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발표

“사실을 묻는 질문과 의견을 묻는 질문을 구별하려는 노력, 이것이 언어의 순결함이다. 사실이 먼저 있은 후에 의견이 있을 뿐이다. 사실이 여론을 이끌고 가는 세상이 민주주의다. 여론이 사실을 뭉개버리는 세상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 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김훈의 지적대로, 우리는 여론이 사실을 뭉개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여론몰이의 일등공신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부패언론과 일신의 안락과 소비의 삶을 부추기는 영혼 없는 공중파 방송이다. 여론의 힘으로 ‘경제대통령’의 이미지를 업은 이명박이 ‘다수결’로 대통령이 되고, 이미지 정치에 힘입어 콘텐츠가 부실하기 그지없는 박근혜가 ‘여론조사’에 따라 차기 대통령 후보 1위로 꼽힌다. 파업은 국가경제의 기반을 흔든다는 여론, 노무현은 말을 함부로 한다는 여론, 이혼가정 아이들이 심리적 장애가 크다는 여론, 모든 교육정책을 전교조 대 반전교조로 몰고 가는 여론 등. 미세먼지처럼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여론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덮었다. 미디어로 축적된 사실들은 국민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지배계층에 의해 조작된 ‘여론’이 사실과 진실을 뭉개버리는 세상이다.

민주주의는 '무리짐승'을 낳는다

이것이 니체가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유이다. 민주주의는 여론에 의한 사실(진실)의 사망이 가능한 구조다. 진실을 밝히는 한 명의 강자에 대해 백 명의 약자가 ‘다수결’로 여론을 제압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독일어로 ‘짐승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니체는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시민들 개인의 적극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을 무리 짓게 만들고 그 무리를 (하향)평준화하는 어떤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그들이 모든 힘을 다해 추구하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고 위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안심하고 편안하게 살면서 풀을 뜯는 무리들의 보편적인 녹색 행복이다. 그들이 가장 많이 부른 두 노래와 이론은 ‘동등한 권리’와 ‘고통 받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이다. 그들은 고통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일단, 저자가 니체를 대하는 태도가 맘에 든다. 니체(1844-1888)의 업적을 그가 활동한 시대, 그가 처했던 상황에 비추어 보는 점이 역사학도의 구미에 우선 맞는 것 같다. 철학서 중에도 니체에 관한 이야기는 담론의 시비에만 몰두해서 문외한으로서는 현실감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 많다. 이 책에서는 건강 등 여러 조건에 따른 표현의 결함과 한계를 감안해 주기 때문에 니체가 정말로 어떤 생각을 중시했는지 알아보기 좋다.

니체의 글, 참 읽기 어렵다. 그런데 어려운 대목 중에는 저자의 결함이나 한계를 감안하고 넘어가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을,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애쓰는 바람에 필요 이상으로 어려움을 키우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아마 니체를 전공한다는 이들 중에는 "나의 니체"의 권위를 세워주는 데 집착해서 이런 경향을 조장하는 일이 많은 건 아닌지. 이 책은 그런 어려움을 줄이는 데 좋은 도움이 된다.

뭐 눈에 뭐만 보이는 격이겠지만, 나는 니체의 사상에서 "평등" 관념에 대한 저항을 중시한다. "초인",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은 물론이고 "이성의 지배"에 대한 반발도 모두 평등하지 않은 인간세상을 평등하다고 우기는 시대사조에 대한 반발로 본다.

갓난아이 때 걸음마를 배운 이후 걷는 동작은 누구에게나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로봇에게 이 동작을 시키려면 엄청난 수학이 필요하다고 한다. 사회적 관계에도 그런 측면이 있는 것 아닐까? 문명과 사회의 진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러운" 틀이 잡히면, 복잡한 메커니즘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형태의 패키지로 내장되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작동된다. 그것이 "관습"이다.

문명 발생 이래 인간사회에서는 "불평등" 구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관습을 어떤 형태로든 개발, 운용해 왔다. 근대세계에서 "만민평등"이 보편적 이념으로 나타난 것은 예외적 사례다. 옛날에도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단 말인가?" 하는 말이 만민평등을 표현했다고 하는 것은 아전인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불평등 구조를 다른 불평등 구조로 바꾸려는 것이지, 근대인이 생각하는 평등 구조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니체가 활동하던 시절의 유럽에서 "민주화"는 아마 백여 년 후 한국에서와 비슷하게 시대적 과제로 강력하게 제기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바탕에 깔린 만민평등 이념에서 부조리를 읽은 것은 니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부조리를 철학 차원에서 밝히려 했고, 그것은 걷는다는 단순한 동작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된 것 아닐까.

