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바리새인들은 음식 먹을 때 손을씻으라 하는가

15:1

유전과 전통에 관한 논쟁 (마태복음 15:1-9)

우리는 악한 관례들(manners)이 좋은 법칙들을 생기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유대인 교사들이 그들의 성직제도를 뒷받침하기 위해 내뿜은 과도한 열기(熱氣)는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여기에 있는 것과 같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탁월한 많은 대화들을 하시도록 동기를 유발시켰다.

Ⅰ. 여기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을 들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트집을 잡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유대 교회의 위대한 사람들이었으며(그들의 이득은 경건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는 대원수였다. 실상 그들은 사람의 양심에 대해 그들의 폭력을 행사하려고 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반대를 모세 율법에 대한 거짓된 열심으로 가장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학식이 있고 또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소개된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심판의 보좌가 놓여 있고, 서기관들이 올라갔던"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았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나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외적인 특권들은 만일 그것들이 정당하게 활용되지 못한다면 사람들을 교만과 사악으로 더욱 부풀게 한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은 순수한 샘이 되었어야만 했지만 지금은 독이 있는 웅덩이가 되고 말았다. "신실한 도성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만일 이 위대한 사람들이 고소자라면 그들이 고소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제시한 조목이 무엇이었는가? 그들의 교회의 표준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가 있겠는가?(2절) 즉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라고 그들이 특별히 그 제자들을 고소한 실례는,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런 비행인가! 그것은 이러한 관습이 그들이 고소할 수 있는 최대의 악행이었는데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것을 범하는 행동을 하였다는 표식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장로들의 유전"이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종종 손을 씻어야 하며, 식사할 때는 언제나 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불결한 손으로 만진 음식이 그들을 더럽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손 씻는 것을 최대의 의무로 간주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이 이것을 실천하였으며, 이는 양심의 문제로서 위반하면 공적인 형벌을 받는다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이 규율을 다른 사람들에게 엄격히 부과하였다. 랍비 요세(Joses)는 "불결한 손으로 먹는 것은 간음한 것만큼 큰 죄이다"라고 정하였다. 랍비 아키바(Akiba)는 그가 투옥되어 있을 때 손 씻을 물과 식사와 곁들어 마실 물을 받았는데, 그 물들이 우연히 쏟아지고 말았다. 그 때에 그는 마실 물은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그 나머지 물로 손을 씻으면서 말하기를 장로의 유전을 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하였다. 아니, 그들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은 자와 더불어 식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회 억압자들은 대개 그들 나름대로 제정한 법칙들을 실천하게 하며 그들 자신의 부과물들을 열심히 짐 지우려고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 못하였다면, 그들이 이렇게 적은 일에 광분하는 것이 매우 새삼스럽게 보일 것이다.

2. 제자들은 이 유전과 계율 중에서 어떤 것을 범하였는가? 아마도 제자들은 식사할 때 그들의 손을 씻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을 몹시 불쾌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일들에서 엄격하고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관습은 해롭지 않은 것이었으며, 또한 그것이 공공연하게 쓰일 때 예의가 바르고 고상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참석하셨던 잔치에 정결케 하는 물(요 2:6)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것을 포도주로 바꿈으로써 쓸모 없이 해버리셨다. 손을 씻는 것이 종교적인 의식과 예식으로 실천되고 부과되었을 때 또한 그것에 대해 이와 같이 강조되었을 때 제자들은 비록 지식에 있어서 빈약하기는 했지만 그것에 순응하거나 준수하지 않도록 잘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주시하였을 때도 그들은 결코 그러한 의식을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사도 바울의 교훈, 즉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말씀을 터득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세력 아래에도 인도되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영혼더러 우리가 지나가도록 머리를 숙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인도되지 않을 것이다(고전 6:12).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에 대하여 어떠한 불평을 하였는가? 그들은 그리스도가 틀림없이 그 자신의 모본을 보이심으로써(역주:실제로 그는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 제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고 추측하면서 그 문제에 관해 그리스도와 논쟁하였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교회의 규범을 범하나이까? 어찌하여 당신을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고 하시나이까?" 그 불평을 그리스도에게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제자들은 비록 이런 경우에 처했을 때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를 알기는 했지만 아마도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바람직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Ⅱ. 여기에는 이 트집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과 또한 법을 어겼다고 고발당한 제자들의 정당성을 변호사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해 주신 자유안에 견고히 서 있을 동안 그는 확실히 우리들을 변호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방법으로 그들에게 답변하고 계시다.

1. 반소(反訴, 오히려 상대방을 도로 고소하는 것)의 방법에 의해(3-6) 그들은 그의 제자들의 눈에 있는 티를 엿보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 자신의 들보를 내보이고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고소(告訴)하신 것은 진짜로 반소(反訴) 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난자를 정죄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변호가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은 불복해야하는 것(사리에 맞지 않는 것)을 정당하게, 반대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 그들의 유전에 대한 비난인 것이다(그들은 그 권위를 들어 고소를 제기하였다). 신적인 권위와 충돌되는 인간의 권위를 추종할 필요는 없다.

(1) 그들을 고소한 내용은 대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이다. 그들은 그것을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부름으로써, 그 관례의 고전성(古典性)과 또한 로마 교회가 주교들과 공의회에 대해 하는 것처럼 그것을 부과한 자들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것을 "그들의" 유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비합법적인 부과물들은 그것을 고안하고 명한 사람들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사람들의 책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막 6:16 참조).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신의 부과물에 대해 매우 열심인 자는 대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매우 소홀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러한 부과물에 대해 반대한 이유는 그것들이 처음에는 단지 기독자들의 자유를 침범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항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식사 전에 손씻는 계명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침범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계명은 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불순종한 그이 제자들의 행위를 변명하셨던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제 5계명을 범하고 있다는 특별한 예를 들어 이 고소를 입증하고 계시다.

[1] 하나님의 계명(4절)이 무엇인가. 즉 명령하는 것과 또 허락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그 율례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이것은 인류의 공통된 아버지(Father)에 의해 분부되었으며, 또한 우리는 섭리자께서 우리를 존재케 하는 도구로 삼으셨던 자들(보무)에게 존경을 드림으로써 그들 부모에게 자신의 형상을 부여하셨던 창조자(Author)이신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부모들에 대한 자녀들의 모든 의무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명령에 다 들어 있다. 이것은 나머지 모든 율례들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내가 만일 부모라면 내 영광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만일 기회가 있고 또한 부모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들을 부양하고 그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과부를 경대하라." 즉 그들을 부양하라(딤전 5:3).

제 5계명에 있는 이 율법의 허락은 "너희가 장수하리라"는 약속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고 유익한 일이라고 추측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장수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의무가 가장 필요한 것임을 나타내는 성경 구절, 즉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출 21:17 에도 있음)에서 이 계명을 어겼을 때에 수반되는 형벌에 대해 강조하고 계시다. 부모를 저주하는 죄는 여기에서 그를 공경하는 의무와는 정반대가 된다. 부모에게 악담을 하거나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 그들을 비웃거나 욕설을 퍼붓고 무례한 말을 하는 자들은 이 율법을 깨뜨리는 자이다. 형제에게 "나가"라고만 하여도 그렇게 중한 형벌을 받게 된다면 하물며 부모에게 그러한 욕설을 하는 것은 그 죄가 얼마나 클 것인가?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이 율법의 적용에서 나타난 것은 부모를 섬기거나 편안히 해드리기를 거절하는 것도 그들을 저주하는 것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말로는 존경을 하고 또 저주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행위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한 아들"과 다를 바 없다(마 21:30).

[2] 장로들의 유전이 이 계명에 대해 범하였던 모순이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직접적이거나 노골적인 것이 아니라 암시적인 것이었다. 그들 궤변가들은 이 계명의 의무에서 쉽게 도피할 수 있도록 만든 이러한 규칙들을 그들에게 제시하였던 것이다(5, 6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러나 너는 ∼라고 말한다"고 말씀하셨음을 듣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위대한 사람이나 학식 있는 사람, 권세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사람들이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 면밀히 검사(조사)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만일 그것이 모순되거나 일치되지 않는 점이 발견된다면 거절되어야만 한다(행 4:19).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그들의 유전은 무엇이었는가? 사람이 그의 세상적인 재산을 가장 보람있게 쓰는 길은 그것을 제사장에서 바쳐서 성전을 위해 쓰도록 하는 일이다. 또한 어떤 것이 그와 같이 바쳐질 때에 그것을 매각(또는 양도)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책임들(비록 그것이 의롭고 성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은 이로 말미암아 폐기가 되며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행하는 것에서 면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의식과 성전에 대한 미신적인 관심에서 비롯되었으며 또한 한편으로는 그들의 탐욕과 돈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성전에 드려진 것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았다. 전자는 하나의 구실이며 후자가 이 유전의 밑바닥에 있는 참된 것이었다.

둘째, 그들은 이 유전을 그들의 자녀의 경우에 어떻게 적용시켰는가? 그들의 부모들이 그들의 도움을 청할 때 그들은 자신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서 떼어 둔 모든 것을 성전 금고에 드렸다고 변명하였다. 즉 "그것은 내가 드려 당신을 유익하게 할 물건이다"라고 그러므로 그들의 부모들은 그들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더욱이 그렇게 바쳐진 것들의 영적인 유익은 그러한 분위기에서 살아야 하는 부모들에게 되돌려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그들이 가르쳤던 이 유전은 타당하고 유효한 변명의 구실이 되었으며, 많은 불효자식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정당화하였으며,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와 같이 그 의미를 보충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의미를 더 보충하여 말하기를, "그는 만사가 형통하며,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다. 그는 제 5계명을 정당하게 준수한 자로 간주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종교의 위선은 부모를 공경하기를 거절하는 행동을 당연하고 그럴 듯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 유전의 어리석음과 불경건은 매우 명백하였다. 왜냐하면 계시된 종교의 목적은 자연적인 종교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근본적인 법칙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들이 "내가 제사를 원하지 않고 공의와 자비를 원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더라면 가장 필수적인 도덕을 파괴하는 이와 같은 임의적인 의식들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불순종으로 인도하거나 장려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결과적으로 말씀을 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려고 그런 것을 취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다.

