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왜 우리는 안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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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저작권자

영화는 지루하다. 우리의 일상만큼 지리하게 전개된다. 1939년에서 1945년까지의 나치에 점령당한 폴란드의 일상을 이 영화는 담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은 그 때의 일상을 담고자 했다. 게토 안의 길거리에는 아사한 어린 아이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그 옆을 사람들은 무감각하게 지나간다. (카메라는 이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다.) 굶주린 어떤 남자는 땅에 떨어진 음식을 개처럼 정신 없이 핥는다. 독일군은 유대인들을 그저 개만큼만 취급할 뿐이다. 춤추라고 하면 춤춰야 하고, 맞으라고 하면 맞아야 한다. 앞에서 재롱을 떨면 귀여워해 준다. 그저 자비를 구할 수밖에. 자칫하면 졸 수도 있는 이 영화를 보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내 망막에 맺히고 있는 상황은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쏘고, 죽이고, 슬퍼하고, 미치고, 사랑하고, 후회하고, 무감각한 우리의 모습들이 담겨있다. 나는 주인공, 스필만에게 몰입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지리한 일상 속에 몰입한 것이다.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이유는 바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우리가 100년 남짓의 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의미’ 덕분이다. 세상에 태어난 어린 아이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고, 그 호기심은 그 아이의 눈앞의 모든 것들을 의미로 만든다. 아이는 그 의미를 가슴에 품고 꿈을 갖게 되고 앞으로의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삶의 과정 동안 여러 가지 의미들이 그 아이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며 삶을 무르익게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의미와 함께 살아간다. 전쟁이란 어떤 상황인가. 바로 이 의미를 강제로 박탈당하는 상황이다. 전쟁은 사람의 생명을 지나가는 똥파리만도 못하게 하고 모든 도덕 기준을 무력하게 한다. 방아쇠 위에 놓인 집게손가락을 살짝만 움직이면 사람은 피를 토해 널브러지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 모두 정신 없는 상황에서 도덕적인 타락을 좀 한다고 해서 누가 그것을 경찰서에 신고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적에 대한 ‘살인’을 자신의 모국내에서 ‘법적으로’ 허용하게 하는 상황이며, 사람을 죽인 만큼 훈장을 받는 기묘한 서바이벌 상황인 것이다. 주인공 스필만은 그만의 의미를 모두 박탈당하기 시작한다. 그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스튜디오는 폭격을 당해 결국은 연주를 끝까지 하지 못했고, 첫눈에 반한 아리따운 아가씨와 제대로 데이트할 수 있는 공간도 박탈당하고 결국은 그 아가씨와 기약없이 찢어진다. 하나뿐인 가족이 죽음의 늪으로 끌려가는 기차로 강제로 이송되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에게는 생존과 복수에 대한 욕구만 남게 된다. 그의 삶의 의미는 삭막하게도 생존과 복수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는 복수보다는 생존에 더욱 집중한다. 아름다운 선율을 잉태하는 그의 섬세한 손가락을 피로 더럽히는 것이 꺼렸던 것일까? 여전히 순결을 지키고 있는 그의 손가락은 이제는 아득해진 그의 소중한 단 하나뿐인 삶의 의미, ‘음악’을 잊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 덕분에 생존의 투쟁을 벌이는 동안 그의 귀에는 아득하게나마 피아노 선율이 울렸으리라. 아파트에서의 나름대로 아늑한 도피 상황에서는 바로 그의 눈앞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건반 바로 위의 허공을 그의 손가락은 탐닉하듯 춤을 추어 그의 메마른 가슴을 희망으로 충만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의 내동댕이쳐졌던 삶의 의미가 다시금 그의 가슴 안으로 살포시 스며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는 잠시동안 원기를 충전하고 다시금 매정한 운명에 휘몰려,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에 홀로 입성하게 된다. 그곳은 모든 의미가 파괴된 질퍽한 흔적이 남은 비린내나는 곳이었다. 굶주린 그의 손에는 통조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변질이 되어 버릴 그 통조림의 뚜껑을 따기 위해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다가 우연히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된다. 결국 통조림을 열려고 애를 썼던 그의 ‘의지’ 덕분에 그는 그 그리웠던 피아노 앞에 마음껏 앉을 수 있게 된다. 그는 통조림을 열려고 애를 썼을 때의 의지, 곧 생존을 위한 의지 덕분에 자신의 삶의 의미와 조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의지 뒤에는 죽음이란 순간이 뒤따를 수도 있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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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그리워했던 연인을 만났을 때의 벅차 오르는 가슴과 눈물 같이 그는 건반 위에서 한없는 감동과 그리움, 환희와 눈물을 만난다. 지금까지 너덜너덜해졌던 그의 삶의 의미가 새하얀 새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같은 감동이 그의 몸과 정신을 정화시켰으리라. 그 순간만큼은 모든 죽음과 핏빛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의 의미를 탐닉하고 감동해 했을 것이다. 결국 스필만의 혼신을 쏟은 연주는 독일군 장교의 마음을 움직인다. 