"非민주적"인 생각도 마녀 취급을 받는 세상에서 "反민주적"인 생각을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일 수 없었다. 그러나 "민주화"를 자축한 지 근 30년이 지난 대한민국에서 "주술국가"의 모습을 뒤늦게 확인하고,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의 대통령 선거에서 "非호감" 챔피언 대결을 보면서는 훨씬 쉬워졌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가 가진 문제점과 한계 역시 세상을 험하게 만드는 데 한 몫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볼 때가 되었다. 그런 생각을 열어보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니체의 생몰 연대를 1900년 아닌 1888년까지로 표시한 것은 1889년 이후 그의 연명에서 의미를 찾지 못해서임.)

 
니체는왜민주주의에반대했는가
카테고리 인문 > 철학 > 서양철학자 > 니체
지은이 김진석 (개마고원,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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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1년, 올해의 책'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강준만의 <대한민국 소통법>이 김진석의 이 책과 <기우뚱한 균형>에 대해 늘어놓은 호평에 덜컥 YES24에서 주문하긴 했지만, 정작 배송된 책을 보고는 솔직히 '괜히 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라니! 내가 니체라니! 짜라투스트라 어쩌구하면서 헛소리하던 또라이 니체를 내가 읽을 수 있긴 한걸까?!

 그러나 기대 이상이었다. 재미있고 매우 흥미롭다. 잘 읽히기까지 한다. 지식인이자 교양인, 그리고 진보적인 젊은이를 자처하면서도 그동안 나의 사고는 너무 꽉 막혀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생각하는 첫 걸음을 뗄 수 있었다고나 할까. 새삼스럽게 생각해보면, 이미 현대인의 상식이 되어버린 민주주의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매력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리가 논쟁하는 것은 민주주의 하의 경제와 정치(제도)를 어떻게 조율하는 것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이로운가에 대한 것이지,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 자체가 가지는 정당성 혹은 부조리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니체는 플라톤식의 절대 질서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고 '강자의 도덕'을 찬양한다! 이는 나에게 굉장한 충격과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고통을 회피하고 안정을 갈구하는 현대 소비 사회,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강박 속에서 타인을 곁눈질하면고 자신의 '선함'을 '악의적으로' 증명하려는 약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니체의 혐오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혼자 책을 읽다가 마구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엘리트주의가 아니냐고? 안타깝게도 민주주의는 이미 문화적 엘리트주의의 성격을 띤다. 오히려 모두가 암묵적으로 이에 동의하면서, 겉으로는 만인이 평등한 양 떠드는 것이 더 위선적이고 악의적이다. 만인은 모두 평등할 수도, 모두 자유로울 수도 없다. 오히려 이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고, 우리 모두에게 차등적으로 주어진 역량과 재능을 인정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타인을 곁눈질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것에만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한국에서의 임지현이 논의한 미시 파시즘에 대한 문제제기도 인상적이었다. 이 세계와 이 문화의 일부인 폭력과 잔인함을 철학적, 개념적으로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접근은 현실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다. 철학의 명제를 현실 세계의 맥락 안에서 풀어내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철학이 기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답이 없는' 근본주의적 문제 제기 보다 각각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해석하고 논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본주의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오히려 허무주의와 권태, 무기력의 다른 말일 뿐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가진 상상력은 민주주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양면성을 꿰뚫어 본 철학자로서 니체를 해석하고 이를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가 놓치고 있는 부조리를 살피는 계기로 삼자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김진석의 말처럼,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만인은 서로 평등하지 않고, 강자와 약자는 존재하며, 폭력과 잔인함은 무조건 몰아내야 할 절대악이 아니라는 통찰력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동천이가 말했듯, 니체는 참 괜찮은 친구인지도 모르겠다. 미친 놈이 아니라.

 
2.

 니체는 평안함과 행복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는 쾌락의 소비시대를 예상하고 저주한 것이다. (70)

 '고귀하고 자유로운 자'. 무엇보다 타인을 곁눈질하면서 그 타인의 흠을 자신의 덕으로 바꿔치기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훌륭한 덕을 자존하는 사람. (74)
 고귀한 영혼이 자기 자신에게 가지는 어떤 근본적인 확신. 찾으려고 할 수도 없고 발견될 수도 없고 아마도 또한 잃어버릴 수도 없는 어떤 것. ― 고귀한 영혼은 스스로에게 경외감을 가진다. 
 ―『선악의 너머에서』, No. 287
(75)

