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12 .mp3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죽음

창세기 3:21-24

하나님의 형상 시리즈 열두 번째 시간이자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사건인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하나님 형상 시리즈 설교를 모두 마치려고 합니다.

지나간 설교를 통해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창세기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말씀은 사람에 대한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일차적인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이야말로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창세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과는 어쩌면 상반되는 사람에 대한 또 다른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땅에서 가장 하찮고 쓸모없는 티끌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땅의 티끌로 만들었다는 창세기의 말씀이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티끌을 뜻하는 아파르라는 히브리어는 아무 것도 아닌 무가치한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였던 단어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티끌로 지으셨다는 창세기의 말씀은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생기’(breath of life)가 없으면 그저 한 낱 휘날리는 먼지나 티끌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없으면 사람이란 존재는 먼지나 티끌처럼 아무 것도 아닌 그저 비루하고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2:7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티끌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산 존재가 되었다.(현대인)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동시에 땅의 먼지로 지음 받았다는 창세기의 말씀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양면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존귀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동시에 하찮은 먼지로 만들어진 비루하고 비참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해서 사람의 육체는 먼지로 만들어진 하찮은 것이고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귀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씀과 땅의 먼지로 지어졌다는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할 사실은 사람이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하거나 반대로 비루하고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귀함이나 비참함을 결정하는 것은 육체나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다는 것은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땅의 티끌로 지어진 비루하고 하찮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티끌로 만들어진 비루하고 비참한 존재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영적 원리를 가르쳐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한 가운데 두신 두 나무였습니다. 두 나무가 무엇입니까?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한 가운데 두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절실하게 깨닫도록 만드는 나무였습니다. 생명나무는 내 생명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있음을 깨닫게 하는 나무입니다.

특별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어떻게 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나무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에덴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큼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는 독이 있어 사람이 먹으면 죽게 되거나 뱀의 유혹처럼 먹기만 하면 하나님과 같아지는 신비하고 놀라운 효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결코 넘지 말아야 할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2: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하나님의 경고와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하나님께서 금지한 나무열매를 먹었습니까?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명령에 불순종합니다. 인간이 피조물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건을 신학에서는 인간의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란 단순하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원죄란 사람이 피조물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모든 것을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려는 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이 아니라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선이며 옳은 것이고,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악이며 잘못된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이 꼴도 보기 싫어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저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또한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인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들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인과 하나님의 대화도 지속됩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이유는 하나님과 같아지기 위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까지 먹고서 영생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내쫓으시고는 다시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 돌아와서는 더 이상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그룹들과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완전히 막아버리셨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처럼 사람에게 죽음은 피할 수 있는 운명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은 반드시 육체적인 죽음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영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해 숨기 시작한 것처럼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나님 없는 채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는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죽음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죽음을 설명하는 또 한 가지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죄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이것은 인간의 죽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죽음은 하나님에 의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가 기록하고 있는 인간 최초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아벨이었습니다. 최초로 죽음을 맞이한 아벨이 어떻게 죽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저주나 벌을 받아 죽었습니까? 아니오. 아벨이 죽은 것은 형 가인에 의해서였습니다. 아벨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였던 형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인간 최초의 죽음입니다.

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까? 동생 아벨 때문에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처럼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게 되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의 대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습니다. 그리고 노아 시대에는 사람 사는 온 땅에 폭력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라고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을 만들어주셨지만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4:23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도대체 왜 사람들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가 아니라 죽고 죽이는 관계된 것입니까? 사람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유익한 것만을 선이라고 하고, 자신에게 피해가 되거나 손해가 되는 것은 무조건 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신이 선악의 판단 기준이 되면 사람은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죽이는 관계가 되고 맙니다. 공동체 전체의 유익, 인류 전체의 유익보다는 나 자신의 유익, 내가 속한 집단의 유익을 모든 선악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이 바로 뱀의 유혹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이익과 위해서라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곧 성경이 말씀하는 사탄의 실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건은 그래서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은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형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에서의 추방과 그로 인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심판이며 형벌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이며 은총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죽음을 단순히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로 보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분명 하나님의 심판이며 형벌의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며 은총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가진 양면성을 다 알아야만 죽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며, 죽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지만 사람이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꼽는다면 사람은 결국 죽지만, 하나님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 한 가운데 있었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하나님의 장치였던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에게 죽음은 우리의 인간됨을 보호하고 보장해 주는 하나님의 장치입니다.

사람은 왜 죽는 걸까요?” 사람이 늙기 때문에 죽는 걸까요? 아니면 사람이 병이 들기 때문에 죽는 걸까요? 물론 사람은 늙어서 죽기도 하고, 병이 들어 죽기도 하고, 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든다면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면 그 사람이 사람입니까? 귀신이지! 모든 인간의 삶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도구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삶이 유한한다는 사실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다운 인생을 살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잘 살펴보세요. 어떻게 삽니까? 마치 자신은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교만하고 탐욕스럽게 삽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죽임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살거나 무시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이 되려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은 마음에 두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신 형벌이면서 동시에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버린 사건은 단순히 아담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사람을 심판하고 저주하고 벌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진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며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았다면 에덴동산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인과 같은 사람이 라멕과 같은 사람이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았다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세상은 생지옥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죽고 싶어도 도무지 죽을 수도 없는 생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끝없는 고통 가운데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생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인간의 죽음 중에는 안타까운 죽음도 있고, 마음 아픈 죽음도 있고, 억울한 죽음도 있고, 어처구니없는 죽음도 있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모든 죽음은 다 슬픔이고 아픔입니다. 세상에 슬프지 않은 죽음, 아프지 않은 죽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에는 우리의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차원의 진실이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곧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음 속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가장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선포하기를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이루신 것입니다.

6:23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경고와 명령에 불순종하며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과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로 일그러진 세상을 새롭게 회복시킬 거대한 계획을 품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아갈 만한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에게 죽음은 분명 하나님의 심판이며 형벌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사람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기막힌 은총이며 구원의 신비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에 죽음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통해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