율법을 깨뜨리는 것도 나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그와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더욱 나쁘다"(마 5:19).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주어진 뜻이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는다면 그 법은 우리들에게 아무 효과도 없게 된다. "주여, 지금은 당신이 일하실 때입니다." 즉 위대하신 개혁자, 위대하신 정련사(Refiner)이신 당신이 나타나실 절호의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의 법을 폐하였기 때문입니다"(시 119:126). 그들은 계명을 "적대"할 뿐만 아니라 그 계명을 "폐하여 버리는"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그들과 그들의 유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명은 완전한 능력과 힘, 그리고 덕에 있어서 견고하다는 사실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심으로써 답변하시고 있다. 그가 그들을 들어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외식이었다. "외식하는 자들아"(7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외식자라고 선포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살피시며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아시는 자의 특권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의 눈은 겉에 드러나 보이는 모독(profaneness)만을 볼 수 있지만, 외식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눈뿐이다.(눅 16:15). 또한 외식은 그가 발견하는 죄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이 무엇보다도 미워하는 죄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이사야 29장 13절을 들어 그들을 비난하고 계시다.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이사야는 그가 예언하였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말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죄와 죄인들에 대한 책망은 세상 끝 날에 동일한 사람들과 행동들에 대해 책망하기 위해 의도되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사로이 해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벧후 1:20). 후일의 죄인들에 대해 예언되어 있다(딤전 4:1; 딤후 3:1; 벧후 3:3). 우리가 동일한 죄를 짓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향했던 위협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이사야는 그들에 대해 예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로 책망을 받았으나 계속적으로 버티고 있는 외식가들에 대해 예언하였다. 성경의 예언들은 매일 성취되고 있다.

이 예언은 정확하게 외식적인 국가들을 묘사하고 있다(사 9:17; 10:6). 여기에서 보면,

(1) 두 가지 일들에서 외식에 대해 묘사함.

[1] 그들 자신의 종교 예배의 수행에 있어서(8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외식가들은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가?(어느 정도인가?) 외식하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또한 그를 존경한다. 그는 신앙을 고백하는 점에서 하나님의 예배자이다. "바리새인은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들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외식가들이 세상에서 경건의 모양과 형식을 유지하는 일을 할 때는 그들의 봉사에서도 어떤 존경을 받으시기는 하신다. 하나님은 비록 본인들은 의도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로부터 스스로 존경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거짓으로 복종할 때, 즉 그들이 "거짓말을 할 때에"(시편 66편 3절은 그런 뜻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명예에 도움을 주며, 그는 "존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둘째, 외식가의 거처는 어디인가? 그는 그의 입과 입술로만 행동을 한다. 그것은 입술에서 나오는 외적인 경건에 불과하다. 그는 많은 사랑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전부이며, 그의 마음속에는 참된 사랑이 없다. "그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상달케 하려고 하며"(사 58:4), 주님의 이름을 언급한다(사 48:1). 외식가들이란 단지 입술로만 예배하려고 하는 자들이다. 최악의 외식가들은 말고 혀로 최선의 성도들처럼 행할 수 있으며, 야곱의 목소리와 같이 아름답게 말할 수 있다.

셋째, 외식가의 결점은 무엇인가? 그 결점은 주요한 문제 속에 있다. 즉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습관적으로 떠나 있으며(엡 4:18), 실제적으로 방황하고 그 밖의 것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를 향한 경건한 사랑이나 영혼과 영원에 관한 관심, 그 봉사에 합당한 생각들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렘 12:2; 겔 33:31). "어리석은 눈"을 가진 마음은 "세상 끝날"(직역하면 "땅 끝")에 있다. 마음이 없는 비둘기가 어리석은 비둘기이듯, 그것 "어리석은 일(의무)"(호 7:11)이다. 외식가는 한 일을 말하면서도 다른 일을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살피시며 요구하신다(잠 23:26). 만일 그 마음이 그에게서 멀리 된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봉사가 아니며, 따라서 "합당한 것"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제사이다(전 5:1).

[2]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명령에 있어서. "그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외식의 본보기이다. 그때의 유대인들은 그 이후의 교황 숭배자(papists)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들이 행하였던 것과 같이 구전(口傳)에 대하여도 똑 같은 존경을 하였으며, 그것을 Paripietatis offectuac reverentiac─즉 동일하게 경건한 사랑과 존경으로 받아들였다(Conc. Trident. Sess. 4. Decrl). 사람들의 창작물이 하나님의 제도에 덧붙여지고, 따라서 부과될 때에 이것은 외식이며 순전히 인간적인 종교이다. 사람의 계명은 사람들의 일들과 적절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신의 법에 의해 행해진 그 자신의 일을 소유하실 것이며, 또한 그 자신이 지시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받지 않으신다. 그에게서 나온 것만이 그에게로 돌아간다.

(2) 외식가들의 운명. 그것은 간결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즉 "그들은 헛되이 나를 경배하는도다"이다 그들의 예배는 지시된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 그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들도 유익을 얻지 못한다. 만일 그것이 "영"으로 하는 시이 아니라면 "진리"는 되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은 전혀 무익한 것이다.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건이 헛 것이다"(약 1:26). 만일 우리의 경건이 헛된 재물이요, 헛된 경건이라면 "그 헛됨은 얼마나 클 것이냐!" 기도와 설교, 안식과 성례전의 시대에 사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이 모든 것들에서 "허공을 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일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다. 입술로 수고하는 것은 헛된 수고이다(사 1:11). 외식가들은 바람을 심고 회오리바람을 거둔다. 그들은 헛것을 믿으며, 또한 헛 것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에 불순종한 것을 정당화하고 계신다. 이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트집에 의해 행해졌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답변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이 말씀에 만족 할 수 없었지만, 잠잠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능력에 감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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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에 대한 말씀 (마태복음 15:10-20)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씨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이 장로들의 유전과 계율을 범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입증하시고 나서, 여기에서는 그들이 그 자체가 악이었던 어떤 일을 행한 것으로 비난을 받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계신다. 그의 이야기의 전반부에서 그는 율법의 권위를 전복시키셨으며, 이곳에서는 그 추론을 전복시키고 계신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Ⅰ. 이 이야기에 대한 엄숙한 서론(10절). "그는 무리를 부르셨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대화하셨을 때 물러나 있었다. 아마도 그 거만한 사람들은 무리들이 듣는 곳에서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누기를 원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물러가라고 명령하였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사사로이 이야기하도록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셨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무리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신속히 처리하시고 곧장 그들에게서 돌이키셨으며, 그리고 대중들, 즉 그의 청중들을 초청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음은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 멸시받는 것들을 선택하셨다. 겸손하신 예수님은 거만한 바리새인들이 멸시하는 자들을 영접하셨으며, 또한 주님은 그들이 그러한 굴욕을 당하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는 사악하고 가르치기 어려운 그들로부터 돌이키셨으며, 그리고 비록 약하기는 하지만 겸손하고 가르침 받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에게로 향하시고 계시다. 그는 무리들에게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입에서 들은 바를 열심히 깨달으려고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학자들뿐만 아니라 무리들이나 서민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전심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

그가 그들에게 이해할 것을 종용하시고 계신 이유는 그가 무리들에게 지금 가르치시려고 하는 교훈이 그들이 그들 선생님들에게서 젖으로 먹었던 생각들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교훈은 강조되고 주장되었던 많은 관례들과 관습들을 뒤집어엎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오랫동안 훈육하고 익숙해진 부패한 원칙들과 행위들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에 대하여는 마음을 기울이고 이해를 돋우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흔히 편견에 의해 잘못되거나 비뚤어진 이해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Ⅱ. 진리 그 자체가 두 가지 명제에서 규정되었는데(11절), 이 명제들은 그 당시의 통속적인 오류(역주:일반에게 잘못 인식되어 있는 일)에 정반대가 되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매우 놀라운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매우 놀라운 것들이었다.

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을 도덕적으로 썩게 하고 더럽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음식의 종류나 품질 또는 우리의 손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롬 14:17).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거나 그를 무례하게 하는 것, 그와 관계를 맺기에 부당한 것 등이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만일 우리가 부당하고 무절제하게 먹지만 않는다면)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기"(딛 1:15)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의도했던 것보다는 이러한 음식들을 먹음으로써 의식적인 타락을 하였으며, 또한 우리 주님께서 반증하신 그들 자신의 것을 첨가함으로써 그것을 무겁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이러한 의식적인 법을 폐지하려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무 것이나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만일 베드로가 "잡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그는 "주여, 그렇게 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행 10:13-15, 28).

2.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더럽게 되는 것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깨끗지 못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에 의해서이다. "육체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것은 입술이다"(전 5:6). 그리스도께서는 앞서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말들"(마 12:36, 37)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셨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그를 비난하는 자들을 책망하시고 경고하시기 위함이었으나, 여기에서는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그들을 비난하였던 자들을 책망하시고 경고하시기 위함이었다. 제자들은 그들 자신이 먹는 것으로 더러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악의적이고도 비판적으로 헐뜯음으로써 자신을 더럽힌 자는 바리새인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의 계명을 범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자들이 오히려 더욱 종종 경솔한 판단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써 범죄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가장 불결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불결함을 비난하는 데 앞장을 서는 법이다.