스필만의 연주는 독일군 장교에게 그가 잃어버렸던 의미, 유대인도‘똑같은 인간’이라는 존엄성을 느끼게 한다. 벌레만도 못한 종족이라 여겼던 유대인의 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에서 천상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장교는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감동하고 있는 그 자신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이젠 홀로코스트 영화는 지겹다고 말한다. 자신들은 항상 선의의 피해자일뿐이다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그 후에 어떤 일을 했는지를 바로 얘기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어떤 이는 역겹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볼 때는 잠시 그 생각을 접어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영화는 물론 홀로코스트 영화이나, 단지 유대인들이 당한 수난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바로 ‘전쟁’과 우리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영화이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은 유대인들이 당한 수난으로 극대화되고, ‘의미’는 음악이란 예술로 극대화된다. 유대인들의 수난과 음악은 그저 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유대인들의 수난을 소재로 차용한 이유는 감독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고 음악이란 장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감독과 그 ‘실화’와의 운명적인 조우에 의한 것이리라. 그렇게 우연과 이유가 만나 이 ‘피아니스트’란 영화는 탄생했으리라 여겨진다. 6.25 전쟁이 끝난 후, 대한민국이라는 안전한 울타리에서 ‘나름대로’(어디까지나 나름대로일 뿐이다.) 평화롭게 살아온 우리는 전쟁을 그저 TV나 영화, 게임에서 겨우 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저 전쟁이 나면 막연하게 서로 총을 겨누고, 탱크가 지나가거나 미사일이 발사될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지금은 핵이 하나 떨어져 한번에 모두 끝장날 거라 사람들은 보통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전쟁이 일어나면 어쨌든 그 전쟁은 바로 우리들이 하는 것이고,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결심이 그 전쟁을 진행시키고 우리, 곧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엄마, 형, 오빠, 누나, 언니, 동생, 친구 등 모두가 그 모든 것을 겪는다. 차가운 브라운관이 아닌 거친 숨결과 땀이 적시는, 검붉은 피가 물드는 실제인 것이다. 그 안에는 분노, 절규, 두려움, 슬픔, 허망이 모두 녹아 있다. 전쟁은 이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보여 주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에서 가치와 의미를 모두 박탈한다. 아직 그 개인에게 가치와 의미가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실현시키기에는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아직 빛을 내는 그 가치와 의미가 전쟁을 종식시키고, 다시금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지만 한 번 전쟁이 일어나면 그 찬란한 빛을 기다리기까지 우리는 많은 것을 희생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끔찍한 과정을 누군들 겪고 싶겠는가. 이 전쟁의 긴장이 지금 우리 한반도 내에서는 최고조에 이르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의 핵 개발이 문제가 되어 미국이 북한에 전쟁을 도발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다행히 현재의 국면은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는 있지만 백퍼센트 안심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쟁이란 우리에게 무엇인지. 평화란 왜 지켜져야 하고, 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며, 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하는지. 그리고 이 존엄성이란 우리에게 무엇인지. 이에 대한 다같은 공감대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의미를 지킬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우리에게 이 피아니스트란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의미를 박탈한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인간임을 포기하라는 강요와도 같다. 결국 전쟁은 곧 우리에게 인간임을 포기하라는 강요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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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물정'과 '사회학'. 이 두 단어는 인과관계 혹은 상관관계로 이어진다고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왠걸. 두 단어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
 - 사회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학자는 세상물정과는 괴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지식은 왜 상아탑에 있어야 하는가. 반대로 세상물정에 빠삭한 할아버지는 사회학에 어둡다. 이론과 사회 사이에는 이만한 질곡이 존재한다.
 - 결국, 근본적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사회란 무엇인가? ---- 오늘날 우리가 발딛고 선 이 사회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이기에, 우리는 세상물정과 사회학 사이에 질곡을 겪어야만 하는가?

