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체포되는 과정에서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聖經> 마태복음 26:1-72

<題目> 최후의 만찬

<序言>

  25장에서 감람산 강화가 끝나고 26장과 27장은 예수님의 수난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본장은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신 내용을 급박하게 다루고 있으면서도 구속사적인 관점을 중점적으로 부각하고 있습니다. 내용 구조는 네번째 수난 예고 (1-5절), 향유부음 받은 사건 (6-13절), 가룟 유다의 배반 (14-16절), 유월절 성만찬 (17-30절), 제자들에 대한 배신 예고 (31-35절),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36-46절), 예수님의 체포 당함 (47-56절), 예수님의 심문 받음 (57-68절), 베드로의 부인 (69-75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네번째 수난 예고 (1-5절)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예수님께서 앞서 세 번에 걸쳐 수난당하실 것을 예고했습니다 (16:21, 17:22, 20:18). 본문은 유월절 이틀 전에 한 예고로서 네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때를 명절인 유월절을 피하자고 했습니다 (1-5절).

  '유월절’(逾越節)은 유대력으로 정월(바벨론력으로는 니산월) 14일 저녁이고 ‘무교절’(無餃節)은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간입니다. 태양력으로는 3-4월에 해당하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낼 때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자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 재앙은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죽일 때에 그 재앙으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양을 잡아 피는 문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양 고기는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발효되지 않은 떡)과 쓴 나물을 함께 먹게 했습니다. 그 날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재앙을 내릴 때에 피가 발라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재앙을 내리지 않고 넘어 갔습니다 (출12:13).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사건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오게 하실 때 구원해 주신 것을 기념하게 하기 위해 지키게 한 절기입니다 (출12:1-28,43-49, 13:3-10, 23:15, 34:18, 레23:5, 민9:1-14, 28:16, 신16:1-8).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던 데서 구원하고 (출1:11-22,신5:15,15:15), 죽임 당할 위기에서 구원하는 것 (출12:22-24), 곧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억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했습니다 (3-4절). ‘대제사장들’은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있습니다. 장로들’은 유대인들의 대표로 선출된 자들입니다. 마가복음14:1에는 '서기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사들을 말합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는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이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입니다. 공회원은 의장 1명과 의원 70명(제사장24, 서기관22, 장로24)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공회는 율법에 의한 사법권과 재판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모인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치유 사역을 하고 율법을 재해석하고 성전제도를 정죄하는 행위를 하자 극도의 경계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율법에 관한 질문을 했으나 그 때마다 오히려 자신들의 지식 없음이 여실히 드러나 굴욕을 당하자 죽이기까지 하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급기야 공회로 모여 공적인 의결을 통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예수님을 어떻게 잡아 죽일지에 대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민란이 날까 두려워하여 명절에는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5절). 유월절은 당시 유대인의 가장 큰 절기였으므로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약 120만 명 가까이 모여 들었습니다 (Josephus).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선지자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에 대해 친근한 감정을 가진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회원들은 그 절기 기간에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이면 그 사람들이 소요와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절기 기간에는 그를 잡지 말자고 의결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호의를 가진 대중들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은 그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후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의 전향으로 결국 유월절 절기 때 예수님을 체포하여 처형하게 됩니다. 곧 그들은 예수님을 절기 때 잡지 않으려 했으나 가룟 유다의 도움으로 절기 때 잡아 죽이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 죽음으로 대속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서 애굽에서 구한 사건이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의 첫 번째 유월절에서 피 흘려 죽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인 장자들의 생명을 죽음에서 살렸던 것처럼, 예수님이 유월절 양처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므로 자기 백성들을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이 유월절 기간에 붙잡혀 십자가에 죽게 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요한복음1:29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고,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5:7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의도를 아시고 구약의 유월절에 드려지는 양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동일시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이틀 전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려야 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마26:2). 그리고 유월절 전날 밤에 최후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죽음을 두고 아버지 뜻대로 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26:17-30, 36-46).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면서 잡으러 온 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체포되었습니다 (마26:45-56).

  사탄과 인간들은 자기들의 지혜로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과는 달리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사역 중심으로 살면서 담대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2. 한 여인의 향유 부은 사건 (6-13절)

  베다니에서 예수님께 기름 부은 사건은 타 복음서와 비교할 때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한 여인으로부터 향유를 부음 받은 사건은 사복음서 모두에 나옵니다 (마26:6-13, 막14:3-9, 눅7:36-50, 요12:1-8). 사복음서에 나온 모든 내용을 같은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온 내용은 같은 사건이고 누가복음에 나온 내용의 사건은 다른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사건은 동일한 사건으로 보여지지만 누가복음의 사건은 전혀 다른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첫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임박해서 발생한 것으로 언급되나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초기에 발생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장소가 베다니로 언급되어 있고 누가복음은 갈릴리 부근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향유를 부은 장본인이 마리아와 한 여자로 언급되는 반면 누가복음은 죄 있는 한 여자로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넷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가 분개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으나 누가복음은 다만 예수님이 집 주인인 바리새인 시몬을 책망하는 기사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마리아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기름 부은 여인에 대해 예수님의 죄 사함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값 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라는 가사는 잘못된 것 같습니다 (찬송가 211장). 막달라 마리아는 향유 부은 적이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죄 있는 한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죄 많은 여인이라는 소문이 없었습니다. 혹시 누가복음에 나오는 죄 많은 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가정할지라도 정확하지 않은 막달라 마리아를 가사에 넣는 것보다는 정확한 이름이 나올 뿐 아니라 사복음서에서 3곳이나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를 가사에 넣는 것이 더 좋을 뻔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사건을 유월절 2일 전이라고 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6일 전으로 나와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마26:2, 막14:1. 요12:1). 아마도 요한복음의 기록이 맞을 것입니다. 원래는 한 여자가 기름을 붓는 사건이 유월절 6일 전에 있었고 산헤드린 공회의 의결이 유월절 2일 전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와 마가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결을 기록하면서 유월절 2일 전이었고 기록하고 그 다음에 여자의 기름 부은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자의 기름 부은 사건도 유월절 2일 전으로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여자의 기름 부은 사건이 더 먼저 있었던 사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태와 마가가 산헤드린 공회의 의결 다음에 여자의 기름 부은 사건을 기록한 것은 그들의 의도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한 여자의 기름 부은 사건을 넣어서 강조하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의 의결과 가룟 유다의 배반 사이에 그들과 대비되는 한 여자의 기름 부은 사건을 배열한 것일 것입니다.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①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6-7절).

  예수님이 베디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을에 있을 때였습니다 (6절).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은 예루살렘 맞은 편 감람산에 있던 마을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입니다 (요12:1-3). ‘나병환자 시몬’은 그들의 아버지이거나 마르다의 남편으로 추정됩니다. 시몬은 원래 나병환자였으나 이미 일전에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나은 자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대인의 결례법상 사람들이 그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친근하게 그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나병이 나은 자였을 것입니다. 그 집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식사를 대접한 것은 예수님이 문둥병을 낫게 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나 나사로를 살려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일 수 있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7절). ‘한 여자’는 베다니의 마리아입니다 (요12:1-3). 그는 마르다의 동생이며 나사로의 누이입니다. 매우 값진 향유인 ‘나드’(ναρδοs)는 동인도의 나르도스타키스 자타만시(Nardostachys Jatamansi)라는 향나무의 뿌리에서 채취하여 추출한 향기로운 점액성 액체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유대 지방에서는 재배되지 않고 히말라야 산맥이나 인도 지방에서 자라기 때문에 당시 유대 지방에서는 수입을 해야 했으므로 값이 매우 비쌌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부은 나드 향유는 1근(약340g)이었다고 했는데 (요12:3), 5절에 보면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어치라고 했습니다. ‘300 데나리온’은 장정이 300일 동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품삯으로서 (마20:8-9) 안식일을 제외하면 1년 동안 일해서 벌 수 있는 금액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 때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 5,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물론 최소한의 음식이기는 하지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금액이 200데나리온인 것을 감안하면 향유 1근이 300데나리온이라면 얼마나 고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막6:37, 요6:7). '옥합'(玉盒)은 헬라어로 '알라바스트론'(αλαβαστρον)인데 그 뜻은 '알라바스터'를 재료로 만든 '알라바스터 병'(alabaster jar)이라는 뜻입니다. '알라바스터'(alabaster)는 탄산석회나 황산석회 성분을 가진 반투명 광물로서 주산지인 애굽의 이름을 딴 이름입니다. 이 병은 몸체가 둥글고 목이 긴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값 비싼 기름이나 향을 넣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깨뜨려’라는 표현은 병 전체를 깨뜨린다는 말이 아니라 몸 전체가 둥글고 위로 올라가면서 좁고 긴 목을 가지고 있고 끝이 봉인되어 있기 때문에 담겨 있는 나드향유를 붓기 위해 그 목을 잘랐다는 말입니다. 유대 지방에서는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붓기는 했으나 그 때는 감람유(올리브유)를 부었습니다. 나드향유는 그런 곳에 사용하지는 않고 귀한 손이 방문했을 경우 식사 때 붓거나 (눅7:44-46) 장례 때 시신에 부어 바르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눅23:56-24:1, 요19:40). 바로 마리아는 식사 중에 예수님의 머리 위에 니드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요한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 자기 머리털로 닦으니 냄새가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요12:3). 동일한 사건에 대한 시각과 강조점의 차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잔치 석상에서 주빈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을 감안하면 마리아도 머리에 부었을 것이고 그것이 발에까지 흘렀을 것입니다. 나드향유의 냄새는 온 집안에 가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②제자들은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8-9절).

