병이라면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으리라. 지원의 가슴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써 작은 미소로 감정을 가리며 연지의 학교생활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선물로 준비해 간 책을 건네곤 일어섰다.

“힘내세요. 이 세상엔 기적이란 것도 있어요. 어린 연지의 간절한 기도가, 가 족의 깊은 사랑이, 반드시 기적을 만들어 낼 겁니다.”

“그럴까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배어 있어 지원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지원은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인사를 하고 급히 연지네 집 대문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 지원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린 연지의 어깨에 짊어진 너무나 큰 짐의 부피가, 희망이 없는 연지 아빠의 삶이, 그녀를 아프게 하고 흐느끼게 했다. 지원은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하느님, 연지 아빠에게 기적을 주소서! 희망의 빛을 주소서! 우리 연지에게 아픔 대신 기쁨을 주소서!’

눈물 어린 눈으로 바라본 봄하늘은 잔인하도록 파랬다.

그로부터 지원은 글쓰기 하기엔 너무 어린, 2학년짜리 연지에게 집중적으로 글쓰기 지도를 했다. 연지도 잘 따라주었다. 그리하여 그 해 가을, 김천 직지사에서 열린 김천예술제 문예백일장에서 연지는 도시 아이들을 물리치고 차상(2위)을 차지했고 성적도 학급에서 1위였다. 2위와 차이가 많은……. 어둡던 연지의 얼굴이 밝아지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 연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지원도 덩달아 행복했다.

지원은 학교 만기로 다른 학교로 이동이 되어서도 연지가 보고프면 연지를 만나러 달려갔다. 연지네 가족들이 함께 먹을 빵과 케잌, 그리고 연지와 아빠가 읽을 책을 선물로 가지고 갔다.

연지가 5학년 되던 해의 크리스마스 이브, 지원은 연지의 산타가 되어 개령초등학교로 연지를 만나러 갔다. 오후 수업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여 점심식사를 생략하고 출발했다. 연지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가 드실 음식과 연지가 읽을 동화책, 그리고 민지의 털모자, 털장갑, 털목도리를 예쁘게 포장하여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지고 갔다.

지원의 차가 운동장에 들어서자 달려오는 연지, 일단 둘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연지를 차에 들어오도록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응. 연지야, 아빤 건강하시지?”

“아니요. 한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지원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귀에서 쒜~~~ 하는 금속성이 길게 울렸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연지야, 그 때 왜 바로 선생님에게 알리지 않았어? 알았으면 당장 달려왔을 텐데…….”

“좋은 일이 아니어서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건 아니지. 힘든 일일수록 빨리 알려야지. 다음부턴 그러지 말고 모든 일 선생님에게 바로 바로 알려줘. 알았지?”

“예, 선생님.”

연지는 울면서 그 때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밤에 아빠의 기침 소리가 너무 심해서 아빠 방에 갔어요. 근데 아빠가 검은 피를 많이 토하고 있었어요. 급히 119를 불러 병원으로 가는데 아빠 손을 만 져보니 차가웠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저런…….”

그 순간, 어린 연지가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무섭고 슬펐을까? 지원은 연지를 안고 함께 울었다.

“연지야, 하늘에 계신 아빤 네가 씩씩하게 사는 모습을 원하실 거야. 공부도 열심히 하고 바르게 자라서 너의 꿈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실 거야. 선생님은 믿어. 우리 연지는 시련을 이기고 열심히 살 거라는 걸. 선생님이 힘이 되어 줄게. 선생님이 널 지켜줄게.”

“감사해요. 선생님.”

선물을 주고 돌아오는 길, 지원은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손으론 눈물을 닦으며 계속 흐느꼈다. 점심을 거른 허기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많이 아팠다. 퇴근하고도 너무나 가슴이 아파 저녁 식사도 하지 못하고 늦은 밤까지 뒤척였다.

그 후 지원은 연지와 계속 메일을 주고 받았는데 연지는 지원이 자신의 오아시스라고 했다. 목마를 때, 힘들어할 때 목을 축여주는……. 지원은 연지에게 힘들면 언제나 달려오라고 했다. 삶에 지쳐 주저앉아 있을 땐 언제나 손잡아 일으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연지가 중학교에 가서도 봄, 가을에 열리는 문예 행사 때면 어디선가 달려와 지원의 품에 안기는 연지, 그 연지와의 만남도 행복했고 공문에서 보는 연지의 좋은 결과도 지원을 행복하게 했다.

지원이 다시 개령초등학교로 갔을 때 아침, 저녁으로 세콤을 하러 오는 분과 자주 대화를 했다. 그녀의 장녀는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났다고 했다. 처음엔 장애가 있는 줄 몰랐으나 말을 배울 때가 되었는데도 말을 하지 못해서 알아보니 청각장애를 갖고 있음을 알았다고 했다. 그 순간, 하늘이 모두 자기 가슴으로 무너져 내려앉는 것 같았고 그 때부터 눈물과 한숨으로 점철된 삶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딸에게 말하는 사람의 입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듣게 교육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을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고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인 개령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지원은 그 아이도 문예부에 넣고 가르쳤다. 예원이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마음의 귀로 소리를 듣고 글을 썼는데 제법 잘 썼다. 예원이는 김천시 단위의 각종 문예행사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그 수상은 예원이의 얼굴에 항상 드리워져 있던 우울의 짙은 그림자를 깨끗이 걷어가 주었다.

그 해 초겨울, 새마을문고중앙회가 주최한 대통령기 국민독서경진 경상북도 예선대회 독후감 부문 개인부에서 예원이가 최우수를 했다는 연락이 왔다. 지원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평범한 아이들의 수상 때와는 다른 색깔의 감동이 그녀의 가슴에 차올라 눈물짓게 했다.

보통 아이들의 시상식엔 일일이 따라가지 못했으나 예원이는 특별한 경우라서 지원은 대구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가기로 했다. 시상식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지원은 내내 예원이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예원이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피어났고 예원 엄마의 얼굴에도 밝은 미소가 감돌았다. 지원은 준비해 간 꽃다발을 예원이가 상을 받고 내려올 때 전해주고 안아주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지원의 그 눈물은 감격의 눈물, 감사의 눈물이었다.

“우리 예원이 장해! 정말 장해! 예원아, 선생님은 지금 너무 행복해! 예원아, 선생님을 행복하게 해줘서 너무 고마워!”

예원이도 눈물어린 눈으로 지원을 바라보며 마냥 행복해 했다.

예원이가 졸업하고 그녀의 막내 예진이가 문예부에 들어왔다. 정상아인 예진은 언니 못지 않게 글을 잘 썼다. 예진이가 장애를 가진 언니로 인해 눈물과 한숨으로 사는 엄마에게 쓴 편지는 너무나 절절하여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지원은 그 편지를 우정사업본부가 주최하는 전국민편지쓰기대회에 보내고 발표일을 기다렸다. 그 때까지 공모전에 많은 작품들을 보냈지만 발표를 그처럼 간절히 기다린 적은 없었다. 예진이의 큰 대회에서의 수상은 예진이 자신보다 장애를 가진 딸로 인해 평생을 한숨과 눈물로 살아야 하는 가엾은 어머니에겐 더없이 큰 삶의 보람과 기쁨일 테니까.

예정된 발표일, 지원은 떨리는 손으로 우정사업본부의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가슴이 뛰었다. 첨부파일을 클릭하는데 마우스를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예진이의 이름이 맨 위에 있었다. 금상이었다. 상금도 50만원이나 걸린……. 눈물이 어려 글씨가 흐려지자 지원은 눈물을 닦고 또 다시 보았다. 틀림없었다. 가슴이 크게 뛰었다. 기뻐할 예진이와 예진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퇴근 시간이 되자 다른 직원들은 서둘러 퇴근했으나 지원은 세콤을 하러 오는 예진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원이 교무실에서 홀로 앉아 있을 때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운동장을 내다보니 예진이 엄마였다. 교무실로 들어오는 예진이 엄마,

“선생님, 왜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지원은 대답 대신 예진 엄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눈물이 쏟아지고 흐느껴졌다.

“선생님, 왜 이러세요? 무슨 슬픈 일 있어요?”

“슬픈 일 아니고 기쁜 일이요.”

“선생님을 울릴 만큼 기쁜 일이 뭔데요?”

“예진이가 전국민편지쓰기대회에서 금상을 받아요. 오늘 발표났어요.”

“예? 우리 예진이가요? 진짜요?”

“그럼요!”

“선생님,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마워요. 전 지금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에요. 흑흑…….”

예진 엄마도 같이 울었다. 녜진 엄마는 녜원의 장애로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현재는 예원이가 사춘기로 접어들어 왜 자신을 장애아로 낳았느냐고 거세게 반항해서 너무나 고통스럽다며 울었다. 지원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같이 아파하며 위로해 주었다.

2006년 7월 12일, 서울에서 거행된 예진이 시상식엔 예진이 부모가 같이 참석했다. 특수학교에 다니던 예원이도 부모와 같이 가서 동생의 수상을 축하해 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 예원이가 와우 수술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원의 가슴이 뛰었다. 딸의 장애를 안 순간 받은 충격을 시작으로 어깨를 짓누르던, 가슴을 헤집던 예원 어머니의 아픔, 이제 그 아픔으로부터 해방되는 어머니와 예원에게 지원은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함께 전해줄 꽃바구니를 만들기로 했다. 꽃집에 맞추면 손쉽지만, 또 항상 그런 식으로 선물을 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직접 만들어 주고 싶었다.

지원은 꽃집에 가서 꽃과 재료들을 사가지고 집으로 와서 3시간이 넘게 걸려 예쁘고 멋진 꽃바구니를 완성했다. 난생 처음 만든 꽃바구니였다.

‘와! 이건 꽃바구니가 아니라 완전히 예술품이다. 예술품! 나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나?’

다음 날, 그 날은 바로 예원이가 수술을 마치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날이었다. 지원은 편지를 꽃바구니에 꽂아가지고 예원의 집으로 달려갔다. 예고하지 않은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모녀가 지원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리고 서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예원이 태어나서 수술을 받기까지의 삶을, 예원의 어머니는 비로소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얀 눈송이가 흩날리던 어느 겨울날, 교무실에 손님이 왔다고 하여 지원이 내려갔을 때 그녀의 눈을 의심케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낯이 익은, 소파에 앉아 있던 여고생이 일어서는 것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너, 샛별이 아니니? 심샛별?”

“맞아요.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인사? 오늘이 수능일이잖아? 너, 수능 안 쳐?”

“선생님, 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수시로 합격했어요. 그것도 장학생으로요. 수능 칠 필요가 없죠.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께 인사 드리러 온 거예요.”

샛별이는 김천시 감문면 태촌교회 심현동 목사님의 딸로 전학 온 아이다. 전학 오자마자 지원은 샛별이를 문예부에 넣고 글쓰기를 가르쳤다. 각종 대회에서 상도 많아 받았으나 가끔씩은 탈락하기도 했다. 샛별이의 수준이 너무 높아 심사위원으로부터 어른이 써 준 걸로 오해를 받아 낙방하는 것이었다. 그런 날이면 지원은 샛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위로해줘야 했다. 초등학생이었지만 중학생 이상의 수준인 샛별이의 글솜씨, 그래서 지원은 샛별이의 찬란한 미래를 예감하기도 했었다. 결국 그 예감이 맞은 것이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 문학의 길로 들어서지 못했을 거에요.”

“나보다는 중, 고등학교 때 문예지도를 해주신 선생님들 덕분이지.”

“아니에요. 중학교 때부터는 학교에서 따로 문예지도를 해주지 않아 저 혼자 서 썼어요. 이 모두가 선생님 덕분입니다.”

지원은 샛별에게 열심히 공부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글로써 희망과 빛을 주는 훌륭한 작가가 되라고 격려해 주었다. 샛별이가 주고 간 샛별 아빠의 장문의 편지에도 딸을 문학의 길로 이끌어준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학교에서 방과후 교육이 있기 전엔 수업 마치고 글쓰기 지도를 했으나 그 후로는 시간이 안 되어 점심시간을 쪼개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면 마음이 급해 제대로 식사도 못하고 교실로 달려가 문예지도를 했다. 일이 많거나 보고할 공문이 많은 날엔 아이들이 써 낸 글을 학교에서 보지 못하고 집으로 싸가지고 가서 보기도 했다. 지원은 샛별이와의 만남으로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간 느낌이었다.

지원이 곡송초등학교로 다시 갔을 때 학교엔 흰색 강아지가 2마리 있었다. 어미가 새끼를 낳고 바로 죽어서 아저씨들이 우유를 먹여 키웠다고 했다.

“저 강아지들 이름이 뭐죠?”

“이름도 없어요. 그냥 멍멍이라고 불러요.”

“세상에! 이름도 없이 살다니! 불쌍하기도 하지.”

지원은 강아지들에게 ‘아롱’ ‘다롱’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돌보기 시작했다. 일단 강아지들의 밥통과 물통을 사서 유성매직으로 ‘아롱이 밥통’ ‘아롱이 물통’ ‘다롱이 밥통’ ‘다롱이 물통’이라 쓰고 사료도 사다 주었다. 예쁜 집도 사다가 부드럽고 따뜻한 담요도 깔아주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강아지들이 좋아하는 간식인 햄과 소세지를 알맞은 크기로 썰어 비닐팩에 넣어가지고 갔다. 아롱, 다롱은 지원의 차를 알아보곤 차가 교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전력질주해서 다가왔다. 지원은 차에서 내려 아롱, 다롱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같이 현관으로 가서 간식을 한 개씩 입에 넣어주었다. 그 시간이 강아지들에게도, 지원에게도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수요일마다 있는 친목회 행사 때면 지원은 통닭을 시키자고 했다. 그녀는 먹는 시늉만 하고 닭뼈에 살을 많이 붙여서 다른 그릇에 넣었다가 현관 뒤편에 가서 강아지들을 불렀다.

“아롱아! 다롱아! 엄마가 너희들이 제일 좋아하는 닭고기 가져왔어. 빨리 와! 빨리!”

지원을 향하여 달려오는 강아지들, 강아지들은 열심히 고기를 뜯어 먹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점심시간이면 강아지들이 급식소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지원을 기다리는 것이다. 지원은 식판에 음식을 받으면 바로 밖으로 나가 그녀 몫으로 받은 고기를 남김없이 강아지들에게 주었다. 강아지들이 고기를 다 먹고 돌아서야 지원은 식판을 들고 들어가서 채소 반찬만으로 식사를 했다.

“선생님, 강아지들 챙기다 영양실조 되겠어요.”

조연아 선생님의 걱정에 지원은 웃었다.

“아롱, 다롱이만 행복하다면 나 영양실조 되는 게 대수예요?”

“선생님의 동물 사랑은 아무도 못 따라갈 걸요.”

지원은 방학이 되면 학교 아저씨에게 5만원을 주며 간식을 챙겨주도록 부탁을 했고 가끔씩 강아지들이 좋아하는 소고기와 닭고기를 준비해 가지고 가서 먹이고 놀아주곤 했다. 강아지들은 나날이 자라 성견이 되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이동하고 깔끔하기로 소문 난 교장 선생님이 부임하자 개털이 날려 위생에도 좋지 않고, 학교가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개들을 없애겠다고 했다. 지원에게 그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웬만하면 집에 데려가 키우고 싶었지만 집엔 이미 개가 두 마리 있고 그 애들이 순순히 아롱, 다롱이를 받아줄 것 같지 않았다. 강한 텃세로 아롱, 다롱이의 삶이 더 힘들 것 같아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교장 선생님, 개들이 아이들 곁에 있으면 정서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애들 이 개를 얼마나 예뻐하는데요. 그러니 제발…….”

“여긴 시골이라 웬만한 집에선 개를 한두 마리씩 키웁니다. 그러니 정서에 좋 으니 뭐니 하는 건 이유가 안 됩니다.”

“그럼, 제발 개를 잡아먹는 사람에게만은 주지 마세요. 네? 제발요.”

“그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하여 스쿨버스 운전기사가 사는 시골 마을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께 주기로 했다.

드디어 이별의 시간, 지원은 마지막으로 아롱이와 다롱이를 번갈아 안아주며 흐느꼈다. 지원의 반 아이들도 아롱, 다롱이를 쓰다듬으며 함께 울었다.

“아롱아, 다롱아, 생곡 가서 주인 할머니 사랑 받고 잘 살아. 너희들을 사랑 한 엄마와 엄마 반 친구들 잊지 말고……. 아롱, 다롱아, 아프면 안돼. 그리 고, 엄마가 너희들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지? 그리고…….”

지원은 무엇인가 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목이 뻐근하게 아프고 흐느껴져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아저씨의 파란 트럭을 타고 가는 아롱, 다롱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원과 그녀의 반 아이들은 두 볼에 그렁그렁 눈물을 단 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원은 1981년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후, ‘왕눈이와 돌이’라는 동화책과 단편소설집 ‘G선상의 아리아’를 내어 학생, 학부모, 동료, 각 기관, 이웃들에게 모두 선물로 나누어 주었고 근무하는 학교와 교도소, 절 등에 기증했으며, 교단일기를 ‘잠 못 이루는 그대에게’ 라는 수필집 상, 하권으로 엮어 역시 모두 선물로 나누어 주고 기관에 기증했다. 총 11000권의 책을 자비 1800만원을 들여서 출판하여 단 한권도 팔지 않고 모두 선물로 주었다.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책의 내용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며 팔기를 원했으나 그녀는 무료로 원하는 분량만큼 모두 주었다. 그리고 너무나 가난해 검정고시와 고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고 자수성가하신 분, 자신과 같은 처지로 고생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그들의 꿈을 활짝 펼치게 하시는, 고려장학회 회장님에겐 100권을 주기도 했다.

다음은 지원의 책을 읽고 어떤 사람이 보내온 편지의 전문이다.

서지원 선생님께

올 가을, 서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래서 어느 해보다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36살의 아줌마입니다.

선생님이 쓰신 책, ‘잠 못 이루는 그대에게’가 저의 손에 들어온 것은 우연일까요? 저는 그 때 친정을 다녀 온 후라 온통 시골 동네의 풍경을 그리워하며 아쉽고, 그립고, 그 속의 가을을 마음껏 사랑하지 못해 속 태우고 있던 때였지요. 여느 시골과 다를 바 없는 촌 동네 (김천시 남면 오봉)지만 어머님이 키우시는 하얀 오리 떼가 작은 냇가를 몰려다니고 알찬 벼들의 노란 물결과 태양빛을 닮아가던 감나무의 감들과 그 곳에선 흔하지 않은 키 큰 수숫대 몇 그루, 농사일로 그을리고 야위신 부모님의 바쁜 일손과 고속철도 공사로 산이 깎이고, 들의 모습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그 곳을 내내 그리워하던 때였지요.

그 즈음에 마음씨가 부처님 같은 친구에게 잠깐 들렸는데 그 친구가

“이 책 한번 읽어 볼래?󰡓

하며 정말 좋은 책인데 정작 본인은 아직 한 페이지도 못 읽었다며 손때 하나 묻지 않은 책을 빌려주었습니다. 바로 선생님께서 쓰신 책 ‘잠 못 이루는 그대에게’였습니다. 첫장을 넘기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고, ‘아름다운 사람’이란 이름표가 있다면 붙여 드리고 싶은, 서선생님이야 말로 꼭 그런 분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전 도무지 친구에게 책을 돌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것으로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그래서 저의 속마음을 친구에게 얘기했더니 그 책은 파는 책이 아니라고, 서점에서는 사서 볼 수 없는 책이라고 하더군요.

‘세상엔 그런 책도 있구나!󰡑

사람들은 이런 때 감동이란 걸 하나 봅니다. 친구가

“그렇게 좋으면 그 책은 너 해. 나는 한번 알아볼게.󰡓

해 놓고서는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서 책을 가로챈 미안한 마음에 전화했더니 당장에 책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쓰신 소설책 ‘G선상의 아리아’도 돌려가며 읽고 있는데 차례가 되면 빌려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그 차례가 올 때까지 저에겐 행복한 기다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미안했던 마음 한구석의 짐도 덜었고, ‘이제는 내 책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은근히 기분 좋아졌습니다.

선생님, 제가 이렇게 선생님을 좋아해도 되겠습니까? 감히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누구보다도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 건강하세요. 아름다운 분이시기에 더욱 건강하세요. 좋은 가을을 선물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글을 줄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11월 6일

김천에서 손수영 드림.

그리고 몇 번의 편지가 더 오갔다. 남편의 실직으로 생활이 어려워 자기가 직접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는 이야기,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어 날마다 학교로 찾아가 기저귀를 바꿔 채운다는 이야기,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형편이 어려워 잘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이야기……. 지원은 언젠가 그 사람을 한번 만나 많은 이야길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워낙 바쁘게 살다 보니 서로가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눈발이 조금씩 흩날리던 늦겨울날, 학년 말 종업식을 마치고 지원은 직원들과 함께 김천 시내에 있는 ‘이박사면옥’이라는 식당으로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그런데 식사 도중 남자 종업원이 그녀를 좀 보자는 것이었다. 그 사람을 따라 주방으로 가니 그 식당에서 일하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아주머니에게 지원을 소개시키는 것이었다.

“아줌마, 이 분이 서지원 선생님입니다.”

체구는 작으나 선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 선생님께 편지를 보낸 적 있는 손수영입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지난 해 가을에 편지를 보낸 사람이었다. 지원의 가슴에 ‘아름다운 사람’이란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다던…….

지원은 그녀의 거친 손을 덥석 잡았다.

“세상에!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선생님, 전 제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해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데 답장을 해 주셔서 너무 고마웠어요.”

“무슨 말씀을……. 보잘 것 없는 저의 책을 읽고 편지를 보내주신 것만 해도 너무 고마운 걸요.”

“오늘 개령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오신다기에 가슴이 설레었어요. 선생님을 만 날 생각에……. 그런데 시간이 왜 그리도 느리게 가던지! 하지만 이런 모습으 로 만나 부끄럽기도 하네요.”

그녀의 미소가 참으로 쓸쓸해 보였다. 지원은 그 사람의 거친 손을 꼬옥 잡아주며 말했다.

“이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학력이 높다고 해서, 지위가 높다고 해 서, 편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인간 자체가 훌륭한 건 아닙니다. 이 세상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고, 또 그 자리에서 부끄 러운 짓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영님은 그 누구보다도 정직하 고 성실하게 살고 계십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은 지위가 높은 사람도, 빛나 는 명예를 가진 사람도, 돈이 많은 사람도, 학력이 높은 사람도 아닙니다. 전 수영씨 같이 열심히 사시는 분들을 좋아하고 또 존경합니다.󰡓

그제서야 그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지만 지원은 그 사람에게 좋은 글솜씨를 사장시키지 말고 열심히 갈고 닦아 글로써 자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가꾸어 가라고 격려해 주었다. 식당을 나설 때 그 사람은 뒤편에서 말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원도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는 길, 지원의 가슴엔 잔잔한 환희 같은 것이 반향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란 이름표를 달아주고 싶은 사람을 만났으므로……. 그리고 지원은 깨달았다. 천사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낮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그 밖에도 지원의 교단생활이 담긴 수필집을 읽고, 맡은 아이들을 팽개치고 승진 점수 따는 일에만 매달렸던 자신의 삶이 부끄럽다며 전화를 걸어온 여교장이 있었고, 언론을 통해 교사들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남고생은 그녀의 책을 읽고 ‘교단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구나!’ 하고 감동하여 진로를 바꾸어 교육대학에 들어갔다고도 했다. 비록 서점에선 팔지 않는 책이었지만 자신의 소박한 삶을 진솔하게 쓴 지원의 책은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새로 피워낸 연둣빛 새싹들이 맑은 햇살 아래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봄날 오후, 지원이 메일방에 들어가 보니 낯선 사람이 보낸 메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식’이라는 사람이 보낸 메일이었다. 지원은 서둘러 그 메일을 열었다. 그 사람은 어느 경로를 통해 그녀의 책을 읽고 메일을 보냈다고 했다.

20대 중반인 그 청년은 중학교 때 자전거를 타고 하교하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경추 3, 4번을 다쳐 전신마비가 되어 평생을 누워서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글을 쓰고 싶으니 지도를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청년의 참담한 삶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파하던 지원은 그 청년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래서 그 청년이 메일로 글을 보내오면 메일로 지도를 해주었다. 처음엔 엉성하기 그지없던 청년의 글은 시간에 비례해 문장력이 늘어 제법 잘 쓰게 되었다. 메일만 주고 받던 지원은 청년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고 유난히도 추운 겨울날, 청년과의 첫 만남을 위하여 커다란 케잌과 함께 크고 예쁜 초 하나, 그리고 시집도 사서 예쁘게 포장하여 가지고 물어물어 청년의 시골 동네, 그리고 집을 찾아갔다. 동네에서 가장 허름한 스레트집, 그러나 집은 텅 비어있었고 옆집 아줌마에게 물으니 여름에 생긴 욕창이 낫지 않고 너무 심하여 수술하러 갔다며 병원도 모른다 하여 그냥 되돌아서야 했다. 그 때의 허전함이라니!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 집 찾는다고 한참을 돌아다닌 탓인지 감기와 몸살이 정답게 손잡고 와서 지원은 오랫동안 아팠다. 하지만 지원은 자신의 아픔보다 청년의 건강을 더 걱정했다. 여름에 생긴 욕창이 겨울까지 낫지 않았다니 말이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지원은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청년이 월간지 ‘좋은 생각’에 낸 글이 대상을 차지하여 상장과 함께 50만원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며 그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지원에게 전한다 했다. 지원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동안 제자들에게 글쓰기 지도를 하여 셀 수도 없이 많은 상을 받았지만 청년의 수상은 그 감동 이상이었다. 그 수상은 청년의 어두운 삶에 빛이 되어 그 청년의 삶을 축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 만큼의 커다란 힘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로부터 며칠 후, 지원은 청년의 수상을 축하해 주기 위해 장미꽃다발과 함께 예쁜 시집, 먹을 것 등, 그에게 줄 축하의 선물을 안고 만나러 갔다. 가는 길은 설레임과 기쁨으로 가슴이 마구 뛰었다. 마치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지원이 청년의 집에 갔을 때 그는 복지관으로 컴퓨터를 배우러 갔다 하고 청년의 어머니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예고 없는 방문에 깜짝 놀란 어머니는 반갑게 지원을 맞아들였다.

“선생님, 우리 아이에게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이 어떤 분인가 궁금했었는데 이 렇게 뵙게 되네요. 저희가 찾아뵈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건강한 제가 찾아와야죠.”

지원에게 음료수를 대접한 어머니는 청년이 사고를 당할 때부터의 삶을 들려주었다.

“우리 애 사고당한 후부터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어요.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아들 놈의 사고만 해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애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다 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있는 재산과 자식의 사고 보상금까지 다 날려버리 고 그것도 모자라 가족을 빚더미에 올려놓은 채 아직도 집에 안 들어와요. 살 던 집도 날려버려 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어떤 사람이 이 집을 빌려주어서 우선 여기서 살고 있는데 언제 내놓으라고 할지 몰라 항상 불안하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바람피운 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불쌍한 자식의 보상 금까지 손을 대겠어요? 보통 사람은 그런 짓 못해요.”

“그럼 생계는 어떻게 꾸려가시나요?”

“애가 나 없으면 물 한 모금 먹는 것조차 못하니 언제나 제가 옆에 붙어 있 어야 해요. 그렇다고 굶고 살 수는 없고 해서 점심시간에 언덕 너머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배식을 하고 30만원씩 월급을 받고 있어요. 배식하고 급식 실 청소하고, 길어야 두 시간 정도 일하면 되니까 그건 할만하더라고요. 그런 데 학생들이 줄어서 몇 년 못 가서 폐교될 거라는 소문이 있어서 불안해요. 그런 일 할 수 있는 곳도 드문데…….”

모자의 삶이 너무나 힘들게 다가와 지원은 할 말을 잊었다.

“아들의 사고 후, 십년 세월을 눈물과 한숨으로만 살았는데 선생님을 알게 되 어 이렇게 좋은 일도 생기고 또 수기의 수상으로 자신감이 생긴 우리 아들이 이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해요. 표정도 얼마나 밝아졌는지!”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웃는 청년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곤 지원도 같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건 감동의 눈물이었고 희망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참, 오늘 오전에 좋은 소식이 왔어요.”

“무슨 소식이요?”

“우리 애가 월간지 ‘수레바퀴’에 낸 글이 대상을 차지하여 상장과 함께 상금 100만원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요. 며칠 후에 서울로 수상하러 가야 한다고 하대요.”

“정말요? 축하해요! 정말 대단해요!”

“이게 모두 다 선생님 덕분이지요.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은혜라니요? 당치 않아요. 이렇게 열심히 살아주니 제가 더 고마운 걸요. 앞 으론 행복할 일만 남았네요.”

“예. 선생님 덕분에 이제 웃고 살 수 있게 되었어요.”

하지만 복지관 차가 도착하고 어떤 남자에게 안겨 차에서 내리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는 지원의 가슴이 찢어졌다. 얼굴은 조각해 놓은 것처럼 아주 잘 생겼는데 두 팔은 뼈만 앙상했고 한쪽 다리도 없고……. 지원은 그 순간, 너무나 건강한 자신의 몸이 청년에게 무척이나 죄스러웠다. 청년보다 하나 더 많은 자신의 다리가, 청년과는 달리 다리가 두개인 것이, 청년에게 정말 미안했다. 지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성식 씨, 보고 싶었어요.”

“저두요.”

“자, 이거…….”

지원은 침대 위에 누운 청년의 팔에 장미꽃다발을 얹어주었다. 전신이 마비되어 팔조차 움직일 수 없는 청년, 움직이지 못하는 청년의 팔처럼 그의 팔 위에서 그대로 정지되어 있는 꽃다발이 왜 그리 슬프게 보이던지! 꽃을 보는 마음이 그렇게 아파보긴 처음이었다.

목 위로는 정상이지만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어 보조기를 끼어야 컴퓨터를 칠 수 있다는 말에 지원의 가슴이 미어졌다. 도대체 누가 가장 아름다워야 할 20대 청년의 삶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지원은 말없이, 오그라들어 제대로는 펴지지 않는 청년의 야윈 손가락을 펴주고 또 펴주며, 뼈만 남은 청년의 차가운 팔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피울음을 울었다. 너무나 힘든 청년의 삶이, 속절없이 접힌 청년의 찬란한 꿈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하지만 헬렌 켈러가 세 가지의 장애를 딛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듯이,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유명한 화가가 된 사람,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는데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된 사람도 있듯이, 청년은 자신의 장애를 딛고 일어나 정상인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을, 지원은 확신했다.

돌아오는 길, 그토록 보고 싶던 청년을 만났다는, 또 그 청년의 수상을 축하해 주었다는 기쁨보다는 아픔이 훨씬 더 컸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사라 브라이트만’의 ‘타임 투 세이 굿바이’가 왜 그렇게 아프게 들리던지! 지원은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 흐느꼈다.

‘이제 그만 아파하자. 청년의 미래가 밝으면 그걸로 된 거지 뭐.’

지원은 눈물을 훔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 후, 지원은 더욱 열심히 청년을 도와주었고, 큰 대회에서의 수상이 이어졌다. 지원으로부터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지인은 시간을 내어 경주에서 열린 청년의 시상식에 가서 금일봉과 함께 꽃다발을 주며 축하해 주었다고 한다. 물론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청년은 지원이 첫 만남에서 준 꽃다발이 난생 처음 받아본 꽃다발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원은 11월 26일, 청년의 생일날이면 케잌과 함께 예쁘고 향기로운 장미꽃다발을 들고 찾아가 축하를 해주었다. 청년과 그의 어머니가 입을 옷과 먹을 것도 사가지고…….

불편한 몸으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 깊은 절망에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청년, 그래서 날마다 자살만을 생각했으나 자살조차도 할 수 없는 몸의 부자유가 저주스러웠다는 청년은 지원과의 만남을 천운이라고 했고 수많은 수상에서 전이된 자신감이 고입 검정고시에 도전, 합격하게 만들었다.

청년은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한국산문’에 수필가로 등단한 것이다.

‘선생님 덕분에 꿈을 꿀 수 있었고, 선생님 덕분에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청년이 보낸 그 메일을 읽으며 지원은 마치 자신의 꿈을 이룬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온몸의 핏줄을 부풀리는 희열, 그리고 강한 전율……. 그건 아무 곳에서나 얻을 수 있는 감동은 결코 아니었다. 지원은 확신했다. 청년에게 고통을 주었던 교통사고가 전화위복이 되어 청년에게 더 밝고 찬란한 미래를 열어줄 거라는 것을…….

지원은 청년을 통해서 비로소 깨달았다. 평범한 사람의 성공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의 성공이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건, 그 안에 훨씬 더 뜨거운 열정과 훨씬 더 깊은 감동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그 감동은 몸이 아픈,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앞날에 밝은 희망의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걸…….

지원의 집은 구미시 관내였으나 복직하여 첫 발령을 김천 관내로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자기의 생활 근거지로 이동을 하지만 지원은 김천시 만기가 될 때까지 옮기지 않고 김천으로 통근했다. 그래서 김천은 그녀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김천에서 25년을 근무하고 만기가 되어서야 지원은 어쩔 수 없이 생활 근거지인 구미로 이동 내신을 냈다. 그리고 바로 집 뒤에 위치한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김천 개령초등학교에서 가르치던 2학년 아이들과 헤어지던 날, 그 이별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우는 아이들…….

“선생님, 2학년 동안에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가시지 말고 3학년 때도 가르쳐 주세요. 예?”

수빈이가 지원의 목을 안고 울었다. 수빈이 엄마는 심각한 심장병으로 심장을 떼어내고 인공심장을 달고 겨우 생명은 유지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수빈이와 동생은 아빠가 돌보고 있었다. 그래서 수빈인 다른 아이들보다 더 아픈 손가락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지원의 옷자락을 잡고 울었다. 지원도 아이들을 안고 같이 울면서 아이들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선생님이 어쩔 수 없이 떠나가지만 일년만 기다려주면 선생님이 돌아올게. 돌아와서 너희들 가르쳐 줄게.”