 그는 이 책 (『도덕의 발생학에 대하여』)의 첫번째 논문에서 '좋은(gut)' 이란 말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발생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한 계열은 '착한'과 '악한'이고, 다른 계열은 '좋은/훌륭한'과 '나쁜'인데, 전자가 기본적으로 약자의 도덕적인 판단이라면 후자는 그것과 다른, 고귀함을 강함과 연결하는 판단이다.
 '좋은'을 '착한'과 등치시키는 약자의 도덕적인 판단은 타자로부터 출발하면서, 타자가 악하다는 판단 위에서 자신에게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 타자에 대한 곁눈질로부터 자신의 평가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그것은 수동적이고 반동적(reaktiv)이다. 그와 달리 '좋은/훌륭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넘친다는 점에서 이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다. 그래서 선과 악의 구별은 약자의 도덕 판단에 속하며, 좋음과 나쁨의 구별은 강자의 '고귀한' 도덕판단에 속한다. (80-81)

 약자의 선악 판단은 타자가 약탈적이라고 판단하면서 그에게 원한을 품는 식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며 도덕적으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81)
 통찰력이 놀랍다. 우리 현실 세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착한 사람 컴플렉스' 에 빠져 살고 있지. 자신이 현재 '약자'로 존재하는 책임을 오로지 타인에게 전가하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사람들.

 아무리 현대 사회가 형이상학적 전통이나 아우라를 벗어던진 것처럼 보여도, 형이상학적 잔재들과 주체들은 여전히 존배하며 따라서 해체 작업은 시들거나 고갈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고. "문법적 주어를 믿는 한 우리는 여전히 신을 믿는 것이다." (133)

 대항-철학 및 그 차원에서 작동하는 문체는 과거보다 현저하게 대항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실로서의 세계는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변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과거에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미세하고 복합적으로 분열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전통적인 철학을 텍스트 안에서 전복하거나 교정하는 일만으로는 사람들의 행위와 행동을 예측하거나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 데,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에 대해 진단하고 또 그 진단에 근거하여 치유책을 마련하는 데 많이 부족하거나 무력할 듯하다. (144)
 이처럼 철학의 현실적 유효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20세기 중후반 현대 사회를 찾아온 '인문학의 위기'의 기저에 깔려있다. 인문학, 그리고 철학은 더 이상 사회적 변화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지지 못한다. 그저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책상물림들이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자기 만족적인 논쟁을 거듭하는 데 그치게 된 것이다.

 니체가 강조하는 귀족적 가치판단은 징징 울어대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스스로 책임을 지며 넘치는 힘에 근거해 이를 낭비할 정도로 긍정적이라는 점에서, 어느 시대에서나 인정받을 수 있는 아주 오래된 기준이다. (152)

그러나 아마도 삶의 가장 강력한 마법은 이런 것일 것이다. 아름다운 가능성으로 빛나는 금실로 짠 너울이 삶 위에 놓여있다. 미래를 예고하면서, 저항하고, 부끄러워하며, 조롱하는가 하면, 동정하고, 유혹하면서. 그렇다, 삶은 한 여자이다.

―『즐거운 학문』4권, No. 339 (161)

 "만일 진리가 여성이라면" 으로 시작하는 아포리즘의 유희적이고 유혹적인 효과는 실제로 엄청나다. 어떤 면에서는 그 유혹적이고 전복적인 힘으로 단번에 사회적 · 정치적 의미의 페미니즘을 압도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저 페미니즘은 기껏해야 기존의 남녀 대립을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는가라는 의혹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164)

 여성의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논의는 지금도 여전히, 아니 변형되고 확장된 채, 진행 중이다. 서양 사상이 남성들에 의해 독점되어왔다고 비판하는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론자들도, 니체와 마찬가지로, 여성평등론과 페미니즘이 남성을 모방하려는 남근적 궤적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180)
 기존의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적 사회 질서에 반기를 드는 페미니즘의 존재가 오히려 기존 질서의 확장과 진화를 꾀할 수도 있지. (비록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대학 학생회에서 배운 그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감히 말하건대) 흥미로운 논의다.

좌익 조직들이라고 해서 자신들의 미시 파시즘을 퍼뜨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유지시키고 배양하며 극진히 여기는 자기 자신인 파시스트,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분자들을 갖고 있는 그러한 파시스트를 보지 않으면서, 그램분자적인 층위에서 반-파시스트가 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 들뢰즈 & 가타리, 『천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 (189)

 우익만 파시즘에 빠지고 이념적으로 정의와 진보를 내세우는 좌익은 미시 파시즘에 빠지지 않을까? 오히려 좌익도 자주 미시 파시즘에 빠질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좌파를 지향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며 파시스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89)
 하다못해 나도 그래. (비교적)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나의 사적인 가치들은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제스처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를 순간 순간 합리화하면서 잘 고치려고 하지도 않지. 이러한 자기 성찰은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김진석이 이어서 이야기 하듯이, 인간의 문화에 내재한 폭력의 존재에 대해 근본주의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정말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무책임하게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한편, 2월에 읽고 리뷰한 강준만의 <대한민국 소통법>에서 인용된 손호철의 칼럼은 미시파시즘에 대한 비슷한 문제제기를 했다. 