  마리아가 예수님께 한 옥합의 나드향유를 부었을 때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고 책망했습니다 (8-9절). 마태는 이에 대해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했는데, 요한은 가룟 유다가 한 말이라고 하면서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라 돈궤를 맡은 자로서 돈궤의 돈을 훔쳐간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요12:5-6). 가룟 유다가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가룟 유다가 먼저 주도적으로 말했을 것이고 다른 제자들이 동조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월절 기간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실제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가 많이 시행되었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욕심 때문에 분노했을 것이고 자른 제자들은 당시 신앙적 관념에 의해 동조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평소에 가난한 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께 자기들의 의로운 생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생각 때문에 동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소 그들의 숙식을 제공했던 마리아로서는 제지들의 예상 밖의 반응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③예수님은 여인의 행위를 인정했습니다 (10-13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녀를 괴롭게 하지 말고 가난 두라고 하면서 그가 좋은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10절). 마리아가 좋은 일을 한 것이니 그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인지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동참하는 일을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11절). 이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평소 가난한 자들에 대해 깊이 동정했습니다 (마5:3, 6:2-4, 눅 6:20, 21:1-4, 요13:29).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언제든지 도울 수 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이 임박한 바 예수님을 위해 헌신할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그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12절).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시체에 나드향유를 부어 발랐기 때문에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내다보고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던 자로서 (눅10:39),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대속을 위한 죽음이 가까웠음을 인지하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마음으로 그 죽음에 참여하기 위해 그런 행위를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많은 택한 백성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사건이 될 것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죽음이 그런 향기를 발할 것을 행위로 고백한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구속사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그에 대해 자신의 가장 값진 것을 사용하여 그의 구속사적 사역을 높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13절). 마리아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믿음의 행위로서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그의 행위도 함께 전파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행위를 기쁘게 여기시고 그의 행위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강조된 것들 중에 교훈 받아야 할 것은 첫째, 우리도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말씀 듣기를 좋아한 마리아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예수님의 구속에 대해 배웠을 것이고 그 구속사건이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라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 의미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일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책망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할 기회는 많이 있지만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위해 헌신할 기회는 항상 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가치 면에서도 가난한 자 구제보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우선시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구제와 같은 선한 일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무슨 일을 하신 분인지 나타내는 것을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를 통해 그 분을 나타내고 그 분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가장 비싼 것을 드렸듯이 우리의 모든 것을 사용해서라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옥합을 깨트린 사실을 언급한 것이 상징하듯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헌신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헌신은 기회 있을 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 중에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위해 헌신할 기회가 항상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나 시간이나 능력이나 제도적인 환경도 허락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씀의 깨달음과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있을 때 그 일을 해야 합니다. 

           3. 가룟 유다의 배반 (14-16절)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14절). 가룟 유다는 시몬의 집이 있는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베다니에서 약 3km나 되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대제사장을 만나서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 ‘유다’와 구분하기 위해 이름에 ‘가룟’을 붙여서 기록한 것입니다. ‘가룟’(Ισκριωτης)은 ‘가룟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가룟’은 유다 지방 헤브론 남쪽에 있는 케리옷(Kerioth)을 지칭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와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실질적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였고 공회 회장을 맡고 있는 자였습니다.

  3-5절절에 보면 대제사장들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서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 방도를 의논했습니다. 하지만 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명절인 유월절(무교절)에는 체포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각지에서 모여든 인파로 120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믿거나 호감을 자진 자들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제의를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라면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군중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월절 인파의 민란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히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마태복음26:15에는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은 30'은 은(銀) 30세겔로서 종 한 사람의 값에 해당합니다. 출애굽기21:32에 보면 황소가 남의 노예를 죽였을 때 은 30세겔을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출애굽시대에 산정된 금액인 은 30세겔이 예수님 당시 때에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감안하면 그 가치가 종 한 사람의 값에 훨씬 못 미치는 하찮은 액수였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돈을 받고 예수님을 어떻게 넘겨줄지 그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 기회는 가장 좋은 때를 말하는 바, 가룟 유다가 찾는 가장 좋은 때는 가능한 한 백성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은밀하게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장소와 시기를 뜻할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는 가룟 유다에 대해 ‘열 둘 중의 하나인’의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실제로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하나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을 일컬을 때와 달리 그런 수식어를 붙인 것은 마태와 마가의 의도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죽는 데에 내어 주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제자들과 구별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마가는 가룟 유다의 배반 동기를 전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신학적 의도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출애굽시 첫 번째 유월절 양의 죽음으로 언약 백성의 생명을 죽음에서 면하게 해 주었던 것을 통해 예표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택한 백성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유월절 기간에 있어야 합니다 (요1:29, 고전5:7, 마26:2, 마26:17-30, 36-46, 마26:45-56). 그래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공회는 유월절 기간에는 죽이지 않으려는 결정을 했었지만 하나님이 가룟 유다의 배반을 허락하여 유월절 기간에 예수님이 죽도록 섭리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2절). 마가는 그런 점을 암시하기 위해 가룟 유다가 어떤 이유와 동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었는지 전혀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의 다른 저자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들을 부분적으로 밝혔습니다. 그 공관복음의 다른 저자들의 보고와 당시 배경을 토대로 보면 가룟 유다의 배반 동기는 근본적으로 성경대로 성취된 것이지만 (슥11:12) 상황적으로 보면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현실적으로 보면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12:6에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공동체의 재정을 맡은 자였는데 재정에 손을 댈 정도로 돈에 대한 욕심이 있는 자였습니다. 마태복음26:4-5에 보면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와 시기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고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댓가로 얼마를 줄 것인지 흥정을 했고 은 30을 받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은 30'은 은(銀) 30세겔로서 종 한 사람의 값에 해당합니다. 출애굽기21:32에 보면 출애굽시대의 모세 때 황소가 남의 노예를 죽였을 때 은 30세겔을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모세는 예수님보다 약 3,500여년 전 사람이므로 모세 때 은 30세겔은 예수님 때에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감안하면 그 가치가 형편없이 낮은 금액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 적은 금액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 준 것을 보면 그는 돈에 대한 욕심이 지대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둘째, 잘못된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정치적으로 보면 그의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엣세네파와 젤롯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젤롯파는 열심당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젤롯파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내용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에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구원자가 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삼하7:12-13). 그들은 그 말씀을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구원자)가 와서 유대 나라를 로마 제국의 식민지에서 독립시키고 다윗왕 때 이상 가는 번영하는 다윗 왕국을 재건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메시야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투쟁과 혁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승에 의하면 바로 가룟 유다가 젤롯파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가룟 출신 유다라는 말입니다. ‘가룟’은 유다 지방 헤브론 남쪽에 있는 케리옷(Kerioth)을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북쪽 갈릴리 지방 출신인데 반해 가룟 유다는 남쪽 유다 지방 출신으로서 유다 왕국 재건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을 것이고 더욱이 젤롯파 출신으로서 유다 왕국 재건을 위해 인생을 바치겠다는 신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라는 분이 로마 제국의 정권과 ㅊ타락한 유대 종교의 기득권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바로 예수가 새로운 다윗 왕국을 일으키기에 합당한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라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일에 헌신하기로 하고 예수를 따라 그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헌신한 것입니다. 예수가 유월절이 가까워갈 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칠 땐 그 일이 곧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의 기대감은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상황에서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26:2에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번에만 그런 말을 한 것을 아니었습니다 (마16:21, 17:22, 20:18, 26:2). 가룟 유다는 예수가 다윗 왕국을 재건할 자로서 유대의 왕이 될 줄 알았는데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가 유대의 왕이 될 줄 알고 모든 인생을 걸고 헌신했는데 예수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속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배신감이 들고 그 동안 그를 따른 자신이 억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거절당한 수치심 때문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것은 심리적으로 보면 수치심 때문이었습니다. 수치심(羞恥心, Shame)은 사전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을 말합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만났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황스러워 하거나 불쾌함을 드러내는 감정을 말합니다. 마태복음26:6-13과 마가복음14:3-9에 보면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체포할 정보를 주겠다고 하기 직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건너편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베다니 마을의 시몬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마리아가 귀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할 것을 찬양하기 위한 상징 행위였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분개하여 그 300데나리온(노동자 1년 수입)이나 되는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허비한다고 책망했습니다. 그 말을 주도적으로 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요한복음12:4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 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자신을 칭찬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심히 책망하고 마리아를 극진하게 칭찬했습니다 (요12:7-8).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바랐던 예수님이 자기를 거절한 것으로 생각하고 극한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즉시 현장을 뛰어 나가 3km나 떨어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체포하게 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거절당한 수치심 때문에 예수님을 넘겨준 것입니다 (마26:14-16, 막14:10-11).  

