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우리가 신을 죽였다!

  • 독후감 상태 승인
  • 작성개시일자 2019년01월10일
  • 승인일자 2019년01월13일
  • 작성자 최**

나는 철학이나 공학 혹은 예술에서도 어떤 정의나 학문을 집대성한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보다 반례를 찾아 주류의 생각에 대항한 인물들이 멋있어 보였다. 흔히 말하는 언더독들이 진짜 보다 진짜 같아 보였고, 이러한 성향 때문인지 나는 니체를 정말 좋아 한다. 니체를 소위 ‘망치를 든 철학자’ 혹은 ‘신을 죽인 철학자’ 근대 철학의 종말을 알리고 현대 철학의 시작을 연 철학자로 평가 하지 않는가? 철학이란 것을 잘 알진 못하지만 니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 입지가 정말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니체는 나에게 너무 먼 존재 이었다. 니체의 저서를 직접 읽어보려 시도했지만 포기하고 돌아 선적도 있다. 최근 소피의 세계, 플라톤의 국가, 철학 여행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야 니체의 문체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고 겨우겨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이 읽었다는 말은 정독했다는 뜻은 아니다. 겨우 완독 했다는 뜻이다.

실질적으로 차라투스라는 읽기 생각보다 편했다. 플라톤의 국가가 그러했든 문학적 문체가 가독성을 확보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문학적 문체는 무엇을 말하는가를 모호하게 만드는 성향이 있어, 니체가 어떠한 말을 하고자 하는지 모호해 지는 순간은 분명 있었고 이는 이 책을 역설적이게도 더 어렵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기본적으로 4부작으로 이루어 져있으며 차라투스트라가 10년동안 사색을 마친 후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하산 하는 옴니버스식 구성이다.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탁월함이 느껴지는 옴니버스는 1부에선 세 가지 비유,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벗에 대하여, 2부에선 춤, 무덤의 노래, 자기 초극에 대하여, 가장 고요한 시간 3,4부에선 중력의 정령에 대하여, 해 뜨기 전에, 꿀의 제물 , 왕들과의 대화, 그림자 등이 있다. 사실 글자체가 희곡 같고, 서사시 같은 느낌이 강해 조금 추상적이고 문학적 요소가 많아 풍성하게 느껴진다. 책 자체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내가 무엇이 재밌었다 고른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만 1부에 세 가지 비유는 너무 유명하니 넘어가고, 새로운 우상과 벗에 대하여와 4부에 왕들과의 대화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새로운 우상에서 우상 어리석은 모습은 국가라는 거대한 계약이 주는 개인 모범적 모습이다. 우리는 이 우상 어리석은 모습을 집어 던지고 즉 낙타의 삶을 부수고 자신에게 집중해 보라며 새로운 우상(idol)을 추구하자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모습은 쉬어 보이지 않다. 지금은 국가에 계약에선 다소 자유로워 졌지만 미디어와 매스컴에 의하여 새로운 형태의 우상들에게 지배받으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이 희미해지는 것 같다. 벗에 관하여 에선 ‘벗을 원한다면 벗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적이 될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벗에 관하여도 적으로 존중할 줄 알아 한다.’ 이 표현으로 압축할 수 있다. 벗과 적은 다르지 않다는 말은 우리의 본질을 대변한다. 그렇기에 벗을 진정한 친구를 사귀고자 함은 적을 품에 품을 수 있음을 말한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너무 쉬운 사회이다. 너무 쉽게 친구라고 부르며 너무 쉽게 ‘너는 나랑 안 맞아’ 하며 처단해버린다. 이는 점점 친구를 대용품처럼 여김이고 이것은 점점 사람을 고립시킨다. 또 니체는 노예와 폭군은 벗을 만들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에 노예, 혹은 폭군이 아닐까? 4부 왕과의 대화는 3부 중력의 정령에 대하여와 관련이 있다. 대지는 불평등 부조리를 나타내고 중령의 정령은 우리를 이 대지위에 존재하게 하는 요소이다. 왕과의 대화에서 왕은 스스로 사이비가 되고 말았다며 스스로를 역겨워한다. 천민을 속이고 되었고, 왕은 왕인 동시에 천민이다. 역사는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다. 역사에 대한 니체의 생각과 행위에 대한 원인을 잘 표현한 장인 것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런 구성이다. 겉으로 보면 그저 희곡 같지만 표현 하나하나에 의미를 숨겨 놓다. 이는 3장 4장을 가면 갈수록 심해진다.