주변의 극소수 사람에게나마 '인간 말종' 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공적으론 대단히 호평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누리고 있다. 아니 사적 영역에서도 그 나름의 장점이 많아 이 사람과 부딪힌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겐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손 교수의 선배는, '인간 말종' 이라는 평가를 낳게 할 만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적인 문제이고 일종의 공적 영역인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그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함께 운동을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손 교수는, 이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안 된 사람이 특정 이념을 가지고 운동을 한다고 해보아햐 그것은 다 거짓이라는 입장이다.
 얼른 보자면, 손 교수의 선배가 대국적이고 대범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바로 이런 생각이 그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공적 영역을 지배해온 주류 정서이자 원리였다. 이런 원리에 따라 '작은' 문제는 늘 '큰' 문제에 압도당한 채 그 명함을 내밀기 어려웠다. (188-189, 손호철, 「김용갑을 다시 생각한다」)


 일상적 행위는 알게 모르게 벌써 무시무시한 미시적 폭력의 아수라장이 아닌가? 현대 사회 안에서 개인들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일상적인 교육과 문화 영역은 개인들을 위한 미시적 폭력의 경연장 비슷하지 않은가? 자기를 계발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문화적 폭력과 권력들의 미세한 자장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개인들이 그 미시적 폭력에서 쉽게, 깨끗이 벗어날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아니, 문화적 교육 이전에 벌써 삶은 미시적 폭력의 경연장일 터이다.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은 언제든지 실존적 관계에 끼어든다. 다르게 말하면 모든 미시적 폭력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난 실존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권력과 폭력을 모두 악으로 설정한 후에,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는 길을 추구하는 것은 공허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접근은 매우 정당하지만 동시에 자칫하면 미시 파시즘을 너무 쉽고도 추상적으로 '우리 안으로' 이식할 수 있다. (191)
 미시 파시즘에 대한 논의는 임지현의 '일상적 파시즘'을 통해 비교적 친숙하다. '우리의 일상은 알게 모르게 파시즘으로 물들어 있다. 이제는 거대 담론적 파시즘이 아닌 개인적 일상에 깊게 배인 파시즘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할 때이다. 진정한 사회의 변화를 위한 개인의 미시적 실천이 시작되어야 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까. 매우 유의미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정말 답이 안 나온다. 그래서, 김진석은 이어 말한다.

 파시즘적 태도를 총체적이고도 미시적인 차원까지 확장해 우리 모두 안에 뿌리 뽑을 길 없이 파시즘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면,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적 욕망과 행위가 알게 모르게, 많건 적건 그것에 시달리거나 매달리고 있다면, 아니 그것에 동의하고 참여한다면, 그에 대한 대응이 과연 구체적이고 실제적일 수 있을까? 그래서 모든 미시적 폭력과 권력까지 파시즘이라고 부른다면, '파시즘'이라는 말은 너무 무차별적으로 확장되는 것 아닌가? 그 결과 파시즘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 대항이 아니라 그에 대한 강박만이 남는 것 아닐까? (192-193)

 니체는 심오하고 고귀한 문화는 언제나 여러 방식으로 잔인함을 내포한다고 했다. 비록 그것의 직접적인 표현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폭력성과 잔인함은 단순히 사라지지 않고 다만 정신화하고 내면화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텍스트에 내재하는 폭발력의 큰 몫이 여기 있다. 아무리 원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이 문화의 진행과정 속에서 사라지거나 극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폭력적인 것이 순전히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문화와 폭력은 안팎의 관계에 있다. 서로 분리되지 않는 안팎의 관계. 그러므로 폭력이나 잔인함이 문화에 내재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나쁜 것도 아니고 결함도 아닐 것이며, 그것이 어떤 행위나 목적에 봉사하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해석될 여지가 적지 않다. 따라서 모든 폭력이나 잔인함을 몰아내고 배제하려는 시도야말로 맹목적일 뿐 아니라 공허할 수 있다. (194-195)
 그래서모든 폭력이나 잔인함을 제거하자는 '불가능한' 주장을 반복하는 근본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문화가 내포하는 폭력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이를 해당 맥락에 따라 해석하고 바로 잡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이 많은 점에서 사회적 권력과 폭력의 산물인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이 거칠게 과장되는 순간, 자칫하면 모든 개인이 파시스트라는 주장이 나올 것이다. ……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개인들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폭력적 행위를 변명할 필요는 결코 없지만, 거꾸로 모두가 미시 파시즘에 참여하고 있다고 과장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215)