  넷째, 악령의 개입 때문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것은 영적으로 보면 악령의 개입 때문입니다. 누가복음22:3에는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3:2에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3:27에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 전부터 사탄이 개입했다고 했습니다. 사탄과 마귀는 악령들의 별명입니다. 가룟 유다는 악령들이 역사하여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26:20-25과 마가복음14:17-21과 누가복음22:21-23과 요한복음13:21-30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할 때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식사 중에 제자들을 향해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불안하여 예수님께 자기인지 물으면서 서로 의심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나는 아니지요?’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도다”고 했습니다 (마26:25).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 옆에 있던 요한에게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머릿짓을 하자 요한이 ‘주여 누구오니이까’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하시고 떡 한 조각을 떼어 쏘스(유월절 음식인 떡이나 쓴 나물을 찍어 먹기 위해 식초와 과일즙을 섞어 만든 쏘스)에 적셔서 가룟 유다에 주었습니다 (요13:26). 예수님이 이미 가룟 유다가 배반할 계획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드러낸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더 이상 자신의 의도를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그에게 악령이 들어갔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과 잘못된 신념과 거절당한 수치심을 가질 때 악령들이 역사하여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악령들이 개입할 때 그런 것들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을 가질 때 악령들이 개입하여 주장하는 교두보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내용은 4복음서 모두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찬 석상에서 제자 가운데 누가 팔지에 대해 지적했는데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직접적으로 가룟 유다를 지목했으나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직접적으로 지목하지 않고 함께 식사를 하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팔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막14:17-21, 눅22:21-23).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절대로 예수님을 팔아서는 안 되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팔 것을 암시하므로 제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의도일 것입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수신자가 로마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마가의 의도는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고 계명의 말씀을 지키느라 고난을 당하는 믿음 있는 자라 해도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음을 암시하므로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아 굳게 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 자라 해도 믿음을 지킬 때 고난이 오거나 그 고난이 길어지면 언제라도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힘들 때 더욱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4. 유월절 성만찬 (17-30절)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17-19절).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고 물었습니다 (17절). ‘유월절 음식’은 유월절에 잡은 양고기를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함께 먹는 음식입니다. '무교절 첫날'을 마가복음14:12에서는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무교절’(無餃節)은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유월절(逾越節)은 정월(니산월) 14일이고 무교절은 정월 15-21일인데 14-21일 기간 전체를 유월절이라 하기고 하고 그 전체를 무교절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절의 ‘무교절 첫날’은 유월절인 정월 14일을 말합니다. 그 날은 뒤에 나오는 ‘유월절 양 잡는 날’입니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유월절 음식 준비에 대해 묻고 유월절 음식을 준비해서 유월절 음식을 먹은 날이 유월절인 정월 14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다르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8:28에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 아래서 체포되어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을 받은 후 예수님을 끌어간 자들이 로마 총독 빌라도 관정으로 끌고 가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새벽에 빌라도 관정으로 끌고 가 고발했다고 했는데 이 관정은 빌라도가 머물던 관저를 말하는데 유대 랍비들은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오가는 가면 부정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끌고 간 자들이 자신들이 더럽혀 지므로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까봐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고발을 한 것입니다. ‘유월절 잔치’을 유월절에 먹는 유월절 양으로 본다면 아직 유월절인 정월 14일이 지나지 않은 날 새벽으로서 유월절 전날인 정월 13일 새벽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요한복음19:14에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때를 말합니다. 그 때가 유월절 준비일 제 6시(낮 12시)였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준비일’은 유월절인 정월 14일 전 날인 정월 13일을 말합니다. 곧 요한복음의 기사를 기준하면 예수님이 유월절 전 날인 정월 13일 저녁에 최후의 만찬을 했고 새벽에 심문을 받고 낮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로 봄). 그러고 보면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하루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은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인 14일로 보고 요한복음은 유월절 전날인 13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보고가 역사적으로 맞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요한복음의 보고가 맞다면 공관복음 저자들이 13일을 14일로 보고한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유월절 양과 연결시키기 위한 신학적 의도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한 것은 유월절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음식인 양을 먹지 못하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공관복음 저자들은 유월절 전 날 저녁에 먹은 최후의 식사를 의미상 예수님이 유월절 양으로 오신 분으로서 유월절 저녁에 잡은 양을 먹는 유월절 식사를 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역사적인 정확한 날자와 수치보다는 구원사적인 의미를 밝히는데 더 주력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여쭈었습니다 (17절). 당시에 제자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월절 기간에는 120만에 가까운 인파가 모여들어 장소를 쉽게 구할 수 없었을 것이고 더욱이 기득권을 가진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거나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 핍박을 가했기 때문에(요9:22-23) 예수님께 장소를 선뜻 내어 주려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유월절 음식 준비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고 했습니다 (18절). 누가복음22:8에서는 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성 안의 아무에게 가서 말하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그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무'에 해당하는 톤 데이나(τον δεινα)는 '아무 아무게' 혹은 '그런 사람'의 의미이지만 앞에 '그'라는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가서 '선생님 말씀이~'라고 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차릴 정도로 서로 잘 알고 있는 관계인 듯 합니다. 결국 그 집 주인은 자기 집을 내어 주어 제자들이 유월절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19절). 마가복음14:13-15에는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사람’(ανθρωπος)이 남성(a man)인 것을 보아 남자 종(노예)을 의미합니다. 당시 물동이를 나르는 일은 주로 여자들이 했는데 여기에서 남자가 물동이를 옮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 동이를 가지고 가는 남자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집 주인’은 제자들이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라고 하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줄 알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머물 장소를 내어 줄 수 있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큰 다락방’(ανωγεον μεγα)은 2층에 있는 큰 방(홀)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해서 유월절 음식을 먹을 준비를 했습니다 (막14:16). 사실 이 음식은 앞서 언급한 대로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월절(14일)에 먹는 유월절 음식이 아니라 그 전날(13일) 먹는 일반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음식인 양고기와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떡)과 쓴 나물을 준비 한 것이 아니라 일반 떡(피타)과 포도즙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기 힘들지만 아마도 이 장소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의 집으로 생각됩니다. ‘물 한 동이를 가기도 가는 사람’은 마가이고 ‘그 집 주인’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로 추측됩니다. 그것이 맞다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이 12제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날 밤에 마지막 식사를 하도록 장소를 제공하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120명이 10여 일 동안 모여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고 그 이후 헤롯왕의 박해로 베드로가 투옥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인들이 모여 밤새 기도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한 것입니다 (행12:12, 행1:13-14). 자기의 집을 예수님과 그의 공동체를 위해, 사도와 교회 공동체를 위해 자기 집을 내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하나님 나라 건설사역을 위해 헌신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제자들에게 건너 마을에서 나귀를 데려오게 할 때 '주가 쓰시겠다' 했고 나귀 주인은 나귀를 내어 주었던 것과 같은 대목과 같습니다 (21:1-3).

   ②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했습니다 (20-24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비된 집에서 유월절 만찬을 하기 위해 앉았습니다 (20절). 유대인의 식탁 자세는 식탁을 향해 왼쪽으로 비스듬히 줍는 자세입니다. 당시 관습으로 볼 때 식탁에 둘러 비스듬히 누운 모습을 말한 것일 것입니다. 당시 식사 풍습에서 자리 배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장 친밀한 사람이 자리하고 나머지는 그들 다음으로 자리하였는데 전체의 형태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자 형태였습니다. 개개인의 자세는 비스듬하게 왼쪽으로 누워 왼 팔로 몸을 지탱하고 오른 팔로 음식을 먹었으며 다리는 다음 사람의 뒤쪽으로 향한 모습이었습니다. 식사 도중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자신을 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대적들에게 넘겨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상상할 수 없었던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전에도 예수님이 팔릴 것을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제자가 판다는 말씀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만찬 중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했습니다 (21절).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배반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제자들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한 사람 한 사람 쳐다보며 예수님께 '주여 내니이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그릇에 함께 손을 넣는 자가 팔리라고 했습니다 (23절). 유대인의 관습은 대접에 과일이나 식초를 혼합한 소스를 넣고 쓴 채소나 누룩없는 떡을 담갔다가 먹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를 하면서 떡을 소스에 찍기 위해 손을 그릇에 넣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13:26에는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고 조각을 가룟 유다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가룟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 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도다'고 했습니다 (25절).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라 부른 것과 달리 가룟 유다는 '랍비'(선생)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을 자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나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팔 것이라고 하므로 가룟 유다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팔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는지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을 팔 자가 자신인지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도다'함으로서 가룟 유다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요한복음13:27-30에는 예수님이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하니 가룟 유다가 곧 나갔다고 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배반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24절).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자’(人子)에 해당하는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ο υιος του ανθρπου)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다니엘7:13에 나타난 '인자 같은 이'(케바르 에나쉬, כבר אנש)를 가리킵니다 (창28:10-14, 삼하7:12-14, 겔1:26-28). 곧 ‘인자’는 구약성경에 오시리라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인 구원자를 일컫는 관용적 표현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그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 구원자는 대속 사역을 위해 고난을 받게 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53장, 시41편, 사53:12, 슥11:12). 예수님이 제자의 배반으로 고난의 죽음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구약성경에 기록된(γραφω) 대로 가는 것으로서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22:22에는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작정된’에 해당하는 기본형 ‘호리조’(οριζω)는 ‘표시하다’ ‘교시하다’ ‘결정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구약성경에 이미 기록해 주신대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계획 가운데 결정한 대로’의 의미가 강조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 가운데 예정(豫定)하시고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구약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 자신도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자발적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판 자는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의 뜻대로 고난의 죽음을 당하지만 예수님을 고난의 죽음에 넘겨준 자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자유 의지에 의해 결정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개인의 속성과 사고와 행동의 일정한 성향을 아시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하하지 않고도 계획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한한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논리이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을 근거로 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목적대로 계획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계획하신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의지에 따라 결정하여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배반을 당해 고난의 죽음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배반하여 고난의 죽음에 넘겨준 자는 그 계획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의 의지대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가가 클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표현은 예수님이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속담처럼 흔히 사용했던 말을 인용하여 그 사람에 대한 동정을 표시하는 표현입니다.   

       * 유다복음 (The Gospel of Judas)

  위경(僞經) 가운데 ‘유다복음’이 있습니다. 유다복음은 1-2세기에 있았던 이단 영지주의의 분파 가인파가 작성한 것인데, 2세기 말 기독교 변증가 이레니우스에 의해 처음 언급되고 4세기에 에피파니우스가 공격한 이후 사라지고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학회가 미국 워싱턴DC에서 이른바 '유다복음'을 공개했습니다 (2006,3.9).