Ⅲ. 바리새인들은 이 진리에 걸림이 되었으며, 제자들이 이 사실을 그리스도에게 고함(12절).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그리고 그들이 이 말씀에 대해 그렇게 하리라는 것과 이 일로 당신과 당신의 교리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당신에 대해 분노하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하셨나이까?"

1. 바리새인들이 이 명백한 진리에 대해 불쾌하게 될 것임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류와 반감, 잘못과 악의로 점철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하지 못한 눈은 밝은 빛을 볼 수 없다. 교만한 사기꾼을 몹시 화내게 하는 일은 그들이 먼저 눈을 가리고 노예로 만든 자를 일깨워 주는 일이다. 아마도 유전을 엄격하게 준수하였던 바리새인들은 그것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던 서기관들보다 오히려 더욱 결림이 되었던 것 같이 보인다. 또한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손을 씻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가르치셨던 전반부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혀를 엄격하게 제어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던 그의 교훈의 후반부 때문에 성을 내게 되었던 것 같다. 종료의 형식을 위해 크게 논쟁하는 자는 대개 그 본질에 대해 가장 멸시하는 자들이다.

2.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님이 그러한 걸림이 될 줄 아시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사실을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 이전에는 그가 그렇게 하시지는 않으셨다. 분명히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가 그러한 말씀이 그들을 분노케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면 그는 차마 그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말씀하시는 내용과 그 말씀을 하신 대상과, 그 결과는 무엇일 것인가에 대하여 아시고 계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들에게 사소한 일들에는 우리가 거침이 되게 하는 것을 누그러뜨려야 하지만, 두렵기 때문에 진리나 의무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진리는 소유(인정)되어야 하고 의무는 행해져야만 한다. 어떤 일이 걸림이 되는 것은 그 자신의 잘못이다. 그것은 누구에 의해서 주어진 추문(scandal)이 아니라 스스로 취한 추문이다.

아마도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걸림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그 말씀이 매우 대담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규정된 "깨끗한" 음식과 "불결한" 음식 사이의 차이점을 거의 조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들 자신이 이 일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게 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였지만, 그들과 동일한 견해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들에게, 우리를 핍박하고 중상하며 원수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용서하고 또한 그들의 영적인 유익을 추구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것에 분개하면서 돌아가 버리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그것을 철회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설명하시고 수정하시며 변경해 주실 것을 소망하였다. 연약한 청중들은 종종 그들이 악한 청취자들에게 걸림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할 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진리를 은폐하는 사람들을 기뻐하거나 그들의 오류와 타락함으로 빠져 들어가기를 즐거워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Ⅳ.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부패한 유전에 대해 닥치게 될 운명. 이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거침없이 공격하셨으나 유의하지는 않으셨으며, 제자들도 이와 마찬가지였다(역주:그리스도는 그들을 "그냥 두어라"고 명하셨다). 즉, 그들은 개조되기를 싫어하였던 자들의 후손이었으며, 또 멸망을 받게 되어 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두 가지 일을 예언하고 계시다.

1. 그들과 그들의 유전을 뽑아 버림(13절).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바리새인들의 타락한 견해들과 미신적인 행위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파나 방법, 제도 등은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앙 고백의 규칙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만과 형식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유대 백성들은 "좋은 포도나무"로 심기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알지 못하는 나쁜 포도나무가 되어 버렸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이 심지 않은 나무라고 부인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1) 가시적(visible)인 교회에서 우리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식물들을 찾아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바는 교회에서 좋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사 41:19)이라는 사실이다. 농부가 아무리 유의한다고 할지라도, 잡초는 많든 적든지 간에 땅에서 돋아날 것이다. 가라지를 심기에 바쁜 원수는 분명히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썩는 것을 허용하시기는 하지만 그것을 심지는 않으신다. 그는 "밭에 좋은 씨"만 뿌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의로워야만 하며 또한 아버지의 정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식물들은, 모두가 의로운 사람들과 사물들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모든 영을 믿지 말고, 그 영들을 시험하라"(렘 19:5; 23:31, 32).

(2) 바리새인들의 영, 즉 교만하고 형식적이고 속이는 영에 속한 자들은 그들이 아무리 꾸민다 할지라도, 그들이 어느 파에 속하였는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기가 친히 심으신 식물들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3) 하나님께서 심지 않은 그러한 식물들은 그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뽑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행 5:38). 비성경적인 것들은 스스로 시들어져 죽게 되거나 교회에 의해 당연히 추방될 것이다. 어쨌든 큰 심판 날에 거치게 하였던 이러한 가라지들은 단에 묶여 불에 던지움을 받을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유전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들은 오래 전부터 내버림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진리의 복음은 위대하며 또한 존속될 것이다. 복음은 결코 뽑혀질 수 없다.

2. 그들과 또한 그들의 인격과 원리들을 찬양하였던 추종자들의 멸망(14절). 여기에서,

(1)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냥 두어라"고 명하시고 있다. "그들과 대화하거나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라.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도 말고 그들의 불쾌함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들이 걸림이 되더라도 염려하지 람 라. 그들은 스스로의 길을 갈 것이다. 그들이 논쟁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들은 그 자신들의 환상에 몰두하고 있으며 모든 일을 그 나름대로 해나갈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으면서(살전 2:15) 오직 너희 양심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기를 바라는 자들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그들은 에브라임과 같이(호 4:17) 우상들, 즉 그들 자신들의 환상의 우상들과 연합되어 있다.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라.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내버려 두라"(계 22:11).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명하신 죄인들의 처지는 실로 슬프기 짝이 없다.

(2) 그는 "그냥 두어라"고 하는 말씀의 이유를 두 가지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1] 그들은 교만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어리석음을 고칠 수 없도록 만드는 나쁜 본질들이다(잠 26:12).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매우 무지하였으며, 신적인 법의 영적 본질에 대해 매우 낯선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매우 교만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더 잘 깨달으며, 그렇게 때문에 자신들은 천국에 이르는 방법을 전혀 모르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알려 주려고 그들의 지도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으며, 자기들을 따르지 않으려는 자들을 배척하였다. 비록 그들이 소경이기는 하였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안약을 바르기 위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왔다면, 그들은 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에 대한 암시를 묵살시키고 말았다. 즉 "우리도 소경인가"(요 9:40)라고 그들은 "스스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롬 2:19, 20)로서, 그렇게 하도록 임명을 받았으며, 그렇게 하기에 적합하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이 말했던 모든 일은 신탁(神託)과 법이었다. "그러므로 그냥 두어라. 그들의 처지는 절망적이다. 그들과 더불어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라. 너희는 그들을 즉시 화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들을 확신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우맹이었고 거만한 행동을 하는 자존심이 강한 바보들이었으며, 한편 백성들은 바보스럽게 맹목적인 신앙과 순종을 함으로써 그들을 따라가며 "명령 쫓기를 좋아하였으니"(호 5:11) 그 당시의 유대교회의 처지는 얼마나 처참한 것이었겠는가! 이제 이사야 29장 10, 14절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될 것인가?"(렘 5:31)에 대해 쉽게 상상 할 수 있다.

[2] 그들은 멸망을 자초하는 자들이며, 머지 않아 그곳에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만일 둘이 소경이면서도 무모하게 앞으로 나가려고 하며, 위험릉 깨닫지 못한다고 하면 결국은 둘이 함께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다. 둘 다 유대인들에게 닥치게 될 일반적인 파멸 속에 빠지게 될 것이며, 또한 둘 다 영원한 파멸과 멸망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소경된 인도자와 소경된 추종자는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지옥은 "거짓말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의 분깃(몫)이 될 것이다(계 22:15). "속임을 당한 자"와 속이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속한다(욥 12:16,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역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첫째, 간교하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와 오류를 범하게 하는 자들은 그들의 교활함과 간교함을 모두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의 파멸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면," 소경된 인도자는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며, 그 상태는 심히 처참할 것이다. 예레미야 14장 15, 16절을 보라. "예언자(역주 :거짓 예언자)들은 먼저 멸망될 것"이며 그후에 "그들이 예언했던 자들(역주:예언을 했던 대상자들)"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렘 20:6; 28:15, 16).

둘째, 속이는 자들의 죄와 멸망은 그들에 의해 속임을 당한 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할 것이다(역주:직역하면, 그들을 안심케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백성들을 그릇되게 만들었던 자"는 그들의 지도자이지만, "그들에 의해 인도"된 자도 함께 "멸망을 받게 된다"(사 9:16).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시정해 주려고 하는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다. 세네카(Seneca)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통속적)인 견해와 행위들에 의해 인도되는 것을 불평하면서(Unusquisque mrvult credere quam judicare ─ 즉, 사물들을 믿기만 하고 시험하지는 않는다) 결론지어 말하기를 (Indeista tanta coacervatio aliorum super alios ruentium) "그러므로 큰 혼잡을 이루면서 무리들은 무리 위에 엎드려진다"라고 하였다(De Vita Beata). 둘이 함께 떨어지는 것은 그 떨어짐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서로 간에 상대방의 죄를 증가시킨 자들은 서로의 파멸을 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Ⅴ. 그리스도께서 진술하셨던(10절) 진리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주어진 교훈.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고 고의적으로 무지한 자를 거절하시지만, 기꺼이 배우려고 하는 무지한 자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가지신다(히 5:2). 만일 율법을 헛되게 만든 바리새인들에게 걸림이 되었다면 그냥 두어라.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

여기에서 보면,

1. 이 주제에 대해 더 가르침을 받으려는 제자들의 소망(15절)이 있다. 이 요구는, 그 밖의 여러 경우에도 그랬지만 베드로에 의해 말해졌다. 아마도 그 밖의 제자들은 그로 하여금 말하게 하거나 그들의 의견이 일치됨을 나타내었을 것이다.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생각과는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에 대해 반대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것을 비유라고 불렀으며, 이해할 수가 없었다.