“정말이죠? 꼭 돌아오시는 거죠?”

“그럼.”

“시간이 뛰어갔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참 좋겠다.”

아이들과 일년 후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지원은 이별의 아픔을 달랬다.

선산초등학교에서의 새로운 시작, 비록 개령 아이들과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메일로, 전화로, 아이들은 그녀를 찾았고, 줄어드는 시간만큼 희망도 함께 커져갔다.

간절히 지원을 보고 싶어하는 개령 아이들, 그래서 그녀는 여름방학 때 집으로 아이들을 초대했다. 청소를 해놓고, 간식을 사 놓고, 아이들을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나 지루했다. 평소엔 껑충껑충 뛰어가던 시계는 느림보 거북이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탄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오자 지원은 선산터미널로 갔다. 김천에서 오는 대한교통 버스가 정류장 안으로 들어가고 곧 아이들이 터미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반대편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던 지원은 손을 흔들었다. 빨간 불인데도 선생님만 바라보고 길을 건너려는 아이들을, 지원은 두 팔로 크게 엑스자를 그리며 제지했다. 그 순간, 빨간 불 신호가 왜 그리 길게 느껴지던지! 드디어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선생님!”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목소리로 ‘선생님!’을 외치며 달려와 지원의 품에 안겼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왔다.

“이게 얼마만이니? 선생님 보고 싶었쪄?”

“예!”

“얼만큼?”

“하늘만큼 땅만큼이요!”

“선생님도 너희들이 하늘만큼 땅만큼 보고팠는데…….”

아이들과 함께 집에 도착! 아이들은 아래, 위층을 뛰어다니며 집 구경을 했다. 아이들의 소란에 방에서 키우는 고양이 방울이는 침대 밑으로 숨고 현관에서 키우는 강아지 유리는 쉬지 않고 컹컹 짖어댔다.

지원은 먼저 음료수와 간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 동요 반주를 하고 아이들과 같이 불렀다.

모래성이 차례로 허물어지면

아이들도 하나 둘 집으로 가고

내가 만든 모래성이 사라져 가니

산 위에는 별이 홀로 반짝거려요.

밀려오는 물결에 자취도 없이

모래성이 하나 둘 허물어지고

파도가 어두움을 실어올 때에

마을에는 호롱불이 반짝거려요.

“선생님, 이러니까 꼭 선생님 집이 우리 교실인 거 같아요.”

“맞아. 우리가 지금 교실에 있는 것 같아.”

“그래? 아마 6개월 후면 우리가 함께 교실에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걸?”

“정말요?”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저두요.”

“진짜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해 봐.”

지원은 거실에 앉아 아이들과 게임도 하고 놀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먹고 싶은 걸 물으니 약속이나 한 듯이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사실, 지원은 자기 솜씨로 밥을 하여 아이들을 먹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집밥보다는 시켜 먹는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원하는 음식을 사주기로 마음 먹었다.

지원은 집 근처의 중국음식점 ‘태산성’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탕수육과 자장면으로 점심을 먹였다. 모두 즐거워하며 맛있게 먹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 내년 3월에 꼭 오시는 거죠?”

“그럼.”

“빨리 내년이 왔음 좋겠다.”

“나두.”

“선생님도 내년 3월이 기다려져. 아주 간절히……. 우리 조금만 참았다가 그 때 다시 만나자.”

지원은 또 아이들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여름 해가 서산을 넘을 무렵, 아이들은 떠나갔다. 버스의 뒷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원은 손을 흔들었다.

지원이 선산초등학교에서 일년을 근무하고 김천으로 내신을 내려하자 교장 선생님이 지원을 교장실로 불러 이동을 만류했다. 선산에서 근무한 일년, 하지만 최선을 다 했었다. 2학년 6반 36명 아이들과 고학년 문예부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지도하여 전국적으로 눈부신 실적을 올렸고, 학력도 다른 반에 비해 월등히 높았으며, 반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글을 모아 ‘재롱동이 동산’이란 학급문집을 만들고, 36명 반 아이 모두의 작품을 손수 시화로 제작하여 성황리에 시화전을 했다. 그렇게 학부모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그래서 교장 선생님은 지원을 잡고 싶었을 것이다. 개령 아이들과의 약속 때문에 가야 한다고 했지만 교장 선생님은 또 다시 지원을 불러 간곡히 만류, 하지만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선생님, 도교육청 홈페이지 집필위원이죠?”

“네.”

“선생님이 도교육청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 월등히 조회수가 많고 특히 선생 님이 올린 ‘함박눈 되어’란 시는 교육감님이 너무 좋아하셔서 회의 때 여장학 사가 낭송했다더군요. 그리고 작년 스승의 날 기념식 때도 선생님이 쓴 ‘세상 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란 시를 낭송했다더군요. 선생님이 이처럼 큰 학 교에 근무하니까 이렇게 선생님의 글이 빛나는 거지 개령처럼 이름도 없는 작은 학교에 근무해 봐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니까. 그러니 제발 부탁인데 더 도 말고 딱! 일년만 더 있어요. 예?”

“교장 선생님, 개령 근무할 때도 제 글, 인기 있었는데요. 그래서 해마다 집 필위원이 바뀌는데 담당인 남장학관님이 우리 팀장에게 저는 절대로 빼면 안 된다고 하셨다던데요.”

“그래요? 허참……. 이것도 안 통하네.”

“교장 선생님, 전 꼭 개령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절 기다리고 있어 요. 저도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병이 날 지경이에요.”

“허참…….”

담임 반 학부모들도 자기 아이 담임 못 해도 좋으니 제발 일년이라도 더 있으라고 하고 동료들도 한사코 말렸다.

“선생님, 바로 집 뒤의 학교를 두고 25년간이나 김천으로 다닌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집 곁으로 보내주었는데 다시 일년만에 돌아간다는 건 더 이해가 안 되어요. 차 기름값만 해도 엄청날 텐데…….”

“나, 원래 계산 같은 거 잘 못해요. 계산 잘 하는 사람 같음, 이렇게 살진 않 겠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과의 약속, 꼭 지켜야 해요.”

“미안하다고 말 한마디만 하면 되잖아요?”

“그건 안 돼요. 난 늘 우리 아이들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를 말고,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거든요. 그랬는데 내가 약속을 깨 면 절대로 안 되죠. 그리고 약속 이전에 개령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 병이 날 지경이에요.”

“선생님 이야길 듣고 보니 더는 말릴 수가 없네요.”

지원은 그렇게 모두를 뿌리치고 내신서류를 냈다.

2008년 2월 15일, 인사 발령이 났다. 김천에 있는 개령서부초등학교로 발령이 난 것이다. 지원은 실망했다. 타시군 이동엔 희망하는 학교를 적지 못하지만 그녀가 개령초등학교로 가기 위해 일년만에 돌아오는 거라는 걸 김천교육지원청에서도 잘 알고 있는데…….

‘할 수 없지 뭐. 일년 후에 개령으로 가는 수밖엔……. 또 바로 이웃 학교니 가끔씩은 우리 아이들을 볼 수 있으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지.’

그런데 다음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처음엔 생활 근거지를 배려해서 인사 작업을 했는데 누군가의 반발로 다시 점수대로만 작업을 해서 지원은 개령을 지나고, 김천 시내를 지나서도 30분이나 더 달려야 하는 구성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지원은 너무나 큰 충격에 현깃증이 났다. 그 충격을 숨기고 간신히 수업을 하고 퇴근 시간이 되자 현깃증으로 비틀거리며 집으로 갔다. 그것은 그 때까지 지원의 삶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고 소주 한 병을 꺼내어 병목을 잡고 벌컥 벌컥 물처럼 들이켰다. 술에 약한 지원, 꿈을 꾸듯 몽롱한 상태에서 휴대폰을 열고 통화기록에 있는 번호를 아무거나 눌러댔다. 친구가 받았다. 엉엉 울며 하소연했다.

“영미야, 나 어떡해? 차로 한 시간도 더 걸리는 그 먼 길 어떻게 다녀? 고개 도 많고 경사도 급해 눈이 오면 출근도 힘든 곳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 지난 25년간 김천교육지원청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각종 대회 심사, 책 만드는 일, 시험문제 출제하는 일 등등……. 방학 때 그 먼 친정에 갔다가 하룻만에 불려내려와 일한 적도 있는데, 지금은 심사료란 것도 있지만 그 땐 모두 무료봉사였고, 또 난 집이 선산이라서 거꾸로 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에 출장비가 턱없이 부족해 내 돈으로 기름 사 넣어 가면서 일했는데, 그 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리고 시엄마, 남편, 자식, 다 팽개치고 꼭 두새벽부터 밤까지 학교 일에만 올인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구?”

“그러게 적당히 하지 그랬어? 그럼 억울하지나 않잖아? 진작부터 자식 잘 챙 기지. 내가 늘 말했잖아? 나중에 자식들한테 원망 듣는다고……. 이제부터라 도 잘 챙겨.”

“이미 늦었어. 애들 이미 다 커버린 걸.”

“아이구, 참내…….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어? 이렇게 크게 당할 거면 서…….”

눈물이 어려 잘 보이지 않는데도 지원은 또 다른 버튼을 눌렀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웬 남자?’

“누구세요?”

“교장이라.”

“교장 선생님, 저 어떡해요? 통근도 힘든 아주 먼 곳으로 쫓겨간 저, 이제 어 떡해요?”

“그러게. 붙잡을 때 못 이기는 척 하고 가만히 있지, 왜 고집을 부렸어요?”

“교장 선생님이 절 꼭 붙잡았으면 안 가는 건데 살짝 잡았으니까 간 거잖아 요?”

지원은 엉뚱한 떼를 쓰고 있었다.

“남의 아내를 어떻게 꼭 잡누? 하하하…….”

막내 아들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대전 여동생이 전화를 했다.

“으이구, 바보야! 학교에 미쳐 꼭두새벽부터 출근해 날뛰더니 꼴 좋다. 그렇 게 열심히 해서 돌아온 게 겨우 이거야? 내가 전부터 말렸지? 아무도 알아주 지 않는데 미친 짓 그만 하라구. 25년간 선산에서 김천까지 통근했으면 기름 값으로 집 한 채 사고도 남았겠다. 제발, 계산 좀 하고 살아! 바보, 천치! 멍 청이! 교단생활 삼십 사년이 지나도록 스승의 날 그 흔한 교육장상 한 번도 못 받은 주제에, 억울하지도 않아?”

“사람들이 모두 나보고 바보라 해도 흑흑, 난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았 어. 흑흑, 그런데 흑흑, 오늘 보니까 나 바보 맞나봐. 흑흑…….”

“으이구! 그걸 이제야 알았어? 이제부터라도 계산 좀 하고 살아! 사람들에게 등신이라고 손가락질 받지 말고! 내가 다 쪽팔린다! 이제부터라도 정신 좀 차 리고 살라구! 으이구! 속 터져!”

“이제부터? 이제부터 다르게 살라고?”

친구나 동생의 그 조언도 결코 위안이 되진 못했다.

상상하지도 못한 엄청난 충격으로 지원은 봄방학 내내 앓아누웠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해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지원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질했다. 계산할 줄도 모르는 바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참으로 행복했으므로……. 지난 25년간 김천으로 다니면서 길 위에서 보낸 시간보다, 길 위에 뿌린 엄청난 기름값보다 훨씬 더 큰 행복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닥친 충격으로 지원은 심하게 방황하고 있었다.

지원의 아픔엔 관계없이 시간은 흐르고 시업식 날이 다가왔다. 지원은 전입교사라고 구성초등학교에서 또 양각분로 보내졌다. 구성의 교사들도 지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25년만에 집 가까이로 보내줬는데 일년만에 돌아온 것이 상식적으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지원은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그저 쓸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직원 상호간의 인사가 끝나고 분교 직원들은 양각분교로 출발했다.

현깃증으로 비틀거리는 그녀 앞엔 19명의 분교 아이들이 있었다. 전교생의 2/3는 엄마의 가출, 또는 부모의 이혼 등으로 조부모 밑에서 자라는 불우한 아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하지만 몸을 가눌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아픈 지원을 일으켜 세운 건, 바로 19명의 분교 아이들이었다. 비록 깊은 상처 하나씩을 가슴에 품고 살지만 순수하고 예쁜 아이들이 아픈 지원을, 방황하는 지원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래, 나에겐 아이들이 있었어.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저 아픈 아이들이……. 언제까지 일진 모르지만 함께 하는 동안 저 가엾은 아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주어야 해. 아픔을, 슬픔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는 일을 내가 해야 해. 왜? 난 저 아이들의 선생님이니까.’

그 때부터 지원의 분교 아이들 사랑이 시작되었다. 아동수가 적기 때문에 분교는 복식수업을 해야 했다. 3학년 3명, 4학년 3명을 같은 교실에 앉혀 놓고 수업을 했다. 인원수는 적었지만 양쪽을 번갈아 다니며 가르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며칠간은 코피를 쏟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적응이 되어갔다.

지원은 매일 아침 수업 시작하기 전에 1시간 동안 전교생 19명에게 글쓰기 지도를 했다. 그리고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학급으로 나누어 주어 교실에‘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독서지도도 병행했다. 대부분이 가난하고 가슴에 아픈 상처 하나씩을 품고 사는 가엾은 아이들에게 글을 통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들의 힘든 삶을 아름다운 글로써 승화시키게 해주고 싶었다. 지원의 열정과 아이들의 노력으로 전국, 도, 시 단위 문예행사에서 놀랄만한 실적을 거두었고 분교부장은 도로에 현수막 걸기에 바빴다.

그해 가을, 지원이 김천예술제 문예백일장과 동화구연대회에 아이들을 참가시키고 발표를 기다리는 시간, 다른 때와는 달리 몹시 초조했다. 그 때까지 그녀가 근무한 학교 중에서 가장 가엾은 아이들이 많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전화가 왔다. 김천예술제 결과 발표가 났다는……. 얼른 김천예총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입상자 명단에 화정이 이름이 있었다. 그것도 맨 위에! 학습부진아로 늘 주눅이 들어있던 화정이가 동화구연대회에서 쟁쟁한 도시 아이들을 물리치고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너무나 반가운 소식에 지원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교실에서 화정이가 등교하길 기다리는 그 시간이 왜 그리 지루하던지! 드디어 화정이가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원은 다짜고짜 화정이에게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화정아, 동화구연대회에서 네가 대상이야! 대상! 장해! 우리 화정이 정말 정 말 장해!”

“진짜요?”

“그럼!”

지원과 화정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원을 그리며 폴짝폴짝 뛰었다. 너무나 밝은 화정이의 얼굴, 그처럼 밝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열등감에 사로잡힌 화정이, 학력은 좀 뒤지지만 노래도 잘 부르고, 그림도 잘 그리니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위로해도 늘 그랬다. 그래서 시험칠 때면 지원은 늘 화정이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그런 화정이가 드디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으로 지원은 행복했고, 수상에서 얻은 화정이의 자신감이 학습으로 전이되어 학력도 높아지리란 걸 확신했다. 문예백일장의 성적도 우수해서 부장은 또 전화로 큰길가에 걸 플래카드를 주문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원은 양각분교에서도 노래로 시작하고 노래로 끝나는 교실을 만들었고 매일 반 아이들에게 간식을 챙겨주었으며,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에 선물과 함께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아이들의 생일엔 출근길에 철따라 피는 야생화를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생일 선물(옷), 생일 편지와 함께 주며, 케잌에 불을 켜고 아이들과 같이 축하해 주고 기념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리고 생일을 맞은 아이의 부모님에겐 책 선물을, 할머니와 사는 아이에겐 할머니의 옷과 드실 것을 선물했다. 어린이날엔 전교생에게 학용품 세트를 선물로 주었고, 급식이 없는 토요일엔 전교생과 전직원에게 김밥, 떡 등 간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글을 써서, 또는 지도상이라도 받으면 그 핑계로 전직원을 일식집(김천 섬바우)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고 직원의 생일을 달력에 표시해 두었다가 생일 날 아침, 수업 전에 전직원이 교무실에 모인 자리에서 케잌에 불을 켜고 생일을 축하해 주고 포도주와 안주를 선물했다. 그리고 직원의 자녀가 입학할 경우, 가방 등 학용품을 선물했다.

또한 다른 학교에서도 혼자 자취하는 동료들에게 손수 만든 청국장과 김치, 그리고 밑반찬 등을 만들어 주었지만 양각분교의 낡은 사택에서 혼자 사는 50대 후반의 선생님에겐 반찬과 음식 등을 더 자주 챙겨드렸다.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봉급의 절반을 차압당하고도 매일 전화로 빚독촉에 시달려 패닉 상태로 힘든 삶을 사는 분이라서 더욱 신경을 썼다.

“선생님, 힘내세요. 인간의 삶엔 굴곡이 있기 마련이에요. 이 시기만 넘기면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원이 양각분교에서 일년을 근무하고 개령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신을 내려하자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난리를 쳤다.

“선생님, 가시면 절대 안 돼요.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맞아요. 저는 선생님이 너무 좋아 일요일에도, 공휴일에도 학교에 와 봐요. 혹시나 선생님이 학교에 오시지 않았을까? 기대를 하고 왔다가 선생님 차가 없으면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가곤 했어요.”

“저는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가시면 안 살아요. 죽을 거예요. 선생님 없이는 못 살아요.”

“선생님이 전근하시면 그 학교로 우리 아이 전학 시킬 겁니다.”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들의 협박(?)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가족과 지인들은 달랐다.

“선생님, 집 가까이나 개령으로 가세요. 날마다 길 위에서 보내는 그 많은 시 간, 또 엄청난 기름값은 어쩌구요? 무조건 가셔야 합니다.”

“제가 가면 우리 아이들이 죽겠다는데 우리 애들 죽이고 어떻게 가요?”

“애들 초상은 제가 치러줄 테니 걱정 말고 가세요.”

지인들의 강력한 권유에도 지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애타게 그녀를 기다리는 개령초등학교 아이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더 가난하고, 더 가엾은 양각분교 아이들의 간절한 손길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수혁인 양각분교에서 개구쟁이로 이름난 아이였다. 수혁이의 전 담임이 참고로 하라며 지원에게 들려준 이야기,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어떤 날은 11시가 되어야 나타나며 고도비만인데도 급식을 두 번 이상 받아먹고 담임의 말을 듣지 않으며 힘이 약한 아이들을 수시로 괴롭히고 잘못을 지도하려면 마구 반항하는 심각한 문제아라고 했다.

하지만 지원의 시야 내에서의 수혁인 보통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비만의 심각성을 인식시키고 급식을 한번만 받아먹게 했다. 수혁인 불만 없이 잘 지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차츰 본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 창밖을 내다보던 지원의 시야에 수혁이의 심술이 포착되었다. 이유 없이 저학년 남자 아이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는가 하면 여자 아이들에게 흙을 던지기도 했다. 이유도 없이 학교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늘 묵비권을 행사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 대답은 시원스럽게 잘 했다. 하지만 수혁인 담임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수혁이의 심술은 반복되었다.

점심시간에 승준이가 울면서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수혁이 형아가 제 머리를 벽에 부딪쳤어요.”

“그래? 어디 보자. 상처 났으면 치료해야지.”

“피는 안 난 것 같은데 무지 아파요.”

지원은 승준이의 동그란 혹에 호~~~ 해주며 약을 발라주곤 수혁일 불렀다.

“수혁아, 왜 승준이 머리를 벽에 부딪쳤어? 머리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데,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어?”

“그냥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수혁인 늘 그랬을 것이다.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방어 차원이 아니라 자기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런 짓을…….

“수혁아, 사람들이 무심코, 혹은 장난으로 연못에 던진 돌이 개구리들을 죽일 수도 있어. 네가 심심해서, 그냥 장난으로 한 행동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생각해 봤니?”

“아니요.”

“그럼 한번 입장 바꿔 생각해봐. 너보다 힘센 아이가 이유도 없이 널 때리고 괴롭히면 넌 어떻게 하겠니?”

“당연히 못 참죠. 몇 배로 더 세게 갚아줘야죠.”

“네가 다른 애들을 괴롭힐 때 다른 아이들의 마음도 지금의 네 마음과 같을 거라는 거 생각해 봤니?”

“…….”

긴 시간의 설득이 통했는지 수혁인 한동안 잠잠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수혁일 어떻게 하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버릇을 고칠 수 있을까?’

지원은 수혁이로 인하여 잠 못 자고 고민하는 날이 많았다.

어느 초여름 날, 점심시간에 또 신고가 들어왔다.

“선생님, 수혁이가 연못가에 서 있는 해바라기를 부러뜨렸어요.”

지원이 달려내려가서 보니 해바라기는 허리가 완전히 꺾여 있었고 벌써 잎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희망이 없어 보였다.

지원은 수업 마치고 수혁일 남겼다.

“수혁아, 왜 해바라기 허리를 부러뜨렸어?”

“그냥요.”

“또 그냥이야? 선생님은 우리 수혁이가 완전히 착해진 줄 알았는데, 그래서 행복했는데, 아니었어? 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거야?”

“…….”

“수혁아, 사람에게 꿈이 있듯이 해바라기에게도 꿈이 있었어. 열심히 자라서 예쁜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고 싶다는 꿈이……. 너로 인해 해바라기의 허리가 부러질 때 해바라기의 꿈도 함께 꺾인 거야. 이제 어쩔 건데? 꺾여버 린 해바라기의 꿈은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는데? 또 죽어가는 해바라기는 어쩔 건데?”

“…….”

수혁인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수혁이 네가 커다란 잘못을 했으니까 벌은 받아야겠지?”

벌이란 말에 수혁이 흠칫했다.

“선생님이 수혁이에게 내리는 벌은 바로 이거야. 이 종이에다가 해바라기에게 편지를 써. 너의 진심을 담아서…….”

“예, 선생님.”

수혁인 진지한 모습으로 지원이 준 A4 용지에 정성을 들여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해바라기에게

해바라기야, 정말 미안해. 나는 장난으로 너를 꺾었어. 그 땐 네가 아파할지 몰랐어. 우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네가 무척 아팠을 거란 걸 알았어. 그리고 난 너에게 꿈이 있는 줄 몰랐어. 내가 한 장난이 너의 꿈을 꺾는 일이란 것도 몰랐어.

해바라기야, 정말 미안해. 지금이라도 너를 살려주고 싶은데 살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너무 가슴이 아파.

해바라기야, 그동안 내 가슴엔 브레이크가 없었어. 우리 선생님께서 늘 가슴에 있는 브레이크를 잘 밟아야 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런 사람이 나중에 훌륭한 인물이 될 거라고 했는데 내 가슴엔 아예 브레이크라는 게 없었어. 그냥 내 마음대로 살았어. 다른 사람이 어떤 피해를 보던지 상관없었어. 나만 재미있으면 그만이었어. 나만 신나면 그만이었어.

해바라기야. 이젠 내 가슴에 브레이크를 만들 거야. 그래서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싶어할 때마다 ‘멈춰!’ 하며 힘차게 밟을 거야. 그래서 착한 사람이 될 거야.

해바라기야, 너에겐 미안하지만 너의 목숨 대신 내 가슴에 브레이크를 만들게 되었으니까 쪼끔은 용서해 줄 거지?

해바라기야, 하늘나라에선 행복하게 잘 살아.

너한테 미안한 수혁이가

수혁이의 편지를 읽는 지원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우리 수혁이가 개구쟁이지만 글은 꽤 잘 쓰더니, 반성문도 아주 멋지네.’

지원은 말없이 수혁이를 안아주었다. 그 따뜻한 포옹은 이미 수혁일 용서했다는 의미의 몸짓이었다. 지원은 교단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늘 아이들에게 해주던 이야길 수혁에게 했다.

“수혁아, 네가 말하기 전에 ‘내가 하려는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 닌가?’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말해. 또 네가 행동하기 전에 ‘내가 하려는 행 동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닌가?’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행동해. 그 러면 넌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알았지?”

“예, 선생님. 앞으로는 선생님 속상하게 하는 일 안 하고 선생님을 기쁘게 하 는 일만 할게요.”

“정말? 그럼 우리 약속해. 자,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로 도장 찍고, 복사하고 코팅하고…….”

지원을 바라보는 수혁이의 웃음이 참 귀엽고 예뻤다. 그로부터 수혁이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생님, 수혁이 이상해요. 수혁이 같지가 않아요. 친구들도 많이 도와주고 싸우는 애들 말리기 바빠요. 어제도 제 청소 수혁이가 도와주었어요.”

학년초부터 수혁이와 자주 다투던 재훈이가 말했다.

“전혀 이상하지 않아. 그게 바로 수혁이의 본 모습이었어.”

전 담임이 맡았을 땐 매일 지각했다던 수혁이, 하지만 지원이 맡고부턴 단 한번도 지각을 하지 않았다. 지각은 커녕 반에서 제일 먼저 등교했다. 그런 수혁이가 수업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웬일이지? 아파서 못 오는 건가? 수혁이 엄마에게 전화해 봐야겠다.’

그 때 수혁이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왔다. 콧등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힌 채 두 손을 뒤에 감추고…….

“수혁아,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 늦잠 잤어? 밥은 먹고 온 거야?”

대답 대신 수혁이는 뒤로 감춘 손을 지원에게 내밀었다.

“짠!”

수혁이가 내민 건 싱그러운 내음을 풍기는 풀꽃 한 다발이었다.

“아니! 수혁아! 이것 때문에 늦은 거였어? 정말 그런 거였어?”

“선생님 꽃 좋아하시잖아요?”

얼굴이 빨개진 수혁일 지원이 안아주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박수를 쳤다.

“수혁아, 고마워! 선생님은 지금 너무너무 행복해!”

“선생님, 저도 행복해요!”

미소 짓고 있는 지원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교실 천장의 네모난 석고보드 무늬의 갯수를 세고 있었다. 지원은 그 순간 깨달았다. 사랑의 힘은 사람의 인성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위대하다는 사실을…….

그날 오후, 지원은 피아노 앞에 앉아 즐겨치던 피아노 명곡들을 치다가 노트를 꺼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양각분교의 오후

아이들이 돌아간

조용한 오후.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이

머물던 자리엔

참새들이 모여 앉아

풋여름을 쪼아대고

교사 뒤

네모난 실습지엔

이마를 맞댄

초록잎 감자들이

발밑에 숨겨 놓은 알

알차게 익혀가고

밭가에 서서

한가로이 오수를 즐기고 서 있는

작은 밤나무 위로

하얀 낮달 조울고

텅 빈 교실에 앉아

피아노를 치면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여릿여릿 다가오는

내 젊은 시절.

보름달이 뜨는 밤

교실에 촛불을 밝히고 치던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와이만의 ‘은파’…….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간절히 그리운

그 시절.

흘러내리는 눈물로

마구 일렁이는 피아노 건반들…….

‘선생님!’

나를 부르는

강마을 아이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가슴 저린 오후.

내 노래가

내 노래가

그대의 가슴에

기쁨으로 다가간다면

내 노래가

그대 안에

빛 고운 사랑으로

피어난다면

내 노래가

그대의 삶에

희망의 빛이 된다면

내 노래가

그대의 미래에

밝은 등불이 된다면

나 그대 위해

긴 밤을 밝혀

노래 부르리.

2009년, 오색빛이 대지를 곱게 물들인 가을 날, 지원은 그동안 써 모은 시로‘그대 있음에’라는 제목의 컬러 시집을 냈다. 사촌 오빠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시작하면서부터 써 온 시, 그랬다. 사랑은 그녀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기쁨, 설레임, 환희, 열락, 그리움, 아픔……. 사랑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온갖 좋은 감정과 그것으로 인해 수반되는 아픔까지를 품고 있었다. 그래,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가슴마다에 따스한 사랑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원의 시집엔 사촌 오빠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가슴 저린 사랑도, 아픈 사랑도, 그리움도 들어 있고, 아이들과의 사랑, 동물과의 사랑도 들어 있다. 예쁘고 아름다운 배경에 기쁨, 슬픔, 갈등,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시집을 접한 사람들은 그 시를 읽는 동안은 삭막한 현실을 잊고 행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동화집, 단편소설집을 내고 교단일기를 모은 수필집을 냈을 때 사람들은 말했었다. 픽션인 동화나 소설보다는 수필이 훨씬 더 좋으니 앞으로 제2, 제3의 수필집을 내라고……. 그래서 지원은 제2 수필집을 냈었다. 사람들은 지원이 지어낸 이야기보다는 그녀의 적나라한 삶을 들여다보기를 더 좋아했었다.

하지만 시집을 내자 그것을 읽은 사람들은 수필집보다 시집을 더 좋아했다. 수필은 단순히 남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에 불과하지만 시는 읽으면서 더 가까이 환희를 느낀다고 했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통해서가 아닌, 시에서 바로 자신을 읽어낸다고 했다. 시를 읽으면서 첫사랑에의 기억이 떠올라 행복하고, 그 사람이 그리워 눈물짓는다고 했다. 자신이 바로 시의 주인공으로, 아프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그 때 지원은 알았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산문이 주는 감동과 시가 주는 감동의 색깔과 깊이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지원은 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학생, 학부모, 동료, 이웃들에게 그녀의 시집을 아낌없이 선물로 주었다. 거리가 먼 사람들에겐 우편으로 부쳤다. 그래서 지원은 밤마다 시집을 쌓아 놓고 봉투에 주소를 쓰고 책을 넣어 붙이는 작업을 하고 다음 날 차에 싣고 우체국으로 달려가 부쳤다. 학교와 각 기관에도 기증했다.

가을 선물이라서 더 감동적이라는 사람들, 소설이나 수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가는 지원의 시로 사람들은 행복하고 특별한 가을을 보낼 수 있다며 고마워했다.

다음은 지원의 시집에 실린 가을 시다.

그대 있음에

그대 있음에

지상에 내리는 가을빛이

내 가슴속에서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함을,

그대 있음에

여릿여릿 다가오는

파란 가을 하늘이

내 가슴속에서

더욱 투명한 색으로 빛남을,

그대 있음에

혼자 걷는 들길에서 얻은

황금빛 언어가

내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한 편의 시로 각인됨을,

그대 있음에,

그대가 내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있음에,

무채색이었던 내 삶이

일곱색 무지개빛으로 빛남을,

그대는 아시나요?

내 아픈 사랑

가을 시집을 펴고

숲속 바위 위에 앉았습니다.

책갈피마다 모여 앉은

향기로운 가을 이야기가

하양, 보랏빛 들꽃으로 피어나

찬란한 가을을 노래합니다.

그대를 만난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한,

그대를 그리워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파한

나의 사랑.

기쁨마저도

슬픔으로 다가오던,

눈물로 젖어오던,

우리의 아픈 사랑.

눈을 들어 바라본 하늘에

그대의 하얀 미소가

곱게 피어있습니다.

가을 바람에 실려 온

그대의 목소리가

허공에 맴돕니다.

넘기는 책장마다에서

나는

그대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내 아픈 사랑은

오늘도

노을빛 그리움으로 젖어옵니다.

창밖엔 비

창밖엔

눈물처럼 비가 내립니다.

내 영혼을 울리는

가을 비가…….

내 기쁨을 자신의 기쁨보다

더 크게 기뻐하고

내 아픔에 잠 못 이루며

아파하는 그대.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그대의 사랑이 너무 깊어

눈물이 납니다.

그대와 나 사이의

머나먼 거리가

아픔으로 저무는

이 저녁.

그대 향한

가슴 저리는 그리움이,

나에 대한

그대의 숭고한 사랑이,

한 줄기 비가 되어 내립니다.

가을 숲에서

가을빛이 찬란한

숲속 오솔길을 걸어봅니다.

길섶엔

우리의 아픈 사랑이

하양, 노랑 들꽃으로 피었습니다.

진한 그리움이

나뭇가지마다

고운 단풍으로

붉게 타오릅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

쉼 없이 들려오는

풀벌레 울음소리…….

눈을 감으면

그대의 모습이,

그대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다가옵니다.

수많은 시간이

우리 사이를 지나갔지만

오늘은

그대 모습이

너무나 또렷한 영상으로

다가옵니다.

머지 않은 날

슬픔처럼 낙엽이 지고

이 가을도 떠나겠지요?

오늘만은

찬란한 가을과 함께

내 안에 있는 그대를 꺼내놓고

온전히 사랑하고 싶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

갈대의 솜털도

바람에 날아가 앙상하고

빛바랜 낙엽이

방향 감각을 잃고

길모퉁이에 마구 뒹구는

이별의 계절.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본다는 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떠나가는 계절의

언덕배기에 홀로 서서

싸늘한 바람을 맞는다는 건

얼마나

가슴 시린 일인가?

시월의 마지막 밤에

촛불을 켰네.

잔잔히 흔들리는 작은 불빛에서

희망을 보았네.

떠나간 계절이

다시 돌아오듯이

떠나간 사람도

머지 않아

첫 마음 그대로 안고

첫 미소 그대로 띠고

다시 돌아올 거라는…….

그 희망으로

내 시월의 마지막 밤은

외롭지 않았네.

지원은 가난하고 소외된 양각분교 아이들에게 한 가지라도 더 체험을 시켜주고 싶어 포항에 있는 ‘경북과학교육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포항시 관내 학교에는 버스를 제공하지만 관외 학교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물러날 지원이 아니었다.

지원은 2005년 3월부터 경상북도교육청 홈페이지 집필위원으로서 ‘e – 장학통신’, ‘e - 아름다운 삶’, ‘교육칼럼’에 글을 올려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 중, 그녀의 글이 너무나 감동적이라며 가끔씩 전화를 한 사람이 경북과학교육원의 운영부장임을 안 지원은 그 사람에게 매달려 보기로 했다. 학교 형편상 버스를 대절하기 어려운데 가엾은 분교 아이들을 위해 버스를 내줄 수 없느냐고, 제발 부탁한다며 애원하다시피 하여 원장님과 상의해보겠다는 대답을 얻어냈고, 결국은 원장님의 허락을 받아 아이들과 함께 체험에 나섰다. 지원은 자신의 저서인 수필집과 컬러시집을 과학교육원 전직원에게 줄 만큼의 분량을 버스에 싣고 달렸다.