니체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 가면서 하나 더 알게 된 점이 있다면 니체의 사상과 실존주의의 관계일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을 때 나에게 힘이 되어 준 소설은 카프카의 변신과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작품이 이었다. 이 소설들은 나에게 삶의 부조리란 개인의 욕구와 사회의 현상에 부조화에서 오는 것이며 이런 부조화, 부조리를 이해하고 받아 드려야 개인의 발전을 야기 할 수 있다고 당시에 느꼈고 나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주었었다. 이러한 실존은 결국 개인의 욕구의 대한 생각에 재고를 야기했고, 즉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강조 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인의 선택이 중요할 수 있게 된 것에는 실존과 초인이 아주 밀접함 관계를 갖는다 생각된다. 오히려 개인의 자유의 중요성, 삶의 본질 보다 개인의 실존이 앞섬은 허무함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허무함을 예견해서인지 아님 실존주의가 니체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영원회귀사상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된 관점인 이사상은 그러한 허무함에 답이 되어 준다고 생각한다.

현대 시대상에 니체의 사상을 가져와 이야기 해보고 싶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플라톤의 이데아가 그들의 올바름을 이끌어 주는 사상이었고, 중세는 기독교적 사상이 올바름의 기준이었다. 이는 근대시대에는 칸트의 선과악의 이원론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 하였다. 현대는 어떨까 우리에게 도덕적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가, 헌법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가? 현법은 그저 최소한의 기준만 제공해 주고 있을 뿐이다. 실존주의가 대두되고 과학 기술의 발달로 종교와 고대, 근대의 기존 가치들이 무너지면서 개인의 욕구라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고 우리의 사회는 점점 세분화된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개인의 욕구가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사회적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어쩌면 이제는 현실에 낙타보단 사막에 사자들이 너무 많아졌기에 이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니체의 사상에 조금 더 주목해 보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되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갈등에 대하여 논의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살해자 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니체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본 문장일 것이다.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 하겠는 가는 학자마다 다를 수 있고, 굳이 학자가 아니더라도 각각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조금씩 다를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우리가 기존은 도덕적 가치들을 죽였다. 이제 우리는 우상을 가면을 벗어 던지고 삶이라는 것에 충실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장 추하고, 불행하며, 큰 실패’와 같은 대지 위에서 기존의 도덕적 가치관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 하다. 하지만 이러한 삶을 기꺼이 살아가겠다는 의지는 초인으로 발현되며 한순간일망정 한 없이 충실하게 사는 것, 삶이 라는 영원회귀를 기꺼이 받아드리는 것이 긍정적 니힐리즘이며, 자기해방이고 참된 자유로움임을 말하고 싶은 것 아닐까? 사실 우리는 나약하기 그지없다. 불합리에 대한 분노는 힘에 의해 쉽게 무너지며, 인류역사상 최고의 풍요 속에 살고 있으면서 더 많이 가지길 원하고 빼앗고 음해하며, 충동적인 욕구에 너무 쉽게 휩쓸리며 잘 안되면 자기 합리화를 하기 바쁘다. 물론 남들이 보기엔 완벽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자기 자신만 아는 추악함, 부족함은 분명히 존재 한다. 세상은 불공평해 보인다. 허무해 보인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허무를 긍정에 의해 돌파해야 한다. 라며 주장한다. 낙타의 삶을 집어 던지자. 배고픈 사자가 되길 기꺼이 받아들이자. 사자의 저항과 파괴를 통해 마침내 즐거운 어린 아이가 되고 싶다. 사자가 깃들어 있는 어린아이가 되어 삶을 살고 싶다.

신은 죽었다(독일어: Gott ist tot, 영어: God is dead, The Death of God)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로서, 허무주의를 나타내는 말로 넓게 인용되는 말이다.