(1) 빈약한 이해(이해심이 결여된 것)는 분명한 진리를 비유로 돌려버리기 쉬우며, 쓸모 없는 데서 골자를 발견해 내려고 애쓴다. 제자들은 종종 그렇게 하였다(요 16:17). 메뚜기는 약한 위에 부담이 되며,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린아이는 단단한 음식을 견디거나 소화시킬 수 없다.

(2) 빈약한 머리(hcads, 지식)는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부분에 대해 의심하지만, 올바르고 자발적인 마음은 교훈을 찾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걸림이 되었지만,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그들은 개조 받기를 싫어하였으므로 가르침 받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걸림이 되기는 했지만, 그 걸림이 가르쳐진 교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인정하면서 만족하게 이해하게 되기를 갈망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나무라심(16절).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사랑하시고 가르치시는 것만큼 이와 같이 책망하신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도덕적인 타락이 의식적인 타락보다 더 나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실로 무지한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두 가지 사실이 그들의 어리석음과 어두움을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다.

(1)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사실. "너희도 역시 깨달음이 없느냐? 내가 너희들과 그렇게 가까이 하면서 친절하게 가르쳤는데도 그 말씀에 대해 그렇게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신앙 고백을 하며 교회 회원의 특권을 기뻐하는 자들의 무지함과 오류는 주 예수님에게 대한 슬픔이 된다는 사실이다. "메시야의 나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리새인들이 이 교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받아들였으며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너희가 그 정신과 특성에 대해 이와 같이 알지 못하느냐?"

(2) 그들은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문하생이었다는 사실. "너희는 그렇게 오랫동안 나에게서 배웠으면서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학교에 하루만 있었더라고 해도 그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여라 달 동안 계속적으로 배웠으면서도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은 크게 책망 받아야 될 일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가졌던 시간과 방법들을 따라서 지식과 은혜와 지혜의 어떤 분량을 기대하신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4장 9절, 히브리서 5장 12절, 디모데 후서 3장 7, 8절을 보라.

3. 그리스도께서 더럽게 하는 것에 관한 교훈을 그들에게 설명하심.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우둔함을 책망하셨지만, 그들을 내어버리시지 않고 동정하셨으며, 누가복음 24장 25-27절과 같이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나타내 보여 주시고 있다.

(1) "입으로 들어가는 것"(17절)이 사람을 더럽게 할 위험은 거의 없다. 지나친 탐욕이나 폭음, 과식은 마음에서 나오며, 더럽게 한다. 그러나, 음식 그 자체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사람을 더럽게 하는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음식 속에 들어 있는 찌꺼기나 불순물은 "자연"(nature, 오히려 자연계의 하나님)이 그것을 깨끗케 하는 방법을 마련하셨다.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며," 순수한 양분만이 우리들에게 남게 된다. "우리는 두렵고도 놀랍게 만들어졌고" 보존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다. 배출적인 작용은 다른 작용들에 못지 않게 우리 몸에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작용으로 말미암아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이 배설되기 때문이다. 자연(nuture)은 쉽사리 그리고 재빨리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더럽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씻지 않은 손으로 먹거나 음식에 혼합되어 있는 더러운 것을 먹는다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분리되어 몸밖으로 배설될 것이며 그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일은 정결함에 관한 문제는 될지 모르나 양심에 관한 문제는 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것을 종교 문제로 등장시킨다면, 우리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식물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고전 8:8)이나 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은 그 식물을 먹는 행위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를 유발시킨 견해 때문인 것이다. 기독교는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이러한 규칙들을 강조하지 않는다.

(2) "입으로부터," 즉 마음의 가득함에서 "나오는 것"(18절)은 사람을 더럽게 할 위험이 많이 있다. 마태복음 12장 34절과 비교하라. 하나님의 관대함에서 비롯된 소산물에는 불결함이 없다. 불결함은 우리의 부패함의 소산물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보면,

[1] 입에서 나오는 것들의 부패한 근원(fountain). 그것은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마음은 모든 죄의 샘이며 원천이다(렘 8:7). 심히 악한 것은 마음이다(렘 17:9). 왜냐하면 먼저 마음에 범죄하지 않았다면 말이나 행동이 범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쓴 쑥과 엉겅퀴를 내는 것"은 쓴 뿌리이다. 심히 악한 것은 죄인의 속마음이다(시 5:9). 모든 악한 말은 마음에서 나오며,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더러운 전달(communication)은 더러운 마음에서 나온다.

[2] 이 샘에서 흘러나오는 부패한 시냇물(streams)이 상세히 설명되었다. 그것들은 "입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지만, 모두가 사람에게서 나오며, 또한 그것들은 마음에 있으며 거기에서 역사 하는 악의 열매들이다(시 58:2).

첫째, "악한 생각"이란 모든 계명을 거스리는 죄들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헛된 마음은 온전한 율법에 위배된다고 하였다(시 119:113). 이것들은 타락한 마음의 첫 소생(장자), 즉 그 힘의 시작이며, 그것들은 악한 생각과 매우 유사하다. 이것들은 아들과 상속자로서 "집에서 살며 우리 안에 거한다." 단지 마음에서 시작되어 마음에서 그치고 마는 죄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 육욕적인 환상이나 생각들은 "악한 생각" 즉 계획적인 악(Dialsgismoi. ponhroi.),사악한 음모, 남을 해치려는 계략이다(막 2:1).

둘째, "살인"이란 제 6계명을 거스리는 죄이다. 우리의 형제의 생명을 해하려거나 멸시하는 마음의 사악함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법정에서도 살인자로 간주된다(요일 3:15). "전쟁은 마음속에 있다"(시 55:21; 약 4:1).

셋째, "간음과 음란"은 제 7계명을 거스리는 죄들이다. 이것은 방종하고 불결하며 육욕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거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욕심(정욕)은 이러한 죄를 잉태하고 낳는다(약 1:15). 간음은 먼저 마음에서 생기며 그 후 행동으로 옮겨진다(마 5:28).

넷째, "도적질"은 제 8계명을 거스리는 죄이다. 즉 사기, 부정, 약탈, 그리고 해로운 약속들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의 근원은 마음에 있으며, 그러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탐욕에 연단 된 마음을 가지며"(벧후 2:14), 재물에 마음을 둔다(시 62:10). "인간은 탐심을 가졌을 때 그것을 취하였던 것이다"(수 7:20, 21).

다섯째, "거짓 증거"는 제 9계명을 거스리는 죄이다. 이것은 거짓과 탐욕의 혼합이나 마음의 거짓과 악의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기를 요구하시는" 진리와 거룩, 그리고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한다면 이러한 거짓 증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시 64:6; 렘 9:8).

여섯째, "훼방"은 하나님께 대해 악담을 하는 것으로서 제 3 계명을 거스리는 죄이다. 이웃에 대해 악담을 하는 것은 제 9 계명을 거스리는 죄이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이나 이웃을 멸시하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거기에서부터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비롯되는 것이다(마 12:31, 32). 이것들은 속에 있는 쓴 물이 밖으로 넘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20절). 죄는 영혼을 더럽게 하며, 정결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는 데 있어서 불합당한 것들이며, 더럽게 하거나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새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는 부적당한 것들이다. 죄는 마음과 양심을 더럽게 하며, 그 밖의 모든 것을 그렇게 만든다(딛 1:15). 죄로 인한 불결은 유대 교사들이 첨가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의식적인 타락들에 의해 표현되었다. 히브리서 9장 13, 14절, 요한일서 1장 7절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일들과 그것에로의 접근을 조심스럽게 피해야만 하며, 손을 씻지 않는 일에 강조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폐지하신 것은 음식을 구별하는 율법(행 10장까지는 그대로 행해졌다)이 아니라 그 법에 첨가하였던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결론적으로,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이 말씀은 현재 의문시되고 있다)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손을 씻는다고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은 자가 되지 않으며, 손을 씻지 않았다고 해서 더 못한 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15:11 없음.

15:12 없음.

15:13 없음.

15:14 없음.

15:15 없음.

15:16 없음.

15:17 없음.

15:18 없음.

15:19 없음.

15:20 없음.

15:21

가나안 여자의 딸의 귀신을 내쫓음 (마태복음 15:21-28)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가나안 여자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유명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는 불쌍한 이방인들을 사랑스럽게 여기시는 매우 진귀하고 놀라운 면이 담겨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진실된 자비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는 "이방을 비추었던 빛"(눅 2:32)의 미광(微光)이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 땅에 왔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영접치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논쟁을 하였으며 그를 공격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21절).

Ⅰ. "예수께서는 거기서 나가셨다."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빛(light)에 대해 장난을 하거나 거스리는 자들에게서 그 빛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서 잠잠케 될 수 없을 때(역주:그들의 불의에 대해 말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그들을 떠났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는 그리스도의 규범에 대해 본을 보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거스리는 죄인들의 항변"을 오랫동안 참으시지만 언제나 "참으시지"는 않는다. 그는 14절에서 "그냥 두어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렇게 내버려두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에 대한 악의적인 편견과 그것에 대한 트집은 종종 그리스도로 하여금 물러나시도록"하며, "촛대를 옮기도록"하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이다(행 13:46, 51).