드디어 포항의 경북과학교육원에 도착! 직원들이 나와 지원네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원이 준비해 간 선물을 그들에게 주니

“작가에게 직접 책을 받아보는 건 난생 처음입니다. 영광입니다.”

“책의 제목도 너무나 멋지네요.”

라며 좋아했다.

분교 아이들은 과학 작품 만들기, 조립하기, 천체관측 등 여러 가지 과학체험을 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 하지만 아이들의 과학적 호기심을 학교에선 자료가 부족하여 제대로 채워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지원에게도, 과학에 허기진 분교 아이들에게도 뜻 깊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지원은 자동차 동호회 카페에 분교 아이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자주 올렸다. 그러자 운영진에서 분교로 위문을 오고 싶어했다. 아이들과 직원들에게 이야기하니 너무나 좋아했다.

드디어 그 날! 서울에서 인천에서, 대전, 대구에서 같은 차를 몰고 회원들이 분교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달려가 아저씨들의 따뜻한 품에 안겼다.

“안녕하세요?”

“잘들 있었어?”

“아저씨,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바람처럼 달려왔지롱.”

처음 보는 아저씨들인데도 아이들은 마치 오래 사귄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원의 입가에 미소가 일었다.

“먼 길 마다 않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덕분에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저희가 더 감사 합니다.”

잠시 후, 학년 별로 줄을 선 아이들 앞에서 카페지기가 인삿말을 했다.

“양각분교 어린이 여러분, 서지원 선생님께서 카페에 올린 글과 사진을 보고 한시라도 빨리 여러분을 만나고 싶었는데 회원들과 시간을 맞추다 보니 이제 야 오게 되었습니다. 막상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 정말 기쁘고 반갑습니다. 우 리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운동도 하며 오늘 하루 즐겁게 보냅시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이어서 불곰 아저씨가 아이들의 꿈이 무엇인지 듣고 싶다고 했다.

“저는 119 구조대가 되어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고 싶습니다.”

재훈이가 말하자 고고씽 아저씨가 재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재훈이는 아주 훌륭하고 멋진 꿈을 갖고 있네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은 정말 장한 일이죠. 사실, 화재 현장이나 홍수 때 사람들을 구조하다가 숨진 구조대원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일입니다. 우리 다 같이 멋지고 훌륭한 꿈을 가진 재훈이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줍시다.”

모여선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저는 우리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고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지원의 반인 지현이가 말했다.

“그것도 아주 멋진 꿈이죠. 미래의 정지현 선생님께도 박수를 쳐줍시다.”

“저는 음악가가 되어서 우리나라를 빛내고 싶습니다.”

“와! 그것도 아주 멋진 꿈이죠. 우리나라를 빛내고 싶다는 그 마음이 더 예쁘 네요.”

“저는 경찰관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야구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아저씨들은 아이들의 꿈을 듣고 그 꿈을 꼭 이루라고 격려해 주었다.

다음엔 아이들과 아저씨들이 편을 나누어 발야구를 했다. 아저씨들은 일부러 천천히 뛰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아이들과 점수를 맞추어 주었다. 지원은 공을 힘껏 차고 있는 힘을 다 하여 달려도 아이들에게 밀렸다.

“선생님, 힘내세요!”

“선생님, 조금만 더 빨리 뛰세요! 더 빨리!”

1루를 행해 전력달리기를 하던 지원이 넘어지자 한 덩치하는 슈혁이가 달려가 일으켜 주었다.

“고마워!”

“하하하…….”

“호호호…….”

양각분교 운동장에 울려퍼지는 아이들과 아저씨들의 웃음소리, 그 모습을 고고씽 아저씨는 동영상에 담고 있었다.

운동이 끝나고 급식실에서 아저씨들이 준비해 온 피자와 통닭을 먹으며 맛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선물로 가져 온 야구 장비를 아이들에게 주어 행복은 절정에 이르렀다.

아저씨들이 출발하려 하자 1학년 재동이가 아저씨의 허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저씨, 가지 마요. 내일도 우리랑 같이 놀면 안 돼요?”

“재동아, 아저씨들은 아주아주 바쁘신 분들이야. 그러니 이번엔 여기까지만 하고 보내 드리자. 응?”

지원이 재동이에게 말하자 재동인 아저씨 대신 지원의 품에 안겼다.

“양각분교 친구들, 겨울에 한 번 더 올게요. 그 때 다시 만나 신나게 놀아 요.”

“예! 아저씨들, 안녕히 가세요!”

아이들은 떠나가는 아저씨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소외된 분교 아이들을 기쁘고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먼 길을 달려온 회원들이 고마워, 지원은 그들에게 자신의 수필집과 컬러 시집을 선물하고, 직지사 관광을 시켜주었으며, 식당에서 회원들과 직원들에게 산채 정식을 대접했다.

“선생님, 늙지 않는 비결이 뭐죠? 연세보다 20년은 더 젊어 보여요.”

“글쎄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하는데 저도 확실히는 모르지만 평생을 순수한 어린이들과 사니까 늙고 싶어도 늙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정신 연령 도 딱 아이들 수준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부럽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순수한 시골 아이들과 잠깐 어울린 저도 한참 젊어진 느낌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요.”

“그래 주시면 더 고맙죠.”

회원들은 겨울에 한 번 더 귀마개, 털장갑, 털목도리 등, 겨울 선물과 햄버거 피자, 통닭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싣고 와 분교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기념사진도 찍어 동영상과 함께 카페에 올렸다. 그 때도 지원은 회원들과 직원들을 직지사 식당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2010년 3월 26일 밤, 매스컴은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전했다. 서해 백령도 부근에서 군함인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놀라서 TV 앞에 모여 앉았다.

2010년 3월 27일, 두 동강이 난 함수 위쪽에서 58명의 병사들을 구조했다는 소식이 왔다. 그러나 침몰한 함미에서의 구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온 국민과 장병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TV, 라디오, 신문, 인터넷 등 각종 언론 매체들을 통하여 병사들의 생환을 기다렸지만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천안함엔 외부와 차단된 격실이 있는데 거기엔 69시간을 버틸 수 있는 공기가 있기 때문에 장병들이 그곳으로 피신했다면 희망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의 크기는 줄어들고 절망의 부피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해군 특수여전단인 유디티가 군함에 갇힌 군인들을 구하러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들었다. ‘나라에 있어야 내가 있다’는 신조로 살아왔다는 애국자 한주호 준위도 수병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목숨을 걸고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든 한주호 준위, 하지만 그는 3월 30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아! 그의 거룩한 희생이 단 한명의 후배라도 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주호 준위의 안타까운 희생으로 희망의 끈이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제발, 제발 살아있어야 하는데…….’

지원의 가슴이 타들어갔다.

‘내가 이런데 저 사람들의 가족들은 어떨까? 아마 죽음보다 더 큰 공포와 불 안으로 힘들어할 거야.’

지원은 종교는 갖고 있지 않았지만 절대자라고 믿어지는 분들께 간절히, 아주 간절히 기도했다.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제발, 우리 장병들을 무사히 돌려보내 주세요! 제발, 제발…….’

최종 시한인 69시간이 한참을 지날 때까지 구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이나 국민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버릴 수가 없었다. 포기하기엔 너무나 젊고 귀한 청춘들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희망의 끈을 놓아가고 있었다. 대신 기적을 기다렸다. 기적은 언제든,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기적이니까. 하지만 4월 7일에 발견한 한명의 병사도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또 한 뼘의 희망의 부피가 줄어들었다.

함미를 인양했다고 했다. 반가운 소식이긴 했지만, 꼭 그래야 할 일이긴 했지만, 숨통을 막는 불안감이 실낱같은 희망을 짓누르고 있었다.

4월 15일, 전 국민은 낮부터 TV 앞에 모여 앉아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오후부터 뉴스 특보로 내보내는 화면엔 이름을 새긴 노란색의 굵고 커다란 글씨가 연달아 왼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기나긴 이름의 행렬……. 그건 바로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병사들의 이름이었다.

‘아! 사람의 이름을 바라보는 가슴이 이렇게나 많이 아플 수도 있는 거구나!’

TV 앞에 앉은 지원은 마치 군대 (큰 아들 연천, 작은 아들 파주)에 가 있는 쌍둥이 아들을 잃은 것처럼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가슴을 치고 또 치며 흐느꼈다.

“어떡해? 어떡하지? 응? 저 청년들 불쌍해서 어떡해? 아직 피어보지도 못한 아까운 청춘인데…….”

그날, 저녁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강하게 흐느끼던 지원은 자정을 넘긴 시간에 글을 써 내려갔다. 거침이 없었다. 고칠 일도 없었다. 흐느낌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나오는 그대로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 글을 해군 홈페이지에 올렸다. 하지만 시 안에 자신의 이름은 써 넣지 않았다.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어머니의 노래

(아들아, 이젠 널 보내줄게)

아들아!

칠흑같이 어둡고 차가운 물 밑

꽉 막힌 좁은 공간에서

얼마나 힘들었니?

살아보려고,

살아서 엄마에게 돌아오려고

얼마나 힘들게 발버둥쳤니?

병으로 쇠약해진 몸도 아니고

20대의 생생한 젊음으로

그 목숨 넘기기가

얼마나 힘들었니?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보고픈 가족이,

가고픈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니?

거기서 그대로 끝나버릴

너의 푸른 꿈이

얼마나 아쉬웠니?

그런 널 생각하면

엄만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고

가슴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진다.

살아있음이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문이다.

아들아!

엄만 널 잃은 그 날부터

모든 감각기관이 마비되고

슬픔만을,

아픔만을 감지하는 감각만

펄펄 살아

널 애타게 불러왔다.

밤낮으로 널 부르고 부르다

목은 잠겨버리고

가슴은 다 타

까만 숯검정이 되어

내쉬는 숨마다

파란 연기만 나올 뿐…….

아들아!

제대하면 효도하겠다는 약속 못 지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라.

네가 태어나던 날,

엄만 세상을 다 얻은

큰 부자가 되었고

너의 그 이쁜 자람을 보며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단다.

그것만으로도 엄만 충분해.

오히려

너에게 많이 거슬러 줘야 할 거야.

아들아!

세상은 지금

새로 피워낸 연둣빛 새싹과

온갖 봄꽃으로 곱게 단장했지만

올해의 봄은 엄마의 삶에서

가장 잔인한 봄이었고

엄마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렇게 기억될 거야.

아들아!

넌 엄마의 아들이기 이전에

대한의 아들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 떠난

자랑스런 아들이기에

그것으로

엄만 아픈 가슴 달래려 한다.

아들아!

우리 사이를

생과 사의 높은 벽이

갈라놓았지만

죽음도

우릴 갈라놓을 순 없어.

넌 지금 내 곁에 없지만

네 영혼만은, 너와의 추억만은,

엄마 가슴 한복판에

영원히 살아 있을 거야.

아들아!

엄만 끔찍한 사고가 나던 그 날부터

보이지도 않는 널 꼭 껴안고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몸부림쳤지만

이젠

널 보내려 한다.

이러는 건

널 아프게만 할 뿐,

편하게 보내주는 길이 아닌 걸 알기에…….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가엾은 내 아들아!

이젠

꼭 안고만 있던 널 놓아줄게.

이젠 널 보내줄게.

이승에서의 힘들었던 기억,

아팠던 기억은

모두 내려놓고

행복했던 기억만

가슴에 안고 가렴.

뒤돌아보지 말고,

울지도 말고,

고운 봄향기 타고

가벼운 마음으로 승천하렴.

아들아!

머지않은 날

엄만 네 곁으로 돌아가

널 만날 기다림으로 살련다.

그 때

우리 다시 만나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 나누자.

아들아!

사랑한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

잘 가라!

내 아들!

지원은 그 시를 경상북도교육청 홈페이지에도 올렸다. 그러자 전에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여교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천안함 시 ‘아들아 이젠 널 보내줄게’ 선생님이 쓰신 거 맞아요?”

“맞아. 내가 써서 해군 홈피에 올렸어. 쌍둥이 아들이 현역에 있으니 마치 내 아들을 잃은 것처럼 가슴이 아팠어.”

“지금 그 시가 동영상으로 제작되어 방송에 나가고 있는데 시를 쓴 사람은 안 나오더라구요.”

“당연하지. 내가 시 안에 내 이름을 안 썼으니까.”

“시가 정말 실감나요. 그 시 보고 안 운 사람이 없어요. 남자들도 많이 울었 다 하더라구요. 그래서 전 그 시를 아주 유명한 시인이 쓴 건 줄 알았어요.”

“유명한 시인이 아니라서 미안해.”

“그런 뜻이 아니구요. 그렇게 훌륭한 시를 쓰신 선생님을 안다는 자체만으로 도 제겐 큰 영광입니다.”

“무슨 영광씩이나.”

알고 보니 지원의 시는 SBS, MBN을 비롯한 방송과 각종 라디오 방송, 각종 일간지에 보도되었고 인터넷 뉴스와 카페, 블로그에도 올려져 있다고 했다. 실제로 지원이 본 것은 SBS에서 제작한 특집 방송 ‘46인의 꿈과 사랑’ 끝부분에 지원의 시가 슬픈 음악과 함께 자막으로 올라가는 것과 지금도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MBN에서 만든 동영상이다.

그런데 용케 지원을 찾아낸 신문사도 있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텅 빈 교실에서 피아노 명곡들을 치고 있는 그녀에게 양각분교 부장이 달려올라와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국민일보 기자라 했다.

“선생님께서 천안함 시 ‘아들아, 이젠 널 보내줄게’를 쓰셨나요?”

“네.”

“해군 홈피에 글을 올린 사람 이름이 있어서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동명이인 이 여럿이더라구요. 그 중 왠지 선생님이 쓰셨을 것 같아 전화 드립니다.”

“제가 쓴 건 맞는데 왜요?”

“인터뷰를 좀 하고 싶어서요. 응해 주실 거죠?”

“네. 그러죠.”

지원이 기자와 인터뷰를 했고 다음 날, 국민일보는 전화 인터뷰를 통해 취재한 내용을 신문에 실었다.

또한 국방일보 유세정 작가가 지원에게 전화를 해서 영결식 아침에 생방송이 있으니 그 때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자작시를 낭송해 달라고 했다. 방송 시간은 15분 정도일 거라고 했다.

2010년 4월 29일 아침이 밝았다. 방송 끝나고 바로 출근해야 했으므로 지원은 일찍부터 서둘러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한 다음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방송이라서 무척 긴장이 되었다. 드디어 전화가 왔다. 진행자는 평택대학교 윤영미 교수였다.

사실 남북분단은 지원에게도 큰 아픔이었다. 지원의 할머닌 6. 25 때 북으로 끌려간 막내 아들로 인해 뼈에 사무친 그리움으로 눈 감는 순간까지 눈물과 한숨으로 살았고 지원도 곁에서 함께 아파했었다. 그런 이야기와 여러 가지 질문엔 침착하게, 담담히 답변했으나 마지막으로 슬픈 배경 음악이 깔리고 ‘아들아, 이젠 널 보내줄게’란 자작시를 낭송할 땐 목이 메이고 흐느껴져서 지원은 울면서 시를 낭송했다. 너무나 강한 슬픔이 차올라 잠깐씩 끊기기도 했다. 하지만 생방송이라서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이 끝났을 때 지원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수고 많이 하셨어요.”

“울어서 미안해요. 감정이 복받치는데 도무지 자제가 안 되더라구요. 혹시 저 때문에 방송 망친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어요. 나무나 가슴이 아파 우리도 입술 을 깨물고 참아야 했어요. 감사합니다.”

“다행이에요. 정말 많이 걱정했는데…….”

지원은 세수하고 다시 화장을 한 다음에 학교로 출발했다. 하지만 운전하는 내내 눈물이 흘러 지원은 한손으론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론 눈물을 훔치면서 갔다.

학교에 도착, 지원은 분교 아이들에게 ‘바다의 꽃’이란 제목을 주고 시를 쓰도록 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숙연하고 진지한 자세로 글을 쓰는 아이들, 애국심을 담은 좋은 시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전교생이 지원의 교실에 모여 앉아 TV로 영결식 장면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천안함 폭침, 비록 아까운 젊은 생명을 많이 잃어 유가족과 온 국민을 아프게 한 커다란 사건이었지만 지원은 그 아픔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 사건은 안보에 해이해진 국민에게 강한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 나라는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만큼 소중한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특히 전후 세대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강한 안보의식과 함께 애국정신을 깊이 심어준, 그래서 앞으로 우리나라를 지켜내는데 커다란 힘이 되어줄 사건이었다.

지원은 변변치 못한 자신의 시가 전국민을 울린 건, 그 안에 진심을 담은 아픔이 들어있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때 지원은 비로소 깨달았다. 읽는 이를 감동시킬 수 있는 글은 화려한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 담긴 글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2000년 어느 봄날 아침, 지원이 2층 자기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가 마당에서 노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굶주렸는지 고양이가 아니라 청설모의 모습이었다.

‘세상에나! 고양이가 굶으면 저런 모습이 되는구나! 아이구 불쌍해라!’

새끼 고양이들은 배가 고픈지 엄마의 빈젖을 빨아대고 있었다. 너무나 불쌍해 지원은 얼른 참치를 사다가 넓은 그릇에 담아주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경계도 않고 허겁지겁 먹는 고양이들……. 그때부터 지원은 길고양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하루 두 번씩 사료와 물을 주고 가끔씩 간식도 주고…….

그런데 어느 날, 가느다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서 다가가 보니 주먹만한 새끼 고양이가 어미에게 버려져 누운 채 울고 있는 것이었다. 지원은 그 새끼 고양이를 방으로 데려왔다. 눈도 뜨지 못하고 네 다리가 오그라들어 서지도 못하고 누운 채로 오른쪽 방향으로 뱅뱅 돌기만 했다. 당장 달려가 우유와 젖병을 사와 우유를 타서 젖병을 물렸으나 빨지도 못했다. 그래서 얼른 주사기를 사다가 우유를 조금씩 입에 흘려 넣었다. 그렇게 미숙아로 태어났으니 어미도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가야, 내가 너의 엄마가 되어 줄게. 엄마가 널 보살피고 잘 지켜줄게.”

고양이는 지원네 가족의 정성스런 돌봄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눈을 뜨고 오그라들었던 다리도 한 개씩 펴지기 시작했다. 이름도 지어주었다. ‘방울’이라고……. 사람에게 안기기를 좋아하고 애교도 잘 부리는 방울이, 그 방울이로 인해 가족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누구든지 밖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방울이를 찾았고 여행을 가면 집에 전화하여 방울이 안부부터 물었다. 방울인 그렇게 가족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방울이가 네 살이 되던 어느 가을날, 입에서 뽀글뽀글 거품이 나오고 먹지를 않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간식을 주어도 고개를 돌리고 토하기만 했다. 물조차 못 먹고 입에 흘려 넣어도 곧 토해버렸다.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려 했으나 일요일이어서 가지 못했다. 지원의 속이 타들어 갔다.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월요일에 수업 마치면 조퇴하여 방울이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월요일 새벽, 출근 준비를 하는 지원의 방에 방울이가 들어왔다.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면 일어나고, 쓰러지면 또 다시 일어나 지원에게 다가오는 방울이, 지원은 방울이를 품에 안고 울었다.

“방울아, 엄마가 학교 갔다 와서 병원에 데려갈게. 조금만 참아. 엄마가 네 병 고쳐줄게.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 알았지?”

출근하여 일을 해도 지원의 마음은 온통 방울이에게 가 있었다.

‘방울인 지금쯤 혼자서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을까?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할 텐데…….’

거북이가 되어버린 시계, 지원의 가슴이 타들어갔다.

5교시 수업을 마쳤을 때, 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점심시간에 집에 가보니까 방울이 꼼짝도 못하더라. 빨리 병원에 가야 겠어요. 무지 급해.”

“아무리 그래도 수업은 마치고 가야지. 수업 빼먹고 병원에 갈 순 없잖니? 그런 일은 엄마 사전엔 없어.”

지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다. 아이들 수업에 지장 안 주려다 아들까지 잃은 지원인데 단 한 시간이라도 동물 때문에 수업을 빼먹을 순 없는 일이었다.

6교시 수업을 마치자마자 지원은 조퇴를 달고 차란 차는 모두 추월해 가면서 집으로 달렸다.

‘방울아, 엄마가 간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지원의 딸이 분홍색 담요에 싸인 방울이를 안고 대문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지원은 방울이를 안은 딸을 뒷좌석에 태우고 구미에 있는 ‘금오동물병원’을 향해 달렸다. 뒤에서 방울이가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울이 옆으로 눕혀. 토사물로 기도가 막힐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선산에서 구미까지 신호등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구미 시내 가까이 갔을 때 딸이 말했다.

“엄마, 방울인 눈 감을 힘도 없나봐. 계속 빤히 나만 쳐다보고 있어.”

“눈 뜰 힘이 없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눈 감을 힘이 없단 말은 처음 들어본 다. 방울아, 힘내! 이제 다 왔어!”

그 때만 해도 지원은 여유가 있었다. 그런 농담을 할 수 있을 만큼…….

구미에 도착하여 ‘금오동물병원’ 앞에 딸을 내려주며 말했다.

“여긴 주차 금지 구역이니까 방울이 치료 끝나면 전화해. 병원 앞에 차 댈 테 니까.”

“알았어.”

담요에 싸인 방울이를 안고 병원으로 들어가는 딸을 보고 지원은 병원 근처에 주차할 곳을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그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불길했다.

‘아직은 전화할 시간이 아닌데……. 이 불안감은 도대체 뭐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딸의 울먹이는 목소리!

“엄마, 방울이 죽었어! 병원에 내려놓았을 땐 이미 심장이 멎어 있었어.”

“뭐? 우리 방울이가 어쨌다고? 말도 안돼! 조금 전에도 토했잖아? 그건 살아 있다는 증거였잖아? 근데 죽다니! 말도 안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게 꿈이었으면, 깨어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악몽이었으면…….’

그러나 그것은 잔인하게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지원이 병원 앞에 차를 대자 딸이 혼자 나왔다. 울먹이며…….

“우리 방울이는?”

“병원에서 화장해 준대.”

“방울아! 방울아!”

지원은 울부짖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안돼! 화장은 안돼! 우리 방울이 뜨거워서 안돼! 우리가 묻어주자. 어서 방울 이 데려와!”

“알았어. 데려올게.”

지원은 운전하면서 울고 딸은 뒷좌석에서 죽은 방울이를 안고 울었다.

“엄마, 방울이 아직 따뜻한데, 정말 죽은 걸까? 이렇게 따뜻한데……. 방울아! 눈 좀 떠봐! 눈 뜨고 큰 누나 좀 바라봐줘, 응?”

“방울아! 엄마가 미안해! 물도 못 먹는 널, 30분만 아니, 10분만 먼저 가서 바로 링거만 꽂았어도 살릴 수 있었는데, 방울아, 엄마가 미련해서 널 죽였구 나. 방울아! 엄마가 선생이어서 미안해! 집에 있는 엄마였으면 빨리 병원에 데려와 넌 죽지 않았을 건데, 방울아, 엄마를 용서하지 마! 학교에만 미쳐있 는, 학교에만 목숨 거는 엄마를 용서하지 마!”

지원은 앞이 훤히 트인 양지바른 동산에 방울이를 고이 묻어주었다. 마지막에 방울이를 감쌌던 분홍색 담요에 곱게 싸서…….

“방울아, 오늘 새벽, 마지막으로 네가 엄마를 보러 왔었구나. 마지막으로 엄 마 품에 한 번 안겨보고 싶어서……. 엄마 품에 한 번만 더 안겨보고 떠나고 싶어서……. 방울아, 너와 함께 한 4년 동안 엄만 참 행복했어. 네가 간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했고, 엄마 품에 안겨 잠든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했고, 엄마 팔에 누워 애교부리는 모습 보는 것도 행복했고, 엄마가 퇴근하면 현관에 나와 앉아 엄말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했고, 마치 강아지처럼 엄마가 ‘방울아!’ 하고 널 부르면 네!(야옹) 하고 쪼르르 달려와 엄마 품에 안길 때도 행복했고……. 방울아, 고마워. 4년간 우리 가족을 행복 하게 해줘서……. 방울아, 조금만 기다려줘. 엄마도 이제 하늘나라로 갈 때가 멀지 않았어. 방울아, 우리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 나누자, 응? 방울아, 잘 가. 하늘나라에 가서 잘 지내며 엄마 기다리고 있어. 응?”

‘이제 막 승천한 우리 방울인 반드시 천국에 갈 거야. 착한 애니까.’

아픈 방울이를 태우고 병원으로 갈 때, ‘방울이는 눈을 감을 힘도 없는 것 같다’ 던 유란의 말, 그래, 이미 그 전에 방울인 숨을 거두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자기를 몹시도 사랑하던 큰 누나 얼굴을 바라보며…….

지원은 눈물 어린 눈으로 방울이가 묻힌 곳을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산을 내려왔다. 서쪽 하늘의 진분홍빛 저녁노을이 지원의 상처난 가슴으로 너무나 아프게 다가오고 있었다.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은 쉴새없이 자원의 볼에서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엄마, 함께 한 시간 동안 행복했어요. 고마워요! 엄마, 사랑해요!’

방금 승천한 방울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지원의 가슴은 또 다시 미어졌다. 방울이와의 이별, 그것은 그 때까지 지원이 겪은 여러 이별 중, 가장 아픈 이별이었다.

지원은 방울이를 잃고 몸져누웠다. 음식을 먹으면 바로 토해버려서 며칠간은 물과 음료수로만 연명했다. 일주일만에 몸무게가 3.5kg이나 빠졌다. 하지만 그녀가, 그녀의 온 가족이 아무리 아파해도 떠나간 방울이를 되살릴 순 없었다. 집안엔 웃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거운 침묵과 무채색의 우울만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나면, 시간에 비례해서 아픔도 엷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몇 달이 지나도, 아니, 일년이 지나도, 방울이를 잃은 아픔의 부피는 그대로였다. 방울이가 마지막으로 갔던 구미의 ‘금오동물병원’ 앞을 지날 때면 또 울음이 터져 나와 지원은 강하게 흐느끼곤 했다.

‘방울아, 엄마의 아픔을 덜기 위해 억지로 널 잊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을게. 아프면 아픈 대로, 네가 보고프면 보고픈 대로……. 그게 엄마가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면 달게 받아드릴게.’

방울이로 인해 행복했던 만큼 아픔의 크기도 컸다. 지원은 그 때서야 깨달았다. 이별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이들과의 사랑으로 얻은 행복 다음엔 그 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고통과 슬픔이 뒤따른 다는 것을…….

방울이를 잃고 나서 지원은 현관에서 키우고 있는 개 서유리에게도 더 잘 해주고 많은 길고양이들도 더 잘 챙겨주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출근 길, 달리고 있는 차 앞으로 참새 두 마리가 낮게 날아 도로를 횡단하고 있었다. 지원은 알아서 피하겠지 생각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툭!”

하는 소리가 났다. 백밀러를 보니 참새 한 마리가 도로 위에 떨어져 있었다. 뒤에 날아가던 참새였다.

“어떡해! 내가 참새를 죽였어! 어쩌면 좋아! 쟤 불쌍해서 어떡해! 속도를 줄였 어야 했는데…….”

2004년 수마트라 해안에 닥친 지진 쓰나미 때 12만 5000명의 사람이 희생되었으나 동물은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고 해서 동물에겐 인간이 갖지 못한 뛰어난 감각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원은 참새가 알아서 차를 피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원은 흐느껴 울었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눈물, 학교에 도착해서도, 교실에 들어가서도 울었다. 아이들이 놀라서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왜 울어요? 선생님, 슬픈 일 있어요?”

“선생님이 학교 오다가 참새 한 마리를 치었어.”

“그 참새 죽었어요?”

“응.”

“죽은 참새 많이 아팠겠다.”

“그래, 차에 부딪힐 때 얼마나 아팠겠니? 고 작은 몸이…….”

“정말, 죽은 참새 넘넘 불쌍하다.”

“다 내 잘못이야. 흑흑…….”

아이들도 함께 울었다.

그날 저녁, 지원의 친정인 청주에서 남매들 가족이 모였다. 하지만 지원은 아픔으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물론 점심도 먹지 않았었다.

“왜 밥을 안 먹어? 어디 아파?”

지원이 아침의 일을 이야기하고 흐느끼자 엄마가 말했다.

“그까짓 참새, 잡아먹기도 하는데 참새 한 마리 죽였다고 밥도 안 먹고 울 어? 내참 기가 막혀서……. 네 나이가 몇이냐? 애도 아니고…….”

“죽은 참새는 아마 엄마 참새일 거야. 앞에서 날던 건 아빠 참새고……. 비 내리는 이 저녁, 새끼 참새들이 모여 앉아 얼마나 애타게 엄마를 기다릴까? 돌아올 수도 없는 엄마를……. 모두 다 내 잘못이야. 속도를 줄였어야 하는 건데……. 천천히 달려도 일등으로 출근하는데 왜 그렇게 욕심을 냈을까? 그 런 내가 싫어! 정말 싫어!”

또 흐느끼자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하는 여동생의 핀잔, 이어서 제부가 말했다.

“처형,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은 인간이 잡아먹으라고 있는 겁니다. 그 까짓 참새 한 마리 죽인 거 가지고 뭘 그러세요?”

“그거 동물들한테 물어봤어요? 인간에게 잡아먹히기 위해서 태어났냐고 물어 봤냐구요? 동물들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구요. 동물들도 천 수를 다할 때까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구요. 인간에게 동물을 죽일 권리 는 없다구요!”

그랬다. 어른들은 모두 그랬다. 지원의 아픔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동물의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아이들만이, 오직 순수한 아이들만이 지원의 편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하나 같이 그녀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보통 어른들과는 많이 다르기에, 자신들의 눈높이, 감성의 높이와 같은 선생님이기에…….

학교에서 제부도로 갯벌체험 갔을 때 늦은 밤, 지원도 직원들과 함께 조개구이 집에 갔었다. 뜨거운 불판 위에서 몸부림치다 죽어가는 조개들, 너무 놀란 지원은 그곳을 빠져나왔고 그 때부턴 조개구이 집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TV에서 살아있는 생선을 칼로 베거나, 도마 위에서 베어져 꿈틀거리는 낙지의 모습, 그리고 펄펄 끓는 물에 살아있는 문어를 넣는 장면, ‘동물의 세계’에서 사자나 호랑이가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 장면이 나오면 얼른 채널을 돌려버리곤 한다. 또한 출퇴근 때, 도축장으로 가는 소, 돼지, 닭, 개를 실은 차를 뒤따라 가게 될 땐 동물들의 표정과 눈빛에 너무 가슴이 아파 그런 차들을 재빨리 추월하곤 한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도 견디기 힘든 고문이므로…….

‘인간들, 정말 잔인해! 사람에게 잡혀 처참하게 죽어간 동물들아! 내가 인간을 대표해서 사과할게. 다음 세상에선 동물로 태어나지 말고 사람으로 태어나 천 수를 다 하며 행복하게 살아라.’

죽어가는, 또 죽은 동물들 앞에서 지원은 그녀 자신이 사람인 게 참으로 미안했다.

지원이 처음에 양각분교에 갔을 땐 전교생이 19명이었으나 다음 해엔 12명으로 줄었고 마지막 해엔 7명뿐이었다. 그래서 전교생이 야구를 해도 자신이 볼을 위로 던져 놓고 자신이 쳐야 했다. 그런 사연을 지원의 반 승준이가 천하무적 토요일 홈페이지에 올렸고, 며칠 후, KBS TV ‘천하무적 토요일’ 프로그램 피디와 작가가 학교로 와서 출연을 제의했다. 흔쾌히 수락했다. 수업을 먼저하고 다음에 야구를 하겠다며 지원에게 음악 수업을 부탁했다. 지원은 평소처럼 피아노로 수업하고 싶어했지만 작가가 옛날 맛을 내고 싶다며 굳이 오르간으로 수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창고에 버려진 오르간을 교실로 가져와 닦고 또 닦아 놓았다.

촬영이 있는 날, 서울에서 촬영팀과 함께 야구 단원인 오지호, 김창열, 동호, 이하늘, 이현배, 임형준, 김동희, 김현철, 한민관, 탁재훈, 마리오, 김준 등 연예인 야구단원이 왔다. 야구단원이 어린이 복장을 하고 분교로 전학오는 것으로 설정을 했다. 지원과 아이들은 교실에 앉아 전학오는(?)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예인들이 한 사람씩 교실로 들어와 자기 소개를 하고 그 연예인을 마음에 들어하는 아이들이 손을 들어 짝꿍을 정하기로 했다. 나이가 제일 많은 탁재훈이 자기 소개를 하자 일부러 나이를 묻는 짖궂은 현철,

“몇살이에요?”

“아침 햇살입니다!”

탁재훈의 재치가 웃음바다를 만들었고 어설픈 춤으로 또 웃음을 유도했다. 아이들이 원하는 연예인만이 짝꿍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자기가 뽑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김창렬은 두 손을 모아 배꼽에 대고 귀여운 몸짓을 하며 동요‘노을’을 부르는데 고음에 무리를 하여 아이들을 웃겼고 막내인 재동이의 선택을 받아 짝꿍이 되었다.

분교 아이들 숫자 만큼인 일곱 명의 연예인은 짝꿍을 찾았고 남는 연예인들은 자기들끼리 앉아야 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김현철의 엉뚱한 질문,

“선생님, 시집갔어요?”