의미[편집]

신을 포함해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들던 일체의 절대적 가치가 그 본질적 의미를 잃고 허무해짐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최고가치의 상실로 인한 허무주의의 도래를 뜻하는 말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최고 가치의 상실로 이해하고 이로 인해 유럽에 허무주의가 도래할 것이라 경고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 즉, 비극적 상황 앞에서도 자긍심을 잃지 않는 고귀한 정신이 필요함을 설한다. 이러한 정신을 지상에서 실현한 자가 위버멘쉬이다.

니체의 저작[편집]

《즐거운 지식》(Die frohlich Wissenschaft, 1882)의 108장, 125장, 343장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 안에서 가장 저명한 것은 125장의 기술인데, 해당 부분을 발췌하면

Gott ist tott. Gott bleibt todt.Und wir haben ihn getodtet.Wie trosten wir uns, die Morder aller Morder?

한국어로는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안식을 얻을 것인가?

이라 한다. 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년)의 모든 부분은, 함축적 언어[1]로 씌인 《즐거운 지식》(1882년)의 사상을 이은 것이다.

원문[편집]

신의 죽음과 그에따른 상실감은 《즐거운 학문》에 최초로 기술된다.

"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 부르짖었다. 나 너희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해내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다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닦아버릴 수 있는 스펀지를 주었단 말인가?

지구가 해의 궤도에서 풀려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지구는 어디로 움직이고 있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모든 항성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나?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진하고 있나? 측면으로 가고 있나? 직진하고 있나? 아니면 모든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가?

아직도 위쪽이 있고 아래쪽이 있나?

우리는 끝없는 허공을 방황하는건가? 허공의 흐름을 느끼지는 못하면서?

더 추워지는 거 아닐까? 계속해서 저녁만 반복되는거 아닌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2]

— 《즐거운 학문》

신의 죽음의 신학[편집]

니체의 말인 「신은 죽었다」는 1960년대가 되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이 번성한 시대의 미국의 신학자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미국의 신학자들은 현대 사회에서 신은 인간에게 리얼한 존재는 아니라는 의미로, 신은 죽었다는 의미로 이용한다.

1957년에 미국의 신학자 게이브릴 바하니안은 「신은 죽었다」라고 제목을 붙인 저서를 저술했다. 바니한은 그 중에서, 무신론을 미국의 대중의 삶의 방법이라 말하고 있다.

미국인의 신학자 토마스 알타이더는 에모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동안에, 「신은 죽었어?」를 출판한다. 알타더는 무신론적 신학자가 아니고, 「이 역사 안에 신이 완전히 내재화하고 있다.」라고 신의 내재화를 말한 것이다[3].

또 미국의 신학자 윌리엄 해밀튼이 다른 입장으로부터, 1961년에 저서 「크리스트교의 새로운 본질」로, 다른 시점의 신의 죽음의 신학을 전개했다.

각주[편집]

  1. 경구 혹은 아포리즘. 아포리즘의 어원은 다음 영문 텍스트를 참조할 것. http://www.etymonline.com/index.php?term=aphorism
  2. http://www.nietzschesource.org/#eKGWB/FW-125
  3. W. E. 호댄 「현대 크리스트교 신학 입문」(1969년) 후세도웅 역, 일본 기독 교단 출판국, p. 333-p. 336

참고 문헌[편집]

  • 야마자키 쇼이치·이치카와 히로시 저 「현대 철학 사전」코단샤(코단샤 현대 신서), 1970년
  • W. E. 호단(저) 「현대 크리스트교 신학 입문」후세도웅(역), 일본 기독 교단 출판국 1969년
  • 윌리스톤 워커 (저) 「크리스트교사 4근·현대의 크리스트교」, 야려요시오·츠카다 사토시·야시로 타카시 역 요르단사, 1986년
  • 하비 M. 콘 (저) 「현대 세계 신학」마츠다 카즈오 (역), 성혜수산장, 1985년

관련항목[편집]

  • 허무주의
  • 실존주의 - 크리스트교적 신앙의 위기를 배경의 하나로서 나타난 유럽에서의 철학적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