Ⅱ. 그는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두로와 시돈(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권능"을 행하시려는 것을 막았던 일이 있다, 마 11:21, 22)으로 가시지 않고, 그 길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셨다. 그는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눅 4:26)로 갔던 엘리야와 같이 지방으로 가셨으며, 그곳에서 이 불쌍한 여자를 찾으러 가셨다. 그는 이 여자에게 대해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선을 베풀려고 다니실 때 그는 결코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신 일이 없으셨다. 가장 먼 곳에 있는 지방의 어두운 곳에까지도 그의 자비로운 영향력은 고루게 미칠 것이다. 지금은 "지방의 끝"이지만 후에는 "땅 끝"까지도 "그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사 49:6). 이곳에서 이 이적은 행해졌으며,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에게 대한 가나안 여자의 인사(22절). 그녀는 이방인이었으며, "이스라엘 나라에 대하여는 낯선 자(나그네)"였다. 아마도 그녀는 "가나안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에 의해 저주를 받았던 나라들의 후손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정치적인 집단의 파멸은 언제나 그들 각 개인에게까지 미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라들로 그의 남은 자를 부르시며 또한 각처에 있는 선택된 그릇들과 심지어 가망이 없는 자들까지도 불러모으실 것이다. 그녀는 그와 같은 곳에서 왔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지방을 찾아오시지 않았더라면, 그의 자비가 두루 미친다 하더라도 그녀는 결코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와 사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우리의 문에 당도하며, 우리가 그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종종 침체된 신앙과 열심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요구는 끈덕진 것이었으며, 열심 있는 자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가나안인 이었으므로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가까이 접근을 하지 않고 멀리서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녀의 호소에서,

(1) 그녀는 자기의 불행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 딸이 흉악한 귀신 (kakw/j daimoni,zetai, 그녀는 악한 귀신이 들렸다) 들렸나이다. 불행에도 정도(degrees)가 있는데, 이 경우는 그 중 최악의 것이었다. 그 당시에도 그것은 공통된 경우였으며 매우 비참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린 자녀들의 고통은 부모의 괴로움이며, 그들이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것보다 더 큰 괴로움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온유한 부모는 그들 자신의 살붙이(pieces)인 자들(자녀들)의 불행을 매우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다. "귀신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그녀는 내 딸입니다."

우리의 친척들의 가장 큰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그에 대한 의무를 취소케 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녀는 지금 그리스도에게 그녀의 가정의 고통과 괴로움을 가지고 왔다. 그녀가 그리스도에게 온 것은 가르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병고침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신앙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녀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필요해서 주님을 찾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그에게서 쫓겨나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녀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보도록 이끌었던 동기는 그녀의 딸의 고통이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동정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러한 고통들을 개선하고 편리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2) 그녀는 자비를 요구하고 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붙드소서." 그녀는 그리스도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다. 신앙을 굳게 하여 위로를 간구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능력의 행동을 기대할 수 있다. 주님은 구원을 명하실 수 있다. 우리는 다윗의 자손에게서 그에 관하여 예언되었던 모든 자비와 은혜를 기대할 수 있다.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유대인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과 다윗 집의 영예를 인정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기독교를 자연 종교의 진보로 받아들여야 할뿐만 아니라 구약과 연관된 유대 종교의 완성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 여자의 간구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영역: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이다. 그녀는 그리스도에게 이러 저러한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하고 한계를 지우지 않고 다만 자비만을 베풀어 주십사하고 간구하였다. 그녀는 공로를 호소하지 않고 자비에 의존하고 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녀들에 대한 자비는 부모에게 대한 자비이며, 우리들의 자녀에 대한 호의는 우리에게 대한 호의이다. 또한 그렇게 간구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기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그들의 영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부모 된 자들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들, 딸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교만한 의지, 더러운 귀신, 사악한 귀신에 사로잡혀 괴로움을 당하고 있나이다. 주여, 그들을 도와주소서." 이것은 육체적으로 귀신들린 것보다 더 심각한 경우이다. 그들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가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들을 치유하실 수 있다. 부모들은 사탄이 그들 자녀들의 영혼 속에서 깨뜨려지는 것을 그들에게 대한 최대의 자비로 간주해야만 한다.

2. 이러한 요구에서 그녀가 직면하였던 실망.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 볼 수 없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격려하거나 용기를 주셨으며, "그들이 부르기 전에 응답하시거나 그들이 말하고 있는 동안 들어"주셨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와 반대로 취급되었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1)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이 불쌍한 여자를 외면하신 것은 유대인들처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호의와 친절을 베풂으로써 그들 유대인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 들어가지 말라"(마 10:5)고 명하셨으며, 따라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호의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서 물러나시려고 하셨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2)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이와 같이 대하신 것은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한 그녀의 신앙의 힘과 그녀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러한 실망을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잘 아셨다. 주님이 그녀를 만나신 것은 "그녀의 믿음의 시련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기"(벧전 1:6, 7)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경우(창 22:1)나 천사가 야곱과 더불어 씨름한 경우(창 32:24)와 같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다루실 때에 그의 섭리와 특별히 그의 은혜의 방법(이것은 모호하고 복잡하다) 중 대부분은 이 이야기의 열쇠(key)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 이야기가 기록된 목적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맛살이 찌푸려질 때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또한 "그가 우리를 죽일지라도 그를 신뢰할 수"있다는 사실을 격려해 주기 위함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특별한 실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녀가 주님께 소리를 질렀을 때 "그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다"(23절). 그의 귀는 언제나 불쌍한 간구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있으며 관심을 집중시킨다. 또한 꿀송이를 떨어뜨리는 그의 입술은 언제나 화평의 대답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불쌍한 여자에게 그는 귀머거리가 되셨으며, 그녀는 구호물이나 응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그러한 말을 듣고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그렇게 인자하고 온유하시다고 소문이 난 바로 그 사람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말할 때 즉시 그의 응답을 받았는데, 나는 어찌하여 처음으로 거절당한 청원자가 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만일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푸신 것이 사실이라면 왜 나에게는 냉담하실까?"라고 하면서 돌아가 버리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가 행하는 바를 잘 아셨다. 그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기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는 그녀의 호소를 들었고 그녀를 좋게 생각하셨다. 또한 그녀의 요구를 계속하게 함으로써 "그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다"(시 138:3; 욥 23:6), 그렇지만 그는 즉각적으로 그녀가 기대하였던 답변을 하지는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심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더욱 끈덕지게 요구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응답되는 모든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된 기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 하나님은 잠자거나 놀란 사람처럼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유의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시 44:23; 렘 14:9; 시 22:1, 2). 아니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시 80:4; 애 3:8, 44).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함으로써 "향상시키기"위함이며, 그의 나중 출현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고 그들에게 더욱 환영받는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마지막날에 환상(vision)이 말할 것이며 또한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이기"때문이다(히 2:3). 욥기 35장 14절을 보라.

[2] 제자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주시도록 주님께 말씀드렸을 때, 그는 왜 그녀의 요구를 거절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더욱 실망을 주는 것이었다.

첫째, 제자들이 그녀를 위해 중개 역할을 한 것은 사소한 위안에 불과하였다. 즉 그들은,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말하였다. 선한 사람들의 기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녀가 목적하고 온 것이 성취되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그 불쌍한 여자의 만족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편안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그 여자를 치료하여 보내소서. 왜냐하면 그 여자는 끈덕지게 소리를 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부끄럽게 하고 있나이다." 끊임없는 요구는 사람들에게, 더욱이 선한 사람들에게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뒤에서 부르는 자를 사랑하신다.

둘째, 제자들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은 그 여자의 기대를 완전히 좌절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너희는 내가 그러한 목적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며, 또한 그 여자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아니다. 너희는 내 사명을 벗어나는 일을 하기를 원하느냐?" 끈덕지게 요구한다고 해서 현명한 사람의 확고한 이유가 변경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러한 거절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잠잠케 하며, 끝내는 돌아서게 만든다. 그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반격하시고 이유를 제시하심으로써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셨던 것이다. 그녀가 "잃어버린 양"임에는 틀림없으며, 그 누구보다도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께서 먼저 파송함을 받았던(행 3:26) "이스라엘 집"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여자에 대해 즉각적으로 관심을 가지거나 자격을 부여하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할례의 수종자"이셨다(롬 15:8). 물론 그는 "이방의 빛"으로 보내심을 받으셨지만, 그 "완성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 또한 아직 "휘장이 찢어지거나 칸막이 벽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사역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시려는"것이었다. "만일 내가 그들에게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더라고 이러한 영광을 전혀 모르는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로 보내심을 받으셨는지의 여부를 질문 받게 되는 것은 큰 시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이러한 의심을 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은 없다. 우리는 "그가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드리신"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나를 위한 것도 되는 것이다.

