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어린 이의 희박한 자리 최미래 묵인은 많은 것을 자라나게 한다. 나는 키가 큰 사람이 되었다. 두애는 방문을 잠그고 한나절 동안 나오지 않는다. 종종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월경 주기처럼 규칙적으로 그러나 불현듯 찾아오는 이 날에 나는 그다지 날카롭지 않은 칼을 쥐고 두애를 기다린다. 껍질이 끊어지지 않고 길게 길게 이어지도록 사과를 깎는다. 칼은 순간의 세계. 방 쪽에 귀 기울이며 멈칫하다가는 손가락이 베이거나 껍질이 끊어질 것이다. 두애는 자기만의 시간과 생각 속에서 내가 모르는 불행을 견디고 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문을 열 때마다 완전히 지친 모습이고, 먼 미래를 미리 보고 온
사람처럼 허탈한 동작과 표정으로 걸어 나온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나마 덜 갈변된 사과를 한 조각 건넬 것이다. 두애는 사과를 손바닥에 올린 채로 소파에 늘어져 있다가 결국 먹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과정은 조립식 가구를 만드는 것처럼 당연한 절차가 되어버렸다. 나는 사과의 속살로 미끄러지는 칼날과 그 감각에 집중한다. 두애의 방문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껍질이 끊어지지 않게 사과를 깎는다는 것은 한 순간 순간이 길게 이어져야 하는 일이다. 이 순간들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그냥 지나쳐야 하는 다른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비가 잠깐 쏟아졌다 그치고 해가 어느 쪽으로 기울며 가라앉고 잠자리가 베란다 창에 부딪히는 일들을 모르는 하루. 나는 두애가 나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몰두한다. 간단한 일도 몰두해서 하려고 한다. 온갖 쓰레기가 널브러진 거실을 걸으면서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만 줍고 그다음엔
종이로 된 것만 줍고, 그러다 보면 신발장 앞에 쓰레기봉투가 여섯 개 정도는 금방 쌓인다. 그래도 혼자는 외롭고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두애의 방문 그 단단한 손잡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간신히 먼 곳에 떨어뜨려 놓았던 어떤 기분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한다. 미루어 놓았던 만큼 매끈하게 성장해 있는 그것들은 작고 단단한 돌멩이 같은 것이다.
가방 앞주머니에, 주머니에, 머릿속에 조약돌이 들어 있고 운이 나쁘면 갑작스럽게 조약돌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의식하는 것은 내게 이미 오랜 습관이 되었다. 두애와는 재수학원을 같이 다녔지만 서로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누가 먼저 자기 얘기를 꺼낸 적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맥도날드에서 각자의 메뉴를 시켜 조용히 먹고 헤어졌을 뿐이었는데, 맥도날드 건너편 재즈 바에 가보자고 한 사람은 두애였는지 나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그날 이미 입안에서 조약돌을 굴리고 있었다. 망친 시험지가 가방에 있던 날이었고 학원비 납입 날짜였으며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간 몇 시간 뒤 아버지의 비상금을 훔치다 걸린 날이기도 했다. 술을 많이 먹었고, 이제 대학 안 갈 거다 어차피 가고 싶은 과도 없다, 따위의 말을 오래도록 했는데 두애는 그 지겨운 얘기를 들었다. 나는 조약돌이 자꾸 혀에 걸려 말을 더듬었다. 그 점이 창피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썼다. 두애는 말을 잘했고, 잘 들었다. 눈을
맞추면서 들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런 기분. 두애는 취미로 코스프레를 한다고 했다. 숨겨 왔던 정체를 고백하는 것처럼 사실은 말이야 나는 코스프레를 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학원이나 길거리에서나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두애가 코스프레를 하는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신기하다 신기해 두애는 주로 어떤 옷을 입을까 궁금했지만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두애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빙글빙글 사람들을 비추는 보라색 불빛과 리듬에 고개를 끄덕이며 충만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있거나 없거나 두애의 시간에는 큰 변화가 없다. 