“아, 네. 여러분이 돌아갈 때 선생님이 쓴 시집 선물로 줄게요.”

늙은 학생들은 지원의 재치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르간으로 음악 수업을 하는데 돌림노래인 ‘릿자로 끝나는 말’을 배웠다. 평소에 TV에서만 보던 연예인들과 같이 앉아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너무나 즐거워했다. 어린이 대표로 수혁이가 나와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리리 릿자로 끝나는 말은……. 아이씨!”

가사를 까먹은 수혁이가 한 말 ‘아이씨!’가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전학생 대표로 나온 김현철,

“리리 릿자로 끝나는 말은 개나리 보따리 댑사리 소쿠리 응~~~나는 현처리!”

마지막 줄 가사를 몰라 임기응변으로 웃음을 주었다.

작가가 오지호에게 노래를 시키라고 미리 부탁을 해서 지원은 지호를 불렀다.

“지호야, 이번엔 네가 한번 불러 볼래?”

“예, 선생님.”

오지호는 씩씩하게 걸어나와 두 손을 잡아 배에 대고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너무 귀여운 표정으로 노래를 불러 박수를 많이 받았다.

다음은 팀 대결! 청팀 대표인 승준이와 민관이, 백팀 대표인 수혁이와 하늘이의 대결에선 목청이 큰 수혁이의 공로로 백팀이 승리했다.

수업이 끝나고 운동장에 나가서 편을 갈라 야구도 했다. 야구다운 야구를 연예인 형아들과 하는 분교 아이들의 얼굴엔 즐거움과 행복이 넘쳤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을, 양각분교 아이들도, 직원들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천하무적 야구단원과 피디, 작가, 스텝들에게 지원은 자신의 컬러 시집 ‘그대 있음에’를 선물했다.

분교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간곡한 요구로 지원은 3년간 양각분교에 근무했는데 학교 통폐합으로 2011년 2월 말일자로 양각분교가 문을 닫게 되고 재학생들은 인근의 학교로 가게 되었다. 아동 수가 줄어 양각초등학교에서 양각분교로 격하되고 결국 개교 62년만에 문을 닫게 된 학교, 마지막으로 2명을 졸업시키던 날, 전교생 7명의 학생, 학부모, 직원들이 식당에서 만났다. 며느리의 가출로 재훈, 재범 형제를 키워온 할머니는 지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 고마워요. 우리 재훈이, 재범이를 잘 가르쳐 주시고, 저도 못 챙겨주 는 손자들 생일도 챙겨주시고 제 옷까지 선물하시고……. 이 은혜를 어찌 갚 겠습니까? 너무 감사합니다.”

“은혜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전 할머니가 더 고마워요. 우리 재훈이, 재범이 바르게 키워주시고 뒷바라지 잘 해주셔서요. 다른 아이들 상 받을 때도 기뻤 지만 재훈이와 재범이가 글짓기 전국대회에서 큰 상 받을 땐 정말 기뻤어요. 제가 재훈이, 재범이 담임인 게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했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할머니, 지금은 손자들 키우시느라 고생하시지만 아이들이 잘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할머니께 효도할 거예요.”

“그럴까예?”

“그럼요.”

지원은 눈물어린 눈으로 재훈, 재범 할머니의 거친 두 손을 꼬옥 잡아드렸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고운 미소가 피어났다.

양각분교에서의 3년, 주위 사람들은, 일년이면 이동할 수 있는데 그 먼 길을 3년간이나 다닌 지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양각분교엔 길 위에서 보내야 하는 많은 시간으로는, 길 위에 쏟아 부은 엄청난 기름값으론 계산할 수 없는, 아주 커다란 행복이 있었다.

그렇게 양각분교에서 3년을 근무하고 학교가 문을 닫아서야 학부모와 아이들에게서 놓여난 지원은 개령초등학교로 갔다. 그러나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이들은 이미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개령초등학교에 가서 지원이 맡은 4학년 14명의 아이들, 농촌 아이들답게 착하고 순수한 아이들이었다. 비록 지원을 기다리던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그 아이들과 함께 하는 동안 지원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겠다고 다짐하고 남보다 두 시간 먼저 출근하여 퇴근할 때까지 최선을 다 했다.

온갖 봄꽃이 한창인 어느 봄날, 지원이 퇴직하면 살려고 미리 사 놓은 전원주택에 산아네 가족이 놀러왔다. 지원이 준비한 소박한 점심을 먹고 지원은 산아 손을 잡고 벚나무 울타리를 걸었다. 때 맞춰 불어오는 봄바람에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그 장면, 시간이 거기서 멈추어 주길 간절히 기도할 만큼,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에 지원의 두 볼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이 있었다니!’

그것이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하는 순간이어서 더욱 감동적이었다.

“선생님, 정말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너무 감동적이어서 막 시가 나오려고 해 요.”

“산아야, 선생님도 영화 같은 이 아름다운 장면, 정말 눈 감는 날까지 잊지 못할 거야.”

“저두요. 저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산아야.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시를 한 편 써 봐.”

“예, 선생님.”

산아는 거실에 벗어 놓은 가방을 가지고 나와 공책을 꺼내어 벚나무 그늘 아래 앉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산아가 시를 쓰는 동안 지원은 자신의 시집에 있는 봄의 시를 읽었다.

사월

바람에 날려 온

민들레 홀씨 하나

가슴 깊이 고이 간직했다

한적한 길섶에

여린 싹으로 틔우고

기나 긴 어둠의 터널 속에

고이 숨겨 두었던

작은 소망 하나

마른 나뭇가지에

연둣빛 작은 잎으로

곱게 피워내고

가슴 한 켠에

고이 묻어 두고

오랜 시간 번민하던

순결한 사랑 하나

아름드리 벚나무 가지에

연분홍 꽃잎으로 피워내고…….

허공으로 반향하는

고운 봄향기와 손잡고

우리들 가슴, 가슴에

하늘 빛 그리움으로

곱게 젖어드는 너,

사월이여!

봄비

이른 새벽부터

소리 없는 언어로

연둣빛 새싹 깨우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조용히 뿜어내는

따스한 입김으로

연분홍 꽃잎 열고

곱고 보드라운 손길로

겨울잠에 빠진

동물들 깨우고…….

톡!

톡!

톡!

내 하얀 가슴에 날아와

수없이 꽂히는

초록빛 화살들…….

물빛 고운 봄이

창가에 매달려

이리저리

방안을 기웃거리고 있다.

봄길

맑은 햇살 내려앉아

나직이 속삭이는

한적한 오솔길.

마른 나뭇가지마다

겨우내 준비한 사랑

연둣빛 새싹으로 피워내고

길섶에 피어난

하양, 노랑,

민들레꽃에 앉아

희망을 노래하는

흰나비 한 쌍.

봄바람에 실려 온

고향의 봄소식에

촉촉이 젖어드는

연둣빛 그리움.

진달래꽃 암술 뽑아

꽃씨름하던

그 산자락에도,

버들피리 만들어 불던

그 도랑가에도,

봄나물 캐던

그 밭둑에도,

지금쯤 새봄이 와 있을까?

오늘도 난

고운 봄길에 홀로 앉아

유년의 고향 속으로 달려간다.

라일락 피는 계절에

언젠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라일락 피는

봄날 오후에 떠나고 싶다.

라일락 고운 향기를 타고

승천하고 싶다.

이 세상에서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만

가슴에 품고

가볍게 날아오르고 싶다.

가슴 아팠던 기억

슬펐던 기억

힘들었던 기억

모두

땅 속에 묻어두고

좋은 것만 품고

홀연히 떠나고 싶다.

어느 봄날

연보랏빛 고운

라일락 피는 계절에

내 삶을 마감하고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고 싶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산아와 지원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연분홍 벚꽃잎이 연이어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다.

산아네 가족이 떠나고 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원이 남은 밥을 창고 앞에 갖다 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새들이 모여들어 밥알을 쪼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창고 앞에 고양이 네 마리가 새들을 쫓아내고 밥을 먹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넣지 않은 맨밥인데 걸신들린 것처럼 허겁지겁 먹는 고양이들, 그런데 그 고양이들은 하나같이 뼈만 남았을 정도로 야위어 앙상했다.

“세상에! 얼마나 굶었으면!”

‘도시의 길고양이들은 음식물쓰레기 봉투라도 뒤져서 배를 채우지만 시골엔 남아서 버리는 음식도 없으니 얼마나 굶주림에 고통 받았을까? 세상에서 가 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 배고픔이라던데…….’

지원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가엾은 고양이들! 얘들아, 이제부턴 내가 너희들 엄마할게. 엄마의 목숨이 붙 어 있는 한, 너희들 배고프지 않게, 아프지 않게, 엄마가 잘 돌봐줄게.’

그 때부터 지원은 전원주택이 있는 마을의 길고양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을 만나기 전, 겨울엔 집을 비워두지만 봄부턴 채소를 가꾸어야 하기 때문에 주중에 한번 그리로 퇴근하여 채소에 물주고 김매고, 다음 날 바로 학교로 출근하곤 했다. 물론 주말엔 무조건 갔다. 가족들과 함께…….

고양이들을 알기 전엔 대문 안에 차를 넣으면 일단 채소밭의 채소들이 물고파하지나 않나? 병들지나 않았나? 하고 채소밭으로 먼저 달려갔지만 고양이들을 돌보기 시작하곤 지하실에 있는 고양이 밥그릇부터 찾았다. 3일간 먹을 사료를 넉넉히 주고 가도 다른 짐승들도 와서 먹는지, 언제나 깨끗이 비어있는 밥 그릇, 어떤 땐 주린 배를 물로 채웠는지 물그릇이 말라 있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양의 사료와 간식을 주고 가곤 했다.

시간이 지나자 고양이들과 친해져서 차가 도착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고양이 네 마리,

“엄마 보고 싶었쪄? 그래서 이렇게 달려온 고야? 엄마 많이 기다렸쪄? 아이 구! 이쁜 것들!”

“엄마 진짜 많이 보고싶었다옹! 엄마도 우리들 보고싶었냐옹!”

“그럼. 엄만 너희들 보고 싶어 죽~~~을 뻔했어.”

트렁크에서 사료와 간식을 꺼내 밥그릇에 넣어주면 배불리 먹고 감사의 표시로 지원의 앞에서 발라당 눕거나 좌우로 구르며 재롱을 부리는 고양이들, 그리고 자고 나면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부터 달려와 어김없이 또 현관에 옆으로 나란히 서서 안쪽을 바라보며 지원을 기다리는 고양이들……. 그 예쁘고 귀여운 고양이들에게 아침엔 언제나 참치를 많이 넣어 밥을 비벼 주었다. 적어도 그 집에서 만큼은 지원 자신이 먹기 위해서보다는 고양이들에게 주기 위해서 밥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고양이들은 메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저녁엔 캔간식과 사료, 아침엔 참치 비빔밥, 주말의 낮엔 고체 간식이란 것을…….

지원이 밭으로 가면 밭으로 따라와 지원이 일하는 동안 밭가 느티나무 밑에 앉아서 놀고, 과수원으로 가면 과수원으로 따라오고, 집으로 들어가면 거실까지 따라 들어와 방마다 순회하고……. 언제나 강아지처럼 지원을 졸졸 따라다니며 지원의 다리에 머리와 목을 비비기도 하는 고양이들에 반해서 지원의 삶은 더욱 행복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고양이 숫자가 늘어갔고, 거기에 비례해 지원의 행복도 커져가고 있었다.

지원은 새들의 엄마이기도 했다. 정원에 커다란 나무가 많아서인지 꿩, 산비둘기 등 큰 새로부터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아주 작은 새들까지 놀러왔다. 시골집에서 잘 때면 언제나 부지런한 새들의 울음소리에 눈을 떴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또 멋진 모습으로 하늘로 치솟는 온갖 종류의 새들의 유희를 보며 즐거워했다. 겨울이면 먹을 것을 찾기 힘든 새들을 위해 주기적으로 가서 새모이를 주고, 사철 물그릇에 깨끗한 물을 담아주었다.

지원은 전 주인이 과수원에 쳐 놓은 그물을 집 사자마자 다 걷어버렸다. 지나가던 전 주인 아저씨가 잠시 들러 과수원을 보더니 말했다.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친 그물인데 걷었어요?”

“그물치기도 힘들었겠지만 걷는 건 더 힘들던데요. 나뭇가지 다칠까봐 한 사 람은 장대로 받치고, 다른 사람은 가위로 잘라야 하고, 또 가지에 걸려서 일 일이 풀기도 힘들고……. 그물 걷는데 하루종일 걸렸어요.”

“그러게 그물은 왜 걷어요? 그물 안 치면 새가 다 파먹어요. 감, 사과, 배, 뭐 하나 제대로 못 먹어요.”

“새들과 같이 먹으려고 일부러 걷은 거예요.”

“예?”

어이 없어하는 아저씨,

“글 쓰시는 분이라서 그런가?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요.”

“저 많은 과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 먹어요? 새들과 같이 먹고 이웃들과 나 누어 먹으면 되지요.”

“과일 안 팔 겁니까?”

“과일 장사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냥 새들과 나누어 먹을 거예요.”

“여기 오는 새들 횡재했네. 좋은 주인 만나서, 하하하……. 전엔 그물에 걸린 새들 잡아 구워먹기도 했는데…….”

“과일 좀 먹으러 왔다가 그물에 걸려 죽어요? 세상에…….”

하긴 그물 걷을 때 보니 커다란 새의 깃털이 그물에 끼어 있어 어떤 일이 있었을지 상상해 보고 안타까움에 도리질을 했었다.

‘제발 그건 아니길……. 아닐 거야. 그 새는 걸렸다 무사히 빠져나갔을 거야.’

그랬는데, 그게 사실이었다니! 충격으로 안타까워하는 지원의 면전에 대고 그가 말했다.

“새고기가 얼마나 맛있는데, 둘이 먹다, 아니 넷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몰라 요!”

사실, 사과, 배, 감 등, 제일 먼저 익은 것은 새들이 먼저 알고 파먹었다. 과일들의 맛이 들지 않을 땐 건드리지 않다가 사과나 배가 맛이 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파먹었다. 까치 부부가 마주 서서 사과를 파먹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고 정답던지! 지원은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기 집에 놀러오는 새들이 지원이 가꾼 과일들로 배부르고 즐거운 날들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경상북도교육청 홈페이지 ‘e - 아름다운 삶’ 집필위원인 지원은 ‘새들아, 우리 집에 놀러와 줘서 고마워!’란 제목으로 글을 올리기도 했었다.

“남들은 새들이 주는 피해로 아우성인데 선생님은 정반대네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순수하신지! 저의 마음까지 정화되는 느낌이에요.”

동료 교사의 말에 지원은 그냥 웃어주었다.

고양이 방울이의 엄마였고, 강아지 서유리의 엄마, 선산 길고양이들의 엄마, 별장 길고양이들의 엄마인 지원, 동물들과 교감하고 정을 나누는 삶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다른 사람들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스승의 날 아침, 지원은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출근길에 올랐다. 반 아이들에게 입혀줄 리바이스 티셔츠, 파티에 필요한 과자, 빵, 음료수를 트렁크에 싣고서……. 차창밖으로 익은 봄이 지나가고, 아카시아 고운 향기가 스쳐 지나가고, 스피커에선 그녀가 좋아하는 ‘G선상의 아리아’가 곱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참으로 행복한 출근길이었다.

지원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미리 보아둔 클로버꽃길에……. 바람에 일렁이는 하얀 클로버꽃, 후리지아 향기를 닮은 은은한 향기…….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열심히 꽃을 꺾었다. 싱그럽고 향기로운 꽃향기를 싣고 다시 학교를 향하여 달렸다. 음악은 어느 새 엘가의 ‘사랑의 인사’로 넘어가 있었다. 같은 곡인데도 다가오는 느낌이 다른 때와는 많이 달랐다.

아이들이 등교하자 지원은 아이들 하나, 하나에게 티셔츠를 입혀주고 손가락엔 꽃반지를, 손목엔 꽃시계를 채워주었다. 아이들의 얼굴엔 잔잔한 기쁨이 흐르고 있었다.

“선생님, 너무 예뻐요. 향기도 좋아요.”

“향기 나는 반지는 첨 봐요.”

“이건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주는 사랑의 선물이에요.”

“선생님, 오늘은 스승의 날인데, 우리들 날 아니고 선생님 날인데, 왜 저희에 게 선물을 주세요? 우리가 드려야 하는데…….”

“지난 번 어린이날에도 선물 주셨잖아요? 그런데 왜 또…….”

“선생님, 선물 못 드리고 받기만 해서 죄송해요.”

“선생님에겐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 선물이에요. 선생님을 가장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건 바로 여러분이니까요.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받는 것이 훨씬 더 많으니까 거슬러줘야지요. 화이트데이에 준 선물, 또 어린이날 선물도, 오 늘 주는 선물도, 또 생일 선물까지, 모두 다 합해도 여러분에게 거슬러주기엔 너무 부족해요. 그리고 선생님은 주는 것만 좋아해요. 받는 건 시로! 시로! 그 러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받는 게 왜 싫어요? 저는 받는 거 좋은데…….”

“선생님은 그래. 왜? 선생님은 괴짜니까!”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빵과 과자를 먹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그랬다. 지원에겐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거스름돈이 부족할 만큼…….

“선생님 생신은 언제예요?”

“그건 왜?”

“선생님은 우리에게 생일편지와 선물 주시니까 우리도 선생님 생신 때 선물 드려야 하잖아요?”

“맞아. 5학년 형아들은 자기 선생님 생신 때 파티도 하고 선물도 드렸다는 데…….”

“우리도 그런 거 하고 싶어요. 그러니 선생님 생신 언젠지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은 주는 것만 좋아해. 받는 건 싫어해. 그리고 선생님은 생일 없어.”

“에이!”

“진짜야. 선생님도 내 생일이 언젠지 몰라. 우리 가족도 몰라. 그건 며느리도 몰라.”

“예? 선생님, 며느리 있어요?”

“아직은 없어.”

“바보야, 그건 선생님의 며느리가 아니고 텔레비젼 선전에 나온 말이야.”

“맞아.”

지원은 반 아이들과 직원들의 생일은 반드시 챙겨주었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생일을 가르쳐준 적은 없었다. 지원은 나누어 줌으로써 행복했다. 언젠가 자식의 생일은 챙기지 않으면서 반 아이들에겐 지극정성이라고 흥분하는 동생에게 지원은 말했었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주는 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야. 받는 우리 아이들보 다 주는 내가 훨씬 더 행복하거든. 그러니 남는 장사 아냐?”

그랬다. 그녀 자신은 시골 장날, 길거리에서 파는 2000원짜리 티셔츠를 사 입으면서, 반 아이들에겐 좋은 옷을 사주고 싶어했고, 자신은 매일 보리밥에 된장국만 먹으면서 직원들과 이웃들을 ‘한우명가’에 초대하여 한우를 대접하고 일식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지인들은 그녀에게 ‘자신에겐 한없이 인색하고 타인에겐 끝없이 관대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지원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좋은 옷은 편하지 않을 것 같아 사 입지 않았고, 값비싼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타인에게 보여지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 뿐이었다.

지원이 퇴직 후에 살 집, 과수원과 텃밭이 딸린 대지 1164평, 건평 33평의 전원주택을 사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자기 반 아이들을 초대해 1박 2일 동안 먼 훗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런 일 하라고 이 집이 내 집이 된 거야.’

사실 그 집은 지원이 사고 싶어했는데 다른 사람이 하루 전에 계약해버려 몹시 안타까워했었다. 하지만 다음 해, 그 집이 다시 매물로 나와 바로 달려가 계약금을 많이 주어 집주인으로 하여금 번복하지 못하도록 하여 지원의 집이 된 것이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지원은, 계약을 파기한 쪽에서 계약금의 2배를 물어야 한다는 사실도 다른 사람이 힌트를 주어 알게 된 것이다. 앞에 계약한 사람이 잔금을 치를 능력이 못 되어 일년간의 시간을 더 달라 하여 그렇게 해주었으나 그 기간 동안에도 약속을 지키지 못해 결국 계약을 최소하게 되었다는 걸 계약하는 날 알았다.

‘내 인생에서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일도 생기네.’

좋기도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마치 그 사람에게 죄를 짓는 느낌? 그와 비슷한 거였다.

지원은 이른 봄, 상추, 아욱, 열무, 쑥갓 씨앗을 뿌리고 4월 중순엔 고추, 오이, 호박, 가지, 파, 토마토 모종을 심고 가꾸며 아이들을 초대할 날을 기다렸다. 아이들에게 그 계획을 이야기 하자 아이들은 환호했다.

“와! 대박!”

“선생님, 그 날이 빨리 왔음 좋겠어요.”

“시간아, 빨리빨리 달려가라!”

많은 아이들과 함께 1박 2일을 지내려니 준비할 것이 많았다. 거긴 살림하는 곳이 아니고 주말에만 가는 곳이기 때문에 이부자리도 없고 부엌 살림도 거의 없었다. 지원은 일단 이부자리를 많이 사다 놓고 가스렌지를 사고 냉장고도 샀다. 많은 인원의 음식을 해야 하므로 그릇도 큰 것으로 샀다.

행사 일이 가까워오자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재료를 사고 쌀도 넉넉히 갖다 놓았다. 아이들에게 줄 상품도 사고 담임 이름의 예쁜 상장도 만들어 놓고 마른 간식은 미리 준비했다. 혼자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하는 그 바쁨까지도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아! 이 행복한 기다림! 시간아, 전속력으로 달려가라!’

지원은 전원주택의 이름을 ‘별이 머무는 집’이라고 지었다. 도시에서 쫓겨난 별들이 모두 모여 밤마다 초롱초롱 빛나는 곳, 그래서 퇴직하고 그곳으로 이사 가게 되면 대문 입구에 세워진 타원형의 커다란 돌에 집의 이름을 그렇게 새길 작정이다.

지원은 일단 창의 인성 캠프 ‘별이 머무는 집으로 떠나는 1박 2일’이란 제목으로 안내문과 일정표를 만들어 교장, 교감 선생님에게 결재를 받았다. 학부모들은

“선생님, 정말 대단해요. 집에 손님 한 둘 오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어떻게 그 많은 아이들을 감당하려고 해요?”

하며 식사 준비라도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지원은 사양했다. 직원들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선생님, 저 같음 전원주택이 있다 해도 그런 일은 상상도 못할 것 같아요. 그게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데…….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대단하긴요. 그 일로 아마 우리 아이들보다 제가 더 행복할 걸요.”

“참내……. 선생님을 누가 말리겠어요?”

‘별이 머무는 집으로 떠나는 1박 2일 캠프’ 소문에 다른 학년 아이들이 부러워했다. 생각 같아선 전교생을 데리고 가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어 안타까웠다.

그날 아침, 지원은 간식으로 줄 떡과 빵, 음료수, 그리고 음식 만들 재료, 밑반찬과 국 끓일 준비를 해서 전원주택에 가져다 놓고 출근했다. 아이들에게 준비시킨 것은 세면도구와 베개뿐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부장과 6학년 선생님, 그리고 지원의 차, 이렇게 3대에 나누어 태우고 출발! 산 고개를 세 개나 넘어가는 길도 아름다웠다.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초록빛 풍경! 아이들을 태우고 가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지원은 미리 준비한 음악, 아름다운 동요들을 틀어주었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아이들은 동요를 따라 부르며 즐거워했다.

드디어 집에 도착! 일단 짐을 거실에 넣어 놓고 아이들과 같이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정원, 잔디밭, 과수원, 채소밭…….

“우와! 우리 선생님 집 되게 넓다. 큰 나무도 많고 정말 좋다.”

“영화에 나오는 별장 같아!”

“맞아!”

“지금부터 우린 1박 2일간 여기서 우리의 추억을 만드는 거야. 먼 훗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을 말이야.”

“야호!”

“와! 신난다!”

지원은 아이들과 같이 정원 잔디밭에서 게임을 했다. 원을 만들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돌다가 지원이 호루라기를 불어 손가락을 펴면 그 숫자만큼 짝을 만드는 짝짓기도 하고, 두 편으로 나누어 닭싸움과 염소 싸움도 하고, 편을 갈라 줄넘기 릴레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수건돌리기도 했다. 아이들이 무척 즐거워했다. 초록빛 잔디밭에서의 아이들의 신나고 즐거워하는 몸짓, 지원은 그곳이 자신의 집이라서 행복의 부피가 훨씬 더 컸다.

게임이 끝나고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쉰 다음, 예정된 백일장을 열기로 했다.

“자, 이제부턴 백일장을 하겠어요. 백일장 이름은 무지개 백일장!”

“와! 이름도 예쁘고 멋있다.”

“오늘은 선생님이 제목을 따로 주지 않겠어요.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 귀 에 들리는 것, 그리고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소재로 해서 멋진 시를 써 보세요.”

“예! 선생님!”

아이들은 각자 흩어져서 시의 소재를 찾았다. 잔디밭에 앉아서, 채소밭가에 앉아서, 또 과수원의 배나무, 사과나무, 감나무 그늘에 앉아서 아이들은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썼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원의 입가엔 연신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심사는 지원과 두 교사가 했고 밤에 시낭송회가 끝난 다음 시상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저녁을 먹고 지원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동요를 불렀다. 평소에 교실에서 부르던 급가, 방울꽃, 무지개, 모래성, 섬집 아기 등을 불렀다. 피아노를 치는 지원의 둘레에 서서 박자에 맞추어 부드럽게 몸을 움직이는 아이들, 교실에서와는 또 다른 기분으로, 또 다른 느낌으로, 악상을 살려서 열심히, 예쁘게 불렀다.

소리없이 밤은 깊어가고, 하늘엔 별들이 가득했다. 도시에서 쫓겨난 별들이 모두 거기 모여 있었다. ‘별이 머무는 집’에서 은은한 배경음악 속에 시낭송회가 열렸다. 아이들은 낮에 쓴 자신의 시를, 감정을 넣어서 낭송했다. 아름다운 음악과 시가 함께 어우러져 별밤을 곱게 곱게 수놓고 있었다.

시 낭송회가 끝나고 심사 결과에 따라 담임 이름으로 표창을 했다. 장원은 민석이였다. 산아, 시은이가 차상, 정화, 민주, 지수가 차하였다. 나머진 참방이었다. 모두 열심히 썼는데 수상에서 제외된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상처가 추억까지를 손상시킬까 걱정된 지원은 그렇게 전원에게 상을 주었다. 예쁜 그림을 넣은 아주 특별한 담임 이름의 상장과 상품에 아이들이 환호했다.

“와! 이렇게 멋있고 예쁜 상장은 처음 보았어.”

“나도! 선생님, 고마워요!”

“그렇게 봐주니 내가 더 고마워.”

간식을 먹고 난 다음에 조별로 장기자랑을 했다. 열심히 연습해서인지 모두 잘했다. 2조의 연극 ‘똥데렐라’는 배를 움켜쥐고 웃어야 할 만큼 재미있었고 3조의 ‘개령시대’는 여자 아이들의 귀여운 춤으로 인기를 얻었다. 자신들이 극본을 쓰고 음악을 고르고 안무를 꾸민, 온전히 아이들만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더 즐겁고 의미있는 장기자랑이었다. 장기자랑도 심사하여 상을 주었다.

여자 아이들은 피아노가 있는 방에, 남자 아이들은 거실에 재우기로 하고 지원은 요와 이불을 펴주었다. 6학년 선생님은 먼저 가고, 주방을 맡았던 산아 아빠인 정기효 교무부장에게 수고했다며 음식을 싸주려 하자, 다음 날 아침 식사까지 도와주겠다며 아이들과 함께 자겠다는 것이었다. 지원이 남자 아이들의 자리 맨 끝에 교무부장의 잠자리를 만들어 주자 해미가 말했다.

“선생님은 선생님 방에서 혼자 주무실 거잖아요?”

“응. 왜? 해미가 선생님하고 같이 자고 싶어? 그럼 그러지 뭐.”

“그게 아니구요. 교무 선생님이 남자들과 같이 주무시는 게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요. 선생님 방 침대 넓은데 교무 선생님과 같이 주무시면 안 돼 요?”

“맞아!”

아이들이 거들었다.

“뭐? 말도 안 돼. 호호호…….”

지원도, 얼굴이 빨개진 교무부장도, 웃음을 참기 힘들어했지만 아이들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

“선생님, 왜 웃어요? 해미 말이 맞잖아요? 교무 선생님, 넘넘 불쌍해요.”

“맞아요. 같이 자요, 예?”

“같이 자요! 같이 자요! 같이 자요!”

아이들의 힘찬 합창이 이어졌다.

“우찌 그런 힘든 주문을…….”

“힘든 주문? 그게 왜 힘들지?”

“같이 주무시는 게 왜 힘들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들, 먼 훗날, 아이들은 알 것이다. 자기들의 주문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리한 요구였는지를, 그리고 배꼽을 잡고 웃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고 텃밭에 나가 채소 수확 체험을 했다. 고추, 가지, 오이, 방울토마토 등, 자기가 딴 것을 자기가 가져가도록 커다란 비닐봉지를 나누어 주었다. 지원이 새벽에 일어나 미리 수확했던 상추도 나누어 주었다. 자기 집에서 잠을 자고 온 6학년 김충구 선생님이 도착하자 모두 차에 올랐다. 아이들을 태우고 돌아가는 길도 지원은 행복했다.

지원은 1박 2일 동안 체험한 것을 동영상으로 찍고, 그녀의 피아노 반주에 아이들이 부른 동요를 배경 음악으로 하여 동영상을 만든 CD를 나누어주었다.

학년 말, 일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물었을 때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선생님 집에서 함께 한 ‘1박 2일 캠프’라고 했다. 그래서 지원은 ‘별이 머무는 집으로 떠나는 1박 2일 캠프’ 행사를 해마다 하고 있으며, 주먹밥 만들기 등 식사 준비도 아이들과 함께 하여 더 즐거운 행사가 되도록 하고,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바꾸어 색다른 체험을 하게 하고 있다.

지원은 퇴직 후에도 초등학교 아이들을 담임과 함께 집으로 초대하여 1박 2일 동안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했다. 학교에서 1박 2일간의 경비 일부를 지원하려 했으나 사양하고 모두 지원이 부담했다. 계산이 생리에 맞지 않는 그녀로선 당연한 일이었을 뿐더러 자기 반 아이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일에 그 누구의 어떤 도움도 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뒤, 지원은 단층집 옆에 57평짜리 2층집을 지었는데 2층 서재는 전망대와 같았다. 남쪽 창을 내다보면 보이는 풍경 자체가 한폭의 산수화였다. 그래서 지인들이 오면 2층으로 안내해서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정원에 정자를 지어 친구나 지인들이 오면 그녀가 직접 재배한 무농약 채소로 시골 밥상을 대접하곤 했다.

지원은 1981년 가을에 복직하고부터 학교에 모든 걸 걸었으나 거기에 대한 어떤 댓가나 욕심을 부린 적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2012년까진 스승의 날, 그 흔한 교육장상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 바로, 여동생의 푸념에 단골 메뉴였던…….

그런데 지원은 주위 사람들의 강권으로 2012년 가을, 조선일보와 교육부가 공동 주최하는 ‘올해의 스승상’ 공모전에 서류를 냈다. 초등학교 교사는 전국에서 3명 정도 뽑기 때문에 거의 희망이 없는 도전이었다. 더구나 서류심사, 현장 실사, 1차 심사, 본심, 검증의 5단계를 모두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수상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을 뿐만 아니라 그 상은 교육부에서 현장연구 1등급을 주기 때문에 일반 교사보다는 승진점수가 필요한 사람들이 목숨 걸고 도전하므로 승부욕도 없고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살아온 지원이 도전하기엔 무리인 행사였다.

지원은 오랜 세월 동안 교단생활을 했으나 상이라든가 근무성적에 단 한 번도 신경을 써 본적이 없었다. 때론 그녀의 공적을 도용하여 큰상을 받으려다 다른 사람에게 발각된 교사도 있었고, 그녀가 받아야 할 지도상을 다른 사람이 받아, 근무성적도 나쁜데다 상도 하나 없어 이동 때 통근도 힘든 먼 곳으로 쫓겨 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원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지원이 30대 중반에 교장 선생님 두 분이 적극 도와주겠다며 승진을 권유했지만 지원은 정중히 사양했었다. 그녀가 교단으로 되돌아 온 이유는 오직 아이들이 좋아서,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승진 점수가 필요하지 않으니 상이든 근평이든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추천해 주는 상은 거의 받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근평이나 상은 필요한 사람들이 윗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리기 때문에 주로 그런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다른 직장은 모르지만 학교에선 일하는 것과 상이나 근평은 별개였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교직의 그런 생리를 알기에 포기하고 지낸다. 지원은 포기가 아니라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 때까지 지원이 받은 건, 어쩌다 받게 되는 지도상이거나 본인이 글을 써서 받은 상이 전부였다.

주위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참여한 희망이 없는 도전, 더구나 제출해야 하는 몇 가지 서류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연구실천보고서 (A4 용지 20매)를 본 교감 선생님이

“이거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쓴 연구보고서 좀 읽어보고 다시 쓰세요.”

하는 것이었다. 사실 지원은 승진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승진 점수에 필수인 연구보고서를 쓸 일이 없었다. 처음으로 써 본 연구보고서, 보고서라기보다는 수기에 가까웠던 것이다.

“교감 선생님, 단 1%의 희망도 없는 도전이에요. 어차피 떨어질 건데요 뭐. 다시 쓸 시간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냥 보내세요.”

그래서 서류를 보낸 후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육부의 김윤기 연구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류심사를 통과하여 이틀 후에 학교로 실사를 나온다는 것이었다.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어서 지원은 얼떨떨했다.

“연구사님, 뭘 준비해야 되는 거죠?”