셋째, 그녀가 끈덕지게 요구를 계속하였을 때 주님은 그 일의 부당성을 강조하셨으며, 또한 그를 거절하셨을 뿐만 아니라 책망하는 어투로 말씀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절). 이것은 그녀의 모든 소망을 끊어 버리기 위함인 것처럼 보이며, 그녀가 실로 강한 신앙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녀를 절망 속으로 몰아 넣으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복음적인 은혜와 이적적인 치유(그것의 부속물)는 자녀들의 떡이었다. 그것들은 "양자가 된"사람들에게 속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비나 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길로 다니게 하셨던"(행 14:16, 17) 나라들에게 주셨던 열매맺는 계절들과 동등시할 수 없다. 아니, 이것들은 특별한 백성들, 정해진 정원에 소속된 특별한 은혜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인(요 4:41)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그들을 치유하셨다는 기사는 찾아 볼 수 없다. "구원은 유대인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규범을 떠나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의해 큰 멸시를 받았으며, "개들"로 불리우고 또 그렇게 취급되었다. 위엄이 있고 특권을 가졌던 이스라엘 집과 비교하면서 주님은 이 사실을 인정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유대인에게 주어진 은혜에 참여하는 것은 합당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식탁이 어떻게 돌려졌는가를 살펴 보라.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온 후 율법에 열심을 가진 유대인들은 "개"라고 불리운 것이다(빌 3:2).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가나안 여자에게 이 사실을 역설하고 계시다.

"가족이 아닌 자가 어떻게 자녀의 떡을 먹으려고 기대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그리스도께서 두드러지게 존귀케 하려고 계획하신 자들을 그는 먼저 그들의 비천함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그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신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 위대하고 특권이 있는 자가 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개처럼 여겨야만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큰 시험을 받음으로써 큰 신앙을 연마하시기를 기뻐하시며, 때때로 "시험을 받아 금과 같이 되도록"하기 위하여 마지막에 가장 예리한 시련을 준비하신다. 이 일반적인 규칙은 여기에서는 단지 시련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다른 경우에서는 지시를 위해 사용된다. 특별한 계율들과 교회의 특권은 자녀의 떡이며, 또한 무지하게나 모독적으로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어져야 하지만, 영적인 위엄은 신앙의 식구들에게 전적으로 돌려져야(소유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분별없이 그들에게 마구 허용하는 것은 자녀의 떡을 허비하는 것이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이다(마 7:6). procul hinc, procul inde, profani- 즉 모독하는 자들아, 떠나라.

3. 이러한 모든 실망들을 깨뜨리는 데 있어서 그녀의 신앙과 결심은 매우 강하였다. 이러한 시험을 받은 자는 대부분 잠잠하게 되거나 또는 기가 꺾이게 될 것이다. 그녀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는지 모른다. 즉, "불쌍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을 이렇게 싸늘하게 대하다니, 너무 하는구나. 여기까지 와서 이러한 멸시와 조롱을 당하느니 보다는 오히려 집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걸. 멸시와 조롱을 당하느니 보다는 오히려 집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걸. 멸시만 받았을 뿐 아니라 개라고까지 불리워지나니!"라고. 교만하고 겸손치 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참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집의 명성은 지금 세상에서 그리 큰 것은 되지 못하였지만, 이방인에게 주어진 이 멸시는 불쌍한 여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말대꾸를 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으며, 또한 그녀가 그리스도에 대해 과대한 칭찬을 했던 것처럼 그의 명성에 대해 실망을 하게 하는 오점을 남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사람을 판단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는 것만을 보고 그들을 판단해 버리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란 말인가?"(그녀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친절하고 온유하며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가? 나는 그가 이러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일생에 그렇게 거칠게 취급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와 같이 행하셨을는지 모른다. 만일 그러한 분이 아니시라면 나를 개로 취급하시지는 않으실거야. 나는 개가 아니라, 여자야. 괴로움을 당하는 정직한 여자야. 나를 개라고 부르는 것은 얼토당토 않단 말이야!"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한 말이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겸손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영혼)은 그가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 중에서 좋은 부분만을 고르며, 그것을 선의로 해석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이러한 모든 실망들을,

(1) 열심히 간구함으로써 극복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거절당했을 때도 나타나 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25절).

[1] 그는 계속적으로 기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것은 제자들을 잠잠케 하였다. 너희는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듣지 말라. 그들은 그 대답에 순종하였으나 그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짐을 의식적으로 느끼게 될 때에 그것의 제거를 위해 더욱 열심 있게(결심을 가지고)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낙심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 그녀는 진보적으로 기도하였다(기도 가운데서 진보되었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를 비난하거나 그의 불친절을 탓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간주하였던 것 같다. 그녀는 맨 처음 인사에서 자신을 낮추거나 그를 충분히 존경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두려워한 나머지 이제 "그에게 와서 절함으로써," 그녀가 앞서 행했던 것보다 더 많은 존경을 그에게 드렸던 것이다. 또는 그녀가 앞서 충분히 진지하지 못하였던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되어 이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소리질렀는지 모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기도의 응답이 제지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보다 낮게 더욱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앞서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우리는 잘못된 것이 앞으로 고쳐지도록 요구해야만 한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은 기도의 의무를 더욱 촉진시키는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번민 가운데서도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3]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로 보내심을 받으셨는지, 않으셨는지를 문제삼으려 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이스라엘 집의 한 종족임을 요구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와 더불어 논쟁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나는 자비를 얻기 위해 다윗의 자손에게로 왔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떠나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많은 연약한 기독자들은 그들의 선택의 문제, 즉 그들이 이스라엘 집에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의심과 질문을 하면서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하나님께 두고 자비와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해야만 한다. 도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발아래 엎드려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망하더라도 여기서 망하겠나이다"라고 해야한다. 그 때에 모든 문제는 점차로 분명히 해결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불신앙에 대해 "깨달"을 수 없다면, 그 문제를 위해 엎드려 기도하자. 열렬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는 기도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삼키려고 하는 많은 실망들을 극복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4]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는 그녀의 기도는 매우 간결하였지만 이해하기 쉽고 열정적인 것이었다.

첫째, 이 기도는 그의 처지를 슬퍼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만일 메시야께서 이스라엘 집에만 보내심을 받았다면, 주여 저를 도우소서. 나와 내 딸은 어떻게 될 것이오니까?"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상한 심령이 자신을 한탄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 그들을 눈여겨보시는 것이다(렘 31:18).

둘째, 이렇게 시험을 당할 때에 자기를 도와주도록 은혜를 갈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는 이와 같이 상황이 불리해졌을 때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기는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간구 하기를,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기 어려울 동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소서"(시 63:8)

셋째, 그녀의 본래적인 요구. 즉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내가 온 목적을 이루어 주옵소서"를 재촉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는 비록 이스라엘 집에 소속된 자는 아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능히 자기를 도우실 수 있으며 또한 도우시리라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녀의 간구를 그만 두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그리스도를 좋게 생각하였으며, 붙잡은 것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는 간구는 잘드려지기만 하면 좋은 기도이다. 그러한 간구가 웃음거리가 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한다면 그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그녀는 이러한 모든 절망을 매우 놀라운 간구를 드려 신앙의 성스러운 솜씨(능숙 능란, skilfulness)를 발휘함으로써 극복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식탁에 둘러 있는 감람나무"와 같은 자녀의 위치에 두셨으며, 이방인들은 식탁 밑에 있는 개의 위치에 두셨다. 또한 그녀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반박함으로써 얻어질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불쌍한 여자는 그것에 대해 반대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에 순응하기로 결심하고 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여기에 보면,

[1] 그녀는 매우 겸손하게 인정하였다. "주여, 옳소이다"라고.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여러분은 겸손한 신자에 대하여 비천하고 모멸스럽게 말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한다면 그것은 모욕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겸손한 자는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며 몹시 대드는 것에 대해 찬동을 나타내며 그들을 멸시하는 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주여, 옳소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나이다. 나는 개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할 권리가 없습니다." 다윗, "너는 어리석고, 참으로 어리석구나. 주여 옳소이다." 아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짐승과 같구나. 주여 옳소이다." 아굴, 너는 "누구보다도 잔인하구나. 주여. 옳소이다." 바울, 너는 "죄인 중의 괴수요, 지극히 작은 성도보다 못한 자요, 사도라 칭하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구나. 주여, 옳소이다."

[2] 그녀는 매우 영리하게 그녀의 기도를 개선하였다.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녀는 비범한 총명과 영적인 기민성 그리고 재치성을 발휘하여, 멸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논쟁의 주제를 재빨리 파악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신앙은 우리를 대적한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우리를 위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먹는 자에게서 음식을 강한 자에게서 달콤한 것"(역주:삼손의 수수께기)을 끄집어 낼 것이다. 불신앙은 자칫하면 초신자들로 하여금 원수에게 오류를 범하도록 만들기 쉬우며 또한 위로를 주는 전제(前提)에서부터 실망을 주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하는 것이다(삿 13:22, 23). 그러나 신앙은 실망 가운데서라도 용기를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밀쳐 버리려고 내민 손을 굳게 붙잡음으로써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에 있어서 재빨리 깨닫는 것"(사 11:3)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녀는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간구하고 있다. 완전하고 정상적인 음식은 자녀들만을 위한 것이며, 우연히 생기는 적은 떡 부스러기들은 개들에게 허용되거나 또는 그들에게 가까스로 주어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그러한 부스러기를 기다리며 상 밑에 앉아있는 개들에게만 주어진다. 불쌍한 우리 이방인들은 유대인에게 속한 다윗의 자손(그리스도)의 정해진 사역과 이적들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유대인들은 지금 그 음식에 싫증을 느꼈으며, 그것을 가지고 노닥거리며, 그 결점을 찾아내며, 그것들을 잘라 내던지고 있다. 그 때에 분명히 어떤 부스러기가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떨어질는지 모른다. "귀한 떡과 똑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조각이 된 그 부스러기처럼, 그들이 가진 떡덩이에 비유하면 보잘 것 없는 찌꺼기에 불과한 부스러기처럼 조금만이라도 치유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자녀의 떡으로 배불리 먹게 될 때 부스러기만이라도 즐겨 먹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적인 특권들 안에 있는 우리의 부스러기는 많은 영혼을 위한 진수성찬이 될 수 있을 것이다(행 13:42).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첫째, 그녀의 겸손과 필요성은 그녀로 하여금 부스러기에라도 만족하게 하였다. 자신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는 그 어떤 일에도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자임을 알게 될 때, 그 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때이다. 그리스도의 가장 작은 것(the least of Christ)이 믿는 자에게는 귀중하며 또한 그것이 바로 생명의 떡 부스러기인 것이다.