자기만의 어떤 것으로 이미 충만하니까. 아주 가끔씩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게 된 것을 제외하면 몇 달 전에 있었던 그 일에도 두애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모르겠다. 사실은 많은 것들이 두애 안에서 바뀌고 있을지도. 나는 그날 두애의 집에 없었고, 내가 없는 두애의 일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어떤 순간은 지금까지의 삶이 재정립될 만큼 많은 것들을 바뀌게 한다. 그날이 그랬다. 어떤 하루가 우리에게, 아니 두애에게 있었다. 팬이 다녀갔다고 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두애는 소파에 눕듯이 앉는다. 촛농을 많이 흘린 초 같다. 내가 건넨 사과 한 조각을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들고서 우리가 함께하는 집의 시간으로 되돌아온다. 두애가 말한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을 때 아이는 내 쪽을 흘깃 쳐다보다가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린다. 방문을 열어 보고 베란다를 살펴봐도 두애는 보이지 않는다. 일주일 정도는 금방 지나간다. 두애는 언니에게서 메시지 한 통을 받고 내게 말해 주지는 않지만, 나는 그 메시지가 꽤 절망적인 내용인 것을 알 수 있다. 두애는 보라보라 섬 같은 친구의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한다. 은재는 끼니때와 상관없이 자신이 먹고 싶을 때 시리얼을 먹고 초코바를 먹고 가끔은 식빵에 초코 잼을 발라 먹는다. 씻고 싶을 때 얘기하라고 말해 두었으나 아직 한 번도 씻겨 달라고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여전히 쉽게 잠들지 않는다. 그 점이 두애와 나를 힘들게 한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은 일도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끔찍할수록 오히려 그 안에 잘 흡수되는 타협점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고착된 시간들은 일주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일상에 완전히 스민다. 여전히 끔찍한 채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다른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서 이제 우리들은 한 가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집은 예전보다도 빠른 속도로 더러워진다. 은재는 콜라를 자주 흘리고 혼자서 놀다가 잘 넘어지고 그때마다 울지만 우리는 그냥 내버려둔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면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유튜브를 보고 있다. 종종 내게 와 게임을 방해하면 나는 얼린 요구르트를 손에 쥐여 준다. 그러면 말을 멈추고 요구르트를 녹여 먹으며 노트북 창을 물끄러미 보다가 소파로 돌아간다. 요즘은 나를 찾는 횟수가 잦은데 그건 앞니가 썩고 있기 때문이다. 은재는 손으로 입을 가리키며 아프고 슬프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양치를 시켜 주려고 칫솔에 치약을 묻히는 동안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자고 있는 은재의 입을 벌려 본 두애는 딸기향이 나는 가글을 주문했다. 은재는 가글을 입안에 오래 머금고 있다가 그대로 삼켜버린다. 나랑 두애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큰 소리로 웃는다. 우리가 웃으면 은재도 따라 웃는다. 두애는 이제 보라보라 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을 꾸미는 일도 하지 않는다. 두애의 화장품은 점점 은재의 것이 되어 간다. 은재는 이 집에 있는 것들을 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건 비단 화장품만이 아니다. 하루라도 깊게 잠드는 법이 없고 늦은 시간까지 우리와 있으려고 기를 쓴다. 나는 헤드폰을 쓰고 모른 체하는데 두애는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평소와 달리 은재는 음식투정을 한다. 나는 헤드폰을 쓴다. 그러면 금세 저녁시간이 되어 있다. 가끔 뒤를 돌아볼 때마다 거실 바닥이나 소파를 수건으로 훔치는 두애가 보인다. 두애는 콘셉트 자체를 아이 엄마로 잡은 것 같다. 집 안은 여전히 지저분하고 은재는 씻지 않고 해결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두애 혼자 바쁘게 움직인다. 