“상장 원본 정도 준비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이 참고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준비하라고 해서 지원은 퇴직하면 읽어 보려고 출력해 놓았던 아이들에게 쓴 생일편지, 글쓰기를 가르친 전신마비 장애인 청년과 주고 받은 메일, 지원이 받은 상장의 원본, 그리고 아이들이 받은 상장 사본을 준비했다. 다른 서류는 모두 증빙자료를 첨부하여 송부했기 때문에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현장실사가 있던 날, 조선일보 송한준 대리와 교육부의 김윤기 연구사가 서류에 기재된 공적을 확인하고 준비한 자료들을 본 다음 직원들과 지원의 반 아이들, 또 전 해에 지원이 가르친 아이들에게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으로 지원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전, 연구보고서를 잘못 써서 서류심사에 통과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지원의 그 말에 송한준 대리가 말했다.

“선생님,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람은 연구보고서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참스승 입니다.”

그 말 끝에 김윤기 연구사가 말했다.

“저도 전에 학교에 있었는데 선생님 앞에선 저의 삶이 부끄럽습니다.”

그 분들의 말에 지원은 몹시 부끄러웠다. 자신의 삶이 그런 찬사를 받을 만큼 대단한 삶도 아니었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살아왔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떠나면서 김윤기 연구사가 지원의 학교로 취재를 오겠다고 했다. 교육부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꿈내래’ 1월호에 실을 예정이라며……. 하지만 아직 1차 심사, 사회 저명인사가 참여하는 본심, 검증이 남아 있어 지원은 거의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었다. 서류심사를 통과하여 실사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2012년 11월 30일, 조선일보의 송한준 대리에게서 ‘올해의 스승상’에 뽑혔다는 메일이 왔다. 상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상이라서 지원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곧 이어 조선일보에서 취재를 왔다. 그리고 이틀 후, 교육부에서도 취재를 왔다. 수상자 13명 중, 지원네 학교에만 온 거라고 했다.

2012년 12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올해의 스승상’ 수상자 발표가 실렸다. 유, 초, 중, 고 수상자 13명 중에서 사진과 함께 지원의 기사가 가장 크게 났다. 사람들은 그 때서야 그녀가 복직한 첫해부터 30여년간 불우한 졸업생에게 익명으로 장학금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들 부부의 이혼으로 손자, 손녀를 키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돌보고, 주말이면 컨테이너박스에 홀로 사는 89세 할아버지 (김문환)를 찾아가 김치와 밑반찬들을 드리며 손수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크리스마스 땐 산타가 되어 지하 단칸 셋방에서 치매 남편을 돌보는 할머니에게 금일봉을 전달하고, 학교에서 일하는 세콤 아줌마, 청소 도우미를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시골 동네 어르신들을 초대하여 한우로 식사 대접을 하며, 다른 학교에 다니는 불우한 아이들까지 찾아다니며 산타 노릇을 하고 생일엔 생일 선물과 용돈을 주고 격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한우를 대접하고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을 나누어 주었으며, 직원이 상을 당하면 첫출근하는 날을 알아두었다가 꽃다발과 편지로 위로하고, 승진하는 직원과 이동하는 직원, 그리고 퇴직하는 직원들에게 꽃바구니로 축하를 해준다는 사실도…….

그 때까지 지원이 해 온 그런 일들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아니, 가족들도 알지 못한 일이었다.

“엄마가 학교에 일찍 가는 건 알았지만 그런 일한 건 몰랐어.”

“그럼, 엄마가 하고 싶은 일들을 일일이 너희들에게 결재 받고 해야 하니?”

“그건 아니지만……. 이번 상이 아니었으면 엄마가 한 일을 영원히 알지 못 했을 거잖아?”

“별 것도 아닌데 뭐. 왜? 숨겨서 억울해?”

“그건 아니고, 엄마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엄마 다시 봤어.”

“뭐, 대단씩이나.”

2012년 12월 17일 오후 2시에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올해의 스승상’ 시상식이 있다고 했다. 지원에겐 교단생활 중 최고의 날이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옆에 앉은 여동생에게 지원이 말했다.

“누가 알아준다고 꼭두새벽부터 학교에 달려가느냐고 핀잔하더니 마지막에 와서 이렇게 알아주는 사람도 있네. 그러니 앞으론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그런 말 하지 마.”

“이 상도 주위의 권유가 아니었음 서류조차 안 냈을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바보’라는 이름표는 떼어줄 수가 없어. 그동안 아이들에게, 직원들에게, 이웃 들에게 바친 돈이 도대체 얼마야? 또 기름값은? 집 서너 채 사고도 남았겠 다.”

“나, 돈 모르는 거, 계산할 줄 모르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오늘만 좀 봐주 라. 응?”

“알았어.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한번 봐 준다.”

“이 상이 아니라도 난 그동안 충분한 보상을 받았어.”

“보상? 무슨 보상? 올해까진 스승의 날 교육장상도 한번 못 받은 거 내가 다 아는데 무슨 보상을 받았단 말이야?”

“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참 행복했어. 우리 아이들 가르치면서 세상 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찾아냈고, 우리 아이들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어. 나의 행복을 누군가의 시샘으로 빼앗기는 건 아닐까? 불안해 할 만큼…….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준 것보다 우리 아이들에게서 받은 것이 훨씬 더 많아. 난 교사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배 운 것도 많아. 세상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각, 순수, 정직……. 그렇게 충분 히 보상을 받았는데 뭘 더 바래?”

“그 딴 게 보상이야? 학교에 미쳐있는 언니 때문에 언니 자신은 행복했는지 모르지만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는데? 또 시어머니는?”

“퇴직하면 며느리 노릇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나신 시모님께는 죄송할 뿐이지. 집안 살림 잘하는 며느리 얻었더라면 편하 게 사셨을 텐데……. 그래서 장례식 날, 하늘나라로 떠나신 시어머니께 편지 썼잖니? 다음 세상에서 며느리와 시어머니로 다시 만나자고, 그 땐 며느리 노릇 잘 하겠다고, 울면서 쓴 그 편지 너도 봤잖아? 그 때 네가 ‘만나긴 뭘 만나. 됐다고 그래!’라고 해 놓곤…….”

“그건 그렇고 언니가 내팽개친 자식들은?”

“팽개친 건 사실이지만 큰 딸 은행원이고, 작은 딸 공기업에 다니고, 쌍둥이 아들 하나 유학가고 막내만 취직하면 모두 제 구실할 텐데 무슨 욕심을 더 부려?”

“머리 좋고 재주 많은 아이들인데, 좋은 엄마 만났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됐겠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건, ‘무엇이 되느냐?’ 가 아니야. ‘어떻게 사느냐?’ 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난 제자는 물론 내 자식들이 자신과 가족만을 위 해서 사는 삶보다는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 삶을 살기 바래.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보석처럼 빛나는 삶이니까.”

“또 그 소리,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그냥 조용히 들어준다. 더 이상 토는 안 달게.”

지원은 조선일보 사장으로부터 금빛의 상패와 상금 (1000만원)을 받고, 교육부장관상도 받았다. 지원의 가슴은 잔잔한 감동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상장과 상패를 품에 안고 앉아 있는 지원의 눈앞엔 아이들과 함께 한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의 영상이 차례로 지나가고 있었다. 사실 지원을 그 자리에 세운 것 바로 아이들이었다. 그녀의 품 안에 아이들이 있었기에 마음껏 사랑했고 사랑했기에 행복했다. 지원은 감사했다. 자신의 교단 인생 최고의 날로 만들어준 분들과 축하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시상식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막내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 ‘TV 조선 뉴스 판’에 엄마 상 받는 거 나왔어. 수상자 중에서 엄마만 나왔어. 그 때 진짜 엄마가 자랑스러웠어. 엄마가 내 생일도 까먹고 엄마 반 애들만 챙겨줄 땐 원망스러웠지만 오늘 보니까 자랑스럽더라. 그래서 친구들 에게 전화해서 자랑했어. 우리 엄마 큰 상 받았다고, TV에도 나왔다고…….”

“내가 우리 아들에게 자랑스런 엄마일 때도 다 있네. 며느리로서도, 아내로서 도, 엄마로서도, 올 빵점인 줄 알았는데…….”

지원은 상금으로 장학금도 주고, 불우이웃돕기도 하고, 학생, 동료들, 이웃들에게 식사 대접도 했다.

12월 26일 오후, 지원이 텅 빈 교실에서 친구와 중요한 통화를 하고 있을 때 교실의 키폰이 울렸다.

“전화벨 소리 나네. 이만 끊어야겠다.”

“아냐, 괜찮아. 급한 거 아닐 거야. 어서 그 다음 이야기해봐.”

통화 중 또 벨이 울리다 끊기는가 싶더니 교무행정사가 눈이 휘둥그레 가지고 교실로 뛰어 올라왔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는 지원을 향하여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선생님, 교육감님 오셔서 아까부터 기다리시는데 뭐하세요? 지금 교장실에 계세요. 빨리 내려가 보세요.”

“알았어요. 근데 오늘 교장 선생님 출장 아닌가?”

“교장 선생님도 급히 연락 받고 지금 오시는 중일 거예요.”

지원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교장 선생님도 급히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원이 교장 선생님과 같이 교장실로 들어가니 사진으로만 보아 온 이영우 교육감과 남종호 김천교육장, 그리고 도교육청에서 온 둣한 백발의 남자 한분이 있었다. 지원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교육감님, 예고도 없이 갑자기 웬일이세요?”

“우리 경북교육을 크게 빛내주신 서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왔어요.”

“지난 번에 보내주신 축전만 해도 감사한데 보잘 것 없는 무명교사인 저를 이렇게 직접 찾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명교사라니요? 서선생님은 우리 경북의 보배 선생님인데요.”

사실 조선일보에 기사가 나자마자 이영우 교육감은 지원에게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 경북 교육을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란 축전을 보냈었다.

지원은 수상 이야기보다는 반 아이들과 그녀의 전원주택에서의 즐거웠던 1박 2일의 추억을 들려주고, 제자 산아와 손잡고 벚나무 울타리를 걸을 때 불어오는 바람에 연분홍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던 그 순간을 실감나게 이야기했다. 어린 아이처럼 얼굴엔 한가득 천진한 미소를 띤 채…….

“그 장면, 상상이 갑니다. 저도 전국 교육감 회의를 벚꽃이 한창일 때 경주 보문단지에서 열었습니다. 모두 벚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즐거워하더군요.”

교육감을 수행한 사람들은 처음엔 전혀 예상밖의 화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들처럼 두 사람의 자연스런 표정과 편한 대화에 공감하며 같이 즐기는 모습이었다. 교육감과 수행원, 그리고 운전기사에게까지 지원은 자신의 컬러 시집을 선물하며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올해의 스승상’ 수상으로 교육부에서 발간한 꿈나래 1월호엔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바보 선생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고, 월간 교육지 새교육 5월호엔 ‘학생바라기 선생님’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났으며 다른 여러 언론매체에서도 지원과 인터뷰를 한 내용을 기사로 냈다. 그리고 KBS 1라디오 ‘교육을 말합시다’ 생방송에 15분간 출연하여 문예지도, 독서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원은 2005년부터 경상북도교육청 홈페이지 집필위원이다. 그녀가 올린 교단생활에서의 소박한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켜 매회 조회수가 제일 높았다. 다음은 어린이날 기념, 지원이 경북교육청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너의 꿈을 위한 나의 노래

얘들아,

너희들 그거 아니?

너희들의 몸의 성장,

마음의 성장이

선생님에겐 가장 큰 기쁨인 거?

얘들아,

너희들 그거 아니?

너희들의 몸의 상처,

마음의 상처가

선생님에겐 가장 큰 아픔인 거?

얘들아,

너희들 그거 아니?

너희들의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던 날

선생님이 뒤돌아서서 흘리던

벅찬 감격의 눈물을?

얘들아,

너희들 그거 아니?

잘못을 저지른

너희들을 꾸짖은 날이면

긴 밤을 지새워

가슴을 치고 또 치며

선생님의 무능을 꾸짖은 거?

얘들아,

너희들 그거 아니?

너희들의 꿈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

선생님에겐 가장 큰 보람인 거?

얘들아,

밤마다 선생님이 부르는 노래가

뭔 줄 아니?

그건

너희들의 아름다운 꿈을

활짝 꽃피우게 하기 위한,

세상에서 가장 고운

사랑의 노래란다.

얘들아,

이른 새벽마다

선생님이 드리는 기도가

뭔 줄 아니?

그건

오늘 하루도 우리 아이들의

꿈을 향한 고운 날갯짓에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힘을 실어주는,

교사가 되게 해 달라는 거란다.

창밖에 세월 가는 것도 잊은 채

너희들 안에서

함께 웃고 함께 울면 산

기나 긴 세월,

지금은

눈가에, 입가에, 잔주름이 일지만

그 주름들은 너희들과 함께 만든

고귀한 문신이기에

거울 속의 선생님의 얼굴엔

언제나 밝은 미소가 피어난단다.

얘들아,

너희들 그거 아니?

선생님이 이 세상에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의,

선생님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의 전부가

바로 너희들인 거?

오늘도 선생님은

너희들이 자신의 찬란한 꿈을

활짝 꽃피우고

그 자리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기도하며

묵묵히 이 길을 간다.

2013년5월 15일, 제32회 스승의 날, 포항에 있는 경북교육문화회관에선 스승의 날 기념 ‘어울림 한마당’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학생들과 교육감 등,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교사들이 참가한 그 행사에서 경상북도교육청 이경희 장학관의 간절한 부탁으로 지원은 자신이 쓴 스승의 날 기념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낭송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오늘 아침의 태양이

유난히 밝게 빛나는 것은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고운 꽃으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의 바람이

더욱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거룩한 당신의 삶이

온 누리에 향기롭게 반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다 접어두고

외지고 구석진 곳에서

창밖에 세월 가는 것도 잊은 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온

외길 인생.

때로는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꼿꼿이 서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오직

제자들의 참된 삶을 위해

모든 걸 바치셨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긴 밤을 하얗게 밝히고

심신이 부족한 제자

알차게 키우느라

온 몸이 다 부서져도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던

당신.

제자들을 통한 기쁨만이

진정한 기쁨이었던 당신,

자신의 아픔은 뒤로 감추고

제자들의 고통에

더 크게 아파하던

당신.

당신의 삶에서

당신 자신은 간 곳이 없고

가슴엔 언제나 제자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이유가,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할 이유의 전부가,

오직 제자들이었던

당신.

당신의 그 깊은 사랑으로,

당신의 그 뜨거운 정열로,

당신과 함께 하는

제자들의

힘차고 아름다운 날갯짓에

곱게 미소 짓던

당신.

당신이 바친 사랑만큼

당신이 쏟은 정열만큼의

그 부피가

새싹들의 미래를

좌우한다 확신하고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혼신을 다 바치시는

당신.

비록 가진 건 없어도

제자들의 알찬 자람으로

마음만은 부자인

당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삶인지

몸소 보여 주시는

당신…….

먼 훗날

제자들의 고운 꿈이

찬란히 꽃피는 그 날,

비로소

당신의 주름진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그건 바로 당신이 가진

‘선생님’이란 이름입니다.

지원의 시에 나오는 선생님, 지원은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선생님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마지막 날까지도 그건 희망사항일 뿐, 결코 그런 선생님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원은 오랜 교단생활 동안 제자들에게 사람의 삶에 있어선 ‘무엇이 되느냐?’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가르쳐왔다. 사실 우리 사회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올라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지원이 존경하는 사람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돈을 많이 가진 사람도 아니고, 빛나는 명예를 가진 사람도 아니다. 가난으로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김밥 장사를 하여 평생 모은 돈을 대학에 기부한 김밥 할머니, 철길에 뛰어들어 어린 아이를 구하고 두 다리를 잘렸어도 이웃이 권하는 편한 자리를 사양하고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간 아름다운 철도원, 또한 홀로 사는 산골 노인들의 온갖 심부름을 다 해주고 틈틈이 농사일도 거들어 주는 아름다운 우체부, 세상에서 가장 큰 설움인 배고픔을 겪고 있는 가엾은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는 민들레 국수집 서영남 님……. 지원은 그런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의사, 판검사로 길러낸 부모들이 훌륭한 부모가 아니라, 훌륭한 김밥 할머니로, 아름다운 철도원으로, 아름다운 우체부로, 나눔의 천사로 키워낸 부모님들이 진정으로 훌륭하신 부모님이라고 지원은 생각한다.

학년 말, 지원이 근무하던 개령초등학교엔 교환 근무가 끝나서 돌아오는 교사와 군 복무가 끝나 전역한 교사가 돌아오기 때문에 자리 둘을 비워야만 했다. 내규에 의해 전입 순서대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녀가 여러 번 근무한 곡송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고 근처의 다른 학교들도 아동수가 줄어 학급이 줄었기 때문에 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지원은 김천동신초등학교로 가게 되었다.

지원은 김천동신초등학교에서 3학년 4반 30명의 아이들을 만났다. 첫만남에서 지원은 자신의 교단생활을 엮은 수필집과 컬러 시집을 선물로 주고 ‘꽃처럼 아름답게, 꽃처럼 향기롭게’ 살자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학교에서도 늘 그랬듯이 첫만남에서 하던 말,

“말하기 전에 ‘내가 하려는 말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보고 말하고, 행동하기 전에 ‘내가 하려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보고 행동하라.”

고 가르쳤다.

교단생활 대부분을 그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시골 학교만 찾아다닌 지원, 막상 아동수가 1000명이 넘는 도시학교로 가보니 시골 아이들과 도시 아이들은 참 많이 달랐다. 쉬는 시간이면 복도는 무법천지였다. 전력달리기를 하는 아이, 마주 달리다 서로 맞부딪쳐 넘어져 우는 아이, 친구와 엎치락뒤치락 엉켜서 싸우는 아이, 이유도 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이……. 화장실에선 폭행도 한다 했다. 그래서 학교에선 쉬는 시간마다 교사들이 당번을 정하여 복도와 화장실을 순시하며 아이들을 감독하고 지도해야 했다. 하지만 교사들의 시선을 피해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시골 아이들은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도시 아이들은 하지 말라는 일도 거리낌 없이 했다. 그게 바로 시골 아이들과 도시 아이들의 차이 점이었다.

도시 아이들은 힘든 일은 하기 싫어했고, 인내심과 끈기가 부족했으며, 상대를 배려, 양보하는 마음도 부족하고 이기적이었다. 그래서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지원은 밤마다 잠을 설치며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자라게 해선 안 되는데, 내가 과연 저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다른 선생님들이 하지 못한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겠지만 지원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가기로 했다.

지원이 지금까지 일기쓰기 지도로 생활지도와 문장력 기르기,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것처럼 김천동신초등학교 아이들에게도 그것을 도입하려고 일기를 매일 쓰도록 했다.

“선생님, 귀찮은 일기를 어떻게 매일 써요? 일주일에 한번만 쓰면 안 돼요?”

“선생님, 작년엔 일기를 일주일에 두 번 쓰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요.”

“선생님, 일기는 쓰고 싶은 사람만 쓰면 안 돼요?”

“맞아. 일기쓰기가 제일 싫은데…….”

어떻게든 짐을 덜어보려는 아이들…….

“일기는 자기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먼 훗날, 여러 분이 쓴 일기는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이 될 겁니다.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아주 귀한 재산이……. 일기쓰기는 힘들지만 일기를 쓰면 자신의 생 활을 반성하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고, 일기를 잘 쓰면 문장력이 늘어 글 쓰기도 잘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좋은 점이 많은데 일기쓰기를 게을리하면 안 되겠죠? 나쁜 것은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좋은 것은 쉽게 얻어지지 않아요. 일기쓰는 일은 선생님을 위한 일이 아니고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겁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쓰기 바랍니다.”

지원의 진지한 가르침으로 아이들은 열심히 일기를 썼다. 그런데 자기가 한 일만 늘어놓는 아이들이 많았다.

“일기에 한 일만 쓰면 맛있는 일기가 될 수 없어요. 엄마가 나물을 무치실 때 마늘, 참기름, 깨소금 등 양념을 넣고 무쳐서 맛을 내듯이 일기도 한 일에다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넣어야 맛있는 일기가 될 수 있어요. 그래야지 문장력 도 늘고……. 그리고 그 날 한 일을 모두 늘어놓지 말고 제목이 있는 일기를 쓰세요. 그 날 있었던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자세히 쓰세요. 특별 한 일이 없는 날엔 다른 사람의 좋은 글을 옮겨 쓰는 것도 괜찮아요. 남의 좋은 글을 읽는 것도 글쓰기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니까요. 그리고 앞으로 선 생님이 시를 가르쳐 줄 텐데, 일기에 시를 써도 되구요.”

일기쓰기로 아이들의 글솜씨가 점점 늘어갔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아 선생님으로부터 위로 받고 싶어하기도 했다. 전담 시간이면 지원은 일기를 읽고 일일이 댓글을 달아주었다. 아이들이 쓴 일기보다 댓글의 분량이 더 많은 경우도 자주 있었다. 전담이 없는 날엔 쉬는 시간에 댓글을 달아야 했다. 30명의 일기에 일일이 댓글을 달자니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수업 전과 창체 시간 등, 틈틈이 글쓰기 지도를 하니 자신의 시를 일기에 쓰기도 했다. 일기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이 예쁘게 채색되어 가는 걸 보는 지원은 마냥 행복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적이 누군지 아세요? 그건 바로 자기 자신 입니다.”

“엥? 진짜요?”

“말도 안돼. 자기가 어떻게 적이 돼요? 다른 사람이 적이지.”

“다른 사람을 이기긴 쉽지만 자기 자신을 이기긴 정말 어렵답니다.”

“예? 선생님의 말씀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놀고 싶고 게을러지려는 마음,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려는 마음,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싶은 마음……. 아무리 힘들어도 그 모든 거 다 이겨내고 열심히 공 부하고 바르게 산다면 그 사람은 성공할 수 있어요.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엔 선과 악이 같이 살고 있어요.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구요. 선을 이기긴 쉽지 만 악을 이기긴 힘들어요. 악은 아주 달콤한 무기로 유혹하니까요. 악을 이기 면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악에 지면 그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 되지 못하는 거죠. 이제부터라도 여러분의 가슴에 악을 이길 수 있는 브레이 크를 만들어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싶을 때마다 ‘안 돼!’ 하면서 힘차게 밟 으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겁니다.”

아이들은 지원의 말을 새겨 듣고 지키려고 노력했다.

지원은 만남의 첫날, 아이들에게 만들어 준 커다란 거북이에 붙이라며 예쁜 스티커를 준비하여 착한 일을 하는 친구,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친구들에게 주었다. 학기말에 스티커 갯수대로 상을 준다는 약속과 함께……. 스티커를 하나라도 더 많이 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맛있는 일기를 쓰고, 착한 일을 찾아서 하고, 친구들을 도와주고……. 스티커 한 장에 목숨 거는 아이들의 그 순수한 모습에 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이들은 순수해. 지금은 스티커를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착한 일 을 하지만 그것이 습관화 되면, 그리고 노력의 댓가로 돌아오는 좋은 결실에 서 큰 보람을 느끼고, 선행의 참맛을 알면, 우리 아이들은 정말 예쁘고 아름 다운 마음을 갖고 바르고 알차게 자랄 거야. 난 그걸 믿어.’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 늘 그랬듯이 지원은 아이들에게 사탕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어주고, 직사각형 초콜릿에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붙여주었다. 선물을 받는 아이들의 얼굴엔 꽃보다 더 고운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지원은 아이들의 생일을 달력에 표시해 놓고 예쁜 동시집을 사서 안 표지에‘은빈아, 생일 축하해. 바르고 곱고 알차게 자라서 너의 예쁜 꿈을 활짝 꽃피우렴. ****년 *월 **일 널 깊이 사랑하는 서지원 선생님.’ 이라고 써서 컬러 복사지에 인쇄한 생일 편지와 같이 주고, 케잌에 나이 만큼의 촛불을 밝히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과 함께 축하해 주었다. 시골학교에선 생일을 맞은 아이들에게 주로 옷을 선물했지만 도시에선 아이들의 마음을 더 예쁘게 가꾸어 주고 싶어서 예쁜 시들이 담겨있는 동시집을 선물했다.

인원수가 적어 교실에 공간이 넓은 시골 학교에선 남쪽 창 밑에 커다란 연못을 만들어 물풀도 심고 예쁜 돌을 넣어 물고기를 기르고, 연못 둘레를 빨간 벽돌로 장식하고 연못가에 화분을 2층으로 둘러놓아 예쁘게 꾸미고 연못 중앙에 우산분수를 돌려 눈을 감으면 숲속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연못을 통하여 자연의 생태계 공부를 하고 마음도 예쁘게 가꾸어 가게 한 예쁜 연못, 하지만 도시의 학교는 인원수가 많아 그럴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안타까웠다.

며칠 밤을 고민한 지원은 남쪽 창가에 커다란 화분을 놓고 거기에 고추, 가지, 방울토마토를 심고 오이 덩굴도 올려서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식물의 한살이’를 체험을 통하여 배우게 하는 산교육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산 장날, 채소 모종을 사서 화분에 심고 정성을 들여 가꾸었다. 식물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꽃이 앉았던 자리마다 작은 열매를 달고 키워가는 모습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수업 시작 전과 끝난 후엔 자신의 피아노 반주로 아름다운 동요를 불러 마음씨를 곱고 아름답게 가꾸어 가게 했다.

매일 아침, 다른 선생님들보다 2시간 먼저 출근하여 교실 청소해 놓고 따뜻이 자신을 맞아주고, 날마다 일기의 댓글에 달려 있는 선생님의 깊은 사랑이 느껴졌음인지 아이들의 변화가 눈에 보였다.

“3학년 4반 아이들은 어찌 그리 착하고 예쁩니까? 처음엔 그렇지 않은 것 같 던데……. 도대체 그 비결이 뭡니까?”

3학년 6반 선생님의 그 물음에 지원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지원은 고학년을 중심으로 문예부를 조직하여 일주일에 두번 수업 전에 지도했다. 시골에서처럼 매일 지도하고 싶었지만 바쁜 아침 시간에 너무 큰 부담을 주게 되는 것 같아 수요일과 금요일 아침에만 지도하기로 했다. 수요일엔 운문을, 금요일엔 산문을 지도하고 작품을 쓰는 건 숙제로 내서 수업이 끝난 오후에 보고 댓글로 지도하고 만났을 때 개별로 지도했다. 지원은 반 아이들에게도 틈나는 대로 글쓰기 지도를 해서 각종 백일장에서 김천동신초등학교 아이들이 대상부터 시작하여 좋은 상을 휩쓸어 오고 각종 문예 공모전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일간지에 보도되기도 했다.

최근 들어 학교와 교단이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학부모가 교육의 장인 학교에서 교사를 폭행하고 무릎을 꿇리고, 학생이 스승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하고…….

구미의 어느 초등학교에서는 50대 여교사가 잘못을 저지른 자기 반 아이에게 머리에 꿀밤을 한 개 주자 그 아이가 담임의 뺨을 때려 한동안 교사와 학생이 서로 치고 받고 반 아이들은 구경하는, 코미디 같은 싸움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 참담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2013년 초겨울, 초등학교 교사가 꿈인 여고생 3명이 학교로 지원을 찾아왔다. 그녀는 교권 추락에 불안해 하는 그 학생들에게 자신의 교단생활 이야기를 들려주고 교단 일기를 묶어 만든 수필집 ‘잠 못 이루는 그대에게’ 상, 하권을 선물로 주며 말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신뢰가 깊고, 스승의 꾸중이나 훈계가 자신을 바르게 키 우기 위한 스승의 피눈물이라고 믿었다면 그 학생들이 그렇게 반응했을까?”

지원의 말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지원은 초임지에서의 주억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심각한 문제아에게 내린 벌,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침으로써 주억이로 하여금 다시 태어나게 한 그 일을…….

“인간관계는 상대적이야. 서로간의 신뢰와 사랑의 깊이에 따라 반응하는 형태 도 다르고 이해의 폭도 달라. 교권이 추락했다고, 교실이 무너졌다고 한탄하 기 전에 교사들은 교육자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

학생들은 지원의 말에 숙연해졌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고 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깊은 사랑을 이길 순 없다는 사실을…….

2014년에도 지원은 3학년 4반 25명의 아이들을 맡았다. 전년도에 어떤 소문이 돌았는지 학부모 총회가 있던 날, 회의가 끝나고 지원의 교실을 방문한 학부모들은 한결같이 자기 아이가 지원을 만난 건 행운 중의 행운이라고 했다. 좋은 선생님이라고 소문이 나서 자기 아이의 담임이길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현실이 되었다며 무척 좋아했다.

“우리 아이가 선생님을 만날 확률이 1/36 밖에 안 되는데 정말 행운아에요.”

“맞아요.”

“작년에 시인 선생님이 우리 학교로 오셨다기에 우리 쌍둥이 담임이 되길 희 망했는데 안 되어 많이 섭섭했는데 올해 결국 만나네요. 시업식 날, 우리 아 이들이 선물로 받아온 선생님의 시집과 수필집 보고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 지 몰라요.”

“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신 책은 우리 가족에게 가장 귀한 선물이고 영원히 보 관할 거예요.”

“선생님의 수필집 읽으니 감동적인 장면이 너무 많았어요.”

“맞아요, 전 울면서 보기도 했어요.”

학부모들의 말에 지원은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사실 전 좋은 선생님이 아닌데 그렇게 소문이 났다니 부끄럽네요. 하지만 우 리 아이들과 함께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

2014년 4월 25일 오후, 경상북도교육청에서 지원에게 전화가 왔다. 문화일보에 ‘좋은 선생님’이란 코너가 있는데 경북의 교사 중에서 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데 지원을 추천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는……. 지원은, 자신은 결코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며 사양했지만 공보실 직원의 끈질긴 설득에 할 수 없이 동의했고 3일 후에 기자가 와서 지원과 반 아이들을 인터뷰하고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기자는 지원의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며 교장실에서 만나자마자 확인, 또 교실에서도 확인했고, 돌아가 전화로도 다시 확인했으며, 5월 8일 아침, 그 날 신문에 나올 거라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이를 확인한다고 했다. 기자가 직접 본 지원의 모습도 그렇고 찍어간 사진을 본 직원들이 도저히 그 나이가 아니라 한다고…….

“못 늙어서 죄송합니다. 평생을 어린 아이들과 살다 보니 늙지조차 못했습니 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기자의 밝은 웃음소리가 지원은 싫진 않았다.

5월 8일자 문화일보를 본 사람들이 전화를 했다. 지원은 쑥스럽고 면목이 없었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 날 오후, 지원은 집에서 가까운 용한내과의원을 찾았다. 아직까지 그 흔한 위내시경검사도 한번 받아보지 않았을 만큼 병원 가길 꺼렸으나 한참 전부터 아랫배 왼쪽에 혹이 만져지더니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여름방학하면 병원에 가려고 버티고 있었는데 손바닥을 다 펴서도 감싸지지가 않을 만큼 커졌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장이 아니라 산부인과 쪽인데요. 큰 병원으로 빨리 가보세요.”

“조금만 더 참았다가 여름방학 때 큰 병원에 가면 안 될까요? 학교에 결근을 할 수가 없어서요. 다른 직장은 모르지만 학교라는 곳은…….”

진료실 천장을 보고 헛웃음을 웃으며 어이 없어하는 의사, 지원은 그 순간, 오래 전 심한 임신중독증에도 방학하면 병원에 가려고 버티다 교단에서 쓰러져 사경을 헤매던 일, 조산하여 30 시간만에 하늘나라로 보낸 아들, 그리고 목숨보다 직장이 더 소중했냐는 의사의 질책이 떠올라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지원은 현재 같이 살고 있는 남편과 막내는 물론, 직장 때문에 멀리 나가 있는 세 아이에겐 말하지 않고 5월 9일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나서야 외출을 달고 학교 근처에 있는 제일병원으로 갔다. 초음파검사를 하니 왼쪽 난소에 가로 16cm, 세로 13cm의 거대한 혹이 있어 급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혹을 떼어내 조직검사를 해봐야 양성인지 악성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지원은 그 병원에서 수술하기로 하고 수술 날짜도 혼자서 잡았다. 5월 12일 오전 9시로……. 바로 진단서를 끊어 학교에 제출했다. 당장 기간제 교사를 구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일단 2주간 병가를 내겠다며 자세한 이야길 하니 교장, 교감 선생님과 동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 나이면 살만큼 살았잖아요? 세월호 침몰로 열 일곱 살짜리 어 린 학생들도 많이 죽었는데 이만큼 살았으면 과분한 거죠. 어차피 한번은 가 야 할 길인데 조금 먼저 가나 뒷차로 가나 무슨 큰 차이가 있어요?”

직원들의 근심어린 표정에 대고 지원은 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요?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그러게요. 왜 난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선생님은 정말 특별한 분이에요. 평범한 우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 쓰시는 분이라서 그런가?”

그건 그녀 자신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상황이면 제 정신이 아니어야 정상인데 말이다. 자기는 그렇다 쳐도 네 아이 중 아직 한명도 짝을 지어주지 못했는데, 아직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하긴 지원은 전부터 그랬다. 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가신 할머니, 아버지, 시모님, 아기, 강아지 해리, 고양이 방울이를 만날 수 있으니 죽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왔었다. 지원에게 있어서 그녀 자신의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환상 같은 거였다. 먼저 간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그 며칠 전, 경상북도교육청 홈페이지 교육칼럼에 ‘내가 어른이어서 미안해’라는 세월호 관련 글을 올린 지원은 암일까 봐 걱정하는 동료들 앞에서 잠깐 이런 생각을 했다. 구조되었으나 자살한 단원고 교감 선생님, 저승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어하는 그 사람의 유서를 떠올리고, 만일 그녀가 말기암으로 머지않아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세월호 사고로 먼저 간 선생님들과 만나 같이 간 학생들을 가르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다. 그런 그녀를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므로…….