둘째, 그녀의 신앙은 그녀로 하여금 떡 부스러기를 기대하도록 격려하였다. 부자집 식탁에서 개가 자녀들과 더불어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있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의 식탁에는 더욱 그러하지 않으랴?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그 여자는 그것을 "주인"의 상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 여자가 개였다면, 그녀는 "그의" 개이며 또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한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나쁜 것이 될 수는 없다. "자녀라 일컬음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아니, 나를 집에서 쫓아내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개와 같이 앉아 있게 하소서. 왜냐하면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하게 있기 때문입니다"(눅 15:17-19). 우리가 비록 문지방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4. 이 모든 행복한 결과와 성취. 그녀는 드디어 이 싸움에서 신뢰와 위안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비록 가나안인이었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왕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승리하였던" 이스라엘의 진정한 딸로 인정하셨다. 지금까지 그리스도는 그녀에게서 얼굴을 숨기셨지만, 지금은 "영원하신 친절"로 그녀를 감싸고 있다(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하셨다." 이것은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내가 요셉이라"고 알렸던 것과 흡사하였다. 여기에서는 실제로 "내가 예수이다"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본래의 자신과 같이 말씀하시고, 그 자신의 용모를 드러내시기 시작하셨다. "그는 영원히 다투지 아니할 것이다."

(1) 그는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그가 칭찬하신 것은 그녀의 믿음이었다. 이 일련의 사건에서 그녀의 행동을 더욱 빛나게 했던 그 밖의 다른 은혜들은 곧 지혜와 겸손, 온유, 인내, 끊임없는 기도 등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그녀의 믿음의 소산물들(products)이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것을 가장 칭찬할 만한 것으로 여기셨던 것이다. 모든 은혜들 가운데 믿음은 그리스도를 가장 영예롭게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은혜들 가운데 믿음을 가장 영예롭게 하시고 계시다(칭찬하고 계시다).

[2] 그가 칭찬하신 것은 그녀의 큰 믿음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첫째, 모든 성도들의 믿음이 똑 같이 귀중하기는 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강하지는 않다. 모든 믿는 자들은 똑 같은 크기와 높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둘째, 믿음의 위대성은 실망 가운데서라도 모든 것을 충족히 채워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굳게 결합하는 데 있다. 그가 우리를 거스리는 적대자(an Enemy)로 보실 때도 친구이신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는데 있다. 이것이 "큰 믿음"이다!

셋째, 비록 연약한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면, 거절당하지 않고 위대한 믿음으로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매우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칭찬하셨으며, 또한 이방인도 그와 같이 칭찬하셨다. 백부장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여자는 그리스도의 선의(善意)를 믿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둘 다 바람직한 믿음이었다.

(2) 그는 그녀의 딸을 치유하였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나는 너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으니. 네가 목적하고 온 것을 가지고 가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위대한 신자들은 그들이 요구한 것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뜻이 그리스도의 교훈의 뜻에 순응하게 될 때 그의 뜻에 일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전혀 부인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비록 잠시동안 그가 그의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끝내 그들을 부인하지 않으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 죄가 사함 받으며, 너의 타락함이 억제되고, 너의 본성이 정결케 될 것이다. 즉 네 소원대로 되리라. 네가 더 바랄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 불쌍한 여자가 행했던 것처럼 사탄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여 기도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재의 기도와 일치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소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탄은 베드로를 "체로 치고" 바울을 "때릴 수"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기도와 그의 은혜의 충족함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눅 22:31, 32; 고후 12:7-9; 롬 16:20).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하였다(역주: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은 더 이상 귀신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아니하였다." 어머니의 믿음은 딸을 치료하였던 것이다. 환자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의 효능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다."

15:22 없음.

15:23 없음.

15:24 없음.

15:25 없음.

15:26 없음.

15:27 없음.

15:28 없음.

15:29

일곱 개 떡과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여 명을 먹임 (마태복음 15:29-39)

내용별로 살펴보면,

Ⅰ. 그리스도께서 대규모적으로 병을 고치신 일반적인 기사.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하심의 표징은 불충분하거나 부족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넘치는 충만함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이러한 치유를 행하였던 장소. 그리스도께서 친숙하셨던 곳은 "갈릴리 호숫가"였다. 우리는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가나안 여자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 이외에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해 찾아볼 수 없는데, 그런 견지에서 볼 때 그가 그 지방으로 가신 것은 바로 이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사역자들은 비록 그것이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선행을 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하야 한다. 영혼의 가치를 아는 자는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사람을 구해내기 위하여 용감히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떠나셨다." 떡 부스러기를 상 밑으로 떨어뜨리게 하신 후 그는 자녀들을 위해 큰 진수성찬을 주시기 위해 이곳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우리는 늘 일상적으로 하지 않는 것을 우연히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었지만, 이제는 "갈릴리 호숫가에 앉으시고 계시다."(29절). 위엄 있는 보좌나 재판석 위가 아니라, 산 위에 앉아 계시다. 육체로 계실 때의 그의 가장 경건하신 외모는 겉으로 볼 때 초라하고 검소하셨다! 그가 "산 위에 앉으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보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적인(open) 구세주이셨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 여행에 피곤해진 자와 같이 약간의 휴식을 취하시려고 앉으셨다. 아니 오히려 은혜 베풀기를 고대하는 자와 같이 앉으셨다. 그는 아브라함이 천막 문 앞에서 낯선 나그네(천사)를 기다렸던 것처럼 병자들을 기다리면서 앉아 계셨다. 그는 좋은 일을 행하시려고 작정하셨다.

2. 그에 의해 병고침을 받았던 무리들과 질병들(30절). "큰 무리가 그에게로 왔다." 이것은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는 성경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과 같은 육체적인 질병을 고칠 수만 있었다면 그것보다 더 많은 무리가 그들에게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인 고통과 질병에 대해서는 곧잘 느끼지만 자신들의 영혼과 영적인 질병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1) 그리스도는 선하셨기 때문에 각종 부류의 사람들을 허용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자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도 환영하셨으며,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는 결코 찾는 무리들에 대하여 불평하시거나 그들이 "속된 무리"라고 부르는 자들을 멸시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천한 자들의 영혼도 임금들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귀중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능력이 많으셨기 때문에 각종 부류의 질병을 고치셨다.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은 병든 친척이나 친구들을 그에게 데리고 와서 "발 앞에 두었다." 우리는 그들이 그에게 어떤 것을 말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긍휼을 얻기 위하여 그들을 앞에 내려놓았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들의 불행은 그 어떤 유창한 웅변가의 혀보다 그들에게 잘 말해 주었다. "다윗은 그의 우환은 여호와께 진술하는"(시 142:2) 것만으로 족하였고, 그 후에는 그에게서 떠났던 것이다.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평안과 안심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처지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고 그것을 그 앞에 펼치며, 그것에 대해 진술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영적인 병고침을 받으려는 자는 그의 기쁘신 뜻대로 지배되고 명령을 받도록 자신을 그의 발 아래에 두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온 자들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이었다. 죄가 이루어 놓은 일들을 보라! 죄는 세상을 병원으로 바꿔 놓았다. 사람의 육체에 있는 병은 얼마나 다양한가! 구세주께서 행하신 일을 보라! 그는 인류에 대한 그 많은 원수들을 정복하신다. 환상의 불길(a flame fancy)과 같은 이러한 병들은 누구의 탓으로도 돌릴 수 없고, 또 고칠 수도 없는 병들이다. 이러한 병들은 체액(humour, 體液)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지체에 있는 병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병들은 그리스도에게 예속되어 있다. "그는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고치셨다."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병들은 그리스도의 명하심에 따라 들어가고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의 한 실예로써, 우리가 연약함에 처해 있을 때 위로할 수 있다. 그의 긍휼하심은 우리가 비천함 가운데 있을 때 위로할 수가 있을 것이다.

3. 이러한 병고치심이 무리들에게 미친 영향(31절).