  ‘유다복음’은 26쪽 분량의 사본(寫本)으로 그 내용은 우리가 신뢰하는 성경(정경)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판 것은 예수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서,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신 한 것은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가룟 유다가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의 메세지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므로 예수님으로부터 다른 제자들보다 신임을 받았고,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의 구속 사역을 이루는 데 있어서 비밀리에 가룟 유다에게 자신을 배반하여 팔라고 지시했고, 가룟 유다는 그 일을 잘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살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자신이 육신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어서 적에 의해 해방되기 보다는 신임하는 친구에 의해 해방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가룟 유다에게 자신을 배반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가룟 유다는 배반자가 아니라 유일하게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비밀을 계시 받은 자로서 예수의 구속사역을 위해 헌신한 예수님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유다복음’은 1~2세기에 있었던 기독교 이단종파 영지주의 분파였던 가인파가 작성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그 사본이 발굴될 당시 함께 나온 다른 자료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것이기 때문이고 그 내용의 주장이 그 분파인 가인파의 주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靈智主義)는 영과 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자들로서 영을 선하게 여기나 육은 악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신과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가진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도 신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고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자신들에게 전달하는 비밀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영지주의파에는 마르시온파와 몬타누스파와 시몬마구스파와 가인파 등이 있었는데 가인파는 그 분파 중 하나입니다. 가인파(Cainites)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맏아들 가인을 숭배하는 자들로서, 가인이나 가룟 유다 등 보편적으로 악인으로 인식된 인물들을 예언의 실현도구라는 관점에서 보는 자들입니다. 유다복음은 그들이 가룟 유다에 대해 가진 견해를 복음이라는 용어를 덧붙여 만든 문서입니다.

  유다복음은 자의적 해석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정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는 가룟 유다가 자기 욕심에 끌려 사탄(마귀)의 사주로 예수님을 팔았고 결국 자살했다는 내용뿐입니다 (마26:4-5, 요13:2,27, 마27:5). 가룟 유다가 예수의 신임 받는 제자였다는 기록과 그가 예수의 계시에 의해 예수를 배반했다는 기록은 정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유다복음이 위경인줄 알고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③ 예수님이 성찬예식을 행하셨습니다 (26-30절)

  예수님께서 만찬 때에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며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포도주 잔을 가지고 축복하고 제자들에게 주며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했습니다 (26-28절).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에서 떡과 잔을 나눈 것은 예수님 자신이 구속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이 찢길 것과 피를 흘릴 것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떡’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말합니다. ‘잔’은 포도주를 담은 잔을 말합니다. 아마도 물의 ⅔정도를 섞은 포도주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월절 공동식사에서 주역이 떡을 떼어 주고 잔을 나누면서 감사기도를 했습니다. 그 내용은 “땅에서 떡이 생겨나게 하신 하나님이시여 찬양을 받으소서” “포도의 열매를 만드신 하나님이시여 영광을 돌립니다”의 형태였을 것입니다 (Jeremias). 예수님이 그런 형태의 축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누면서 그것들이 예수님의 몸과 피와 같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예수님이 떡과 잔을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한 것은 로마 카톨릭(천주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주장한 것처럼 실제 떡과 포도주가 몸과 피로 변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빛, 물, 포도나무, 길 등 여러 단어들로 표현을 했는데 그것들이 실제 표현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르치려는 의미를 부여한 말씀으로서 상징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몸이 못 박혀 찔리고 피를 흘려 죽을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곧 예수님의 대속해 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연합할 것을 요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대속을 믿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죽으므로 그들의 죄를 대속하여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을 받아들이는 자는 죄 사함을 받아 죄로 인한 형벌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내어 줌’ 사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29절). 예수님이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나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마시는 것이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 식사가 지상에서 마지막 식사가 될 것으로 선언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어 주려는 확고 부동한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는 마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가치 면에서 전혀 새로운 나라에서 교제를 할 것을 기대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만찬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22:19에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이 명령을 따라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고린도전서11:23-26에는 “~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사람들은 성찬식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기념하고 우리가 그에게 연합하여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의식의 행위로 선포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 성찬(聖餐)과 주의 임재(臨在)


  오늘날 성찬식(聖餐式)을 행할 때 주의할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공동예배에서 행해져야 하며 합법적인 목사의 집례 하에 이루어져야 하며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시대와 지역마다 가장 효과 있는 방법으로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적 형태는 다를지라도 그 의미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떡과 즙을 먹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성령으로 임하여 그 은혜를 적용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떡과 즙에 대한관념은 일반적으로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화체설(化體說)입니다. 화체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결정적 역할로 로마 카톨릭의 정설이 되었습니다. 화체설은 예수님이 떡과 즙에 실재로 임하여 떡과 즙이 살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공재설(共在說)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주장으로서 떡과 즙은 그대로 있지만 예수님이 떡과 포도즙에 임한다는 주장입니다. 셋째는 기념설(記念說)입니다. 기념설은 종교 개혁자 쯔윙글리의 주장으로서 예수님이 떡과 즙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즙은 기념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넷째는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說)입니다. 영적 임재설은 종교 개혁자 칼빈의 주장으로서 예수님이 떡과 포도즙에 참여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임하신다는 주장입니다. 오늘날 개혁교회가 받아들이는 정설은 영적 임재설입니다.      

      * '다 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

   예수님의 성만찬과 관련하여 그림 최후의 만찬의 그림이 소재가 된 다빈치 코드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붙잡히시기 전에 12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이탈리아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15세기 말(1495~1497)에 그린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은 그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다 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2003년에 미국 소설가 댄 브라운(Dan Brown)이 지은 소설로서 그 소설을 바탕으로 2006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그 책은 44개국으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영화도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프랑스 파리 루블(Louvre) 박물관에서 한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하는데 4명의 인물들이 그 사인과 관련된 비밀을 풀어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비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아내가 있었고 그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알고 있었는데 숨겼고, 그 사실을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도 알고 있었으나 숨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 수도회'(Priory of Sion- 루블 박물관에서 죽은 사람은 이 단체의 교주)가 알게 되었고 그 비밀이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Da Vinci)에게도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1495~1497년에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을 그리면서 그 그림에 그 비밀을 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있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이고 그가 예수님의 아내이고 예수님의 딸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설에 불과합니다. 그 책에서 그런 가설의 근거로 삼는 문서가 있는데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와 이집트 나까마디 문서(Nag Hammadi Documents)입니다. 사해 두루마리는 이스라엘 사해 주변 쿰란에서 발견된 엣세네파(Essenes)의 문서로서 그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대부분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 때였고, 그들은 종말적 메시야에 대한 대망을 가졌을뿐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이해는 없었습니다. 나까마디 문서는 이집트 나일강 위쪽 콥틱 교인들 유적에서 발견된 것인데 그것은 이단 영지주의(Gnosticism)자들의 글을 애굽어로 번역한 문서입니다. 더욱이 그 책의 서두에도 책 내용이 소설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복음22:21-24에 보면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배반하여 대적들에게 넘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그 말씀을 먼저 하시고 성찬식을 행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성찬식을 행한 후에 그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찬식 후에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자인지 의심하며 누가 배반할 자인지 밝히는 논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가 더 큰 자인지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자인지 논쟁이 벌어지면서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그가 가룟 유다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자인지 논쟁하다가 그가 밝혀지자 이제 누가 예수님을 더 위하는 자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곧이어 누가 더 예수님께 인정받는 자인지 논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전에도 여러 번 누가 더 큰 자인지 논쟁을 벌였었습니다 (막9:33-35, 10:35-41, 눅9:46). 그런데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구원자로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대로 대속의 죽음을 위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팔릴 것을 말씀을 하시고 성찬식이라는 극으로 강조하는 상황에서도 서로 큰 자임을 논쟁하며 다툰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도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신들이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성공하는 데에만 관심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나타내는 성찬식장에서 보인 모습니다. 그들의 황당한 모습에 예수님이 오히려 당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하신 말씀대로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로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택한 백성인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성찬의 의미가 요구한 바대로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해야 하고 그의 고난과 죽음에 연합하여 그가 맡긴 사명에 따른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적으로 부요해지고 성공을 하고 명예를 얻으려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높은 자임을 논쟁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잘난 자인지, 누가 더 옳은 자인지, 누가 더 높은 자인지에 대한 싸움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으로 구원해주신 것에 대한 반응이 어떠해야 할지 깊이 묵상하고 신앙의 정체성을 바로 회복해야 합니다.