은재는 아무도 자신에게 음식투정의 이유를 물어보지 않자 노래 부르듯 말에 리듬을 붙여 찡얼거린다. 우리는 마트까지 버스를 탈지 걸어갈지 고민한다. 은재는 레이스가 여러 층으로 겹쳐진 긴 치마를 입고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돈다. 햇빛도 좋고 바람도 좋고 이런 날에는 조금 걸어도 좋을 것 같아. 두애와 나는 눈으로 대화를 나눈 후 시내 쪽으로 걷는다. 푹 자고 싶지만 나는 이미 아까부터 깨어 있다.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두애와 나는 남들이 자는 시간에 잠들어 본 적이 거의 없다.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어도 어둠은 금방 익숙해진다. 두애는 가끔 나 몰래 컴퓨터를 한다. 나는 그때마다 깨어 있을 때가 많다. 열린 문틈으로 눈을 가늘게 뜨면 두애의 작은 등 너머 컴퓨터 창이 일부분 보인다. 두애는
탈퇴했던 인터넷 카페를 본다. 카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의상 사진으로 가득하다. 색깔이 선명하고 화려해서 멀리서 봐도 알 수밖에 없다. 나는 언젠가 두애가 한 말을 기억한다. 두애는 오늘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얼른 저녁이 되기를 기다린다. 사과 서너 개가 담긴 쟁반을 더러운 거실 가운데 놓고 앉아 껍질을 벗긴다. 결국 칼갈이를 사지 못했다. 무딘 칼은 날카로운 칼날보다도 위험하다. 칼을 쓸 때는 그 대상만을 생각해야 하는데, 무딘 날에 익숙해지면 머릿속에서 사과를 쉽게 놓치기 때문이다. 은재는 유튜브를 보면서 우유와 부드러운 식빵을 먹고 있다.
충치가 더 악화된 것 같다. 주로 눅눅해진 시리얼을 먹거나 식빵을 우유에 적셔 먹는다. 그 모습은 팥죽을 오랜 시간 식혀 먹는 노인처럼 보인다. 두애가 방 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숱한 날 중에 오늘만큼은 은재가 있고 그래서 유난한 날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린아이 체취와 우유 냄새, 항상 틀어져 있는 텔레비전 소리, 바닥에 흩어져 있는 시리얼 조각들, 햇빛, 베개 두 개, 머리카락. 평소와 다름없는 낮잠의 분위기. 지금 여기 이 안에서라면, 나는 사과를 깎으며 애쓰지 않아도 닫혀 있는 방문과 두애가 의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과를 깎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평소에는 있는 둥 마는 둥 느껴졌던 은재가 무방비한 나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관찰하려 하지 않아도 모든 감각이 슬그머니 그쪽으로 향한다. 나는 사과의 푸른 향을 맡으면서 껍질이 아닌 속살에 칼날을 밀어 넣어 버린다. 혼자만 아는 실수가 몇 번 일어난다. 반복되는 실수의 이유는 두애가 없는 탓이다. 두애가 없으니까
보호자 딱지가 저절로 내게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은재와 나는 한 달에 한 번쯤 둘만 남겨진다. 우리는 그때마다 조금 어색해진다. 나는 은재가 오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과를 깎고 청소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몰두하지 못한다. 은재는 치과에서 충치 치료를 받는다. 앞니 한 개는 안쪽부터 너무 썩어버려 일반적인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는다. 두애와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은재는 일부러 우리 앞에서 가글을 하고 삼킨다. 그건 일종의 퍼포먼스이고 두애와 나는 착한 관객이 되어 웃는다. 우리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체감하지 못한다. 두애는 새로운 취미로 집을 꾸민다. 잎이
넓은 인조 식물을 사들이고 나무로 된 드림캐처와 풍경을 창문마다 달아 놓는다. 두애의 방은 온갖 조잡스러운 것들이 모여 점점 정체 모를 섬이 되어 간다. 플라스틱 식물과 각종 쓰레기들 사이에 잘 차려입은 두애와 은재가 앉아 있다. 그 모습은 이상하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익숙하게 접하지만,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이상한 채로 두 사람 곁에 앉아 함께 텔레비전을 본다. 화면에 비친 우리는 표정이 없고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잔뜩 멋 부린 얼치기 가족처럼 보인다. 따분하다 따분해. 어디서 들었는지 은재는 요즘 따분하다는 단어를 자주 쓴다. 너무 많이 쓰니까 지금은 거슬리지만, 나는 은재가 따분하다고 말하는 것이 점차 들리지 않게 될 것이고 은재는 은재의 따분함에 곧 익숙해질 것이다.
《문장웹진 2020년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