(1) 그들은 "기이히 여겼다." 아마도 매우 기이히 여겼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들은 우리의 기적이 되어야만 한다.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시 118:23). 소경들이 믿음으로 보게 되었을 때, "벙어리"는 기도로 "말하게" 되었으며 "절뚝발이"는 거룩한 순종으로 "걷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이는 그가 이와 같이 기이한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2)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일들을 보고 그를 모독하였다. 우리의 기이함의 주제인 이적은 우리의 찬양의 주제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즐거움의 주제인 자비는 우리의 감사의 주제가 되어야만 한다. 고침을 받았던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만일 그가 우리의 질병을 고치신다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축복하여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눈먼 것과 절뚝발이, 벙어리가 되지 않고 은혜스럽게 보호하심을 받았다면 마치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치유함을 받은 것처럼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아니, 그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셨을 때도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그의 교회의 하나님이시며 약속된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한 이러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예수님)이시다. 누가복음 1장 68절을 보라.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이 일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행해졌으며, 누구도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Ⅱ.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여명을 먹이신" 특별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이적은 그가 최근에 "떡 다섯 개와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여 명을 먹이셨던" 이적과 비슷하다. 손님들은 그 때만큼은 많지 못하였지만, 음식은 그때보다 조금 더 많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팔이 짧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랑을 하려고 이적을 행하시지 않고 꼭 필요한 경우에 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따라서 그는 그 경우에 적절히 행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먹일 수 있을 만큼의 분량을 취하셔서 그것을 가지고 그들을 먹이는 데 사용하신 것이다. 자연의 최고 능력이 초과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능력은 초과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이적도 이전의 것에 못지 않은 이적이다. 여기에는,

1. 그리스도의 긍휼(32절)이 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라 그의 제자들에게 이것을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동정심을 시험하고 자극시키기 위함이다. 이 이적을 행하시려고 할 때 그는 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셨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의 목적을 알게 하고 그것에 대해 의논하려고 하셨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충고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대한 자신의 겸손한 사랑을 본보기로 보여 주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을 "종"으로 부르지 않으신 것은 "종은 그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친구와 상담자로 부르고 계시다.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1) 무리들의 처지.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며 먹을 것이 없도다." 무리들이 평일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청종하려고 자신들의 직업을 버린 것이나 그와 함께 있으려고 큰 고통을 견딘 것은, 그들의 열심과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대한강한 애착이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그들은 자연적인 휴식을 원하였으며, 아마도 들판에 있는 군인들과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일용한 음식을 원하였으며, 적어도 생명을 유지시킬 만큼의 것이라도 먹기를 원하였다. 뜨거운 그곳 열대 지방에 있는 그들은 서늘한 이곳 지방에 사는 우리들보다 오랜 굶주림을 보다 더 잘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몸에 고통을 주고 건강을 해친다 할지라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그들을 삼켰으며,"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의 일용할 양식보다도 더 좋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우리는 공공 예배 의식에 세 시간 참석하는 것을 너무 많은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삼일 동안 함께 있었지만, 코웃음을 치거나 "아, 피곤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친절하게 말씀하신 사실을 유의하라.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무리들은 자기들과 더불어 삼일 동안 수고하시면서, 지칠 줄 모르게 가르치시고 병 고쳐 주시고 또한 그에게서 많은 능력이 나갔으므로 아마 역시 배고프셨던 주님에게 마땅히 측은한 마음(동정심)을 가져야만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주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 주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이 얼마동안 그를 청종하고 있는가를 염두에 계산하시며, 또한 그들이 이로 인하여 당하는 어려움을 유의하신다는 사실이다(계 2:2). 즉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아노라." 또한 그것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리들이 처했던 긴급한 사정은,

[1]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자비심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주님은 그들이 배고플 때 먹이셨다. 그때에 음식은 갑절이나 필요하다. 그는 그들을 옛적 이스라엘에 대하셨던 것처럼 대하셨다. "그는 그들을 주리게 하시고 또 먹이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배고픈 자에게는 맛있는 것이 되고 만족한 자에게는 싫증난 것이 되기" 때문이다.

[2] 그들을 먹이시는 이적을 크게 확대시켰다. 몹시 굶주렸기 때문에 그들의 식욕은 더욱 간절하였다. 만일 두 사람이 먹어도 부족한 음식이 세 사람을 배부르게 하였다면, 삼일 동안 굶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대수로운 일인가! "그들은 다 배불리 먹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에게는 가장 진지하고 폭넓은 욕구를 가진 자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자비와 은혜가 있다는 사실이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워 주리라." "그는 굶주린 영도 채워 주실 것이다."

(2) 무리에 대한 우리 주님의 염려. "길에서 기진 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가족에게 수치이며, 그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영혼이 어느 정도 고조되고 넓혀질 때에 우리의 몸이 선한 의무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그것과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육신의 연약함은 영의 자발성(the willingness)에 대해 큰 슬픔이 된다. 그러나 육체가 영체(靈體)로 만들어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그치지 않고 밤낮으로" 하지만 지치지 않는 천국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다."(계 7:16).

2. 그리스도의 능력. 그들의 부족함에 대한 그의 긍휼은 그들의 필요함을 공급하기 위해 그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의 능력을 믿지 않았는가?(33절).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어떤 사람들은 이 질문이 모세의 질문과 같이(민 11:22)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즉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리까?"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적합지 못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 일반적인 확신을 가졌으며, 최근에도 이와 같은 이적에 의해 적절하고 충분한 양식을 마련하는 특별한 체험을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서의 이적에 대한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였던 사역자들이었다. 불어났던 떡은 그들의 손을 통하여 전달되었다. 그들이 "어디서 떡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은 것은 그들의 신앙이 매우 약함을 보여 주는 한 실예이다. 그들이 선생과 같이 있는 동안 실족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전의 경험을 잊어버리는 것은 현재의 의심에로 우리를 내던진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음식이 얼마나 적은 것인가를 잘 아셨지만, 제자들에게서 그것을 알려고 하셨다. 즉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34절). 그가 일하시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작은 것을 가지고 일하시려는가를 보이시는 것은 그의 능력이 더욱 빛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자들이 가진 떡과 생선들은 자기들 몫이었으며, 또한 그것들은 그들에게도 흡족한 것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모든 무리에게 나누어주시려고 하셨으며, 또한 그것을 더욱 많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에 의탁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이 했던 것처럼 관대함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만일 필요한 경우가 생긴다면 값없이 나누어주어야만 한다.

"관대하게 주어야난 한다." 나발과 같이(삼상 25:11) 주어서는 안 되며, 엘리사와 같이(왕하 4:42) 주어야 한다. 내일을 생각하여 오늘 인색하게 구는 것은 타락한 애착의 복합체 (역주:그러한 애착은 타락한 것들이 엉켜져 있는 복합체라고 할 수 있음)이며, 마땅히 없어져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소유한 것을 가지고 친절하고 자비스럽게 사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보내 주시리라는 사실을 엄숙하게 기대할 수 있다. "여호와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제자들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이용해야만 하며, 그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데까지 최선을 다해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부족하게 가진 것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오히려 더 많이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마르다에게 하셨던 교훈, 즉 "많은 일로 근심하거나 많이 봉사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교훈대로 수행하셨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Nature)는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며, 그보다 더 작은 것으로도 품위 있게 될 수 있지만 정욕(lust)은 그 무엇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다.

(2)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음식을 마련하심으로써 그의 능력을 어떻게 무리들에게 나타내셨는가? 이 이적의 방법은 마태복음 14장 81절 이하의 것과 비슷하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바로 곁에 있었던 음식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에 불과하였다. 떡은 목숨을 지탱하는 것인데, 그들이 가진 생선은 이 떡을 먹기에도 부족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선은 그들 자신이 직접 잡은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부들이었고 또한 현재 바다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고"(시 128:2), 우리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을 즐기는 것이 편안하다는 사실이다(잠 12:27). 우리가 수고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얻은 것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고해야 하는 것은 "주기 위한 것이기"(엡 4:28) 때문이다.

[2] 백성들이 떡을 받을 수 있도록 대열을 정돈하심(35절).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그들은 지극히 작은 음식을 보았지만 그것에서부터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앉아야만 했다. 그리스도에게서 영적인 음식을 먹으려는 자는 그 발 앞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그러한 영적인 음식을 주시리라는 사실을 기대해야만 한다.

[3] 무리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심. 그는 먼저 "축사하셨다."(euvcaristh,saj, 감사드렸다).앞의 이적에서 사용된 단어는 (euvlo,ghse)(그가 축복하셨다)이다. 이 두 단어는 결국 하나의 뜻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축복을 갈망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우리가 더욱 큰 자비를 요구하고 받게 될 때에 우리는 받은 것에 대해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만 한다. 그때에 그는 "떡을 떼어"(왜냐하면 떡을 떼어야만 그 떡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무리에게 나눠주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이전과 같이 그들을 사용하셨다. 그는 그의 사역자들의 연약함과 유연성에 대해 당연히 화를 내셔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셨다. 그는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으며, 그들은 그것을 무리들에게 주었다.

[4] 그들에게는 풍요함이 차고 넘쳤다(39절). "그들이 다 배불리 먹고"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먹이시는 자들을 배부르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배부르게 하지 못할 세상의 것을 위하여, 수고하지만(사 55:2), 그리스도를 참되게 기다리는 자들은 "주의 집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것이다"(시 65:4).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여러 번 무리들을 먹이신 것은 비록 그가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우셨지만 실제로 그는 "베들레헴," 즉 "떡집의 예수"이셨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아니 그보다도 그는 친히 "생명의 떡"이셨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흡족하게 배불렀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찰 만큼 남겨졌다. 제자들이 많이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과 같이 그렇게 많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그리스도에게는 먹이고도 남을 만큼 많은 떡이 있음"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공급해 주시며, 구하면 구할수록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

[5] 떡을 먹은 무리들에 대한 셈(계산 account). 그들은 자기들의 먹은 음식에 대해 계산을 하지 않았다(그들은 값을 치루지 않고, 흡족하게 먹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해 증인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이 사실은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시는"(시 136:25) 보편적인 섭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장정만 사천여 명이 배부르게 먹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해 날마다 먹여지는 큰 가족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집주인이시며, "중생의 눈은 그를 앙망하며, 그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는 것이다"(시 104:27-145:15).

[6]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다른 지방으로 떠나심(39절). 그는 무리들을 "흩어 보내셨다." 그는 두 번씩이나 그들을 먹이셨으므로, 그들은 일용한 양식과 같이 이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역주:이적을 날마다 먹는 떡과 같이 항상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미 두 번씩이나 보여 주셨으므로). 이제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직장과 식탁으로 돌아가도록 해야만 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배를 타시고 다른 곳으로 떠나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빛"이시므로, 여전히 "일하시며 선행을 베푸시려고 돌아다니셔야"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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