더 이상은 가족을 속일 수 없어 할 수없이 이야기하니 지원의 남편과 아이들은 넋을 잃었고, 상의도 없이 작은 병원에서 수술 날짜까지 잡은 것에 어이없어 했다. 지원이 학교 옆 작은 병원을 선택한 건 만일에 장기 입원해야 한다면 얼마 전에 창가에 심어 놓은 방울토마토와 고추 등 채소가 걱정되어서였다. 반 아이들에게 식물의 한살이를 이론이 아닌, 직접 체험으로 산교육을 하고 싶어 화분에 모종을 사다 심고 정성을 들여 가꾸어 온 것이다. 조금만 소홀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새벽이나 밤중에라도 가서 돌보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달려가 보고 싶은 반 아이들도 볼 수도 있으니……. 그런 이유로 제일병원을 선택한 거라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타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지원에겐 심각하고 진지한 일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실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진지하고 심각한 일이 지원에겐 사소한 일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일에 지원은 목숨을 걸었다.

“언니는 종자 자체가 달라. 보통 사람 종자가 아니야.”

지원은 갑자기 여동생의 말이 생각나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정상적인 종자는 아니야.’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걱정하는 가족에게 지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은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교단에서 쓰러 지는 거야. 내가 말기암이라 해도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난 다시 교단으로 돌 아갈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 난 교단에 서 있을 거야. 우리 아이들 곁에 있을 거야. 쓰러져도 병원이 아닌, 집도 아닌, 교단에서 쓰러질 거야.”

“어쩌면 저렇게 미칠 수 있는 거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투덜대는 동생에게 그녀는 말했다.

“전에도 말했잖아? 어디엔가 미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행복한 거야. 안 그래?”

“말이나 못하면…….”

2014년 5월 12일 오전 9시, 수술복을 입고 이동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끌려가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춘 침대 머리 맡에서 지원의 남편이 말했다.

“수술 잘 받고…….”

목이 메어 다음의 말을 잇지 못하는 남편,

“언니, 힘내. 잘 될 거야.”

여동생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엄마, 흑흑…….”

막내의 격한 흐느낌……. 그러나 지원은 담담했다.

수술실 문이 닫히고 둥근 라이트 밑으로 끌려간 지원, 초록색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미리 꽂혀 있던 링거 줄에 마취제를 놓는데 주사액이 들어가자 둔한 통증이 느껴져

“아파, 아파…….”

그러다 지원은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안갯속처럼 뿌연 공간에 흐릿한 사람들이 보이고 누군가가 지원의 침대를 끌고 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고, 병실로 들어서자 지원을 시트 째 들어 올려 침대에 눕혀 놓았다. 막내가 지원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엄마, 괜찮아? 정신이 들어?”

“응.”

지원의 여동생도 다가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충혈된 눈으로…….

“의식도 덜 깬 상태에서 언니가 처음으로 한 말이 뭔 줄 알아?”

“내가 뭐랬어?”

“‘우리 반에 기간제 선생님 왔을까? 안 왔음 우리 애들 어쩌지?’ 그거였어. 언닌 죽어가면서까지 애들밖에 없어? 가족과 친척은 아예 없어? 언니 수술방 에 들어가고 막내 아들이 얼마나 울었는데, 그건 통곡이었어. 그런데 자식은 안중에도 없었어? 나도 가슴이 찢어져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는데…….”

“나 원래 빵점짜리 며느리고, 빵점짜리 아내고, 빵점짜리 엄마고, 빵점짜리 언니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가족과 자매들에겐 지원의 병이, 수술이, 심각한 일이었으나 지원에겐 별거 아닌 일이었다. 그래서 직장에 휴가내고 오겠다는 딸들을 강력하게 말렸었다.

“뭐 이런 일 가지고 휴가를 내? 직장 일에나 충실해.”

혹이 하도 커서 복강경은 안 되고 개복을 해야 한다더니 얼마나 베었는지 진통제를 달고 있는데도 아파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옆으로 누울 수도, 일어나 앉을 수도, 기침을 할 수도 없었다. 기침을 하여 가래를 뱉아내야 한다는데 재채기나 기침이 나오면 까무러칠 만큼 아팠다.

“아파, 너무 아파. 언제까지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거지?”

“아픈 게 당연하지. 생살을 그렇게나 깊이 베었는데 안 아프겠어?”

오후에 수술을 한 의사가 와서 하는 말,

“혹 무게가 무려 980g이었습니다. 그처럼 큰 혹은 처음 봤어요. 어떻게 그렇 게 혹을 키웠어요? 정말 대단합니다.”

“…….”

의사의 핀잔에 지원은 할 말이 없었다.

‘방학하면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이만하면 빨리 온 건데…….’

하지만 그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이 뻔할 것이므로…….

“개복을 하고도 혹이 너무 커 꺼낼 수가 없어서 혹에 관을 꽂아 내용물을 빼 내 혹의 크기를 줄인 다음 간신히 꺼냈어요. 조직검사 보내 놓았는데 검사 결 과는 일주일 후에 나옵니다.”

가족과 동생은 혹의 크기에 놀랐지만 지원은 혹의 무게인 980g이란 숫자에 전율했다.

‘학교에 미친 엄마 때문에 세상에 나온지 30 시간만에 하늘나라로 떠난 내 아들,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하고 급히 보내야 했던 내 가엾은 아들의 몸무게 가 980g이었는데 이건 뭐지? 그 숫자의 일치는 도대체 뭐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거야. 분명히 뭔가가 있어.’

그래, 1984년 12월 25일에 떠난 지원의 아기가 엄마를 기다린 30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이제라도 가엾은 아기를 만나라고 하늘에서 깊은 병을 주신 거라고 지원은 생각했다.

‘그래, 이제 하늘나라로 가서 모두 다 만나는 거야. 6교시 수업 다 마치고 동 물병원으로 가다 거의 다 가서 차 안에서 죽은 불쌍한 우리 방울이도 만나고, 퇴직하면 효도하려 했는데 그 몇 년을 기다리지 못하시고 떠나신 시어머님도 만나고, 누구에겐가 잡혀 먹혔는지 집 나가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 는 진돗개 해리도 만나고, 오래 전에 간암으로 하늘나라로 가신 할머니와 퇴 직하자마자 병을 얻어 10년간 투병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만나는 거야. 병이 날 만큼 보고 싶었던 이들을, 이제 만나러 가는 거야.’

지원은 오히려 편안했다. 먼저 간 이들을 만날 생각에 밝은 미소까지 지었다. 하지만 악성인지, 양성인지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가족과 동생은 주저앉았다. 하루, 하루가 피를 말리는 생지옥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니까 때 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니야. 엄마로서 네 아이 모두 짝지어 주지 못하고 떠나 서 좀 그렇긴 하지만…….”

지원의 담담함에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수술 후, 이틀째 되던 날 밤, 간호사가 병실로 와서 말했다.

“아까 선생님 반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들 몇 명이 복도를 서성이던데 병실에 안 들어왔어요?”

“우리 반 애들은 아닐 걸요. 내가 이 병원에 있는 줄도 모르거든요. 올까봐 일부러 말 안 했어요.”

“어? 이상하다. 꼬마들이 뭉쳐서 여기에 올 일이 없는데…….”

그런데 다음 날 오후, 지원의 반 개구쟁이 재현이와 동영이가 인라인스케이트를 신은 채로 병실로 들어왔고 이슬이도 편지를 들고 왔다. 뜻밖의 방문에 너무 반가워 침대를 세워 달라고 하여 아이들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

“선생님은 너희들 넘넘 보고팠는데, 너희들도 선생님 보고 싶었어?”

“예. 선생님 보고 싶어 죽~~~을 뻔했어요. 저는 울면서 매일 기도했어요. 우 리 선생님의 병 빨리 낫게 해달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흐느끼는 이슬이, 지원은 이슬일 안아주고 싶었으나 움직이기도 힘들고 수술 부위가 당기고 너무 아파 손만 잡아주었다.

“얘들아, 고맙다. 너무나 보고팠는데 이렇게 찾아와줘서…….”

지원은 동생을 시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다음 날은 전날 온 아이들과 함께 더 많은 아이들이 와서 지원은 동생을 시켜 빵과 케잌, 과일을 사다가 나누어 먹였고, 퇴원하기 전날엔 3학년 선생님들이 문병을 와서 스승의 날 지원에게 쓴 아이들의 편지를 한 보따리 전해 주었다. 지금의 아이들과 작년에 가르친 아이들이 보낸 편지를……. 편지 한 장, 한 장마다 아이들의 간절한 부름에 지원의 얼굴엔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어서 빨리 학교로 돌아가야 할 텐데…….’

일주일 후에 나온 조직검사 결과는 ‘점액성 낭종’이었다. 암이 아니라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남편, 자식들과 형제, 자매들에 비해 지원은 그저 담담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맞을 기회를 잃었군.’

복강경이 아니고 개복을 했기 때문에 수술 후 최소한 두 달은 쉬어야 한다고 했으나 지원은 고집을 부렸다. 하루라도 빨리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었다. 지원의 아이들은 메일로, 편지로, 문자로, 학급 홈페이지에까지, 보고 싶다고 어서 돌아오라고 난리였다. 문예부 아이들까지도 빨리 문예지도 받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지원의 반 쌍둥이 아빤

‘우리 지윤, 아윤인 선생님이 그리워 학교가 가기 싫답니다. 선생님 병문안 가자고 조르는 걸 선생님께 폐가 될까 걱정되어 간신히 달랬습니다.’

란 문자를 보내왔다. 사실 쌍둥이 생일이 5월 17일인데 그 땐 지원이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생일편지와 선물은 미리 주고 왔으나 생일축하 파티도 못해주고 생일축하 노래도 못 불러주어 내내 마음이 아팠었다.

동생은

“언니, 다른 사람들도 수술하면 두 달 이상 쉰다더라. 그러니 두 달간 쉬고 완전히 회복한 다음에 출근해.”

라고 했고 가족들도 그러길 바랬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어? 난 하루가 급한데…….”

“으이구! 언니를 누가 말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

“또 그 소리, 난 누가 알아주라고 그러지 않는다 했지? 내 마음이 그렇게 시 켜. 빨리 학교에 가라고…….”

원래는 5월 23일에 학교 선생님들을 전원주택으로 초대하기로 했었다. 그 집을 사고부턴 해마다 직원들을 초대하여 한우갈빗살로 식사를 대접하고 지원이 손수 가꾼 무농약, 무공해 채소들을 나누어 주었다. 시골 학교는 전직원이라야 25명 안팎이라서 해마다 전직원을 초대했는데 지금 근무하는 학교는 전직원이 100명이 넘기 때문에 모두 수용할 수가 없어 작년처럼 3학년 선생님들과 전담 선생님들만 초대하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수술 때문에 날짜를 미룰까 했는데 서울과 대전에 사는 여동생이 음식 준비는 자기들이 하겠다고 정해진 날짜에 초대하라고 했다.

지원은 수술 후유증 때문에 움직이기도 힘들어서 여동생들이 음식준비를 했다. 텃밭에서 채취한 취나물을 삶아 무치고, 이미 팬 두릅 중 새순을 따서 두릅전을 부치고, 호박전, 김치전을 부치고 정원에 있는 달래를 캐서 청국장을 끓이고, 월남쌈을 만들고, 잡채를 하고, 첫수확인 고추를 따고 텃밭의 상추와 파로 절이개를 하고…….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한우 갈빗살을 충분히 준비했다.

“한우 등심도 맛있는데 갈빗살씩이나……. 자긴 맨날 된장국에 보리밥만 먹으 면서 남한텐 어찌 그리 후한지…….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 정말 언닌 달라 도 너무 달라.”

“난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 내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

“그래,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 우리가 말린다고 되겠어?”

5시가 좀 넘어 차가 3대 나타났다. 먼저 정원을 둘러본 선생님들이 말했다.

“와! 정말 대단해요. 울타리가 너무 예쁘고, 큰 나무도 많고, 정원이 너무 넓 어 오면서 무슨 학교인 줄 알았어요.”

“네. 울타리에 서 있는 나무들이 모두 벚나무인데 꽃필 땐 정말 예뻐요. 그 때 초대하면 더 좋은데 그 땐 텃밭에 채소가 날 때가 아니라서 지금 초대한 거예요. 내가 손수 가꾼 채소들 나누어 줄 수 있는 때가 지금이라서요.”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무슨 깊은 뜻씩이나……. 배고프죠? 어서 들어가요.”

거실에 들어간 선생님들은 차려 놓은 상이 완전히 잔칫상이라며 놀랐다.

“배고프죠? 어서 들어요.”

“우리 집에선 먹어 볼 수도 없는 맛있는 고기네요. 입에서 살살 녹아요.”

음료수와 여섯 종류의 술과 같이 식사를 하는 직원들, 건네주는 막걸리를 두잔 정도 마시고 기분이 업된 지원,

“난 뻐꾸기가 한낮에만 우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아침 6시부터 울더라.”

그리곤 피아노 방으로 가서 ‘요나슨’의 ‘뻐꾹 왈츠’를 쳤다. 곡이 끝나자 거실에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내친 김에 지원은 와이만의 ‘은파’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도 치고 바다르제프스카의 ‘소녀의 기도’와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도 쳤다. 평소에 늘 치던 곡이라서 악보를 보지 않고도 칠 수 있었다. 그런데 취기가 오르는지 갑자기 피아노 건반이 일렁거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는 1악장을 치다가 중지했다. 지원은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가 말했다.

“피아노 건반이 파도치는 건 첨 봤어.”

“언니, 중환자가 술을 마시면 어떡해? 술은 상처에 독약이라더만.”

“알았어. 이제부턴 안 마실게. 그만 마실게.”

“와! 선생님의 피아노 솜씨 정말 대단해요.”

“맞아요. 글만 잘 쓰시는 줄 알았는데 피아노까지…….”

“뭐, 그 정도 가지고…….”

“그 정도라니요? 우린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음악회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는 데요.”

“맞아요.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특히 두 번 째 곡은 정말 훌륭했어요.”

“두 번 째 곡? 아! 와이만의 ‘은파’ 말이군요. 그 곡은 꾸밈음이 많아 선율이 무척 아름다워요. 처녀 땐 정말 피아노 열심히 쳤어요. 그 땐 피아노 명곡집 상, 하권에 있는 곡들을 악보 없이 다 쳤는데 결혼 후엔 피아노에 게을러져 그렇게 못하고 지금은 악보도 눈에 잘 안 들어와요. 악보 없이 칠 수 있는 곡도 예닐곱 곡 정도?”

“그만하면 훌륭해요. 선생님이 정말 부러워요.”

선생님들은 초록빛 정원이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곳에서 맛있는 음식에 라이브 음악회까지, 너무 행복하다며 좋아했다.

선생님들이 돌아갈 때 지원은 작년에 과수원에서 따서 손수 담근 매실액을 콜라병에 담아 한 병씩 주고, 지원이 직접 가꾼 텃밭의 상추, 쑥갓, 아욱도 나누어 주었다. 고추와 가지는 이제 겨우 크는 중이라서 주지 못해 아쉬웠다.

“먼 곳까지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월요일에 봐요.”

“아니! 수술하고 두 주일만에 출근하시겠다구요? 선생님, 그건 무리예요.”

“누구 맘대로 무리? 내 병은 학교에 가야만 빨리 나을 수 있어요.”

“아닌데,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못했을 텐데, 참으세요.”

지원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싫어! 싫어! 안 참을 꼬에요!”

“선생님, 취하시니까 넘넘 귀여워요.”

“맞아요. 하하하…….”

차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원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음식을 충분히 준비했기 때문에 이웃에 사는 어르신들께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지원에겐 참으로 행복한 밤이었다.

수술 후, 꼭 두 주일만인 5월 26일 오전 6시 12분에 학교에 도착한 지원은 제일 먼저 창가에 심은 채소들을 살폈다. 그동안 방울토마토와 고추가 많이 컸고 방울토마토 두 포기는 시들시들하여 곧 죽을 것 같아 얼른 물을 떠다 주었다.

‘제발 살아줘. 제발, 제발…….’

아이들에게 주려고 미리 준비한 빵과 음료수를 책상마다 올려놓고 아이들을 기다렸다. 전 같으면 출근하면 바로 창문 열고 청소부터 시작했겠지만 수술 부위가 당기고 너무 아파서 도저히 청소를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시간이 왜 그리도 지루하던지!

8시가 되어서야 하나씩 아이들이 들어왔다. 등교하는 아이들마다 얼마나 반가워하던지! 웃으며 다가와 안기는 아이도 있었고 울먹이는 아이도 있었다. 눈물 어린 눈으로 아이들을 맞는 지원의 얼굴엔 끊이지 않고 미소가 번졌다.

지원이 먼저 인사하러 가려했는데 교장, 교감 선생님은 출근하자마자 바로 지원의 교실을 방문하여 아직 출근할 때가 아니라며 병가를 더 내던지 수업만 마치고 바로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하지만 지원은 버틸 수 있는데까진 버티겠다고 했다.

“제가 빨리 회복하려면 우리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해요.”

“선생님을 누가 말리겠어요? 하지만 무리하진 마세요.”

“네, 걱정 마세요.”

출근하고 2주일간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지 배가 당기고 너무 아파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수업 전에 문예부 아이들을 가르치고, 매일 5시간씩의 수업을 했다. 걷는 것도 힘들었다. 배를 움켜쥐지 않으면 걸을 수가 없었다. 몸은 계속 무리라는 신호를 보내왔지만 지원은 그것을 무시하고 전처럼 6시 반 이전에 출근하여 아이들에게만 올인하려고 노력했다.

잠시, ‘교사로서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희망하던 꿈은 멀리 날아가고 지원은 그렇게 사랑하는 3학년 4반 25명의 아이들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2014년 7월 16일 오후 3시 반, 경상북도교육청 본관 4층 건물에선 제33회 스승의 날 기념 정부 포상 전수식이 있었다. 경북의 유초중고등학교 교원 중에서 근정포장이 1명, 대통령 표창이 5명, 국무총리 표창이 7명이었다. 작년까진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대통령 표창 이상은 청와대로 초청 받아 대통령에게 직접 상도 받고 식사 대접도 받았지만 올해는 세월호의 아픔으로 시상식이 미루어졌다가 각 교육청 별로 전수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3월 중순경에 내려온 공문에 의해 학교에선 지원의 공적서에 훈격을 대통령 표창으로 하여 상신했고, 김천교육지원청을 거쳐, 경북교육청에서도 그렇게 중앙으로 올라갔으나 교육부에서 다시 심사하여 경북에선 최고 높은 근정포장을 받게 된 것이다. 지원은 다른 12명의 수상자들에게 미안했다. 특히 바로 아래 대통령 표창을 받은 포항 이동중학교 교장 선생님에겐 더 미안했다. 평교사인 자신이 더 높은 상을 받아서……. 그리고 이번에 수상하진 못했지만 어디에선가 지원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깊이 아이들을 사랑한 무명 교사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교육감이 수상자 중 제일 먼저 지원의 가슴에 포장 메달을 달아주고 대통령 시계와 함께 포장증서를 수여했다. 전수식이 끝나고 일어서자 이영우 교육감이 지원에게 다가와 말했다.

“서지원 선생님, 잠깐 제 방으로 가서 차 한잔 하고 가세요.”

그래서 지원은 교육감실로 같이 가서 이영우 교육감과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생님의 아이들 사랑, 모든 선생님들이 본받아 야 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전 다른 선생님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잘 한 것은 없습니다.”

지원은 복도까지 배웅 나온 교육감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40여년의 교단생활, 남들이 학교에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만큼 학교에 올인했던 지원은 교단생활 마지막 해에 그런 큰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선산에 도착하자 지원은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3년전 가을에 세상을 뜨신 시모님을 만나러 갔다. 포장증서 위에 가슴에 다는 메달, 그리고 대통령 시계를 올려서 두 손으로 바치고 지원이 말했다.

“엄마, 엄마, 저 왔어요.”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랬던 것처럼 지원은 ‘엄마’라고 불러보았지만 시모님은 말이 없었다.

“엄마, 뭐가 그리도 급하셨어요? 내년 2월이면 정년퇴직하여 그동안 못한 효 도 다 하려 했는데, 뭐가 그리 급해서 서둘러 떠나셨어요?”

지원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 저 오늘 아주 큰상 받았어요. 엄마도 기쁘시죠? 제가 학교에 가는 거 반대는 하셨지만 제가 상 받을 때마다 동네에 다니시면서 자랑하셨잖아요? 제가 드린 상금으로 한턱 쏘기도 하시구요. 살아계셨으면 오늘 같은 날, 동네 큰 잔치를 벌이셨을 텐데요.”

그랬다. 지원의 시어머니는 지원의 복직을 강하게 반대하고 아이가 아프다던지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학교를 그만두라고도 했지만 며느리 자랑으로 허전함을 달래곤 했었다.

지원은 며느리 노릇 제대로 못하는 것이 죄송해서 결혼 첫해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모님 생신엔 음식을 직접 장만하여 동네 어르신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놀다가 돌아가실 땐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보리빵을 주문하여 종이 가방에 넉넉히 넣어 드리곤 했었다. 식당에서 대접하면 편하겠지만 직장으로 인하여 며느리 노릇 못하는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갚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 정말 죄송해요. 지금까지 전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복직한 거라 고 자신있게 말하고 다녔지만, 또 그렇게 사는 동안 저 자신은 행복했지만 어 머님을 비롯한 가족에겐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거라는 거 잘 알아요. 엄마, 우리 다음 세상에서 다시 고부간으로 만나요. 그 땐 이승에서 못 다한 효도 할게요. 그 때, 제가 교단에 다시 선다 해도 온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며느리들이 하는 것 만큼은, 아니, 더 잘할 자신 있어요. 저, 그렇게라도 이승에서 엄마께 진 빚, 꼭 갚아야 해요. 그러니 우리 다음 세상에서 꼭 다시 만나요. 네?”

대지를 이글이글 달구던 태양이 서산을 넘고 서쪽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미쳤어. 완전히 돌았어. 누가 알아준다고 맨날 아침도 안 먹고, 집안 일 다 팽개치고 꼭두새벽부터 학교에 가?’

동생이 자주 하던 말이 환청처럼 지원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래, 나도 겨울에 라이트 켜고 학교에 가면서 내가 미친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교실 창문 열어 놓고 아이들 책상 사이, 사이에 끼어 있는 쓰레기들 말끔히 쓸어내고 대걸레 빨아다 깨끗이 닦고, 아이들 책상까지 말끔히 닦아 놓고 히터 틀어 따뜻하게 교실 데워 놓고 우리 아이들 기다리는 그 시간이 난 참 행복했어. 그래서 날마다 집안 일 팽개치고, 밥도 안 먹고 꼭두 새벽부 터 달려간 거야.’

‘누가 알아준다고 자기 자식 생일은 까먹으면서 남의 자식들은 그렇게 알뜰히 챙겨줘?’

‘그래, 너무 바빠서 가끔씩 내 자식 생일 까먹은 적 있고, 내 자식 생일엔 단 한 줄의 생일 편지 써 준 적 없어. 하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의 가출로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가엾은 아이들에게 기쁨 주는 일, 그 일은 꼭 하고 싶었어. 학교 일 뿐만 아니고 교육청 일도 해야 하고, 글을 쓰다 보 니 수많은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손을 내미는데 그 간절한 손길을 뿌리칠 수 도 없고……. 차마 거절 못해 그 모든 일 다 들어주다 보니 몸도, 마음도 그 로키 상태가 되어 나에겐 자식을 챙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어. 일부러 안 챙겨준 게 아닌데…….’

수시로 들리던 여동생의 힐책, 그 환청에 지원은 쓸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누가 알아준다고? 그래, 누가 알아주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이 그 렇게 하라고 시켜서 했을 뿐이지만, 내 교직 인생 마지막 해에 이렇게 알아주 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럼 된 거 아니니?’

독백처럼 그렇게 말하며 지원은 땅거미가 내리는 산길을 내려왔다.

다음 날, 오전 6시 5분에 출근한 지원은 교실 청소를 말끔히 한 다음, 전날‘한선수 베이커리’에서 미리 준비한 빵과 음료수를 아이들 책상마다 가지런히 얹어 놓고 아이들을 기다렸다. 등교하는 아이들마다 하나 같이 물었다.

“선생님, 웬 빵이에요? 지난 번엔 수술하시고 오랜만에 오셨다고 주셨지만 오늘은 왜요?”

“그냥, 그냥 너희들이 너무 예뻐서 주는 거야. 아침 안 먹고 온 사람은 지금 먹고, 밥 먹고 온 사람은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 먹어.”

“우와! 우리 선생님, 최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내년에도 우리 선생님 해주세요, 예?”

“글쎄…….”

직원들을 식당으로 초대하여 제대로 대접하고 싶었지만 방학식 전, 전직원 회식 등, 미리 잡힌 약속들로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하여 그 날 오후 퇴근 전에 음식을 주문해서 학년실에 모여 함께 먹었다.

“훌륭하신 선생님 덕분에 우리 입이 즐겁고 행복하네요.”

지원은 상턱으로 선산 집에서 돌보는 강아지와 고양이, 그리고 길고양이들에게 그 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육계를 사서 푹 삶아 먹기 좋도록 찢어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퇴근하는 대로 새벽에 삶아 놓았던 닭고기를 가지고 시골집으로 갔다. 언제나처럼 차가 대문으로 들어가자 쏜살같이 나타나 마중하는 검둥이, 노랑이 두 마리, 아기 고양이들…….

“그동안 잘들 있었어? 엄마 보고 싶었지? 엄마도 너희들 무지 보고팠는 데…….”

지원은 넓은 플라스틱 그릇에 닭고기를 먹기 좋도록 얇게 찢어 그득하게 담아 고양이들에게 내밀었다.

“얘들아, 엄마 상 받았지롱.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너희들이 좋아하는 닭고기 많이 가져 왔어. 어서 먹어. 실컷 먹어. 배가 빵빵하도록…….”

고양이들은 허겁지겁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닭고기 먹으니까 맛있지? 앞으로도 엄마가 조그만 상이라도 받으 면 맛있는 고기 사 줄게. 너희들이 천수를 다 하는 그 순간까지 엄마 노릇 잘 할게. 그런데 한 가지 부탁하자. 너희들 모두 최소한 엄마보다 하루는 더 살아야 해. 엄만 너희들 잘못 되는 거 절대로 못 보니까. 엄마에게 있어서 가 장 큰 고통은 너희들이 엄마보다 먼저 가는 거야. 그러니 절대로 그런 일 없 도록 해. 알았지?”

잠시 지원을 바라보던 고양이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닭고기를 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원은 참으로 행복했다.

지원은 지금까진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먹을 것만 챙겨 주었지만 올 겨울엔 지하실에 고양이들이 겨울 동안 따뜻하고 편하게 지낼 집을 마련해줄 생각이다. 고양이들이 출입문으론 드나들 수 없으니 창문을 하나 열고 고양이들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의 공간만 빼고 고정시켜서 지하실 안에 커다란 개집을 사서 그 밑에 스티로폼을 깔고, 따뜻한 담요를 깔아주고 집 둘레를 비닐로 겹겹이 싸서 보온을 해 줄 생각이다. 그리고 사흘 간 먹을 물과 사료를 미리 그릇에 담아 놓고 간식은 올 때마다 주려고 한다.

오랜만에 부드러운 닭고기로 포식을 한 고양이들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지원의 현관을 떠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새벽, 눈을 떠 보니 언제나처럼 네 마리의 고양이들이 현관 앞에 앉아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참치에 밥을 비벼주고, 주말까지 먹을 사료는 지하실에 넉넉히 갖다 놓았다. 혹시 비가 와서 사료가 물에 잠길지도 모르므로…….

사실 지원은 새벽 3시부터 일어나 맛살, 햄, 초록, 빨강, 노랑, 주황색의 파프리카를 꿰어 계란에 입혀 구워낸 ‘지원표 꼬지’를 플라스틱통에 담으며 스스로 감탄했었다.

“음, 맛도, 모양도, 색깔도 예술이야! 이건 음식이 아니고 완전한 예술작품이 야! 할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시겠지?”

지원은 어제 가져다 냉장고에 넣어 놓았던 열무김치, 양파김치와 함께 쌀과자와 크라운산도, 새벽에 만든 꼬지를 커다란 종이 가방에 담아 가지고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의 컨테이너박스로 갔다. 집 가까이에 이르자 살금살금 소리나지 않게 발자국 소리를 죽여서 문 앞에 갖다 놓고 또 살금살금 기어나왔다.

‘휴, 성공이다. 근데 이 전율은 뭐지? 도둑들이 이 전율맛에 도둑질하나?’

지원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지원이 시골집에 올 때마다 컨테이너박스에서 홀로 사시는 김문환 할아버지에게 반찬들과 음식을 만들어 주었는데, 할아버지가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며 몇 번은 캔에 담긴 옥수수라든가 파인애플을 준 적이 있었다. 받지 않으려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 후부터 지원은 이렇게 도둑(?)이 되어 몰래 가져다 놓고 바로 집으로 가거나 학교로 출근하곤 했다.

지원이 차로 가서 시동을 걸고 대문 밖으로 나가 차를 세워두고, 대문을 잠근 다음 다시 차를 타려 하자 따라 나온 고양이들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배웅을 했다.

“얘들아, 오늘도 엄마가 너희들 흉내냈다. 발소리도 없이 살금살금 할아버지 댁에 가서 가방 놓고 왔어. 성공이야, 성공! 엄마가 너희들하고 친하다 보니 까 엄마도 너희들 닮아가나 보다. 그치? 어? 오늘은 왼쪽부터 키 순서대로 섰네. 노랑이 원, 투, 검둥이, 아기……. 왜? 엄마한테 사열해 달라고?”

“네! 엄마! 야옹! 야옹!”

“알았어.”

지원은 큰 노랑이부터 차례대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차에 올랐다. 출발 전,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지원이 말했다.

“노랑이 둘, 검둥이, 아가, 엄마 올 때까지 싸우지 말고 잘 놀고 있어. 아프 면 절대 안돼. 다음에 올 땐 너희들이 제일 좋아하는 생선 간식 갖고 올게.”

지원은 점점 멀어지는 고양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학교를 향해 달렸다.

‘여름방학 땐 친구들을 불러 시골밥상을 대접하고 내가 가꾼 토마토, 오이, 가지, 고추, 호박, 파, 감자를 나누어 주어야지.’

그 신나고 즐거운 순간을 상상하는 지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엷은 안개 속으로 초록빛 풍경들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스피커에선 지원이 좋아하는 음악인 ‘마법의 숲’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싱그런 자연의 향기, 새소리와 아름다운 음악으로, 그녀의 가슴은 잔잔한 환희로 물결치고 있었다. 그녀는 행복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로 무기 연기되었던 김천문화원 주최 제35회 매계백일장이 9월 24일 오후에 열린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종직 선생을 기리기 위한 제1회 점필재 백일장도 함께 열린다고 했다.

지난 3월부터 새로 만난 반 아이들에게 틈나는 대로 글쓰기를 가르치고, 고학년을 중심으로 문예부를 조직하여 수요일과 금요일 아침에 과학실에 모아 놓고 글쓰기 지도를 한 지원은 그런 대회를 통해 아이들이 자신감을 갖고 더욱 열심히 글쓰기 공부를 하길 희망했다. 그래서 참여를 권장했고 지원의 반 12명과 다수의 문예부 아이들이 참가했다.

9월 27일 토요일, 집안 청소를 마치고 잠시 침대에 누워있는데 지원의 반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2학기 반장인 허지원이었다.

“선생님, 지난 번에 한 백일장 있잖아요? 제가 점필재 백일장에선 장원을 했 고, 매계백일장에선 차상했어요.”

“그래? 지원아, 축하해! 우리 지원이 정말 장하다! 그런데 어디에 발표가 났 어?”

“엄마가 그러시는데 김천신문에도 났고 김천문화원 홈페이지에도 났대요.”

“그래? 지원아, 우리 월요일에 만나 선생님이 그 때 다시 축하해 줄게.”

“예, 선생님.”

지원은 전화를 끊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김천문화원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입상자가 온통 지원이 지도한 아이들이었다. 상금이 50만원이나 걸린, 초중고 전체에서 1명 뽑는 대상에 5학년 6반 임정언, 저학년, 고학년에 장원이 5명이었다. 특히 지원의 반 지윤인 운문부 장원, 지원인 산문부 장원이었다. 지원의 반 12명이 참가하여 11명이 입상했고 두 곳 모두 입상한 아이가 5명이었다. 저학년 입상자 명단엔 온통 지원의 반인 3학년 4반 아이들의 이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너무나 고맙고 반가웠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아침,

“오늘은 선생님이 과학실에 가서 언니, 오빠들에게 글쓰기 지도하는 날이니까 조용히 책 읽고 있어요.”

하면 선생님이 있을 때보다 더 조용히 독서를 하던 착한 아이들이었다.

아! 그런데! 누구보다도 지원이 입상을 간절히 원했던 지원의 반 민혁이 혼자 낙방한 것이다.

‘이를 어째? 우리 민혁이가 받을 상처는?’

지원이 민혁이의 입상을 더욱 간절히 원한 이유는 민혁인 아주 특별한 아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3월 2일 시업식 날, 가장 먼저 눈에 띤 아이가 민혁이였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허공을 향해 권투하는 시늉을 하는가 하면 수업 시간에도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딴 짓을 했다. 단 일분을 제자리에 앉아 있질 못했다.

“민혁아, 수업에 집중해야 선생님이 가르치는 게 머리에 들어가지.”

“전 공부에 취미 없어요. 공부하기 싫어요. 그딴 거 안 해도 돼요.”

다음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민혁이에 대한 반 아이들의 신고가 빗발쳤다.

“선생님, 민혁이가 창훈이 뺨을 때렸어요.”

“왜?”

“비키라는데 안 비킨다고요.”

“선생님, 민혁이가 5반 애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어요.”

“5반 애가 어떡했기에?”