Try, 이 책은 어떤 질문을 던져주는가.
 - 에세이는 세상물정과 사회학을 절묘하게 잇는다. 세상에 대한 신랄한 풍자 반. 사회학을 통한 풀이 절반.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학'이라면, 그 근거에는 질문이 자리한다. 책은 많은 이론이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이 이론이 엮어내는 질문이다. 세상물정과 사회학은 '왜'라는 단어를 통해 통한다.

<세속- 첫 번째 키워드>

 상식 : 우리의 상식은 대체 무엇인가? 누구나 안다는 교묘한 믿음은 얼만큼 정치적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는 양식은 또 얼마나 고루한가. 그리고 거짓일망정 상식을 연기하는 단어들, 그 레토릭은 얼마나 달콤한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우리의 상식은 왜 천박함에도 진리로 통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문화는 대체 어떤 상식 위에 서 있는 것인가?

 명품 : 왜 명품인가. 내 기호는 왜 명품으로 대체되어야만 하는가. 나의 자존은 명품이 대체해주는 것인가. 명품의 이미지가 소비되듯, 우리의 인생은 편집됨이란 단어를 통해서만이 구체화 되는 것일까.

 프랜차이즈 : 서울과 뉴욕과 이집트와 남아공에서 먹는 맥도날드 햄버거 맛은 동일하다. 우리는 이런 맛에 길들여져야 하는가. 그러한 표준화에 노동과 인간은 있는가? ... 수익(소비자)과 비용(노동자) 간의 관계는 프랜차이즈 양식을 통해 어떻게 강요되고 있는가?

 해외여행 : 미국과 일본은 왜 선진국인가. 선진국이란 단어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작아지는가?

 열광 : 왜 군중은 열광하는가? 대중과 군중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레토릭과 대중과 시민. 그리고 정치인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배고픈자들에게 자유는 빵보다 달콤할 수 있는가.

 언론 : 언론 권력을 구성하는 자들은 사실 브루주아 남성들이다. 그러니, 하나의 기득권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렇다면 브루주아 남성이 브루주아 남성을 견제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즉, 계급론을 벗어난 권력 분립은 가능할 것인가?)

  기억 : 모든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편집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편집된 그 이외의 영역에는 무엇이 자리할 것인가? 영웅과 필부 사이에 놓여진 그 간극. 99%의 이야기는 어떻게 기술되어야 할 것인가. ...다시, 우리의 역사는 무엇인가?

 불안 : 알면 알 수록 더 큰 위험을 알게된다. 먼 옛날 다이옥신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오늘날 '안다'는 이름 아래 다이옥신이 치르는 무서움에 떨게 되었다. 마치 아담의 열매처럼, 안다는 것은 또다른 불안을 불러온다. - 청정에너지라는 탈을 쓴 원자에너지는 또 어떤가. 100년 전 위험이 없을 것이라 장담했었던 원자력은 오늘날 가장 큰 위험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종교 : 자본이 종교를 만나면 무엇이 되는가? (기독교 근본주의를 떠올려보자. 신에게 헌납하는 ATM기를 상상하라) 신에 대한 맹목적 찬양이, 돈이라는 단어로 대체되도 별로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종교가 아니냐고 깠나보다.) 그렇다면, 종교가 없는 세게 (혹은 종교가 생활에 침투한 세계)는 어떨까. 기도하지 않지만, 교회에 가지도 않지만, 찬양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 남들을 배려하고, 약자를 생각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 조응해서 움직인다. 가장 종교적이지 않은 나라에서 종교의 이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삶의 평범성 - 일상이란 무엇인가?>

 이웃 : 이웃집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힘들 때 손을 내밀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미래가 안전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신뢰가 깨진 사회에 미래는 존재하는가?

 성공 : 자기계발서는 단 하나의 발언만을 일삼는다. 모든 성공은 너의 노력에 달려있어. 노력하면 돼. 정말 그럴까.

 명예 : 호모 루덴스. 사실 인간은 놀이를 통해 사회성을 발달시켰다. 사회성을 발달시킨다는 건, 서로간의 '명예로운 경쟁'을 가치로 인정했다는 것. 이 경쟁에는 승자나 패자가 있으나 독식은 없다. 모두가 잃을 게 없이 행복함을 위해 내달렸던 과거. 무한경쟁인 지금, 그런 명예의 시대를 행복하는 것은 가능할 것인가?