      5. 제자들에 대한 배신 예고 (31-35절)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께서 체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찬미의 노래를 한 후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고 했습니다 (31절). 가룟유다 뿐 아니라 다른 11제자들도 다 주를 배신할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된 대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31절). 이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므로 제자들이 다 흩어질 것을 가리킵니다. 가룟 유다는 적극적으로 주를 배반했으나 다른 제자들은 그렇지는 않을지라도 소극적으로라도 주를 배신할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성찬에 참여한 제자들이 가룟 유다처럼 적극적으로 배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모두 예수님 자신의 수난과 관련하여 떠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목자가 공격을 받을 때 양들이 흩어진다고 한 스가랴13:7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공격을 받으면 제자들이 흩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될 때 자신들도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여 대부분 도망하고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 모두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난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32절). 예수님은 수난 후 십자가에서 죽게 되지만 다시 부활하게 되고 부활한 후에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 제자들이 고향 갈릴리로 가겠지만 예수님은 그들보다 먼저 가서 재회하여 새로운 관계를 이룰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했습니다 (33절). 제자 베드로는 언제나 열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따르라 할 때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고 (4:22), 예수님에 대해 그리스도로 고백했고 (16:16).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하실 때 그리하지 말도록 항변하며 만류했습니다 (16:22). 그 같은 열정으로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한 것입니다. 사실 그는 순수한 고백을 한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은 장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의 고백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34절). 마가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막14:30). ‘닭 울기 전’은 예수님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밤이 끝나기 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점으로부터 불과 몇 시간 후의 일인 것입니다.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은 철저하고 완전하게 부인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고에 베드로는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고,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35절). 마가복음14:31에는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고 했는데, 여기의 ‘말하되’(ελεγεν)가 미완료 시제인 것으로 보아 매우 단호하게 계속적으로 말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순교의 각오로 결단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호언장담에 다른 제자들도 분위기에 따라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유다를 제외한 10명의 제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단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들이 아직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아직 실감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연약성에 대해 깊은 자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붙잡힐 때 모든 제자들이 주를 떠나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배반한 것은 물질에 대한 욕심과 예수님께 인정받지 못한 마음과 메시야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습니다 (14-16절 해석 참조).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주를 배신한 이유는, 첫째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군졸들에게 붙잡히는 것을 보고 붙잡히는 것을 보고 도망했습니다 (마26:56). 주님께 신임을 받았던 베드로까지도 대제사장 가야바 관정의 뜰에서 심문받는 모습을 보고 무서워서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마26:69-75). 이는 고난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요20:9). 둘째는 실망감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후 모든 제자들이 다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행1:4-8).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메시야인 줄 알고 육신적인 소망을 두었다가 그 소망이 끊어지자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마20:21, 요21:2-4). 특히 신앙적으로 예수님이 저주의 죽음을 죽은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을 수 있습니다 (신21:23, 눅24:21).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암시를 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했습니다 (31-32절). 이 말씀은 스가랴13:8-9의 반영입니다. 스가랴 13장은 참 목자가 해를 받으므로 대부분의 양 떼가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양떼의 ⅓은 남아 연단을 받은 후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한다고 했습니다. 곧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갈릴리로 떠나겠지만  그들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여 갈릴리로 먼저 가서 그들을 다시 세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36-46절)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기 위해 겟네마네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36절). 겟세마네는 예루살렘성 동쪽 옆 기드론 시내 건너편 감람산 기슭을 말합니다. 그 곳은 성으로부터 1.2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당시에 그 곳은 감람나무가 많이 있었고 감람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는 틀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는 그와 관련되어 지어진 이름입니다. '겟세마네'는 아람어로서 기름짜는 틀(oilpress)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①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세 제자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올라가면서 세 제자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한참 기도를 하신 후 잠깐 내려와 보니 그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고 책망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올라가 한참 기도를 하신 후 다시 내려와 보니 또 자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올라가 한참을 기도하시고 새벽녘에 내려와 보시니 역시 또 자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이제는 자고 쉬라"라고 했습니다. 이젠 대제사장들이 보낸 무리들이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붙잡으러 올 것이니 이젠 무한정 자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젠 기도해야 할 때가 다 지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붙잡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해야 하는 문제로 사선을 넘는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땅히 깨어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어떤 기도를 해야 했을까요? 38절에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나와 함께'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과 같은 내용을 기도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두고 예수님이 느끼는 내적 고통에 동참하며 그를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마26:2,24, 막8:31, 눅22:22, 요2:19-21). 그리고 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시험'(πειρασμος)은 '유혹'(temptation)의 의미입니다. 누가복음22:40에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고 했습니다. 얼마 전 저녁식사 때 예수님이 이미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고 (21절),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라~"고 하셨고 (31절), 특히 베드로에게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34절). 사실 요한복음17:1-26에 요한이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기록한 것을 보면 요한은 아주 잠들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특히 베드로 이름을 부르면서 책망했습니다. 40절에 보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했습니다. 마가복음14:37에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했습니다. '한 시간'은 꼭 60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을 이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것을 두고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한 것을 깨닫고 자기들도 결코 낙심치 않고 그를 배반하지 않으려는 결단의 기도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기 때문에 예수님이 붙잡힐 때 모두 도망했고 베드로는 대항하기 위해 칼로 대항했고 예수님이 심문받을 때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51-54절, 69-75절).

  제자들은 육신이 약해 잠을 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면서 41절에 보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해당하는 '프뉴마'(πνευμα)는 '영'(spirit)을, '육신'에 해당하는 '싸륵스'(σαρξ)는 '육'(flesh)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원이되 육신은 약하다는 말은 영적인 인지로는 기도해야 하려는 의지가 있지만 육적으로 약하여 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번역된 ‘프뉴마’(πνευμα)는 하나님의 뜻을 향하는 속성을 가진 영(spirit)을 의미하고, ‘육신’으로 번역된 ‘싸륵스’(σαρξ)는 죄의 본성을 따르려는 육(flesh)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는 욕망이 있지만 죄성 때문에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임박한 수난과 자신들이 시험에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질 것을 인지하고 넘어지게 하려는 사탄의 유혹과 죄성의 유혹을 경계하며 기도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욕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성이 강하게 지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더욱 미혹에 들지 않도록 경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43절에는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고 했습니다. '피곤함'에 해당하는 기본형 '바레오'(βαρεω)는 '내리 누르다' '무겁게 하다' 등의 뜻입니다. 제자들은 피곤한 차에 밤이 늦었기 때문에 눈꺼풀이 무겁게 짓눌렀고 그것을 견디지 못해 잠이 든 것입니다. 낮에도 예수님을 따라 사역을 했고 성만찬을 위한 준비를 했고 저녁 내내 성만찬을 했고 예루살렘에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1.2km나 되는 곳까지 왔고 산 위에까지 올라왔으니 눈꺼풀이 자동적으로 내려와 짓눌렀을 것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꺼풀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행구인 누가복음22:45에는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슬픔'에 해당하는 '뤼페'(λυπη)는 '슬픔' '근심' '한숨' '싫은 것을 억지로' 등의 뜻입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이 자기들을 떠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예고하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정말로 싫어하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하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마음의 번민과 공포를 잊기 위해 의도적으로 잠을 청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산기도할 때 혼자 묘지에서 기도할 때 경험한 바도 같습니다.  

  44-46절에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다르고 세 번째는 두 번째와 동일한 것으로 기록했으나 (마26:39-44), 마가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동일하고 세 번째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 번째에 3제자에게 와서는 “이제는 자고 쉬라”고 했습니다. 이는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아 이제 기도해야할 때가 지났으니 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책망과 권면으로 깨어 기도하라고 했으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고 이제 수난의 때가 왔으니 더 이상 그렇게 강요할 필요가 없으니 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습니다. 배반한 가룟 유다가 제사장들의 신하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가까이 와 있으니 가서 체포를 당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결단하고 담대히 그 길을 가려는 모습을 모여 준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일하는데 쏟아 버리므로 피곤하여 기도하지 못합니다. 모든 관심을 돈 벌고 잘되는데 집중하느라 진짜 중요한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설사 주의 사역을 한다 하더라도 그 사역 자체에만 몰두하느라 주님의 요구를 알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 영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주의 길을 가는 데에 어려움이 예상되면 근심하면서 일부러 잊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극한 내적 고통 중에 사선을 넘는 기도를 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잠 자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 생각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는지, 예수님이 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죽어야했는지,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는지, 성령님이 왜 우리에게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하고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훈련시켰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이 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이 도망하듯이 신앙 생활하면서 어려움이 따르면 도망하고 열심을 내더라도 분별력이 없어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열심을 부립니다. 이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로마서13:11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5:5-6에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고 했습니다 (벧전4:7, 5:8). 단순히 기도를 열심히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하시는 일을 분명히 알고, 신앙 정체성을 깊이 확인하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②예수님은 세 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앞두고 기도했습니다. 마태복음26:36-46뿐 아니라 마가복음14:32-42, 누가복음22:39-46, 히브리서5:7에도 나온 기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 마가 요한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습관대로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밖으로 1.2km 떨어진 겟세마네라고도 하는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제자들을 산 아래 머물게 하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만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기도하는 하는 장소에 이르자 세 제자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지시하고 돌 던질 만한 거리로 더 올라가서 홀로 기도했습니다 (눅22:41). 죽을 정도로 심한 놀람과 슬픔과 고민 가운데 무릎을 꿇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히5:7). 얼마나 절박한 기도를 했는지 진액을 짜며 기도했고 바닥에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 같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십시오" 기도 후에 세 제자들에게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 동일한 기도를 하고 또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 동일한 기도를 하고 그렇게 세 번을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과 행보를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죄와 죽음과 내세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때가 임박하자 심히 놀랐습니다. 마가복음14:33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라고 했고, 마태복음26:37-38에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심히 놀라고 슬퍼하고 고민하여 죽을 정도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극심한 놀람과 슬픔과 불안과 근심과 번민으로 극심한 고통을 느낀 것입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Περιλυπος εστιν η ψυχη μου εως θανατου)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프쉬케'(ψυχη)는 영혼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영혼은 마음보다 더 깊은 생명의 원리로 보고 있습니다. 마음의 단순한 고민이 아니라 내적으로 가장 깊은 곳에번민으로 인해 고통이 있었고 그 고통을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는지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렇게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태복음26:39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했고, 마가복음14:36에는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아빠’에 해당하는 ‘압바’(Αββα)는 아람어 표현으로서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히 부를 때 사용하는 발음입니다.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πατηρ)는 헬라어로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잔'은 고난과 죽음에 대한 상징 표현입니다. 각색하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당신이 저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압니다. 당신이 택한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저를 보내신 것을 압니다. 저를 그들의 죄값으로 대신 죽어 그들의 죄를 없애고 그들을 죄의 결과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을 압니다. 저도 저를 통해 택한 백성들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꼭 그런 방법으로야 되는 겁니까? 다른 방법은 안됩니까? 당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 아닙니까. 그러니 제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길 만은 피하게 해 주십시오." 인성을 가진 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원대로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인성을 가진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그 길을 가는 것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에 그 길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밤새 기도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태복음26:39, 마가복음14:36, 누가복음22:42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실은 앞에서 고난의 잔을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 것은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항변했을 뿐 그는 결코 택한 백성을 죄와 그 결과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들의 죄값으로 고난과 죽음을 당해야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고, 레위기17:11에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고, 히브리서9:22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자신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마가복음8:31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고 했고, 요한복음2:19-21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택한 백성을 죄와 그 결과에서 구원하는 일이 다른 방법으로는 안 되고 오직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며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부요와 평안과 행복과 성공이 보장될 때입니다. 만일 가난과 질병과 실패와 불화 등 고난이 따를 때는 결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서 복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렇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히 갈등하며 번민하며 항거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꼭 그렇게 힘든 상황을 경험해야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분입니까?" 항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는 예수님이 보이신 결단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부요하고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살고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불가불 고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저는 그 길을 가겠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이 못난 자를 선택하여 아들을 삼아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천국가게 해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생명 살리는 사역을 맡겼으니 힘들어도 이 길을 가겠습니다"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목적 하에 있는 자임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 가치가 평생 힘든 가운데서도 자존감과 행복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7. 예수님의 체포당함 (47-56절)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① 큰 무리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47-50절)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과 말씀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파송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체포하러 왔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 무리들과 군호를 짜서 약속한 대로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미 아시고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했고 무리가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47-50절).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할 때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가룟 유다는 그 때 제자들의 무리에서 나왔습니다 (요13:30).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를 원했으나 백성들의 민요가 두려워 잡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민요가 나지 않도록 밤에 붙잡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밤에 어디서 기도하는지 알기 때문에 정보 제공 뿐 아니라 체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큰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감람산의 겟세마네 동산으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무리에 대해 47절에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라고 했으나, 마가복음14:43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71명의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공회는 율법 해석에 관한 일뿐 아니라 재판까지 했으며 사형 결정까지 할 수 있는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이었습니다. 그 공회는 이미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이기로 결정했었습니다. 하지만 민란을 두려워하여 유월절에는 체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은 30세겔을 받고 예수님을 아무도 모를 때 체포할 수 있는 정보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월절 전날 밤에 유월절 만찬을 하는 도중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지적을 받은 직후  그 자리에서 나와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가장 적절한 장소와 때에 체포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날 저녁에 평소처럼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신다는 사실과 밤새 기도하고 내려오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새벽이 되기 전에 체포하면 아무도 모르게 체포할 수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는 공회에서 파송한 무리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누가복음22:52에 ‘성전의 경비대장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아 성전 경비대로 참여한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18:3,27에 ‘군대’와 ‘천부장’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로마 군사도 참여한 것 같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들의 자신들에게 권한이 있는 종들과 성전 경비대를 보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의 사태를 위해 로마 군대까지 파견 요청을 하여 군사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리’를 마태복음26:47에서 ‘큰 무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많은 수가 온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천부장’이 참여한 것을 근거로 200명에 달했을 것이라고 말하기고 합니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검과 몽치였습니다. 요한복음18:3엔 등과 횃불도 가졌다고 했습니다. ‘검’은 로마 군사들이 가진 칼이었을 것이고 ‘몽치’는 성전 경비대가 가진 곤봉이나 대제사장들의 종들이 가진 몽둥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흉악한 강도를 잡거나 반란군을 진압하러 온 것처럼 한 것입니다 (사53:12).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행동을 다 아시고 체포조가 올 것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들을 맞이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자들과 군호를 짰습니다. 자신이 입 맞추는 자가 예수님이니 그를 잡으라고 했었습니다. 그 군호대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면서 입을 맞추니 예수님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했고 체포하러 온 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48-50절). 예수님께 ‘랍비여’(ραββι)는 ‘선생님이여’의 뜻으로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가룟 유다가 군호를 짜서 예수님을 체포하게 한 것은 당시 체포하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정확하게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시간대가 새벽이 되기 전이라 어둠 컴컴해서 예수님을 알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입맞춤’은 가족 간, 친구 간, 사제 간 등 아주 친밀한 사이에 하는 인사인데 갸룟 유다는 그것을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신호로 이용했습니다. 마가복음14:44에는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자들에게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가룟 유다가 체포조를 인도해 오고 예수님께 랍비여 하면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알게 하고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고 한 것은 그가 얼마나 완전한 의지를 가지고 배반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얼마나 비열하고 가증하게 배반했는지를 알게 해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재정까지 맡았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철저히 배반한 행동을 했습니다. 이는 불택자도 얼마든지 택자처럼 행동할 수 있고 택자도 불택자처럼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는 불택자도 택자처럼 살아갈 수 있고 택자도 불택자처럼 살아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왔을 때 요한복음18:4-6에 보면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니라' (Εγω ειμι)는 예수님이 자신을 누구인지 곧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낼 때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무리들은 아마도 출애굽기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Εγω ειμι ο ων)는 70인역(LXX)을 연상했을 것이고 어떤 신적 위엄을 느끼고 물러서게 되고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신적 권위에 대한 암시는 예수님이 무력 앞에 어쩔 수없이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승리적인 모습으로 붙잡혔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철저히 배반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정치적 기대에 어긋난 실망감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본문의 배반 행동은 그의 가증스런 배신과 위선의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돈 궤를 맡아 충성스럽게 보였으나 결국 자신을 가르친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그냥 배반한 것이 아니라 은 30세겔을 대가로 받고 대적들이 붙잡을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붙잡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군호로 예수님의 입을 맞추며 인사를 했습니다. 자기 스승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면 배은망덕한 행위인데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 대해 이렇게 했으니 사탄의 역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화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24절).    