 분노와 각성의 순간 우리는 "삶은 더럽다" "삶은 엿 같은 것" 혹은 "산다는 건 이미 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각성은 일종의 시적 혹은 종교적 각성의 성격을 띤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각성의 순수함을 근거로 삶을 속속들이 더러운 것 혹은 통째로 죄와 벌로 만들어버린다면 오히려 애초의 의도와 거꾸로 갈 수 있다. 삶과 존재는 긍정되고 실천될 때 오히려 자유의 여백을 남겨놓는다. 그것을 더러움과 죄의 깊은 뿌리에 예속시킬 때 알게 모르게 근본주의적 권력이 팽창한다. (215-216)
 (좀 다른 맥락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이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용서한 - 용서했다고 믿은 - 아들 살해범을 교도소로 찾아가 만나고 절망한다. 그를 만난 아들 살해범이 평온한 얼굴로, 자신은 이미 신으로부터 용서받았으니 당신의 세속적인 용서는 더 이상 필요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신이 무슨 자격으로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남자를 - 그것도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 용서할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이 잠깐이나마 믿고 의지한 신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이 문단에서 영화 <밀양>이 떠오른 건, 인간의 삶을 통째로 예술 - 종교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 에 의탁할 때, 예술적 순수 혹은 진정성에 스스로의 의지를 내맡길 때, 현실의 인간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남는가의 문제를 각기 다른 방향에서 제기한다고 생각해서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맥락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근본적인 회의에 바탕한 허무밖에 없지 않을까. 결국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맥락을 무시함으로써 근본주의적인 접근이 가져오는 건 자포자기로 인한 자기 파괴일 것 같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보편적 이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장되는 매 순간 그것과 현실 사이에는 간격이나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만인의 동등한 권리' 라는 이념이나 이상은 크건 작건 근본주의적 방식으로 설정되곤 한다. …… 그런 도덕주의적 이상이 실제로 실현 불가능한 것일 경우, 그런 이상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이상을 빌미로 자신들의 도덕적 혹은 관료적 혹은 사제적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니체 주장의 한 축 …… (227)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동등하다고 여겨질 필요가 없다. 민주주의는 어떤 종류의 문화적 엘리트주의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의 정치적 과정은 싸움을 인정하는 능력주의라고 불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한시적인 지배와 권위는, 모든 시민과 집단이 참여할 기회를 가진 논의의 경쟁 속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 해텁 (Lawrence J. Hatab) (240)

 니체는 무조건 모든 사람의 평등이 담보될 뿐 아니라 모든 폭력과 권력이 극복되는 민주주의적 상태를 믿지 않았다. 그런 이상 자체가 플라톤적이고 기독교적인 이상의 현대적 가면이며 연장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 이상이 발생하게 된 비밀은 무엇이었던가? 다름 아니라 그것은 타자의 강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원한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민주주의적 가치는 원한의 끈질긴 산물인 셈이다. (259)

 파시즘이나 맹목적인 폭력에는 마땅히 반대해야 하지만, 무조건적이며 유토피아적인 근본주의도 적지 않은 점에서 권력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권력과 폭력의 존재방식에 대해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265)

 니체는 권력이나 폭력이 독립적인 실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것만 뿌리 뽑거나 틀어막으면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실체라고 여기지 않는다. … 권력과 폭력은 … 모든 문화 활동과 함께 경향적으로 혹은 기능적으로 끼어들거나 혹은 그것에 내재하는 메커니즘 혹은 기제를 갖는다.
 그렇다. 권력이나 폭력은 문화의 짝패이다. 여기서 '폭력'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폭력적' 현상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것은 그저 야만스런 더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문화와 정신에 깊이 내재하는 비밀스런 것이다. …… 그것은 문화로 쉽게 극복하거나 뿌리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과 함께, 그것에 의하여, 때로는 심지어 그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활동이나 작동이다. (266-267)

 차이에 내재하는 차별의 개입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을 경우 추상적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다양한 '차이들'이 그저 좋은 의미의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다원성으로 이어진다고 여기는데, 사실 '차이의 인정'은 기존의 불평등과 차별을 은근히 정당화하는 경향이 크다. (296)
 
 


3.

 들뢰즈, 『노마디즘』

 들뢰즈 & 가타리, 『천개의 고원』