 수치심 : 모든 예절은 수치심을 자극시키는 규약. 식사예절 (퀴진)은 귀족을 모방하려는 우리의 습성. 구별짓기를 통해 상대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자존감을 채우는 자아. 이런 자아는 페르소나를 통해 우리를 억압한다. 억압은 무엇을 만드는가. ... 오늘날, 라이프스타일은 예절의 위상을 가진다. 트랜드를 쫓는다는 것. 우리의 삶은 라이프스타일이란 유행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의 자존은 자본이 대체할 수 있을까? 이런 자존을 통해 웃는 것은 누구인가

 취미 : 나는  누구인가. 나를 드러내는 것은 '직업'인가 '가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취미'인가. 오늘날, 취미 마저 하나의 스펙으로 대체되고 있다. 독서가 정말로 취미로 기능할 수 있을까? 사교 골프는 취미의 영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섹스 : 남성과 여성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권력과 어머니란 단어는 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가족으로 미화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는 성적인 영역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권력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남성은 (혹은 남성성) 왜 업소에서 자신을 정당화시킬까? ... 사랑은 여전히 사랑일 수 있는가

 남자 : '내가 누군지 알아?' 자신의 자아를 끝없이 비대화시킴으로써 확인받고자 하는 심리는 무엇인가. 군대와 남자는 어떤 기묘한 관계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가. 강자와 약자에게 대하는 '아저씨'의 태도는 왜 다른 것인가. 자존과 자긍심과 비열함과 비참함 사이 그 어딘가를 짚어보자. 개저씨인가 아재인가

 자살 : 자살은 개인적인 영역인가? ...그렇다면 97년 이후 늘어난 자살율은 무엇인가. 사회적 상황과 개인의 상황이 통계적으로 유사한 상관관계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살은 '사회'를 무시하는 '개인'의 나약함 때문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노동 : 노동자는 왜 미래를 상상하면 안되는가. 우리는 왜 자본에 종속되어야 하는가. 노동만이 우리의 미래일까

 게으름 : 자신의 정당한 몫을 잃은 개미와 적은 노동시간을 위해 연대를 꿈꾸는 베짱이 사이. ... 국가는 누구를 원할 것인가? ...우리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가

 인정 : 돈과 생존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에겐 '자존'을 대변할 '인정'이 필요하다. ...일베와 할배들은 왜 길거리에 나와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가? (그들의 박탈된 자존은 회복될 수 있을것인가?) ... 그들의 자존은 왜 무너졌는가. ... 법보다 주먹이 가깝듯, 약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통한 심리적 안정은 제도적 안정을 통한 경제적 안정보다 더욱 가깝게 작용한다.

 개인 : 용산 참사 앞에서 무너진 개인. 왜 우리는 집단적으로 사고할 수 밖에 없나. (왜 나는 없고 네이션만이 존재해야 하는가?) 왜 전체를 위해 개인은 무너질 수 밖에 없을까? ... 이런 생각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애국심이 투철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개인의 자유와 행복은 연관이 깊다. 하지만 애국심과 행복은 조금, 아니 꽤 거리가 먼 것 같다.

 가족 : 아버지라는 권위주의. 어머니라는 모성애. 그 도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왜 아버지는 무게를 잡고, 어머니는 자애로워야 하는가. 페르소나는 왜 우리의 자아를 잠식할까? (아버지라는 이름은 왜 개인의 멘탈리티를 무너뜨릴까?) - 그래야만 한다는 단어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막힌 소통을 하고 있다. 언제까지 인간의 이야기가 '그래야만 한다'는 선언 위에서만 성립 가능할 것인가?

 집 : 교환가치로서가 아닌 사용가치로서의 집은 왜 이리도 멀게 느껴지는가? 왜 우리는 집에서 편안한가 (인간성과 익숙함이란 말을 통하여 공간적인 가치는 어떻게 재창조될 수 있는가?) 저 집과 이 집 사이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웃집 김씨 아저씨는 나에게 이웃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성숙 : 양식이 있다고 성숙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우병우는 양식 있는 지식인이지만 성숙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죽음 : 타인의 고통. 우리는 고통마저 스펙터클화시켜 관람한다. (때문에 남의 고통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요소로 전락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죽음은 어떻게 체감되는가? (죽음은 너무 먼 이야기로 숨어 있지 않은가?) 죽음은 평등하지만, 그 죽음의 양태마저 평등한가? (고고한 죽음은 무엇인가? 돈 냄새 나는 죽음은 과연 고고한 것인가?)

And
 이 책은 덧붙일 이야기가 없다. 챕터 하나 하나가 기억에 깊이 새겨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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