   ② 베드로는 검으로 대항했습니다 (51-53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들이 칼과 몽치를 들고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 때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가 떨어지게 했습니다 (51절). 요한복음18:10에 보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였고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귀를 떨어뜨렸는데 그 종의 이름은 말고(Malchus)였습니다. 당시 유월절 순례자들은 먼 여행에서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목적으로 칼을 휴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22:36-38에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 직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에는 예수님의 활동이 사람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았을 때이기 때문에 사역을 할 때 식사와 잠자리를 쉽게 제공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전대나 주머니나 신발이나 칼이 꼭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후에는 상황이 달라져 박해를 받는 때가 될 것이므로 그 때에는 전대나 주머니나 신발이 필요하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칼이 필요한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칼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전과 다른 위험이 닥쳐올 새로운 환경을 올 것이니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면서 사역을 희생적으로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칼 2자루가 있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그러면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2사람은 칼을 가지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베드로가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붙잡히게 되었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칼로 대항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바 있고 베드로 자신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배반하지 않을 것을 호언장담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붙잡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을 보일 절호의 기회로 알고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말고의 귀를 내리친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목을 치려했을 것인데 말고가 피하는 바람에 말고의 귀가 잘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다시 집에 꽂으라고 하고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52절). 이 말씀은 칼 자체를 쓰지 못하게 하는 말씀이라기 보다는 나타나는 현상적 대응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설사 칼로 대항하여 그 무리들로부터 벗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능히 하나님으로부터 12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 달라고 해서 무리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營)'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기온(λεγιων)은 군대의 군단(軍團)으로서 당시 로마의 일개 군단은 보병이 6,100명이었고 말이 726필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12영 더 되는 하늘의 천군천사를 부른다면 200명 정도 될 것으로 추측되는 무리를 제압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상황을 벗어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18:11에 “예수께서 베드로 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잔'은 성경에서 주로 고난에 대한 상징으로 쓰입니다 (사51:17,렘25:15-18).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잔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마26:39).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을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하여 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예수님의 의도에는 배치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책망과 권면을 받았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했더라면 예수님이 대속의 길을 가야 할 것을 알고 분별력을 가져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면 고난도 달게 받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마26:39). 바울처럼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면 된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빌1:20). 애매히 고난을 당하거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이루다가 오는 고난을 받으려 해야 합니다 (벧전2:20).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빌1:29, 3:10). 예수님과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롬8:17).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10:38,16:24).

   ③ 예수님이 잡히신 것은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54-56절).

  대제사장들의 종들과 성전 경비대들과 로마 군사들이 가룟 유다의 인도 하에 새벽이 되기 전에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와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55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고 했습니다. 로마 군사들은 칼을 가졌을 것이고 성전 경비대들은 곤봉을 가졌을 것이고 대제사장들의 종들은 몽둥이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도둑이나 강도나 폭도를 잡으러 온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자들치곤 그 수와 무기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도둑질을 하거나 강도짓을 하거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무리들에게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라고 했습니다 (55-56절).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끊임없이 바리새인의 서기관(율법사)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감시하고 책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자신들의 위선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은밀한 장소에서 은밀하게 가르치지 않고 떳떳하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 회당이나 성전 같은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쳤습니다 (11:15,16, 12:28-40). 하지만 그들이 그런 때에는 예수님을 책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 깨달음이 드러난 연고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가룟 유다의 정보 제공으로 사람들이 보지 않는 장소에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성경을'(γραφαι)에 해당하는 단어가 복수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특정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고 하기보다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여러 말씀들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가룟 유다의 배신과 은 30에 팔릴 것도 성경의 예언되어 있고 (시41:9, 슥11:12), 예수님이 자의로 체포당할 것도 예언되어 있고 (사53:7), 예수님이 유월절 절기와 관련하여 붙잡혀 죽게 될 것도 예언되어 있고 (출12:21, 고전5:7).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것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53:12, 슥12:10). 대적들이 예수님을 유월절 기간에 그리고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서 체포한 것은 그 같은 말씀들을 이루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유월절과 관련하여 가룟 유다의 배신과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과 대제사장들이 체포조를 보낸 것은 그들에 의한 일 같지만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신앙으로 반응할 때 원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우린 그런 상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을 행하거나 사명을 감당하려 할 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섭리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는 것입니다. 대항할 수도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양보하고, 손해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손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5:39-42).

   ④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56절에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했습니다. 31절에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고 했는데 그대로 된 것입니다. 35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고 했는데,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예수님이 붙잡히게 되자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달아난 것입니다. 요한은 심문받는 자리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으나 베드로는 심문받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른 제자들은 따라가지 못하고 도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41절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했으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별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결단과는 달리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다 도망했다는 언급에 이어 한 청년이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한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14:51-52에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은 복음서 중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청년’에 해당하는 ‘네아니스코스’(νεανισκος)는 ‘청년’ ‘젊은이’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young man -KJV,NASB,NIV). 이 청년이 아마도 본서의 저자인 마가(Μαρκοs, Mark)일 것으로 추정되며 (Bruce, Cranfield), 마가는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동시에 자신도 그 안에 있었음을 고백하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운 행적을 들추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Lenski). ‘베 홑이불’에 해당하는 ‘신돈’(σινδων)은 ‘고운 삼베’로서 세마포를 가리킵니다 (linen choth -KJV, linen sheet -NASB, linen garment -NIV). 세마포는 마로 가늘게 짠 베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같습니다. 이 세마포는 이것은 매우 귀한 것이어서 시신을 염할 때에 쓰거나 부자들이 잠옷이나 겉옷으로 만들어 입었다고 합니다. 마가의 집은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부자였기 때문에 마가도 세마포로 잠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 같습니다. 주경신학자 렌스키(Lenski)의 추론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집 2층에서 유월절 식사를 최후의 만찬으로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을 마친 후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고 마가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가룟 유다와 대적의 무리들이 마가의 집에 들이닥쳐 예수님의 찾았고 예수님이 안 계시자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했습니다. 마가는 잠결에 급작스런 상황을 당하자 예수님의 신변이 염려되어 잠옷 바람으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뛰어 갔습니다. 마가가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이 붙잡히고 제자들은 도망했습니다. 마가도 도망하려는 순간 무리들이 마가를 잡았고 그런 상황에서 마가의 잠옷이 벗겨졌는데 마가는 잠옷을 버려 둔 채로 도망을 했습니다.