“그 애가 복도에 지나가다가 민혁이 팔을 조금 스쳤는데 바로 발로 차고 마 구 때리던데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선생님, 민혁이가 십원짜리 욕했어요.”

“선생님, 민혁이 복도에서 마구 뛰어다녔어요.”

“선생님, 민혁이가 화장실 문 잠그며 장난쳤어요.”

그 때마다 남겨 놓고 지도했지만 하루를 못 넘기고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이미 습관화된 생활패턴이라서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민혁이 엄마가 찾아왔다.

“선생님, 왜 저를 안 부르세요?”

“네?”

“지금까지 민혁이 때문에 숱하게 학교에 불려왔는데 안 부르셔서요.”

“전, 아이 일로 학부모님을 부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제 선에서 해결해왔 어요. 제 힘으로 도저히 안 되면 그 때 가서 생각해 보려고 했어요.”

민혁이 엄만 그동안 담임들에게 여러 번 불려갔기 때문에 민혁이의 학교생활을 잘 알 터이므로 지원은 굳이 민혁이의 그릇된 행동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다만 작은 일에서라도 민혁이의 칭찬 거리를 찾아내어 칭찬해주라고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 선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 민혁이 때문에 마음 고생하신 점,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부모로서 부끄럽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 있어요. 점점 나아질 거라고 전 믿어요.”

지원이 언제나 반 아이들과의 첫만남에서 하던 이야기, ‘내가 하려는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는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말하고, 내가 하려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행동하라.’는 그 이야길 민혁이와의 상담 때마다 상기시키고, 가슴에 브레이크를 만들고 자신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하려 할 때마다 브레이크를 힘차게 밟으라고 했다. 그래야만 자라서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라고…….

지원의 진지한 지도로 민혁이의 폭력은 사라지고 지원의 시야 내에서 민혁인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 낮은 성적,

“선생님, 전 공부에 취미가 없다고 했잖아요?”

“민혁아, 공부를 취미로 하는 사람은 없어. 누구에게나 공부는 힘들어. 하지 만 열심히 하면 그만큼의 댓가가 돌아오는 거야. 민혁아, 나쁜 건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좋은 것은 쉽게 얻어지지 않아. 민혁이 넌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 라 아예 안 하는 거잖아? 넌 머리가 좋아서 다른 아이들의 반만큼만 노력해 도 뛰어나게 공부를 잘 할 수 있어. 에디슨도 말했잖아?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거라고…….”

지원의 말에 힘을 얻은 민혁인 수업에 집중하였고 수학 시간에도 열심히 공부하여 어려운 문제도 잘 풀었다. 전에는 수학을 못해 늘 남아서 공부했지만 남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 다른 선생님들은 내 이야기를 안 들어주고 다른 아이들 이야기만 듣고 나를 혼냈는데 우리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고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신다. 조그만 일도 크게 칭찬해 주시는 우리 선생님, 선생님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는 게 가슴으로 느껴진다. 나도 우리 선생님이 좋다. 지금까지의 선생님 중에서 제일 좋다. (민혁이의 일기 중에서)

지원은 민혁이의 변화에 행복해 했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우리 안으로 들여보냈으므로…….

하지만 지원의 그 행복은 결코 길지 않았다. 알고 보니 지원의 시야 밖에서의 민혁인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폭력을 쓰지 않는 것 외엔……. 충격이었다. 미술, 영어, 과학 등 전담 시간엔 수업 태도가 엉망이라고 했다. 미술 시간엔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고 싸운다는 거였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안 들어 포기하고 무시한다고 했다. 영어 시간에도 민혁이가 마구 쏟아내는 말로 시끄러워 수업을 제대로 못하겠다고 했고, 과학시간에도 딴 짓을 하고 하지 말래도 계속 한다고 했다. 민혁인 자기가 좋아하는 담임에게만 잘 보이려고 노력했을 뿐, 지원의 시야 밖에선 브레이크가 고장난 아이였다.

“선생님, 오늘 영어 시간에 민혁이 비트박스했어요. 미술시간에도 하고요. 선 생님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계속했어요.”

“선생님, 제가 내일 시청으로 상 받으러 간다니까 민혁이가 시장님 욕했어 요.”

김천시청 주최 음식문화개선 문예 공모전에서 입상한 지원이가 말했다.

“뭐? 감히 시장님께 욕을? 어떤 욕?”

“시장 할아버지 되게 못 생겼다고……. 저 상 받는 게 배 아픈가 봐요.”

“선생님, 쉬는 시간에 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져 제가 주우려는데 민혁이가 발 로 찼어요.”

줄줄이 이어지는 신고!

‘이럴 수가!’

힘이 다리 아래로 내리고 갑자기 현깃증이 난 지원은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민혁인 내 능력으론 도저히 안 되는 아이인가? 내 능력이 여기까지가 다인 가?’

서울에선 대안학교에 다녔고 김천에 내려와서도 적응 못해 시골학교에 전학갔다가 그곳 아이들을 괴롭혀 다시 돌아왔다는 민혁이……. 자기를 믿어주고 깊이 사랑하는 담임 앞에선 최대한 자제하려 노력하지만 담임의 시야 밖에선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민혁이로 인해 잠 못 이루고 고민하던 지원인 민혁이의 삶에 전환점이 될 특별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하는 것이라 생각되어 민혁이의 입상을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원의 반에서 유일하게 탈락한 아이가 바로 민혁이라니!

‘혼자 탈락한 충격으로 민혁이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아! 그 러면 정말 안 되는데, 여기까지 오는데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풍성한 수확이었지만 민혁이 때문에 지원은 마음이 무거웠다.

월요일 아침, 지원은 아이들이 등교하는 대로 입상한 아이들을 안아주며 칭찬해주었다. 민혁인 언제나 늦게 등교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축하해 주었다.

한편, 평소에 글을 아주 잘 써서 기대가 컸던 5학년 6반 임정언은 9월 17일에 실시한 경상북도교육청 주최 화랑문화제 김천시 예선대회에서 김천동신초등학교 입상자 9명 중 유일하게 가장 등급이 낮은 동상을 받아 몹시 실망하고 상처 받았었는데 500명 넘게 참가한 점필재 백일장에서 김천시내에서 내노라 하는 중고등학교 언니, 오빠들을 제치고 대상을 받게 된 것이다. 지원은 정언이를 교실로 불러 안아주었다.

“선생님은 알고 있었어. 우리 정언이가 큰 일 해낼 거라는 걸. 정언아, 고마 워. 선생님을 행복하게 해주어서…….”

목이 메어 더 이상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 모두가 선생님 덕분입니다.”

“아니야. 네가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야.”

정언이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깊은 상처 다음에 얻은 영광이라서 더욱 감동적이었다.

지원은 반 아이들과 약속했다. 민혁이가 상처 받을 수 있으니 민혁이의 탈락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기로……. 아이들은 담임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날 오후, 풀이 죽어 있는 민혁이를 남긴 지원은 민혁이를 따뜻이 안아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일기는 날마다 쓰던 민혁이, 그래서 문장력이 꾸준히 늘어가던 민혁이였다.

“선생님은 우리 민혁이의 글솜씨 인정해. 어른들도 표현 못하는 것을 민혁인 잘 하더라. 그 때마다 선생님은 깜짝깜짝 놀랐어. 민혁아, 10월 중순에 열리 는 김천예술제 문예백일장에 다시 한번 도전해 봐.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충분 히 희망이 있어. 선생님은 우리 민혁일 믿어.”

민혁이의 미소를 보고서야 지원은 마음을 놓았다.

신문에 실린 입상자 명단에 온통 3학년 4반, 그리고 지원이 지도한 문예부 아이들의 이름으로 도배되어진 것을 보고 다른 학년 학부모들은 부러워했고, 지원의 반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지원을 담임으로 만난 걸 행운을 넘어 천운이라고 했다. 공문으로 온 입상자 명단을 본, 9월 1일자로 부임한 교장 선생님이 지원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선생님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존경합니다. 글쓰기 지도 시간에 문예부 아이들을 격려해 주고 싶습니다. 아이들 다 모이면 연락주세요.

10월 1일 아침, 문예부 지도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과학실로 올라왔다.

“우선 여러분의 입상을 축하합니다. 백일장 입상자 명단을 보니 온통 우리 학 교 어린이들의 이름으로 도배가 되어 있더군요. 정말 장하고 고맙습니다. 그 런데 이렇게 된 데는 누구의 힘이 가장 컸을까요?”

“서지원 선생님이요!”

“맞아요. 바쁜 아침 시간에 여러분을 위해 봉사하신 서지원 선생님 덕분입니 다. 앞으로도 서지원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받고 더욱 열심히 글쓰기 공부하 세요.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은 지원에게 허리를 깊게 굽혀 인사를 했다. 아이들의 얼굴엔 자신을 지도해준 지원에 대한 감사와 입상에의 기쁨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민혁이가 대구 안과에 가기 위해 1교시 마치고 조퇴한 날, 지원은 아이들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길 들었다.

“선생님, 매계백일장할 때 민혁이가 어떤 아줌마 패주고 싶다고 했어요.”

“뭐? 어른을 패고 싶다 했다고? 세상에! 아니, 그 아줌마가 어떻게 했는데?”

“민혁이가 글은 안 쓰고 마구 뛰어다니고 장난치니까 뭐라고 했어요.”

“그런다고 패주고 싶어? 그것도 어른을? 다른 사람들 글 못 쓰게 방해하면 혼내는 건 당연하지. 근데 그 이야길 왜 이제 와서 하는 거야? 바로 말했어 야지.”

그 물음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 후에 영민이가 말했다.

“선생님은 민혁이 착해졌다고 칭찬해 주시는데 착해지지 않았어요. 어제도 화 장실 갈 때 동영이 엉덩이를 발로 세게 찼어요.”

“왜? 동영이가 민혁이 화나게 했어?”

지원의 반에서 가장 착한 현우가 말했다.

“저도 봤는데 동영이 가는 길을 민혁이가 막아서 비켜 가려는데 민혁이가 발 로 엉덩이 걷어찼어요. 동영인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그거 말고도 애들 많이 맞았어요.”

“선생님은 민혁이의 폭력이 완전히 사라진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럼 그 동안 그런 이야길 왜 안했어?”

다시 영민이가 말했다.

“민혁인 자기 아빠가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며, 우리 아빠 이런 사람이니까 까 불지 말라고 협박했어요. 그래서 후환이 두려워서 민혁이가 잘못하는 거 말하 지 못했어요.”

“어떤 사람?”

“자기 아빠한테는 판사가 100명, 변호사가 100명, 깡패가 500명, 불량배가 1000명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까불면 복수하겠다고 했어요.”

무언가로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 지원은 멍해졌다. 자기 아빠를 내세워 아이들에게 한 협박도 충격이지만 어른을 패고 싶다고 한 말에 대한 충격으로 강한 현깃증이 났다.

‘자신의 잘못을 나무라는 어른을 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 어른이 좀 더 크게 꾸짖었다면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도 있는 아이 아닌가? 어떤 초 등학교 아이가 꾸짖는 자기 담임의 뺨을 때렸다더니, 우리 민혁이도 그럴 수 있는 아이가 아닐까? 아! 이를 어째?’

주저앉고 싶었다. 맥이 풀렸다. 할 일은 태산인데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날 밤,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뜬눈으로 심하게 앓은 지원은 아침도 거른 채 출근했다. 민혁이가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복도로 나오라고 했다. 전례로 봐서 ‘어떤 아줌마 패고 싶다고 했어? 안 했어?’ 그렇게 물으면 자동으로 안 했다고 부정할 거기 때문에 이번엔 질문의 유형을 바꾸었다.

“민혁아, 지난 번 매계백일장하던 날, 어떤 아줌마 왜 패고 싶었어? 패주고 싶은 이유가 뭐였어?”

“제가 뛰어다닌다고 그 아줌마가 ‘아! 진짜! 너, 쫌 그렇다.’ 그래서 짜증났어 요. 그래서 패주고 싶었어요.”

“백일장하는데 마구 뛰어다니면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글을 쓸 수 있겠니? 그 아줌마가 그 정도 말한 건 아주 약한 거야. 그보다 더 크게 꾸짖을 수도 있었어. 그만하면 많이 참은 거야. 그리고 보통 아이들 같으면 그 아줌마가 그렇게 말했을 때 부끄럽고 미안해서 죄송하다며 용서를 빌었을 거야. 그런데 자기가 한 잘못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짜증난다고 어른을 패고 싶다니, 어떻 게 그럴 수 있는 거니?”

“…….”

“그럼 그동안 선생님이 너의 잘못을 지도할 때마다 선생님도 패고 싶었겠 네?”

“아니에요! 선생님은 절대로 아닌데요!”

민혁인 눈을 크게 뜨고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민혁아, 너의 그 대답이 선생님에게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

“어른들께는 아이들이 한 잘못에 대해 지적하고 지도할 의무가 있는 거야. 네 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어른보다 그렇게 하신 아줌마가 진실로 훌륭한 분이야. 그런데 사과를 드리기는커녕 패고 싶었다고?”

“…….”

입을 툭! 내밀고 서 있는 민혁이, 민혁인 그 순간에도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해 반성하는 표정이 아닌, 오직, 담임의 지도에 야속해 하는 표정뿐이었다.

‘우리 민혁일 어떻게 하나?’

단 몇분간으론 민혁이의 깊은 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지원은 일단 민혁일 교실로 들여보냈다.

‘이건 도저히 나 혼자선 감당할 수 없는 일이야.’

지원은 민혁이 엄마에게 전화하여 이틀 후 오후에 교실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오랜 교단생활 중 단 한 번도 반 아이 일로 학부모를 부른 적은 없었으나 민혁인 달랐다. 그대로 키우다간 어떤 엄청난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아이이므로 학부모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은 그 때까지의 학부모 면담 중 가장 힘든 면담이 될 것이었다.

심란한 표정으로 교실로 들어와 지원의 이야기를 계속 굳은 표정으로 듣던 민혁이 엄마가 말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인데 우리가 민혁일 그렇게 키운 것 같습니다. 공부하기를 너무 힘들어 해서 너는 음악만 잘 하면 되니까 공부는 못 해도 된다고 말한 것도 우리 부모고, 또 전에 민혁이 선배들이 괴롭히려 한다고 해서 아빠한테 부하가 많아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으니 싸움이 나면 즉시 말하라고 한 것도 애들 아빠고……. 민혁 일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저희들입니다. 정말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긴 시간의 상담이 끝나고 복도로 나가 배웅하려는데 민혁이 엄마가 지원의 손을 꼭 잡았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한번 안아 봐도 돼요?”

지원은 말없이 민혁이 엄마를 안아주었다.

“민혁인 아직 어리니까 유연성이 있어요. 잘 지도하면 바른 아이가 될 겁니 다. 희망이 있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그런데 포옹을 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계속 지원을 안고 있는 민혁이 엄마,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지원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충격을 드려서 미안해요. 민혁이가 한 그릇된 말과 행동, 민혁이로 인해 힘 들었던 이야긴 마지막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민혁일 참된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부모가 협조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할 수 없이 오시라 했어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잘 하셨어요. 저희도 알아야지요. 선생님은 우리 민혁이의 선생님 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저의 스승님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을 닦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민혁이 엄마, 지원의 얼굴에도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 어른을 패고 싶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의 지도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는 생각에 지원은 자기 옆의 특석에 있던 민혁이의 자리를 원래의 자리인 맨 뒤에 갖다 놓았었다. 그것은 민혁이에게 주는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원은 민혁이의 책상을 다시 앞으로 갖다 놓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자신의 책상을 뒤로 옮겼을 때 민혁이가 받은 충격을, 다른 색깔의 충격으로 민혁이에게 새로운 믿음과 기쁨을 주고 싶어서…….

다음 날 아침, 원래의 자리로 옮겨진 책상을 본 민혁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순수한 소년의 미소가……. 엄마를 울게 하고 담임을 울게 한 민혁인 책상을 뒤로 옮겼을 때 받았던 충격,

‘드디어 우리 선생님이 날 버렸구나!’

에서

‘아직은 우리 선생님이 날 깊이 사랑하는구나!’

에 대한 믿음으로, 민혁인 자꾸만 곁길로 가려는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공부 시간에 일일이 짚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고 우유 당번이 아닌데도 그 무거운 우유 박스를 혼자 들고 오고, 늘 친구들 기분 거슬리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하더니 친구들도 따뜻이 대하고……. 전에 오직 담임에게 보이기 위해 일시적으로 하던 선행과는 분명히 다른 색깔의 변화였다.

‘그래, 우리 민혁인 지금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가고 있는 거야. 시간에 비 례해서 민혁인 정말 달라질 거야.’

2014년 10월 15일 수요일 오전 10시에 김천 직지사에서 김천예술제 문예백일장이 열린다고 했다. 지원은 전학년에 걸쳐 참가 신청을 받고 자신의 반 아이 모두를 데리고 백일장에 가고 싶어서 학부모들에게 편지를 썼다.

3학년 4반 학부모님께

3학년 4반 학부모님, 안녕하십니까?

학부모님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격려로 지난 번에 실시한 점필재 백일장과 매계백일장에서 우리 반 친구들이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0월 15일 오전 10시에 김천 직지사에서 김천예술제 문예백일장이 열린다고 합니다. 담임의 생각으론 우리 반 친구 모두가 백일장에 참가하여 실력도 뽐내고 먼 훗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그 때 쯤이면 직지사에 단풍도 곱게 물들 것 같아 입상을 떠나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글을 써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 한번 욕심을 내보았습니다.

원래 학부모님께서 아동을 인솔하셔야 하는데 맞벌이 등으로 인솔이 어려운 친구는 저의 차에 태워가려고 합니다.

우리 반 학부모님 모두가 담임의 생각에 동의하시면 그렇게 하도록 추진하겠습니다.

그리고 김천예술제 문예백일장은 다른 백일장과는 달리 일반부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 대회장에 들여보내고 학부모님들께선 일반부에 참여하셔서 글재주를 뽐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작년에도 저의 반 학부모님들이 참여하셔서 장원을 하시는 등 자녀와 함께 입상하여 더욱 뜻 깊은 대회가 되었습니다. 글을 써보지 않았더라도 누구에겐가 편지 한통이라도 써 보셨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제가 개령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저의 강권(?)으로 참여하신 학모님들이 장원, 차상, 차하, 모두 휩쓴 적이 있고, 작년에 실시한 일반부 백일장에서도 19분의 입상자 중에서 우리 학교 학부모님들이 12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참여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원고지 쓰는 법과 참고 작품은 아동 편에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0시부터 백일장이 시작되기 때문에 점심은 백일장 끝나고 가족 단위로 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가족 소풍 가시는 셈 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참가 여부를 아동 편에 전해주시면 참가 신청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10월 2일 담임 서지원 드림.

지원이 시골학교에 근무할 땐 학부모들에게 직접 글쓰기 지도를 했지만 지금의 학부모들은 거의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안 되어 따로 글쓰기 지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학급 홈페이지 학부모 광장에 자신이 쓴 동화, 시, 수필, 독후감, 단편소설을 수시로 올려놓고 읽어 보도록 했다. 그리고 대회에 앞서 아이들 편에 원고지 쓰는 법을 상세히 적어 보냈고 지원이 쓴 수필 3편도 참고하라며 보냈었다.

학부모들의 협조로 지원의 반 아이들 모두가 백일장에 참가하기로 하고 부모가 인솔하기 힘든 아이는 지원의 차에 태워 가기로 했다.

10월 15일 아침, 작년에 지원의 반이었고 현재 문예부인 가인이가 부모의 인솔이 어렵다 하여 지원의 차에 태우고, 맞벌이로 인솔이 곤란하다는 지원의 반 한태원, 박창민, 주성준, 이재현을 태우고 직지사를 향하여 출발했다. 대회장 앞까지 차를 몰고 갈 수도 있으나 지원은 아래 쪽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가을길을 걸었다. 빨간빛 벚나무 단풍, 은행잎도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지원은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파랗게 파랗게 높은 하늘 가을길은 고운 길…….”

대회장에 도착하자 먼저 온 아이들이

“선생님!”

하고 달려와 지원의 품에 안겼다. 그 때 어떤 중년 여인이 다가왔다. 작년에 가르친 호준이 엄마였다.

“선생님, 보고 싶어 죽~~~을 뻔 했어요.”

“저두요. 저도 많이 보고 싶었어요. 오늘 일반부에 꼭 참가하세요. 아들과 함 께 백일장에 참가하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잖아요?”

“예, 그럴게요. 글은 써보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부탁이니 한번 도전해 볼게 요.”

아이들을 대회장에 들여보내고 홀로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지원, 지나가던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혹시 서지원 선생님 아니세요?”

“맞는데 누구세요? 우리 학교 학모님? 아님 다른 학교 선생님?”

“아니에요. 그냥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절 아세요?”

“교육부에서 나온 책 보고 알고 있었어요.”

“아! 꿈나래 1월호요?”

“예.”

2012년 11월, 조선일보와 교육부가 공동 주최한 ‘올해의 스승상’ 현장실사 때 심사위원으로 내교한 교육부의 김윤기 연구사님이 심사 후에 기자 두 명을 데리고 와서 취재를 했고 2013년 ‘꿈나래’ 1월호에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바보 선생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되다.’란 제목으로 기사와 사진이 함께 실렸는데 그 내용을 본 것이었다.

“저, 그 기사 보고 정말 감동했어요. 교단에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도 계시는 구나! 하고요. 전국적으로 유명한 선생님이 우리 김천에 근무하신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또 오늘 우연히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감동적이고 기뻐요.”

“저를 너무 잘 보신 것 같아요. 전 그저 평범한 무명교사일 뿐인 걸요.”

“너무 겸손하시네요.”

“아니, 겸손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선생님도 참…….”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잠시 후, 지원의 귓가에 두 여인의 대화가 들렸다.

“동신초등학교 3학년 4반은 담임이 시인 선생님인데 오늘 반 아이들 모두가 왔다네. 지난 번 백일장에서도 그 반 아이들이 좋은 상 모두 휩쓸었는데……. 그 반 아이들, 정말 복 터졌다. 어떻게 하면 그런 선생님을 만나지?”

“호호호……. 바로 우리 영민이가 그 선생님 반이야. 행운아지. 우리 영민이 지난 번 매계백일장에서 입상했어.”

“정말? 부럽다, 부러워!”

돌아보니 영민이 엄마였다. 지원의 얼굴에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다음 날 저녁, 혹시나? 해서 지원은 김천신문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김천예술제 문예백일장 입상자 명단’

기사 제목을 보는 지원의 가슴이 콩콩 뛰었다. 내용을 보려고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학년 운문부 장원 동신초 3학년 4반 장보영, 저학년 산문부 장원 동친초 3학년 4반 허지원, 고학년 운문부 차상 동신초 5학년 4반 윤아진, 김민주, 고학년 산문부 장원 동신초 6학년 4반 여지윤……. 부문마다 맨 위엔 지원이 가르친 아이들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원이 찾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민혁이, 우리 민혁이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꼭 있어야 하는데…….”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저학년 산문부 차하에 김민혁이란 이름이 분명히 있었다. 지원의 몸이 떨렸다. 손을 벌벌 떨며 가방에 든 아동명부를 꺼내어 민혁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혁이 엄마! 축하해요!”

“선생님, 뭘요? 뭘 축하해요?”

“김천예술제 문예백일장 발표났는데 우리 민혁이가 뽑혔어요. 3등급인 차하 로…….”

“예? 정말이에요? 사실이라면 이건 기적인데요.”

민혁이 엄마의 음성도 떨리고 있었다.

“기적은 무슨, 민혁이의 피나는 노력의 댓가죠. 그런데 민혁이 엄마 이름은 뭐죠? 일반부도 발표났는데…….”

“제 이름은 김미나입니다.”

“아! 민혁이 엄마도 차하네요! 아들과 똑같은……. 축하, 축하해요! 민혁이 집 안에 큰 경사가 났네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게 모두 선생님 덕분입니다. 선생님 정말…….”

민혁이 엄만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두 아들 때문에 고생한 일, 학교에 자주 불려 다니고, 학부모들에게 수시로 항의 받고……. 그런 아픔 끝에 얻은 영광이라서 더 감동적이고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곧이어 문자가 왔다. 직지사에서 만난 호준이 엄마였다.

입상자 명단에 우리 호준이 이름은 없지만 선생님 반이 운문 장원, 산문 장원 등 좋은 상은 모두 휩쓸었네요. 정말 대단해요. 선생님 덕분에 저도 참가하여 차하로 입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원이 바로 답장을 했다.

입상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4학년 호준이가 6학년을 이기기는 힘듭니다. 학년 구분 없이 심사하니 불리할 수밖에 없어요. 내년엔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호준이 잘 위로해 주세요.

다음 날 아침, 지원은 아이들이 등교하는 대로 안아주었다. 입상한 아이에겐 칭찬을, 입상하지 못한 아이에겐 위로의 말을 전하며…….

다른 아이들보다 등교가 늦은 민혁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뒷문이 열릴 때마다 그곳으로 시선이 갔다. 드디어 민혁이가 나타났다.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열 살짜리 소년의 순수한 웃음이…….

“민혁아, 축하해! 거봐 되잖아? 해냈잖아? 선생님이 뭐랬어? 너에겐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했잖아?”

다른 아이들보다 더 격하게 담임의 칭찬을 받는 민혁일 아이들은 시샘하지 않았다. 민혁인 선생님의 그런 칭찬을 받아야 할 만큼 마음이 많이 아픈 아이란 걸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민혁이로 인하여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한 선생님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아는, 착한 아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수업 전에 교장 선생님이 메신저를 보냈다.

저학년, 고학년 4개의 장원 중에서 우리 학교가 3개를 가져왔고, 백일장 상을 우리 학교가 싹쓸이했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서지원 선생님,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날부터 민혁인 정말 달라졌다. 전처럼 담임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던, 상반된 두 얼굴이 아닌……. 전담 시간에도 수업태도가 좋다고 했고, 다른 아이들로부터 어떤 신고도 들어오지 않았으며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쳤다. 아이들에게 부리던 심술도 사라지고, 하지 말라는 건 하고, 하라는 건 하지 않는 청개구리 근성도 멀리멀리 사라졌다. 항상 불만에 차 있던 얼굴이 소년의 순수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상장 한 장의 힘, 그것은 참으로 위대했다.

민혁이 아빠는 김천시내 중심가에 있는 실용음악학원 원장이었다. 그동안 자기 아들도 지도하여 11월 7일 저녁 7시에 김천예고 강당에서 열리는 공연에 유명인을 초청하고 그 공연에 아들과 함께 출연한다는 초청장을 담임과 지원의 반 아이들 모두에게 돌렸다. 민혁인 공연에서 드럼을 친다고 했다. 초청장을 받은 아이들은 너도 나도 민혁이의 공연에 가겠다고 했다.

지원은 단골 꽃집에 꽃바구니를 부탁했다.

“저의 제자 공연이니까 특별히 예쁘게 만들어 주세요. 리본엔 ‘민혁아, 사랑 해. 서지원 선생님’이라고 써서 배달해 주세요.”

“알았어요. 저의 재주를 총 동원해서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예쁜 꽃바구니를 만들어 드릴게요.”

지원은 민혁이의 공연에 가서 직접 꽃바구니를 주며 격려하고 싶었지만 그 날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안타까웠다.

학년 초부터 반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늘 거슬리는 말로 아이들에게서 멀어졌던 민혁이, 하지만 달라진 민혁이와 민혁이의 멋진 공연을 본 아이들은 민혁이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민혁인 온전히 순수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민혁이가 그 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린 많은 시간은 그 만큼 민혁이가 앓았던 병의 깊이가 깊었다는 반증이었다.

2014년 12월 2일, 교내 기말고사가 있었다. 민혁이는 평균 97점으로 반에서 7등이었다. 1학기말고사에선 뒤에서 두 번째였었는데…….

다음 날 저녁에 지원이 전화를 했다.

“민혁이 엄마, 오늘 알림장에 붙여 준 민혁이 성적 보셨죠?”

“예, 봤어요.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기절할 뻔했어요.”

“오늘 민혁이 안아주세요. 아주 따뜻하게 오래도록…….”

“예, 그럴게요. 선생님, 고마워요. 선생님의 깊은 사랑이 결국 승리했네요. 제 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선생님을 잊지 못할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민혁이 부모는 민혁이의 좋은 성적을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었다. 담임의 민혁이에 대한 깊은 사랑과 격려, 그리고 민혁이의 노력이 이루어낸 아름다운 결실이었다.

지원은 민혁이를 자신의 교단생활을 가장 보람있게 보내라고 하늘이 보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힘들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도 많았고, 속은 다 타서 숯검정이 되었으며, 민혁이 때문에 병이나 밤을 하얗게 밝힌 날도 많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안고 왔었다. 민혁이를 보통 아이로 돌려놓는데 걸린 많은 시간, 하지만 그 힘들었던 느린 시간에 반비례하여 민혁인 빠른 속도로 자신을 발전시켜 밝은 미래를 예약할 거라고 지원은 확신했다.

2014년 12월 10일 밤, 청주의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 의사가 그러는데 엄마 일주일 못 넘길 것 같대. 그러니까 17일이 마지 노선이야.”

“그래? 누나가 이번 주 토요일 오전에 갈게.”

사실 지원의 친정 어머니는 일년 전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변을 보지 못하여 검사해 보니 장협착 판정을 받았고 수술을 하려고 배를 열었다가 암을 발견한 것이다. 그 땐 이미 암세포가 여러 곳으로 퍼진 상태였다. 그 정도면 통증이 있었을 텐데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고 그 후로도 통증은 없었다. 그래서 전혀 예감하지 못한 것이다. 암은 죽음 자체보다 통증이 더 무서운데 신기하게도 지원의 어머니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만지면 그 부분만 아프다고 했을 뿐……. 손을 쓸 수도 없는 말기암 진단에 자식들은 마냥 허탈해 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별을 준비해야만 했었다.

12월 13일 새벽, 지원은 아침도 굶은 채 청주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에 있는 어머니, 멀리서 왔다고 면회 시간이 아닌데도 면회를 시켜주었다. 아직 의식은 있었다.

“엄마, 저 왔어요.”

“누구세요?”

초점 잃은 눈으로 지원의 어머니는 낯선 사람을 보듯 맏딸을 바라보았다. 작년 봄부터 치매를 앓고 있는 지원의 어머니는 그렇게 지원이 갈 때마다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늘 안타까움에 가슴을 치곤 했었다.

“엄마, 오래 살아야 해요. 그래야지 외손녀 시집가는 것도 보고, 엄마가 키운 정길이 장가가는 것도 볼 수 있잖아요?”

사실 지원의 쌍둥이 중 큰 아이는 지원의 친정 어머니가 키웠다. 산후 조리하러 친정에 갔을 때, 맡기고 왔었다.

“직장생활하며 아이 둘을 어떻게 키우니? 정길이는 내가 키워 줄게.”

그렇게 해서 큰 아들이 유치원갈 때까지 시골에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키웠다. 지원의 친정 아버진 전매공사를 퇴직하자마자 신부전증이란 병을 얻어 10년간 투병하다 세상을 떴다. 지원의 시어머니는 하루라도 빨리 손자를 데려오라 했지만 외손자 보는 낙이 전부인 병든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올 수 없어 유치원 갈 때까지 그곳에 맡겨 놓았었다.

직장생활하는 남편 때문에 혼자서 논일, 밭일을 다하고 집안 일도 해야 했던 힘든 삶, 그리고 별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로 고단했던 삶, 거기다가 말년에 병을 얻어 마지막까지 고생하는 어머니가 너무나 가엾어서 지원은 강하게 흐느꼈다. 하지만 짧은 면회시간으로 마음껏 아파할 수조차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엄마, 다음 주말에 다시 올게요.”

하지만 지원의 어머닌 낯선 사람을 보듯, 별 반응이 없었다.

2014년 12월 18일 저녁, 어둠이 깔릴 때쯤 지원의 집 차고문 밖과 뒷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뒷집 개가 짖음을 멈추어도 차고 쪽 개는 계속 짖어댔다. 목소리로 보아 큰 개 같았다.

한참 후, 너무 시끄러워 대문을 나가 차고 문 쪽으로 갔다가 들어온 지원의 막내가 말했다.

“엄마, 왠 개 한 마리가 우리 차고 문 앞에 앉아 있어. 그 개가 거기 앉아 있 으니까 뒷집 개가 계속 짖는 것 같아.”

“개가 거기 앉아 있다고? 떠돌이 개인가? 근데 왜 하필 거기 앉아 있지? 큰 개니? 짖는 소리로 봐선 큰 개 같은데…….”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큰 개 같았어.”

둘의 대화 중에도 차고 쪽 개는 계속 짖어대고 있었다.

“저 개 누구네 개인진 몰라도 배고프겠다. 일단 먹을 거 갖다 줘 봐야지.”

지원은 사료와 꽁치 통조림을 따서 각각 다른 그릇에 담아 들고 대문을 나가 차고문 쪽으로 갔다. 막내가 휴대폰 불빛을 비추어 주어서 보니 개는 셔터 바로 옆 담벼락에 붙어 앉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짖음도 멈추었다.

“이상하다. 떠돌이 개 같으면 사람이 가면 피할 텐데 왜 저렇게 꼼짝 않고 앉 아만 있지? 뒷다리를 못 쓰나? 그래서 누군가가 여기 갖다 버린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얘, 집에 가서 박스 하나 가지고 와. 이 매서운 추위에 저 시멘트 바닥에 앉 아 있으면 얼마나 차갑겠니?”

“알았어.”

막내가 박스를 가져와 접어서 개가 앉아 있는 바로 앞에 깔아주었으나 개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원이 사료 그릇을 가까이 가져 가자 막내가 말했다.

“엄마, 물릴지도 모르니 조심해.”

“알았어.”

지원이 사료와 꽁치 그릇을 앞에 놓으며

“배고프지? 이거 먹어.”

하자 그 개가 벌떡 일어섰다.