  마가는 원래 좋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마가는 요한이라고도 합니다. 히브리식 이름은 요한인데 로마식 이름으로 마가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행12:12). 그는 유대인이며 레위족속의 후손으로서 구브로 출신이었고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골4:10, 행15:37,39). 그의 집은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그의 집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했다고 했는데 (막14:15), '큰 다락방'은 ‘메가 아노게온’(μεγα ανωγεον)으로서 (a large upper room)으로서 2층에 있는 큰 홀을 말합니다. 그의 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예수님과 12제자가 만찬을 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고 음식을 장만할 정도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다음에 120명이 모여 기도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할 정도였고, 후에 헤롯왕의 박해 때 베드로가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모여 기도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할 정도였습니다 (막14:15, 행1:13, 12:12). 그의 집은 여종을 두었을 정도였고, 잠을 잘 때 입는 잠옷을 값비싼 세마포로 짠 옷(베홑이불)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행12:13, 막14:51). 마가는 신앙적으로도 좋은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집안이 유대인으로서 레위족속의 후손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예수님과 12제자에게 만찬을 준비해 주고, 예수님이 죽은 후 120명이 기도할 수 있도록 집을 내어주고, 베드로가 갇혔을 때에도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내어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청년 때에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목격하고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목격하고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것에 동참했습니다 (막14:15, 행1:13, 12:12).

  하지만 마가는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가 실패한 사건들을 각색하여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날 밤 어머니가 손님들이 올테니 집 2층을 정리하고 음식 준비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저녁 때에 예수님과 12제자가 와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도중에 12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분노한 모습으로 뛰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집을 떠났습니다. 마가는 그들이 떠난 후 잠옷(베홑이불)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누가 격렬하게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가보니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들의 종들과 성전 경비대원들과 로마 군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급하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지 못하자 가룟 유다가 매일 밤마다 가는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군사들과 가룟 유다가 급하게 그 곳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닌가 생각하고 잠옷을입은 채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하자 대적들이 벌써 예수님을 붙잡고 그들이 예수님 제자들도 붙잡으려 하자 제자들은 도망했습니다. 그들이 자기도 붙잡으려고 잠옷을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는 너무 겁에 질려 겉옷이 벗긴 채 알몸으로 도망을 했습니다 (막14:51-52). 오랜 후에 외삼촌 바나바가 바울이라는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간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안디옥으로 따라갔습니다. 바나바가 바울과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 선교 팀에 합류하여 따라갔습니다. 배를 타고 구브로 섬을 거쳐 지금의 터키 남 부지역인 밤빌리아의 버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앞으로 선교여행이 너무 힘들 것 같았습니다. 계속 선교여행에 동참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팀을 떠나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선교 팀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총회에 참여한 후 다시 두 번째로 선교여행을 떠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는 다시 선교여행에 동참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난번 일로 나무 큰 상처를 받았는지 데려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사역자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사역자들끼리 갈등하며 결별하게 하는 요인을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행13:13, 15:36-41).    

  그러나 결국 마가는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마가는 심각한 실패를 두 번이나 경험했지만 두 번째 선교여행에서 외삼촌 바나바를 따라 다니면서 조언을 받고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인 사도 베드로에게 말씀을 배우게 됩니다 (벧전5:13). 그리고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사역을 할 때 베드로의 설교를 통역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디모데후서4:11에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데마, 그레스게, 디도, 두기고도 없고 누가 한 사람밖에 없으니 마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사역을 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하기 직전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는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가서 바울이 부탁한 사역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거부했던 마가가 후에는 바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 되었고 바울이 생각할 때 마가가 자신의 요구를 충분히 감당할 정도로 성숙하게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순교한 후에 로마에 큰 박해가 일어나는데 그 때 로마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마가복음을 기록합니다. A.D.64년에 로마의 황제 네로가 로마의 대극장(GreatCircus) 근처에 새 궁전을 짓고 싶어서 불을 지르도록 명령합니다. 그로인해 로마의 14개 행정구역 중 대부분 불타고 4개의 구역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재를 자신이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이 일으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군대를 이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고문하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 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 바울도 붙잡혀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인도했던 사도들이 순교를 당하고 자기들도 언제 붙잡혀 죽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하에 숨어들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마가는 그들을 격려하고 굳세게 해야 할 사명감을 느끼고 베드로에게 들었던 내용을 기초로 하여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도 가족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했고 마침내 붙잡혀 로마정권에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부활하였다는 내용으로 기록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을 믿는 연고로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성령으로 고난의 현장 가운데 있는 그들과 함께 하시니 결코 흔들리지 말라고 격려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가복음은 A.D.67-7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서 A.D.70년경에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A.D.85-90년 사이에 기록된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최초의복음서입니다. 심지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이 마가복음을 기준하여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마가는 그 위대한 마가복음을 기록한 후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이집트에서 순교를 당합니다(4-5C의 바나바행전과 마가행전).

  마가는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연단되지 못했을 때는 신앙과 사역에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사역자에게 상처를 주고 사역자들끼리 결별하게 하고 사역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습니다. 쓰임 받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자신도 심한 자책감과 수치심과 절망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섭리로 성장하여 베드로와 바울의 로마사역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고 특히 마가복음을 기록하여 로마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로 세우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신앙의 유익을 얻게 했습니다. 마가의 실패는 오히려 겸손하게 하여 사도들에게 배우게 했고 사역자들을 이해하여 사역자를 진실로 돕게 했고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아픔을 느껴 위로하게 하는 동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도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자로서 자주 실패할 수 있는 자인 줄 알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결코 어긋나게 하지 않는 분입니다. 반복된 실패의 경험으로 심한 좌절 가운데 있을지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택과 구속과 목적을 위해 섭리 가운데 인도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는 과정 속의 실패일 뿐 영원한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가 결코 하나님이 우릴 부르신 목적을 실패하게 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실수가, 실패가, 상처가, 좌절이, 열악한 환경이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과 영광 받으려는 목적을 헛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포기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이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8. 예수님의 심문 받음 (57-68절)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들의 종들과 성전 경비대와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서기관과 장로들이 다 모였습니들 (57절). 마가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막14:53).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71명(의장 1명, 의원 7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유대교 최고 의결기관이자 재판기관이었습니다. 당시 공회는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전승에 관한 내용뿐 아니라 일반 민사재판까지 했습니다. 그 공회는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대제사장에게 연행되어 가자 그들이 모인 것입니다.

  마태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이 먼저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려가 예비심문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18:13에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으로 끌려가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은 것입니다. 전에는 안나스가 대제사장으로 있었으나 (A.D.7-17년에 봉직) 빌라도의 전임 총독에게 해임을 당하고 그 뒤를 이어서 안나스의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A.D.18-36년에 봉직). 당시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아직도 그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체포대는 예수님을 안나스에게 끌고 가 심문을 받게 했고, 안나스는 심문 후에 현직 산헤드린 공회 의장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낸 것입니다.  요한복음18:24에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고 했습니다. 가야바의 관정에는 산헤드린 공회원 전체는 아닐지라도 정족수가 되는 ⅔이상 모였을 것입니다. 보통 산헤드린 공회는 해가 있는 낮에 시장에 마련된 홀(hall) 등 공개된 장소에서 모이는 것이 상례였으나 예수님을 재판하는 일에 대해서는 은밀하게 처리하기 위해 새벽에 가야바의 관정에 모인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님이 연행되어 갈 때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58절). 마가는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 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었다고 했습니다 (막14:54).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변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예수님이 연행되어 갈 때 멀리서 뒤따라갔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 뜰 안까지 갔습니다. 마태는 베드로가 어떻게 거기까지 들어갈 수 있었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요한은 그 내용을 밝혔습니다. 요한복음18:15-16에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 한 사람’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 가야바와 어떤 친분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그와의 친분 때문에 대제사장 관정의 아치형 문을 지나 뜰까지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문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문으로 돌아와 문을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준 것입니다. 문을 통과하여 뜰로 들어온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m인 고지대였고, 봄날엔 날씨가 싸늘했고, 일교차가 매우 심한 새벽 시간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추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연행해온 대제사장들의 종들과 성전 경비대원들과 로마 군사들은 뜰에서 추위를 피하려 불을 피워 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사람들 속에 끼어 들어 불을 쬐며 추위를 피하는 동시에 자신을 은폐시켰습니다. 그 곳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해 모인 공회가 열린 불 켜진 방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았습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그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59-60절上). 산헤드린 공회는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고 예수님을 연행한 후 사형 판결을 내리기 위해 공회가 모였고 증인들까지 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유죄 판결을 위해서는 2명 이상의 증인의 증언들이 일치해야 하는데 (민35:30, 신17:6, 19:15). 증인들의 증언은 많았으나 일치하지 않아 증거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증언 가운데는 이런 증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60-61절). 이 증언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일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죄목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관한 예언을 했다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구형받은 적이 있습니다 (렘26:1-19). 예수님이 약 2년 전 성역 초기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요2:19). 예수님이 성전을 헐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요2:21). 하여튼 그 증언에서도 서로 증언이 일치하지 않아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빌미를 얻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님께 왜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고 물었으나 예수님은 침묵했습니다 (62-63절上). 여기의 ‘대제사장’은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를 말합니다. 많은 증인들의 고발이 서로 맞지 않아 사형에 처할 빌미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이 어떤 대답도 하지 않자 조급함을 느낀 대제사장이 직접 나서 심문했습니다. 증인들의 증언에 대해 답변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으므로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수치스런 곤욕을 당하면서도 침묵하신 것입니다 (사53:7, 시38:13-14). 그러자 대제사장이 다시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63절). 이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질문입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이냐는 것입니다. 이는 대제사장 자신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도 않았거니와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대답할 경우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서 하나님 백성을 희롱한 죄로서 사형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64절上). 전에는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이제 때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확실히 증거했습니다. 이어서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했습니다 (64절下). 인자의 승귀와 강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자'(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는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구약성경에서 오시리라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왕에게 신탁을 전할 때 구원자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으로 예언했습니다 (삼하7:12-13). 그런데 그 구원자가 에스겔이 본 전차 환상에서 ‘사람의 모양을 한 형상’으로 나타나고 (겔1:26), 다니엘이 본 네 짐승 환상에서 ‘인자 같은 이’(כבר אנש, one like the Son of man)로 나타납니다 (단7:13).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ο υιος του ανθρωπου, the Son of man)라고 할 때는 바로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고난과 죽음을 통해 대속을 이루고 3일 만에 부활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오르고 정한 때에 다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구원자에 대해 예언된 내용을 인용하여 승귀와 재림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110:1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고 했고, 다니엘7:13에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공회원들에게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고 물었고 공회원들은 다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고 했습니다 (65-66절).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대답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받아들이고 분노의 모습을 표출하고 더 이상 증인이 필요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신성모독을 하므로 그에게 사형판결을 내릴 증거가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회원들도 모두 예수님에게 사형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67-68절). 마가는 손바닥으로 친 자들을 하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막14:65). 그리고 마가와 누가는 그들이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조롱했다고 했습니다 (막14:65, 눅22:64). 공회의 공식적인 사형 판결이 내려지자 사형을 결의한 공회원들과 방청을 하던 하속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예수님을 학대하는 난장판이 된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침을 뱉고 때리는 행위는 범죄자로 선고된 사람에 대한 경멸의 표시였습니다 (민12:14, 신25:9, 욥30:10, 사50:6). ‘선지자 노릇을 하라’는 말은 구원자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회원들과 하속들로부터 침 뱉음과 놀림과 폭행까지 갖은 모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사야50:6에"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온갖 모욕과 치욕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온갖 불법을 행했습니다. 유대인의 소송법상 중요한 소송건은 야간 재판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그들은 한 밤중에서 새벽 사이에 했습니다. 중요한 소송일 경우 적어도 이틀에 걸쳐 진행되어야 하나 하룻밤 사이에 모든 소송을 처리해버렸습니다. 재판은 공회장이나 광장 등 공개적인 데서 이루어져야 하나 가야바의 집에서 열었습니다. 안식일에나 축일에는 법정심리를 할 수 없었으나 유월절에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는 변호인이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9. 베드로의 부인 (69-75절)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장면이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 곧  공회의 심문과 재판을 받는 장면에서 베드로에게로 바뀌었습니다. 54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고 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변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예수님이 연행되어 갈 때 멀리서 뒤따라갔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 뜰 안까지 갔습니다. 마태는 베드로가 어떻게 거기까지 들어갈 수 있었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요한은 그 내용을 밝혔습니다. 요한복음18:15-16에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 한 사람’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 가야바와 어떤 친분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그와의 친분 때문에 대제사장 관정의 아치형 문을 지나 뜰까지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문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문으로 돌아와 문을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준 것입니다. 문을 통과하여 뜰로 들어온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m인 고지대였고, 봄날엔 날씨가 싸늘했고, 일교차가 매우 심한 새벽 시간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추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연행해온 대제사장들의 종들과 성전 경비대원들과 로마 군사들은 뜰에서 추위를 피하려 불을 피워 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사람들 속에 끼어들어 불을 쬐며 추위를 피하는 동시에 자신을 은폐시켰습니다. 그 곳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해 모인 공회가 열린 불 켜진 방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깥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하면서 앞문까지 나아갔습니다 (69-71절上). 마태는 베드로가 바나 뜰에 있었다고 했으나 마가는 베드로가 아랫 뜰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막14:66). 이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 같은 위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야바 관저에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위치를 기준으로 했을 때 마태는 베드로가 있었던 곳을 그 바깥으로 보았고 마가는 아래로 본 것입니다. 베드로가 뜰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 대제사장의 한 여종이 와서 불빛에 비친 베드로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하면서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자가 아니냐고 힐문했습니다. 아마도 그 여종은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다닌 것을 본 경험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한 것은 나사렛에서 온 예수와 함께 있던 자라는 말로서 예수님을 경멸할 뿐 아니라 그를 따른 베드로도 넌지시 조롱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불 쬐는 사람들 틈에 끼어 혹시 누가 자기를 알아보지나 않을까 불안한 가운데 있었을 것인데 여종이 자기를 알아보자 당황하여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여종의 추궁을 피하려 할 때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자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하자 베드로는 맹세하고 또 다시 부인했습니다 (71-72절). 마가는 첫 번째 추궁을 하던 여종이 또 다시 두 번째 추궁한 것으로 보고했고 (막14:69-70), 마태는 다른 여종이라고 했고 (71절), 누가는 제 3의 남자로 묘사했습니다 (눅22:58). 이는 모순이라기 보다는 베드로에게 의혹을 품고 접근하여 추궁하는 자가 여럿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여종은 베드로가 추궁에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려는 것을 수상히 여겨 곁에 있던 대제사장의 부하들이나 성전 수비대나 로마 군사들에게 베드로가 예수님과 한 패거리에 속한 자라고 고발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욱 당황하여 또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14:70에서 ‘부인하더라’(αρνεομαι)가 미완료 시제인 것으로 보아 베드로가 거듭 지속적으로 부인하는 말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하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73-74절). 마가복음14:70에 ‘말하되’(ελεγον)가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이 반복적으로 추궁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누가는 한 시간쯤 있다가 한 사람이 장담하며 말했다고 했습니다 (눅22:59).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 사이에 어느 정도 시간적 간격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세 번째 질문을 한 자가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말고의 친척 중 한 사람이 감정적으로 접근하여 동산에서 보았다고 하므로 베드로로 하여금 꼼짝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밝혔습니다 (요18:26). 마태는 곁에 섰던 사람이 베드로를 추궁하면서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했다고 하므로 베드로의 사투리가 갈릴리에서 온 자임을 증명하여 베드로가 꼼짝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을 묘사했습니다 (마26:73). 갈릴리 사람들은 히브리어 '알렙'(א) '헤드'(ח) '아인'(ע) 같은 후두음을 정확히 발음하지 못했고, ''(ב)''(פ) ''(ש)'타우'(ת)로 발음했다고 합니다 (Pulpit). 그렇게 본다면 '사람'에 해당하는 '이쉬'(איש)'이투'(אית)로 발음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동산에서 목격했다는 말과 발음이 증명한다는 확실한 증거 앞에 더욱 두려워 그 사람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아마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했거나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확신케 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맞다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거짓을 확신시키려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룟유다처럼 계획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니지만 겁이나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74下-75절). 마가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막14:72). 누가에 의하면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할 때 닭이 울었고 그 때 예수님이 돌이켜 베드로를 보았고 그 때 베드로는 주의 말씀이 기억나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눅22:61-62).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강력하게 부인한 것입니다.  ‘심히 통곡하니라’(εκλαυσεν πικρως)는 문자적으로 ‘난폭하게 울부짖었다’입니다. 베드로가 손으로 벽을 치며 머리를 벽에 부딪히며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이 울부짖었지 않았겠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14:72에 ‘울었더라’(εκλαιεν)가 미완료 시제인 것으로 보아 그런 통곡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따르라" 했을 때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4:18-20).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고 고백했습니다 (16:16-19). 또 예수님께서 디베랴 언덕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바다 건너편으로 갔는데 거기까지 따라온 무리들이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떠났을 때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주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라고 고백했습니다 (요6:67-69).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성만찬을 마치고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했을 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고 고백했고, 예수님이 다시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자 베드로는 오히려 섭섭하게 생각하면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26:31-35). 그래서 감람산 아래서 대제사장들이 보낸 무리들이 가룟유다를 앞세우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빼 들어 저항했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 넣으라고 하면서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면서 친히 붙잡히셨습니다 (26:50-54). 그런 베드로도 결국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자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실패에 매여 있지 않고 회개한 다음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75절에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로 인해 닭이 울 때마다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사역을 하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실 때문에 자신의 결심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성령의 강권하는 역사가 없이는 안 될 줄 알고 더욱 기도로 성령님을 의지하므로 성령님께 붙들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대 예루살렘에서 생명을 내놓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붙잡아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경고할 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고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4:19-20). 그리고 로마까지 가서 복음전도 사역을 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의 박해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그런 광경(獸刑)을 보면서 잠시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하는 회의에 빠져 로마를 떠나지만 마주 올라오는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는 다시 로마로 올라가 복음 설교를 하다가 붙잡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는 아내가 먼저 붙잡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는 것을 강제로 본 후 자신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폴란드 소설가 셍키에비치(Sienkiewicz)의 소설 '쿼바디스'(Quo Vadis Domine?)와 로마감독 클레멘트(Clement)의 서신과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의 저서에서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結言>

   베드로의 부인은 누구나 주를 부인할 수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를 지키려는 열정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때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경험할 때는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주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 때는 주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예수 믿는 믿음과 주님이 주신 말씀과 주님이 맡긴 사명을 저버립니다. 그래서 매 순간마다 기도로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20:22-24). 그렇게 되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성령께 이끌려 헌신적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