“어? 일어나네! 뒷다리가 고장난 건 아니었군.”

그런데 개가 천천히 다가와 먹이가 아닌 지원의 손등을 빨고 목과 얼굴에 뽀뽀를 해대는 것이었다. 너무나 격렬했다. 당황한 지원,

“어머! 얘가 왜 이래?”

그리고는 꽁치를 정신없이 먹어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료는 먹지 않았다.

“뽀뽀 고마워. 뽀뽀의 댓가로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재워준다.”

“엄마, 어떻게 재워줘? 개집도 없잖아? 이렇게 큰 개를 유리가 사는 현관 안 에 들일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이 추위에 여기에 그대로 둬? 집에 데려가서 건물 옆, 바람 막는 곳에 따뜻한 것 깔아주면 돼. 오늘 밤만 거기 재우고 대문 앞에 써 붙이자. 개를 보호하고 있으니 찾아가라고……. 자, 이리와.”

개는 지원을 따라 순순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전등 불빛에 비친 낯익은 얼굴! 지원이 놀라서 외쳤다.

“아니! 얘는 오래 전에 집 나간 진돗개 해리 아냐?”

“엉? 말도 안돼! 그 때가 언젠데? 까마득한 옛날인데…….”

“아니야. 이것 봐. 얼굴은 우리 해리와 완전히 똑 같고 꼬리가 오른 쪽으로 굽은 거 하며…….”

“어? 진짜!”

개는 꼬리가 떨어져라 계속 흔들며 지원에게 매달렸다. 마치

‘엄마! 저 해리예요! 오래 기다리셨죠?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지원은 개를 안고 울부짖었다.

“해리야, 고마워! 이렇게 돌아와줘서……. 너 잃고 엄만 큰 병이 나서 죽는 줄 알았어. 엄만 네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줄 알았는데, 그래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 데……. 아! 어떻게 이런 일이!”

해리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계속해서 지원의 손, 목, 얼굴에 뽀뽀를 퍼부어 대고 있었다. 소란함에 지원의 남편이 마당으로 나왔다.

“자기야, 우리 해리가 돌아왔어! 진돗개 해리가!”

“뭐? 말도 안돼! 그 때가 언젠데, 다른 개겠지.”

“아니야. 우리 해리 맞아. 틀림없는 우리 해리야.”

“아닐 걸.”

그 때 개가 화단에 들어가 쉬를 했다.

“어! 저 모습! 숫놈이 다리 들지 않고 엉거주춤 앉아서 쉬해서 정말 특이한 놈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그러잖아? 진짜 우리 해리 맞네!”

지원의 남편이 말했다. 지원은 다시 해리를 안고 펑펑 울었다.

“해리야, 도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응? 어쨌든 고마워. 엄마에게 돌 아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게 꿈이야? 생시야?”

지원은 방으로 들어가 매트와 함께 담요, 입지 않는 겨울옷을 꺼내어 현관문 앞에 깔아주었다.

“해리야, 오늘 밤은 여기서 자. 내일 엄마가 새집 사줄게.”

사실 지원은 2000년, 집 짓고 바로 당시에 근무하던 곡송초등학교에서 하얀 강아지를 데려와서 ‘유리’라고 이름을 짓고 키웠다. 그런데 유리는 밥을 잘 먹지 않아 가족의 애를 태웠다. 그러던 중 2004년 3월 22일에 3개월된 진돗개 황구를 사와 ‘해리’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길렀다. 왜 그 날짜를 정확히 아냐 하면 지원의 수필집에 황구가 온 날의 일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치와와의 믹스견으로 3kg짜리 작은 개였으나 해리는 형아 대접을 해주고 유리가 하는대로 잘 따라했다. 시샘에서인지 입이 짧던 유리가 밥도 잘 먹고 해리와 잘 놀았다.

그런데 해리는 2006년 가을, 열린 차고문으로 집을 나갔다. 해리를 잃고 지원은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해 열흘만에 몸무게가 3kg이나 빠졌다. 몇날 며칠을 가족이 선산 골목, 골목을 샅샅이 찾아다녔고, 혹시나 해리가 들어올지도 몰라 석달 넘게 낮이나 밤이나 대문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 마을방송도 하고 전단지도 붙였다. 하지만 해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지원의 깊은 병은 쉽게 낫지 않았고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자 상처는 서서히 아물고, 흑백의 추억 속에만 있던 그 해리가 8년만에 나타난 것이다. 상상조차 못한 일, 그건 커다란 감동이기도 했지만 엄청난 충격이었다. 기절할 만큼 행복한 충격!

지원의 품에서 놓여나자 자기 꼬리를 잡으려고 시계 방향으로 뱅글뱅글 도는 해리를 보고 막내가 말했다.

“진짜 우리 해리 맞네. 그 때도 꼬리 잡으려고 날마다 뱅뱅 돌았는데……. 와! 이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야. 어떻게 8년만에 집을 찾아오지? 정말 대단해! 대전으로 팔려간 진돗개가 진도의 자기 집으로 찾아 가는데도 7개월만이었다던데…….”

“그래, 이건 기적같은 일이야.”

“이런 기적이 우리에게 일어나다니!”

자세히 보니 해리는 갓난 아기 손가락 굵기의 비닐 목줄을 달고 있었다. 그것을 끊고 탈출한 거였다. 바로 그 목줄에 답이 있었다. 누군가 해리를 잡았는데 진돗개라서 보신탕집에 팔기는 아깝고 쇠줄을 매어 집을 지키게 하다가 나이가 많아 더 늙으면 고깃값도 제대로 못 받을 것 같으니 팔아버리려고 쇠줄을 풀고 임시로 비닐끈으로 묶었는데 해리가 눈치를 채고 있는 힘을 다 하여 이빨로 목줄을 끊고 탈출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해리는 돌아오고 싶어도 쇠줄에 묶여 있어 돌아오지 못하다가 이제야 약한 목줄을 끊고 아주 오래 전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몇날 며칠을 걷고 또 걸어 집을 찾아온 것이리라.

지원은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밥에 참치를 듬뿍 넣어 비벼서 해리에게 주었다. 해리는 게눈 감추 듯 단숨에 밥그릇을 비웠다. 자세히 보니 해리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뼈만 남은 해리!

“불쌍한 것! 세상에서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는데, 얼마나 굶주린 거야? 이 혹독한 추위에……. 도대체 몇달을 헤매다 집을 찾은 거야?”

흥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원은 수시로 현관 밖으로 나가 해리를 안아주며 꿈이 아님을 확인, 또 확인했다.

“해리야, 고마워. 이게 꿈은 아니지? 깨어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꿈 은 결코 아니지? 그동안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니?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어 얼마나 괴로웠니? 널 잃고 엄마의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갈 때, 너도 그랬 겠구나. 엄마가 아파했던 것처럼 너도 그랬겠구나. 하지만 이렇게 늦게라도 돌아와줘서 정말 고마워. 엄만 지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된 것 같아.”

그 날 밤, 지원은 한숨도 못 자고 해리의 귀가를 확인, 또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출근한 지원은 아이들에게 돌아온 해리 이야길 했다. 지금까지의 그 어느 수업시간에도 그처럼 집중한 적이 없는 아이들, 얼굴엔 감동 이상의 것이 흐르고 있었다. 지원은 웃고 있었지만 두 볼엔 쉴새 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 위에도…….

“선생님, 진짜 감동이에요.”

“맞아요. 책에 나오는 진돗개 이야기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에요. 그 개는 자 기 집 찾아가는데 7개월 걸렸지만 선생님네 해리는 8개월도 아닌, 8년만에 돌아왔으니까요.”

“해리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집을 찾아오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 해요. 해리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게. 선생님도 그게 궁금해. 누구네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탈 출했고 어떻게 집을 찾아왔는지…….”

“해리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지원의 이야기를 들은 교사들도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다.

“와! 이건 정말 극본 없는 한 편의 드라마네요. 정말 감동적입니다.”

“선생님, 동화 같아요. 동화속에나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선생님, 이건 그냥 묻혀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사연이네요. 동화로 한번 써 보세요.”

“그럴까요?”

집에 전화하니 막내가 해리를 선산의 ‘중앙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서 피검사, 초음파 검사를 비롯한 각종 검사를 하여 구충제를 받고 동물 등록도 했다고 했다.

퇴근시간은 네시 반, 그 날은 왜 그리 시간이 안 가던지! 거북이가 되어버린 시계를 원망하는 지원, 돌아온 해리가 보고파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과속을 하여 집에 도착한 지원! 차에서 내리는 지원에게 달려간 해리는 격한 애정 표현을 했다.

“해리야, 엄마 보고 싶었쪄? 엄마도 오늘 우리 해리 보고파서 죽~~~을 뻔했 는데……. 해리야, 우유 먹자.”

지원은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기 몫의 우유를 먹지 않고 가져와 그릇에 따라주었다. 해리는 몇초만에 다 들이켰다. 전에 지원은 장난을 치기도 했었다. 우유를 따다가 잠시 멈추면 해리는 지원의 손목을 툭! 치곤 했다. 그러다 다시 따려 하면 입맛을 다시며 지켜보고 또 멈추면 손목을 툭! 치고……. 아마 해리도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짧은 겨울 해를 원망하며 지원은 해리의 저녁 준비를 했다.

“엄마, 얘는 사료 안 먹어 본 애 같아. 유리가 먹는 사료를 주니까 냄새만 맡 고 안 먹어서 아침에 끓인 미역국에 밥 말아주니 허겁지겁 먹던 걸. 짬밥 먹 여 대충 키운 것 같아. 목욕도 한번 안 시킨 것 같아. 해리 만지고 손 씻으면 검은 물이 나와.”

“그래도 얘는 진돗개니까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야. 해리가 똥개였으면 아마 잡힌 즉시 보신탕집으로 갔을 거야. 누군진 모르지만 죽이지 않고 이만큼 키 워줬으니 고맙지.”

“하긴…….”

지원은 사료에 밥과 참치를 섞어 비벼 해리에게 주었다. 해리는 며칠 굶은 개처럼 1분도 채 안 되어 밥그릇을 비우곤 지원에게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해리, 고마워. 엄마를 잊지 않고 돌아와 줘서……. 앞으로 엄마가 더 잘해 줄게. 네가 돌아오길 참 잘했다고 느껴질 만큼 예뻐해 줄게. 그리고 해리야,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제발 엄마보다 일년이라도 더 오래 살아야 해. 엄만 너 잘못되는 거 죽어도 못 봐. 그러니 꼭 엄마보다 더 오래 살아. 알았지?”

해리를 안은 지원의 얼굴엔 또 쉴새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돌아온 해리로 인해 지원의 눈은 수도꼭지가 되고 말았다. 그 눈물은 바로 감당하기 힘든 행복이 준 선물이었다.

지원은 막내와 같이 따뜻한 물로 해리를 목욕시키고 드라이기로 털을 말려주었다. 그리고 새로 산 해리의 집에 부드러운 담요를 깔아주었다.

“해리야, 잘 자. 오늘 밤엔 엄마 꿈꿔, 응? 엄마도 네 꿈 꿀게. 알았지?”

2014년 12월 20일 오전 4시 31분, 지원의 휴대폰이 울었다.

‘이 불길한 예감은 뭐지?’

지원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휴대폰을 집어 드는 팔이 떨렸다.

“누나, 엄마 지금 많이 위독하셔. 숨을 길게 몰아쉬는 거 보니 얼마 못 갈 것 같아.”

“그래? 지금 바로 출발할게.”

지원은 교감에게 전화하여 특별 휴가를 내 달라고 부탁하고 급히 차를 몰고 나섰다. 눈발이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엄마, 제발 조금만 참아주세요.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맏딸이 달려가 고 있어요.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마지막으로 맏딸 얼굴 한번 보고 가 셔야 하잖아요?”

지원의 어머니는 지원이 크게 보도된 2012년 12월 12일자 조선일보를 닳고 닳도록 읽고, 그것도 모자라 가지고 다니며 이웃 사람들에게 자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맏딸이 작가라는 걸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고도 했다. 그렇게 지원의 어머니에겐 8남매 중, 지원이 가장 자랑스런 자식이었다.

하지만 내륙고속도로에서 중부고속도로로 들어가기 직전에 블루투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순간,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내렸다.

“누나, 엄마 방금 운명하셨어. 청주장례식장으로 옮길 거니까 그리로 와.”

“알았어.”

지원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 뭐가 그리도 급하셨어요? 맏딸이 지금 목숨 걸고 달려가고 있는데, 조 금만 더 참지 왜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셨어요? 지금껏 잘 참았는데 마지막으 로 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그 1시간 20분을 못 참으신 거예요? 엄마! 가엾 은 우리 엄마!”

출발할 땐 어머니가 떠나기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 마음이 급했지만, 그래서 목숨 걸고 달렸지만 모든 것이 끝나버린 지금, 지원의 다리도 풀려 자동으로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지원이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얼굴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엄마, 이승에서 힘들었던 기억, 가슴 아팠던 기억은 모두 내려놓고 편안히 가세요. 엄마, 저도 이제 이승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조금만 기다 려주세요. 우리 그 때 다시 만나 깊은 사랑 나누어요.’

장례식 날, 전날 내린 눈으로 세상은 온통 하얀 눈의 나라였다. 지원의 어머니와 자식들은 같은 차를 타고 지원이 태어나서 자란 충북 청원군 남일면 문주 2리로 향하고 있었다. 지원네의 뒷동산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가 잠든 그곳으로…….

다시 하얀 눈이 퍼붓고 있었다. 그 하얀 눈을 맞으며 지원의 어머니는 차디 찬 땅속에 묻히고 있었다. 말없이, 맏딸이 해준 아이보리색의 실크 수의를 고이 차려 입고 어머니는 그렇게 먼저 간 아버지 곁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지원은 뒷동산을 내려가기 전, 자신이 살던 집에 들렀다. 폐가가 되어 지원이 사방치기를 하고 뛰놀던 마당엔 마른 풀이 눈에 덮여 있었고, 안채와 사랑채 방의 문들이 떨어져 나간 을씨년스러운 집, 그곳에 길고양이들이 살고 있었다.

“너희들이 우리 집을 대신 지키고 있었구나. 고마워.”

지원은 제를 지내고 남은 음식들을 줄을 맞춰 마루에 놓아주었다. 밥, 국, 떡, 고기, 생선 등을……. 굶주린 고양이들이 달려들어 열심히 먹었다. 나그네에게 눈길 한번 주고서……. 고등어 색깔 고양이는 지원의 다리에 부비부비를 했다.

“얘들아, 언제 다시 만날진 모르지만 그 때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 다음 에 올 땐 사료와 간식 넉넉하게 가지고 올게.”

참으로 오랜만에 찾은 고향, 아픔을 안고 왔다가, 아픔을 안고 잠시 머물다, 그렇게 다시 아픔만을 안고 지원은 고향을 떠났다.

‘의사의 진단보다 3일 더 사시다 떠난 엄마, 그래, 그건 엄마가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신 마지막 선물이었어. 엄마가 3일 전에 돌아가셨다면 엄마의 장례 를 치르느라 식구들이 집을 비워 우리 해리가 돌아왔어도 집에 들이지 못해 영영 잃었을 테니까. 우리 해리가 돌아온 것조차 몰랐을 테니까. 8년만에 집 에 돌아왔는데 집엔 아무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다시 잡혀 갔다면, 우리 해 린……. 아! 그 기막힌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죽을만큼 힘들어도 참고 또 참아준 엄마, 정말 고마워요! 엄마, 이제 저에게 남은 시간 얼마 안 되지만 남은 삶도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다 갈게요. 엄마와 함께 한 시간 동안, 엄 마의 딸이어서 참으로 행복했어요. 엄마, 안녕!’

지원은 그렇게 어머니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 날 출근해 보니 학교는 이미 방학에 들어가 있었다. 아이들을 보지 못하고 방학에 들어가게 해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 미안함을 지원은 학급 홈피에 글로 올렸다.

주말, 은행 본점에 근무하는 큰 딸과, 울산의 근로복지공단 본부에 근무하는 작은 딸이 해리를 보러왔다. 해리의 간식과 장난감을 사 들고……. 해리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누나들을 맞았다.

“와! 진짜 집나간 우리 해리 맞네. 근데 까맣던 수염과 눈썹이 하얗게 세어버 렸네. 하긴 열 살이니까 이젠 할아버진 걸.”

“돌아온 건 고맙지만 왜 이렇게 늙어서 돌아온 거야?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진돗개 평균 수명이 열 살에서 열 네 살이라던데……. 해리는 죽을 때가 다 되어서 돌아온 거네. 진작 좀 오지.”

“빨리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온 거지. 매어 있었으니까. 오고 싶어도 단단 한 줄에 묶여 있어서 오지 못했던 해리는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니? 결국 허술한 목줄이 탈출을 도와준 거야. 이제라도 돌아온 것이 고맙지. 우리 해리 는 다른 진돗개들보다 더 오래 살 거야. 우릴 떠나서 보낸 많은 시간을 보상 해줄 만큼 오래오래 살 거야. 엄만 그걸 믿어.”

“엄마, 근데 우리 부서 사람들이 SBS의 ‘세상에 이런 일이’나 ‘동물농장’에 제보하라던데, 그러면 바로 달려올 거라고……. 이건 아주 드문 일이거든.”

“엄마 학교 직원들도 그런 말 많이 하는데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왜? 우리 해리 TV에 나오면 스타될 텐데…….”

“그런 거 찍자면 우리 해리 스트레스 받을 거 아냐? 그것도 싫고 또 엄마도 그런 곳에 나오는 거 싫어. 엄만 항상 조용히 살고 싶어.”

“하긴, 엄마 성격에 그건 무리지.”

“엄만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아. 그리고 이 감동이 사라질까 두려워. 그래서 해리가 돌아온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한밤 중에도 몇 번씩 마당에 나와 확인하 곤 해.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정말 감동이야. 어떻게 오래 전의 집을 기억하고 돌아온 거지? 우리 집에서 산 시간보다 밖에 나가서 산 시간이 몇배 더 많은데?”

“언니, 진돗개는 첫주인을 잊지 못한대. 그동안 돌아오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 만 단단히 묶여 있어서 돌아오지 못한 거겠지.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웠겠 어?”

“그럼. 그리움이 깊어 병이 되었을 거야.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라도 돌아와 줘서 얼마나 고맙니? 올 연말에 이런 행운이 찾아왔으니 새 해엔 우리 집에 좋은 일만 있을 거야.”

“그렇겠지?”

“그럼.”

해리를 둘러싼 지원 가족의 얼굴엔 감동과 환희의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지원은 육계 세 마리를 사서 압력솥에 삶아 고기만 발라서 유리, 해리, 그리고 고양이 별이와 길고양이들에게 주었다. 모두 맛있게 먹었다.

“해리!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해리는 지원을 한번 바라보곤 닭고기를 폭풍흡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원의 얼굴에 또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엄마, 이제 그만 울어. 내가 전화할 때마다 해리 이야기하며 울더니…….”

“알았어. 앞으론 웃기만 할게. 빨리 봄이 왔음 좋겠다. 우리 해리하고 시골집 으로 가 넓은 정원에서 맘껏 뛰어 놀게. 여긴 해리가 뛰어 놀기엔 너무 좁 아.”

“그래서 내가 원반 사왔잖아? 던져주면 달려가 물고 오라고…….”

지원은 해리를 잃고 쓴 시, 지금도 그녀의 시집에 있는 시를 읽으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해리야!

해리야!

지금 어디 있는 거니?

하늘나라로 간 거니?

어제도 오늘도

밤새껏

대문 열어 놓고 기다려 봐도

너의 그림자조자 보이지 않고…….

해리야!

널 잃고

엄마가 얼마나 아파하는지

알기나 하니?

이젠

눈물조차 말라버렸고

가슴은 다 타서 숯검정이 되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고문이다.

살아있기에

이 엄청난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거니까.

네가 이 세상에 머문,

엄마와 함께 한,

지난 2년간

엄만 참 행복했다.

내 사랑 해리야!

넌 지금 내 곁에 없지만

엄만 눈 감는 그 순간까지

널 잊지 못할 거야.

해리야!

다음 세상에선

개로 태어나지 말고

우리,

모자간으로 다시 만나

못 다한 사랑 나누자.

“우리 해리가 이렇게 살아있는지 모르고, 이렇게 다시 돌아와 엄마에게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큰 행복을 줄지 모르고 그렇게 많이 아파했었구나. 해리야, 고마워. 엄마를 죽을만큼 행복하게 해줘서……. 네가 돌아온 날, 2014년 12월 18일, 그 역사적인 날을, 엄만 눈 감는 순간까지, 아니,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야.”

8년만에 돌아온 해리로 지원네 가족의 겨울은 춥지 않았다.

지원의 생일날 저녁, 일본에 있는 큰 아들을 제외한 가족이 모두 모였다. 케잌에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지원이 촛불을 끄자 자식들이 차례로 작은 선물을 전해주고 밖으로 나갔던 큰 딸이 가방을 한 개 들고 들어왔다.

“엄마, 내 선물은 바로 이거야.”

가방의 지퍼를 열자 노란 고양이가 걸어나왔다. 지원의 동공이 커졌다.

“웬 고양이? 어? 이건 몇년 전에 죽은 우리 방울이와 꼭 닮았잖아?”

“맞아. 엄마. 방울이 꼭 닮은 애 찾는데 4년이 걸렸어. 방울이 비슷한 고양이 는 많았지만 죽은 방울이처럼 왼쪽 다리는 하얀 색, 오른 쪽 다리는 노란색인 고양이는 찾기가 정말 힘들었어. 그런데 며칠 전에 드디어 찾았어. 엄마가 전 에 방울이 보고 자주 그랬잖아? ‘방울아, 넌 왜 다리가 짝짝이니?’라고……. 그 짝짝이 다리 때문에 엄마가 방울이 더 예뻐했잖아? 엄마가 방울이 잃고 많이 아파할 때 언젠간 방울이와 꼭 닮은 애를 사주려고 했어. 엄마에겐 그게 가장 큰 선물일 테니까. 그런데 이제서야 닮은 고양이를 찾은 거야.”

“고맙다, 고마워. 그래, 엄만 방울이 잃고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많이 아팠 어. 치료라도 받다가 죽었으면 그래도 덜 아플 텐데 병원으로 가다가 죽게 해 서 미치도록 안타깝고 죽을 만큼 아팠어. 시간이 지나면 아픔의 크기도 줄어 들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지금도 우리 방울이가 마지막으로 갔던 금오동물병 원 앞을 지날 때면 가슴이 찢어져. 눈물 없인 그곳을 지날 수 없어. 지금까지 도……. 엄만 이 아이를 가엾은 우리 방울이가 살아서 돌아온 거라고 믿고 싶 어.”

“그래서 방울이와 꼭 닮은 고양이를 사 온 거야.”

“그래, 엄만 이 아이 이름을 ‘방울’이라고 지을래.”

지원은 방울이를 안았다. 새방울이도 따스한 엄마 품을 파고 들었다. 그랬다. 지원에겐 방울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선물이었다.

“근데 엄마 생일인 오늘, 또 다른 곳에서 엄마에게 아주 큰 선물을 주더라.”

“다른 곳에서 엄마에게 선물을? 도대체 그곳이 어딘데?”

큰 딸이 얼굴에 커다란 물음표를 달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인터넷에서 ‘교육부 4월의 스승’을 한번 검색해봐. 거기에 내 대답이 있어.”

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아이는 휴대폰으로 검색을 했다.

“엄마, 엄마가 교육부에서 뽑은 4월의 스승이야?”

놀란 둘째 딸이 물었다.

“응, 바로 오늘 발표가 났어.”

“와! 우리 엄마 정말 대단해요!”

막내 정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기사와 사진 찍은 거 보니 엄만 미리 알고 있었을 텐데 왜 말 안했어?”

큰 딸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생일이 음력으로 2월 24일인데 올해는 양력으로 4월 1일인 거야. 4월 1일날 발표한다고 해서 오늘 알려주려고 아껴 둔 거지.”

“근데 어떻게 엄마가 뽑힌 거야?”

“나도 그게 의문이었어. 누가 추천해준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내가 뽑혔는 지가…….”

“근데?”

“요즘 제자와 학부모가 스승을 폭행하는 등, 교단이 무너지고 있어서 교육부 에서 스승 존경 풍토와 교사의 사기 진작을 위해 작년 2월에 안창호, 주시경 선생 등 유명인사 12명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그 중 12분이 친일행적이 있 어서 모두 철회하고 주시경 선생만 5월의 스승으로 하고 6월부턴 교사 중에 서 11명을 선정하여 올 5월까지 한 달에 한명씩 발표하는 거래. 그동안 스승 상 받은 사람 중에서 선정했다고 하는데 ‘올해의 스승상’, ‘대한민국 스승 상’, ‘남강교육상’ 등 일년에 스승상 받는 사람이 수십명이고 그동안 받은 사 람이 수백명일 텐데 엄마가 뽑혔으니 대단하긴 하지. 하지만 엄만 고마운 마 음보다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훨씬 더 커.”

“왜?”

“외진 곳에서 엄마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제자를 돌보는 선생님들이 많을 텐 데 내가 뽑혀서 말이야. 사실 2월 23일에 교육부의 김태환 연구사님을 비롯 하여 네분이 개령초등학교에 와서 인터뷰하고 사진도 찍었어. 제자들과 학부 모들 인터뷰도 했고……. 그 때 알았어. ‘4월의 스승’ 발표는 4월 1일에 하고, 스승의 날 교육부에서 초청하여 기념패도 준다는 걸.”

“엄마에겐 정말 최고의 생일 선물이네.”

“맞아. 내 생애에서 가장 큰 선물이지.”

“근데 오늘 발표한 거 보고 곧 언론사에서 취재 오는 거 아냐?”

“인터뷰할 때 그러더라. 발표하면 언론사에서 취재 많이 올 거라고, 하지만 내 연락처 알려주지 말라 했어. 난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긴 엄마 성격에 그건 무리지.”

엄마 성격을 잘 아는 딸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퇴직하면 우울증 오고 여러 가지 병도 와서 힘 들어한다던데……. 왜 외할아버지도 전매공사 퇴직하시고 바로 병이 와서 투 병만 하시다가 돌아가셨잖아? 엄마, 솔직히 난 불안해. 엄마에게 우울증 같은 거 올까봐. 특히 엄만 학교에 모든 걸 걸었었잖아?”

큰 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엄만 아플 시간도 없을 걸? 할 일이 많으니까. 바쁜 벌은 슬퍼할 줄 모른다 잖아?”

“엄마, 뭐 계획 세워 놓은 거 있어?”

“응. 엄마가 왜 작년에 퇴직하자마자 시골에 있는 집을 그대로 두고 옆에 2 층 집을 새로 지은 줄 아니?”

“나도 좀 의아하긴 했어. 원래 있던 33평짜리 집만 해도 충분할 텐데 왜 그 랬나? 하고…….”

“엄만 퇴직했어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초등학교 아이들 초대해서 1박 2일 캠 프를 하고 싶어.”

“전에도 그 집에서 했는데 굳이 그 일로 집을 늘릴 필요가 있어?”

“시골 아이들은 한 반이 15명 내외라서 1박 2일이 가능했지만 30명이나 되 는 동신 아이들은 그 집에선 수용이 안 되어 하지 못했어. 개령 아이들과 찍 은 1박 2일 동영상 보고 얼마나 하고 싶어했는데……. 그 때 정말 안타깝고 미안하더라. 어쩌면 1박 2일 캠프는 도시 아이들에게 더 필요할 수도 있어. 삭막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니까. 집이 완공되면 그런 걱정 없이 아이들 과 담임을 함께 초대해서 정원에서 백일장도 열어 내 이름으로 표창하고 별 이 빛나는 밤엔 2층 테라스 별빛 아래서 잔잔한 음악속에 시낭송회도 열고, 게임과 장기자랑도 하고, 또 내가 가꾼 무농약 채소 수확, 과일 따기 체험도 하고……. 그렇게 먼 훗날까지 잊혀지지 않을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 그래 서 큰 집이 필요한 거야. 그리고 엄마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전신마비장 애인 청년을 비롯해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전원주택에 초대해 서 시골밥상도 대접하고 밤새워 이야기도 나누고, 엄마가 가꾼 농산물도 나누 어 주며 정을 쌓고 싶어. 또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이 있으면 후원도 하여 그 분들로 하여금 아직은 이 세상이 살아볼만한 세상이란 걸 느끼게 하고 싶 어. 지금까지 돌보아온 선산 길고양이, 무을 길고양이들에게 더 잘 해주고 싶고……. 그리고 오후로 초등학생들에게 글쓰기 교육 등 교육기부도 하고, 봉사단체에 가입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고도 싶고…….”

“뜻은 다 좋은데 그런 거 다 하려면 비용이 만만찮을 텐데…….”

큰 딸이 말했다.

“그게 걱정되니?”

“당연하지. 엄만 아직까지도 돈을 모르잖아?”

“엄마가 평생 돈을 모르고, 계산도 할 줄 모르고 살아왔지만 계획은 있어. 얼 마전에 아빠에게 물어보니 지금까지 저축해 놓은 것이 좀 있다 하더라. 그리 고 연금도 나오니 그거 모아서 하면 돼. 생활비는 가게에서 세 받는 걸로 하 면 되고……. 엄마가 하고픈 일로 너희들에게 손 벌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 리고 또 하나의 계획이 있는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궁금해. 지금 이야기해 줘.”

“아니,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사실 지원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으로 시어머니 이름을 딴 ‘권경순 장학회’를 만들어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싶다고 했으나 동의를 얻진 못했다.

“야야, 그런 말 하지 마레이. 내가 밤새워 삯바느질을 하고 장사를 해서 돈을 모은 건 오직 니들 잘 살라꼬 한 거제 다른 뜻은 없었데이. 그러니 딴 생각 은 아예 하지 마레이.”

하지만 지원은 3천억이 넘는 전 재산을 대학에 기부한 어느 독지가가 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독을 물려주는 것과 같다’는 그 말에 공감하기 때문에 막내까지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면 남편과 자식들의 동의를 얻어 ‘권경순 장학회’를 설립하여 경제적으로 힘들어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을 도우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생전엔 반대하셨던 시어머니께서도 하늘나라에선 잘 했다고 칭찬해 주실 거라고 믿는다.

그 어느 해의 생일보다도 뜻 깊고 행복했던 지원의 생일날 밤이 소리 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지원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은 교단으로 돌아온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원은 다시 태어나도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어 한다.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순백색 도화지 위에 좋은 것만, 아름다운 것만 그려줄 수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거라고 한다. 선생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므로…….

< 끝 >

사무실에서 야간 근무를 하고 있을 때 새벽 쯤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젊은 남자 목소리, 낯설지 않은 그 목소리가 아프게 귀를 울렸다.

“여기 별장인데요. 엄마가,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예?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구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제가 와 보니 이미 숨져있었어요.”

처음처럼 정경사와 함께 급하게 순찰차를 몰았다. 충격으로 가슴이 뛰었다.

아! 그녀는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거실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숨을 쉬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탁자에 빈 소주병이 처음보다 한 개 더 많은 3개가 올려져 있다는 것!

“어찌된 겁니까?”

“집에서 기르던 개 열 여덟살 짜리 유리, 엄마가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유리가 어제 저녁에 죽었어요. 너무나 아파하시던 엄마가 혼자 있고 싶다고 하며 나가시려다 쓰러져 제가 말렸지만 한사코 가시겠다고 해서 제가 차로 모셔다 드리고 같이 있으려니 혼자 있고 싶다며 하도 가라고 하셔서 집에 가 있었어요. 불안해서 전화해 보니 받지 않아 급하게 와 보니……. 엄마가 아무 리 말려도 제가 곁에서 지키고 있었어야 했는데, 흑흑…….”

그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일단 119를 불러 병원으로 이동시켰다.

전에 고양이 일로 전화한 일을 사과하러 왔을 때 심하게 자책하던 그녀, 그 때 좀더 따뜻한 말로 대했더라면, 전화해 줘서 선생님을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고맙다고, 농담으로라도 그렇게 말했더라면 이렇게 더 힘들 때 무의식 중에라도 전화하지 않았을까?

‘저, 지금 죽을 것만 같아요.’

그래, 지난 번처럼 죽을만큼 힘들 때 전화해 주었더라면, 그래서 숨을 거두기 전에 우리가 왔더라면 그녀를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난 가슴을 치고 또 치며 후회했다. 그녀가 동물 이야기를 하며 아파할 때도

‘그렇군요.’

‘그랬군요.’

‘다행이네요.’

그 간단한 추임새로 끝냈던 나, 그러지 말고 좀더 자상하게 대꾸해 주었더라면, 따뜻이 위로해 주었더라면, 이렇게 많이 힘들 때 하소연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눈이 펑펑 쏟아져서 쌓이고 또 쌓인다. 세상을 그대로 삼켜 버리겠다는 듯이……. 그녀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하늘나라에 도착하여 조금 먼저 간 유리를 만났을까? 지난 여름에 간 초롱이도 만나고, 그녀의 고집으로 잃었다던 아기도 만났을까?

그녀는 먼저 간 이들을 만나려고 작정하고 그런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녀에겐 8년만에 엄마를 찾아온 해리도 있고, 그녀를 만나 행복한 아롱이도 있고, 그녀가 돌보아야 할 동물이 아직 28마리나 남아있는데, 그녀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한 수많은 제자들이 있고, 그녀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데…….

살아있는 그녀를 본 건 겨우 세 번 뿐인데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왜일까?

아이들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한 그녀의 동화 같은 삶, 과연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녀의 카톡 배경화면에 있는 글일 것이다.

‘이 세상에 진실한 사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새봄이 오면 그녀의 묘비 앞에 그녀가 좋아한다는 들꽃 한 다발을 바칠 것이다. 비록 짧은 인연이었지만 동화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삶을 내게 보여준 감사함에 대한 보답으로…….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